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8/50)

3

초작초작 소리를 내며 여우비가 데크를 적셨다.

부동산 이 씨는 정숙이 나가고 난 후 찾아와 이제는 허전하겠다며 곁에 서서 담배를 태우며 안부를 전했다. 건물이 완전히 빠지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가게 물건을 중고로 내놓으며 정리하기로 했다. 이미 물려받은 중고식기를 다시 한번 되파는 것이어서 바람을 맞거나 가격이 안 맞아 거래가 불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오히려 반찬 장사를 할 때보다 더 바빴다.

한참 그런 잡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나면 종종 동희 씨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몇 번이나 해 봤다고 금세 익숙해져서 식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입 안이 허전할 지경이었다. 이소는 자신의 변화에 코웃음을 쳤다.

“여기 다시 사는 건물주는 노났지. 지하철 들어온다는 소문도 있더라.”

“이 근처 땅을 연예인들이 사들인다잖아. 그거 알지, 테레비에 나온 그 사람이 산 썩은 건물이 금세 30억 넘어 버린 거. 이 땅이 그렇게 아는 사람만 아는 노른자 땅이래요.”

“나도 여기 건물 하나 가지고 있으면 평생 노후 걱정 없겠다.”

동희 씨 카페에 있으면 들르는 사람마다 이소의 가게 건물 이야기를 했다. 동네 재개발이 어그러지면서 오히려 주변 건물들을 개인이 사들이는 것이 붐처럼 일었다. 동희 씨의 가게도 철물점 주인이 나가면서 전면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지 새것처럼 깨끗했다. 이소는 저와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라 들을 때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한 귀로 흘렸다.

이소는 지갑에서 꺼낸 주영의 명함 끝을 만지작거렸다. 일반 싸구려 명함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고급스러운 펄 재질의 명함은 몇 번을 만지작거려도 쉽게 구겨지지도 않았다. ‘대표이사 윤주영’이라고 적혀 있는 이름이 낯설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것 같던 주영이 제 근처를 애매하게 맴돈다. 주영을 만난 이후로 정말로 저를 괴롭히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혹시 고 대표도 주영이 막아 준 걸까. 7년 동안 제게 갚지 못한 빚을 이제서야 몰아서 갚으려는 걸까.

살아 있어서 다행. 분명 주영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죽기라도 했단 거야, 뭐야.”

어쩌면 주영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 걸까. 그러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쉽사리 번호를 찍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관에서 만난 해준은 마치 눈빛만으로 주영을 물어뜯을 기세였기 때문에 이소는 대놓고 해준에게 주영을 만나는 것을 오픈할 수 없었다.

“사장님, 오늘은 좀 한가해요?”

“아, 네. 오늘은 시간이 좀 남네요.”

명함 끝을 하도 매만져 끝이 부드럽게 구겨질 즈음에야 동희 씨가 허브차를 타 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빗소리와 잘 어울리는 리드미컬한 재즈 선율이 가게 안을 채웠다. 손님은 이소 한 명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지날 무렵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제법 한산해져 동희 씨는 숨을 돌리며 그제서야 차를 입가에 댔다. 이소는 문득 동희 씨가 마시는 컵을 보다 제가 일으킨 사고를 떠올리고 머뭇거리며 사과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정신이 없어서 여태 미뤄 뒀던 사과였다.

“그날은 죄송했어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잔 깨뜨린 거, 많이 놀라셨죠.”

“어우, 아니에요. 이미 잔 값도 물어 주셨으면서 왜 또 사과하세요.”

웃으며 그날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인 동희 씨는 구구절절 사정을 더 묻지 않았다. 잠깐의 적막 이후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이소의 핸드폰을 바라보던 동희 씨는 제 전화번호를 알려 줘도 되냐고 물었다.

“어, 그럼요. 당연히 되죠.”

이소가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 화면을 켰다. 동희 씨가 퍽 안심한 표정으로 좋아했다.

“다행이다.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왜요?”

“에이. 정숙 사장님 계실 때 제가 몇 번이나 찾아가서 인사하고 그랬는데 한 번도 먼저 말 걸어주신 적 없었잖아요. 그래서 저 불편해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동희 씨 말에 이소는 팔을 내저었다. 제가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겠지만 본래 성격이 치대질 않아 먼저 번호를 묻거나 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제가 해준과 번호를 제대로 교환한 것도 만나고 한참 후의 일이 아니었던가. 이소는 동희 씨에게 오해하게 한 것을 사과하며 다른 감정이 없다고 설명했다. 동희 씨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사장님 좋은 사람 같아서 제가 엄청 말 섞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되죠? 발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모양새가 애교스러웠다.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희 씨는 티백을 빼어 티슈 위에 올려 두고 잘 우러난 티를 마시며 미소를 띠었다.

