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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한 찌는 더위였다. 여름의 한가운데, 해가 머리 위에 뜨면 어김없이 30도를 넘는 온도에 혀가 말렸고 때 없이 쏟아지는 비에 바깥에 널어 놓았던 고추들을 걷어 가는 할멈들이 야단이었다. 이소는 부채를 부치며 무력하게 가게 앞에 나와 있었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 유난히 더위를 타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그래도 타이밍이 좋았지.’
주영을 마주치고 난 일 이후로 2주째, 다행히도 학교에 자주 갈 일은 생기지 않았다. 도시락집을 정리한다고 말한 후 학과 주문은 알뜰하게 모은 스티커를 모조리 사용한 후 거짓말처럼 끊겼다. 가끔씩 걸어서 찾아오는 학생들 말고는 배달 주문은 눈에 띄게 적어졌다.
해준 역시 가을학기가 끝나는 대로 교수 일을 정리한다고 말했다. 이소에게는 퍽 뜬금없는 소식처럼 들렸지만 해준은 재단 이사직도 그렇고 생각보다 교수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겸사겸사 쉬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물여덟 살에 처음 교수가 되고 난 후부터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고 했다.
지금의 자기 나이보다 한 살 더 먹었을 뿐인 당시의 해준은 무려 교수였다니. 새삼 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실감이 났다. 심지어 지금은 재단 전무 자리도 갖고 있었다. 어쩐지 교수 일만으로 이 큰 집을 운영하는 것이 의아스럽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럼 일 년 정도 푹 쉬시는 거예요?’
‘일단 대략적인 일정은 일 년이긴 한데, 글쎄요. 재단 일이 바쁘면 더 오래 회사로 나가야 할 수도 있고. 4년을 미뤘더니 슬슬 이사진들도 인내심이 바닥나나 봐요.’
‘그렇구나….’
저는 그저 하는 일이 많아 놀라워 고개를 끄덕였던 것뿐인데 해준은 이소의 표정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둘러 안았다.
‘내가 일 안 하고 이소 씨랑만 놀았으면 좋겠죠.’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생각보다 뭔가 많이 하셔서 대단하시다고 생각했어요.’
‘소띠라서 그런가. 일이 끊기질 않네.’
‘어? 소띠세요?’
‘아니, 토끼띠. 깡총.’
실없는 농담을 하며 주말을 보내고 이소는 정숙과 해수와 함께 소박한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말하자마자 해준은 주 기사를 통해 꽤나 좋은 옷을 골라 보냈다. 덕분에 해수는 난생처음 프릴이 잔뜩 달린 원피스를 입었고 저 역시도 빳빳한 새 셔츠를 걸친 채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스티커 사진 말고 정식으로 사진관에 와 본 것은 꽤 오랜만이라 이소와 정숙은 무척 긴장했지만 사진사가 워낙 베테랑이라 몇 번 웃다 보니 촬영은 금방 끝이 났다.
해수를 안은 채 정숙이 의자에 앉았고 그 뒤에 멀끔한 모습으로 선 이소까지. 세 사람이 함께 선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숙은 결국 공항에 가는 택시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해수 역시 눈물을 훔치는 정숙을 보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였다.
2년 하고 6개월,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정말 힘들었을 시절에 제 옆을 든든하게 지켜 준 정숙이 제 진짜 가족에게 돌아가는 특별한 날이었다. 정숙은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이소의 손을 붙잡고 놓지 못했다. 이소 역시 그 애틋한 마음을 알기에 주름진 손을 제 손으로 포갠 채 토닥였다. 다 좋아질 거다, 어린 해수를 안고 정숙의 집에 처음 들어왔던 저를 도닥이던 인자한 미소를 떠올렸다. 다행이다, 정말로 정숙이 잘돼서 다행이었다.
* * *
“이소 씨, 이거 받아.”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 출국장으로 떠나기 전 정숙은 이소에게 낡은 수첩을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수첩에는 이미 도장이 찍힌 가게 양도 관련 서류와 귀퉁이가 해진 낡은 통장이 끼어 있었다. 통장 안에 들어 있는 돈은 가게를 빼고 난 다음 새로 들어온 권리금까지 해서 이천오백만 원이 조금 웃도는 금액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금액이 왔다 갔다 했는지 입출금 기록이 지저분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가장 왼쪽에 찍힌 날짜들을 문지르며 이소는 정숙의 시간을 되짚었다. 2년 전 기록 중에는 [이소 씨 월급]이라고 찍힌 기록도 있었다. 몇 번 못 받고 결국 해수를 돌보아 주느라 이소가 월급을 받지 않았던 이후부터 제 이름은 그 통장에서 사라졌다.
먹색 잉크로 꾹꾹 눌러 찍힌 날짜들은 허투루 보낸 적 없는 고된 하루하루의 기록이었다.
마지막 줄에는 저금액 전부를 이소의 계좌로 보낸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소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숙을 바라보자 ‘혹여나 문제 생기면 내가 보냈다는 기록 제출용으로 써도 되고….’ 하며 덧붙였다. 이소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사장님, 저 이 돈 못 받아요. 이렇게 큰돈을 어떻게 받아요.”
“그냥 받아. 애 키우다 보면 큰돈 들어갈 때가 분명 생겨. 해수 내년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야 하고 대학도 보내야 하는데 기반이 있어야지. 마음 같아서는 꽉꽉 채워서 주고 싶은데 그렇게 못 해 준 게 너무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이건 사장님이 가지고 계셔야죠.”
이소가 손사래를 쳤지만 정숙은 기어코 이소의 가방 안에 통장을 쑤셔 넣었다. 이 소중한 물건을 제가 뭐라고 감히 받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몇 번이나 통장이 왔다 갔다 하며 자리를 못 잡았다. 어린 해수 눈에는 그것이 꼭 아빠와 할머니가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 급기야 정숙은 이소의 팔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고 가장 깊숙한 곳에 제 보물을 처박은 후 지퍼까지 잠가 버렸다. 막무가내였다.
