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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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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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의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윤이소가 찾아올 거라고 기대도 한 적 없었고 예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얼마 전 사람을 붙였었다. 감시보다는 보호 목적으로. 해코지하는 사람만 없게끔 주변을 맴돌면서 적당히 경계하고 몸을 사리며 살 수 있도록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기도 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윤이소는 가끔씩 정신을 빼놓고 아무 데서나 잠들기도 했고, 아이에게 신경을 쓰느라 제 살이 쓸리고 까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녔다. 쉴 새 없이 일을 했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대체로 제 귀로 들어오는 일정과 시간은 거짓 없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래서 믿었다. 조금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고 머뭇대기는 하지만 저에게 말을 하지 않을 뿐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오늘, 오토바이를 타고 반대편 동네로 넘어가더니 낡은 대부업체 사무실로 들어갔다고 했다. 혹여나 또 맞고 오지는 않을까 싶어 사무실 앞에서 대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스럽게도 윤이소는 1시간도 안 되어 멀쩡한 얼굴과 사지로 걸어 나왔다. 다만 기분이 좋지 않은지 오토바이를 돌려 집 반대 방향으로 가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처량한 것을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듯 둑방에 쪼그려 앉은 채 망부석마냥 잠이 들었다. 둑방에서의 사진을 전송받은 해준은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소가 전화를 켰을 때 볼 수 있을 만큼의 메시지만 보내 놓고 차에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쪼그려 앉아 있는 몸을 조수석에 태우고 돌아오고 싶었지만 이소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얌전히 참고 기다렸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저찌 이소는 가게로 잘 돌아왔다. 길 잃은 새끼 개마냥 비도 맞고 돌아다니고 오토바이도 어딘가에 방치한 채였지만 오는 내내 딴 길로 새지 않고 제가 돌아올 곳으로 착실하게 발걸음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적을 전달받았을 때는 버스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갔다고 했다. 해준 역시 그 말을 듣고 이만 들어가 봐도 좋다고 하고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갑자기 터진 일을 수습하고 곧 가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따뜻한 죽 한 그릇을 사 가고, 해수나 정숙이 좋아할 피자 따위를 주문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또 한 걸음 다가가 지쳐 있는 그의 어깨를 안아 주면 아무런 의심 없이 다가와 안길 것이었다.
그런데 윤이소가 찾아왔다.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주렁주렁 열에 감긴 채 가쁜 숨을 내쉬며 제 앞에 서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달려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쉬지도 않고 뛰어왔는지 가슴을 들썩이던 윤이소는 제가 문을 열자 고개를 끌어 올리고 억지로 숨을 골랐다. 누가 강가에 떠밀기라도 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젖어 있었다.
달라붙은 티셔츠에 흰 피부가 반투명하게 비쳤다. 가슴 언저리에 살짝 솟아 나온 유두가 옷 주름에 걸려 부드러운 굴곡을 만들었다.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 아래 쇄골에 고인 빗물이 찰랑거렸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볼에 붙어 있는 모습은 지저분하긴커녕 맑고 순진하게 보였다. 입술이 핏빛처럼 붉더라니 열이 나고 있었다. 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홍채 주변이 붉게 번져 있는 모습이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 일 이야기하듯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으면서도 이런 꼴을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다는 생각을 하니 배 속이 빠듯하게 당겨 왔다. 열도 끓고 있고, 옷도 모두 젖어 차 키를 챙겨 바로 집에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정말로 그랬는데.
“저…. 지금 너무 많이 젖었거든요.”
그 말에 해준은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뜻이 아닌데 붉게 짓무른 눈두덩을 한 채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순진한 사람의 손을 덥썩 잡아끌었다. 한 팔에 감긴 가는 허리에도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이건 당신이 나쁜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끌려온 남자는 자연스럽게 제 목에 팔을 감았다. 비릿한 비 냄새와 처음 맡아 보는 담배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추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지금은 오로지 제게서 떨어지면 죽을 듯이 매달리는 이 사람에게 정신없이 파고드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열이 부지불식간에 옮아든듯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윤이소를 보면 자꾸만 그렇게 됐다. 해준은 이 가여운 미인에게 엉키고 있었다.
* * *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허리와 손목을 움켜쥔 채 방으로 이소를 끌어당긴 해준이 안경을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값비싸 보이는 안경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자 이소의 시선이 저절로 떨어졌다. 그걸 본 해준은 이소의 턱을 잡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볼을 부볐다. 순식간에 그깟 안경 걱정 따위는 저 멀리 날려 버리는 키스였다. 열로 바싹 메마른 입술에 차가운 살갗이 닿자 이소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해준이 보고 싶어 무작정 찾아왔지만 이런 끈적한 스킨십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체온으로 전해지는 위로는 경직되어 있던 몸과 꽉 막힌 정신을 살살 구슬리며 풀어냈다. 하루 종일 있었던 더러운 기억들이 다 씻겨져 내려가고 있었다.
“흣, 교수님, 잠시만요….”
