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소 씨, 진짜 괜찮겠어?”
“그럼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쉬고 계세요.”
정숙이 창문에 매달린 이소를 걱정스레 올려다보다가 가게로 들어갔다.
때 이른 여름 장마가 오기 전 이소는 창문을 손볼 생각이었다. 오래된 나무 새시 사이로 몰아치는 우풍에 떨었던 전 집을 생각하면 그보다 10년은 더 된 이 집도 비바람이 새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나마 몇 없는 식구 중 거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 하나밖에 없는지라 전구 갈기, 울타리 손보기, 지붕 수리, 벽지 바르기 등은 전문가 못지 않게 잘했다. 이소는 성인 남자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창문에 허벅지를 밖으로 걸쳐 놓은 채 우그러진 나무 틀에 스티로폼을 맞춰 덧대며 근 며칠을 찬찬히 더듬었다.
‘노력하겠다.’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긴 후 해준은 대체로 오픈 시간에 맞추어 이소의 가게에 들렀다. 정숙이 있으면 얼굴만 보고 가거나, 정숙 없이 혼자 나와 있으면 몰래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있다가 가곤 했다. 꼭 출근하기 전 모닝 키스를 하는 남편 같았다. 이소는 눈을 뜨자마자 보는 해준의 얼굴이 반가웠기에 일찍이 나가 언덕 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퇴근할 때도 들러서 해수의 간식을 사 오거나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돌아갔다. 몇 주간 해준의 어머니가 사랑채에 계실 예정이기 때문에 저택에 방문하는 일정은 모두 미뤄졌지만 그 덕분에 생긴 저녁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때때로 라면으로 때웠을 끼니를 분주하게 고기와 생선을 번갈아 차렸지만 전혀 수고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해준과 함께하는 소담한 한 끼가 좋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준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면 좋았겠지만 정말로 불현듯 다가오는 불안감을 어떻게 갈무리 해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 결혼, 생각해 본다. 해준이 뱉었던 그 세 단어가 계속해서 이소의 입 안을 맴돌았다. 오늘도 생각했을까? 지금도 고려 하고 있을까? 사실 우리 집에 못 오는 날에는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까? 차해준은 근사한 사람이니까,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그를 보면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럼 저 같은 별 볼 일 없는 애아빠는 금세 잊히겠지. 이소는 약 101번 정도의 이별 장면을 그려 보며 창문 사이에 스티로폼을 꾹꾹 욱여넣었다.
스트레스가 많으면 잡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전에 없이 종종 실수를 했다.
“아야.”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었다. 누가 알아준다고 커터칼로 스티로폼을 창틀에 꼭 맞추어 자른다는 게 결국 손가락을 깊게 베이고 말았다. 피가 제법 많이 나 붕대로 꼼꼼하게 감는다고 감았는데도 두꺼운 붕대를 뚫고 붉은 기가 조금씩 비쳤다. 손가락이 따끔따끔한 상태로 다시 창문에 발을 걸터앉아 멍하게 해준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사장님-”
처음에는 저를 부르는 줄 몰랐던 이소는 발밑에서 한참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호칭을 알아차리고서야 느지막이 시선을 내렸다. 건너편 카페 주인이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채 벽돌색 앞치마를 하고 선 여자는 쟁반에 스콘과 커피잔을 올려놓은 채 이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거기서 뭐 하세요?”
“태풍 오기 전에 손 보려고요. 새시가 틀어져서 우풍이 심하더라고요.”
“내려와서 좀 드시고 하세요.”
이소는 카페 주인에게 머리를 꾸벅 숙인 뒤 곧 내려가겠다고 덧붙였다. 카페 주인을 반기는 정숙의 유난스러운 목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왔다. 괜한 자리를 만들 것 같아 끼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어코 정숙은 데크까지 나와서 카페 주인이 만든 스콘을 먹고 일하라며 채근을 했다. 결국 머쓱한 표정으로 내려간 이소는 스콘을 먹는 내내 그 카페 주인의 이름이 이동희라는 것과 해수 또래인 아들 둘을 키우고 있다는 것, 정숙과 어느 시점에 같은 동네에 살았었던 사람이라는 이야기까지 모두 듣게 되었다. 30분이나 허비했고 배달시간마저 촉박해져 얼른 오토바이에 올랐다. 다친 손가락이 시큰거렸다.
* * *
학교로 배달을 나가면 쉬이 돌아오지 못했다. 괜히 해준에게 메시지를 한 번 더 했고 사진을 한 번 더 찍어 보냈다. 이소는 언젠가 해준이 뽑아 준 미니 사이즈의 시간표를 꺼내어 보고는 꼭 제 배달 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연락을 했다. 짬이 나면 벤치에 앉아 기다렸고 때로는 강의실 근처를 서성이기도 했다. 몇 번 그렇게 했더니 저를 알아본 학과 학생들이 손을 흔드는 일도 종종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두 손에 캔 커피 두 개를 들고 해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 음대 앞 야외홀에 앉아 있어요. 20분정도 시간 비는데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나오실래요?]
