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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다. 이소가 눈을 떴을 때 해준은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사람이 더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자는 모습이 어쩐지 눈 속에 머리를 파묻은 꿩 같았다. 제 가슴에 올려 둔 단단하고 두꺼운 팔을 살며시 들어 베개 위에 올려 두자 해준은 뒤척이며 자세를 바꿨다.
‘귀여워. 주무실 땐 되게 늘어지는 타입이구나.’
이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어제는 없던 붉은 자국이 팔과 다리, 가슴까지 온통 범벅이었다. 섹스를 하다가 만지면 이렇게 자국이 남는 걸까? 아니면 제 살성이 원래 이렇게 약했나? 못 보던 두꺼운 이불이 덮여 있었다. 이것 덕분에 퍽 따듯하게 잠들었다. 이소는 몸을 일으켰다. 뼈마디가 다 아팠다.
어제 제가 입었던 파자마는 땀에 푹 절어 방문 앞 바구니에 있었다. 젖어서 말려 두었다는 제 옷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저 입으라는 듯 개켜 놓은 옷들이 보여 책상까지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베이지색 니트와 면바지, 그리고 그 위에 도톰한 개나리색 도포가 있었다. 이 한복은 왜 여기 있는 걸까? 이소는 속옷과 양말을 천천히 꿰어 입고 나머지 옷들도 모두 입었다. 그대로 밖을 나갔던 이소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금세 돌아와 얼른 도포를 낚아채 나갔다. 아직 감기 기운이 다 낫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루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니 허리와 둔부가 쿡쿡 쑤셨다. 어제 정말 목이 쉬어라 울고 빌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좋아서 온몸을 뒤틀었던 제가 생각나 괜히 민망해졌다.
“어우…. 진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허리를 두드리곤 신발을 찾았다. 비에 젖은 제 신발 대신 가지런하게 놓인 새 단화조차도 흰색이었다. 옆에 놓인 해준의 구두와 다르게 사이즈가 참 앙증맞았다. 이게 들어갈까? 싶었는데 마치 맞춘 듯 꼭 맞았다.
“꼭 내 것 같네.”
고작 신발이 잘 맞았다고 기분이 좋아졌다. 신발을 꿰어 신고 앞을 내다본 이소는 할 말을 잃었다. 어젯밤 내부에서 봤을 때도 믿기지가 않는 인테리어였는데 마루에 앉아 내다본 한옥의 외관은 더욱 감탄을 자아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과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한 정원 곳곳을 채운 와송과 사철나무들이 잘 정돈된 정원이 있었다. 제가 살고 있는 빌라의 면적과 비슷해 보이는 듯한 커다란 정원 구석에는 작은 못도 보였고 인공적으로 만든 다리도 있었다. 저 멀리 작은 정자도 보였다.
신발을 질질 끌고 징검돌을 따라 걷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자 낮은 담벼락 아래로 이어진 길에 비슷한 디자인의 한옥이 몇 채 더 보였다. 그리고 장난감 병정마냥 비슷한 옷들을 입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질을 하는 사람, 커다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떠들며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 장독을 열고 먹을 것을 담는 사람들까지. 아, 해수 또래의 아이들도 있었다. 이소는 아이들을 보자 괜히 웃음이 나 고개를 빼고 어른들 사이를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기침하셨네요.”
갑자기 들린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다리 밑에 서 있었다. 이소가 눈을 깜박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신사 역시 고개를 갸웃하며 이소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참 잘 차려입었고 수염조차도 잘 다듬어 꼭 영화 배우 같았다.
“저, 저요?”
“예.”
이소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지만 이 정원에는 남자와 저 둘뿐이었다.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젯밤 제가 이 집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을까 봐 마음이 졸아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조반은 어떤 것으로 올릴까요?”
“조반….”
“전복죽과 미역국 정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갖다 드릴까요?”
이소는 자신이 지금 호텔에 와 있는 건지 해준의 집에 와 있는 건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 저는 정말 괜찮….”
