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해준 (11/50)

차해준

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정원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작은 와송이 늘어진 작은 연못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툭툭 잎사귀를 춤추던 빗방울이 어느덧 꽤 굵은 줄기가 되어 내리자 정원을 노니던 새들이 분주해졌다. 예고에 없던 비였다. 정원에 만발한 꽃나무 가지 사이에 숨어 지저귀던 작은 새들은 갑작스럽게 내린 비를 피해 부산하게 붉은 정자 안으로 날아들었다. 어쩐 일로 사람이 하나 보이질 않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방이 트인 정자 안에서 누군가 잠들어 있었다.

검은색 도포를 이불 삼아 대충 덮은 채 곤히 잠이 든 남자의 주변에는 먹과 벼루, 어지럽게 늘어진 화선지, 그리고 한과 부스러기가 잔뜩 있었다. 새들은 생각했다. 정말 어지간히 크고 거대한 인간이구나.

젖은 날개를 털어 내며 울어대던 새들은 마룻바닥에 드러누운 채 잠이 든 남자 주변에 모여들었다. 아무리 낯이 익은 정원의 주인이라지만 그래도 제 몸집보다 거대한 존재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용기를 낸 한 녀석이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한과 접시 근처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기둥 주변에 모여앉은 다른 녀석들은 연신 고개를 기웃거리며 선발대로 나선 녀석의 행동을 주시했다. 이것만 성공하면 오늘은 특별한 만찬을 맛보리라. 마침내 튀긴 쌀가루가 묻어 있는 한과 하나를 낚아챈 녀석이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힘차게 날갯짓을 하려던 참이었다.

“떽.”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마루를 쿵 내려치자 소리와 진동에 놀란 새들이 부리나케 흩어졌다. 어쩐지 공기가 축축하더라니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남자는 눈썹을 긁적이며 몸을 돌려 누웠다. 그리다 만 그림과 주전부리가 모두 습기에 눅눅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다기의 차는 식은 지 오래였다. 비가 얼마나 많이 세차게 내리는지 항상 정원을 가득 채우던 가야금 중주마저도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돌연 마루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남자는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미간을 구겼다. 쉬는 날에는 직장동료를 비롯해 가족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평소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것을, 앉아 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좋아하는 와식형 인간이기에 지금도 별다른 약속이 없다면 그대로 누워 있었을 것이다.

비야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고 남자는 모든 할 일을 마쳤기에 시간이 많았다. 더 볼 것도 없이 핸드폰 전원을 끄고 주머니에 넣으려고 할 때 사진 하나가 전송되었다. 곱게 차려진 다과상과 빛깔이 고운 담금주 사진이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남자가 사진을 본 것을 상대방이 확인했는지 금세 전화가 울렸다.

- 꼭 이렇게 눈으로 봐야 믿지.

“영감님. 이건 진짜 반칙이에요.”

- 싫음 말어. 해준이 자네 말고도 여기 올 사람 널렸어.

“또 마음에 없는 소리 하시긴. 제가 자리에 없는 게 아쉬워서잖아요.”

- 그러니까 어서 와. 옥션에 화훼도도 한 점 들어와서 그 이야기나 할까 하고.

“갈게요. 다 드시지 마세요.”

전화를 끊은 해준이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비 올 때 나가는 거 질색인데 어쩔 수 없네.’

고개를 들자 정원 대문 너머 정장을 차려입은 나이 든 집사가 우산을 들고 기웃대고 있었다. 제 주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저택에서 조심해야 할 가장 큰 규칙이라는 것을 아는지 해준이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손을 들고 들어와도 된다고 미소를 지어 주자 늙은 집사는 장우산을 들고 정원으로 걸어 들어왔다.

해준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켠 뒤 대충 신발을 꿰어 신었다. 어깨를 덮고 있던 도포는 마루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익숙하게 겉옷을 들어 팔에 걸친 뒤 우산을 건네는 것은 집사 몫이었다. 해준은 우산을 받아 들고 안채로 걸어 들어가며 정원 가득 핀 수선화와 칼랑코에의 젖은 꽃잎을 어루만졌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이 툭툭 꽃잎을 건드는 것만으로도 진한 향내가 묻어났다. 정원의 쪽문을 밀어 젖히자 저택의 안채로 통하는 다리가 나타났다. 비에 젖은 잔디가 신발에 채일 때마다 풀 내음이 났다.

