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2/50)

4

바야흐로 봄이었다. 담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길 곳곳에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가게 앞에 나온 정숙은 언덕을 걸어 내려오는 이소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해수 역시 새 자전거를 끌고 나오다 제 아빠를 보고 달려와 와락 안겼다. 만 하루 만에 보는 딸이었지만 늘 반가웠다. 어느새 제 명치만큼 오는 딸의 머리통을 답싹 끌어안고 쓰다듬자 향긋한 샴푸 향이 올라왔다.

“이소 씨, 그날 비 그렇게 맞고 나갔는데 괜찮아? 전화 받고 놀래가지고 정말.”

“죄송해요. 지금은 열 다 내렸어요.”

정숙이 걱정스레 물었다. 해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쏟아지는 폭우와 간밤의 정사까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꽤나 가벼운 편이었다. 난생처음 수액도 맞았는데 해열제가 잘 들었는지 정신은 맑았고 없던 힘까지 나는 것 같았다.

이소는 해수의 자전거를 대신 끌며 정숙과 떠들었다. 지난밤 해수는 아빠가 아프다고 하니 정말 많이 걱정을 하다 잠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착한 딸을 두고 정작 저는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해준에게 칭얼거렸다니, 해준 말마따나 제가 해수보다 더 어린애 같았다. 이소는 눈썹을 긁적였다.

“근데 갑자기 그날 왜 뛰쳐나갔어. 차 교수한테 뭐 급하게 할 말이라도 있었어?”

“아, 할 말….”

정숙이 무심결에 던진 말에 이소는 멈칫 얼굴을 붉혔다. 밤새 해준에게 했던 말이라고는 ‘그만할래요.’ ‘죽을 것 같아요.’ ‘또 나올 것 같아요.’ 따위의 비명에 가까웠던 것인데. 좋아한다는 고백도 했지만 사실 횟수로만 따지자면 울면서 애원한 문장들이 더 많았다.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부끄러운 말들을 외쳐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이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떫은 표정으로 머리를 젓는 이소를 보며 정숙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열 내렸다니 다행이다. 요새 자꾸 틈만 나면 코피 나고, 꾸벅꾸벅 조는 게 영 마음에 걸려. 나이 먹은 나보다 더 비실대면 안 돼. 해수 생각해서 영양제도 먹고 끼니도 거르지 말고. 응?”

정숙의 잔소리에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숙만큼 저를 어미처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이소는 그 점이 퍽 고마웠다.

“그럴게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늦은 감상이었지만 새로 산 자전거는 해수에게 꽤나 잘 맞아서 발을 한 번 굴렀을 뿐인데도 앞으로 잘 나갔다. 몇 번 페달을 밟지 않았는데도 저만치 멀어지는 해수를 보며 이소는 마음이 시큰해졌다. 뒤늦게 무슨 복이 있어서 해준 같은 사람을 만났을까. 아마 저라면 절대로 사 주지도 해 주지도 못할 이벤트들의 연속이었다.

평생 만져 본 적도 없던 질 좋은 옷, 하늘을 수놓은 풍선 군락, 트렁크를 가득 채운 선물 꾸러미들까지 안겨 주면서도 해준은 이소의 반응만 살폈다. 혹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봐 고개를 내리고 표정만 살피던 해준이 참 귀하게 여겨지던 순간이었다.

“킁.”

이소는 괜히 또 마음이 벅차서 코를 훔쳤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세 해준이 보고 싶었다.

* * *

아팠었던 이소를 위해 기분을 낼 겸 정숙이 외식을 제안했다. 커다란 접시에 돈가스와 생선가스, 샐러드까지 모조리 나오는 커다란 경양식집에 가서 간만에 칼질을 했다. 모형 벚꽃이 우거진 홀에 타일을 이어붙인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안에 해수 손바닥만 한 붉은 잉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해수와 정숙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잉어를 구경했다. 이소도 그 옆에 기대서 물고기에 정신이 팔린 해수를 바라봤다. 평온한 점심시간이었다.

“윤주영 귀국한대.”

“범양 윤주영?”

이소가 기대선 벽 뒤로 한창 식사 중이던 직장인 무리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이소의 시선이 그들에게 가닿았다.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이소는 제가 빤히 쳐다보는 줄도 잊은 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거 봐. 어제 공항 왔대. 근데 기럭지 봐.”

“연예인이네 완전.”

