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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그 날 밤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었다.
불이 꺼진 본가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기자들은 꽤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지친 표정이었고 누구 하나만 걸리면 개떼처럼 몰려들어 기삿거리를 물을 생각처럼 보였다. 하필 제가 드나드는 오래된 개구멍은 갓난쟁이 아이를 안고 들어가기에 너무나도 작고 더러웠기에 이소는 하는 수 없이 제 교복 재킷을 벗어 아이를 숨겨 정문에 진입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 때문에 몸 씨름을 하다 재킷이 밀려 떨어졌고 갓난아이를 안은 채 당황한 표정으로 선 이소에게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얼른 재킷을 들어 아이를 덮었지만 황급히 도망치듯 떠난 뒷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선명할 것이다.
이소는 남자에게 믹스 커피를 타 내밀었다. 남자의 취향은 아니었는지 남자는 말없이 테이블에 올려 둔 채 이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아세요? 그렇게나 15년을 맞고 멸시당하고 외면하시더라도 그건 제가 친아들이 아니니까… 동생의 아이를 거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 감수할 수 있었어요. 매일매일 잠들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끼니는 챙겨 주시니까, 학교는 보내 주시니까. 사랑은 과분하다고 생각했어요. 회장님 덕분에 얻은 두 번째 삶이었으니까 항상 감사해하며 살아야지 생각했어요.”
살이 에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훈훈한 열기가 이질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주방으로 달려가 우유부터 꺼내어 전자렌지에 돌렸다. 그때는 몰랐다. 아직 어린 아이는 생우유를 마시면 안 되는 줄. 그래도 엄마 젖이 아니면 모든 분유를 구토를 하며 게워 내는 아이에게 어떻게든 뭐라도 주고 싶어 냉장고 안에 있는 고급 유기농 우유를 집어들었다.
허둥대며 온갖 집기를 다 떨어뜨리자 뒤늦게 소란을 알아챈 아주머니가 내려와 성을 냈다. 식사 시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와서 난리를 피우냐며 짜증을 부렸다.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아주머니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2층 구석 방 안에 있는 아이가 큰 소리로 울지 않기를 바라며, 제 책가방에 든 간식거리들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제발 빨리 주방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다.
덥힌 우유를 들고 가 젖병에 넣으면서 부디 맛있게 먹어 주기를 바랐다. 아이야, 할 수 있어. 잘 먹고 기다리고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데려다줄게. 조금 냉정하긴 하시지만 마음씨 좋으신 분들이야. 아이들을 돕는 활동도 많이 하시고, 학교도 여러 개 지으셨어. 분명 너를 반겨 주실 거야. 당장은 놀라시겠지만…. 그래도 인정해 주시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젖병을 물렸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한 번의 고갯짓 없이 그 많은 양을 꿀꺽꿀꺽 잘 마셨다. 벅차고 고마웠다.
“어쩌면 저는 그 순간에도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범양의 핏줄이니까, 버려지게 두지 말아야지. 단칸방 차가운 바닥에서 엄마 없이 말라 죽어 가는 그런 일은 없게 만들어야지. 그런 일이 일어나면 회장님에게도, 사모님에게도, 형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까. 책임을 물으려 했다기보단 그저… 처음으로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데려갔었던건데.”
이소는 머리를 쓸어올리고 코를 훌쩍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화가 치밀어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흥분한 윤치승 회장의 두툼하고 커다란 손이 제 뺨을 갈기고 밀쳤을 때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며 재떨이로 머리를 맞았을 때는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또박또박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던 것까지도 기억이 난다. 그 자리에 주영이 있었다면 제 편을 들어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역정을 내는 윤치승을 설득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제 몫이었다.
이소는 가방에서 은형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회장님, 이 아이 주영이 형 아이예요. 지금은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아마 형이 오면 다 설명해 줄 거예요. 여기 메시지 보면 돌아온다고….’
이명희가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아이를 왜 네가….’
‘당신 조용히 해. 그것부터 내놓거라.’
윤치승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던 이명희가 이소의 손에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천천히 넘기며 얼굴은 시시각각 일그러졌다. 이명희가 윤치승에게 핸드폰을 넘기고 윤치승이 주영과 은형의 기록을 훑어볼 동안 이소는 그 시간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머리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에 고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다리가 저렸다. 그래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서 일어나 손녀 얼굴 한 번 보자, 하고 저를 일으킬 것이라 기대했다.
‘정말 나는 이제 널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얘. 어쩜 주영이는 저런 애를 들여서는.’
이소는 고개를 들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피가 이마를 타고 흘렀다. 보기 추했다. 당신이 깔끔하게 처리해요, 시끄러워지지 않게. 이명희는 아이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냉정히 돌아섰다. 사모님, 가지마세요. 이소가 고개를 돌리자 윤치승은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손수건을 꺼내 제 이마를 두드렸다. 이소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 처음 있는 다정한 접촉이었다. 정성스럽게 피를 닦아 낸 윤치승이 이소를 일으켰다.
‘어렸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넌 참 보기 드물게 순하고 착한 아이란 말이야.’
‘…….’
‘그래서 우리 주영이가 널 마음에 들어 했는지도 모르고. 그 못된 것이 너만 곁에 두면 그렇게 얌전히 굴지 않았겠니. 너를 데리고 있으면서 온갖 추문, 책임, 의무를 감내해야 함에 불구하고 내 아들 때문에 널 여태 내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젠 아주 시키지도 않는 동정을 베풀어 썩 곤란하게 하는구나.’