이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소는 제 등에 닿는 단단한 가슴과 익숙한 향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 파자마를 입은 해준이 이소의 뺨에 입을 맞추고 나른하게 웃었다.
“이소 씨는 아침잠이 별로 없구나.”
해준은 중얼거린 후 중년의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중년 남자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소만 가운데서 얼굴이 벌게진 채 말을 더듬었다.
“어, 언제 깨셨어요….”
“품에 없으니까 허전해서 금세 깼어요. 집사님, 혹시 백숙 준비할 수 있어요?”
“예. 있습니다.”
뜬금없이 백숙을 물어보는 해준이나 그걸 또 있다고 대답하는 남자나. 이소는 번갈아 돌아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늠하는 중이었다.
“그럼 두 마리 준비해서 내 방 앞으로 갖다주세요. 우리 병아리 먹이게.”
해준은 이소의 어깨를 가볍게 쥔 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병아리 키우세요?”
“응. 여기 있지. 노란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 내 병아리.”
해준은 이소의 도포 소매를 들어 보인 후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선물한 스웨터도 노란색이었다. 이소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해준을 밀어냈지만 해준은 여전히 팔을 어깨에 감은 채 얼굴을 부볐다. 앞에 일하는 사람이 있든 말든 개의치 않는 애정 표현이었다. 정작 남자는 이상한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수첩을 들어 몇 가지 전달사항만 줄줄 읊었다. 이소는 남자와 해준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회장님께서 오늘 중 통화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진 회의에 좀 나오시라고.”
“성가시게 하네. 학교 일로 바쁘다고 했는데.”
“학교 일은 가볍다고 여기시니까요.”
“아무튼 알겠어요. 아버지께는 내가 두 시 이후에 전화 드릴게. 나머지는 우리 둘이 있을 때 이야기합시다.”
남자는 해준이 웃으며 손짓하자 고개를 주억거리곤 빠르게 몸을 돌려 내려가 버렸다. 언덕 아래를 내려가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던 이소는 다시 한번 저를 끌어안는 해준에게 폭 싸인 채 안겼다.
“집사님이 근사하게 생기긴 했지.”
“무슨 소리예요…. 어르신 내려가시는 거 그냥 본 거예요….”
“질투 나니까 오래 보지 마요.”
별걸 다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이소는 고개를 저으며 정원을 마저 구경하기로 했다. 사실 해준이 너무 달라붙어 아침부터 또 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얌전히 손만 잡고 집을 구경시켜 줬다. 중간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자 해준은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고 앉아 이소를 업었다. 괜찮다고 걸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 정원에는 집사와 해준 말고는 들어올 사람이 없다고 하길래 주위를 둘러보다 얼른 업혔다. 해준의 등에 업힌 채 정원 구석구석과 언덕 너머를 구경했다.
해준이 기거하는 안채, 식솔들이 머무는 행랑채와 손님들이 쉬어갈 수 있는 객실, 다과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담채, 부모님이나 가족이 오면 쉬어 가는 사랑채, 그 외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많은 용도의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사람도 집도 엄청 많아요….”
“내가 욕심이 좀 많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해준의 얼굴에는 묘한 피로감이 어렸다. 젊은 나이에 저 사람들을 모두 고용해서 쓰는 거겠지. 아까 들으니 무슨 이사장이 어머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굉장히 부자인가 보다. 이소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도 있었어요.”
“응. 아마…. 일곱 살, 아홉 살…. 네 살도 있었고. 올해 태어날 아기도 있어요.”
“너무 예쁘겠다.”
“착한 애들이죠.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자기 할 일 잘하고.”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담장과 언덕을 넘어 이소의 귓가에서 넘실거렸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과 평화로운 사람들, 걱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듯해지면서도 문득 쓸쓸함이 밀려왔다. 사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교수님. 지금 점심 지났을까요?”
“음, 아직. 우리 느지막이 일어났고 집사님이 온 시간이면 이제 열한 시쯤. 왜요?”
“해수…. 걱정할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식사하고.”