이소는 무겁게 눈을 깜빡였다.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이마에 닿아 눈꺼풀과 콧등을 간지럽혔다. 밀어내려고 할수록 허리를 끌어안은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마시고 있었는지 제 입속을 구석구석 핥는 뜨끈한 혀에서 씁쓸한 커피 맛이 났다. 부드럽게 고개를 꺾어 가며 입술을 맛보는 해준의 코가 이소의 볼에 뭉근하게 뭉개졌다. 한 치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깊게 파고드는 키스에 숨이 막혔지만 이소는 동시에 더 폭 안기려고 발부리를 들었다. 그게 퍽 기꺼운 듯 이소의 목덜미로 옮겨 잡은 해준의 손바닥이 움찔댔다.
일전에 가게 앞에서 쪼그려 앉아 하던 키스에서도 느꼈다. 평소 다정하고 상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불도저 같은 입맞춤에 얼마나 놀랐는지. 제 허리를 꺾어 버릴 기세로 덮쳐 오는 커다란 몸을 밀어내면 도망치지 말라는 듯 세게 잡아채는 손,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뺀 채 화답하면 칭찬하듯 살며시 쓰다듬는 손. 둘 다 해준과의 잠깐의 키스에서 느낀 감상이었다. 스킨십 자체에 면역도 경험도 없는 이소는 그저 정신없이 휘둘릴 뿐이었다.
“하… 흐으.”
“나를 보러 왔으면 나한테 집중해야죠.”
살짝 떨어진 입술에서 토라지듯 내뱉은 말에 이소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해준은 몸을 바짝 붙인 채 입술을 찾았다. 옷깃을 쥐어 잡고 숨을 참으면 잠시 떨어진 입술이 코와 볼에 입을 맞추고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저를 퍽 예뻐하는 것이 이소 스스로도 느껴졌다. 다시 밭은 숨을 들이마시면 낮게 웃음 치며 미끄러지듯 옮겨붙은 입술이 다시 잇새를 벌리고 혀를 감아 왔다. 제 혀가 단맛이 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섞어 대고 빨아 올리는지 자칫 숨까지 모조리 빼앗으려는 것 같았다.
“교수…님… 숨 막혀…요.”
“미안. 여유가 없네.”
힘주어 고개를 돌리자 다급하게 올라온 해준의 손이 턱 아래 여린 살을 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소가 간지러워하며 입술을 벌리면 해준은 흡족하게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해준은 이소의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끼워 넣었다. 이소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해준의 허벅지 위에 말을 타듯 걸터앉은 꼴이 되었다. 땅에 닿을 듯 말 듯 한 애매한 높이에 몸이 흔들렸다. 발끝을 허우적대자 해준은 손을 내려 이소의 오금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리 하나만 내린 채 아래를 맞붙이고 얼굴이 가까워지자 이소는 긴장감에 숨이 막혔다. 또 키스인가.
쿠르릉, 그 순간 번쩍이는 번개에 뒤이은 요란한 천둥소리가 고요한 교수동을 울렸다. 바깥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미화원이 구시렁거리며 끌차를 이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면 어떡하지. 그 생각뿐이었다. 소리가 가까워지는 듯하자 이소는 급하게 고개를 돌려 문고리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해준이 이소의 손목을 잡아챘다. 으스러질 듯이 잡은 손목에 통증이 일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가려고?”
으르렁거리듯 읊조리는 말투에 이소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저었다.
“누가, 누가 들어올 것 같아서….”
해준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귀여워라. 어떻게 다 큰 남자가 이렇게 귀여울 수 있지.
“누가 들어온다고. 내 방인데.”
“그래도요. 청소하시는 분이 갑자기….”
“안 들어온대도.”
이소가 불안한 눈초리로 입술을 달싹대자 해준은 웃으며 문고리의 레버를 돌렸다. 찰칵, 바깥세상과 단절된 날카로운 쇳소리 이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대화와 키스가 모두 멈추자 이소는 뻣뻣하게 눈을 굴리다 해준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가까웠다. 저만큼이나 많이 붉어진 귓불에 해준 역시 이 상황이 꽤나 기껍다고 여겼다.
“그건 그렇고,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요? 흐앗!”
해준은 땅에 닿아 있는 이소의 다리마저 잡아 올린 후 그대로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다리에 균형을 잃을까 얼른 해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해준은 이소가 무겁지도 않은지 작은 소동물을 대하듯 가볍게 걸음을 옮겨 연구실 한편에 있는 커다란 책상으로 데려왔다. 교수들은 모두 책상에 서류와 책을 잔뜩 쌓아 놓을 줄 알았는데 해준의 책상은 펜 몇 자루와 고서 몇 권 빼고는 아무것도 없이 휑했다. 그마저도 해준은 걸리적거렸는지 손바닥으로 밀어 바닥으로 떨어뜨리고는 그 위에 이소를 살포시 앉혔다.
이소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떼어 내는 손길에서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형형하던 짐승의 눈초리는 사라지고 다시 예의 다정한 그 눈이었다.
“출입 카드도 없이 어떻게 들어왔을까. 우리 학교는 교수회관에 외부인 쉽게 못 들어오는데.”
배달할 때는 경비실에서 열어 준다 치고. 지금은 모두 퇴근한 시간인데 말이죠. 해준의 따뜻한 손이 더운 뺨을 훑었다.
“아, 그거….”
“응. 그거.”
“……학생, 이라고 하니까….”
“응?”
이소는 머뭇대며 아까의 상황을 상기했다. 별 의심 없이 열어 주던 직원이 생각났다.
“학생이라고 하니까, 행정실 직원분이 열어 주셨어요.”
“그냥? 의심도 없이?”