핫 이슈를 전달하는 유튜버의 설명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소리를 듣기만 해도 공항에 몰린 기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이 됐다. 젊은 유튜버는 근 20년째 예술재단을 운영하던 범양그룹이 몇 년 사이 국내 대형 엔터 지분을 인수했다는 내용을 줄줄 읊었다. 아직 30대 초반인 윤주영 이사가 기존 이사회 임원들보다 젊은 예술가 산업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를 지원할 계획이라 했다.

저걸 다 분석하고 외워서 말하는 건가, 대단한데. 이소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 일이 되어 버린 이름들을 가지고 더 생각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아 이소는 천천히 걸어와 해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우리 이제 밥 먹자. 사장님, 우리 밥 먹어요.”

“응, 그래야지.”

자리로 돌아와 밥을 먹으면서도 이소는 영 입맛이 없어 깨작거렸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건너편 직장인 무리가 하는 이야기가 계속 테이블 너머로 흘러 들어왔다.

“대박, 윤주영 결혼했네.”

“몰랐냐. 2년 전에 해서 한국 온 거잖아. 이제 범양 물려받으려고.”

“좋겠다. 나한테 3억만, 아니 천만 원만 던져 주고 갔으면.”

“난 백만 원. 노트북 사게.”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깔깔대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이소는 물을 들이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를 잘못 골랐나, 괜히 물맛도 썼다.

“이소 씨, 왜 안 먹어. 해수야, 할미 많다. 돈가스 더 먹어라.”

정숙이 제 돈가스를 해수에게 밀어 주며 이소의 안색을 살폈다. 이소는 속이 쓰리다는 핑계를 대며 샐러드만 조금 집어 먹고 말았다. 남은 밥과 디저트까지 모두 해수에게 몰아 주고는 어서 식사 시간이 고요해지기를 바랐다. 맛있게 먹고 싶었는데 못내 아쉬웠다.

* * *

돌아오는 길에 정숙은 철물점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카페 들어온대.”

“카페요?”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에 아기자기한 화분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곧 오픈할 모양인지 노란 조명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카페보단 꽃집 같은데요.”

“젊은 여자 사장 혼자 하더라. 나중에 오픈하면 가서 마시자.”

“카페 커피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안 드시잖아요.”

정숙이 팔꿈치를 들어 이소의 옆구리를 찔렀다.

“비싸서 안 먹었지. 좋아해, 왜.”

아, 그렇구나. 이소는 나중에는 꼭 정숙이 좋아하는 맛을 알아내서 사 줘야겠다 생각하며 웃었다. 하긴 저도 해준이 사 주어서 캐러멜이 들어가는 커피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가까운 곳에 카페가 생겼으니 제 돈 주고 사 먹어 봐야지 생각했다.

정숙은 이소와 해수만 남기고 먼저 가게 정리를 하겠다고 들어갔다. 마음은 공원을 더 걷고 싶지만 다리가 아파 온다는 이유였다. 이소의 건강을 걱정하기는 했지만 정숙은 요새 종종 부쩍 피곤해했다. 사실 많은 나이도 아니었지만 매일매일 정기적으로 쉬는 날도 없이 가게 일을 한다는 것은 고되다. 남는 시간에는 재료를 다듬어야 했고 해수도 봐줘야 했다. 저만 아니었으면 늦은 나이에 육아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소는 항상 정숙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돈을 꼭 많이 벌어서 정숙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이소는 해수와 함께 슈퍼에서 음료와 과자를 두어 개 사서 펼쳐 놓고 집어 먹었다. 단내 때문인지 종종 벌이 꼬였다. 손으로 휘휘 저어 가며 벤치에 몸을 기대고 과자를 먹었다. 전주보다 꽃이 훨씬 많이 피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스며 들어오는 꽃내음이 진했다.

“봄은 봄이다.”

“봄은 봄이다가 뭐야?”

해수가 입 안의 과자를 우물대고 물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햇살은 따뜻하니까 어디 놀러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리지.”

놀러 간다는 말에 해수가 화색을 했다.

“나도 어디 놀러 가고 싶어.”

“그러게, 어디 가지.”

이소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도시락을 싸서 기차라도 타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볕이었다. 산이면 좋겠다. 아니 바다여도 좋겠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서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해수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근데 아빠 요새 바쁘잖아.”

“아빠가 왜 바빠. 안 바빠.”

별다른 일도 없었는데 해수는 영 토라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빠 예전에는 가게 일 끝나면 같이 도서관도 가고 공원도 갔는데, 요새는 자꾸 집에 없잖아.”

“아빠가?”

