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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는 늦은 아침 눈을 떴다. 전에 없이 몸이 가뿐했다. 어젯밤 에는 꼭 돌아가신 부모님이 저를 꼭 안아 주는 것 같은 꿈을 꾸었더니 기분이 배는 좋다. 항상 창밖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올 적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침밥을 하고 가게 오픈 준비를 했다. 해수를 깨워 원에 보낼 준비를 하기까지 매일 아침은 전쟁이었다. 늦게까지 잘 수 있었던 날은 몸살이 나서 죽을 만큼 아팠을 때 말고는 없었다. 이렇게 쫓기는 것 없이 눈을 뜰 수 있는 아침이 있다니, 과거의 윤이소가 보면 부러워서 몸을 배배 꼴 것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등이 다 배겼다. 누런 장판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핸드폰에서 정숙의 전화가 울렸다. 해수도 간만에 고기를 잔뜩 먹고 늦잠을 자고 있으니 조금만 더 쉬다가 아침 먹고 천천히 이동하자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차 교수가 꽃구경 가자고 어제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소는 웃음이 났다. 정숙은 그냥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한 말을 순진하게 잘도 믿었다.
“차 교수님이 우리랑 왜 꽃구경을 가요.”
“갈 건데요.”
낡은 욕실 문이 열리면서 몸을 한껏 숙인 채 방으로 들어온 해준은 젖은 손을 털었다. 저 사람이 왜 저기서 나오지? 이소가 너무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리지도 못하고 해준을 올려다봤다. 수화기 저편에서 정숙이 ‘뭐야, 차 교수 옆에 있어? 차 교수가 안 간대? 간대, 안 간대?’ 하고 날카롭게 묻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해준이 통화를 마저 하라며 턱짓을 했다.
“가신대요….”
- 그럼 그렇지! 어제 나랑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니까. 간만에 멋 좀 부려야겠네. 아침 먹고 열 시쯤 넘어갈게.
이소는 그러세요, 하고 전화를 끊은 뒤 해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 낡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어제와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제집에 있었다. 해준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이소는 얼른 일어나 이불을 개켰다. 방에서 같이 잔 건가, 아니면 집에 갔다가 온 건가. 정말로 같이 꽃구경을 갈 생각인 건지,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인지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는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잘 잤어요?”
“아…. 네, 어제는 제가 잘 잤….”
해준이 주방에서 종이 쇼핑백을 부스럭거리며 여상히 물었다. 그 말에 이소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해수를 정숙이 데려가고, 저와 해준은 평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하다가 술이 조금 올랐다. 해준이 바싹 다가왔고 제 입가의 밴드를 떼어 주고 코를 툭 쳤다. 아, 기억났다. 되지도 않는 요구를 했고 아기 안듯 저를 허벅지에 앉힌 해준의 품에서 잠이 든 것까지 모조리. 이소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방금 개킨 이불에 머리를 묻었다.
“아….”
“다행히 기억하나 보네요.”
“어떡해….”
“괜찮아요. 기분 나아졌으면 됐죠.”
겨울 눈밭에 머리를 묻은 꿩마냥 서랍 위에 올린 이불에 머리를 쿡 박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소를 보며 해준은 피식 웃었다. 매번 이런 식이면 놀려 먹는 재미가 상당하겠는데, 생각하며 아침에 행랑채 조리방에서 받아 온 해장국을 꺼냈다. 문 집사가 이번에 꽤 손맛 좋은 사람을 들였다 한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자개가 새겨진 붉은 찬합에 담긴 뜨끈한 국물이 벌써부터 식욕을 돋웠다.
밤과 대추, 콩과 은행이 소담하게 올라간 찹쌀밥과 갓 구운 조기, 정갈하게 담은 백김치까지 차곡차곡 꺼내며 이소네 오래된 밥상을 찾아다 올렸다. 새벽녘에 전화해서 잠을 깨운 것치고는 종류와 정성이 적지 않은 찬이었다.
이소는 붉어진 목덜미를 썩썩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이게 다 뭐예요? 사 오신 거예요?”
“집에 잠깐 갔다 왔어요. 사장님 아침에 일어나면 먹이려고.”
“교수님이 만드신 거예요?”
“그럴 리가요. 나 요리 젬병인데.”
아, 그럼 교수님도 부모님이랑 사시는구나. 멋대로 짐작한 이소는 젓가락을 받아 들고 찬합을 내려다보았다. 정갈하게 담긴 찬은 감탄을 자아냈다. 찹쌀밥에 해준이 찢어 준 조기를 얹어 한입 삼키자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 안으로 사르르 밀려 들어갔다. 초밥도 그렇고 해준이 가져오는 음식들은 모두 부드럽다 못해 솜사탕마냥 살살 녹았다.
해장국은 또 얼마나 얼큰한지 국물을 떠 마실 때마다 칼칼한 청양고추 맛에 느끼한 속이 다 풀어졌다. 반숙으로 익은 계란까지 베어 먹고 나니 가슴께에 땀이 뻘뻘 났다. 정신없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비로소 제 앞에 해준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가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을 묻히고 들이켜는 저에 비해 해준은 소리도 없이 퍽 얌전히도 먹었다.
다 먹고 설거지를 하려고 하니 해준이 해수 오기 전에 씻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이소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양이 얼마 되지도 않아 제가 금방 하면 되는데 굳이 등을 밀어내는 통에 설거지를 맡기고 씻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10분도 안 돼서 씻고 나오는데 어쩐지 해준이 같이 꽃구경을 간다고 하니 신경이 쓰여 평소보다 더 꼼꼼히 씻었다. 이도 두 번이나 닦고 비누로 귀 뒤까지 깨끗이 문질러 닦았다. 거울을 보자 어젯밤 잠을 잘 자서 그런지 말간 얼굴이 꽤 나쁘지 않았다.
머리를 털어내고 방으로 들어오자 옷에 물기가 범벅이 된 해준이 설거지를 엉망으로 해 놨다. 분명 닦아 내기는 한 것 같은데 싱크대 전체가 물바다였다. 이소는 해준이 무안할까 봐 마른행주로 물기를 닦아 내며 그릇을 정리했다. 어느새 쇼핑백을 정리한 해준이 제게 해수가 쓰는 작은 로션을 내밀었다.
“로션은 왜요?”
“얼굴 터요. 발라요.”
