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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교수님 닮았다.”
이소는 요새 혼잣말이 늘었다. 장을 보다가도 웃고 있는 캐릭터 인형만 보면 꼭 해준이 생각나서 사진을 찍었다. 식사를 하다가도 맛이 있으면 해준이랑 같이 먹는 상상을 하니 비식 웃음이 터졌다. 커피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해준이 떠올랐고, 길가에 피어 있는 개나리만 보아도 해준이 주었던 병아리색 도포가 마음에 그려졌다. 어디를 가든 무얼 하든 차해준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이소 씨 요새 참 잘 웃어.”
“제가요?”
“응. 뭐 좋은 일 있는 사람마냥. 보기 좋아.”
그건 비단 저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는지 정숙도 오며 가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러나 이소의 동선이나 생활 반경을 알고 있는 정숙으로서는 여자 만날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봄이 와 마음이 달뜬 것이라 여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해준의 집 쪽을 올려다보며 빙긋 웃곤 했다. 그냥 그 언덕 너머에 해준이 잠자고 깬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고 만족이었다. 어쩐지 이 동네에 이사 온 것이 운명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소 씨, 점심 주문 끝났으면 커피나 한잔할까?”
“좋아요. 제가 타 올까요?”
“아니야, 기다려 봐. 요 앞에 카페나 가 보려고.”
정숙은 가게 문 앞에 걸린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이소 역시 그런 정숙을 보며 주방에서 가볍게 손을 씻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상기된 것이 열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숙은 그런 이소의 얼굴을 보며 오히려 생기가 돈다며 퍽 예뻐라 했다. 그전에는 너무 창백해서 영 사람이 차가워 보였다나. 이소는 얼굴을 두드리고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소는 정숙이 준비하는 동안 핸드폰을 켜 메시지 함을 열었다.
해준이 오전에 출근하면서 ‘오늘 하루도 잘 보내요.♥’라고 보낸 메시지에 ‘네. 교수님도요.’라고 제가 답장한 메시지가 전부인 채팅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매일매일 꼬박꼬박 통화를 하면서도, 집이 코앞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둘 다 일상은 바빴고 심지어 이소는 육아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짬이 날 틈이 없었다. 학교 시험 기간이라고 하던데, 그럼 일찍 끝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소가 가게 문을 닫고 해수를 재울 시간이 되어서야 해준이 전화를 했고, 이소는 해준이 보냈던 메시지들을 몰아서 보다가 살금살금 나가 통화를 하곤했다.
함께 밤도 보냈고 입도 꽤나 여러 번 맞추었지만 이소는 해준이 늘 어려웠다. 해준이 너무 좋았지만 좋으면 그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서 동시에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었다.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뛰면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해준이 따뜻한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면 다정에 타들어 갈 것 같으면서도 용기 내 다시 눈을 맞추고 싶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제가 퍽 바보 같았다.
이소는 문득 뻐근한 느낌에 바지를 내려다보았다가 희게 질렸다.
“아씨, 또….”
그리고 그날 밤 이후로 해준 생각만 하면 자꾸만 배 속이 간질간질했다. 예전에는 해준의 웃는 얼굴과 코트 입은 큰 품만 상상했다면 이제는 그 방에서 보았던 벌어진 어깨와 제 허리를 쥐어 잡던 커다란 손이 떠올랐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자꾸만 재생되는 노골적인 소리들, 이를테면 살이 부딪히는 소리라든지, 침대가 삐걱이던 소리라든지, 시트를 손톱으로 긁는 소리라든지, 해준의 만족스러운 신음 때문이라든지 때문에 저절로 아랫쪽에 피가 몰렸다. 이소는 입술을 물고 심호흡을 했다.
“여기 가게다. 여기 가게라고…. 제발 빨리 가라앉아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속으로 눈 앞에 보이는 도시락 레시피를 줄줄 읊었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고추’라는 단어는 두 번 읽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중얼대자 금방이라도 바지 위로 고개를 내밀려 했던 아들 녀석이 얌전해졌다. 아직 가게 문 앞에는 정숙이 있었다. 이소는 제법 날이 따뜻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의자에 걸어 두었던 커다란 후드 집업을 꺼내어 몸에 걸쳤다. 정숙과 있을 때만큼은 더 조심하고 싶었다.
그런 이소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정숙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들뜬 상태였다.
“엊그제 부동산에서 그러는데, 오픈했다고 쿠키도 준다더라고. 가서 먹고 오자.”
정숙은 얼마 전에 열었던 카페를 가리키며 웃었다. 커피도 좋지만 언제부터인가 요새 너무 자주 가게를 비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소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들었다. 정숙에게 만 원을 내밀었다. 어차피 저는 굳이 카페 커피를 먹지 않아도 됐다.
“사장님, 천천히 쉬다 오세요. 제가 가게 볼게요.”
“아니, 왜? 이소 씨 같이 가야지. 맨날 그 안에 처박혀 있으면 사람이 우울해져. 겨울 내내 문 걸어 잠그고 안에 있었던 걸로 충분해. 찌뿌둥하다.”
“손님 오실까 봐요.”
“괜찮아. 점심 지났으니까 한산할 거야. 우리도 좀 쉬어야지.”
이소가 머뭇거리자 정숙은 그럼 얼른 커피 사 와서 가게 앞 테이블에서 마시자 했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이소는 지폐를 지갑에 다시 넣고 느릿느릿 정숙을 쫓아갔다.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선 카페는 아기자기했다. 도자기로 만든 작은 고양이 인형들이 창가에 줄지어 앉아 있었고 작은 팬지와 들꽃들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화단이 정말 꽃집 같은 분위기를 냈다.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깔린 3평 남짓한 공간은 퀴퀴한 철물점이 있었던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은 여자가 검은 앞치마를 둘러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소는 메뉴판을 훑어보다 반가운 이름이 있어 마음이 들떴다.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 주세요.”
정숙은 초콜릿이 들어간 카페모카를 주문했다. 곧 하원할 해수를 위해 작은 생과일 주스도 샀다. 이소는 커피가 나오는 동안 가게를 둘러보았고 정숙은 주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 참, 저번에 준 떡은 잘 먹었어요. 갓 쪄서 그런지 입에 쩍쩍 달라붙더라고.”
“다행이네요! 그거 제가 직접 찐 거예요.”
“젊은 사람이 손재주도 많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죠? 우리는 2년 되어 가는데, 여기가 우리 같이 일하는 윤 사장. 그냥 나이 비슷하니까 이소 씨, 해도 될 거 같은데.”
“에이,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사장님이라 불러야죠.”
“그런가? 그러게. 요새 젊은 사람들은 나이 비슷하면 오빠 동생 한다길래. 나중에 친해지면 또 모르지. 그치.”
이소는 대답하기가 애매해 곤란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지만 정숙은 눈치 못 챈 듯했다.
정숙은 커피가 나오는 동안 앞에 앉은 주인과 연신 떠들었다. 어쩌다가 혼자 카페를 하게 되었냐느니 나이는 몇이냐느니 개인적인 질문들을 참 잘도 물었다. 괜한 선입견을 갖게 될까 봐 이소는 멀찍이 떨어져 듣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워낙 작은 가게라 이것저것 들려왔다.
“이소 씨, 여기 사장님도 아들 둘이나 있대. 큰 애가 아홉 살, 작은 애가 일곱 살이래. 우리 해수랑 동갑이네!”
“어머, 딸이 있으세요?”
“아, 네. 일곱 살이요.”
이소는 예의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웃어 보이며 끄덕이곤 다시 찬찬히 벽을 구경했다. 액자들이 꽤 많이 걸려 있었다. 주로 누군가 찍어 준 것 같은 주인의 모습과 커피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구석에는 아들로 보이는 아이들의 사진과 스무 명 남짓 되는 무리의 단체 사진도 있었다. 큰 정자에 앉아 찍은 사진인데 다들 퍽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족사진이라기에는 다들 외모와 분위기가 제각각이었다. 어디 회사에서 찍은 사진인가 보다, 생각하며 참 잘 찍었다 여기고 몸을 돌렸다.
여전히 정숙이 떠들고 있었다. 워낙 붙임성이 좋은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얼른 커피를 사 들고 나가고 싶었다.
“우리 그럼 나중에 한 번 만나요. 애들 친구나 만들어 줄 겸 같이 밥 먹어도 좋고!”
“너무 좋아요! 자주 오세요, 저희도 놀러 갈게요! 그래도 되죠, 사장님?”