해준은 업힌 이소의 손을 토닥이다 볼을 부볐다. 개나리색 도포의 옷감이 구겨지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해준이 정숙에게 전화를 해 줬다고 했지만 비 오는 날 미친 사람처럼 고장 난 우산으로 뛰어나가 버린 모습을 보여 준 것도 마음에 걸렸다. 뿐만 아니라 해수와 오랜 시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보니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밥만 먹고 들어가도 되는 건데 고작 그 한 시간을 더 있는 게 유독 마음에 쓰였다.
“내려갈래요.”
해준은 이소를 돌담 근처에 앉혀 주었다. 눈높이가 딱 맞았다. 이소는 도포 소매 위로 나온 손가락을 꼼질댔다.
“저…. 오늘은 그냥 돌아갈게요. 어제 점심부터 해수 못 봤더니, 아빠 많이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요.”
“나도 이소 씨랑 있고 싶은데.”
해준이 뺨을 부비며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비누 향기가 났다. 이소는 고개를 틀었다.
“그치만 가야 해요. 가게 오픈도 해야 하고….”
“정숙 여사님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해준이 이소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몸을 부볐다. 이소는 자꾸만 간지럽히는 해준의 장난이 기꺼웠지만 신데렐라마냥 돌아갈 시간과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마냥 여기서 죽치고 앉아 저만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할 수는 없었다.
“…금방 다시 올게요.”
“응, 진짜?”
시무룩해 있던 해준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해수랑…. 같이 와도 돼요?”
“해수랑?”
“네. 그게 사실…. 제가 매일 일을 하다 보니 해수가 친구들하고 뛰어노는 걸 아직 한 번도 못 봤어요.”
이소가 머뭇머뭇 입술을 물었다. 정말이었다. 자꾸 이사를 다니고 어린이집을 옮겨 다니는 통에 꾸준하게 친구가 없었다. 또 제가 남자다 보니 동네 엄마들하고 친해질 기회가 없어 해수는 함께 다닐 단짝이 없었다. 아까 또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걸 보니 괜히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가 마음에 쓰였다. 해준은 가볍게 이소의 볼을 쥐었다.
“또 해수 생각만 하고.”
“아이에여….”
“이소 씨가 여기 또 오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해 줄게요. 이 집에 또 오고 싶어요?”
해준은 다람쥐 볼을 늘어뜨리는 것마냥 양손으로 살살 흔들었다. 그걸 말이라고.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이어요….”
“응?”
해준이 늘어뜨린 볼을 살짝 놓아주자 이소는 볼에 바람을 넣었다 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고 싶어요. 여기 또 올래요.”
“자고 가기도 하고?”
“네.”
“이소 씨는 나랑 놀 거죠?”
“네… 으응? 해수는….”
“해수는 아마 또래 있으면 늙은 아빠랑 놀려고 하지도 않을걸. 친구들이랑 놀기 바쁘지.”
아, 그런가. 이소는 입술을 비죽였다.
“언제든 와요. 아무 때나. 이소 씨는 그래도 돼.”
해준은 아쉬웠지만 이소의 볼을 놔주고 살짝 문질렀다. 물러 터진 듯싶었지만 때때로 굉장히 단호했기에 해준은 이소가 두어 번 고집을 부리면 그의 말을 따라 줬다. 두 사람은 방에서 가볍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태워 주겠다고 했지만 이소는 거절했다. 조금 걷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기는 했지만 너무 빨리 도착하는 것도 사양이었다. 이 여운과 자유를 아주 조금만 더 즐기고 싶었다.
정문을 통해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러면 너무 돌아가게 되니 빠른 길을 알려 주겠다며 해준이 이소를 잡아끌었다. 해준의 손을 잡고 내려간 정원의 끝에는 작은 문이 나 있었다. 마당 중앙에서 보았던 커다랗고 웅장한 대문과는 달리 작고 소박한 문은 성인 남자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문밖으로는 돌을 쌓아 만든 낮은 계단이 있었고 돌담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시내가 나올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대낮임에도 대나무가 우거진 숲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 해준이 이소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정말 혼자 갈 거예요? 내가 데려다줘도 되는데.”
