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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이라는 것은 참 신기했다. 손바닥만 한 작은 기계에서 적힌 몇 글자가 하루 종일 그 사람이 옆에 있는 것처럼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해준과 연락을 시작한 후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도 없이 메시지가 왔다 갔다 했다. 덕분에 이소는 난생처음으로 교수가 어떤 생활 패턴으로 움직이는지도 알 수 있었고 제 생각보다 훨씬 바쁜 직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 몇 주 해준은 시험 기간에 들어가 바쁘다고 했고 대신 아침저녁으로 통화를 했다. 길게는 20분, 짧게는 5분이었지만 해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많이 되었다.
이소는 거울을 보며 이제는 멍도 빠지고 한결 아문 얼굴을 보며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 허여멀건 피부에 퀭한 눈을 하던 사내 대신 뽀얗게 살이 오른 남자가 비쳤다. 근래 해준이 전화로 식사를 챙기는 통에 시간을 맞춰 꾸역꾸역 먹다 보니 몸무게도 2kg 정도 늘었고 푸석푸석했던 머리카락에도 기름이 반질반질했다.
보통은 밥을 하고 난 후에 남은 찬을 가지고 대충 비빔밥을 해 먹거나 그냥 우유와 빵으로 때우기는 했는데 해준이 오늘 먹은 음식을 사진 찍어 보내라고 하고 나서 부터는 어떻게든 잘 차려 먹으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니 기왕이면 조금 더 예쁘게 담고 싶었고 그 덕에 혼자 먹더라도 정갈하게 차려먹게 됐다. 저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한 명 생겼을 뿐인데 일상이 크게 바뀌고 있는 게 참 신기했다.
사진을 찍어 해준에게 보내고 식사를 마쳤을 때 즈음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들르는 젊은 부부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메뉴를 고르는 내내 손을 놓을 생각을 않던 두 사람은 음식을 만드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키득거리며 입을 맞췄다. 보기 좋았다. 질투가 난다거나 눈꼴이 시리다거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 대신 부러움이 샘솟았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보아도 별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요새는 자꾸만 그 사람들 얼굴에 저와 해준의 얼굴을 대입해 보곤 했다. 그러다 얼른 고개를 흔들곤 현실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자기야, 우리 이사 언제 하지.”
“조만간 해야지. 근데 빨리 팔리려나 모르겠다. 뭐만 하면 이 동네 재수 없는 일만 생기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어.”
남자는 그 말을 하며 밖을 내다봤다. 이소는 궁금했지만 딱히 말을 걸 정도로 친화적인 성격은 못 되어 그저 묵묵히 포장을 마무리했다. 계산을 마치고 물건을 건네는데 여자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사장님, 이 동네 사신 지 꽤 됐죠?”
“아, 저도 여기로 이사 온 지는 얼마 안 됐는데…. 그래도 바로 옆 동에 있다가 오긴 했어요.”
“그럼 저쪽 빌라에 전과자 사는 것도 아세요? 사기 폭행에 강간 미수까지 했대요.”
“정말요?”
이소는 깜짝 놀라 애써 만든 음식을 놓칠 뻔했다. 타이밍 좋게 받아 든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완전 조심해야 돼요. 저희도 이제 애기 곧 낳을 건데 이런 동네에서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요. 그저께 밤엔 빌라 쪽에서 비명 소리도 들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금시초문이었다. 사기 폭행은 그렇다 치고 강간 미수범까지 근처에 살고 있었다니 괜히 마음이 졸아들었다. 앞으로 정숙과 해수만 놀이터에 보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소는 부부를 배웅했다.
가게 문을 닫고 꽃잎으로 지저분해진 데크를 쓸던 이소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8시 20분, 해준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연락이 없었다. 아직도 학교인가,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 걸까. 전화를 해도 되나 머뭇거리다 메시지를 다시 한번 눌렀다. 마지막으로 연락 온 시간이 오후 네 시 반이었다. 조금 있다가 연락한다고 해 놓곤 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바쁜 모양이었다. 이소는 데크에 쪼그려 앉아 전화를 만지작댔다.
“음…. 에라, 모르겠다.”
그러고는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음성 메시지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호감이 커지자 그만큼 겁도 몸집을 불렸다. 그러나 다행히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해준의 목소리가 전화에서 흘러나왔다.
- 이소 씨.
“교수님.”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제 이름이 반갑다. 이소 씨, 이소 씨. 백 번 들어도 한 번을 안 질린다.
- 미안해요, 내가 좀 바빴어요.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모르고…. 연락한다고 했는데 기다렸겠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밀고 당기기를 하라는데 이소는 그런 마음을 숨기는 것에 서툴렀다. 좋아하면 얼굴이 붉어졌고 애달파하면 눈물부터 떨어졌다. 아이를 키우면 좀 더 담담해지고 여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때로는 제가 해수보다 더 잘 울었던 것 같다. 이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요.”
아니요, 가 아닌 대답에 해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지금 보러 갈까요? 나 끝나고 가면….
- 차 교수, 미안한데 여기 좀 와 봐야겠는데?
해준이 말을 이어 가려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 해준을 불렀다. 수화기 너머로 해준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동안 이소는 데크에 쪼그려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면 좋겠다. 얼른 해결할 수 있는 일이어서 얼른 와서 나를 봐 줬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손도 잡고 포옹도 해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꽃잎으로 덮이는 데크에 앉아 숨을 죽였다. 해준이 돌아왔지만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 어쩌지, 조금 더 늦어질 것 같은데….
“많이요?”
- 그게 얼마나 걸릴지를 몰라서요. 아, 정말 이놈의 학교 때려치치우든가 해야지.
“왜 때려치워요.”
- 이소 씨 보러 가고 싶은데 못 보러 가게 하니까.
이소는 발끝을 옴지락댔다. 해준이 아무렇지 않은 톤으로 던진 ‘보고 싶다’라는 말에 제 마음에는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방금 전까지 동네에 이상한 사람이 산다고 투덜거리던 마음은 모래사장에 쓴 글씨처럼 사라져 버렸다. 해준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제 마음속에 있는 나쁜 생각들이 파도에 떠밀려 저 먼바다에 떠밀려 가 버리곤 했다.
“…제가 가면 되죠.”
- 응?
“많이 늦으시면 제가… 강의동 앞에 마중하러 가면 되죠.”
수줍게 전한 진심에 해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어쩐지 해준 역시 이소 자신처럼 웃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이어 터지는 달큰한 숨소리에 웃음이 묻어 나왔다.
- 아, 이소 씨. 진심으로 연구실에서 뛰어내릴까 봐요.
이소는 꽈리가 터지듯 아하핫, 하며 웃었다. 해준은 사뭇 진지하게 어떻게 뛰어내릴지를 설명했다.
- 우선 가방에 서류랑 전화를 넣고 먼저 던져요. 그 후 내가 칠 층에서 뛰어내린 다음에 후문으로 달려가면 5분이면 갈 텐데. 내가 지금 바로 출발할….
“그 전에 죽어요….”
해준의 농담에 이소가 한숨을 쉬며 웃었다. 그만큼 보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며 몇 마디 더 찡얼거리는 해준을 살살 달랬다.
- 피곤하니까 오늘은 집에서 쉬어요. 내가 내일 들를게요. 줄 것도 있고.