“이거 해수 건데…. 제가 쓰는 건 저거예요.”
이소가 화장대 뒤에 있는 대용량 로션을 가리켰다. 해준은 성큼성큼 가서 로션을 펌핑하더니 손바닥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소가 의아한 표정으로 해준을 바라봤다.
“이 냄새가 아니었는데….”
“아, 가끔 해수 씻기고 저도 손에 집히는 대로 막 바를 땐 그거 가끔 써요. 근데 비싸서. 하하하, 안 발라야 하는데 자꾸 그러네요. 아무튼 제 거는 저거예요.”
이소가 손바닥을 내밀고 로션을 달라고 하자 해준은 영 탐탁잖은 얼굴로 아기 로션만 내밀었다. 이소가 눈을 깜빡였다.
“저 큰 통이라니까요.”
“이거 발라요.”
“안 돼요, 이거 비싸다고요.”
“내가 더 사 줄게요. 오늘은 이거 발라요.”
“아니 교수님이 왜 사 주세요, 빨리 주라니까요. 아 진짜….”
몇 번 실랑이를 하다가 고집을 부리는 해준을 이길 수는 없어 해수의 로션을 짜서 얼굴과 목에 펴 발랐다. 이제 정말 쓰지 말아야지, 향이 좋아서 저도 바르고 싶지만 손바닥만 한 통에 만 원 가까이나 하는 통에 해수에게도 아끼고 아껴서 발라 주는 것이었다. 군데군데 펴 바르고 나자 해준은 마치 확인을 하듯 바짝 다가서 킁킁댔다. 그러고는 뭐가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이며 떨어졌다.
로션을 바르고 서랍장을 열었다. 영 입을 옷이 없었다. 이소는 사계절 가진 옷이 서랍장 한 칸에 다 들어갈 정도로 적었다. 그래도 날이 따뜻해져 즐겨 입는 카디건만 걸치면 될 정도지만 어제 밥을 먹으며 고기 냄새가 너무 배어서 영 입고 나가는 게 찝찝했다. 자기 전에 벗어 밖에 걸어 둘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서랍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뒤로 다가온 해준이 이소의 몸을 잡고 살짝 돌렸다.
“100? 아니면 95?”
“뭐가요?”
“옷 사이즈요.”
“95요. 앗!”
순순히 대답한 이소의 머리 위로 병아리처럼 샛노란 스웨터가 쑥 들어왔다. 너무 놀라 몸부림을 치자 해준은 얕게 웃으며 이소의 두 팔과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그대로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붕 떴다가 내려앉은 후 시선이 멈춘 곳은 욕실 앞 거울이었다.
“딱 맞네.”
항상 탁한 색의 옷을 입었던 이소는 제 몸에 걸쳐진 밝고 화사한 색의 스웨터가 영 어색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뜯어 보니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꺼끌꺼끌하고 빳빳한 질감이 아닌 부드럽게 팔과 허리를 감싸는 스웨터는 꼭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옷이 딱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이소는 생각했다.
“앞으로 밝은색 옷 많이 입혀야겠네요. 아주 잘 어울려요.”
해준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에 비친 해준은 이소의 어깨를 매만지더니 툭툭 털어 냈다. 앞으로라니, 꼭 다음번도 있다는 듯 말했다. 해준은 다른 쇼핑백에서 색이 잘 빠진 청바지를 꺼냈다. 이소는 곤란했다. 저는 줄 게 없는데 자꾸만 받기만 해서, 나중에 해준이 왜 염치도 없이 받기만 하느냐고 무어라 할까 봐 겁이 났다. 해준이 주는 선물은 이소에게는 도시락 몇십 개, 과일 몇 바구니만큼의 갚아야 할 빚처럼 느껴졌다. 곤란했다.
“교수님, 너무 감사한데….”
이소가 머뭇대며 새 청바지를 밀어냈다. 스웨터도 정말 예쁘고 좋았지만 충분히 다른 것을 입고 가도 된다. 자꾸 받기만 하면 나쁜 버릇이 들 것 같았다. 손가락을 꼬물대며 스웨터도 벗을 준비를 했다.
“제가 어떻게 계속 받기만 해요. 이것도 너무 예쁘지만 못 받아요….”
“괜찮아요. 나도 받을 거 있어요.”
아, 역시. 준 만큼 받을 거라는 해준의 말에 이소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궁상맞지만 정말 없이 사는 나날들이 계속되면 돈 없다는 소리는 부끄럼도 없이 잘도 나온다.
“저 돈 없는데….”
“사장님이 충분히 줄 수 있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옷이나 입어 봐요.”
해준이 은근하게 웃으며 다시 청바지를 밀어 이소의 앞에 갖다 두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나른하고 여유로우면서 어딘지 모르게 짓궂은 느낌이 드는 표정이었다. 턱짓을 하며 입으라고 보채자 이소가 두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아니,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
이소의 길고 흰 허벅지와 마주한 해준이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평소 뭘 주기만 해도 고맙다, 감사하다, 신세가 많았다 하도 그러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고 손을 내저었던 것이었는데. 이소는 해준의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무심하게 바지를 벗어 내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여기서 갈아입을 줄은 몰라서….”
“남자끼린데 뭐 어때요.”
노란 스웨터와 흰 양말만 신은 채 다리를 훤히 내놓은 이소가 해준이 준 새 바지를 두 발에 조심스레 꿰어 입었다. 그 모습을 해준은 고개를 돌린 채 조용히 눈으로 힐끗거렸다. 그래, 그의 말마따나 어차피 남자끼리고 속옷도 아니고 바지를 코앞에서 갈아입는 것쯤이야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쳐도, 어젯밤 그렇게 안겨 있었으면서 어떻게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굴 수 있는 건지. 이럴 때 보면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건지 저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해준은 괜히 귀를 붉혔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이소가 해준을 불렀다.
“저…. 다 입었어요.”
이소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해준의 앞에 섰다. 해준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돌렸다. 자로 재듯 똑 떨어진 기장과 색이 몸에 맞춘 듯 잘 어울렸다. 낡고 해진 옷만 보다가 보송보송하게 새 옷을 차려입은 이소를 보니 인형 놀이를 꽤 성공적으로 해낸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해준이 이소의 동그란 어깨선을 매만지며 눈을 맞췄다.
“자, 이제 내가 선물 받을 차례예요.”
