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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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학교 자유게시판(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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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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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소가 기절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사정 직후 잠시 잠에 빠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온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어두운 방 안, 색색 숨을 몰아쉬는 이소의 곁에 앉아 조용히 피가 말라붙은 코 주변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방구석에는 구겨서 던져 버린 스타킹 세 짝과 피에 푹 젖은 티셔츠, 정사의 흔적들을 허겁지겁 닦아낸 수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하….”
해준은 숨을 몰아쉬고 마른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소가 손을 봤다던 낡은 창문 틈새로 어느새 추적추적 내린 비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주치의가 다녀간 지 세 시간째, 윤이소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 * *
“아……!”
높은 비명과 함께 폭풍 같은 쾌락이 두 사람을 덮쳤다.
해준은 제 팔뚝에 깊은 생채기를 낸 후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이소의 몸을 잡아챘다. 분홍빛 성기에서 싸르르 뿜어져 나온 묽은 흰 체액이 이소의 배와 얼굴, 해준의 가슴과 얼굴을 다 적시고도 한참을 더 나왔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계속 줄줄 터졌다. 낡은 솜이불을 다 적시고 바닥과 낮은 책상까지 온통 다 이소의 몸에서 나온 물로 다 젖었다.
이소의 내벽 안 깊숙이 사정한 해준이 끓어오르는 고양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간만에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약에 취한 듯 몽롱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자 품에 안은 이소의 어깨에 코를 묻고 얼굴을 부볐다. 배끼리 맞닿은 곳이 아직도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연인의 체액을 뒤집어쓴 채 눈을 뜬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인지. 해준은 이소의 어깨를 잘근잘근 물며 놀리듯 속삭였다.
“이소 씨, 소리 못 참을 정도로 좋았어요? 옆 방에서 다 들었겠….”
뭔가 이상했다. 대답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해준의 가슴을 타고 흐르는 땀의 양이 유난히 많았다. 고개를 들어 힘없이 처지는 얼굴을 잡았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선홍빛 피였다. 이소의 코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피가 온 이불을 다 적시고 입과 턱 주변에 범벅이었다.
“이소야.”
당황한 해준이 급하게 허리를 뒤로 물리자 좆이 빠진 구멍에서 울컥울컥 사정액이 새어 나왔다. 얼마나 많이 싸질렀는지 의식 없는 몸뚱이가 구토를 하듯 왈칵 흰 물을 뱉어 냈다. 그 와중에도 코피는 멎지 않았다.
해준은 제 티셔츠를 벗어 이소의 얼굴을 닦아 냈다.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둘걸, 뒤늦은 후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피를 닦아 내자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입술 끝도 두툼하게 부어 있었다. 해준은 이소를 일으켜 앉힌 후 뒷덜미를 잡고 다른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양쪽 콧방울을 지그시 압박했다. 찢어진 스타킹 위로 얹어 둔 해준의 티셔츠가 핏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이전에도 종종 이소는 섹스 후 잠이 들곤 했지만 이렇게 완전히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첫 섹스 때는 열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었고, 두 번째에는 뜬금없는 장소에서 세 번이나 사정시켰었다. 그러나 대체로 금방 깼다. 조금 수척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잠깐 자고 일어나면 금세 본래의 이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뺨을 때리고 몸을 흔들어도 돌아간 눈동자가 돌아오지 않자 해준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아 이소를 안은 채 응급처치를 하고 전화를 들었다. 그답지 않게 손이 떨렸다.
* * *
자정이 조금 못 된 시간, 주치의 민병덕은 왕진 가방을 들고 낡은 빌라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해준이 말한 주소로 오기는 했는데 평소 해준의 동선과도 겹치지 않는 곳이었고 즐겨 찾을 만한 곳도 아니었다. 심지어 굉장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피가, 피가 너무 많이 납니다.’라고 말해 정말 이번에야말로 그 곱상한 도련님이 사람이라도 죽인 건가 하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곰팡이가 잔뜩 낀 계단을 지나 낡은 문을 두드리자 웃통을 벗은 채 젖은 몸을 한 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십 먹은 노인의 취향이 아닐진대 병덕은 해준의 반 나신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소란을 피우면 안 됩니다. 옆 방에 딸이 있어서.”
“딸?”
해준을 따라 들어간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정사의 향이 짙은 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늘어진 여자 스타킹과 축축하게 젖은 바닥, 피에 젖은 이불과 휴지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불을 덮은 채 잠든 한 남자가 있었다. 해준이 윗옷을 걸치는 사이 병덕은 소란의 틈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불 좀 켜 봐.”
“안 돼요.”
“진료해야 할 거 아니야, 불 켜.”
“이 사람 눈 부실까 봐.”
“야, 개소리 하지 말고 불 켜. 나 그냥 간다?”
