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1/50)

4

“누가 봐요.”

“보라고 해요.”

해준의 등에 업힌 채 다리를 달랑달랑거리며 저택의 후문에 가기까지 고작 5분, 경사진 언덕을 넘어 작은 문을 지나면 대나무가 양쪽으로 울창한 산길이 나온다. 푹신푹신한 흙을 걸을 때마다 사박사박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가 적막한 숲을 채웠다. 골목은 분명 푹푹하게 찌는 초여름의 열기로 데워져 있었는데 고작 몇 걸음이나 왔다고 이리도 계절감이 다를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족히 5~6미터는 되어 보이는 죽림 사이로 노란 볕뉘가 내리쬔다.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꼭 다른 세계로 가는 길 같아요.”

“상상력이 뛰어나네.”

“아니에요. 진짜로 교수님 집에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거 같단 말이에요. 지금 산책로도 너무 예쁘고요. 어떻게 만든 거예요? 대나무는 다 심었어요?”

이소의 말에 해준이 피식 웃었다. 때로는 정말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 점이 때 묻지 않아 보여 좋았다. 꾸밈없이 보이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이소의 맑은 눈이 참 예뻐 보였다.

“여긴 땅을 사고 얼마 안 돼서 우연히 발견한 길이예요. 제법 산책로가 잘 나 있길래 계단만 조금 손 보고 나머진 그대로 두었지.”

“그럼 원래는 누군가 다니던 길이었을까요?”

“그렇겠죠? 아마 누군가 나처럼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업고 걸었을지도 모르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이소는 얕게 숨을 들이켰다. 언제 들어도 낯간지럽고 속을 시끄럽게 함에도 불구하고 저를 안고 귓가에 밤새 속삭여 주었으면 하는 말이다. 해준은 애정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는 성격이었지만 가볍고 쉽게 내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소는 부끄러움이 많은 저를 위해 지나가는 말처럼 에둘러 표현해 준 해준의 배려에 마음이 벅차 고개를 묻었다.

“교수님…. 그거 아세요?”

“어떤 거요.”

이소는 얼마전에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쩐지 동화 속에 나올 법한 길을 걸으니 그게 어울리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중국에서 내려온 이야기인데요, 오랜 인연이 이어져 언젠가 맺어질 상대는…보이지 않는 운명의 붉은 실로 이어져 있대요.”

“그런 거 잘 믿어요?”

“미신이긴 한데 이런 이야기 재미있거든요. 그냥…. 낭만적이잖아요. 어딘가에 운명적인 내 사람이 있다는 게.”

“그러네. 낭만적이네.”

말을 마친 이소가 목덜미에 이마를 문지르자 해준은 느린 걸음으로 이소의 허벅지를 꽉 붙들어 맸다. 이렇게 끝없이 윤이소를 업고 길을 걷기만 한대도 좋을 것 같았다. 이소의 호흡과 체온이 등으로 온전히 느껴졌다. 이소는 해준의 목을 다시 끌어안았다. 저를 안고 한참을 올라와 제법 땀에 젖을 만한데도 해준은 목덜미가 보송보송했다. 머리를 기대고 하늘거리는 댓잎들을 바라보던 이소가 무언가 생각난 듯 번쩍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이소 씨, 왜요?”

이쯤 어디메였던가. 이소가 꼭 어미 찾는 노루 새끼마냥 고개를 돌리다 나지막히 읊조렸다.

“찾았다.”

“응?”

이소가 손을 뻗은 곳에 덜 자란 연둣빛 대나무 하나가 길 가장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무슨 의중으로 그 대나무를 가리키는지 모르는 해준이 멀거니 서 있기만 하자 이소가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빨리이, 저기로 가 줘요. 해준이 말 잘 듣는 강아지마냥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이소는 손을 내려 해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여기요, 제 편지.”

[또 올게요.]

또박또박 단정한 글씨로 적은 메시지는 일전에 해준의 집에 다녀간 이소가 적어 둔 것이었다. 해준이 이소를 팔 하나로 지탱한 후 다른 손을 들어 글자가 적힌 대나무를 매만졌다. 이 정도의 길이의 메시지는 핸드폰에서도 종종 보던 흔한 안부였고 마음에 여운을 줄 리도 없는 인사말에 불과했는데도 해준은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님, 저 떨어질 것 같아요.”

“응. 미안.”

이소가 보채자 해준은 다시 팔을 뒤로 둘러 이소를 고쳐 업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뗐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후원에 도착해야 했다. 제가 적어 놓은 편지에 꽤나 놀랐는지 한참을 말이 없던 해준을 보며 이소는 볼을 부볐다.

“무슨 생각 하세요?”

순순히 업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소가 얌전히 등에 매달린 채 제법 아양을 떨자 해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저 대나무를 어떻게 하면 안채 안에 옮겨다 심을까 하는 생각.”

“편지 때문에요?”

“네.”

이소가 코끝으로 가볍게 웃으며 해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 이유라면 제가 도착해서 더 길게 써 드릴게요, 애꿎게 나무는 옮기지 말고 친구들과 함께 자라게 두세요. 그리 말하니 해준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한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가 진해질 무렵 두 사람은 후원에 다다랐다. 해준의 키보다 조금 작은 문을 숙이고 지나오자 색색의 꽃들이 담장 주변을 타고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해준은 해가 지기 전 이소에게 새로 난 화초를 보여 주려는 듯 보폭을 좁혔다. 이건 토끼풀, 이건 양귀비, 이건 범부채, 이건 금계국…. 둑방길과 공원에서 보던 꽃들도 있었지만 특이한 모양과 색을 지닌 것들도 많아 이소는 눈을 떼지 못하고 실컷 꽃구경을 했다.

꽃구경을 마친 이소는 가볍게 마루에 짐을 내려놓고 다리를 뻗어 통통 두들겼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해준은 신발까지 다 벗겨 주면서까지 수발을 들었다. 누가 보면 큰 사고라도 난 사람인 줄 알겠다며 이소가 웃어넘겼지만 해준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소 씨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마요.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걸음도 못 하게 하더니 신발까지 벗기고 기어코 물까지 떠와 입술에 대 주어 먹이는 해준을 보니 그 말이 결코 농담은 아닌 것 같아 이소는 대답은 않고 웃기만 했다.

* * *

“이소 씨, 빨리 와! 아니 여기 궁궐이야!”

예상했던 바였지만 정숙이 제일 들떠 있었다. 30분 전부터 도착해 있던 정숙과 해수는 마당 한가운데 차려진 엄청난 크기의 평상에 앉다 대문을 열고 들어온 이소를 보자마자 엉덩이를 떨어뜨리고 뛰어왔다.

“이소 씨, 아니 차 교수. 아니 어쩜 이런 좋은 데에 산대?”

“뭘요. 편히 쉬시다가 오늘은 주무시고 가세요.”

“아유, 이소 씨 친구 덕에 내가 호강한다.”

정숙이 연신 해준의 팔뚝을 치며 호감을 드러냈다.

“도련님, 잠시만요.”

“응, 갈게.”

해준은 갑자기 주방에서 부르는 소리에 이소를 먼저 보냈다.