“다들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식구들은 일찍이 다 먹었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까요?”

“괜찮아요. 상월동 영감이 술이나 한잔하자 해서 거기 좀 다녀오려고.”

말을 마친 해준이 안마당에 걸음 하자 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마당을 정리하는 중년의 남자들, 커다란 빨래통을 들고 문지방을 넘던 여자들, 음식을 준비하는 할멈들과 창문과 바닥을 분주히 닦는 소년, 소녀들이 해준의 등장에 너 나 할 것 없이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까지 모두 대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도련님, 오셨어요!”

“다들 안녕.”

해준이 눈을 접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마당을 유유히 지나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기 전 해준은 창문을 닦던 소년을 불렀다. 열다섯쯤 먹은 소년이 얼른 걸레를 놓고 바지춤에 손을 닦으며 해준의 앞에 섰다. 해준이 투명한 상자에 담긴 나무 책갈피를 하나 건넸다. 검은색 노리개가 달린 책갈피 중앙에 은빛 자개 거북이가 작게 붙어 있었다.

“희주야, 전에 이거 갖고 싶다 했었지. 내 것과 같은 것은 없길래 거북 모양으로 하나 했는데, 어떠니?”

“아니, 저는 그냥 종이 끼워 쓰면 되는데… 너무 예뻐요.”

“학교 열심히 다닌 상이야. 안 빠지고 계속 다닐 거지?”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해준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집사에게 눈짓을 했다. 집사가 헛기침을 하자 소년은 귓불이 발그레해져 얼른 돌아섰다. 자리로 돌아가는 발소리에 들뜬 마음이 전해졌다.

“아직 어린 애한테 너무 비싼 걸 주시는 거 아닙니까.”

“또 잔소리. 주 기사에게 차 준비하라고 해 줘요. 곧 나갈 테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해준은 집사의 얼굴을 보며 코를 찡긋하곤 문을 닫았다. 집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선물을 받아 간 희주가 할멈들에게 노리개가 달린 책갈피를 흔들며 자랑하고 있었다. 상기된 표정의 희주의 목덜미 뒤로 작은 흉터가 언뜻언뜻 비쳤다. 소년원에서 막 나왔을 때 생긴 흉터였다.

제 젊은 주인의 너그러움으로 이 많은 식구들이 이 집에서 먹고 자고 한다. 집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벌써 인연을 같이한 지 10년이 넘었다. 모두가 삶의 의지를 놓기 직전 해준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고 해준의 손에 다시 한번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아직 마흔도 안 된 해준이 집안일로 부리는 사람만 서른 명이 넘었다.

남편이 남긴 카드빚에 허덕이는 여자, 자살 직전에 우연히 구했던 소년,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던 남자 등 다들 사연이 많았다. 적게는 6개월, 길게는 저처럼 10년 넘게 곁을 자리한 사람들이 벌써 백 명 가까이 되었다. 개중 대부분은 나가서 살기는 했지만 해준이 부르면 재깍 달려왔다.

지금처럼 같은 지붕 아래서 밥을 먹고 자는 것은 서른 명 남짓이었다. 계급사회도 아니었고 신분이 나뉜 것도 아니었지만 식솔들은 항상 도련님이라 부르며 젊은 해준을 깍듯이 대했다. 해준의 한마디면 죽는시늉도 했다. 그 유난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이 본 저택의 집사 문준경이었다.

아내와 고등학생이던 딸이 교통사고로 떠나고 회사에 나오지 않았을 때 당시 차 이사의 아들이었던 고등학생 해준이 준경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때는 하도 같잖아 어린 네 놈이 무엇을 아느냐고 훈계를 했지만 해준은 준경의 손에 아무 말 없이 삼천만 원을 쥐여 주고 돌아섰다. 그 돈으로 가족들의 장례를 치르고 거처도 옮겼다. 이틀에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했고 나이 든 저를 데리고 식사도 같이했다. 그 뒤 10년 가까이 곁에서 해준이 사람들을 돕고 거두는 일을 함께했다.

‘그냥, 제 취향이에요.’