이소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썼다 지우며 문장을 고쳤다. 너무 당연하게 해준에게 나와 달라 요구하는 것도 면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학교에 들러서 연락을 안 하는 것도 찜찜해 최대한 완곡하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사실 보내고 싶은 말은 간단했다. ‘보고 싶은데 오실 수 있어요?’라는 말. 그러나 이소는 언제나 제 마음을 전부 꺼내어 보여 주고 싶다가도 해준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조용히 혼자 갈무리를 했다. 해준만 괜찮다면 정말 누구보다 많이 좋아해 줄 수 있는데 애정조차 마음껏 퍼줄 수 없는 제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게 참 아쉬웠다.
“결혼 생각 있으면서 왜 날 만나….”
이소는 캔 커피 입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어머니께 둘러대는 말인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를 앞에 두고 그렇게 대놓고 통화할 줄은 몰랐다. 서운함과 의아함이 번갈아 마음을 후볐다. 안 그래도 이명희가 다녀간 후 불안감이 가시질 않아 며칠 잠을 설치며 보냈더니 눈 밑이 퀭해졌다. 여러모로 몸과 마음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결혼 생각?”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자 쪼그려 앉은 채로 턱을 괸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인기척도 없었는데 언제 제 뒤에 바짝 붙어 혼잣말을 엿들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결혼해요?”
“어, 언제 오셨어요?”
이소가 당황해 말을 돌렸지만 해준은 턱을 기울이며 눈을 깜박였다.
“이소 씨는 나만 만나는 줄 알았는데. 결혼 생각하고 있는 사람까지 있었어요?”
너무 당황하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마치 제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듯 말하는 해준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빈정이 팍 상했다. 이소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팩 내뱉었다.
“교수님이요.”
“응?”
“교수님이 그랬잖아요, 저번에. 어머니랑 통화할 때, 결혼은 나중에… 생각해 본다고, 그러셨잖아요.”
“내가요?”
해준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렸다. 이소는 제가 내뱉어 놓고도 그 말이 너무 속상해 기분이 가라앉았다. 한 번 터진 말은 자꾸 꼬리를 문다. ‘나랑 키스도 해 놓고, 나랑 잠도 자 놓고, 좋아한다고 해 놓고. 어떻게 어머니한테 결혼을 고려해 보겠다는 말을 해요.’라고 머릿속으로 줄줄 읊었지만 차마 뱉지는 못했다. 입 끝에서 맴도는 투정과 푸념까지 쓰게 삼켜 놓고 정작 손톱 끝 베인 자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내자 해준이 손목을 잡아챘다.
“손은 또 왜 그래요.”
“몰라요.”
“다쳤어요?”
“네.”
“어쩌다가요.”
“창문 고치다가요.”
이소는 퉁명스레 말을 뱉고 시선을 피했다. 왠지 해준이 냉한 눈을 한 채 저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말을 예쁘게 할걸, 오늘 아침 해준이 모닝 키스도 해 주고 갔는데 왜 저는 꼭 이렇게 초를 칠까. 그런 이소를 두고 해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소가 앉은 의자 옆에 슬며시 앉았다. 결혼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소의 손을 잡은 채였다. 이소는 그게 썩 마음에 걸리면서도 손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우리 이소 씨 혼자 못 두겠다. 자꾸 찢어지고 피 보고 멍들고.”
해준은 이소의 손을 제 손 위에 얹어 두고 어설프게 감은 붕대를 슬슬 풀었다. 압박해 놓은 붕대가 느슨해질 때마다 팔꿈치까지 저릿저릿했다. 이소의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차근차근 감긴 천은 상처가 끝나는 지점까지 길게 이어졌다. 미니핫도그마냥 다친 부분만 둘둘 말아 둔 이소의 솜씨와 달리 해준은 꽤나 능숙하게 붕대를 감았다.
“어릴 때 내가 참 많이 다쳐 봐서 붕대 감는 건 눈 감고도 해요. 자, 다 됐다.”
한결 자연스럽고 가벼워진 손을 바라보며 이소는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걸 보고도 해준은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아까 던진 질문에 대답이나 좀 해 주지, 이소는 가지고 있던 캔 커피를 슬쩍 내밀었다. 해준은 커피를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소는 또 그게 뭐라고 서운했다. 왜 내 커피 지금 안 마시지, 스멀스멀 제가 봐도 미운 감정들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이소 씨.”
그러나 잔뜩 토라진 이소를 옆에 두고도 해준은 눈을 떼지 않은 채 몸을 기울였다. 제 앞으로 숙여 마주친 얼굴에는 냉기나 비웃음 따위는 걸려 있지 않았다. 여전히 아침에 보았던 눈빛 그대로였다.
“내가 결혼 생각해 본다고 해서 속상했어요?”
