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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뜬 이소는 슬며시 눈을 뜨고 허리를 두드렸다. 어제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나.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결국은 은밀한 곳까지 서슴없이 핥아대는 해준 때문에 질겁을 했다. 콘돔까지 뒷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젤이 없어 고심하는 듯하더니 조리대에 있던 코코넛 오일을 제 구멍 안에 치덕치덕 발라 밀어 넣는 것을 본 게 제대로 된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소 씨, 구멍에서 좋은 냄새가 나. 혀 조금만 넣을게.’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진짜 하지 마…! 으흑, 하지 말라고…!’
예전에는 해준과 몇 차례 몸을 섞었어도 말만은 점잖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요즘은 말과 행동이 갈수록 집요하게 저를 놀리고 괴롭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이소 씨, 여기 봐요. 내 거 들어갈 때마다 배 위로 만져져. 여기 보여요?’
‘아으……. 아… 제발…… 그런 말 좀, 그만, 해 주, 세….’
원래 섹스는 그렇게들 하는 건가. 몰아붙일 때까지 허리 짓 하다가 한쪽이 기절하면 끝나는 건가. 그런데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다정한 변태가 다음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할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다른 때는 퍽 신사 같은데 둘만 남게 되면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해준이 낯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는 혹시라도 정숙이 불시에 내려오게 될까 봐, 해준이 문을 덜 잠가서 누구라도 들어올까 봐 신음을 참아내는 것이 너무나 고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래를 치받는 힘이 너무 세서 조리대 바닥에 제 성기가 홧홧하게 문질러지는 것이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든 허리에 힘을 주고 바짝 들어 아래가 닿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그럴 때마다 속을 더 깊이 파고드는 통에 자신은 자지러지며 무력하게 흔들렸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기억 속 해준은 이불에 저를 눕히고 허락도 없이 집 안 곳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서랍을 열고 혼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액자를 뚫어지게 구경하기도 하고, 책꽂이에 꽂힌 이소가 좋아하는 책들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종래는 제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선물들을 잔뜩 꺼내서 주절주절 설명했다. 그 목소리가 원체 나긋나긋하고 조곤조곤해 이소는 그만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감기 전 제 앞에 해준이 누워 있어서 좋았다. 해준의 향기가 가까이 있어서 좋았다.
이소는 제 옆에서 자고 있는 해수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집 안을 에워쌌다. 해수의 말간 얼굴을 쓰다듬었다. 주먹만 하던 머리통은 어느새 쑥쑥 자라서 제 배꼽께에 닿았다.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다가 넘겨 주고 몸을 돌리자 제 앞에 늘어놓은 핸드폰과 자질구레한 액세서리, 해수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핸드폰도 있었다. 씀씀이가 크고 정이 많다는 것은 알았는데 어린 해수가 무슨 필요가 있다고 이런 과한 걸 샀나 싶었다.
“아니… 해수 건 왜 샀어….”
말은 그리 해 놓고 이소는 얼른 해수 것부터 뜯었다. 손바닥을 펼치면 몽땅 가려지는 자그마한 스마트폰은 폰트조차 동글동글 귀여웠다. 아기자기한 메뉴와 귀여운 케이스까지 맞춰 놓고 나니 해수가 정말 좋아할 것 같았다.
이소는 해준이 준 새 핸드폰을 켰다. 제가 쓰던 것은 6년도 넘게 쓰던 거였는데 해준이 사 준 것은 얼마 전 광고에서 본 최신형이었다. 화질부터 음향까지 세련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카메라를 열었더니 눈으로 보는 것보다 화질이 더 선명했고 두 손가락을 벌려 가며 화면을 확대했더니 거짓말 안 하고 전등 갓에 널린 벌레 시체의 날개까지 보였다.
괜히 천장을 향해 카메라를 켠 이소는 벽지 구석구석을 훑어가며 구경했다. 못 보던 어플들도 잔뜩 있었다. 한참을 누워서 구경하다가 시계를 보니 십 분 뒤 가게에 나갈 시간이었다. 이소는 답지 않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누웠다. 작은 장난감을 선물 받았으니 조금만 더 구경하고 내려가고 싶었다.
새 핸드폰이라 오전 중에 통신사에 등록까지 하러 가야지, 생각했는데 무려 개통까지 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눌러 보며 구경하던 도중 연락처에 미리 저장된 번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즐겨찾기 제일 상단 목록에 해준의 이름이 있었다.
[차해준]
차해준 교수님이라고 딱딱하게 쓰여 있던 제 핸드폰과 달리 직함은 똑 떼고 이름 세 글자만 달랑 입력된 것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이름이 참 예쁘구나. 이소는 해준의 이름을 누르고 메시지를 적었다. [선물 고마워요. 그리고 엉덩이 너무 아파요. 못 갈 거 같아요.] 마지막 말은 농담 반 진담 반, 투정 같은 것이었다. 두근두근하며 보냈더니 무려 1분이 되기도 전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많이 아파요? 그럼 내 차로 갈까요?’
말을 말자. 이소는 웃으며 글자를 쓰다가 문득 저도 이모티콘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모티콘 버튼을 눌렀다. 괜히 기분 좋으니까 한 개 정도만 사자. 그런데 구매한 이모티콘 목록에 제가 구입하지도 않은 온갖 이모티콘이 잔뜩 있었다. 이게 다 몇 개지, 세어 보니 30개가 넘었다. 하나같이 커플 이모티콘들이었다. 이것 역시 해준의 소소한 선물이었다.
이소는 손가락을 밀어 둘러보다가 어린 왕자와 장미 캐릭터에 시선을 멈췄다. 장미가 어린 왕자의 목을 잡고 흔들며 채근하는 동작이었다. 어쩐지 저도 이런 걸 보내도 될 것 같은 상황이라 그걸 꾹 눌렀더니 해준에게 전송되었다.
읽고 나서 괜히 오버 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괜히 보냈나. 삭제해야겠다. 이소의 생각이 빠르게 건너뛰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해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를 읽었다.
‘장난이에요. 조금 이따 만나요.’
해준의 답장은 간결했다.
그러고는 한 번만 봐 달라는 듯이 손을 싹싹 비는 어린 왕자의 이모티콘이 왔다. 곧이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어린 왕자, 손 키스를 날리는 어린 왕자, 애교를 부리는 어린 왕자가 연달아 왔다. 이소는 괜히 멋쩍어져서 ‘저 이제 나갈 준비할게요.’ 라고 메시지를 보내곤 화면을 껐다. 괜히 웃음이 났다.
이소는 정숙에게 먼저 내려가 보겠다고 문자를 한 후 욕실에 가 어느 때보다 꼼꼼히 씻었다. 가게 일이 끝나고 나면 양도로 가야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은형에게는 깨끗하고 말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오늘은 특히나 더 그랬다. 해준이 준 옷들을 걸쳐야지, 해준이 사 준 신발도 신어야지. 좋은 옷이 한 벌이라도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점심을 먹고 이소는 정숙에게 인사를 하고 해수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집을 나오기 전 긴 고민 끝에 해준이 사 준 시계도 찼다. 은형이 본다면 그게 얼마짜리 시계냐고 눈이 동그래질 텐데, 직접 보여 줄 수 없어 아쉬웠다. 이소는 해준에게도 잘 다녀오겠노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해준은 어김없이 몇 분 되지 않아 바로 잘 다녀오라는 연락이 왔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끼고 있는 건지 제 연락에 참 빨리도 답했다.