해준의 집에 종종 들르는 나이 든 친구들이 질린 표정으로 과하게 큰 집과 식솔들을 바라볼 때마다 해준은 그저 웃으며 답했다. 꼭 조선 시대 왕자를 대하는 것마냥 식솔들은 조용히 움직였고 말없이 시중을 들다 사라졌다. 그리고 해준은 그것이 썩 기꺼운 눈치였다.

해준은 종종 평소에 자신이 너무 위선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저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일 뿐, 준경은 해준이 나름대로 선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흠이라고는 일반인들은 생각하지 못할 만큼 과하게 사치를 부리는 것과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허무하게 나누어 주는 것.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대체로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고 푸근했다. 독특한 사내였다.

준경은 해준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문에 서 있을 때 주 기사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조금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 해준이 장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즐겨 입는 크림색 셔츠를 입은 채 머리를 올린 해준의 모습에 기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잘 다듬어진 콧대와 결이 좋은 눈썹, 풍성한 속눈썹 아래 자리한 깊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사람들은 종종 넋을 잃고 할 말을 잊곤 했다. 그럴 때마다 준경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상대의 주위를 일깨웠다.

“갑자기 엔진에서 연기가 나서, 오늘은 도련님 차를 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런. 어제 검사 맡긴다고 안 했던가?”

해준이 곤란한 표정으로 준경을 돌아보았다.

“그렇죠. 오늘 외출하실 일이 없다고 하셔서 어제 맡겼습니다.”

준경이 덧붙이자 기사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그걸 본 해준은 기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아요. 마침 들러야 할 곳이 있는데, 걸어가도 될 것 같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기사는 상냥한 제 주인의 말에 무척 감사해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기사가 떠나자 해준은 시계를 한 번 보고 쓰게 웃었다.

“내 술이 남아 있질 않겠는데.”

비 올 때 걷는 것은 계획에 없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이 흐렸다. 별일이 없기를 바라며 해준은 우산을 챙겨 들었다.

* * *

해준의 저택은 크기나 위용만큼 자리한 동네 자체가 특이했다. 대부분 낮은 고택과 낡은 상가로 이루어진 동네는 사람들이 빠져나가 빈집이 많았고 군데군데 작은 가게들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밤 8시가 되면 문을 닫아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재개발이 들어가니마니 말이 많았던 동네에 어느 날 나타난 해준이 빈집들을 정리하고 커다란 담을 세웠을 때 사람들은 그 자리에 국립의료원이니 학교가 들어오니 기대감에 말을 얹었다. 완공 후에는 의료원도 학교도 아닌 개인 사가라는 말에 ‘어떤 이기적인 새끼가 이 큰 부지에 집을 지어 놔서 재개발도 못 하게 훼방을 놓느냐’며 욕도 엄청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동네가 날이 갈수록 흉물스럽게 변해 가자 짐을 꾸려 떠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준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땅값이 쌌고 직장이 가까웠기 때문에 결정한 것일 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거나 불법으로 터전을 밀어 버리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귀가 간지럽네.’

해준은 골목을 걸어 내려오며 마주친 동네 사람과 눈인사를 했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담배를 태우던 동네 주민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무시했다. 아직도 오해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동네는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사람들의 느릿한 움직임, 밥그릇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값싼 라면 냄새, 심지어 부서지는 햇볕의 눈 부심조차도 꼭 제 어릴 적 보던 풍경과 같았다. 한참 걷다가 학교로 넘어가는 마지막 골목에 끝에는 해준이 유독 좋아하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주인장이 외국에서 커피를 하다가 돌아와서 차린 가게였는데 제법 맛이 좋았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불이 꺼져 있더니 기어이 간판이 내려가고 말았다.

혹시나 가게 문을 열었을까 기대하며 내려왔던 해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직업도 직업이거니와 해준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에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하염없이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스케치하느라 4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던 적도 있었다. 크고 짙은 눈동자는 사물의 움직임을 빠르고 면밀하게 쫓아 머릿속에 꼼꼼히 새겨 넣었다. 한 번 본 것은 여간해서는 잊지 않았다.