“뭘 자꾸 주세요.”
나는 줄 것도 없는데. 이소의 손톱이 바지의 해진 부분을 살살 긁어내렸다. 시무룩한 이소의 말에 해준이 부드럽게 제 마음을 드러냈다.
- 그러게요. 나 왜 자꾸 이소 씨한테 뭘 자꾸 주고 싶죠.
짧을 거라 예상했던 통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결국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커지고 나서야 해준은 이소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이소는 그사이 제 머리 위에 앉은 꽃잎이 꽤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흔들어 털어 내자 눈앞으로 수많은 벚꽃잎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소는 한참을 떨어진 꽃잎을 보며 웃었다.
* * *
이소는 흥얼거리며 도시락을 쌌다. 몇 주 만의 강의동 배달이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기 시작하니 학교 도서관과 강의동 쪽으로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빨리 먹을 수 있는 죽과 핑거푸드 메뉴를 늘렸더니 퍽 인기가 좋았다. 이소는 포장을 다 마친 뒤 냉동실에서 쟁반을 하나 꺼냈다. 어젯밤 해준과 통화 후 괜히 마음이 동해 만든 시리얼 바였다.
평소에 잘 챙겨 먹는 것을 중요시하니 어쩐지 이런 간식류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아몬드와 땅콩, 캐슈넛 등을 잔뜩 넣고 곱게 부수어 시리얼 바를 만들었다. 오트밀이 꽤 값이 나갔지만 해준의 입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욕심이 나 또 한 주먹을 추가했다. 붉은색 리본으로 꼼꼼히 포장한 뒤 주문한 도시락과 함께 박스에 넣었다. 강의동으로 향하는 오토바이가 무거운 엔진 소리를 내며 학교 언덕을 올랐다. 오래된 타이어가 굴러가는 엇박마저도 리듬감 있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하세요….”
시험 기간만 되면 흡사 양초처럼 녹아내리는 이 학교 조교들은 올해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핏줄이 터진 눈 아래 팬더마냥 번진 아이라이너는 어젯밤에도 어쩐지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소는 도시락을 내려놓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해준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 키 큰 사람이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지 않았다면 고개를 빼고 둘러본다고 보일 리가 없겠지.
“와, 고기다….”
“한우예요. 여기 이건 장어정식이고요. 이건 낙지죽이요.”
“고맙습니다…. 이거 먹고 힘내서…. 시간표를 다시 짜야지….”
바들거리며 숟가락을 드는 조교에게 이소는 답지 않게 질문을 했다.
“고기 맛 괜찮으세요? 예전에는 샐러드랑 돈가스만 드셨는데, 요새 고기 자주 주문해 주셔서 취향이 바뀌셨나 하구요.”
“아, 저희 요새 밥, 차 교수님이 사 주셔서 그래요.”
어린 조교가 장어 꼬리를 통째로 입에 넣고 우물우물 말을 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조교가 낙지죽을 후룩후룩 떠먹으며 웃었다. 이소가 눈을 깜빡였다.
“차 교수님이요?”
“네. 무조건 비싼 거 먹으라고 해서 저희 메뉴판 뒤에서부터 고르는 사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요.”
“맞아, 진짜 다른 과에서 엄청 부러워해요. 자기들은 교내식당 갔는데 저희들은 맨날 만이천 원 넘는 밥 먹는다고. 카드도 주시고 가셔서 이걸로 음료수도 쟁여 놨어요.”
조교가 주머니를 뒤져 검은색 카드를 흔들었다. 어느새부터인가 과사무실에 올 때마다 결제하는 카드였다.
“저번에 스무 개 시켰을 때부터 교수님이 사 주셨는데. 꽤 됐어요.”
“근데 치사한 건 사장님 가게에서 주문할 때만 쓰래요. 웃기죠. 사장님 가게에서는 이걸로 전 직원 다 사 줘도 아무 소리 안 할 거래요.”
“뭐가 치사하냐. 커피까지 얻어먹으면서 뭘 더 바래.”
“하긴, 이게 어디예요. 아무튼 근데 사장님, 어쩌다가 교수님이랑 친구 먹으셨어요? 완전 지인 찬스 대박이시네요.”
그 뒤는 대체로 어린 조교가 투덜거리면 나이 든 조교가 받아 주는 식의 사담에 가까워 이소는 머리를 꾸벅 숙이곤 과사무실을 나왔다. 전혀 몰랐다. 어쩐지 싼 메뉴 위주로만 주문했었던 사람들이 매번 가장 값이 나가는 것으로 주문하고 심지어 수량도 주문할 때마다 10개가 넘었었다. 그냥 식성이 바뀌었고 모여서 먹나 보다 했다.
‘나중에 고맙다고 해야겠다.’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교수동 연구실까지 도착한 이소는 심호흡을 하고 해준의 연구실 앞에 섰다. 교수 차해준이라고 적힌 이름을 보니 그의 위치가 더욱 실감이 났다.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감도 오지 않았다. 혹시 머리나 옷에 먼지가 묻어 있지는 않은지 여러 차례 털어 내곤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러나 분명 ‘재실’이라고 표시된 화살표와 달리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두어 번 정도 더 두드린 후 귀를 바짝 대곤 혹시나 숨소리라도 들리나 기다렸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힝, 안 계신가 보다….’
반갑게 웃으며 해준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얼굴을 보지 못하자 조금 힘이 빠졌다. 그래도 얼굴을 보고 주고 싶었는데, 생각하며 이소는 곱게 싼 봉투를 문고리에 걸었다. 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 자신이 놓고 갔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했는데 문득 뭐라고 써야 할지 난감했다.
‘이소가, 라고 쓰면 좀 아니겠지…?’
애도 아니고. 이소는 자신의 이름 두 글자 앞에 조심조심 ‘윤’ 자를 써넣었다. 뒤늦게 쓴 글자여서 그런지 줄이 맞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윤이소’라는 이름을 남겼으니 해준이 알아보고 연락을 줄 것이다.
* * *
가게에 돌아오니 사월의 달력을 찢어 낸 정숙이 곱게 접어 오려 냈다. 스테이플러로 양 끝을 꼭꼭 눌러 테이프로 마감을 했다. 해수가 쓸 스케치북을 만드는 일은 온 동네가 도왔다. 정숙은 넉살 좋게도 동네를 돌아다니며 날짜가 지난 달력을 한 장씩 얻었고 어느새 스무 장 가까이 모이면 차곡차곡 모아 해수의 스케치북을 만들었다. 어떤 종이는 얇았고 어떤 종이는 두껍고 빳빳했다. 종이 질감마다 쓰는 색연필과 사인펜, 연필도 달라졌다. 덕분에 해수는 정숙을 만나고부터 종이 걱정은 없이 실컷 그림을 그렸다.
“저 집도 결국은 이사 가나 봐.”
“어디요?”
이소가 헬멧을 벗고 머리를 땀을 닦아 냈다. 오월이 되자 낡은 항공 점퍼가 조금 더웠다.
“철물점. 요새 계속 불 꺼 놓고 있더니만 아까 낮부터 짐 빼는 것 같던데.”
