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ide Story 2. (17/19)

Side Story 2. 

Try me boy 

「방해꾼들이 좀 있겠지만 오늘 하루 같이 있어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해주실 거죠? 아참, 저녁을 먹을 곳은 육질이 끝내주는 스테이크가 나오는 레스토랑이에요.」

신경원은 키이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번에도 또 고기에 넘어가버린 자신은 소고기님에 한해서는 정말 한 옴큼의 자존심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아버렸다. 더불어 애교 어린 어리광에도 약하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절실하게 깨달았다. 

에휴. 넘어가면 안 되는 거였는데.

키이스가 말한 대로 스테이크의 육질은 정말 끝내줬다. 필레 미뇽은 입에서 살살 녹았고 티본은 씹히는 맛이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입에 넣는 족족 잘도 넘어갔다. 하지만 위는 더부룩하고 답답한 것이 체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원은 시즈닝만 간단하게 된 티본 스테이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다. 그러자 나이 먹은 할배 군단과 하등의 쓸모도 없는 입씨름을 하던 키이스가 갑자기 대화를 뚝 끊어버리곤 신경원을 챙겼다.

“더 드시겠어요?”

신경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5명의 할배들이 ‘그만 좀 먹어!’라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하지만 이내 흠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키이스가 안광을 번쩍이며 그들을 둘러봤기 때문이다.

“립 아이도 괜찮아요. 그게 아니면 필레 미뇽으로 한 접시 더 하시는 건 어떠세요?”

눈가를 살짝 접으며 웃고 있는 키이스의 얼굴은 미추와는 상관없이 참 달콤하게 보였다. 할배들과는 180% 다른 얼굴인지라 더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불편한 자리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는 있었다. 자신을 볼 때면 저렇게 녹아내릴 듯 웃다가 할배들을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지만 진짜 재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게 말이다. 배트맨에 나오는 투페이스도 아니면서 어쩜 저렇게 휙휙 잘도 바뀌는지. 참 신기하다. 

“어떤 걸로 드실래요?”

신경원은 고민했다. 더 먹고 싶긴 한데, 과연 먹어도 되는 걸까? 더 먹었다가는 할배들 눈빛에 찔려 죽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도 쏘아보니 오기가 생긴다. 무엇보다 신경원은 아직 덜 먹어서 배가 고팠다. 

장례식장을 나와 곧바로 점심을 먹은 뒤부터 신경원은 내내 키이스에게 끌려 다녔다. 제일 처음에는 눈이 돌아갈 것같이 화려한 어느 명품 매장에 가서 옷을 샀다. 

키이스는 애교를 떨어대며 제발 입어달라고 애원했다. 왜 또 옷을 사주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장례식에 다녀온 복장으로 다니는 건 영 내키지 않아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뒤에는 의외의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거리를 좀 걸어 다니며 지난 이틀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신경원은 그제 두 번째 병문안을 가지 못했다. 수행비서라는 사람으로부터 키이스의 상태가 조금 나빠져서 면회가 불가능해졌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만나진 못했지만 키이스가 선물한 핸드폰으로 미안하다는 사과와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다음 날에도 메시지가 왔다. 워낙 특이 케이스라 받을 검사들이 많아서 도저히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lol이 적어도 100개쯤은 찍혀 있었다. 

어쨌든 키이스에 대한 걱정과 불안, 그리고 라미레즈의 일 때문에 우울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던 신경원은 키이스와 거리를 걷는 한가한 시간이 매우 좋았다. 다만 그 뒤로 계속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 보니 배가 등에 붙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니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일단 먹어야 했다. 소화가 좀 안 될지도 모르니 기왕이면 살살 녹는 걸로 먹자.

“필레 미뇽으로 둘.”

“네.”

키이스는 즉시 대기하고 있던 플로어 매니저를 불렀다. 그는 주문을 듣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요리를 두 접시나 먹어치운 신경원 때문에 후식을 못 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또 주요리를 추가해서 시키니 매니저가 당황할 만도 했다. 

노련한 매니저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는 정중하게 곧 서빙하겠다고 대답하고는 힐끔, 비어버린 와인잔을 체크했다. 그에 키이스가 매니저보다 더 빨리 물었다. 

“와인은요?”

“이 상태로 더 마시면 죽어.”

“그럼 탄산수는 어떠세요?”

신경원은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키이스는 구비된 탄산수의 종류를 묻고는 신경원이 잘 마시는 브랜드로 주문했다. 

신경원은 포크를 내려놓을까 말까 고민하다 접시 위에 남아 있는 사이드 디시를 쿡쿡 찔러 응징했다. 감히 소고기님을 영접하는데 아스파라거스 따위가 알짱거리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 

“키이스. 이러지 말고 자리를 좀 옮기면 어떤가. ‘손님’께서는 아직 식사를 하셔야 하니.”

처음 키이스가 신경원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부터 눈치를 주던 할배 넘버원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넘버원 할배의 파워가 제일 센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열자 나머지 할배들도 이때다 싶은지 입을 나불거렸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그러면 손님께서도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지 않겠니.”

“맞아. 우리 대화가 지루할 텐데.”

“지루한 게 문제가 아니죠.”

“식사 정도야 괜찮다 생각해서 허락했다만, 외부인에게 그룹의 사정을 이런 식으로 알리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키이스.”

할배 넘버원이 할 말은 해야겠다는 태도로 말하자마자 키이스의 입에서 풋―하고 웃음소리가 나왔다. 할배들의 눈썹이 제각각 춤을 췄다.

“외부인이라….”

“그래. 처음에는 손님이 계시니 참았다만 아무리 그래도 경우에 따른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너도, 네 손님도.”

“착각하시고 계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요, 마크 숙부님.”

“……?”

“숙부님들이 저를 만나주는 게 아니라, 제가 숙부님들이 사정사정하니까 만나드리고 있는 겁니다. 엄밀히 말해 손님은 숙부님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청객이죠.”

“키이스, 도대체….”

“기본적인 사항은 이미 레이첼에게서 연락을 받으셨을 텐데요? 그런데도―,”

“그게 어디 연락이냐. 통보지. 감히 우리에게….”

“감히라고 하셨습니까? 저한테?”

“아니, 네가 아니라 레이첼이―,”

키이스의 위협적인 말에 할배들이 찔끔했다. 어쩐지 고소했다.

“보내드린 공문에서 분명히 밝혔을 텐데요. 레이첼은 단순한 대변인이 아닙니다. 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니까요. 그러니 감히, 라는 말은 레이첼이 아니라 저한테 하신 게 됩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레이첼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거다. 그 아이가 경영에 소질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마크, 그런 이야기는 손님 앞에서 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일단 손님을 먼저 보내거나 자리부터 옮기자.”

“이런, 방금 드린 말씀도 잊은 걸 보니 치매라도 오나 봅니다? 손님은 신이 아니라 숙부님들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요.”

“키이스!”

“저는 제발 만나달라고,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애걸복걸하셔서 신과 데이트를 하는 중인데도 ‘아주 잠깐’ 시간을 내드린 것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데이트?”

“데이트라고?”

순간 다섯 할배의 시선이 신경원에게 파바박 꽂혔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쿨럭 하고 기침을 해버렸다. 

이 강아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부지불식간에 아우팅을 당해버렸다. 거기에, …뭐라고 했더라?

“키이스.”

“네.”

“이거… 데이트였냐?”

“식사하고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도 하고 저녁도 같이 먹는데 그럼 데이트가 아닌가요? 뭐 불청객이라는 쓸모없는 옵션이 달린 데이트라 좀 그렇지만 그래도 데이트는 데이트죠.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면 벌써 사흘째인데 제대로 된 데이트도 한 번 못 해보고 복귀하면 억울할 거 같아서요. 그래서 불청객이 좀 있더라도 강행하자! 라고 생각한 거죠. 불청객들 때문에 기분 나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네? 얼른 보낼게요.”

신경원은 가만히 듣고 있다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사흘째냐?”

“사귀기로 한 지 사흘째요.”

“우리가 언제 사귀기로 한 거지?”

“헉―! 저 속은 거예요? 신이 저 없으면 못 산다고 고백하고 사랑한다고, ―윽!”

신경원은 더 참지 않고 구둣발로 키이스의 발을 콱, 찍어버렸다. 

“아프잖아요, 신.”

“더 나불거리면 발로는 안 끝나.”

신경원은 딱 잘라 말하고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게 서빙된 스테이크에 포크를 콱 찍었다. 성질 같아선 키이스의 손에다 콱 찍어버리고 싶었는데 많이 봐줬다. 

솔직히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는 건 정말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그나마 통성명도 하지 않았고 대화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기에 고기에만 집중할 수 있어 참고 먹었을 뿐이다. 하지만 불청객들 앞에서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나불대는 건 참아주기 힘들다. 쪽팔려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신경원은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하나를 다 먹어치울 무렵 키이스가 멋대로 아우팅을 해버린 것이 생각났다. 뭐라 말을 했어야 했는데 보는 눈이 많아 제대로 말을 못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더불어 얼굴 가죽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아서 환장하시겠다. 두 번은 안 볼 것 같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 무슨 개 쪽 팔리는 일이란 말인가.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하세요. 이후로는 절대 숙부님들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망발이냐.”

“망발이고 나발이고 하고 싶은 말만 딱 하시라니까요. 들어드린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하지만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싫으시면 말고요.”

고오오~하고 할배들한테서 분노의 아우라가 뿜어 나왔다. 그래도 점잔을 빼느라 큰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일단, 레이첼에게 위임한 권한과 직책부터 거두어들이면 좋겠다.”

“그래. 그런 건 마크에게 맡겨야지 나이 어린 레이첼로는 감당하기 힘든 자리다.”

“그리고 당장 지금 하는 일, 그만둬. 그룹의 총수가 될 사람이 밖으로 나도는 거 보기 좋지 않고 남부끄럽다.”

