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해준은 생각했다. 이 낡은 빌라의 원래 건물주는 도대체 왜 계단을 이딴식으로 높이가 낮고 폭이 좁게 만들어 놔서 구두 바닥의 절반만 대고 걷게 만드는 건지. 뜀박질을 하면 닿을 듯한 답답한 천장과 순환되지 않은 축축한 공기는 건물 전체를 삭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 곳이야.’
문고리를 쥐고 당겨 열자 상쾌한 비누 향이 순식간에 눅눅한 곰팡이 냄새를 밀어냈다. 작은 방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시원한 맞바람이 현관 앞에 선 해준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코 끝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서 옅게 이소의 체취가 느껴졌다. 매번 쓰는 향이 진한 싸구려 샴푸로 머리를 감았나 보다. 해준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이 쓰레기 같은 빌라를 탈탈 털어 가장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이소의 성격대로 장식한 액자와 단정하게 쌓아 올린 물건들, 가지런히 개킨 옷가지들, 낡았지만 반짝반짝한 식기들까지도 모두 이소의 손길이 닿은 것들이었다.
해준은 손을 씻고 제가 사 온 것들을 작은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얼마나 부지런을 떠는 건지 작게 소분된 채소들과 고기들은 선반에 각을 맞추어 쌓여 있었다. 해준은 잠시 너저분한 자신의 책상을 떠올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건들을 정리하고 난 후 이소의 곁에 앉았다. 오후부터 얼마나 물고 빨고 만지고 싶었는데 이소는 그런 해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이소의 눈동자가 눈꺼풀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결이 좋은 눈썹이 작게 움찔거렸다. 해준은 턱을 괴고 그 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이소 씨,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눈에 보이는 건 다 사 왔어.”
맵고 시고 단 것. 네 마음에 들면 좋겠어. 이소는 해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미소 지으며 꼭 먹고 싶다는 듯 입술을 우물댔다. 이소가 숨을 쉴 때마다 진한 꽃주 냄새가 났다. 어디서 맡았더라, 기억을 더듬던 해준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정숙이 백일주를 깠나 보다. 얼마나 마셨는지 볼이 벌그스름한 채 입술을 벌리고 잠들어 있는 이소는 볼을 찌르거나 코를 꼬집어도 눈을 뜰 생각을 안 했다. 해준은 조금 더 짓궂은 장난을 치려다 바로 옆에서 잠들어 있는 해수를 발견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린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들의 애정 행각을 보다가 충격을 받아 성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말을 종종 들었던 것 같은데. 해준은 눈을 굴리다 옆에 널브러져 있는 베개와 인형들을 주섬주섬 모았다.
해수의 주변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은 솜인형과 베개는 제법 가림막다웠다. 다만 해수의 손을 잡고 있는 이소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빼내는 도중 이소가 싫다는 듯 몇 번이나 다시 바닥을 더듬길래 꽤 애를 먹었다. 결국 해준은 얼른 제 손을 갖다 대 주자 이소는 얼른 손가락을 얽어 왔다.
해준은 이소의 손가락과 손등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윤이소는 전체적으로 모가 옅고 가늘었다. 눈썹 아래로는 거의 터럭 한 올이 없다시피 해 희고 깨끗한 편이었다. 해준은 그런 이소가 백자(白磁)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해준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이 있는 백자를 가장 좋아했다. 취향이라는 것은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인가.
해준은 가느다란 손목과 길게 뻗은 팔 안쪽의 여린 살, 그리고 선이 고운 목덜미에 입술을 옮겨가 잘근잘근 씹어 내려갔다. 먹음직스러운 과일 향 비누가 식욕을 돋운다. 깊은 잠에 빠진 듯 큰 숨을 내쉴 때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은 품이 큰 티셔츠 안에서 사근사근 움직였다. 턱선과 더운 뺨을 지나 입술에 이르렀을 때 해준은 양 볼을 두 손에 담은 채 찬찬히 연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사랑스럽다. 이대로 이불에 둘둘 말아 제 정원으로 훌쩍 데려가 버리고 싶다.
