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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장마가 올 거라고 했다. 심지어 뉴스에서는 강력한 태풍까지 북상할 거라고 했다.
“이번 해는 진짜 뭐 이렇게 일이 많냐….”
이소는 비옷을 입은 채 꼼꼼하게 짐을 쌌다. 아무리 부실하게 지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천장이 내려앉을 수 있나. 사실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창문은 얼마 전에도 바람이 불어 몇 번이고 덜컹거리며 틀이 통째로 들리기도 했고, 큰 비가 아니어도 천장은 물이 새 얼룩이 졌다 마르기를 반복했다. 장롱으로 막아 놓은 벽 뒤 나무 기둥은 통째로 썩어 큼큼한 냄새를 풍겼고 쥐가 기어 다니면서 구멍을 냈는지 구석구석에서 쥐똥이 발견되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병 안 걸리고 잘 먹고 잘 산 게 용하네.’
애아빠 윤이소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이 밤, 갑작스럽게 단출한 짐을 싸는 이유. 아기자기한 제 보금자리가 이렇게 풍비박산이 난 이유는 고작 1시간 전의 사고 때문이었다.
* * *
“아빠, 비 또 샌다.”
“그러게.”
해수와 함께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주방 쪽에 빗물이 좀 많이 샌다 싶어 살림살이를 옮겨 놓고 다시 누웠던 밤, 이번에는 이불 가장자리가 젖어들었고, 또 몇 시간 후에는 해수 장난감 상자가 젖기 시작했다.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얼른 해준에게 연락하고 해수를 데려가라고 한 뒤 이소 자신은 중요한 짐 몇 가지만 챙겨서 가게로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15분도 되지 않아 해준의 차가 도착했고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해수를 안아서 뒷좌석에 옮기던 때였다.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콰르릉, 쾌객-쾅!
비행기가 코앞에서 떨어진 것 같은 요란한 굉음이 일었다. 밟고 선 땅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진동에 세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이소는 반사적으로 해수를 끌어안았고, 해준 역시 이소를 바짝 당겨안았다. 어디 나무라도 쪼개졌는지 빗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매캐한 탄내와 함께 바닥에서부터 뽀얀 먼지가 올라왔다.
비바람 치는 밤, 세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보일 정도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웅크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제일 위에서 두 사람을 제 몸으로 감싸고 있던 해준이었다. 너무 놀라 우산까지 놓쳐 버린 터라 온몸이 비로 흠뻑 젖었다. 잘 빗어 넘긴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내려와 고운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게 뭔….”
해준의 말에 이소 역시 얼굴을 때리는 빗물을 연신 닦아 내며 고개를 들었다. 해수가 젖을까 봐 꼭 안은 채였지만 세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장대같은 빗속에 있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얼마 전까지 이소가 수리한다고 올라앉아 있던 창문 쪽으로 벼락 맞은 거대한 노목이 쓰러져 종이짝처럼 구겨져 버린 황량한 풍경을. 거짓말처럼 낡은 3층 빌라는 딱 이소네가 살았던 방을 반절로 가르고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섬짓했다. 15분 전만 해도 저기 앉아서 졸음을 참아 가며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소리에 사람들이 몇 살지도 않은 동네에 불이 톡톡 들어왔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웅성웅성 사람들이 1층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소는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아빠.”
멍한 정신을 깨운 것은 해수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우산을 편 해준이 제 옆에 서 있었다. 해수도 많이 놀랐을 텐데. 이소는 쪼그려 앉아 해수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고 비 맞은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해수야, 아저씨랑 먼저 아저씨 집 올라가 있을래? 아빠 여기서 짐만 좀…. 챙겨서 올라가야 할 거 같아.”
“무슨 소리야, 이소 씨도 같이 가야지. 지금 건물에 들어가면 오히려 더 위험해요.”
“괜찮아요. 다 무너진 것도 아니어서. 들어가서 중요한 서류만 챙겨서 나올게요.”
해준은 이소의 말을 듣고 건물을 올려다봤다. 아주 박살이 난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노목이 이소의 방만 덮친 채 멈춰 있었고 2층 천장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으니 아직 2/3는 무사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신고를 하고 있었다. 해준은 차 안에 있는 여분의 우산을 꺼내들어 이소에게 펼쳐 주었다.
“그럼 나 해수만 데려다주고 바로 올게. 이소 씨는 서에서 오면 상황 설명 좀 해 주고, 나 오면 같이 올라갔다가 내려가요. 나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혼자 올라가면 안 돼.”
“그럴게요.”
해준은 이소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해수를 태워 집으로 올라갔다. 이소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이럴 때는 참 가까운 곳에 해준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안 되어 경찰과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기에 차후 사고를 예방할 조치만 치르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해준과 이소는 구급대원들의 보호 아래 무너진 집에 들어가 몇 가지 짐을 챙겨들었다. 막상 들어오니 다행히 벽과 창문, 천장만 무너졌을 뿐 자잘한 용품에는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생활은 불가해 이소는 사진 앨범과 서류, 해수의 학용품 등을 챙겨서 빠져나왔다. 야반도주도 심심찮게 다녔던 이소인지라 차곡차곡 정리된 짐을 챙기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집은 꽤 정이 들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 가자.”
해준이 엉망이 된 현관에 서서 이소의 손을 잡았다. 이소는 마지막으로 저와 해수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샀던 싸구려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를 한참 돌렸다가 놓으면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부분이 아주 천천히 반복되는 공산품이었다.
이소는 제 손바닥보다도 훨씬 작은 오르골을 주머니에 넣은 채 해준의 손을 잡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차의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 건물은 무너진 몰골도 몰골이거니와 불까지 꺼져 흉물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얼마 전까지 저기에 앉아 정숙과 맥주를 마시고, 해수의 자전거를 옮기고, 해준과 키스를 했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시동을 건 해준이 이소를 안심시켰다.
“비 그치고 나면 사람들 불러서 치우면서 멀쩡한 물건들 있으면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집은 괜찮아, 다시 만들면 되지. 사람이 안 다친 게 중요한 거야.”