“하루라도 빨리 본사로 와서 경영 수업을 받도록 해.”

“원한다면 계열사 몇 개는 직접 경영해도 좋다. 본사는 우리가 힘을 모아보마.”

“하실 말은 그게 답니까?”

“더 있지만 일단 중요한 건만 말한 거다.”

“그럼 저도 대답해드리죠. 전부 불가합니다.”

“키이스, 아무리 네가 성…, 이런.”

“신도 알고 있으니 굳이 말을 가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신중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중요한 사항을 함부로 외부인에게 발설을 해! 제정신이냐, 키이스? 그건 국가 기밀이다!”

“발설한 적 없습니다. 신은 그냥 현장을 목격 한 거라서 말이죠.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은 생각 없고요, 말씀하신 것은 전부 불가하니 디저트나 드시고 돌아가시죠.”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게다가 데이트라니, 지금 우리 앞에서 커밍아웃이라도 할 셈이냐?”

“이미 했는데 할 셈은 뭐가 셈입니까.”

“세상에! 네 약혼자는 어쩌고!”

순간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식기를 놓쳐버렸다. 쨍그랑 소리가 프라이빗 룸을 크게 울렸다. 하지만 할배들은 그걸로 끝내줄 생각이 없었는지 2차 공격을 감행했다. 

“로버트, 뭐 어떤가. 애인 하나 정도는 그냥 눈감고 넘어가주자고.”

씨발, 먹던 게 다 넘어올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로 먹던 게 다 넘어올 것 같았다. 

“신, 신경 쓰지 마세요. 다 헛소리니까. 전 약혼자가 있는 줄도 몰랐고 누군지도 몰라요.”

키이스가 급히 상황을 수습하려 한다. 신경원은 차가운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신. 정말로 아무런 걱정도 안 하셔도 돼요.”

이걸 확 그냥 죽여버릴까. 

신경원은 접시 위에 떨어뜨린 나이프를 다시 잡았다. 그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기분이 정말 거지같았다. 배신감 같은 걸 느낀 건 아니다. 키이스의 고백은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고 자신의 고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저….

신경원은 더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직각으로 내려찍었다. 

쾅―!

큰 소리가 나며 단단하기 그지없는 고가의 접시가 두 동강났다. 아까운 소고기님이 데굴데굴, 식탁 위를 굴렀다. 아스파라거스와 버섯 따위야 구르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리고 망할 할배들은 저 아스파라거스와 버섯보다 못하다. 

“키이스.”

“네.”

“상황 정리해. 30분, 아니 한 시간 주지.”

“네. 알겠습니다. 어, 어디 가세요?”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 체할 것 같아.”

“하지만….”

“정리해.”

신경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레스토랑 직원이 황급히 외투를 갖다주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외투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의 레스토랑인지라 밖은 조용했다. 신경원은 성질을 내며 푹신한 양탄자 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약혼자 정도는 있는 게 당연하지. 자그마치 클리세딕의 오너가인데 없는 게 이상하겠지. 응. 그런 걸 거야.

레이첼도 태어나자마자 상대가 정해졌다고 들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결혼을 했을 정도니 키이스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을 거다. 본인은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얼굴도 모르는 거겠지. 그러니 화 같은 건 안….

신경원은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벽을 주먹으로 쳐버렸다. 겨우 그따위 소리를 듣고 화가 났다는 사실 자체가 더 기분 나쁘다. 

망할 할배들! 그놈의 집안사람들은 어째서 다 저 모양 저 꼴이냐고!

“씨발―.”

입에서 욕설이 절로 튀어 나왔다. 성질난다고 그 맛있는 필레 미뇽을 포기하고 나오다니, 미친 모양이다. 그리고….

“소고기님보다 강아지 새끼가 더 중요하다니, 말이 돼?”

신경원은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제가 한 질문에 Yes라는 대답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우.”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에 신경원은 마구 도리질을 쳤다. 그때마다 달아오른 얼굴에서 열이 푹푹 뿜어져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그의 얼굴은 당장에 껍질을 까서 깨물어 먹어도 될 만큼 아주 푹~ 잘 익어 있었다.

* * *

키이스는 미간에 인상을 쓴 채로 앞에서 악다구니처럼 떠들어대는 영감탱이들을 바라보았다. 신경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낸 그들은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빼앗길까 봐 가시를 잔뜩 세운 채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모르지 않는다. 형들과는 달리 이제 겨우 24살의 어린 나이인데다 경영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고 밖으로만 돈 천방지축 애송이로 보일 거다. 

애석하지만 그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키이스는 경영 관련 수업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전 회장이 사람을 붙여 가르치려 들었지만 고집스레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시간을 보냈더니 얼마 안 가 포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때 그쪽으로 유명한 학교로 보내려 했지만 레이첼의 도움을 받아 웨스트포인트로 가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키이스도 좋으나 싫으나 클리퍼드가의 핏줄이었다. 10살 때부터 살았던 저택에는 언제나 그룹의 중역들이 드나들었다. 당연히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본의 아니게 보고 들으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혼하고 본가로 돌아와 있던 레이첼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재미 삼아 키이스에게 이것저것 가르쳤다. 또한 성인이 되며 사전 증여된 재산 관리는 모두 레이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기본은 알아야 한다며 포인트 레슨을 해줬다. 덕분에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도 ‘보는 눈’ 정도는 생겼다. 

레이첼은 위의 두 형제보다 훨씬 더 상재에 밝고 뛰어난 사람이다. 전 회장도 그것을 알기에 일찌감치 클리세딕 인더스트리를 그녀에게 맡긴 것이다. 규모는 좀 작을지 몰라도 조나단과 네이선이 경영하고 있는 계열사들보다 훨씬 더 알짜배기 회사였다. 그리고 그녀는 10년에 걸쳐 ‘작은’ 회사를 서부 지역을 주름잡는 커다란 회사로 키워냈다. 

솔직히 앞에 앉아 있는 숙부들도 하나같이 걸출한 인재긴 했다. 하지만 키이스가 알기로는 그들의 자식들 중 레이첼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이기에 그런 게 아니다. 그녀의 능력을 잘 알고 있고 그녀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숙부들도 그것을 알기에 이렇게나 레이첼을 경계하는 거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의 파이가 작아질까 봐,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자신의 대에서 사라질까 봐 말이다. 

키이스는 각성하기 이전에도 그룹의 일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에겐 할 일이 따로 있다. 바로 신경원의 곁에 있는 거다. 그것 이외에는 솔직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키이스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필요하다 싶은 말들만 몇 개 주워 담았다. 그는 힐끔 손목의 시계를 봤다. 신경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지 정확히 46분이 지나 있었다. 슬슬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숙부들에게 충분히 예의를 차린 게 아닌가 싶었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예의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말라는 레이첼의 가르침 때문이다. 자신 때문에 레이첼이 욕먹는 게 싫어서 기를 쓰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니 그게 몸에 배어 자동반사로 어떠한 순간에도 예의를 지키게 돼버렸다. 가끔은 이렇게,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말이다. 

웃는 얼굴을 하니 영감탱이들의 기세가 더더욱 올랐다. 키이스를 만만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룹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갖가지 이야기를 하며 그 안에 교묘하게 키이스를 깎아내리는 말을 담아 그에게 던지고 있었다. 요약하면 이거다. 

‘너와 레이첼은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 나이도 너무 어리다. 그러니 우리에게 맡겨라. 우리가 널 도와주겠다.’

영감탱이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조나단과 네이선 쪽이 이들보다는 훨씬 더 머리가 좋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현실을, 그리고 클리퍼드가의 특수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욕설을 퍼붓고 숨길 수 없는 지독한 반감을 품고 있음에도 자신의 말 몇 마디에 알아서 자존심을 접으며 꼬리를 말고 물러났던 것이다. 

“넌 아직 어려서 생각이 짧을 수밖에 없다. 다 이해해.”

“그러니 키이스, 레이첼의 치맛자락에 휘감겨서는 안 되는 거다.”

“이 정도면 키이스도 이해했을 겁니다.”

46분, 아니 거의 50분간 릴레이로 떠들어댄 영감탱이들이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거라 자위하는 꼴을 봐라. 제 머리를 과신하니 이 모양이다. 혹은 ‘애송이 총수’ 정도는 손쉽게 손안에 넣고 굴릴 수 있을 거라 보는 걸 수도 있다. 

신경원이 준 시간은 한 시간이다.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겠다. 

“숙부님들. 하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래. 그래야지.”

“하지만 제 대답은 그대롭니다. 거부하겠습니다.”

“키이스!”

“네가 이렇게까지 아둔할 줄은 몰랐구나.”

“말조심하세요, 레이놀즈 숙부님.”

“뭐라고?”

“숙부님들 앞에 있는 사람은 클리세딕의 ‘차기 총수’가 아니라 ‘현 총수’입니다. 예의를 지키셔야죠.”

“……!”

“잊으셨습니까? 어떠한 경우에서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각성’하는 자가 나왔을 시, 클리퍼드가의 모든 것은 각성한 사람의 것이 된다는 걸요. 전 회장님께서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전 회장님은 숙부님들과 똑같은 ‘일반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각성한 순간부터 클리퍼드의 모든 것은 제 것이 된 겁니다. 숙부님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동으로요.”

“그게 우리 가문의 오래된 전통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다고 하더냐. 하지만 전통은 전통일 뿐,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해야….”

“마크 숙부님은 클리퍼드가의 기반이자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나 보군요.”

“키이스!”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법이니 따를 수 없다고 하시면…, 그래요. 관두죠, 뭐.”

“뭐라고?”

“음, 어디가 좋을까요?”

키이스는 과거 성혈의 소유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클리퍼드가와 같은 처지에 처해 있는 가문들을 줄줄 읊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디스 그룹이 좋겠네요. 그쪽도 30년 넘게 손가락만 빨고 있었으니 찾아가서 양자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왜 말이 안 됩니까? 언질만 살짝 해줘도 그룹의 전 재산을 가져다 바치며 제발 이디스가 되어달라고 애걸복걸할 텐데요.”