해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소는 난처하게 웃었다.
“레포트… 내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들어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아, 레포트.”
해준은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큭큭 웃더니 다시 입술을 맞댔다. 책상에 앉은 채라 벌어진 다리 사이로 해준의 몸이 기울어져 왔다. 연구실 안은 바깥과 다르게 온기가 넘쳤다. 차가운 빗물에 얼었던 목이 천천히 녹기 시작하고 해준의 마른 옷에 얼굴과 몸을 부비자 조금씩 경련이 멎었다.
다만 멈추지 않는 키스 때문에 또 다른 의미로 열이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입만 맞추고 끝날 것 같았던 키스는 볼과 턱 끝을 지나 목 아래 여린 살갗을 깨물기 시작했다. 달팽이가 지나가듯 천천히 타액을 미끄러뜨리며 목젖과 그 아래 움푹 파인 곳까지 머금어 빨아들이자 명치께가 울렁거렸다.
“아읏….”
이소는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해준의 숨이 닿는 곳곳이 덥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바르작거리던 손을 가만둘 수 없어 젖은 티셔츠를 잡고 아래로 죽 당긴 채 주먹을 쥐고 숨을 참았다. 해준은 이소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기도 하고 잘근잘근 가볍게 깨물기도 하면서 이소의 반응을 즐겼다. 마치 커다란 범이 잡은 먹이를 맛보기 전 유희거리로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았다. 이소는 자꾸만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려 팔을 뒤로 넘긴 채 끙끙댔다. 목덜미를 문지르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가는 허리를 길게 쓸어내렸다. 젖은 옷 때문에 차게 식어 있던 허리가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손에 덴 듯 펄쩍 튀었다.
해준은 달라붙어 있는 옷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낮게 웃었다.
“학생.”
“……?”
갑자기 학생을 찾길래 누가 들어왔나 고개를 들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는 채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해준은 여전히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이소 학생.”
“…….”
“레포트는 어디에 숨겼을까.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데.”
아, 정말. 괜한 이야기를 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자 해준이 웃음을 잔뜩 매달고 코로 손을 쿡쿡 눌렀다. 왜 손을 안 쓰고 자꾸 코랑 입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건지, 얼굴을 가린 손가락 틈으로 해준의 웃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손 내려 봐요. 고운 얼굴 좀 보자.”
이소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볼이 훨씬 붉었다. 온몸이 열에 들떠 코까지 훌쩍대고 있었다. 이 사람 정말 상태 안 좋네. 해준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미소 지었다. 항상 볼 때마다 술이 아니면 잠에 취해 있더라니, 이제는 열에 취해 있고. 그 와중에도 정신없이 저를 찾아왔다는 것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다리 사이로 깊이 파고들어 허리를 숙이자 더는 갈 곳이 없는지 뒤를 돌아보며 허리를 옴싹댔다. 옷깃을 잡으려는 듯 밀어내는 듯한 애매한 태도를 취한 손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교, 교수님.”
“네, 이소 씨 교수님 여기 있어요.”
해준은 고개를 떨군 채 바르작대는 이소를 천천히 감상했다. 말랑한 볼과 입술에 가볍게 찍어 누르며 귀여워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잔뜩 젖어 울음 섞인 신음을 참는 모습에 저절로 침이 넘어가고 심장이 뛰었다. 흰 티셔츠 아래로 불투명하게 비치는 유두를 모르는 척 건드리자 이소의 흰 팔이 움츠러들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티를 안 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저같이 공격적인 사람들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까. 눈 앞의 남자는 자꾸만 날 것의 욕망을 깨운다.
이소는 티셔츠를 내려 필사적으로 앞섶을 가렸다. 그러나 눈에 띄게 팽팽해진 바지춤이 해준의 무릎에 닿아 있었다. 어떻게든 엉덩이를 뒤로 빼려 했지만 이제 더는 갈 곳이 없었다. 경험은 부족해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해준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을 때도 빳빳하게 선 해준의 것이 제 고간에 비벼지고 맞닿은 아래가 오래전부터 단단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닳고 닳은 인간은 아니었기에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한지 알지 못했다. 이소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끝까지…. 할 거예요?”
“끝까지?”
못 알아듣는 척 고개를 기울인 해준이 원망스러웠다.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긴 생각들은 노골적인 그 단어를 선택하지 않으려 떠올린 애매한 대명사뿐이었다.
“여기서, 그거…. 저랑 지금 그거 하시려고 밑이….”
“그거? …섹스?”
“섹….”
이소는 음절 한 자 한 자 정확하게 짚어 주는 해준의 말에 질색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애 같은 반응이네. 해준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반질반질하고 둥그런 이마 아래 결이 잘 든 눈썹이 가지런했다. 물론 그 아래에 있는 눈은 나른하고 은근하며 집요하게 이소의 입술을 쫓고 있었다.
“하고 싶다고 하면, 해도 돼요?”
기다란 손가락으로 옆구리와 허리를 지분거리고 쓸어내리다 종래에는 비에 푹 젖은 바지를 내릴 태세로 덥썩 쥐자 이소는 얼른 해준의 손목을 저지했다.
“여기서 해도 된다고? 누가 들어올까 봐 겁난다며.”
“아, 아니….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이소는 아이처럼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도리질을 쳤다.
“여기선…. 여기서는… 끝, 끝까진 안 돼요….”