“아유, 그냥 받어 좀. 그냥 지난 2년간 이소 씨랑 지낸 일기같이 느껴져서 주고 싶었어. 나는 이제 아들하고 살 거니까 돈도 필요없고. 이 년간 제대로 월급도 못 주는 늙은이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어. 이거 받고 더 잘 돼서 나중에 나 보러 미국 올 때 비행기 삯 해.”
정숙의 말에 이소는 쥐고 있던 가방을 살며시 놓았다. 여태 잘 참았는데 정숙이 툭 던진 말이 제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만들었다.
“저희 또 볼 수 있어요?”
“말이라고 해. 나 안 보려고 했어?”
“가시면…, 너무 머니까 못 보는 줄 알았어요.”
“나이는 스물일곱밖에 안 먹어 놓고 왜 이리 꽉 막혔어. 도착하면 전화도 하고, 매주 영상 통화도 하고 편지도 하고, 선물도 보내고, 그러다가 보고 싶으면 내가 아들한테 말해서 훌쩍 날아오면 되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말어. 가만, 이소 씨가 나 안 보고 싶은거 아니고?”
정숙의 말에 이소는 당황해 눈물이 나오려던 것을 얼른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쉬워서 그랬어요. 저는 사실 사장님 가는 거 너무…, 좋으면서도 싫기도 하고 그래요. 오래오래 저희랑 살 줄 알았거든요.”
“나도 그럴 줄 알았어.”
정숙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숙은 이소의 뺨을 매만졌다. 스물일곱답지 않게 뽀얀 뺨은 여전히 앳된 티가 났다. 이런 가엾은 녀석을 두고 저만 혼자 가족을 만난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부디 그 늑대 같은 차해준이 도중에 마음이 변하지 말고 천년만년 데리고 살아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 잘 될 거야, 이소 씨. 알지.”
“네, 그럼요. 다 잘 될 거예요.”
정숙을 마지막으로 보내기까지 세 사람은 몇 번이나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달랑 트렁크 한 개를 들고 돌아서는 모습은 낯설었다. 이소는 제 손을 잡고 죽어 가는 정숙을 상상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이렇게 공항에서 근사한 모습으로 떠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은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해수의 손을 잡고 공항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있을 때 즈음 주 기사에게 전화가 왔다.
돌아가는 길은 모시러 오겠다는 말에 해수가 반색을 했다. 택시 안이 영 좁아서 잠들기 어려웠는데 제 카시트가 있는 차가 온다니 마음이 들뜬 듯했다. 기왕 돌아가는 거 해수는 해준에 집에 기거하는 세한, 세현 형제에게 전화를 했고 자기들끼리 멋대로 놀 약속까지 정했다. 방금 전까지 정숙을 보내고 눈물을 훔쳤던 모습은 간 데 없고 금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이소는 해수가 전에 비해 썩 아이다워진 모습이 새로워 혼자 조용히 웃음 지었다.
* * *
“아빠, 그러면 나는 기사님 차 타고 갈 테니까 아빠는 아저씨랑 같이 와. 밥 먹고 올 거지?”
해수가 차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이소는 웃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미묘하게 해수가 해준을 챙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뭐랄까, 저와 해준을 일부러 붙여 놓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는 것 같은 느낌.
“아저씨 말고 해수 따라가면 안 돼?”
물론 농담이다. 주 기사님이 안전하게 해수를 저택으로 데려갈 것을 알고 있었고 해수 역시 공항 서점에서 잔뜩 산 책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들고 들떠 있었다. 이소의 말에 해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왜긴, 아빠도 해수랑 있고 싶으니까 그렇지.”
“나는 저녁에 또 보면 되지. 아저씨랑 밥 먹고 들어와.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해.”
“너 세현이랑 놀고 싶어서 그러지.”
“응, 저번에 스도쿠 같이했는데 그거 또 하려고 책 두 권 샀어. 세한 오빠도 잘 놀아 줘서 좋아. 그리고 아까 공항에서 산 과자도 가서 친구들하고 나눠 먹을 거야.”
해수는 선물을 부스럭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결국 이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물러섰다. 언젠가 해준이 말했듯 이제는 아빠와 놀기보다는 친구들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은 해수였다. 언제 이리 훌쩍 커 버렸나 아쉬웠지만 제법 기특하기도 했다. 해수를 보내고 이소는 택시에 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이 남았기에 이소는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오래된 기록을 뒤졌다.
“기사님, 여기 적힌 주소로 가 주세요.”
택시가 출발하고 등을 기댄 이소는 가방을 뒤졌다. 정숙이 준 통장을 넘겨 보던 이소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동안 모은 금액과 정숙이 준 돈을 합치면 고 대표가 언제 찾아오더라도 거의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은 고 대표였고, 저는 그사이 열심히 모은 돈을 안겨 주기만 하면 이제 더는 엮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소는 다시 낱장을 넘겨 제일 앞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이소에게 가게를 넘기기 전 본래 꼼꼼하고 악착같았던 정숙의 성격은 통장에 찍힌 여섯 글자에서도 드러나곤 했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해수생일선물]
[해수어린이날]
[미용실고스톱]
[해수병원비]
[이소병원비용]
[내무릎치료]
[해수얼집보충]
짧은 시간 참 많이도 병원에 갔고, 참 많이도 선물을 주고받았다. 정숙은 해수와 이소에게 준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지난 시간 동안 누구보다 많이 주고 베풀었다. 옥상이 떠내려가라 웃었던 정숙의 웃음소리를 떠올리자 이소는 눈이 조금 시큰해졌다.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여기서 하던 고된 일은 내려놓고 가족들과 따뜻하고 안온한 일상을 보내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 * *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택시가 멈춘 곳은 고즈넉한 곳에 위치한 미술관이었다. 규모가 꽤 컸지만 시가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고 평일이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은 적었다. 잔디가 깔려 있는 바닥, 전면 유리로 된 커다란 창이 있는 미술관은 개관한 지 꽤 된 곳이었다. 무려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거미줄이나 곰팡이 하나 없이 운영되고 있는 곳은 이 공간을 가진 사람의 집요한 애착이 드러났다.