한참 만에 커피가 나오자 이소는 서둘러 종이컵을 집었다. 카페 주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밝게 웃었다. 보기 좋게 올라간 입매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가 눈에 띄었다. 미소가 꽤 예쁜 여자였다. 내내 대답을 피했던 이소 역시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오세요.”
카페 주인이 잠시 멈칫하며 이소를 빤히 보았다. 이소는 무슨 할 말이 있나 하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제서야 주인은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빤히 봤죠.’ 하며 얼굴을 붉혔다. 대화를 하다가 무슨 상념에라도 젖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이소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미리 나와 기다리던 정숙은 이소가 카페 주인과 몇 마디를 더 하자 흐뭇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이소는 커피를 홀짝였다. 전에 해준이 사 주었던 커피보다 덜 맛있었지만 그래도 제가 아는 달달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아 기분이 나아졌다. 정숙은 기분이 들떠 있었다.
“참 싹싹해. 어려 보였는데 이소 씨보다 다섯 살이나 많더라. 그래도 이제 서른 조금 넘었는데 참 독립심도 강하다. 어떻게 저렇게 예쁜 카페를 혼자 차릴 생각을 했는지. 그치? 요즘 엄마들 참 대단해.”
“그러게요. 대단하시다.”
정숙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이소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들고 있던 캐러멜 마키아토 사진을 한 장 찍어 해준에게 보냈다. 저번에 비를 맞아 맛이 조금 간 핸드폰은 어째서인지 제멋대로 모음과 자음을 분리해 글씨를 입력했다. 몇 번이고 수정했지만 나아지지 않아 변명을 덧붙였다.
[커피 마셨어요. 카라멜 마끼아또에요. 식ㅅ ㅏ 하셨ㅇ ㅓ요?]
[꽃 엄청 많이 ㅍ ㅣ었어요.]
[오ㅌ ㅏ가 아니고 폰ㅇ ㅣ 조금 ㅇㅣ상한 거 ㅇ ㅔ 요.]
[밤ㅇ ㅔ 전호 ㅏ 드릴ㄱ ㅔ 요.]
고작 메시지 몇 번 보냈다고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폰을 보니 곧 바꿀 때가 된 듯했다. 오토바이도 그렇고 핸드폰도 그렇고 참 교체 주기가 자주 온다. 한 번 사서 10년씩 쓰면 얼마나 좋을까. 고장도 덜 나고 튼튼하게 만들면 좋을 텐데. 이소는 화면이 멈춘 폰을 대충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정숙은 여전히 옆에서 떠들고 있었다.
“이소 씨, 듣고 있어? 시간 내서 언제 한 번 저쪽이랑 같이 밥도 먹고….”
“사장님.”
이소는 말없이 숨을 들이켰다. 정숙은 이소의 눈치를 보았다. 대체로 언제나 허허실실 웃는 이소였지만 꼭 여자 문제가 나오면 냉한 눈을 하고 저를 보곤 했다. 그래도 이리 따뜻한 날에 언제나 가게에 처박혀 일만 하는 이소가 안쓰러워 벌인 일이었다.
“아니, 뭐.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구. 그쪽도 애가 있대고 우리도 마침 해수가 동갑인데 친구가 영 없잖아. 그리고 젊은 사람들끼리 얼굴 트고 지내면 좋지 뭐.”
“그런 이유로 밥 먹자고 한 거 아니잖아요.”
이소는 미간을 찌푸리며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캐러멜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는지 끝맛이 쓸 정도로 달았다. 정숙은 빈정이 조금 상했는지 입술을 길게 늘이며 대꾸했다.
“길게 보자, 이소 씨. 뭐 당장 만나 보래니.”
“아시잖아요. 그럴 생각도 여유도 없어요.”
“맨날 차 교수랑 만나지 말고 연애를 해. 봄도 왔겠다, 자리도 얼추 잡아가겠다. 누가 당장 결혼하래? 좀 두고 보고 따져 보고 그런 것도 좋지만 이소 씨는 일단 옆에 누가 좀 있으면서 말랑말랑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 좋은 시간을 사랑도 안 하고 어떻게 흘려보내. 아까워서 그런다 내가.”
정숙의 입에서 해준이 언급되고 뒤이어 연애, 결혼, 사랑이라는 단어가 줄줄 쏟아져 나오자 이소는 말을 잃었다. 분명 대상이 따로 있는 말이었는데 제 귀에는 꼭 해준과 연애, 해준과 결혼, 해준과 사랑을 하라는 듯 들렸다. 이소는 목덜미를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아무튼 괜히 그러는 거 아니야. 이소 씨도 생각 좀 해 봐. 해수한테도 중요한 문제야.”
토라진 정숙이 가게 안으로 쑥 들어가고 나서야 이소는 괜히 날을 세웠다 싶어 마음이 쓰였다. 따라 들어가 정숙을 위로할 참이었다.
불현듯 배터리가 얼마 없는 핸드폰이 울렸다. 해준이었다. 이소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 댔다.
“교수님.”
- 이소 씨, 문자 왜 이렇게 귀여워요? 웃음 나서 한참 봤어요.
이소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전 내내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짬이 나는지 해준은 후련한 목소리였다. 식사는 했는지, 오전에는 무얼 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해준은 웃음기가 다분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오타를 잔뜩 낸 문자가 귀엽다는 이야기부터 했다.
“원래도 상태 안 좋았는데 저번에 비 맞았더니 완전히 고장 났나 봐요.”
- 하나 사야겠네.
“그러게요. 조만간 바꾸려고요. 지금도 배터리 2퍼센트밖에 없는데, 아 1퍼센트 됐다. 자꾸 요새 꺼져가지고요. 이러다 완전 가겠어요. 충전하고 또 전화할게요.”
- 저녁에 가게 들를게요. 무슨 색 좋아해요? 하나 사 가게.
해준은 마치 마트에서 사탕 하나를 사 온다는 듯 여상한 투로 물었다. 이소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네? 뭘요?”
- 화이트? 블랙? 아니면 요새 뭐 있나, 실버? 골드? 이소 씨 선호하는 기종 있어요? 사과? 우주?
“잠시만요, 무슨 사과고 무슨 우주요?”
그제서야 해준이 핸드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깨달은 이소가 급하게 전화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받는 것도 정도껏이었다.
“아니요, 교수님! 설마 핸드폰 사 오시려는 건 아니죠? 안 돼요! 절대 사 오지 마세…!”
띠리리릭.
그러나 화면이 꺼져 버린 기계에 외치는 공허한 외침은 해준에게 가닿지 않았다. 이소는 냉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충전 포트에 꽂고 기다렸으나 충전 30분이 지나도록 화면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가게 전화로 해준에게 전화하고 싶었지만 기억나는 거라고는 뒷자리 네 자리뿐이었다. 이소는 봉화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핸드폰 사 오지 마시라고.
“아이고, 하…. 하하, 하…. 나 참. 진짜 큰일 났다.”
이소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그래도 저녁에 해준이 온다. 저를 보러 온다. 그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숙의 말이 맞았다. 요새 이소는 참 자주 웃었다.
* * *
이소는 주방 구석에 앉아 내일 할 일 목록을 꼼꼼히 적었다. 일찍 문을 닫고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오전이 무척 바빴다. 주문은 예약한 것까지만 받고, 해수는 늦잠을 좀 재우고 가게를 점심까지만 열어 둔 후 해수와 함께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 지방 터미널에 내리고 나면 거기서부터 또 작은 시내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도착해야 하는 오래된 납골당. 그곳에 해수의 엄마가 있었다. 이소는 달력을 툭툭 두드렸다.
‘너무 늦었어… 삐졌겠는걸.’
아직도 눈에 선한 그 미소가 종종 아니 자주 생각이 난다. 같이 지각해서 치마가 뒤집어지게 뛰었던 골목, 같이 걷던 교정, 둘이서 먹던 간식, 옥상에서 터놓고 한 고백, 임신해 뒤뚱뒤뚱 걸으면서도 자기 모습이 예쁘지 않냐며 물었던 당당함, 밤새 부은 몸을 주물러 주던 저와 고맙다며 제 입에 넣어 주던 쓴 초콜릿, 그리고 해수를 낳고 누구보다 잘 키울 거라며 다짐했던 그 모습까지.
- 어이없어. 어째 애기가 너한테만 가면 안 우냐. 엄마는 난데. 완전 억울하다.
- 그럼 당연하지. 내가 배 속에 있을 때 얼마나 동화를 많이 읽어 줬는데. 그치, 딱풀아.