그랬나? 해수의 말에 기억을 더듬었지만 가게를 닫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항상 집에서 해수와 책을 읽고 놀아 주다 잤던 것 같은데 해수는 퍽 서운한 말투로 시선을 떨궜다.

“응. 아빠 친구랑만 놀잖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소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해준을 자주 만났던가? 해수가 섭섭해할 정도로? 이소는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달싹였다. 해수 말을 듣고 보니 근래 해수 얼굴보다도 해준의 얼굴을 더 자주 봤던 것도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운했어?”

“응. 나도 아빠랑 있고 싶었는데 자꾸 아빠가 친구 생겨서 늦게 들어오니까 이젠 나를 안 사랑하나 보다 했어.”

이소는 펄쩍 뛰었다.

“아빠가 해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니야.”

정말이었다. 이소는 대체로 말을 아끼는 편이었지만 해수가 저를 사랑하냐 물을 때는 조금도 주저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다. 진심이었다. 해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쭈욱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

“응. 그럼 됐어. 그냥 그랬었다고.”

해수는 입에 문 과자를 삼키곤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이소는 괜히 목이 메어 들고 있던 커피 우유를 주욱 들이켰다. 간밤 저를 걱정했다는 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늠이 가지를 않았다. 해준은 저를 닮아 퍽 똑 부러진다 말했지만 이소는 달리 생각했다. 저는 유약했다. 갈대 같은 변덕과 깊은 무지로 입을 다물고 살아갈 뿐, 그런 저를 지탱해 주는 것은 언제나 올곧은 눈으로 아빠를 지지해 주는 해수였다. 이소는 그런 해수를 대단하다 여겼다. 어쩜 저리 성격이 저와 달리 단단한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아빠, 근데 나 할 말이 있어.”

“응, 뭔데?”

해수는 마시던 바나나 우유를 쭈욱 빨고는 돌아보았다.

“누가 나한테 뽀뽀를 하고 싶다고 하면 뽀뽀해도 되는 건가?”

콜록, 주욱 빨아올리던 커피 우유가 갑자기 좁아진 식도에 눌려 왈칵 터져 나왔다. 해수는 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소의 입을 닦아 주었다. 어휴, 애기도 아니고. 이소를 타박하는 말투가 제법 어른스러웠다. 이소가 입을 마저 닦으며 해수를 내려다보았다.

“으응? 어? 뽀뽀?”

“응. 뽀뽀.”

“갑자기 뽀뽀는 왜?”

언젠가 해수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정말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답해야지, 생각했었는데.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훅 들어오는 카운터 펀치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반에 이도현이라고 있거든? 근데 걔가 내가 너무 예쁘다고 갑자기 뽀뽀하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했어. 뽀뽀는 사랑하는 사이에만 하는 건데 나는 도현이를 아직 안 사랑하거든.”

“그렇지. 네가 사랑하지 않으면 뽀뽀하지 않아도 돼.”

“응. 도현이 멋있긴 하지만 뽀뽀는 좀 그래.”

꽤 진지한 표정으로 도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해수의 말투가 퍽 단호했다. 이소는 그런 해수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함부로 너의 몸을 만지지 않게 하라, 도현이가 아니라더라도 누군가 너에게 뽀뽀를 한다면 선생님한테 말하라. 원하지 않을 때는 싫다고 말하라 등의 간단하지만 중요한 지침을 알려 주었다. 이제는 이런 것까지 설명을 해야 할 때가 오다니 해수가 부쩍 자란 게 실감이 났다.

해수가 턱을 긁적이며 이소를 올려다보았다.

“아빠는 그럼 엄마랑 뽀뽀했겠다.”

“아, 크흠. 크흐음.”

“엄마랑 아빠랑 사랑해서 나를 낳았으니까, 그치.”

“어, 이 과자 맛있다. 해수야, 우리 과자 더 먹을까?”

이소는 남은 과자를 입에 싹 털어 넣고 일어났다. 그놈의 뽀뽀 이야기, 그냥 대답하면 되는 건데도 자꾸만 볼이 달아올라 더워졌다. 주머니 속 꼬깃한 지폐를 꺼내 해수에게 건넸다. 과자 하나만 더 먹자, 이번에는 해수가 직접 계산해 보는 걸로.

“좋아. 나 혼자 해 볼게.”

“그리고 해수야, 우리 이번 주엔 진짜 소풍 가자. 공원 말고 진짜 차 타고 멀리. 아빠랑만 둘이.”

“진짜? 어디!”

해수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표정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이소가 슬며시 웃었다.

