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2
3
4
5
6
7
1
사람이 없는 곳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한 발은 제멋대로 움직여 결국은 반대쪽 건물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쓰레기장이 코 앞이라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장소를 가릴 처지는 못 되었다. 이소는 가쁜 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을 허벅지에 석석 비볐다.
‘형이 여길 왜 왔지…. 미술, 미술 엔터… 뭐라고 했었는데. 그때 그 학생들 계약한다는 그것 때문인가? 그래도 대표씩이나 돼서 직접 학교에 올 줄은 몰랐는데….’
제게는 어렵고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해준의 학과에서 몇몇 학생들이 주영의 회사와 전속으로 계약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해준이 관련되지 않았다면 한 번 듣고서도 흘려 버릴 그런 이슈였는데. 이소는 입술을 깨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앞으로 학교에 자주 올 거라고 했다. 학교는 주영이 저를 만나러 오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 혹은 우연처럼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가 되어 버렸다. 이소는 식은땀을 훔쳤다. 돌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해준이었다.
“아, 교수님. 저…, 저 잠시 화장실에 왔어요. 아니요, 예술관이 아니고 여기 경영관 동문 근처…. 네, 금방 갈게요. 아니에요, 아픈 건 아니고…. 네. 거기 계세요, 제가 갈게요.”
해준과 전화를 마친 이소는 벽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뛰어왔는데 해준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 좀 정신이 든다. 주영은 아마 사람들에게 몰려서 사라졌을 테니 저도 해준과 함께 학교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이소는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다 문득 제 손이 너무 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앉은 자리를 더듬다 얼른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해준에게 주려고 가져온 종이백이 없었다.
“어, 어디 갔지.”
분명 처음에는 들고 있었는데. 잠시 생각을 더듬던 이소는 제가 주영을 마주하고 뒷걸음질 친 순간부터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진짜 바보 아냐….”
고작 마주친 것만으로도 이렇게 겁먹어 도망칠 거였으면서 그때는 무슨 용기가 나 멱살을 잡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윽박을 질렀는지. 떨어진 종이백 안에서 뭉개져 굴렀을 양갱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일단 해준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으니 실망하는 것은 저 하나로 끝날 것이다. 이소는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일단 가자, 양갱은 버렸다고 생각하고.
크고 둥근 기둥 뒤에서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기둥 뒤쪽에서 불쑥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흐헙!”
이소는 너무 놀라 비명까지 집어먹고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다. 낯익은 종이가방을 든 손의 주인은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제가 놓쳤던 물건을 들고 민망한 듯 웃는 주영을 이소는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또 여기 있어?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주영은 이소의 눈을 보다 눈썹 앞쪽을 가볍게 긁적이곤 손을 내밀었다.
“이거 놓고 갔길래….”
전에 보았을 때보다 볼이 움푹 패인 것이 조금 더 살이 내린 것 같았다. 주영의 손에 들린 종이백에는 다행히 양갱들이 흩어지지 않고 제자리를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떨어뜨릴 때 많이 흔들리지는 않았나 보다, 가방을 받아 들고 안을 확인한 이소는 감사 인사를 할 생각도 못 하고 가늘게 눈을 뜬 채 주영을 마주했다. 제가 준 것을 내치지도 않고 별다른 말 없이 받아 든 이소를 보며 주영은 달게 미소 지었다.
“잘 뛰더라. 쫓아오느라 애먹었어.”
“…….”
“기자들은 갔어. 비서도 보냈고. 나만 온 거야.”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는 고양이 같은 이소를 보며 주영은 나지막이 설명을 덧붙였다. 굳이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분명 주영의 배려였다. 그러나 여전히 입술 끝에서는 고맙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주영 역시 딱히 대꾸를 바랐던 것은 아닌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곤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이만 갈게. 저녁에 비 온다니까 조심히 들어가고.”
안부를 덧붙인 주영은 다시 몸을 돌려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소는 종이백을 끌어안았다. 주영과 같이 있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담백하게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용건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는 듯 가 버리는 뒷모습에 미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소는 시선을 떨궜다. 내가 왜 이러지. 그냥 눈이 마주치더라도 자연스럽게 지나갈 것을 그랬나, 곱씹다가도 역시 무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뜻밖에 나타난 주영 외에도 기자들과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주영이 거기서 제 이름을 불렀을 생각을 하면 아찔했다. 22년 전 잊힌 범양그룹 양자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제 와서 주목을 끄는 것은 정말로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주영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이소는 본래 가기로 했었던 예술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설렘이 가득해 가볍게 떨어졌던 걸음이 이제는 발목에 추를 매단 듯 무거웠다. 저 멀리 해준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이자 괜히 종이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이비색 오픈 카라를 걸친 채 손을 흔드는 해준을 보자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용한 저녁의 캠퍼스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까이 다가온 이소를 본 해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낯빛을 살폈다.
“이소 씨, 배 많이 아파? 데이트 하지 말고 집으로 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창백한걸. 오늘은 식사만 하고 바로 집으로 가자.”
해준은 걱정이 되는지 이소의 뺨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매만졌다. 다정이 묻어나는 손길이었지만 이소는 금세 고개를 돌리곤 귀를 붉혔다.
“아직 학교예요.”
“아, 그렇지. 미안해요.”
머리를 숙이고 곤란해하는 이소의 말에 해준은 얼른 손을 내렸다. 차로 가자, 저녁 먹고 들어갈까요? 웃으며 주차장을 향해 걷는 해준의 뒤를 쫓으며 이소는 몸을 돌려 적막한 캠퍼스를 눈으로 훑었다.
‘이제는 학교에 자주 오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주영과 기자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돈다. 무척이나 좋아하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자주 오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이소는 그저 아쉬워 힘이 다 빠졌다. 주영이 줄 때까지도 내내 온전한 모습을 유지했던 종이백은 이소의 손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러나 정작 집에 갈 때까지도 이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