“아까워서요. 추억이 많은데.”
해준 역시 이소의 집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다. 아니, 이소를 만난 이후의 모든 기억들은 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투성이다. 이소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해준은 언덕 위로 차를 몰았다. 대야로 쏟아붓는 것 같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 이소는 그렇게 해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 * *
이소가 온다는 소식에 행랑채 손님방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먼저 온 해수가 샤워를 마치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머리를 말리며 뜨끈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해준의 차가 자갈을 굴리며 주차장으로 들어오자 잠옷 바람으로 나온 사람들이 처마 밑에 서서 이소를 반겼다. 몇 번이나 봤다고 벌써 식구들처럼 느껴져 이소는 차에서 내리며 환하게 웃었다.
“짐이 이게 다예요?”
중요한 것만 가져왔다고 해도 배낭 하나만 덜렁 메고 문을 들어선 이소를 보며 다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머쓱하게 입술을 말아 쥔 이소에게 보송보송한 수건과 따뜻한 차를 내온 동희 씨가 걱정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입을 떼려는 때 해수가 이소의 가방에서 앨범을 꺼내 들었다.
“와! 아빠 사진 가져왔다! 내 사진 볼 사람!”
이소의 등 뒤로 앨범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머리를 통통 맞대고 노트만 한 앨범을 구석구석 훑어보는 식솔들의 감탄사가 방을 가득 메웠다. 아이고, 이 작은 것 봐. 아니 애가 애를 키웠네. 장하다, 장해. 어머나, 해수 너무 예쁘다. 이거 뭐야, 걸음마 하는 사진이구나. 이소 씨도 너무 앳되다. 계속되는 칭찬에 이소는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한참 그러고 있던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고 해준이 문을 열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식솔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자 해준과 눈이 마주쳤다. 해준은 흠칫 놀랐다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이소에게 눈을 돌렸다.
“올라가자, 씻어야지.”
자연스럽게 씻자고 말하는 해준에 이소는 몸을 일으키다 멈칫했다. 별것 아닌 말임에도 어쩐지 은근히 야하게 들리는 것은 제 착각인가. 이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수에게 손짓했다. 해수야 가자. 그러나 해수가 고개를 저었다.
“나 여기서 잘래.”
“그래, 해수는 여기에서 자.”
해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준이 말을 되받았다. 우연이겠지만 해준의 집에 올 때마다 해수와 같이 자는 일이 어그러지는 것 같다. 해수야, 열한 시야. 이소가 돌려 말했지만 오히려 식솔들이 웃으며 이부자리를 내왔다.
“애들끼리 놀다 보면 알아서 자더라고요. 여기 몇 번이나 온다구. 친구 집 왔다고 생각하니까 해수도 여기서 자는 게 더 편하지.”
“맞아. 올라가면 재미없어.”
해수가 답지 않게 입술을 죽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이소는 하는 수 없이 한 번 더 져 줬다.
“알았어. 대신 너무 늦게 자지 말구. 아침에 일찍 데리러 올게.”
“응. 아빠 잘 자!”
몇 시간 전 집이 무너진 아이답지 않게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구나, 아가. 이소는 눈을 접어 웃었지만 속으로는 볼을 한 번 늘려 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해준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사이 비가 조금 보슬보슬하게 내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박사박 언덕을 올라가는 걸음이 유달리 가벼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석조계단 옆으로 들어온 노란 조명으로 비치는 얼굴에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소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해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산을 든 해준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왜 웃지.
“왜 웃으세요?”
“왜요.”
“아니, 웃을 일이 없는데 얼굴이 이렇게.”
이소는 양 손가락으로 제 얼굴에 스마일 표시를 만들어 낸 후 해준을 따라 했다.
“엄청 행복한 표정이시길래.”
“내가 그랬나?”
이소의 얼굴을 본 해준이 더 환하게 웃었다. 단둘이 있을 때 종종 보여 주는 함박 미소였다. 해준은 이소를 보면 잘 웃어 주기는 했지만 대체로 이까지 드러날 정도로 크게 웃지는 않았다. 저 정도로 웃는 건 거의 간지럽혔을 때나 볼 수 있는 표정인데. 모르쇠로 일관하는 해준의 대답에 이소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곁에 바짝 붙어 걸었다. 비에 젖은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다박다박 보폭을 맞추자 꼭 한 사람이 걷는 소리처럼 들렸다.
대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가던 이소가 문득 제 시야에 잡힌 작은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준의 별채. 몇 번이나 왔었지만 항상 문이 닫혀 있던 저곳은 손님방이랬던가, 해준의 또 다른 서재로 쓰이는 곳인가. 캐묻는 성격이 아닌 이소는 그저 무슨 일이 있어도 있나 보다, 제게 말하지 않으면 딱히 괜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으며, 생각보다 사람들은 정말로 제가 말하고 싶은 것들이 아니면 남에게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살면서 체득한 지혜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궁금하기는 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교수님.”
툇마루에 앉아 신발을 벗으려던 이소는 불이 꺼진 별채를 가리키며 해준에게 물었다.
“저긴 뭐 하는 곳이에요?”
이소의 말에 해준의 고개가 나른하게 기울어졌다. 이소가 오기를 기다리며 몇 번이나 쓸고 닦았지만 도통 관심을 주지 않는 제 사람에게 언제나 보여 줄 수 있을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날들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밤이 늦었다.
“밝을 때 봐요. 마음에 들진 모르겠네.”
“응? 뭐가요?”
해준은 더 대답하지 않고 이소의 앞에 몸을 숙인 채 곧게 빠진 발목을 잡아 들었다. 제가 선물한 하얀 운동화의 끝이 흙에 젖어 있었다. 신발 뒤축을 잡고 살짝 벗겨 내자 무리 없이 슥 벗겨지는 운동화를 바닥에 차분하게 내려놓고 다른 발을 집어 들었다. 말없이 신발을 벗겨 내는 해준의 머리통을 보며 이소는 이유 없이 웃음이 났다. 신발을 다 벗긴 해준이 두 발목을 잡아다 제 손 위에 올린 채 이소와 눈을 맞췄다. 흰 양말을 신은 이소의 발가락이 쑥스러움에 꼼질거렸다.
