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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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 씨, 감기 걸렸어?”

정숙은 이소를 한 번 보고 바깥을 한 번 보았다. 나 어릴 때는 종종 삼월에도 눈이 내렸던 적이 있었는데,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꽤 가벼웠는데 이소는 뜬금없이 목에 본 적도 없는 목도리를 친친 감고 내려왔다. 평소 얇은 옷만 입고 칼바람을 맞으며 배달해서 기어코 감기에 걸렸구나 싶었다. 꼭 저렇게 제 몸을 소홀히 한다니까.

“아, 그냥 아침에 일어나니까 쌀쌀해서요.”

“젊다고 막 다니면 안 돼. 근데 이쁜 거 하긴 했네.”

“정말요? 예뻐요?”

“그래, 이소 씨 평소에 안 하고 다니는 스타일이긴 하다.”

이소는 앞치마를 입기 전 목도리를 벗어 얌전히 개켰다. 혹여나 목도리에 먼지나 음식이 묻을까 봐 신문지로 잘 싸서 서랍 안에 깊숙이 넣었다. 조금 있다가 잠깐이지만 한 번 더 둘러 봐야지, 생각하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전번에 만난다는 사람은 잘 만나고 왔어?”

“아, 네. 그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오후에 바쁘셨죠.”

“바쁘긴. 원래 저녁 되기 전에 좀 한가하잖아.”

정숙은 주방에서 유자청을 꺼내 뜨거운 물에 타면서 이소를 힐긋거렸다. 축 처진 어깨로 롤케이크 박스만 만지작거리던 게 눈에 선했다. 아직 월말이 되려면 며칠은 더 남았는데 빚은 얼마나 갚았는지. 정숙은 작년 겨울까지 얼굴이 흉터가 가득한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쩔쩔매던 이소를 기억했다. 저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모른 척하는 것이 배려였다.

개든 사람이든 밥 먹이고 키우다 보면 돈이 든다. 먹이기만 하고 알아서 크면 좋으련만, 사람은 재우고 입히고 씻기는 것마저도 모두 돈이 들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욕심도 생기고 요구도 많아진다. 사람 하나를 온전히 키우기 위해 제가 가진 시간과 돈을 쪼개 새끼 입에 30년을 물려 줘야 겨우 제 밥벌이를 한다. 정숙 눈에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이소가 저보다 더 작은 딸 애의 입에 무어라도 물려 주려고 밤낮없이 뛰는 것이 퍽 측은해 보였다.

“너무 해수한테 다 해 주지 말고, 봄옷이라도 하나 사 입어. 여기 꿰맸던 거 또 터졌네.”

“다 안 해 줘요.”

“안 해 주긴. 저번에도 그 겨울나라인지 눈의 왕국인지 운동화 사 달라고 졸라서 사 준 거 내가 몰라?”

“해수 빼고 같은 반 애들 다 신는대요. 마침 발도 커졌고요.”

“그러다 애 버릇 나빠진다.”

정숙이 유자차를 건네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소는 말없이 웃으며 홀짝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도 선물이라는 걸 받았다. 주기만 해 봤지 받아 본 적은 처음이라 마음이 들떴다. 요리를 하는데 저절로 흥이 났다. 자꾸만 콧노래가 나왔다. 이소는 제가 웃고 있는 줄 몰랐지만 정숙은 주방을 오가며 요새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이소에게 물었다. 별일 없죠 뭐, 하고 고개를 내리는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빨리 해수를 데리러 나갈 때 목도리를 두르고 가고 싶었다.

* * *

오후 네 시,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학교는 셔틀버스를 타러 나서는 학생들로 분주했고 어린이집 앞도 하원 하는 아이들로 정신없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아이 엄마들은 삼삼오오 모여 하원 후 키즈카페를 가니 마니, 날이 좋으니 운동장에서 놀리다가 들어가야겠다느니 수다 중이었다. 저녁을 차려야 하는데 해가 길어져 자꾸 밖에만 있고 싶고 그러다 보면 그냥 들어가는 길에 반찬집에 들러 국이나 찌개를 사 가는 게 좋겠다며 웃고 떠들었다.

“어, 해수 아빠 왔어!”

30대 젊은 엄마들은 괜히 입고 있는 옷의 먼지를 털고 머리를 매만졌다. 처음에는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놈이 일곱 살짜리 애 아빠라길래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애를 만들었구나 싶어 얼굴을 볼 때마다 수군거리기 바빴더랬다.

보나 마나 대학도 안 가고 저 반반한 얼굴로 클럽에서 여자 꼬셔서 임신시킨 거겠지. 호빠 출신이라던데. 같은 반 여자애랑 배 맞추고 나서 여자는 도망갔다던데. 온갖 소문이 돌았다. 하필 정착도 못 하고 떠날 때가 많아서 이소의 뒤에는 언제나 졸졸 발랑까진 어린애 아빠 꼬리표가 붙었다. 그러던 중 도시락집을 운영하면서 몇 번 가게를 들르는 엄마들이 ‘생각보다 성실하게 산다.’라고 몇 마디 얹어 주자 지독하게 저를 괴롭히던 소문은 어느새 홀연히 사라졌다.

오히려 뒤늦게 입학한 사람들이 이소를 욕할라치면 ‘해수 아빠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자기 그런 말을 해?’ 하며 무리에서 떨어뜨리곤 했다. 편부편모가 동정표를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특히나 학부모들 세계에서 편부가 받는 동정과 측은지심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이소는 사람들에게 더욱 깍듯하게 굴었고 선을 지켰다.

설령 답답해 보이고 융통성이 없어 보여도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매장당하는 것은 저 하나만은 아닐 것을 알아서였다.

“안녕하세요. 아, 민준이 어머니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어, 자기도 일찍 왔네.”

엄마 무리 중 가장 연장자가 이소에게 손을 흔들었다. 해수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오빠가 있는 집은 몇 년 앞서 터득한 육아 상식과 팁을 이소에게 알려 주고 싶어 했고 주로 그런 주제로 말의 물꼬를 텄다. 그러다 보면 다들 눈을 반짝이고 이 어린 아빠에게 몇 마디라도 더 얹으려 다가오곤 했다.

“자기야, 저번에 줬던 해수 옷은 잘 맞아?”

“네. 조금 길긴 한데 잘하면 내년 봄에도 입힐 수 있을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로션은 괜찮아? 셋째 때문에 베페 갔다가 사은품 너무 많이 받아서 주긴 했는데…. 내가 너무 막 재고 처리하듯이 준 것처럼 여겨질까 봐 좀 그러네.”

“아니에요. 전에 주신 로션도 아직 다 못 써서 그거 다 쓰고 써 볼게요. 매번 감사해요.”

이소가 가늘게 눈을 접어 웃자 아이 엄마들의 볼이 동시에 붉어졌다. 요 근래 동네를 나설 때마다 도무지 얼굴에 화장품을 찍어 바를 일이 없었는데 오후 네 시에 이소가 오기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게 어느새 정기모임이 되어 버렸다.

모이고 나서 보면 패션쇼가 따로 없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놀리자고 했던 사람들이 구두에 귀걸이까지 하고 나왔다. 이소가 해수를 데리고 20분도 안 되어 가 버리고 나면 애써 한 화장과 옷차림이 아까워 다들 한두 시간을 더 놀다가 들어갔다. 어린이집 교사들은 ‘올해 어머님들은 벌써 친해지셨나 봐요. 항상 놀이터 앞에 모여계시구.’ 하며 은근 이른 퇴근에 반색했다. 윤이소가 만든 나비효과였다.

“오늘 저녁은 뭐 나와?”

“그러게, 나 오늘 애 아빠도 늦는다는데 그냥 자기네 가게에서 밥 사서 때울 거야.”

몇 마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 메뉴 선정으로 주제가 흘러갔다. 정숙이 만들었던 도시락이 주로 값싼 재료로 만든 자취생들 도시락에 가까웠다면 이소가 만든 메뉴는 집밥을 하기 귀찮은 엄마들을 겨냥했다.

아이 입맛에 맞으면 싱겁게 먹는 성인들도 먹기 좋았고 나아가 병원 밥을 먹는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종종 사 가곤 했다. 부드러운 식감과 영양가 있는 재료들을 썼고 가격을 크게 올리지 않으면서 맛을 다양하게 구현하기 위해 매번 다른 요리법을 썼다. 미역국은 일반 반찬집보다 더 오래 불리고 푹 끓여서 씹지 않고도 술술 넘어가게 했고 맛탕도 한 번 찐 고구마를 재벌로 튀겨서 사용해 집에서 한 것만큼 촉촉했다.

손이 조금 더 가기는 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해져 큰 힘도 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소 본인이 먹기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몇 번이고 다시 만들어 나온 완벽한 결과물이었다.

“국은 맑은 육개장이고요. 매운 코다리찜이랑 애호박전 했어요. 오늘은 오리 무쌈말이도 있어요.”

“금요일이니까 무쌈말이 먹어야겠다. 맥주도 하나 까야겠네.”

“그러게. 애들은 육개장 주고 우리는 맥주나 한잔하자.”

“해수 아빠도 한잔 같이 하면 좋은데.”

엄마들이 아쉬운 듯 말을 얹었다. 매번 모임에 나와 달라고 말하지만 이소는 적당히 에둘러 거절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가게 일을 가야 해서요.”

이소는 엄마들이 하나둘 예약한 대로 핸드폰에 적어 넣었고 정숙에게 전화해 포장을 부탁했다. 이소가 이 시간에 가서 물어 오는 주문 건만 해도 대여섯 건은 되었으니 정숙은 매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소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숙은 그때마다 그 얼굴로 아양을 떨며 더 친근하게 굴었다면 엄마들이 옷도 사 주었을 거라며 짓궂게 농담했다.

주문을 거의 다 받아 적었을 때 뒤늦게 해수가 뛰어나왔다.

“아빠!”

“해수야!”