어느새 작은 트럭 두 대가 와 짐을 옮기고 있었다. 같은 날 동시에 이사를 하는지 한 대는 가게에 물건을 대고 있었고 다른 한 대는 같은 건물 3층으로 낡은 가전을 옮기고 있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허리는 꼿꼿한 노인이 걸어 나와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전달사항을 지시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인가. 문득 해준은 이 동네가 얼마나 밤에 적막한지를 떠올리며 나이 든 여자 혼자 살아갈 수 있는가를 되짚었다.

<두솥 도시락>이라고 적힌 촌스러운 간판을 보고 나서야 해준은 자리를 떴다. 화방이라도 들어오나 기대했건만 저와 인연이 없는 곳이었다.

해준은 나른한 기운에 어깨를 폈다. 해가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때 이른 춘곤증을 깊게 앓고 있는지 시시때때로 졸음이 왔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학교 안에 있는 제 방에서도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잤다. 집에 돌아와서도 정자에서 난을 치다가도 잠이 들고, 식사를 하다가도 절반 이상 남기고 자리로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제 정신을 깨울 만한 흥미로운 취미가 생기면 좋을 텐데 여간해서는 마음에 차는 것이 없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들이자 연기가 점막을 간질였다. 영 맛이 썼다. 해준답지 않게 단것이 당겼다.

* * *

기껏 도착한 고택에 영감들이 보이지 않자 해준은 전화기를 들었다. 언덕을 오르는 일이 힘든 것은 아니지만 말없이 약속 장소가 변경되어 제 시간을 버리는 일은 달갑지 않았다. 대낮부터 얼마나 처마셨는지 상월동 영감 혀가 잔뜩 꼬부라졌다.

- 너 안 와서 박 화백 집으로 왔다.

“자리를 옮긴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도착했간?

“네. 거의 다 왔어요.”

- 운동 삼아 좀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돼. 어차피 누워 있었지? 그 이상한 정원에서.

노친네들은 입만 열면 잔소리를 한다. 해준이 귓가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린 채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길 건너편에서 째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젊은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여자의 허리춤도 안 오는 작은 어린아이는 바짝 긴장했는지 몸이 굳은 채 얕게 경련했다. 아이의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게 길 건너편에서도 다 보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년의 남성은 재빠르게 119에 신고했고 나이 든 여자들은 아이 엄마를 진정시키려 했다. 아이고 어떡해, 하는 소리와 아이 엄마의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영감이 무어라 더 떠들었지만 해준은 통화를 이어 갈 수 없었다.

그저 구급차가 빨리 오기를 바라며 도로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때 돌연 낡은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해준의 앞에 섰다. 덕분에 빗물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이 왈칵 튀어 해준의 바지를 흠뻑 적셨다.

“아, 씨발…. 진짜.”

물비린내가 코끝을 찌르자 해준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이봐요. 저기요!”

헬멧을 쓴 남자는 해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인파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 이내 오토바이를 버려 두고 중앙선을 넘어 빠르게 걸어갔다.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해준 역시 홀린 듯 길을 건너 남자를 쫓았다.

남자가 다가가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남자는 빠르게 꿇어앉아 ‘진정하세요.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다. 헬멧을 쓰고 있어 조금 뭉개지기는 했지만 확실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해준은 약속장소에 가야 할 시간이 지난 것도 잊은 채 남자의 행동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남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더듬다가 작은 휴짓조각을 발견했다. 적어도 해준의 눈에는 그것이 휴짓조각 따위로 보였다. 남자가 헬멧의 쉴드를 열고 조금 더 확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가 뭐 먹었어요. 사탕?”

아이 엄마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네, 네. 맞아요. 사탕. 아이가 분명 내릴 때 먹고 있었는데!”

남자는 아이 엄마의 말과 동시에 장갑을 벗고 재빠르게 아이의 입을 벌렸다. 어디서 났는지 순식간에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고 아이의 혀에 손가락을 넣었다. 고개를 숙여 아이의 입을 확인하는 모습은 마치 수십 번이고 같은 일을 처리한 적이 있는 능숙한 손길이었다.

“아이 어머니, 팔 잡으세요.”

아이 엄마는 마치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의사인지 중국집 배달원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팔을 잡았다. 저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남자는 늘어진 아이의 몸을 뒤집어 품에 기대곤 등을 문질렀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혀를 누른 채 숨이 넘어가는 아이를 달랬다.

