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8/50)

2

닫힌 눈꺼풀 너머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을 느리게 깜빡인 뒤에야 초점이 돌아왔다. 누런 벽지 사이로 빗물이 번져 말라붙은 자국이 선명하게 들어올 때쯤 이소는 제가 정신이 들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옛날 옛적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작은 손과 발, 유난히 따뜻했던 진혁의 집 방바닥, 아기 분 냄새, 저를 걱정하던 친구의 목소리. 마치 고개를 돌리면 바로 옆에 갓난쟁이 해수가 작은 입을 꾹 다물고 잠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제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꿈은 꿈이었다.

“해수 진짜 작았는데….”

이소는 혼잣말을 읊조리곤 몸을 돌려 누웠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던 건지 찌뿌둥한 몸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소는 팔을 모로 베고 누운 채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정사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된 집기와 바닥은 해준이 직접 치운 듯했다. 스타킹도 없었고 소변에 푹 젖은 이불도 없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제가 정말 열심히 애원했다는 것과 눈이 보이지 않은 채 해준의 이름을 부른 것 정도였다.

처음이었는데. 소중한 해준의 이름을 너무 꼴사나운 상태로 부른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해준, 차해준, 차해준 씨. 입 안에 넣고 굴린 글자들은 익숙지 않아 꼭 낯선 이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아이고….”

이소는 얌전히 허리를 일으켜 앉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간밤의 해준은 마치 물소처럼 저를 들이받았다. 그동안은 그래도 제가 아프고 힘들다고 하면 자세도 바꿔 주고 느리게 페이스도 맞춰 주곤 했는데 어젯밤은 무슨 버튼이 눌린 건지 살려 달라고 울고 비는 제 허리를 잡고 숨이 넘어가도록 치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소는 다정다감한 해준이 꼭 180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좀 무섭긴 했지.’

갈아 입혀진 하얀 티셔츠 위를 더듬자 유두 부분이 따끔따끔했다. 옷을 들어 올리자 벌그스름한 잇자국이 온몸에 천지였다. 당황한 이소는 제 옆구리와 허벅지, 허리를 모두 훑었다. 심지어 겨드랑이 옆 여린 팔뚝살까지 모두 해준이 씹어 놓은 흔적투성이였다.

“진짜 미쳤어.”

손목을 내려다보자 묶였던 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갗을 꾹 누르면 전에 없는 시큰시큰한 통증이 올라왔다. 이소는 머뭇대다 두 손을 펴 제 눈을 가렸다. 그러나 숨이 가쁘지도, 심장이 두근대지도 않았고 두려움도 없었다.

“…이건 아무렇지도 않네.”

근데 교수님이 눈을 가렸을 때는 왜 그렇게 무서웠지. 시야가 차단되니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윙윙거리는 세탁기 소리와 젖은 피부에 닿는 적막한 공기의 흐름, 눅눅한 방 안의 냄새뿐, 그 공간에 차해준이라는 사람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듯했다. 이소는 다시 한번 그때를 되새기며 고개를 저었다. 찝찝하고 불쾌한 기억이었다. 다시는 그런 변태 같은 장난은 하지 말자고 해야지.

이소는 조심스럽게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요에 닿은 엉덩이가 유난히 불편했다. 엉덩이 둔덕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입구 주변을 더듬었다. 손가락을 갖다 대기만 했는데도 따끔따끔할 정도로 부어 있었다. 눈을 제외하고는 제 몸에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이번에 오면 진짜 따져야겠어, 이소는 이번에야말로 해준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받아 내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이불을 말아 쥐었다.

마침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방에 들어온 것은 정숙이었다. 아이고야, 깼다 깼어. 그 말에 다급하게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해수와 해준이 차례로 들어왔다. 아침 먹고 왔나 보다, 제 옆에 앉은 정숙의 몸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다.

“이소 씨, 정신이 좀 들어? 그사이 살이 쑥 빠진 것 봐. 병원 안 가 봐도 되겠어?”

이소가 눈을 깜빡이며 정숙을 바라보는데 그 옆에 해수가 쪼그려 앉아 이소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빠 괜찮아? 많이 아팠지?”