하, 씨발. 해준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해준은 울먹이는 이소의 목덜미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뜨거워진 피부는 입술이 닿을 때마다 데는 것만 같았다. 당장 갈기갈기 뜯어먹고 싶은데 왜 열이 나고 그러실까. 좆같은 타이밍에 해준은 이를 세운 후 흰 목을 짓씹었다.
“아, 아프… 아파요, 교수님, 아파요!”
여린 피부를 욕심껏 강하게 빨아들이며 손가락으로 젖은 유두를 문지르자 고개를 비틀고 새소리를 내며 울었다. 맞닿은 아래가 제법 단단하게 달라붙은 것이 당장 바지를 까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사람의 아래도 목덜미처럼 아기 분 냄새가 날까. 안 그래도 하얀 피부인데 햇볕을 받지 않은 그곳은 얼마나 더 허여멀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열이 오르는 피부 곳곳에 입술을 찍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어깨를 잡고 밀어내는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럼 어디선 끝까지 해도 돼요?”
이소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유독 낮았다.
“응? 말해 줘야 알죠. 지금 나는 이소 씨가 허락하는 데까지만 만질 건데.”
목 주변과 쇄골 주변을 빨아들이며 바지 뒤춤으로 천천히 손을 집어넣자 허리가 휘며 벌어진 다리가 해준의 옆구리에 바싹 붙었다. 바지 안쪽의 엉덩이를 쥐자 커다란 손아귀에 작고 말랑한 살이 폭 잡혔다. 두 손으로 둔부를 양옆으로 벌리듯 당기며 앞으로는 맞닿은 섶을 문지르자 해준의 어깨를 잡은 이소의 두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교, 교수님! 교수니임….”
몸을 튕기느라 좆끼리 비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이소는 내내 우는소리를 하며 제가 먼저 달라붙고 있었다.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 텐데 해준은 정말 미쳐 버릴 노릇이었다.
“대답부터 해 줘요. 응? 이소 씨는 나랑 전혀 할 생각이 없어?”
“으, 아니이. 아니히…. 그게 아니고.”
“들어올 때부터 아래는 바짝 세워 놓고, 아니라고만 하면, 나를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감질나는 행위에 인내심이 바닥나는 중이었다. 돌연 해준이 이소의 엉덩이를 답싹 움켜잡았다.
“흐앗!”
이윽고 허리를 뒤로 뺐다 강하게 아래로 찍어 누르자 이소는 놀란 숨을 집어삼켰다. 잠깐 떨어졌던 샅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한 번 거칠게 부딪혀 왔다.
“아흐읏!”
“싫은 듯 우는 건 몹시 내 취향이긴 한데.”
터질 듯한 아래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계속되자 이소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릿한 통증 후 빠르게 찾아오는 뭉근한 쾌감은 배뇨 직전의 간질거림을 닮아 있었다. 해준은 몇 번을 더 허리를 띄웠다가 잘게 찧듯이 쳐올렸다. 저만큼이나 단단하게 부푼 아래는 쇠몽둥이로 때리는 것 같은 압박감과 둔통을 주었다.
“으, 으응, 이거, 하지 마…! 하지 마세요…!”
“그거야 침대 위에 올라갔을 때 이야기고.”
고 대표가 만졌을 때와는 달랐다. 얼굴과 입은 도리질을 치고 있지만 이소는 더욱더 해준에게 매달렸다. 배 속이 간질거렸다. 해준은 나지막이 속삭이며 허리 짓을 했다. 젖은 채 비벼지는 샅이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계속 애태우지 말고,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말해요. 안 그러면 내가 마냥 참기가 힘들잖아요.”
“읏, 아! 그만…! 교, 교수님, …그만!”
“콘돔도 젤도 없고, 눕힐 침대도 없어. 무엇보다 당신, 이렇게 온몸이 젖은 채 와 놓고.”
해준은 아래를 찧어대며 귀를 이로 물고 속삭였다. 얇은 귓바퀴조차도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이소의 손이 옷깃에서 떨어져 무력하게 흔들거렸다. 하얗게 질린 가는 손가락이 허공에서 덜컥덜컥 움직였다.
“자꾸만, 그런 얼굴로, 나를 자극하지 말아요.”
“으흑, 학…! 아흑, 아, 하읏!”
젖은 샅에 닿은 해준의 바지가 맞닿을 때마다 함께 척척하게 젖어갔다. 맨살에 닿는 것도 아닌데 부딪힐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기 때문에 질척질척한 물소리는 먹먹한 신음과 함께 방 안을 울렸다. 이소는 배 아래로 몰리는 빠듯한 감각을 어떻게든 외면하고자 했지만 규칙적으로 온몸에 퍼지는 진동에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누르지 마… 교수니힘, 누르지…. 흐흑….”
“쌀 것 같아?”
“으응, 으…. 이거, 자꾸 누르니까. 으읏!”
밑이 간질거려 울음이 터진다. 해준이 몸을 밀어 쳐올릴 때마다 제가 커다란 범종이 된 것 같았다. 밑동이 굵은 통나무로 제 몸을 세게 부딪치면 이렇게 혼이 달아나는 것같이 괴로우면서도 벅찰까. 눈물이 방울져 관자놀이를 타고 떨어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벌써 죽을 것 같다.
“나, 나… 갈 것 같… 하, 하윽, 교수…님…. 안 돼….”