꼭 이마를 맞대듯 바짝 붙은 해준이 붕대 감은 손을 살짝 겹쳐 잡았다. 이소의 마르고 투박한 손등은 해준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덮이자 가늘게 떨렸다. 이소는 입 안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할 말은 많았고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입술은 꾹 닫힌 채 열릴 생각을 안 했다.
“이소 씨 보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니 억울하고 화나고 그랬어요?”
아니다. 그렇다. 아니다. 사실은 그렇다. 갈팡질팡한 대답이 벌어진 잇새를 비집고 나오지 못한 채 머물렀다. 서운한 감정을 입 밖으로 토하지를 못하니 코끝과 눈꼬리로 불안이 기어 나왔다. 코가 매워 킁 하고 콧물을 들이마시자 해준이 쓰게 웃었다. 야외 홀 한가운데서 손을 맞잡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볼 수 있었지만 해준은 애초에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사람 참 나쁘다, 나랑 뽀뽀도 하고 잠도 자고 데이트도 했으면서 왜 결혼 이야기 하지.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눈 밑이 검어지도록 고민하고 그랬어?”
“아니에요.”
“아니긴. 이소 씨 화나니까 나 너무 무서운데.”
“놀리지 마세요.”
이소가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해준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길고 매끄러운 해준의 손가락이 가만가만 마디 사이로 얽혀 왔다. 해준은 바짝 몸을 당겨 앉았다. 누가 보아도 남자 둘이 가까이 앉은 것이 그림이 이상해 보일 것 같은데 해준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붙여 왔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해준의 얼굴이 코 앞이라 이소는 저 멀리 운동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해준은 깍지를 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거는 기대가 커요. 애정과 자본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만큼 아들이 잘 자라 주기를 바랐고, 지금도 마음에는 덜 차지만 아버지가 하시는 일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놔두시는 것도 다 나를 많이 아끼시고 믿고 있어서 그래요.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잘 자란 내 아이가 좋은 사람을 만나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결혼을 채근하시기도 하죠. 나이가 드셔서 그런가 요새 부쩍 그래요.”
이소는 자꾸만 코끝이 매웠다. 언젠가 헤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뜬금없이 대낮의 야외 홀 앞에서 담백하고 무감하게 이별을 말하는 것은 제 101가지 시나리오 안에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우리 어머님 소박한 꿈이거든요. 제가 부인 손을 잡고 부모님 집 마당을 걸어 들어오면 그 뒤로 예쁜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오는 거예요.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우고, 다 같이 가족 여행도 가고. 우리 집은 나 혼자라서 아버지 어머니가 내 아이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거든. 손자 손녀 다 봐주신다고.”
미워 죽겠다. 그래서 어쩌라고. 난 애 못 낳아 줘. 차해준 진짜 나쁜 새끼다. 이소는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이럴 거면 아침에 뽀뽀는 왜 해 주고 갔어.
“그리고 이제 저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좋은 사람 생기면 그냥 결혼할까. 어머니 아버지처럼 그냥 남들 하듯이 오손도손 가정을 꾸리고 살까. 평생 그런 생각 추호도 없었는데 요새 자꾸 집에 가면 따뜻한 조명 아래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고.”
“킁….”
“왜요, 울지 말고 들어 봐요. 퇴근하고 들어가면 하루 종일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끌어안아 주는 거예요. 내가 사 온 꽃을 안겨 주고 같이 정원을 걷고, 미리 준비해 둔 다과를 먹으면서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그러다 같이 끌어안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또 눈을 뜨는 거예요. 그런 흔한 결혼생활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소는 결국 볼 위로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못한 채 얼굴을 구겼다.
“고민이 많았어요. 이런 이야기를 이소 씨한테 어떻게 전해야 하나, 갑작스러워서 당황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소 씨라면 이해해 줄 거야, 나를 많이 좋아하니까. 그쵸?”
“진짜, 진짜 나쁘시네요. 교수님, 진짜…. 너무 나쁘세요.”
잔인한 새끼. 결국은 해준에게 모질게 말하려고 던진 말은 고작해야 저것이었다. 더한 말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해준의 상황이 이해가 가고 제 사정도 맞물려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뜬금없이 이해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배려가 없었다. 이소는 해준에게 참 많이 서운했고 그만큼 미웠다.
“왜 울어요.”
너 같으면 안 울겠니? 오늘따라 저 나긋나긋한 말투가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안 울고 싶은데 눈물 콧물이 질질 흘렀다. 해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다정하게 눈물범벅이 된 이소의 얼굴을 닦아 냈다. 이소가 자꾸 해준의 손을 밀쳐내도 해준은 아랑곳 않고 계속 얼굴을 슥슥 닦아 줬다.
“당장은 아니고 한 일 년 정도, 혹은 이 년 정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랑 자리 같은 것도 정리해 놓고 식 올리려고요. 프러포즈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리스트 짜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다 들어주고, 사람들은 최대한 많이 모아서 성대하게 하고. 신혼여행은 해외로 한 사오 개월 다녀올까, 그사이에 집은 집사님한테 맡겨 놓고.”