“신발 제가 벗어도 되는데.”
“같이 씻을까?”
따뜻하게 맞추고 있던 시선이 순식간에 농밀하게 얽혔다. 여태 건물을 뒤적거리다 와서 저는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상태였고 해준 역시 왔다 갔다 하느라 다시 한번 씻고 자야 할 듯했다. 그러나 왠지 지금 제게 하는 씻자는 말의 의미가 씻고 바로 잠들기만 하자는 의미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이소는 입술을 꼼질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해준은 이소의 시선이 떨어진 곳으로 고개를 내리며 채근하듯 물었다. 말투는 따뜻했다.
“같이 씻자. 응?”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땅에 떨어져 작은 점점들을 만들어 냈다. 그 곁에 쪼그려 앉은 해준의 머리도 아주 조금 젖어 있었다. 역시 씻어야겠지.
“…좋아요.”
이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준이 흡족한 듯 끄덕이며 그대로 이소의 오금 아래에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매번 안길 때마다, 업힐 때마다 놀라곤 한다. 어쩜 이리 가볍게 들지. 해준은 이번에도 저를 안은 채로 사뿐하게 구두를 벗어 내렸다. 이소는 해준에게 안긴 채 어깨에 볼을 기댔다. 더운 김이 훅 끼치는 욕실, 따뜻한 이불, 포근한 품.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쳐도 해준과 함께라면 편히 잘 수 있다. 그 생각에 이소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 * *
“으, 으읏.”
“긴장 풀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길게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이소는 욕조 가장자리를 잡은 채 몸을 벌벌 떨었다. 기분 좋을 정도로 뜨거웠던 물이 미지근해진 지 오래였다. 분명 옷을 벗고 거품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겨 줄 때까지는 너무나도 평범했기에 이대로 침대로 가서 잠이 들려나 싶었는데. 욕조에 들어가 노곤노곤해진 몸을 기대며 해준에게 입 맞췄을 때였다. 등 뒤에 바짝 붙여 오는 해준의 것이 엉덩이 사이에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이런 분위기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했었던 터라 입술에 침을 바른 채 허리를 들었다. 굽어 있던 등에 바짝 힘을 주고 손으로 바닥을 짚자 등 뒤에서 해준의 낮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말랑하고 살이 많은 둔부 사이로 단단한 기둥이 느리게 왔다 갔다 했다. 살이 약한 회음부 사이를 진득하게 문지를 때마다 꽉 오므려 있던 구멍이 움찔거리며 욕조 물을 머금었다 뱉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허리 아래 장골뼈를 눌러 잡았다. 금방이라도 구멍을 비집고 치받을까 봐 겁이 났다. 섹스할 때 다정한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크기였고 하고 나면 진이 빠져 까무룩 기절하거나 잠이 들곤 했으니 긴장을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욕실은 두 사람의 숨소리, 그중에서도 신음을 참는 이소의 숨소리가 물방울이 맺힌 벽을 타고 울렸다. 해준의 손가락이 입구를 더듬어 오자 이소는 욕조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숨을 참았다. 천천히 주름을 매만지던 손끝이 뱀의 대가리처럼 파고들었다.
“끕.”
숨을 흡 들이마시고 허리를 들자 해준이 다른 한 손으로 동그란 엉덩이를 옆으로 잡아 벌리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숨 내쉬어야지.”
손가락 하나가 두 마디까지 들어온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남자 손치고는 무척 고운 편이었지만 그것이 아래를 휘젓고 쑤실 때면 그만한 흉기가 없었다. 조여드는 입구를 지나면 그 안 내벽은 말랑말랑한 내장 기관에 불과하다. 여성의 질과 달리 그 어떤 돌기도 존재하지 않는 매끈한 내벽은 더듬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손가락에 쫍쫍 달라붙었다.
“이소야, 매번 느끼지만 안에 참 깨끗해. 걸리는 것도 하나 없고.”
“으윽, 아, 아윽… 이상한, 말을….”
“사람 같지 않으니까. 신기해서.”
마치 호미 삽으로 모래를 긁어내듯 손가락을 구부려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장내를 자극한다. 해준의 손가락이 곳곳을 찌르는 듯 샅샅이 문지르면 이소는 그것만으로도 자지러졌다. 한참 그렇게 안쪽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나면 이제는 손가락을 끊어 먹을 듯 조이는 입구를 풀어야 했다.
해준은 천천히 바깥으로 손가락을 내보냈다가 다시 밀어 넣으며 따듯한 물이 들어왔다 나갈 수 있도록 움직였다. 이소는 그때 가장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손가락이 처음에는 한 개, 두 개, 그러다가 종래에는 네 개까지 들어왔다 나가자 이소는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내며 욕조를 움켜잡고 벌벌 떨었다. 해준은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 눈에 새겼다.
“아, 으응, 아, 아윽.”
해준은 한 손으로는 무자비하게 아래를 쑤시면서도 남은 손으로 이소의 앞을 어루만지거나 가슴을 희롱하기도 하면서 바짝 언 몸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소의 흰 무릎이 익숙한 쾌감에 접혔다 펴지며 부들부들 떨렸다. 가슴까지 찼던 욕조 물이 찰랑거리며 바닥을 적셨다. 버둥거리는 몸을 단단하게 잡은 팔이 원망스러웠다.
“이거 놔아, 놔요…. 그만, 손 그만….”
시작도 안 했는데 이소는 욕조에 몸을 매단 채 입술을 떨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처음에는 젤도 없이 어떻게 손이 들어가나 했는데 뜨끈한 물이 안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 선연히 느껴지더니 나중에는 제 몸에서 나오는 물인지 욕조 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뒤섞여 버렸다. 해준의 팔이 이소의 엉덩이를 잡아 들었다. 구멍을 찾아 맞춘 해준의 것이 문질문질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소가 고개를 돌렸다.