병덕이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다시 집어 들자 해준은 말없이 스위치를 눌렀다. 불을 켜도 환해지지는 않고 여전히 애매하게 어두웠지만 한결 나았다. 병덕이 이불을 걷어내려 하자 해준이 주춤거리며 손을 들었다. 이건 뭐, 진료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손 하나 댈 수 없게 해 놓고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꼭 뭐 마려운 강아지 같았다. 병덕이 말없이 노려보자 해준은 이불을 끌어 배 아래까지만 드러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이고…. 죄 물어뜯어 놨네.”
온몸이 잇자국투성이였다. 이 정도면 아팠을 만도 한데 도대체 왜 요즘 애들은 이렇게 거칠게 뒹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목은 뭐에 묶여 있었던 듯 발갛게 부어 있었고 눈은 울었는지 만지기도 미안할 정도로 짓물러 있었다. 콧구멍 주위는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얇게 번져 있었다.
“너, 이 정도면 학대야. 잔뜩 울린 거 보니까 싫다고 했는데 또 몰아붙였지.”
“…….”
“적당히를 몰라, 정말. 한 번 더 이러면 아무리 너라도 신고할 거야.”
병덕은 신경질적으로 알코올 솜과 거즈를 꺼내 이소의 코와 눈가를 닦아 냈다. 솜을 정리한 병덕이 이소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둥근 이마가 드러나니 얼굴에 아직 어린 태가 났다.
“저번에 그 사람이지.”
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덕은 해준의 집에 왔던 남자를 기억해 냈다. 펄펄 끓는 몸을 하고 죽은 듯 잠들어 있었던 남자는 중얼중얼 연신 헛소리를 해댔다. 그때도 해준은 옆에 앉아 출산을 기다리는 남편마냥 다리를 떨어댔다. 그러더니 결국은 이런 꼴이 되어서 만나는구나 싶었다.
병덕은 맥을 짚고 이어 남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정수리가 뜨끈했다. 양손을 잡자 시체에 닿은 듯 매우 찼다. 온몸의 기가 막혀 있어 나가지 못하고 심장 부근을 맴돌았다. 이런 경우 약하게는 특정 상황이 되면 질식하거나 토할 것 같은 불쾌감을 느끼거나 심한 경우 지금처럼 실신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이렇게 정신을 잃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조증상이 있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남자의 몸만 보면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은 자명했다.
병덕은 남자의 마른 팔뚝을 소독한 뒤 주사기를 꺼내 팔뚝에 꽂았다. 바늘을 찌른 후 피스톤을 천천히 뒤로 당기자 검붉은 피가 보틀에 쪼르륵 채워졌다.
“대화 많이 하라고 했잖아. 몸 약하니까 챙겨 주라고.”
“대화 많이 했어요.”
“몸의 대화 말고, 마음으로. 이게 뭐니, 네가 개니? 애 상태 봐라. 한동안 건드리지도 마.”
해준을 향해 조용히 타박한 병덕은 이소의 팔뚝에서 주삿바늘을 뽑았다. 혈액이 담긴 보틀에 이름을 대충 ‘윤이수’라고 적자 해준이 인상을 쓰고 ‘윤, 이소. 이소. 흴 소, 하얗잖아요. 윤이소라고요.’라고 몇 번이고 고쳐 말했다. 나는 네 애인 이름 끝 자가 흴 소인지 검은 소인지 궁금하지도 않다고 쏘아붙이자 어쨌든 윤이소라고 고쳐 달라며 집요하게 굴었다.
병덕은 한숨을 쉬며 가방을 싸매 들었다. 지금은 피도 멎었고 정말 말 그대로 잠이 든 것뿐이니 분명 깨어나긴 할 테지만, 바로 정신이 들지 않는 것은 이 남자의 의지가 클 테다. 당장 깨어나고 싶지 않으면 꿈이라도 좋은 걸 꾸어야 할 텐데. 병덕은 남자만큼이나 눈 밑이 퀭한 해준의 어깨를 위로하듯 살살 두드렸다.
“흡연도 안 하고 과음도 안 하는데 심박이 너무 높아. 얼굴은 얌전해 보이는데…. 동맥 긴장이나 혈압도 높은 게 마음속에 화가 너무 많아. 저번에 스트레스 수치가 굉장히 높다고 말했잖아. 평소에 어떻게 풀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단순히 그걸 잠으로 해소하기엔 부족할 거야. 자고 일어나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으니까.”
“빚을 갚아 줬어요.”
해준이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빚? 무슨 빚.”
“이 사람 앞으로 얼마 안 되는 빚이 있었어요. 그 빚 때문에 이 거지 같은 집에서 계속 사는 거였고, 몇 푼 안 되는 돈을 쥐고 한 달에 한 번씩 사채 새끼 얼굴을 보러 가야 하고, 정작 본인은 차 한 잔 사 먹을 여유도 없어 하고…. 그래서 조만간 데려오려고 별채도 다 정리를 했는데….”