딱 붙어 있으라고 태명도 딱풀이라 지었고 정말 매일매일 동화를 읽어 줬다. 태담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그래도 자주 목소리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중에 태어나서 혹시나 저를 알아볼까 봐. 이소는 어린 저를 생각하다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놈들이, 뭐 좋다고. 바보들.
혼자 옛날 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고 있을 때 딸랑, 현관 위 걸어 두었던 작은 벨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반가운 얼굴이 고개를 쑥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오셨어요.”
이소는 공책을 덮고 일어났다. 해준의 머리 위에 앉은 꽃잎들이 제법 많았다. 어디서 저렇게 꽃비를 맞고 왔는지 의아하면서도 그 모습조차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근사해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해준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이소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엄청 반가운가 보네. 문 열자마자 강아지처럼 달려 나오고.”
그 말에 이소는 나긋나긋한 미소를 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 해준이 눈썹을 내려뜨리고 볼을 끌어안았다. 막 입술을 맞대려 하던 순간 이소가 얼른 뒤로 물러섰다.
“여기 너무 가게 문 앞인데요….”
해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적하기는 하지만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결이 가지런한 눈썹을 까딱이며 해준은 양손으로 이소의 어깨를 감싸 쥐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해준에게 어깨를 잡혀 뒷걸음치듯 주방으로 끌려가면서도 이소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눈을 접어 찡그리듯 웃었다. 해준은 그 얼굴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당장에라도 앙곰하게 닫힌 눈꼬리에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참느라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야.”
서로의 얼굴을 보며 느리게 걷느라 이소는 주방으로 들어가는 카운터에 등을 부딪쳤다. 가볍게 흔들리는 몸을 단단한 손으로 지탱하며 부딪힌 곳을 문지르자 이소가 몸을 간지러운 듯 몸을 꼬았다. 폭 안기듯 가까워지는 몸은 언제나 그랬듯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해준은 이소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주방 안쪽 조리대에 사뿐히 앉혔다. 이소는 성인 남자인 저를 쌀자루보다 가볍게 드는 해준의 팔 힘에 매번 놀라곤 했다. 이소의 키에 맞게 높여 놓은 조리대에 앉아 해준과 얼굴을 마주하자 눈높이가 꼭 맞았다. 해준은 양팔을 뻗어 그사이에 이소를 가두고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이소는 해준의 머리 위에 앉은 꽃잎을 살살 털어 냈다. 오늘 처음 본 해준의 정수리는 단정하게 빗어 내린 것 같으면서도 숱이 많이 풍성했다. 만져 보고 싶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조금요.”
“이럴 땐 많이 기다렸다고 하는 거예요. 보고 싶었는데 왜 늦었냐고 응석도 부리고.”
“그럼 많이 기다렸어요. 엄청 보고 싶었어요.”
“나도.”
해준의 지적에 말을 바로 고치곤 민망한 듯 미소 지은 이소가 불현듯 손을 들어 해준의 머리카락을 살짝 그러쥐었다. 해준이 그답지 않게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이소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이소가 볼을 붉혔다.
“복슬복슬해서요. 강아지 같아요.”
“그래서 갑자기 만져 보고 싶었어요?”
“네. 이 각도에서 본 건 처음이라…. 남자 머리카락이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지?”
“이소 씨가 더 부드럽죠. 색도 옅고.”
해준의 이소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오래되어 보풀이 인 청바지 위로 해준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썩 귀한 것을 다루는 사람마냥 한 올 한 올 매만지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이소는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내리려 작은 입술을 우물댔다. 그리고 그 작은 움직임을 해준은 놓치지 않았다.
“입술이 왜 자꾸 얌전히 못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말투에 장난기와 웃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해준의 코끝이 톡톡 이소의 코끝에 닿았다 떨어지며 간질이기를 반복했다. 입술로 다가올 듯하면서도 눈꺼풀과 볼, 이마, 콧등을 차례로 훑어내듯 하는 입맞춤에 허리가 빳빳이 섰다. 이소가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하고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움찔대자 해준이 낮게 웃었다. 이소는 주먹을 꼭 쥔 채 해준의 옷깃을 잡아야 하나 제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놓아야 하는지 머리를 굴렸다. 입을 맞출 때마다 흡사 숨을 참는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에 해준이 미간을 찡그리며 웃어 버렸다.
“이소 씨, 눈 떠 봐요.”
“아, 응. 네에.”
“오늘따라 왜 이리 어쩔 줄을 몰라 해요.”
해준이 보기에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 게 보였는지 이소는 괜히 면구스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자꾸 장난치시니까….”
“장난? 내가?”
입술에다가는 안 해 주고. 오만 군데 뽀뽀만 하셔서 예측할 수가 없었다고 차마 말을 못 했다. 이소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을 우물거리며 삼켰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소가 눈치를 보며 올려다보려는 찰나 돌연 해준은 허벅지 위에 꼭 쥔 이소의 손을 살짝 잡아 올렸다.
“장난한 적 없는데.”
그리고 제 손바닥 위에 이소의 손등을 보이게 올려놓은 채 천천히 입술을 내리눌렀다. 메마른 손등에 내려앉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낯설었다. 해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이소의 애꿎은 눈동자만 흔들렸다.
“의미를 담아서, 마음을 담아서 입 맞추고 있었던 건데.”
“…….”
“손등에 하는 건 존경을 담아서.”
해준은 이소의 손등을 살짝 뒤집어 오므라든 손가락을 하나하나 간질이듯 펴냈다. 이윽고 드러난 하얀 손바닥에 다시 한번 입술이 닿았다. 이번에는 손등과 달리 조금 더 강하게 빨아들이며 혀로 살갗을 간질였다. 찌릿한 느낌에 손가락이 절로 움츠러들 때쯤 해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손바닥은 질투를 담아서.”
그리고 손가락이 깍지를 끼듯 얽혔다. 깍지 낀 손에서 시선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해준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이마는 믿음과 신뢰.”
이마에서부터 미끄러지듯 내려온 입술이 눈썹을 지나 눈꺼풀에 닿았다. 얇은 피부에 가볍게 닿았다가 쪽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의 온도가 퍽 뜨겁다고 여겨졌다.
“눈은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요.”
“…코는요?”
“코는.”
그리고 다시 수사자가 애정 표현을 하듯 코끼리 맞댄 채 문지르다 이윽고 콧등에 꾸욱 찍어 누르듯 입을 맞췄다. 어째서인지 입술에 할 때보다 더 진득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해준 때문에 더 야릇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키스가 점점 농밀해지자 이소는 깍지를 낀 손을 풀어 바닥을 짚었다. 자칫 뒤로 넘어갈 것 같은 포즈였다. 키스를 하고 있던 해준이 나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얽혔다.
“당신에게 반했어요.”
“…….”
“당신을 좋아해요.”
이소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제가 생각해도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다 알고는 있었는데도 해준의 목소리로 들으니 자꾸만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뛰었다. 영업이 끝나 적막만이 흐르는 가게에는 유난히 시계 초침 소리까지 크게 들리는 듯했다. 이소는 눈동자를 굴렸다. 굳이 시선을 들어 올리지 않아도 해준이 저를 진득한 시선으로 훑어내리는 것쯤은 느껴졌다. 조용한 주방은 이소의 침 삼키는 소리도 잘 들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해준이 가볍게 입을 맞추곤 떨어졌다.
“내일은 어디로 가요?”
해준의 단정한 목소리가 어색한 정적을 깨뜨렸다. 이소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고성시 양도읍이요.”
“몇 시에?”
“오전에 가게 정리하고…. 점심 먹고 출발했다가 돌아오면 네 시쯤 될 것 같아요. 좀 멀거든요. 여기서 지하철 타고 터미널 가서, 고속버스 타고 2시간 정도 가서…. 내리면 또 시내버스 타고 15분 정도….”
해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질색했다.
“너무 복잡한데.”
“그땐 거기밖에 마련할 곳이 없었거든요. 나중에 돈 좀 모이면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죠.”
다시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이소가 씁쓸하게 웃었다. 납골당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 그나마 연고 없이 물어물어 당장 안치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그곳을 찾게 된 것뿐, 나중에 정말 돈을 많이 모으면 집을 하나 사서 정착한 후에 납골당 역시 집 가까운 곳으로 바꿀 요량이었다.
“내일 내 차 타고 같이 가요. 그럼 편하잖아.”
“아니에요. 해수랑 약속했거든요.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가기로. 저희 지하철, 버스 타는 거 좋아하거든요.”