이소가 해수를 끌어안는 모습에 아이 엄마들 고개가 모두 돌아갔다. 이 부녀는 왜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들떠 있는 것인가. 매일 회식과 조기축구로 집에 붙어 있지 않은 남편들을 잠시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머릿속으로는 우리 집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라 존중해야 하는데 정작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놀아 주지 않고 소파 붙박이로 잠드는 모습을 회상하니 눈앞에서 딸을 안고 빙빙 도는 이소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해수 아빠는 참, 저렇게 반가울까.”

“그러게. 아침에도 봤는데. 저거 봐, 번쩍번쩍 든다.”

“젊어서 그래. 우리 준영 아빠도 20대 땐 나도 업을 수 있었을걸.”

“그만하자. 슬프다.”

현실을 상기하느니 그저 눈앞에 있는 우리 동네 아이돌 윤이소를 보며 마음을 달래는 게 속 편했다.

해수가 놀이터 벤치에 걸터앉은 엄마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때 어린이집 문이 열렸다. 담임교사가 색지를 들고 이소를 불러세웠다.

“해수가 놓고 갔어요. 아빠한테 편지 썼던데요.”

이소가 색지를 받아 들고 돌아오자 엄마들이 말을 얹었다.

“근데 해수 한글은 다 뗐어? 우리 애는 아직 받침 있는 걸 못 쓰더라.”

“초등학교 가기 전에 학습지 하나만 더 할까? 그래도 자기는 큰 애 있으니까 좀 낫지. 곧잘 지 오빠 따라 하잖아. 우리 애는 맨날 누워서 티브이만 봐.”

“해수도 슬슬 학습지 하는 게 어때? 요새는 독서 습관도 잡아 준다던데. 가게 보느라 공부시킬 시간 없지?”

“해수 아빠, 해수가 편지에 뭐라고 썼어? 어디 좀 보자. 얼마나 글씨 잘 쓰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제 아이보다는 덜하겠지 싶어 확인하려는 심보였다. 난처한 기색의 이소가 말을 돌리려는 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해수가 입을 열었다.

“저 영어로 썼는데요.”

그저 한글이 아닌 언어로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던 것뿐이었는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소가 멋쩍게 웃으며 해수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 다급하게 인사를 하며 빠져나갔다. 엄마들은 실소를 터뜨리며 어린아이에게 느낄 수 있는 묘한 불쾌감과 열등감에 혀를 찼다.

* * *

이소는 해수와 동네 놀이터 그네에 걸터앉은 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다행히 도시락 주문은 포장이 완료된 상태고 엄마들 성격상 그런 일로 가져가면서 한 소리 할 것도 아니었지만 괜히 입장이 난처해졌다.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까, 어른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 하지만 뭐 딱히 무례하게 이야기한 건 아니었다. 말투를 고쳐? 그것도 아닌데. 되바라지게 들리기는 했지만 같은 반 아이들이 한글을 떼지 못한 상황에서 해수 혼자만 영어로 편지까지 쓰는 걸 들키게 되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소는 입술을 한 번 핥고는 고개를 돌렸다.

“해수야.”

“응.”

“편지 말야, 읽어 보긴 할 건데 아빠 궁금해서. 뭐라고 쓴 거야?”

“오늘 아침에 뽀뽀로 깨워 줘서 좋았고, 공주 신발 사 준 거 고맙다구 썼어.”

해수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고는 무심한 표정을 풀었다. 이소를 바라보는 눈은 다시 여느 일곱 살과 다르지 않은 천진한 얼굴이었다.

해수는 대체로 말이 없고 표정도 다채롭지 않은 편이었다. 서너 살 적에는 워낙에 감정 표현이 적어 자폐를 걱정했으나 전문센터에 가 검사를 해 보니 상상 이상으로 영특했다. 기억력, 집중력, 지구력 모든 점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월등히 높았다. 공감능력과 이해력 또한 대여섯살 많은 언니·오빠들하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편이었다. 다만 의사가 덧붙이기를 아이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하니 또래와 어울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 보호자의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이라 했다.

“고마워. 나중엔 더 좋은 거 사 줄게.”

“나도 저금통에 돈 있어. 나중엔 내가 아빠 신발 사 줄게.”

이소는 괜히 해수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센터에서는 해수가 영재원에 들어가는 것을 추천했지만 이소는 대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지속적인 컨택을 하며 뒷바라지를 해 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이사를 하며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였고 그렇다고 저 핏덩이 같은 것을 센터에 떨어뜨려 놓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볼 수도 없었다.

때문에 해수는 그 좋은 머리를 갖고도 동네 민간 어린이집에 다녔다. 가기 전 몇 번이고 붙잡아 알려 준 덕에 아이들하고 지내는 데 큰 트러블은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체육 시간을 즐겼고 미술에 소질이 있어 매번 가져오는 그림마다 액자에 걸지 않으면 아까울 정도였다.

다만 단체 활동 시간이 끝나고 나면 해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었다. 이소가 데리러 올 때까지 책장을 넘기며 시간을 죽였다. 어린이집 교사는 또래와 병행 놀이를 하지 않는 해수를 걱정하며 몇 번이고 함께 노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해수는 부드럽게 거절하곤 했다.

‘선생님, 저도 지금 놀고 있는 거예요. 괜찮아요. 재미있어요.’

다섯 살에 한글을 완전히 뗀 해수의 손을 잡고 처음 서점에 갔었던 날. 아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고 무엇보다 청소년판 문고도 아닌 성인이 읽는 개정판 문고를 사겠다고 떼를 부려서 한참을 씨름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고집을 이기지 못해 그 책을 사 왔고 해수는 날마다 날마다 책 끝이 해지도록 읽었다. 그 결과 현재는 이소도 일곱 살 해수를 말로 이기기 어려운 때가 종종 오곤 했다.

“그래도 나중엔 어른들한테는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야 해.”

“준영이 엄마가 말을 이상하게 하잖아.”

“준영이 엄마가 왜.”

“난 아빠 주려고 쓴 건데 준영이 엄마가 먼저 본다고 하잖아. 그건 월껀이야.”

“월권이겠지.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

말을 말자. 이소가 한숨을 쉬며 눈썹을 긁었다. 해수는 여전히 아까를 생각하며 입술이 뾰로통 나와 있었다. 머릿속에 지식이 많다 한들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분위기나 상황을 읽는 데 능숙하지 못했고 불합리한 일이라 생각이 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누구를 꼭 닮았다.

이소는 해수 입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소매로 닦았다.

“맛있어?”

“응. 역시 겨울엔 아이스크림이지.”

“지금 봄이야.”

“역시 봄에는 아이스크림이지.”

해수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제 아빠 앞에서 농담을 던지며 해실해실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짙은 쌍꺼풀과 날카로운 눈매는 이소와 닮지는 않았지만 웃을 때마다 코를 찡그리는 버릇은 꼭 저와 같았다. 해수는 시선을 내리다 이소의 목도리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도리 샀어?”

“응? 이거? 어때. 잘 어울려?”

“응. 엄청 예쁘다. 아빠 목도리 한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아니야, 그전에두 했었는데. 그 갈색 있잖아, 앵두 그려진 거.”

해수가 입술을 비죽댔다. 그 털 숭숭 빠져서 매번 재채기 하는 안 예쁜 목도리.

“그건 할머니가 하고 다니는 거 아빠가 잠깐씩 쓰는 거잖아. 이건 마트 가서 샀어?”

“아니. 선물 받았지.”

“우와! 누구한테!”

그러게. 누구라고 하지. 이소는 순간 해준을 무어라고 설명해야 하나 머뭇댔다. 옆에 없는데도 쉽게 입에 올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빠 아는 사람인데.”

불현듯 사슬이 절그덕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이 이소의 손 위로 겹쳐졌다. 그네가 앞으로 살짝 밀리며 이소의 등 뒤로 익숙한 향이 덮쳤다. 어둡고 깊은 숲에 들어온 듯한 묵직한 나무 냄새는 가을의 깊이를 닮았다.

“안녕, 또 보네.”

고개를 들자 반가운 얼굴이 퍽 다정한 시선을 하고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 사람이다. 봄바람이 살랑이며 머리카락을 흐트려트렸다. 해준의 가슴에 닿은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불현듯 너무 기대고 있었나 싶어 얼른 고개를 내렸다. 잠깐 눈을 맞췄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 선명한 눈동자에 집어삼키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 끝을 적시자 정신이 들었다.

“아…. 교수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길래 뒤에 사람이 오는 줄도 몰라요.”

이소는 대충 손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딸이랑 이야기하느라고… 아, 해수야. 인사해. 여기는 그러니까….”

“아빠 친구.”

이번에도 제대로 말을 못 하고 해준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친구. 이소는 속으로 친구라는 단어에 담긴 심적 거리에 관해 생각했다. 친구라고는 일 년에 가끔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진혁 말고는 없었다. 저번에 정숙에게는 대충 집에 들어온 남자가 누군지 상황을 얼버무리느라 제가 먼저 친구라고 해 버렸지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이소가 말을 않고 또 멀끄마니 쳐다보자 해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틀린가요, 하는 표정이었다.

해수는 갑자기 등장한 길고 검은 아저씨에게 시선을 던졌다. 꼭 곰 같다. 엄청 큰 흑곰. 검은 머리, 검은 코트, 검은 구두. 인사도 않고 빤히 해준을 보는 시선에 이소가 얼른 해수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이, 인사해야지. 그렇게 어른 빤히 보는 거 아니야.”

“안녕하세요.”

“응, 안녕.”

해준 역시 그 말을 끝으로 해수를 빤히 봤다. 삼십 대 중반 남자와 일곱 살 먹은 여자아이가 꼭 기 싸움을 하듯 눈동자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맞추는 통에 괜히 이소만 가운데서 눈동자를 굴렸다.

“저기, 우리 이제 집에 가자. 교수님도 그럼 들어가 보세요.”

“같이 가요. 저 부탁할 거 있어서 가게 가던 길이었어요.”

“무슨 부탁이요?”

“가면서 이야기해요.”