“넌 클리퍼드다!”

“그 클리퍼드가 절 총수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하는 소립니다.”

“우리가 언제 널 총수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했더냐? 우리가 한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라,”

키이스는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숙부님들 전부, 제가 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귀담아 듣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분명히 말했습니다. 거부한다고. 그런데도 계속 같은 말씀만 반복하고 또 반복하셨어요. 그건 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

“딱 한 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둘 중에 선택하세요. 제게 복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후자를 선택하신다면 저는 클리퍼드가를 떠나겠습니다.”

“키이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게는 클리퍼드에 대한 애정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이유는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클리퍼드에 레이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레이첼에게 감사하세요. 그녀가 없었다면 저는 각성한 즉시 미련 없이 클리퍼드를 떠났을 테니까. 이건 협박도 아니고 위협도 아닙니다. 진실 그 자체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영감탱이들의 안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이니 손안에 넣고 주무를 수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조나단과 네이선보다 머리가 나쁘다. 

“자꾸 현실현실 하시니 저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클리퍼드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저 같은 사람이 클리퍼드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레이첼과 함께 클리퍼드를 버리고 나가 다른 이름으로 홀로서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나라 전체를 통틀어 한 대에 기껏해야 대여섯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바로 성혈의 소유자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술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그 수를 늘려보려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어떠한 시도에도 그 수는 결코 늘지 않았다. 때문에 성혈의 소유자는, 혹은 그 핏줄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고 보호를 받는다. 그들이 없으면 국가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것도 일단 ‘사람’이라고 하는 구성원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까. 너무 지나치게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진실이요 진리다.

“클리퍼드가에 주어지고 있는 모든 이권은 제가 클리퍼드를 공식적으로 떠나는 그 순간부터 거두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건 모두 제게 고스란히 주어질 테고요.”

그 한마디에 영감탱이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위협도 협박도 아니라고 했지만 이건 명백한 협박이요, 위협이다.

“그동안 축적해놓은 것이 있으니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숙부님들의 자식들 대를 넘어갈 때쯤이면 먹고살기 꽤 힘들어질 거라는 건 충분히 예측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혈의 소유자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그들이 없어지는 순간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들을 통해 얻은 부와 명예는 그들이 있어야만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전 회장이 그토록 제 피를 이은 성혈의 소유자를 원한 것이고 그 때문에 인륜을 거스르는 짓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사자인 키이스로서는 그렇게까지 해서 ‘가문’의 부와 명예를 이어나가려 하는 회장의 집착을 ‘옳다’고 인정해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선택은 숙부님들 아니, 여러분들의 자유에 맡기겠습니다. 아, 꼭 의견통일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를 인정하시겠다는 분이 계시면 오늘 일은 잊고 아주 너그럽게 ‘용서’해드릴 요량이니까요.”

굳어버린 영감탱이들의 얼굴을 보고 키이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그냥 깡패 짓, 혹은 날강도 짓이나 다름없다. 각성해서 성혈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거대 그룹을 날로 삼키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로 클리퍼드를 버리고 레이첼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가 전력을 다해 클리퍼드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 신경원의 곁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이 정도로 끝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명예와 부라는 것은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으면 편하니까 챙겨두자는 심보다.

키이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숙부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그들 중 둘은 벌써부터 키이스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며 잘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가뿐한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나갔다. 

로비로 내려온 그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레스토랑을 나오며 신경원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로비라는 말만 하고 바로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는 초조하게 로비를 맴돌았다. 아래로 내려오기만 하면 금방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웬걸 신경원의 그림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깔끔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호텔리어에게 물어야 했다. 

“짙은 남색의 슈트를 입은 동양인 남자 못 보셨습니까? 키는 6피트 정도고 좀 말랐는데, 1시간 전쯤 내려왔을 텐데요.”

“아, 30분 전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셨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호텔리어는 잽싸게 프런트로 가서 키이스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동료에게 뭔가 말을 했다. 잠시 후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키이스에게 신경원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본 사람이 있는 건지 아니면 호텔 내부의 CCTV 영상이라도 뒤진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그거면 된다. 

신경원은 구석진 곳에 있었다. 여자 화장실 근처의 소파로 인테리어 때문에 로비 한가운데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구석에 틀어박히는 버릇은 없었던 것 같은데 좀 의외였다. 

키이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경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중간에 저도 모르게 멈추어 서고 말았다. 신경원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표정은 험악했으며 입술은 또 얼마나 깨물었는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눈 밑의 그늘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건 또 어디서 사 들고 와서 노려보고 있는 건데.

신경원의 두 손에는 예의 동그란 사과 주스 병이 들려 있었다. 30분 전쯤 나갔다 들어왔다더니 저걸 사러 나갔었던 모양이다. 저걸 보고 있다는 건 기분이 저조하거나 우울하거나 혹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 번째는 아닌 것 같았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기분이 나빠질 일은 없었으니까. 

아니, 그렇지도 않지. 그땐 별 생각 없었지만 내가 멋대로 영감탱이들 앞에서 커밍아웃을 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신경원은 그것 자체에 대해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사귀자는 말을 안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는 건 다른 이유로 기분이 저조하거나 우울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영감탱이들이 한 말 중에는 신경원에게 상처가 될 말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아―.”

키이스는 한숨을 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이상 고민해봐야 답은 안 나온다. 이럴 땐 본인에게 묻는 게 최고가 아닐까?

“신. 많이 기다리셨죠?”

그는 허리에 손을 짚고는 상체를 숙여 신경원과 시선을 맞추었다. 초점이 흐려져 있던 진한 갈색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죄송해요.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나중에 또 귀찮게 할 사람들이라 신이 준 시간을 그만 다 써버렸어요.”

“…괜찮아.”

“로비에 계시다고 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데 계실 줄은 몰랐네요.”

“전화 걸면 되잖아.”

“아―!”

제 자신의 멍청함에 뒤통수를 처맞은 기분이 된 키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사 신경원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소리가 울리니 금방 찾아낼 수 있었을 거다. 키이스는 제 어리석음을 탓했다.

“정리는 잘했어?”

“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두 명은 이미 넘어온 것 같으니 잘될 것 같아요.”

“흐음.”

“일단 해명부터 하고 싶은데 해도 되나요?”

“…….”

무언을 긍정의 답으로 받아들인 키이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신경원의 옆에 앉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약혼자 같은 거 전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몰랐다는 것이 면죄부가 되진 않을 테지만 정말 아는 게 없어요. 아마 제가 각성을 하니 바로 그 일족 중 하나를 제멋대로 골라놓은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전 인정하지 않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앞으로는 절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낼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이제 클리퍼드에서 제 말에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요.”

“클리세딕 그룹의 총수가 되니까?”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이에요. 각성한 순간 그렇게 되게 되어 있거든요. 오랜만의 일이라 영감탱이들이 잊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다들 한소리 하러 온 거고요.”

“제 밥그릇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서였겠지.”

“네, 정확합니다. 거기에 하나 더, 본가의 밥그릇을 넘보러 온 거예요. 제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으니까. 어쨌든 듣기 싫은 소리 듣게 해서 죄송해요. 뻔히 알면서… 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서 제가 고집을 부렸어요.”

“그건 괜찮아. 그런데… 이제 기관은 그만두게… 되는 건가?”

“음? 아니요. 제가 왜 기관을 그만둬요. 전 신의 옆에 있어야 하는데. 아~, 설마 그게 걱정돼서 그러고 계셨던 거예요?”

“……?”

“손에 들고 계신 거요. 기분이 저조하거나 우울할 때 그걸 들고 계신다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틀렸나요?”

“반 정도만.”

“나머지 반은요?”

질문을 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곤 손에 쥔 사과 주스 병만 본다. 어쩌면 신경원은 자신이 그의 곁에 계속 있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것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었기를 바란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랑받고 있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제가 혹여나 신의 곁을 떠나게 될까 봐… 걱정하셨어요?”

“…….”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룹의 일은 이미 전부 레이첼에게 맡겼어요. 그때 레이첼이 제일 먼저 왔었는데 불청객들이 찾아오기 전에 이미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거든요. 레이첼은 기꺼이 수락했고요. 전 앞으로 그냥 제가 하고픈 일만 하며 살 거예요.”

키이스는 자신이 하고픈 일은 신경원의 곁에 있는 것뿐이라며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경원은 저항하지 않고 키이스에게 살짝 기댔다. 

아침에 국립묘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키이스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멋대로 이렇게 안아도 피하지 않고 되레 살포시 기대오는 게 신경원이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경계하며 손도 못 대게 하던 길고양이가 드디어 길들여져 품 안에 얌전히 쏙 안길 때의 느낌이랄까….

“레이첼이 말이죠, 그런 쪽으로는 의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욕심이 많아요. 그룹 전체를 맡길 거라고 하니 의욕에 가득 차가지고는 벌써부터 여기저기 펄펄 날아다니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덕분에 불안감에 가득 찬 영감탱이들이 우르르 몰려오게 만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래도 괜찮은 거야?”

“네?”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냐고. 아까 그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가 경영에 뛰어드는 쪽을 원하는 것 같던데.”

“원한다기보다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거죠. 클리세딕이라는 게 밖에 알려진 것보다 덩치가 굉장히, 훨씬 더 크거든요.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 그런 걸 가볍게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요.”

신경원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 제가 경영을 직접 하거나 말거나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

키이스는 고개를 숙여 신경원의 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댄 채 소곤소곤 말했다. 

“제가 성혈의 소유자인 이상 클리세딕은 무조건 제 것이거든요.”