미술을 보는 눈 따위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서서 보고 있으면 일렁이던 마음이 금세 편안해지고는 했다. 차분한 피아노 음악, 고요한 바닥을 또각또각 스치고 지나가는 구두 소리, 거대한 공간에서 울리는 소곤거림, 심지어는 폐를 끼칠까 얼른 갈무리되는 기침 소리마저도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무심코 지나치다가도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으면 하염없이 서서 혹은 쪼그려 앉아서 지켜보곤 했다.
이소는 빈 공간에 놓인 커다란 조형물을 꽤 오랫동안 집중해서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작품에서 오는 느낌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
노을이 질 무렵 붉은 해는 길게 뻗어 이소의 발끝에 닿았다. 통으로 되어 있는 유리창은 해와 그림자가 만들어 낸 장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 됐다. 이소는 유독 시선을 끄는 작품 앞에 서서 5분째 캔버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물감을 으깨어 뭉갠 듯한 거친 붓질과 무심하게 섞인 색은 대비가 강했지만 조화로웠다. 지는 해가 그림에 가닿자 샛노란색은 주홍이 되었고 푸른색은 보랏빛으로 변했다. 또 새삼 다른 작품이 되었다. 이소는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득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려 목소리를 죽여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 주 기사님 말로는 해수만 집으로 왔다는데, 이소 씨는 어디예요?
“미술관이요.”
- 미술관?
“그림 보고 싶어져서 왔어요. 여기로 오실래요? 주소 보내드릴게요.”
- 이름만 알려 주면 돼요. 나는 곧 끝나니까 데리러 갈게요. 기다릴 수 있어요? 배고프진 않고?
“교수님이랑 같이 먹을게요.”
- 그럼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요. 금방 가요. 곧 봐요, 달링.
“달…,”
해준은 바쁜지 제 할 말을 하고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내 병아리, 자기, 여보, 달링. 자신을 부르는 온갖 호칭들에 낯간지러워 옆구리가 간질간질했지만 해준의 입술 끝에서 톡 튀어 오르는 말은 모두 기꺼웠다.
그건 그렇고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캔버스에 바짝 다가가 손을 대고 더듬어 볼 뻔했다는 사실에 당황해 얼른 손을 거뒀다. 거친 붓질로 뭉개 놓은 물감이 퍽 입체적이라 꼭 만지면 손끝에서 노랑, 빨강이라는 색이 생생한 촉감으로 치환되어 만져질 것만 같다.
이런 그림을 사서 걸어 두는 사람들이 있겠지? 몇백만 원, 어쩌면 몇천만 원이나 하겠지. 뭐가 되었건 자신의 집에는 어울리지 않을 대단한 작품이었다. 오래 보고 싶다.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눈에 그림을 담던 그때였다.
돌연 무엇인가 작고 묵직한 것이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긴장을 푼 채 서 있던 이소의 몸에 부딪혔다. 자신의 등을 부딪치다시피 껴안은 것이 몹시 작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인지할 겨를도 없이 이소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고개가 넘어가기 전 무엇인가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팔을 뻗은 곳이 하필이면 제가 방금까지 보던 작품의 귀퉁이였다.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리케이드 안쪽으로 나동그라졌다.
“종훈아! 어머, 어떡해! 저걸 어떡하면 좋아!”
적막을 날카롭게 찢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놀란 담당 큐레이터와 직원들, 관람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이의 엄마는 저 멀리 서 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빠르게 달려왔다.
“아오, 너 그러니까 엄마가 근처에서 놀라고 했잖아! 틈만 나면 사고치고!”
아이 엄마는 아이의 안위보다는 아이가 일으킨 사고로 물어 주어야 할 금액이 걱정되는지 막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다그치기 시작했다. 이소가 온몸으로 받아낸 덕에 아이는 생채기 정도에 그쳤지만 곧 제 엄마에게 끌려가 엉덩이를 후드려 맞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소의 뒷모습을 보고 아빠인 줄 알고 달려들었다고 흐느꼈다. 정작 아이 아빠는 화장실에 다녀왔는지 뒤늦게 나타났다. 아이 아빠의 등장으로 조용했던 공간은 귀가 울릴 정도로 소란스럽게 변했다.
“못살아, 정말! 내가 이러니까 이런데 애들 데려오면 힘들다고 했잖아!”
“당신이 애를 더 잘 봤어야지! 어디에 정신 팔고 있었길래 얘가 이런 큰 사고 칠 때까지 모르고 있었어?”
“아니, 그럼 이게 내 잘못이야? 애가 사방팔방 쑤시고 다닐 거 알면서도 작품 보는 눈 길러야 된다고 여기 데려온 게 누군데? 아니 저걸 어떡해, 저거 얼마 짜린지도 모르겠어. 어떡해 정말!”
부부가 소리를 지를 때까지도 여전히 이소는 캔버스 옆에 앉아 있었다. 넘어지면서 옆구리와 무릎을 세게 찧었고 손바닥은 딱딱하게 굳은 유화 물감에 거칠게 찢겼다. 그러나 이소 역시 놀라고 다친 것은 둘째치고 물감이 박힌 제 손톱을 내려다보며 돈 걱정부터 했다.
‘만져 보고 싶긴 했는데 이따위 방식으로 만지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망했다.’