이소의 말에 해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왜 굳이 내 돈을 주고 그 좁고 정신없는 차량을 타는 것에 흥미를 두는 것인지.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해수하고의 약속 때문이라는데 고집 부릴 건덕지가 없었다.
“그럼 돌아오는 길에는 내 차 타고 와요. 데리러 갈게.”
“오는 길에도 같이 삶은 계란이랑 귤 먹으면서 오려고 했는데….”
“아니, 그러면 나는 언제 만나요.”
해준의 말에 이소는 우물쭈물했다. 원래대로라면 끝나고 어차피 해준의 집에 가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마치 처음부터 같이 가기로 했었던 사람처럼 구는 해준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어서 무어라 둘러댈 말이 없었다.
“금방 올 건데요….”
“해수 잠들면 또 안고 버스 타고 올 테고, 지치면 나랑 놀아 주지도 못할 텐데.”
해준은 정말 서운한지 입술을 비죽였다. 하지만 이소 역시 해수와 약속한 것들이 있어 쉽게 그렇게 하겠노라 말을 못 했다.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소를 내려다보며 해준은 조금 전 조리대 위에 올려 두었던 쇼핑백을 가까이 가져왔다. 혹시나 못 따라가게 하면 이것으로 구슬려 보려는 나름의 회유책이었다.
“이소 씨 가만 보면 나한테 너무 인색해요. 나는 이렇게 선물도 사 왔는데 따라가지도 못하게 하고. 진짜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건데. 운전기사만 할 건데.”
쇼핑백을 보란 듯이 흔들었지만 이소는 시선을 떨구고 볼만 긁적였다.
“그 선물은…. 어떻게 그것까지 받아요, 저도 염치가 있지. 운전도 안 돼요. 거기 은근 멀어서 왔다 갔다 하시면 피곤하시단 말이에요. 저 저렇게 좋은 차는 사고 날까 봐 교대도 못 해 드리고…. 아무튼 진짜 몇 시간만 다녀오는 거예요. 요새 교수님이랑만 놀았더니 해수가 삐쳤단 말이에요….”
“나 참, 나랑 언제 놀았어요. 내내 바빠서 데이트도 못 했는데.”
“얼마 전에도 봤고, 아침에도 통화…했잖아요. 문자도… 보냈는데.”
허, 해준은 기가 차 헛웃음을 뱉었다. 해준은 이소가 매일매일 보고 싶었다. 눈을 뜨면 제 방 안에서 이소가 간식을 먹고 있었으면 했고 정원에 나가면 이소가 꽃을 보며 노닥거렸으면 했다. 차를 타면 옆자리에 이소가 앉아서 저를 쳐다보고 종알거려 주기를 원했고 집에 오는 길에는 제 허벅지에 이소의 머리를 누이고 살살 쓰다듬다 재우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저만 그런 마음인가 싶어 괜히 기분이 샐죽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더 많이 좋아하고 보고 싶고, 안달난 거였나 봐.”
“네?”
“이소 씨랑 통화하다가 전화 끊겼을 때도 너무 속상해서 그 자리에서 핸드폰 사러 나갔다 왔는데, 칭찬도 안 해 주고 선물은 받아 주지도 않고. 뽀뽀도 안 해 주고 양도에도 안 데려가 주고. 이거 완전 다 잡은 물고기라고 이젠 예뻐해 주지도 않는 거죠.”
“아니 그건….”
“순진한 나 꼬셔서 밤새 따먹고 나니까 이젠 밀어내기만 하구.”
“예? 제, 제가 언제요! 제가 언제 따, 따먹…! 그리고 누가 순진해요! 누가!”
이소가 해준의 말에 경악하며 질색을 했다. 누가 누구를 따먹어? 그날 처음인데도 밤새 허리가 부서져라 박힌 게 누군데. 해준은 과장되게 입술을 잔뜩 내밀고 시선을 떨궜다.
“아닙니다. 소첩이 어찌 지아비의 바깥일에 관여를 하겠어요.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야죠.”
“하…….”
이소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보려 했지만 곧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려 할 말을 모조리 잊고 말았다. 입을 열어도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라는 변명만 자꾸 맴돌았다. 말재주도 없어 삐친 해준을 어떻게 달래 줘야 하는지도 몰랐다.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아이를 달랠 때처럼 뭔가 다른 것을 주고 달래야 하는데 제가 당장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해준에게 사탕을 사 줄 테니 삐진 것을 풀라고 할 수도 없고. 곤란했다.
해준은 손톱을 뜯고 있는 이소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해준이 진심일 때는 장난치는 거냐며 밀쳐 놓고는 이번에는 진짜로 장난을 치자 오히려 진심으로 삐친 줄 알고 쩔쩔 매고 있었다. 해준은 이소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고개를 기울였다. 끌어안은 팔이 단단하게 등을 받혔다.
“장난인데 놀라긴.”
“아니, 아는데…. 하….”
하하, 이소가 사색이 될수록 해준은 더 많이 웃었다. 귀엽다. 놀리면 놀리는 대로 이를 물고 펄쩍펄쩍 뛰는 게 너무 재밌다. 해준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럼 내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따라갈게요. 안 토라지고 얌전히 기다릴게요.”
“소원이요?”
“응.”
이소는 조금 고민하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래라도 부르라면 부를 수 있었다. 가요보다는 동요를 더 많이 알았지만 뭐 상관없었다. 춤이라도 춰서 화가 풀린다면 율동이라도 춰 줄 심산이었다. 뭣하면 서툰 키스라도 정말 열심히 할 자신이 있었다. 양도에 못 따라가게 하는 건 둘째치고 그냥 해준이 저에게 실망하고 삐친 것이 싫어서였다.
“굉장히 결의에 찬 표정이네요.”
해준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이소를 바라보았다. 해준의 기분이 풀어진 듯 보여 이소는 금세 안심했다. 이제 해준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돌연 해준이 허리를 잡아 들어 올린 후 이소의 바지를 잡고 끌어 내렸다. 낡고 오래된 청바지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쑥 벗겨졌다. 도대체 버클은 언제 풀었고 지퍼는 언제 내렸지?
“어?”
별안간 조리대 위에서 아래를 훤히 내놓은 꼴이 되자 이소는 급하게 허리를 숙여 해준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교, 교수님!”
그러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해준의 머리통이 더 빨랐다.
“밀어내기 없기예요.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키스의 마지막 종착지는 입술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복슬복슬 강아지 같다고 쓰다듬었던 해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잡고 이소는 가는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접었다. 그리고 아득해지는 정신 끝에 이소는 떠올렸다. 아직 가게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걸.
“헉!”
순식간이었다. 살짝 허리를 숙인 해준은 이소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양손으로 오금을 잡고 제 어깨 위에 얹었다. 터럭 하나 없는 맨 엉덩이가 주방 조리대 끝에 말캉하게 걸쳐졌다. 해준은 제 시야에 찹쌀마냥 퍼지는 흰 엉덩이가 들어오는 것을 퍽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이소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무, 문도 안 잠갔는…데에…!”
“문 잠그면….”
해준이 사타구니 끝에 코를 묻고 진득하게 핥아 올리며 목을 기울였다.
“해도 되고?”
이소는 제 다리 사이에서 능글맞게 웃는 해준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로지 신경은 아직 잠그지 않은 유리문이었고, 주방을 가린 하얀 레이스 커튼이 저를 안 보이게 막아 줄지에 쏠려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준은 대답이 없는 이소를 보며 눈썹을 까딱이곤 야금야금 허벅지 안쪽으로 입술을 옮겼다.
“교, 교수님, 잠까… 잠깐만요!”
“싫어요.”
그러고는 이소의 것을 핫바를 베어 물듯 합 하고 입에 담아 버리는 해준의 행동에 이소는 결국 얼굴을 잔뜩 구겼다.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꽤나 맛있는 것을 핥고 빨아대는 듯 해준의 고개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커다란 손으로 이소의 엉덩이를 꽉 쥔 채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고정해 놓고 얼굴을 파묻자 흐느끼는 소리가 주방을 울렸다.
모두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오손도손 밤을 보내는 시간, 골목은 느지막이 퇴근하는 가장들이 아이들과 통화를 하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가끔씩 배달 오토바이가 가게 앞을 지나곤 했다. 평화로웠다. 이소는 그 평화로운 시간을 망치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어금니를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흑…. 교수니임… 진짜아….”
“왜 우어요. 내아 오 했다고.”