“괜찮아요. 천천히 구경하면서 가고 싶어요.”
이소의 말에 해준은 못 이기겠다며 웃어넘겼다. 이소가 문을 열고 계단에 발을 디뎠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정원의 꽃향기와 다르게 대나무가 가득 심어진 숲은 청량감을 주었다. 낮은 돌담 하나 차이인데 계절이 순식간에 바뀐 느낌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서 시내에서 버스를 타면 되려나. 신비로운 곳에 사는구나, 교수님은. 이소는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해준을 올려다보았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너무 빨리 도착해서 놀라지 말고.”
해준이 씩 웃었다.
“지름길이거든요.”
“어디로 통하는데요?”
이소의 질문에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비밀이에요. 웃어 버리고는 어깨를 두드렸다.
“다녀와요.”
마치 자신의 집이 여기라는 듯 다녀오라 말하는 해준의 인사에 이소는 그만 아하하 웃어 버렸다. 그리고 저 역시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받아쳤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소는 천천히 내려가는 계단에서 몇 번이나 몸을 돌려 해준을 바라보았다. 해준은 그 자리에 서서 이소가 돌아볼 때마다 또 한 번 손을 흔들어 주고, 또 흔들어 주며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대나무 사이에 가려 해준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이소는 숨을 들이켰다.
꿈 같은 밤이었다. 말도 안 되게 좋았고 설렜던 밤. 뜻밖의 고백과 키스, 그리고 신기루 같던 집. 이소는 제 키보다 조금 큰 대나무 하나를 쓱쓱 쓸어 보다 문득 펜을 하나 꺼내 단정한 글씨로 작게 끄적였다.
[또 올게요.]
언젠가 해준과 함께 걷게 되면 보여 줘야지, 생각했다. 저 멀리 빛이 쏟아지는 입구가 보였다. 저기까지 걸으면 곧 골목이 나온다. 몇 계단을 남기고 다시 한번 돌아보며 이소는 고개를 숙였다. 안녕, 또 봐요.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려선 이소는 다시 한번 눈을 의심했다.
불과 언덕 아래에 눈에 매우 익은 빌라와 도시락 가게가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몸을 돌려 담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일 년 전 부동산 아저씨가 이야기한 이삼 천 평 남짓의 거대 저택의 담장이 언덕을 따라 주욱 이어져 있었다. 제가 삼십 분 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바로 그 담장이었다.
“여기가… 교수님 집이었어?”
할 말을 잃은 이소는 천천히 웃음을 뱉었다. 아하하, 아하하하…. 뭐야, 너무 웃기다. 알맞은 타이밍에 해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잘 도착했어요?]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 저희집 잘 보여요.]
해준에게 톡톡 문자를 적어 보내자 저번에 보았던 찹쌀떡이 또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몸을 배배 꼬는 이모티콘이 왔다. 아, 오늘은 꼭 사야지. 웃으며 핸드폰 액정을 문질렀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서 반가운 얼굴이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무척 반가운 두 사람이었다. 이소는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낸 후 주머니에 전화를 넣고 뛰어 내려갔다. 답지 않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해준은 여태 그 자리에 앉아 이소가 사라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인 기다리는 개마냥 시무룩한 꼴이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띠링, 메시지가 도착했다. 잘 도착했다고 담백하게 말했지만 아마 엄청 놀랐을 것이다. 금세 윤이소가 보고 싶었다. 딸이든 할머니든 누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와도 좋으니까 그냥 윤이소가 제 옆에 앉아 있었으면 했다. 보고 싶다고 또 잔뜩 보냈지만 이소는 답장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돌아갔으려나,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메시지가 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해요. 교수님.]
해준은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머리칼을 헤집었다. 윤이소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리는 것 같았다. 좋아해요, 교수님. 내가 많이 좋아해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해준은 머릿속을 흔드는 이소의 순수한 고백을 온몸으로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