“도련님하고는 어제도 만나시구요?”

“아, 네. 뭐 그렇죠. 같이 식사하고, 차로 데려다주시고.”

내리려던 것을 붙잡아 불도저처럼 키스하고 차에서 울면서 섹스하고. 이런 설명은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동희 씨는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진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앞이니까 하는 말인데요. 해준 도련님 진짜 좋으신 분이에요. 저보다 고작 몇 살밖에 많진 않지만 매번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고, 말씀이 많지 않으시지만 그래도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거든요.”

해준이 말이 많지 않다니. 이소는 눈썹을 크게 들어 올렸다. 항상 저와 같이 있으면 이소보다 항상 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해준이었다. 혹부리 영감마냥 흥얼거리기도 하고 아는 것이 많아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 줬다. 그때마다 이소는 해준의 무릎을 베고 누워 게으르게 그의 목소리를 듣다가 잠들곤 했다.

“동희 씨는, 교수님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음?”

이소는 큰 눈을 깜빡이는 동희 씨를 보며 아차 하며 얼른 손을 저었다.

“아, 그러니까…. 대답하기 곤란하면 말씀 안 해 주셔도 돼요. 개인적인 사정일 수 있는데 너무 가볍게 물었죠.”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은 다 해결된 문제라 괜찮아요. 저 사실 제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해요. 말하고 나면 속 시원해지거든요.”

어디 가서 퍼트리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덧붙이며 찻잔을 내려놓는 동희 씨에게 이소는 ‘저 입 무거워요.’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보다 적극적인 이소의 태도에 동희 씨가 마침 심심했는데 잘 되었다며 눈을 굴렸다.

“조금 무거운 이야기 있을 수 있지만 사장님만 괜찮으시면 저 그냥 이야기할게요?”

“네. 잘 들을 수 있어요.”

“귀여워라. 음, 저는 꽤 어릴 때 결혼했다가 이혼했어요. 거두절미하고 남편이 너무 많이 때려서요. 아이 낳기 전에 그랬으면 벌써 갈라섰을 거였는데, 이 사람이 그 성질을 어떻게 잘 숨기고 있었는지 애 둘 낳기 전까지는 안 그랬어요. 사업 말아먹고 스트레스 심해질 때마다 때리더니 나중에는 의자로도 패는데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애들 둘 데리고 도망 나왔어요.”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동희 씨는 이소의 어깨까지밖에 안 오는 아담한 체구였다. 그런 여자를 의자로 때렸다니 이소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를 동희 씨는 담담하게도 풀었다.

“한참 여기저기 여관방 전전하면서 사는데 그때가 세현이가 5살, 세한이가 3살이었거든요. 친정엄마한테는 전남편이 가서 윽박지르고 그래서 차마 가지도 못하고 아는 언니네서 기거하면서 일하다가… 도련님 네 어머님, 그러니까 지금 도련님 본가에서 집안 행사하는데 도우미 뽑는다고 해서 멍도 안 빠진 얼굴로 무작정 지원했어요. 다행히 사모님께서 허락해 주셔서 사람들 안 보이는 주방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행사 둘째 날 도련님을 만난 거죠. 그게 지금으로부터 얼마 안 됐어요. 한 이 년 전.”

동희 씨는 그때를 생각하며 한참을 당시의 해준이 얼마나 근사했는지를 잠시 떠들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선이 고왔고 처연한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고 했다. 이소는 지금도 충분히 멋있는데 동희 씨는 그때의 날렵한 느낌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였다.

“근데요, 처음에 만났을 때는 되게 당황스럽긴 했어요. 처음 절 보자마자 ‘여기서 일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병원이나 경찰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거든요. 날 언제 봤다고 병원이니 경찰이니 말하는 것도 고까웠지만, 사실 그동안 경찰이 조치 없이 몇 번이나 그냥 돌아가 버리곤 해서 답답한 상태였거든요. 그때 너무 짜증 나서 도련님한테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인생에 훈수 두지 마세요.’ 하고 흘기곤 나왔어요. 웃기죠, 조용히 일이나 하지. 그때는 도련님이 저보다 한참 어린 줄 알고 덤볐거든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결국 훈수를 뒀군. 이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희 씨의 말을 마저 들었다.

