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Story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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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는 참으로 난감한 기분으로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에이전트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는 연신 샐샐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찌나 기분 좋게 웃고 있는지 중대하고 심각하고 진지한 목적으로 그를 호출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사 시름을 떨쳐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토록 기분 좋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그들의 복장을 뒤집었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해도 한 가지 대답밖에 하지 않아 꼭지가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에이전트로 일하고 싶어요. 아니, 할 겁니다.”
“클리퍼드. 그러니까 그게 안 되는 거라니까.”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키이스는 자연스레 다리를 꼬며 싱긋 웃었다. 여유 만만한 자세였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기관의 높으신 분들이었다. 한 사람은 이 사무실의 주인인 뉴욕 지부 부장 클린트였고 다른 하나는 부부장 예들린, 마지막은 총 기관장인 리메인이었다. 그들은 지금 성혈의 소유자가 된 키이스가 에이전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하자 만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왜라니. 이유야 자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리메인은 앞에 앉아 있는 놈이 잘난 얼굴에 반비례하는 지능지수를 가진 게 아닐까 의심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제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성혈의 소유자에게 뱀파이어 헌터 같은 위험한 일을 시킬 수는 없네. 뱀파이어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다는 건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야 매력적인 조건이기는 해. 하지만 물리는 것만이 ‘부상’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자칫 잘못해 손톱 등에 의해 치명상을 입으면 자네가 아무리 성혈의 소유자라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네.”
“부상 안 당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자네의 실력이 다른 에이전트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받았어.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 날고 기는 베테랑들도 아차―하는 사이에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고작 몇 개월밖에 안 된 에이전트의 실력? 그런 건 처음부터 논외야.”
“어쨌거나 죽지만 않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게.”
“쓸데없는 고집이라니요.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무슨 특채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아카데미 지원해서 합격했고 수석으로 수료했습니다. 제가 에이전트로서 일하는 데 아무런 결격 사유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자네의 피가 결격 사유지 않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그렇지 않기는 않아! 미치지 않고서야 세상에 누가 성혈의 소유자를 뱀파이어 사냥에 내몬단 말인가!”
키이스는 리메인 기관장의 말을 듣고 조금 전보다 더 진하게 웃었다. 어째선지 비웃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으려는 찰나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에서 몇 개의 나라 이름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벨기에.”
“……!”
“체코, 폴란드, 라트비아… 더 할까요?”
키이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는 자신이 계속 에이전트로 일하겠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대가 클 거라는 걸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신경원에게는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난관이 꽤 높았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난관을 넘어설 자신이 있었다.
“성혈의 소유자를 갓난아이처럼, 깨지기 쉬운 유리인형처럼 애지중지하는 건 우리랑 캐나다뿐 아닙니까. 뱀파이어의 홈그라운드라 불리는 영국만 해도 성혈의 소유자가 기관장이 되는 것이 전통이고 직접 사냥을 나가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더군요. 성혈의 소유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이자 숙명, 그리고 명예로 여기면서요.”
“그건….”
리메인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키이스는 당연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들린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게 보였다.
“성혈이 에이전트가, 뱀파이어 헌터가 될 수 없는 ‘결격 사유’라면 그들은 뭐가 되죠? 그 사람들 앞에서도 그 피가 ‘결격 사유’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클리퍼드.”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반대를 하십니까. 제가 원하는 일입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됩니까.”
“성혈을 가진 사람의 숫자가 매우 적다는 것이 문제일세. 자네는 국가적 차원에서….”
“네. 보호를 하는 것이 원칙이죠. 하세요. 그건 안 말릴 거니까.”
“그래서 에이전트 일은 그만두라고 하는 거 아닌가.”
“그건 안 됩니다.”
“자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할 셈인가?”
“아니요. 기존의 성혈의 소유자와는 다른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3세가 가진 특수성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특수성?”
“알고 계실 텐데요? 저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각성을 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요.”
“…….”
“저는 뱀파이어에 물리고 난 직후 각성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제 생각에 제가 각성할 수 있었던 것은 에이전트로 일하며 뱀파이어라는 존재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매우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성혈로 각성한 사람이 갑작스레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간 예는 없습니다만, 제 케이스 자체가 워낙 특이하지 않습니까. 기관을 그만두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가 만일의 하나라도 제 피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책임은 누가 지고요.”