예복 입은 해준을 생각하니 마음이 시큰해졌다. 멋있겠네. 해준이 이소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데도 이소는 우울한 표정으로 해준의 결혼 계획을 멍하게 듣기만 했다. 때때로 눈물이 흘렀지만 해준이 알아서 닦아 주든지 말든지 내버려 뒀다.
“아, 아니다. 해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떠나려면 2년이 아니라 올해 식을 올려야 하겠구나… 아무리 신혼여행이 중요해도 초등학교 첫 입학식은 꼭 봐야 하니까….”
“……?”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이소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예요…?”
“해수 초등학교 입학식 전에는 한국에 와야죠. 입학식에 사진 찍어줘 야지.”
왜요? 해수 초등학교 입학식이랑 당신 결혼식이랑 무슨 상관이 있길래? 설마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 애 초등학교 입학식에 와서 축하해 주려고?
“결혼하고 나서도 저랑 계속 만나시게요…?”
해준은 코가 시뻘게진 상태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소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나 없을 줄은 몰랐다.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 두었는데 땅을 얼마나 파고 내려갔는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해준은 이소의 동그란 코를 살짝 꼬집었다.
“뭘 계속 만나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눈치를 못 채면 어떻게 해.”
“…예에?”
그럼 안 만나 주나? 이소의 목소리가 다시 무너졌다. 해준이 이소의 양 볼을 잡았다. 마른 뺨을 감싸 쥐고 꾹 누르자 이소의 입술과 볼이 보기 좋게 뭉개졌다. 학교고 뭐고 당장 키스를 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속삭였다.
“윤이소 씨랑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긴데.”
“……?”
“한집에서 같이 살고, 함께 잠들고 눈 뜨고, 맛있는 거 먹여 주고 이소 씨 무릎 베고 쉬고 싶다고요.”
해준과 마주친 이소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납골당 앞에서 전화한 건 분명 어머니였는데. 어머니한테 지금 남자랑 결혼할 거라고 말할 거라고요? 그걸 이해해 줄 거라고요? 한국에서는 남자랑 결혼 못 해요. 아니 그리고 갑자기 우리가 왜 결혼을 해요. 새롭게 떠오르는 의문들과 할 말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러나 동시에 해준이 건네는 말이 장난인 것 같아 쉽사리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 이건 정식 프러포즈 아니에요. 이소 씨가 하도 땅 파고 들어가니까 말해 주는 거지.”
“아니, 왜…. 우리 결혼… 갑자기, 네? 우리 둘 다 남자인데….”
“한국에선 조금 어려우면 외국에 가면 되지, 아버지 어머니한테 말씀드리는 건 좀 나중일 거고. 갑작스러울 테니까 이소 씨랑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고 생각… 아니 왜 또 울어?”
당황이 가시고 나자 이소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형태의 원망과 분노가 자리 잡았다. 짓궂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릴 줄은 몰랐다. 이소는 주먹을 들어 해준의 가슴을 퍽퍽 밀어냈다.
“지금 사람을 갖고 놀고…!”
“미안, 미안해요, 자꾸 착각하니까 귀여워서 그랬어. 이소 씨, 손 너무 맵다. 잠깐만, 잠깐만요.”
이소는 진심으로 화가 치밀어올라 해준의 등이고 가슴을 마구 때렸다. 진짜 너무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해준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에 마음이 놓여 코를 훌쩍이면서도 가슴이 후련했다.
“자기야, 아파요. 진짜로, 너무 손이 매워!”
“자, 자기…라고 하지 마세요, 진짜 어떻게 그렇게 놀려요? 재미있으세요? 제가 우스우세요?”
해준이 이소의 팔을 잡고 정색했다.
“그럴 리가.”
“…….”
“이소 씨는 재밌는 편도 아니고 웃기게 생기지도 않았지만 같이 살고 싶어.”
“내가 하지 말라고 했어!”
결국 대낮의 야외 홀 앞에서 해준은 정말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다. 등이고 어깨고 다리고 이소는 분이 풀릴 때까지 밀치고 때렸다. 마음이 조금 풀려 쉬고 있을라치면 귀에다 대고 ‘진짜 결혼하고 싶은데. 안 돼요?’ 하고 속삭이는 해준 때문에 다시금 주먹으로 단단한 팔뚝을 퍽퍽 때렸다. 지나가던 학과 학생들이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인다며 잠시 웃었을 때조차 해준이 어깨동무를 하고 ‘그치, 우리 너무 잘 어울리지.’ 하고 놀리는 통에 또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30분만 있으려고 했는데 눈물 콧물을 다 빼고 소동이 있었더니 금세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이소는 학교 주차장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며 한숨을 쉬었다. 옆에 선 해준이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화 아직도 안 풀렸어요?”
“몰라요.”
“그래도 봐줘요. 하나도 거짓말 아닌데.”