그는 성혈에 대한 것은 특급 국가 기밀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 데서나 발설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한 후에야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다른 나라 사정은 좀 다르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각성한 사람은 무조건 국가에서 관리하고 보호해줘요. 원하기만 하면 일평생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놀 수 있고 당사자가 원하면 그뿐 아니라 그에 딸린 식구들에게까지 별의별 혜택을 다 주거든요. 예를 하나 들면 각성한 사람이 속한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가 국가에서 주도하는 사업에 입찰을 했다고 쳐요. 그 경우 국가에서는 무조건 각성한 사람이 속한 회사를 선택해요.”

“왜 그렇게까지 하지?”

“반은 일평생 주기적으로 그의 피를 받아 가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제공하는 거고 나머지 반은…, 타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죠. 어지간한 돈으로는 흔들리지 않도록,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아무도, 무엇으로도 그들을 좌지우지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클리세딕이 현재의 성세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전 회장을 제외하면 대대로, 가주이자 총수가 각성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고요.”

“…….”

“만일 제가 클리퍼드라는 성을 버리고 클리세딕을 떠나면 그 순간 클리세딕에게 주어지던 모든 혜택이 사라지게 돼요. 그리고 그건 온전히 저 한 사람에게 주어지죠. 그러니 클리세딕은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절대로 절 포기하지 못해요.”

키이스는 자신은 클리세딕이라는 작은 나라의 절대군주와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영감탱이들이 제가 나이가 어리다고 좀 주물러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어림도 없죠. 저는 제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계속 말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신경원은 가만히 있다 시간차를 조금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규모가 규모니 만큼 한동안은 절 귀찮게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더 이상 불청객이 찾아올 일은 없어요. 아참, 영감탱이들 때문에 식사 제대로 못 하셨죠? 길 건너에도 괜찮은 식당이 있는데 가실래요?”

“아니.”

“그럼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갈까요? 술도 좋고. 아, 술은 안 되려나요?”

키이스가 내일은 근무를 해야 하니 가볍게 맥주는 어떠냐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신경원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졸려.”

“…….”

“그날 너를 만나고 와서… 다음 날도 널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었잖아.”

“죄송해요.”

“그다음 날도 불가능했고….”

“…….”

“그래서 이틀 동안 아니, 오늘 아침까지 한숨도 못 잤어.” 

“그럼 바로 본부로 돌아갈까요?”

“아니.”

신경원은 그렇게 말하며 제 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키이스에게 건넸다.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이 호텔의 카드 키였다.

“지금 당장, 자야겠어.”

신경원은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찾아갔다. 키이스는 카드 키를 꼭 쥔 채 그를 따라갔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신경원의 뒤에 선 그는 팔을 뻗어 신경원을 끌어안았다. 

“제가 없어서 한숨도 못 주무신 거예요?”

신경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스는 그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았다. 이런 장소만 아니라면 신경원을 번쩍 안아 들고 환호성을 질러버렸을 거다. 체면이고 뭐고 그냥 확 안고 정말로 방방 뛰어볼까 하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스위트룸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 시즌이 시즌이라 이거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 거 안 해요.”

룸이 없다고 해도 클리퍼드라는 이름을 대면 당장에 최고 등급의 룸이 제공되었을 거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신경원과 단둘이 있을 수만 있다면.

엘리베이터 안에는 단둘뿐이었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 키이스는 신경원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하얀 드레스 셔츠 위로 드러나 있는 밀빛 목덜미에 입술을 꼭 붙였다. 살짝 깨물고 빨았더니 신경원이 어깨를 움찔했다. 

“싫으세요?”

“…아니.”

고무된 키이스가 목덜미를 본격적으로 빨아볼까 하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스위트가 아니라더니 과연 몇 층 올라오지도 않았다. 신경원은 룸 넘버를 기억하고 있는지 묵묵히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키이스는 그를 부지런히 따라가며 틈만 나면 귀며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신경원은 저항하지 않았다. 

마침내 신경원이 빌린 룸 앞에 당도했다. 그는 문을 열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기계가 카드 키를 인식하는 시간은 순간이었으나 몇 시간 아니, 며칠은 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키이스는 문의 록이 풀리자마자 신경원의 손목을 잡아채고 안으로 들어갔다. 룸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큰 룸인지 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곧장 신경원을 문 쪽으로 몰아붙이곤 입술을 겹쳤다. 귓가에 삐리릭―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사과 주스 병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의 입술은 메말라 있었다. 다만 얼마나 깨물어댔는지 조금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신경원의 사정을 봐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집어삼킬 듯 신경원의 입술을 덮쳤다. 신경원이 들이마시는 숨도, 내쉬는 숨도 모조리 가지고 싶었다. 

저항 없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내맡기듯 몸에 힘을 푸는 게 느껴지니 온 세상이 자신의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미친 듯이 신경원에게 매달렸다. 입안 전체를 혀끝으로 훑고 제 것에 감겨오는 혀를 강하게 빨았다. 그것만으로도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입술에서 입을 떼는 순간 신경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키이,”

겨우 이렇게 단둘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거부를 한다. 키이스는 심술이 나서 여린 살갗을 깨물어버렸다. 

“읏―.”

신경원은 신음을 흘리며 두 팔로 키이스를 밀어냈다. 키이스는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며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신경원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기다리…라니까.”

“못 기다려요.”

“나 피곤해.”

기가 막힌 말에 키이스는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손만 잡고 자자고요?”

“싫어?”

신경원의 눈에 불만이 어린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윽―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신경원은 키이스를 문가에 두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룸은 정말로 평범한 스탠더드 클래스였다. 스탠더드라도 호텔 자체가 5성인지라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지만 전체 크기는 키이스가 머물고 있던 호텔의 드레스 룸보다도 작았다. 

키이스는 쳇―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사과 주스 병을 집어 들고는 침대 옆에 있는 1인용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경원은 그의 앞에서 보란 듯 슈트를 벗기 시작했다. 

이건 뭐 먹이를 앞에 두고 ‘기다려’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는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이틀이나 자지 못해 눈 밑까지 시커메져 있는 사람을 무작정 덮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다분하다 못해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차마 할 수가 없다. 

“신.”

키이스는 어느새 속옷까지 벗어 던져 나신으로 서 있는 신경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함부로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러지 마세요.”

“한두 번 봤냐.”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거든요?”

“됐거든? 샤워하고 나올 테니 할 일 없으면 TV라도 보고 있어.”

신경원은 사과 주스 병을 힐끔 쳐다보고는 어메니티가 놓여 있는 화장대에서 TV 리모컨을 집어 키이스에게 던졌다. 그러곤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문을 닫기 전 얼굴만 쏙 내밀고는 키이스에게 경고했다.

“도망가지 마.”

“안 가요!”

키이스는 끄응 소리를 내며 턱을 괬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여러모로 지옥을 맛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온 미지근한 물이 얼굴을 때렸다. 어느새 달아오른 몸에 떨어지는 물은 제 온도보다 시원하게 느껴진다. 

신경원은 샤워기 아래 가만히 서서 제 몸을 타고 줄줄 흐르는 물줄기를 내려다봤다. 심하진 않지만 울퉁불퉁 각이 져 있는 몸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호텔의 룸을 잡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프런트에 가 있었고 호텔 룸 키와 신용카드를 함께 돌려받고 있었다. 

미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호텔을 뛰쳐나갔었다. 코트 자락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무척이나 찼다.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 손에 쥐고 있던 사과 주스 병은 더더욱 찼다. 

사과 주스 병을 손에 들고 있으면 진정이 될 줄 알았다. 머리가 아무리 복잡한 일이 있어도 그걸 보면 항상 고요하게, 순식간에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키이스에 대한 일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와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어’라는 마음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뇌를 두 개로 갈라 각기 한쪽씩 차지하고 서로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싸워대는 것 같기도 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생각하고 다시 단어로 내뱉으며 신경원은 고개를 저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젠장.”

젖은 손으로 벽을 치자 철썩 소리가 났다. 머릿속이 시끄러운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이스의 말을 믿는다. 하지만,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건드리지 마, 이건 내 강아지야.

그 순간 망할 할배들에게 외쳐주고 싶었다. 왜 가만히 있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신경원은 답답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거친 못이 박인 손이 젖은 가슴을 긁어댔다. 하지만 답답함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키이스가 왜 그리 대놓고 티를 내며 주변에 으르렁거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는 계속 불안했던 거다. 자신이 그러하듯이.

단 한 번도 사내자식에게 시선을 준 적은 없었다. 편안한 수면을 위해 만났던 것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키이스는 게이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그도 자신을 만나기 전에는 ‘여자’를 좋아하던 평범한 남자였다는 소리다. 

“저 멍청한 새끼는 강아지지 종마가 아니라고.”

입안으로 스며드는 물과 함께 강한 불만이 담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각성이니 성혈이니 그런 거창한 것들을 전부 제외하더라도 키이스라는 사람은 초재벌가의 아들이다. 부자들의 생리 따위는 잘 모르지만 상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키이스는 아마도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되었을 거다. 

“씨발―.”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 때문에 이렇게 머릿속이 소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특정 지을 수 없는 ‘약혼녀’라는 여자 때문에 그토록 눈앞이 새빨개질 줄도 전혀 몰랐다. 

저건 내 거야. 내 거라고.

그래, 바로 그것 때문에 정신없이 달려가 이 룸을 잡았다. 키이스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자신이 없어진다. 

이걸로 되는 걸까? 정말로, 키이스는… 나를….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으니 될지 안 될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왠지 자신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키이스는 어떨지 모르겠다. 틈만 나면 입술을 부딪쳐오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서로 벌거벗고 마주 서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모르겠다. 

신경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면 해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경원은 사정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벗어나 욕조를 나왔다. 물이 뚝뚝, 타일 바닥 위로 떨어졌다. 

신경원은 닫아놓았던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이 들고 있던 사과 주스 병을 손에서 손으로 던지고 있었다. 

“키이스.”

“네?”

“그거 냉장고에 넣고 들어와.”