“괴롭히고…. 막… 이런 거, 좋…아하시는 거죠…. 진짜아, 으윽…. 변태같이…. 주방에서, 하는… 세, 섹스 판타지 있고오….”
으흐흡, 해준이 이소의 기둥을 입에 문 채 어깨를 떨며 웃었다. 입에 물고 있던 이소의 기둥을 주욱 빼내자 지나친 자극에 이소의 가는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한참 맛있게 빨고 있는데 자꾸 울면서 할 말은 다 하니 웃음만 났다.
“나중에 말해 줄게요. 굳이 지금 말해서 분위기 깰 필요는 없잖아.”
숨을 고르던 이소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뭐, 뭔데요. 무서운 거예요?”
“아니야, 평범한 건데.”
재료가 좀 필요해서 그렇지 뭐. 그렇게 말한 해준의 고개가 다시 내려갔다.
“흐아……! 예고 좀 하고…!”
해준이 부드럽게 달래며 보들보들한 살갗을 핥아내자 동시에 납작하게 붙은 배가 훅 꺼졌다. 이소의 손바닥이 해준의 머리카락을 쥐고 가늘게 떨었다. 행여나 머리카락이 뽑힐까 봐 당기지도 못하고 끝만 쥔 채 떠는 손이 애처로웠다.
윤이소의 다리 사이에서는 보송보송한 과일 향이 났다. 언젠가 이소의 집에서 잠을 잤을 때, 이소가 서랍장에 다 쓴 마른 비누를 양말에 넣는 걸 보고 의아해하자, ‘이렇게 하면 서랍장에 넣어둔 옷 전부에서 비누 냄새가 나요.’라 말하고 웃었더랬다. 오늘은 라임향인가.
어깨에 걸친 종아리가 연신 움찔거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눕힌 채 박아 대고 있었다면 귀여운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것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이소의 손이 더듬더듬 옮겨가 제 허벅지를 옭아맨 해준의 손등을 긁어내렸다.
“교수님, 으응, 진짜…. 저 안 돼요, 흑….”
길고 부드러운 기둥이 빠르게 입천장을 쿡쿡 긁어내자 허리가 유연하게 흔들렸다. 이소는 빠져나오려고 허리를 뒤틀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해준의 목구멍 깊숙이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능숙하게 목구멍을 열고 기둥 끝까지 삼켜 올리자 해준의 숨이 뿌리 끝에 닿았다. 쿨척쿨척 걸쭉한 타액이 입 안에서 거품을 내며 윤활제 역할을 했다. 매끄럽게 빠졌다가 삼켜지는 행위의 반복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으응, 흐…! 놔아…, 진짜 갈 것 같….”
해준의 시선이 붉게 달아오른 이소의 목덜미와 귀에 닿았다.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는 땀까지도 모두 단내가 날 것 같았다. 남김없이 핥고 싶었다. 이소의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방울진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다분히 색정적이었다.
‘아, 씨발…. 존나게 야하네 진짜.’
해준은 제 목구멍에 담은 기둥 끝을 볼우물이 패이듯 깊게 빨아들였다. 동시의 이소의 고개가 홱 뒤로 넘어갔다.
“아읏…!”
가늘고 높은 비음과 함께 희고 가느다란 목에 옴톡하게 나온 목젖이 사정없이 떨렸다. 해준의 머리칼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절정은 달고 무서웠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그 순간을 열망했고 동시에 피하고 싶었다. 이소의 눈가가 짓물렀다. 결국 눈물이 주륵 흘렀다. 더 이상 참는 것은 무리였다. 멋대로 내보내지 않으려 견디고 견뎠던 시간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흐응, 흑, 흐! 아아…!”
해준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잡고 뱉은 높은 신음이 달콤하게 울렸다. 이로 꽉 깨문 입술이 으득 소리와 함께 깊게 찢어졌다. 해준이 제 목구멍 안으로 뿜어지는 비릿한 액체를 단물 마시듯 꿀꺽꿀꺽 삼켰다. 내뱉는 족족 해준이 입 안을 조여 삼키는 통에 이소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들을 툭툭 뱉었다. 우, 으 등의 단어가 되지 못한 말들이었다.
비로소 갈증을 해소한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찢어진 살갗 틈으로 맺힌 피가 이소의 입술에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에 어울리지 않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소원이었다.
* * *
해준은 이소의 허벅지를 천천히 내려놓은 뒤 제 겉옷으로 이소의 아래를 가렸다. 바지와 속옷을 주면 좋을 텐데 해준은 짓궂게 웃으며 허벅지는 가려 놓고 맨 엉덩이는 계속 주물럭댔다. 이소는 손끝이 떨렸다. 아직도 사정의 여파가 쉬이 가시지 않는 듯 숨만 몰아쉬었다.
“너무 좋다.”
“…….”
“너무 좋아요, 이소 씨.”
해준은 제 주인에게 애교 부리는 강아지마냥 얼굴을 부볐다. 이소는 헛웃음이 나왔다.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이제…, 만족하세요?”
“응. 조금.”
“조금요?”
“아이, 참 부끄러워요.”
해준은 이소를 끌어안은 채 볼을 부볐다. 이소는 한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토닥였다.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고 대뜸 아래를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다. 두 번 달래다가는 아예 걷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해준은 그럼 부축해 줘야 한다며 그 핑계로 쫓아갈 사람이었다.
이소의 숨소리가 차츰 안정되자 해준은 그대로 안긴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소 씨.”
“네.”
해준은 손을 내려 겉옷을 단단히 이소의 허리에 둘렀다. 겉옷 아래로 달랑이는 흰 종아리와 발목을 덮는 양말이 귀여웠다. 사랑스러웠다. 윤이소는 참 사랑스러웠다.
“나 오늘 듣고 싶다. 이소 씨 이야기.”
“어떤 거요?”
“짧게는 해수 엄마 어떻게 만났는지, 길게는 그냥 전반적으로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다.”
“그게 뭐예요. 바지나 좀 주세요.”
“싫다니까. 엉덩이 조물조물 만지고 싶단 말이에요.”
이소는 입술을 죽 내밀고 고집을 부리는 해준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해준이 눈썹을 내리고 입술을 끌어당겼다. 뭐 대단한 거라고 그것을 애원한담.
“역시 내가 너무 이소 씨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 제일 많이 아실 것 같은데….”
이소는 그렇게 말해 놓고 눈동자를 굴렸다. 음, 음 하며 말을 고르는 목소리가 달았다. 이렇게 쉽게 말해 줄 수 있는 거였으면 종종 물어볼 것을 괜히 참고 기다렸나 싶어 해준은 아까움에 혀를 찼다.
“음, 해수 엄마는, 그러니까 은형이는 저보다 두 살 많았어요.”
해준에게 안긴 채 언젠가를 떠올리던 이소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래 봤자 아직 만 6년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잊히기에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준은 오늘 조금 이기적이고 싶었다. 듣고 싶었다. 그래야 그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끓어오르는 질투심도, 열등감도 가라앉힐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개인 사정으로 학교를 늦게 들어왔대요. 저랑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쭉 같은 반이었어요. 그 친구는 할머니랑 둘이 살았었고, 저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사촌 형 집에서 같이 살았거든요. 나름 공통점이 있었고 둘 다 마침 점심시간마다 같이 먹을 친구가 없어서 친해졌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
“다섯 살 때쯤이요. 기억은 잘 안 나요. 분위기 착 가라앉은 장례식장에서 저만 계속 장난감을 갖고 놀았대요. 엄마 아빠 놀러 간 줄 알고.”
“갑자기 두 분 다요?”
“사고가 있었거든요. 혼자 남은 저를 큰아버지께서 거두어 주신 거였고, 그 덕에 감사하게도 보육원행은 피했어요.”
이소는 씁쓸하게 웃었다. 삶이 기구했대도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이것보다 더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으니까, 저는 그저 운이 조금 없었을 뿐이라고. 그나마 거둬 줄 친척이라도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은형이랑은 그 뒤로 쭉 붙어 다녔어요. 내성적인 저랑 다르게 털털한 성격이었고 항상 당당했고, 참 잘 웃었어요.”
그런 점에 반했나, 해준은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이소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해 놓고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헛헛해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짝사랑 상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랄까.
“해수 태어나기 두 달 전에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곁에 남은 사람이 없었어요. 많이 힘들어했고 경황도 없어 해서 저희 둘이서 소박하게 장을 치르고 돌아오면서 배 속에 있는 해수 잘 키우자, 이야기했었어요. 은형이에게 남은 건 정말 해수뿐이었거든요.”