정숙은 이소에게 몇 마디 말을 더 얹은 후 조금 더 주변을 기웃거리다 주방 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뒤를 쭈뼛쭈뼛 해수가 걸어왔다. 해수는 눈을 돌리다 입 모양으로 ‘여기 완전 대박이야.’라고 속삭였다.

“해수, 예쁜 말.”

엄하게 말했지만 곧 이소가 입꼬리를 끌어당기자 해수가 얼른 볼을 붉히고 안겨들었다. 아빠 이제 안 아파? 응응, 다 괜찮아졌어. 얼마 전까지는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오전에 폭풍 같은 일들을 겪고 나니 제 품의 아이는 아직도 쥐면 날아갈 것처럼 작고 여린 꼬마였다. 이소가 깊이 해수를 끌어안자 해수는 숨이 막힐 법도 한데 아빠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꼭 안겨 한참을 말없이 호흡을 나눴다.

해후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대문을 열었을 때부터 허기를 자극하는 기름 냄새와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온 집에 그득했기 때문이라. 부녀는 몸을 일으켜 엉거주춤 섰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 할 일을 뚝딱 해내고 있는 와중에 손님으로 왔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덥썩 밥상만 받아먹기에는 스물일곱 이소는 낯짝이 그리 두껍지 않았다. 마침 절뚝거리며 지나가는 젊은 남자가 있어 이소가 얼른 말을 걸었다.

“아, 저 안녕하세요. 차해준 교수님 초대로 왔습니다.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아유, 아니에유. 앉아만 계셔유.”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남자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마당 한가운데 평상을 가리켰다. 제일 작은 평상인데도 그 위에 올라간 밥상이 제법 컸다. 이소가 떨떠름한 얼굴로 남자를 다시 바라보자 재차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저기 맞아유. 손님 상이니께 거기 앉아서 기다리면 금뱅 나온께. 근디 가마솥 옮기야 하는디 우리 도련님 어디 간겨.’ 하고는 자리를 떴다. 이소는 마지막 말을 제가 잘못 들었나 했지만 남자는 성치 않은 다리를 하고서도 재빠르게 문간으로 사라져 버려 더 묻지 못했다.

남자의 말대로 해수와 이소는 사람들을 피해 주섬주섬 평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각자의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듯 여자들은 주방에서 요리를 옮기고, 남자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장작들을 가져와 교차하여 차곡차곡 쌓았다. 꼭 불이라도 피울 것처럼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충 어림잡아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의 숟가락이 모두 놓이고 나서야 어느 정도 준비가 다 끝나 가는 것 같았다.

“아빠, 여기 책에서 보던 옛날 집 같아.”

“응, 맞아. 신기하게 생겼지.”

“나 엄청 큰 차도 타고 왔어. 그리고 여기 말고도 밑에도 또 여기랑 똑같이 생긴 집 몇 개 더 있어. 거기엔 애들도 있더라. 한 다섯 명…?”

전에 언덕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보았던 아이들인가. 이소는 해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연신 분주하게 평상 위로 음식을 옮기고 있었다. 대략 나온 평상만 8개, 그 위로 올라간 크고 작은 밥상만 해도 열 개는 됐다. 여자들이 커다란 소쿠리에 상추와 깻잎, 치커리와 쑥갓, 근대, 신선초까지 야무지게 담아 척척 소분을 했다. 양이 상당했는데도 쟁반 열 개에 나누어 담아 놓으니 순식간에 동이 났다.

뒤이어 뜨끈뜨끈한 연밥, 색색의 나물들과 도토리묵 무침, 바삭하게 튀겨진 녹두전과 김치전이 산처럼 쌓인 채 밥상 위에 올려졌다. 벌건 홍어 무침과 두부김치도 있었다. 음식들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수레에 실어 온 항아리를 평상 옆에 하나씩 내려놨다. 평상 옆에 묵직하게 자리한 갈색의 항아리마다 입구에 흰 천이 둘둘 동여매져 있었다.

“아빠, 이건 뭐야?”

“글쎄, 막걸리… 같은데.”

“막걸리가 뭔데?”

“술.”

호기심을 참지 못한 이소와 해수가 살짝 천을 들어 안을 들여다보자 톡 쏘는 청량한 향이 코를 찔렀다. 해수가 질겁을 하며 고개를 뺐으나 이소는 한참을 코를 박고 킁킁댔다. 시큼한 효모 냄새 사이로 찹쌀의 단 향이 났다. 술맛을 잘 모르는 이소였지만 군침이 돌았다. 이소가 몸을 숙이고 항아리에 코를 박고 있을 때 해수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낯익은 남자를 보았다. 처음 저와 정숙을 태워다 준 할아버지였다. 해수가 이소의 등을 쿡쿡 찔렀다.

준경이 다가오자 이소는 얼른 병 입구를 덮어 두고 벌떡 일어났다. 전에 본 집사의 얼굴을 알아본 이소가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자 준경은 인자하게 웃음 지으며 이소를 앉혔다.

“편찮으시다더니 좀 어떠신가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오늘 저녁은 수육을 준비해 달라고 하셔서 지금 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침 어제 막 들어온 돼지고기가 있었는데 도련님이 수육 이야기를 하셔서 급하게 메뉴를 추가하긴 했습니다만….”

이소는 저 때문에 일이 번잡스러워진 것 같아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었다. 이렇게 큰 걸 바란 건 아니고 그때처럼 방 안에서 고기나 한 상 얻어먹고 뒹굴다가 들어올 계획이었는데, 도대체 해준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렇게까지 큰 잔치를 벌이나 싶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너무 다들 고생하시네요.”

이소가 준경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제 탓을 하자 준경은 부드럽게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들 평소에 이렇게 먹습니다.”

“네?”

“농담이 아니라, 워낙 식구가 많아서 이게 일상입니다. 다만 오늘은 마침 손님도 오시고 주말을 앞둔 저녁 시간이라 다들 조금 들떠 있긴 한데, 아마 이소 님이 오시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수고는 다들 하는 편이니 너무 괘념치 마세요.”

준경의 말이 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소와 해수는 고개를 빼고 다시 밥상을 바라보았다. 차려진 음식의 가짓수만 해도 스무첩은 넘어 보였는데 모두 하나같이 정성이 빼곡히 들어간 것들이라 누구라도 잔칫상이라고 생각할 만한 규모였다.

해수도 슬슬 허기가 지는지 배를 잡고 슥슥 문질렀다. 다행히 해수는 크게 가리는 음식이 없어 아이 입맛에도 먹을 것들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아까 보니 아이들 숟가락도 보이는 것 같았는데 같이 앉아 먹겠지? 이소는 괜히 크기가 작은 수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연 소란스러운 쪽을 고개를 돌렸다. 해준이었다.

“아, 도련님! 이거는 거가 아니라 저 짝이라니께유. 아유, 다리 아파.”

“그러니까 춘식 씨는 왜 자꾸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해, 지금 이 뜨거운 걸 들고 내가 몇 번을 왔다 갔다… 아, 이소 씨. 가까운 데 있었네.”

해준은 춘식이라는 남자에게 구시렁대다 이소를 발견하고 손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아까 같이 언덕을 내려올 적만 해도 깔끔한 모습이었던 해준이 팔을 걷어붙인 채 목장갑을 낀 양손에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한 짝씩 들고 있었다. 해준의 등 뒤로 따라붙은 남자가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들고 연신 잔소리를 했다.