“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손에 들고 있는 거 냉장고에 넣어놓고 욕실로 들어오라고.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소리야. 씻고 바로 잘 거니까.”

“신, 그런 말씀 하시면 곤란해요.”

“…뭐가.”

“지금 전 24년 인생에 최고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유혹하지 마세요.”

키이스는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제발 봐달라고 애원했다. 신경원은 턱을 들어 올렸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뺨과 턱을 지나 목덜미를 타고 주르륵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키이스의 대답을 듣자 조금 자신이 생겼다. 

“들어와. 당장.”

키이스의 푸른 눈동자가 단번에 크게 확대되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경원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그 순간 키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슈트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의 손에 있던 사과 주스 병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소파 밑으로 굴러갔다. 

하얀 뚜껑이 소파 밑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키이스가 그 상태 그대로 욕실로 달려들었다. 욕실의 문을 닫을 틈도 없었다. 

넓은 어깨와 긴 팔이 신경원의 몸을 사로잡았다. 끌어안고 무작정 입술을 겹친다. 신경원은 손을 들어 반듯하게 매듭지어져 있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젖은 손가락에 걸린 넥타이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벗어봐.”

잠깐 입술이 떨어진 사이 명령을 하자 키이스는 황급히 제 목에서 넥타이를 뽑아내고는 앞이 젖어버린 드레스 셔츠를 좌우로 잡아 당겼다. 조그만 단추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반라가 된 키이스가 다시 신경원에게 달려들었다. 신경원은 그의 벨트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렸다. 무거운 벨트가 달린 바지는 후두둑 소리를 내며 곧장 바닥에 떨어졌다. 

“신, 신….”

눈과 뺨, 코, 그리고 목에 사정없이 입술이 부딪쳐왔다. 상반신 전체에 가해지는 묵직한 무게에 신경원은 조금씩 뒤로 밀려갔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다시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매끄러워진 피부에 길고 하얀 손가락이 감겼다. 등에서부터 허리로 커다란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바닥이 둔부에 닿자 긴 손가락이 그것을 꽉 쥐었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반듯하게 뻗은 쇄골이 입술에 닿았다. 신경원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꽈악 깨물어버렸다. 작은 신음소리가 물줄기 소리를 뚫고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이건 반칙이라고요, 신.”

“그래서 싫어?”

“아니요. 돌아버릴 정도로 좋아요.”

신경원은 키이스의 중심을 덮고 있는 드로우즈로 손을 뻗었다.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드로우즈가 신경에 거슬렸다. 신경원은 드로우즈를 거칠게 끌어내리고는 짙은 금색의 음모에 감싸여 있는 성기를 살며시 부여잡았다. 그것은 반쯤 발기해 있었다. 

“할 수 있어?”

“…….”

“나한테 넣을 수 있냐고.”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아무리 힘들어도 욕설을 거의 내뱉지 않던 입에서 자신이 하던 욕설이 터져 나왔다. 신경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급격하게 커져가는 성기를 손바닥으로 감싸 문질렀다.

“그럼 넣을 수 있게 해봐.”

키이스의 목에서 마치 짐승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신경원을 내팽개치다시피 놓아주고는 세면대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병들 중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곤 안의 내용물을 모조리 손바닥 위에 부어버렸다. 

그는 신경원을 부둥켜안고는 샤워기 아래로 밀어붙였다. 등이 다시 젖기 시작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액체가 듬뿍 묻은 손이 엉덩이를 문질렀다. 그러곤 예고도 없이 엉덩이 사이의 구멍으로 쑤욱, 손가락이 들어왔다.

“읏―.”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물감이 심했다. 

“아파요?”

신경원은 키이스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고개를 흔들었다. 키이스는 그대로 몸을 물려 욕조의 턱에 걸터앉았다. 구멍 안에 들어갔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목에 팔 제대로 감아요.”

시키는 대로 하자 두 손이 엉덩이에서부터 허벅지를 지나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 어느새 신경원은 아주 자연스럽게 키이스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었다.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키이스의 피부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키이스는 한 팔로 신경원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잡고는 벌어진 비부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다시 긴 손가락이 내부로 들어왔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몸에 바싹 매달렸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구멍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참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구멍을 쑤시는 손가락은 성급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좁아요.”

“입 좀 다물어.”

손가락이 안을 자극할 때마다 키이스의 목에 휘감은 팔이 절로 바르르 떨렸다. 그것은 안을 드나들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면서부터 더 심해졌다. 그리고 손가락이 세 개가 되자 조금씩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신경원이 신음을 흘리자 안을 드나들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젠장. 신, 나 거의 한계예요.”

키이스는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었다. 벌어진 하체 아래쪽에서 크게 발기한 성기가 쿡쿡, 고환을 찔러대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을 것 같다. 신경원은 그의 목에서 팔을 풀고 일어났다. 그리고 거품이 일어 있는 키이스의 손을 잡아 샤워기 밑으로 끌었다. 키이스는 자연스럽게 신경원을 마주 안고는 거품을 씻어냈다. 그 사이에도 그의 자유로운 손과 입술은 신경원의 어깨와 목덜미에서 바삐 움직였다. 

“헐떡이지 마, 품위 없게.”

키이스가 발기한 것을 확인하고 나니 묘하게 여유가 찾아왔다. 마음은 자신을 향하고 있어도 몸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초조해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섹스할 때 품위 좀 없으면 어때요.”

그런가? 그럴지도. 

“씨발, 머릿속이 날아가버릴 것 같아.”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거품을 씻어내기 위해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빼냈다. 그는 그대로 커다란 타월로 신경원을 감싸더니 번쩍 안아들었다. 짐짝도 아닌데 참 번쩍번쩍 잘도 든다. 

신경원은 그대로 침대에 던져졌다. 키이스는 물기도 닦지 않고 바로 신경원의 몸 위로 올라왔다. 굵은 물방울들이 타월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나, 정신 못 차리고 신을 상처 입힐 것 같아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데 한 발 먼저 빼도 돼요?”

바보 자식,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신경원은 빨개진 얼굴로 손을 빼서 제 슈트를 가리켰다. 

“안쪽 주머니 봐봐.”

키이스는 짐승처럼 그르릉거리면서도 신경원의 말을 따랐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주스와 함께 샀던 콘돔 박스와 손바닥보다도 작은 젤이 들려 있었다. 

“제일 큰 걸로 샀는데….”

“이런 거 안 들어가요.”

키이스는 콘돔 박스를 던져버리고는 신경원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젤을 반쯤 짰다. 그러곤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같이 잡아줘요. 빨리.”

커다랗게 발기한 키이스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함께 잡으려니 한 손으로는 빠듯했다. 두 손으로 모아 쥐자마자 키이스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기에 성기가 비벼지는 느낌은 정말이지 생소했다. 하지만 열기가 피어오르는 데는 충분했다.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쾌감도 쾌감이지만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키이스의 얼굴만으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이스가 그런 것처럼 신경원도 여러 개의 굴곡과 곧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얀 피부에 열이 올라 핑크빛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는데 빠르게 허릿짓을 하던 키이스가 우뚝 멈추었다. 신음과 함께 진한 정액이 가슴과 턱에까지 튀었다. 

“빌…어먹…을.”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킥킥 웃어버렸다. 

“조루냐?”

“아니거든요!”

키이스는 턱에 튄 제 정액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려 신경원의 뺨에 발라버렸다. 진하게 풍겨오는 냄새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니 키이스도 인상을 썼다.

“왜 이렇게 여유가 넘쳐요. 난 돌아버리기 직전인데!”

신경원은 그저 웃기만 했다. 키이스는 젠장! 하고 소리를 치더니 신경원의 몸을 우악스럽게 뒤집었다. 그러곤 무릎을 세우게 하더니 배와 가슴 아래로 폭신한 베개를 밀어 넣었다. 

“왜 이, …으읏.”

왜 이러느냐고 물으려는데 키이스의 혀가 구멍을 핥았다. 두 손으로 엉덩이를 한껏 벌리고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혀를 미끄러뜨린다. 신경원은 시트를 움켜쥐고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꾹꾹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리 내요. 듣고 싶으니까.”

잠깐 밖으로 빠져나왔던 혀가 다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뾰족해진 혀가 입구 주변을 남김없이 적신다. 입구 주변이 타액으로 흥건해지자 키이스는 남아 있던 젤을 모조리 구멍에 짜 넣었다.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안을 헤집으며 내벽을 질척하게 만들었다. 

신경원의 허벅지가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몸도 움찔움찔하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넣어도 되죠?”

단단해진 살덩이가 사타구니 사이에 닿았다. 구멍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이 등골을 따라 맹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된다고 말해주세요.”

키이스는 입으로는 애원을 하면서도 행동은 반대였다. 단단해진 제 성기를 잡고 선단을 회음부에 문지르고 고환을 쿡쿡 찌르며 애를 태웠다. 

“어서요. 넣어도 된다고 말해주세요.”

선단이 구멍 주위를 꾹꾹 눌렀다. 살짝 열린 입구 위를 진득하게 문질러댄다. 

“읏―.”

“한 마디만 하시면 돼요. ‘넣어’라고.”

주도권을 주는 듯하지만 반대다. 애를 태우고 태워 자신이 원하는 말을 이끌어내려 한다. 그래놓고는 분명 나중에는 이쪽에서 원해서 했는데 무엇을 잘못했냐고 할 놈이다.

“너… 성격… 나빠.”

예의 바르고 반듯하고 친절한 건 다 저 성격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나쁘지만 신을 사랑해요.”

선단이 구멍과 회음부를 긁듯이 움직였다. 쿠퍼액으로 아래가 젖어가는 묘한 느낌에 신경원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해요? 넣어요?”

“씨―. …어.”

“안 들려요, 신.”

“빨리 넣어! 이 개자, ……!”