그냥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다들 울상을 하고 저를 걱정하는 모습에 의아함과 당혹감이 밀려왔다. 아, 혹시 어젯밤 소리를 다 들은 걸까. 이소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지, 어젯밤 있었던 일을 해준이 설마 다 이야기한 건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어, 그게….”

“아유, 됐어. 일단은 미음이라도 쒀 와야지. 그 고생을 했으니 기력이 하나도 없겠어.”

정숙의 말에 이소는 다시 한번 입술을 짓씹으며 숨을 들이켰다. 정숙보다도 어린 해수가 다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해수는 이소의 옆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정숙이 이제 아빠가 일어나셨으니 어서 너도 어린이집 갈 준비 하자며 보채는 통에 손을 쓰다듬다 몸을 일으켰다. 아빠, 오늘은 가게 나가지 말고 더 자. 내가 갔다 와서 포장하는 거 도와줄게. 드물게 의젓한 소리를 하고는 멀어지는 해수의 뒷모습을 보며 목이 멨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자 방 안에 남은 것은 저와 해준이었다.

이소는 방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현관문 앞에 서 있는 해준을 멀거니 바라보다 손짓했다. 이리 와요, 앉아요. 말없이 부르자 빠르게 눈을 깜빡인 사내는 제 곁에 와 앉았다. 평소 훤하게 트인 이마와 갸름한 얼굴에 보기 드물게 그늘이 져 있었다. 찬찬히 뜯어보니 퍽 미안한 표정이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그 낯에 이소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허리 아파요.”

“…….”

“아래도, 너무 아파요. 얼얼하구… 제대로 앉지도 못하겠고.”

그 말에 해준이 소 눈알처럼 큰 눈을 들고 이소를 쳐다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처럼 보였다. 이소는 그 눈을 보고 돌연 실소가 터졌다. 이렇게 미안해할 거면서 어젯밤에는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굴었는지. 이소가 해준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막 손을 씻고 왔는지 손등이 차갑고 촉촉했다. 워낙에 버석버석한 제 손바닥은 부드러운 살결이 퍽 반가웠는지 틈 없이 답싹 달라붙었다.

“그래도 잘 잤더니 좀 나은 것도 같구….”

“의식이 없었어요.”

내내 말이 없던 해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소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소는 제가 잘못 들었는가 고개를 돌려 해준을 바라봤다. 해준이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흔들어 봐도, 뺨을 때려 봐도 깨어나질 못해서 민 선생까지 왔다 갔어.”

이소는 저를 걱정하며 나간 정숙과 해수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해준의 벌게진 눈가도 이해가 갔다. 해준이 창백한 표정으로 이소의 손을 꼭 쥐었다.

“난, 이소 씨… 나는… 미안해, 내가 심했어. 그저 이소 너랑 하는 게 좋아서, 자꾸만 내가….”

행여 놓칠세라 제 손을 꼭 쥔 해준이 숨을 뱉었다. 미안해,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몇 번이고 이소의 손등에 이마를 댄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자신이 누워 있는 내내 속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줄줄 읊었다.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라 차마 볼을 꼬집거나 밀쳐낼 수도 없었다. 이소는 조금 머쓱해져 그저 해준의 등을 토닥이는 거 외에는 아무 말도 않았다.

* * *

그날 이후 해준은 며칠을 이소의 곁에 머물렀다. 아주 잠깐 외출하는 것 외에는 어디선가 달여 온 보약을 꼬박꼬박 먹였고 다시 이소를 눕혀 재우기를 수십 번. 정숙에게 얼마나 과장되게 말을 해 놨는지 가게 일도 강제 휴가를 받았다. 고작 섹스 한 번 하고 기절했다고 이렇게 질겁을 할 줄이야. 잠을 많이 자서 좋기는 하지만 돈 벌어야 하는데. 이소는 볼을 긁적였다.

해준은 정숙에게 받은 미음을 다시 데워 이소의 입에 떠먹이고, 빠르게 상을 치웠다. 천장에 팔만 뻗어도 닿을 것 같은 사람이 제 허리도 안 오는 싱크대에 몸을 숙이고 설거지하는 꼴이 제법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이소는 팔을 뻗어 바지를 주워 입었다.