“그날 이후에 몇 번을 더 마주쳤다가 도련님이 해외 나가시는 날에 준경 집사님 통해서 연락처를 주고 가셨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안 받으려고 했었는데 ‘어쩌면 경찰보다 빨리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홀려서 그대로 번호 받아서 돌아갔어요.”

동희 씨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날 연락처를 받은 것은 어쩌면 조상신이 제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그날 자신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 정도 있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전남편이 다시 찾아왔어요. 있는 돈도 다 빼앗고 아이들까지 때리려고 해서 그때 얼른 가서 애들 안고 막았거든요. 그때 찢어진 상처가 아직도 머리에 있고, 눈은 거의 실명 위기까지 갔었어요. 그 미친놈이 정말 얼굴만 죽자고 때리더라고요. 그렇게 맞으면서도 애들은 장롱에 넣어 두고 핸드폰으로 얼른 여기 전화하라고 그랬어요. 그때가 우리 세현이가 일곱 살이었는데, 우리 엄마 죽는다고 빨리 와 달라고 그렇게 옷장 안에서 울었던 게 아직도 생생해요.”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말들이었다. 해수와 함께 놀았던 세현, 세한 형제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소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정말 제 앞에 동희 씨의 전남편이 있었다면 자신도 그 몹쓸 놈의 얼굴만 골라서 때려 주었을 것이다. 진심이었다.

“아이고, 우울한 이야기다. 진짜. 아무튼 정말로 집사님 말마따나 경찰들보다 일찍 도련님의 사람들이 도착했고 그 개새끼는 바로 구속됐어요. 변호사도 선임해 주고 치료비도 대 주고, 저희 애들은 심리 치료도 해 주고 제가 다 나을 때까진 집에서 방도 주고 그랬어요. 예상하셨다시피 이 카페도 도련님이 내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어땠겠어요. 저는 퇴원하자마자 도련님 앞에 무릎 꿇고 평생 잘하겠다고 했어요. 우리 애들도 같이 울었어요. 무슨 일 있어도 도련님은 무조건 배신하지 말자, 끝까지 남자 그랬거든요.”

동희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소는 곰곰이 생각했다. 누군가를 거둔다는 것, 단순 측은지심만으로는 행하기에 어려운 일일 텐데. 저 역시 해수를 거뒀을 때는 앞뒤 안 가리고 오로지 작은 생명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무모하게 달려들었었더랬지. 물론 저와 달리 해준에게는 계획도 있었고 자본도 넘쳤다. 그 결과 이렇게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는구나. 이게 진짜로 미래를 책임져 주는 거구나, 대단하다. 멋지다. 그런 생각들이 불규칙하게 떠오르다 사라지곤 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거리는 적막했다. 손님이 없는 고요한 카페, 두 사람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뒤 저택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저 역시도 마음이 애틋해져요. 각자의 사정이 있고, 우리는 다 모여서 울기도 많이 울고 웃기도 많이 웃었거든요. 진짜 가족들과는 다 멀어지고 원수같이 지내는데 지금 얼굴 맞대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렇게 상처가 많은 사람들끼리 모여서도 잘 지낼 수 있는 건지, 이렇게까지 끈끈할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에요. 물론 그 중심에 해준 도련님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죠. 다 저 같은 마음일 거예요.”

“교수님하고 오래되신 분들도 계시겠죠?”

“제가 알기로는 준경 집사님이 10년 넘을걸요? 아마 스무 살이 되기도 전부터? 물론 이 저택 자체는 몇 년 전에 지었고요, 그 전에 살던 곳은 일반 가정집 같은 곳이었어요. 그리고 본가에서 일하던 사용인들 중에서도 사정 딱한 사람들은 도련님이 다 데려왔죠.”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이 몰린다. 해준의 덕을 입은 사람들은 각자 서로를 끌고 뭉치며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자주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해준의 저택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푸근하고 선한 인상의 사람들이었다.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는 이소를 보며 동희 씨가 웃음 지었다.

“그거 아세요, 저희 저택 사람들 다 사장님만 보면 엄청 고마워하는 거.”

“네? 왜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기울이자 동희 씨가 팔을 들어 허공에 어깨동무하는 자세를 취했다.

“도련님 곁에 이렇게 딱 붙어 계시잖아요.”

