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5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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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게요. 아니에요, 제가 고맙습니다.”

오토바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이소는 휴대폰을 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인사를 했다. 통화를 완전히 끝낸 것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숨을 들이켰다. 찬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차 온몸을 훑었다.

스물일곱 윤이소는 색이 바랜 낡은 점퍼가 말해 주듯 삶이 고됐다.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혹은 그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이소 역시 일찍이 군대를 다녀와서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가진 것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부모도 형제도 돈도 없었다. 이소는 7년 전 자신이 한 선택을 종종 돌이켜보곤 했다. 잘한 짓이었을까, 모른 척했다면 아마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 삶은 조금 더 나았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때때로 변했고 그것은 속으로만 삼켰다. 아무리 과거를 뒤집어 봐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작고 약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윤이소의 천성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

“다음은 미술대…. 아트홀 지나서 5층 502호. 8개나 되네.”

이소는 오토바이 시동을 켜고 언덕을 향해 달렸다. 꽤나 경사가 있는 언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운전했다. 주차를 하고 강의동 앞에 내리기 전 이소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훑어보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꼭 학교 안으로 들어오기 전 또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구질구질해 보이지는 않을까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다.

[502호 동양화과 사무실]이라고 적힌 문을 두드리자 젊은 조교가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는 잘 하셨어요?”

“덕분에요. 여기 주문하신 도시락 8개랑 오픈 서비스로 새우튀김 하나씩 넣었어요.”

“아, 진짜요? 고맙습니다! 오늘 교수회의 준비한다고 해서 다들 엄청 신경 쓰느라 굶었거든요. 저 오늘 진짜 사장님네 돈가스 먹고 싶어서 혼났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과사무실 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저녁 5시 30분, 학생들의 거의 빠지고 청소하는 여사님들만 이소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이소는 살짝 묵례를 하고 다시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동경심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도 들었기에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던 것이 습관이 되었다. 문득 창가에서 들어오는 노을이 길게 뻗어 이소의 운동화 끝에 닿았다. 어제 삶은 운동화가 새하얗다는 이유만으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학생이에요?”

불현듯 들린 목소리에 이소는 고개를 들었다.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큰 키에 짙은 밤색 슈트, 바짝 조여 맨 타이는 평범한 대학생의 옷차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는 얼굴. 이소는 교정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학생과 학생이 아닌 사람의 얼굴을 잘 구별했다. 외부인 같아 보였다.

남자는 가볍게 던진 질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치고는 이소의 얼굴을 빤히도 쳐다봤다. 이소는 문득 자신이 남자를 퍽 수상한 사람을 대하듯 경계하는 눈초리로 훑어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퍼뜩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도시락 배달 왔습니다.”

“배달?”

“후문 뒤에 ‘두솥 도시락’이요. 원래 정문 앞에 있던 가게를 이전했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옷차림만 보고 학생인 줄 오해했네요. 도시락 가게, 도시락.”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었다. 깊고 낮은 목소리는 울림이 있어 듣기 좋았다. 또 듣고 싶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잠깐의 적막이 지나고 이소는 제가 할 수 있는 가벼운 주제로 말을 꺼냈다. 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다가도 툭 치면 영업 시간과 상품 설명 정도는 줄줄 읊을 수 있었다. 어설프게 보이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최대한 말을 더듬지 않으려 신경도 썼다.

“저희가 오픈 이벤트 하면서 메뉴를 많이 바꿨어요.”

“네에.”

“그동안 너무 고기 메뉴에 치중되어 있었던 것 같아서 여자분들이 좋아하시는 샐러드나 샌드위치 메뉴도 넣고, 아가들도 먹을 수 있는 키즈 메뉴도 추가했고요. 기업행사나 사모임에 들어가는 도시락도 하거든요. 오픈부터 저녁 6시까진 배달도 해 드리고 밤 8시까지 주문 후 가지러 오시면 10퍼센트 할인도 해 드려요.”

속사포처럼 신메뉴 설명을 하는 내내 남자는 고개를 기울인 채 제법 흥미롭게 이소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렇구나. 그럼 아르바이트하는 거예요?”

“아, 아르바이트는 아니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소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럼 사장님?”

사장님이라는 단어를 뱉으며 남자는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미소만큼이나 눈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 깨끗하게 다듬은 짙은 눈썹 아래 깊게 파인 눈꼬리에 시선이 갔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은 창문에 반사된 저녁 노을빛과 함께 너울거렸다.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전 사실 진짜 사장은 아닌데.’ 하며 남자에게 구구절절 부연 설명을 늘어놓을 것 같아 벌어진 입을 얼른 다물었다. 남자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홀린 듯 입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두 남자 사이에는 그 이야기를 끝으로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엘리베이터는 5층까지 오는 데 여러 번 서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기다린 지 5분은 흐른 것 같았다. 어서 가서 남은 재료들도 정리하고 이웃 가게에 인사도 해야 하는데.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옆 비상구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돌연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빈 복도를 울렸다.

“번호 좀 알려 줄 수 있을까요?”

“번호요?”

“네. 사장님 번호.”

이소는 제 몸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식욕을 돌게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잘생긴 사람도 밥은 먹고 사니까. 그럼요, 알려드릴 수 있죠. 이소는 남자에게 예의상 빙긋 웃어 준 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가게 전단지를 찾았다. 잔뜩 채워 놓았는데 오전부터 여기저기 돌리느라 다 써 버렸는지 잡히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집을 청소하던 중에 바닥에 굴러다니던 몽당연필과 색종이를 대충 집어넣었던 게 생각나 점퍼 앞주머니를 뒤졌다.

“제가 지금 전단지를 다 써 버려서…. 여기다 번호 적어 드릴게요.”

“전단지요? 아, 제 말은….”

“원래는 가지고 다니는데 아까 다 돌리고 남는 게 없네요. 가게 오셨을 때 저 있으면 할인해 드릴게요. 꼭 아는 척하세요.”

엘리베이터 옆 벽면에 분홍색 꽃무늬 색종이를 댄 채 지역번호부터 시작되는 가게 전화번호를 적고 ‘두솥 도시락(후문 둘셋치킨 골목)’까지 꾹꾹 눌러썼다. 이소는 남자에게 색종이를 건네며 ‘여기 조교님도 가게 옮기기 전부터 엄청 자주 사 드셨었거든요.’ 하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혹여 넉살 좋은 조교가 밥맛이 꽤 괜찮은 곳이라고 말이나 얹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소가 한 말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곤 ‘가게 번호는 처음 받아 보는데…. 재미있네요. 그럼 연락드릴게요.’ 하고 웃으며 색종이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는 몰랐지만 이소는 한 명의 손님이라도 가게를 찾아 주기를 바라며 고맙다고 말하곤 눈을 접어 웃었다.

이후 남자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이소는 재빠르게 허리를 숙이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오늘은 이걸로 끝. 학교에 있으면 자꾸 걷고 싶어져서,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책을 읽고 싶어져서, 할 일 없이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결국은 부러움에 서러워져서 기분만 가라앉고 만다. 결국 이소는 열두 시가 되기 전 성을 쫓겨 나가는 신데렐라마냥 학교를 벗어났다.

* * *

국내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만 들어간다는 그 대학 주변에 자리를 잡은 지 2년이었다. 커다란 캠퍼스에는 학교 이름을 딴 병원도 있었고, 넓은 잔디광장과 화려한 분수대, 호화스러운 웨딩 홀도 있었다. 기다란 산자락을 끼고 있어 평일이나 주말 구분 없이 등산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학교 주변에는 큰 번화가가 있어 언제나 왁자지껄했다. 스물다섯 살 겨울, 이소는 두솥 도시락 배달원으로 처음 자리를 잡았다.

점주 이정숙이 호기롭게 시작한 프랜차이즈 도시락집은 처음에는 인기가 좋았지만 홀로 일하며 내내 일손 부족에 시달렸다. 자금이 부족해 요리를 도와줄 사람과 배달원을 동시에 쓸 수 없어 가게를 낸 지 육 개월 만에 경영난에 시달릴 때 문을 두드린 것이 볼이 빨갛게 튼 어린 청년 윤이소였다.

오토바이 면허증 하나를 들고 정숙의 가게에 들어온 이소는 묵묵하고 성실히 일했다. 제 이야기는 통 하지 않았지만 잡일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잘 해냈고 정숙이 자리를 비우면 밥을 안치거나 나물을 볶아 놓는 등 가벼운 요리도 미리 해 놓기도 했다. 몇 달이 지나 정숙은 시간이 남을 때마다 이소에게 하나둘 조리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고 이소 역시 제법 적성에 맞고 소질이 있어 잘 배웠다. 맛도 훨씬 좋았다. 그 덕인지 도시락 가게는 정숙이 혼자 할 때보다 부쩍 찾는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다. 매출이 두 배 이상 뛰었다.

결국 정숙은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이소에게 가게를 맡기다시피 했다. 음식과 배달을 이소가 도맡아 했고 정숙은 느지막이 내려와 재료 손질이나 청소, 결산만 하곤 도로 올라가 쉬었다. 이소는 그래도 군말 없이 일했다. 배운 것은 없었지만 성실히 일했고 덕분에 1년 만에 후문 쪽에 조금 더 넓은 곳으로 가게를 이전할 수 있었다. 정말 잠자는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빴지만 그래도 통장에 꽂히는 돈을 보면 기뻤다. 바지사장에 불과했지만 어엿한 직장이 생겨 떳떳했다. 빚을 갚고, 월세를 내고, 가게에서 일하고 남은 재료를 손질해 저녁을 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새 가게로 옮긴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아, 좋다.”

이소는 가게 불을 꺼 두고 데크 위에 앉아 맥주 한 캔을 깠다. 칙 소리가 나며 거품이 올라오자 얼른 입술을 갖다 대고 후루룩 마셨다. 술을 입에 대는 것도 어언 3년 만이다. 정숙은 가게를 옮긴 후 몰려드는 손님과 동이 난 재료에 기분 좋게 일찍 문을 닫자고 했다. 정숙이 상품으로 나갈 것을 제외한 남은 식자재는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이소는 조금 망설이다 도로 집어넣었다. 대신 재료를 손질하고 남은 자투리로 간단한 안주를 만들기로 했다. 이소는 냉장고에서 작은 통을 꺼내 들었다. 오후 디저트 도시락에 사용하고 남은 멜론 끝부분이었다.

달고 과즙이 많은 가운데 부분과 달리 양 끝부분은 쓴맛이 나 손님에게 내놓지 않았다. 대신 모아 둔 멜론의 끝부분은 토치로 구우면 단맛이 배가 된다. 모양은 심히 뭉그러졌지만 제법 먹을 만했다. 국 재료로 쓰고 남은 두부 역시 모로 썰어 가지를 얇게 말아 앞뒤로 튀겼다.

금세 먹음직스럽게 안주가 완성되었다. 저를 위한 음식은 꽤 오랜만에 준비한 것 같았다. 행복했다. 이소는 작고 사소한 행복일지언정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단 5분 만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려 내일 아침까지였다.

데크 위에서 올려다본 빌라의 3층은 불이 들어와 있었고 간간이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이소는 발그스름한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잘 있네.’

두 캔, 세 캔 까서 마시고 있으니 오후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씻은 듯 나아졌다. 이래서 다들 술을 마시는 거구나. 배시시 웃으며 한 캔만 더 마시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 낯익은 밤색 체크 슈트와 같은 색의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구두를 한 번 보고 다리를 지나면 금세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선은 한참을 더 올라갔다. 잘록한 허리를 지나 모양이 잘 잡힌 넓은 가슴,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 그러고 나서야 드디어 얼굴에 시선이 닿았다.

‘어.’

웬 서늘하게 생긴 미남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소는 눈을 깜빡였다. 누구였더라. 오전부터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터라 얼굴들이 뒤죽박죽 섞였다. 그러나 저렇게 특출난 마스크는 쉽게 잊어 버릴 리 없다. 눈을 찡그린 채 기억을 더듬던 이소가 이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엘리베이터!”