‘회, 회장님. 그건….’
‘뭐 그래도. 그 덕분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주영이 씨도 미리 안아 볼 일이 생기지 않았겠니.’
분명 제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따뜻했는데 가슴은 어느 때보다 시렸다.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심장이 사정없이 뛰었다. 아이 이리다오, 인자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마치 양의 탈을 뒤집어 쓴 늑대의 음성처럼 느껴졌다. 잠시간 망설이던 이소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우유를 잔뜩 마시고 세상 모르고 잠에 빠진 얼굴에서 주영의 어린 시절이 보이는 듯 했다.
이소는 고개를 들어 윤치승을 바라보았다. 팔을 벌린 채 미소를 띤 얼굴은 종종 TV에서 보던 윤치승의 온화한 미소였다. 이소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치승이 웃고 있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너무 맞고만 자라서 이 사람이 이렇게 손녀를 인정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래서 혈육이 무서운 건가. 잠든 아이를 천천히 품에서 떨어뜨려 치승에게 넘기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이명희가 던진 말의 종지부가 가시처럼 제 머릿속에 콕 박혔다.
‘처리해요. 시끄러워지지 않게.’
동시에 아이를 안기 직전의 윤치승의 팔이 뒤로 쑥 빠지는 것을 알아챈 이소가 황급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이를 잡아챘다. 모과보다 조금 큰 아이의 머리통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처박히기 전 아이를 받아 낸 이소가 몸을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순식간에 머리에 피가 몰렸다. 다시금 새어 나온 피가 눈썹을 적셨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아기 떨어뜨리실 뻔했잖아요!’
‘뭘 기대하고 내게 데려온 거냐. 내가 어디 근본 없는 기집애와 배 맞았다고 해서 이걸 호적에라도 올려 줄 거라고 기대했니? 아니면 네가 그랬듯이 내가 알량한 동정으로 거둬 키울 거라 여겼어?’
‘…….’
‘내게 주거라. 적어도 어린 너보단 내가 처리하는 게 더 확실할 텐데.’
윤치승은 바닥에 웅크린 이소를 바라보며 뇌까렸다.
‘아,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회장님. 정말로 안 돼요…!’
축 처진 이소의 눈에 핏발이 섰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었다. 발에 채이는 들꽃 따위가 아니다. 방 안에 기어 들어온 벌레 따위가 아니다.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지 제가 우유를 꼴딱꼴딱 먹이던 사람의 아이였다. 윤치승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소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뭘 어쩌게. 네가 할래?’
‘네…?’
살의에 가득찬 조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품에 안은 아이가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저택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소가 입술을 떨었다.
‘회장님. 제, 제가 어떻게…. 아니, 뭘. 뭘 하라는….’
윤치승은 고개를 기울였다.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였지만 대체로 언제나 그런 모습일 때가 많았다.
‘주영이는 장차 범양을 물려받을 아이야. 영국에서 학위를 수료하고 오는 대로 경영권을 물려받을 테지. 천방지축으로 좆질을 하고 씨까지 뿌려댄대도 날 닮아 성정이 괴팍하고 자유분방한 걸 어쩌겠어. 그때마다 근본도 없는 애들을 내 핏줄이라고 인정해 줄 수는 없잖니. 설사 정말 이 일을 주영이가 원하지 않는대도 나는 아비로서 그 애의 앞길을 닦아 줄 필요가 있어. 그나마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아이를 데려온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지. 기자들이야 입 막음 하면 되는 일이고.’
피가 너무 흘렀나 보다. 이소는 윤치승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이소를 두고 윤치승은 회유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영이가 너를 비서로 앉히고 싶어 하더구나. 그래서 이번 유학을 같이 가고 싶어 한다지.’
이소는 주영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소야, 나랑 같이 살자.’ 양친의 장례식장에 쪼그려 앉아 있는 저를 부르던 어린 형의 다정한 음성은 어느덧 스무 살 이소에게 유학을 같이 가자며 달콤한 제안을 하는 스물넷의 형의 목소리와 겹쳐져 제 머릿속을 헤집었다. 주영은 버려진 땅에서 저를 구제한 은인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정말 뛸 듯이 기뻐하며 형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주영이 곁에 남을 수 있다면 개똥밭에서도 구를 수 있었다. 윤이소는 주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이 일만 잘 끝내고 나면, 군말 없이 너를 주영이 곁에 남게 해 주마.’
아이의 우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소는 아이의 입을 막고 싶었다. 듣기 싫은 두 소리가 겹치자 머리가 아파 왔다.
‘이건 야산에 묻든지 강에 던져 버리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다만 확실하게….’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번쩍이는 불빛 아래 윤치승의 안광이 번득였다. 태어나서 본 가장 무섭고 섬뜩한 낯이었다.
‘죽여 버리고 와.’
결국 스무 살 소년의 눈에서 떨어질 듯 말 듯 고여 있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 * *
“저희 둘은 그때 이미 한 번 죽었어요.”
이소는 마지막으로 제 입에 식은 믹스 커피를 털어 넣고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를 빌미로 범양에 입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15년을 겉돌았는데 스무 살이 되어 입적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카의 무덤을 밟고 선 채 죄책감에 시달리다 매일 밤 잠이 들었을 것이다.