해준이 앞장서 걷자 이소와 해수가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키가 꼭 높은 도부터 라, 레 순으로 작은 세 사람이 나란히 둑방을 걸었다. 발을 맞춰 얌전히 걷다가 어른들의 대화가 지루해지자 해수가 한참 앞에 있는 민들레 꽃밭으로 뛰어가 버렸다. 노을이 어스름하게 생기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이소와 해준은 꽤 가까이 서있었다.

“그날은 잘 들어갔어요?”

“네. 워낙 가깝기도 하고….”

“목도리도 마음에 드셨나 봐요. 또 하고 있으니 보기 좋아요.”

“아,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보다 날이 차서…. 고맙습니다. 따뜻해요.”

“잘 어울려요. 사장님 생각하면서 고른 거거든요.”

나를 생각하면서…? 시선은 여전히 둑방 아래에 있는 해수에게 가 있었지만 이소는 해준이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눈을 깜빡이며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질 못했다. 꼭 저를 꾀어내려는 듯이 말한다.

“농담이시죠?”

“네, 농담이에요.”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이 사람은 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을 해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이소는 해준의 몸을 힐끗거렸다. 모직 코트 안쪽 넓고 판판한 가슴 아래 단단하고 곧게 선 허리는 몸 전체를 흔들림 없이 지탱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내려가는 매끈하게 긴 다리와 깨끗하게 떨어지는 발 끝까지 시선을 내리자 문득 날 선 부러움이 비죽 솟았다. 이소는 구두도 한 켤레 없었다. 구멍이 나 몇 번 기운 하얀 운동화 한 켤레가 다였다.

“사장님.”

시선이 얽히자 해준이 이소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혹시 제가 따님께 친구라고 말해서 난처하신가요?”

“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해준처럼 근사한 사람과 친구라는데 싫을 리 없었다. 해준이 희고 넓은 손바닥을 뺨에 갖다대며 시선을 낮췄다. 결이 고운 눈썹을 내리며 미안한 낯을 했다.

“아까는 말을 고르시길래요. 불편하시면 지금이라도 그냥 아는 사이 해도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마음대로 그렇게 말해 버려서….”

“아니에요! 친구…, 친구 좋아요! 친구 하고 싶어요!”

소리를 높이려던 건 아닌데 해준이 워낙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당황해 대뜸 속에 있던 말이 덥썩 튀어나왔다. 저 멀리에 앉아 있던 해수가 민들레 팔찌를 만들다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둑길을 산책하던 사람들도 커다란 남자 목소리에 싸움이 났나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소의 얼굴이 대번에 시뻘게졌다. 토끼처럼 놀란 표정을 한 해준이 곧이어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었다. 긴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럼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 친구라고 말해도 되죠?”

“예에….”

“가끔 가게로 찾아와도 내치지 않을 거고요?”

“예…. 그럼요….”

“이유 없이 전화를 해도 괜찮고요?”

“친구니까…. 편하게 하세요….”

해준이 짓궂게 말꼬리를 잡으며 이소의 얼굴을 살폈다. 이소는 시선을 피한 채 껍질에 숨은 자라마냥 목도리 끝을 코까지 묻고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본 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매만졌다. 매번 놀리듯이 말하고 있는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여섯 먹은 소녀마냥 얼굴을 붉히는 이소를 보면 장난을 관둘 수가 없었다.

단정하게 깎은 목덜미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붉은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피부가 얇구나. 점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는 꼭 때 묻지 않은 아기의 것과 닮아 있었다. 자세히 보면 하얀 솜털이 보들보들하게 보였다.

‘여자고 남자고 환장할 상이군.’

해준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모르자 이소는 해수에게 가 봐야겠다며 황급히 둑방으로 내려갔다. 문득 해준은 제가 이소를 보기 위해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로 마음이 쓰여서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얼마 전 이소와 헤어질 때만 해도 다른 마음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그랬는데.

* * *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과사무실에서 학생들이 낸 레포트를 훑어보던 중이었다.

“교수님, 도시락집 사장님하고 잘 아는 사이세요?”

“그냥요. 오다가다 일이 좀 있어서. 왜요?”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알고 싶긴 하지. 해준은 속으로 곱씹었다. 단정하게 올려다보는 눈동자와 머뭇거리는 태도에 시선이 가 그의 집까지 갔었는데. 평생 동안 빗맞은 적이 없었던 제 레이더가 고장이 났는지 ‘그쪽’일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애까지 있었다. 여전히 아리송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미 애까지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준은 딱히 할 말이 없어 괜히 입맛만 다셨다.

“아, 사실은 학교 게시판에 사진 올라온 거 보고 다들 난리거든요. 저도 거기 사장님 누구랑 웃으면서 대화하는 거 처음 봐서요. 근데 그게 교수님일 줄이야.”

해준이 레포트에서 눈을 떼고 흥미를 보이자 조교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거기 사장님 인기 진짜 많아요. 얼굴도 잘생겼지, 키도 크지. 나이는 모르지만 뭐가 됐든 완전 동안인 거 같구. 우리 학교에 사장님 얼굴 보려고 배달시키는 사람들도 진짜 많아요. 특히 음대랑 미대 여학우들 사이에서 학식보다 더 많이 시켜요. 맛있는 건 덤이지만. 근데 아까 사장님이랑 교수님이 카페에서 커피도 사고 한참 이야기하다가 가셨다는 거예요.”

“어, 맞아. 나도 봤는데 사진 잘 나왔더라.”

옆자리 앉은 조교가 말을 얹었다.

“장난 아니에요. 두 분 완전 화보인 줄. 뭐 교수님이야 워낙 유명하시니까 그렇다 치지만 사장님은 이때 딱! 사복을! 이거 보세요, 러블리하게 베이지색 니트 카디건을! 맨날 그 빨간색 항공 점퍼만 보다가 이거 보니까 완전 눈 정화 제대로인 거 있죠.”

조교가 보여 준 사진에는 이소와 해준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해준이 크림페이스트리를 건네는 모습과 그걸 건네받는 이소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에도 이렇게 보이는구나. 가까이서 볼 때는 몰랐던 객관적인 모습의 이소는 꽤나 멀끔한 보통의 대학생처럼 보였다. 댓글은 온통 찬양일색이었다. 이 조교들 말고도 학교에서 꽤나 유명인사인지 알아보는 사람들이 주절주절 외모 칭찬을 얹었다. 근데 이런 걸 당사자 동의 없이 찍어서 올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해준의 눈썹이 꿈틀댔다.

“근데 사장님 애기 있잖아. 우리 학교 부속 어린이집 다녀.”

앞자리에 앉은 조교가 말을 얹었다. 알게 모르게 다들 도시락집 사장에게 관심이 많군.

“헐, 란희 쌤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매일 4시에 거기 벤치에서 기다리잖아. 우리 자리에서도 보이는데. 딸 하나 있어. 요만한데 지 아빠 닮아서 엄청 이쁘게 생겼다.”

나이 든 조교가 손을 제 가슴께에 갖다 대며 아는 체를 했다.

“와, 대박. 나만 몰랐나 봐. 그래서 그 기획사에서 연예인 하라고 쫓아다녔을 때도 계속 거절한 거구나. 애기 있어서! 근데 애기가 다섯 살만 넘어도 5년 전에 낳은 거 아니에요? 그럼 헐, 지금 사장님 몇 살이라는 거야?”

“어릴 때 낳았나 보지. 근데 엄마 본 적 있어? 여기서 2년 넘게 있으면서 엄마는 한 번도 못 봤네.”

해준은 심드렁하게 학생들 레포트를 검토하면서도 귀는 여전히 조교들이 무어라 떠드는지 바짝 기울이고 있었다. 애 엄마는 뭐, 이혼했나 보지. 그때 보니 혼자라는 거 보니까 헤어진 거 같던데.

“그 집 부인 죽었다더라.”

건너편에 앉아서 책을 읽던 나이 많은 교수가 무심히 말을 던졌다. 추측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뭉툭한 안경 너머로 확신에 찬 눈빛을 보내며 말을 얹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말투에 납보다 무거운 주제였다.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가 가지 무는 것마냥 쉽게쉽게 집어다가 가십거리로 쓰는 여자의 말에 해준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헐, 그럼 사별이에요? 어떡해….”

“저번에 그 있잖아, 캐스팅해 가려고 기획사에서 사람이 왔었는데 어린이집 앞에서 딱 마주친 거야. 근데 애 있는 거 보고 애한테 물어봤다나 봐, 아빠 테레비에 나와도 돼? 그러면 우리 아가랑 엄마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많이 사 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랬는데 걔가 ‘저희 엄마 하늘나라에 있는데요.’ 해서 사장님이 진짜 엄청 크게 화내고 그랬던 거 한참 난리였어.”

“불쌍하다…. 하긴, 항상 혼자 계시긴 하더라구요.”

“그럼 죽은 아내를 못 잊고… 아, 이거 너무 드라마틱한데. 그래서 좀 처연한 느낌이 들었구나.”

“그래서 내가 자꾸 마음이 쓰여서 웬만하면 그 집 밥 팔아 주려고 먹기도 하는데.”

“선 넘는 거 참 쉬워요. 그쵸.”

해준은 레포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달아오르는 대화의 판을 싹둑 잘라 냈다. 세 사람의 긴장한 시선이 해준에게 가닿았다.

“몇 푼 치른다고 사람 사생활을 반찬 삼을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닐 텐데 말이에요.”

매번 싱글싱글 웃는 상이었던 해준이 신경질적으로 레포트를 걷어 내고 일어나자 젊은 조교가 얼른 일어나 우물쭈물댔다.

“죄, 죄송합니다.”

“조교님들은 그렇다 치고. 교수님까지 말을 얹으시면 어떡합니까. 어른답지 못하게.”

“내가 뭘….”

그 자리에 더 있다가는 노인네마냥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아 해준은 고개를 젓곤 자리를 떴다. 조교들은 자신들의 입술을 때리며 해준의 미움을 받을 것을 걱정했고 나이 든 교수만 자리에 앉아 젊은 교수의 괘씸한 언사에 문만 노려보았다.