“…알아요.”
이소는 제 앞에 선 미인의 미소에 약하다. 심지어 그 사람이 한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거짓뿐이었던 제 삶에 해준은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해준의 미소가 싱그럽게 흩어졌다. 이소는 차분히 헬멧을 쓰고 눈을 마주쳤다. 장난기는 묻어 있었지만 애정이 담긴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용서한다는 뜻으로 키스해 줘요.”
응? 빨리, 빨리이. 해준이 능청스럽게 건넨 말에 이소는 물끄러미 쳐다보다 웅얼댔다.
“…집에서요.”
그러고는 얼른 핸들을 돌려 웃음을 터뜨리는 해준을 등지고 달아났다. 헬멧 안에 보이지 않는 귓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이소가 해준의 장난을 되씹으며 가게로 돌아왔을 때 정숙은 팔짱을 낀 채 부동산 이 씨와 이야기 중이었다. 멀리서 봐도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다. 시동을 끄고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그 소리에 김씨와 정숙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가, 그래, 나중에 보자고. 가벼운 인사와 함께 골목 뒤로 사라지는 김씨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이소는 정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우, 몰라. 정말 승질 나서 못 살겠네.”
정숙이 괜히 애꿎은 바닥에 발길질을 했다. 천생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얼마나 성이 나길래 그러나 싶었다.
“왜요.”
“건물주가 갑자기 바뀌었대. 근데 김씨 말로는 그 사람이 약간 땅설거지꾼이라데.”
“땅설거지꾼이요?”
“그 왜 있잖아, 땅값 싸고 인적 드문 그런 데에 아파트 단지 짓고 빠지는 집단들. 여기도 재개발이 된다 만다 말이 많았는데 결국 파투 났잖어. 그냥 이러고 마나 싶었는데 이 낡아빠진 빌라랑 옆에 건물 세 채까지 통째로 샀대. 권리금 받고 나가는 기간까지 3개월 준다고 하는데 그사이에 어떻게 정리를 하냐고. 내가 정말 속이 터져.”
“왜 나가요? 그냥 건물주만 바뀐 거 아니에요?”
“개보수도 해 놓고 리모델링하면 될 텐데 그냥 싹 밀고 저기부터 여기까지 건물 큰 거 하나 세운대.”
바로 옆 건물들은 상가라고 해 봤자 오래된 고시텔과 기사식당, 그 외 층은 몇 사람 살지도 않는 작은 월셋집 정도였다. 그마저도 만실이 아니라 언제나 불이 꺼져 있는 빈집들이 태반이었다. 결국 이 근방에서 장사가 되는 거라고는 정숙의 가게와 건너편 동희의 카페, 그리고 드문드문 있는 슈퍼와 정육점 따위가 다였다. 크게 손해 보는 것은 정숙이 유일했다. 속이 터질 만했다.
“그런데 오래되긴 정육점 건물이 더 오래됐는데 왜 여길 샀을까요? 여기는 사거리에서 더 안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거야 조물주보다 위대하신 건물주가 알겠지, 난들 그 깊은 속을 알아? 아무튼 우리는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말이야. 이제 좀 풀리나 했는데 언제 또 가게를 옮기고… 아니 이제는 가게 운영도 힘드려나. 자꾸 요새 눈도 아프고 맛도 모르겠다, 이소 씨.”
말마따나 정숙은 요새 자주 졸았고 요리도 거의 손을 놨다. 이소는 낡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지어진 지 20년 된 건물은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니었는데.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오래된 건물이 있으면 흉물스러워 보이려나. 아직 여름도 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정리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근처 작은 가게라도 알아봐야 하나 싶었다.
“일단은 김씨한테 바로 근처에 있는 빈 데 있나 알아봐 달라 했어. 뭐 3개월 안에 빈 가게 하나 안 나겠어. 우리야 당장 자기 집, 내 집, 가게까지 세 집이나 한 건물에 붙어 있으니 이 사달이 난 거지. 건물주 오면 내가 잘 말해 볼게.”
이소가 입술을 매만졌다.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그냥 저희랑 합치시는 건 어떠세요. 두 집보다는 투룸으로 해서 방은 사장님이 쓰시고 거실은 저랑 해수가 쓰면 되지 않을까요? 돈도 아끼고… 나중에 조금 더 벌면 그땐 제가 더 큰 집으로 옮겨 드릴게요.”
이소는 진심이었다. 해수를 돌봐 주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해외에 있는 자식 내외와도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정숙을 아들처럼 보호하겠노라 생각하고 항상 곁에 있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제법 진지한 표정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이소를 보며 정숙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우리 뭐 당장 찢어질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심각해. 나 아직 이소 씨가 업고 다닐 정도로 나이 먹진 않았으니까 걱정 말어. 그리고 자기는 뭐하면 차 교수한테 좀 도와 달라고 해 봐.”