못하겠다고 윤치승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이 아이만이라도 거두어 달라고 빌었다. 살인 자체가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인다는 것은 이소의 선택지에 없었으니까. 다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생명을 꺼뜨리는 선택을 거리낌없이 하는 치승 일가가 두려웠다. 처음으로 제 앞에 선 늙은 사내가 가진 권력의 크기가 실감났다. 이소는 작은 개미 하나도 못 죽였다. 그런 저에게 아이의 숨통을 끊어 놓으라는 것은 제가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던진 덫과 같았다.
윤치승이 이소의 작은 턱을 움켜잡았다. 이소는 어둡고 거대한 저택이 저를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못 죽이겠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강하게 움켜잡은 손이 우악스럽게 이소의 턱을 잡고 올려 들었다.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입술을 떨었다. 윤치승의 눈동자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이 애를 데리고 꺼져.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앞으로 평생 주영이에게 연락도 하지 말고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을 지우고 살아. 눈에 띄는 일 없이 지금처럼 쥐 죽은 듯이 숨어 살아. 경찰의 도움을 받거나, 기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발설하면 그 날로 너와 이 애새끼는 개천에 떠다니는 시체 두 구로 사회지 1면에 실리게 될 거야.’
어린 이소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다시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게요. 잘 숨어 있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죽이라고 하지 마세요. 대상을 잃어버린 애원은 차가운 공기 주변으로 흩어졌다. 몇 푼 안 되는 돈과 낡은 가방을 등에 진 소년은 지친 아이를 품에 안았다. 콰르릉, 다시 한번 천둥번개가 하늘을 때렸다. 조용히 저택 뒷문을 열었다. 정문에 기자들이 바글바글했기에 이소는 냅다 뒷문을 통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빈 골목만이 버려진 두 영혼의 도피처가 되었다.
그렇게 무작정 비를 맞고 달려간 곳은 버스정류장으로 두 정거장이나 떨어진 진혁의 집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갈 곳은 없었고 무엇보다 제가 정신을 잃으면 그대로 객사할 판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잠시간 기다리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오늘 많이 힘들지. 조금만 있으면 눕혀 줄게, 따뜻하게 안아 줄게.
문을 연 진혁이 저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었다. 그때 볼만했는데. 진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려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몇 달 뒤 술자리에서 그때를 반추한 진혁 말로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고 했다. 빗물과 섞인 울음은 온몸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스무 살 윤이소는 다시 한번 버려졌다. 주영의 아이와 함께.
이소는 반질반질한 손톱 주위를 매만지며 마른 살갗을 예민하게 긁어내렸다. 이제는 시간이 꽤 지나 담담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먹먹한 기억인가 보다.
“그리고 계속 도망 다녔어요. 절에도 몇 년 있었고, 센터에도 몇 년…. 친부가 아니니까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고 그저 보호자 명목으로 아이를 데리고 있기에는 버거워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저 회장님께 많이 배웠거든요. 아주 기본적인 보살핌만 있어도 아이는 자라긴 자란다는 걸.”
이소는 꼭 그렇게 자랐다. 아주 기본적인 것만 받고 먹으며 자랐지만 운 좋게도 잘 자랐다. 그래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찬이 넉넉하지 않아도 삼시세끼 빠뜨리지 않고 잘 먹이고 찬 데서 재우지 않으려 항상 몸을 덥혀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돈이 부족해도 사랑을 듬뿍 주면서 기르면 아이는 잘 자랄 거라 여겼다.
그리고 돌봄센터에 보낼 때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매번 긴 상담을 거쳤다. 친아빠는 아니지만 아이를 데리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이가 저를 아빠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리고 친부가 아닌 동거인으로 등록된 이소는 정기적으로 법원에 가 아동 학대 정황은 없는지, 아이의 영양 상태는 정상적인지 등 양육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는 소명 자료까지 내야했다.
귀찮고 모욕적인 질문을 받았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매년 심사를 통과하고 약간의 지원비를 받을 때마다 안심했다. 제가 해수를 잘 기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저희 해수 참 잘 웃어요. 횡단보도에서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의 속도에 발 맞추어 걸어 주기도 하고, 저보다 어린 동생이 있으면 제가 배가 고파도 반이나 뚝 떼서 나눠 주는 애예요. 친구들 사이에선 꽤 인기도 많고, 세상에서 자기 아빠가 해 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는 애예요. 어른스러워 보여도 아직도 잠잘 땐 제 손 붙잡고 자는 겁 많은 녀석인데….”
이소는 피식 웃었다. 애답지 않다고도 생각할 때가 많았지만 기억을 더듬다 보면 역시 아이다운 구석이 많은 해수였다.
“그런 애를 어떻게 이렇게 쉽게 달라고 하세요.”
남자는 한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뒤늦게 갈증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이소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류 따위는 들춰 볼 생각도 없었다. 10억짜리 건물이든, 20억짜리 땅이든 재산은 제게는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물론 돈이 아쉬울 때도 있었다. 해수에게 좋은 음식을 못 먹이거나 수준에 맞는 교육을 못 시킬 때는 특히나 그랬다. 그럼에도 몸을 팔면 팔았지 범양에 손 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소는 어느새 젖은 눈을 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쁘지.