“이, 이렇게 끝까지 다 하는 거예요?”
“아, 얼굴 보고 할까?”
여기서 끝내거나 침대로 가는 선택지는 없는 거였나. 이소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 침을 삼켰다. 여유롭게 고개를 비튼 해준이 미소 지으며 이소의 몸을 돌려 안았다. 아직 저도 해준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바짝 선 아래가 맞닿았다. 해준은 마주한 좆을 한꺼번에 잡은 채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해준의 손에 잡힌 제 것이 낯선 감각에 부르르 떨었다. 해준은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 제 것과 이소의 것을 동시에 잡고 몇 번을 쥐었다가 추어올리는 행동을 반복했다. 커다란 손에 엉기듯 겹쳐진 두 개의 성기가 비벼지는 감각이 노골적으로 좋았다. 한참을 그렇게 앞에 집중하느라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모를 때였다.
“아, 잠깐, 아흐으아…!”
시선을 돌리고 있는 틈을 타 둔부 사이를 두꺼운 귀두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이소는 찢어지는 고통에 욕조 끝을 잡고 발버둥 쳤다. 아무리 손가락 세네 개로 잔뜩 풀어놓았다고 한들 밀려 들어오는 부피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둥글고 단단한 귀두가 좁은 입구를 가르고 북북 밀고 들어오자 저절로 숨이 멎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숨을 내쉬어야 한다는 둥의 친절한 말은 없었다. 입구에 저절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 교수님…! 안 돼, 안 돼… 들어오지 마, 지금 들어오지 마요!”
“괜찮아, 어깨 안아요.”
“아파, 아파요… 정말 아프단 말이야, 으흑….”
“응, 미안해. 내가 미안….”
이소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이걸 호들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죽을 만큼 아프다. 매번 해준과 할 때마다 처음 진입할 때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꾹 참아내면 그다음부터는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좋았다.
해준의 귓가에 울먹이면서 못하겠다고 한 서른 번쯤 말하면 해준은 등을 쓸어내리며 ‘아프지, 많이 아프지, 이소야.’ 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어깨를 둘러 안은 팔이 굳은 채 훌쩍거리면 해준은 손을 내려 입구 주변을 꾹꾹 눌러 줬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가 팽팽하게 변한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으흑, 흐으엉….”
“아팠지. 잘했어, 잘 참았어.”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내벽의 진동이 멎고 숨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해준은 느리고 진득하게, 꽤 오래 움직였다. 곧고 굵은 기둥이 장 안을 긁으며 밀려 들어왔다가 쑥쑥 안을 뚫어 길을 만드는 것이 반복될수록 배 속이 간질거리고 뇌가 흐물흐물해졌다. 꿍꿍 물길이 들었다. 제가 해준의 어깨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듯 해준 역시 두 손으로 이소의 허리를 잡은 채 구멍을 뚫는 행위에 집중하며 밀어낼 생각을 않았다. 굳게 이어진 두 몸의 연결 부위가 거칠게 부딪혔다.
“으으응, 흐윽, 교수…니임, 아으, 으흑… 배가 눌려서, 아흑….”
억눌린 신음이 입 밖으로 터지기 시작하니 다물릴 생각을 안 했다. 젖혀진 고개가 휘깍휘깍 흔들렸다. 이어 붙은 좆이 툭툭 몸을 쳐올릴 때마다 간지러웠던 속이 긁히는 기분이 든다. 동그랗게 튀어나와 있던 어느 지점을 쿡쿡 눌러 문질러 주면 피가 몰린 성기 끝에서 몽글몽글 탁액이 맺혔다 물에 섞여 흩어졌다.
“아직도, 힘들어?”
해준이 이소를 안은 채 이마를 맞댔다. 자꾸만 동공이 넘어가려는 것을 참으려 하다 보니 이번에는 입 밖으로 타액이 줄줄 샜다.
“아, 아니…… 아니요….”
이소는 참 백치같이도 답했다. 정신이 없구나. 해준은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혀로 유두를 살살 씹어 내리며 굴리자 흐응 하고 이소는 높은 소리로 울었다.
“기분이, 좋아지면, 좋겠는데…. 아닌가?”
둥글게 밀어 올리자 윤이소는 다시 한번 허벅지를 조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좋, 으읏, 좋으… 좋아, 요. 좋, 아윽, 조, 좋은데에….”
제 몸통을 조이는 이소의 허벅지에 해준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정작 이소는 입술을 깨물고 참아 내느라 죽을 맛이었다. 같이 가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고 참고 있는데도 해준은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울 때 해준의 손이 이소의 성기를 붙잡았다. 이소는 고개를 흔들며 해준의 손을 겹쳐 잡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손이 커다란 해준의 손의 엄지와 검지를 쥐어 잡았다.
“같이, 같이 할래요.”
“아까부터 가고 싶어 했잖아. 도와주려고.”
“같이, 으응, 하려고…. 했, 아으윽!”
그랬어? 해준은 기특한 눈으로 이소를 바라보다 몸통을 쳐올렸다. 철퍽, 큰 파동을 일으키며 대량의 물이 바닥을 적셨다. 이소는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그다음에 치받기 시작하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목에 팔을 감아 두르자 해준이 고개를 내려 이소의 뺨에 부볐다. 착하다, 같이 갈까? 상냥한 질문에 대답할 새도 없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뒤로 미끄러질까 봐 이소는 허우적대며 매달렸다.
“교, 교수님! 이거, 위험해, 이러면 떨어져요…!”
“그러니까 꼭 잡아야지.”
같이 가려면. 허벅지가 미끄러지지 않게 꽉 끌어안은 해준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 좆이 훅 빠지는 느낌이 들자 이소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훅 빠진 만큼 콱 쳐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배운 대로였다.
“아!”