“차해준.”
병덕은 안경을 끌어 올려 해준을 바라봤다. 항상 저보다 몇 수를 앞서 내다보던 영민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그저 제 연인 앞에서 갈피를 못 잡는 다급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준은 제가 가진 것들을 모조리 퍼 주며 온몸으로 매달렸지만 남자가 손에 들어오지 않아 초조한 듯했다.
“너는 문제가 다만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니?”
“더 있을 수 있겠죠.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가 있을 수도 있고, 전 부인이 나타날 수도 있고, 이 사람에게 전과가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으면 기꺼이….”
“아니 내 말은, 네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걸 윤이소 씨가 원할 것 같냐고 묻는 거야.”
병덕의 말에 해준이 낯을 바꾸고 고개를 들었다.
‘어린 도련님아, 주기만 하는 사랑은 위험하단다. 어느 순간 내가 주는 행위에 심취해 상대를 옥죄기 마련이거든.’
본디 괜한 말은 얹지 않는 병덕이지만 해준을 본 지 10년, 누구에게나 가볍게 마음을 쪼개 주었지만 제 마음에 꼭 차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가져야 하는 이기적인 놈의 그물에 걸린 것이 하필 이렇게 불행이 덕지덕지 붙은 사내라니. 해준이 아니라 남자에게 마음이 가서 하는 소리였다. 병덕은 최대한 온화한 단어를 골라 입 안에서 굴렸다.
“해준이 네가 정이 많은 거야 내가 잘 알지. 그래도….”
주치의는 조용히 가방을 챙겨 들었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신발장 옆에는 여자아이 신발도 두어 켤레 있었다. 한눈에 둘러봐도 뭐가 없어 보이는 집. 어쩌면 이 인연을 이어 가면서 고민이 많은 건 차해준만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네 마음에 들었다고 길가에 핀 들꽃까지 모조리 파내 정원에 끌어다 놓아서야 되겠어.”
병덕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숨을 고르며 현관에 등을 기댄 병덕은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정신을 잃은 사람이 어디 도망갈 것도 아닌데 여전히 두 손을 꼭 얽은 채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애틋하다기보다는 광인처럼 느껴졌다. 알고 있다. 늙은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고집을 꺾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도 기왕이면, 이왕 사랑을 할 거라면 저 둘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았다.
* * *
이소는 우박처럼 떨어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달렸다. 꿈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7년 전 그 날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제 품에 안긴 아기의 체온이 현실처럼 생생했기 때문에 꿈에서 깰 생각도 않은 채 다시 한번 진혁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대충 챙겨 가지고 나온 책가방에는 아이의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와 약간의 돈이 들어 있는 통장, 그리고 구겨진 대학 합격 통지서. 스무 살의 윤이소는 그렇게 무모했고 대책이 없었다.
“야, 윤이소.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왜애.”
친구 진혁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이소가 눈을 흘겼다. 젖은 교복은 세탁기에 탈탈 돌아가고 있었고 주방에서는 라면 익는 냄새가 솔솔 났다. 부모님이 모두 해외 파견 근무로 나가 계시는 진혁의 집이 가장 만만했고 무엇보다 진혁은 이소의 몇 안 되는 오랜 친구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쟤가 강은형 애라고? 장례식에는 쟤 돌보느라 코빼기도 안 비친 거야, 그러면?”
“뭐, 그렇지. 애기 봐줄 사람이 없어서.”
“돌았다.”
진혁은 대충 머리를 터는 이소에게 후드티를 건넸다. 이소는 간만에 따뜻하고 부들부들한 옷에 코를 묻고 웃었다. 은형의 장례식에는 갈 수가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는 순간 학교를 그만둔 은형에 대한 온갖 추문이 퍼질 테다. 이소는 제 친구의 마지막을 그렇게 가볍게 추모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소는 제 통장을 탈탈 털어 돈만 보태고 멀리서 아이를 안고 지켜보기만 했다.
“야 근데, 너 강은형이랑 그런 사이였어?”
진혁이 턱을 잔뜩 끌어 내리며 ‘네 타입 아닐 텐데. 걔 너보다 키도 크고….’ 하고 덧붙였다. 이소가 손을 내저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은형이랑…. 어떻게 그래.”
담담히도 말하는 이소를 두고 진혁이 도리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럼 얘는 뭔데! 아니 대뜸 문 두드리더니 얼굴은 줘 터져가지고 품에서 핫도그도 아닌 갓난애가 쑥 나오는데 내가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
길길이 날뛰는 진혁을 두고 이소가 배시시 웃었다. 진혁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 이불로 기어 들어간 이소가 조심스럽게 잠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잠결이었음에도 제 검지가 다가가자 주먹으로 꼭 쥐는 아기를 보며 신기한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진혁이 질린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서 집에 갔다 온 거야? 네 큰아버지가 뭐래?”