“묻으랄 땐 언제구.”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돌리곤 눈가를 매만졌다.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자 어째서인지 피식 웃음이 났다. 아, 정말 신파가 따로 없네. 제대로 녹음이 되었으려나. 일부러 과장되게 말한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제 간절한 마음만큼은 전해졌기를 바랐다. 그들의 얼어 버린 마음에 아주 조금의 균열이라도 생겼기를 바랐다. 이소가 바란 것은 통쾌한 복수극이 아닌 평온한 일상이었기에, 이제 그만 저희를 내버려 두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했다.
이소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 쓰레기통에 종이컵을 버렸다.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았다. 앞치마를 풀어내 옷걸이에 거는 동안 남자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이 코를 훔쳤다. 티슈를 건네는 친절은 일부러 베풀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딱 그만큼만 무심하기로 했다.
* * *
언제 울었냐는 듯 남자는 손수건으로 눈과 코를 한 번 닦아 내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이소가 느리게 블라인드를 걷었다. 삐걱삐걱 올라가는 낡은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이소의 얼굴을 부드럽게 훑었다. 타고난 외양과 의연하고 여유로운 태도는 재계 도련님 시절의 품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범양에 남았더라면 아마 이 청년을 마음에 둔 집안사람들이 줄을 섰을 것이다.
이소는 발부리를 들어 문을 열고 팻말을 다시 ‘영업중’으로 바꾸어 놓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그만 가셔야죠.”
이소는 이제 남자를 완전히 내보낼 준비를 했다. 문을 열자 꽉 막혀 있던 축축한 공기는 바깥으로 길을 텄다.
남자는 가방을 챙겨 들며 가게를 한 번 둘러보았다. 조도가 낮아 오래 있으면 눈이 침침한 곳, 오래된 천장형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는 눅눅한 공간, 앉을 공간이라고는 주인이 재료를 다듬을 때 쓰는 테이블 두어 개가 전부인 곳. 스물일곱 윤이소가 홀로 딸을 기르며 살아가는 초라한 천국. 저도 윤치승 일가 사람이지만 가진 것 없는 이 가난한 청년에게서 기어코 칠 년을 기른 딸을 포기하게 만들어 달라는 명령은 참 내키지가 않는 것이었다.
“주제넘게 개입할 것은 아니지만, 사견을 하나 말씀드려도 됩니까.”
“상처를 주려는 말이면 안 듣고 싶은데.”
“기왕이면 도움이 될까 하고요.”
문 앞에 선 이소가 자세를 고치고 섰다. 어떠한 감정과 동요도 없이 잔잔한 호수와 같은 눈을 하고서 이소는 그렇게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혹시 칠 년 동안 윤주영 이사님과 연락이 닿으신 적이 있었나요?”
“유감스럽게도, 없었어요. 한 번도요.”
주영이 영국으로 가 버린 후 이소는 한동안 주영의 꿈을 자주 꾸었다. 그 집에서 저를 가장 많이 보살펴 준 사람, 주영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예절을 배우고, 주영과 같은 학교에 가고 싶어 남몰래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다. 큰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른 날은 둘 다 곤죽이 되게 맞은 뒤 함께 지하실에 갇혔고, 두 소년은 상처를 달고 윤 회장의 오래된 소주를 꺼내어 마시며 웃었다.
그런 주영이 친구 은형과 사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영이 은형의 과외를 맡아 준다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둘이 데이트가 있는 줄 모르고 주영의 연락을 받고 쭐레쭐레 영화관에 가기도 했고, 주영이 사 주는 주스를 얻어먹으러 카페에 들렀을 때도 은형은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 순간 데이트마다 제가 눈치없이 끼어들었다. 그럼에도 주영은 단 한 번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이소야, 평생 내 동생 해.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이소는 그런 주영을 퍽 좋아했다.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도 주영이 문을 열고 들어와 끌어안아 주면 숨이 트였다. 제게만은 언제나 잘 해 줬던 주영이라 버틸 수 있었다. 때문에 집을 나오고도 꽤 오랫동안 주영의 연락을 기다렸다. 범양에 놓고 온 것들 중 주영이 제일 아쉬웠다.
“회장님께서 연락하지 말라고 하시기도 했지만, 형 역시 그 이후 쭉 저한테 연락한 적 없었어요. 그리고, 음…. 저희가 예전처럼 지내기엔 이제는 너무 멀리 와 버렸죠. 지금의 형이라면 절 미워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자조적으로 웃으며 끝낸 이소의 대답에 남자는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안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 만날 거라니깐, 꼭 그렇게까지 확답을 듣고 싶은 건가 싶었다. 이미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인데.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소가 눈동자를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묘하게 확신하는 말투였다. 불안과 의심을 담은 눈빛을 읽었는지 남자는 재차 덧붙였다.
“윤주영 이사님께서 이소 도련님을 미워하진 않을 거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오히려 반대일지는 몰라도.”
“아하하하하.”
이소는 오늘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가늘게 접히는 눈꼬리 끝이 가볍게 휘어졌다.
“글쎄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큰 위로는 되지 않네요. 어차피 그 집안 사람이잖아요.”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곤 가게 문을 열었다. 이소는 가게 앞에 서 남자가 탄 고급 세단이 멀어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주영이 이소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말, 남자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은 이소의 마음에 닿기도 전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누가 되었건 쉽게 믿어 버리는 것은 어려워진 지 오래였다.