* * *

그렇게 저도 모르게 걷다 보니 어느새 후문 앞이었다. 할 일이 분명 있었는데 가방에 대충 욱여넣고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드니 도시락 가게로 가는 골목에 다다랐다. 해준의 집은 굳이 이 길을 통하지 않더라도 더 빠른 길로 빠지는 골목이 두 번은 더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10분은 더 돌아 이곳까지 오게된 건 그 말간 얼굴이 문득 떠올라서였다.

‘죽었다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 처지가 입방아를 찧는 것도 모르고 미소를 띠며 도시락을 날랐던 남자가 신경이 쓰였다. 제가 하는 게 동정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말을 걸고 싶었다. 잔뜩 경계하고 뒷걸음질 치던 모습만 보다 제 앞에서 꽈리가 터지듯 웃음을 터뜨렸을 때 마음 속에서 차올랐던 깊은 미묘한 흡족함을 기억했다. 웃는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어. 그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떼었었는데.

‘차 교수님.’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네에 앉아 있는 남자의 손을 감싸 쥔 채 아는 척을 하고 난 후였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마주친 연갈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저를 올려다보았을 때, 해준은 문득 생각했다. 같잖은 동정심이라도 이 얼굴을 꽤 오래 볼 수 있다면 어디 마음 가는 대로 한 번 해 볼까 하고.

해준은 둑방 위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풀밭에 작게 몸을 웅크린 채 집중하고 있는 부녀가 보였다. 이소는 해수에게 민들레를 한 움큼 건네받아 화환을 만들고 있었다. 해준은 천천히 다가가 이소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민들레가 지천이었다.

“도시락 200개요?”

“네. 미술대학 전체 과가 합동으로 하는 행사가 있는데 사장님 가게에서 몰아서 주문할까 하고요.”

“200개….”

이소가 눈을 굴렸다.

“무리예요? 힘들 것 같아요?”

해준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니에요. 될 것 같아요. 포장 용기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내일 가서 미리 사 와야겠어요. 택배가 늦어지면 안 되니까. 그리고 당근도 두 박스 더 주문하고, 감자도 사고, 소고기도 사고….”

오래된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하는 이소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몸에 비해 작은 두 손에 자잘한 상처와 흉터가 많았다. 요리하는 사람보다는 뱃일하는 사람마냥 거친 느낌이었다. 휴식이란 게 있는 걸까.

“이렇게 많이 팔면 주말엔 쉴 수 있어요?”

“음, 재료 소진되고 나면요. 교수님 덕분에 쉴 수 있을 거 같아요.”

고른 치열을 드러낸 채 웃는 얼굴이 흐뭇해 보였다. 이소는 상체를 뒤쪽으로 기대어 편안히 숨을 내쉬었다. 무슨 좋은 일인지, 근사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저와 친구 하자고 다가오질 않나. 주문을 이렇게나 많이 해 주질 않나. 문득 이소는 신문 한편에 있는 띠 별 운세를 기억해 내며 ‘동쪽에서 귀인이 온다.’라는 말이 진정 맞는 말이었나 상기했다.

귀한 분께 나는 무얼 드리지. 손등 위로 촉촉하고 파릇한 풀잎이 살랑였다. 이소는 허리를 숙여 민들레 하나를 꺾었다. 지금은 줄 수 있는 게 당장 이것뿐이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

“네.”

“고맙습니다.”

“…….”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거, 친구 된 기념.”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해준은 몇 번 눈을 깜빡이곤 이내 웃으며 꽃을 받아 들었다. 커다란 손에 작은 민들레를 쥔 해준이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손수건을 꺼내 곱게 접어 넣었다. 그러고는 저도 풀숲에서 흰 민들레를 하나 꺾어 건넸다.

“저도요. 잘 부탁해요.”

“아하하, 고맙습니다.”

하늘하늘거리는 민들레 홀씨를 보곤 이소가 여유롭게 웃었다. 해준이 준 민들레를 강 쪽으로 후, 입김을 불자 홀씨가 바람에 흩어졌다. 개중 몇 개는 해준과 이소의 옷에 달라붙었지만 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소는 노을을 담은 화환을 만들어 해수의 머리에 씌웠다. 조곤조곤 대화가 이어졌고 때때로 웃음이 터졌다. 지금껏 이소의 인생에 없었던 평안하고 여유로운 저녁이었다.

* * *

해준은 그날 이후 부쩍 바깥을 내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이소가 학교에 오는 시간은 매일 오후 네 시. 늦어지면 네 시 삼십 분 전에는 꼭 와서 어린이집 문 앞을 서성거렸다. 해준의 강의실은 학교 운동장 너머로 멀찌감치 아이들이 하원 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은 강의를 하다가 안경 너머로 힐긋 시선을 넘기면 말끔하게 차려입은 낯익은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정원을 가로질러 걷는 게 보였다. 들어가기 전부터 여자들 사이에 잔뜩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 꽤나 익숙한 듯 말을 건네고 허리를 숙이며 어울렸다. 수다스럽고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리다가도 남자가 입을 열면 다들 숨을 죽이고 경청하는 모습이 꼭 아이돌 가수를 따라다니는 소녀 팬들 같아 보였다. 조교가 도시락집 사장님이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하다더니 비단 대학생들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싶었다.

교양 수업이 있는 날은 건물 1층 강의실로 내려가 수업을 했다. 처음 학교에 왔을 때도 강의실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연구실을 선택할 정도로 걷는 것을 싫어하는 해준은 어느 날부터인지 제일 먼저 1층 강의실에 와 수업 준비를 하고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정말 우연히 그 강의실 앞으로 이소의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것을 본 이후였다.

오토바이가 지나간다고 모두 이소일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요란한 엔진 소리만 들리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다 보면 운 좋게도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는 빠르게 지나가는 이소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반가웠다. 붉은 색의 낡은 항공점퍼가 시야에서 벗어나면 그제야 화선지로 시선을 내렸다. 눈치 빠른 학생들은 어쩐지 저 젊은 교수가 30분 전에 비해 기분이 퍽 나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짝 조인 긴장을 풀곤 했다.

늦은 오후가 되면 이소는 벤치에 앉아 때를 놓친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집을 하면서도 아침부터 점심까지 요리 냄새에 찌들어 있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종래에는 입맛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나물을 무치고 볶고 찌개와 국을 올리면서 매번 맛을 봐야 했고 그러다 보면 야금야금 베어 먹은 반찬들 때문에 어설프게 배가 찼다. 그렇게 점심시간 주문까지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정작 제대로 된 끼니는 건너뛰고 하루의 절반이 가 버리곤 했다. 입이 짧은 편은 아니었지만 매번 먹는 음식의 종류는 한정적이어서 쉽게 물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판 초콜릿 빵에 200mL 우유가 다였다.

“아, 여기 있었네요. 간식 먹어요?”

꼭 아까부터 저를 찾고 있었던 것만 같은 해준의 등장에 이소는 놀라면서도 못내 반가웠다. 혹여 촐싹 맞게 입에 무어라도 묻혔을까 봐 소매로 썩썩 닦고는 해준이 편히 앉을 수 있게 엉덩이를 들어 옆으로 슬슬 비켜 앉았다. 자리에 앉은 해준이 이소가 반쯤 먹은 초콜릿 빵을 빤히 쳐다보자 이소는 해준과 빵을 번갈아 보다 아차 싶어 얼른 주머니에서 하나 더 꺼냈다.

“여기 하나 더 있어요. 드실래요?”

이소의 손에 들린 작은 빵 봉지를 보고 해준이 옅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작아 누구 코에 붙이나 싶을 정도의 크기였다. 남자치고 작은 키도 아닌데 이 작은 것을 먹고 어떻게 생활을 할까. 그러나 첫 만남에 가볍게 훅 들렸던 이소의 몸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점심시간 지난 지 오랜데, 식사는 했어요?”

“이게 점심이에요.”

이소가 초코 빵과 우유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해준이 난감한 표정을 했다.

“너무 적은데.”

“괜찮아요. 요리하면서 몇 개 집어 먹었더니 그렇게 배고프진 않아요.”

“그래요? 아쉽다. 사장님이랑 같이 먹을까 하고 가져왔는데.”

“뭔데요?”

해준이 눈썹을 내리며 아쉬운 티를 내자 이소가 해준의 등 뒤를 힐긋거렸다. 검고 납작한 종이 박스는 휘황찬란한 벚꽃이 그려져 있었다. 화과자인가. 이소는 문득 정숙이 일본에 갔었다가 사 왔던 화과자 박스에도 저런 무늬가 그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해준이 박스를 열자 알록달록한 색의 생선회가 고슬고슬한 밥알 위에 얌전히 올라와 있었다. 보기에는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초밥 좋아해요?”

이소는 아, 하고 묘한 표정으로 해준을 올려다봤다.

“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안 좋아하지도 않고….”

“그게 뭐예요. 좋아하긴 하는데 알레르기? 아니면 회는 먹는데 초밥은 안 먹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선뜻 말을 못 하자 해준이 이소의 표정을 살폈다. 이소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어서요.”

괜히 부끄러웠다. 밥집을 하면 이것저것 많이 먹어 볼 것 같은데 또 막상 하던 음식만 하게 되고 먹던 음식만 먹게 되니 우물 안 개구리 같았다. 티브이를 보다가 스테이크가 나와 먹고 싶어지면 값 싼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다져서 밀가루와 섞어 뭉친 후 함박스테이크를 해 먹었고 인도커리 맛이 궁금하면 일반 카레에 토르티야를 구워 싸 먹었다.

맛은 무척 달랐겠지만 외식하는 기분은 충분히 냈고 그 정도로 만족하면서 살았다. 초밥은 사오 년 전 진혁이 제 생일 때 사 온 것들 중 마트 마감 시간에 집어 온 딱딱하고 마른 것을 두어 입 먹다가 그대로 뱉은 경험이 전부였다. 목구멍으로 씹어 넘긴 적도 없었으니 제가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리 없었다.