“자네가 말한 대로 그런 선례는 없네.”
“선례는 없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건 그쪽 일족에게만 전해지는 거라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기본적으로 성혈에로의 각성은 후보자의 정신 상태나 마음가짐, 가치관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그 전부가 각성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 하더군요. 실제로 저는 기관에 들어오기까지만 해도 뱀파이어가 인류에게 있어 그토록 위협적인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료를 봐도 그냥 그런가 보다, 많다 많다 해도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정도고 언론 통제 정도로 커버가 되는 정도라면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직접 발로 뛰며 뱀파이어들과 싸워보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은 진심 중의 진심이었다. 자신이 성혈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 피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 피를 무기 삼아 퇴치하고 있는 뱀파이어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각성하면 클리세딕을 가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레이첼이 더 이상 자신이 멸시받을까 걱정하고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주기적으로 피를 뽑아주는 거야 헌혈하는 셈 치면 되는 거라고 정말 가볍게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에이전트가 되고서야 성혈의 소유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 몸으로 직접 통감했습니다. 어째서 유럽의 ‘일족’들이 몸을 사리는 일 없이 직접 무기를 들고 뱀파이어를 사냥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주 철저하게 깨닫기도 했고요.”
“…….”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직접 나서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만히 안전한 곳에 앉아서 피만 뽑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성혈을 가진 자로서, 뱀파이어 퇴치는 책임이자 의무, 숙명이자 명예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에이전트로서 뱀파이어를 퇴치하며 살아갈 겁니다. 죽는 그날까지.”
나름 엄숙하게 명예 운운하며 선언했지만 속을 까뒤집어보면 반 이상이 새빨간 거짓말이다. 키이스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이자 의무로 여기고 있는 신경원을 도우려는 것이다. 그의 어깨에 무겁게 얹힌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짊어지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 신경원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고 싶었고 그 여유만이라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계속 반대하시고 불합리한 이유로 저를 억지로 기관에서 퇴출시킬 경우, 저는 저 혼자서라도 뱀파이어 퇴치에 나설 겁니다.”
“클리퍼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안 될 건 또 뭡니까. 우리나라에는 프리 헌터가 존재하지 않지만 유럽에는 꽤 많다죠? 자꾸 이러시면 아예 영국이나 프랑스로 가서 그쪽 기관에 몸을 의탁해버릴 겁니다.”
“뭐라고?”
“국가 차원에서 막으면 멕시코로 넘어가서 유럽 쪽으로 망명하죠 뭐. 프랑스 쪽은 수가 꽤 되지만 영국만 해도 현재 둘밖에 없는 걸로 압니다. 제가 망명하겠다고 하면 영국 정부는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다소 악화된다 해도 분명 제 망명 신청을 받아줄 거라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키이스는 영감탱이들을 협박할 때와 똑같은 수법을 썼다. 클리세딕이 키이스를 포기 못 하는 것처럼 기관도, 그 위의 정부도 새롭게 각성한 성혈의 소유자를 포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앞에 앉아 있는 세 남자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과연 뱀파이어와의 전쟁에 있어 수뇌부에 해당하는 사람들인지라 영감탱이들보다는 반응이 빠르다.
“…하지만 클리퍼드. 이 일은 너무 위험하단 말일세.”
“괜찮습니다. 제 파트너가 좀 많이 유능하거든요. 그의 곁에 있으면 적어도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치프?”
리메인 기관장이 저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예들린과 클린트를 돌아봤다. 예들린은 작게 한숨을 쉬며 신경원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주었다.
“저희 지부의 베테랑 에이전트입니다. 기관장님께서도 아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일 겁니다. 에이전트 신이라고, 콜 사인이 퍼스트죠.”
“아―! 그―.”
“퍼스트의 실력은 모두 인정하시죠? 그럼 쓸데없는 걱정은 좀 놓으셔도 될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영 걱정되시면 퍼스트를 제 고정 파트너로 만들어주시고 저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려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현직 에이전트에게 자네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하라고 말인가?”
“네. 퍼스트에게는 이중으로 짐을 지우게 되는 일이라 좀 그렇긴 하지만 그건 제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어쨌든 퍼스트는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는 제가 물리는 것도 직접 목격한 탓에 제가 성혈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를 보호하는 것이 뱀파이어 퇴치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에 해당하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현직 필드 에이전트입니다.”