이소가 긴장하며 올려다보았다. 뭘 주지, 내가 줄 수 있는 게 뭐지. 비싼 거 달라고 하시면 안 되는데. 그런 고민이 유리 같은 투명한 눈동자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해준의 입매가 긴 호선을 그렸다.
“사장님 이름이요.”
“제 이름이요?”
“그거 알아요? 친구라고 해 놓고, 나는 아직 사장님 이름도 몰라요.”
“아……. 그러네요.”
이름. 너무나도 별것 아닌 것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해준에 이소는 몹시 당황했다. 해준이 커다란 손으로 이소의 작은 귀를 매만졌다. 익숙한 온기, 차분히 매만지는 손길. 꿈이라고 하기에는 생생했던 감각은 밤의 파도처럼 저를 잔잔하게 덮쳐 온다. 혹시 지난밤에 제가 끌어안았던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라 해준이었을까. 순간 꿈인지 제 망상인지 혹은 현실이었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이소는 해준의 다정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물어보면 답해 주려나.
“저 혹시 어젯밤에요.”
“이름부터 알려 줘야지.”
아, 눈을 깜빡이던 이소는 한참을 머뭇대다 제 이름 석 자를 천천히 내뱉었다. 별로 뭐 대단할 건 없는 이름인데 왜 여태 안 알려 주었는지 저도 모를 일이었다.
“이소예요.”
“성은?”
“윤.”
“윤….”
해수 아빠도 아니고, 사장님도 아니고 윤이소. 제 이름 윤이소를 꽤 오랜만에 입에 올렸다. 그동안 제가 받은 게 얼마인데 해준은 고작 제 이름 석 자를 받고서 한참을 입에 굴리듯 읊조렸다. 이소, 윤이소. 윤 씨. 윤 씨였구나. 혼잣말로 몇 번이나 이름을 곱씹던 해준은 불안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소를 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이름도 참 예쁘네, 윤이소 씨.”
이소 씨. 해준은 이소를 그렇게 불렀다. 그냥 이름일 뿐인데 해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는 화려한 꽃잎이 한가득 붙어 있는 것 같다.
돌연 심장이 백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마냥 빠르게 뛰었다. 쿵쿵, 세찬 맥동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 귓불 아래에서 팔딱팔딱 움직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던지 이소는 제 코앞에 선 해준이 모조리 들을까 봐 가슴에 힘을 바짝 주어 조였다. 너무 세게 뛰지 말라고, 조금만 작게 뛰라고 그렇게 숨을 참았다. 이소는 그 어떤 선물보다 해준이 불러주는 제 이름이 제일 큰 선물같이 느껴졌다.
* * *
집과 조금 떨어진 작은 공원에 가려고 했건만 해준은 굳이 제 차를 타고 조금 더 멀리 가자고 제안했다. 4명이 좌석에 다 타고도 트렁크에 자전거까지 실을 수 있다는 말에 정숙과 해수 모두 크게 놀랐다. 이소 역시 차를 타고 나들이를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이소는 철물점 사모가 준 낡은 자전거를 손걸레로 닦아 낸 후 해수에게 내보였다. 어린 해수는 믿기지 않는 듯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아빠 고마워, 하고 웃었다. 그 웃음 한 번에 이소는 어제 맞은 상처들이 하나도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나, 이게 누구야.”
정숙이 노란 스웨터를 입은 이소를 보고 벙찐 얼굴을 했다. 역시 사람이 옷이 날개라더니 밝고 화사한 색의 옷을 입으니 얼굴이 산다며 추켜올렸다. 정숙이 저를 예뻐라 하는 것은 알았지만 오 분이 넘도록 호들갑을 떨어대니 무안하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이소는 돗자리와 컵라면 몇 개를 가방에 넣으며 자리를 피했다.
“차 교수는?”
“내려오신대요. 지금 통화 중이세요.”
“바쁘긴 바쁜가 봐. 근데 오늘은 수업 안 간대?”
그러게요, 이소 역시 해준의 스케줄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몇 번밖에 마주치지 못했지만 학교에 가면 으레 해준이 있는 줄을 알았고, 그게 아니면 조금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소는 항상 그랬다. 감히 다른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바쁘다 해서 들어가 버리면 바쁜가 보다, 떠난다 해서 자리를 뜨면 가야 하나 보다 했다. 오늘도 해준이 쉰다면 일정이 없고 쉬어도 되는 날이겠거니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정숙이 지적해 주자 그제서야 얕은 의문이 들었다.
“죄송해요. 통화가 좀 길었어요. 짐 다 쌌어요?”
“네.”
“차를 좀 멀리 대 놨어요. 가방은 내가 들게요.”
해준은 이소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분명히 똑같은 사람 손인데 제 손에 들려 있을 때는 꽤 부피가 커 보였던 가방이 해준의 어깨에서는 작은 쇼핑백처럼 보였다. 이소는 가게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과 해준의 등을 번갈아 보며 덩치 차이를 가늠했다. 스스로 키가 작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해준의 옆에 서니 꼭 머리 하나가 덜 자랐다. 가게 유리창을 힐끔대는 이소를 보고 해준은 큰 손을 들어 머리를 썩썩 쓰다듬었다.
“걱정 마요. 예뻐요.”
해준은 제가 새 옷이 마음에 들어 비쳐 보는 줄 알았나 보다. 이소는 작은 목소리로 그런 거 아니에요, 하곤 얼른 자전거를 꺼내 들었다. 해수는 정숙의 손을 잡고 앞서 걸었고 이소와 해준은 나란히 걸었다. 걸을 때 자꾸만 팔이 스쳐 조금 떨어져 걸을까 했지만 해준은 굳이 제 옆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낡은 자전거가 삐걱대며 발을 맞췄다. 저 멀리 완연한 봄이었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광장에 벚꽃 군락이 만개했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수북한 연분홍 꽃가지와 쾌청한 푸른 하늘이라 눈이 즐거웠다.
이소와 해준은 그늘이 진 잔디에 돗자리를 깔았다. 주말도 아닌데 공원에는 꽤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일에도 종종 시간을 내어 이렇게 여가를 보내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소만 칠 년을 휴일 없이 바쁘게 보냈다.