이소가 고개를 빼고 바깥을 내다보자 정말로 어지럽게 나와 있었던 잡다한 물건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느새 간판까지 내렸는지 점포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가게 앞 작은 의자에 기대앉았었던 철물점 사장이 실은 꽤 오래전부터 저를 고까워하고 있었다는 일이 떠오르자 괜히 몸서리가 쳐졌다.
“경기가 안 좋다 하는데 우리는 다행히 건물주가 월세 올린단 말은 없더라고. 여기서 몇 년 더 뭉개면 좋겠어.”
“그러게요. 다행이에요.”
“이소 씨도 자꾸 이사 가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난 이소 씨가 밀어내기 전까지는 옆에 꼭 붙어 있을 테니까.”
“그럼요.”
정숙이 웃으며 다 만든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사실 요새는 굳이 정숙이 아니더라도 이 동네에 오래 있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생겼다. 이소는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빨리 가게를 닫을 시간이 오면 좋겠다. 얼른 해준이 저를 보러 오면 좋겠다.
* * *
살아가면서 정말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많이 겪었던 이소였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했다. 까치 한 마리가 가게 앞을 서성거리길래 점심으로 먹으려 했던 백설기를 조금 떼어 주었다. 그러더니 그놈이 친구들을 몰고 와 백설기 한 덩이를 모조리 빼앗아 갔다. 정숙은 그걸 보더니 오늘 장사가 아주 호황이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덕인지 정말로 피크 타임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두 시간 동안 허리를 펼 새도 없이 정신없이 주문과 포장을 했다. 나이 든 정숙은 허리를 몇 번 두드리곤 낮잠을 좀 자고 오겠다고 집으로 올라갔다. 이소 역시 데크에 걸터앉아 생수로 목을 축이며 숨을 돌렸다.
“아, 살 것 같다.”
노르스름한 볕이 골목 사이사이를 비집고 땅을 데웠다. 갈라진 콘크리트 사이로 마구잡이로 자라난 들꽃의 잎이 이질감이 들 정도로 생생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수분도 흙도 모자란 곳에 허겁지겁 뿌리를 내린 들꽃의 모습이 꼭 제 처지와 같았다. 이소는 마시던 물을 꼴꼴꼴 따라 내어 들꽃에게 부어 주었다. 나도 요새 이렇게 누군가 물을 주고 있거든. 그 덕분에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속으로 말을 걸며 그 작은 행위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싶었는데 고개를 들었더니 낡은 부목을 짚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이 만신창이였고 온몸에 붕대를 감았지만 흔하지 않은 몸집과 고압적인 분위기는 변하지 않아 누군지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화풀이를 한 철물점 사장이었다. 당황스럽고 무서운 느낌보다는 무슨 업보를 받은 것인지 참 많이도 다쳤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가까이서 퀭한 얼굴의 철물점 사모가 이소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이소는 천천히 일어나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섰다. 안녕하냐는 인사는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붙인 채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분노도 없었고 뒷걸음질 칠 만큼 질겁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 와 더 무슨 할 이야기가 남아 찾아왔을까 하는 호기심만 고개를 들었다.
부목을 휘두르며 욕지거리를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남자는 천천히 이소의 앞에 몸을 숙였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 보였는데 무슨 생각인지 오기를 부려 가며 꿇어앉는 모습에서 기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이윽고 완전히 무릎을 꿇은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무릎 꿇은 남자를 목전에 두고 저만 서 있는 구도가 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재미있는 구경난 듯 모여들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카메라를 켜고 달려드는 어린 학생들도 보였다.
그런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의식하지 않는 것인지 남자는 여전히 엎드린 채 몸을 떨었다. 이 남자는 무얼 하고 싶은 것일까, 이소가 그의 어깨를 잡으려고 할 때 쇠로 긁는 거친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잘못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벌벌 떨며 시작된 고백은 한참을 이어졌다. 평소에 술을 마시면 자꾸 나사가 빠지게 군다는 둥 제가 오해를 해서 애꿎은 사람에게 주먹질을 하기도 한다는 둥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장님 얼굴에 침을 뱉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는 뒤늦게 술집에 가려고 지나가던 학생 무리들이 작게 야유를 퍼부어 겨우 다음 말을 뱉었다.
그 말을 들으며 이소는 오전 내내 좋았던 기분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철물점 사장에게 사과를 바란 적은 없었다. 종종 저에게 해코지를 했었던 사람들이 꿈에 나오기는 했지만 과거를 번복해 그들을 응징한다거나 복수한다는 유의 생각을 해 본 일 없이 살았다. 어차피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면죄부나 받을 요량의 사과는 오히려 사양이었다. 지나간 일이었고 딱히 마주치지만 않으면 크게 저를 괴롭히는 기억도 아니었다. 그렇게 잊힐 단순한 해프닝에 그쳤다고 생각했다.
옆에 선 철물점 사모는 손을 빌며 이소에게 제발 이이를 한 번만 살려 달라고 빌었다. 기가 막혔다. 제가 언제 자기네들을 위협이라도 했던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머리를 찧는 부부를 보고 의아함과 함께 경멸이 피어올랐다. 이소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쏠리자 부담감과 불편감에 진땀이 났다.
“그만하시고 일어나세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저희가 이사도 가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가게도 다 정리했고…, 이 동네에 발도 붙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합의를, 선처를 꼭 해 주시면….”
가게를 정리? 이소가 당황해 내려다보았다.
“사모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이가 이번에도 들어가게 되면 우리 딸이 다시는 아빠 안 보겠다고 했어. 셋째 손주도 곧 나오고, 안 그래도 빨간 줄이 몇 갠데….”
야, 저 사람 그 전과자 아니야? 사람들이 하나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맞네, 나 저 사람 우편물에서 본 것 같아. 강간 미수범 아니야? 뭐야, 저 아저씨가 또 무슨 잘못 했나 보네. 그제서야 사모는 제가 입을 잘못 놀렸다는 사실에 손을 떨었다.
“야이, 씨팔. 니 주디 다물어라.”
남자가 부목을 집어 던지며 사모에게 성을 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도리어 사람들의 관심만 더 끌 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소 역시 얼마 전 신혼부부가 와서 언급한 전과자가 철물점 사장이었다는 사실에 그간의 일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 해수 머리도 쓰다듬고 그랬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주춤하며 발을 빼던 찰나였다.
“내가 잘못했다니까, 내가, 이렇게 빌잖아! 고작 윤 사장 몇 대 때렸다고 육십 다 된 인생 조지는 건 너무 심하잖아?! 양심이 있으면,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방금은 말실수다. 사장님. 윤 사장. 봐도. 응? 내 봐도….”
남자는 고개를 들어 이소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두 팔에 모두 붕대를 감았지만 개의치 않는 듯 다리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용서해 달라며 빌었다. 그러나 저를 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이소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 버리고 있었다. 주절주절 떠드는 남자의 입술을 보며 난생처음으로 타인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소리를 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발 입을 좀 닥치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 버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이소는 그럴 만한 베짱이 못 되었다. 그저 버릇처럼 눈을 질끈 감은 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 이소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남자가 저 멀리 내던진 부목을 집어 들었다.
“어어…! 때리지 마라, 내 다쳤다! 내 이미 다쳤다고!”