느리게 문지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쾌감이 작살처럼 몸을 꿰뚫는다. 단단한 살 기둥이 콱콱 내벽을 가르고 꽂힐 때마다 신경다발이 펄쩍펄쩍 뛰는 쾌락이 채찍처럼 몸을 때렸다. 악, 아학, 으아, 아악! 제가 무슨 소리를 지르는지도 모르고 이소는 흔들리며 신음을 내질렀다. 좋다 못해 기절할 것 같았다. 또 정신이 깜빡깜빡 나갈 것 같다. 이소는 어떻게든 지금을 잃지 않으려 눈을 뜨고 해준을 보려 했다. 그러나 눈물에 흐려진 시야가 자꾸만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 흐으, 좋…. 흐응, 아윽, 앗, 아!”
“나도 좋, 아.”
“아, 어떡, 해애, 아윽, 끅, 아으으윽, 교수님, 교수니임, 저어…!”
“응, 말해도 돼.”
이소의 얼굴이 울먹이며 일그러졌다. 안을 쑤시고 들어오는 해준의 성기가 조금 더 커진 것도 같았다. 겨우 마주한 얼굴이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때마침 강하게 치받는 힘이 적어진 대신 해준이 허리를 붙잡고 빠르고 얕게 찧었다. 이소는 고개를 빼어 해준의 입술을 더듬더듬 찾아 입 맞췄다. 그리고 해준의 아랫입술을 문 채 새처럼 울었다.
“좋, 아요… 좋아, 해요….”
좋아해요, 좋아요. 여러 번 울먹이며 내뱉은 고백과 함께 쿵쿵쿵 터지는 쾌락이 두 사람을 동시에 덮쳤다. 사정과 함께 내 안을 뜨뜻하게 채우는 가시 같은 파정에 배가 홉 하고 붙었다. 이소의 눈꼬리에서 길게 눈물이 흘렀다. 하도 쓸려 부드러워진 입구 바깥으로 즈윽즈윽 탁액이 샜다.
해준이 천천히 욕조 안으로 다시 앉았다. 미지근하게 느껴졌던 물은 상대적으로 다시 따뜻하게 몸을 데웠다. 초점이 없는 이소의 얼굴을 끌어다 해준이 길게 입을 맞췄다. 텅 빈 몸에 혼을 불어넣듯 긴 입맞춤 끝에 이소의 눈동자에 차츰 생기가 돌았다.
“으응….”
“이번엔 기절 안 했네요.”
해준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해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욕실이 울릴 정도로 비명을 질러서 그런지 제 신음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해준이 이소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소는 기분이 좋아 해준이 하는 대로 가만히 놔두었다.
“이소야.”
이소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연결된 아래가 움찔거리며 뷰륵뷰륵 정액을 내보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해준이 젖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볐다.
“같이 살자, 겨울 올 때까지만.”
“…….”
그 말에 놀란 이소를 눈치채지 못한 듯 해준은 이소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지는 손끝에서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
“올겨울까지 같이 살다가, 네가 내키면 또 다음 겨울까지 여기 머물면서 같이 살고.”
‘해수야, 봄이 될 때까지만 나랑 살까. 그렇게 스무 번의 봄까지만 같이 살까.’
이소는 아주 오래전 해수에게 제가 했던 고백을 떠올렸다. 갓난아이의 손을 잡고 스무 번의 봄이 지나면 보내 주겠다던 약속을 했던 열아홉의 저를 생각했다. 이소가 느리게 고개를 들자 해준은 따뜻하게 시선을 맞췄다.
“그렇게 오래오래 몇 번이고, 네가 질릴 때까지 같이 살자.”
해준은 볼을 매만졌다. ‘살까’가 아닌 ‘살자’ 몇 번이고 이소에게 장난치듯 조르고 졸랐던 이야기였지만 해준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공원에서 처음 손을 잡을 때부터 절대 놓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때처럼 해준은 이번에도 꼭 같게 말했다. 네가 질릴 때까지 살자고. 천천히 눈을 들어 맞춘 시선에는 그 어떤 우월감도 동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사랑도 조금씩 닳는다던데, 과연 나는 얼마나 더 받아야 당신의 마음이 마모되는 걸까. 이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저를 다 모르시잖아요.”
“이소 씨도 나를 다 모르는걸.”
이렇게 쉽게 수락해도 되는 걸까. 폐를 끼치면 어쩌지. 이소는 문득문득 제 불행이 해준에게 옮아 갈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이렇게 선한 사람인데 저 하나 잘못 들였다가 이 집에 괜한 분란을 만들까 봐 걱정했다.
“그리고 모르면 어때. 앞으로 쭉 알아갈 게 많아서 난 더 좋아.”
해준은 불안해하는 이소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랑 같이 살아, 응? 이소는 한참 뜸을 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그까짓 거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응, 좋아요’라고 내뱉는 순간 너무 벅차서 또 훌쩍대고 울까 봐 그저 고갯짓만 겨우 했다. 울지 말아야지, 너무 자주 울면 질리니까. 해준은 제가 질리는 것을 우려했지만 이소는 항상 볼 것 없는 초라한 저를 두고 사라져 버릴까 봐 염려했다. 이소의 고갯짓을 본 해준은 뻔히 예상했을 거였으면서도 그리 답해 준 이소가 너무 좋아 연달아 입을 맞추며 기뻐했다.
같이 살자, 그 말의 의미는 이소에게는 무겁고도 중한 말이었기에. 이소는 서글프면서도 기쁘고 벅차서 속으로는 여러 번 울고 또 울었다.