다른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캔버스를 들어 올렸다. 정말 저도 모르게 잡아 뜯었는지 캔버스의 한쪽 귀퉁이에 그려진 물감에 제 손톱자국이 깊게 나 있었고 바닥에 찍히며 엄지손가락만 한 구멍까지 나 있었다. 누가 봐도 엄청난 손해배상 감이다. 허탈감과 함께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부부는 여태 소리를 지르고 싸웠고 아이는 큰 소리로 울었으며 담당 큐레이터가 작품 손상 시 배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정신이 없었다. 이소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저…, 아이는 안 다쳤나요?”
소란을 가르는 이소의 천진한 물음에 부부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이소를 마주했다. 앳된 얼굴에 단정한 슈트 차림을 하고 있지만 맹해 보이는 남자. 학생 같아 보이는데 똑 부러질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아이의 아빠는 이소를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얼른 손을 건넸다.
“정말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저희 아이가 조금 산만해서 그만….”
“아닙니다. 아이니까 그럴 수 있죠.”
이소는 양손을 들어 부부를 안심시켰다. 저도 아이를 기르고 있으니 이런 실수는 백번 천번 이해할 수 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난감할까, 이소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부부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큰 손해를 끼쳤습니다, 배상을 진행하시다가 혹시라도 도움 드릴 일이 있으면 꼭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많이 다치신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후유증이 생기신다면 그 부분만은 저희가 꼭 치료비를 대도록 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큰 소리로 사과를 하는 부부의 말에서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때쯤 수석 큐레이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큼 다가왔다.
그럼 여기 연락처를 받으시고, 저희는 이만…. 아이의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동시에 사고의 현장에서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부부를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소와 큐레이터 역시 당황했다.
“저, 선생님. 지금 어디 가십니까? 손해배상은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선생님께도 물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자제분께서 이분을 밀치셨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지금 바로 저희와 함께 담당 부서로 이동하셔서…,”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희가 배상이요? 왜요?”
이소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저 잠시 시끄러운 속을 가라앉히려 이곳에 온 것뿐이었는데 오히려 더 큰 소란에 휘말렸다. 심지어 부부는 저에게 사고의 책임을 온전히 덮어씌우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었다. 심히 추했다.
“아니, 성인 남자가 돼서 여섯 살짜리 아이 하나 달려들었다고 쓰러지는 게 말이 돼요?”
“무방비한 상태에서 아이가 달려들면 누구라도 넘어지는….”
“넘어지면서 중심을 잘 잡든가, 왜 엄한 그림 잡고 넘어지면서 우리보고 물어내라고 합니까? 그리고 무슨…, 이런 거 다 보험회사에서 해 주는 거 알아요! 지금 이깟 그림 하나 망가졌다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고 지금 우리 애 기를 죽이시는 거예요?”
“저희가 언제 면박을…,”
“지금 수군거리면서 쪽팔리게 하고 있잖아! 애 트라우마 생기겠어요!”
콩 심은 데 콩 난다, 어쩐지 그런 속담을 생각하며 이소는 한숨을 쉬었다. 오히려 정말로 책임을 나누게 되었을 때 저 부부가 얼마나 제 아이를 쥐잡듯 잡을까 생각하니 도리어 자신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게요. 우리 애 기 죽으면 어쩌지.”
이소는 이 미술관을 좋아했다. 차가운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 커다란 공간을 채우는 고요와 적막, 그리고 눈부시다 못해 흘러넘치는 햇살. 그 공간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사로잡았다. 군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에 머물렀다. 큐레이터와 담당 직원들이 모두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소란스럽네.”
“죄송합니다. 대표님.”
또다. 뜻밖의 장소, 생각지도 못한 시간,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의 가운데에 주영을 또 마주쳤다. 대표님이라니, 이 미술관이 범양, 그러니까 주영의 것이었던가. 당황한 이소를 한 번 힐끗 본 주영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놀라셨죠. 귀한 시간을 망친 점,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깍듯하고 부드러운 태도였다. 이소가 주춤하며 고개를 숙이자 주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한참을 감상하듯 내려다보았다. 학교에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우아한 위압감, 보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주영의 주위를 감돌았다. 주영은 다시 부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게 보여 주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아이와 부부를 훑어본 주영은 나긋하게 속삭였다.
“우선 댁의 귀한 자제분께서 손상시킨 ‘이깟 그림’의 가격이 얼마인지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듣고 나면 기가 죽는 건 애가 아니려나. 낮게 읊조린 주영의 말소리에 아이 부모뿐만 아니라 이소마저도 마른침을 삼켰다. 주영의 하늘거리는 속눈썹이 반달을 그리며 살포시 접혔다. 지금의 주영의 모습은 제가 아는 그 옛날 주영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이소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주영의 입 밖에서 나온 작품의 가격은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비쌌다. 또한 부부에게 과실 100% 책임을 묻겠다는 주영의 발언 이후 부부는 도대체 이러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난리 법석을 피웠다. 후방 추돌 교통사고가 나도 앞차가 후방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10% 이상의 쌍방 과실로 판결이 나는 세상이다. 달려온 아이는 그저 부딪히기만 했을 뿐 결국 과실은 작품을 직접적으로 손상한 이소에게 있다는 것, 또한 미술관에서 이러한 사고가 종종 발생할 텐데 이때마다 관람객이 전부 배상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소 역시 제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영은 무슨 생각인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서 부부의 이야기를 듣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기관에서는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통로로 사용하는 공간을 피하고, 작품을 고정하고, 작품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고 만지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등 노력을 기울입니다. 또한 각 공간마다 담당 직원이 두 명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공간 곳곳에 과하다 싶을 만큼 단단하게 채워진 펜스와 곳곳에 붙어 있는 안내 문구는 기관이 꽤나 작품을 신경 쓰고 관리에 충실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주영은 무감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겨 CCTV를 가리켰다.
