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Story 4.
First. Second. Third.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몸이 깨어나고 있었다. 몸은 아직 샌드맨의 옷자락 밑에 있건만 정신은 어느새 완벽하게 깨어나 몸을 찾는다.
나른한 기운이 맴도는 가운데 키이스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평소라면 옆구리나 등이 따스하게 느껴질 터인데 오늘은 묘하게 썰렁했기 때문이다.
“……?”
탁탁―. 그리고 더듬더듬. 아무리 손을 뻗고 더듬어 봐도 걸리는 것이 없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퀸 사이즈보다도 넓은 침대에 있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다. 황망한 기분에 깔끔하게 꾸며진 침실을 둘러봤다. 당연하지만 신경원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몸에 남아 있던 잠기운이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키이스는 침대에서 벗어나 맨다리에 바지를 꿰어 입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10시밖에 되지 않았다. 신경원은 정작 11시 반, 핸드폰의 알람이 울려야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다. 게다가 신경원은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었다. 불면증 때문이 아니라… 으음.
“핸드폰은 여기 있는데….”
침대 옆의 협탁에 핸드폰 네 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렇다면 긴급 호출을 받고 나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째선지 조금이지만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일단 집 안을 뒤져보자 생각한 키이스는 황급히 침실을 나섰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작고 새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신―.”
신경원은 팬티 바람에 가운만 걸친 채로 거실 한가운데 털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곤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었다.
쉬잇―.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린 것이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신경원은 그대로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수신호를 했다. 작전 중도 아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집 안에서 수신호를 하다니, 대체 무슨 조화일까. 키이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주 약간, 옆으로 이동했다. 그 움직임을 눈치 챈 신경원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면 한 대 패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 역시 Stop을 의미하는 수신호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때였다.
“우아아앙.”
…….
……우아앙?
“우니야앙? 미요오옹~.”
“응. 안녕~. 울음소리가 굉장히 예쁘다. 나는 신이야. 넌 이름이 뭐니?”
순간 키이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세상에! 신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나오는 거야?! 나도 아직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야아아앙.”
“이리 와봐. 응?”
다시금 들려온 달콤한 목소리에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신경원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신경원과 ‘대화’를 하고 있던 놈이 그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그건 초콜릿색 귀에 새하얀 몸통과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장모종 고양이였다.
“냐옹냐옹. 이리 와 봐. ‘오빠’가 안아줄게. 응?”
신경원은 달콤하다 못해 사르르 녹아들 것 같은 목소리로 고양이를 불렀다. 그거로도 모자라 어서 가슴에 뛰어들라는 듯 두 팔까지 벌렸다. 그걸 본 키이스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을 안아주기 전에 저부터 좀 안아주시죠.”
“녀석? 이거 암컷 아니야?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신경원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키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수컷입니다. 그리고 아직 정식 이름은 없어요. 두 번째 새끼라 세컨드라고만 이름을 붙여놨다고 들었어요.”
키이스는 후우―하고 한숨을 쉬고는 신경원의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곧장 신경원을 품에 안았다.
“그 꿀이 뚝뚝 흐를 것 같은 목소리는 대체 뭡니까? 절 처음 보셨을 땐 이름도 묻지 않으셔놓고.”
키이스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경원의 머리에 제 뺨을 부비곤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했다. 이런 생각을 하긴 정말 싫지만 고양이에게 진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정말 진심으로!
“아침부터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지 마. 더워.”
“저한테도 그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아침인사 해주시면 놓아드릴게요.”
“달짝지근이라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적 없거든?”
“그러셨거든요?”
“이거 놔. 우씨―! 아침부터 왜 더듬어!”
“아침인사요.”
“잘 잤냐? 됐지? 이거 좀 놔―읍!”
키이스는 바동거리는 신경원을 꼭 끌어안은 채 턱을 당겨 억지로 입을 맞추었다. 품 안의 몸은 순간 바싹 굳어버렸다. 하지만 입안의 혀처럼 이내 부드럽게 풀어졌다. 오싹하는 기운이 등골을 따라 올라왔다. 키이스는 마음껏 신경원에게 입을 맞추며 혀를 얽었다.
신경원은 멈칫멈칫하면서도 이끄는 대로 따라와주었다. 젖은 소리가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투명한 타액과 함께 흘러나왔다.
“자, 잠깐…, 읏….”
키이스는 신경원을 품에 안은 채로 바닥에 몸을 눕혔다. 살짝 반항하는 몸을 내리누르며 마음껏 입을 맞추고 순식간에 부풀어버린 몸의 중심을 신경원의 사타구니에 대고 문질렀다.
“너, 아침부터… 아무리 오늘 …쉬는…으. 으읏.”
신경원의 허리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키이스가 팬티 속으로 손을 쑥 넣어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고는 곧장 손가락 하나를 비부에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너… 이 자식….”
“아직 좀 부어 있는데요. 게다가 여전히 부드러워요.”
“아프…거든?”
“하지만 기분 좋으시죠?”
키이스는 손가락마디 하나만 집어넣은 상태로 살살 흔들었다. 신경원의 무릎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신경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매끄러운 피부를 살짝 깨물었다. 그러곤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았다. 신경원의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죠?”
“…….”
“휴가도 길잖아요. 네?”