“누워 있어요.”

등을 돌린 채 달그닥달그닥 그릇을 닦던 해준의 목소리가 이소에게 닿았다. 며칠이나 누워 있었으면 충분히 잔 것 같은데 뭘 자꾸 누워 있으라는 건지, 이소는 괜히 해준을 향해 입술을 비죽이곤 서랍을 뒤졌다. 초여름이지만 지금 입은 옷보다 조금 더 긴 옷을 찾아 입어야 할 것 같았다. 팔뚝도 가리고, 목도 조금 가릴 수 있는 그런 옷. 이소는 긴 맨투맨을 꿰어 입고 해준이 선물한 목도리를 찾아 목에 둘렀다. 뒤를 돌자 해준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그리고 집 안에서 그거 두르고 있기엔 조금 더울 텐데.”

“가게 가려고요.”

이소의 말에 해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해준의 손이 이소의 얼굴 근처로 다가오자 이소는 몸을 뒤로 물렀다.

“싫어요, 왜요.”

“이거 풀고 얼른 누워요. 이제 미음 막 먹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해요.”

“하루 이틀 잔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열이 난 것도 아니고 몸살도 아니고 그냥…….”

“그냥? 지금 이소 씨 하루 종일 못 깨어나게 만든 사람 앞에서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하지 마요. 나 정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으니까.”

이소는 머뭇거렸다. 섹스하다가 기절한 것 가지고 괜히 유난은, 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런 노골적인 말을 꺼낼 수가 없어 숨만 몇 번 더 집어삼키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진짜 괜찮아요. 이미 피크 타임은 지났고 오는 주문만 받아서 정리하면 돼요.”

“그 정도는 정숙 여사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러는 교수님은 출근 안 하세요? 무슨 교수가 이렇게 제멋대로예요. 학생들 공부 안 가르쳐 주고.”

이소가 도리어 쏘아붙이자 해준은 기가 찬다는 듯 입가가 스르르 벌어졌다. 내내 울상인 표정이었는데 이제서야 조금 제가 아는 해준다워졌다. 해준이 팔을 벌려 이소를 품에 안았다.

“이소 씨가 자꾸 눈에 밟힌단 말이에요. 이소 씨가 일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어.”

“돈 벌어야죠….”

“내가 먹여 살릴게요….”

이소 역시 아직 걷어 올리지 못한 소매를 길게 늘어뜨린 채 해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해준은 이소가 아프다고 했지만 이소 눈에는 해준이 더 아파 보였다. 저는 정말로 괜찮았는데, 심지어 지나고 보면 좋았던 것도 같은데 해준이 한동안 잠든 저를 앞에 두고 얼마나 걱정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그럼 정산만 하고 금방 올라와서 잘게요. 진짜예요. 출근하셔도 돼요.”

해준이 이소의 뺨을 손가락으로 길게 문질렀다. 그것마저도 보내 주기 싫다는 눈치였다. 이소가 눈을 접은 채 흰 이를 드러내고 배시시 웃었다. 해준이 좋아하는 제 미소였다.

“약속할게요.”

결국 해준은 얕게 한숨을 내쉬곤 이소가 가게에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소가 아는 해준은 정말로 바빴다. 잠깐 입을 맞추는 순간에도 수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을 몇 번이고 무시하다 해준은 결국 아쉬움을 뒤로하고 문을 나섰다. 닫히는 문 뒤로 ‘조금만 일하고 올게요, 영양제 사 올게. 나 왔을 때는 자고 있어야 해요. 알았죠.’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해준을 내보내고 이소는 겨우 숨을 돌렸다.

사실 해준을 빨리 보내야만 했다. 서랍에서 옷을 꺼내다가 문득 올려다본 달력의 날짜를 발견하고 이소는 적잖이 당황했다.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상환 일자가 무려 며칠이나 지나 있었다. 전화통에 불이 났어야 했는데 연락 한 번이 없었다.