해준은 고개를 내려 잠든 이의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달큰한 술 냄새가 숨에 섞여 퍼진다. 해준은 작은 얼굴을 도망가지 못하게 잡은 후 그 작은 입술을 먹어 치우듯 키스했다. 길게 빨아올렸다 놓아주고 다시 베어 물고 핥아 내기를 여러 번, 반사적으로 입을 벌린 이소가 손을 뻗어 해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 허리를 끌어안는 감촉에 눈을 맞추자 반쯤 감긴 눈이 해준을 마주하고 빙긋 웃었다.
“깼어?”
이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전에 없던 쌍꺼풀이 여러 겹 생긴 모양에 해준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입술을 말아 참았다. 해준을 발견하고 눈을 여러 번 떴다 감던 이소는 배시시 웃으며 해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음, 곤란한데. 해준은 제 입술을 매만지며 다른 손으로 이소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소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 듯 색색 소리까지 내며 잤다. 정말이지, 아이가 옆에 있으니 더한 짓을 하려야 할 수가 없군.
해준은 허리를 숙여 이소의 귓가에 속삭였다. 해준은 때때로 이소가 자고 갈 때면 소박한 장난을 치곤 했다. 의식이 없는 이소에게 열 번이나 스무 번 정도 같은 말을 반복하며 무의식에 제 사랑을 심었다.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하는 것이다. 재미있으니까.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고 있는 이소만 보면 귓가에 가서 속삭이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차해준이 너무 좋다.’라든지 ‘교수님 집에 가고 싶다.’, ‘교수님 보고 싶다.’, ‘교수님하고 결혼하고 싶다.’라고 속삭이면 열에 아홉 번은 웅얼대며 ‘…하고 시따.’ 하며 해준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럼 해준은 묘한 만족감이 차올라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춘 후 이소를 안고 잠이 들었다. 해준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소야, 다른 사람이 만지면 ‘싫어요.’ 하는 거야.”
해준은 마치 다섯 살 아이에게 낯선 이를 피하는 법을 가르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누가 너를 데려가려 하면 ‘안 돼요.’ 해야 하고.”
이소는 작은 입술을 우물댔다. 해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른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세요.’ 해. ‘교수님, 도와줘요.’ 하라구.”
“……주세요.”
“옳지. 잘한다.”
해준은 이소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착하다, 예쁘다. 해준은 한 손으로 이소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발갛게 익은 뺨을 매만졌다. 정말이지 바보가 된 것 같다. 정숙이 그랬더랬다. 주고 더 주어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부족하기만 한 사람이 있다고. 정숙에게는 자식이 그랬다면 해준에게는 이소가 꼭 그랬다. 제가 이소의 부모가 아닌데도 해준은 꼭 이소만 보면 그렇게나 갈급하게 제 사랑을 털어 넣고 또 부족해할까 봐 발을 동동 굴렀다.
“네가 말하는 붉은 실의 인연이 나였으면 좋겠어.”
해준은 이소의 손가락에 실을 엮듯 새끼손가락을 천천히 매만졌다. 다른 이를 기다리지마. 만약에 그런 인연이 있거든 내가 모조리 자르고, 그 실은 전부 내 손가락에 이어줄거야.
“…좋아해. 내가 널 정말 좋아해, 이소야….”
제가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싶다. 내가 가진 돈도 옷도 집도, 모두 너에게 주고 싶어. 그것도 모자라 온 세상을 안겨 주고 싶어. 해준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소를 사랑해 왔던 것처럼 이 곱고 말간 사내에게 깊게 빠져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오토바이를 내던지고 아이를 살리려 뛰어가던 그 모습을 보았었던 날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이 사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해준은 이불을 길게 끌어 이소의 턱 끝까지 올렸다. 이불에 폭 싸인 모습이 꼭 아기같았다. 해준은 핸드폰을 들어 이소의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또 끌어안았다. 술기운에 따땃하게 열이 오른 몸은 안고 자기에 적당한 온도였다. 오늘 밤은 윤이소가 옆에 있으니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으응…. 해수…. 사랑해….”
“응, 해수 아니고 해준이. 나도 사랑해.”
해준은 이소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사랑을 안고 잠든 밤은 따뜻했다.