빨리 놔유 진짜! 내 팔 떨어징께! 그 말에 해준은 그 큰 솥뚜껑을 장작때기 위에 척 얹었다. 미리 데워 놨는지 불붙인 장작에 올리자마자 금세 푹푹 흰 연기가 올라왔다. 저를 번쩍번쩍 들던 팔 힘이 저 가마솥 뚜껑을 보고 나니 이해가 됐다. 이소와 해수가 입을 쩍 벌리고 쳐다보자 어느새 옆에 선 준경이 별일 아니라는 투로 넌지시 말했다.

“장정 넷이 할 일을 도련님이 도와주시기만 하면 두어 번이면 끝납니다. 물론 워낙 바쁘셔서 못 도와주실 때가 많지만, 뭐 오늘은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요.”

마지막 문장을 맺으며 준경이 이소에게 찡긋 눈을 접어 웃었다. 이소는 얼굴이 벌게진 채 괜히 물을 한번 들이켰다.

어느덧 사람들이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새 자리마다 막걸리잔이 가득 차 있었다. 정말 꼭 잔칫날 같았다. 이소와 해수, 정숙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여앉았다. 사람들이 앉을 동안 옆에서 큰 칼로 석석 고깃덩이를 잘라 낸 춘식이 펄펄 데워진 가마솥 뚜껑 옆에 자리를 잡고 해준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큰 고기가 가마솥 위에서 기름 끓는 소리를 내며 튀겨지기 시작했다.

해준이 술을 따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큰 마당이 고요해졌다.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은 마음껏 들어요. 내일 하루는 푹 쉬셔도 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단체로 와아, 만세를 지르며 술잔을 부딪치고 젓가락을 놀렸다. 이소는 이런 분위기에 섞이는 것 자체가 실로 처음이었다. 찌르르 풀벌레가 우는 초여름 밤, 음악 소리 하나 없어도 행랑채 사람들의 속삭임과 웃음소리만으로도 그 큰 마당에 평안과 행복이 꽉 들어찼다. 신기했다. 해준과 하는 모든 것들은 저에게 매 순간 기적과 같은 기쁨을 선물했다.

해준이 어깨를 기울여 제 잔을 이소의 잔에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이소가 잔을 들고 올려다보자 해준은 코를 찡그리며 짓궂게 덧붙였다.

“누추한 저희 집에 걸음 해 주셔서 무척 영광입니다. 윤이소 씨.”

“그게 뭐예요.”

“사랑을 담은 환영 인사지.”

막걸리를 한 모금 들이켠 이소의 입에 해준이 부드러운 수육을 한 점 물려 주었다. 달큰하고 사르르 녹는 고기가 꼭 제 입맛에 맞았다. 해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때요.’ 이소 역시 고갯짓으로 답했다. ‘맛나요.’ 초여름의 푸른 밤은 그렇게 폭폭 무르익었다.

* * *

이소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술판이 벌어진 지 어느덧 두어 시간, 막걸리 항아리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고개를 돌리자 해준 역시 벌써 몇 병째 마시고 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연신 술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이미 홍조가 짙어진 제 볼과 달리 해준은 전혀 취하지 않은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해수는 노릇한 육전과 잡채를 접시째 들이마시듯 먹었고 정숙도 잘 무친 고들빼기에 수육을 몇 번이나 싸 먹으며 풀어진 모습이었다.

해준의 집에서 먹는 요리는 담백하면서도 정갈한 맛이 있었다. 입 안에 넣기만 해도 사르르 녹는 수육은 가성비를 따져가며 고른 가게용 고기와는 차원이 달랐고, 김치 역시 끝맛이 깔끔하게 떨어져 군내가 나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고급 재료들로 만든 음식들을 커다란 접시에 산처럼 쌓아 두고 장정들이 달려들어 푹푹 헤프게도 찍어 먹었다.

이소는 해수가 체할까 봐 연신 등을 두드렸다. 해준은 그 큰 손으로 머위 쌈을 야무지게 싸서 이소의 입에 집어넣으며 꼭꼭 씹을 때까지 한참 바라봤다. 이소와 해준의 평상이 가운데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래저래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소를 바라보며 웃기도 하고 옆 사람과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방인이 신기한가 보다 싶으면서도 해준의 행동이 너무 눈에 띄어 이소는 상 아래로 해준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교수님.”

“응.”

해준은 여전히 이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소는 머위 쌈을 꿀꺽 삼키곤 고개를 돌려 작게 속삭였다.

“그만 넣어요.”

“응?”

시끄러운 사람들 목소리에 묻혀 제 말이 들리지 않는지 해준이 고개를 빼고 재차 물었다. 이소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입가에 손을 대고 조곤조곤 내뱉었다.

“너무, 크니까. 그만 넣으라구요.”

해준이 잠시 말을 잃고 이소를 바라보다가 ‘너무 커요?’ 하자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이 ‘꽉 차서 더는 안 들어가요?’ 하고 볼을 두드리자 이소는 ‘응, 완전 목까지 꽉 차서….’ 하고 대답하다 별안간 몸을 뒤로 빼고 해준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입을 가리고 귀까지 달아오른 모습이 꼭 희롱당한 새색시 같았다. 해준이 씩 웃고는 다시 술잔에 입을 가져다 대자 이소는 얼른 평상 아래로 다리를 내려 신발을 꿰어 신었다. 취한 해준의 옆에 계속 앉아 있으면 더한 농담을 듣다 체할 것 같았다.

“이소 씨, 이리 와.”

마침 정숙이 손을 흔들었다. 정숙의 또래처럼 보이는 나이 든 여자들과 젊은 여자들이 섞인 자리에는 해수가 아이들과 함께 늘어져 있었다.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오동통하게 나온 모습이 귀여웠다. 정숙은 마치 이 집에 아주 오래 있었던 사람마냥 편안하게 기대어 앉아 사람들과 어울려 떠들었다. 몇십 년을 장사로 다져진 입담은 시선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이소는 정숙의 곁에 앉아 드러누운 해수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해수 역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밤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라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이소는 몹시 즐거웠다.

“술 많이 드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막걸리병을 든 낯익은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지 매치가 잘 되지 않았다.

“어….”

“저 맞아요, 카페.”

동희 씨였다. 이소가 말을 못 잇고 시선을 추어올리자 동희 씨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놀라실 건 또 뭐예요.”

“왜 여기 계신가 하고요.”

“여기 사니까?”

동희 씨는 손을 들어 행랑채 중앙에 있는 작은 방을 가리켰다. 카페를 막 닫고 돌아왔는지 동희 씨의 몸에서는 은은한 커피 향이 배어났다. 해준의 사람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잘 해 줄걸, 이소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를 옆으로 비꼈다. 자연스럽게 곁에 앉은 동희 씨가 이소의 잔에 술을 따라 주려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해준이 이소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윤 사장님 술 드려도 돼요?”

이소의 술을 왜 해준에게 허락받는지는 몰랐지만 이소 역시 고개를 돌려 해준을 바라보았다. ‘나 마셔도 돼요?’라고 묻는 듯한 동그란 눈에 해준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 잔만.”