정신이 아득해지기 전 내뱉은 말에 해준의 풀어졌던 동공이 다시 초점을 맞췄다. 움직임이 멈추자 이소는 힘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언제 흘렀는지 칠칠치 못하게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 타액이 범벅이었다. 해준은 파들파들 떠는 이소를 내려다보았다. 힘없이 벌어진 다리 아래로 전에 없던 따뜻한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열 때문에 예민한 건지 원래 민감한 건지. 사정의 여파를 맞은 윤이소는 마치 감전된 사람마냥 간헐적으로 파득대고 있었다. 책상이 다 젖었다.
“하, 이소 씨. 엉망이 됐네.”
“흐윽, 끅…흑…, 죄송해요…. 나중에, 닦… 닦아드릴….”
“책상 말고. 바보처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눈에 힘이 풀린 채 떨고 있는 이소의 다리를 살며시 쓸어올린 해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소의 볼을 매만졌다. 미열에 가까웠던 몸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응급실에 데려가야 하나 싶어 시계를 들여다보는데 돌연 이소가 가슴에 머리를 기대 왔다. 여전히 코를 들이마시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양새로 어깨를 움찔대는 모습이 가여웠다. 해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칫하면 정말로 강제로 밀어눕힐 뻔했다는 것을 스스로는 자각하고 있었다.
‘씨발. 왜 자꾸 적당히를 모르고.’
해준은 입술을 짓씹었다. 정작 이소는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자. 옷 갈아입고, 링거도 맞고. 그러고 나면 집에 데려다줄게요. 응? 이소 씨.”
이소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잔뜩 쉰 목소리가 입술 새를 비집고 기어 나왔다.
“싫어….”
“…….”
“집 싫어…. 집 안 갈래요….”
“…….”
“보내지 마세요…. 싫어요, 혼자 있는 거 싫어요….”
그 말을 끝으로 이소의 고개에서 힘이 빠졌다. 툭 떨군 머리통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해준은 잠시간 생각하다 일단 이소의 몸을 안아 들었다. 성인 남자치고는 너무나 가볍게 들리는 몸은 속이 텅 빈 유리병 같았다. 의자에 걸린 담요를 이소의 등에 둘러 들쳐 안고 바깥으로 나오자 거세게 쏟아지는 비가 구두 끝에 튀었다. 품에 안긴 이소는 열에 취한 채 연신 같은 말만 반복했다.
‘혼자라고.’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안 갈 거라고.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잘게 고개를 흔들면서 울먹이는 말에 거짓은 일 할도 없었다. 그렇겠지. 그 집에는 중늙은이 하나와 어린 것 하나. 네가 책임져야 할 목숨은 둘인데 너를 보듬어 줄 이는 없구나. 네가 그리 아파하고 자주 우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해준은 이소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곤 발걸음을 옮겼다.
* * *
따뜻하고 포근한 꿈을 꿨다. 은은하고 어슴푸레한 주홍빛 조명 아래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 이마에 얹은 물수건이 시원한 것으로 갈음되자 이소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병원인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해준의 흔들리는 눈동자였다. 열에 들떠 몇 번이고 제가 입술을 찾았는데 해준은 키스를 안 해 줬다. 감기 아닌데, 안 옮는 건데. 서운했다.
아, 너무 꼴사납게 보였으려나. 이소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하고 있으면 자꾸만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아. 주제도 모르고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이소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처음 느껴 보는 시원하면서도 동시에 온기가 올라오는 특이한 감촉의 이불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또 잠이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둑한 방 안이었다. 두런거리던 목소리들도 빛도 없었다. 제집이 아닌 건 확실했다. 이소는 후들거리는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니 사물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낮은 선반과 도자기,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 제가 앉아 있는 침대.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집기들을 보아하니 꼭 누군가의 방인 것 같았다. 그런데 꼭 사극세트장 같다.
“우와, 병풍도 있네….”
이소는 낮게 중얼거리며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려 하다 그제서야 제 손에 꽂은 주삿바늘을 발견했다. 고개를 들자 높은 거치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수액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왜 꽂혀 있지?
“일어났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환해졌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숙이자 해준은 아, 하고 놀라더니 조도를 낮췄다. 보기 좋을 정도로 낮아진 밝기에 이소는 한결 편안해진 상태로 눈을 맞췄다.
“병원에 가려고 했었는데 옷도 갈아입혀야 할 것 같고…. 열만 내리면 푹 잘 것 같아서 일단 내 집으로 왔어요.”
아, 해준의 집이구나. 이소가 팔을 내려다보자 해준은 주치의가 와서 직접 하고 간 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주치의라니, 새삼 해준이 저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실감이 났다. 수액은 다 맞았으니 이제 빼자, 해준이 능숙하게 주삿바늘을 빼고 후 처치를 했다.
“저 기절했었나요?”
“응. 내가 좀 무리를…. 시켰죠. 미안.”
해준은 차마 눈을 맞추지는 못하고 쓰게 웃었다. 손에는 작은 그릇이 들려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자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 낮부터 먹은 게 없었다. 해준이 그릇을 옆에 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 커다란 사람이 앉았는데도 침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게 참 신기했다.
“어디 보자, 땀 엄청 흘리더니 열은 다 내렸네.”