30분 남짓이었지만 남자가 남기고 간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폭풍이 몰아쳤다. 이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배가 태우고 싶어졌다.
* * *
“이소 씨, 왜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어.”
어느새 일을 마치고 다가온 정숙이 걱정스레 물었다. 앞치마도 벗은 채 나와 있던 이소와 불이 꺼진 가게를 번갈아 보던 정숙이 이소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들어? 힘들어서 그렇지, 어여 들어가. 그러니까 왜 죽만 먹던 사람이 괜히 나와서 일한다고 그래. 정숙의 두툼하고 따듯한 손이 퍽 반가웠다. 엄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이소는 종종 정숙을 보며 감히 그런 생각을 품곤했다.
“웬 영어책이에요?”
정숙의 손에 빳빳한 새 영어자습서가 들려 있었다. 해수를 위해 산 것치고는 너무 기초였고 어디서 얻어 왔다기에는 지나치게 새것이었다. 꼭 서점에서 방금 구매한 것처럼 띠지도 둘려 있었다. 이소의 말에 정숙은 얼굴을 붉혔다.
“아, 응. 별 건 아니고…. 언젠가 손주들 만나면 걔넨 영어로 말할 텐데, 할머니도 한두 마디 해야지 싶어서.”
“미국에서 연락 왔어요?”
정숙의 아들 부부는 미국에서 사업을 한다. 언제나 자랑스레 늘어놓던 아들 이야기를 들으며 이소는 의아했다. 그리 대단하신 아들은 어째서 이 허름한 가게에 어미를 두고 연락 한 통이 없는가. 술이 들어가면 시시콜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정숙은 그런 아들에게 퍽 섭섭해하면서도 제가 먼저 연락해 볼 엄두를 못 냈다. 정숙은 그렇게 퍼 주고도 더 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했다. 그런 점은 못 견디게 슬프면서도 공감이 갔다. 저 역시 그랬기에.
“지금은 바쁘지. 나중에. 나중에 만나게 되면 놀래켜 주려고. 아유, 근데 칠십 다 돼서 하려니까 아주 엄두가 안 나네.”
“그래도 잘 하실 거예요. 나중에 미국도 다녀오시고 이러면 더 좋죠.”
“그러게. 가서 아주 같이 끼고 살았으면 좋겠…. 아…, 뭐 그냥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정숙은 괜히 말을 하다 머쓱해졌는지 깔깔 웃으며 이소의 어깨를 도닥도닥 두드렸다. 앓는 소리를 하는 것치고는 꼭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 밤 설레하는 소녀마냥 상기된 얼굴이었다. 가족들을 만난다면 정숙에게 참 좋겠지. 핏줄도 아닌 해수도 이리 예뻐하는데 친손주들은 얼마나 아낄까. 다만 저도 모르게 정숙이 제 곁에 끝까지 남아 주기를 바랐나 보다. 미국 가서 살고 싶다는 정숙의 말에 아주 조금 서운함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나도 참 못됐다. 이소는 자조했다.
이소는 자신의 어깨에 얹힌 정숙의 손을 제 손으로 살짝 포갰다. 평소에는 털끝 하나라도 닿을까 조심했고 상냥하기는 했지만 여우마냥 살갑게 구는 일이 없는 이소였기에 정숙은 놀란 눈을 하고 이소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 사람이 웬일이지? 그러나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제가 아는 말간 얼굴의 청년, 윤이소가 맞았다.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좋아 보이세요.”
“응? 뭐가.”
“그냥…. 다요.”
영어 공부를 하시는 것도, 예쁜 봄옷 입으신 것도, 머리 다시 볶으신 것도, 화장품 바꾸신 것까지 모두 다. 이소의 말에 정숙은 이를 드러내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이소는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정숙이 좋다는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질투를 하고 말고가 있겠는가.
정산을 마친 이소는 오늘은 먼저 올라가 보겠다고 말한 후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손에 들린 하얀 장미 바구니가 보기보다 묵직했다. 이 정도는 쉽게 들고 갈 수 있었는데 역시 무리했는지 조금 어지러웠다. 자꾸만 손에 힘이 빠지는 걸 보니 오늘 밤은 고기를 먹어야겠지 싶었다. 이틀 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만 자서 아마 소화가 좀 더디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푹 고은 수육을 얇게 저며서 그릇에 소담히 올려놓고 먹으면 기력을 좀 찾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현관 앞에 올라온 이소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직도 바느질을 제대로 하지 않은 카디건의 안감 구멍으로 손가락이 빠졌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
아주 어렴풋한 기억 속 해준이 이곳에서 저를 끌어안았던 것 같다. 워낙 스킨십이 잦은 사람이라 아무렴 여러 기억이 섞여 있다지만 이처럼 자각도 못 하는 사이 해준은 불쑥 나타난다. 아, 보고 싶다. 이소는 열쇠를 찾다가 그만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안감 어디엔가 돌아다니고 있을 열쇠는 내버려 두고 그대로 핸드폰을 들었다. 엉덩이에 닿은 차가운 바닥에서 축축한 냉기가 올라왔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해준♥, 해준♥, 해준♥, 해준♥]
통화 목록에는 오직 해준의 이름뿐이었다.