“엄마 보러.”

그 말에 해수는 뽀뽀 이야기는 잊고 눈을 접어 웃었다. 환하게 웃는 해수의 미소가 봄풀마냥 싱그러웠다.

* * *

해준은 느릿느릿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달맞이꽃들이 바람에 사브작 흔들렸다. 연보랏빛 꽃잎을 만지는 손길이 제법 조심스러웠다. 정원은 고요했다. 밤이 늦은 시각, 해준의 안채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 여덟 시가 넘으면 해준이 따로 부르지 않는 이상 식솔들은 알아서 개인 시간을 보냈다. 와글와글 떠들어도, 다 같이 고기를 구워 먹어도 해준은 무어라 잔소리 한 적이 한 번 없었고 오히려 집사 준경을 불러다 더 많이 놀고 먹으라 카드를 쥐여 주곤 했다. 해준의 소소한 낙은 언덕 위 정자에 앉아 그들이 즐겁게 떠들고 노는 것을 말없이 구경하며 술을 홀짝이는 것이었다.

해준은 낮에 이소와 내려다보았던 바위 위에 서서 행랑채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그리 바쁜지 여자들이 큰 바구니를 들고 왔다 갔다 했으며 남자들은 아이들을 무등 태우고 뛰어다녔다. 기름진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지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손에 무언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저게 무어람. 해준은 아래를 내려다보다 전화가 울려 시선을 거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소였다. 반가웠다.

“이소 씨.”

매번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얌전한 목소리로 네, 대답할 이소를 기대했다. 그러나 대답 없이 이소는 쿡쿡 웃었다.

“여보세요?”

- 네. 저예요.

담백하게 떨어지는 말투,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저예요.’ 한 마디로 웃음이 나게 할 수 있는 사람. 해준은 바람 빠지듯 숨을 뱉곤 안부를 물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점심은 잘 먹었어요? 많이 바빴어요? 이소의 대답을 조금 더 길게 들으려고 생각나는 대로 혼자서 질문을 연달아 뱉었다. 사실 그냥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해준은 문득 오늘 자신이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소의 전화가 올 때까지도 저는 얌전히 이소의 전화만 기다렸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다.

- 마감하고 지금은 가게 앞이에요. 점심은 돈가스집 갔었어요. 오후엔 손님도 좀 많았고…. 이것저것 정리하고 났더니 조금 늦게 끝났어요.

“응. 그랬구나.”

- 교수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이소 씨 기다렸어요.”

수화기 저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해준은 눈을 깜빡이다 화면을 들여다보고 전화가 꺼졌는지 확인했다.

- 음… 어, 아! 죄송해요.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뭐라 할 말이…. …제 연락 기다리셨어요?

“응. 종일.”

응석을 부리듯 그렇게 던져 놓고 나니 문득 수화기 건너편의 이소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제 말에 얼굴을 붉히고 있을지, 혹은 질색하는 표정을 하고 있을지. 이소의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해준은 부산하게 손톱을 매만졌다. 호흡이 떨렸다.

- 그럼 저 지금 올라갈까요?

해준은 숨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당황해서 머뭇대거나 말을 더듬는 이소를 생각하며 어떻게 놀려 줄까를 생각하고 있었던 해준은 대뜸 여기로 온다는 이소의 말에 제가 먼저 놀라 침 삼키는 것도 잊었다. 담장 너머 언덕 아래서 식솔들이 웃고 떠드는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이소의 목소리는 달밤의 토끼마냥 제 앞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듯 사고를 정지시켰다.

- 교수님.

“아, 네.”

- 놀라셨나 봐요. 너무 늦었죠. 다음에 갈게요.

수화기 너머로 이소가 낮게 웃었다. 해준은 답지 않게 당황해 말을 잃었다. 어린아이 취급을 하도 했더니 정말로 윤이소가 애처럼 여겨졌던 것인지, 해준은 이소가 제게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일에 유독 놀라곤 했다. 언제나 찾아가는 것은 저였고 다가가는 것도 제 몫이었다.

이소는 해준을 놀리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주절주절 오늘 일을 떠들었다. 사실 돈가스를 먹으려고 했는데 제대로 못 먹어서 배가 고팠다느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삼계탕 한 그릇 배부르게 먹고 갈 것을 그랬다느니. 한껏 들떠 떠드는 목소리에 하루의 만족이 묻어 났다. 듣는 사람까지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성이었다.