순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것이 단숨에 입구를 비집고 들어왔다. 화끈하다 못해 구멍이 타버릴 것 같은 통증에 눈앞이 새카매졌다. 지나친 고통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파요?”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아파도 참아요’라고 말하더니 선단만 들어온 듯한 성기를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단단한 살덩이가 연약한 내벽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몸을 둘로 갈라버릴 듯한 통증이 전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일으켰다. 그 사이에도 키이스의 성기는 계속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고 신경원은 그 성기가 고동치는 것까지 모조리 느끼고 있었다. 

고통은 지독했다. 빠듯하다 못해 한계까지 벌려진 구멍 때문에 아랫도리 전체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하면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만큼은, 머릿속만큼은 쾌감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키이스가 자신에게 발정하고, 발기한 성기를 밀어 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갈 것 같았다. 

“다 들어갔어요.”

조금씩 움직이던 키이스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끝이 아니었다. 곧장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단한 몸이 부딪쳐올 때마다 눈앞이 점멸했다. 눈꺼풀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키이스의 성기가 푹푹 안으로 박혀들었다. 결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뱃속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이 키이스의 전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몸을 더욱더 흥분시켰다. 

고통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와 거의 흡사할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몸과 머리를 가득 채웠다. 신경원의 입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허리를 흔들며 키이스의 성기를 조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흔들리는 허리를 키이스의 손이 단단히 부여잡았다. 성기가 빠르게 진퇴를 반복했다. 입구가 녹아내리는 것같이 뜨거웠다.

“읏―! 키, 키이, 하윽―.”

신경원은 시트를 꼭 잡고 있던 손을 풀어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자, 잠깐― 움직이지, 마―아윽!”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뻗은 손을 내려놓지 않았다. 안 말고도 밖도, 손도 몸도 키이스에게 닿고 싶었다. 뒤로 뻗은 손목에 키이스의 커다란 손이 휘감겼다. 아주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는 다른 팔도 당겨 똑같이 휘감아 잡았다. 축 늘어져 있는 상체가 당겨지는 힘에 반쯤 세워졌다. 그대로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신경원의 허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 몸을 당기는 힘을 따라 근육이 수축을 일으켰다. 허리가 뒤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다물지 못한 입에서 투명한 타액과 높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키이스의 움직임이 더욱더 빨라졌다. 

성기가 내벽을 헤집는다. 거칠게, 혹은 부드럽게 미칠 듯한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몸속 전체를 가득 채웠다. 신경원의 몸은 안에 박혀드는 성기를 힘껏 조였다. 

어느 순간, 귓가에 짐승을 닮은 낮고 낮은 신음이 틀려왔다. 깊숙이 파고든 성기가 울컥 하며 정액을 토해냈다. 안쪽이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안에 사정했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쾌감이 고통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내벽은 계속 키이스의 성기를 조이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는 듯 움찔거렸다. 그러고 난 후에야 신경원은 짧은 신음을 흘리며 토정했다. 

단단히 잡혀 있던 손목이 스르륵, 그의 손을 스치며 빠져나왔다. 안을 꽉 채웠던 성기도 함께 구멍을 빠져나갔다. 반쯤 벌어진 구멍에서 키이스의 정액이 질질 새어나왔다. 

신경원의 몸은 털썩 소리를 내며 침대에 널브러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 있었다. 

정신없이 몸이 흔들렸다. 수면부족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져 있던 몸은 한 번의 사정으로 축 늘어져버렸다. 한순간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좋았지만 더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신경원의 아래는 두 사람의 정액으로 흠뻑 젖은 채 다시 키이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냐 하면 신경원의 부주의한 말실수 때문이었다. 

「얼굴… 보고 싶었는데.」

키이스가 사정할 때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뒤로 뻗으며 멈춰달라고 했는데 키이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저를 향해 오는 손을 잡아당겼다. 첫 관계부터 하드하게 뒤로 한판 해버린 거다. 

얼굴을 보며 하고 싶었다고 하자 신경원의 몸을 뒤집어놓고 젖꼭지를 물고 빨며 후희를 즐기던 놈이 갑자기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버렸다. 힘이 남아 있었다면 발로 걷어차버렸을 텐데 실오라기 하나도 들 힘이 없어 그냥 몸을 내주게 되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다리를 잡아 좌우로 한껏 벌리고는 아직도 제 정액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구멍에 단숨에 성기를 삽입했다. 뭐든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쉽다고, 신경원의 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키이스를 받아들였다. 

억울했지만 바라던 것을 그대로 보고 있는 기분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파란 눈동자는 눈꺼풀에 가려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계속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예쁜 모양의 입술은 벌어졌다 꾹 다물어졌다 살짝 일그러지기도 했다. 

키이스는 아래 이외에는 힘이 빠진 신경원의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조금씩 체위를 바꿨다. 신경원을 비스듬히 눕게 한 그는 밀빛의 허벅지를 제 쪽으로 당겼다. 순간 결합이 깊어졌다. 신경원은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키이스의 얼굴이 보고 싶어 억지로 눈을 떴다. 

얄밉게 미소를 지은 얼굴이 보였다. 색기가 흘러넘치는 표정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빠르게 뛰고 있던 심장이 쿵쿵거리며 요동을 쳤다. 

키이스는 한순간도 신경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깊으면서도 얕게,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그리고 빠르게 한계까지 몰아붙인다. 

신경원은 자신이 신음을 흘리다 못해 거의 울부짖듯 울어버리기 시작한 것도 몰랐다. 질척한 소리가 귀를 메웠다. 머리끝까지 쾌감에 젖어간다. 

첫 관계부터 이렇게 미친 듯이 느껴버리는 게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진다. 하지만 그걸 능가하는 쾌감과 기쁨이, 환희가 몸 전체를 가득 채워 두려움을 남김없이 덮어버렸다.

부딪치고 흔들리던 몸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키이스의 정액이 다시금 몸속 깊은 곳을 적셨다. 뇌까지 정액에 젖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신경원은 눈을 감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아득해졌다. 

눈꺼풀 안쪽으로 키이스의 색기 어린 얼굴이 어른거렸다. 더 보고 싶은데 눈이 뜨이지 않았다. 졸음이 미친 듯이 밀려왔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 이대로 자는 건가요? 씻고 자야죠.”

입을 벌렸더니 신음이 나온다. 

“신, 신?”

몸이 살짝 흔들렸다. 박혀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 키이스의 손이 어깨를 잡고 흔드는 거였다. 그 손은 아주 부드러웠고 세심했다. 

손길만큼이나 부드러운 입술이 눈가에 떨어졌다. 그 입술은 곧장 신경원의 입술 위에도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만족스러웠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랑해요, 신.”

꿀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따라 귓속으로 조로록, 흘러내렸다. 

신경원이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 * *

처음은 송곳으로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말을 하던 입을 절로 다물어버리게 할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었다. 

불현듯 일어난 통증은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기침과 함께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터져 나왔다. 피비린내가 입안과 코를 진동시키는 동시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신경원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통증은 이미 배에서 가슴으로 올라와 폐까지 퍼져 있었다. 고통은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긴장한 근육은 오장육부를 내리누르며 미친 듯이 피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신경원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피에 젖은 입술을 움직여봤지만 피만이 울컥울컥 넘어올 뿐,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심장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식도가 심장으로 이어지는 혈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은 순식간에 몸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켜버렸다. 눈앞은 암전했고 귀는 멍해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계속 피를 토했다. 심장은 제 기능을 잃고 몸 밖으로 피를 밀어내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생각을 하려 했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목덜미를 잡혀 지옥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었다. 신경원을 홀로 두고는 절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왜―.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살아야 해.

신―.

나는 신의 옆에 있어야 해. 

내 목숨보다도 그가 더 중요해. 신, 당신을 사랑해. 

살고 싶어. 죽지 않겠어. 

죽을 수 없어―.

신을 두고는 절대―!

“허억―!”

키이스는 곤히 자다 말고 발작을 일으키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기도가 부어 협착이라도 된 것마냥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는 헉헉거리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손이 절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알몸으로 잠든 신경원의 손이 그의 손에 잡혔다. 그는 정신없이 신경원의 손을 부여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식은땀에 푹 젖어버린 손에 조금씩 온기를 전해왔다. 가쁘던 호흡이 천천히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길.”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끔찍했던 고통이 몸에 잔재를 남기고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키이스는 그 상태로 잠시 신경원의 손이 주는 온기에 매달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떨림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몸 전체를 흠뻑 적신 식은땀이 온기를 빼앗아가고 있어 등골이 서늘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손을 이불 안으로 넣고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섹스 끝에 정신을 잃고 잠든 신경원은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신경원의 눈가에 살짝 입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멀쩡한 듯싶었지만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어지러움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다행히 금방 멀쩡해졌다. 

키이스는 거울 옆에 있던 스탠드를 켜곤 불빛을 낮게 조정한 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던 슈트 재킷을 찾았다. 안쪽 주머니에는 엠브리시오가 준 조혈제가 들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혈제는 주사제의 형태로 처방되지만 그가 받은 조혈제는 성혈의 소유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경구용 알약이었다. 

그는 핏빛 액체가 들어 있는 투명한 젤라틴 캡슐을 입에 털어 넣고 냉장고를 열었다. 물과 토닉 워터, 맥주와 주스 등 다양한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뒤적여보니 이온 음료도 하나 나왔다. 

“…멀쩡해지면 진짜 두 번 다시 마시고 싶지 않을 것 같다니까.”

키이스는 차가운 이온 음료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연구소에서 주는 이온 음료보다는 백 배 나았다. 그쪽의 이온 음료는 맛이나 향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기능성만을 중시해서 제조된 것이라 찝찌름함이 심해 마치 눈물을 모아 마시는 기분을 들게 했다. 신경원이 이온 음료라면 고개를 내젓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갔다. 

조혈제를 복용한 그는 곧장 샤워를 하고는 가운을 입고 나왔다. 시간은 오전 6시 32분. 잠든 시간이 대략 12시 정도였으니 충분히 잤다. 