해준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방금 전까지 들고 있었던 그릇 때문인지 뜨끈한 온기가 퍽 반가웠다. 그만큼 이소의 체온이 많이 내려갔다는 의미였다.
“춥진 않고요?”
“지금은 괜찮아요.”
땀을 젖어 있는 머리카락과 달리 몸은 보송보송했다. 내려다보니 처음에 입고 있었던 후줄근한 티셔츠와 카디건은 온데간데없고 웬 흰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제 옷은요?”
“내가 갈아입혔어요. 맞는 게 없어서 일단 내 옷 입혔고. 씻기는 내내 안 깨길래 좀 걱정하긴 했는데 그래도 잘 자더라고요.”
그 말인즉슨 제 알몸을 해준이 봤다는 뜻일까? 이소는 얼른 이불을 들췄다. 바지까지 깨끗하게 갈아입혀져 있었다. 바지를 살짝 들자 못 보던 검정 속옷까지 입혀져 있었다. 이불을 내리고 해준을 쳐다보자 해준이 나른하게 웃으며 이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비밀을 다 알아차렸을 게 뻔해서 얼굴을 붉힌 채 노려보자 해준은 눈썹을 까딱이며 말을 돌렸다.
“아, 이소 씨 핸드폰 완전히 침수됐던데. 일단 충전하긴 했는데 전화 자체가 오래됐더라고요.”
손톱을 문지르며 어색함을 달래다 불현듯 정숙과 해수에게 연락을 못 한 게 생각났다. 번쩍 고개를 들자 해준이 핸드폰을 살포시 두드렸다.
“아까 이소 씨 잘 때 정숙 여사님하고도 통화했어요. 열이 많이 나서 우리 집에 왔다고 했고…. 해수는 아빠 조금 찾다가 잠들었다고 했는데. 그래도 의젓하던데요. 많이 아프냐고 물어서 괜찮다고 말해 줬어요. 열 내리고 잠 깨면 보내 주기로 했지.”
“해수랑 통화했어요?”
“응. 아빠 닮아서 아주 똑 부러지던데.”
빈말이라도 아이 칭찬에 괜히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정숙과 연락도 되었다고 하니 안심이 되면서 한시름을 덜었다. 정숙은 해준이 이소에게 다가오는 것을 달갑게 여겼다. 지난 시간 동안 이소 곁에 사람이라고는 없는 줄 알았는데 뒤늦게 사귄 친구가 이소를 잘 챙겨 주는 모습에 제가 다 신난다나. 정작 이소는 해준과의 오묘한 관계를 정숙이 눈치채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긴 했다.
연락에 대한 부담이 덜어지고 편히 쉴 수 있게 되자 다시 한번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해준은 아까 옆으로 치워 두었던 그릇을 집어 들었다. 다 식었네, 데워 와야겠다 중얼거리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몇 시예요?”
“새벽 세 시. 그런데 시간보다는 날짜가 중요할걸요. 하루 꼬박 잤으니까.”
“네?”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정말로 날짜가 하루나 지나 있었다. 어젯밤에 해준과 연구실에 있었고 하루를 꼬박 잤고 그러니까 지금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고작해야 조금 자고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남의 집에서 종일 민폐를 끼치며 잤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소 씨 정말 죽은 듯이 자던데요. 코도 안 골고 이도 안 갈고. 땀도 잘 안 흘리고.”
해준은 씩 웃었다. 이소가 걱정스럽게 시트를 쥐었다.
“제가 침대 써서 못 주무신 거 아니에요?”
“옆에서 잤는데.”
“예?”
“어젯밤 내내 끌어안고 잤어요. 이소 씨 안고 자니 잠이 잘 오더라고요.”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애정에 날 선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기절한 성인 남성을 안고 집까지 와서 씻기고 옷까지 갈아입혔을 수고를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면서 미안하기도 했다. 해준이 죽 그릇을 휘휘 저었다.
“그동안 많이 먹였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말랐던데. 스트레스도 너무 심하다고 하고…. 잠은 하루에 몇 시간 자요? 식사는 제때 해요? 가게 일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무엇부터 먼저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고 있자 해준이 피식 웃었다. ‘미안, 천천히 물어볼걸.’ 하고는 죽 그릇을 매만지던 해준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소는 얼른 해준을 붙잡았다.
“어, 어디 가세요.”
“죽이 뜨거워야 하는데 대화하느라 좀 식었어요. 데워 달라고 하려고.”
이 시간에? 새벽 세 시인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주방에 계신다면 그분도 주무셔야 할 것 같은데. 이소는 습관처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어깨를 누르는 해준의 손에 주춤하며 앉아야 했다.
“일하는 분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그래도, 제가 할게요. 너무 늦었는데 민폐라….”
“해도 내가 하지, 이소 씨가 왜 해요. 그리고 괜찮아요. 그분한테도 민폐 같은 거 아니에요.”
금방 올게요, 하고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맞댄 후 문을 닫고 나간 해준의 뒷모습을 이소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빨리 오세요, 혼자 두지 마세요. 어쩐지 없던 분리불안증까지 생긴 것 같은 밤이었다.
침대 등받이에는 푹신한 쿠션 여러 개가 겹쳐진 상태라 몸을 기대자 편안하게 파묻힐 수 있었다. 이불은 따뜻했고 좋은 냄새가 났다. 제집에서 덮는 이불도 깨끗한 세탁 비누 냄새가 났지만 그것과는 결이 다른 고급스러운 향이었다. 방 안 곳곳에 자리한 선인장과 난, 화초의 배열도 미술관에 온 것같이 단아한 멋이 있었다. 꼭 여행을 온 것 같았다.