“흐음.”
리메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들린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냐는 표정으로 키이스를 쏘아보았다. 키이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 눈빛을 태연하게 받았다.
신경원한테 리메인에게 요청한 것을 그대로 말하면 거짓말 안 보태고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명령을 받아들일 거다.
그걸 떠나서 신경원은 키이스를 보호하라는 명령 따위 받지 않아도 분명 키이스를 지키려 들 사람이다. 그가 성혈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키이스는 다시 샐샐거리기 시작했다.
우린 파트너란 말이야. 자신의 등을 믿고 맡기고 서로를 지켜주며 싸우는 파트너.
파트너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든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둘 다 통용이 되는 표현이지 않은가. 한 가지 의미만 담는 것보다 두 가지 의미를 담는 쪽이 서로를 연결해주고 있는 인연의 고리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리메인 기관장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겠다며 나가보라고 했다. 키이스는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러곤 당연하지만 곧장 신경원을 찾아갔다.
키이스는 트레이닝실의 구석 의자에 가로로 누워 있는 신경원을 발견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몸이 찌뿌둥하니 운동을 해야겠다고 그렇게 강력히 주장하더니만 운동은 개뿔, 자느라 정신이 없다.
도대체가, 눈을 뗄 수가 없단 말이야. 이런 ‘공공장소’에서 저 매끈한 허벅지를 홀라당 다 드러내놓고 자면 어쩌자는 거야!
게다가 분명 신경원은 어제 그의 품 안에서 아주 곤히 잘 잤다. 그런데 왜 또 저렇게 아무 데나 누워 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 불면증은 핑계고 그냥 잠이 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는 속으로는 투덜거리며 겉으로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신경원을 흔들어 깨웠다.
“퍼스트, 일어나요. 출근 시간 지났어요.”
“…려.”
“잘 땐 자더라도 사무실에 가서 의자에 앉아 주무시는 편이 좋을걸요? 안 그랬다가는 치프가 달려와서 또 퍼스트 뒤통수 후려칠 것 같은데 저 그거 진짜 싫단 말입니다.”
집요하게 어깨를 흔들자 신경원은 결국 눈을 떴다. 그는 키이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씨발’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꽤나 졸린 모양이었다.
“밤새 잘 주무셔놓고 웬 낮잠을 이렇게 주무세요.”
“…너……든?”
“네?”
“너 때문이라고.”
“……?”
“내 체력이 너 같은 줄 알…, 하아―. 관두자.”
신경원은 에고고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두들겼다. 그리고 비척비척 트레이닝실을 나갔다. 키이스는 뒤편을 살피며 누구든 신경원의 허벅지를 훔쳐보는 놈이 있다면 반드시 척살하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앞으로 트레이닝은 긴 거 입고 받으세요.”
“더워서 싫어.”
“싫다고 하시면 허벅지에 잔뜩 흔적 만들어둘 겁니다.”
“…….”
“허벅지로 안 끝날걸요? 팔 다리 손목까지 울긋불긋, 한 번 생기면 최소 일주일은 울혈이 지워지지 않게 아주 진~하게 만들어놓을 거예요. 의심되시면 한 번 시험해보세요.”
신경원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키이스를 돌아봤다. 키이스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어 민소매 셔츠만 걸치고 있는 신경원의 어깨를 덮어버렸다.
“돌았냐, 키이스?”
“아뇨. 제정신인데요.”
“제정신으로 그런 말이 나와?”
“제정신이니까 그 정도로 끝나는 거죠. 하지만 신이 자꾸 이러면 무슨 짓을 할지 저도 장담 못 해요.”
“맞고 그만할래, 안 맞고 그만할래?”
“아시잖아요.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셔도 계속 할 거예요.”
“키이스.”
“네.”
“너 성가셔.”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요?”
“아니, 엄청나게 성가셔. 절대 정상이 아니야.”
“그냥 참고 귀엽게 봐주세요. 앞으로는 계속 저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해나가야 하니까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뭐라고?”
키이스는 샐샐거리며 지부장실에서 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뒤쪽만 편집해서 들려줬다.