* * *
늦은 아침, 이소는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이불과 베개에 완전히 파묻혀 있다가 머리를 천천히 내놓고 눈을 껌뻑였다. 어젯밤에 정숙과 함께 술을 마시고 난 후 한참 떠들다가 그대로 잠든 것 같은데 몸이 개운한 걸 보면 그 와중에 샤워까지 했나 보다. 몇 시쯤 되었지, 해수 어린이집 가야 하는데.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오래 잔 느낌인 걸 보니 대충 여덟 시 삼십 분 정도 되었을 테고 조금 서둘러야겠거니 하며 화면을 켠 이소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헉!”
열 시 사십 분이었다. 주말에도 이렇게까지 늦게 자 본 일은 없었다. 여름에는 날이 좋아 자주 놀이터도 나가고 물놀이도 있는 편이라 웬만하면 빠지는 일이 없이 보내는데 늦잠을 자다니 완전히 얼이 빠졌다. 몸을 돌려 해수를 찾았지만 해수가 잠들었던 이부자리는 깨끗하게 개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항상 해수의 가방을 놓던 자리에 가방과 준비물 주머니까지 없었다.
너무 늦잠을 자서 정숙이 보냈나, 이소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나무문 사이로 도마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정숙이 아침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사장님, 죄송해요….”
“일어났어요? 더 자도 되는데.”
정숙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해준이 서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이소 키에도 낮은 편인 조리대에 잔뜩 고개를 숙인 채 당근과 감자를 자르고 있는 해준의 모습을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해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씻고 와요, 밥 먹어야지.”
“여기서 뭐 하세요…? 해수…, 해수는요?”
“내가 데려다줬어요. 이소 씨 더 자라고.”
해준은 씩 웃으며 채소를 마저 잘랐다. 정갈하게 잘라 놓은 채소는 모양은 반듯한데 조금 작았고 양은 많았다. 카레를 하시려고 하나? 이소는 한참을 그렇게 해준의 옆에 서 있다가 결국 욕실까지 해준의 손에 이끌려 가서야 세수와 양치만 하고 나왔다. 제집인데도 해준이 주방에 서 있는 것이 영 어색해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제법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집 안을 채웠다. 작달막한 밥상에 김치와 김, 달걀 프라이 따위의 반찬이 올라왔다. 이소는 얌전히 앉아 밥상을 받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정숙이 아닌 사람을 제외하고 제집 주방에서 바로 뚝딱 차려서 올라오는 밥상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해준은 꽤나 능숙해 보였고 이소는 한참을 앉아서 해준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그냥 밥을 차리는 것뿐인데도 멋져 보였다.
밥상이 완성되고 나서 이소는 잠시 말을 잃었고 곧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밥은 물고기에게 던져 줘도 될 만큼 물 양이 많아 떡이 졌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하게 자른 작은 야채 무더기는 카레가 아닌 된장찌개에 들어갈 것들이었나 보다. 된장찌개에 당근과 브로콜리도 들어갔다. 달걀 프라이는 세 번 씹으면 한 번은 달걀 껍질이 나왔다. 결국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건 조미김과 소시지뿐이었다. 해준은 제가 만든 것을 몇 입 떠먹다가 결국 모조리 남겼다.
“독특한 맛인 것 같아요.”
“그냥 맛없다고 해요.”
“신기한 맛.”
“더 먹지 말라니까.”
“특이한 맛.”
이소가 해준을 계속 놀리며 찌개 국물을 떠먹자 결국 해준은 찬장을 뒤져 라면을 꺼내 들었다. 이것만은 제대로 해 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했지만 라면 두 개를 끓이는 데 큰 냄비에 물을 한 솥을 받는 것을 보고 이소는 벌떡 일어나 라면 물 맞추는 것부터 차근차근 알려 줬다. 결국 라면에 달걀 넣는 것까지 옆에서 지켜보고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는 해준이 준비한 시간까지 합쳐 총 2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래도 좋았다. 이소는 그저 눈을 떴을 때 해준이 곁에 있어 좋았다.
해준이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소는 냉장고에서 작은 요구르트를 꺼내 왔다. 빨대를 꽂아 해준에게 주었는데 해준의 손이 커서 꼭 미니어쳐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소는 해준의 곁에 붙어 앉았다. 날이 더웠는데도 집 안은 그늘이 져서 선선했다.