‘교수님 방 너무 좋다….’
방 안에는 액자도 하나 없었고 달력도 없었다. 흔한 시계조차 걸려 있지 않아 주인이 있는 방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섬세히 보면 곳곳이 해준의 흔적 천지였다. 이소는 제가 입고 있는 옷을 슥슥 쓸었다. 이 질 좋은 옷도 교수님 거겠지. 팔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해준의 품에 코를 박으면 나는 은은한 나무 향이 배어나는 듯했다. 코를 부비고 있자 제가 무슨 주인 냄새 찾는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문이 열리고 해준이 들어왔다. 금방 데워진 죽에서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고 살살 갈아 넣은 깨와 김이 입맛을 돌게 했다. 해준은 옆에 앉아 정성스럽게 죽을 저었다. 뜨거워요. 호호 불어 먹어야하고…. 이소는 나긋한 목소리로 죽을 휘젓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아하고 고혹적인 미인은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 있는 어떤 배우들을 다 데려와도 이 사람보다는 덜할 것 같았다.
어김없이 해준은 이소에게 숟가락 하나도 쥐지 못하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기를 쓰고 제가 떠먹으려고 했을 텐데 이소는 한 번의 거절 이후 빠르게 포기하고 말없이 입을 벌렸다. 해준도 고분고분한 이소를 흘깃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조심스럽게 떠먹였다.
혀 안에서 퍼지는 은근한 단맛과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소는 해준이 떠 주는 대로 열심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얼마나 빨리 먹는지 해준의 숟가락이 쉴 새 없었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따뜻한 보리차까지 마시고 나자 텅 비어 있던 몸이 촘촘하게 차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잠이 든다면 삼 일 동안 깨지 않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준은 그릇을 옆으로 밀어 놓고 이소를 등받이에 기대 주었다.
몇 시나 되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꽤 흘렀을 텐데도 해준은 영 졸린 기색이 없었다. 이불이 흘러 내려갈까 봐 끌어 올려 덮어 주고 더 필요한 것은 없나 연신 살피는 모습은 꼭 제가 어린 해수를 챙기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보살핌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아니, 좋구나. 왜 아이들이 부모에게 엉기는지 알 것 같았다. 뜬금없이 안아 달라고 하는 것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여러 차례 물어보는 것도, 떨어지지 않으려 시도때도 없이 끌어안고 있는 것도 모두 이런 맥락이었나 보다 싶었다.
“왜 웃어요?”
제가 웃었던가. 해준과 눈을 맞추고 나서야 제 입꼬리가 말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는 포근했고 덮고 있는 이불은 따뜻했다. 수액을 맞아서인지 정신은 또렷했고 열이 식은 몸은 개운했다. 무엇보다 제 앞에 선 해준에게 드는 설렘과 벅찬 감정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고 줄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런 유려한 설명보다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감정.
“좋아서요.”
툭 내뱉고 그냥 배시시 웃어 버리자 해준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처음으로 화답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몇 번이나 전화기를 붙잡고 떠들고, 강의동 앞에서 해준을 기다리고, 비를 가르고 뛰어가 입을 맞추고 몸을 만질 수 있게 허락한 것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커져 버린 해준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다만 더 확실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교수님이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놓이고, 편안하고, 계속 기대고 싶어져요.”
“…….”
“밥때 되면 생각나고, 잠자기 전에도 떠올리고, 울고 싶을 때도 생각나고.”
어제도 그랬는데. 이소는 고 대표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울음을 참으며 해준을 생각했다. 그게 뭐 대단한 약이라도 된다고 해준의 생각을 삼키며 버텼다.
“그러다가 하루 종일 같이 있었으면 싶고, 어제 연구실에 있었던 일도…. 싫었다고만 생각되지 않는 건….”
이소는 해준의 눈을 보고 있었다. 해준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제 시선과 단단하게 얽혀 있었다.
“제가 교수님을 많이…. 많이 좋아해서 그러는 거 같아요.”
의외로 담백하게 뱉어 낸 말은 화려한 고백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도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놀라울 것 없는 사실. 하지만 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미루고 아끼고 싶었던 말이었다. 한 번 말하고 나면 볼 때마다 질리도록 말하고 싶을까 봐 입가에서 매번 떨어지지 않던 말이었다. 어느새 잡은 손을 쓰다듬으며 해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시 말해 봐요.”
제 손을 하나씩 쓰다듬다 천천히 깍지를 껴 오자 열 개의 손가락이 차분하게 얽혔다.
“싫어요. 다 들어 놓구.”
“한 번만, 다시. 또 듣고 싶어서 그래요.”
쪽, 쪽 가볍게 볼과 코에 입을 맞추는 입술이 이제는 익숙했다. 이소는 기왕 뱉은 거 어려울 게 또 무엇이 있겠냐 싶어 다시 또 내뱉었다.
“제가, 교수님을, 많이 좋아한다구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제 입술에 내려앉는 온기에 느리게 숨을 뱉었다. 다정을 들이부은 것같이 느긋하고 꼼꼼하게 주름을 핥고 빨며 파고드는 키스였다. 제 얼굴을 잡은 커다란 손도 너무 좋아서 자꾸만 고개를 꺾고 기대고 치댔다. 이소는 언제부터 제가 이렇게 응석받이가 되었는가 싶었다.