그 말에 동희 씨는 눈을 접어 웃으며 정말 딱 반 잔만 따랐다. 동희 씨는 싹싹하게 웃으며 이곳에서 산 지 이 년이 넘었다고, 아들이 허리에 오기도 전에 이 집 정문을 넘었는데 어느새 일곱 살이라며 제 이야기를 풀어놨다. 이소는 작은 잔을 홀짝이며 해수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 시기에 아이들이 참 말을 안 듣는다느니, 일곱 살 여자아이가 삐치면 어떻게 풀어 줘야 할지 모르겠다느니 고민을 토로하자 동갑내기 아이를 둔 엄마 동희 씨 역시 신이나 맞장구를 쳤다.

왜 사람들이 아이 이야기할 때 그렇게 흥분하는지 몰랐는데 제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 이소는 저도 모르게 몰입해 마구 주절거렸다. 옆에 앉은 해준은 이소가 기댈 수 있게 허리를 세우고 마저 술을 털어 넣었다.

아이들은 떼로 무리 지어 술래잡기를 하고, 저쪽 구석에서는 언제 가져왔는지 북과 장구를 가져와 주섬주섬 노래할 준비를 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 이소가 해준을 올려다보자 해준은 ‘원래 좀 흥이 많은 사람들이라.’ 하고는 이소를 바짝 끌어당겼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정숙이 벌떡 일어나 얼른 춤을 출 준비를 했다.

아마추어 같지는 않아 보였다. 대본을 통째로 외웠는지 아니면 원래 말을 잘하는 건지 남자는 한참을 제 출신이 어디고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 오늘 손님들이 많이 와서 좋다는 맥락 없는 이야기를 줄줄 읊었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는데도 리듬과 억양이 썩 흥미로워 이소는 박수를 치며 구경했다. 노래를 하는 남자 옆으로 현란한 손놀림으로 북을 치는 남자가 튀어나오자 이소는 아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구경했다.

“교수님, 저거 봐요. 북을 엄청 잘 치세요.”

“예전에 품바 해서 그래요.”

“품바가 뭐예요?”

“오래된 뮤지컬.”

해준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이소가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썩 보기 좋았지만 동시에 마당에 내려온 후부터 저는 돌아보지도 않고 시선을 준 것이 영 서운했다. 해준은 흰 가래떡을 하나 집어 꿀을 치덕치덕 발랐다. 이소의 입에 넣어주려고 살짝 벌어진 입술을 톡톡 두드렸으나 이소는 시선은 여전히 북 치는 남자에게 둔 채 떡만 앙곰 베어 물었다.

이거 봐라. 해준은 다시 한번 떡으로 이소의 입술을 문대듯 꾹꾹 눌렀다. 빨리 여길 봐 줘. 이소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가자 해준의 눈꼬리도 같이 접혔다. 그러나 이내 이소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손뼉을 치며 환호하자 해준은 김이 새 가래떡으로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따, 우리 도련님도 노래 한 곡 하셔야쥬!”

쩌렁쩌렁하게 마당을 채우는 사투리에 취기가 거나하게 묻어 있었다. 음식을 퍼먹던 사람들이 해준의 옆으로 다가온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매번 있는 일이었다. 다 같이 술을 먹으면 거기에 그치지 않고 꼭 주변 사람들의 장기나 노래 한 곡을 듣고야 마는 인간이 있다. 무언가 보여 주지 않으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생떼를 부리는 것이 춘식의 주사였다. 가볍게 동요 하나만 불러도 쉽게 만족하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코까지 벌겋게 된 춘식이 해준의 앞에 마이크를 갖다 댔다.

“이번에는 도망 못 가유. 노래가 싫으면 춤이라두, 아니믄 뭐라도 하나 보여 줘유!”

“아유, 미쳤나 봐! 도련님, 무시하세요!”

“빨리 춘식이 데리고 들어가, 좀.”

사람들이 춘식을 뜯어말렸다. 마이크를 코앞에 둔 해준은 턱에 손을 괸 채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종종 행랑채에 내려와 술이라도 한잔할라치면 이리도 귀찮게 군다. 다들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해준에게는 이런 것들이 퍽 곤란하게 다가왔다. 다음 날이 되면 허리를 바짝 숙이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는 것을 보는 제 입장은 어쩌라고 이리 제 주량도 모르고 삐뚤어지게 마셔대는지 원.

그러나 분위기를 깨면서까지 권위를 과시할 생각도 없었다. 어쨌든 제가 먹이고 재우며 나름 아끼는 식솔들이었다. 굳이 가진 것도 없는 그들의 소박한 장난에 제가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를 어찌 빠져나가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해준은 제 옆을 지킨 토끼 같은 두 눈동자를 의식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잔뜩 긴장한 모습이 꼭 이소 저에게 노래를 시킨 것마냥 당황한 기색이었다. 해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가 보고 싶으세요.”

귀를 사로잡는 낮은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싸구려 마이크로 전달되는 해준의 기품 있는 음성에 사람들은 음식을 씹어 삼키거나 떠드는 것을 모두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분노나 불쾌함이 묻어 있지 않은 담백한 어조, 그러나 해준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술에 취해 무서운 줄 모르는 춘식만 제외하곤.

“아무거나유. 술기운 빌려서 좋은 거 보여 주셔두 좋구, 재미있는 이야기도 좋구.”

“좋은 거….”

그 말에 해준이 고개를 내리고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이를 드러내고 웃은 것뿐인데 그 준수한 외모와 우아한 행동거지에 여자들은 목덜미를 붉혔다. 돌연 해준이 팔을 들어 이소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겼다. 해준의 말이 트이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소가 불현듯 힘없이 딸려가 해준의 품에 가 붙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제 뺨에 닿았다 떨어진 부드러운 입술에, 이소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해준을 응시했다. 이소와 춘식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두들 말을 잃었다. 깨끗하게 잘생긴 해준의 얼굴로 달빛이 쏟아졌다. 붉어진 이소의 뺨을 본 해준의 입매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늦지 않게 와요. 기다릴게.”

뺨에 키스를 받은 채 그대로 굳어 버린 이소의 머리를 썩썩 쓰다듬은 해준이 몸을 일으켰다. 느릿느릿 신발을 꿰어 신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해준을 한참 바라보던 이소가 별안간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 교, 교수님이 술이 많이 취하셨나 봐요. 제가 데려다드리고, 금방 다시 올게요!”

급하게 평상에서 내려와 언덕을 향해 달려가던 이소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뒤늦게 해수를 찾았다. 다행히 해수는 친구들과 노느라 보지 못한 듯싶었다. ‘해수야!’ 하고 부르자 ‘아빠, 나 오늘 밑에서 잘 거야! 늦게 자도 돼?’라고 물었다.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이소는 해수의 말에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가 느티나무 아래서 손을 흔들었다. ‘좋은 꿈 꿔! 내일 봐!’ 부쩍 의젓해진 말투와 목소리로 저를 배웅하는 해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이소는 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해준과 이소가 사라진 행랑채 후문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술을 홀짝였다. 정숙만 눈치 없이 ‘아유, 깜짝이야. 얼마나 술을 먹으면 저렇게 천지 분간 못 하고 입술을 부벼대. 놀랬다, 정말.’ 하고 웃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궤짝으로 세네 짝은 거뜬하게 마시며, 단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는 해준의 주량을 아는 식솔들만 고개를 흔들었다. 어쩐지 오늘은 아주 오래간만에 집안 전체를 울리는 가야금 산조를 밤새 틀어 놓고 자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행랑채의 후문을 벗어나자마자 저 멀리 휘적휘적 걸어가는 해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다리로 어찌나 휘적휘적 잘도 올라가는지 이소는 술기운이 올라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해준을 불렀다.