욕실에서의 관계는 밤새 침실에서도 두어 번 더 이어졌다. 이소는 마치 해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여러 번 매달렸다. 눈을 보고 하는 것이 참 어렵고 부끄러웠는데 지난 밤만큼은 몇 번이고 조를 정도로 해준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끝까지 기절하지는 않고 해준의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해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잘 자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는 해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이소 역시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이소는 침실에 앉아서 죽을 얻어먹고 오후가 되어서야 천천히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해준이 일찍이 일어나 사람들에게 이소네 집에서 살림살이를 몇 가지 더 챙겨 와 달라 부탁한 덕분에 아끼던 옷이나 선물 받은 자전거 따위를 챙겨 올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그저 놀러 온 줄만 알았던 해수가 아예 이곳에 살림을 꾸린다고 하자 가장 좋아한 것은 행랑채에 기거하는 아이들이었다. 은찬이가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해수야! 너 진짜 여기 살아?”
“응. 아빠가 이사 갈 때까지만 여기 살 거래.”
은찬이 얼굴을 붉히며 ‘와, 진짜였어, 와.’ 하며 놀라워했다. 해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세한의 형 세현이 언덕 뒤편에 있는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소원탑에 소원 빌었더니 이루어졌다고 저러는 거야.”
“소원탑?”
“응.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저기에 로보트 선물 받고 싶다고 쪽지 써 놨더니 진짜로 산타할아버지가 로보트 선물 주시고 가셨거든. 근데 이번에는 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적었더니 소원 이루어졌다고 그러는 거야.”
그때를 상기하며 흥분한 세현에게 해수가 담백한 어조로 대답했다.
“산타할아버지 같은 거 없는데.”
“야, 있거든?”
옆에서 이소의 짐을 풀던 은찬 어멈이 아이들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해수가 부채를 부치며 돌아봤다.
“근데 왜 나랑 같이 살고 싶다고 적었는데?”
“네가 좋으니까 그랬지!”
그 말에 수정과를 마시던 식솔들이 절반을 뿜었다. 이소 역시 아이들의 대화가 재미있어 내내 웃는 낯으로 짐을 끌렀다. 여전히 평화로웠다. 저 멀리서 해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진회색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해준은 이소를 발견하자 가볍게 손을 흔들고 제게로 오라며 팔을 벌렸다.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뛰어갈 뻔하다 마당에 아직 식구들이 있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해준은 이소의 손을 이끌고 정원을 지나 별채 앞에 섰다. 어쩐지 긴장한 표정이었다. 대충 짐작하기에는 이곳이 제가 지낼 곳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역시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해준의 연인이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제가 지금까지 살았던 곳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규모였기에. 해준은 머쓱한 듯 입술을 조금 매만지다 천천히 장지문을 열었다.
해준이 기거하고 있는 안채의 분위기가 조금 더 고풍스럽고 무거운 기운을 띠고 있다면 이소가 머물 별채는 조금 더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풍겼다. 색이 옅은 나무로 만든 창틀과 문, 기둥마저도 직선보다는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고 조명마저도 해준의 안채보다 훨씬 밝았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전에 살던 이소의 방과 배치와 크기가 비슷한 아기자기한 가구들이었다. 현관 앞에 있던 작은 선반, 그 위에 있던 소품들까지도 대충 비슷하게나마 재연해 놓은 것까지 모두 해준의 선물이었다.
“아주 똑같진 않지만 그래도 꽤 비슷하게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물론 가구나 침대는 전혀 다르지만 위치나 배치는 신경 썼어요. 생활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이소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구석구석을 구경하자 해준은 그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설명했다. 전에 살던 곳은 주방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바로 붙어 있는 구조였는데 여기는 아쉽게도 주방은 없다. 조리방에서 바로 음식이 올라오는지라 따로 넣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신 단출하게나마 간이 테이블을 만들었고, 요리를 하고 싶으면 여기서 하면 될 것이라 말해 주었다.
방도 무려 세 개나 있었다. 오밀조밀하게 디자인된 해수의 방, 포근한 침구와 원목 침대, 책상. 평생 가져 본 적도 없는 아이용 책장도 따로 있었다. 이소 혼자만 쉴 수 있는 공부방, 침실, 욕실까지 깨끗하게 딸려 있었다. 모조리 새것이었다.
별채를 모두 구경하고 가장 큰 문을 닫을 때까지 이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준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이소의 얼굴을 살폈다.
“별로예요? 이소 씨가 안채 쓸래요? 난 그래도 되는데.”
이소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기껏해야 안채에서 침대나 같이 쓰는 정도를 생각했던 이소는 해준이 아주 오래전부터 꾸며 왔던 계획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심지어 제가 지금 저 대단한 별채가 마음에 안 드는 줄 알고 자신이 쓰는 안채와 바꾸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소는 미간을 구긴 채 손을 내렸다.
“교수님.”
“응, 이소 씨.”
“진짜 어디 가서 사기 같은 거 안 당하시고…. 괜찮으신 거죠?”
“응?”
이소는 진심으로 해준이 걱정됐다. 해도 너무했다.”
“이렇게, 아니… 저한테 이렇게 다 해 주시면, 교수님 뭐 먹고 살아요…?”
농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아 해준은 잠시 당황해 말없이 이소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이내 이소의 발상이 몹시 귀여워 입술을 물고 웃었다.
“이소 사랑 먹고 살아야지, 뭐.”
농 같은 진심을 담아 머리를 콩 쥐어 박으며 해준은 이소가 별채를 썩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에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매일 밤 가꾸고 또 가꾸며 이소가 이곳에 앉아 책을 읽고 잠을 자는 것을 바라 왔다. 문을 열면 흰 시트에 얼굴을 묻고 저를 기다렸다 말해 주기를 소망했다. 아주 조금씩 제가 원하는 그림이 채워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해수에게도 별채를 보여 주었다. 역시 뛸 듯이 기뻐했다. 해수는 잠자기 직전까지 한참을 아래에서 놀다가 눈이 거의 감길 때 즈음이 되어서야 언덕 위 제 방으로 돌아왔다. 해수가 잠들고 이소는 수면등을 켜 둔 채 바깥으로 나왔다. 풀벌레가 우는 밤, 해준이 연못 다리 근처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한여름의 정원은 다채로운 꽃과 나무들이 만개해 폭발적으로 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그 가운데에 여유롭게 저를 응시하는 해준에게 시선을 던지며 이소는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여름이 되니까 꽃이 더 많이 피었네요. 나무도 잎이 풍성해져서 봄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예쁘죠.”