고태균이 이럴 인간이 아닌데. 이소가 꼬박꼬박 봉투를 잊지 않고 가져왔음에 불구하고 항상 일주일 전부터 온갖 상환금 알림 메시지와 안부를 가장한 희롱, 자잘한 심부름까지 시켰던 위인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집 주소까지 기어코 받아 냈다. 지나면 지났다고 집 앞까지 찾아와 제 뺨이라도 흔들 인간이었는데 얼굴은커녕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아니 이소 씨, 왜 내려왔어.”

정숙이 식자재를 정리하다 이소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자 놀라 일어났다.

“조금만 하고 올라갈게요. 오늘 우리 다섯 시쯤 닫아요. 내일은 제가 더 일찍 열게요.”

“아유, 됐어. 내가 다 해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정숙은 수많은 식자재를 언제 다 정리하나 걱정이 컸던지라 이소의 등장이 반가웠다. 이소도 은연중에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내려와 정리를 도왔다. 카운터로 들어가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으면서 이소는 연락처를 뒤졌다. 이상했다. 고 대표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이상하다. 나 분명 연락처 싹 옮겼는데…. 빼 먹을 리 없는데.’

고 대표만큼은 제가 정숙, 해수 심지어 해준보다도 먼저 저장하는 전화번호였다. 가족들 전화번호만큼이나 잊어서는 안 되는 번호였다. 그런데 몇 사람 안 되는 전화번호부를 뒤져도 고태균 대표의 번호가 없었다. 사무실 번호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소는 고개를 기울이며 달력을 들춰 봤다. 오늘은 오후 일찍 해준이 올 테니 시간이 없을 테고, 내일은 고 대표의 사무실에 들러야겠다. 핸드폰에 문제가 생겼다고 둘러대고 준비한 돈을 갖다주면 더 뭐라 안 하겠지. 제 앞으로 남은 상환금을 계산하며 이소는 앞으로 삼사 년만 더 빠듯하게 갚으면 완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보았다. 다행히 요새 해준이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 줘서 생활비를 많이 아꼈다. 덕분에 돈을 조금씩 더 모을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 요 앞에 좀 쓸고 올게.”

“두세요, 그것도 제가 할게요.”

“됐어, 방금 차 교수한테 문자 왔는데. 이소 씨 일 많이 못 하게 해 달라고 하더라. 나 참. 이소 씨는 좋겠어. 부인처럼 챙겨 주는 친구도 있고.”

정숙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구시렁거렸다. 부인이라니. 괜히 볼이 달아올라 얼굴을 매만지며 카운터를 정리했다. 한참 정산을 마치고 공책을 덮었다. 정숙이 꽤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제가 쉬는 사이에 배달도 못 나갔을 테고 전날 팔던 기본 찬만 나가서 그런지 매출이 거의 구멍 난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 가게까지 빼면 정숙과 저는 이제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 고개를 들었다. 짬을 내어 근방에 싼 점포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별안간 가게 앞을 쓸던 정숙이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이소 씨, 꽃 배달 시켰어?”

“꽃 배달이요?”

이소가 앞치마를 꿰어 입고 문 앞까지 나오자 오토바이를 탄 배달원이 이소의 눈앞에 흰 장미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이밀었다. 윤이소 씨 되시죠, 여기 사인하세요. 남자는 웅얼거리며 수취자 사인을 받은 후 황급히 사라졌다. 잘못 배달 온 것도 아니고, 생일도 아닌데 제 이름으로 꽃이 한 아름 배달 왔다. 흰 장미는 세기도 벅찰 정도로 많았다. 정숙만 신기한 듯 바구니를 여러 번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살다 살다 이렇게 하얀 장미는 또 처음 보네.”

“그러게요. 누가 보냈을까요.”

“그거야 이소 씨가 알지 누가 알아.”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

해준일까? 이소는 해준에게 꽃 사진과 함께 잘 받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준이 준 꽃이니 우선 가게에 잘 놔두고 집에 올라가서 전부 말려 보관해야지. 처음 받은 꽃바구니인데 흰 장미라니 어쩐지 로맨틱하다고 느껴졌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이소는 기분 좋게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켰다. 해준이 지난밤 미안해서 선물을 보냈다는 둥의 다정한 메시지를 보냈을 거라 생각했다.