“가게 일 끝나셨나 봐요.”

남자의 담백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아, 네…. 어떡하죠, 오늘 저희 일찍 마감했는데….”

미안해하는 이소의 말에도 남자는 ‘일찍 끝났다니 다행이네요.’ 하며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다. 아, 정말 잘생겼다. 자세히 보니 꼭 배우 같다. 이소는 입맛을 다시며 입가를 닦다 움찔했다. 아무리 퇴근했기로서니 손님 앞에서 너무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세를 바짝 가다듬고 싶어도 자꾸만 허리에서 힘이 빠졌고 눈이 힘없이 감기려 했다. 멍청해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이소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바로 앉았다.

“다음번엔 문 닫기 전에 오세요. 저 있을 때 오시면 서비스로 새우튀김도 드릴게요…. 아, 혹시 새우튀김 좋아하세요? 저 진짜 맛있게 튀기는데….”

“무척 좋아하죠. 고소하잖아요.”

다행이다, 알러지 없나 봐. 이소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새우튀김도 드릴게요. 특별히 세 개.”

“좋아요. 다음번에도 올게요. 그런데 혹시 옆에 앉아도 돼요?”

“아, 괜찮….”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이소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방을 내려놓고 이소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덩치가 얼마나 큰지 그냥 앉기만 했는데도 데크 바닥이 절반이나 가려졌다. 이소는 남자를 피해 옆으로 조금 비켜 앉으며 남은 맥주를 털어 마셨다.

꽤 오랜만에 세 캔이나 마셔서 어지러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술이 잘 받았다. 어디선가 흘러 들어오는 도시의 담배 냄새, 무성하게 자란 풀 냄새, 습기를 머금은 축축한 공기의 냄새가 또 다른 안주가 됐다.

“아, 기분 좋다.”

이소는 하늘을 보며 혼자 읊조렸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옆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이소는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어…. 한 캔 드려요?”

“좋죠. 같이 마셔요. 말동무해 드릴게요.”

아, 말동무 좋지. 오늘 이소는 흔쾌히 제가 가진 것을 나누기로 했다.

“잠시만요…. 술 더 가져올게요.”

엉거주춤 일어난 이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섬주섬 맥주를 챙겼다. 처음 본 사람과 밤 맥주라니. 뭔가 웃기고 신기하기는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어서 품 안 가득 맥주캔을 집어넣었다. 후드티가 행주치마가 된 것마냥 불룩해진 채 자리로 돌아와 데크 위에 주저앉으며 남자에게 찬 맥주를 건넸다.

“고마워요.”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번호도 받아 가셨으니까 자주 이용해 주세요.”

“그럴게요.”

이 일을 한 지 1년이 넘었다. 이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로 웃어야 손님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호감을 느끼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담백하게 건넨 호의에 손님들은 가게를 찾았고 상품의 질에 만족해 단골이 되곤 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소는 서투르기 짝이 없었던 날들을 반추하며 피식 웃었다.

문득 입이 텁텁해 단 게 먹고 싶어 남자 옆에 앉은 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투명한 비닐에 곱게 싸인 밀크 캐러멜을 툭툭 까서 입에 털어 넣었다. 찐득한 사각형을 입 안에서 몇 번 굴리고 씹으니 데크 위에 금세 달큰한 향이 퍼졌다. 한참 맛을 보고 있는데 볼을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이소의 입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어…. 왜요?”

“술안주로 캐러멜을 드시네요.”

“네. 좋아하거든요.”

“그렇구나. 캐러멜을 좋아하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여전히 이소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소는 잠시 고민했다. 너무 나만 먹었나. 먹고 싶으면 말을 하면 하나쯤은 줄 수 있는데. 요구는 않고 노골적으로 바라만 보는 눈빛이 숨이 막혀 이소는 입술을 비죽이며 얼른 포장지를 벗겼다. 손가락으로 캐러멜을 집어 든 이소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 하세요.”

“…네?”

“하나 드릴게요. 아, 하시라구요.”

당황한 남자의 입술이 벌어지기가 무섭게 캐러멜을 입 안으로 쏙 밀어 넣어줬다. 맥주와 캐러멜이 어울린다는 건 처음 알았겠지.

“맛있죠?”

이소는 쌔물쌔물 입술을 샐그러뜨리며 웃었다. 이소의 돌발행동에 남자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입 안의 혀를 굴리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는 남자와 꽤 오랫동안 대화를 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푸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순간이 나쁘지 않다고 여겨지기는 했지만 너무 많이 마셨는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고 싶은데 남자는 계속 이것저것 물어 왔다. 나긋나긋하면서도 편안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이대로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혼자예요?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요?”

“그런 거 없는데요….”

“날도 찬데 언제 들어가려고요.”

“곧 들어갈 거예요. 근데 진짜 오랜만에 술 마셨더니 좋긴 좋다….”

“감기 걸릴 것 같아요. 옷도 얇게 입었잖아.”

“나 멜론 더 먹고 싶어….”

남자는 반쯤 감긴 눈을 하고도 꼬박꼬박 대꾸하는 이소를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대학 새내기마냥 앳돼 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의 옷차림은 촌스러웠고 작은 흉터가 많은 손에는 밴드도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핸드폰 번호를 달라니까 눈치 없이 가게 번호를 적어 주던 모습은 다시 생각해도 실소가 터져 나온다.

퇴근 때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가 차 키를 꺼내는 도중 주머니에서 딸려 나온 색종이를 보고 불현듯 생각나 들렀는데 불 꺼진 가게 앞에 퍼질러 앉아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자꾸 가게 앞에 풀숲을 보고 ‘아하하, 아하하’ 하고 소리 내 웃었다. 맥주캔이 세 캔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미 잔뜩 취해 있었다.

앉아서 구경하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혼잣말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맥주 한 캔을 가져와 덥석 쥐여 주곤 생색을 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듯싶었는데 노란 캐러멜을 꺼내 탈탈 털어 내서 앉은 자리에서 네 개나 까먹었다. 저 단 걸 어떻게 저렇게 먹나 하고 신기해서 쳐다봤던 것뿐인데 이 어린 사장은 자신의 입에 캐러멜을 던져 넣어 놓고는 퍽 만족한 눈치였다.

“저 이제 들어갈 거에요. 그럼 들어가세요….”

이소는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주섬주섬 맥주캔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야지. 덜 취했다면 책이라도 몇 페이지 보고 잠이 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기분이 센치해지기도 했고, 옆에 앉은 사람이 술친구까지 해 줘서 전에 없이 무리하고 말았다. 비닐봉지에 든 캔을 골목 뒤 분리수거함에 넣고 뒤를 돌았는데 남자가 여태 가지 않고 있었다.

“안 가세요?”

“사장님 넘어질 것 같아서요.”

“나 참,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취하진 않았거든요.”

손사래를 치며 한 걸음 내디뎠는데 이소는 자기도 모르게 골목 벽에 머리를 찧었다. 쿵, 쿵, 쿵. 스스로가 바보 같았지만 왠지 웃음이 나와서 눈을 찡그리고 소리 내 웃었다. 고작 맥주 네 캔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남자 말대로 곧 넘어질 것 같기는 했다. 남자는 어느새 비틀거리는 이소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고집 부리지 말고요. 지금 벽에 부딪히고 있잖아요. 집이 어디예요?”

“이 빌라 3층이요.”

“그나마 가까워서 다행이네요.”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데 몸이 자꾸 늘어져 남자의 어깨에 자꾸 기대게 됐다. 부드러운 질감의 슈트에 걸맞은 좋은 향수 냄새가 났다. 이소는 문득 코를 비벼 냄새를 더 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층에 다다라 현관문을 열어야 하는데 자꾸 점퍼 주머니에 구멍 난 부분으로 열쇠가 빠졌다. 몇 번 바느질했던 부분인데 여러 번 세탁했더니 실이 헐거워졌는지 동전이고 열쇠고 심심찮게 주머니 안감 안에서 도망을 다녔다.

“아씨, 또 이러네….”

“두세요. 제가 찾을게요.”

어느새 남자는 이소의 주머니를 매만지며 열쇠를 찾고 있었다. 친절하고 상냥했다. 이소는 남자에게 반쯤 기대섰다. 남자는 이소를 품에 끌어안은 채로 안감 속 열쇠를 집어 들었다. 뒤집힌 주머니의 안감 구멍을 통해 열쇠 머리가 조금씩 드러났다. 이소는 어두컴컴한 현관 앞에서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열쇠를 찾겠다고 골을 부리는 자신의 꼴이 우습게 느껴져 해죽해죽 웃었다. 돌연 골이 울렸다. 아, 술을 너무 마셨나.

“으…. 더워.”

“응, 덥지. 들어가면 옷 벗는 거 도와줄게.”

문득 어두운 계단에서 큰아버지의 눈을 피해 형과 처음 술을 마셨던 그 날이 생각났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축축한 지하실 바닥에 둘이 쪼그려 앉아 추위를 잊으려 소주를 마셨었다. 과학실 알코올 병 향이 난다고 코를 막았던 자신을 놀리던 형의 발그스름한 볼은 따뜻했다.

남자가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넣고 돌리자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소는 여전히 예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곰팡내가 나는 이 빌라는 어릴 적 지하실의 큼큼한 냄새를 닮아 있었고 만취한 스물일곱의 자신은 열일곱 어린 날과 꼭 같이 몸을 가누질 못했다. 떠나 버린 형을 제외하곤 참 변한 게 없다.

“형….”

현관에 들어선 남자는 이소의 신발을 벗기고 오금에 손을 넣어 가볍게 안아 들었다.

“형?”

남자의 목소리에 이소가 퍼뜩 정신을 깼다.

“응…. 어, 아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어요.”

자신이 안긴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 이소는 고개를 저으며 사과했다.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은 몇 살이에요?”

남자는 혼자 주절거리는 이소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작지 않은 키인데도 참 가벼웠다. 품이 큰 후드 안에 가는 허리는 한 손으로도 절반이 잡혔다. 이소는 허공에 뜬 다리를 달랑거리며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부볐다. 꼭 친한 이에게 애교를 부리듯 유들유들 웃었다.

“저 나이 되게 많아요.”

이소는 가물거리는 눈을 힘주어 뜨며 웅얼댔다. 그러나 곧 감길 태세였다.

“몇 살인데요.”

“스물여섯, 아니다. 이제 해 지났으니까 일곱.”

“엄청 애기네.”

“애기 아닌데….”

남자가 이소를 낮은 매트리스에 앉히며 늘어진 카디건을 매만졌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카디건의 끝부분을 잡고 더듬어 올라와 쇄골을 살짝 스쳤다. 따뜻했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어디선가 맡아 본 듯한 묵직한 향이 났다. 달큰한 흙냄새 같기도 했고 소나무 냄새 같기도 했다. 이소가 코를 킁킁대고 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주사가 치대는 거예요?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거예요?”

“무슨 말….”

“처음 보는 남자 가슴에 코 박고 킁킁대는 거. 원래 이러냐고.”

“아니, 향수 냄새가 좋아서 그런 건데….”

이소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저를 데려다주었으면 이제 그만 나가면 될 텐데 언제까지 있을 생각인지 곁에 앉아 있는 게 영 이상했다.

“이제 가세요.”

“조금만 더 있다 갈게요.”

“저 졸려서 자야 돼요. 내일도 가게 열어야 하고….”

“응, 가게도 열어야 하고…. 바쁘겠네….”

아까부터 말을 한마디씩 얹을 때마다 자꾸만 가까워지던 남자는 어느새 이소의 등이 낮은 책장에 닿을 때까지 다가왔다. 등 뒤가 튀어나온 책의 모서리에 찔려 따끔했다. 가벼운 통증에 자꾸 움찔거리자 남자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쩐지 긴장이 되어 침을 삼키자 꿀꺽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소의 시선이 흔들렸다.

“저기, 우리 지금 너무… 가까이 앉은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가깝네요.”