“교수님!”

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준은 놀리듯 안채로 향했다. 이소는 약이 바짝 올라 쫓아갔다. 안채 정원으로 들어가는 정문 앞, 해준이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이소가 한 걸음 다가서면 해준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소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해준은 말없이 눈을 깜빡이며 이소가 다가오면 물러서고, 멈춰 서면 같이 멈춰 섰다.

“교수님.”

“응.”

“왜 자꾸 도망가세요.”

이소의 말에 해준이 기분 좋게 웃었다. 꼭 정말로 술에 취한 듯 천천히 기울이는 고갯짓이 아름다웠다. 품이 넉넉한 흰 셔츠를 걸친 채 사뿐히 움직이는 해준의 모습은 마치 조용하면서도 현란한 학의 춤 같았다.

“홀리려고.”

해준의 음성이 적막을 깨고 귀를 사로잡는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그의 정원이었다. 해준의 발이 대문의 문지방을 살풋 밟고 넘었다. 톡, 풍채와 어울리지 않게 가볍게 땅을 지르밟는 소리가 현실 같지 않았다. 이소는 해준의 말마따나 홀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피처럼 붉은빛을 한 대문 너머, 수많은 꽃의 군락 한가운데 해준이 서 있었다. 이소는 잠시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술 취하신 거 아니죠.”

“취했지.”

“거짓말.”

“영근 달에 취하고, 깊은 밤에 취하고, 소서(小暑) 꽃 향에 취하고.”

오래된 시조를 읊듯이 몸을 흔들며 웃음 짓던 해준이 돌연 가까이 다가온 이소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어떤 요령으로 이리 가볍게 안아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허리를 쥐어 잡은 손아귀의 힘이 그리 세지도 않은데도 편안하게 해준에게 안긴 이소가 웃음을 터뜨렸다. 해준은 그대로 이소를 안아 들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흡 하고 들이마시자 어지러운 마음을 순식간에 안정시키는 이소의 분내가 났다.

“어여쁜 네게 취했지.”

“농담이 어려워요.”

“같이 있고 싶어 개수작 부렸다는 말이에요.”

“그게 무슨….”

결국 이소가 웃음을 터뜨리며 해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해준은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알고 있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이 달밤, 속절없이 홀린 것은 윤이소가 아니라 해준 자신이었다.

* * *

정자에서 시작된 키스가 어느덧 농밀한 애무로 넘어갈 때쯤 이소는 제 배에 입을 맞추던 해준의 머리를 잡아들었다. 아무리 높은 언덕을 넘어 올라온다 한들 사방이 훤히 드러난 정자였다. 해수가 아직 행랑채 앞마당에 있었고, 누구라도 취기에 충동적으로 올라올 수 있을 만큼 개방된 곳이었다. 잘록하게 휘어진 흰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간질이며 해준이 나른하게 웃었다.

“잔치가 한창인데, 누가 오겠어요.”

그래도 이소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차단하고 싶었다. 불안에 푹 젖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본 해준은 바닥을 짚고 기어 올라와 이소의 동그란 코를 살짝 깨물었다. 별안간 코를 깨물린 이소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꾹 다물었던 입술을 살짝 벌리며 긴장을 놓았다. 저나 이소나 술 냄새가 진창이었다. 해준의 입매가 곡선을 그렸다.

“일단 씻을까.”

해준은 이소의 허리를 들어 올려 제 품에 담듯 안았다. 마주 끌어안은 채 성큼성큼 안채로 향하는 길,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천천히 멀어지는 정원을 눈에 담았다. 초여름 바람에 산들거리는 꽃들이 이소에게 조심히 들어가라며 인사를 하는 듯했다. 이소는 헤실헤실 눈을 접어 웃으며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해준은 욕실로 들어가 커다란 욕조에 더운물을 받는 내내 이소를 안고 있었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와 눈이 반쯤 감긴 이소의 옷을 일일이 다 벗기고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이소를 내려놓은 뒤 마른 어깨에 조심스레 물을 끼얹었다. 해준의 앞에서 옷을 벗은 것이 처음도 아닌데 거품을 낸 스펀지가 몸 구석구석에 닿을 때마다 이소는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얼굴을 붉혔다.

목욕을 끝내고 난 후에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데도 해준은 이소를 안아 들고 간이의자에 앉힌 후 발가락까지 아주 꼼꼼하게 닦았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흩어진 물기를 몽땅 닦아 내고 털이 보슬보슬한 가운까지 잘 여며 입혔다. 어느새 꺼내 왔는지 능숙하게 헤어 드라이어를 꺼내 머리까지 탈탈 말려 줬다. 마치 이소를 씻기는 일이 제게 주어진 엄청난 사명이라도 되는 양 해준은 진지하고 정성스럽게도 임했다.

그런 시간 동안 정작 안달이 난 것은 이소였다. 욕조에 들어가기 전부터 몇 번이고 끌어안으려고 시도했지만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해준에 의해 탈의를 당했다. 머리를 감기는 해준의 뺨을 아래에서 연신 쓰다듬었지만 해준은 그저 가볍게 입만 맞춰 줄 뿐 오로지 머리를 살살 감기는 데만 집중했다. 머리를 말리는 와중에도 이소는 해준의 허리에 머리를 파묻고 팔을 두른 채 비협조적으로 굴었으나 해준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꼼꼼히 머리를 말렸다.

심지어 침대에서 하는 입맞춤도 평소와 결이 달랐다. 언제나 잡아먹을 듯이 덥썩덥썩 이소를 베어 물던 해준은 키스하는 내내 몇 번이나 눈을 맞추고 뺨을 쓰다듬었다. 혹여나 쥐면 깨질까 당기면 부서질까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해준은 이소의 흰 목덜미와 발그스름한 뺨, 판판한 가슴을 지나 움푹 들어간 복부까지 입을 맞춘 후 잠시 멈칫했다. 가운 아래로 눈에 띄게 윤곽을 드러낸 이소의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흥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허약한 몸 상태에 비해 지나치게 솔직한 반응은 흥미로우면서도 기껍기도 했다. 그러나 해준은 눈썹을 한 번 찡그린 후 그대로 몸을 일으켜 이소의 곁에 모로 누웠다. 당연히 그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있었던 이소만 몹시 당황했다.

온몸을 다 씻기고 키스까지 해 놓고, 기대가 무색하게 저를 재우려 이불까지 끌어 올려 주는 해준의 행동에 이소는 할 말을 잃었다. 혹여 해준이 저에게 전혀 동하지 않았는가 하여 내린 시선 끝에는 눈에 띄게 부푼 바지춤이 있었다. 그런데도 해준은 저와 달리 평화로워 보였다. 억울했다. 이소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왜… 안 해요?”