이소가 동희 씨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자 동희 씨는 민망한지 팔을 내리고 웃었다.

“저희 도련님 항상 혼자셨거든요. 아이들 공부도 잘 봐주시고, 선물도 사 오시고, 식사도 가끔 함께하시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이면 누구나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에게 특별함을 기대하곤 하잖아요. 내가 이걸 해 줬으니 마땅히 바라는 게 있는 그런 감정이요. 근데 도련님은 딱히 그런 게 없어 보여서요. 주는 것에는 도가 텄는데 받는 것에 면역이 없는 사람. 눈이 높다기보단 정말로 마음에 차는 게 없어 보이기도 하고, 마음 둘 사람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들 그 점을 유일하게 아쉬워하곤 했어요. 저 사람 곁에 누가 나타나 주면 좋으련만, 그런 거요.”

이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은 참 많이 주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황금이 나오는 항아리마냥 제가 가진 것들을 모두 퍼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소 역시도 그 다정을 받아먹었고. 물론 반대로 제가 무엇인가를 준비해 가면 당황하거나 몹시 황송해했다. 훨씬 많이 가진 사람인데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은 어쩐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날, 있잖아요. 사장님 볼에….”

동희 씨는 자신의 볼을 톡톡 치며 기억나냐는 듯 입을 뗐다. 이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희 씨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저택에서 휴가처럼 지냈던 여름밤. 사람들 앞에서 제 뺨에 입을 맞추고 올라간 해준을 따라갔던 날,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소가 해준의 남자 애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동희 씨는 해준이 이소를 만나 얼마나 많이 유해졌는지를 말하며 웃었다.

“해수까지 같이 있으면 뭐랄까, 단란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 이제야 우리 도련님이 드디어 정착하려나 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안심하고 그랬다니까요.”

동희 씨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목젖이 다 보이도록 웃었다. 유쾌한 대화였다. 이후 자연스럽게 아이들 이야기로 넘어갔고 세한이와 해수가 모두 2월생이라는 것을 알자 동희 씨는 내년에 그럼 함께 생일파티를 하면 되겠다며 해맑게 박수를 쳤다.

이소는 말도 못 하게 힘들었던 과거가 있는데도 명랑하게 새 인생을 살고 있는 동희 씨를 보며 감탄했다.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허심탄회함도 느껴졌다. 동희 씨가 이렇게 단단해지기까지는 해준의 도움도 컸겠지만 동희 씨 스스로 잔인한 과거의 끈을 자르고 살아 보려는 의지가 컸기 때문도 있으리라.

이소는 문득 주영을 생각했다. 미루거나 회피하지 말고 주영의 이야기를 듣고 선을 그어야 한다. 그게 저와 해수 모두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소는 동희 씨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답답한 기분이 퍽 나아졌다.

* * *

비가 그쳤다.

이소는 동희 씨와 함께 가게 문을 닫았다. 장사도 안 되는데 뭐하러 오래 열고 있냐던 동희 씨는 ‘날이 눅눅한데 부침개나 부쳐 먹죠.’ 하며 셔터를 내렸다.

해수를 먼저 하원시키고 다 같이 손을 잡고 세한의 어린이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자 굼뜬 세한 대신 그 친구들이 뛰어나왔다. 세한의 친구들이 ‘야! 세현아! 니네 아빠 완전 멋있다! 테레비 나오는 사람 같다!’라고 해서 다른 반 아이들까지 우르르 몰려오는 바람에 약간의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세한의 하원은 순조로웠다.

세한은 현관문 앞에서 제 엄마와 함께 온 이소를 보며 잠시 얼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해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둘은 손을 맞잡고 방방 뛰었다. 동희 씨는 가방을 건네받으며 연신 이소가 세한의 아빠가 아니라 친구 아빠라고 해명하며 한참 깔깔 웃었다. 이소는 머쓱해 우산을 끌고 멀찍이 먼저 걸어 나왔다.

해준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항상 저를 보는 나른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당황으로 벙찌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해준은 간만에 학회에 갔다가 돌아오느라 차를 타고 나갔다. 이소는 해준의 전화에도 메시지에도 답을 하지 않고 언덕 아래 행랑채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었다. 커다란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술래잡기도 하고,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주방 근처에 쪼그리고 있으면서 유모 할매가 조금 잘라 준 밤고구마를 받아먹었다.