터미널로 향하는 중간에 고 대표에게 전화가 두어 번 왔지만 받지 않았다. 오늘은 받을 수 없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보나 마나 쓸데없는 말장난을 하려고 하는 게 틀림없다. 정산일까지는 아직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었고 저번 달에 준 중도상환금까지 하면 재촉할 정도는 아닐 텐데. 가끔씩 고 대표는 그냥 저를 미치게 하려고 연달아 전화를 했다. 전화를 주머니에 깊이 쑤셔 넣고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타고 있지 않아서 해수와 이소는 구석에 앉아 몰래 달걀을 까먹었다.
굽이굽이 버스가 돌아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개발이 될 만도 한데 가는 길은 여전히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곳, 나무가 울창한 산길이었다. 하지만 나름 운치도 있었기에 이소는 해수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해수는 아침에 받은 핸드폰을 보고 정말 집이 떠내려가도록 좋아했고 기어코 그것을 들고 오고 말았다. 혹시나 값비싼 것을 잃어버릴까 봐 이소는 전전긍긍했지만 해수는 제법 제 것을 잘 지켰고 꼭 챙겼다.
납골당에 거의 도착했을 때 해수와 이소는 짠 것이 아님에도 둘 다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적막한 그곳은 기온마저도 바깥보다 조금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둘은 손을 꼭 붙들고 걸었다. 작은 정사각의 상자를 겹쳐 놓은 것 같은 협소한 안치단에 은형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찾아주는 이라고는 이소와 해수뿐인 쓸쓸한 공간 안에서도 은형은 밝게 웃고 있었다. 해수의 이름을 지었던 그 날, 그 꽃나무 아래에서 웃었던 그 사진이었다.
“은형아, 나 왔어.”
“엄마, 안녕.”
이소와 해수는 안치단에 들어 있는 사진을 꺼내어 또 한참 들여다봤다. 해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엄마였지만 그 사진을 참 좋아했다. 전에 쓰던 이소의 핸드폰 안에도 그 사진이 있었는데. 이소와 해수는 이제 자신들의 새 핸드폰으로 은형의 사진을 다시 찍었다. 부녀는 복사한 듯 똑같은 화면을 보고 씨익 웃었다. 두 사람 나름의 은형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의젓하고 어른스러워도 일곱 살은 일곱 살이었다. 해수는 추모를 하다 조금 지루해졌는지 조금 떨어진 곳 의자에 앉아 책을 폈다. 이소는 해수가 멀리 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은형의 앞에 섰다. 다른 안치단들은 모두 꽤나 화려했는데 은형의 유리판 앞만 썰렁했다. 대신 이소는 안치장 안에 해수의 원복 입은 새 사진을 넣어 주었다.
“은형아, 해수 내년에 학교 가.”
갈수록 은형과 웃는 모습이 꼭 닮은 해수였다. 해수는 웃을 때 왼쪽 볼에 인디언 보조개가 피었다. 은형 역시 웃을 때 꼭 그랬다. 학교에서 매점 빵을 사 먹으며 모자란다고 이소의 것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도,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담을 넘었을 때도, 지각해서 오리걸음 하다가 체육 시간에 공을 차던 이소를 마주쳤을 때도 은형은 꼭 그렇게 유쾌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소는 은형이 항상 밝아서 좋았다.
“해수 진짜 똑똑해. 얼마 전에는 영어로 편지도 쓰고, 발표회에서 상도 받았어. 말도 얼마나 잘하는지…. 아, 장난 아니야, 내가 말로 못 이긴다니까. 아, 그리고 입맛이 어떻게 그렇게 너랑 똑같지? 너 학교 다닐 때 항상 소시지에 마요네즈 찍어 먹었잖아. 그런데 해수가 꼭 그래. 피는 못 속이더라. 그리고 음, 음….”
이소는 한참 해수에 대해 떠들다 말을 골랐다. 은형이 궁금할지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맨날 오면 할 이야기라고는 ‘일을 구했어, 어디로 이사했어’라는 둥의 신변잡기가 다였는데 은형이 앞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제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여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잘 지내. 밥도 전보다 잘 먹고, 이사한 곳도 전에 살던 데보다 좋은 것 같아. 장사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 봐, 옷도 좋은 거 입었어. 잠도 전보다 더 잘 자고…. 살도 더 찌고. 그리고….”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해수가 볼까 봐 살짝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
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해준이 준 시계를 아끼고 아끼다가 이런 날 차고 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은형에게는 꼭 말하고 싶었다. 여자애들을 봐도 딱히 설레지도 않고 학교를 공부만 하러 다니는 저를 보고 은형은 세상 숙맥도 이런 숙맥이 없다고 놀려댔다.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여학생의 고백도 당황해하며 거절하자 은형은 그때부터 이소를 고자라고 놀려대곤 했다. 주방 조리대 위에서 해준과 몸을 섞었던 지금 제 모습을 은형이 본다면 까무러칠 일이다.
“좋은 사람 같아. 나한테는 과분하지만, 그래도… 자꾸 욕심이 나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그 사람한테 기대고 싶어지고. 은형아, 네가 그랬잖아.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크면 자꾸 안 되는 걸 알아도 저절로 몸이 다가가고 있다고. 내 것이 아닌 걸 아는데도 지켜만 봐도 좋다고.”
이소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오랜만에 친구 앞에서 털어놓는 고백은 제 마음을 살살 쓸어넘겼다.
“내가 그래. 그냥 지금도 좋은데…. 너무 좋은데, 마음이 슬프더라. 이렇게 어려운 건 줄 알았으면 네가 사랑을 할 때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걸.”
이소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은형이 저를 보고 있었다면 혀를 찰 일이었다. 너 그런 성향이어서 너 좋다는 여자애들 다 거절했냐, 하며 머리를 쥐어박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소도 몰랐다. 해준이 남자여서 좋았다기보다는 그냥 해준이어서 좋아졌다.
“말 많았다, 그치. 나 이제 가 볼게. 오늘은 그 사람 집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아. 해수도 같이 가. 거기 해수 또래 친구들도 있고 역시 같이 놀다 보면 좋을 거 같….”
“아빠!”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해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소를 불렀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사이로 선글라스를 낀 익숙한 얼굴의 중년 여자가 걸어 나왔다. 7년이나 지났음에도 잊을 수 없는,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해수가 후다닥 달려와 이소의 품에 안겼다. 이소는 다급하게 해수를 등 뒤로 숨겼다. 이 고요한 납골당에 저와 해수만이 다급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차분하게 걸어온 여자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어 내렸다. 이소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랜만이구나.”
이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여자가 이소를 보고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회색 짧은 코트에 검정 구두를 신은 채 나타난 여자는 꽤나 미인이었다. 그러나 반듯한 콧대와 번쩍이는 피부와 달리 움푹 패인 눈가는 예민해 보였고 그 안의 옅은 색 눈동자는 무미건조해 보였다.
갈색의 눈동자에서 떨어진 시선이 해수에게 가닿았다.
“계절감이 떨어지는 옷을 입혔네.”
이소는 또 한 번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 이명희는 항상 저런 식의 말을 구사했다. 머리가 나쁘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할 애매한 질문 혹은 혼잣말. 그러나 그 안에는 가시가 있었고 제대로 알아먹지 못하면 두 번 말하지 않는다며 밥을 굶기고 행동을 제약했다. 그러나 그 말투는 꽤나 오래전부터 입에 익어 왔던 모양인지 이제는 정말로 걱정하는 말을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소는 한숨을 쉬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읽었는지 해수가 이소의 옷깃을 꽉 쥐었다.
“한가하신가 봐요. 여기까지 직접 오시고.”
갈라진 첫 마디, 이소는 답지 않게 날을 세웠다.