한참 키스에 집중하고 있는데 입술이 맞닿은 채로 해준이 눈을 떴다. 키스가 멎자 이소 역시 눈을 떴다. 아, 왜 그러지. 해준은 손을 들어 이소의 말랑한 볼을 쓰다듬었다.
“이소 씨.”
“응…. 네.”
“나랑 하는 키스가 그렇게 좋아요?”
대답하기는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고 눈을 굴리자 해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또 섰어요.”
그 말에 고개를 내리자 두꺼운 이불 아래 자신의 것이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언제 바짝 세운 건지, 심지어 그걸 저보다 해준이 먼저 알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맞대 봤다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도 몸이지만 자꾸 어젯밤 연구실에 했었던 폭풍 같은 행위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이제는 뭘 해도 키스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어…. 아니….”
이렇게까지 밝히는 타입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불을 끌어모아 얼른 가리자 해준이 볼에 입을 맞추고 침대로 올라왔다. 왠지 아까와는 달라진 위험한 분위기에 이소는 엉덩이를 뒤로 밀어 도망치려 했지만 침대 헤드에 가로막혀 갈 곳이 없었다. 해준은 이소의 앞에 걸터앉은 채 이불을 천천히 내렸다.
“혹시 아직 어지러워요?”
푹 자서 그런지 깨끗하게 가신 두통과 어지럼증은 지금은 흔적도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러는 게 싫거나 무서워요?”
무섭다기보다는 그냥, 불안하고…. 서툴고. 잠자리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싫거나… 무서운 것도 아니면….”
해준의 손가락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닿았다. 심장은 거세게 뛰는데 호흡하는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맞췄다.
“안아도 되는 걸까?”
안는다는 게 그냥 포옹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껏 알았다. 해준이 제 몸을 잡고 밀어 쳐올리던 것이 생각나자 전에 없던 기대감과 두려움이 조금씩 봉오리를 피웠다. 남자끼리는 해 본 적도, 알고 있는 것도 없는데 제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함께 싹텄다.
“그게….”
“응? 이소 씨 예뻐서, 나는 하고 싶은데. 이소 씨 생각은… 어떤지… 내가 모르잖아.”
웃음을 매단 채 이소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해준은 상냥하게 물었다. 해준이 한마디 한마디 느리게 뱉을 때마다 자꾸 속옷 안의 제 것이 눈치도 없이 바짝 단단해졌다. 이러다가 정말 목소리만으로 사정할 것만 같았다. 키스 때와 같이, 아까와 같이 자신은 잘 못 해도 해준이 알아서 이끌어 주고 가르쳐 주는 걸까.
해준은 침대 끝까지 이소를 몰아넣은 채였지만 아주 차분하게, 오랫동안 끈기를 갖고 대답을 기다렸다. 채근하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겁박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로 진득하게 이소의 뺨을 문지를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는요… 제 생각은….”
“응.”
끝까지 대답은 못 하고 한참 입술을 깨물던 이소는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준이 못 알아챌까 봐 두 번 세 번, 더 끄덕이곤 나중에는 용기를 내어 시선을 맞추고 다시 한번 끄덕였다. 이 모든 과정을 느긋하게 지켜본 해준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이소를 격려했다.
“아주 잘했어요.”
그리고 이내 해준은 남은 이불을 모조리 끌어 내렸다.
파자마 위로 봉곳하게 솟은 앞섶은 손으로 가리려야 가릴 수 없을 만큼 티가 났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바지 앞섶은 동전 모양으로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부끄러웠다. 해준이 천천히 몸을 숙이자 이소는 다리를 오므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까와 같이 찧어대면 이번에는 정말로 꼴사납게 울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돌연 해준이 허리에 손을 얹어 바지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참, 아까 옷 갈아입히다 본의 아니게 봐 버렸는데요.”
해준이 바싹 다가와 짓궂게 속삭였다. 따뜻한 손이 바지 끝에 걸리자 더는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소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체념했다.
“어쩜 이렇게 예쁜 걸 잘도 숨기고 있었나 싶더라고.”
해준이 천천히 바지와 속옷을 내리기 시작하자 이소는 숨을 들이켰다. 이것 때문에 대중목욕탕도 못 갔단 말이다. 억울한 감정을 토로하기도 전에 빠르게 내려간 바지 때문에 순식간에 아래가 허전했다. 해준이 저를 예쁘다 예쁘다 하는 것은 무시로 듣고 넘길 수 있었지만 아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하는 말에는 면역이 있을 턱이 없었다. 작은 손으로 가리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유를 부렸지만 속으로 해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피부에 털 한 올이 없이 깨끗했다. 살굿빛이 오묘하게 어린 기둥은 백옥으로 빚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하얀 손가락으로 애처롭게 가렸지만 틈 사이사이로 보이는 흰 피부와 번들거리는 애액이 투명한 게 더없이 예뻐 보였다.
“아하핫, 야해라.”
이소의 무릎을 두 손으로 잡은 해준은 뱀 같은 눈을 번득이며 아래를 천천히 감상하다 불현듯 허리를 숙였다. 이소는 터지는 비명을 모두 제 안에 삼키느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긴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