뜬금없이 나온 정숙의 말에 이소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가, 갑자기 차 교수님은 왜요?”
“잘사는 친구 덕이나 보라는 거지. 매일 와서 밥 얻어먹고 선물 주고 자기한테 지극정성인데 친구 힘든데 안 도와주겠어.”
알 수 없는 논리였다. 순간 정숙이 저와 해준의 사이를 알고 있는 건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정숙이 멋쩍어졌는지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아유, 농담이야. 또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쳐다봐. 됐어, 됐어. 하여간 누구한테 신세 지는 건 되게 싫어해, 정말.”
분위기 심각해질까 봐 농이나 친 건데 반응이 달갑지 않아 저만 민망하다며 정숙은 괜히 이소에게 한 소리를 하고는 올라가 버렸다. 이소는 정숙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다 어느새 불이 꺼진 부동산으로 가볍게 곁눈질을 했다. 김씨가 아직 있다면 더 물어볼 참이었는데 이른 퇴근을 했나 보다. 하긴 건물 세 채나 계약했으면 중개비 한몫 두둑이 챙겨서 오늘 밤 술이나 진탕 마실 사람이었다.
“어쩐지 감이 좋지 않네.”
이소는 중얼거리며 집으로 올라왔다. 어설프게 마무리한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샜다. 나중에 테이프로 막든지 조금 더 보수가 필요할 것 같았다. 우선은 해준이 온다고 했으니 방을 치워 놔야 할 차례였다. 평소에도 청소를 꼼꼼히 하는 편이라 충분히 깨끗했지만 이소는 지문 하나 없이 닦을 요량으로 방바닥에 엎어졌다.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은 바닥이 세 시간 후에는 얼마나 엉망이 될지도 모른 채 윤이소는 참 열심히도 닦았다.
* * *
“안녕, 여보.”
이소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장난스럽게 인사한 해준을 한 번 흘기고는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조기를 굽는 노릇한 냄새가 새어 나갔다. 이소는 잘 손질한 참조기 다섯 마리와 일주일 전에 담근 깍두기, 애호박전, 소시지 야채 볶음, 그리고 들깨가 잔뜩 들어간 된장국을 소담하게 퍼 담았다.
명절에 팔 요량으로 산 조기가 우연히 한 줄이 더 왔었다. 그 덕에 이소는 지난달 해수와 정숙에게 꽤 좋은 품질의 생선을 먹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오늘 해준이 온다기에 우르르 꺼냈다. 몇 번 해준과 밥상을 함께하며 알게 된 점은 해준은 정말 당길 때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먹는다는 점과 그게 제 요리에 거의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즉 다른 데서는 모르겠지만 이소가 한 밥은 정말 두세 그릇씩 뚝딱 비웠다.
“수저 좀 놔 주세요.”
“네, 여보.”
“여보 소리 진짜 한 번만 더하시면….”
“알았어, 자기.”
얼굴을 붉힌 이소가 파프리카를 썰다 말고 식도를 쥔 채 돌아보자 해준은 ‘장난이에요, 장난’ 하고 웃으며 얌전히 수저를 놓았다. 해준은 이소가 이런 식으로 골을 부리는 게 꽤 신선해 종종 놀리기로 했다. 성이 나면 매번 눈물 뚝뚝 흘리며 울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가끔씩 발 구르며 씩씩대는 모습도 썩 기꺼웠다.
해수와 정숙까지 건너와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해준은 현관 앞에 쌓아 두었던 상자를 주섬주섬 열었다. 내심 라면과 즉석밥 따위를 기대했던 이소는 그 안에서 나온 화려한 색의 인형의 집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상자가 총 세 개였다. 정숙과 해수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똑같은 인형의 집을 세 개나 사 왔어?”
“똑같긴요. 이건 말 그대로 인형의 집, 이건 학교, 이건 백화점. 자고로 인형 놀이는 소품과 장소를 많이 쌓아 놓고 옮겨 가며 해야 재밌죠.”
보통 사람은 그런 이유로 인형의 집을 한꺼번에 세 개나 구매하지 않는다는 것을 해준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소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자기 집에 일하는 사람 방만 스무 칸이 넘는 분이 어련하실까 싶었다. 그리고 뜻밖에 해수가 그 선물들을 어쩔 줄을 모르고 좋아했다. 매년 책이나 먹을 것을 주며 넘어갔었던 생일이 떠올라 이소는 조금 미안해졌다.
해수는 한참을 구경하더니 인형의 집을 끌어안고 정숙의 집에 옮겨 놓았다. 집이 세 채라 두어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제가 받은 선물을 꾸역꾸역 다 날랐다. 이소가 이를 닦다가 해수가 하는 양을 보더니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언질했다.
“해수야, 장난감 왜 다 옮겨. 아빠랑 여기서 놀아.”
“아니야, 아빠는 아저씨랑 놀아. 아저씨 자고 갈 거죠?”