키이스는 일부러 보채는 듯한 말투로 졸랐다. 어리광 피우듯 조르면 대부분의 경우 넘어오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경원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신경원은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웅얼거렸다.
“고양이….”
“네?”
“고양이가….”
키이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신경원을 끌어안아 일으켰다. 그러곤 공주님처럼 번쩍 들어 올렸다.
“키, 키이스!”
“네네. 미성년 고양이가 보면 좀 자극이 셀 테니까 침대로 갈게요.”
그는 성큼성큼 걸어 침실로 돌아가 신경원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고양이가 들어오면 안 되니까’라고 말한 후 침실 문을 아예 걸어 잠갔다.
“이제 됐죠?”
키이스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경원을 내려다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신경원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신경원은 부끄러워지면 얼굴부터 시작해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거기서 더 부끄러워지면 피부색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바로 기분이 확확 다운되지만 몸이 빨간 동안에는 문제없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동그란 무릎을 핥았다. 매끈한 피부를 핥으니 허벅지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그는 그대로 신경원의 속옷을 벗겨내고는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렸다. 밤새 괴롭힌 구멍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커튼….”
“네?”
“커튼 쳐줘… 여긴 너무…밝아.”
“새삼스럽게 왜 밝은 걸 가지고 태클을 거세요. 우린 대부분 햇살 받으며 아침에 하잖아요.”
낮에 출근해서 오전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고 출근 전날은 하지 못하다 보니 보통은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오전 내내 침대를 구르며 잔다. 물론 일반적 의미의 ‘잔다’와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제 얼굴 보고 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아니거…든?”
“아닌 게 아닌 거 알거든요? 얼굴 보면서 하면 살짝 치대도 3배쯤은 더 자지러지면서.”
“……!”
“커튼 치면 제 얼굴 안 보일 텐데, 그래도 칠까요? 아니면 커튼 치고 불 켜고 하는 건?”
“씨―, ……!”
욕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키이스의 입이 막아버린다. 신경원은 주먹을 쥐고 키이스의 넓은 어깨를 두드렸지만 키이스는 꼼짝도 안 했다. 그는 마음껏 신경원의 입안을 헤집고 나서야 아래로 내려왔다. 다음 공략 대상은 가슴의 작은 유두였다.
밀빛 피부 위에 앙증맞게 달려 있는 갈색의 유두는 요즘 키이스의 집중 공략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물고 빨아도 간지러워할 뿐 느끼지 못했던 신경원이다. 하지만 집요하게 빨아댔더니 얼마 전부터 살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곧 월척이요! 하고 신경원의 새로운 성감대 하나를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신경원이 오늘부터 1일이라고 선언한 날부터 석 달이 조금 더 지났다. 그사이 해는 바뀌었고 키이스는 이제 공식적으로 수습을 벗어나 정식 에이전트가 되었다.
이번 휴가가 바로 정식 에이전트가 된 기념으로 받은 일종의 포상 휴가다. 이틀밖에 안 되지만 격일 근무일자에 맞추니 3박 4일이라는 근사한 휴가가 되었다.
하루 정도 더 받아보려 했지만 라미레즈의 일 이후로 유닛 멤버가 번갈아가며 일주일씩 휴가를 받았던 탓에 그 이상 날짜를 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계산한 대로 휴가받은 타이밍이 아주 죽여주니 별 불만은 없었다.
석 달간 변한 것은 그 이외에도 많다. 일단 신경원은 키이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레이첼이 골라준 집은 기관에서 자가용으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어느 고급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였다. 신경원의 기준에서는 당연히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비싸고 고급에다가 무지막지하게 컸다. 안에는 트레이닝룸은 물론이요 작은 실내 풀까지 있었다. 신경원을 위한 개인 서재도 마련되어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키이스는 신경원에게 개인 서재를 선물한 것을 이사 첫날부터 후회했다. 레이첼이 고용한 수행비서는 아주 꼼꼼하고 섬세한데다 세심했다. 그는 키이스가 찍어 보낸 신경원의 의학서적과 논문 목록을 기초로 그와 동급의 최신 의학서적과 최근 발표된 관련 논문들을 뽑아내 서재를 가득 채워놓았던 것이다.
참고로 서재를 채우는 데 사용된 돈은 모두 신경원의 전 집주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 그들은 키이스가 고용한 변호사 군단에 의해 탈탈 털렸던 것이다.
서재가 그들의 돈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물론 신경원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반짝이는 새 책들을 본 후 첫날 저녁을 먹은 후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을 뿐이다. 그러자 키이스는 서재를 조금씩 채워나갈 걸 그랬다며 한탄했다.
신경원과 살게 되며 키이스는 그가 평소 비번일에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아주 단순한 일과였지만 말이다.
기상해서 운동을 가볍게 하고 식사하고 그날의 의학 토픽을 컴퓨터로 검색해보고 다시 운동을 한 다음 점심을 먹고 의학 서적이나 논문을 보고 다시 운동을 하고 식사하고 또 의학 서적을 봤다. 그가 어떻게 에이전트 생활을 하는 중에도 의사 라이선스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일과였다.
서재는 금세 신경원이 읽고 내동댕이친 논문과 책으로 가득 찼다. 깔끔하게 꾸며진 서재가 논문 더미와 책으로 난장판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한 달이었다. 그 창고에서 살 때는 어떻게 공부를 했냐고 물었더니 근처의 도서관에서 살았다는 대답이 나왔다. 왜 공부를 계속하는 거냐고 했더니 필드 에이전트로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되면 연구소에 지원하려고 그런다는 답이 돌아왔다.