- 난 아닌데. 이소 씨 누구한테 꽃 받았어요?

해준의 메시지에 이소는 다시 말을 잃었다. 장미를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나 이 물음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소는 그저 만지작거리던 꽃잎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배달원이 사라진 골목을 말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기만 했다.

이소는 흰 장미 바구니를 들어 가게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해준이 준 것도 아니라면 누가 보낸 걸까. 몇 없는 인연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지만 저에게 이런 멋진 선물을 줄 사람은 해준밖에 없었다. 지난 밤이 미안해서 장미를 보내 놓고 모른 척 장난을 치는 걸까? 꽃잎을 한 장 한 장 매만지며 생각을 곱씹다 정숙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이소 씨, 나 은행 좀.”

“네. 다녀오세요.”

이소는 정숙을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해준의 말대로 조금 더 쉴 것을 그랬는지 한 것도 없이 머리가 띵했다. 주말이 오기 전에 고 대표의 사무실에 한 번 더 들러야 하고, 새집과 가게 자리도 알아봐야겠지. 정숙이 새 건물주를 만나 어느 정도 날짜를 조정하고 나면 저 역시 거기에 맞춰 거래처들과 자재 물량을 조절해야 하는 등 여러모로 바쁠 것 같았다.

눈썹 밑 오목하게 패인 자리를 꾹꾹 누르며 달력을 넘겨 보던 이소는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가게 문에 달아 둔 종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한 남자가 가게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소는 달력을 카운터 위에 올려두고 앞치마를 고쳐 맸다.

“어서 오세요. 메뉴판 보신 후에 천천히 고르시고 말씀해 주세요.”

남자는 이소의 말을 들었음에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서 이소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소는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주문할 생각은 전혀 없이 서류 가방을 꼭 쥔 주먹과 이런 허름한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시계와 셔츠, 그리고 제가 온몸을 천천히 훑어볼 때까지 동요도 없이 이소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두 눈. 손님으로 온 게 아니다.

이소는 시계를 한 번 본 뒤 남자의 어깨 너머 유리문 바깥으로 골목을 내다보았다. 한산한 시각, 등교할 학생들은 모두 떠나고 점심시간이 되기 두 시간 전. 이소는 카운터 앞으로 나와 남자를 스쳐 지나간 뒤 문에 걸린 팻말을 ‘잠시 외출합니다.’라는 표시로 뒤집어 놓고 문을 잠갔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몸을 틀어 건조한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팍에서 명함을 꺼낼 준비를 했다.

“법무법인 감우 장홍식, 아시겠지만 범양그룹의 전속 변호를 맡고 있습….”

“낯이 익다 했는데…. 변호사님이 여전히 회장님 밑에서 일하고 계시네요.”

“……기억하시네요, 작은 도련님.”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에 있을 당시 장 변호사는 치승의 자잘한 폭행 시비를 정리하면서 자주 마주쳤었다. 퍽 푸근한 인상 덕에 이소는 그를 허물없이 대했고 일 처리도 나쁘지 않아 치승도 곁에서 아끼던 측근이었다. 동시에 이소가 처음 해수를 데리고 집을 나갔을 무렵, 치승의 사주를 받고 쫓아와 얼른 애를 놓고 너라도 살라며 도망가라고 말하던 이였다. 그때는 그 조언이 퍽 저를 위한 일인 줄 알고 앳된 고집을 부렸었는데, 이제와 제 앞에 번질번질한 정장을 입은 채 금박이 둘린 명함을 내미는 걸 보며 그도 결국 치승의 사람인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회장님이 많이 급하신가 봐요. 가게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이소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남자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들어 보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넣었다. 남자도 딱히 무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별다른 소개 없이 서류를 꺼내 들었다. 안 봐도 내용이 훤했다.

“이명희 사모님께서 서류를 다시 한번 전달해 달라 요청하셨습니다. 저번 만남에서 추모하는 자리를 배려 하지 않고 저희 측 제안을 꺼내 당황스러우셨을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미리 연락 드리거나 차를 보내겠습니다.”