“이러다 꼭 닿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좀만 뒤로….”

이소가 숨을 토해 웃으며 남자의 얼굴을 주욱 밀어냈다. 본의 아니게 손가락이 남자의 입술 끝을 툭 치고 떨어졌다. 남자가 킥킥 웃으며 고개를 젖혔다.

“아주 여우네.”

나른하게 웃으며 다가온 남자는 이소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술기운에 뜨끈한 온기가 입술에 열감을 더했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이소의 볼을 잡은 채 살짝 비틀자 흑갈색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흘러내렸다. 이소는 눈을 끔뻑였다.

“지금 뽀뽀했어요?”

“응, 했어요. 싫어?”

“어… 모르겠는데.”

“모르겠어?”

남자가 다시 한번 뺨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부비며 바짝 다가왔다.

“모르면 안 되는데.”

술에 취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 얼굴을 쓰다듬고 매만져 준 기억이 너무 오랜만이라 기분이 들떠 이소는 풋 하고 웃어 버렸다. 남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 잠깐만. 그렇게 웃으니까 더 애기 같네. 솔직히 진짜 몇 살이에요. 스물셋? 스물둘? 난 미성년자만 아니면 되는데.”

“애 아니야…. 스물일곱이라니까아…. 그리고 반말하지 마세요…. 그쪽도 어려 보이는데에….”

“알았어, 알았어. 스물일곱 씨.”

이소가 입술을 내밀고 노려보자 남자가 눈썹을 내리고 웃으며 바짝 다가왔다.

“알았어요. 반말 안 할게요.”

부드럽게 속삭인 남자가 자꾸 입을 맞추며 파고들었다. 귀찮음에 밀어내면서도 술기운에 열이 올라 더위가 푹푹 올라왔다. 손부채질을 하며 길게 한숨을 내뱉자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이소의 볼을 매만졌다. 아직 삼월밖에 안 되었는데 유난히 집이 덥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야 하려나, 팔을 뻗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남자가 이소의 손을 잡아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었다. 이소는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이 예뻐서요.”

그렇게 몇 번 더 쪽쪽 손등에 입을 맞추던 남자가 다시금 품에 파고들었다. 뺨에 입술을 찍어 누르던 남자가 돌연 이를 세워 여린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으응…!”

어깨를 파득 추어올리자 남자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소는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 목은…. 왜애.”

“싫어요?”

“아프잖아요….”

“그럼 키스는?”

키스? 이소는 말없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까 했잖아요.”

“아니,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이소의 시선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남자의 손가락이 이소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길게 할 건데. 남자가 덧붙인 말에 이소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해도 돼요?”

남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싫으면 여기서 그만할게. 고요한 시선이 무겁게 얽히자 이소는 입술을 우물댔다.

“싫은 건 아닌데요….”

“그런데?”

거의 입 안에 들어온 먹잇감이 놀라 도망갈까 남자는 천천히 이소의 뺨을 그러쥐었다. 귓바퀴를 간질이는 손가락에 이소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저 잘 못해요…. 진짜 놀라실 수도 있어요….”

“제가 가르쳐 드리면 되죠.”

무어라 말을 더 얹기도 전, 남자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을 맞췄다. 이소는 숨을 잔뜩 참았다. 입술에 힘을 주고 꾹 다물고 있었는데 입술 사이를 부드럽게 비집고 달큰한 혀가 파고들었다. 뭉근하게 혓바닥을 누르고 입천장을 가볍게 훑어내리며 느릿느릿 휘젓는 캐러멜 맛 키스였다. 이소는 생경한 감각에 자꾸만 몸을 뒤틀었다. 아까는 자꾸만 눈이 감겨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남자의 크고 부드러운 손이 제 허리를 간질간질 감싸 안자 파득파득 잠이 달아났다. 이소가 남자를 밀어내고 참은 숨을 토했다.

“흐읏, 파하…. 자, 잠깐만.”

“진짜 서툴긴 하네요.”

분명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남자는 이소의 턱을 살짝 그러쥔 뒤 엄지로 입술을 벌리고 제 혀를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파고든 혀가 입천장을 자꾸만 긁어내렸다. 헤집어지는 쪽은 입술 안쪽인데 별안간 허벅지가 떨리며 오므라들었다. 숨이 차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입맞춤을 힘겹게 받아 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남자는 이소의 입술을 크게 베어 물고 혀를 핥기도 했다가 입술을 머금고 당겨 물기도 했다.

“흐으….”

“당신 좋은 냄새가 나. 남자 몸에서… 분 냄새가 나네.”

뒷덜미를 쓰다듬던 손이 가슴을 스치고 내려가 옷을 끌어 올렸다. 남자의 손이 술을 마셔 적당히 데워진 배에 닿았다. 긴 손가락이 복부를 더듬고 옆구리를 쥐자 이소는 파드득 놀라 남자의 입술을 잘근 물었다. 남자는 입꼬리를 휘어 웃기만 할 뿐 아래를 지분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후드 안으로 손가락이 가슴을 더듬으며 올라와 유두를 살짝 긁어내렸다. 이소가 남자의 손을 끌어 내리며 미약하게 버둥댔다.

“으, 으응….”

“목소리도 예쁘고.”

아랫배가 자꾸 간질거렸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소변이 마려운 것 같기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힘없이 벌어지자 남자의 입술이 촉 소리가 나며 떨어졌다. 입술만 맞대고 있었을 뿐인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찼다. 아래가 유난히 뻐근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을 일으킨 남자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타이를 풀어 내렸다.

“벌써 섰어?”

“하아…. 하…. 뭐가… 서요?”

“아니야, 마저 할게요.”

이윽고 남자가 짧은 한숨을 토하며 이소의 후드를 들추고 머리를 집어넣으려던 때였다.

-띵동

돌연 요란한 초인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진동했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노크가 다급했다.

“해수 아빠! 집에 있어?”

실타래처럼 얽히던 두 사람의 몸은 움직임을 멈췄다.

“미안해서 어째, 해수가 무서운 꿈 꿨다고 하도 울어서…. 그냥 방에서 재워야겠어. 문 열고 들어갈게? 옷 갈아입는 거 아니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에 이소는 몽롱하게 잠겨 있던 정신을 깨웠다.

‘여기가 어디지.’

언뜻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눈동자를 굴려 익숙한 집 안 풍경을 보곤 금세 마음을 놓았다. 아, 집이다…. 해수 수면 독립 연습 많이 했는데 역시나 아직은 혼자 자는 건 무리인가. 근데 너무 어지럽다. 나가서 해수 안고 와야 하는데…. 정숙 사장님 비밀번호 아시니까 알아서 들어오시겠지…. 수많은 생각이 산발적으로 쏟아지며 머리를 어지럽히자 도리어 몸에서 힘이 스륵 빠지며 느리게 눈이 감겼다. 작은 머리통이 톡 하고 떨어지자 남자는 몸을 굳힌 채 이소를 흔들었다.

“저기요, 스물일곱 씨. 이게 무슨 소리, …사장님? 자요?”

부지불식간에 잠이 든 이소를 보며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뒤이어 도어록을 누르고 들어온 노인이 잠든 아이를 안고 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낯선 이를 보고 경계하듯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친구예요.’라고 말한 후 상냥히 웃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잠든 이소와 아이의 이부자리를 봐주고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와 마른세수를 했다. 온몸에 당황이 덕지덕지 묻었다.

삼월의 밤공기는 아직 찼다. 남자는 이소와 앉았던 데크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낡은 빌라 삼 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뒷목을 느릿하게 쓸었다.

“혼자라더니.”

어두운 골목길에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 * *

이소는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몇 년 만에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했고 어젯밤 기억은 드문드문 끊겼다. 이도 닦지 않고 잠들었는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술 냄새가 났다. 눈가와 손발이 붓는 느낌이 뻐근하면서 불쾌했다.

‘밖에서 안 잔 게 용하다….’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몇 시지, 해수 데리러 나가야 하는데. 몸을 돌려 일어나려는 순간 이소의 배에 무언가 턱 하고 걸쳐졌다. 하얗고 작은 종아리였다. 해수가 어느새 와서 누웠는지 좋아하는 인형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이소는 어젯밤 정숙이 문을 두드리며 방에서 재워야겠다고 말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분명 할머니 집에서 비디오 보다가 잘 수 있다고 큰소리쳤으면서. 이소는 해수의 이마를 몇 번 쓸어 올리곤 어깨를 토닥였다.

“해수야, 일어나. 어린이집 갈 시간.”

“아빠, 오 분만.”

“안 됩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공주님.”

해수를 욕실로 보낸 후 이소는 커튼을 열고 창문 너머 보이는 새 동네를 둘러보았다. 지나가면서 몇 번 본 동네였지만 이렇게 제가 짐을 꾸려 살게 될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운이 좋았다. 이사를 와서 부동산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이 동네가 워낙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많아서 재개발이 되니 마니 말이 많았다고 했다. 집값은 떨어지지, 밤만 되면 기거하는 사람은 없이 몇몇 구멍가게만 달랑 있던 골목이었는데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이 동네 땅을 한꺼번에 사들여 싹 밀어 버리고는 크게 집을 짓는 바람에 졸지에 도로 공사까지 모두 새로 했다고. 얼마나 제집에 공을 들이는지 삼 천 평 가까이 되는 땅을 다지고 쌓아서 울타리를 치고 집으로 가는 길까지 닦아 놓았다고 했다.

‘말도 마. 나는 처음에 무슨 나라에서 의료원 같은 거 짓는 줄 알았다니까. 근데 그냥 개인 저택이래.’

‘사람이 많이 사나 보죠.’

‘많이는 살더라. 한 오십 명 왔다 갔다 하는 거 같더라니.’

창문 밖 걸쳐진 벚나무에 둥지를 튼 작은 새들이 앉아 연신 종알댔다. 어미 새가 갓 태어난 새끼에게 먹이를 주느라 한창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높은 언덕 위 그 커다란 집의 대문이 보였다. 봄맞이 대청소를 하는 건지 많은 사람들이 나와 대문에 기름칠을 하고 외벽을 닦고 있었다. 저렇게 밝은 색으로 담을 만들면 매번 저렇게 닦아 주어야 하나 보다.

저 사람들은 얼마 받고 일하길래 싱글벙글이지. 꽤 보수를 많이 주는지 일을 하는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일꾼들의 움직임을 한참 구경하던 이소는 저보다 늦게 울린 알람 소리에 몸을 돌렸다. 일찍 일어나는 편인 이소는 아침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여유로웠다. 그나마도 잠깐이지만 감사했다.

* * *

낡은 오토바이의 시동이 또 꺼졌다. 배터리를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날이 조금만 추워지면 픽픽 꺼지는 꼴이 통째로 갖다 버려야 하나 싶다. 이 녀석과 일한 지도 어느새 3년이었다. 처음 진혁과 같이 중고 오토바이 가게에서 이 녀석을 끌고 왔을 때 너무 좋아 떡볶이와 순대를 시켜 놓고 소박한 파티를 했던 것이 어제 일 같았다. 데려올 때부터 낡은 녀석을 가리는 곳 없이 여기저기 끌고 다녔더니 이제는 시동 걸 때마다 아흔 살 노인마냥 푸푸 힘없는 엔진 소리만 뱉는다.

“아 진짜, 조금만…. 진짜 오늘 배달 끝나면 내가 하루 수리 맡겨 준다니까…!”

쥐어짜는 목소리로 바디를 탁 내려치자 기적처럼 우르릉 시동이 걸렸다. 그럼 그렇지. 역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써야 한다. 이소는 최대한 많은 도시락을 싣고 학교를 향해 내달렸다. 이소네 가게는 주로 점심시간이 가장 바빴지만 배달은 점심 이후가 가장 많았다. 라이더를 쓰는 것이 편했지만 그만큼 돈이 나갔다. 오전과 점심까지 이소가 재료를 다듬고 포장하고 나면 오후부터는 정숙이 느지막이 내려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그럼 종종 학교에서 들어오는 배달을 이소가 직접 나갔다. 대부분 식사 때를 놓친 조교와 교수들, 공강에 늦은 점심을 먹는 학생들의 도시락이었다.