해수가 자전거에 올라 페달에 발을 올렸다. 안장과 핸들의 높이를 맞추어 주려 했지만 조이는 부분이 녹이 슬어 푹 하고 빠져 버리는 통에 애를 먹었다.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은 해수는 몇 번이나 페달을 놓쳐 발이 허공에 둥둥 떴다. 아직 타는 요령이 없었지만 뒤에서 밀어 주니 곧잘 재미를 느낀 해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굽힌 채 공원을 몇 바퀴나 돌았더니 진땀이 났다. 그늘에 앉아 있던 정숙이 컵라면을 다 먹었는지 이소에게 손짓했다.
“이제 내가 밀어 줄게. 와서 사진 좀 봐 봐. 교수님 카메라 엄청 신기하다.”
입가를 휴지로 닦으며 정숙이 일어났다. 이소가 자리에 앉자 해준이 손바닥만 한 사진을 내밀었다. 언제 찍었는지 저와 해수가 자전거를 타며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폴라로이드 가져왔어요. 첫 소풍이라면서요. 남는 건 사진이라잖아요.”
그렇게 말한 해준이 대뜸 이소의 얼굴을 보며 셔터를 눌렀다. 환한 불빛이 번쩍하더니 곧 흰색 필름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아무것도 안 찍혀 있어 잘못 나왔나 했는데 해준이 사진을 살살 흔들어 보라고 했다. 이소가 사진을 받아 들고 위아래로 흔들자 하얀 필름에 멍한 제 얼굴 표정이 서서히 나타났다.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매일 세수하고 거울을 보는데도 남이 찍어 준 사진으로 보니 또 새삼 느낌이 달랐다.
“어때요?”
“조금 멍청하게 나온 거 같아요.”
“참 자기 얼굴에 인색하다니까. 그럼 이건 제가 가질게요.”
그렇게 한참을 이소가 사진에 정신이 뺏겨 있는 사이 해준은 은근슬쩍 손가락을 가져와 이소의 손등 위에 살짝 포갰다. 손을 빼야 하나? 사진을 보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머뭇대다 이내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해준은 저를 보고 있었다.
“이소 씨.”
해준의 입에서 사장님이 아닌 제 이름이 나오자 입술의 침이 말랐다.
“네, 네에.”
“손잡아도 돼요?”
구석진 그늘이었지만 사람들이 꽤 많았고 사방이 탁 트인 야외였다. 손가락을 슬쩍 빼며 거절을 할 만도 한데 이소는 목 뒤만 붉힌 채 퍽 얌전히 굴었다. 그러나 얼굴은 쳐다볼 수 없는 모양인지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해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해준의 손이 건반을 두드리듯 한 번 더 성큼 올라와 손등 전체를 덮었다. 그늘에 덮여 있어 시렸던 손등 위로 순식간에 온기가 전해졌다.
“싫어요?”
이번에도 이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닿은 손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갈까 봐 불안했는지 검지손가락을 살짝 들어 해준의 새끼손가락에 걸치듯 얽었다. 이소치고는 큰 용기였다. 그 미미한 변화를 해준은 놀랍도록 잘 알아챘다. 부끄러움이 많은 이소를 굳이 놀릴 생각은 없었다.
“봄은 봄이네요. 날은 따뜻하고 아이는 할머니랑 잘 놀고, 쫓길 것 없는 휴일이고, 이렇게 손도 잡고 참 좋다, 그쵸.”
이것저것을 다 들어 좋지 않냐 묻는 해준의 말에 반박할 거리는 없었다. 이소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네. 좋아요.”
해준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사실 다른 것보다도 해준의 손을 잡고 있는 게 제일 좋았다. 차마 부끄러워서 해준을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 온기가 제 손을 타고 전해지는 게 믿기지 않아 일부러 빼지도 않고 있었다. 고작 손가락을 얽은 것뿐이지만 맞닿은 살갗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포옹을 먼저 했는데도 손잡는 것은 또 다른 느낌으로 좋았다. 따뜻한 바람이 일렁였고 그늘이 되어 주던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들이 사락사락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기왕 손이 닿은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요.”
해준은 엄지로 이소의 손등을 문지르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해준이 묘하게 웃었다.
“이소 씨만 괜찮으면 전 더 오래 그리고 자주 잡고 싶은데.”
“…….”
해준의 손이 매끄럽게 손등을 훑으며 이소의 손가락 골짜기 사이로 더듬어 내려왔다. 이내 손바닥이 맞닿으며 손가락 열 개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손깍지를 꼈다. 손깍지, 지금 손깍지를 꼈다. 이소의 호흡이 갈 곳을 잃고 자꾸만 멎었다.
“오늘은 셋 셀 때까지만 잡고 있을까요?”
“그게 뭐예요….”
“보는 눈이 많잖아요.”
공원을 걸어 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숙과 해수까지도 함께 있는 자리였다. 대낮부터 남자끼리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키지 않을 때까지만 잡고 있어 볼까 하는 얄궂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이소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 싫으면 놔도 되고.”
“교수님이 먼저 놓으실 수도 있잖아요.”
“난 안 놓을 거예요. 이소 씨가 놓기 전엔.”
여전히 제 손을 잡은 해준은 싱긋 웃었다. 단단하게 얽힌 손을 바라보며 이소는 불안한 눈초리로 해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하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수와 정숙이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자, 하나.”
“아니, 잠깐만…!”
해준은 나직이 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이소가 움켜잡았던 손을 무의식중에 빼려 움직이자 해준의 눈썹이 약하게 꿈틀댔다. 아무렇지 않게 다정하게 웃는 표정에 이소는 냉큼 시선을 거두었다. 저만 이리 불안한가, 그러는 와중에도 목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수는 몰라도 정숙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둘.”
하지만 해준이 꽉 움켜잡은 것도 아니었음에도 이소는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손을 놓아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다정하게 안아 주지도 가볍게 손잡아 주지도 않을까 봐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해수가 저를 알아보고 달려들기 직전이 되어서야 이소는 얼른 곁에 둔 카디건으로 손을 감췄다. 그리고 얼른 몸을 비켜 앉아 손을 가렸다. 뒤는 나무 그늘이 가려 줄 테고 앞에 선 해수와 정숙도 잘만 하면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 해준이 셋을 세 주면 얼른 손을 뺄 생각이었다. 해수가 땀을 닦으며 이소 옆에 둔 어린이 음료를 집어 들었다.
“아빠, 자전거 너무 재밌어.”
“아까보다 훨씬 잘 타더라.”
“응. 근데 자꾸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안 가져.”