‘차해준 교수님’이라고 해 놓은 이름을 언제 또 제멋대로 바꾼 건지 웃음이 났다. 이소는 이름을 꾹 누르고 눈을 감았다. 두통으로 미간에 골이 팼지만 그래도 수화음이 넘어가는 동안 숨을 고르고 참았다. 남자와 나눴던 이야기, 정숙에 대한 서운함까지 뒤늦게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었다. 혈압이 내려가고 있는지 손발이 시렸다. 전화 받아 주세요, 교수님. 수화음이 멎고 이내 들려오는 단정한 목소리.
- 네, 이소 씨.
낮고 담담한 어조로 해준이 말했다. 해준이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세차게 뛰었던 심장과 불규칙한 호흡이 잦아들고 있었다.
- 말해요.
“…응.”
- 밥은, 먹었어요? 가게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갔죠?
“응.”
이소는 현관에 기대어 가만가만 대답했다. 남자에게 너무 많이 떠들어서 그런지 해준과 주절주절 통화할 기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래도 아주 간결한 대답만으로도 납처럼 무거웠던 머리는 가벼워지고 있었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 반말도 듣기 좋다. 나 보고 싶어서 걸었어요?
그 말에 이소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어떻게 알았지.
“응.”
진심이었는데, 이소의 말에 해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직 바쁠 시간일 텐데 괜한 시간을 빼앗았나 싶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오매불망 해준만 기다리는 꼴이 된 건지 저도 알 수가 없었다.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불규칙하게 깨진 바닥의 균열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나직하게 귓가를 때리는 음성에 불안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 …이소 씨, 무슨 일 있어요?
말하지 말까, 말할까. 찰나의 시간을 고민했지만 이성보다는 감정이 먼저 해준을 붙잡았다.
“…응.”
- 무슨 일.
상냥했던 해준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소는 노기를 띤 목소리를 듣고도 오히려 엷게 미소 지었다. 해준은 제가 질리지 않을까. 퍽 하면 누구에게 맞고 오고, 사채빚도 있고 좁아 터진 집에서 애까지 끼고 대책없이 사는 이 못난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이리 관심과 애정을 주는 걸까.
“교수님, 미안해요.”
- 이소야.
이소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겨우 침을 삼켰다. 오늘따라 자꾸만 똑바로 생각을 못 하고 응석만 남아 평소에는 하지도 못할 말들을 툭툭 뱉게 된다. 목소리를 들었으면 그만 끊어야 하는데,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고 고기를 삶아야 하는데 전화를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출근하라고 하지 말걸.”
꾸역꾸역 욕심이 났다. 얼마 없지만 제 손에 잡힌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수도 보내고 싶지 않았고 정숙도 제 곁에 남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 해준이 제 불행의 민낯을 보고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왜 저는 다 가질 수 없는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온전한 형태로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도 제 바람은 생각보다 간절하지 못했나 보다.
이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해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참아야 하는데 정말로,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응석이 섞인 욕심이 제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흔든다.
“보고 싶은데, 왜 내 옆에 없어요.”
이소는 답지 않게 툭 내뱉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어 울리는 진동 소리를 모조리 무시한 채 무릎을 끌어안았다. 인정해야 했다. 담담한 척했지만 7년 전 사건들은 여전히 저를 스무 살의 대책없고 어리석은 소년 윤이소로 끌어내린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느냐고, 정말 예상 못 했던 거냐고 악을 지르고 싶었다. 정을 주고 마음까지 다 줘 놓고 어쩌면 모조리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라앉았던 숨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했다. 다시 한번 피로가 몰려와 눈이 잠깐 감겼다.
* * *
완전히 고개가 떨어지려는 찰나 번뜩 눈을 뜬 이소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또다. 또 잠들고 멍청이처럼 다 잊어버리려나 봐. 이소는 손톱을 세워 무릎을 긁어내렸다.
“잠들면 안 돼.”
단단한 손톱이 얇은 옷감을 꾹 누르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내 마디가 꺾이고 힘이 빠졌다. 이소는 제 손을 들어 뺨을 때렸다. 한 대, 두 대, 흰 뺨이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제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잠들지 마, 여기서 잠들면 안 돼. 정숙이 보면 또 얼마나 놀랄까. 곧 해수도 올 시간인데.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주어 들면서 안감 주머니를 뒤졌다. 신경질적으로 열쇠를 뽑아내곤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숨을 몰아쉬고 좁은 구멍에 키를 맞추어 넣었다. 다음 이사 때는 도어록을 설치하는 게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열쇠를 돌리는데 누군가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왔다.”
어떤 개들은 주인의 발소리만 들어도 반가워서 꼬리를 흔든다는데. 이소는 잘 훈련받은 개마냥 기민하게 귀를 기울였다. 이건 아는 소리야, 내가 좋아하는 구두 소리야. 내가 사랑하는 교수님의 소리야.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바로 섰다. 고개를 돌리자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온 해준과 눈이 마주쳤다. 수업을 하다 바로 온 건지 팔까지 걷어올린 셔츠 소매에 먹물이 튀어 있었다. 학교에서만 쓰던 안경을 벗을 새도 없이 뛰어온 모양이었다. 낯설었지만 여전히 근사했다.
“뛰어오셨나 보다.”
이소는 잇새로 옅은 웃음이 터졌다. 해준이 뛰었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해준은 시선을 이소에게 고정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옷차림이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전화 너머 이소의 목소리가 너무 위태위태해서 조교에게 수업을 맡겨 놓은 채 바로 후문을 향해 달렸다.