“음. 그렇구나.”

해준은 별다른 말은 얹지 않은 채 차분하게 박스를 열고 긴 젓가락으로 노란빛의 계란 초밥을 집었다. 그리고 이소의 입술 앞에 갖다 댄 채 눈짓했다.

“먹어 봐요.”

저에게 젓가락을 주면 집어 먹을 수 있는데 대뜸 입술 앞까지 초밥이 배달되자 이소는 손을 움찔거리며 머뭇거렸다. 꼭 제가 해수에게 하듯 어르는 표정으로 바짝 다가와 젓가락으로 톡톡 입술을 두드렸다.

“한 번만 먹어 봐요. 자, 아.”

“제, 제가 먹을게요.”

“사장님도 나 캐러멜 먹여 줬잖아요. 내가 주는 것도 먹어 봐요. 한 번만.”

“아니 그건….”

하는 수 없이 작은 입술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치자색의 초밥이 매끄럽게 밀려들어 왔다. 혀에 닿는 쫀득한 밥알을 씹을 때마다 달큰하고 새콤한 향이 났고 입천장과 혀 사이에서 뭉개지는 계란의 식감이 부드러웠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사르르 녹아 꿀떡꿀떡 넘어간 초밥 맛에 이소가 손으로 입을 막고 침을 삼켰다. 말도 안 되게 맛있었다.

“맛있죠.”

고개를 끄덕이고 해준을 바라보자 어느새 다른 종류의 초밥이 코앞에 와 있었다. 이소가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이제 제가 진짜, 먹겠습니다.”

“처음 먹어 본다면서요. 순서가 있어요.”

“…….”

젓가락 주기로 해 놓고. 이소가 당황한 낯으로 바라보자 해준이 부드럽게 설득했다.

“원래 달걀 초밥이 가장 나중인데 사장님이 안 먹어 보셨다고 해서 입문하기 쉽게 먼저 먹인 거예요. 자, 이건 도미. 흰 살 생선이에요. 천천히 씹으면서 식감을 느껴 봐요.”

먹는 순서가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니. 그냥 박스에 놓인 대로 순서대로 집어 먹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이소는 해준이 주는 대로 참치, 연어, 문어, 장어까지 순서대로 받아 먹었다. 처음에는 받아 먹는 게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자꾸 젓가락을 달라고 했는데 그때마다 해준은 씹는 동안 차분히 들으라며 자연스럽게 입에 넣어주곤 차분한 목소리로 부위별 명칭과 먹는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해 줬다. 먹는 중간중간 국물까지 곁들여 먹으니 속이 데워져 한결 든든했다. 정신 차려 보니 박스 하나를 이소가 거의 다 비워 버렸다.

“어떡해요, 제가 다 먹었어요. 교수님 한 점도 못 드셨어요.”

“괜찮아요. 사실 저 먹고 왔어요.”

해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자, 연어 하나 더 남았어요. 여기 아.”

“이건 진짜 제가 집어 먹을게요.”

이소가 얼른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들어 마지막으로 남겨 둔 초밥을 집었다. 해준이 하던 것처럼 능숙하게 간장을 찍어 먹고 싶었는데 입에 넣으려는 순간 젓가락이 엇갈리며 연어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소는 떨어지려던 연어를 얼른 낚아채 손바닥으로 밀어 넣었지만 입가에 기름기와 소스가 범벅이 된 후였다. 정작 제 꼴을 모르는지 이소는 대충 소매로 입가를 문지르곤 손에 묻은 흰 소스만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해준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돌연 커다란 손을 뻗어 이소의 볼에 묻은 소스를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으로 가져가 한 번 쪽 빨곤 이소를 향해 눈을 흘겼다.

“스물일곱 살 아니고 그냥 일곱 살이네. 다 묻히고 드시고.”

“아니 그걸, 왜…. 왜 드세요. 닦아야죠.”

“닦을 데가 없어서요.”

“여기 있는데…!”

이소는 제 손을 닦던 손수건을 뒤집어 해준의 손을 잡고 벅벅 문질렀다. 몸에 비해 한참 작은 두 손이 해준의 손바닥을 쥔 채 꾹꾹 눌러대는 동안 해준은 얌전히 손을 내밀곤 기다렸다. 오래되어 색이 다 빠진 손수건 군데군데 작은 아기 오리가 그려져 있었다. 20대 후반 남자들의 주머니에서는 나오지도 않을 것들이 이소의 품에서는 참 잘도 나왔다. 물티슈, 작은 고무줄, 사탕 껍데기, 캐릭터 밴드, 그리고 아기 손수건까지.

“귀여운 무늬네요.”

“아, 이거 해수 아기 때부터 쓰던 거예요. 가지고 다니는 게 버릇이 돼서.”

이소가 손수건을 몇 번 뒤집으며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참 아이 아빠 같고.”

해준의 말에 이소는 문득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방 안을 기어 다니던 해수의 목에 걸어 주던 침 받이가 어느새 아이의 이마를 닦아 주기도 하고, 대여섯 살이 되어 손수건이 필요 없게 된 순간에도 곱게 개킨 채 언제라도 쓰일 일이 있게 들고 다녔다. 아이가 좋아하던 무늬였고 이소 역시 처음 직접 돈을 주고 산 손수건이라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던 20대 초반의 윤이소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교수님은 진짜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네요.”

“뭘요?”

이소는 여전히 해준의 손을 잡은 채였다. 해준의 맥박이 두 손으로 맞잡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냥… 남들이 다 물어보고, 궁금해하는 것들이요. 옛날엔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다들 조금 가까워지고 그러면 다 물어보고 그랬거든요.”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고작 몇 번 얼굴 보고 그마저도 호감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해준이 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잘 해 주는 게 기꺼우면서도 동시에 의아했다. 누군가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렇게 잘 해 준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 곱씹으며 제 지나간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소와 시선이 맞부딪힌 해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누구나 사정이 있으니까요.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이소의 양손을 해준이 슬며시 잡았다. 이소의 손은 작고 거칠었지만 따뜻한 편이었다. 이소는 손을 빼낼 생각은 못 한 채 진득하게 얽힌 시선에 매여 있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옆에 앉아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나누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 줄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지금은 제가 사장님한테 그런 사람이면 좋겠고요.”

다들 궁금해했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도마에 올린 후 난도질했던 사람들은 많았다. 아이가 들어서는 안 되는 오해와 거짓말로 점철된 소문들이 제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지독하게 괴롭혔다. 아주 어릴 때는 저에게 잘 해 주는 사람을 덥석 믿고 하소연을 했다가 도리어 그 고백이 칼날이 되어 제 등을 찔렀었던 적도 왕왕 있었다. 이소는 그렇게 입을 닫았고 말을 아꼈다. 따가운 눈총과 뜬구름 같던 소문들은 일 년이 지나 동네를 떠나고 나면 곧 잊혔다. 그렇게 7년 동안 열 번이 넘게 정착을 못 하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언제라도 사장님 이야기 하고 싶어지면 그때 말해도 괜찮아요. 다 들어 줄 테니까.”

하지만 사실은 언제라도 제 옆에 같이 걸을 사람이 생긴다면 시시콜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꺼내어 놓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언제라도요?”

“네. 언제든. 사장님이 원할 때.”

해준은 언제라도 괜찮다는 말을 하며 다른 손으로 이소의 손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커다랗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평생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매끈하고 고운 손이 이소의 작은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저도 곧 서른을 바라보는 성인인데 해준은 꼭 저보다 열 댓 살은 많은 어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릴 적 잡았던 아버지의 손이 저를 다독였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런 기억.

식사를 마친 이소는 해준과 함께 후문까지 걸었다. 광장에서부터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10분, 걸어가는 내내 이따금 스쳤던 어깨는 불쾌하지 않았다. 이소가 신문에서 보았던 띠별 운세에 흥미를 보이면 해준은 고대 민간신앙과 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고 이소가 나무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면 해준은 그 나무로 지은 궁궐에 대한 유래를 풀었다.

교수들은 원래 이렇게 아는 게 많은 걸까. 학생들에게도 이렇게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강의를 하겠지. 이소는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해준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은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종일 듣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꽤나 느린 걸음으로 걸었는데도 저만치 후문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해준은 방금 전 이소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가벼운 질문이었는데 어느새 고대 중국 지배층의 사치품은 무엇이 있었는가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소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들어갈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해준을 보내고 자신은 가게로 돌아가 봐야 했다.

“교수님.”

“네.”

“제가 강의동 앞까지 배웅해 드릴까요?”

“응?”

재차 묻는 말에 이소의 귀가 달아올랐다. 용기를 내는 일이란 건 어려운 거구나.

“얘기…, 더 하고 싶어서요.”

그래도 어렵사리 뱉은 말에 후회는 없었다. 해준이 봄볕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같은 마음이었네.”

그럼 우리 조금 천천히 걸을까요? 해준의 말에 이소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해준이 이소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끌어당기자 두 사람의 걸음은 왔던 길의 자취를 되밟았다. 조금 늦으면 어때, 이소는 이따금씩 가볍게 부딪히는 해준의 손등이 느껴질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해준의 강의동이 아주 멀었으면, 아주아주 멀었으면 좋겠다.

* * *

이른 아침, 가게에 혼자 나온 이소는 플라스틱 용기에 음식을 담으면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여러 번 확인했다. 그냥 도시락도 아니고 기업 행사용으로나 나가는, 하나에 15,000원이나 하는 도시락을 무려 200개나 만들어야 했다.

이 주문 하나에 300만 원. 2년을 가까이 일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만들어 본 것은 처음이다. 갑자기 취소되는 일은 없겠지. 이 정도 금액이면 평소 들어오는 주문의 8배였다. 시간은 없는데 갑작스럽게 많은 양을 주문해서 사장님이 고생스럽겠다며, 제 손을 꼭 쥐곤 미안하다고 말하는 해준의 얼굴이 생각났다. 실망하게 하는 일 없이 흠 잡히는 일 없이 만들기로 했다.