해준은 이소를 안고 허리를 토닥였다. 계속해, 계속해 봐요.
해준의 말에 이소의 듣기 좋은 목소리는 기억을 더듬어 옛날 일을 먹먹하게 풀어냈다.
“해수가 태어났을 땐 얼마나 허둥댔는지 몰라요. 아는 건 없지, 돈도 없지, 예정일도 아니었지. 아, 해수가 예정일보다 2주 빨리 나왔거든요.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하필 옆에 제가 없었어요. 아르바이트하느라고 바빴거든요. 뒤늦게 연락받고 갔을 때 은형이가 안고 있는 애기가 얼마나 예쁘던지, 은형이를 안고 고생했다고, 얼마나 무서웠겠냐고 많이 울었던 게 기억나요.”
“기특하네. 둘 다 어렸을 텐데.”
“그리고 병원에서 나와 얼마 안 되어서, 전 집에서 아기를 보고 있었고 은형이는 해수를 등록하러 갔었어요. 해수라는 이름도 은형이가 지었어요. 갖출 해에 빼어날 수, 이름 잘 지었죠.”
“네. 예뻐요.”
“옥편 들고 한참 고민하면서 좋은 한자만 갖다 썼거든요. 다 잘되라고, 무조건 잘되라고.”
이소는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해준은 안다. 윤이소는 안겨 있을 때 기분이 좋으면 깊이 폭 안기지만 위로가 필요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불안한 마음만큼 몸도 들풀마냥 흔들렸다.
“그리고 음, 그날이에요…. 해수 이름 지은 날에.”
이소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이 온 거예요. 엄청 다급한 목소리로요.”
어느새 물기 젖은 목소리가 담담하게 공간을 울렸다.
“교통사고였어요.”
해준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은 옷깃을 움츠락대며 쥐었다. 이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전 일인데도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해수 이름을 등록하겠다며 손을 흔드는 은형에게 차 한 잔이라도 마시고 천천히 놀다 오라며 혼자 보냈던 스스로를 몇 번이나 원망했다. 이름 등록했다는 전화를 받고 꽃이 참 예쁘다며 보낸 사진 속 은형은 밝게 웃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은형이 병원에 옮겨지는 동안 잠든 해수를 끌어안고 주머니를 털어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가는 내내 빌었다. 거짓말이라고, 심장이 약하게나마 뛰고 있을 거라고, 어쩌면 지나가는 사람의 착오가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땀에 젖은 채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만난 은형은 거짓말처럼 차게 식어 있었다. 차에 치인 것으로 예상되고 그 사고로 후두부와 갈비뼈에서 심한 출혈과 내상이 있었다고 했다. 골든 타임이 아슬아슬했으나 결국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고 했다. 어미의 죽음을 모르는 해수는 아기띠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때가 제가 기억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운 날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로, 정말로 많이 울었어요.”
해준은 그저 어깨를 토닥였다. 제 같잖은 이기심으로 어찌 머리조차 들이밀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도, 그래도. 윤이소의 과거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자꾸만 그 어린 애가 엉엉 울고 있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왜 그때 나는 네 옆에 없었을까. 왜 이렇게 늦게 만났을까. 나 사람 잘 거두는데, 왜 내 눈에 안 띄었을까. 그게 참 가슴 아팠다.
“그리고 쭉…. 저 혼자 키웠어요. 집에서는 뭐…. 엄청 두들겨 맞고 쫓겨났고, 그 뒤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많이 많이 떠돌았어요. 정말 많이. 굶기도 많이 굶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항상 해수 먹일 건 있었고, 운 좋게 센터에서 해수를 맡아 줄 때는 일도 두 개나 다닐 수 있었고, 나중에 겨우 도움받아서 어린이집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너무 좋아서 케이크 한 조각 사서 파티도 했고…. 다 좋은 추억이에요. 그러니까 전 지금은 후회 안 해요. 해수 놓지 않은 거, 절대로 후회 안 해요.”
윤이소는 불안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작은 머리통은 비밀을 한꺼번에 꺼내 놓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눈치를 보며 저에게 내놓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이만큼만 저를 알아 가라는 듯. 그러나 그 큰 눈에 눈물을 잔뜩 매달고 뒷걸음질 치며 제 비밀을 내가 언제 집어먹을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과거 같은 것은 다 집어치우고 그냥 안아서 도망쳐 버리고 싶어졌다.
“…그럼 그때 빚도 지고 그랬어요?”
“가게 달력 보셨어요?”
너무 보이는 데 적어 놨나 봐요. 이소는 걱정하듯 저를 바라보는 해준의 양 뺨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해준은 미안한 듯 말을 하지 않았다.
돈 이야기를 강박적으로라도 하지 않는 건 상대에게 구걸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어서였다. 특히나 해준에게는 빚에 관련된 걱정이나 우려는 조금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요. 남들 지는 만큼 조금 졌어요. 요즘 빚 없는 사람 없잖아요.”
“…….”
교수님 같은 사람은 빚이 뭔지 모르겠지. 이소는 쓰게 웃었다.
“알아요, 교수님한테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 적응이 안 되시겠지만…. 얼마 안 돼요, 정말로. 금방 갚거든요. 한 달에 이십만 원 정도만 나가는 거라구요.”
실제로는 한 달에 300만 원씩, 혹은 그 이상 나가기도 하지만 이소는 해준에게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금액을 이야기하고 안심시켰다. 그 정도라면 해준도 자신을 너무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 같았다. 해준은 제 이야기를 다 듣고서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소는 조리대 위에 걸쳐진 양말만 신은 흰 다리를 달랑달랑거렸다. 해준은 이소의 얼굴을 마주하고 겉옷 아래로 내놓은 무릎을 쓰다듬었다.
“듣기 좀 그렇죠? 완전 우울한 이야기라서.”
듣지 말걸. 아니, 들었어야 했나. 아니, 그래도 듣지 말걸. 자꾸 머릿속에 어리숙한 이소의 모습이 겹쳐졌다. 더러운 옷깃, 낡은 운동화, 호의에 경계하던 눈, 난생처음 먹어보는 음식들, 선물을 받으면 아이처럼 좋아하던 모습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잘 몰라서,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외로워서. 너는 꽤 오랫동안 혼자서 많이 포기하고 체념하며 살아왔겠구나, 생각하니 자꾸만 가슴이 콕콕 아렸다.
힘들었지. 이소야, 힘들었지.
작은 위로의 말도 꺼내지 못한 해준은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이소를 끌어안았다.
“에이, 왜 울어요.”
이소는 팔을 들어 그런 해준의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아까와 같이 계속 말했다. 울지 마요. 나 괜찮아, 괜찮아요. 그러니까 교수님도 괜찮아져라. 여린 듯 단단한 마음을 가진 윤이소는 오래된 주문을 외우듯 계속 그렇게 말했다.
이소는 해준의 단정한 뒷머리를 쓸어넘기며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이걸 어쩌나.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길래 최대한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빼고 뭉뚱그려서 이야기한 거였는데 해준은 이소의 어깨를 잡고 킁킁 숨을 집어삼켰다.
* * *
포옹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교수님, 뚝.”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어깨를 끌어안는 팔이 가늘게 떨렸다.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얹은 손을 들어 제 볼의 마른 눈물 자국을 닦아 냈다. 허리 위 분위기야 애틋하고 좋았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은 지금 문도 잠그지 않은 주방에서 아래를 헐벗은 채 해준의 겉옷만 두른 채였으니. 이제는 둘 다 정신을 차리고 내일을 위해 헤어질 시간이었다.
“교수님, 바지 주세요. 저 이제 들어가 봐야겠….”
“이소 씨, 정리 다 했어? 불 다 켜 놓고 어디 갔대?”
연신 코를 훔치던 이소가 몸을 굳혔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정숙이 빈 홀을 보고 주변을 살폈다. 화장실 갔나? 혼잣말을 하며 주방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급하게 해준의 어깨를 잡고 조리대 아래로 밀어냈다. 이소 역시 얼른 조리대 위에서 해준의 겉옷으로 아래를 둘러맸다. 해준이 일어서려 하자 이소는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아래로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해준이 벙찐 얼굴로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허둥지둥 시선을 내리자 아직도 구겨진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바지가 보였다. 이소는 정숙에게 윽박지르듯 고함을 쳤다.
“드, 들어오지 마세요!”
“어? 있었어?”
정숙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다 뚝 끊겼다. 홀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던 정숙이 의아하게 물었다.