“그거 아세요? 정숙 사장님 미국 가신대요. 아드님 사업이 잘돼서요. 엄청 잘됐죠.”
“응, 잘됐네.”
“그래서 어제 축하주 깠어요. 교수님이 사장님 주신 거요.”
“백일주? 술꾼 다 됐네. 그거 독한 건데.”
해준이 이소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빨대를 빨며 해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해준이 이소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베였네, 아팠겠다.”
주영의 손을 뿌리치다 깨진 유리 파편이 튀었을 때 베인 것이다. 이소는 대답은 않고 제 손등을 매만지는 해준의 손이 따뜻해 얌전히 있었다. 해준 역시 더 묻지는 않은 채 이소의 손을 매만지다 깍지를 꼈다. 이소는 해준의 손가락을 가만히 보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뭐 물어봐도 돼요?”
“뭐든.”
“교수님은 예전에 저 말고도 사귀는 사람이 많았겠죠?”
해준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맞추자 이소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해준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정하시고, 섬세하시고 잘 챙겨 주시고 그러는 것 같아서요. 질투를 하는가 했는데 그런 건 아닌가 싶어 아쉬워질 때 즈음 이소는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저 만나기 전에는 몇 명 만나셨어요? 두 명? 세 명?”
“…….”
“…다섯? …여섯?”
“…….”
해준이 말을 않고 바라보자 이소는 입술을 비죽이다 ‘…어, 그냥 더 안 물어볼게요. 엄청 많으신가 봐요.’ 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혼자 어디까지 상상하는 건지 귀까지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해준은 도리어 이소에게 똑같이 물었다. 사귀는 건 제가 처음인 걸 아니까 물리고,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럼 이소 씨는 좋아했던 사람 있었어요?”
“…… 글쎄요….”
“있었어?”
“…음, 그냥.”
이소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제 연정을 조심스럽게 정의할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그때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냥 우정이나 동경이었던 거요. 너무 어리니까 그 차이를 잘 몰라서 사랑이라 착각하는, 그런 사람이 있긴 했었어요.”
으흠, 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맞췄다. 그 표정이 퍽 진지해서 이소는 풋 웃음이 터졌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해준이지만 때때로 이소는 해준이 정말로 못 견디게 귀여웠다. 이 이야기가 뭐라고 이렇게 진지하게 듣는단 말인가. 이소는 손가락을 들어 해준의 코를 살짝 간질였다.
“그래도 지금은 착각이 아니라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
“좋은 선생님이 곁에서 가르쳐 주시거든요.”
이소의 따뜻한 시선이 해준에게 가닿았다. 이내 민망한 듯 눈을 깜빡이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는 이소에게 해준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요구르트를 들고 있던 이소의 손이 갈 곳을 잃고 멈췄다. 어느새 해준은 이소를 벽에 밀어 넣은 채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소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어, 교수님. 저희 방금 밥 먹었어요.”
“응”
“달걀, 달걀도 먹었고…. 라면도 먹었어요.”
“응, 알아.”
“입에서 냄새, 그러니까 저 양치하고 와서.”
“나 냄새나요?”
“아니, 아니요. 교수님 말고 제가….”
“아냐, 이소 씨는 비누 냄새, 꽃 냄새밖에 안 나.”
해준이 고갯짓을 하며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아하하, 높은 소리를 내며 이소가 나동그라졌다. 얇은 티셔츠 안을 헤집는 손가락은 아직도 차가웠다. 웃음소리와 옷장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작은 방 안에서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굴렀다. 입을 맞추면 값싼 요구르트의 단맛이 구석구석 퍼졌다. 해준이 이소의 티셔츠를 들어 올리고 가슴에 입을 맞췄을 때는 이소가 발을 구르다 오래된 옷장을 발로 차 그 위에 있던 인형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별안간 스무 개는 되는 인형 더미에 파묻혀 버린 해준과 이소는 그게 뭐 우습다고 또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멎을 때 즈음에는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해준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거지 같은 빌라에서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려도 좋을 것 같다. 불어 터진 라면과 엉망인 식사, 오래된 장판이 깔린 좁아 터진 방구석이지만 윤이소가 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정말이지 그저 윤이소만 있으면 되었다. 어이없지만 솔직한 제 생각에 해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픽 웃었다.