“원래 수습을 새 파트너로 맞으면 일이 년 후에는 바이바이라면서요. 그건 곤란하니까 머리 좀 썼죠. 퍼스트가 공식적으로도 계속 제 파트너가 될 수 있도록.”
신경원은 입을 떡 벌렸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다.
“기관장님은 생각 좀 해보시겠다고 했지만 분명 통과될 거예요. 그럼 국가공인으로 24시간 퍼스트 옆에 붙어 다닐 수 있어요. 잘했죠?”
“…….”
“아참. 조금 전에 레이첼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내일 오전이면 새 집 인테리어가 다 끝난다고 하더라고요. 퇴근하고 한숨 자고 일어나서 이사해요.”
키이스는 허리를 숙여 여전히 벌어져 있는 신경원의 입술 끝에 쪽―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키이스가 방긋 웃는 순간이었다. 신경원의 몸이 그의 눈앞에서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싶은 찰나 강렬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옆으로 기울었다. 카펫이 깔린 복도가 키스하자고 얼굴로 덤벼들었다. 부지불식간에 시전한 낙법으로 밋밋한 카펫과의 키스는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복부를 비롯해 온몸에 쏟아지기 시작한 신경원의 발길질은 절대 피할 수가 없었다.
“자고로 ‘북어’랑 ‘개새끼’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더니. 네가 딱 그 꼴이야!”
“으악― 아파요! 퍼스트! 아프― 윽. 악!”
“그래 어디 먼지 날 때까지 한 번 맞아봐. 그래도 계속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나 실전을 전제로 한 트레이닝을 하는 신경원은 러닝화가 아닌 전투용 부츠를 신고 있었다. 때문에 맨발로 얻어맞는 것과는 차원이 틀렸다. 키이스는 일전에 신경원이 자신을 얼마나 봐주며 팼는지 뒤늦게 몸으로 직접 깨닫기 시작했다.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키이스의 고함소리가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그들 중에는 키이스를 찾아 위층에서 내려온 예들린과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전할 말이 있다는 소리에 줄줄 그를 따라 내려온 유닛 Zero의 동료들도 있었다.
“우와, 완전 제대로 각 잡고 살벌하게 패는데?”
“무슨 일 있었나?”
“이유 없이 패는 건 아닐걸? 분명 강아지 새끼가 잘못했을 거야.”
“응. 전투용 부츠 신고 패는 걸 보면 분명해.”
예들린은 신경원이 살벌하게 키이스를 지르밟는 모습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놈의 말도 안 되는 드립에 뒤집어졌던 속이 시원하게 풀리고 있었다.
리메인 기관장은 일단 키이스를 뉴욕 지부의 에이전트로 계속 일하게 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키이스가 망명 운운까지 했기 때문에 결정이 뒤바뀔 가능성은 극히 희미했다. 키이스가 정말로 망명을 시도할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가능성이 제로가 아닌 이상은 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만간 국방부 쪽이나 어쩌면 화이트하우스 쪽에서 저놈을 찾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들린은 상대가 누가 되든 키이스의 태도나 답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혈의 소유자들은 성격은 제각각 다르지만 딱 하나 공통된 부분이 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죄다 안하무인이다.
과연 저 고삐도 안 달린 천방지축 애송이 녀석을 어떻게 제어해야 하나 고심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다.
그래. 패라, 패. 더 패!
예들린은 속으로 신경원을 부추겼다. 평소보다 좀 많이 살벌하고 섬뜩할 정도로 패고 있긴 하나 상대가 성혈의 소유자인 이상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은 몸 하나는 아주 튼튼했다.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내일이면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다.
“맞아도 계속 할 거라고? 그래. 어디 한 번 신나게 맞아봐. 아주 오뉴월에 개 패듯 패주마. 맞고 나서도 어디 똑같이 말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연속해서 퍼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인정사정없이 밟고 찬다. 그러면서도 뼈는 안 부러지게 아주 교묘하게 잘도 차댄다.
예들린은 신경원을 응원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키이스의 파트너로 영원히 붙여놓으리라 다짐을 했다. 신경원이 아니면 저 천방지축 안하무인인 자식을 제어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키이스는 자신의 바람을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완벽하게 달성했다.
“으악―. 퍼스트. 저 죽어요. 악―!”
키이스의 비명과 애원은 그로부터도 한참 동안 복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