어느새 저녁 일곱 시가 막 넘어갔다. 자갈이 깔린 주차장에서 바스락바스락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해준은 주차장에서 주 기사를 퇴근시키고 터덜터덜 올라왔다. 이소는 또 뭐가 그리 바쁜지 연락도 받지 않고, 가게 불도 꺼져 있었다. 가게 앞에 내려서 집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집 안 불도 꺼져 있길래 외출을 하였는가 싶어 우선은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학회에서 노인네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내 듣다 왔더니 귀를 씻고 싶었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주차장서부터 와글와글했다. 대문 너머 밥 짓는 내음과 튀긴 기름 냄새가 났다. 오늘은 또 무얼 만들었으려나. 어서 식사하고 푹 자고 싶다, 고단함에 찌든 해준이 커다란 돌계단을 무거운 걸음으로 밟고 대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저씨 왔다!”

“도련님이다아!”

귀에 익은 여자애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고개를 들자 바닥에 붙어 있어야 할 해수가 제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무등을 탄 채 손을 흔들었다. 어디서 났는지 아이들이 불이 들어오는 장난감을 들고 마당을 뛰어다녔고 그 가운데에서 이소와 해수가 손을 흔들었다. 이소가 제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해준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문 앞에 멀거니 서 있자 이소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해수야, 잠깐 내려봐 봐.”

이소는 허리를 내려 해수를 내리려 했다. 그러나 꽤 키가 큰 해수가 한 번에 내려오기에는 요령이 부족했고 결국 동희 씨가 바싹 달라붙어 이소의 등을 타고 내려온 해수를 안아 주었다. 해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동희 씨가 말려 올라간 이소의 옷을 내려주고,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털어 주자 이소가 고맙다며 웃고 고개를 돌렸다. 해준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왜 이리 속이 꼬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희 씨가 ‘도련님 오셨으니까 이제 저녁 준비할게요.’ 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소는 동희 씨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 해준에게 달려왔다. 이소의 얼굴이 오늘따라 말갰다. 얼마 전까지는 근심 걱정이 가득이었는데 마치 그런 불안은 씻은 듯 없어진 낯에서 빛이 났다.

“동희 씨가 저녁 같이 먹자고 해서 왔어요. 교수님 놀래 주려고 말 안 하고 왔는데, 깜짝 놀랐죠.”

방금까지 아이들과 놀아 주었던 터라 이마에는 얕은 땀이 배어 모가 가는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해준은 이소의 그런 점도 퍽 사랑스럽고 얼빵하게 보였다. 고된 하루의 여파로 해준의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작은 심술들은 이소의 말간 눈을 보고 나니 사박사박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해준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이소에게 장난을 걸고 싶었다.

때문에 다정한 대꾸 대신 이소의 손을 잡아끌어 열었던 대문 바깥쪽으로 이소를 끌어당겼다. 영문도 모르고 질질 끌려 나가는 이소를 보면서 동희 씨와 아이들은 고개를 기울였다. 해수가 ‘아빠, 어디 가!’라고 크게 외쳤던 것도 같다. 돌아보기도 전에 해준의 손에 이끌려 나간 바깥, 곧 커다랗고 무거운 대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

이소는 육중한 대문을 등지고 해준의 팔 안에 갇힌 채였다. 슬그머니 눈을 들어 해준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울어서 서린 눈물이라기보다는 본래 윤이소가 가지고 있었던 맑은 영이 우아하게 찰랑이는 듯한 생기가 돌았다. ‘교수님, 왜요.’ 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 좋다. 문득 해준은 바람에 섞인 진한 풀내음을 맡았다. 저와 처음 키스했던 주정뱅이 스물일곱 씨와의 봄밤을 떠올렸다. 그날도 바람에 이렇게 싱그러운 풀냄새가 섞였었는데.

해준은 이소의 부드러운 볼과 입술에 차례로 입 맞췄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다 꽃잎에 내려앉듯 부드럽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에 이소의 손이 해준의 가슴에 가닿았다. 언제나 그렇듯 옷깃을 살짝 쥔 채 발부리를 들어 올린 이소의 행동은 기껍다 못해 황송할 지경이다.

가늘지만 단단한 허리를 제 팔로 끌어안고 더 깊게 혀를 집어넣으면 윤이소는 모자란 숨을 홉 들이마시며 입술을 연다. 이소의 어설픈 입맞춤은 언제나 해준을 동하게 했다. 평생 윤이소가 어색해하고 당황해하며 저를 버거워했으면 좋겠다. 제가 가르쳐 줄 것이 더 많게, 손을 잡고 끌어 줄 수 있게 이소의 앞에 한 발짝만큼만 먼저 걸으며 제 사랑의 흔적을 따라오게 하고 싶었다.