학교가 원체 컸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 보면 몇 군데 배달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금세 시간이 갔다. 구경도 쏠쏠했다. 대운동장을 끼고 매끈하게 닦인 도로와 그 주변에 심어진 벚나무들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캠퍼스 잔디를 뒹구는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음대를 지날 때 나는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조율하는 소리, 농구공이 바닥을 튕기고 운동화가 바닥을 끄는 생생한 마찰음마저 모두 사랑스러웠다.

이소는 학교가 참 좋았다. 물론 오래 앉아 있으면 동경을 가장한 질투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지만 어쨌든 아무 걱정 없이 보고 있을 때는 좋았다. 부러운 눈으로 한참을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소는 9건의 배달을 마친 후 벤치에 앉았다. 한 곳으로 몰아서 배달할 때가 편한데 오늘은 어쩐지 일곱 건의 주문이 경영관, 학술관, 예술관 등 모두 다른 건물에서 온 것이었다. 심지어 계산 착오로 배달 순서마저 꼬여 버려서 낡은 오토바이 기름이 바닥나도록 달렸다.

배달을 마쳤지만 정작 제 밥 먹을 시간조차 챙기지 못한 이소는 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점심시간에는 주문받은 도시락을 포장하느라, 그 이후에는 배달을 하느라 항상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빨리 소화도 못 시켜서 허겁지겁 먹다 보면 꼭 급체했다. 그럴 바에는 안 먹고 걸렀다 늦은 점심을 먹는 게 차라리 속이 편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주머니에서 뜯은 시리얼 바와 흰 우유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남들 입에 들어가는 도시락은 푸짐하게도 만들면서 정작 저는 이런 과자 쪼가리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니. 하지만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이제 어린 해수가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귀기 시작하면 정착해야 한다. 자는 아이를 안아 들고 얼레벌레 싼 짐을 메고 야반도주하듯 몇 번이고 내달렸던 지난 밤들이 생각났다. 다행히 지난가을부터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아서 눈치를 보다 정숙과 함께 가게 이사도 했다. 이렇게 일 년만 더, 또 일 년만 더 지내다 보면 남들처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똥밭에 구르는 제 인생이라고 언제나 어둡기만 하겠는가.

“학교에서 또 보네요?”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깊은 상념을 깨뜨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남자가 서 있었다. 말끔한 셔츠에 진회색 정장 차림의 남자는 커피를 들고 이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이 남자는 사람의 얼굴을 참 빤히 본다.

“아…. 안녕하세요.”

“식사 중인가 봐요.”

“네. 잠시 시간이 나서요.”

이소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다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두었다. 건넨 말이 워낙 담백해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축구공이 이리저리 날아다닐 때마다 이소의 눈동자도 의미 없이 따라갔다. 남자는 가던 길을 갈 생각이 없는지 이소의 옆에 멀그마니 서 있었다.

“해장은 했어요? 술 약한 것 같던데.”

“…?”

이소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 돌아보자 남자 역시 오묘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소란스러운 운동장과 달리 둘 사이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 안 난다는 표정이네요.”

남자의 말에 이소는 시리얼 바를 쥔 채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잘생긴 남자와 만난 기억은 엘리베이터 앞을 제외하곤 없었다. 혹시 제가 바쁠 때 잠깐 와서 저녁 도시락을 사 갔던가? 아니면 정숙이 잠시 내려왔을 때 들렀었나? 말을 못 하고 입술만 달싹대는 이소에게 남자는 ‘술 마셨잖아요. 사장님이랑 저랑.’ 하며 손가락을 번갈아 까닥댔다.

“제가요?”

“나 참.”

남자가 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웃었다.

“안주는 가지 말아 튀긴 두부랑.”

“…….”

“토치로 구운 멜론.”

“…….”

“제 입에 캐러멜도 먹여 주셨는데.”

“…….”

“이런, 정말 하나도 기억 못 하시나 보네.”

제게 기대서 농담 따먹기 한 건 기억나세요? 남자가 말을 덧붙일수록 이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 기억 속 어젯밤은 혼자 데크에 앉아 맥주를 마시다가 집에 기어들어 온 게 다였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집에 걸어 들어온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아침에 일어나 비닐봉지에 깔끔하게 담긴 맥주캔을 보며 나는 참 만취해도 분리수거는 잘 하고 잔다며 스스로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필름이 완전히 끊겼다.

“저, 그….”

이소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랜만에 술을 입에 댔더니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려서 낯선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어제 필름이 끊겨서….”

“아, 다 잊어버리셨다?”

“헉.”

무슨 일이 있긴 있었는지 남자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이소는 제 주사도 모른다. 꼭지가 돌게 술을 퍼먹어 본 적도 없었고 어릴 때는 가끔 한두 잔 마시더라도 항상 혼자 마셨다. 혹여 제가 값비싼 옷과 명품 구두에 가지 두부가 섞인 구토라도 하지 않았는지 덜컥 겁이 났다. 요새는 세탁비도 만만치 않던데.

“저 혹시 제가… 선생님께 토했나요?”

“네? 아니요.”

“그럼 제가 선생님을 때, 때렸다거나….”

“아, 전혀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 주사 있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남자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토하지도 않았고 때리지도 않았다. 모르는 남자와 멀쩡히 술만 마셨다. 남자는 퍽 얌전한 자세로 이소 앞에 선 채 난처한 듯 웃었다. 불만을 토로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마음이 놓일 법도 했지만 어쩐지 제 앞에서 저도 모르는 일을 상기하며 웃고 있는 남자가 찜찜했다. 이소는 제 옆에 놓인 가방과 헬멧을 꼭 쥐었다.

“그럼 무슨 일이신지….”

“아, 다름이 아니고 제가 깜빡 잊은 게 있어서요. 어제 드린다는 게 그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는 이소가 헬멧까지 집어 들고 갈 채비를 하자 급하게 가방을 뒤졌다. 아, 설마 영업이나 전도인가. 말끔하게 생긴 얼굴이라 안심했는데 잘못 걸리면 시간을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예전에도 학교 벤치에서 밥을 먹다가 사이비 종교단체인 줄 모르고 설문조사에 응했다가 정체불명의 신에 대해서 설명만 40분을 들었던 전적이 있었다.

그것뿐이랴, 일반 예금인 줄 알았다가 사망보험을 들었던 적도 있었고 카시트를 준다길래 덜컥 계약했더니 정수기와 비데를 들고 무작정 문을 두드린 사원들도 있었다. 물론 바보같이 더 알아보지 않은 제 잘못이긴 했지만 제게 영업하고 사기를 친 사람들도 겉모습은 참 멀쩡해 보였다.

“아니에요. 안 받아도 됩니다. 저 이만 밀린 배달 가야 해서요. 실례했습니다.”

이소는 황급히 남자의 말을 자르고 헬멧과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일어났다. 등 뒤에서 남자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빠른 걸음으로 벤치를 벗어나 오토바이를 향해 내달렸다. 먹다 만 시리얼 바를 주머니에 대충 욱여넣었다. 배가 다 차지 않았는데 입맛이 떨어져 먹을 생각이 가셨다. 학교에 오래 있지 말걸.

“술 먹고 뭐 해 준다고 덜컥 약속한 거 아니겠지….”

주차장에 도착한 이소는 남자가 쫓아올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토바이에 열쇠를 꽂았다. 다행히 낡은 오토바이도 제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한 번에 시동이 걸렸다. 돌아오는 길에 본 벚나무길은 올 때만큼 예뻐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꽃잎이 꼭 제 마음에 내리는 비 같았다.

* * *

겨우 언덕을 넘어선 오토바이는 가게 앞에 도착하자 퍼져 버렸다. 만들어진 지 무려 10년이나 된 오래된 이 중고 오토바이는 속력을 50km/h 이상 올릴라치면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종 엔진이 멈추곤 했다. 그런데 평소 10분 남짓 달려야 하는 거리를 무려 4분 만에 질주해 버렸다. 퍼질 만했다. 이소는 숨을 몰아쉬며 가게로 돌아와 헬멧을 벗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별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 부드럽게 거절하고 자리를 피할 걸 그랬나 싶다. 줏대 없이 변덕스러운 제 마음 상태에 한숨이 나왔다.

“너무 무례하게 굴었나….”

그러나 이미 돌아오고 만 것을 어쩌겠는가 싶어 얼굴을 감싸 쥐고 마른세수를 했다. 찜찜하고 답답했다. 나중에 배달 갔을 때 얼굴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정숙이 멀거니 선 이소와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이소 씨, 학교 갔다 온 거 아니야?”

“아, 네 맞아요.”

정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해수 일찍 데리고 온다며?”

“아, 맞다! 해수!”

대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부속초등학교에 딸린 작은 어린이집. 올해 초 해수가 어린이집을 학교 안으로 옮기면서 이소는 조금 더 편해졌다. 긴 보육 시간과 양질의 교육, 학교 안이라 안전하다는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져 입소가 확정되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오후 배달이 끝나고 정숙과 교대하는 시간이 되면 교정 벤치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며 해수를 기다렸다. 이소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딸을 기다리는 시간이자 길지 않은 휴식 시간이었다.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고 빼먹은 적도 없었다. 정숙에게 미룬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해서 해수 하원 생각도 않고 바로 가게로 와 버렸다. 시계를 보자 하원해야 하는 시간보다 10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소는 가게 밖에 초라하게 서 있는 오토바이로 달려가 열쇠를 돌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해수를 앞자리에 태워 주기로 약속했는데.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었다.

이소는 운동화 앞코를 몇 번 두드리곤 다시 학교로 향했다. 정문에 다 와 갈수록 그 남자를 또 만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늦은 오후가 다 된 시간, 이 넓은 캠퍼스에서 약속도 하지 않은 누군가를 두 번씩이나 만나는 우연 따위는 자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소는 어린이집 창문 근처에 얼굴을 내밀었다. 낮은 책상에 앉아 색종이를 접다 흥미가 떨어졌는지 책꽂이 근처로 걸어오는 해수가 보였다. 창문을 두드리는 것은 실례인지라 가만히 딸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책꽂이 앞에 와 한참을 고민하더니 무척이나 두꺼운 그림 전집을 꺼내 들던 해수는 창문 앞에 서 있는 이소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이소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딩동딩동 할게.’ 하고 눈짓을 하자 해수는 얼른 전집을 집어넣곤 가방을 챙겨 멨다.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소는 30분 전에 있었던 찜찜한 기분을 씻어 냈다.

* * *

“뭐야, 열쇠 어디 갔지?”

현관문 앞에서 이소는 주머니를 뒤졌다. 항상 넣어 두던 점퍼 주머니에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또 안감 구멍으로 빠졌나 싶어 점퍼 가장자리를 몇 번이나 쥐어 보아도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제 동선이 거기서 거기니 금세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과 가게 바닥을 샅샅이 뒤져도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이소의 현관문은 전자 도어록 한 개와 아날로그 열쇠 구멍이 세 개로 사중 잠금이 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제가 있을 때는 도어록만 걸어 두지만 집을 비우거나 가게에 나올 때는 강박적으로 열쇠를 돌려 잠갔다. 훔쳐 갈 것도 없는 살림인데 그렇게 해야 마음이 놓였다.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나이 든 사장 정숙과 이소, 그리고 딸 해수가 전부였다. 제가 없을 때는 여자 둘만 있는 작은 빌라였고 이 동네는 도어록도 손쉽게 뜯는 좀도둑도 들끓는 곳이었다.

“잃어버리면 골치 아픈데….”

그런데 지금 그 중요한 열쇠 꾸러미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가더라도 열쇠 자체는 한 시도 몸에서 떨어뜨려 놓은 적이 없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찜찜하기는 하지만 열쇠를 다시 맞출 때까지 며칠만 도어록만 잠가 둔 채 지내야 할 것 같았다. 간단하게 집을 정리한 후 정숙이 올라오자 이소는 해수를 맡기고 가게로 내려갔다.