사람들은 쌍방 폭행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려 렌즈를 돌렸다. 철물점 부부 역시 부목을 들고 걸어오는 이소를 보며 팔을 휘저으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욕심이 덕지덕지 묻은 부부의 얼굴에 겁까지 덮이자 무척 꼴사나웠다. 이소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히익 높은 소리를 내며 팔을 치켜들었다.
“받으세요.”
그러나 이소는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부목을 건넸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심히 일어나시고, 그만 돌아가세요.”
“…….”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도와줄 수 없다는 말에 철물점 사모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 사람을 이렇게 때리고, 가게는 다 박살을 내놓고-!”
“제가 한 일이 아니잖아요. 정말 왜 저한테 와서…. 사장님, 저 말고 또 다른 사람 때리셨어요? 그분께 가 보세요. 그리고 지금처럼 잘못했다고 하세요. 왜 자꾸 절… 귀찮게 하세요.”
부부는 동시에 말을 잃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어쩐지 남자는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망을 뱉거나 욕지거리를 할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어 담담히 뱉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용서를 해 준다거나 괜찮다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날 해준이 위로해 준 것과 별개로 정말 오래 몸이 아팠고 우울했고 절망스러웠다. 미움 받는 것에 익숙하다고 해서 상처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경멸 어린 시선과 멸시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고 생각했고 그런 취급도 낯설지 않았지만 결코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담담해지고 금세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뿐, 상처 자체를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제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철물점 부부는 입술을 깨문 채 일어났다. 부목을 낚아채듯 가져간 남자는 벌건 눈을 하고 이소를 내려다봤다.
“씨발년. 내 깜방 가면 니 진짜 직일 끼다.”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했던 사과가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나 속을 쉽게 드러낼 줄은 몰랐던 터라 이소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회한과 반성보다는 치욕과 노여움이 깃든 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며 항시 입버릇처럼 내뱉던 ‘괜찮아요.’를 말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부부가 초라한 모습으로 자리를 떠나고 싸움이 이어지지 않자 흥미를 잃은 사람들도 곧 흩어졌다. 저 멀리 간판이 내려간 철물점 앞에서 낡은 트럭이 멀어지자 이소는 그제서야 꾹 쥔 주먹에 힘을 풀었다. 누군가는 떠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남았다. 항상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남았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은 채로, 변하지 않은 채로. 기분이 묘했다.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다음주 화요일 점심, 사무실. 이자 빼먹지말고. 올 때 커피도 사와. 답장.]
채무 상환 일정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였다. 이소에게 돈을 빌려준 파라다이스 고 대표는 특이하고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답장을 꼭 달라는 마지막 말에 평소처럼 얌전히 ‘네. 대표님, 곧 뵙겠습니다.’ 하면 될 것을 괜히 심사가 뒤틀려 그대로 화면을 꺼 버리고 주머니에 집어넣어 버렸다.
문득 까치들이 요란하게 모여들어 백설기를 뜯어갔던 오후 일이 생각났다. 좋은 일이 아니라, 그냥 시끄러운 하루가 될 것이라는 암시였나. 참 개같다. 이소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뇌까렸다.
* * *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이소는 가라앉은 기분을 어떻게든 끌어 올리려 애를 썼다. 해수가 그림을 그려 왔을 때도 다정하게 답했고 정숙이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도 속이 별로 좋지 않다는 핑계로 웃으며 거절했다. 티가 많이 나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연신 이소에게 오늘따라 아빠 기분이 좋아 보인다며 농담도 많이 했다. 이소는 정숙에게 해준을 만나고 오겠다고 말하며 신발을 구겨 신었다. 해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충동적으로 ‘치킨 시켜 줄까?’ 묻자 그제서야 배시시 웃으며 TV로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데크 계단에 앉아 하염없이 골목만 쳐다봤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기다리듯 그렇게 쪼그려 앉은 채 한 사람만 기다렸다. 해준이 오면 할 말이 많았다. 내가 만든 과자는 잘 받았는지, 그동안 조교들한테 밥 팔아 준 거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야 알아서 고맙다든지, 오늘 까치들이 떼로 몰려와서 신기했다든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이소의 고개가 까무룩 떨어졌다.
요새 왜 이렇게 자꾸만 정신을 놓게 되는 건지 이소도 알 수 없었다. 숨통을 꼭 죄고 있던 긴장이 풀리면 몸에 힘이 빠지면서 눈꺼풀이 감겼다. 해준을 기다려야 하는데, 지나가는 누군가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그대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묻었다.
한참 만에 코끝을 간질이는 익숙한 먹 냄새에 얼굴을 들었다.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가 선명해졌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해준은 고개를 기울이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내내 뻣뻣하게 당겨 왔던 뒷목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교수님이다.’
후드 모자 안으로 들어온 해준의 손이 이소의 귓바퀴를 덧그리며 찬찬히 매만졌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이소를 보고 있는 시선은 뱀처럼 진득하게 얼굴 곳곳을 핥고 있는 느낌이었다. 예의 상냥한 어조였던 해준은 오늘따라 낮고 차분하게 뇌까렸다.
“길고양이도 아니고, 아무 데서나 잠드는 나쁜 버릇이 있네.”
귀를 매만지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턱 아래 피부를 간질였다. 마치 정말로 작은 고양이를 대하듯 턱을 가볍게 쥔 채 중지와 약지로 여린 피부를 쓸어 내며 이소의 반응을 살폈다. 가르릉 소리라도 내야 하는가 눈동자를 굴려 올려다보자 해준은 눈썹을 까딱이며 원하는 대로 해 보라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나비야, 일어나야지.”
해준의 엄지가 도톰하게 올라온 입술의 얇은 살갗을 가볍게 스쳤다. 딱 간지러워서 긁고 싶을 만큼만 닿았다가 곧바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손길에 입술이 저절로 움찔댔다.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조금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손장난은 짓궂게도 계속 턱과 입을 따라 쫓아왔다. 이소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이리저리 얼굴을 피했다.
‘또 장난.’
싫다는데도 계속 쫓아오는 손가락이 성가셨다. 별안간 오기가 들어 이소는 충동적으로 해준의 손가락을 덥썩 입으로 물었다. 이로 가볍게 문 적당한 체온의 매끈한 손가락이 이소의 축축한 혀끝에 닿았다. 아, 침 묻었다. 어쩌지. 이윽고 흔들리는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세게 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해준은 말이 없었다. 역시 선을 넘었나 보다, 당황을 뒤집어쓴 이소가 우선 사과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교수님, 아프세… 으흡!”
벌어진 입술에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준의 몸이 주저앉은 이소에게 덮쳐들었다.
입술에서 빠져나간 손가락이 강하게 턱과 볼을 그러쥐었다. 머리칼 사이로 파고든 손바닥은 유연하게 이소를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고개가 젖혀지자 살금 벌어진 입술 새로 더운 숨이 부딪혔다. 꾹 옹송그리고 있었던 팔을 풀어 다급하게 해준의 코트 깃을 잡자 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손이 느리게 내려와 볼을 감쌌다. 일전에 손등에 짧게 내려앉았던 입맞춤보다 더 깊고 집요하게 따라붙은 접촉에 이소는 끌어당기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하, 하으.”