“거기 서서 뭐 해?”
다행히 정숙에게는 이소가 서 있는 뒷모습만 보이는지 의심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이소가 입술을 짓씹다 얼른 둘러댔다.
“아니, 그 음식물 쓰레기가 터져가지고…. 지금 다 튀어서 바지를 갈아입으려고요.”
“또? 저번에도 그러더니… 우리 쓰레기통을 바꿀까 봐. 일단 내가 바닥 닦을게, 바지 대충 털고 이리 좀 나와 봐.”
“아니요!”
정숙이 기다리려는 듯 대걸레를 찾으려 주방 가까이 다가오자 이소가 버럭 큰 소리를 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성을 낸 것처럼 들리자 정숙이 멈칫 고개를 들었다.
“아니, 놀래라…. 아니 뭐 그렇게까지 소리를 지를 건 뭐야.”
한껏 오해한 정숙이 볼멘소리를 했다. 안 그래도 민망해 죽겠는데 바닥에 쪼그린 해준이 큭큭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이소는 억울한 마음에 발로 해준을 밀어냈다. 해준이 고개를 돌리며 자꾸 일어나려는 듯 장난을 치자 이소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도대체 들켜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친구 앞에서 바지를 벗고 있었다고 하면 무어라 변명할지 이소는 감도 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정리할게요. 피곤하시잖아요. 저 정말 화난 거 아니에요…. 저 사실 지금….”
극단적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 눈치 없는 정숙이 자기를 기다릴 것 같아서 이소는 발을 동동 굴렀다.
“바지에 전부 엎질러서 애벌 세탁할 겸 다 벗고 있어서…. 그냥 올라가시면 안 될까요…?”
“어머, 알았어. 말을 하지! 나 그러면 먼저 간다?”
“예에, 올라가세요! 제가 싹 정리하고 갈게요. 가게 앞도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고 갈게요!”
“괜히 고생하지 말고…. 그냥 적당히 하고 얼른 올라와.”
걱정을 담은 말투에는 어떠한 의심도 없었다. 정숙은 냄새가 날 수 있으니 환기통만 잘 열어 주라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이소는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정숙의 목소리에 간담이 서늘한 것은 처음이었다. 금방이라도 들어와 제 발 밑에 깔린 해준을 알아챌까 봐, 혹시나 커튼 뒤로 정사의 짙은 냄새가 새어 나갈까 봐 마음을 졸였다.
정숙이 나가는 문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이소는 안도하며 제 발 밑에 있는 해준을 내려다보았다. 해준은 아까부터 쪼그린 자세에서도 이소의 복숭아뼈를 들어 연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소는 이 간지러움을 참아 가며 정숙과 대화를 이어 나갔었더랬다.
“저만 또 간 떨어질 뻔한 거죠.”
“왜, 나도 놀랐는데. 이소 씨 목청 엄청 크더라.”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뭐 어때요. 이소 씨는 어쩜 이렇게 발도 앙증맞지. 한 손에 쏙 들어오네.”
“보통 남자 발 사이즈예요…. 교수님 손이 유난히 큰 거거든요.”
이소가 발끝을 꼼지락댔다. 뭐가 좋다고 이렇게 저를 물고 빨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양말에 구멍이라도 났으면 어쩌지, 괜히 민망해져 발을 조금 떨어뜨리자 해준이 덥썩 가느다란 발목을 쥐었다. 해준은 제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발목을 잡은 채 정강이, 무릎까지 차츰차츰 입술을 찍어댔다. 이소는 다시금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지탱하며 해준을 밀어냈다.
“또!?”
“응. 여사님도 이제 완전히 올라가셨잖아요.”
“저, 저 가게에서는 안 돼요, 진짜!”
“아, 왜애. 아깐 했잖아요.”
“아까 그거는, 입으로만 한 거였잖아요!”
“그럼 또 입으로만 해 줄게요오.”
해준이 애교 있게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이소는 어깨를 때리고 발을 휘두르며 조리대에서 허우적댔다. 해준은 못 이기는 척 맞아 주며 반쯤 엉덩이를 걸친 이소를 다시 올려 주었다. 입혀 줄게, 웃었지만 이소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해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바닥에 떨어진 청바지를 주워다가 툭툭 털었다.
혼자 입을 수 있는데도 해준은 고개를 저으며 이소의 다리를 하나하나 끼워 넣었다. 세 살배기가 된 기분이었다. 해준이 속옷을 끌어 올리며 또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그냥 입혀 주기나 하지 자꾸만 이상한 짓을 하는 해준 때문에 난감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착실히 반응하는 제 아랫도리 때문에 이소는 티셔츠 자락을 쥐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이제는 뭐 거의 반사적으로 해준이 닿기만 해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속옷을 엄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해준의 손가락이 허벅지 중간에 있었다.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이 바닥에 달라붙은 엉덩이 옆을 살살 간지럽혔다. 이제 몸만 들어 얼른 입으면 되는데도 해준은 좀처럼 일어나라는 소리를 안 했다. 이소가 고개를 푹 숙였다. 티셔츠를 당겨 가린 밑이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이소가 억울한 듯 입술을 지근거렸다.
“좋으세요? 좋으시냐구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씨이….”
해준이 눈을 접어 웃으며 웃음을 참았다. 아직 입술의 상처가 다 아물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짓무른 눈가가 가라앉지도 않았다. 정숙이 나간 지 10분, 아마 별다른 일이 없으면 지금쯤 씻고 있을 것이다. 이소는 결국 제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대형견의 애교에 먹이를 던져 주고 말았다.
“문이라도… 잠그고 오세요.”
“네, 주인님.”
해준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얼른 주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해준은 센스 있게 영업 팻말을 Close로 바꾸어 놓은 후 가게 불을 껐다. 커다란 키로 문의 걸쇠를 돌려 잠그자 찰칵 소리와 함께 정적이 감돌았다. 불이 꺼진 가게 안은 밖을 지나가는 누가 봐도 영업이 끝난 허름한 도시락 가게였다.
해준이 흠흠 콧소리를 내며 주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소는 시선을 돌린 채 여전히 티셔츠를 당겨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 꼬물꼬물 벗어 내렸는지 하얀 속옷이 조리대 위에 단정하게 개켜진 상태였다.
그걸 본 해준이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 같은 청량함이었다. 그것이 아래를 훤히 내놓은 남자를 보며 짓는 웃음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해준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이소의 앞에 섰다. 이소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그의 코끝에 걸렸다. 해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잘 먹을게요.”
형광등에 비친 남자는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 이소의 허벅지 사이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이소는 해준의 입술을 핥는 붉은 혀를 보며 그만 고개를 돌렸다.
* * *
해준은 오랜만에 돌담길을 따라 걸어 올라왔다. 기분이 좋았다.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한 번만, 어쩌면 두 번 정도 입으로 장난을 치려고 했었던 것뿐인데. 집중해서 아래를 빨다 보니 제 주머니에서 빠진 콘돔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몰랐다. 그걸 본 윤이소가 놀라 ‘이, 이…이거 왜 가지고 다니느냐’며 질겁을 했다. 절대로 끝까지 안 할 거라며 도리질을 치는데 그 표정을 보고 제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안 한다는 것을 달래고 달래서 결국은 조리대 위에 엎어 놓은 채 이소의 하얀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여간 저도 너무 못됐다. 몇 번이고 애원하고 조르면 이소가 못 이기는 척 들어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얼른 그 작은 부리에 입을 맞추고 혹여나 변덕이 나 못 하게 할까 봐 또 뒤집어서 이번에는 구멍을 빨아 줬다. 게걸스럽게도 핥았더니 윤이소는 그게 싫다고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교수님, 교수님…! 거기 빨지 마요, 하지 마요, 진짜 나 욕 할 거야…. 욕할 거라고오….’
마르고 판판한 허리와 그 아래로 떨어진 둥그런 엉덩이가 찹싹찹싹 제 샅에 달라붙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끊어지는 신음 소리와 함께 말려 올라간 상의에 가려진 붉은 귓불도 좋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조리대 모서리를 잡은 하얀 손끝이 사랑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 우는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또 듣고 싶다. 윤이소 우는 소리만 따로 만들어서 하루 종일 귀에 꽂고 듣고 싶다.
그딴 추잡한 생각을 하며 두 번을 더 했다.
‘진짜 너무해요, 진짜 너무…. 아, 으응! 너, 무 …흣…! 교수님…! ,하지마…, 미워…! 아! …응!’