“어, 어…. 코, 콘돔 없는데…, 지금 집에 없는데…!”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해준을 저지하며 이소가 몸을 뒤로 물렸다. 괜찮아, 내가 있어. 엄청 많아. 다 쓸 때까지 못 나가. 해준이 속삭이며 이소를 끌어안았다. 나의 사랑, 나의 우주, 나의 이소. 꽈리처럼 터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해준은 제 성에 찰 때까지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톡톡, 늦은 아침을 적시는 비가 창틀을 때렸다. 때 이른 장마의 시작이었다.
* * *
“아이고….”
이소는 허리를 통통 두들겼다. 해준이 왔다 가고 꼬박 5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허리가 쑤셨다.
나이는 제가 더 어린데도 불구하고 왜 꼭 나가떨어지는 것은 해준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제가 먼저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일 붓을 들고 그림만 그리는 해준보다 제가 더 많이 움직이고 무거운 것도 많이 드는 것 같은데 도통 잠자리에서는 제 뜻대로 몸 한 번 뒤집기가 벅찼다. 해준의 페이스에 휘말려 정신없이 흔들리다 보면 어느새 눈이 풀린 채 입을 벌리고 엉엉 울고 있기나 했다.
‘그렇게 점잖은 사람이 왜 잠만 자면 눈이 돌아서….’
이소는 혼자였지만 괜히 얼굴이 붉어져 볼을 긁어내렸다. 침대가 없었던 까닭에 몇 번이고 바닥에 엎드린 채 하다가 무릎이 시뻘게지자 해준은 이소를 번쩍 안아든 채 찍어 올렸다. 결국 살려 달라고 무섭다고 목이 쉬어라 울다가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한 30분 잠들었다가 깼다.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멍한 정신을 깨웠다. 정숙이었다. 최근 정숙은 미국에 가는 날짜가 확정되고 난 후 얼굴이 눈에 띄게 폈다. 동네 미용실에서 제일 싼 3만 원짜리 파마 대신 15만 원짜리 고급 세팅펌을 하자 꼭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가 안주인 같은 인상이 되었다. 역시 스타일링이 중요하구나, 이소는 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정숙의 머리를 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예쁘세요, 사장님.”
“어머! 티 나?”
정숙은 지나가던 개가 봐도 바뀌었을 머리 스타일을 거울에 비추며 유난스럽게 재잘거렸다. 그 모습은 퍽 좋아 보였다. 정숙은 간만에 이소의 옆자리에 앉아 한참을 떠들었다. 이소는 불규칙적으로 켜졌다 꺼지는 형광등이 신경이 쓰이는지 창고에서 새 등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가게 빠질 거 등은 뭐하러 갈아.”
“그래도요. 이렇게 깜박거리다가 갑자기 픽 나가 버리더라고요. 미리미리 하려고요.”
“해도 길구만.”
하긴, 여덟 시만 돼도 요새는 해가 쨍하던데. 그래도 매장에 불을 꺼둔 채 손님을 맞을 수는 없으니 이소는 묵묵히 낡은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나사를 돌려빼느라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흰 티셔츠가 가는 허리 위에서 하늘거렸다. 정숙은 등을 갈아끼우는 이소의 허리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별안간 고개를 휙 돌렸다.
‘세상에, 저게 뭐야.’
허리 주변이 온통 벌레에 물린 듯 시뻘건 자국투성이였다. 다시 눈을 힐긋 돌려보니 무언가에 세게 꼬집힌 듯 부어오른 것 같기도하고 멍처럼 보이기도 했다. 배꼽 주변부터 옆구리 전체가 온통 개가 씹어 놓은 것마냥 잇자국이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냥 넘어갔을 일조차 해준의 얼굴을 생각하고 나면 항문 근처가 아릿아릿하게 오그라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이런 난잡한 짓거리를 저 깨끗한 얼굴로 모두 받아 주고 있었을 것을 떠올리니 이소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그 검은 속내를 알고 나니 바들바들 오금이 저리던데. 어쩌면 이소 씨가 생각보다 속이 깊고 강단이 있으니 해준이 잡혀 살거나, 혹은 두 사람의 균형이 잘 맞는걸까? 정숙은 오전에 동희 씨가 준 커피빵을 씹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참, 사장님. 미국 가시기 전에 사진관에서 사진 찍고 가시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소는 여전히 천장에 시선을 두고 새 등을 돌려 끼우며 담백한 어조로 물었다.