“핸들이 자꾸 돌아가데. 중고라 그런가.”
말을 얹은 정숙이 연신 부채질을 하며 물을 들이켰다. 이소는 정숙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눈은 해준을 보며 연신 채근했다. 놔주세요, 빨리요. 그러나 해준은 영 모르는 척하는 얼굴을 하고 해수에게 말을 걸었다.
“해수야. 우리 저기 풍선 사러 갈까?”
“풍선이요?”
해준이 가리킨 공원 매점 근처에 색색의 헬륨 풍선이 가득했다. 평소 해수가 좋아하는 캐릭터까지 있었다. 이런 곳에 오면 풍선 하나에 육칠천 원씩 하는지라 매번 구경만 하다 돌아가곤 했다. 일곱 살 해수 역시 아빠의 주머니 사정에 밝은지라 빤히 풍선 있는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안 가져도 돼요. 저거 비싸요.”
“그래? 아저씨는 공주 그려진 풍선이 갖고 싶은데.”
해준이 말을 얹자 해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소는 손을 잡은 것도 잊은 채 반짝이는 딸의 눈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저라면 농담으로라도 해 줄 수 없는 말이었다.
“아저씬 남자 어른이 무슨 공주 풍선이에요.”
“공주 예쁘잖아. 그리고 어른이라서 그런지 많이 갖고 싶어. 음, 어디 보자. 우리 이렇게 할까? 아저씨가 많이 사면 해수가 좀 들어 주는 거야. 그럼 아저씨가 보답으로 해수 몫의 풍선을 나눠 주기. 어때?”
해준의 풍선을 들어 주는 것을 도와주면 보답으로 자신에게도 풍선을 주겠다니 썩 그럴싸하게 들렸나 보다. 해수가 큼지막한 눈을 굴렸다.
“아저씨가 다 들 수 없어요?”
“응. 아저씨 혼자 들기에 너무 많은걸. 손이 모자라 하늘로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그럼 내가 도와줄게요.”
해수는 꽤나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소 역시 함께 일어나려 했으나 아직도 손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껏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해준은 어깨만 으쓱했다.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다시 엉거주춤 앉자 해수가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며 물었다.
“아빤 안 갈래?”
“아, 으응. 가야지. 가야 되는데.”
말을 더듬으며 카디건 안으로 손을 꼬옥 쥐었다. 입술을 물고 손톱으로 해준의 손등을 쥐어 눌렀다. 기왕 셋까지 센 거 이소 자신도 죽어도 먼저 손을 놓지 말아야지 생각했지만, 굳이 해수가 코앞에 있는데도 해준이 고집스럽게 손을 놓아주지 않자 원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해준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자 어린 해수가 저희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져 진땀이 흘렀다.
“교수님, 빨리….”
“셋.”
마지막 숫자를 호명하고서야 이소는 숨을 몰아쉬며 카디건 안에서 손을 빼냈다. 걷어 낸 카디건 아래 해준의 손등에 빨갛게 손톱자국이 패여 있었다.
“해수야, 아빠는 조금 쉬라고 하고 아저씨랑 가자.”
이소가 땀에 젖은 손을 주무르고 있자 해준이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얼굴을 맞댔다. 긴장을 풀고 있다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지자 이소가 놀란 눈을 하고 다시 숨을 들이켰다. 해준이 이소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짓궂게 굴어서 미안.”
해준은 이소의 손등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정숙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해수를 보고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소만 공연히 얼굴이 벌게진 채 두 팔로 무릎을 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손에…. 키스했어….’
방금 전까지 손등에 닿았던 입술의 온기가 생생했다. 입술이 앉았던 자리가 간질간질했고 불에 덴 것처럼 홧홧했다. 마치 해준에게 입 맞추듯이 이소는 팔 사이에서 몰래 손등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어차피 제 체온일 텐데 꼭 촉감은 입술과 비슷했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던 이소는 돌연 제가 한 짓이 너무 변태 같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해준이 키스한 자리에 제 입술을 찍다니. 미쳤다, 미쳤나 봐. 내가 사람이 너무 고팠나. 이소는 손바닥으로 제 뺨을 꾹꾹 눌렀다.
“엄마야, 내가 못 산다. 쓸어 왔네, 쓸어 왔어.”
혀를 차는 정숙의 말에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정숙뿐만 아니라 아마 공원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같았을 것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넘실거리며 떠 있는 풍선들의 개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귀여운 공주 풍선부터 시작해서 공룡, 상어, 새, 용 등 갖가지 캐릭터 풍선을 풍성하게 둘러싼 벚꽃색의 풍선 수십 개가 두둥실 뜬 채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풍선 군락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열기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실을 모조리 쥐고 있는 것은 제 딸 해수였다. 과장이 아니라 태어나서 해수가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빠! 할머니! 나 풍선 엄청 많지! 아저씨가 저기 있는 풍선 다 사 줬어!”
달뜬 표정으로 달려오던 해수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움에 연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수가 정숙에게 풍선을 자랑하는 사이에 돗자리에 쪼그려 앉은 이소에게 해준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 많은 풍선을 해수에게 다 주고, 해준은 손에 풍선 하나를 달랑 들고 왔다. 날개를 단 천사 풍선이었다.
“이소 씨, 여기 선물.”
“…….”
“이소 씨랑 똑같이 생겼던데. 이거 봐요, 웃는 얼굴 꼭 닮았죠.”
해준의 눈에는 제가 이렇게 보이나 보다.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예쁘다 곱다 하더니 정말이었는지 말도 안 되게 귀여운 풍선을 가져와서 저와 꼭 같다고 우겼다. 이소는 풍선을 건네받았다. 해준이 주는 선물들은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너무 크고 예뻐서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가슴이 뛰다 보니 놀라움과 감격이 번지다 종래에는 코끝이 알싸하게 매워졌다.
“아…. 정말….”
이 벅찬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싫지 않아서 자꾸만 해준의 곁에 있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이소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주책맞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
해준은 말없이 내려다보다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다가온 손이 톡톡 이소의 발끝을 간질였다. 무릎 사이에 묻은 고개를 들자 긴 손가락 두 개가 걸음을 하듯 발등을 타고 올라오더니 이소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그리고 다시 제 등 뒤로 끌어다 얌전히 내려놓았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아주 은밀한 스킨십이었다.