조리실은 서늘한 편이었다. 어딘가 엎어 놓고 박아대면 배가 시릴까 걱정이었고, 눕혀서 하기에는 좁았으며, 조리대에 앉아서 하기에는 볼기가 찰까 염려되어 해준은 이소를 마주보고 들어 올린 채로 아래를 쑤셨다. 위로 공을 튀기듯 몸을 던져 올리면 이내 푹 하고 엉덩이가 내려오며 그 말랑한 구멍이 자신의 좆을 덥석덥석 잡아먹었다.
‘살려주, 세요…, 진짜…나, 더 못…해. 나 더 못해애…….’
제 몸무게만큼 푹푹 박히는 통에 이소는 끅끅대며 서럽게 울었고, 해준은 제 어깨를 내어 줬다. 이가 다칠까 어깨를 물고 있으라 했더니 자신의 몸에 상처 내는 것은 싫다고 입술만 묻었다.
“다 젖었네.”
그 덕에 이소의 침으로 어깨가 흠뻑 젖었다. 해준은 척척하게 젖은 어깨를 끌어 올려 제 뺨에 부볐다. 연인의 타액으로 젖은 제 셔츠를 입으로 빨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좀 아닌가. 안타깝게도 바깥이라 입술만 할짝이며 참았다. 해준은 낮은 숨을 내뱉으며 조금 전 사정하자마자 그대로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이소를 떠올렸다.
완전히 탈진해 버린 이소의 바지를 다 꿰어 입히고 안아서 집까지 올려다 주었다. 이 시간이면 해수는 정숙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설치한 CCTV는 잘 작동하고 있었다. 좀도둑이 많은 동네라더니 정말 신문 배달을 하는 놈부터 그냥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놈까지 수상한 새끼들 천지였다. 왜 이소가 그렇게 열쇠에 집착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해준은 미리 복사한 키로 문을 열고 이불에 천천히 눕혔다. 이제는 몇 번 와 봤다고 벌써 익숙해진 그 게딱지만 한 집이 제법 마음에 찼다. 어디를 보아도 다 윤이소의 흔적이 있었다.
서랍장을 열었더니 가지런하게 정리된 옷가지들이 나왔다. 개수는 적었지만 향긋한 냄새가 났다. 향수를 쓰나, 뒤적거렸더니 얼기설기 끝이 해진 양말 한 짝에 오래된 비누 조각들이 있었다. 그것마저도 너무 윤이소다워서 한참을 웃었다. 바지와 속옷, 티셔츠를 하나씩 꺼내서 이소에게 입혔다. 손가락 들 힘조차 없는지 눈을 감은 채 이소는 순순히 옷을 입었다.
해준은 옆에 앉아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이소에게 선물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정작 이소는 제대로 들을 생각은 없고 얼른 자고 싶은지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해준은 그 큰 몸을 구부린 채 연신 혼자 떠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아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소 씨, 이거는 핸드폰. 개통은 내가 다 해 놨고 요금도 내가 낼 거고…. 이거는 케이스,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색깔별로 다 가져왔고, 이거는 블루투스 이어폰이고, 이거는 그립톡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손가락에 끼워서 쓰는 거예요. 아, 그리고 이건 해수 거. 이소 씨가 싫어할까 봐 고민했는데 그래도 그냥 내가 사 주고 싶으니까 샀어요. 키즈폰은 내가 잘 몰랐는데 되게 작네, 아무튼 귀여운 걸로 사 왔고, 또 이거는… 자요? 이소 씨, 졸렸구나. 잠깐만, 기다려 봐요. 나도 베개.”
해준은 솜이 다 빠진 베개를 들고 와 얼른 이소의 옆에 누웠다. 맨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찼지만 그래도 누워서 이소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소는 그새를 못 참고 잠이 들어 버렸다. 이소는 집에 돌아온 이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그저 눈만 깜박이다 잠이 들었지만 그거면 됐다. 해준은 그렇게 맨 바닥에 누워 윤이소가 입술을 벌리고 새액새액 잠이 드는 걸 한참 바라보다 나왔다.
* * *
걸으며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낮은 돌담길 너머 피어난 꽃들이 마음에 쏙 찼다. 돌담 아래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란 민들레들이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해준은 민들레를 보면 이소가 생각이 났다. 둑방에 쪼그려 앉아 저에게 건네주었던 그 작고 하찮은 꽃에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그 저녁. 어쩐지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해준은 그날 잠을 무척 설쳤다.
해준은 손을 뻗어 민들레 홀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홀씨를 사뿐히 내려놓고 살포시 접었다. 화원에 도착하면 손수건을 열고 후 불어 흩뿌려 주어야지. 내 공간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은 마치 그게 이소의 분신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커다란 한옥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던 아이들이 달려와서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 오셨어요?”
“안녕.”
괜히 기분이 좋아 손까지 흔들었다.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해준은 가방과 함께 들고 온 쇼핑백을 주섬주섬 매만졌다. 아까 해수 선물을 사고 나오는 길에 어쩐지 눈길이 가서 집어 들었던 것들이었다.
“얘들아. 혹시….”
“네!”
“이런 거 좋아하니?”
해준은 답지 않게 망설이며 봉투를 내밀었다. 아이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세한이가 봉투를 받아 들고 열었다. 공간이 깊은 쇼핑백 안에 태블릿 PC 넉 대가 들어 있었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준이 어, 음… 하며 고민했다. 역시 그냥 먹을 것을 사 올 것을 그랬나.
“역시 싫으니?”
세한이가 느리게 입술을 벙긋댔다.
“아, 아니요. 너무 좋…. 저 도련님, 저, 잠시만… 잠시만요! 어, 엄마! 엄마!”
아이들이 법석을 떨며 쇼핑백을 들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다음은 뻔했다. 아이들의 선물을 본 아이 엄마들이 요란하게 반응하며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허리를 숙이며 이런 것을 어떻게 받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해준은 얼굴을 긁적였다. 이소에게 선물을 줄 때도 느낀 거지만 그냥 주면 기분 좋게 받지, 이럴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요즘은 애들 공부할 때 이걸 쓴다길래…. 사람 수대로 샀는데 부족하면 말해요.”
왠지 민망해져서 식구들이 전부 모이기도 전에 손을 내젓고는 얼른 제 방이 있는 언덕으로 오르려던 차였다. 정원 근처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던 준경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또 무슨 과한 선물을 했길래 다들 저리 야단인지. 그리고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은 오늘 무엇이 이리 기분이 좋아 저를 보자마자 싱긋 웃는지.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달이 밝아 그런가.”
초승달 같은 눈을 접어 웃으며 괜한 핑계를 댄다.
“또 그 가게 다녀오시는 길이겠죠.”
준경의 말에 해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들었다.
“문 집사, 이거…귀신이네. 아, 이건 집사님 거. 내가 특별히 따로 챙겼지.”
해준은 주머니에서 작은 양갱 하나를 꺼냈다. 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들에게는 덥석덥석 태블릿 피시를 건네었으면서 집사에게는 양갱 하나로 퉁 치려고 한다. 정작 준경은 부담 없이 받아 들었다. 제가 잘 먹는 것이었다.
“애들 선물 사느라 나 거지 됐으니까 집사님은 그것만 받으세요.”
“아무렴요. 식사는 하시고 들어오시는 길이신가요? 다과라도 올릴까요?”
“아니에요.”
해준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달밤에 비친 짙은 눈동자가 유독 깨끗했다.
“맛있는 거 배부르게 먹고 왔어요.”
해준은 준경과 헤어져 안채의 대문을 열었다. 고요한 안채에 준경이 미리 켜 둔 등이 은은하게 밝았다. 돌담길을 따라 다소곳이 자리한 화원, 해준은 제 안채와 가장 가까운 화원 담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190cm가 훌쩍 넘는 우람한 덩치는 어깨를 말고 쪼그려 앉아도 여전히 큼지막했다.
해준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살짝 열어 민들레 홀씨를 집어 흙 아래 살포시 묻어 주었다. 내년 봄에는, 싹을 틔울 거야. 많이 많이 자라렴. 여기 내 정원 흙이 양분이 많아 좋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새근새근 잠든 이소를 생각했다. 민들레 홀씨를 심은 흙을 마치 잠든 이소를 두드리듯 도닥이며 속삭였다.
이소야, 내 정원으로 와. 아무 곳이라도 좋아. 네가 내 곁 어디든 있었으면 좋겠어.
달이 깊은 밤, 정원의 주인은 그렇게 나긋나긋이 흙을 보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