“손님들께서는 입장하시고 고작 30분 동안 우리 직원의 주의를 일곱 번 넘게 들었습니다. 네 살짜리도 지킬 수 있는 간단하고 기본적인 규칙입니다. 뛰지 않아야 하고,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되며, 작품을 만지거나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죠. 특히 미성년자를 동반한 관람객은 인솔자의 감독 의무를 다하여야 하며, 그 관리를 태만히 하였을 시 기관은 과실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사실관계만 정확히 하자고요. 저희 애가 직. 접. 적. 으. 로 사고를 일으킨 게 아니잖아요. 그림을 찢은 건 저 사람이잖아요!”
언성이 높아지며 아이 엄마가 이소에게 성큼 다가서자 주영은 살며시 걸어 나와 그 앞을 막아섰다. 마치 발레 동작을 하듯 우아하고 품위 있는 걸음걸이였다.
“두 분은 자제분이 천지 분간 못 하고 사방팔방 소리 지르며 뛰어다닐 때 어머님은 카페에서 20분 내내 통화를, 아버님은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화장실에서 담배까지 태우셨죠.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을 넘어뜨려서 타박상까지 입혀 놓고 사과는커녕 배상 책임까지 몽땅 뒤집어씌우시려는 것은 선처의 여지까지 말소시켜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보상금 이야기를 하셨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우기기만 하신다면 아마 과실 책임 비율을 나누자고 한들 꽤 많은 액수의 구상금 지급 청구는 피하실 수 없을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작품 가격이 꽤 세서. 주영은 덧붙이며 미소 지었다.
주영은 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명함을 한 장 꺼내 들어 이소에게 건넸다. 부부를 앞에 두고도 자신에게만 연락처를 건네자 이소는 의아한 얼굴로 주영을 바라보았다. 제 연락처입니다. 넣어 두세요, 이후 문제가 생길 시 저희 측 변호팀에서 보호해 드릴 겁니다. 덧붙인 말에 부부의 얼굴이 똥씹은 듯 구겨졌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이 많아 차마 더 말을 얹지 못했다.
주영은 수석 직원에게 부부를 관리책임부서로 데려가기를 지시했고 부부는 끌려가다시피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부부가 자리를 떠나고 난 후 직원들이 소란을 정리하는 동안 이소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영은 분명 저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짜 주었다.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서는 주영을 쫓아갔다.
“저기, 저….”
주영의 주변에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소는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분명 주영은 사람들 앞에서 이소를 모르는 체했으니 편하게 부를 수가 없었다. 또한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 감이 안 왔다.
“무슨 일이시죠?”
“그러니까…. 그게…. 저 관장, 아니 대표…님.”
도대체 직함이 뭐지, 이소가 머뭇대며 쫓아오자 고개를 돌린 비서가 먼저 자리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주영과 비서를 번갈아 보며 한참을 망설이던 이소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아직 비서가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존대를 쓸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뭐가요?”
“저, 그… 제 편을 들어주셔서….”
이소의 인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주영이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싱그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주영의 청량한 웃음소리였다.
“그 부부가 괘씸하긴 했지만 딱히 편을 든 건 아니었는데. 참,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사람에게 무르시네요.”
주영은 한참을 웃다가 비서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요청한 후 이소와 단둘이 남았다. 저를 보며 옅은 미소를 띤 주영을 잠시 살핀 이소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아직 해준이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그럼 누구 부탁인데.”
이소의 물음에 주영은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영과 이소는 1층 테라스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주영을 본 카페 직원들은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소는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후 얼른 입술 끝에 빨대를 물었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갈증이 심했다. 각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을 채웠다.
주영은 이소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려는 듯 가만히 다리를 꼰 채 의자 뒤로 기댔다. 교차로 얽힌 길고 가는 손가락이 톡톡 마디를 건드리며 초침처럼 정박으로 움직였다. 이곳이 주영이 관리하는 곳인 줄 미리 알았다면 당연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제 마음에 꼭 든 곳이었지만 미술관은 많으니까.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결국 카페에 앉은 지 10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눈치만 살피고 있자 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분명 감사 인사와 함께 몇 가지를 더 물어보려던 것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너무 본격적인 자리가 되어 버린 탓에 이소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이소는 제가 있던 전시실에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다 주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림, 그 사람들이 정말로 전부 변상해야 해?”
“그럴 생각이었는데. 왜, 네가 내주게?”
“아, 아니…. 난…… 아이가 걱정돼서.”
“아이?”
“아마 그 부모가 엄청 잡을 것 같거든. 아이 탓할 거 같고.”
넘어진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괜찮냐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 채 부모에게 엉덩이를 맞던 아이였다. 제가 저지른 사고로 아이가 모든 책임을 떠안고 죄인처럼 자라지 않기를 바랐다. 그 가족이 안면몰수한 진상인 것은 차치하고 즐거운 주말 나들이에 몇십 억이나 하는 빚더미를 떠안은 채 귀가하게 된다면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가겠는가.
“진짜 착하네.”
주영은 눈을 접어 웃었다.
“걱정 마, 이번 사고에 관한 비용은 모두 보험으로 처리할 거야. 이런 일은 생각보다 흔하거든. 아까는 그냥 겁만 좀 주려고 한 거였어. 대신 뒤집어씌우려고 한 게 영 괘씸해서 부모에게 자원봉사는 무조건 시킬 거야.”
‘그것도 하루에 그치진 않겠지만.’ 하며 가볍게 덧붙였다. 그나마 자원봉사로 때울 수 있다면 잘된 일이다. 이소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주영은 숨을 몰아쉬는 이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손은 어때, 아까 보니까 다친 것 같던데.”
“괜찮아. 별거 아냐.”
“어디 봐 봐.”