정숙의 작은 경차에 차곡차곡 담은 도시락이 쏟아지지 않게 고정하곤 학교를 향해 떠났다. 차를 몰 일도 별로 없었고 굴릴 만한 능력도 되지 않았기에 운전면허만 따 두고 썩히던 참이었다. 오토바이를 몰 때보다 훨씬 더 천천히 운행했고 겨우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주차하는 데만 15분이나 걸렸다. 나중에는 돈이 좀 모이면 중고 경차라도 하나 장만해서 틈틈히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행사가 꽤 큰 모양인지 학생들이 분주하게 강의동 앞에 천막을 친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이소는 해준이 부탁했던 대로 도시락을 옮겨 행사장 가운데 갖다 놓고 모양이 망가지거나 흐트러진 것은 없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다. 학생들이 이젤과 캔버스를 옮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구석에 쪼그려 앉아 하나하나 들여다보느라 목이 다 뻐근했다.

정리를 끝낸 이소가 학생들과 조교에게 눈인사를 하고 이내 해준을 찾았다. 낯익은 노교수들도 꽤 많이 보여 해준도 곧 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도통 익숙한 검은 옷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이 엇갈렸나 보다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저 멀리서 하얀 트레이닝 복을 입은 해준이 학생들과 짐을 나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항상 검은 코트에 정장입은 모습만 보았었더래서 해준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소는 저 긴 다리에도 맞는 바지가 있구나, 생각하며 한참을 해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얼른 배달만 마치고 가야 하는데 해준과 인사를 하고 싶어 계단 위를 서성였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판화과 조교가 이소에게 믹스커피를 내밀었다. 이소는 해준에게 용건이 있다고 말하기가 애매해 머뭇대다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기 행사 구경하느라구요.”

“혹시 차해준 교수님 기다리세요?”

이소가 놀란 눈을 깜빡이자 조교는 ‘그럼 말씀하시지, 잠시만요. 제가 가서 말씀드릴게요.’ 하고는 얼른 해준에게 뛰어갔다. 어째서 판화과 조교까지 알고 있는 거지. 눈치도 좋았다. 부끄러워서 그냥 뒤돌아 가게로 가 버리고 싶었는데 눈은 여전히 조교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제 몸만 한 짐을 옮기던 해준은 160cm도 안 되는 조교가 다가오자 허리를 훅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워낙 키가 크다 보니 저런 것도 불편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조교가 뒤를 돌아 이소가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자 해준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차분하게 돌아가는 고개와 맞붙는 시선에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드디어 저를 발견한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크게 미소 지었다. 꽤나 멀리 서 있었는데도 그 근사한 얼굴이 제 눈앞에 있는 듯 아주 잘 보였다.

‘안녕.’

‘안녕하세요.’

해준이 손을 흔들자 이소 역시 작게 손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걸어오려나 싶었는데 또 금세 해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해준은 자신의 귀 옆으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편 채 흔들었다. ‘전화할게요.’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바로 강의동 안으로 사라졌다. 핸드폰 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화를 한다는건지 의아했다. 이소는 조금 아쉬웠지만 얼굴이라도 본 게 어디냐 싶어 발 길을 돌렸다.

* * *

가게에 돌아오니 오전에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엉망이었다. 재료도 거의 소진해 점심시간 지나고 나면 오후 3시쯤 문을 닫아도 될 것 같았다. 포장용기를 정리하고 점심 밥을 안쳤다. 어느새 정숙이 내려와 라디오를 켜고 매장 정리를 도왔다.

[사랑과 희생의 삶, 범양그룹은 푸른어린이재단에 100억을 기부하면서 명실상부한 서민 친화적 기업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20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노약자와 차상위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은 임원진들이 거추장스러운 정장을 벗어 던지고 함께 아름다운 사회를 가꾸어나가자는 취지로….]

“참 저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거 아니겠어. 저번에 어떤 기업 회장은 돈 빼돌린 거 해명하라니까 휠체어에 담요 쓰고 나와서 기침만 해대더만. 나는 말야 이소 씨, 세상에 죄 나쁜 놈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좋은 부자들도 있더라고. 그 뭐야, 오블라디 오블라다?”

“그건 비틀즈 노래구요. 노블레스 오블리주요.”

“그래, 그거. 부자들이 자기가 가진 거 나눠 주는 삶. 얼마나 멋있어.”

“그러게요.”

이소는 말없이 바닥을 쓸었다. 세상에는 제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도 많지만 이소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제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남이 가진 것까지 탐내곤 했다. 이해한다. 저만 해도 너무 여유가 없다 보니 손에 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알량한 동정심으로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가 손해 본 일도 왕왕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은 타인과 무얼 나누기보다는 제 것을 쪼개 해수와 정숙에게 나누기만 해도 부족했다. 저도 통장에 한 1억 있으면 길거리 거지를 볼 때마다 한 푼이라도 적선할 텐데. 없는 놈들이 더한다고, 좋은 마음은 쉽게 마음 먹어지지 않았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가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숙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기 때문에 이소는 카운터로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두솥 도시락입니다.”

- 사장님.

“네. 주문하시겠어요?”

주문을 받으려 펜과 종이를 들었는데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되묻자 별안간 익숙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 내 목소리도 기억 못 하고. 섭섭해요.

차 교수였다. 전화한다는 게 가게로 전화한다는 거였구나. 이소는 제가 남긴 것이 색종이에 적은 가게 번호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가게로 전화하실 줄은 모르고…. 행사 끝나셨어요?”

- 아니요. 오후까지 정신없어요. 제가 너무 바빠서 인사만 겨우 했는데, 잘 들어갔어요?

“네. 잘 왔어요.”

- 그래도 다행이에요. 조교가 안 알려 줬으면 얼굴도 못 봤을 거 아니에요. 또 그냥 도시락만 두고 가려고 했죠?

사실 10분 정도 기다렸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소는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 양이 제법 많았을 텐데 배달 어떻게 했어요? 힘들었겠다.

“차에 싣고요.”

- 차가 있었어?

“배달용으로 쓰는 정숙 사장님 차 있어요. 뒷좌석이랑 트렁크 합치니까 그래도 200개는 들어가더라고요.”

- 고생했겠어요. 내가 시간이 있었으면 내 차로 가지러 가는 건데. 미안해요.

원래 주문하면 다 배달해 주는 건데 해준은 자신의 차로 가지러 오질 못해서 사과를 하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사과를 받으니 이소는 괜히 면구스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그래도 오늘 할당량은 다 끝내서 세 시쯤 문 닫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일은 쉬고요.”

- 사장님은 쉬는 날 뭐해요?

이소는 해준과 통화하며 수화기 선을 손가락에 감아올렸다. 꼬불꼬불한 선을 손가락에 감았다 푸는 행동을 쓸데없이 반복했다.

“그냥… 해수랑 놀아요. 공원이나 놀이터도 가고, 책 읽으러 도서관도 가끔 가고.”

- 또?

“어, 그냥 많이 걷고…. 음, 가끔 스티커 사진도 찍고요.”

- 스티커 사진? 그 사각 부스 안에 들어가서 찍는 거요? 그런 게 요즘도 있어요?

“네. 요즘은 사진 네 장 이어져서 나와요. 값이 조금 나가긴 하는데 가끔 찍어요. 기념일이나 기분 좋을 때. 생일에도 가서 찍구.”

- 나도 보고 싶다. 사장님 스티커 사진.

“제 스티커 사진이요?”

- 네.

“왜요?”

- 그냥요. 잘 나왔나 궁금해서요. 이런 건 궁금해해도 되죠?

궁금한 것도 많다. 그냥 해수랑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가발 쓰고 찍은 몇 장의 사진인데 해준은 집요하게 보여 달라고 했다. 이소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중에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다. 해준은 저녁에 일찍 끝내고 가게로 오겠다고 했다. 도시락을 또 사 가려나 싶어 묻자 해준은 그냥 사장님과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서 그런거니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급히 전화를 끊었다.

“저녁…. 냉장고에 뭐 있더라. 먹을 거 없을 텐데.”

저녁 도시락을 포장해 놓아야 하나 생각하던 이소는 같이 식사하자는 그 말에 줄을 직직 긋곤 냉장고에 재료가 무엇이 있나 뒤졌다. 간단한 찬거리와 찌개거리뿐이라 어쩐지 초라한 밥상이 될 것 같았다. 해준이 와서 실망하면 어쩌지 근심이 들었다.

“해수 아빠 있어?”

골목 철물점 집 사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에도 반찬과 찌개를 자주 사 가는 단골손님이라 이소는 얼른 냉장고 문을 닫고 웃는 낯으로 카운터에 섰다. 사모 손에는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별 건 아니구, 점뻔에 내가 시아주버님 생신상에 사장님네 가게에서 산 갈비찜이랑 잡채 올렸더니 너무 맛있다고 잘 드시더라고. 우리 신랑도 잘 먹었어. 요새 내가 사장님 덕 많이 봐서 고마워서 이거 가져왔지.”

봉지를 열어 보자 이중삼중으로 묶은 봉지에 막 담근 김치 두어 포기가 담겨 있었다.

“날 더워지기 전에 굴 사서 넣었으니까 오늘 내일 안에 후딱 먹어. 돼지고기 삶아서 이거랑 쏘주랑 먹으면 딱이야.”

“안 주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굴이 섞인 김치니까 오늘은 보쌈을 하면 되겠다. 뜻밖의 호의는 저녁 메뉴 걱정까지 덜어 주었다.

“아, 그리고 해수가 올해 1학년인가?”

“내년에요. 올해까진 어린이집 다녀요.”

“키 얼만치 되나?”

“또래보단 조금 커요, 한 130cm 정도요.”

이소가 제 명치께를 가리키자 사모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딱이다! 우리 손주가 딱 고만할 때 타던 자전거가 있는데 버릴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주 낡은 건 아니야. 잘 굴러가고 그 뭐야, 비싸게 주고 샀어. 15만 원인가…. 근데도 지 엄마가 새로 사 준다니까 할미 집에 있는 건 쳐다보지도 않더라고. 해수 혹시 자전거 없으면 내가 줘도 될까?”