정말 아주 오랜만에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렸다. 혹여나 윤이소가 제가 없는 사이 또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 봐, 또 호구처럼 어디서 처맞고 있을까 봐. 해준은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어미마냥 다 내던지고 달려왔다.
어두운 현관 앞에 서 있는 이소는 아침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침에는 그래도 몸에 힘이 좀 들어가지 않았다 뿐이지 눈이 맑았고 발그스름한 볼이 생기가 있었다. 도대체 자신이 자리를 비운 그 몇 시간 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볼이 푹 꺼지고 혼이 다 달아난 사람처럼 눈동자에 빛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소야.”
먹물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검은 손 끝이 이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해준이 계단을 두 어개 남겨놓았을 때 돌연 이소의 무릎이 푹 꺾였다. 해준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몸을 숙여 완전히 고꾸라지기 직전의 이소를 끌어당겼다. 해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이소는 중얼거렸다. 나 자면 안되는데, 잠들면 안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소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소야, 나 왔어. 나 왔으니까 이제 자도 돼, 응? 괜찮아. 우리 이소, 코 자자.”
이소의 고개가 아주 작게 흔들렸지만 해준은 이소의 이마에 볼을 한 번 부비곤 안아 들었다.
* * *
오래된 열쇠 구멍 주변으로 여러 번 날카롭게 긁어내린 흔적이 난무했다. 해준은 반쯤 꽂힌 열쇠를 힘주어 돌려 열곤 현관 앞에 열쇠를 집어 던졌다. 언제 데리고 나올지는 모르지만 우선은 이 망할 문부터 도어록으로 교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당겼다.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일을 한답시고 나가서 이렇게 저를 불안하게 한다. 이소는 눈을 감았다 흠칫 놀라 다시 뜨기를 반복하며 해준이 있는지를 살폈다.
“여기 있어.”
해준은 아침에 깔아 놓은 이불에 그대로 이소를 눕혔다. 몸이 완전히 눕혀지고 나서야 이소는 아주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해준은 이소의 손을 잡았다. 아침과 다르게 양손 엄지손톱이 죄다 뜯겨 있었다. 해준은 자연스럽게 팔 닿는 곳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밴드와 연고를 꺼냈다. 살림살이가 단출해도 너무 단출해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외우기 쉬웠다. 해준은 누워서 숨을 고르는 이소의 손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감았다. 찌익 찍, 이소의 하얗고 긴 손가락에 해수의 공주 캐릭터 밴드가 감겼다.
“수업…, 죄송해요.”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요.”
이소는 제 손을 잡은 해준의 엄지를 꼭 잡았다. 저도 남자 손임에도 불구하고 해준의 손을 잡고 있으면 꼭 부모 손을 잡은 아이마냥 안심이 됐다. 마음껏 응석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든든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이야기도 가감 없이 나오곤 했다. 마냥 얌전하지만은 않았던 예전의 윤이소처럼 꼭 그렇게 굴게 됐다.
“자꾸 잠이 와요. 저 몸이 이렇게까지 약하지 않았는데…. 운동해야 하나 봐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나랑 얼마 전에 했었잖아요. 내가 너무 몰아붙여서 그래요.”
이소는 그날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너무했어요….”
“응, 너무했어.”
“변태….”
“맞아요. 나 진짜 변태예요. 타지도 않는 쓰레기에 짐승 새끼, 무뢰배, 난봉꾼….”
“그만 해요. 왜 자꾸 내 교수님한테 뭐라고 해요.”
“내가 우리 이소 아프게 하니까. 미안해서.”
이소가 누워 해준의 손을 살살 흔들었다. 수업을 빠지고 달려와 준 것도 고마웠지만 다 큰 남자가 픽픽 쓰러진다고 무안 한 번 준 적이 없는 해준이 고마웠다. 해준은 저에게 자도 된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해준이 오고 손을 잡고부터는 정신이 다시 맑아지고 있었다. 해준은 약으로 따지자면 각성제 같은 사람일까. 윤이소에게만 잘 듣는 약.
이소는 느린 시선으로 해준의 얼굴을 하염없이 뜯어보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냉장고를 가리켰다.
“오늘 고기 먹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꽝꽝 얼어서 지금 꺼내야 돼요.”
이소가 몸을 일으키자 해준이 손을 저으며 얼른 뒤로 눕혔다. 정말 자신의 상태가 지금 자각이 없는 건지 이소는 가끔씩 이렇게 해준을 당황하게 했다.
“지금 이 상태로 요리를 하려고?”
“나 고기 먹고 싶은데….”
“오늘은 주방 금지예요.”
이소가 입술을 비죽였다. 죽이나 미음 같은 것 말고 속이 든든하고 더운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그렇다고 배달시켜 먹는 것은 성에 안 찼다. 그냥 평소처럼 가볍게 된장이나 풀어서 한두 시간 푹 곤 야들야들한 돼지 살코기가 먹고 싶었다. 그거에 동치미 한 사발이면 답답했던 속이 꼭 풀어질 것 같았다. 이소가 죽 내민 입술을 도통 집어넣을 생각을 않자 해준이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왜, 우리 이소 씨 오늘은 꼭 고기가 먹고 싶어요?”