주영은 이소의 손을 잡아 뒤집었다. 생각보다 많이 까졌는지 봉곳하게 피가 올라온 상처는 붉게 부어올랐다. 손톱 사이사이에 낀 딱딱한 물감은 긁어 빼 버렸지만 들려 버린 손톱 밑 살갗이 몹시 쓰라렸다. 주영은 상처를 몇 번 더 매만지며 걱정스레 내려다보다 아차 하며 손을 놓았다. 저번 만남 때 이소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자리를 뜬 것이 기억난 모양이었다. 뒤늦게 무안함이 밀려오는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사과했다.
“미안, 나도 모르게.”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많이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다. 혹시 모르니까 집에 가는 길에 꼭 병원 들러서 소독하고 가. 넌 다른 사람보다 살갗이 약해서 찢어지면 오래가고 그랬잖아.”
주영은 어릴 적부터 자주 넘어지고 다치던 이소의 상처를 직접 치료해 주곤 했다. 무릎에 피멍과 딱지를 주렁주렁 달고 들어가도 윤치승 내외는 본 척 만 척했고 가솔들은 눈치를 보다 연고나 한 번 발라 주곤 끝이었다. 그때 즈음 중학교를 다니던 주영의 가방에 항상 들어 있던 연고와 밴드는 대부분 어린 이소에게 쓰이곤 했다.
이소는 제 손톱 밑의 상처를 내려다보다 뒤늦게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림은 어떻게 되는 거야? 작가한테 배상해야 하지?”
“아니, 유작이라 그냥 처분행이야. 이미 크게 손상이 가서 경매에 내놓거나 반환할 수도 없어.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일반인들이 속속들이 알기에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작가 가족분이 기증하고 돌아가셔서 일단 우리 미술관에서 관리하고 있던 거거든.”
아, 좋은 그림 같았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이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결이 고운 속눈썹이 비에 젖은 나비 날개마냥 축 내려앉는 것을 본 주영이 보다 가벼운 화제를 꺼내어 들었다.
“꽤 오래 보고 있던데.”
목적어가 없는 문장에 이해를 못 한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주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 들어올 때 우연히 봤는데 그냥 혼자 쉬고 있는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 걸었어. 그 그림 앞에서만 한참을 서 있더라. 주영이 차근차근 덧붙인 말에 이소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나중에 오면 못 보니까 볼 수 있을 때 오래 보려고.”
“왜 나중에 못 와?”
너 같으면 오겠니. 이소는 눈을 도록 굴리며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여길 범양에서 운영하는지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
“아.”
주영은 낮게 탄식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이소의 태도에 입술을 몇 번 비죽이던 주영이 고개를 기울여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갖고 싶어?”
“응?”
“갖고 싶으면 너 주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저게 얼마 짜린데….”
아까 옆에서 대충 들은 바로는 20억이 훌쩍 넘어가는 고가품이었는데 마치 구멍가게 건빵 한 봉지를 넘기듯 가볍게 말하는 주영의 제안에 이소는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시선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제집에는 당장 걸어 둘 곳도 없었고 그 곰팡이 핀 벽에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색하는 이소를 보며 주영은 농담 아닌데, 하며 조용히 웃었다.
긴 한숨, 이소의 거절 이후 다시 한번 적막이 찾아왔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고 앉았지만 이소와 주영은 한참을 시선을 피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이미 한 번 와르르 쏟아 낸 감정의 찌꺼기가 발목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주영은 이소를 나른하게 바라보다 슬쩍 웃고는 반절이나 남은 컵을 내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저번에 학교에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자꾸 널 마주치네.”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이소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난 주영을 따라 올라갔다. 주영은 애써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빛을 등진 얼굴에는 어쩐지 쓸쓸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미련이 남아 보이기도 했다.
“소란이 있었지만 아직 폐관까진 시간이 좀 남았어. 마저 잘 보고, 조심히 들어가.”
“…형은, 왜 아무렇지도 않아?”
목소리가 떨린 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제집 앞에 찾아온 주영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이소는 한동안 몇 번씩 착잡하고 허탈한 기분을 마주하곤 했다. 유년 시절 누구보다 잘 지내고 애틋하게 지내던 둘이었는데, 7년 전 그 밤 이후로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이소 자신이 그동안의 주영의 사정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제가 주영에게 지난 시간의 고됨을 쉽게 털어놓기 어렵듯 주영 역시 제 비밀을 온전히 꺼내어 놓지 않았다.
어렵게 꺼낸 말의 무게감을 실감하기에 주영은 조급해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컵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지만 이소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난 아직도 형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밉고 화나면서도 동시에 묻고 싶은 게 산더미라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마냥 미뤄 둘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아. 그래서 계속 마음에 걸려. …어려워.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날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고 울부짖는 것과는 별개로 차분하게 묻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다만 실제로 주영을 마주한 순간에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그러나 주영은 오래전과 같이 여유롭게 차분하게 이소를 대했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여상한 태도였고 이소에게는 어떠한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듯 굴었다.
때문에 그런 생각이 슬그마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저에게만큼은 상냥했던 주영이었기에 어쩌면 물으면 묻는 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까. 그 대답이 설령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억울한 마음은 좀 가시지 않을까. 뒤죽박죽 섞이는 상념 사이로 주영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한 주영은 웃는 듯 보였지만 전체적인 낯은 침울하게 뒤틀려 있었다.
“지금도 헛소리나 잔뜩 늘어놓고 도망가려고 그랬는데.”
“…….”
주영은 입술을 달싹이며 쓰게 웃었다.
“미안, 아직도 널 다시 만난 게 실감이 안 나서 그래.”