“하아―.”

그는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는 한숨을 쉬었다. 악몽 때문에 깼더니 정신이 좀 몽롱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고통을 꿈속에서 다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불시에 기습을 당해 멍해진 기분이었다. 

키이스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혀를 찼다. 진짜 고통은 그보다 훨씬 더 심했는데 악몽 따위에 놀라 잠이 깨다니 짜증이 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곤 레이첼이 고용해준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게 하고는 일단 침대로 돌아갔다. 

신경원은 보듬어 안아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품에 안고 나니 몸에 남아 있던 고통의 잔재가 사르르 풀려나갔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있잖아요, 신. 제가 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그런데 그것만은 앞으로도 절대 말을 못할 것 같아요.”

성인이 되고 나서도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 각성할 수 있는 요건, 인자를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아예 사례가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온몸의 피를 토해내며 각성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말이다. 

키이스는 영문도 모른 채 부지불식간에 고통을 당해야 했다. 신경원을 안고 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다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연구소로 옮겨져 와 있었다. 

연구소에서도 그는 계속 피를 토했다. 닥터 엠브리시오를 비롯한 연구진들은 처음 당하는 일에 혼란에 빠졌고 피를 토하는 키이스를 위해 각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는 거의 만 여섯 시간 동안 피를 토했다. 입으로만 토한 것이 아니라 온몸에서 붉은 땀이 나왔고 고통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에도 피가 섞여 붉게 흘러내렸다. 연구원들이 조사한 결과 체내의 피를 반 이상 토해냈다고 했다. 당연하지만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성혈이라는 것 자체가 의학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존재 자체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검사를 해보면 일반인들의 피와 똑같은데 뱀파이어의 피나 체액, 신체 조직이나 뼈에 닿으면 인정사정없이 말살을 해버리니 말이다. 

어쨌든 그는 몸의 피를 모조리 토해내고 반쯤은 죽었다 살아났다. 급성 빈혈보다 더한 빈혈 상태로 몇 시간을 보냈다. 수혈조차 받을 수 없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준비해둔 자가 수혈용 혈액은 키이스 그 자신의 피였음에도 그의 몸에 불가해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나마 조혈제가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웃기는 건 정확하게 12시간이 흐르자 완벽하진 않아도 갑자기 멀쩡해졌다는 거다. 연구진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상태는 의학적으로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키이스는 그것을 모두 신경원 덕분이라 생각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도, 잃은 후에도, 다시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든 후에도 그는 계속 신경원만을 생각했다. 

죽지 않겠다. 신경원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살아서 신경원과 함께할 것이다. 

그건 기원의 수준에 가까웠다. 그의 간절한 기원은 이루어졌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글자 그대로 기적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는 건 별로 무섭지 않았어요. 하지만 신을 두고는 죽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때 받았던 고통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고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다시 그 고통을 받으라고 하면 죽는 쪽을 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뭐 그래도 신을 두고는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살짝 소름이 돋아 오른 팔을 신경원의 몸에 감았다. 동양인들 특유의 매끄러운 피부가 몸에 닿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키이스는 신경원을 품에 안은 채 계속 부비적거렸다. 그게 꽤 성가셨는지 어느 순간 신경원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뭐야.”

“이런, 깨셨어요? 아직 시간 괜찮으니까 조금 더 주무세요.”

신경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불청객이 찾아오는 바람에 더 재울 수가 없었다. 수행비서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키이스가 일어나니 신경원도 부스스 일어났다. 신경원은 멍한 눈을 한 채 침대에 앉아 있다가 키이스를 보더니 또 인상을 찌푸렸다. 

“너.”

“네.”

“다음부터는 네 사이즈에 맞는 거 사 와.”

뭘 사 오라는 건지 싶어 잠시 생각하던 키이스는 신경원이 눈이 자신의 벌어진 가운 사이에 꽂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깨를 떨며 웃은 다음 ‘네’ 하고 대답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몰라.”

“음… 일단 뭐라도 좀 드시겠어요? 음료수는 냉장고에 있는데 다른 걸 원하시면….”

“커피.”

신경원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져버렸다. 허리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씨발―.”

누가 신경원 아니랄까 봐 대뜸 욕부터 한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부축하려 했지만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봐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는 그 언젠가처럼 엄청나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 부끄러움이 극에 달해서 말이다.

“웃지 마.”

“안 웃었는데요.”

“눈이랑 입이 웃고 있거든?”

“…….”

신경원은 끙끙거리며 제 힘으로 일어났다. 그러고는 키이스가 룸서비스를 시키는 사이 거북이 같은 속도긴 했지만 제 발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다시 나왔을 때는 온몸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욕실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나오는 걸로 봐서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 옷이요.”

키이스는 쇼핑백을 내밀었다. 신경원은 그것을 획 잡아채고는 아무 말 없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수행비서가 가져온 옷은 활동하기 편한 캐주얼이었다. 

옷을 입은 신경원은 제자리에 서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허리를 돌리다 인상을 팍 쓰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다가 평소보다 더 살벌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다음에도 또 그렇게 이성을 잃고 덤벼들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린다.”

“…….”

처음은 몰라도 두 번째는 확실히 반쯤은 이성을 잃었던 터라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원의 눈치를 보며 룸서비스로 시킨 음식이 가득 담겨 있는 트레이를 앞으로 끌어와 덮개를 열었다. 

“…커피 왔는데요. 베이컨이랑 촙 스테이크랑 소시지랑 서니 사이드 업으로 계란도….”

신경원은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소파에 앉았다. 끄응~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식사는 고요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키이스는 부지런히 신경원의 수발을 들었다. 2인분이 아니라 4인분을 시켰지만 음식은 금방 동이 났다. 

키이스는 냉장고를 열어 신경원이 마실 만한 음료수를 몇 개 꺼내 왔다. 그중에는 어젯밤에 넣어둔 사과 주스도 있었다. 물론 마시라고 꺼낸 건 아니다. 궁금증도 풀고 신경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저기요, 신.”

“…….”

“이 주스… 왜 그렇게 들고 다니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분이 우울하거나 저조할 때 이걸 꺼내다 앞에 놓고 보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신경원은 황금색 액체가 들어 있는 동그란 병을 잠시 노려보더니 키이스를 쳐다봤다. 

“전에 궁금한 건 물어보면 대답해주신다고 했잖아요.”

“대답해줄 수 있을 만한 건 대답해준다고 했지 다 대답해준다고 한 적은 없어.”

“이건 거기에 속하지 않는 건가요?”

“…….”

“말씀해주시기 그러면 괜찮아요.”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하지만 정말 궁금하긴 하네요’라고 덧붙였다. 

“너, 성격 나빠.”

신경원은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키이스는 그냥 방긋 웃었다. 신경원은 오렌지 주스 한 병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비운 뒤 문제의 사과 주스 병으로 손을 뻗었다. 

“Memeto Mori.”

“…메멘토 모리요?”

“라틴어야. 죽음을 기억하라.”

“…….”

“인간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야. 하지만 나에게는 그냥 글자 그대로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오브젝트… 심벌 같은 거지.”

키이스는 표정을 굳혔다. 누구의 죽음인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다.

“그날… 집으로 가는데 목이 말랐었어. 날이 굉장히 더웠거든.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던 건 주유소의 매점밖에 없어서 중간에 옆으로 샜었어. 사 가지고 마시면서, 천천히 집에 갔지. 그리고 주유소에 갔다 오기 위해서 소모한 그 시간이….”

“…….”

“내 목숨을 구했어.”

“신….”

“주유소에 갔다 오지 않았으면 난 아마… 가족들이랑 같이 죽었을 거야.”

신경원은 뒤로 고개를 꺾었다가 천천히 한 바퀴를 돌렸다. 

“이건 내 목숨을 구했고, 더불어 가족들과 함께 죽지 못한 원인이고 이유야.”

신경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주스 병을 위로 휙― 던졌다.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는데 솔직히 정말 많이 힘들었어. 의사라는 직업은 체력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운동 자체는 열심히 해왔지만 뱀파이어를 죽이는 건 체력만으로는 안 되잖아?”

“…그렇죠.”

“그나마 의사 나부랭이라고 피에는 익숙해 있었으니까 그건 괜찮았는데, 너무 힘드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부모님이 바라셨던 대로 그냥 의사가 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뭐 그런 거. 그러다가 어느 날 우유 대신 이게 메뉴로 나왔는데 이걸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어.”

“…….”

“내가 하려고 했던 게 뭔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내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만 이야기하셔도 돼요.”

“궁금하다며.”

“상처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상처는 무슨.”

“…….”

“어쨌든 그날 이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기에 하나 사다가 침대 맡에다 올려놨어. 그랬더니 그동안 힘들다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힘들지 않게 느껴지더라고. 뭐 그래도 마실 수는 없었지만. 트라우마라면 트라우마지.”

신경원은 다시 주스 병을 위로 던졌다가 탁―소리를 내며 받았다. 

“내가 평생을 거쳐 책임지고 갚아나가야 할 것을 이게 알려줘. 머릿속의 잡생각을 깨끗하게 지워주거든. 효과가 아주 좋아. 너에 대한 것만 빼면.”

“…네?”

“이걸 아무리 들여다봐도 너에 대한 것만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더라고.”

“……!”

“그때 어렴풋하게나마 느낌이 왔던 거 같아. 좋아한다고까진 생각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너를 다른 누구보다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신.”

“응?”

“키스해도 됩니까?”

“키스로 끝낼 수 있으면.”

키이스는 움찔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신경원의 말을 듣고 보니 키스만으로는 끝낼 자신이 없었다. 키이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엄청나게 기분 나빠 보이던 신경원의 표정이 평소만큼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신경원은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은 키이스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는 사과 주스 병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다시 오른손으로 던지며 여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질문이 있는데 대답해볼래?”

“네. 뭐든지.”