신경원은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이 말한 그대로 뱀파이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제 시간을 모두 남김없이 바쳐 현재를 위해 몸을 단련하고 미래를 위해 머리를 단련하고 있었다.
취미 활동이라고 부를 만한 건 아예 하지 않았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 신경원이 제 스케줄에 ‘키이스’라는 이름을 올려둘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키이스를 얼마나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신경원은 기본적인 의료기기를 주문해 일주일에 한 번씩 키이스의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성혈의 소유자로서의 첫 채혈도 신경원이 해줬다. 말은 안 했지만, 직접 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여 기관과 그 피를 가져가 뱀파이어 퇴치용 무기를 만들게 될 클리세딕의 관계자에게 손을 썼다.
신경원이 키이스의 채혈을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라이선스가 살아 있다는 부분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신경원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키이스의 혈관에 바늘을 꽂았고 묘한 표정으로 붉은 액체가 채워지는 비닐 팩을 보고 그것을 은색의 케이스에 담아 가져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신경원은 그날 하루 종일 키이스가 해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침대에서 요구한 것도―들어주었다. 어쩌면 평생 이렇게 주기적으로 피를 뽑혀야 하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는커녕 희열이 느껴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신경원이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해주는 것 자체가 좋았다.
“신.”
키이스는 신경원의 매끄러운 나신을 어루만지며 갈색의 젖꼭지에서 입을 뗐다.
“이따가 채혈해야 하는데 해주실 거죠?”
“…내가… 계속 해도 되는…거야?
“이야기해봤는데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도 계속 신이 해도 되고요.”
“그럼 할… 읏―.”
말을 마치자마자 젖꼭지를 이빨 사이에 끼고 자근자근 깨물었더니 반응이 왔다. 조만간 젖꼭지만 빨아도 달뜬 신음소리를 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감이 든다.
“넣을게요.”
“젠… 으으읍―!”
밤새 괴롭혔던 몸은 아주 쉽게 키이스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부어오른 내벽이 금세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성기를 힘 있게 조여왔다.
“입 막지 말고 소리 내요.”
키이스는 허리를 잘게 흔들며 신경원을 괴롭혔다. 뿌리 끝까지 깊이 처박고 이렇게 허리를 흔들어주는 걸 신경원은 굉장히 좋아했다. 그 자신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신경원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저었다. 키이스는 그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하지… 마.”
“괜찮아요. 일어났다고 연락할 때까지는 아무도 이쪽에 안 올 거예요. 시선 돌리지 말고 날 봐요.”
키이스는 신경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허리를 느리게 움직였다. 잔뜩 짜 넣은 젤이 녹아 흘러내려 찌걱찌걱하는 소리가 났다.
“좋아요?
신경원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빨간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역시 여기가 좋죠?”
허리를 살짝 틀어 가볍게 쳐올리자 신경원의 몸이 퍼뜩 튀어 올랐다. 시간을 들여 찾아낸 신경원의 포인트다.
첫 관계 때부터 삽입을 당한 채 사정을 했기 때문에 마냥 좋은 줄로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만 앞을 만져주지 않아도 사정했다. 몸보다는 정신적인 쾌감으로 가는 거였다. 세 번째 관계 때가 돼서야 그것을 알게 된 키이스는 조금, 아주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여기 찔러주면 좋죠? 좋다고 말해봐요. 그럼 계속 찔러줄 테니까.”
신경원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봐야 곧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내게 될 텐데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심하게 타는 남자다.
키이스는 심술궂게 허리를 비틀어 다른 곳만 찔러댔다. 물론 앞도 만져주지 않았다. 거듭된 정사에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는 신경원의 몸은 얼마 가지 않아 그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조금 더 강한 자극을 원하기 시작했다.
“거길 찔러달라고 말해요.”
“……기.”
“어디요?”
“거기….”
“어떻게 해드릴까요?”
“…씨….”
“욕 말고 말을 하셔야죠.”
“씨발 빨리 거기…흐악―.”
키이스는 지체 없이 신경원의 약점을 강하게 찔러 올렸다. 단 한 번뿐인데 신경원의 성기에서 묽은 액체가 튀어 올랐다.
“한 번으로 싸버리면 곤란하잖아요.”
신경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도 울지 않는 남자지만 침대 위에서는 아주 자주 운다. 오늘도 울리고 싶어졌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손을 놓아주고는 머리 옆에 손을 내려 팔을 단단히 디뎠다.
“잡아요.”
신경원은 불만 가득한 표정임에도 시키는 대로 키이스의 팔을 잡았다. 키이스는 곧장 신경원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사정 후의 민감해진 몸이 곧장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약한 곳을 인정사정없이 찌르자 교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깊이 박고 흔들어주니 고개를 흔들며 눈물을 흩뿌린다.
눈물을 흘리며 ‘그만’이라고 말하지만 키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이럴 때면 신경원은 언제나 반대로만 말하기 때문이다.
교성은 이내 비명과 울음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추삽질을 해대자 신경원은 짧지만 높은 소리를 내며 두 번째 사정을 했다. 가슴 위가 묽은 액체로 지저분해졌다.
“신. 부탁이 있어요.”
