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Story 1.
End & Start
수습 에이전트 앤 라미레즈의 장례식이 열렸다.
겨울비라도 왔다면 하늘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통속적인 말이라도 하며 슬픔을 덜어내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해를 며칠 앞둔 한겨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무정하리만치 맑기만 한 하늘은 원망을 자아냈다. 이렇게 좋은 날 하늘을 볼 수 없는 땅속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마음은 깊은 땅속만큼이나 어둡고 침침했다. 그들은 야속한 하늘을 바라보며 비를 대신하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라미레즈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멀리 플로리다에서 온 라미레즈의 가족은 아버지와 네 명의 형제자매뿐이었기 때문이다.
기관에서는 라미레즈의 가족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그녀의 고향 플로리다에 있는 가족 무덤에 안장하는 것, 다른 하나는 국가 유공자 자격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었다.
본래 라미레즈는 국립묘지 안장을 허가받기엔 조금 자격이 부족했다. 그녀는 아직 수습 에이전트에 불과했고 근무 기간을 반년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작전 중에 사망한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었다. 비록 뱀파이어가 되어 동료의 손에 의해 사살되긴 하였으나 그 이전에 뱀파이어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는 분명 나라를 위해 제 목숨을 초개처럼 바쳤다는 사실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동료들의 추천과 예들린의 배려로 비록 사후지만 정식 에이전트로 진급했다. 그러자 총본부에서는 마지못해 그녀의 국립묘지 안장을 허가했다. 다소 전시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국립묘지 안장을 불허하는 경우 그녀와 같은 수습 에이전트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생각한 것이다.
라미레즈의 가족들은 사정까진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후자를 선택했다. 전자를 선택했다면 소탈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한 장례식이 아니라 수많은 일가친척들과 지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영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국립묘지에 묻히길 바랐다. 그리고 수많은 일가친척을 대표하여 가장 가까운 직계 가족들만이 기관에서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뉴욕까지 왔다. 뱀파이어에게 희생된 어머니와 남동생을 위해 고향을 떠나 먼 뉴욕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던 라미레즈라면 분명 그리 원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장례식에는 가족들만 참석한 것은 아니다. 함께 동고동락해온 유닛 Zero one의 남은 구성원들도 모두 참석했다. 또한 같은 수습 에이전트들 중 비번인 일부가 참석했는데 몇 명 되지는 않았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라미레즈에게는 뉴욕에 사는 지인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라미레즈의 가족들은 동료들과 함께 뉴욕 지부의 높으신 어른―예들린이 참석해 장례식을 주관해주었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해했다.
주인 없는 관에는 성조기가 덮여 있었다. 하관 직전 걷힌 성조기는 뉴욕 지부 부부장의 직함으로 참석한 예들린에 의해 라미레즈의 아버지 손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라미레즈의 어린 동생들이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제일 나이 많은 오빠가 여동생들을 달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몇 수습들도 크게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지만 눈물을 보였다.
그래도 라미레즈의 아버지는 꿋꿋한 모습을 보였다.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지만 딸이 FBI 에이전트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을 정도로 공을 세운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두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장례식에 참석한 캐리가 울먹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딸을 보살펴줘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되레 캐리를 위로하기까지 했다.
장례 절차를 마치자마자 라미레즈의 아버지로부터 인사를 받고 뒤로 물러나 있던 예들린은 캐리를 비롯한 에이전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캐리를 제외하면 모두들 비교적 덤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덤덤해 보인다고 해서 괜찮겠거니 하며 넘길 수는 없는 상황이다.
기본적으로 기관의 에이전트들은 동료의 죽음에 익숙해져 있다. 정신적 문제로 그만두는 경우를 포함해 부상으로 인해 그만두고 나가는 동료들에게는 더더욱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약간의 상담만 거치면 별 문제 없이 넘어간다.
하지만 라미레즈의 경우는 에이전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케이스였다. 사실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헌터들은 뱀파이어에게 당해 죽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후 그들이 사냥해온 대상, ‘뱀파이어’가 되는 것만큼은 죽기보다 더 싫어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싶어 했다.
그나마 라미레즈가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왔던 선임 에이전트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긴 하다. 만일 라미레즈가 아닌 다른 에이전트가 같은 케이스로 사망했다면 저들 중 몇은 발작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
예들린은 제일 끝에 서 있는 신경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당연하지만 제일 세심하게 살폈다. 이번 일로 캐리와 더불어 가장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십중팔구 캐리의 배쯤은 상심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신경원이 그러했듯이 라미레즈도 뱀파이어에 대한 복수심으로 기관에 투신했는데 하필이면 뱀파이어가 되며 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신경원은 키이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관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행복해 보였다. 답지 않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단 채 귀찮아하는 보고서 작성도 순식간에 해치웠다. 예상한 대로 키이스의 일로 라미레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현재 신경원의 눈 밑에는 새카만 그늘이 져 있었다. 보나마나 그날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쯧쯧―.
예들린은 작게 혀를 찼다.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휘하의 에이전트들 중 가장 아끼는 녀석이 누구냐고 하면 바로 신경원을 뽑는 그다. 편애는 좋지 않지만 필드 에이전트로서의 생명을 걸고 마지막으로 구해냈던 녀석이고 그 스스로가 이 바닥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보니 계속 눈이 가고 정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역시 여자라도 하나 소개시켜줘야 하나.
예들린은 수염이 자라 까칠한 턱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5년째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긴 한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섣불리 누군가를 소개해주기가 참 힘들었다. 안되면 그만이지만 잘돼도 문제다. 안 좋은 소리를 하면 안 되겠지만 까닥하면 엄한 미망인 하나를 만들어버리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그거야말로 여자 쪽에 실례가 되는 일이다.