“네. 네…. 아, 진짜요? 아… 네. 그럼 다녀오시고 맞춰 주세요. 어쩔 수 없죠, 네.”

이소는 열쇠 가게에 전화를 한 뒤 머리를 긁적였다. 시골에 내려가야 해서 며칠 뒤 돌아온다는 말에 제집을 제일 먼저 해 달라고 말한 후 의자에 앉았다.

저녁이 되면 동네가 한산해진다. 오전과 점심, 그리고 늦은 오후까지 가게 일을 하고 별도의 주문이 없으면 8시쯤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고 도시락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과제 하는 학생들이 아니면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여유 있는 시간이었지만 동네 가게들이 워낙 일찍이 문을 닫는 바람에 골목은 스산했고 때때로 취객들이 들러 시비를 거는 탓에 저녁 시간은 정숙이 아닌 이소가 항상 자리를 지켰다.

이소는 남는 시간에 주로 책을 읽었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터라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던 20대 초반, 부러움과 질투를 해소하는 방법은 다행히 건전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도 틈틈이 책을 읽었고 심심하면 작은 노트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다.

요새는 SNS도 있어 제가 할 말을 다 토해 놓고 산다는데 이소의 핸드폰은 전화와 메시지만 하는 용도였다. 그래도 가끔 제가 생각해도 잘 그린 그림이 있으면 틈틈이 카메라로 찍어 놨다. 아이와 함께 지내다 보면 수도 없이 만화 캐릭터를 따라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못 그리려고 해도 제법 그럴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소는 카운터에 걸터앉아 낙서를 끼적이고 있었다. 낡은 오토바이에 탄 해수를 그렸고 그 뒤에 자기 자신도 그려 넣었다. 작은 집도 그렸다. 나무도 그리고 꽃도 그렸다. 보기 좋았다. 이렇게 살고 싶다. 떠날 걱정 없이, 돈 걱정 없이 그냥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었다.

별일 없이 자리 잡는다면 해수가 이 동네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빚도 차근차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매번 이사를 갈 때마다 찾아오는 사채업자에게 주소를 불러주고 집안 물건들을 일일이 검사받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서 빚을 다 갚고 나면 해수도 대학에 갈 것이고 저도 나이가 들 것이다.

이소는 노트의 구석에 20년이 지나 어엿한 성인이 된 해수와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때쯤이면 우리 가족은 세 명이 될 수 있을까. 이소는 제 옆에 키가 아담한 여자 하나를 그려 넣은 채 손을 맞잡게 했다. 그림 속 윤이소는 눈을 접은 채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옆에 손잡은 이가 어떤 사람이든 제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아마 이소는 그저 좋을 것 같았다.

“아, 머리 아프네.”

이소는 노트를 덮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가 약한 두통이 밀려왔다. 어쩌면 어제 숙취가 이제 올라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7시 50분이었다. 가게 유리창 너머 골목에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소는 일찍 파할까 싶어 가게 의자를 테이블에 올렸다. 바닥을 훑어보니 아이 손님이 왔다 갔는지 과자 부스러기가 지천이었다.

“어디 보자아. 과자를 많이도 흘렸군요오. 초코도 흘렸군요오.”

의미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운터 뒤로 가 빗자루를 가지고 돌아오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눈에 띄었다.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날이 흐리고 가로등이 어두워서 그런지 뿌연 실루엣은 꼭 사람이 아닌 것처럼 길쭉하고 걸음 보폭이 너무 커 여느 괴담에 나오는 팔다리가 긴 귀신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이소는 빗자루를 쥔 채 그 모습을 눈에 담다가 긴 다리가 마지막 가로등을 지나친 순간 사색이 되어 카운터 뒤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낮에 본 그 남자였다.

어쩐지 실루엣 주위가 팔랑팔랑거리는 것 같더라니 검은 코트를 걸친 채 걸어오는 모양새가 무척 거침이 없었다. 남자의 발걸음이 가게 앞에 다다랐는지 구두가 나무 데크를 또각또각 밟고 올라서는 소리가 코앞에서 들렸다. 가게 불은 켜져 있었고 문도 잠그지 않았다. 남자가 가게를 어떻게 알고 왔나 싶었다가 자신이 직접 색종이에 가게명과 주소까지 적어 준 것을 떠올린 이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기억은 아니지만 가게 앞에서 함께 술도 마셨다는 남자의 말도 생각이 났다. 무례고 나발이고 다시 한번 얼굴을 보는 것이 거북하고 불편했다.

“계세요. 실례합니다.”

똑똑똑, 유리를 두드리며 사람을 찾는 남자의 목소리가 가게를 울렸지만 이소는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들어와서 카운터 아래를 들여다볼까 손에 쥔 빗자루만 꼭 움켜잡고 긴장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구둣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위가 고요했다. 나가도 되는 건가? 허리를 일으키려는데 진동이 울리더니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 아, …벌써? 나는 잠깐 누굴 좀 보러 왔는데 안 계시네. 아니에요. 곧 올라갈게요.”

남자가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빼고 바깥을 내다볼까 싶었지만 아직 남자가 멀어지기에는 이른 듯해 조금 더 숨어 있기로 했다. 이소는 제가 잘못한 것도 없이 숨어 있는 꼴이 우스웠다.

문득 가게 문 앞에서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어느덧 15분이 지나 있었다. 카운터 옆으로 머리를 내밀어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남자가 가게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연신 주변을 힐긋대고 있었다.

‘뭐야, 저 사람. 나 기다리는 거야?’

이소는 한숨을 쉬었다. 이쯤 되면 제가 무례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대응한 것 같았다. 곧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더니 담배 냄새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소는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게를 알고 있으니 내일 또 올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세상이 흉흉하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두 번씩이나 저를 찾다니 영 마음이 찜찜했다.

* * *

점심이 되어 주문이 몰아쳤다. 20건이 넘는 주문이 다 같은 곳에서 온 것이었다. 동양화과 과사무실.

“점심때만 되면 주문 많아지는 게 뭐라고 기분 참 좋네.”

속없이 포장을 하던 정숙이 웃으며 말했다. 평소 같으면 그러게요, 하고 웃었을 이소는 대꾸도 않고 묵묵히 밥을 담았다. 그 남자를 만났던 것도 그 과사무실 앞이었다. 저만 보면 툭툭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지던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도 꼭 할 말이 있다는 듯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눈빛이 번들거리는 게 보고만 있어도 뱀 앞에 생쥐마냥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이소는 괜히 밥을 꾹꾹 눌러 담는 것으로 찝찝함을 지웠다.

도시락 20개를 들고 과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긴 생머리의 조교가 웃으며 반겼다. 이래저래 항상 제 요리를 찾아 주는 고마운 고객이었다.

“사장님, 진짜 고마워요. 엄청 많았죠.”

“아니에요. 많이 시켜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여기 영수증하고 카드요.”

카드를 받아 든 조교는 학생들과 도시락을 옮겨 담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희 과 교수님이 원래 학교에서 식사를 안 하시거든요. 뭘 드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저희가 그때 도시락 먹는 거 딱 보더니 이거 어디서 주문했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막 영업했거든요. 여기 사장님이 밥 진짜 집밥처럼 잘하신다고. 그랬더니 오늘 조교들한테 제일 비싼 걸로 다 쏘신 거 있죠.”

어쩐지 평소에 먹던 5500원짜리가 아니라 7500원짜리로 스무 개나 넘는 주문이 들어왔더라니. 교수가 산 거였다. 조교는 작은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를 꺼내서 이소에게 내밀었다. 이소는 음료를 받아 들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중에 어떤 교수님이신지 꼭 알려 주세요. 제가 감사하다고 인사하려고요.”

“아, 정말요? 안 그래도 곧 올라오신다고 했는데 보고 가세요.”

“오늘은 제가 다음 배달이 있어서요. 나중에요.”

“그럼 나중에 마주치게 되면 알려 드릴게용!”

이소는 과사무실을 나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머물러 있었지만 괜히 1층에서 그 남자를 마주칠까 싶어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다행히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량 주문이 한꺼번에 들어온 덕에 재료도 일찍 소진되어 남은 오후는 다음 날 쓸 채소를 다듬는 것으로 보냈다. 해수를 데리러 갔을 때도 별일이 없었고 오토바이도 엔진을 조금 손보았더니 다시 시동이 걸렸다. 타이어를 교체할까 했지만 다음 달에 월급이 나오면 새것으로 갈아 주기로 했다.

이소는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평화로웠다. 이제 양파만 썰어 놓고 재고만 정리하면 오늘 할 일은 끝이었다. 하루 종일 마음 졸였지만 낮에도 그렇고 저녁 늦게까지도 별일이 없었다.

가게 문을 잠그고 올라가려다 문득 달달한 것이 당겼다. 슈퍼에 들러 해수에게 줄 딸기우유 하나와 정숙에게 줄 유자차를 사고 남은 돈으로 제 커피 우유를 샀다. 빨대에 꽂아 입에 물고 골목을 돌았을 때 이소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게 문 앞에 그 남자가 있었다.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한참을 서서 고민하는 듯싶었다. 남자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들어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시계를 보며 조금 고민하던 남자는 뒤돌아 다시 골목으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골목 전봇대 뒤에 숨어 남자를 관찰하던 이소는 문득 남자가 제집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쳤다. 해수와 정숙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이소는 골목에서 튀어나가 뒤돌아서 걷는 남자를 불러세웠다.

“저, 저기요!”

다급하게 불러세우자 남자는 몸을 돌렸다. 어두운 밤에도 달빛에 반사된 피부가 희고 매끈했다. 하지만 외적인 감상과 별개로 남자는 방금 전까지도 이소의 집 앞을 서성이던 수상한 사람이었다.

“아, 사장님. 오늘은 계셨네요.”

남자는 반갑게 웃었다. 고저가 없는 나긋한 말투였다.

“그러니까, 그게….”

이소는 할 말을 찾았다. 말재주가 없어 이런 상황에서도 더듬는 자신이 꼴사납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있는 아이를 떠올리며 단호하게 끊어 내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찾아오시면…. 제가 좀 난처합니다.”

남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소는 퍽 남 싫은 소리를 못 했다. 하지만 스토커처럼 저를 쫓아다니는 이 남자가 퍽 부담스러웠다. 두 눈을 꼭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마구 뱉었다.

“제가 원래 이런 거 거절을 잘 못 해요. 돌려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자주 마주칠 거 같고 가게까지 찾아오시면서 곤란하게 만드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이소는 후욱 심호흡을 했다. 남자는 고개를 기울인 채 이소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종교 같은 거 안 믿어요. 도를 아십니까 같은 거 하나도 관심 없고 몰라요. 교회도 안 다니고 절도 안 다닐 테니까 전도하거나 포교하지 마세요. 돈 없어서 카드도 안 만들고 예금, 보험, 적금 들 여유도 없어요. 주식이랑 펀드는 무식해서 못하고 인터넷은 안 바꿀 거예요. 여기 가게, 부동산도 이거 제 거 아니어서 허탕 치시는 거에요. 정수기나 비데 같은 건 없어도 돼요. 지금까지 나열한 거 아니더라도 저 해 드릴 수 있는 거 하나도 없어요. 시간 낭비 하시는 거예요.”

숨도 쉬지 않고 머릿속에 있는 말을 다다다 내뱉었다. 논리고 뭐고 하나만 걸려라, 뭐가 되었든 아무것도 팔아 줄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뭐가 웃긴지 말없이 입을 가린 채 입꼬리를 씰룩이며 웃고 있었다. 이소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

“이보세요, 선생님. 자꾸 사람이 말을 하는데 픽픽 웃기나 하고….”

“열쇠요.”

남자가 말을 잘랐다. 이소가 말을 하다 말고 쳐다보자 남자가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사장님 댁 열쇠 드리려고 온 거예요.”