신경원은 달뜬 숨을 내쉬며 멍한 눈으로 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아직 사정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얼굴에 싸보고 싶어요.”
“…….”
“해도 되죠?”
단단한 복부와 가슴 위에 흩어져 있는 정액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까지 뿌려보고 싶다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고 싶어요. 하게 해주세요. 네?”
키이스는 애교가 어린 목소리로 졸랐다. 신경원은 보기보다 정말로 애교에 약하다. 거기에 채혈까지 부탁했으니 분명….
“…대로 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키이스는 몇 번 더 추삽질을 하다 급히 구멍에서 성기를 뺐다. 손으로 훑어줄 것도 없었다. 그저 방향만 간신히 맞추자 곧장 혈관이 울퉁불퉁 솟아 있던 성기에서 반투명한 액체가 터져 나왔다.
진득한 액체가 신경원의 얼굴 위에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질끈 눈을 감는 신경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농염했다.
방금 사정했는데도 또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경원은 입술로 흘러드는 정액을 손등으로 닦아내다 말고 다시금 발기하는 키이스의 성기를 보고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기를 잡은 채 신경원을 내려다봤다. 거친 숨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당장에라도 신경원의 다리를 벌리고 박고 싶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허락할 것 같지 않다.
“누가 짐승 새끼 아니랄까 봐.”
신경원이 얼굴에 튄 정액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안 되나 보다 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더 못 하겠으니까 일단 이걸로 참아.”
신경원의 손이 발기한 성기에 감겼다. 손으로 해주려나 하는데 대뜸 귀두로 입술을 가져간다.
“신?”
“물어뜯진 않을 테니 겁먹지 마.”
“그… 읏―!”
크게 벌어진 신경원의 입으로 귀두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신경원의 머리를 잡았다.
“목구멍 열 수 있어요?”
자신의 목소리가 이토록 낮게, 색정적이게 제 귀에 들려온 것은 처음이다. 신경원은 눈을 치켜뜨고는 키이스를 노려봤다. 거부와 허락이 동시에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신경원이 손이 키이스의 허벅지에 닿았다. 한 손으로는 두꺼운 기둥을 감싼다. 매끄러운 혀가 커다란 귀두를 핥고 요도 끝을 헤집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신경원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미칠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거라며 키이스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많이 아프세요?”
“닥쳐.”
신경원이 연신 입가를 손등으로 문대는 것을 보고 묻자 평소보다 배는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성기를 삼켰던 신경원의 입가는 발갛게 변해 있었다. 찢어지진 않았지만 조금 부어올라서 통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키이스가 제대로 자제하지를 못한 탓이다. 그는 신경원의 얼굴을 다시금 정액으로 적신 후에야 신경원을 풀어줬었다.
“죄송해요.”
“닥치라고 했다.”
신경원은 고개를 팩 돌리곤 어둡게 선팅한 차창을 보았다. 어두워서 밖이 잘 보이는 건 아니었으나 가로등의 불빛이 나타나면 가로수 정도는 보였다.
“가능한 30분 이내로 끝내볼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차체가 큰 롤스로이스에는 둘만 타고 있지 않았다. 신경원의 사촌 동생인 재원이와 해원이도 말쑥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채 건너편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다 스마트폰 게임 삼매경이라 키이스가 연신 신경원의 손을 주물러대고 있음에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스마트폰 중독으로 보여 걱정이 되는 동시에 자신과 키이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 보호자로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서글퍼진다.
현재 신경원은 키이스와 함께 LA에 와 있었다. 3박 4일이나 되는 휴가인지라 신경원이 아이들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날을 짜 맞추기라도 한듯 휴가기간이 아이들의 부활절 봄방학과 겹쳐 있었기에 타이밍도 무척 좋았다.
근무를 마치고 함께 사는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키이스가 새로 구입했다는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LA에 왔다. 이번에는 호텔에 머물지 않고 말리부에 있는 레이첼의 저택에 머물렀다.
최근 레이첼은 클리세딕 그룹의 총수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3세의 대리인으로서 실질적으로 그룹의 총수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뉴욕에서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말리부의 저택은 비어 있다시피 했던 것이다.
키이스는 센스를 발휘해 재원이와 해원이까지 그 저택으로 초대했다. 두 녀석은 저녁 내내 실내 수영장에서 놀다 일찌감치 지쳐 잠들었고 신경원은 초저녁부터 한밤중까지 키이스에게 시달리다가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키이스에게 또 시달렸던 신경원은 점심을 먹고 한숨 더 잔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조금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도대체 왜 내가 너랑 같이 파티에 가야 하는 거지? 그리고 왜 저 녀석들도 꼭 데려가야 한다고 우긴 건지 말해봐.”
“가보시면 안다니까요.”
“난 쓸데없는 스무고개 싫어해.”
조금 이른 저녁을 먹자마자 키이스가 갑자기 분주히 움직였다. 그는 꼭 참석해야 할 파티가 있다면서 신경원은 물론이요 두 아이들에게까지 미리 준비해둔 슈트를 내밀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어른들이 참석하는 ‘진짜’ 파티에 간다고 하니 신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녀석들은 어째선지 키이스의 말을 아주 고분고분 잘 들었다.
“있잖아, 형은 IQ는 좋은데 EQ는 떨어지는 것 같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해원이가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맞아. 뻔히 보이는 걸 저렇게 눈치를 못 챈다니까.”