“숨, 막혀요.”

결국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 이소의 뺨에 제 입술을 부비며 해준은 애태우듯 속삭였다.

“다른 사람이 이소 씨 만지게 두지 마요.”

“다른 사람?”

“…….”

해준이 가늘게 눈을 홉떴다. 토라진 것 같기도 했다. 이소가 눈을 깜빡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동희 씨요. 아까는 무등 태우느라구 그런 건데.”

“손 잡지마, 응? 머리도 만지게 하지 마. 옷도 내려 주게 두지 마. 다정하게 웃어 주지 마요.”

“교수님, 왜 그래요.”

제 뺨을 잡은 이소의 손을 겹쳐 잡은 해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따라 집에 가고 싶더라니. 네가 있어 그랬나 보지. 해준은 응석 부리듯 내뱉었다.

“나한테만 해 줬으면 좋겠어.”

“교수님한테만 해요.”

“사촌 놈도.”

“응?”

해준이 눈을 흘겼다.

“윤주영 이사한테도 안 돼요.”

“아니, 그건 진짜 그때 아니라고 했잖아요. 형은,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이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합 입술을 베어 문 해준은 제 양껏 키스했다. 이소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고개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럴 때마다 이소는 자꾸만 대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문 근처에 다가와 ‘도련님 어디 가셨지? 두 분 차 타고 과자 사러 나가셨나 봐!’ 하고 소리를 지르면 한껏 달아올랐던 몸이 파스스 식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그런 것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몸을 접붙여 왔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단단한 허벅지가 제 몸을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제 고간을 비비는 오른쪽 허벅지 바로 위에 단단하게 발기한 해준의 기둥이 여실히 느껴졌다. 여기서는 안 된다.

“아, 알았어요. 안 만져, 안 만진다니까. 교수님, 나 진짜 여기선 안 돼요!”

아래를 바짝 세운 상태로 아이들을 지나 안채로 뛰어갈 수도 없었다. 더 단단해지기 전에 얼른 할머니가 떠 준 스웨터 생각이나 하며 아래를 잠재워야 했다. 해준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내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안 해. 진짜 안 할게요. 교수님하고만 한다니까요.”

“정말로?”

“응. 진짜로,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빨리 내려 줘요. 애들이 문 뒤에 있단 말이에요.”

이소가 속닥이면서도 씩씩댔다. 해준은 손가락을 걸고 그제서야 만족한 듯 이소를 허벅지 위에서 내려 주었다.

“진짜 장난이 너무 심하세요.”

이소가 눈을 흘겼다. 해준이 이소를 끌어안은 채 몸을 느리게 흔들었다.

“이소 씨 보니까 반가워서 그랬지. 오늘 잘 거죠?”

“몰라요.”

이소는 제 코로 해준의 가슴팍을 몇 번 쿡쿡 찌르곤 몸을 돌려 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대문이 열리며 너른 마당을 뛰어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와, 오셨다! 과자! 과자는요!”

“없다, 이놈들아.”

해준을 둘러싼 아이들이 단체로 실망한 듯 입을 내밀었다. 동희 씨는 그것이 퍽 귀여워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해준에게 머리를 숙였다. 해준은 괜히 동희 씨를 빤히 쳐다본 후 다시 씩 입꼬리를 올렸다. 예의 여유로운 낯으로 돌아온 해준을 천천히 따라 걸으며 이소 역시 느리게 웃었다. 이 저택에 있는 누구보다 해준이 가장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니까. 물론 저만 아는 비밀이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이소는 가볍게 샤워를 했다. 무더위는 해준의 집에서도 피할 수는 없었던 터라 티셔츠 안으로 배어나는 땀을 이기지 못하고 얼른 찬물에 몸을 담갔다. 한결 보송보송해진 피부를 톡톡 매만지며 이소는 해준의 마루 선반에 있는 잉어 먹이를 집어들었다.

“밥 먹자, 얘들아.”