이소가 종일 찾던 그 열쇠였다. 남자는 옅은 웃음을 매단 채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짐작도 하지 못한 이유여서 벙찐 상태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예의 나긋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같이 술 마셨던 날, 제가 사장님 부축해서 집에 데려다드렸어요. 문 열어 드리고 나서 저도 모르게 열쇠를 제 주머니에 넣었나 봐요. 저도 돌아가서 한참 뒤에 알았어요. 따로 말씀드릴 것도 있고 해서 얼굴 보고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두고 갈까 하다가 나중에 CCTV 같은 거 보시면 더 놀라시고 오해하실까 봐요. 누가 집어 갈 수도 있고요. 이 동네가 좀 흉흉해서.”

남자는 이소의 손목을 잡고 뒤집어 손바닥에 열쇠를 폭 내려놓았다. 남자의 행동에 이소는 사고를 멈춘 채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종교, 영업직, 예적금 권유….”

남자는 이소가 했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소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나 볼 때마다 꽁지 빠지게 도망갔구나?”

“…….”

“나 이상한 사람 아닌데.”

마치 남자는 다 보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남자는 허리를 펴고 코트를 매만지며 여상히 입을 열었다.

“뭐, 아무튼 그날 술 마시고 사장님이랑 있었던 일은 제가 오해를 좀….”

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이소가 불안하게 올려다보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구태여 끄집어낼 이야기는 아니죠. 혹시라도 사장님이 기억나시면 그때 이야기하고요.”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씩 웃었다.

“열쇠 줬으니 용건 끝났어요. 이제 귀찮게 안 합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정말 미안.”

남자는 열쇠를 쥐여 준 이소의 손을 톡톡 두드리더니 몇 걸음 멀어졌다. 아쉬움이 없이 멀어지는 보폭에 이소가 남자를 쳐다봤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문득 남자가 뒤를 돌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소를 보곤 빙긋 웃었다. 가로등에 비친 남자의 미소가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사장님.”

이소가 눈을 깜빡이자 남자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이제 들어가요. 아직 날이 차요.”

말을 마친 남자는 다시 뒤돌아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소는 열쇠를 쥐었다. 뒤늦게 제가 남자에게 쏟아 낸 말이 머리를 울렸다. 사이비 종교에 보험에 정수기, 비데까지. 혼자 삽질하고 성을 짓고 벽을 쌓고 무너뜨렸다.

“아, 어떡해….”

정말 상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 * *

어김없이 날이 밝았다. 이소는 고개를 돌려 제 옆에서 자고 있는 해수를 한 번 보고 사중으로 굳게 잠긴 현관문을 보았다. 벽에 걸린 작은 못에 남자가 주고 간 열쇠가 걸려 있었다. 훼손된 곳 없이 꼭 맞았다. 괜한 의심을 했다.

어젯밤 골목으로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소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점잖게 대응했기에 망정이지 정작 도움을 받고서 어젯밤의 자신은 괄괄 날뛰기만 했다. 남자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멋대로 단정 지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도리어 남자는 밤중에 찾아와 놀라게 만든 것 같다고 사과를 했다. 이렇게 된 거 찾아가서 제대로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 근데 뭐 하는 사람이지. 아니, 언제 마주칠 줄 알고….”

생각해 보니 남자의 직업도 모르고 동선도 몰랐다. 학교에서 종종 마주치기는 했지만 잘 차려입은 그 정도 또래의 젊은 남자는 그 사람을 제외하고도 수도 없이 많았다. 대학원생인가, 학생인가, 강사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종래에는 거의 매일 가는 학교니까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추측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소는 핸드폰을 들어 쇼핑 사이트를 뒤졌다. 무얼 사서 성의 표시를 해야 적절한지 몰라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렸다. 겨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구매하려고 했을 때는 사이트에 회원가입도 되어 있지 않아 다시 처음부터 인증을 거쳐야 했다. 이런 일에 영 서툴러 몇 번이고 구매가 취소되자 이소는 잠시 핸드폰을 밀어 뒀다.

‘일단 만나면 무조건 머리 숙이고 사과부터 해야지. 그리고 선물은 그다음에….’

다시 한번 부끄러움과 후회가 밀려와 이불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 * *

‘역시 모두 우연이었나….’

벌써 일주일째였다. 해수 어린이집이 끝나고 운동장을 기웃거려도 남자의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주치기 싫었을 때는 블랙 코트를 입은 남자의 실루엣만 봐도 눈치를 보며 도망가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검은 옷만 사람만 보면 쫓아가려고 엉덩이부터 들썩였다. 가게가 남자의 귀가 동선에 속하지는 않는지 저녁에 데크에 앉아 골목을 기웃거려도 노란 가로등 아래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키 큰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소 씨. 해수 방금 재웠어.”

“고생하셨어요.”

어느새 내려온 정숙이 데크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해수가 어린이집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썩 잘 그렸더라고.”

“요새 색을 이것저것 잘 조합해서 쓰던데요. 제법 많이 늘었어요.”

“우리 가족이라고 그렸는데 이거 봐. 내 머리에 리본도 달아 주고, 할미가 제일 예쁘대. 비싼 빽도 들고 있네.”

“예쁘게 잘 그렸네요.”

이소는 정숙이 건넨 그림을 받아 들고 푸흐흐 웃었다. 정숙은 물끄러미 이소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작은 골목에서 썩히기는 정말 아까운 얼굴이었다. 정숙은 코앞에 있는 대학에 연기를 한답시고 연극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을 숱하게 보아 왔지만 곁에 앉은 이 청년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여태껏 본 일이 없었다.

이소는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어리게 보았을 정도로 말갛고 순하게 생긴 얼굴을 가졌다. 무엇을 하고 자랐는지 또래보다 기계도 못 만지고 경험도 적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참 맑고 따뜻했다. 거짓말을 약간 보태서 해수랑 같이 있어도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오빠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게에 있으면 수시로 이소를 보러 구경 오는 예쁜 여학생들이 참 많았는데 이소는 그렇게 상냥하게 굴면서도 마음 한 번을 내주지 않았다. 정숙은 그게 참 아까웠다.

“아빠 옆자리에 누구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 말을 하면서 정숙은 이소의 눈치를 보았다. 입꼬리에 항상 미소를 달고 있는 이소였지만 여자 만나라는 잔소리를 할 때마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때 보면 은근 고집이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르는 척하는 얼굴로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수도 엄마 있으면 더 안정될 거고.”

“할머니가 잘 해 주시잖아요.”

“나 죽고 나면 엄마 있어야 된대두.”

“그런 서운한 말씀은 안 하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죽는다는 소리에 이소가 짐짓 엄한 눈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정숙은 말을 돌렸다. 이소는 농담으로라도 사람 죽는 얘기는 참 싫어했다.

“그러니까 얼른 나 있을 때 새 장가 가.”

예에. 이소가 성의 없이 끄덕이자 정숙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요 근래 자꾸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마냥 가게 앞에 나와서 고개를 쭉 빼고 있길래 여자가 생겼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정숙은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잠시 서서 이소를 바라보다 문득 며칠 전 밤이 떠올랐다.

“근데 이소 씨, 그 키 큰 친구는 언제 사귀었어?”

고개를 돌린 이소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정숙은 이소와 지내며 이소의 친구랄 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친구요?”

“왜, 그때. 우리 이사 오고 얼마 안 돼서 이소 씨 술 마셨을 때 같이 있었던 친구. 무지하게 크고 잘생겼더니만.”

여태 데크에 앉아 있던 이소는 그 말에 일어나 정숙에게 다가왔다.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 사람을 보셨어요?”

“봤지, 왜? 술 먹고 뻗은 이소 씨 안고 있다가 눕혀서 이불 덮어 주고 한참 쳐다보다 갔어. 내가 그 옆에 해수 눕히는 것도 도와주고. 내가 영 못 미더운 눈치로 보니까 친구라고 그러더라구.”

“집에도 들어왔었다고…?”

“왜, 무슨 일 있어? 누군데?”

이소는 두 눈을 깜박였다. 이소가 취했던 그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제집 안에서 정숙까지 마주쳤다고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숙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굳이 정숙까지 불안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친구 맞아요.”

정숙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니, 그렇게 멋진 친구가 있었어? 또 오라고 해. 담번에 오면 꼭 말해 줘. 그렇게 큰 사람은 살다 살다 처음 봤다. 모델 같은 거 하나 봐?”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고 이소는 가게 마감을 하겠다며 돌아섰다. 아무래도 내일은 학교에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정수기, 비데, 보험판매원으로 오해한 것을 사과할 겸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 * *

배달이 있을 때는 가볍게 돌리던 문고리를 용건 없이 쥐는 건 참 어려웠다. 이소는 엘리베이터 옆 전신 거울에 몸을 비췄다. 여기 오기 전 더러운 배달 점퍼가 신경 쓰여 괜히 집으로 올라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단정한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색이 조금 바래기는 했지만 제가 가진 옷 중에는 제일 좋은 축에 속했다. 학교에 가기 전 빵집에 들러 유통기한이 긴 롤케이크를 하나 고르고 선물용으로 포장도 했다. 몇 번의 심호흡 후에 문고리를 돌리자 자판을 두드리던 조교가 놀란 눈으로 이소를 반겼다.

“사장님! 이열! 완전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이소가 고개를 숙이자 소파에 앉아 있던 늙은 교수들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인가 싶어 이소를 뚫어지게 보았지만 이내 몸을 돌리곤 하던 일을 했다. 조교가 종종걸음으로 문 앞까지 나왔다. 이소는 그 배려도 퍽 고마웠다. 어쩐지 안에 들어가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학생도 아닌 제 이야기를 들으러 나와 준 마음씨가 예뻤다.

“무슨 일이세요? 저희 오늘은 도시락 안 시켰는데.”

“아, 그게…. 여쭤볼 게 있어서요.”

조교가 그 남자를 알 거라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두 번 본 저보다는 몇 번이라도 더 보았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남자의 모습을 설명했다.

“여기 층에 자주 오시는 거 같아서요. 볼 때마다 정장 입고 있으시고…. 젊으신 분인데, 정말 키가 되게, 진짜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시고…. 아, 맞다. 그리고 진짜 엄청 잘생기셨어요.”

“풋, 그냥도 아니고 엄청 잘생기셨어요?”

잘생긴 사람보고 잘생겼다고 설명하는데 조교는 큭큭대며 웃었다. 이소는 단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며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목소리도 좋으시고요. 아, 그 여기까지 오는 검정 코트 입고 다니시고요.”

“으흠.”

조교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면 바로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교의 반응이 영 미적지근한 것을 보니 학교 사람이 아닌가 보다. 진짜 판촉사원 같은 건가? 조교는 이소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씩 웃었다.

“저, 알 것도 같아요.”

“정말요?”

다행이다. 하긴 한 번 보면 잊기에는 힘든 키랑 얼굴이긴 하지.

“네. 키 되게 크시고, 목소리 좋으시고, 검정 코트 입으신 정말 엄청 잘생기신 분.”

“네, 네. 맞아요! 그분 누구세요? 제가 꼭 할 말이 있어서….”

문득 이소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로 멈췄다. 저 멀리 대리석 바닥을 차분하게 울리는 익숙한 리듬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회색빛이 도는 올리브색 슈트를 걸친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 걸음 뒤로 검정 코트 자락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탱고를 추듯 우아하면서 힘 있는 걸음걸이였다. 남자는 한 손에는 가죽가방과 두꺼운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커피 8잔이 든 캐리어를 쥔 채 이소와 눈이 마주쳤다. 이소가 엉거주춤 돌아보자 조교가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교수님, 손님 오셨어요.”

알 것도 같은 게 아니라, 아는 사이였다. 이소가 당황해 돌아보자 조교가 장난친 게 미안한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저희 과 교수님이세요.”

“…교수님이요?”

“네, 차해준 교수님이요.”