“무슨 소리야?”
“우리를 데려가는 거 보면 몰라?”
“……?”
“우리도 신문 정도는 봐. 시사 교양 과목이 있으니까.”
신경원은 신문을 보지 않았다. 그런 쪽으로 그가 보는 건 의학 관련 사이트의 뉴스 페이지와 의학 잡지가 고작이었다.
“퍼거슨 새끼네 파티 가는 거지, 키이스?”
재원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키이스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원은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어 애들과 키이스를 번갈아 보았다.
“형은 키이스랑 우리가 메신저 어플로 계속 연락 주고받고 있던 것도 몰랐지?”
“…….”
“키이스 요즘 우리한테 한글 배우고 있어.”
“…뭐?”
“아직 가나다라 외우고 단어 몇 개랑 인사말밖에 못하긴 하지만. 흐흐흐흐.”
“도대체 언제부터….”
“크리스마스 때 핸드폰 선물해드렸잖아요. 그때부터요. 물론 번호는 그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
“형 연락 없을 때도 키이스는 부지런히 우리한테 연락도 해주고 형 잘 지낸다고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고 그랬어. 진짜 몰랐어?”
“…어.”
“진짜 형은 못 말려. 아무리 일이 좋아도 그렇지.”
“신이 맡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굉장히 크고 중요한 것들이라 그래.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사실 내가 농땡이 피우는 거야.”
키이스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사근사근하고 상냥하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진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해. 내가 그거에 반했지.”
“……!”
신경원은 경악이 서린 얼굴로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너―!”
“이러고 있는데 눈치를 못 챈다면 그건 해원과 재원을 바보로 보는 거예요, 신.”
키이스는 주물거리고 있던 손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신경원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 했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해원과 재원에게 연락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제가 알려줬어요.”
“괜찮아, 형. 우린 그런 거에 거부감 없어.”
“형이 좋다면 우리도 좋아. 솔직히 우린 형이 연애 한번도 제대로 못 하고 일만 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 우리 형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그러고.”
신경원은 뭐라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렸다. 그를 제외한 세 남자는 사이좋게 웃어가며 잘 부탁한다느니 걱정 말라느니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탄 롤스로이스는 시내의 유명 호텔 앞에 도착했다.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문을 열어주고 그들은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게 정확하게 무슨 파티야, 키이스?”
“너네 풋볼팀 선배의 아버지가 다음 시의원이 되고 싶어서 사람들 꼬시는 파티.”
“으하하학. 그게 뭐야.”
“기본적으로는 자선 파티지. Mrs. 퍼거슨이 주최하는.”
“그런데 가는 것까진 그렇다 치고 가서 뭐하려고? 혹시 그 아줌마 오는 거야?”
“응?”
“전에 우리 도와준 키이스 닮은 예쁜 아줌마.”
“아아, 레이첼?”
“그 아줌마가 없으면 완전 개무시당할 거 같은데.”
“흠. 연락을 해두긴 했는데, 올지 안 올지 잘 모르겠다. 요즘 많이 바쁘시거든.”
“그럼 우리 완전 쭈구리 되는 것 아닌가?”
“걱정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아이들에게도 이미 다 알려졌다는 충격에 신경원이 멍하니 있는 사이 키이스는 그의 허리에 팔을 휘감은 채 파티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화려한 호텔의 내부를 구경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파티는 호텔에서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LA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호텔인지라 내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실례합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연회장 입구에 있던 남자가 그들이 다가가니 약간 굳은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입구는 개방되어 있었는데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나이대가 좀 있었다. 보나마나 신경원의 일행을 불청객으로 본 것 같았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품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것을 열어본 남자의 얼굴은 곧장 사색이 되었다. 초대장에는 이름이며 회사며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 직위를 증명할 수 있는 표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드, 들어가십시오.”
목에 깁스라도 한 것처럼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곧장 사람들이 가득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꽤 많았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드레스에 보석을 주렁주렁 단 여자들이 반, 그녀들을 에스코트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들이 반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 사람들이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린다.
“너무 두리번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내가 여기 왕이다! 이런 기분으로 걸어.”
“하지만 너무 화려한걸.”
“우리랑 비슷한 나이대 애들도 없잖아, 키이스.”
“진짜 괜찮은 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아참, 너희들은 아직 술 마시면 안 된다.”
“보호자도 있는데 안 돼?”
“그건 신에게 물어봐야지.”
신경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에이~.”
키이스는 지나가던 호텔 직원을 불러 무알콜 칵테일을 주문했다. 아주 당당한 태도라 그런지 직원은 재빨리 사라졌다가 분홍빛이 나는 무알콜 칵테일 두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신경원에게는 키이스가 샴페인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신경원을 금세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때 입구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오오~ 다행히 시간 맞춰 오셨는데? 일이 쉽겠어.”
큰 키의 키이스는 고개를 살짝 드는 것만으로도 입구가 보인 모양이다.
“누가 왔는데?”
“너희들이 기다리던 예쁜 레이첼 아줌마. 아, 우리가 묵고 있던 저택이 레이첼 거야. 소개해줄 테니 감사 인사 꼭 해.”
“응. 알았어, 키이스.”
“걱정 마.”