이소는 그 손가락을 꼭 쥐었다. 그리고 그 큰 등에 몸을 숨기고 연신 훌쩍훌쩍 코를 훔쳤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시상식에서 배우들이 상을 받고 그렇게나 우는 게 참 이상해 보였는데. 상 받고 좋은 날 왜 저렇게 서럽게 울까. 그런데 정말이었다. 기쁘고 벅차서 눈물이 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었다.
* * *
그런 날이 있다.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아도 가뿐하게 눈이 뜨이는 그런 아침. 어수선한 악몽을 꾼 것도, 스트레스와 고민으로 밤잠을 설친 것도 아닌 기대감으로 하루가 시작하는 그런 날이 있다. 이소는 돌아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해수의 어린이집과 정숙의 전화번호, 진혁, 그리고 일 있을 때만 연락하는 식자재마트 사장님 외 서너 명. 몇 없는 연락처에 어제 새로 추가한 사람은 제일 먼저 눈과 손이 갈 수 있게 즐겨찾기에 등록부터 해 놨다.
<차해준 교수님>
제 연락처에 있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이름이었다. 이소는 이름을 몇 번이고 수정하려다 사실 저것 말고는 적당한 이름이 없어 그대로 두었다. 차 교수님보다는 이름 세 글자가 붙어 있는 게 더 보기 좋았다. 나들이에서 돌아오던 날 해준은 핸드폰을 꺼내어 내밀었다.
‘생각해 보니 핸드폰 번호도 여태 모르고 있었어요.’
‘아, 그러네요.’
이소가 번호를 꾹꾹 눌러 건넸다. 해준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이소의 전화가 울렸다. 생소한 열한 자리 번호가 화면에 뜨자 이소는 얼른 연락처를 저장했다. 그때까지도 이름을 지정 못 해 ‘교수님’이라고만 적었었다.
‘밥 먹고, 포옹하고, 이름 알고, 손잡고, 번호 교환하고. 뒤죽박죽이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되니 좋네요.’
해준이 지나가는 말처럼 이소와 있었던 일들을 읊었다. 뒤죽박죽, 뭔가 순서가 있는 걸까. 우리는 무슨 사이인 걸까, 이소는 묻고 싶으면서도 쉽게 입에 올리지 않았다. 관계를 정의 내린다는 것은 책임을 동반하는 것이니까. 해준이 둘 사이를 가볍게 생각해서 지금처럼 지낸다고 하더라도 이소는 이제 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해준이 말하는 친구 사이의 범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런 친구’로 남아 줄 수도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전 해준은 시선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먼저 연락해요. 저번과 같은 일이 생기면 바로. 알았죠?’
‘네. 그럴게요.’
‘착하다. 이제 들어가 봐요. 들어가는 거 보고 나도 갈게요.’
앞서 걷던 해수와 정숙이 손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소 역시 가볍게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해준은 정말로 이소가 빌라 현관에서 몸을 감출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통,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공기가 빠진 풍선 하나가 떨어져 나와 이소의 콧등을 때렸다.
“많이도 사 줬다….”
해수가 아저씨 몫이라며 다섯 개를 넘게 쥐여 주었는데도 여전히 게딱지만 한 집 천장은 풍선으로 꽉 찬 상태였다.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풍선 끝에 매달아 둔 실이 움직이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거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 살아야 하는 거지, 고민이 들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천장 가득한 분홍색 풍선들이 눈에 들어오자 꼭 꿈을 꾸는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소는 고개를 돌려 제 책상 앞에 매달린 천사 풍선을 바라보았다. 하프를 들고 웃고 있는 표정의 캐릭터가 보다 보니 귀여웠다. 머리가 짧은 게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이 꼭 누구를 생각나게 했다.
“손 또 잡고 싶다.”
살짝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미풍이 스며 들어와 풍선들이 넘실거렸다. 꼭 제 마음 같았다.
* * *
해준은 시야에서 이소가 사라지고 난 후 전화를 꺼내 들었다. 집사 문준경에게 전송된 사진은 별다른 설명이 없는 사진 한 장이었다. 해준은 사진 속 해가 내리쬐는 골목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주택가 건너편, 다 떨어져 가는 간판의 정육점, 철물점, 고깃집, 슈퍼 그 외 다수. 사람 한 명 찍히지 않은 골목 사진은 딱히 감성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흔들리기까지 한 성의 없는 구도였지만 해준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제가 원하는 것들은 아주 자세히 잘 나왔다.
“잘 나왔네.”
해준은 전화를 집어넣은 후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 뒷좌석에 넣은 풍선들이 서로 맞부딪히며 아주 작게 통통 소리를 냈다. 해준의 차가 이소의 빌라를 지나쳐 언덕을 올랐다. 엔진이 더 달궈지기도 전에 해준의 차는 반질반질하게 기름칠을 한 목조대문 앞에 멈춰 섰다. 이내 누군가 달려 나와 문을 열자 검은 세단은 저택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일반적인 문보다 폭이 배는 넓은 육중한 대문이 좌우로 열리고 나면 판판한 넓적 바위와 허리를 굽힌 노송들 사이로 차가 오를 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이 나온다. 나무에 달랑달랑 걸린 사각등을 지나 흰 자갈밭이 깔린 주차장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안마당으로 통하는 행랑채 대문이 코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해준은 휘파람을 불며 해수에게 건네받은 풍선을 집어 들고 제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대문을 넘어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늦은 시간은 아니었는지 행랑채 처마에 걸린 등에 불이 환했다. 담장을 타고 넘는 가야금 소리도 뚱땅뚱땅 귀를 즐겁게 했다.
수십 그루의 동백나무가 둘러싼 담장. 낮은 돌계단을 몇 개 넘어 천천히 대문을 민다.
“세현아! 도련님 오셨다!”
기대가 섞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제일 먼저 해준을 반겼다. 해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너른 안마당 중심에 심어진 느티나무와 평상, 그 주위를 둘러싼 수십 개의 장독과 작은 연못. 하얀 이불이 널린 빨래마당을 마주 보고 있는 스무 칸이 넘는 단정한 자태의 행랑채. 처마에는 옥수수와 메주가 걸려 있고, 툇마루에 걸터앉은 사람들이 마른 작물을 까고 과일을 널어 놓은 소박한 풍경. 가마솥에서 익어 가는 찰밥 냄새가 따뜻한 곳. 그곳이 바로 해준의 집이었다.