“예쁘게 키웠네. 쳐다보는 눈매가 꼭 지 아빠랑 꼭 닮았어.”
이소가 눈을 치켜뜬 채 이를 악물었다. 이명희의 뒤를 지킨 남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소와 해수의 길목을 막았다. 이명희가 손을 들어 ‘길 좀 비켜 봐, 애 협박하러 온 거 아니니까.’ 하자 그제서야 슬금슬금 길을 터 주었다. 젊은 남자가 이명희에게 노란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서 꺼낸 빳빳한 종이를 훑어보던 이명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우리 도움 없이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는 안 했다.”
하필 만나도 그런 질 나쁜 업자한테 돈을 빌려서는 이 귀한 애를 그리 고생을 시켜. 이명희가 쯧 소리를 내며 눈을 흘겼다. 이소는 듣기 싫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지난 시간 정말 사람 피를 말려 놓고는 한 2년 잠잠한가 했더니 기어코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호적에도 못 올리는 애를 데리고 있자니 답답했겠지. 뭣 하러 얘를 데려왔나 싶을 거고.”
이소는 해수의 귀를 막았다.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 적이 없는 애가 왜 4년 전엔 갓난애를 데리고 바다에 기어들어 갔어. 죽으려고?”
“…….”
“내가 안 보고 있을 줄 알았니?”
이소는 눈을 치떴다.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말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기가 찼다. 그 바다에 어떤 심정으로 갔는지는 자신만이 안다. 심지어 보고 있었으면서 말리지도 않았다는 것인가. 정말로 들어갔으면 아이는 살리고 자신은 죽게 놔두었을까. 아니면 애물단지들이 알아서 정리되겠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을까. 이명희는 안쓰럽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래, 힘들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특하다고 여기고 있어. 그리 아등바등 살면서도 희망이나 기대는 놓지 않는 게 너답기도 하고.”
“하시고 싶은 말씀만 하시고 비켜 주시겠어요. 저 선약이 있어서.”
“백조는 백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야 해.”
못난 어미 오리 품 말고. 이명희의 말에 이소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해수의 귀를 막고 있는 손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이명희는 차분하게 종이를 내밀었다. 계약서로 보이는 두툼한 종이 뭉치가 시야에 걸렸다. 그러나 이소는 차갑게 이명희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의 지난 시간, 이걸로 다 보상해 줄 수 있어. 이 정도 돈이면 대학 공부는 다시 할 수 있을 거고, 회사 따위 다니지 않아도 평생은 놀고먹겠지. 널 괴롭히는 빚도 싹 갚을 수 있을 테고 가난이니 궁상이니 모두 남 이야기가 되어 버릴걸. 솔직히 네 나이에 이 정도 돈 만지는 게 어디 쉽니.”
이소는 떨리는 숨을 골랐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학습된 무기력은 주먹을 나가게도, 소리를 지르게도 못했다. 그녀의 앞에서는 몇 년이 지나도 저는 약하디약한 작은 어린 애였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것은 지금 제 옆에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볼 안쪽을 짓씹은 후 겨우 말을 뱉었다.
“…이제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뭔데요.”
“7년 전 일.”
이명희가 서류를 봉투에 넣으며 말을 골랐다. 옆에 있는 비서에게 눈짓하자 비서는 뚜벅뚜벅 걸어와 이소의 가방에 멋대로 서류를 욱여넣었다. 제 가방이 눈 앞에서 털럭털럭 열리는 꼴을 보며 이소는 이명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와 회장님도 무척 후회하고 있어.”
그리 내보내지 말 것을. 그냥 데리고 있을걸. 이소는 해수의 귀를 더 세게 막았다. 혹여라도 아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을 저 배려 없는 노인네가 해 버릴까 봐 눈에 서슬 퍼런 날을 세운 채 노려보았다. 이명희가 말을 고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회장님이 몸이 많이 안 좋아. 뉴스 봐서 알 테지만 사실 언론에 공개된 것보다 훨씬 더 경과가 좋지 못해. 벌써 서너 달이 넘어가네. 그 깐깐한 양반이 자꾸만 언제서부턴가 어린 핏덩이가 눈에 밟힌다고 해서.”
“허, 좋은 거 많이 드시고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암이 전이가 빨랐지. 두어 달밖에 안 남았다더구나.”
이소는 혀를 찼다. 언제부터 그렇게 정에 약하고 연민에 차 있었던가. 제가 기억하는 치승은 언제나 경멸 어린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걸핏하면 뺨을 올려붙이던 그런 사람이었다. 풍채 좋은 그 덩치로 열두 살 된 이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쥐어패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우리가 너에게 모든 정보를 다 공유할 필요는 없어. 다만 이제사 아이가 필요해졌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상응할 만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한 후 데려가겠다는 거야. 그만한 가치가 있는 두뇌니까.”
이명희는 이미 해수의 뒷조사까지 모두 마친 눈치였다. 뭐, 이제 와 제왕 수업이라도 시킬 생각인가.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가. 얼마 전 결혼까지 하셨다는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이소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건 여전하시네요. 두 분 다.”
이소가 해수를 들쳐 안았다. 뭘 모른다는 건가. 눈치 빠른 해수는 눈을 감고 자신의 귀를 막은 아빠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이소는 마음이 미어졌다. 어른들 싸움에 어린아이가 떠는 모습이 꼭 제 어릴 때 같았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찾아와서는 이 사달을 낸단 말인가. 이소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 앞에 대치했다.
“지난 7년간 사람을 토끼몰이하듯 몰아넣었다 풀어 주기를 반복한 게 셀 수도 없어요. 제가 키우겠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지내는지 감시하려고 사람을 보내셨을 때마다 제가 책임지고 입 다물고 키우겠다고, 절대로 비밀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겠다고 각서까지 썼잖아요. 전 그때 그 각서를 제 목숨값 대신 드린 거예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가 끝까지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쓴 거라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원래 자리를 운운하세요? 2년 동안 잠잠했다가 나타난 게 이런 이유 때문이고요? 굳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이를…!”
“글쎄다. 넌 아이가 너랑 살면서 행복한 것 같아 보이니?”
이소가 말이 없자 이명희가 몸을 돌렸다. 매끈한 벽에 그녀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비쳤다. 오늘따라 납골당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출입을 통제했을 것이다. 비밀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
“네가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게 가난 말고 뭐가 있을지 모르겠다.”
“백모님!”
이소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서늘한 납골당을 울렸다. 목에 핏대가 서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면 우리 주영이 보기 부끄럽잖아. 그렇지?”
이소가 이를 악물었다. 돌아보기 전 핏발 서린 눈에 슬픔과 분노, 회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부끄럽지 않냐고? 우리 둘을 먼저 떨어뜨려 놓은 게 누군데. 울면서 애원했는데도 그 관계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게 누군데. 이소는 볼 안쪽 살을 짓씹었다. 핏물이 진득하게 배어 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이명희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이소가 낮게 읊조렸다.
“무슨 말을 하셔도 절대로 안 보내요. 7년 전에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버리셨으면….”
“…….”
“이제 와 다시 주울 생각 하지 마세요. 너무 늦었어요.”
이소는 해수를 안고 발걸음을 뗐다. 따라와서 붙잡는다면 이로 물어뜯고 주먹을 휘두를 생각도 있었지만 다행히 남자들은 쫓아오지 않았다.