레이첼은 이 지역에서도 유명인사였고 최근 클리세딕 그룹을 대표하게 되며 더더욱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니 당연히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렸다. 아내가 주최한 자선 파티긴 하지만 실질적 호스트인 퍼거슨 역시 시장을 상대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거의 10년간 LA를 무대로 사업을 해온 레이첼이다. 참석하지 않을 걸 알아도 예의상 초대장을 보내야 할 대상이었는데 정말로 참석을 해오니 퍼거슨은 무척이나 그녀를 반가워했다.
클리세딕 인더스트리의 대표에서 그룹 전체의 대표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녀는 이제 퍼거슨이 허리를 굽실거려야 할 사람이었다. 그녀의 원조까지도 필요 없다. 약간의 호의만 보여준다 해도 그의 뒷배는 든든해지는 것이다.
호스트와 그의 가족이 직접 나서 그녀를 맞이하니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레이첼은 다른 여자들에 비해 보석도 얼마 걸치지 않았고 드레스도 수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혹적인 미모와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키이스?”
“가만히 있어봐.”
키이스는 살짝 몸을 빼려는 신경원을 단단히 붙들고 허리를 더 깊이 감아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신경원은 그의 귀에 작게 말했다.
“해원이 말해줄 거예요. 신.”
“나?”
“응. 그 빌어먹을 레이시스트 녀석이 뭘 어떻게 했는지 신에게 말해줄래?”
해원이는 칫―하고 혀를 차더니 정말 싫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이후로 대놓고 괴롭히는 건 없어졌는데, 그다음부터는 아주 교묘하게 눈에 안 보이게 괴롭히기 시작했어. 그나마 나한테는 직접적으로 피해는 안 줬지만 그 새끼 때문에 다른 부원 하나가 결국 팀을 그만두고 나갔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신. 레이첼까지 동원해서 경고했는데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이번에야말로 최종병기를 능가하는 ‘끝판왕’이 등장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키이스가 말한 ‘끝판왕’이라는 단어는 한국어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쓰잘데기 없는 단어를 배우고 또 가르친 건지 어이가 없었다. 기왕 가르칠 거면 제대로 가르치라고 한소리 하려는 찰나였다. 대화를 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레이첼과 퍼거슨 부부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네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데는 잘 안 오시면서 어쩐 일이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절 놀래주려고 오셨나요?”
“휴가차 잠시 왔다가 레이첼이 참석한다고 하기에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 그리고 레이첼. 어색하게 그렇게 말하지 마시고 그냥 평소처럼 대해주세요. 저 섭섭해집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게 옳은 거랍니다.”
“저어, 실례지만….”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던 퍼거슨 사장이 레이첼과 키이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살짝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 아주 많이 닮은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퍼거슨 사장은 최신 소식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었다.
“혹시 이쪽 분이….”
“짐작하시는 그분이죠. 모처럼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소개해드릴게요. 이쪽은 얼마 전에 취임하신 우리 그룹의 총수이신….”
“레이첼, 제가 직접 인사드리겠습니다. 클리세딕의 주인인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3세입니다.”
순간 주위가 술렁거렸다. 그 소리에 퍼거슨 사장이 자신의 이름을 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사이 퍼거슨 사장은 옆에 있던 아내와 아이까지 키이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계열사도 아니고 클리세딕의 총수, 무려 자신을 ‘주인’이라 당당하게 말하는 회장의 앞이다. 당연히 가족들을 소개하고 싶었을 것이다.
신경원은 사색이 되어 있는 퍼거슨 부인과 그 옆에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이후에도 계속 괴롭혔다니 괘씸하긴 했으나 막상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니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장 신경원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키이스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 저도 소개를 해드려야겠군요. 이쪽은 제 ‘파트너’, 크리스토퍼 신. 그리고 이쪽의 친구들은 신의 동생들입니다.”
“……!”
또 한 번의 술렁거림이 파티장을 뒤덮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컸다. 클리세딕의 총수가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이런 장소에서 당당히 커밍아웃을 했으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다가와 제 딸을 소개하려던 몇몇 부인들은 이마를 짚으며 혼절하기까지 했다 .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지요, Mrs. 퍼거슨?”
“아, 그러셨습니까?”
퍼거슨 사장이 반색을 했다. 클리세딕의 새로운 총수가 게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가 자신의 아내와 인연이 있다고 하니 그쪽에 더 신경이 쏠렸다.
“네, 일전에 제 파트너의 동생들 일로 학교를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키이스는 눈에 보이지 않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신경원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참 유감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를 짓고 있던 키이스의 얼굴에는 싸늘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퍼거슨 사장님.”
“예?”
“올해 시의원직에 출마하신다는 이야기를 아까 슬쩍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이 레이시스트여서야….”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클리퍼드 회장님. 제 아들은….”
“제 파트너의 동생이 퍼거슨 사장님의 아드님으로부터 인종차별적 발언을 많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더불어 제 ‘연인’인 신에 대해서도 굉장히 모욕적인 발언을 했고요.”
“그런…!”
“그 발언 때문에 약간의 사건이 있어서 직접 갔던 건데, 뭐 그때는 아드님의 장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드렸습니다만, 사장님께서 의원이 되시려면 아드님 간수부터 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런,”
“솔직히 말해 사장님께는 아무런 유감도 없습니다만, 부인과 아드님께는 많이 섭섭한 부분이 있어서요. 솔직히 말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굉장히 불쾌합니다.”