손님뿐만 아니라 식솔들마저도 그 대문을 열 때마다 매번 시간이 순식간에 역행하는 오묘한 느낌을 받았다. 제가 있는 이곳이 서울의 한복판인지 조선 양반가의 마당인지 진심으로 헷갈려 했다.
“다녀오셨어요.”
“응, 주전부리 먹나 봐. 냄새 좋네.”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수많은 식솔들이 나와 인사를 건넸다. 저 멀리서 미리 전화를 받은 집사 문준경 역시 편안한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어젯밤 연락도 없이 안채에 들어오지 않은 채 주방에서 음식만 쏙 가져간 해준의 의중도 궁금했지만 대부분 그의 손에 들린 출처 모를 풍선에 시선이 가 있었다.
저 멀리서 대청마루를 뛰어 내려오는 나머지 아이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해준이 이 집에 데려온 지 3년이 조금 못 되어 가는 아이들이었다. 어릴 때 아장아장 걷던 모습이 눈에 선연한데 어느덧 자라 제법 제 할 일을 했다.
“도련님!”
“여덟 시가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안 잤어?”
“저희 원래 아홉 시 넘어서 자요…. 근데 그 풍선은 뭐예요?”
네다섯 명의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해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먹을 것을 사 왔을 때보다 더 기대하는 눈치다.
“너희들 생각나 가져왔지.”
“우와아-!”
아이들이 해준에게 풍선을 건네받고 제 어미에게 달려가 발을 굴렀다. 도련님이 풍선 사다 주셨다! 해맑게 웃으며 뜻밖의 선물을 연신 쓰다듬자 아이 엄마인 듯한 여자들이 고맙다고 허리를 숙였다.
해준은 문득 해수 생각이 났다. 저 나이 또래의 아이들 같은 호기심과 천진함보다는 날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은 예민한 모습의 아이. 툭 하고 건드리면 소같이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쭉쭉 뽑아내는 제 아빠와 달리 넘어져도 이를 악물고 참는 매서운 눈을 한 아이. 우리 애들이 그 아이 또래인 것 같은데. 여느 때보다 유심히 아이들을 바라보던 해준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해준은 행랑채에 앉아 있는 아이의 엄마에게 손짓을 했다. 아이 엄마는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젊고 근사한 주인은 저희들에게 인사는 자주 건넸지만 사적인 대화를 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예, 도련님.”
“동희 씨, 아직도 커피 배우러 다녀요?”
해준의 말에 동희 씨라 불린 여자는 웃으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신 덕분에 자격증도 땄구요. 이제는 제법 잘해요.
“커피 만드는 일 재미있어요?”
“네.”
“계속하고 싶어요?”
“기왕이면요.”
“음, 좋네. 알겠어요. 나중에 내가 따로 부를 일이 있을 거예요. 들어가서 쉬어요.”
동희 씨는 갑작스럽게 끝나 버린 질문에 눈을 깜빡이다 머뭇거리며 인사를 하곤 들어갔다. 또래 여자들이 해준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며 몰려들었다. 젊고 근사한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체로 가볍게 인사만 하고 언덕 위 안채로 올라갈 때가 많았고 그 안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가끔씩 뜻 모를 선물만 잔뜩 사다 줄 때 말고는 행랑채 앞에 십 분 이상 머무르는 일도 적었다. 때문에 이 커다란 한옥에 기거하는 식솔 대부분은 자신들의 의식주를 모조리 책임지는 주인을 모두들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어려워했다.
소란스러운 행랑채를 지나 언덕을 넘어 해준은 준경과 함께 안채로 걸어 들어왔다.
“시간이 늦었는데 식사는 하셨습니까.”
“별로 생각이 없네. 사진 보내 준 건 잘 받았어요. 오면서 대충 둘러도 봤고. 커피 한 잔만 올려 주고 자료 준비해서 내 방으로 와요.”
해준은 방으로 돌아와 가볍게 씻은 후 자리에 앉았다. 준경을 기다리면서 잠시 이소에게 메시지나 남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신없는 학교 행사 이후 하루 종일 이소에게 온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잠을 거의 자지 못해 소파에 앉자마자 뒤늦은 고단함이 쏟아졌다. 해준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 12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욕실의 물기가 어느새 다 말랐고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은 단정하게 옷걸이에 걸린 상태였다. 들어오면서 열어 둔 창문은 꼼꼼하게 닫혀 있었고 테이블에는 갓 내온 음식과 준비해 달라던 자료와 유에스비가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해준의 어깨를 덮고 있는 담요는 준경이 이미 방 안에 몇 번이나 들어왔다 나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해준은 담요를 끌어 내려 옷처럼 등과 어깨에 둘러멨다. 커피 대신 제 앞에 놓인 쌍화탕은 준경이 몇 번이나 와서 바꿔 주고 간 듯 방금 내린 것처럼 뜨끈했다. 식사를 놓친 해준을 위해 주방에서 만든 떡도 몇 점 유리그릇 위에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어련히 드시겠거니.
해준은 탕을 마시며 다른 손으로 영상 자료를 재생했다. 이른 새벽 준경에게 부탁한 것은 단순히 이소에게 먹일 조기와 해장국만은 아니었다. 어제 오후 한 시부터 저녁 일곱 시 사이 이 쥐좆만 한 동네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떤 것이든 추려서 가져올 것. 시간대는 확실하지만 범위가 애매해 준경이 어느 정도까지의 일을 사건에 넣어야 하냐고 물었을 때 해준은 상냥하게 짚어 주었다.
- 그 시간에 이 동네에 발붙인 고양이의 이빨이 새로 났다면 그것까지도 보고해요.
덕분에 준경은 간만에 사람을 풀어 온 동네의 CCTV와 블랙박스, 심지어 정말로 지나가는 개 족적까지도 모조리 수집했다. 하지만 정말로 제 주인이 고양이의 이빨이나 개 족적을 궁금해했을 리는 없었다. 골목의 CCTV를 돌려보던 준경은 짧은 시간 사이 일어난 커다란 사건을 몇 가지로 추렸다. 개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뜻하지 않은 시비에 휘말려 구타를 당한 젊은 남자의 비틀거리는 뒷모습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 사람들이 거의 나가 이제는 몇 세대 남지 않은 맨션에 멀끔한 모습을 한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준은 아까까지도 닳도록 쓰다듬었던 저 귀여운 뒤통수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남자가 맨션의 현관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의 여성이 따라 들어갔다.