진득하게 마주친 두 쌍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검고 깊은 눈동자는 이소가 알지 못하는 지난 시간을 담고 있는 듯 어둡고 무거웠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주영이 난처한 기색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이소는 미간을 깊이 찡그린 채 무슨 말이냐며 따지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무심코 떨군 시선 끝에 세게 쥐다 못해 하얗게 질려 버린 주영의 손을 본 이소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형, 손에서 피가….”
이소는 다급히 손을 들어 주영의 손을 잡아챘다. 손톱으로 손마디를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발갛게 배어난 피는 이소의 손에도 묻어났다. 변하지 않았구나. 제 손을 못살게 구는 것은 어릴 때부터 억울함을 참을 때마다 나타나는 주영의 버릇이었다. 차라리 나처럼 엉엉 울어 버리지, 어렸던 이소는 저보다 고작 네 살밖에 많지 않은 주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매번 그렇게 손톱을 세워 살갗을 괴롭히고 나면 가라앉은 기분으로 침대에 눕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소는 밤새 주영의 손을 잡고 형 손이 얼른 낫기를 바라며 매만지고 걱정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도대체 이 버릇은 나이 먹고도 고쳐지지가 않는 거야?”
이소는 얼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주영의 손을 감쌌다. 입술을 짓씹으며 붕대를 감듯 손수건을 감아올렸을 때 주영은 들릴 듯 말 듯 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주영은 쓸쓸한 낯으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주영의 손을 잡은 이소의 손에 답싹 힘이 들어갔다. 꼭 자신의 안위에 나쁜 일이 생겼다고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구는 주영의 말은 무거운 추처럼 잔잔한 마음에 깊은 파동을 만들어 냈다. 자꾸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주영의 손을 잡은 채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 주면 안 되냐고 채근하던 찰나였다.
“손.”
공간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 이소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셔츠를 입은 해준이 삐딱하게 서서 저와 주영을 보고 있었다. 해준을 마주한 이소가 눈을 맞추자 해준은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이소의 손 쪽으로 떨어뜨렸다. 옅은 미소 한 점조차 없는 냉한 얼굴을 한 해준을 마주한 이소는 여전히 제가 주영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황급히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교수님.”
“내가 여러 번 전화했는데, 이소 씨.”
다시 저와 시선을 맞추고 다정하게 웃는 해준의 말에 이소는 제 주머니를 더듬었다. 메시지 5개와 부재중 통화가 6통이 와 있었다. 여러 번 전화했는데 나오질 않자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가 저와 주영의 실랑이를 목도한 듯했다. 이소는 괜히 손을 문지르며 해준에게 다가갔다.
“…지금 봤어요. 죄송해요. 얘기하느라 전화 온 줄을 몰랐어요.”
“그러게. 퍽 집중한 것 같더라고.”
해준은 화를 내는 대신 이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작은 귀를 매만졌다. 평소와 같은 상냥한 손길이었지만 하필 자리가 주영의 앞이었기에 이소는 고개를 물리며 해준의 손을 피했다. 동시에 해준의 고운 미간에 얕은 골이 패었다 사라졌다.
주영은 제 손을 감싸고 있던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대리석 바닥을 차분하게 울리는 구두 소리가 해준과 이소의 앞에 다가섰다. 다치지 않은 손을 부드럽게 내밀며 인사를 청하는 모습에는 불쾌함이나 거부감 대신 반가움마저 일었다.
“우리 구면이네요, 차 교수님.”
“…그러네요, 윤주영 이사님.”
해준은 상냥한 어조로 답했지만 마치 제 앞에 악수를 청하는 주영의 손이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듯 태연한 태도로 무시했다. 이소는 웃는 낯으로 주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해준과 민망한 듯 가볍게 거두는 주영의 손을 몇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도리어 제가 머쓱해졌는지 마른 입술을 축이며 해준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왜’라고 가볍게 묻는 입 모양에 불쾌감은 보이지 않았다. 이소는 불안한 눈초리로 주영을 바라보자 갈 곳 잃고 방황하는 눈동자를 눈치챈 해준이 재단 사업으로 교수진들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고 속삭였다. 어느 정도 연계 활동을 할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얼굴까지 트고 인사할 줄은 몰랐기에 이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해준의 곁에 바싹 붙었다. 주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소와 해준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차 교수님은 여기 어쩐 일로….”
“애인 데리러 왔습니다.”
날카롭게 주영의 말을 끊은 해준이 이소의 허리를 바싹 당겨 안았다. 이소는 해준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낭창한 허리를 안은 손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소의 귀가 새빨갛게 익고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주영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믿기지 않는 듯 입을 가렸다. 애인?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물음에 이소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어…아니, 내가 나중에 설명을….”
“나중에?”
이번에는 답지 않게 해준이 말꼬리를 잡고 이소를 보며 고개를 내렸다. 이소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 대답할지 몰라서 한참을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며 또 몇 번을 더듬었다. 주영은 제 앞에서는 날 선 삵 같던 이소가 해준의 앞에서 순한 양이 된 모습을 꽤나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래,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주영은 눈을 접어 웃으며 해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엉겁결에 이소 역시 고개를 숙이며 주영을 보냈다. 정작 해준은 느린 고갯짓으로만 까딱거릴 뿐 무표정한 얼굴로 주영이 걸음을 떨어뜨리는 것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이소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주영의 뒷모습을 쫓았다. 해준이 오기 전 주영이 모호하게 남긴 말들은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우리도 이만 갈까요.”
“아, 네.”
주영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나자 해준은 이소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는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은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이소는 입술을 깨물며 해준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주차장에 남은 차량은 해준의 세단 한 대뿐이었다. 무례할 정도로 깊숙이 파고드는 혀가 입술 안쪽 여린 점막을 핥고 빨아들였다. 이소는 판판하게 붙은 제 배를 더듬는 커다란 손을 저지하면서 다른 손으로 해준의 어깨를 밀어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교, 교수님. 잠시만….”