입맞춤이 농밀해질수록 등 뒤로 쿰칠쿰칠 전기가 올랐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떨어진 열기는 작은 케이크를 베어 물듯 다시금 한 입씩 잇새를 벌리며 파고들었다. 머릿속에 불꽃이 일어 어지럽게 꼬여 있던 생각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철물점 부부도, 빚 독촉 문자도 모두 재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별안간 주머니 속 전화가 요란한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다. 해준은 듣지 못한 건지 놔줄 생각이 없는 건지 뱀처럼 휘감은 혀로 구석구석 이소의 점막을 핥아 내고 있었다. 결국에는 밭은 숨이 차오르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이소가 어깨를 통통 치며 밀어내자 아쉬움을 남기고 해준이 떨어졌다.
입술을 문지르며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자 고 대표의 번호가 떠 있었다. 답장을 하지 않았더니 저녁에 보낸 문자에 날이 서 있었다. 15통이나 보냈는데 재깍 답장을 안 하니 열이 받았는지 전화까지 했다.
“급한 전화?”
“…아니요. 안 받아도 돼요.”
이소는 차단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제정신으로 키스를 했다. 차해준 교수와.
뒤늦게 정신이 들자 부스럭거리며 바닥을 뒹구는 낙엽마저 천둥소리를 내는 듯했다. 볼을 붉히고 후드 줄을 당겨 고개를 내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본 해준이 웃으며 코트를 펼쳐 그 안에 이소를 가두었다. 뒤에서 보면 아무도 이소가 있는 줄 모를 정도로 큰 장막에 숨은 느낌이었다. 해준이 제 몸 안에 이소를 가두곤 고개를 내렸다.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놀랐어요?”
“…….”
후드 모자 속에 얼굴을 감춘 채 몸을 웅크리고 말을 아꼈다. 키스라니, 진짜 키스했다. 키스했다고. 내가 남자랑 키스를 했다고. 진짜로 키스를 했어,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어. 침도 섞였어. 입술을 막 사과 베어 물듯이 야금야금 물었다니까! 머릿속에서 종이 댕댕 울렸다. 물론 기억이 나지 않는 언젠가 해준과 키스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술에 취해 있을 때였고, 지금은 완전히 의식이 제정신인 상태였다. 이소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해준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갑자기 키스해서 싫었어요?”
“……그게.”
“앞으로 하지 말까요?”
해준이 조용히 물었다. 이소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싫지 않았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저도 모르게 매달리고 또 팔까지 감을 뻔했다. 무슨 정신으로 입을 맞췄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시끄러웠던 속이 한결 진정됐다. 이런 일을 기대하고 기다린 건 아니었는데 뜻밖의 이벤트가 터지자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으론 물어보고 할게요. 숨지 말고 얼굴 보여 줘요.”
이소는 입술을 몇 번 짓씹더니 천천히 후드를 내렸다. 잘 익은 사과마냥 붉은 볼을 하고 시선을 내린 이소를 보며 해준은 다시 한 번씩 웃었다. 왜 이렇게 이 남자가 귀여운지 모르겠다. 해준은 코트를 내리고 천천히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오늘은 또 누가 우리 이소 씨를 속상하게 했을까.”
‘우리 이소 씨.’ 이름 앞에 붙은 우리라는 말이 뭐라고 또 귓불이 달아오른다.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작은 주먹을 감싸 쥐고 해준이 따뜻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잠든 얼굴이 시무룩해서 걱정이 되네.”
“아….”
사람 자는 얼굴이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해준은 퍽 염려 하며 물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나. 이소는 시선을 떨궜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어쩐지 입이 꾹 다물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준에게 매번 제 구질구질한 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애까지 딸린 자신이 사소한 일로 일일이 하소연을 하면 해준이 완전히 질려 버려서 만나러 와 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이소는 고개를 들고 억지로 입꼬리를 당겼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괜찮아요.”
“정말?”
문득 골목이 걷고 싶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어두운 골목 쓰레기통 사이사이에 툭툭 버리고 오고 싶었다. 그렇게 무단투기한 제 감정과 마음의 짐을 내버려 두고 해준과 걷고 싶었다.
“네. 진짜로 괜찮아요.”
이소는 해준을 향해 웃었다. 해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소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더 캐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도자기처럼 잘 다듬어진 매끈한 손바닥이 가로등 불에 반사되어 희게 빛났다.
“그럼 이리 좀 와 볼래요? 보여 줄 게 있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또 그 손에 제 손을 포갰다. 너무 따뜻하고 포근해서 아주 조금만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작은 생쥐가 커다란 케이크를 파먹듯, 언젠가 인간의 빗자루에 맞아 죽더라도 당장의 달콤함이 너무 고팠다. 해준이 주는 애정은 꼭 그만큼 달았다.
* * *
해준의 손을 잡고 걸어간 곳에 전에 해준이 타고 온 것과는 다른 세단이 있었다. 미끈하게 빠진 외관과 마치 방금 갈아 끼운 것같이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타이어가 갈라진 콘크리트 위에 서 있는 모습에 이질감이 들었다. 해준이 다가가자 운전석이 열리더니 멀끔하게 차려 입은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소 역시 엉거주춤 허리를 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해준은 잡고 있는 손을 끌어당겨 손등을 두드렸다. 이소가 고개를 들자 ‘잠시만 여기 있어요.’ 하고 속삭였다. 천천히 손을 놓자 미련없이 빠져나간 온기가 아쉬웠다.
해준은 남자에게 작은 쇼핑백을 받은 후 차 뒤로 걸어 나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민트색 쇼핑백이 해준의 손끝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바로 건네줄 줄 알았는데 해준은 ‘아, 이걸 먼저 보여 줘야지.’ 하더니 다시 차의 뒤쪽으로 다가가 트렁크 버튼을 가볍게 당겼다. 걸쇠의 잠김이 풀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골목을 울렸다.
“내가 이런 건 보는 눈이 별로 없어서, 주 기사님한테 부탁해서 같이 다녀왔어요.”
“뭔데요?”
“주 기사님이 초등학교 들어간 딸이 하나 있거든.”
활짝 열린 트렁크 안에는 가지런하게 눕혀진 고급스러운 흰색 바디의 자전거가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이소는 저도 모르게 입술 새로 아,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옅은 갈색 안장, 자동차 타이어만큼 두꺼운 타이어, 부드럽게 마감된 핸들 바와 체인 가드까지 완전히 새것이었다. 자전거 옆에는 함께 착용할 헬멧과 무릎보호대까지 있었다. 찬찬히 자전거를 훑어보다 돌연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디의 안쪽에 은색으로 새겨진 딸의 이름이었다.
[윤해수]
이소는 한참을 그 세 글자를 매만졌다.
‘윤해수…. 윤해수라고 써 있어.’
까슬까슬한 질감으로 새겨진 해수의 이름과 그 옆에 새겨진 자신의 전화번호를 보며 생각지도 못한 세심함에 감탄했다. 눈과 비가 와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해수가 아마 이걸 본다면 소리를 지르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겠지. 땅이 울퉁불퉁하고 더러운 골목에서 타기가 아까울 정도로 값비싸 보여서 어디 길이 잘 닦인 공원이라도 싣고 가서 조심조심 타야 할 것 같았다. 자전거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없이 안장과 바디를 만지작거리는 이소를 보며 해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역시 공주가 그려진 걸 샀어야 했나…? 근데 요새 여자애들은 꼭 분홍색 사 주는 건 아니라고 하던데….”