바쁜 이소와 달리 해준은 낡은 베개에 게으르게 기대 다리를 뻗고 티백 녹차를 홀짝이던 중이었다. 딱히 그럴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해수의 말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럴까 봐.”
“그럼 나는 오늘 할머니랑 잘게요.”
“착한 아이네.”
마침 이를 다 닦고 나온 이소가 말간 얼굴로 짐짓 엄한 체를 했다.
“오늘은 할머니 좀 피곤하시니까 여기서 놀아. 그리고 아빠도 구경할래.”
해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현관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뜯었던 백화점 세트를 끌어안으며 무심히도 말했다.
“내 건데 왜 아빠가 구경해. 아빠는 그냥 아저씨랑 놀라니까.”
“아니 아빠두 보고 싶은데…. 그리고 저번에 보다만 영화도 같이 보자며.”
“아니야, 나 이게 더 중요해졌어. 이걸로 늦게까지 갖고 놀다 잘 거야. 아빠 잘 자. 아저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아니 왜 자꾸 아저씨를, 엇.”
말이 끊기기가 무섭게 해준이 이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행히 해수가 두 사람을 등진 채 문을 닫아서 들키지는 않았지만 이소는 코앞에서 제 등에 얼굴을 파묻는 해준을 돌아봤다. 눈을 마주친 해준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씩 웃었다.
“이소 씨 장난감 여기 있잖아요. 오늘은 나랑 놀아요.”
이소는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번에 해준이 지나가는 말로 해수가 한 살씩 먹을 때마다 저랑 노는 것에 흥미를 잃을 거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벌써 시작된 건가. 저는 저번에 해수가 말한 이후로 더 자주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타이밍이 참 안 맞았다.
그러나 제 허리를 잡고 채근하는 해준을 보자 그런 쓸데없는 고민도 금방 지워졌다. 그의 말대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은 해준이었다.
* * *
정숙과 해수가 나가자마자 둘은 바닥에 누워 한참 키스부터 했다. 바로 옆이 정숙의 방이었고 벽이 얇았기 때문에 이소는 키스를 하면서도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전부터 해준의 장난에 놀아나느라 눈물을 쏙 뺐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은 애정으로 가득 찼다.
결혼 이야기가 진심이건 아니건 저와 오래오래 사귀고 싶다는 말을 해 주었고, 이렇게 기쁘게 몸도 섞고 있으니 이소는 해준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픈 마음이 퐁퐁 샘솟는 것이다. 이소는 제 위에 올라탄 채 끊임없이 입술을 물고 혀로 휘젓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눈을 감고 키스에 열중하던 해준이 눈을 깜박였다. 가까이서 봐도 참 잘생겼다. 이소는 해준의 긴 속눈썹과 유난히도 붉은 입술을 한참 올려다봤다.
“왜요?”
“그냥, 교수님 너무 좋아서요.”
“갑자기?”
“네. 그냥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드네요. 이상하게.”
“이상하긴. 정상이지.”
정상이구나. 이소가 어깨를 붙잡고 해실해실 웃었다. 그러다 문득 저는 해준에게 받은 것만 잔뜩이고 정작 준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큰 눈을 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근데, 교수님.”
“네에.”
“교수님은 뭐 갖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물론 해준이 갖고 싶다고 해서 자신이 모두 사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해 주고 싶었다. 요리도 잘하는 편이고, 바느질도 꽤 하고, 종이접기도…. 여기까지 생각하니 자신이 줄 수 있는 것들은 꽤나 소박하고 초라한 것들뿐이다. 괜히 객기 부렸나, 머쓱해졌다.
“이소 씨가 주는 건 다 좋은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요?”
“해수 선물도 그렇구, 제 선물도 그렇고. 너무 제가 받기만 해서 저도 뭔가 드리고 싶은데 뭘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귀여워. 뭐든 상관없이 다 좋아요. 버리려고 내놓은 신문지에 사랑한다고 편지라도 써 봐요. 가보로 모시고 살 테니까.”
거의 진담이었는데도 이소는 그런 거 말고 제대로 된 걸 말해 보라며 핀잔을 주었다. 키스를 더 하고 싶었는데 팔에서 쑥 빠져나가 책상까지 무릎걸음으로 멀어졌다.
“생각나는 거 있음 말씀해 주세요. 일단 편지부터 쓰구.”
이소의 말에 해준은 옆으로 비켜서 턱을 괴고 모로 누웠다. 글쎄, 내가 갖고 싶은 게 뭘까. 내가 원하는 거. 시간이 째각째각 갔지만 제가 윤이소에게 받고 싶은 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웃는 얼굴 하나면 되는데, 같이 있는 이 시간이면 마음에 꽉 차는데.
해준은 그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시간 자체도 즐거웠다. 그러나 정작 이소는 서랍장과 책상을 뒤적거리며 편지를 쓸 그럴싸한 메모지를 찾고 있었다. 귀여웠다. 그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해준은 문득 이소에게 부탁할 것이 생각이 났다. ‘이소 씨.’ 하고 부르자 드디어 생각이 났냐며 제 앞에 얼른 다가와 무릎을 꿇는다. 해준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소 씨 사진 보자. 졸업사진부터 그 스티커 사진까지 모두 다.”