“네…. 고기 먹고 싶어요….”
“그럼 어떤 거? 전에 못 먹고 간 백숙은? 소고기는? 아니면 양고기는 어때요? 말만 해요.”
해준의 입에서 온갖 고기가 다 나왔지만 오늘 이소는 꼭 임신한 것마냥 그 음식 하나만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수육…. 부드러운 거요. 시원한 동치미도….”
해준이 이소의 머리를 썩썩 쓸어넘겼다. 그럼, 당연하지. 누구 입에 들어갈 건데. 해준은 이소의 동그란 이마를 매만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귀에 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금세 통화가 연결되었는지 해준이 입을 열었다.
“저녁에 손님 모시고 갈 거예요. 자리는 손님방에 두 채, 안채에 한 채 놔주면 돼. 식사는 수육이 드시고 싶다네.”
해준의 말에 이소가 손사래를 쳤다. 또 사람들을 시켜서 번거롭게 만들려는 것 같아 손을 내저었지만 해준은 장난치듯 제 이마를 덮었던 손을 내려 눈을 가려 버렸다. 이소는 이번에는 눈에서 손을 떼어 내려 허우적댔다.
“김치는 맵지 않은 걸로, 동치미가 좋겠는데. 저번에 담근 거 맛이 좋았어요. 여름이 다 되어서 굴은 없지? 그럼 문어로 바꿔 줘요. 고기는 기왕이면 푹 삶아요. 입에 들어가면 살살 녹게.”
이소가 겨우 해준의 손을 떼어 내 제 가슴에 얹어 두었다. 해준은 평소처럼 가슴을 간질이거나 유두를 매만지는 일도 없이 그저 토닥토닥 이소를 두드리며 통화를 이어 갔다. 이소는 그런 해준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참 까다롭고 섬세한 사람이구나. 하긴 그러니까 그 큰 집을 혼자 운영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사는 거겠지. 해준은 잠자리부터 먹는 것, 옷가지까지 모두 새로 준비하라 부탁했다. 집에 있는 잠옷과 세면도구를 대충 꿰어 입고 가면 될 것을 뭐 그런 것까지 시키나 싶었다.
“해수랑 정숙 사장님도 같이 가는 거죠?”
통화를 마친 해준을 향해 이소가 물었다.
“그럼. 그렇게 해야 이소 씨가 마음이 편하잖아.”
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이소의 볼이 붉어졌다. 전에 못 데려가 퍽 아쉬웠는데 이번에야말로 제가 감탄하며 보여 주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게 된다니 마음이 들떴다.
“여사님께는 내가 말하고 올게요. 잠시만 여기 있어요.”
해준이 이소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쉬웠지만 해수의 옷가지와 소지품을 챙겨 갈 것을 생각하니 마냥 부비고 있을 수도 없었다. 해준이 문을 닫고 나가고 이소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서랍으로 기어갔다. 어쩜 이리 몸이 무거운지, 이번에야말로 정말 영양제라도 하나 맞아야겠다 생각했다.
작은 가방에 옷가지를 집어넣고 해준이 준 새 핸드폰의 충전기도 꾹꾹 눌러 담았다. 내일 바로 다시 오겠지만 그래도 지난번 비를 맞으며 해준에게 달려갔던 사건 이후 이소는 꽤나 강박적으로 충전기를 챙겼다. 현관 바닥에 열쇠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또 들어오면서 주머니에서 빠졌나 보다.
“내가 다 준비할 건데 뭘 또 그렇게 일어나서 챙겨요.”
마침 문을 연 해준과 눈이 마주친 이소가 몸을 일으키며 가방 안을 보여 줬다.
“해수 속옷이랑 세면도구랑 충전기랑….”
“우리 이소 수학여행 가네.”
“아니거든요.”
가방의 지퍼를 잠그고 둘러메려 하자 해준이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무겁지도 않은데 해준은 기어코 제 팔에 걸었다. 이소가 신발을 다 신고 현관문을 잠갔다. 뭔가 잊은 것 같았는데 미묘하게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가스는 잠갔고 불도 다 껐고. 속옷도 두 개나 챙겼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해준이 단조로운 어조로 정숙과 해수가 먼저 출발했다는 말을 전했다.
“벌써요?”
“응, 코 앞이니까. 집사님이 데리러 와서 내가 보냈지.”
같이 가야 하는데. 저택 정문 열릴 때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는데.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잠깐의 짬이 나 해준과 둘이 있을 수 있게 됐다. 이소가 해준의 손끝을 잡았다.
“우리는 걸어가요?”
“음, 나만 걸어갈걸요.”
해준의 말에 이소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해준이 이소의 팔을 잡고 가볍게 둘러메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해준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업힌 모양이 된 이소가 얼굴을 붉혔다. 저번에도 업힌 적이 있었다. 해준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난 후 그의 방에 있던 두루마기를 입고 아기마냥 등에 업혀 정원을 걷고 또 걸었다. 해준의 등은 성인인 제가 업혀도 넉넉할 정도로 넓었고 포근했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몸을 기대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면 기분이 좋은지 흔들흔들 걷는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해준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대요, 아주 천천히 후원 쪽으로 걸을 테니.”
이소는 잠시간 망설였지만 이내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기댔다. 제가 쉴 수 있는 공간은 어쩌면 집이 아니라 해준의 곁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두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