“사진?”
“네. 저랑 사장님이랑 해수랑 셋이요. 하나 남겼으면 싶은데….”
정숙은 얼른 빵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몰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좋지, 난 너무 좋지. 아유, 이소 씨 너무 좋은 생각 했다.”
정숙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자 이소가 그럼 동네 사진관에 전화를 해 보겠다며 웃었다. 간밤에 해수가 할머니가 미국에 가 버린다는 소식에 시무룩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사진을 남길 수 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득 정숙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빵을 주물주물거렸다.
“근데 나 가고 나면 해수는 누가 돌보나?”
“사실 그게 좀 걱정인데…. 제가 정시에 출퇴근하는 곳으로 옮기고 해수는 이제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학원을 보내든지 방과 후 교실 하든지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차 교수네 부탁해 보지, 왜.”
“아니에요.”
정숙의 말에 이소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좋잖아. 거기 애들도 해수랑 동갑이고 언니 오빠들도 있고. 혼자 그 학교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보다는 차 교수네 있는 게 훨씬 낫지. 밥도 잘 주는데 거기서 보면 되고.”
“그래도 어떻게 교수님네 맡겨요. 동희 씨도 카페 일로 바쁘고 거기 식구들은 누구 애를 봐주는 게 아니라 자기 아이들 돌보는 것뿐인데요. 잠깐이면 몰라도 매일매일은 힘들죠.”
“아니, 그래도. 남자친… 그러니까 친한 친구 애니까 돌봐 줄 수도 있지. 그리고 어차피 이소 씨도 나중엔 거기로 합칠 거잖아.”
“제가 왜요?”
“응?”
정숙은 이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당황해 빵을 뜯던 손까지 멈췄다. 이소는 정숙이 하는 말을 잠시 곱씹는 듯하더니 코를 찡그리며 싱긋 웃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진 알아요. 교수님도 항상 방 한 칸 내줄 테니 같이 살자 하시거든요. 친절하셔서.”
‘방 한 칸이 아니던데. 집 한 채던데.’
정숙은 근질거리는 입이 터질까 봐 제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소는 쓰레기를 정리해 묶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일은 없어야죠. 그분이 제 보호자가 아니고 저 역시 교수님한테 다 맡겨 버리고 나면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그리고 거기 가면 자꾸만….”
“자꾸만 뭐?”
“아무것도 안 하고 눕고 쉬고만 싶어져요.”
제가 이야기해 놓고 민망한지 이소는 큭큭 웃었다. 정숙은 턱을 괴고 이소가 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염치는 무슨, 네 애인이 너 몰래 그 집에다가 가구며 집기며 죄다 갖다 놓고 몸만 모셔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거절하고 있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지. 그런데 꼭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이소 역시 그 별채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 싶었다. 이소는 그래도 만약에 제가 그 집에 가게 되면 폐는 안 끼쳤으면 좋겠다는 둥, 식솔들과 부대끼며 일손이라도 도우며 잘 지내야 하지 않겠냐는 둥 정숙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했다.