차해준. 남자의 이름이었다. 이소는 남자가 제 코앞에 다다를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스무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쭉 이소의 눈을 보며 걸었다. 두 사람은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그렇게 느린 속도로 서로의 눈만 쫓았다.

* * *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소는 벤치에 앉아 롤케이크를 만지작거렸다. 만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시선을 멀리 두자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도서관에서 나오는 학생들, 잔디밭에 늘어져 이른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소 옆에는 긴 다리를 꼰 채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는 해준이 앉아 있었다. 차마 말을 꺼내기가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 * *

30분 전 이소는 간단하게 용건을 꺼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해준은 조교에게 커피를 건네곤 몇 마디 인사를 나누더니 이소를 데리고 지하 1층 카페에 내려왔다. 롤케이크만 얼른 주고 사과를 한 뒤에 그날 밤의 전후 사정만 듣고 마음 편히 집에 올 생각이었다. 일주일 동안 제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한 짐을 덜고 싶었다.

해준이 카페에 들르자 순식간에 많은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지쳐 있던 알바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일순간 해준을 보느라 사위가 조용해졌다. 처음 보았을 때도 굉장히 덩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운터 앞에 서자 메뉴판에 깎은 듯 잘생긴 이마가 톡 닿았다. 177cm인 이소의 키보다 한 뼘은 더 크면서도 우락부락하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건 그가 입은 올리브색 슈트가 몸에 맞춘 듯 꼭 맞았기 때문이다.

해준은 이소를 한 번 보더니 ‘커피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다. 카페가 워낙 음악 소리와 사람들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이소는 다시 한번 들으러 한 발짝 다가갔다. 이소가 성큼 다가와 올려다보자 해준은 잠시 이소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못 들었어요.’ 하자 해준은 불쑥 이소의 어깨까지 고개를 내렸다.

“커피 좋아하시냐구요.”

순간 해준의 숨이 귓가에 닿아 이소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이소가 좋아하는 새벽 시간 라디오 디제이가 혼잣말을 하며 웃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청취자들의 사연과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오디오를 꽉 채우는 남자의 목소리를 귀에 꽂은 채 이소는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런데 꼭 해준의 목소리는 제가 좋아하던 디제이의 목소리와 닮았다. 귓가에서 가까이 속삭이는 느낌도 비슷했다. 이소는 괜히 귀를 붉히며 메뉴를 가리켰다.

“저 단 거는 먹을 수 있어요.”

“단 거. 그러면 카페모카? 아…. 캐러멜 좋아하시니까 마키아토?”

“마키…?”

“달달한 거예요.”

이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준은 캐러멜 뭐시기 이름이 어려운 커피와 제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안쪽을 둘러보았지만 앉을 곳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본격적으로 마주 앉을 생각은 없었으니 걸으면서 대화하고 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담백하게 헤어져야겠다. 그리 생각하니 이소는 긴장한 속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마침 등 뒤에서 주문 벨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걸으면서 차를 마시자고 할 요량으로 몸을 돌렸을 때 해준은 작은 쿠키 세트와 빵 봉투,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해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 아직 식사 전이라서요. 사장님은 식사하셨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소는 당황해 말끝을 흐렸다.

“아, 저도 아직이긴 한데….”

“그럼 우리 같이 먹어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해준이 이소에게 손짓했다. 입구 쪽으로 성큼 다가가 부드럽게 문을 열고 몸을 기댔다. 이소는 제가 아이도 여자도 아닌데 선뜻 배려해 주는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신기했다. 저런 젠틀함이 몸에 밴 사람 같았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해준의 몸을 스쳐 지나 카페 바깥으로 나왔다. 봄바람이 살랑살랑한 게 그다지 쌀쌀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은은한 꽃내음도 나는 듯싶었다.

그렇게 벤치로 가 앉았다. 이소는 제 오른손에 들린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파란 봉투에 담긴 프랜차이즈 롤케이크는 그나마 제가 먹어 본 것 중에 가장 비싸고 맛있는 것으로 고른 것이었다. 그러나 해준이 골라 온 빵과 쿠키는 크기는 작았지만 하나하나 손으로 만든 수제품이었고 포장지 겉면에 강아지풀과 예쁜 들꽃까지 붙어 있어 제가 산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런 것을 간식으로 먹는 사람인데 제가 사 온 빵은 너무 싸구려가 아닌가 싶어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건 뭐예요?”

해준이 이소가 들고 있던 빵 봉투를 가리켰다.

“아, 이거는….”

문득 이소는 해준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이름과 직책을 방금 알아내기는 했는데 멋대로 불러도 되는지 몰라서 우물거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쪽’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례했고 ‘선생님’이라고 지칭하기에는 구면치고는 거리감이 있었다. 이소는 머뭇머뭇 평생 입에 올려 본 적 없는 호칭을 꺼냈다.

“…교수님, 드리려고요.”

고민하다 이름은 빼고 직책만 불렀더니 해준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교수님?”

“그, 조교님께서…. 교수님이라고 부르시길래, 아까 알았어요.”

“아, 그랬구나. 맞아요. 이 학교에서 학생들 그림 가르치고 있어요.”

해준은 자신이 하는 일을 간단하고 겸손하게 덧붙였다. 이소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거 저 주시는 이유는요?”

희고 긴 손가락이 빵 봉투를 톡톡 두드렸다. 이소는 눈을 마주치고 머뭇거리다 꼭 선생 앞에 혼나는 학생마냥 손을 모았다.

“오해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으음.”

“열쇠를 전해 주러 오시는 줄은 생각도 못 했고, 자꾸 집 앞에 찾아오셔서… 솔직히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워낙, 좀….”

“흉흉하니까?”

이소는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술을 물고 끄덕였다. 해준은 웃는 낯을 한 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뒤늦게 들었어요. 저 올려다 주시고 이불도 깔아 주셨다고….”

“아아, 그날 그냥 두면 그대로 밖에서 누워서 주무실 거 같았거든요.”

“…….”

“분리수거는 꽤 잘하셨는데 자꾸 빈 캔에 입술 대고 남았나 안 남았나 확인하시는 건 좀 귀여웠달까. 말려도 안 듣고.”

“하….”

이소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주사가 궁상떠는 거였나. 이소는 다시금 해준의 말버릇이 미묘하게 여지를 남기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꺼번에 다 이야기하지 않고 조금씩 비밀을 흘리는 듯한 저 말투가 신경 쓰였다.

“아무튼 그날 교수님을 몰아붙여서 죄송해요. 열쇠 돌려주신 것도 고맙고, 또….”

“또?”

“화내지 않으시고 이야기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제가 버럭버럭 언성을 높일 동안 해준은 가만히 서서 듣고 있었고 정말로 열쇠만 주고 돌아갔다. 학교 일이 바빴을 텐데 몇 번이고 걸음을 해서 제집 앞까지 찾아와 줬다. 집을 알고 있었지만 무례하게 올라오지 않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고 저를 기다렸다.

이소는 사람을 사귀는 데 워낙 서툴렀고 요령도 없었다. 긴 인연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친구 진혁이 다였고 지금은 제 옆에 있는 정숙이 이제 막 2년을 채워 가는 중이었다. 진혁은 워낙 오래 보아와서 저를 당황하게 하는 일은 없었고 정숙은 말이 없는 이소를 그냥 성격이겠거니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그런지 이소는 이렇게 길게 제 생각을 읊어 본 일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소는 손가락 끝을 꼼질거렸다.

“원래는 다음 날 만나면 바로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요.”

“네.”

“이름도 모르고, 무슨 일 하시는지도 몰라서 찾아뵐 수가 없었어요….”

지금이라도 이름과 직책을 알아서 다행이었다.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은 그래서 하는 일은 알았고. 이름은 알아요?”

“네. 아까 조교님께 들었어요.”

“그래요? 아쉬워라.”

“뭐가요?”

해준이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직접 말해 주고 싶었는데.”

해준은 정말 아쉬운 표정이었다. 어차피 조교가 말해 주나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나 달라질 것 없는 이름인데 뭐 그런 걸 아쉬워하나 싶었다. 이소는 할 말이 없어 그저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웃는 이소를 해준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곤 커피를 권했다.

“아, 커피 식겠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해준이 들려 준 종이컵에서 달큰한 냄새가 올라왔다. 항상 믹스커피와 슈퍼 커피 우유만 마시던 이소는 뚜껑을 열어 들여다보고는 의아해했다. 커피를 탄 흔적은 보이는데 막상 열어 보니 우유만 잔뜩 있었다.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자 해준이 힐끗 쳐다보았다. 촌스러워 보일까 봐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한 모금 크게 넘기자 뜨거운 우유와 함께 익히 알고 있는 노란 캐러멜의 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인상을 쓸 정도의 단맛은 부드럽고 담백한 우유와 적절히 섞여 속을 따듯하게 데웠다. 꽤 큰 사이즈였는데도 이소는 커피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이소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해준은 종이봉투에서 갓 구운 페이스트리를 꺼내 반을 잘랐다. 겹겹이 싸인 얇은 층 안에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이었다. 학교 카페치고 다양한 베이커리와 음료를 제공하는 카페는 입맛이 까다로운 해준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반을 가른 빵을 이소에게 내밀며 ‘드세요.’ 하자 이소는 그새 긴장이 풀어졌는지 입꼬리를 올린 채 받아 들었다.

“커피랑 빵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건데, 커피 벌써 다 드셨네요.”

“아,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처음 먹어 봤는데 진짜 맛있네요.”

“좋아할 것 같았어요. 캐러멜 좋아하잖아요.”

“어떻게 아셨, 아….”

이소는 문득 해준이 그날 술 마실 때 안주로 캐러멜 나눠 먹은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소가 지난 기억을 떠올리자 해준이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캐러멜을 맥주 안주로 먹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어릴 때 술이 써서 몇 번 먹다 보니 습관이 됐어요.”

“몇 살 때요?”

이소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 18살…?”

“와, 그때부터 술 마셨어요?”

“아니, 많이는 아니고 가끔. 진짜 가끔이요. 정말 일탈로.”

이소는 괜히 부끄러워 볼을 긁적였다. 이렇게 정숙과 해수가 아닌 사람과 말을 길게 해 본 일이 오랜만이어서 마음이 들떴다. 넓은 캠퍼스에 벚꽃이 흩날리는 벤치에 앉아 미술대학 젊은 교수와 식사를 하고 있으니 자신도 왠지 비슷한 급의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할 말이 없어 손에 든 페이스트리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자 노란 크림이 빵 옆으로 흘러내렸다. 생크림보다는 단단하고 버터보다는 부드러운 식감의 달콤한 크림이 입술과 코끝에 묻었다. 해준이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자 이소는 대충 손가락으로 훔쳐 낸 뒤 우물우물 씹었다. 아까 마신 커피도 입이 아리도록 달았지만 이소의 입맛에 꼭 맞았다. 빵 역시 가격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비싼 값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뭐가 되었든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교정을 걸었다. 해준은 다음 수업이 없는지 이소를 가게까지 배웅한다고 했지만 이소는 해준과 헤어지고 혼자 캠퍼스를 구경하고 싶어 웃으며 거절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까 벤치에 앉을 때만 해도 저만 외따로 이방인 같았는데 해준과 식사를 마치고 난 지금은 저도 꼭 이 넓은 캠퍼스를 거니는 보통의 집단에 잘 스며든 것 같았다. 유치한 농담에 깔깔대며 걷다 보니 일상의 가장 큰 걱정은 사채 빚이 아닌 저녁 식사 메뉴가 되는 그런 보통의 삶을 사는 윤이소가 된 기분이었다.

문득 이소는 해준이 그날 저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했었던 것을 떠올렸다. 뭐라고 했더라. 우리가 그날 했던 일에 대해서 말을 하려다가 말았던 것 같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뭐가 되었든 이 상냥하고 다정한 교수가 차분히 설명해 줄 것 같았다.

“근데 교수님, 그날 말이에요.”

“네.”

“제가 기억나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었던 그거요.”

“기억나셨어요?”