용기 내 꺼낸 이소의 물음에 해준은 말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소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분위기와 상황이 되면 어련히 몸을 섞겠거니 생각했었다. 더구나 술까지 얼큰하게 마신 상태였고, 정자에서만 해도 해준이 가슴과 배까지 희롱했기에 당연히 안채에 들어오자마자 제 옷을 몽땅 벗기고 들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제 발로 해준의 정원까지 뛰어 들어왔을 때 둘만의 농밀한 접촉을 기대했던 건지도 몰랐다.

“…내 기억엔 이소 씨 아까도 쓰러질 뻔했던 걸로 아는데, 아니에요?”

“그건….”

“한동안 무리하지 않아야 할 거예요.”

그치만…. 해준의 말에 눈을 굴리던 이소가 멋쩍게 입술을 축이고 깨물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오전까지 더위 먹은 개마냥 현관에서 비틀댔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해준과 보낸 밤의 여파로 내리 정신을 잃고 잠만 잤다. 짓궂은 해준이라 해도 오늘의 저를 건들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을 납득하는 것과 별개로 달뜬 감각은 쾌락의 문턱 앞에서 엉거주춤 선 채 쉽게 잠잠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해준의 시선을 피하며 이소는 입술을 우물댔다.

“나는… 하고 싶은데….”

들으라는 혼잣말이었다. 아래를 바짝 세운 채 제 앞에서 붉어진 뺨을 한 연인이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해준의 입매가 슬며시 올라갔다.

“나쁜 버릇만 들였네, 내가.”

쯧, 혀를 찼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해준의 손이 조심스럽게 흰 샤워 가운을 젖히고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가깝게 맞붙은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혀가 밀려 들어왔다. 이소는 해준의 옷깃을 가볍게 쥐고 답싹 몸을 붙였다. 잇새로 파고든 혀가 입천장을 살살 긁었다. 오돌토돌한 단면을 춤추듯 훑어내린 혀는 이소의 볼과 치아를 차례로 핥은 후 뱀처럼 뿌리 끝을 감았다. 이소가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열어 혀를 길게 내어 빼자 해준이 다정하게 상긋거렸다.

“이젠 키스도 제법 잘하고.”

“흐….”

이소가 다시 한번 해준의 입술을 베어 물려던 찰나 제 아래를 쓸어 쥐는 체온에 힉 하며 다리를 움츠렸다. 해준의 따뜻한 손바닥이 기둥을 감싸고 부드러운 손가락들이 선단을 지그시 문지를 때마다 배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해준의 옷깃을 잡고 있던 이소의 손가락에도 힘이 바짝 들어가 희게 질렸다.

“으읏….”

“아무 곳에서나 잠이 드는 거, 너무 걱정돼요.”

걱정이 담긴 말과 달리 해준의 엄지 끝은 이소의 것을 쥐고 집요하게 긁어내렸다. 동시에 매끈한 좆을 쥔 손이 유연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뭉근하게 사정을 유도했다. 이소는 눈을 감고 넘실대는 쾌락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해준에게 매달렸다. 손가락으로 막은 선단부 끝에서 조금씩 새어 나온 프리컴이 찌걱찌걱 기둥과 해준의 손을 적셨다. 여전히 차분한 해준의 음성과 달리 이소의 숨이 조금씩 가빠 왔다.

“주치의 말로는, 기가 허해서 그렇다는데.”

“으흑, 하…, 교수님….”

“이렇게 다 내보내면, 아까워서 어쩌나.”

아양을 떨며 유혹한 것과 달리 면역이 없는 몸은 필사적으로 해준의 손짓을 저지했다. 해준이 이소의 것을 당기듯 쓸어올렸다 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푹푹 찍어 내렸다. 복부를 때리듯 치받는 강한 자극과 좆 끄트머리를 꾹꾹 눌러대는 묘한 손길에 이소가 몸을 뒤틀고 자지러졌다.

“싸는 것도 금방이고.”

“…아, 잠깐, 만…! 그렇…게… 갑자기, 흣, ……아읏!”

애원은 소용없었다. 애초에 기다려 줄 생각도 없었다. 단단한 손끝이 귀두 끝을 문지르듯 세게 긁어내리자 이소는 짧은 신음과 함께 해준의 가슴에 제 손톱을 박아넣었다. 흰빛을 띈 묽은 정액이 사정없이 튀었다. 몸에 비해 제법 살집이 있는 둔부가 잔뜩 조여들었고 이소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떨며 해준의 바짓단에 앞섶을 비볐다. 해준의 먹색 바지와 대비되는 백탁액이 지저분하게 뭉개졌다. 부어오른 붉은 입술에 채 떨어지지 못한 타액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과 함께 방울방울 져 있었다. 이소는 꼭 뭐가 억울한 사람처럼 힉힉 울음을 삼켰다.

“…아으, ……으흑.”

“봐, 힘들지.”

이소가 마른 입술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극이… 자꾸, 예민하게…. 원래 이렇게 빨리 하진 않는, 데…. 내 맘대로 안 돼서…, 이상해요….”

이소가 창백한 입술 사이로 뻐끔뻐끔 한탄의 말을 쏟아내며 고개를 묻었다. 해준이 이소의 흰 뺨을 눈먼 손길로 쓸어내리며 얕게 저어대는 머리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이상한 거 아니야. 기분이 너무 좋으면 그럴 수 있어.”

이제 오늘은 그만. 자기 쉬어야겠다. 그 말에 이소가 울음을 조금씩 삼키고 고단한 호흡을 길게 뱉었다. 옷깃을 쥔 손에 힘이 조금씩 빠지자 해준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정의 여파로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문득 저는 다 내보냈는데 해준은 괜찮은지 걱정이 된 이소가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교수님은… 안 하셨잖아요.”

해준이 나른하게 눈꼬리를 휘어 접었다. 이 와중에 자신의 걱정을 한다. 어쩜 이리 마음이 여리고 고울까.

“이소야….”

이소는 해준이 저를 ‘이소 씨.’라 부르는 것도 좋아했지만 종종 제게 말을 낮추거나 ‘이소야.’라고 부르는 것도 퍽 좋았다. 거리감 없는 호칭에 다정한 음색이 섞이면 마음이 선덕선덕 널을 뛰었고 얼른 달려가 폭 안기고 싶을 정도로 애정이 솟았다. 그런 해준이 이소를 끌어안고 초승달처럼 작은 귀를 매만지며 이소야, 라고 속삭였다.

해준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이소의 뺨을 문지르다 코끝에 옅게 입을 맞췄다. 이소가 흠칫 놀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해준이 부드럽게 눈을 맞추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코끝에 하는 키스, 어떤 의미인지 기억해?”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왕왕 울리며 정사를 조르던 말들은 입술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코끝 키스. 그저 해준의 눈을 바라보고 코끝에 하는 키스의 의미를 기억해 내려고 했던 것뿐인데. 돌연 이소는 숨을 옅게 집어삼키곤 몸을 떨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나만 너무 밝히는 것 같아.’

얼굴을 보지 않아도 해준이 웃는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렸다. 귓불이 새빨갛게 익는 느낌이 선연했다. 바짝 다가온 해준이 달아오른 이소의 뺨에 제 뺨을 갖다 댔다. 자신의 체온보다 한참은 낮은 피부는 서늘하고 시원했다. 바짝 다가온 해준이 귓가에 속삭였다.

“……답은?”