키이스는 아예 대놓고 불쾌하다는 소리를 하며 얼굴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레이시스트라니.”
그는 퍼거슨 사장의 아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은 다음 고개를 저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시간차를 두고 하는 폼을 보니 아예 광고를 하려는 모양이다.
“레이첼을 만나러 온 것이었는데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만 가봐야겠군요. 레이첼, 혹시 많이 바쁘십니까?”
“아닙니다, 회장님. 저도 잠시 한숨을 돌리느라 LA로 돌아온 참이었어요. 일전에 추진하던 사업 관계로 퍼거슨 사장님과 조금 인연이 있었던지라 참석했던 건데….”
그녀는 사색이 되어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퍼거슨 사장을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키이스는 사장에게만큼은 정말 아무런 유감도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럼. 함께 돌아가셔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회장님.”
“저는 신을 에스코트해야 하니 오늘은 이 친구들의 에스코트를 받아보시면 어떨까요?”
그는 해원이와 재원이에게 눈짓을 했다. 아이들은 그녀에 대한 호감이 가득한데다 키이스가 벌여놓은 깽판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신이 나서 그녀의 양옆에 서서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녀는 영광이라며 두 소년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다섯 사람의 앞에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다. 그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주 당당한 걸음걸이로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과장도 필요 없는 완벽한 파티 크러셔였지만 그들에게 무어라 항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섯 사람은 모두 한 차에 탔다. 말리부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해원이와 재원이의 웃음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은 퍼거슨 사장의 아들이 지었던 표정을 흉내 내며 통쾌해했다. 물론 아이들은 레이첼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나 열성적으로 인사를 했는지 레이첼이 별로 도와준 것도 없다며 손사래를 쳐야 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레이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무 예쁘다면서 미모를 찬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해원이와 재원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것저것 물어댔다. 물론 숨겨두었던 정체를 밝혀가면서까지 퍼거슨 모자를 밟아버린 키이스도 아이들의 감사 인사와 찬양을 엄청 많이 받았다.
“와, 진짜. 키이스 정말 끝내주는 사람이었구나.”
“그러게. 부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클리세딕이라니. 거기에 회장님! 그런 사람이 앞에 앉아 있다니 완전 신기해. ‘대박!’”
“대박이 뭐지?”
“한국말로 끝내준다는 소리야.”
“아항.”
“잠깐. 그렇게 되면 경원이 형은 완전 봉 잡았네?”
“남자 신데렐라?”
두 아이는 으하하학―하고 배꼽을 잡고 웃다가 신경원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깨갱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으아. 이제 안심이다.”
“응.”
두 아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신경원을 힐끔힐끔 봤다. 그러자 레이첼이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뭐가 안심이라는 거니?”
“아, 우리 형이 우리 때문에 고생 많이 하고 살았거든요.”
“혼자 뉴욕까지 가서 밤낮없이 일하고….”
“우리 학비 때문에 아마 돈도 제대로 못 모았을 텐데, 부자 애인 생겼으니까 이제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있잖아, 형. 우리도 대충 알아. 우리 학비 반은 형이 대고 있다는 거.”
“……?!”
“예들린 아저씨가 살짝 알려줬어. 형 엄청 고생하며 살고 있으니까 우리보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거든. 형이 우리가 알고 있다는 거 알면 속상해할 테니까 모른 척하라고 했어. 하지만 조금은 알고 있어야….”
“한눈 안 팔고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알려주셨지.”
“듣고 나니 진짜 한눈 팔 생각도 안 들더라니까?”
이 망할 놈의 치프―!!
신경원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키이스. 우리 형만 잘 부탁해. 우리는 둘 다 장학금 받아서 대학 갈 거니까 우리한테까지 신경 안 써도 돼. 절대 신세 안 질 테니까 우리 형한테만 잘해주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아, 그래도 가끔 맛있는 거 사주러 오는 건 환영이야.”
“어머나. 둘 다 성적이 좋은가 보지?”
“네, 레이첼. 둘 다 성적이 상당히 좋아요. 그 학교에서 상위 1%에서 떨어져본 적이 없거든요. 재원은 하버드가 목표고 해원은 신처럼 존스홉킨스가 목표고요.”
“헉―!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키이스?”
“그때 해원이 사고 쳤을 때 구제 방법이 뭐가 있나 해서 좀 알아봤어. 학교 성적이 좋으면 아무래도 유리하니까 그것도 알아본 거고. 멋대로 알아봐서 미안하다.”
“아아. 아니야. 그땐 내가 잘못한 거였는걸.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키이스. 그리고 레이첼도요.”
“나는 그냥 잠깐 얼굴만 보였던 것뿐인데 그런 것으로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진짜 엄~청나게 크게 도와주신 거예요, 레이첼. 그 뒤로 그 녀석이 대놓고 괴롭히는 건 없어지긴 했거든요. 기왕이면 제 힘으로 해결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경우에는 레이첼이 택한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헤헤헤.”
두 아이는 다시 파티 이야기를 잠깐 했다. 그러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신경원과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는 키이스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키이스.”
“응?”
“왜 그렇게 땀을 흘려? 더워?”
“그러게.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창을 좀 열어줄까?”
“아, 아닙니다. 그냥. 하하하하.”