* * *
이소는 해수를 안고 도망치듯 걸어 나왔다. 뒤도 돌아볼 수 없었다. 손이 다 떨렸다. 어떻게 알고 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은형의 납골당 주소까지 알 줄은 몰랐다. 감시가 끝난 줄 알았는데, 근래 너무 마음을 놓았었던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걷다 보니 어느새 본관에서 훨씬 떨어진 계단 근처였다. 와중에 이소는 해준의 차를 타고 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해준이 연관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해준이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명희와 남자들이 세단에 다가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도 저를 인식한 듯 보였지만 멀거니 쳐다보다가 별다른 조치 없이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소는 입술을 곱씹었다. 이소는 해수를 꼭 끌어안았다. 해수는 은형과의 약속이자 제 삶의 전부였다.
“아빠.”
불현듯 해수가 이소의 손을 잡았다.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는지 주먹을 쥔 손끝에 깊게 자국이 패여 있었다. 해수가 작은 손바닥으로 이소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아저씨들 갔어.”
해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어쩌면 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소는 굳은 어깨에 힘을 빼고 해수의 손을 맞잡았다. 해수는 이소의 표정이 풀어지자 입을 열었다.
“그렇게 화 많이 내는 거 처음 봤어.”
“미안, 놀랐지.”
“아니야, 아빠도 화낼 수 있지.”
제법 의젓하게 말했지만 아까 제 품에 안겨 떨던 해수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빠, 우리 또 이사 가야 해?”
“이사?”
“응. 저렇게 검은 옷 입은 아저씨들 오면 막 짐 싸고 그랬잖아. 네 살 때 내가 좋아하던 인형도 전에 전에 살던 집에 놓고 왔고. 내가 그거 가져와야 한다고 화내니까 아빠가 미안하다고 했던 거 아직도 기억나거든.”
“참, 우리 해수. 진짜 다 똑똑하네….”
이소는 해수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한다는 사실에 할 말이 없었다. 이미 4살 때부터 월등하게 기억력이 좋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예민한 감성을 섬세하게 챙겨 주지 못해 매번 미안했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대지도 못하고, 맞서 싸울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드는 안정의 욕구가 몸집을 불렸다.
“이사, 안 갈 거야. 해수야.”
“정말?”
“응. 해수 걱정 안 시킬게.”
이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거뒀다. 7년 전 제가 집을 떠나고, 치승은 어떻게 저를 찾았는지 사람을 보내 제가 사는 모습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가 버리곤 했다. 처음에는 저와 해수를 죽이러 쫓아온 줄 알았는데 대뜸 아이의 인적 사항을 알아낸 후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일 년, 어떨 때는 육 개월, 어디선가 발 붙이고 숨 돌리고 살려고 하면 불시에 찾아와 사람을 돌게 만들었다. 결국은 암자까지 들어가 공양미를 해 주며 겨우 숨어 살았다.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사가 잦다 보니 직장도 온전히 다닐 수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공사판 노가다와 아르바이트가 다였다.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나 억울했다.
어떤 날은 공원에서 놀고 있거나 길을 걷는데도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피가 식었다. 저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저를 막 대한 사람들은 모두 해수를 제 약점처럼 쥐고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이소는 칠 년 전 밤을 회상했다.
어릴 때부터 크고 어두웠던 내 불행은 어쩌면 이제 너에게 옮겨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둘 다 팔자가 거지 같아서 이렇게 서로를 좀먹고 있는 걸까. 내가 너를 놔주면, 네가 나를 놓으면 조금 더 편해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다에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 등에 업힌 작은 녀석을 두고 물에 뛰어들 수 없었다. 반대로 제가 세상의 전부인 해수를 찬 바닷물에 밀어넣을 수도 없었다.
어린 이소는 그렇게 해수를 안고 몇 번이나 죽음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무섭고 외로워서 많이 울었다. 미안해, 항상 미안해. 내가 네 아빠 해서 미안해. 네 손을 잡은 게 나라서 미안해. 이소는 발치의 돌을 뭉개며 상념에 젖었다. 문득 손을 잡고 있던 해수가 어, 하고 이소의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다.”
계단 아래에서 해준이 전화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차에 기대어 통화를 하는 해준의 모습을 보고서도 반가움보다 씁쓸함이 먼저 찾아왔다.
좋은 사람, 제 곁에 남으려는 사람. 그러나 어쩌면 제 처량하고 볼품없는 삶을 동정하고 연민하다 떠나 버릴지도 모르는 사람.
해준은 몰라도 이소는 자꾸만 둘의 끝을 생각했다. 시작이나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이 애매한 관계도 끝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잠깐의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크게 마음을 주어 버려 대안이 없었다. 정말 저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해수의 손을 잡은 채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해준은 심각한 전화를 받고 있는 듯 표정이 굳어 있었지만 이소를 보고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볕뉘가 그의 얼굴을 훑었다. 먼저 달려간 해수가 얼른 세단에 올라탔다. 차 문이 닫히고 길에는 저와 해준뿐이었다.
해준은 얼른 전화를 끊고 싶은지 곤란한 얼굴이었다. 한적한 시골길에 담백하고 분명한 어조, 오늘따라 그가 하는 말이 선명히도 잘 들렸다.
“결혼은 좀 나중에요. 생각해 볼게요, 어머니. 도착하시면 전화 주세요. 모시러 갈 테니까. 저도 이만 끊어야 해요, 네. 저도 사랑해요.”
이소는 걸음을 멈췄다. 대여섯 걸음만 더 가면 해준의 앞이었는데 발걸음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결혼. 생각해 본다. 어머니. 모두 저하고는 먼 이야기였다. 이소가 더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대자 해준이 머리를 기울이며 팔을 활짝 벌렸다.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이소 씨, 얼른.”
그 말이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 이소는 성큼성큼 다가가 폭 안겼다. 해준은 이소를 아주 푹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더 강하고 깊게 품에 욱여넣은 채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이소는 팔을 들어 허리를 끌어안으려다가 차 안에서 혹시 해수가 쳐다볼까 봐 팔은 들어 올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차렷 자세로 섰다. 그 일련의 과정을 알아챘는지 해준이 낮게 웃었다.
“잘 만나고 왔어요?”
“네.”
“음. 좋네.”
해준이 몸을 흔들었다. 이소는 안다. 해준은 기분이 좋으면 이소를 안고 몸을 흔들었다. 왜 기분이 좋지.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좋은 걸까? 어디 좋은 선 자리라도 들어왔나?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부잣집 딸일까?
해준이 몸을 떨어뜨렸다. 이소는 오늘따라 해준과 떨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어떡하지, 오늘 우리 집 못 갈 것 같아요. 갑자기 어머니가 오신다고 하셔서.”
“어머니가요?”
“응. 갑자기 보고 싶어서 귀국하셨어요. 좀, 엉뚱하신 면이 있어요.”
“아…. 외국 사셨었구나.”
“완전히는 아니고, 일본에 자주 왔다 갔다.”
이소는 여전히 팔을 내리고 안긴 채 말을 이었다. 저와 다른 세계 사람, 한숨만 나왔다.
“대신 우리 오늘은 데이트 갈까요?”
“어디로요?”
“이소 씨 가고 싶은 데.”
이소는 머리를 굴렸다. 가고 싶은 데. 가고 싶은 데가 어디지. 어딜 많이 다녀본 적도 없어서 어디를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사실 머리가 조금 복잡해서 쉬고 싶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생각 안 나게 보내고 싶기도 했다. 이소는 생각했다. 뭐 대단한 거 말고, 그냥 언제라도 해준을 떠올리기 좋은. 자기와 해수가 단둘이 남더라도 해준이 스며들 수 있는 그런 장소.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한강 가요.”
“한강?”