해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해준의 어깨를 간질이는 수국 가지 끝의 둥근 꽃송이가 웃을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이소는 해준의 곁에 걸터앉았다. 대낮의 무더위와는 사뭇 다른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볼을 채이고 지나갔다.
“낮에 했던 이야기요. 오해하실까 봐요.”
이소는 아직 은은하게 불빛이 내려앉은 행랑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들을 척척 해내시니까 너무 대단하시기도 하고. 이렇게 받아도 되나 싶어서 매번 놀라거든요. 물론 이렇게 말해도 다 받아도 된다고 하시겠지만, 저로서는 그랬어요.”
해준이 말없이 낮게 웃자 이소는 미소 지으며 손가락 끝을 꼼질거렸다. 정말 복에 겨웠다. 혹시 사주를 보면 제 운이 초년에는 더럽게 안 풀리다가 북쪽에서 귀인을 만나 청장년에 풀리려는 걸까. 해준이 제게 귀인이라면 평생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이다. 그리고 아마 저뿐만이 아닐 테지. 이소는 동희 씨와 식솔들을 생각했다.
“행랑채에 계신 분들은 모두, 사정이 있으셔서 여기 계시는 거죠?”
“응. 다들 사정이 있었지.”
저보다도 한참 어린 나이에 사람들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해준은 지금은 집 안에서 부리는 사람만 서른 명, 바깥에서 해준을 돕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처럼 용역 깡패를 고용해서 건물을 부순다거나 없는 사람들을 후드려 패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또한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거나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규모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씩 제 사람들을 모으며 영역을 늘려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사채업자처럼 언제까지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기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맡은 바 잘 살아가기만 하면 해준은 그대로 두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수님은 버겁거나 힘들지 않으세요?”
해준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평소 잘 빗어 넘긴 머리는 바람에 사박사박 이마를 간지럽히며 떨어져 내렸다. 달밤에 얼굴이 밝았다.
“뭐가요.”
“많은 사람들을 돕고 계시잖아요. 살 집도 주시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 주시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도 닦아 주시고. 한두 사람도 아니고 이 집안에만 서른 명인데, 식비도 만만찮고.”
식비 이야기에 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많이 먹긴 하지. 해준은 초복이나 말복 때만 되면 닭을 쉰 마리씩 사들이는 장부를 내려다보며 놀라기도 했다. 그럼 뭐 어떤가, 다들 기분좋게 잘 먹으면 좋지. 그런 가벼운 해프닝 따위를 생각하고 있는 해준을 두고 이소는 여전히 진지했다.
“그래서 매번 감탄해요. 누가 시켜서 하라고 해도 못 할 텐데, 기꺼이 그렇게 하고 계시는게요. 어쩜 사람이 이렇게 선할 수가 있지. 어쩜 이렇게 착하지, 어쩜 이렇게 완벽하지….”
이소는 잘도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했다. 해준은 그런 이소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더니 이 짓을 꽤 오래 하고 있네.”
해준은 제 손등을 간질이는 버드나무 가지를 당겼다 놓았다. 그러게, 누가 시켜서도 못 할 짓인데 이게 다 저를 잡아 두는 그 말 때문이다. 그렇지, 문 집사.
* * *
해준은 그리워 마지않는 오래된 기억 속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홉 살, 제 손에 들어온 늙은 개와 다친 고양이들이 해준의 돌봄만 받으면 몇 주 되지 않아 산책할 정도로 나아지곤 했다. 그때마다 제 머리를 쓰다듬던 남자는 어린 해준을 제법 기특하게 바라봤다.
‘해준이 네 손만 타면 다 죽어 가던 것도 살아나는구나. 거참 신통하기도 하지.’
‘그냥 잘 먹이고 잘 재우면 돼요. 제때 산책 나가 주면 되고, 못 걸으면 안고 가면 돼요. 아픈 게 이 녀석 탓이 아닌데 자기만 못 걸으면 속상하잖아요. 불쌍하기도 하고.’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측은지심이 넘치네.’
‘측은…. 그게 뭔데요? 그게 넘치면 나쁜 거예요?’
남자는 어린 해준의 코를 잡아당기며 웃었다. 평범한 듯했지만 따뜻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세상 만물을 사랑하고 길러 주는 마음이지. 측은지심이 있으면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해. 지위가 높은 사람은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수 없고,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업신 여길 수 없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해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끌어안았다. 그 품이 너무 따뜻해 어린 해준은 오랫동안 그 품에 안겼던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때 폐부 깊숙이 들어온 향은 마치 사방에 흐드러진 꽃과 풀,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리는 봄 정원 같았다. 제 첫 스승이자 첫 은인이자 마음을 준 사람. 어린 해준은 꼬옥 그 품에 안겼다.
‘넌 선함을 타고났구나. 아주 착하네.’
처음으로 들었던 칭찬은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설레었고 벅찼다. 벼락처럼 마음에 내리꽂힌 그 말은 머리가 꽤 굵어질 때까지 해준을 따라다녔다. 정말 그의 말처럼 측은지심이 ‘넘쳐’ 버린 것인지, 해준은 제가 가진 것들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준을 거쳐 갔고 어떤 이는 은혜를 알았지만 어떤 이는 안면몰수 배신을 하고 떠났다. 이는 여러 번 반복되었다. 남자가 어여삐 여겼던 해준의 측은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금이 갔다.
마냥 해준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견고하게 다져진 마음은 조건을 걸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받아 주는 대신 그들의 마음을 담보로 받았다. 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 약속을 조건으로 해준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마련해 줬다. 사람들은 적당한 곳에 적당히 쓰였다. 제 사지가 멀쩡했고 하는 일이 불법적이지 않으니 목숨을 걸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자질구레한 일들이 터지면 새벽이고 밤이고 자유롭게 사람을 썼다. 몸이 편했다.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통이면 어제까지 있었던 건물을 통째로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됐다. 신이라도 된 것 같았다. 사소한 것까지 모두 사람을 썼다. 게을러졌다. 잠을 많이 잤고, 하루하루가 무료했다. 아마 신도 그랬을 것이다. 인간을 만들고, 무료함에 몸부림 쳤겠지.