“그건 아닌데, 그냥 계속 신경 쓰여서요. 궁금하기도 하고.”

한 걸음 앞서 걷던 해준이 돌아봤다. 이소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해준을 올려다봤다.

“혹시 우리 그날 무슨 일 있었어요?”

바람이 불었다. 땅에 떨어진 벚꽃잎이 모래바람과 함께 휘몰아쳐 올라와 이소의 볼을 때렸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는지 이소는 볼을 찡그린 채 고개를 숙였다. 한참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해준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순간 이소는 다시 한번 어렴풋한 데자뷔에 휩싸였다. 분명 누군가와 이만큼 가깝게 몸을 붙였던 잔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돌연 해준은 언제 꺼냈는지 모를 목도리를 손에 쥔 채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준의 눈이 이소의 흰 목덜미에 닿았다. 흐트러진 카디건 사이 보이는 오목한 쇄골에 바람에 날린 꽃잎 하나가 자리 잡았다. 해준이 고개를 내리고 입으로 후, 바람을 불자 꽃잎이 톡 떨어져 내렸다. 이소가 놀라 고개를 들자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꽃잎이 앉았네요.”

해준의 목도리는 검은 코트와 상반되는 상아색이었다. 해준은 목도리를 넓게 펼치더니 이소의 머리 위로 팔을 들어 천천히 목에 감았다. 날이 차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목도리가 목을 감싸자 뜻밖의 온기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소는 얌전히 서 있었다. 어쩐지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해준은 목도리를 꼼꼼히 묶어 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했었어요.”

해준의 속눈썹이 깜박여 그늘을 만들었다. 이소는 팔랑거리는 속눈썹에 시선을 두느라 앞에 말을 듣지 못해 되물었다.

“죄송해요. 잘 못 들었….”

해준이 담담히 말했다.

“우리 그날 키스했었어요.”

마침내 해준이 목도리를 다 묶었는지 만족스럽게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하늘을 둥둥 날아다니던 이소의 기분은 봄바람에 휘청이는 벚나무처럼 어지럽게 흔들렸다.

* * *

“우리 그날 키스했었어요.”

이소의 두 눈이 흔들렸다. 해준의 입에서 툭 떨어진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여러 번 곱씹었지만 ‘키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해준의 목도리를 하고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는 이소를 두고 해준은 반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마치 캔버스에 선을 얹기 전 구도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기울이고 느긋한 시선으로 이소의 머리와 목덜미, 어깨와 가슴을 차례대로 훑어 내렸다. 곧이어 길고 가는 손가락이 뻗어 나와 목도리의 양 끝을 잡고 조금씩 당기며 완벽한 대칭을 만들었다. 돌연 정신이 든 이소가 목덜미를 붉히며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키스요?”

제 품 가까이 서 있던 이소가 순식간에 몸을 떨어뜨리자 해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소는 당혹스러웠다. 남자가 남자에게 키스했다는 게 이렇게 가볍게 던져도 되는 말인가? 이 남자는 이런 이야기를 왜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지? 이소는 혼란스러웠다.

“저, 나… 남자예요.”

“남자끼리도 키스할 수 있죠.”

사람이 아침 식사로 밥이 아니라 빵을 먹을 수도 있지, 라는 말처럼 가볍고 아무렇지 않게 툭 뱉은 말에 이소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왜 우리가 키스를….”

해준은 생각 없이 되물어 놓고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이소를 내려다보았다. 저번 가게 앞 노상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이소에게서는 퍽 간질간질한 냄새가 났다. 과일 향도 아니고 꽃 향도 아닌데도 슬쩍슬쩍 움직일 때마다 코를 묻고 들이마시고 싶은 포근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이게 성인 남자한테서 날 수 있는 향기인가? 흔한 비누 향도 아니고 인공적인 샴푸 향도 아니었다.

깨끗하게 세탁해 빳빳하게 말린 옷에서는 청량한 바람의 냄새가 났고 열쇠를 찾아 달라 기대었던 머리통에서는 가벼운 민트 향이 났다. 그러나 일주일이 넘게 해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붉은 입술 사이로 토해 낸 달큰한 캐러멜 향과 목덜미에서 나던 크리미한 분내. 분명 선이 가는 편이 아닌데도 한 손에 도톰하게 잡히는 양 볼과 살짝 벌어지는 입술은 참 어린 태가 나 눈이 갔다.

해준은 이소의 말을 기다리다 한숨을 쉬곤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하게 터지는 소리에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여기 보세요.”

사슴같이 큰 눈에 불안과 초조가 그렁그렁 매달렸다. 이거 원, 가슴 만졌다고 이야기하면 놀라서 까무러치겠는걸. 해준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저 가벼운 키스였어요.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사실 키스 도중에….”

“…….”

해준은 잠시 그날을 회상하듯 시선을 올리고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그날의 당혹과 서늘함은 제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따님께서 들어오셔서.”

그 말에 이소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생전 다른 사람 입에서 제 사생활로 해수의 이름이 오르내린 적은 없었다. 아이가 깨어 있었을까? 아이를 데려온 건 정숙일 텐데 그럼 어디까지 본 걸까. 정숙은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속으로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꼭 못 할 짓을 저지른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물었다. 그런 모습을 해준이 꽤나 느릿한 시선으로 훑어보는 줄은 몰랐다.

다시 고개를 든 이소의 표정은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해수가 봤어요?”

“해수가 딸 이름?”

“네.”

“아니요. 잠들어 있던데요.”

“사장, 그러니까 해수 데려오신 할머니는….”

“여사님이 문을 두드렸고, 사장님은 저한테 기대서 잠들었어요. 안이 조용하니 여사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고…. 그 이후에는 사장님이 알고 있는 스토리 그대로예요. 이불 펴 주고 눕혀 주고 끝.”

이소는 커다란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다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붉혔다. 다행이다. 못 봤구나. 해준과 키스를 했다는 사실보다 그걸 해수와 정숙이 보고 충격 받고 실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성실하고 반듯한 줄 알았건만 아이를 맡겨 놓고 낯선 남자와 입이나 맞추고 있었던 거냐고, 정숙이 실망한 표정으로 몰아세우는 상상을 한 이소는 몸서리를 쳤다.

아이가 못 봤다는 말에 안심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소를 보며 해준은 쓰게 웃었다. 애 아빠 맞네. 아이가 봤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짓궂게 놀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몇 마디고 더 얹는다면 또 울망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쳐들 테지만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날 분위기가 그랬던 건 차치하고.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길래 싱글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있는 줄 미리 알았다면, 키스하지 않았을 겁니다. 맹세코요.”

“네에….”

이소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술이 웬수다. 저 역시 분위기에 취해 같이 장단을 맞춘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준이 이소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기울이고 거듭 사과했다. 이 사람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세상에 남자 좋아하는 남자도 많고, 여자 좋아하는 여자도 많은데. 그저 내 잘못이다. 내 잘못. 이소는 얼굴을 감싸고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요, 사과는 더 안 하셔도 괜찮아요. 당황한 건 다른 게 아니고…. 그냥 전혀 키스라곤 짐작도 못 해서 그런 거예요. 오히려, 제가 오해하게 만들어 드린 것 같네요. 저도 죄송해요…. 그러니까, 같이 키스한 거요.”

이소는 혼자 연신 중얼대며 땀을 훔쳤다. 제 앞에 선 사람이 아무리 근사한 사람이래도 고작 두 번밖에 안 본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와 기억도 나지 않는 키스라니,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이소는 고개를 흔들고 해준을 올려다봤다.

“교수님도 황당하셨을 텐데 솔직하게 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마… 모른 척 말 안 해 주셨대도 저 정말 몰랐을 거예요.”

이소가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해준은 미안하면서도 멋쩍은 표정이었다.

“음, 모른 척하고 싶진 않아서요.”

“양심에 찔려서요?”

“아뇨. 그럼 또 못 보잖아요.”

“네?”

“전 꼭 사장님 또 보고 싶었거든요.”

울림이 있는 목소리, 똑 떨어지는 존대,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설명, 아슬아슬 줄을 타는 농담까지 더한 대화의 강약은 시선과 귀를 사로잡는다. 당장 발걸음을 돌려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남자의 시선에서 뻗어 나온 줄에 발이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주 잠시지만 귓불과 목덜미를 새빨갛게 붉힌 이소는 더듬더듬 해준과 몇 마디를 더 했다. 긴 오해는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풀렸다.

* * *

학교 후문에 거의 다다를 때 즈음 해준이 시계를 들었다.

“가게까지 데려다 드리고 싶은데 전 여기서 이만 들어갈게요. 수업이 있어서.”

“아니에요, 뭘요. 신세가 많았습니다.”

이소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신세라…. 사장님은 참, 제 나이 답지 않은 말을 잘 쓰네요.”

“신세가 왜요?”

“좀, 요즘 애들은 그런 말을 안 쓸 거 같아서요.”

해준은 두 손가락 들어 까딱까딱 접었다 펴며 ‘요즘 애들’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었다.

“전 요즘 애들은 아닌데….”

“아, 그러네. ‘요즘 애’가 있는 아빠지.”

와,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다. 이소는 입술을 길게 늘이고 할 말을 찾다가 문득 제 목에 여태 해준의 목도리가 감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거 드려야지. 고맙습니다. 덕분에 따뜻하게 잘 왔어요. 지금 드릴게요.”

이소가 목도리를 잡고 주욱 당겨 내렸다.

“가게까지 하고 가세요.”

해준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이소를 바라보며 퍽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건 채였지만 부드럽게 부탁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이소는 벗으려던 목도리의 끝을 쥔 채 해준과 눈을 맞췄다.

“종종 꽃샘추위가 온대요.”

찰나의 깜빡임조차 없이 제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목도리를 잡은 이소의 손 위로 해준의 검지와 엄지가 스쳤다. 차가운 손. 해준의 손에 부드러운 캐시미어 목도리는 다시 한번 꼼꼼하게 묶였다. 어느새 가까워진 해준이 가만히 눈을 맞췄다. 이소가 시선을 맞추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건 언제 돌려드릴까요?”

“안 주셔도 돼요. 선물이니까.”

선물. 이소의 입술이 놀라움에 저절로 벙긋댔다. 너무 오랜만에 들은 말이라 사고가 정지했다. 이소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해준은 이 좋은 목도리를 저에게 준다고 하고 있었다. 이거, 새 거 같은데. 이소가 머뭇거리자 해준은 제 손에 든 파란 롤케이크 종이백을 흔들었다.

“나도 선물 받았으니까요. 그날의 사과 겸 보답이에요.”

고작 롤케이크 하나에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이소가 무안한 듯 웃었다.

“교수님은 진짜 친절하시네요.”

“모두에게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해준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떨어뜨렸다.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가 해준을 재촉했다.

“그럼 잘 들어가요, 사장님.”

그렇게 해준이 멀어졌다. 이소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서 해준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워낙 큰 키라 한참 멀어졌는데도 참 잘 보였다. 이제 끝인가. 이상하고 수상했던 남자는 정중하고 차분했다. 살면서 몇 사람 만나 보지도 못했지만 딱히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이소는 이번에도 빗나간 제 예측에 머리를 쥐어박았다.

오해로 엮이기는 했지만 다정한 사람 같았다. 얼굴 몇 번 마주치고 실수로 키스한 상대에게 저 정도로 곰살맞게 구는 걸 보니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겠지. 대화를 하는 내내 그 섬세함에 놀라서 몇 번이나 입술이 벌어질 뻔했다. 심지어 저는 사과하러 가서 페이스트리와 캐러멜 커피도 얻어먹고 목도리 선물까지 받았다. 정숙에게 외출하겠다고 한 것보다 한 시간이나 더 지체했지만 무엇보다 값진 점심시간이었다.

이소는 목에 단단히 매인 목도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해수의 머릿결보다 부드러웠다.

“또 봐요. 교수님.”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날아갈 것 같았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오목하게 패인 보조개에 소박한 동경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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