해준이 기사님을 흘기며 이소의 표정을 살폈다. 답지 않게 불안해하는 해준을 보자 옅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마음이 들지 않을 리가 있을까.
“아니요…. 너무 예뻐서 그랬어요. 진짜 엄청 예뻐요.”
“다행이다.”
이소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해준은 입가를 시원스럽게 끌어 올려 웃었다. 꼭 좋아하는 아이에게 들꽃을 건네준 후 안심하는 소년과 같은 얼굴이었다. 이소와 눈이 마주치자 해준이 손목에 걸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미 자전거로 받을 선물을 다 받은 것 같은데 또 무언가 손에 쥐어지자 이소는 말도 못 하고 연신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이건 우리 이소 씨 거.”
쇼핑백과 해준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이소는 조심스레 입구를 열어젖혔다. 정사각의 작은 상자가 보이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곤 당황한 모습을 보며 해준은 비식 웃었다. 이제야 좀 선물을 주는 재미가 있는 반응이었다. 이소가 선뜻 상자를 열지 못하고 머뭇대자 해준이 턱짓으로 채근했다.
“빨리 열어 봐요.”
“저… 이거, 설마…. 벌써….”
“응?”
이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옆에 기사님도 계시는데 여기서 어떻게 열어 보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고백도 제대로 못 했고, 아니 그 전에 우리가 벌써 이런 귀한 것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던가. 방금 키스했는데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소가 입술을 움찔대며 할 말을 찾자 해준은 뒤늦게 이소의 짐작을 알아채고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아, 실망시켜서 어쩌지. 프러포즈는 아닌데.”
해준이 짓궂게 대꾸하자 이소는 그제서야 제가 김칫국을 마시다 못해 김장독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요, 안 놀릴 테니까 열어 봐요. 빨리.”
이소는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눈에 들어온 것은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시계였다. 상자 옆에는 보증서로 보이는 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속으로 더듬더듬 읽으려고 했지만 제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라 고개만 갸웃하고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해준은 시계보다 종이 쪼가리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이소를 보며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요.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손목 줘 봐요.”
이소는 썩 얌전히 손목을 내밀었다. 해준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처음에는 밥 한 끼만 사 주어도 손사래를 치던 사람이 이제는 주는 대로 일단 얌전히 받는 것으로 길이 들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가볍게 감싸 쥔 뒤 시계를 꺼내 작은 주먹 사이로 통과시키자 흰 피부에 제법 잘 어울렸다. 남자라면 으레 있을 법한 체모도 하나 없는 매끈한 손목이었다. 해준은 두 손으로 이음새를 걸어 잠갔다. 흘러내리는 일도 없이 맞춘 듯 꼭 맞았다.
“잘 어울린다.”
이소는 말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 선물 받은 플라스틱 전자시계를 제외하고 제 손에 무언가 채워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시계는 고사하고 사치품처럼 무언가 몸에 걸치는 것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거 엄청 비싸지 않을까, 스크래치라도 나면 어쩌지, 이런 것을 막 받아도 되는 걸까. 불안한 눈으로 손목만 쳐다보고 있는 이소를 보며 해준이 다정히 속삭였다.
“받아도 돼요.”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양 잔잔하게 다독이는 말투였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건 그냥 받아요.”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아 바보같이 입술만 움싹이고 있자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런 해준을 올려다보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나에게 뭔가 주기만 하고도 그렇게 만족스럽게 웃는 이유가 뭔가요? 해준이 주는 선물들이 한두 푼이 아니라는 것은 무지한 제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행한 멀끔한 인상의 운전기사나 금박 로고가 박힌 쇼핑백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사서 자신에게 안겨 주는지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보답할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매번 부담감이 먼저 고개를 들곤 했다.
“저….”
하지만 숨을 고르고 거절을 하려 눈을 마주치면 저를 보는 온기가 가득한 시선에 말문이 막혔다. 마치 원래 받아야 할 것을 당연히 주고 있다는 듯 반짝이는 눈을 하고 제 반응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차마 다시 가져가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해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 같지만 그의 천진한 표정을 바라보면 선물을 준 사람이 그가 아니라 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소는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마음에 들어요.”
한마디에 고른 치아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는 해준의 얼굴을 보면 마음속에 근거를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마치 고맙다는 한마디로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을 다 한 듯한 그런 고양감이 끓었다.
“다행이다. 마음에 안 들까 봐 얼마나 긴장했는지.”
해준이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그런 해준을 보며 이소는 웃었다. 오후의 우울이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 * *
옆에서 바라보던 주 기사 역시 숨을 돌리며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제저녁부터 백화점에 같이 가자더니 별안간 발도 들이지 않던 레저 코너에 가서 어린이 자전거부터 몇십 대를 보았는지 모른다. 초등학생 딸이 있기는 하지만 동네 작은 가게에서 십만 원짜리 자전거를 산 경험이 전부였다.
그것도 주인이 요새 여자애들 사이에서 제일 잘나가는 것이라길래 태워 보지도 않고 구매했었다. 그런데 해준이 데려간 곳에서 제 월급만큼 비싼 자전거를 줄 세워 놓고 이것은 안장 색이 마음에 안 든다느니, 이것은 타이어 폭이 너무 좁아서 넘어지겠다느니 까다롭게 굴다가 종래에는 보조 바퀴 색까지 모조리 바꾸는 해준을 보며 도대체 누구에게 선물을 하길래 저렇게 공을 들이나 했다.
포장된 상품을 들고 온 직원을 보며 ‘그 사람이 바빠서 조립할 시간이 없으니 여기서 조립한 제품을 가져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한 해준은 그대로 매장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시계 매장을 둘러보았다. 분명 문준경 집사는 차 교수는 성정이 게으르고 무언가 직접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러나 시계 하나를 고르는 데 한 시간 반이나 서서 직원에게 까탈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리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저려 왔다.
그리고 그 공들여 산 시계와 자전거를 난생처음 보는 젊은 남자에게 갖다주었다. 어두운 밤 골목에서 해준의 손을 잡고 나타난 남자는 얼핏 보면 키가 크고 머리 짧은 여자로 보일 만큼 얼굴이 희고 선이 고왔다. 무슨 말을 해도 크게 놀라거나 호들갑 떠는 기색도 없이 느릿느릿 반응했지만 해준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둘 사이가 평범한 친구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나이 든 저도 알 수 있었다.
“비밀로 해야겠지….”
고용주의 취향을 예고도 없이 알아 버린 지금 운전석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혹여나 차 뒤에서 키스라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는 일이었다.
* * *
해준은 주 기사에게 이소의 집 앞에 자전거를 갖다 놓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소는 손사래를 치며 기어코 제가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우겼다. 그 잠깐 사이에 누가 가져간다고 그러냐는 해준과 이 동네는 가게 앞에 우유만 내놔도 순식간에 없어진다고 말하는 이소의 실랑이가 잠시 이어졌다. 결국 주 기사를 보낸 후 자전거 바퀴가 땅에 닿을까 애지중지하며 가게 앞까지 들고 온 이소는 가게 문을 열고 자전거를 카운터 앞에 세워 둔 후 커다란 천을 가져와 덮은 후에야 안심하고 돌아섰다. 그 모습을 바깥에서 구경하며 해준은 귀여워서 웃음을 참았다.