“자, 애기야. 하나 둘 셋 하면 토하는 거야. 아저씨 따라 할 수 있지?”

남자가 하나, 둘 소리에 맞춰 아이의 등을 세게 올려 치자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몸이 새우처럼 말렸다. 커다란 손이 아이의 등을 강하고 묵직하게 때렸다. 아이의 혀를 누르는 손에 침이 흥건했고 콧물이 줄줄 샜다. 아이가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구급대원들은 문제가 막 해결되려는 직전이라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남자와 아이 옆에 서 있었다.

“그렇지, 거의 다 됐어. 한 번만 더.”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였다.

“셋.”

남자가 한 번 등을 쓸어올리듯 쳐올리자 우웩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남자의 손에 침이 섞인 구토를 했다. 녹다 만 사탕의 끝에 하얀 종이 조각이 돌돌 말려 있었다. 종이 조각은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것과 같았다. 아이는 몇 차례 더 기침을 하고 억억 울더니 금세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기침과 함께 침에 피가 조금 튀자 아이 엄마는 다시 한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꼭 답을 줄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사탕 막대가 종이로 된 거라 심각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놀랐으니 이비인후과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토사물이 묻었던 손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아이 엄마는 연신 고맙다고 남자의 손을 잡고 허리를 숙이며 구급차에 올랐다. 구급대원은 아이를 옮기고 난 후 남자를 불러세웠다. 구조와 처치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있는지 남자에게 상황을 듣는 듯했다. 남자는 무어라 설명하는 듯싶더니 답답한지 고개를 숙이고 헬멧을 벗었다. 일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헬멧을 벗은 남자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어졌다. 흑갈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단정한 눈썹과 얇은 쌍꺼풀, 그 위를 촘촘하게 채운 속눈썹이 시선을 끌었다. 뚜렷한 눈동자 사이 자리 잡은 단아한 버선 같은 코끝, 깨끗하고 흰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은 도저히 저 낡고 오래된 헬멧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미형이었다. 남자가 말을 할 때마다 축이는 입술은 꼭 비에 젖은 동백잎처럼 청초하면서 우아하게 움직였다. 조용하고 얌전한 미성의 목소리는 듣기에 거부감이 없었고 침착하고 차분했다. 해준 앞에 오토바이를 거칠게 던져 버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방금 전 다급한 상황을 해결한 사람답게 발갛게 물든 볼과 땀에 젖은 눈가는 지저분하다기보다는 처연한 느낌마저 주었다.

해준은 지금껏 보아 왔던 동서양의 수많은 미인도 중에서도 단연 저렇게 뛰어난 미인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화폭 밖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른한 정신이 밝게 깨었다. 당장이라도 이 사람을 잡고 말을 걸고 싶었다. 그 고요한 시선이 제 눈에 닿았으면 했다.

“선생님, 의사시면 연락처 하나만 주고 가시죠. 처치 관련해서 여쭤볼 것이 더 있어서….”

구급대원이 남자의 팔을 붙잡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남자는 의문스러운 눈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의사 아닙니다. 그냥 배달하던 중이었습니다.”

남자는 구급대원과 이야기가 끝났는지 몸을 돌려 해준 쪽으로 걸어왔다. 해준에 몸에 튀긴 흙탕물에 대해 사과를 하려나 싶었는데 남자는 해준을 지나쳐 다시 중앙선을 넘어가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남자가 시동을 걸자 뒤늦게 정신이 든 해준이 남자를 쫓았지만 뭐라 말 걸 새도 없이 남자는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딱 제 취향의 얼굴, 꼭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신데렐라도 아닌데 단서도 없이 사라진 남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듯했다. 배달원. 이 동네 가게를 다 뒤지면 찾을 수 있을까. 어려 보였는데, 학생일까. 문득 해준의 발치에 누군가 뭉텅이로 흘린 전단지가 채였다. 빗물 웅덩이에 아까 없던 전단지가 둥둥 떠 있었다. 해준은 그나마 덜 젖은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골목, 낯설지 않은 전화번호, 멀지 않은 기억 속 가게 이름.

<두솥 도시락>

“도시락?”

해준은 남자가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쩌면 꽤 빠른 시일 내에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이렇게 보내지 말아야지. 해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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