해수가 자전거를 가지고 싶다고 여섯 살 때부터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그동안 주워 온 것들이 모두 하자가 있는 것들이라 타다가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돈을 좀 모아서 사 줘야지, 사 줘야지 하고 결심만 한 게 벌써 2년이 넘었다.

사모는 해수 데리러 가기 전에 자기 집에 들러 주라며 주소를 적어 주곤, 얼마 전에 담근 깍두기와 직접 빚은 만두도 조금 싸 주겠다고 했다. 모두 다 꺼내 놓으면 해준도 아주 없어 보인다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녁 밥상이 퍽 푸짐해질 것 같은 예감에 이소의 입꼬리도 연신 씰룩댔다.

웬일로 제 인생에 이리 좋은 일이 연달아 생기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역시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종종 오나 보다. 이소는 주소를 받아 들고 사모를 배웅했다. 곧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다. 뒤를 돌아 가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금일, 익일 재고 소진으로 문을 닫습니다. 월요일에 다시 엽니다. 감사합니다.>

가게 문을 닫고 해수를 데리러 가기 한 시간 전 이소는 슈퍼에서 커피 우유를 하나 사 먹었다. 아직 바깥으로는 날이 훤한데 매장 조명을 끄고 일찍 문을 잠그는 것이 영 어색했다. 커다란 종이에 매직으로 재고 소진 알림을 써 넣으면서 쑥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냥 문을 닫아 놓고 며칠 자리를 비운대도 동네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텐데도 이소는 꼭 ‘재고 소진’이라는 말을 써 보고 싶었다. 대박 난 가게에서만 걸 수 있는 상패 같은 느낌이었다.

언덕을 넘어 낡은 빌라 단지로 들어서자 바닥에 음식물 쓰레기와 종량제봉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금이 간 콘크리트 사이로 마구 돋아난 잡초들이 무성했다. 언덕이 꽤 가팔랐는지 춘삼월인데도 이소의 목덜미에서 땀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그래도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길일 테니 크게 힘들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5층에 도착해 좁은 복도를 둘러보자 거미줄에 덮인 어린이 자전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파란 칠이 벗겨진 몸체 위 바구니에 유행이 지난 로봇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자아이가 탔었던 모양이었다. 이소는 허리를 굽혀 자전거 바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구멍은 나지 않았는지 타이어가 힘없이 꺼지는 일은 없었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랴, 당장 체인에 기름칠 좀 하고 물로 잘 닦으면 타는 데 지장은 없게 생겼다. 김치와 만두는 바구니에 넣어서 돌아가야지.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소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추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낯익은 사모가 문을 열어 줄 줄 알았는데 웬 흰 러닝셔츠 차림의 남자가 코가 벌게진 채 문을 열었다. 이소는 집을 잘못 찾았나 싶어 주머니에서 주소가 적힌 쪽지를 꺼내 들었다. 사모가 적어 준 그대로였다.

“누구요?”

남자가 취기가 덜 풀린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그 도시락집에서 왔는데요. 사모님 혹시 집에 계시나 하고….”

이소는 이럴 때마다 곤란했다. 도시락 주문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손님에게는 가게명만 대면 알아서 대화가 풀렸지만 이렇게 사적인 일로 동네 주민을 만날 때면 저를 무어라 소개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모? 내 마누라? …내 마누라를 당신이 왜 찾아?”

남자는 미간을 찡그리곤 문을 벌컥 열며 앞으로 나왔다. 알싸한 소주 향과 함께 매운 양념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자가 다가서자 이소는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발뒤꿈치에 말라비틀어져 버려진 화분이 채이며 먼지가 났다. 남자는 꼭 개처럼 이소에게 가까이 붙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몹시 기분 나쁜 몸짓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사모님께서 손자분 안 쓰는 자전거를 저희 딸 주신다고 하셔서.”

“아이고, 여보. 왜 또 나왔대? 들어가, 들어가 있어.”

어디를 나갔다 오는 모양인지 콩나물 봉지를 들고 뛰어 올라오던 사모가 남자와 이소를 번갈아 보았다. 돌연 남자가 사모에게 윽박질렀다.

“니 이 사람한테 자전거 준다캤나? 왜 명준이 자전거를 서방 동의도 없이 준다 만다캐? 갸 오면 뭐 타라꼬?”

“여보, 그런 게 아니고. 이제 명준이도 열셋 먹어서 네 발 달린 자전거 안 탄단다. 그래서 내가 도시락집 사장님 딸 생각나서 준다캤다. 김치랑 만두도 좀 나눌까 하고 내가 불렀다, 내가.”

“도시락집?”

남자가 시뻘게진 눈을 부라리며 이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소는 사모가 왔으니 이제 오해가 풀렸을 테고 얼른 자전거나 받아서 내려갔으면 싶었다. 그때 별안간 남자가 이소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아아. 오야, 니가 그 세숫대야 믿고 동네 아지매들 다 홀린다는 그놈이고마.”

이소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놀란 눈을 한 채 헝클어진 옷깃을 잡았다. 사모가 얼른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당신 미쳤나, 해수 아빠 그런 사람 아니다!”

“놔라, 여편네야. 니 밤마다 노름질하느라 내한테 던져 준 개밥이 바로 이놈이 만든 거 내가 모를 줄 알간?”

“개밥은 무신, 와 싹싹 잘 처먹어 놓고 이라는데? 손 놔라, 정말 와 이러는데?”

“동네 여편네들 죄다 고스톱 치느라 귀한 서방 저녁상에 식당 밥이나 올리고. 집구석 아주 잘 돌아간다! 으이? 돈을 벌어다 주면 뭐하노? 엄한 놈한테 오륙십만 원씩 꽂아삐는데!”

오해였다. 사모가 돈을 어디다 갖다 썼는지는 몰라도 이소네 가게는 자주와야 열 번이었다. 사 가는 종류의 도시락도 오천 원 언저리에 머무는 것이어서 그렇게 많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돈의 행방은 알리고 싶지 않은 듯 사모는 연신 이소의 눈치를 보며 남자를 말렸다. 남자는 흥분해서 복도가 다 울리도록 쩌렁쩌렁 고함을 쳤다. 빌라 어딘가에서 남자의 목소리에 반응한 개 짖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이소는 남자와 사모를 번갈아 보며 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마, 니 눈 어디에 돌리노? 내 집사람 가슴 쳐다보나?”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이소는 무서웠다. 저도 다 큰 성인이지만 저렇게 나이 든 남자가 솥뚜껑만 한 손을 들고 위협을 하면 겁부터 났다. 오금이 저리고 가슴이 뛰었다.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좁은 계단에서 씩씩대며 발을 굴렀다.

“젊은 놈이 실실 웃어가며 장사하니까 여자들이 좋다고 달려들제? 동네 아줌마들 밥때마다 거기 모여가지고.”

남자가 움켜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밥도 팔고, 여편네들 보지도 빨아 주나 보지? 잉?”

“여보, 니 돌았나!”

남자가 이소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벽에 밀쳤다. 돈 때문이 아니라 제가 동네 아줌마들에게 수작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놀란 사모가 깡충깡충 뛰며 남자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리려 했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키가 작지 않았기에 이소의 옷깃이 위로 들어 올릴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니에요, 오해십니다. 사장님, 그런 게 아니고…, 악!”

묵직한 파열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는 이소의 얼굴을 내리쳤다. 볼이 아니라 귀 쪽을 얻어맞아 골이 다 흔들렸다. 손이 두툼하더라니 주먹이 아니라 꼭 커다란 벽돌로 맞은 것 같았다. 높은 이명이 들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한 대를 때린 남자는 그다음부터는 쉬웠는지 손바닥으로 뺨을 몇 대를 더 갈겼다.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었던가, 이소는 맞으면서도 제가 왜 맞는지 몰랐다. 사모가 울면서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동네 남자들이 다 니 줘패고 싶어 하는 거 아나.”

“…….”

“과일가게 정 씨, 정육점 박 사장, 하나슈퍼 최 사장까지 죄다 니 밥 뭇따.”

밥맛 좋대? 남자가 움켜쥐었던 옷깃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소는 바닥에 엎어져 기침을 했다. 남자가 읊조리는 사람들의 처가 이소의 가게에 올 때마다 적어도 삼사만 원씩은 팔아 줬다. 그저 제 밥이 맛있어서, 일이 너무 바빠서 제 음식으로 배를 채우나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노름하느라 이소가 만든 밥으로 남편들 식사를 대신하고 놀러 나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남자가 숨을 몰아쉬는 이소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입술이 다 터지고 뺨이 부어올랐다. 기침을 하느라 눈도 벌겠다.

“씨팔, 가시나처럼 생겨서는…. 어디 누깔을 비잡게 뜨고 지랄이고.”

남자가 이소의 얼굴에 누런 가래침을 뱉었다. 침에서 매운 고춧가루와 역한 담배 냄새가 났다. 토할 것 같았다.

“앞으로 내 마누라한테 밥 팔지 마라. 알았나.”

“…….”

“한 번만 더 그 면상 들고 실실 쪼개면서 밥 팔믄 그땐 니 하나로 안 끝난다. 니 아새끼 하나 있지.”

해수를 언급하자 이소는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내 한다믄 해. 알아 처듣것제.”

남자는 발로 한 번 이소의 배를 툭 치고는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사모가 어쩔 줄을 모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이소를 살폈다. 이소는 소매로 남자가 뱉은 가래를 닦으며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사랑 받는 것만큼 미움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특히나 이렇게 갑자기 날뛰는 분노 앞에서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해명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편견과 오해뿐이었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아니 저이가 왜 그러나 몰라. 정말로, 아니 얼굴 터진 것 봐, 어쩌면 좋아….”

입술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뱉어도 뱉어도 피가 나왔다. 혀로 볼 안쪽을 핥자 잇몸이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사모님.”