이소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상황을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입술을 맞대어 오는 해준을 차마 밀어내지도 못하고 팔을 둘렀다. 가볍게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허리 사이에 넣은 셔츠를 끌어다 올리며 손을 집어넣자 이소는 펄쩍 움찔하며 해준의 어깨를 잡아 밀쳤다. 새빨갛게 익은 볼과 당황에 젖은 눈을 하고 숨을 삼킨 모습은 꼭 겁을 집어먹은 것 같다. 해준은 금방이라도 다시 베어 먹을 듯 입술을 얕게 벌린 채 그 모습을 나른하게 내려다보았다. 맞잡은 두 손을 천천히 머리 위로 올리며 다시 고개를 내리자 이소는 시선을 떨궜다.
아까까지는 분명 다정하게 저를 토닥이던 해준이 꼭 지금은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 못 받아서 그러시는 거면….”
“둘이 손을 잡고 있던데.”
해준은 고개를 돌린 이소의 귓바퀴를 혀를 빼어 길게 핥았다. 둥그렇고 작은 어깨가 파드득 튀어 오르자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앗, 가벼운 비음과 함께 해준의 가슴에 이마를 맞댄 이소가 곧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그건 다쳤다고 해서….”
“조금 베인 정도로 그 사람이 그렇게 걱정됐어?”
이소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사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보자마자 놀라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덧댄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손수건도 주영에게 주고 나와 버렸다. 이소는 불안정하게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주영에게 또 말려든 것 같다. 저를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만 담백하고 나올 것을 저도 모르게 주영의 발목을 잡고 과거에 대한 미련을 줄줄 읊고 말았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눈앞에서 피가 나니까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간 것뿐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이소는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 해준의 말에 선을 그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누가 봐도 오해할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했지만 저를 온전히 믿지 않는 말투로 놀리듯 말하는 해준의 말은 서운했다. 해준은 그런 이소를 차분히 내려다보다 손바닥을 살며시 훑었다. 까슬까슬하게 올라온 상처의 거스러미들이 따끔거렸다.
“여긴 왜 다쳤어요.”
“…교수님 오시기 전에 곤란한 사고가 조금 있었어요. 제가 뛰어오던 아이랑 부딪히면서 작품에 흠집을 냈는데 아까 그분, 그러니까….”
“윤주영 이사?”
“…네, 윤 이사님이 선처해 주셔서 제가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손은 말을 나누다가 보니 다치셨길래 제가 놀라서 손수건을 드린 것뿐이고요.”
“둘이 말을 텄잖아.”
해준의 말에 이소는 입술을 꼬물거렸다. 주영에 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었는데 해준은 아까의 만남을 상기하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미 반말로 인사까지 했는데 왜 주영을 지칭할 때 빙빙 돌려 말하는지 알 리 없는 해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소는 난감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사촌 형이에요. …그러니까, 윤주영 이사가요.”
주영의 이름에 성까지 붙여 낯설게 내뱉은 이소는 고개를 숙였다. 잘못한 것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해준의 앞에서 저와 주영의 사이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불온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소는 단 한 번도 주영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사촌?”
“네,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놀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해준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썹이 조금 움찔대더니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소로서는 해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저도 우연히 만났어요. 그 미술관이 형이 운영하는 곳인지 몰랐고, 교수님 오시기 전에 잠시 이야기하던 것뿐이에요. 정말로요.”
“알겠어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해준은 이소의 손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살짝 몸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넘어졌을 때 많이 다쳤어? 여기 말고 다친 곳은 없어요?”
해준은 이내 평소의 다정한 어조로 손바닥을 살피고 몸을 매만졌다. 이소는 불퉁한 얼굴로 무릎과 옆구리, 그리고 팔꿈치 등을 보여 주었다. 약한 타박상이기는 하지만 해준은 꼼꼼히 살피며 ‘아팠겠네, 그 사람들 참 나쁘네.’ 하며 말을 얹어 주었다. 제가 어린아이가 아닌데도 멍들고 할퀴어진 상처들을 매만지는 해준이 썩 기껍게 느껴졌다.
“교수님.”
“응.”
“저한테 화 많이 나셨어요?”
이소의 질문에 해준은 잠시 말을 아끼다 이소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 아파요. 찹쌀떡 같은 볼을 길게 늘어뜨렸다가 다시 줄이기를 몇 번. 해준은 피식 웃었다. 이소 씨한테 화난 거 아니에요. 그런 것치고는 볼을 잡은 손은 매웠다.
“이소 씨가 착하고 예뻐서, 자꾸 날파리들이 꼬이는 것 같으니 내 속이 상해서 그렇죠.”
“날파리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이소는 얼얼한 볼을 매만지며 눈을 흘겼다. 이소의 볼을 당기고 자리로 돌아온 해준이 가볍게 시동을 걸며 이소를 향해 미소 지었다. 흠결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환히 빛났다. 소란 피웠더니 배고픈 거 같아요, 저희 밥 먹으러 가요.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말을 한 이소가 안전벨트를 당기자 해준은 오른손을 들어 이소의 벨트를 잡고 대신 채워 주었다. 찰칵, 버클이 맞물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부르릉, 깨끗한 엔진음이 차 안을 울렸을 때였다.
“나는 가끔은 이소 씨를 내 별채에 가두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이소는 제 볼을 매만지다 운전석을 돌아봤다. 내가 잘못 들었나? 당황에 톡 튀어나온 입술을 바라보던 해준이 허리를 숙여 붉게 올라온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물론 농담이에요.”
눈을 접어 웃는 해준을 빤히 보며 이소는 어쩐지 농담치고는 섬짓하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보조석에 머리를 기대자 차는 부드럽게 미술관을 빠져나갔다. 주영을 다시 보는 일이 있을까. 주영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제 마음속 호기심이 자꾸만 고양이를 만지라고 채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