“일평생 주기적으로 피를 뽑아야 한다고 했지? 얼마를 주기로 얼마나 뽑아?”

“음….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아마 한 달에 한두 번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성혈의 소유자가 이제 다섯에서 여섯이 되었으니까 조금 조정될 거라고 들었거든요. 양이야 일반적인 헌혈량보다 살짝 많은 정도고요.”

“한 달에 한두 번은 너무 많잖아. 그렇게 피를 뽑아가면서 에이전트 일을 어떻게 하려고. 특히 여름에는,”

“아, 그거는 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성혈의 소유자들은 몸 자체가 좀 특이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피를 뽑아도 문제가 없거든요. 제가 체력이랑 지구력이 남보다 훨씬 좋은 것도 그 탓이고요. 보셨잖아요. 아무리 퍼스트에게 두들겨 맞아도 한 사흘이면 멍든 게 싹 사라지는 거.”

“…다들 절룩거리는데 너 혼자 멀쩡했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던 건가?”

“아마도 그럴걸요? 기본적으로 회복이 빠르거든요. 근육통은 몇 시간, 외상도 큰 상처만 아니면 사나흘이면 사라져요.”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뱀파이어에게 물렸던 손을 들어 보였다. 이빨이 박혔던 자국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병도 거의 안 걸려요. 그래도 감기몸살 정도는 앓지만요. 죽을 때까지 아주 튼튼하게 건강을 유지하죠.”

“의학자들이 머리 쥐어뜯을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그래서 닥터 엠브리시오가 위장병을 달고 살죠.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저 때문에 왕창 도졌을걸요?”

“젠장. 강아지 새낀 줄 알았더니 쓸개즙 뽑는 곰이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몰라도 돼.”

신경원은 손을 내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그것 이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한쪽에 놓아둔 리모컨을 들고는 TV를 켰다. 그러나 얌전히 앉아서 보지는 않았다. 연신 끙끙 신음을 흘리면서도 스쿼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키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근무 날 빼고 하루에 운동은 몇 시간 정도 하세요?”

“4시간.”

“흠. 그럼 트레이닝 룸을 따로 마련해야겠네요.”

“……?”

“레이첼에게 본부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마련해달라고 했어요. 너무 크거나 화려하지 않은 걸로.”

“키이스.”

“네.”

“너 그거 지금 나한테 같이 살자고 하는 소리야?”

“그럼 누구랑 사시려고요? 설마 본부 숙직실에서 계속 사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

“연인을 두고 혼자 사는 건 반대!”

“…누가 연인이냐?”

“저랑, 신이랑.”

키이스는 자신과 신경원을 차례차례 가리키며 대답했다. 가끔 신경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되묻는 버릇이 있다. 

“하아―.”

“신?”

“너, 나한테 언제 사귀자고 한 적 있어?”

“……!”

“도대체가 순서를 지킬 줄을 몰라.”

신경원은 흥―소리를 내며 다시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TV에서는 출입금지가 되었던 센트럴 파크의 일부 구역이 다시 개장을 했다는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신경원의 눈가 밑에 미미하지만 주름이 잡히는 것이 보였다. 보나마나 라미레즈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신!”

“왜.”

“스쿼트 잠시 멈추시고 저를 좀 봐주세요.”

신경원은 키이스의 말대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키이스는 허리를 펴고 신발 뒤축을 탁 소리 나게 부딪치며 반듯하게 섰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좋아합니다, 사랑해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제 연인이 되어주세요. 평생 신의 곁에 착 달라붙어 살고 싶습니다.”

“…….”

“신이 하고 싶은 일, 신이 목표로 하는 일. 전력으로 서포트하겠습니다. 절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시더라도 불평불만 안 하고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언제든 돌아보시면 항상 보실 수 있는 자리에 있겠습니다. 대신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남는 시간은 전부 제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위해서 같이 살아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우렁찬 고백이 끝나자 뉴스 엔딩 배경음악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참 애매했다. 신경원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 대답해주세요.”

“…넌, 무드라는 단어가 뭔지는 아니? 유치원 다니는 어린애도 프러포즈를 할 땐 최소한 색종이 꽃이라도 들고 하거든?”

“당장 사 가지고 오겠습, 우악―!”

부웅 소리와 함께 신경원의 몸이 허공에 떴다. 키이스는 황급히 팔을 들어 올려 가드를 쳤다. 단단한 다리가 퍼억 소리를 내며 팔에 부딪쳤다. 키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려 했으나 신경원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180도를 회전했던 몸이 그대로 360도를 향해 돌아간다. 축이 되었던 발이 재차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퍼억―.

“윽―!”

키이스는 허리를 얻어맞고 휘청했다. 신경원은 ‘에구구’ 하며 허리를 잡고 끙끙거렸다. 

“씨발―, 너 이 자식, 앞으로 근무 전날에는 절대 박을 생각 마. 덤벼들기만 해봐. 죽여버린다.”

“신―!”

키이스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이틀에 한 번 하고 어떻게 살아요! 매일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틀에 한 번도 많아. 무엇보다 너 하루에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어?”

키이스는 제 가슴을 부여잡은 채 휘청했다. 저건 카운터펀치다. 

“내가 나름 튼튼한 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랬으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했을 테니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저 팔팔하고 혈기왕성한 24살이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이면 저 욕구불만으로 죽습니다!”

“난 시들어가는 30대거든? 매일 하면 내가 죽어! 게다가 네 한 번이 어디 한 번이야? 최소 두 발은 뺄 거 아냐!”

“누가 그래요! 어제는 신이 잠들어서 그만둔 것일 뿐이에요. 한 번에 최소 4발은 빼야 하는 게 기본 아닌가요? 그리고 세상에 어떤 사람이 신을 30대로 봅니까! 얼굴은 둘째치더라도 신체 나이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다들 30대로 보거든? 그리고 한 번에 두 발 이상 빼봐! 그거 꺾어버린다.”

“안 보거든요? 나가서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걸 꺾으면 신이 더 곤란해지니까 절대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다쳐도 금방 낫는다며! 잘됐네. 이리 와, 그냥 확 꺾어버리게. 한동안 고자로 살게 해주마!”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신경원은 한다면 한다. 키이스는 제 중심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신경원은 이겼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폈다. 그는 턱을 치켜들며 명령조로 말했다.

“꺾이기 싫으면 앞으로 내 말에 무조건 따른다고 맹세해.”

“…….”

“주인님이 말씀하셨으니 멍! 하고 따라야 착한 강아지지. 어서 맹세해.”

“…제가 왜 강아집니까.”

“내가 강아지라면 강아지야.”

“…….”

“내 강아지가 되면 귀찮게 졸졸 뒤를 따라다녀도 내 강아지 예쁘다고 쓰다듬어주고 어디서 자든 잘 때마다 꼬옥 끌어안고 자줄 거야.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은 집에서 살면서 24시간 나한테 착 달라붙어 살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싫어?”

“……!”

“대답은?”

키이스는 한쪽 볼에 바람을 불어넣고는 팔짱을 꼈다. 나 불만 많아요, 라고 시위하려는 거다. 

“대답 안 해?”

“하나만. 딱 하나만 조건을 달아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까짓 거, 신의 강아지 할게요.”

“뭔데.”

“이틀에 무조건 한 번, 한 번에 기본 4발.”

“…….”

“…3발. 대신 긴 휴가 때는 무제한.”

“짐승 같은 새끼.”

“강아지 하라면서요. 강아지면 짐승 맞잖습니까. 3발! 그 이하는 안 됩니다.”

“역시 짐승이랑은 말이 안 통하는 거였어.”

신경원은 씨발―하고 욕을 하며 곧장 문가로 향했다.

“어디 가시려고요. 아직 시간 일러요.”

“몸이 찌뿌둥해서 죽을 거 같아. 식사하고 본부로 가서 운동이나 할래.”

“식사는 좀 전에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식사야, 간식이지.”

“…그래도 고기였는데.”

“고작 그걸로 간에 기별이나 갈 거 같아? 그런데 슈트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새 옷 가져온 사람한테 들려 보냈어요. 잠깐요, 신. 같이 가요.”

키이스는 허둥지둥 옷걸이에 걸어놓았던 두 사람의 코트를 꺼냈다. 그 사이 신경원은 혼자 룸을 나서버렸다. 키이스는 카드 키도 챙기지 못하고 코트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보니 신경원은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타이밍도 참 죽이는 게 엘리베이터가 현재 층에 멈춰 있었다. 신경원은 훌쩍 엘리베이터에 타버렸다. 키이스는 한달음에 달려가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붙들었다. 하지만 신경원은 발을 들어 키이스의 배를 걷어차버렸다. 키이스는 배를 움켜쥐며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윽―! 왜 차요!”

“너, 핸드폰 테이블에 두고 나왔다.”

신경원은 close 버튼을 누른 뒤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문이 슈욱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닫혔다. 

“에이씨―! 핸드폰이 뭐 별거라고 발로 차냐고! 걸핏하면 폭력이나 쓰고.”

피하려고 하면 못 피할 것도 없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신경원의 공격은 언제나 전광석화, 일격필살, 거기에 언제 어떻게 시작될지 예측 자체가 불허한지라 키이스로서는 아직 막을 재주가 없었다. 

키이스는 구시렁거리며 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룸의 카드 키는 그의 주머니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결국 보기 드물게 험악한 얼굴로 로비까지 내려가 프런트에서 임시키를 받아 오고서야 룸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핸드폰은 신경원이 말한 곳에 아주 얌전히, 예쁘게 놓여 있었다. 

핸드폰에는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신경원이었다. 키이스는 즉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를 읽은 키이스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험악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겨울임에도 봄처럼 따스한 미소가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 사람은 진짜 못 말린다니까.”

핸드폰에 수신된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1일. 

 센트럴 파크 근처는 싫어.

 호텔 카페테리아에 조식으로 나오는 스테이크가 너무 얇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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