“저 풀빵 먹고 싶어요. 자전거도 타고… 연 날리기 같은 것도 하고, 그리고….”
“배도 탈까?”
“좋아요.”
이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득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폭 안겼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에 해수마저 곁에 없고 해준마저 떠나 버리면 나는 어쩌나. 오늘 하루를 더 즐겁게 살아야지. 그리고 그 즐거운 기억만 안고 죽어야지. 오늘부터 매일매일 기분 좋은 일만 가득하게 살아야지. 생각했다.
* * *
싱숭생숭한 기분과 별개로 이소는 해준과 가벼운 자리 문제로 실랑이를 했다. 해준이 조수석 문을 열고 동시에 이소 역시 뒷좌석 문을 열자 해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하게 바라봤다.
“뭐해요?”
“차 타려고요.”
“왜 여기 안 타고?”
“해수랑 같이 타야죠.”
어린 해수만 뒤에 따로 태울 수 없다는 이소와 그래도 무조건 제 옆에 타고 가자는 해준과의 의견 차이였다. 물론 결국은 이소의 뜻대로 되었다. 이소는 해수와 함께 타지 못하게 한다면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해준은 결국 져 줬다.
뒷좌석에 앉아 차 시트를 문질러 보기도 하고 창문을 바라보며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부녀와 달리 해준은 입이 댓 발 나온 채 운전했다. 이소를 옆에 태운 채 드라이브 하고 싶었는데 아직 어린 해수 옆에 성인이 동승해야 한다는 걸 몰랐었다. 그래도 룸미러로 바라본 이소의 눈가가 많이 부어 있지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한강에 가는 내내 이소는 때때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강물 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빛의 더미들을 보며 착잡하고 우울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어여쁜데, 해준과 나들이도 가는 길이라 마음이 즐거워야 하는데 자꾸만 제 마음이 가라앉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려 쭉쭉 당기고 볼을 짝짝 쳤다. 그럴 때마다 해준이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이소는 그저 슬쩍 미소 짓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강에 도착할 때 즈음에 해수는 까무룩 잠들었다. 고개가 휘모리장단을 치는 해수를 안아 제 무릎에 눕히곤 이소 역시 살짝 졸았다. 문득 언제 나갔는지 해준이 창을 두드렸다. 창문을 내려 보라길래 문을 살짝 내렸더니 시원한 커피가 쑥 안으로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빨대를 물고 쪼옥 빨아들이자 시원하고 달콤한 원두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해준이 창 안으로 손을 넣어 이소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예뻐서.”
그 말에 이소는 빨대를 지근지근 깨물었다. 해준이 닿으니 다시 우울한 마음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와 연기처럼 사르르 사라졌다. 역시 이 사람하고 있으면 자꾸 잊어버리게 됐다. 차라리 잘 되었다. 해준이 데리러 와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버스를 타고 갔으면 해수랑 있을 때도 달걀이고 사이다고 그저 멍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갔을 것 같았다. 그럼 눈치 빠른 해수는 저를 웃게 해 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을 테다. 생각만 해도 갑갑한 가정이었다.
해준은 이소의 창문 옆에 기댔다.
“자, 한강에 와서 뭐가 제일 하고 싶으셨어요?”
“사실 잘 몰라요. 그냥 음, 컵라면 먹기, 맥주 마시기, 자전거 타기, 연날리기….남들은 다 하는 거 전 안 해 봤거든요.”
“오늘 안에 다 하려면 바쁘겠네.”
“조금씩 하죠, 뭐.”
이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해수를 토닥여 깨웠다. 해수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난생처음 보는 커다란 강과 잔디 광장에 놀라 웃음을 터뜨리곤 앞으로 뛰어가 버렸다. 그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아이였다. 오길 잘했네. 이소가 걸어 나가려고 할 때 해준이 이소의 팔을 끌어당겼다. 뒤를 돌아보자 해준은 이소의 눈을 보며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이소 씨.”
“네.”
“나 노력할 거예요.”
따뜻한 눈동자에 서린 결의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진심을 담고 있었다.
“이소 씨가 사느라 바빠서 남들이 다 해 보는 많은 것들이 이제 와 처음 해 보는 것일 테고, 경험이 없어 아직도 서툴고 신기한 것들이 많겠지만.”
해준이 이소의 손을 꼭 쥐었다.
“앞으로는 전부 다 내가 같이 할 거예요.”
“…….”
“매일매일 이소 씨한테 하나라도 더 해 주려고 고민하고 생각할 테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손등을 쓰다듬는 온기가 따뜻하다.
“이소 씨는 내 손만 놓지 않으면 돼요.”
당신은 언제나 나한테 과분한데. 이소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눈이 많아 손을 조물대다가 얼른 놓았다. 뒷덜미를 문지르며 해수를 따라갔다. 해준도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 * *
한참을 정신없이 놀았다. 자전거는 세 명이서 탈 수 있는 게 없어서 페달을 밟아 다니는 마차를 탔다. 해준이 얼마나 힘이 좋은지 한 번 돌릴 때마다 훅훅 나가는 통에 속도감에 공포를 느낀 이소와 해수가 비명을 질렀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진짜 차도로 나갔을 때 해준은 얼른 핸들을 틀어 인도로 돌아왔다.
‘거기가 차도로 내려가는 길인 줄은 몰랐는데. 너무 재밌다, 그쵸.’
그러나 사소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흥미로워한 해준과 달리 이소와 해수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싸 쥐고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그걸 본 해준만 어깨를 으쓱했다.
세 사람은 커다란 인형 뽑기도 했다. 해수가 토끼 인형을 가지고 싶다고 해서 이소가 여러 번 뽑으려고 했으나 집게 힘이 약해 연달아 놓치고 말았다. 보다 못한 해준이 나서자 해수가 ‘아빠도 못 하는데 아저씨가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해준의 자존심이 객기를 부렸다. 뽑히지도 않는 걸 오기로 뽑아 보겠다고 그 자리에서 연달아 8만 원을 썼다. 이소가 그만 좀 하라고 말리고 해수도 이제 안 갖고 싶다고 했으나 해준만 꿋꿋이 3000원을 더 넣었다. 결국 8만 3천 원짜리 토끼 인형을 얻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해준이 제일 좋아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한강 유람선을 기다렸다가 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실을 수 있는 배를 돈만 내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강바람이 셌지만 해수와 이소는 해준의 손을 잡고 배 앞쪽까지 이동해 구경을 했다. 물빛에 부서지는 노을이 참 예뻤다. 멀미도 안 했고 배 안에서 솜사탕도 사 먹었다. 자꾸 해준이 버릇처럼 먹여 주려고 해서 이소는 해수 안 보게 받아먹느라 난처하기는 했지만 행복했다.
배에서 내려와서는 어묵과 풀빵도 먹었다. 컵라면도 세 개나 끓여서 먹었다. 해수까지 먹일 생각은 없었는데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온 해준이 당연히 해수도 먹는 줄 알았다며 해수 것까지 가져오는 바람에 물을 더 부어서 먹었다. 처음 먹어 보는 컵라면의 맛에 해수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코를 박고 먹었다.
이소는 해수가 컵라면을 잘 먹어서 너무 놀랐다. 인스턴트 먹이면 몸에 안 좋은데, 하고 구시렁거리자 해준이 ‘애들이 뭐 이런 것도 먹고 크는 거지, 잔소리 말고 그냥 밥이나 드세요’라며 뭐라 했다. 꼭 보통의 가정에서 나올 것 같은 말이어서 이소는 그 말을 듣고 진심으로 푸하하 웃었다.