그러다 문득, 아주 가끔씩 제 어린 시절 그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를 때면 극심한 공허함에 치를 떨었다. ‘타고난 선한 마음.’ 그 따위 것이 제게 존재하기는 할까. 사람을 수족처럼 부리며 우쭐하고 오만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작 열여덟 살의 차해준은 눈 밑이 퀭해지도록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또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냥 취미로, 제 마음을 조금 달래 보려 시작한 것이 작은 화원을 만드는 거였다. 사람도 풀, 꽃이다. 우습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저 몰래 수족들의 이름을 붙이고 정성을 다해 길렀다. 말을 좀 안 듣는 놈들이 있으면 그 앞에서는 크게 티를 내지 않더라도 괜히 제 작은 화원에 와서 녀석의 이름을 붙인 풀꽃에게 구시렁댔다. 제 말 잘 듣고 삶의 의지를 갖고 잘 사는 놈은 신기하게도 그 이름을 붙인 풀꽃들도 잘 자랐다. 해준은 그런 녀석들을 퍽 예뻐하며 자주 들여다보고 정성스레 가꿨다.
이런 괴상한 취미를 가진 지 벌써 십오 년이 넘어간다. 정원은 커졌고 부리는 사람 수도 많아졌다. 제 곁에 오래 둔 사람들은 풀꽃에서 나무가 되었다. 가볍게 지나간 사람들이라도 정원을 빼곡히 채우는 꽃으로 남았다. 해준은 그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곤 했다. 생각보다 꽤 좋은 기억법이었고, 나쁜 기억 대신 좋은 추억만 남았다.
“뭐, 여하튼. 이제는 그냥 버릇처럼 새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과 어울리는 화초를 심어요. 나름의 약속이랄까.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아주 가끔씩 ‘내가 잘 있나’ 하고 올라와서 꽃과 나무를 살펴보기도 해요. 물론 나 없을 때인 것 같지만.”
해준은 머쓱한 듯 볼을 긁었다. 이소는 점점 알수록 해준이 특이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곁에 제가 있을 수 있어 마음이 간질거렸다. 이소는 해준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버드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이 버드나무도 주인이 있어요?”
“응. 준경 집사님.”
“와. 어쩐지 여기서 제일 커요.”
정자와 연못을 연결하는 다리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는 문준경 집사와 썩 잘 어울렸다. 언제나 과묵하게 저택의 일을 처리하지만 해준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사람. 이소는 그런 문 집사에게도 해준에게 매달릴 만한 상처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집사님도 교수님이 데려오신 거예요?”
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 회사의 본부장으로 승승장구하던 문준경은 별안간 아들과 아내의 교통사고 이후 자살 시도를 하려다 해준에게 발견되었다. 해준의 도움으로 뺑소니범을 잡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 가며 겨우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때 즈음 해준이 제 밑으로 불러들였다. 다 늙은 사람을 무슨 비서로 쓰느냐며 거절했지만 해준에게는 문준경만 한 사람이 없었다. 막 스무 살이 된 어린 저보다 밝은 혜안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고, 유일하게 해준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준의 생떼를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외로울 틈이 없겠어요, 이렇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살면.”
이소는 배시시 웃었다. 아침이 되면 지저귀는 새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하게 그릇을 옮기고, 음식 하는 냄새가 가득한 생기 넘치는 마당이 되곤 했다. 그 사이를 해준은 언제나 바삐 인사하며 지나가면 다들 ‘다녀오세요, 도련님!’ 하며 큰소리로 배웅하곤 했다.
이소의 말에 해준이 피식 웃기만 하자 이소는 잠시 멈칫하곤 눈치를 살폈다. 생각해 보면 항상 해준은 혼자였다고 했다. 다들 해준을 동경했지만 어려워했고, 쉽게 말을 섞지 못했다. 해준은 그들에게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지만 친구는 되지 못했다. 어쩌면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크게 상처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해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해준이 설핏 웃었다. 이 큰 정원에서도 제가 없었다면 혼자 앉아 달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쩐지 그 광경을 생각하니 마음이 시렸다.
“아니라고 하면, 곁에 있어 주려고?”
제가 아는 해준은 다정했다. 장난도 짓궂게 잘 치고, 농담도 잘하고 때때로 말도 많은 편이었다. 섬세했고 질투심도 심했다. 그런 해준의 곁을 지키는 게 고작 이런 정원 따위였다는 게 몹시 가엽게 느껴졌다.
“그럴게요. 곁에 있을게요.”
이소는 제법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아 해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라. 난 정말 이소뿐이네.”
그렇게 말한 해준의 웃음이 조금 쓸쓸해 보여 이소는 팔을 들어 얼른 끌어안았다.
“정말이에요. 제가 끝까지 옆에 있을 거예요.”
해준의 머리를 제 가슴에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갈 곳을 잃은 해준의 손이 아주 천천히 이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이소는 저를 업어 주던 해준의 너른 등을 살포시 두드렸다. 문득 사진 속의 어린 해준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였구나, 아주 착한 차해준. 잘 자랐구나, 기특하네. 이소의 입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손을 잡고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이소는 해준에게 기댔다.
“내 꽃도 있으면 좋겠다.”
“있지.”
이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준은 대답했다. 이소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요? 보여 주세요.”
“아직 싹이 안 났어.”
이소가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해준은 은은한 미소만 띤 채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내년 봄이 되면 아주 많이 날 거야. 이 정원을 모두 뒤덮을 만큼.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하며 비밀스러운 말만 남겼다. 내년 봄, 저는 그때도 이 정원에서 해준과 함께 걷고 있을까. 부디 그렇게 되면 좋겠다, 이소는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