가게 문이 잘 잠긴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이소는 다시 해준의 옆에 섰다. 아까는 분위기에 취해 입도 맞추고 손도 잡았지만 잠도 깨고 정신이 돌아오자 미묘하게 어색함이 감돌았다. 물론 해준은 별생각 없이 팔을 벌렸지만 이소는 어쩐지 뒷덜미가 당겨 해준을 무시하고 골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나지막이 해준의 웃음소리가 등 뒤로 따라붙었다.
“왜요, 왜 그냥 가요.”
이소가 말없이 삼 층을 올려다보자 해준의 고개도 함께 따라갔다. 정숙의 거실이 아직도 환했다.
“안 자고 있을까 봐?”
“혹시라도 볼까 봐요.”
“이 골목만 지나면 안 보일 텐데.”
그렇게 말한 해준이 벽을 돌자마자 이소의 손을 끌어당겼다. 다시금 집요하게 얽힌 손가락이 손등을 덮었다. 손이 작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해준과 손을 잡으면 그의 손바닥 안에 제 주먹이 쏙 들어갔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해준이 어린아이처럼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잡힌 손의 팔목에 찬 시계가 가로등에 반사되어 골목에 빛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정말 별것도 아니었는데 해준이 ‘저거 봐요.’ 하고 가리키자 이소 역시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별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골목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이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걷다가 막히면 다시 돌아서 또 왔던 길을 걷고, 새로운 골목이 나오면 방향을 틀어 걷기를 계속했다.
“이 동네는 참 사람이 없어요. 그쵸.”
“네.”
“빈집도 많고, 가로등 불은 고장 난 것투성이고요.”
“사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요.”
“무섭지 않아요?”
“괜찮아요.”
“그런 것치곤 손은 꼭 잡고 안 놓고.”
“무서워서 잡은 건 아닌데….”
보란 듯이 손깍지를 낀 채 손을 흔드는 해준을 보며 무슨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 알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이소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저도 가게 문을 일찍 닫기 시작한 것이 동네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번화가로 나가면 아홉 시까지도 장사하는 집이 허다했는데 이 골목은 큰 도로가 두 블록 건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재개발이 고꾸라지고 나서 낡은 집에서 사는 것에 질린 사람들이 부리나케 떠나 버려진 동네. 그만큼 떨어진 집값이 오히려 이소에게는 득이 되었다. 이런 동네에 겨우 터를 잡고 살 수 있게 된 저와 정숙은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긴장이 풀어진 이소는 골목을 걸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읊었다. 백설기를 빼앗아 간 까치 이야기도 하고 조교들에게 주었던 도시락 이야기도 했다. 조교들에게 밥 먹으라고 아예 카드를 주었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어찌나 생소한 개념처럼 느껴졌는지를 주절주절 읊었더니 오히려 해준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어요.”
“왜요? 전 많이 주문해 주시면 좋은데….”
“주문이 많으면 이소 씨가 돈은 조금 더 많이 벌긴 하는데, 그거 만든다고 잠도 줄이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니까.”
해준이 돌연 이소의 옆구리를 가볍게 쿡 찔렀다.
“이렇게 말랐죠.”
한 손이 잡힌 채로 옆구리를 찔리자 놀라 파드득 몸을 움츠렸다. 내내 굳어 있던 얼굴 표정이 풀리며 놀란 눈으로 올려다본 해준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하루 종일 이 얼굴을 보려고 오후 시간을 죽이며 보냈다. 해준을 만나기 전에 제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고작 이 사람을 알게 된 지 두어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해준이 없는 제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자꾸만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지고,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정숙에게도 들지 않았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다른 일은 없었고요?”
“다른 일….”
문득 목이 시큰해진 이소는 잠시 고민했다. 말할까 말까. 괜히 또 걱정할 텐데. 그러나 이소가 골몰하는 표정을 기민하게 알아챈 해준이 ‘응, 말해도 돼요.’ 하고 손을 꼭 쥐었다. 그 말에 이소는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무거운 응어리를 넌지시 꺼내 놓았다.
“저번에 저를 때렸던 사람이요.”
“응. 그 나쁜 사람 또 왔었어요?”
“오늘 이사 갔어요.”
이소는 숨을 들이켰다.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다른 이야기 해요.’ 하기에는 내뱉은 말의 파력이 강한 편이었다. 이소는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눈썹을 까딱였다. 느리게 땅을 훑는 눈동자는 적절한 단어를 고르려 애쓰고 있었다.
“어디에서 많이 다쳤는지 다리랑 팔도 부러졌고….”
“결국 벌 받았나 보네요.”
동정심은 일말도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 그럴 만했다. 그날 이소의 얼굴은 정말 누가 봐도 피떡이었으나 이소는 딸과 정숙이 해코지를 당할까 봐 고소도 신고도 하지 않았다. 해준은 그 밤 때린 놈에 대해 몇 번 물어보다 이소가 입을 열지 않자 그냥 부둥켜안고만 있었다. 이소는 깍지를 껴 맞닿은 해준의 엄지손가락을 느리게 매만졌다.
“근데 생각지도 못하게 사과도 받긴 받았어요.”
“미안하다고 해요? 그 사람이?”
“그냥 좀 애매했어요. 꼭 누가 시킨 것마냥 굴고…. 아무튼 진심은 아닌 것 같았구.”
“거참 갱생의 여지가 없는 인간이네. 이소 씨 기분이 그래서 계속 가라앉아 있었구나. 사과받으면 기분 좋아야 하는데.”
해준은 어쩐지 조금 불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 그렇긴 한데.”
해준이 혀를 차자 이소는 볼을 긁적이며 남자의 얼굴을 상기했다. 그런가,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나는. 분명 씩씩거리며 저를 노려봤던 그 눈에 맺힌 원망을 읽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두렵다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긴 적도 얕잡아 본 적도 없이 살았지만 그 순간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이 낯설었다.
“처음인 것 같아요.”
이소는 다시 한번 남자의 축 처진 등을 떠올렸다. 해준과 함께 걷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누군가가 제 앞에서 등을 보이고 돌아선 것도, 제가 떠나지 않고 살던 곳에 멀쩡하게 남은 것도.”
떠나는 트럭과 커다란 짐만 챙긴 채 어수선하게 비워진 가게.
“항상 도망치는 건 제 쪽이었거든요.”
이소는 골목 어딘가를 응시하며 눈을 깜박였다. 생각보다 구설수가 많을 팔자, 화풀이 상대, 동네북 같던 제 삶.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웠지만 그저 박복하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해준이 잡은 손을 들어 이소의 뺨에 꼭 댔다.
“지금은 어때요? 그 사람 많이 신경 쓰여요?”
“아니요. 신기하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 사람도 그냥 보통 사람인데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나는 왜 그렇게 겁먹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저 교수님, 근데 제가 좀 이상하게 보이실 순 있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무슨 다 큰 남자가 그런 별일 아닌 걸로 신경을 쓰느냐고 하겠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이게 정말로…. 되게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철물점 사장이 어기적거리며 트럭에 올라타는 모습을 볼 때 제가 느낀 것은 동정과 후련함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었다. 거대한 덩치로 작은 동네를 휘어잡던 터줏대감은 어디선가 만신창이가 되어 초라하게 퇴장했다. 심지어 그렇게 쥐잡듯 두들겨 팼던 남자에게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드는 감정은 통쾌함보다는 당혹감이었지만 남자가 떠나고 난 뒤 미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이해해요. 마음이 단단해지는 건 사실 시간이 엄청 필요한 거거든요.”