컵라면을 다 먹고 입을 닦으려고 손수건을 꺼냈는데 돌연 해준이 이소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았다. 그리고 물티슈로 이소의 얼굴을 닦아 주고 그 손수건을 제 주머니에 쏙 넣었다.
“왜요, 주세요.”
“이거 나 가질래요.”
“제가 더 좋은 거 드릴게요. 선물 사 드리면 되잖아요. 낡은 손수건은 왜 가져가요.”
그러거나 말거나 해준은 가져간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이소 씨 냄새 난다.”
“그거 그냥 세제 냄새인데.”
“아니에요. 이소 씨 냄새야.”
“맘대로 하세요….”
해준은 씩 웃었다. 이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더 좋은 걸 줄 수 있는데. 해준은 꼭 제가 가진 것 중에 제일 별것 아닌 것들을 가져갔다. 이소는 무어라 더 말하려 하다가 전화가 울려 고개를 돌렸다. 고 대표였다. 오늘따라 참 지독하게 전화한다. 이소는 전화를 무음으로 해 놓은 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해준이 씩 웃었다.
“전화는 마음에 들어요?”
“네. 너무 좋은 거 주셔서…. 아, 그런데 해수 것까지 사 주셨잖아요. 해수야,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옆에서 과자를 먹던 해수가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어…. 아니야, 괜찮아. 그냥 별 거 아닌 거야.”
“그래도 고맙습니다.”
“그래.”
해수가 두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자 해준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싫었다기보다는 민망해하는 느낌이었다. 저에게는 선물을 주면서 그렇게 능글맞게 굴면서도 해수에게는 첫 만남 때와는 달리 퉁명스럽게 굴지는 않았다. 해준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고 커피를 마셨다. 어쩐지 이소는 두 사람의 사이가 전과 달리 퍽 나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놀았는지 노을이 지는 저녁이 되었다. 셋은 해준이 사 온 막대 폭죽에 불을 붙였다. 이소는 영화에서나 몇 번 봤고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소가 해 본 적이 없었으니 해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스운 건 호기롭게 사 온 해준 역시 경험이 없었다.
때문에 셋 다 불을 붙이고 나서 한동안 기세 좋게 타들어 가다가 이내 시들어 버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30개나 사 와서 몇 번이고 불을 새로 붙였다. 이소는 그저 옅은 미소를 건 채 불꽃을 바라봤고 해수는 이소에게 기대어 간간이 말을 걸었으며, 해준은 이소와 해수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빛과 함께 얽혔다.
* * *
어느 정도 불이 다 타들어 갔을 무렵 셋은 일어나서 차로 돌아왔다. 이제 해준의 차를 타고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소는 피곤이 몰려왔다. 나들이가 즐거웠던 것과 별개로 눈덩이가 무거웠다. 그때 문득 해수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 내 핸드폰.”
울상을 하고 전화를 찾는 모습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이소의 정신이 퍼득 깨었다. 해준 역시 운전석으로 가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해수, 전화 없어졌어?”
“아, 아빠 그…. 어떡하지, 나 그 화장실에 놓고 온 거 같은데.”
“화장실이면 여기서 반대편에 있는 데? 매점 옆에?”
“응, 어떡하지…. 아빠 미안해.”
해수가 울상을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화장실이면 볼일이 있는 사람들만 들락날락거릴 거고 운 좋으면 누군가 주워다가 공원 관리실에 맡겨 주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소가 해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른 다녀오면 되지, 문제없어.
“금방 올게.”
“응. 고마워. 나 아저씨랑 있을게!”
해수가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소가 떠나고 해준은 눈썹을 긁으며 해수와 자리에 남았다. 해수와 단둘이 남는 건 처음이라 가만히 차에 기대어 이소가 떠난 자리만 쳐다보았다. 이소가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지자 해수가 입을 열었다.
“핸드폰 저한테 있어요.”
“응?”
“비밀 이야기 해야 해서 그랬어요. 아빠한텐 말하지 마세요.”
“너 참….”
해준이 기가 찬다는 듯 전화를 들었다. 이소가 헛걸음하는 걸 볼 수는 없었다. 납골당에서 나올 때부터 이소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집으로 바로 갔었어야 했는데 어쩐지 무리해서 나들이를 나온 것 같은 모양새라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잠시면 돼요. 진짜 잠시만요.”
“그냥 아빠 있을 때 이야기해도 되잖니.”
“아빠가 물어볼까 봐요. 우리 아빠는 나한테 궁금한 게 많거든요.”
해준은 조용히 전화를 내렸다. 그리곤 이 일곱 살짜리가 저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팔짱을 끼고 차에 기댔다. 해수는 그런 해준을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소가 바보가 아닌 이상 조금 있다가 돌아와 해준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애한테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아빠 요새 되게 잘 웃어요.”
“아, 그러니.”
별말도 아닌 걸 비밀이랍시고 꺼낸 해수를 보며 해준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아이하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해준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며 무감하게 말을 이었다. 해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말을 이어 갈지 몰랐다. 그저 해수가 물어보는 대로 대답은 해 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수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뱉었다.
“아저씨랑 놀면서 잘 웃는다구요.”
강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해수의 긴 머리카락이 노을에 물든 말간 볼을 훑었다. 해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그것도 모르냐는 듯 피식 웃었다. 일곱 살이 아니라 열일곱 살 같은 여유가 묻어났다.
“아저씨.”
“응.”
“우리 아빠 좋아하세요?”
해준이 숨을 멈추고 돌아봤다. 해수는 여전히 시선을 강둑에 던진 채 이소가 오는지 안 오는지만 보고 있었다.
“좋아…하지, 친구니까.”
“손잡은 거 봤어요. 골목에서 뽀뽀한 것도 봤어요. 아빠가 그러는데 친구끼리는 뽀뽀하는 거 아니래요.”
씨발, 결국 들켰군.
“아빠랑 아저씨는 남자잖아요.”
“그렇지.”
“사랑하는 거예요?”
생각보다 구체적인 질문에 해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해수의 시선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해준이 대답을 않자 발은 불안한 듯 바닥을 긁어내렸다. 운동화 코 끝이 흙바닥을 어지럽게 문질렀다.
“우리 아빠 사랑하냐구요.”
“응. 많이.”
해준의 대답을 들은 해수가 안심한 듯 시선을 옮겼다.
“난 우리 아빠가 많이 좋아요. 아빠를 많이 사랑해요. 세상에서 제일.”
해수는 아이답지 않게 신중하게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마치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했다.
“앞으로도 아저씨, 우리 아빠랑만 놀아야 돼요. 우리 아빠도 아저씨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네. 전 알아요. 아빠 옆에 제일 오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약속해 주세요.”
해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든, 해 줄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해수가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아빠 웃게만 해 주세요. 울리면 안 돼요.”
너무 결의에 찬 표정이라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해준은 해수의 작은 손가락에 고리를 걸었다.
“약속할게.”
해준의 약속을 받아 낸 해수가 핸드폰을 들어 이소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라는 이름 뒤에 붙은 하트가 수많았다. 다시 아이로 돌아온 해수가 응석 어린 목소리로 이소에게 사과를 했다.
“응, 아빠. 미안해, 내 가방 맨 밑에 있었나 봐. 미안해.”
수화기 속 이소가 다행이라는 듯 읊조렸다. 얼른 갈게, 하고 끊자 해수는 다시 전화를 집어넣고 돌아보았다. 반듯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은 어쩐지 아이답지 않았다.