시험 문제가 아니다. 이걸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혼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소는 꼭 제대로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에게, 반했어요….”

“또?”

이소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해준이 눈을 찡긋 접어 웃으며 ‘복수 정답이거든.’ 하고 웃었다. 이소의 입꼬리가 샐쭉 접혔다.

“당신을… 좋아, 해요….”

“저도요.”

이소는 제가 말해 놓고 그 말에 화답한 해준의 입술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해준이 이소의 머리카락을 강아지를 쓰다듬듯 헝클어트렸다. 나도 자기랑 자고 싶지,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아직 많잖아. 해준이 이불을 끌어다 이소의 가슴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다 나으면 그땐 질리도록 안아 줄게, 며칠 못 걸어 다닐 만큼.”

상냥하고 농밀한 위로에 이소는 귀 끝을 발갛게 붉히고 해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저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어느새 해준과 이어져 있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구는 자신이 수치도 모르고 날뛰는 망아지처럼 느껴졌다. 해준이 이소의 뒷목에 입술을 찍어 내리고는 깊게 끌어안았다. 해준의 심장 소리와 흐릿한 호흡이 맞닿은 이마와 뺨을 통해 전해졌다.

“같이 자고 싶어요.”

“푹 자요. 곁에 있을게. 네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이리 어루만지며 네 얼굴을 보고 있을 테니까. 자, 숨 천천히 뱉으면서 눈 감고.”

밑도 끝도 없이 빠지는 무의식의 세계, 발밑이 훅 꺼지듯 잠이 들었던 때와 달리 해준의 품에서는 아주 편안하게 따뜻한 물로 걸어 들어가듯 눈이 감겼다.

“안녕…, 잘 자요…. 잘 자요, 교수님.”

“내일 봐, 이소야.”

바라옵건대 다시 눈을 떠도 평화로운 이곳이기를. 모두가 걱정없이 웃고 떠들었던 달밤이 한 여름밤의 꿈이 아니기를.

이소는 그리 바라며 잠에 빠졌다.

* * *

빛이 얇은 눈꺼풀 위를 간질이면 비로소 아침이 온 것을 알아차리는 그런 날이 있다. 귓가에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만으로도,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의 보송보송한 감촉만으로도 눈을 떴을 때 찾아온 아침의 행복 지수를 가늠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있다. 이소는 느릿느릿 눈을 떴다. 머리를 맑게 하는 편안한 나무향이 가득한 방 안, 눈보다 새하얀 이불을 사브작거리며 제 앞으로 끌어당기자 그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해준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먹색 잠옷을 입고 이소의 왼손을 쥔 채 잠든 해준에게서 시원한 나무 향이 났다. 이소를 재우고 뒤늦게 씻고 온 건지 항상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은 반달같은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해준은 밤에는 참 늦게까지도 깨어 있으면서 이른 아침에는 이소가 흔들어 깨워도 잘 못 일어났다. 전에 문준경 집사말로는 대체로 이소를 만나지 않으면 집에서 누워 있거나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이 여실히 믿겼다.

문득 이소는 이불을 들춰 안을 들여다보았다. 제 샤워 가운 아래로 어제는 입지도 않았던 속옷이 입혀져 있었다. 해준이 제 몸을 만진 후에 뒤처리까지 모두 한 듯 이불 안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소는 손등을 들어 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곤 해준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침대를 내려왔다. 간밤에 술을 잔뜩 마셨더니 시원하고 달큰한 것이 당겼다. 자연스럽게 해준이 저를 위해 개켜 놓은 새 옷을 집어 몸에 꿰어 입은 후 조심스레 장지문을 열었다.

아침 이슬이 내렸는지 정원의 흙이 보기 좋게 젖어 있었다. 이소는 마루에 앉아 신발을 꼼꼼히 신고 타박타박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새 일어난 사람들이 새 손님에게 반갑게 허리를 숙였다. 간밤 그렇게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멀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바삐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니 몇 시간 전 일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이소는 어제 봐 두었던 조리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달그닥 달그닥 조리도구들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제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정겨운 소리라 이소는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문 앞에 얌전히 서 기다리자 밥을 짓던 나이 든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제 본 잘생긴 새 손님이 말쑥한 차림으로 공손히 손을 모으고 있자 그녀는 이를 환히 드러내고 웃었다.

“조찬은 따로 갖다드릴 텐데…. 따님 뵈러 내려오셨나?”

아, 해수 생각은 정말 하나도 하지 못했는데. 이소는 괜히 멋쩍어 얼굴을 붉혔다. 해수는 아마 어제 늦게까지 놀았으니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날 것이다. 이소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사실 목이 좀 말라서….”

“물을 좀 드릴까? 결명자랑 옥수수.”

이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 때문에 괜히 아침 시간에 번거로울까 쉬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꾸준히 혀끝을 촉촉이 적시는 단맛이 그리 당겨 견딜 수가 없었다. 애를 밴 것도 아닌데 뭐가 이리 집요하게 생각이 나는지. 이소는 제 앞에서 푸근하게 웃어 보이는 여자에게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손님의 까다로운 취향을 맞추기에는 아침 시간이 분주했던 여자는 젖은 손을 명주 수건에 문지르며 드시고 싶거나 마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편히 말해 보라 채근했다. 생각보다 이 조리방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만들어서라도 주겠노라고.

그 말에 잠깐 사이 이소의 머릿속에는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유채꿀은 달콤하나 풀맛이 나고, 종종 마셨던 바나나 우유는 혀가 텁텁하고, 탄산음료도 영 아니었다. 차 종류는 떫은 맛이 나 당기지 않고, 주스는 더더욱 아니었다. 조금 더 새콤달콤하고 시원하면서 끝맛이 가벼운 것. 이소는 고개를 들었다.

“혹시, 배즙 같은 것도 있을까요?”

여자의 얼굴에 둥근 미소가 피었다.

* * *

시원하게 배즙을 마시고 해준의 것까지 야무지게 챙겨 온 이소는 언덕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랐다. 마루에 다과 쟁반을 내려놓은 후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종류도 규모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가 한데모여 어우러진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사실 제 것도 아닌데 뭐 마음에 안들고 자시고 할 것도 아니었지만, 이소는 그저 해준의 정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끄러운 속이 가라앉는 것 같아 좋았다. 정자 계단에 쪼그려 앉아 오물오물 한과를 씹어삼켰다. 그렇게 해준이 깨기를 기다렸다.

30분이 지나도 영 해준이 일어날 기미가 없자 이소는 안채로 발을 옮겼다. 안채에는 방이 못해도 대여섯 개는 있었는데 모두가 사용하는 방인지 물건과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와 해준이 잠들었던 침실, 단정하게 정리된 옷방, 고서와 화선지가 가득했던 서재 겸 작업실, 손님맞이용 응접실 등 이소의 집 거실보다 큰 방들이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소는 몸을 돌려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서늘한 바깥과 다르게 해준의 향이 잔뜩 배어 있는 포근한 공간이었다. 무슨 책들이 영어, 일어, 중국어와 한자들로 범벅이라 못 알아듣는 것들 천지였지만 한국어로 쓰여 있다고 해서 딱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소는 몇 번을 곱씹어 읽다가 인상을 찌푸리곤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창이 정 가운데로 들어오는 거대한 책상에 어지럽게 늘어진 화선지와 붓, 수려한 그림들과 자료집들 사이 눈을 사로잡는 오래된 액자가 있었다.