키이스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건 신경원만이 눈치 채고 있었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넌 주~욱었어. 감히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또 예고도 없이 아우팅을 시키다니!
신경원은 살기를 풀풀 날리며 손에 더 힘을 줬다. 키이스가 어깨를 움찔했다.
역시 북어와 강아지는 사흘에 한 번은 패야 한다. 봄이 되며 좀 바빠서 패는 걸 등한시했더니 이놈의 망할 대형 강아지가 사고를 쳐도 아주 크게 쳤다.
키이스는 이제 아예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풀고 싶은 궁금증이 있었는지 두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오징어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이지?”
“응?”
“전에 신이 내 옆에서 걸으면 오징어가 된다고 하면서 화를 냈거든. 그런데 무슨 말인지 물어도 대답을 안 해줘서….”
“아아. 그거? 한국에서 오래전에 유행한 말인데, 잘생긴 사람 옆에 있으면 보통 남자는 못생겨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도 안 보인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거야.”
키이스는 아하―! 하고 감탄사를 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화사하게 웃으며 신경원에게 말했다.
“신. 그냥 앞으로도 계속 오징어가 되시는 게 좋겠어요.”
뭐라는 거야, 이 멍청한 강아지 새끼가.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신에게 접근을 안 할 거 아닙니, ―크흑!”
신경원은 키이스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가격했다. 맹세하지만 손톱만큼도 봐주지 않았다. 키이스는 제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참을 쿨럭거려야 했다.
두 아이들은 키이스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키이스, 우리 형한테 잡혀 사는구나.”
“경원이 형 손 되게 매운데. 옛날부터 한 대만 맞으면 그냥 골로 갈 정도였어.”
“그러니까 맞을 짓은 어지간하면 하지 마. 방금 말은 내가 들어도 좀 울컥할 것 같더라.”
“응. 키이스가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오징어가 되라니. 자기 애인한테 그런 말 하면 못써.”
“우리 형, 생각보다 되~게 델리킷한 사람이거든.”
“하지만 주먹은 되~게 터프하지.”
“아프겠다.”
“진짜 아플 거야.”
레이첼은 아이들의 말을 듣다 말고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운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키이스의 신음소리가 한데 어울려 신경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시끄러웠다. 하지만 즐겁다는 기분이 절로 들었다.
전부 키이스의 덕이다.
신경원은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들어 올렸다. 옆의 키이스가 또 움찔했다. 하지만 신경원의 손은 토닥토닥 하며 키이스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뭐, 오늘은 용서해줄까.
신경원의 손이 또 까닥, 움직여 키이스의 허벅지를 톡 쳤다.
어차피 주변에는 알려질 대로 다 알려져버렸다. 당최 숨길 줄을 모르는 바보 강아지 때문이다. 아무 데서나, 누구에게나 왈왈 짖어대며 우리 주인님 건들지 마세요! 하고 일일이 경계를 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심지어는 길을 물어보는 관광객들에게조차 위협적인 시선을 보내서 쪽팔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애초에 주변의 시선이라고는 아예~ 신경을 쓸 생각이 없는 녀석이랑 사귀기로 한 게 문제겠지.
신경원은 포옥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 키이스를 좋아하게 된 건지 정말 모르겠다.
신경원은 키이스를 째려봤다. 그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헤헷’ 하고 빙구처럼 웃어 보였다.
정말이지 덩치만 커가지고는 여전히 강아지 상태를 벗어나질 못한다. 아무래도 라이벌 하나를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짐승이란 경쟁 상대가 생기면 열심히 먹고 열심히 크게 되어 있으니까.
“저기요, 레이첼. 말리부 저택에 사는 고양이들 중에 새로 태어난 애들 중 한 마리를 주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요. 마음에 드는 아이로 데려가요.”
“세컨드라는 아이 데려가도 되나요?”
“키이스는 암컷을 데려가겠다고 하던데요? 그 아이는 수컷인데….”
“그 애가 마음에 들어서요.”
“신이 좋다면야 상관없지만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꽤 도도한 아인데.”
“이름이 세컨드라는 점이요.”
“그건 그냥 편의상 붙여둔 거예요. 누가 데려가든 주인이 직접 이름을 짓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세컨드가 좋습니다.”
“……?”
“제가 직장에서 별명이 퍼스트거든요. 그리고 이 녀석은 키이스 클리퍼드 3세니까. 딱 좋지 않나요? 퍼스트, 세컨드, 서드.”
그러니까 넌 고양이 다음이다, 이 말씀이지.
신경원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 키이스를 보고 씨익―웃었다. 레이첼이나 아이들은 재미있는 작명이라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저 고양이보다 못한 놈이 된 키이스만이 버럭할 뿐이다.
“신, 제가 세 번째라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긴 여기 있지. 그리고 그런 건 다 주인님 소관이야.
“손.”
키이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일단 손을 내밀었다.
“멍. 해봐.”
“에이씨―, 멍!”
“잘했어.”
신경원은 그의 허벅지를 토닥토닥 두드려준 다음 그가 내민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떡 벌어진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다녀왔더니 피곤했다.
“도착하면 깨워.”
신경원은 바로 눈을 감았다. 귓가에 레이첼이 퍼스트, 세컨드, 서드를 연신 중얼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기껏해야 고양이 다음이냐며 키이스를 놀리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키이스의 불만 어린 으르렁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그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소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