“오래오래 우리 아빠 옆에 있어요. 저도… 저도 아저씨가 좋아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해수는 저 멀리서 뛰어오는 이소에게 달려갔다. 이소는 헛걸음을 했는데도 화난 기색 하나 없이 딸을 끌어안고 웃었다. 노을이 진 광장을 등지고 이소와 해수는 강강수월래를 하며 빙빙 돌았다.
해준은 해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소가 왜 그렇게 예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제가 적어도 그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도, 슬프지만 깨달았다.
차 앞으로 거의 다 걸어온 이소가 해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옆에 선 해수가 비밀을 지키라는 듯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했다. 해준도 해수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노을이 지는 저녁, 해준은 해수와의 비밀이 생겼다. 이소는 어느새 잠이 푹 들었는지 고개를 헤드에 기대고 깊게 잠이 들었다. 해수는 간간이 차가 흔들려 제 아빠의 머리카락이 눈을 간지럽히면 작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꼭 엄마가 어린아이를 챙기는 모습 같았다. 해준은 다시 한번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이소 씨, 이소 씨.”
집에 도착한 해준이 이소를 흔들어 깨웠다. 이소는 많이 피곤했는지 도통 일어날 생각을 못 했다. 해수가 걱정스럽게 옆에서 쳐다봤다. 해준이 해수에게 물었다.
“아빠 원래 잠들면 잘 못 일어나니?”
“아니요, 되게 잘 깨는데… 우리 집에서 제일 잘 일어나는데….”
이소는 흔들어 깨웠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잠시 떴다가 다시 감았다. 꼭 기절한 사람 같았다. 가슴에 귀를 대어 보았지만 맥박이 얕게 뛴다거나 숨소리가 불규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치 꼭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해준은 문득 예전에 이소가 비를 맞고 저를 찾았던 밤을 생각했다.
‘몸이 많이 약하다. 신경 좀 써 줘.’
주치의는 이소의 맥박을 짚은 후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보통 사람들보다 마음속에 화가 많은데 이걸 표출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속으로 삼키다가 탈이 난다고 했다. 다만 그것을 잠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얌전해서 좋아 보이지만 스트레스가 많으면 많을수록 깊이 잠이 든다고 했다. 마치 무의식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기절하듯 잠에 빠진다고.
그래서 그런지 윤이소는 항상 위태위태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푹푹 잠이 들어 버리는 것도, 저도 모르는 사이 코피를 자주 쏟는 것도, 모두 직전에 있었던 사건들과 연결이 되는 증상이 아닐까 짐작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실제로 이소는 종종 무기력하게 있다가 픽 쓰러지곤 했다. 영양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냥 좀 원래 피곤하면 열이 자주 나고 잠들고 그러거든요.’
해준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지금도 잘 놀고 들어온 것 같았지만 사실 납골당에서 나왔을 때부터 이소의 낯빛은 좋지 않았다. 아마 그때 무슨 일이 있었거나, 납골당에서 은형을 만나는 것이 엄청나게 큰 스트레스를 요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 추측했다.
“우선 옮기자. 올라가서 아빠 깰 때까지 아저씨가 옆에 있을게.”
해준은 해수를 먼저 내리게 한 후 이소를 들쳐 업으려 했다. 이소의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렸다. 아까부터 오고 있었던 전화 같은데 이소가 잠들어 버려서 그런 건지 받지 않았다. 해준이 이소를 업고 계단에 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와 해수가 이소의 신발을 벗겼다. 달랑거리는 작은 발에서 떨어진 해준이 선물한 새 운동화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이불에 눕혔을 때까지도 이소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주머니 속 전화가 집요하게도 울렸다. 혹여 이소가 깰까 봐 해준은 전화기를 들었다.
[고태균 대표님]
아, 파라다이스랬나. 해준은 문득 이소가 얼마 전 갔었던 대부업체 정보를 떠올렸다. 해준은 얼마 전 이소의 빚을 정리하라고 문준경에게 지시했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문준경이 반대했었지만 해준은 최대한 빨리 정리해 달라고 한 후 자리를 떴다. 고작 그 푼돈 때문에 이소가 계속 그 사무실에 얼굴을 비추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빚을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화할 일이 무어가 있담.
해준은 이소의 전화를 들어 수신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예 번호를 삭제했다. 앞으로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에 별 시답잖은 이유로 찾아온다면 그때 가서 또 조치해야지. 해준은 이소의 볼을 꾹꾹 눌렀다. 말랑말랑하고 흰 볼이 누르는 대로 쑥쑥 꺼졌다가 다시 통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윤이소가 얼른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소의 주변에는 참 쓰레기 같은 것들이 잘 붙었다. 해준은 심부름을 붙여 찍어댄 사진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데나 여기저기 해실해실 웃어 주기나 하고, 본점 사장이 어깨에 손을 두른 채 품목을 읊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듣기만 했다. 철물점 사장은 애를 쥐어 패 놨고, 그 패거리들은 윤이소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리고 집요하게 스토킹하는 고 대표까지.
“당신이 너무 착해서 그래.”
해준은 툭 던졌지만 이소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놈들이 나쁜 거지, 네 탓은 아니지. 그래도, 이제는 받아 주지 마.
해준은 진동이 끊긴 전화기를 들어 화면을 열었다. 비밀번호 하나도 걸려 있지 않은 전화는 등록한 지 만 하루도 되지도 않아 뭐 하나 구경할 것도 없었다. 연락처는 제가 삭제한 고 대표의 번호를 제외하더라도 열 명도 안 되었다. 사진첩을 들어가 오늘 찍은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벚나무 아래에서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게 해수 엄마인가….’
해수와 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 속 은형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소의 얼굴과 휴대폰 화면 속 은형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해수의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해준은 딱히 큰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니까 이소 씨랑 해수는 참 안 닮았네.’
해준은 화면을 끄고 이소의 가슴을 토닥였다. 해수는 그사이에 씻고 나왔는지 얼굴이 말갰다. 해준이 이소를 토닥이는 것을 힐끗 본 해수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해수가 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대충 파악하자 오히려 손짓은 거리낌이 없었다.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고 이불을 끌어다 올려 주기도 하고, 볼을 매만지기도 했다. 여전히 이소는 색색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해준은 고개를 들었다. 해수가 머리를 털다 말고 몸을 돌렸다.
“해수야.”
“네?”
“아저씨 번호 있지? 저장해 뒀는데.”
“네.”
해수가 보란 듯이 전화를 들었다. ‘차해준’이라고 쓰인 곳에 ‘아저씨’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꼭 그렇게 붙였어야 속이 시원했니? 해준은 눈썹을 찡긋거리곤 해수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아저씨한테 전화하는 거야.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어. 네가 아프거나, 할머니, 아빠에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메시지도 괜찮아.”
“아무 때나요?”
“응. 그럼 바로 달려올 거야. 항상 가까운 데 있을 거거든.”
해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뒤늦게 정숙이 현관문 밖에서 ‘어머, 왔나 보네.’ 하더니 문을 열었다. 해수가 반갑게 달려 나갔다. 그 소리에 이소 역시 꿈틀거리더니 눈꺼풀을 힘겹게 들었다. 해준이 이소의 손을 잡았다.
“…어.”
“이소 씨, 집이에요.”
“아…. 저 잠들었었나 봐요.”
이소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정숙이 누워 있는 이소를 힐끗 보고 해준에게도 인사를 했다. 해준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아무렇게나 말아 올린 머리에서 헤어롤을 떼어 내고 펑퍼짐한 치마도 정돈했다. 해준이 일어나 인사를 하자 정숙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연락이 없어서 저녁 혼자 먹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안 그래도 되겠다며 해수와 이소를 불러들였다. 이소는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직 어지러운지 머리를 잡고 찌푸리는 미간이 깊었다.