연못 위 커다란 바위 위에 쪼그려 앉은 채 손바닥에 톡톡 알록달록한 먹이를 털어 못에 뿌렸다. 후두둑 떨어진 작은 알갱이들이 수면에 닿자마자 느리게 올라온 물고기들이 아가리를 벌린다. 멍하게 못 주변을 응시하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놈들이 있었다. 붉은 잉어 두 마리 사이를 맴돌며 크기가 큰 검은 잉어 한 마리가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붉은 잉어 두 마리가 썩 사이가 좋아 보였는데 검은 놈이 자꾸 와서 붉은 잉어 한 마리를 물어뜯기도 하고 제 못생긴 대가리로 밀기도 했다. 결국 작은 잉어 한 마리가 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못 됐네. 사이좋게 지내야지.”

긴 나뭇가지를 꺼내어 검은 놈의 대가리를 쿡쿡 찌르자 텀벙텀벙 신경질적으로 물에 꼬리 짓을 했다.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응?”

“검은 놈이, 빨간 놈을 좋아한다고. 이거 봐, 먹이도 저 비단잉어 먹으라고 주위 놈들을 다 쳐내고 있잖아.”

어느새 다가온 해준이 뒷짐을 지고 서서 손가락으로 검은 잉어를 가리켰다. 해준의 손을 따라 내려간 시선 끝에 검은 잉어 놈이 저는 먹지 않고 붉은 잉어가 먹을 수 있도록 주위를 맴돌며 다른 놈들을 다 밀어젖히고 있었다. 신통한 일이었다.

“저 녀석 자주 그래요?”

“항상 저러지. 잉어치곤 머리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을 한다는 거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놈을.”

“그러게, 신기하다.”

둘은 한참 그렇게 무력하게 연못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쪼그려 있었던 건지 무릎이 다 시큰거렸다. 선선한 밤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가 최적의 타이밍일까. 무어라고 말을 시작해야 할까.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비밀을 대뜸 꺼내어 해준에게 털어 버리기에는 이소는 그리 담대하지 못했고 곯아 버린 속도 얼마나 깊이 썩어 있는지 스스로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문득 해준이 몸을 돌려 이소의 손바닥을 맞잡아 왔다. 며칠 전 다친 손의 거스러미는 까슬까슬한 딱지로 남았다.

“고민이 있어 보이네.”

해준의 말에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티 나요?”

“많이요.”

이소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선생님, 교수님, 인생의 선배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이소가 고개를 기울여 해준과 눈을 맞췄다. 맞부딪힌 해준의 시선이 따뜻하게 닿았다.

“만약 제가 교수님한테 아직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 하면, 많이 서운하실까요?”

“헤어지고 싶어하는 거라면 서운하다 못해 몹시 슬플 거 같은데.”

해준은 밀랍같이 매끈한 이소의 작은 귓바퀴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종종 기분이 좋을 때 하는 스킨십 중 하나라 이소는 눈을 조금 굴리다 다시 해준의 낯을 살폈다.

“……그런 건 아니구요.”

“사람은 누구나 다 비밀이 있으니까요. 이소 씨가 어떤 비밀을 갖고 있건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해서 내가 섭섭할 이유는 없죠. 당신의 비밀과 별개로 나는 내가 아는 윤이소를 마음에 담았는 걸.”

어린 제자에게 가르치듯 해준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요?”

“종종 듣고 싶을 때가 있지만 이소 씨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평생 묻지 않을 생각인데.”

세상에. 이소로서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규모의 포용력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해준은 이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긴 손가락 끝으로 톡 하고 입술을 닫아 주었다. 민망했다.

“왜, 말하고 싶어졌어?”

나긋하게 묻는 해준의 입술을 바라보던 이소는 느리게 눈동자를 굴렸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지. 제가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 아니 그 전에 은형의 일부터? 혹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범양과의 기 싸움? 주영과의 관계?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역시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해결이 된 게 아니라서 좀 복잡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일까?”

이소는 난처하게 미소 짓고 고개를 저었다.

“제 문제니까요.”

해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몸을 돌려 함께 걸었다. 해준이 기다려 주고 있을 때 말을 꺼내야 하는데, 제가 과거사를 들추자마자 이 포근한 행복이 바닥으로 추락해 버릴까 불안했다. 스물일곱 먹고서도 여전히 관계를 만드는 데 유연하지 못했고 곤란한 상황이 오면 일관성 있게 대처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불같이 화를 냈고 어떤 때는 바보처럼 멍하게 서 있다 돌아오곤 했다. 스물일곱 윤이소는 여전히 서툴고 모자라다.

“어떤 선택을 하건….”

이소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자 해준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박사박 정원을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밤을 채웠다.

“항상 이소 씨 스스로를 일 순위에 둬요.”