해준은 이소의 말을 들으며 언덕 아래에 있는 작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언덕 아래에서는 해준의 정원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도 녀석은 어떻게 알아채고 해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해준이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곤 하나둘 모여들어 언덕 위로 고개를 숙였다. 해준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게 손을 흔들다가 식구들이 모여들자 얼른 머리를 숙였다. 굳이 구경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는데, 제가 잔치에 방해가 될까 우려가 되었다.

- 그래서요. 제가 내려와서 문을 열었는데, 저희 가게가 보이는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이소가 기분 좋게 떠들었다.

“즐거웠죠?”

- 네. 그럼 처음에 열쇠 주러 왔다 갔다 하실 때도 그쪽으로 다니셨던 거예요?

“차로 다닐 땐 언덕 위쪽에 있는 대문으로 드나들죠. 주차장이 있거든. 나 혼자 걸어서 다닐 땐 후문이 내 방과 더 가까우니까 종종 이용해요. 그런데 밤에는 워낙 어두워서 자주 안 다녀요.”

- 너무 신기해요. 그런 분위기의 장소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저희 집하고 가까이에 있는 것도 신기하고….

저 멀리서 아이가 무언가를 들고 언덕을 향해 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 엄마와 식솔들이 말렸던 것 같은데 아이가 워낙 재빠르게 달려와 안채 돌계단을 뛰어오르는 모습이 꼭 청설모 같았다.

‘괜찮아. 곧 내려보낼게.’

해준은 당황해하는 식구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바위에서 사뿐 내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꽃을 헤집어 놓을까 봐 정원 근처도 못 오게 했을 텐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이가 올라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해준은 미소 지으며 몸을 틀었다.

“토요일에 우리 집 와서 자고 갈래요?”

- 토요일이요?

“응. 해수 데려와도 좋고.”

이소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어, 그게’ 하고 말을 더듬었다. 해준은 여유 있게 기다렸다. 이소의 대답을 기다리며 정원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붉은 조명 아래 해수와 꼭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오며 가며 제가 기거하는 집의 주인을 동경하는 눈초리로 보아 왔던 작은 아이였다.

해준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를 만질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도 만들어 줄 건데.”

수화기 저편에서 흐흥, 웃음소리가 났다.

- 오후에 일이 좀 있어서요, 거기 들렀다가 가면…. 저녁쯤 도착할 것 같아요.

“어딜 가는데요?”

- 해수 엄마 보러요.

“해수 엄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해준의 손이 우뚝 멎었다. 당황한 해준에 비해 이소는 담담한 말투였다.

- 기일이 2월인데, 이사하느라 바빠서 못 갔거든요. 해수 데리고 나들이 간 지도 오래됐고, 경기 근교라서 오전만 가게 열고, 오후에 다녀오면 그때 들를게요. 그래도 돼요?

기일. 안 될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해준은 기다리겠노라고 말하고 한참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이소 역시 끊고 싶지 않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입술만 달싹였다. 어쩐지 무거운 주제를 꺼낸 것 같아 이소는 뒤늦게 다른 화제를 돌려보려 했지만 말주변이 좋지 않아 ‘음, 음’ 하면서 말을 골랐다. 물론 그것조차도 해준은 듣기 좋았다. 다만 제 앞에 있는 꼬마 손님의 용건도 들어주어야 할 때였다. 장난이 치고 싶었다.

“이소 씨.”

- 아, 네.

“이젠 엉덩이는 안 아파요? 자는데 엄청 끙끙거리던데.”

- 아! 저 갑자기, 일이…! 죄송해요! 나, 나중에 전화할게요!

수화기 너머 뭔가 쏟는 소리가 나더니 이소는 급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냥 부드럽게 나중에 보자고 해도 될 텐데 꼭 이렇게 짓궂게 굴고 싶었다. 해준은 제 성격을 탓하며 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저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몸을 숙였다. 키가 크고 근사한 얼굴을 한 정원의 주인은 입꼬리에 미소를 매단 채 물었다.

“자, 어찌 왔어.”

저에게 떨어지는 상냥한 시선에 아이가 해사하게 웃었다.

“이거 엄마가 만드신 고구마튀김이에요. 희주 삼촌 생일이 내일이라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이가 가져온 종이봉투에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고구마가 김을 냈다. 식사가 끝나면 원래 무얼 먹지 않는 해준이었는데 봉투에서 튀김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것이 아주 달았다. 이소에게 주면 아주 잘 먹을 것 같았다.

“맛있네.”