“더 누워 있지.”
“괜찮아요. 밤에 자면 되죠. 배웅해 드릴게요. 사장님, 저 내려갔다 올게요.”
“그래.”
해수가 해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잘 가요, 하고 보내는 눈에 경계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해준 역시 아까보다는 풀어진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잘 자.
현관문이 닫히고 해준은 이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끼고 내려가는 도중에도 이소는 몇 번이나 어지러운지 눈을 감고 쉬었다. 그만하면 올라가서 잠을 더 자면 될 텐데 굳이 저를 따라오는 것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깊은 걱정도 함께 들었다.
차 앞에 다가간 해준이 이소를 끌어당겼다. 손목에서 찰랑거리는 시계가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손목에 맞게 줄을 조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요 근래 다시 살이 내렸는지 시계가 손목에서 휘청휘청 놀았다.
“시계 차고 갔었네요.”
“아, 네…. 은형이한테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예쁘대요?”
“네, 아마도요.”
이소가 가벼운 농담을 던지고 웃었다. 해준은 그런 이소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문득 눈을 들어 3층을 올려다보았다. 이 각도라면 어디에서 무얼 하든 잘 보였을 텐데 그동안 제가 너무 무감하게 굴었다. 일곱 살짜리 해수가 봤다는 것은 정숙도 어쩌면 봤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해준은 성정이 짓궂기는 했지만 저와의 관계 때문에 이소가 상처 받거나 곤란해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만 차에 타 봐요.”
“저 들어가서 저녁 준비해야 하는데….”
“잠시만.”
해준이 조르자 이소는 못 이기는 척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해준은 문을 닫자마자 이소의 볼을 잡고 가볍게 키스했다. 오늘 하루 종일 입 맞추고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을 참고 또 참았는데 해수가 사실 알고 있었다고 하니 괜히 억울하게 시간을 낭비한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애 앞에서 물고 빨고 할 것은 아니었지만. 입술이 떨어졌음에도 이소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해준이 뒷덜미를 진득하게 문지르자 천천히 들어 올린 눈꺼풀에 아쉬움이 어렸다.
깜박깜박 물음을 달고 있는 옅은 색 눈동자를 보며 해준은 나른하게 웃었다.
“왜요, 아쉬워요? 여기 올라올래요?”
“네? 아니에요, 그런 거!”
해준이 운전석 의자에 기댄 후 제 허벅지를 툭툭 치자 이소는 도리질을 했다. 아직 어제 조리대에서 한 정사의 여파로 앉을 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는데 연달아 이틀을 하면 정말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아쉬워도 참아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이소는 더 할 생각도 없었는데 자꾸만 여지를 남기는 해준을 한 번 흘긴 후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입을 비죽이며 내려놓고도 이소는 해준의 차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해준은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중간에 갑자기 차에서 내려서 언덕을 뛰어 내려와 한 번 더 깊게 키스한 후 다시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해준의 애정 표현에 무척 놀랐지만 이소 역시 볼을 붉히고는 눈을 접어 웃었다. 해준은 이소를 그대로 차에 태워서 데려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 * *
안채로 돌아온 해준이 옷을 갈아입은 후 소파에 몸을 기댔다. 집사 준경은 미리 준비한 다과와 함께 식혜를 올렸다. 여름이 다 와 가는지 밤에 창문을 열어 놓아도 바람이 들지 않았다. 해준의 모친이 오기 전까지 잠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안 쓰던 별채를 청소하는 식솔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해준은 준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태균 채무 쪽은 정리된 걸로 아는데, 아니었어요?”
업자들이 워낙에 채무자를 몰아세우는 식으로 돈을 뜯어낸다고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도 이러는 이유가 뭘까.
“개인적인 연락 때문이십니까?”
“신경 쓰여서.”
“채무 관계가 아닌 친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한 요인은 제3자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른 채무자와 달리 상환금을 이소 님에게만 현금으로 받으려는 점, 통상 10분이면 채무자를 내보내곤 했는데 이소 님과는 한 시간가량 함께 시간을 보내는 점 등이 마음에 걸리죠.”
“꼭 둘 사이가 각별하다는 것처럼 들리는걸.”
“표면적으로 보이는 특이점을 말씀드린 겁니다.”
해준은 혀를 찼다. 영 뒤가 구렸다. 만약에 둘 사이에 제가 생각하는 다른 일이 끼어 있는 거라면 그것은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준이 혀로 볼 안쪽을 진득하게 핥아 냈다.
“일단 좀 더 지켜봐요. 선을 넘는 것 같으면 나랑 같이 가지.”
준경은 눈썹을 꿈틀댔다. 분명히 오늘 바깥을 나갈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았는데 막 돌아온 해준은 가라앉은 상태였다. 윤이소 씨와 다투기라도 한 것인가. 하지만 말을 해 주지 않으니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어 심사가 뒤틀려 있는 이 도련님을 어떻게 달래나, 준경은 고민했다.
“저, 도련님.”
“응.”
“전에 말씀하신 건 알겠지만, 그렇게 신경 쓰이시면 윤이소 씨 쪽을 좀 자세히 알아볼까요?”
해준은 고개를 돌렸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준경을 보내 조사를 충분히 한 후 접근했을 테지만…. 해준은 잠시 머릿속에서 저를 보고 배시시 웃는 이소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교수님은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네요.
그래, 언제라도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 주기로 약속했었지. 다른 건 몰라도 이소의 이야기라면 사람을 보내서가 아니라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설사 좀 구질구질하고 서글픈 이야기라도 충분히 그래 줄 의향이 있었다. 물론 보호 차원에서 사람을 붙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였지만 해준 나름대로 이소의 뒷조사를 하지 않는 것은 연인으로서 지키려는 적정의 선 때문이었다.
“됐어요. 그냥 둬요. 다 알아 버리면 재미없잖아.”
해준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창밖을 내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창틀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는 손가락이 연신 불안한 소리를 냈다. 문득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해준의 어머니였다. 공항에 도착해 비서와 차를 마시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해준은 겉옷을 챙겨 나가기 전 준경을 돌아보며 뜬금없이 물었다.
“일곱 살은 차 뒤에 혼자 태우면 안 됩니까?”
올 것이 왔다. 준경은 가지런히 모은 손을 두드렸다.
“도련님 차 말인가요?”
“응. 내 차.”
준경은 해준이 왜 골이 났는지 조금씩 윤곽이 잡혔다. 아까 신이 나서 직접 차를 끌고 나가시더니만 까였나 보지.
“네. 안 됩니다.”
“왜요.”
“보호장치 없이 태우면 법에 저촉됩니다.”
안전벨트 했잖아, 어딜 다녀오셨는데요, 양도, 그 긴 거리를 안전벨트만 태워서 이동하는 건 위험합니다, 아니 내 차가 얼마나 좋은데, 부모 입장에선 차값이 얼마건 불안할 수 있죠, 아니 애가 또래보다 크다니까, 도련님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게 답니다. 말싸움 아닌 말싸움이 이어졌다.
하, 정말. 해준이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영 내키지 않는 듯 덧붙였다.
“그럼 빌어먹을 카시트 하나만 주문해요. 존나게 비싸고 좋은 걸로. 몇 시간이고 혼자 놀 수 있는 장난감도 있으면 그것도 준비해.”
저것 때문이었나 보다. 준경은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 기사한테 연락해서 아이들 음료수나 태블릿 피시, 책도 좀 알아봐야겠군.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까지 빠져 있는지, 준경이 보기에 제 주인은 여전히 서툴고 불안한 연애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