소박한 부탁이었지만 이소는 눈을 접어 웃으며 얼른 앨범을 꺼내 왔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 낡은 앨범에서 나온 사진 한 장 때문에 그 사달이 날 줄은.
해준과 이소는 이불을 덮고 엎드린 채 앨범을 펼쳤다. 두세 권짜리 앨범은 해수의 어릴 때 사진을 인화한 것, 해수와 이소의 스티커 사진을 모아 놓은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소의 유년 시절 앨범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소가 직접 찍어 준 해수의 사진들에서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갓난아기 때부터 유치가 빠져 울고 있는 모습,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얼굴에 모조리 묻히고 웃고 있는 모습 등 당시의 생생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사진을 보고 있는 해준의 입꼬리도 씰룩씰룩 올라갔다.
네 컷으로 길게 인화된 사진 속 이소와 해수의 얼굴은 낯설었다. 이렇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가. 해준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한번 이소를 바라보기를 여러 번. 대충 눈치챈 이소가 ‘원래 이런 건 재미있게 찍어야 나중에 또 볼 때 기분 좋단 말이에요.’ 하고 얼굴을 붉혔다. 귀여운 취미였다. 나중에는 자신도 끼워 달라 하며 뺨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그리고 마지막이 이소의 어릴 적 사진들이었다. 이것마저도 이소 자신이 가진 것은 없어 은형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소가 통째로 가져온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쭉 친구였던 은형은 다행스럽게도 이소의 사진을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 앨범을 열고 봄 축제 사진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이소 씨라고요?”
“네. 고3 학교 축제 날 여장 했었거든요.”
해준은 낡은 앨범을 들여다보며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속의 인물은 누가 봐도 여학생이었다. 커다란 카디건으로 다부진 골격을 가리고 있었지만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를 입고 벤치에 앉아 있는 여학생은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바짝 어깨를 붙인 채 웃고 있는 은형도 보였다.
“예전에 은형이 유품 정리하다가 나온 건데, 아 얘가 이 사진을 안 버린 거예요…. 미술팀 애들이 머리랑 분장에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하던지…. 이날 상품이 햄버거 세트 걸려 있었거든요. 장난 아니죠.”
“응, 정말 장난 아니게 예쁘다.”
장난 아니게 재밌지 않냐는 물음이었는데 해준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여전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소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벙찐 표정으로 스무 살의 어린 저를 바라보는 해준에게서 제법 때 묻지 않은 소년 같은 풋풋함을 느꼈다. 교수님도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구나, 귀엽다.
해준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이소는 자꾸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이게 됐다.
“자랑은 아닌데요, 저 이날 축제에서 여장으로 일등 했어요.”
“일등? 막 다리도 보여 주고 그런 거 했어요? 섹시한 춤 추고?”
이소가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 뽑은 거예요. 이상한 거 안 했어요.”
“스타킹도 신었어…?”
사진을 훑어보던 해준이 반질반질한 이소의 다리를 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랬죠…. 당연히? 치마 입어야 했으니까요.”
“맞는 게 있었어요?”
이소가 눈을 접어 웃었다. 해준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스타킹이 얼마나 잘 늘어나는데요. 지금 입어도 맞을걸요. 그리구 저 그때는 키 덜 자라서 한 170cm 못 되었나 그랬어요. 저는 스무 살 넘어서도 계속 컸거든요. 신기하죠.”
해준이 아,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이소는 해준의 옆에 엎드린 채 주절주절 당시에 우유 배식 받았던 것을 얼마나 자주 마셨는지, 키가 작아 콤플렉스였다느니, 철봉운동을 했더니 키 크는 것뿐만 아니라 역시 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느니를 떠들었다. 해준은 말없이 제 핸드폰에 이소의 사진을 찍어 저장한 후 팔을 괸 채 돌아봤다.
“이소 씨.”
“그래서 제가, 아 네.”
이소가 얼른 제 수다를 갈무리했다. 배고프신가? 과일 깎을까? 그런 순진한 눈이었다.
“나 이소 씨한테 받고 싶은 거 생겼어.”
“정말요? 뭔데요?”
받고 싶은 게 생겼다는 말에 이소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줄 수 있는 거면 드릴게요. 자신을 마주한 이소의 두 눈동자가 너무 청초하고 맑아서 해준은 말을 할까 말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얼마 없는 제 양심을 아주 무겁고 단단한 상자에 넣어 버리곤 자물쇠로 친친 감아 바다 깊숙한 곳에 내던져 버렸다.
“나, 자기 스타킹 신은 거 보고 싶어.”
흔들림 없는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농담이시죠?”
경악하는 이소의 말을 듣고도 해준은 씩 웃기만 할 뿐 부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