이소는 잠시 시선을 멈추고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얼굴을 무너뜨렸다. 어린 해준이었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이소는 허리를 숙인 채 액자를 들고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미묘하게 지금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잔디밭을 배경으로 반지 낀 여자의 손을 잡은 해준은 앳된 얼굴에 비해 팔다리가 길어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앙다물린 입술과 반항심이 짙어 보이는 표정은 그 또래 남자아이와 꼭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줍게 웃는 듯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낡기는 했지만 깨끗해 보이는 옷을 걸친 해준의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맨날 자신보고 예쁘다, 예쁘다 하더니.

“예쁘긴 자기가 더 예뻤네.”

이소는 눈을 접어 웃으며 액자를 쓰다듬었다.

* * *

“정숙 사장님 좀 잘 돌봐 주세요. 잣죽도 좋아하시고 수정과도 좋아하세요. 그리고 감기약은….”

“걱정 마요. 푹 쉬시다가 내려보내 드릴게.”

해준의 집에서는 꼭 5일을 쉬었다. 마지막 내려가는 길에 해준은 퍽 아쉬워하며 며칠 더 쉬다 가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소는 제 몸을 단단히 얽은 팔을 겨우 떼어 내곤 가게로 돌아왔다. 이래저래 어찌 되었건 제집은 낡은 3층 빌라였고, 가게도 옮길 때까지는 계속 운영해야 했다.

약한 감기에 든 정숙을 해준의 집에 맡겨 두고 내려온 이소는 가게 앞에 서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고작해야 5일이었는데 가게 문 앞에 누군가 일부러 줄을 세워 놓고 간 듯한 흰 장미가 무려 다섯 바구니나 있었다. 모두 같은 곳에서 보낸 건지 디자인이 꼭 같았다. 아침 열 시에 이소가 가게 앞으로 내려왔으니 적어도 이른 아침에 놓고 간 것까지 해서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꽃바구니가 도착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대낮에 찾아와 저를 찾는 성의라도 보였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받는 사람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툭 던져 놓은 모양새가 불쾌했다.

“…장난이 좀 지나치지 않나?”

이소는 바구니를 들어 휙휙 둘러보았다. 혹여 제가 찾지 못하는 메시지라든지 카드가 끼어 있을까 봐 장미를 모두 뽑아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보낸 이가 누구인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칠 만한 사람을 떠올렸지만 그 사람은 현재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소는 주저없이 장미 바구니를 들어 이 동네 사람 모두가 버리는 담벼락 옆 쓰레기장 공터에 갖다 버렸다. 한두 개면 기분좋게 받을 수 있었지만 거의 매일,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 도착하는 발신인불명의 장미 바구니가 달갑지 않았다.

5일 동안 비운 가게에서는 그새 퀴퀴한 냄새가 났다. 오래된 건물은 이따금씩 악취가 배관을 타고 올라온다. 이소는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테이블에는 정숙이 공부를 하다 올려 두고 간 영어책이 펼쳐져 있었다. 취미치고는 꽤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책 끝이 너덜너덜했다. 구불구불한 글씨로 몇 번이나 받아쓰기를 하고 단어를 외우는 것이 본격적인 느낌이 강했다. 혹시 미국 사는 아들이 모셔 간다고 했나. 오늘따라 빠른 눈치에 입이 썼다.

생일파티용 주문을 어느 정도 마무리해 두고 집에 올라간 이소는 어수선한 집 안 꼴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정말 정신없이 나왔나 보네.’

이불을 개지 않고 해준의 집으로 출발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나 개판을 해 놓고 간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흩어진 약통, 덜 닫힌 창문, 대충 쌓인 빨랫감과 흙이 묻은 현관. 이소는 빗자루를 들어 살살 쓸어 버리면서도 영 개운치 못한 생각이 들어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매일매일 치우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요 근래 계속 번잡스러운 일만 생기니 예전만치 깔끔하게 사는 게 어려웠다. 분명 일이 년 전에 비해 환경이나 상황이 훨씬 나아진 것 같은데 어쩐지 매일매일 시한폭탄을 떠안고 있는 듯한 기묘한 불안감이 가라앉질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는 건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걸 되새겨 봤자 어차피 현재가 달라질 리는 없을 테니까. 이소는 서랍을 열어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초여름이 다 지나가는 마당에 이따금씩 출처 없이 오한이 들이닥쳤다. 분명 근육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이소는 지난밤 해준이 가마솥을 번쩍 들어 올리던 것을 떠올리며 마른 제 팔을 매만졌다. 해수를 안아 주거나 20kg짜리 쌀 한 포대를 옮기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생활 근육 말고는 운동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 그렇게 차이가 나나 싶었다. 이소는 방을 정리하고 맥락없이 온갖 잡생각들을 하며 아주 오랜만에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전화가 안 되면 얼굴이라도 마주해야 한다. 정말 내키지 않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눈으로 확인이라도 해야 했다. 고태균 대표는 장난질은 저급한 편이어도 돈에 있어서 맺고 끊는 것에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편이었다. 저와 아직 정산이 끝나지 않았는데 연락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소가 연락을 끊는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와 서류를 들이밀고 손가락이라도 잘라갈 위인이었다.

이소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토바이가 누런 타일이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건물 앞에 도착해 엔진음을 죽이자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언제나 기죽은 듯 들어와 울며 나갔던 곳. 연락이 안 된 지 보름이 넘었다. 이소는 버릇처럼 눈을 내리깔고 주먹을 쥐었다 펴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섰다. 언제나 남자들의 낮은 목소리와 기침 소리, 요란한 전화 벨 소리가 울리던 곳.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건물을 오르는 제 발자국 소리만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이상했다.

툭 튀어나온 은색의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이소는 당황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보인 고 대표의 사무실이 뭔가 어수선했다. 문득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 쓰러져 있으면 어쩌지. 뭔가 무서운 광경이 저를 맞이하면 어쩌지. 이소는 어금니에 힘을 주고 문고리를 천천히 당겼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깨진 화분들과 통째로 엎어진 프린터, 박살 난 컴퓨터, 갈기갈기 찢어진 서류들과 몇 군데에 선명히 남은 핏자국. 이소는 희게 질린 채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바탕 싸움이 일어난 자리였다.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들과 많지 않은 혈흔, 고 대표가 중요하게 관리하던 캐비닛 안 서류들까지 모두 그대로 놔둔 채 비어 있는 사무실. 이소는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나 독사같이 제 곁을 빙빙 돌며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고태균의 손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마구잡이로 찢긴 수기 장부들을 밟으며 이소는 다급하게 일 층으로 뛰어 내려왔다. 설마, 내가 들어오면서 잘못 본 거겠지. 착각했겠지.

그러나 일 층에 도착한 이소는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걸려 있었던 그 오래된 파라다이스 대부 현판이 통째로 보이질 않았다. 밖에서 본 건물 창문 곳곳에 붉은 락커로 누군가 엑스 표시를 요란하게도 쳐 놨다. 외벽 전체에 붙은 철거 딱지와 함께 내부가 완전히 비어 버린 것을 확인한 순간 이소는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고 대표가 증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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