“으응.”

왜 솔직하게 말 안 하셨어요.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 묻는다고 한들 사모에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또 한 번의 사과, 아니면 적반하장식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소는 한숨을 쉬곤 ‘아니에요, 저 갈게요.’ 하고는 일어났다.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가자 사모가 조그맣게 저를 불러세웠다.

“해수 아빠, 기다려 봐. 내가 만두랑 김치 싸 놓은 거 있어. 미안해서…. 미안해서 그러니까 자전거도 꼭 가져가.”

이소는 고개를 들어 사모를 올려다보았다. 배려라고 해야 할까, 동정이라고 해야 할까, 무신경함이라고 해야 할까. 제 자존심이 먼저였다면 그냥 내려갔을 것이다. 이럴 때 돈 몇 푼과 아이 얼굴 생각이 먼저 나는 걸 보면 저도 참 바보에 머저리였다. 이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세요, 가져갈게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지만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사모가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고 낡은 철문이 닫히자마자 이소는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억울했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 * *

어느새 빗방울이 땅을 적셨는지 콘크리트가 젖어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전거 바구니에 담긴 냉동 만두는 적지 않았다. 사모 말대로 맛있게 담가졌는지 시큼하고 달곰한 깍두기 향도 침이 고였다. 고기를 사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저 멀리 정육점이 보였지만 이소는 발걸음을 돌려 다른 골목을 향해 걸었다. 철물점 사장이 말했던, 저를 쥐어 패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 정육점 박 사장도 있다고 했다. 제 꼴이 이렇게 된 것을 가지고 또 몇 마디 얹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아 10분 넘게 떨어진 곳에서 고기를 샀다.

얼굴 꼴이 이래서 어린이집 하원은 못 시킬 것 같아 정숙에게 부탁했다. 얼굴을 보면 많이 놀라겠지. 자전거 바람 넣는 곳이 코앞에 있었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남자에게 맞은 곳이 욱신욱신했다. 전 동네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수군댔었는데 이 동네는 그나마 남자들만 척을 두니 조금 나은가 싶었다.

이소는 한참을 바람 넣는 기계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고 꼭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300인분의 요리와 철물점 사장의 해코지까지, 순식간에 피곤이 몰아닥쳤다. 눈꺼풀이 감겼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거리에 노을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보랏빛 하늘을 끼고 있는 산 너머에 석양이 꼴락꼴락 넘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늦겠다.’

이소는 일어나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었다. 옆구리 부근에 멍이 들었는지 펌프질을 할 때마다 겨드랑이와 배가 욱신거렸다. 어린이 자전거에 바람을 넣는 것뿐이었는데 숨이 찼다. 체력이 엉망이 되었다. 해준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어서 가서 고기를 구워야 했다. 얼굴은 조금 놀라겠지만 잘 둘러댈 생각이었다. 자전거를 가져오다가 굴렀다고 할까, 앞을 제대로 안 보고 다니다가 전봇대에 부딪혔다고 할까. 정작 물어봐 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설프게 더듬지 않으려 열심히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가게 앞에 다다르자 이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해수 아빠! 어디 갔다 이제 와? 어매! 얼굴이 이게 뭐야!”

집에 도착한 이소의 얼굴을 본 정숙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찌개를 올리다 말고 뛰어나왔다. 방바닥에 엎어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해수도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아빠 다쳤어?”

“어, 그냥 좀. 오다가 넘어졌어.”

이소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자 정숙은 ‘어떻게 넘어지면 그렇게 엉망이 돼?’ 하며 혀를 차고 약을 가지러 들어갔다. 해수는 적잖이 놀란 듯 이리저리 얼굴을 살폈다.

“갑자기? 아빠 원래 안 넘어지잖아.”

“아빠도 넘어지지. 사람은 다 넘어져. 해수 잘 놀고 있었어?”

“응. 할머니가 오늘 고기 먹는대서 간식도 안 먹었지. 근데 아빠 너무 아프겠다. 내가 약 발라 줄까?”

해수가 얼굴을 찡그리고 이소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얼른 제 서랍장으로 달려가 캐릭터 밴드를 몇 장 꺼냈다. 공주가 그려져 있어서 엄청나게 아끼는 건데 또 이럴 때는 써도 되나 보지, 이소가 김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정숙이 약상자를 가지고 나오자 해수는 제가 하겠다고 정숙에게 연고를 받아 들었다. 면봉에 연고를 묻혀 이소의 입술에 정성스럽게도 찍어 발랐다. 아직 어려서 어설플 줄 알았는데 제법 바르는 폼이 났다. 입술 바로 옆에 요란한 무늬의 밴드가 붙었다.

“해수 덕분에 금방 낫겠다. 고마워.”

“앞으론 넘어지면 무조건 내가 치료해 줄게. 너무 아프면 말해. 약 더 발라 줄게.”

“지금은 괜찮아. 사장님, 저 밑에 내려가서 불판 좀 가져올게요. 우리 옥상에서 먹어요.”

“좋지. 근데 고기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세 사람밖에 없는데. 어마, 만두도 있네.”

“손님 오세요.”

손님이라는 말에 정숙이 돌아보았다.

“그때 그 키 큰 친구요.”

이소가 간단히 덧붙이자 정숙이 표정이 환해졌다. 그 잘생긴 친구 얼굴 좀 가까이서 봐야겠네,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게요. 같이 제대로 식사하는 건 처음인데, 정작 그 멀끔한 사람이 자기처럼 옥상 마루에 다리를 접고 앉아 고기쌈을 싸 먹는 모습을 생각하니 퍽 어울리지 않는 그림 같았다. 해준은 스테이크에 칼질이 어울리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혹여 자신이 준비한 밥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며 신발을 고쳐 신었다.

* * *

이소는 불 꺼진 가게 문 앞에서 열쇠를 찾고 있었다. 자꾸만 안감 사이로 도망가는 열쇠 꾸러미에 괜히 성이 났다. 바느질한다고 해 놓고 또 일이 바빠 자꾸만 잊었다.

“아, 진짜 짜증 나.”

평소 같으면 차분하게 꺼냈을 일인데 자꾸만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결국 주머니를 붙잡고 마구 당겼더니 옷에 걸린 열쇠 꾸러미가 바깥으로 튕겨 나가 철물점 사모에게 받은 낡은 자전거 옆에 떨어졌다. 가로등 밑에서 보니 칠이 벗겨지고 녹슨 곳이 더 눈에 띄었다. 저런 고물을 받아 왔던가. 입술이 욱신거렸다. 몇 시간 전에 맞았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씨발….”

곱씹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돈을 덜 갚아서 사채업자들에게 맞을 때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때 더 눈물이 났다. 어리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애먼 주먹질을 당했다고 울컥울컥 화가 솟구치는 걸 보니 왜 일곱 살 해수가 혼자 넘어지곤 서러워서 우는지 이해가 갔다.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사장님?”

이소가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얼굴을 한 해준이 서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이소는 해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목과 코가 시큰거렸다. 바로 전에까지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울음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어떠한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입술이 벌어지면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어 버릴까 봐 지근지근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저를 살피던 해준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이소는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아까까지는 정말로 괜찮았는데, 변명거리도 정말 많이 생각해 두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마주치는 것은 너무 궁상맞고 초라해 보였다. 해준이 다가와 이소의 손목을 잡아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밝은 가로등 밑에서 이소의 부어오른 볼과 찢어진 입술은 잘 보였다.

“얼굴이 왜 이래요.”

이소가 대답을 않자 해준이 이소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커다란 손아귀에 가느다란 손목이 다 잡혔다.

“잠깐 나 좀 봐요, 사장님. 잠깐만, 고개 좀 들어 봐.”

해준이 허리를 숙인 채 이소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이소가 계속 고개를 돌리자 해준은 이소의 손목을 놓고 양 볼을 붙잡아 올렸다.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에 눈물이 그득했다. 콧구멍 주위에 마른 핏자국과 깊게도 찢어진 입술, 멍이 들었는지 퍼렇게 부어오른 뺨을 하고 이소는 벌벌 떨었다. 이소는 해준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렇게 시선을 내렸다.

해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누가 이랬어요.”

넘어졌다고 말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다가 전봇대에 부딪혔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계속 치밀어올랐다. 잘 참았었다. 정숙에게도 해수에게도 거짓말이 술술 나왔는데 해준의 앞에 섰더니 자꾸만 아까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고 싶었다. 철물점 주인이 저를 이렇게 때렸다며, 얼굴에 침도 뱉었다며 모조리 이르고 싶었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이소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해준이 말없이 코트를 열어 이소를 당겨 안았다.

넓고 따뜻한 품, 코트 안에서 포근한 해준의 향수 냄새가 났다.

“괜찮아요, 내가 왔잖아.”

해준은 이소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한 손으로는 어깨를 감싸 쥐고 가만가만 두드렸다. 뒤통수를 타고 목덜미까지 쓰다듬는 온기에 데일 것 같았다. 해준의 숨소리가 이소의 귓가에서 천천히 흩어졌다.

“내가 다 혼내 줄게요. 우리 사장님 이렇게 만든 사람한테 가서 똑같이 해 줄게, 응? 그러니까 말해 봐요. 누가 그랬어. 예쁜 얼굴이 왜 엉망이 됐어요.”

“흑…. 으흑….”

해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소는 어깨를 기대고 울었다. 속으로만 삼켰던 울음은 해준의 품에 얼굴을 묻는 순간 서럽게 흐느끼는 것으로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소는 알고 있었다. 사실 피떡이 되어 언덕을 내려오던 그 순간, 핸드폰을 뒤지며 제일 먼저 해준에게 전화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꼴이 이러니 오지 마세요,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해준의 번호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녁을 먹으러 온 해준이 개 같이 맞은 제 꼴을 보고 걱정해 주기를 바랐다. 해준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이소는 계속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해준은 코트 안에 이소를 감춘 채 눈물을 닦아 내고 볼을 매만지며 위로했다. 연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하지만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를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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