‘아마도가 아니라 필히 들어가게 될 것이고 들어가면 물 한 방울 손에 묻히는 일이 없을 것이란다, 요 뻣뻣한 녀석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마치 제 막내아들을 늑대 신랑의 아가리에 집어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 한편으로는 신중하다 못해 고집스러운 이소의 이 성격을 여태 참고 기다린 해준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보나마나 여태 제 고민이나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숙은 무어라 더 말을 얹을까 하다 둘이서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해준의 첨언에 따르면 자신은 세 번 할 말을 한 번 아끼면 해(害)를 막고, 두 번 아끼면 복(福)이 온다나. 그저 제 앞에서 바닥 먼지를 쓸어담는 이소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 *
그렇게 2주일이 흘렀다. 생각보다 평안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이소는 간만에 무료하게 의자에 기대어 쉬었다. 해준은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낸 건지, 제대로 바쁘기 시작하자 코앞에 이소의 가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주 잠깐씩밖에 못 봤다. 출근할 때는 시간이 안 맞았고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얼굴을 비추곤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 일뿐만 아니라 양친의 재단 일에도 관여하고 있는지 눈 밑이 검게 변할 정도로 업무에 치여 어떤 날은 통화로 때우곤 했다. 결국 시간을 내야 하는 것은 이소였다.
오후 네 시, 간만에 밟은 캠퍼스는 학기 초에 비해 조용했다. 종강이 며칠 안 남아 광장에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운동장을 도는 선수들과 예술관에서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소리 정도로 여전히 바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소는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는 기다란 나무 데크를 천천히 걸으며 해준에게 메시지를 했다.
[간식 만들어왔어요. 저 지금 제1운동장 지나가요. 교수실 말고 동문 쪽 앞에서 기다릴게요. 끝나면 천천히 오세요.]
해준의 수업은 항상 십 분 일찍 끝나곤 했지만 때때로 길어질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로 고등학교처럼 정시에 끝나는 줄로만 알고 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아 제가 강의실을 잘못 찾았나 하고 학교를 뱅뱅 돈 적도 있었다.
해준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고개를 들었을 때 이소는 예술관 일 층에 눈에 띄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꼭 볼거리를 둘러싸고 도넛 모양을 만든 군중들이 어림짐작으로 서른 명은 넘었다.
“연예인인가?”
왁자지껄한 말소리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이소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욱여넣은 채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리 세상 일에 무심해도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무시할 정도로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다.
‘잘 안 보이는데….’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못 한 채 멀리서 발부리만 든 채 고개를 빼고 관심의 중심이 된 사람을 찾았다. 꽤 큰 키의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의 말에 친절하게 답해 주고 있었고, 남자가 말을 할 때마다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퍽 재치 있는 입담을 가졌는지 기자들과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고, 여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남자의 사진을 찍으며 연신 ‘잘생겼다.’, ‘웃는 거 완전 대박이다.’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누군데, 나두 보고 싶어.’
인터뷰가 끝나가는지 뒤쪽에 서 있던 기자들이 반대쪽을 향해 서 달라는 요청을 했고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 본다. 여기 본다.’
그리고 몸을 돌린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종이백을 떨어뜨렸다.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은 주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주영을 마주친 이소가 크게 놀랐듯 주영 역시 그대로 얼어 버린 모습이었다. 카메라와 기자들을 마주하던 주영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시선과 동시에 마주한 이소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발걸음을 뗐다. 누구지, 무슨 일이지, 왜 그러지, 웅성거리며 떠드는 말소리가 가감없이 귓가를 때렸다. 금방이라도 주영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저벅저벅 걸어올 것 같았다.
눈에 띄지 말고 살아. 주영이 곁에 남지 마라.
윤치승 회장이 가장 먼저 당부했던 말. 너를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 주영의 곁에는 기자들이 너무 많다. 카메라도 수십 개, 녹음기도 수십 개, 그들의 눈과 귀가 꿈틀대며 자신을 바라본다. 등 뒤로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7년 전 사건을 추궁하고 겁박할 것만 같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기자님들, 인터뷰 끝난 건가요?”
이소의 주위를 맴돌던 웅성거림은 주영의 깨끗한 목소리 하나로 산산조각이 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소에게서 느릿하게 시선을 거둔 주영은 다시 카메라를 보며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이어 나갔다. 미술계를 사로잡은 예술재단의 엔터테이먼트화, 파격적이고 독보적인 행보에 대해서 묻는 질문들이 쇄도했다. 선구적 혜안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젊고 아름다운 외모로 화제의 중심인 새 CEO와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럼 이제 학교에 자주 오시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마지막 말을 하는 주영과 어쩐지 시선이 얽힌 것만 같아 이소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 종래에는 뛰어서 도망을 쳐 버렸다.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