거절한다 해도 계속해서 찾아올 사람들인지라 이소는 팔짱을 낀 채 대꾸 없이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남자는 이소가 서류를 받지 않자 입꼬리를 올린 채 몇 장을 넘겨 읽었다.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해 마땅한 보상금을 도련님 앞으로 준비했습니다. 해외를 나가셔도 좋고 국내에서 노후까지 보장할 수 있을 만큼의 금액입니다. 그리고 이건 윤해수 양의 이름으로 된 회사지분 내역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앉아서….”

“강해수요.”

남자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소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다시금 남자의 말을 되짚었다. 그러나 남자는 제 앞에 선 남자의 심기가 매우 뒤틀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부드럽게 웃는 낯을 하고 있는 사내는 저에게 단 예의상으로라도 한 번 앉아 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강해수입니다. 윤해수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아직 성이 바뀌기 전인데 저희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군요.”

“바뀔 일 없을 거예요. 애초에 윤 씨가 아니었고 범양가의 사람이라고 대우 받은 적조차 없으니 본래의 성대로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땅한 보상금…. 아 죄송해요. 좀 우스워서. 여하튼 그 보상금과 해수 이름으로 된 회사 지분 역시 얼마가 되었건 받지 않겠습니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되신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남자는 세 뼘 남짓한 작은 테이블에 두툼한 서류를 내려놓았다. 안경알 너머로 눈매는 부드럽게 강요하고 있었다. 이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칠 년 사이 참 많이도 음습해진 시선이군.

“저희는 도련님께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기회요?”

“평범한 스물일곱 살로 살 수 있는 기회요.”

남자는 마치 자신들이 커다란 패를 쥐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적막이 흘렀다. 이쯤 되니 분노나 답답함보다는 의아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가져온 호의는 독사과와 같다. 반질반질하고 색이 고운 빨간 사과는 먹음직스럽지만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작열감과 함께 속이 뒤틀어진다. 저는 아마 그들이 만들어 둔 견고한 감옥 안에서 제일 소중한 것들을 빼앗긴 채 외롭게 죽어 갈 테지. 그러나 그런 확신과 별개로 해수를 데려가려는 진짜 저의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 기회는 이미 7년 전에 빼앗아 가신 걸로 아는데.”

이소의 말에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사람을 앞에 두고 이소는 서글퍼졌다. 정말 그때 같이 죽었어야 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 * *

구름이 해를 가리자 안 그래도 어두운 가게 안은 저녁 다섯 시마냥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따라 정숙은 늦어졌다. 차라리 빨리 와서 문이라도 두드린다면 좋겠는데. 남자는 겨우 이소에게 자리 하나를 받아 앉은 채 한참을 설명했다. 사안의 경중이라던지 이소의 착잡한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로지 범양의 입장을 전했다. 뻔했지만 슬펐다. 이소는 말없이 믹스 커피를 홀짝였다. 미래가 마냥 행복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비참한 결말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예전 방식대로 강제로 끌고 가시거나 소송으로 밀어붙였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회장님 내외께서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으시니까요.”

“대외적으로 말이죠?”

“그렇죠.”

예나 지금이나 재계는 언론이 가장 무섭다. 언제 저에게 칼을 들이댈지 모르니 더 그렇다. 이소는 남자의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마주했다. 남자의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만년필이었다. 남자가 가게에 들어온 직후 아주 가끔씩 불이 반짝였다. 입이 썼다. 이 자리에 오지 않고도 저를 감시하는 것이 느껴져 간담이 서늘했다.

“그런 것치고는 연락하시는 텀이 짧네요.”

“워낙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어제도 갑작스러운 심정지가 오고 나니 시간은 없고. 간절하신 거죠.”

“아, 간절.”

이소는 어린 저를 회상했다. 지금도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다. 무슨 배짱과 심보로 그 고집을 부렸는지 저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은 조금 더 몸을 사린달까. 지금의 자신이라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변호사님, 기왕 오신 거 제 이야기도 듣고 가셔야죠.”

이소는 남자의 가슴에 꽂힌 만년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은 마치 치승의 안광처럼 보였다. 이소는 마치 치승이 앞에 있듯 입을 열었다. 적어도 당신들이 한 선택이 내게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알아주라고.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서 간절함을 말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간절함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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