해준이 공감해 주자 이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답했던 속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힘이 풀어진 손은 해준의 손톱에 닿은 채 의미없이 단단한 피부를 매만지고 있었다. 단정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손 끝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해준이 잡은 손을 토닥였다.
“오늘 그래서 유달리 힘이 없었구나. 그 사람이 대거리하고 가 버려서.”
“죄송해요.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왜요. 언제든지 답답한 일 있으면 말하라고 했잖아요. 다 들어 준다니까.”
“아하하, 아니에요. 앞으론 제가 잘 넘기면 돼요. 그냥 교수님은 잊어버리세요.”
이소가 쓰게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돌연 해준이 이소의 어깨를 꼭 잡고 몸을 돌렸다. 마주 본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이소 씨.”
“네.”
“아픈 곳은 치료하면 그만이고, 억울하게 맞은 건 법으로 처리할 수 있어요. 속이 안 풀리면 내가 맞은 것보다 더 때리고 까짓거 돈 더 물어 주면 그만이에요. 참는 것도 좋지만 매번 속에 담아 두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제게는 물어 줄 깽값도 없었고 고소를 진행할 만한 지식이나 의지도 시간도 부족했다. 이소가 대답을 못 하고 서 있자 해준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단호하고 부드럽게 내뱉었다.
“못하겠으면 나한테 다 말해요. 내가 도와줄게요. 이소 씨는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선을 확실하게 그어 줄게요.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어요. 무서울 수도 있고. 그럼 속에 담아 두지 말고 내 뒤에 숨으면 돼요. 내가 이소 씨 대신 해 주면 되지. 내가 가르쳐 주고, 잘 할 수 있게끔 격려해 줄 거예요.”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선의는 의문을 낳는다. 이소는 눈을 깜빡였다. 묻고 싶다. 교수님, 혹시 저 때렸던 철물점 주인에게 가서 겁주거나 그러신 적 있으신가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해준이 나서서 도와준다고 말하니 어쩐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들었다. 왜, 왜 내게 이렇게까지 잘 해 주는 거지.
“……교수님이 왜요?”
마주한 두 눈동자가 대답을 잃고 일렁였다.
“…우리가 친구라서요?”
친구라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니면 손을 잡고 품에 안아 주고 입을 맞추는 사이라서 자신의 뒤에 스스럼없이 숨으라고 하는 걸까. 해준은 알까, 요 근래 해준만 보면 자꾸 시끄러워지는 제 속을. 일평생 성별에 관계 없이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해 본 적도 없었기에 해준이 주는 호의가 너무 벅차고 감사해서 제가 착각하는 건 아닐까 불안함이 불쑥 치솟는다.
친구라고 했으면서 왜 자꾸 손을 잡고, 왜 자꾸 안아 주는 건지. 그런데 왜 자신은 그게 싫지 않은 건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제가 짐작하는 관계가 맞을까. 나만 그런 건가. 해준에 대한 호감과 동경만 커지기 전에 적당히 선을 그어야 할까. 이소가 한참 동안 말을 고르며 입술을 달싹이다 가까스로 제 생각을 전할 때였다.
“그런데요, 교수님. 보통 친구끼리는 키스를….”
“마음이 가서 그래.”
해준의 고개가 부드럽게 기울어져 이소의 눈을 좇았다. 바닥만 쳐다보던 이소의 시선이 당황에 물든 채 해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소 너한테 자꾸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서 그랬던 건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
가까이 다가온 해준이 이소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넘겼다. 마음이 간다는 말 한마디가 주는 파력이 너무 컸다.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해준이 살포시 잡은 뺨을 끌어당겼다. 놀랄까 봐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표현이 부족했나. 나직이 읊조리는 말에 눈을 깜빡이고 올려다보자 어두운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그게 아니면, 내 마음은 아는데, 네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분명 골목에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해준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해준의 입술이 천천히 포개졌다. 이소 씨, 해준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제 이름은 언제 들어도 포근한 울림을 준다.
“친구끼리는 손 안 잡아요. 그렇죠?”
웃음을 매달고 가볍게 떨어진 입술은 다시 한번 혀를 핥고는 떨어졌다.
“품에 안아서 재워 주지도 않고.”
“…….”
살짝 닿은 코끝이 간지러웠다. 이소는 제 후드티 끝을 말아 쥐고 숨을 참았다. 해준이 코끝을 부비며 웃었다.
“이렇게 키스도 안 해요. 알잖아.”
깊게 참은 숨을 토해 낸 이소가 눈동자를 들어 천천히 눈을 마주친다. 애정을 가득 담은 두 눈이 저를 내려다보는 것을 확인한 순간 목이 메었다. 눈을 보면 마음이 보인다는데, 꼭 제가 해수를 볼 때처럼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해준이 믿기지가 않아 한참을 올려다봤다.
“진짜 저 좋아하세요…?”
“이소 씨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 손잡고 키스도 해요?”
“……아뇨.”
“나도 그래요.”
이소가 당황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 해준이 이마를 꽁 부딪혀 왔다. 흣, 하고 눈을 질끈 감자 해준이 이소의 볼을 잡고 살짝 늘렸다 놓았다. 아주 작게 원망이 섞인, 그러나 가볍게 조르는 듯한 어조로 부탁했다.
“그러니까 이소 씨가 힘들거나 아프거나, 짜증 났을 때나 슬플 때.”
“…….”
“기왕이면 행복하고 즐거운 일까지도 모두 다 말해 주면 난 좋을 거 같은데.”
해준이 검지를 들어 이소의 볼을 꾸욱 눌렀다. 말랑말랑한 볼이 광대까지 한껏 올라와 짜부라진 찐빵처럼 되어 버렸지만 해준은 퍽 귀엽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이소는 해준이 하는 양 가만 놔두며 눈을 맞췄다.
“그렇게 해 줄래요?”
불어오는 미풍에 해준의 냄새가 섞인 것 같다. 저녁 내내 해준과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있어서 그런 걸까.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과 맞닿은 살갗의 체온 등 이소가 신경 쓰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해준을 거쳐 전달되었다.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다 말할게요. 상냥하게 바라보던 해준이 낮게 웃으며 이소의 머리를 안고 깊게 끌어안았다. ‘착하다, 예쁜 대답 아주 잘 했어요.’ 고작 그렇게 한다는 말 한마디에 쏟아지는 칭찬과 격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이를 먹고 오랜만에 사소한 행동 하나로 과분할 정도의 칭찬을 받았더니 자꾸만 발이 둥둥 뜨는 느낌이다. 칭찬은 좋은 거구나, 격려를 받는다는 건 행복한 거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이소는 천천히 팔을 들어 해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안온했다. 이 사람이 좋아, 이 사람이 가르쳐주는 사랑이 좋은 것 같아. 이소의 마음에 어린아이 같은 맹목적인 애정이 퐁퐁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