아이는 해준이 다 먹을 때까지 쳐다볼 요량인지 그 자리에 서서 해준이 먹는 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해준은 한두 입을 더 먹다가 반절을 뚝 쪼개 아이에게 내밀자 그제서야 아이는 감사히 받아 든 채 옆에 서서 우물우물 씹었다. 쪼개 달라고 하면 될 것을 어찌 눈치를 보나 싶었지만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이 저를 어렵게 대한다는 것을 알기에 해준은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올해 몇 살이니.”

“일곱 살이요.”

해수와 동갑이다.

“네 이름이…찬.”

“은찬입니다.”

맞다, 은찬. 아이가 많아서 잊었구나.

“심심하지 않니? 집에만 있어야 해서.”

“괜찮아요. 동생들도 있고, 희주 삼촌한테 한글도 배웠어요.”

해준은 아이를 기관에 보내도 된다 허락했지만 아이 엄마는 먹고 재워 주는 것에 만족하며 아이를 끼고 살았다. 복작복작하게 지내는 해준의 집이 썩 마음에 드는지 아이 역시 무료하지 않은 듯했다. 아이는 어느새 튀김을 다 먹고 소매로 입을 썩썩 닦았다. 해준은 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입을 닦아 주었다.

“항상 소매가 아닌 손수건이나 티슈로 입을 닦아야 해. 입성이 더러우면 사람들이 얕잡아 보거든.”

아이의 입을 꼼꼼히 닦은 해준이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아이가 올라왔는데 제가 줄 것이 없었다. 박하사탕을 주자니 너무 매웠고 제가 좋아하는 차는 아이가 마시기에 너무 떫었다. 해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러면 이소가 해수를 데리고 놀러 왔을 때 안채에서 영 먹일 게 없겠는걸. 준비할 것이 꽤 많겠구나. 정작 가진 게 많았음에도 해준은 이소를 생각하면 초조해졌다. 무얼 주어야 환히 웃을까, 상념이 깊었다.

“음, 무얼 주나.”

“뭐가요?”

“모처럼 정원에 놀러 왔으니 선물을 하나 주어야지.”

해준은 고민하다 아이에게 받아 든 종이봉투를 곱게 접어 작은 화분 모양을 만들었다. 그 안에 손으로 흙을 퍼담았다. 촉촉하고 검은 흙이 흰 종이봉투에 잘 담겼다.

“꽃을 하나 줄게.”

“꽃이요?”

“원하는 녀석으로 고르렴.”

아이는 설레하면서도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데요, 도련님. 엄마가 그러는데 꽃은 예뻐도 꺾으면 안 된대요. 꽃이 아프니까요.”

“맞아. 그래서 이렇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뿌리가 다치지 않게 살살 들어다가 옮기는 거란다.”

해준은 아이의 눈길이 가닿은 작은 작약 가지를 들어 흙을 헤쳤다. 아직 어린 가지를 가진 꽃은 깊지 않게 뿌리를 내려 옮겨 담기 어렵지 않았다. 능숙하게 봉투로 옮겨 담아 남은 흙을 사뿐히 덮어 주었다.

“내 정원에 있는 꽃들은 모두 그렇게 온 녀석들이거든.”

봉투 안에 담긴 붉은 작약은 처음 돌담 위에 피어 있던 온전한 모양이었다.

“꽃이 너무 예뻐요! 고맙습니다! 엄마한테 보여 줘도 돼요?”

“응. 데리고 가서 잘 키워 주렴.”

어느새 안채 대문 근처에서 눈치를 보며 아이를 기다리던 아이 엄마가 뒤늦게 허리를 숙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 정원에 놀러 온 아이에게 해코지 하나 하지 않고 돌려보낸 해준은 손을 흔들었다. 제가 잡아먹는 것도 아닐 텐데 참 다들 어려워한다. 귀찮게 하지 않는 그 점이 마음에 들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헛헛해지는 순간이었다.

담장을 내려다보자 아이가 내려가 정원의 꽃을 식솔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늦은 밤에 해준의 안채까지 올라간 아이에게 기어코 한마디를 했고, 아이들은 튀김 한 조각 들고 올라가 선물까지 받아 내려온 아이를 추켜세웠다. 해준은 몸을 돌려 불 꺼진 제 안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조만간 별채를 닦아 놓으라고 할까. 귀한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하니.”

흐드러지게 핀 꽃이 정원 한가득이었지만 가장 원하는 꽃이 제 손에 없었다. 뒤돌아서 안채로 걸어 들어가는 해준의 도포가 봄바람에 쓸쓸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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