“완전히 쫓겨났는데. 뒤지게 맞고.”
“뭐?”
아이의 발을 가지고 박수를 치며 장난을 치던 이소가 말없이 앞머리를 열어 제 이마를 깠다. 남자 주먹만 한 피멍이 진했다.
“야, 씨팔! 뭘로 때린 거야?”
“재떨이.”
“아! 진짜 인간쓰레기 새끼!”
진혁이 놀라 다급하게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 이소는 익숙하게 이마를 들이대고 눈을 감았다. 진혁이 멍 연고를 바르고 나서 뚜껑을 닫자 이소는 미소 지으며 찢어진 입가도 들이댔다. 여기도 발라 줘, 그 말에 진혁이 혀를 찼다.
“아, 존나 진짜…. 니네 큰엄마는 안 말리고 뭐 했어. 하긴 그 아줌마가 말릴 리 없지.”
“알잖아. 회장님 흥분하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 비자금 수사 땜에 기자들 쫙 깔린 데에 눈엣가시인 내가 눈치 없이 애까지 안고 들어갔는데 열통이 안 터지시겠냐.”
“회장님은 니미 씨발, 하여간 카메라 돌 때만 아들, 아들 그러지? 아, 멍 어떡해. 이거 백퍼 혹 나.”
진혁은 마치 제 이마가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울상이었다. 이소는 연고를 바른 이마를 살짝살짝 매만졌다. 찢어지지 않은 게 어디야. 배시시 웃자 진혁은 괜히 어깨를 밀며 옆에 주저앉아 전화를 던졌다.
“야, 가기 전에 전화하자.”
“어디에?”
나가기 싫은데, 이소는 이제 막 따뜻해지기 시작한 바닥에 배를 지지는 게 퍽 좋아 엎드린 채 진혁을 올려다봤다.
“뭘 어디야. 저기 옆 동에 교회 베이비박스는 24시간 열려 있을걸. 전화하고 거기 가자. 목사님한테 애기 그냥 주웠다고 하고, 거기 데려다주고 오자.”
진혁의 말에 이소가 몸을 뒹굴며 고개를 저었다.
“이진혁 이 무자비한 놈아… 지금 밖에 영하 17도야.”
“그럼 뭐, 따뜻한 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놓고 오시게요?”
“그럴까? 봄 20번 정도 지나고 보내줄까 봐.”
“20번? 뭐? 20버언? 네가 키우게?”
“그럼 어떡해. 얘 그냥 두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진혁이 누운 이소를 발로 밀며 애원했다. 친구야, 제발. 너 안 그래도 조진 인생 더 조질 일 있냐. 학교도 존나 좋은 데 가기로 해 놓고 왜 이런 짓을 자처해서 하냐고. 아, 목사님이 알아서 고아원 보내겠지 썅! 진혁이 답답한 듯 발을 굴렀다. 맨날 얻어터지는 새끼, 그 큰 집에 살면서도 우리보다 더 마르고 기죽어 사는 새끼,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한테 한마디도 못 하는 물러터진 새끼.
“이 개또라이야…. 네가 어떻게 키우냐. 집도 없는 게… 솔직히 네 딸도 아니잖아.”
“왜 내 딸이 아니야.”
이소가 아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얀 솜털이 난 볼이 뽀얬다. 제 손을 꼭 잡은 주먹은 행여 놓칠세라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녀석을 가졌을 때 누구보다도 옆에서 태담해 주고 건강하게 나와 달라고 기도한 게 누군데. 네가 먹고 싶다던 걸 내가 다 사다 주고 밤새 우는 너를 안고 달랬던 것도 난데. 은형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붙어 있었는데 말야. 그런 사소한 이유로 어쩐지 묘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마음속에 남은 것이었다. 동정심이라고 불러도 좋다. 누군가의 동정 역시 관심이라고 한다면 이 작은 이이에게는 그것마저 간절할 테니까.
이소는 아이의 작은 볼을 꼬옥 눌렀다. 통, 하고 흔들리며 올라오는 뺨이 사랑스러웠다. 이소가 눈썹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이제부터 내 딸 하면 되지.”
우리 둘이 살래? 내가 앞으로 아빠 하고, 너는 내 딸 하자. 스무 번의 봄이 지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내가 네 아빠로 살게.
이소는 잠든 아이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은형이 지어 준 소중한 이름을 읊조리며 아이에게 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 네 이름은 ‘강해수’야. 잘 부탁해, 해수야.
갓 스무 살의 윤이소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귓가를 맴돌다 멀어졌다. 간만에 꾸는 꿈은 아주 길고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