해준의 단호한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이 이소의 얼굴을 응시했다. 해준은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건 사실 모두에게 득이 되는 선택을 하려고 애를 쓰느라 그런 거죠. 하지만 결국엔 어느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니까. 그리고 이소 씨는 주변인들을 챙기느라 습관적으로 제 몫을 미뤄 두는 사람이고.”

해준이 곁에서 들여다 본 윤이소는 그랬다. 제 안위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느라 제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들을 속없이 빼앗기고도 쉽게 체념했고 타협했다. 결국 그 여린 속이 곪아 터지면 길거리에서도 픽픽 잠이 들었다. 지금도 해준 앞에서 제 마음을 편히 꺼내 놓지 못하고 숨기려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거. 다른 사람을 위한답시고 한 선택은 언젠가 그 사람이 등을 돌리고나면 내 자신을 찌르기 마련이거든. 결국 후회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하지.”

정말로 원하는 것. 이소는 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그게 설령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를 다치게 두어선 안 돼.”

해준은 커다란 손을 들어 이소의 머리를 썩썩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나풀거렸다. 잘했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괜찮아요. 신기했다. 아직 제 이야기는 끈도 제대로 풀지 않은 채 주머니 안에 그대로 있는데도 꼭 해준은 이소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들여다보고 말하는 듯 복잡한 머릿속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해준은 이소의 이마를 톡톡 치며 덧붙였다.

“그리고 결국 이소 씨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여겨지면, 언제라도 편하게 내게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기. 해결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듣는 내가 결정하고 판단할 문제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진 말고. 난 윤이소 씨 편이니까. 응? 이해했어요?”

말미가 주어졌다.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라도 편하게, 이소 씨 편이니까.

내 편. 이소는 해준의 말을 몇 번 더 제 목소리로 읊조리다 볼을 붉혔다. 수줍어서라기보다는 그저 기분이 좋아서였다. 꼬인 실타래의 끝을 해준이 잡고 살살 푸는 법을 알려 줬다. 이제 저는 얽힌 실을 잡고 풀어내다 가끔씩 너무 힘들고 지칠 때 해준에게 응석 정도는 부려도 되는 거였다. 그것만으로 엄청난 위안이 됐다.

“그건 그렇고.”

해준이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이소의 허리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이소의 고개가 젖혀지자 해준은 응석을 부리듯 연인의 뺨에 볼을 비볐다. 숲과 이끼에 덮인 사찰의 냄새가 해준의 품에서 퍼졌다. 오래된 고목의 무거운 느낌을 주면서도 백단향의 청량한 향도 함께 났다. 무엇이 되었던 정말 코를 박고 맡고 싶은 향이다. 이소는 해준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해준이 속삭였다.

“우리 언제쯤 결혼하지.”

분위기 좋았는데, 이소가 고개를 들고 지겹다는 듯 눈을 홉떴다.

“또 그 소리시냐구요.”

“같이 살기라도.”

“지금 사는 집이 당장 내일모레 무너지면 몰라도, 한동안은 그럴 일 없을 것 같네요.”

“집이 무너지면 같이 사는 거예요?”

해준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이소는 제 어깨를 끌어안은 해준을 밀어내려 몸을 비틀었다.

“도대체 이야기가 왜 거기로 튀…, 아, 놔요 좀! 옆구리 더듬지 말라고! 이거 봐, 이렇게 자꾸 야한 짓 하니까 제가 절대로 같이 안 살려고, 앗….”

“일주일에 다섯 번만 할게, 주말에는 쉴게. 응? 이소야, 나랑 같이 살아.”

해준은 이소의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추며 간질였다. 정원 한가운데 서서 해준에게 잡힌 채 한참을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며 실랑이를 했다. 진심 반, 농담 반인 듯 해준은 계속 같이 살자고 말했다. 이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해 볼게요, 나중에요.’ 하며 말을 돌렸다.

언젠가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는 제가 꼭 먼저 같이 살자고 해야지, 생각하며 저를 안고 키스하는 해준에게 웃으며 화답했다. 해준은 이소를 안고 걸으며 짓궂게 속삭였다. 그 집 무너뜨릴까 봐, 그래야 내 이소가 내일이라도 짐 싸 가지고 오지.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이소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눈앞의 일부터 차근차근 해결하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멀어지는 정원을 바라보며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폭 얼굴을 묻었다.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며칠 동안의 폭우 이후 이소의 집 천장이 폭삭 무너졌다. 이소는 해준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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