영상 속 화면에서 약 십 분 정도가 지나자 남자는 들어갔을 때와 달리 매우 지치고 엉망인 모습으로 한 손에는 낡은 자전거를 끌고 맨션을 벗어났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흐릿하고 불분명한 화면임에 불구하고 남자의 머리가 헝클어지고 하얀 뺨에 덕지덕지 피가 뭉개진 것이 눈에 띄었다. 배와 옆구리를 쥔 채 비틀거리던 남자는 얼마 못 가 화면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재생된 다른 각도의 골목에서 자전거에 몸을 기대고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이소였다. 얼굴에서 떨어진 코피가 계단을 적실 동안 이소는 줄곧 잠들어 있었다.
해준은 무감한 표정으로 영상을 바라보며 볼을 쓸었다. 저를 만났을 때 이소는 그래도 저 정도로 진창은 아니었는데 이미 얼굴을 한 번 닦아 낸 후였나 보다. 영상 속 이소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피를 흘리며 잠이 들었고 그 뒤로 몇 사람이 지나갔지만 무심한 시선만 던질 뿐 부축을 한다거나 흔들어 깨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아, 개새끼가 엎어져 있어도 저 정도로 무신경하게 지나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소가 지나가고 난 뒤 집까지 돌아오는 영상까지 모조리 본 해준은 다른 폴더를 열었다. 뜨거운 차가 그새 식었다.
블랙박스와 CCTV에 연달아 찍힌 중년의 남자가 검은 봉투를 들고 건들거리며 맨션에서 나왔다. 덩치가 꽤 큰 남자는 제집 창문에 대고 무어라 소리친 뒤 가래침을 뱉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재생된 다음 화면에서 남자는 고깃집에서 몇 사람을 만나 시간을 보냈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헤어진 뒤 골목길 어귀에서 소변을 보았고 다시 이동한 남자는 사진에서 보았던 철물점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고 몇 가지 물건을 챙겨서 나온 남자가 다시 맨션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영상이 끝이 났다.
영상을 다 보고 난 후 자료를 읽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준경이 문을 열었다.
“안채에 불이 켜져 있길래 들렀습니다.”
“미안, 미안. 너무 늦었지.”
“괜찮습니다. 책 읽던 중이었습니다.”
해준은 나이 든 집사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유에스비를 꺼내어 양손으로 가볍게 부러뜨린 후 방구석에 있는 화로에 던져 넣었다. 준경이 준비한 3장 남짓의 종이도 곱게 접어 화로에 밀어 넣었다. 겨울에는 종종 피웠지만 봄에는 주로 담뱃재를 털어 내는 용으로나 쓰는 쓰레기통 같은 곳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몇 가지만 좀 빠른 시일 내로 준비해 줬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세요.”
상냥하고 느긋한 목소리였지만 준경은 그 목소리에 깃든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렸다.
“전에 전달한 주소 앞하고 근처 곳곳에 성능 좋은 CCTV 달아 줘요. 주변이 영 지저분하네. 내 집 앞까지 오는 길도 추가로 달고.”
“네.”
“그 사람은 내일 중으로 양 사장한테 연락해서 이사 보냅시다. 기왕이면 아주 멀리.”
“네.”
“빚은…. 궁금한 게, 보통 사람한테 천만 원이 삼 년 안에 못 갚을 금액입니까?”
이 정도는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하면서도 종종 갚던데. 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부부가 둘이서 제 명의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고작 천만 원을 빚으로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죠. 조사한 철물점 주인 박웅팔은 알코올 중독 판정도 받은 데다가 지저분한 전과도 있습니다. 현재 미장 일당을 다니고 있지만 보수가 변변찮은지 지인들에게 소액으로 돈을 빌리는데 매번 핑계를 대며 갚지 않고 있습니다. 아내는 정기적으로 동네 여자들 모아서 노름을 하는데 이 역시 자잘한 채무 관계가 얽혀있어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
“아, 적이 많겠네.”
준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50대인 철물점 주인은 각 잡고 털어 보기도 전에 먼지가 수북했다. 이 작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건달 출신인 데다가 사사로운 폭행 전과와 강간 미수까지 지난 십 년간 열 건이 넘었다. 그저 눈만 마주치면 두들겨 패기 일쑤였는지 사람들은 그를 피해 다녔다. 설상가상으로 의처증까지 있었다.
“다리하고 팔 하나씩 날리고 합의금으로 천만 원 입금해 줘요. 깔끔하다.”
다리하고 팔 정도 부러뜨리는데 천만 원 만큼의 합의금이라니. 도대체 어느 정도로 조져 놔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준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영상 속의 남자와 관련이 있을 텐데 준경은 본 적이 없는 낯선 이였다. 그러나 입이 무거운 준경은 꼬치꼬치 따로 묻지는 않았다.
“같이 어울리는 인간들도 틈틈이 지켜봐 줘요. 한 놈 조지면 섣불리 행동하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 질 나쁜 놈들 천지니까.”
“확인하겠습니다.”
해준은 볼일이 다 끝났는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해준이 눈짓하자 준경의 금일 업무가 모두 끝이 났다. 이제 들어가 읽던 책을 마저 읽은 후 안경을 벗고 잠에 빠져들면 되는 일이었다.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찰나였다.
“집사님, 잠시만.”
전에 없이 해준이 추가 지시를 덧붙였다. 준경은 눈썹을 까딱이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생각해 봤는데, 그냥 얌전히 보내는 건 너무 아쉬운 거 같아.”
팔과 다리를 조져 놓으라고 했으면서 뭐가 얌전히 보낸다는 건가. 준경의 눈매가 티 나지 않게 가늘어졌지만 능숙하게 낯을 숨기고 입매를 끌어 올렸다.
“어떤 걸 더 요구할까요?”
“가만있어 보자.”
해준이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골몰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 울면서 빌라고 할까? 그럼 그 사람 마음이 풀어질지도 모르잖아, 그쵸.”
해준은 입꼬리를 올리고 싱그럽게 웃었다. 해준의 웃음을 본 준경의 미간이 옅은 골이 패였다. 어쩌면 제 주인의 그물에 걸린 사람은 배 나온 중년 건달이 아니라 허여멀건 얼굴에 피범벅을 한 젊은 남자인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