다행히 신경원은 누군가 소개 같은 거 안 해줘도 알아서 잘 만나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있긴 했다. 본부의 여성 에이전트나 직원들도 ‘신경원’이라고 하면 한 번쯤 데이트를 해보고 싶어 한다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그들 중 하나를 얼른 꿰차서 결혼이라도 해버리면 참 좋겠다 싶다. 그 경우엔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위험도 정도는 감안을 해줄 거라 생각하니까. 여자 쪽에서 원하기만 한다면 적극적으로 중매를 서줄 생각도 다분하다.
예들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가까운 곳에 멈추었다. 검은색 고급 대형 세단의 조수석이 먼저 열렸다. 단정하지만 고급스러운 슈트를 입은 남자는 주변을 돌아본 뒤 뒷문을 열었다.
……응? 저놈은 왜 여기를 와?
세단의 뒷좌석에서 내린 남자는 다름 아닌 키이스였다. 평소에는 약간 흐트러트리고 다니던 금색의 머리카락을 깨끗이 빗어 넘긴 그는 역시나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같은 유닛에 속해 있었고 동기이니 그가 라미레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저 그가 의아해한 이유는 지금의 키이스로서는 이런 데까지 올 시간도 신경을 쓸 여유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솔직히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러려니 하며 납득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예의가 발랐던 놈이니 동료의 장례식에도 예의를 차리러 온 건 아닐까 하며 흐뭇해하던 순간이었다. 장례식장으로 오던 키이스가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예들린의 시선은 절로 키이스가 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엔 어느새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신경원이 있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터덜터덜 목적도 없이 걸어가는 신경원을 대뜸 끌어안았다. 키이스의 손이 신경원의 등을 도닥이는 게 보인다. 신경원은 가만히 키이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예들린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두 사람이 예상외로 서로 각별한 사이가 되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어째… 하고 있는 폼이 단순한 파트너 사이로 보기에는 좀이 아니라 많이 끈적끈적해 보였다.
“뭐하십니까?”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맥스가 캐리의 휠체어를 밀며 그에게 다가왔다. 존도 어슬렁거리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고 과묵한 리드가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그들은 예들린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쪽에 시선을 주었다. 키이스와 신경원은 여전히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어라, 클리퍼드잖아?”
“다쳐서 병원에 있다더니 멀쩡해 보이는데?”
“왔으면 얼른 뛰어와서 인사부터 하지 않고.”
“저놈 눈에 우리가 보이겠냐? 퍼스트밖에 안중에 없는 놈인데.”
“그건 그렇지.”
맥스와 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예들린은 설마 하며 물었다.
“신밖에 안중에 없다고?”
“모르셨어요?”
“뭘.”
“아직 사귀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얼마 전부터 둘이 수상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대던 거요. 저희들은 치프도 눈치 채셨을 줄 알았는데.”
맥스는 두 사람을 가리켜 보이며 히죽거렸다. 바로 그때 신경원을 꼭 안고 있던 키이스가 팔을 조금 풀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이 신경원의 목덜미를 감싸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누가 봐도 저건 키스를 하고 있는 거였다.
“얼래?”
“허―. 저 녀석들 지금 뭐하냐?”
“눈에 눈썹이 들어가서 빼주고 있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라.”
“…….”
맥스는 백주 대낮에 하고 많은 장소 중 왜 하필이면 국립묘지에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주먹을 쥐어 존에게 내밀었다. 존은 히죽거리며 저도 주먹을 쥐어 툭―하고 마주쳤다. 평소에도 자주 하는 행동이나 좀 과장된 것이 우울한 기분을 이렇게라도 떨쳐보겠다는 티가 난다.
“캐리, 후회되지?”
“후회는 무슨.”
“크으~. 오늘은 내기에서 번 돈으로 맥주나 한 잔 해야겠는데? 괜찮지, 존?”
“좋지~.”
두 사람은 히히덕거리며 아직도 서로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신경원과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여전히 얼이 빠진 표정을 한 예들린이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게이 커플 처음 보시나.”
“신은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저희도 그랬는데, 강아지 녀석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강아지?”
“클리퍼드요. 강아지처럼 퍼스트를 졸졸~ 따라다녔거든요. 강아지치고는 징그러울 정도로 크긴 합니다만.”
“퍼스트가 뭐라 말만 하면 귀를 쫑긋해가지고는 눈을 반짝이며 달려드는 걸 보셨어야 하는데. 크~.”
두 사람은 신이 난 얼굴로 떠들어댔다. 하지만 캐리는 눈물을 흘려 붉어진 눈으로 키이스를 흘겨봤다.
“쳇―, 퍼스트가 진짜 저놈에게 넘어갈 줄이야.”
“기권해놓고 뭘 구시렁거려.”
“솔직히 말해 나는 저놈 마음에 안 든다고! 겉으로는 예의를 3중으로 처바른 것처럼 굴면서 속은 시커메가지고는 의뭉스러워 보이잖아!”
“모름지기 사내자식들은 다~ 속이 시커먼 법이야.”
“그 뜻이 아니거든?”
“아니래도 상관없거든?
“캐리 너 설마 퍼스트에게 흑심 품고 있었냐? 마누라랑 애새끼도 있는 놈이.”
“뭐라고 시부렁거리는 거야. 이 멍청한 자식이. 당장 취소해, 맥스!”
“그럼 왜 그렇게 키이스를 아니꼽게 봐. 그냥 좋게 봐줘. 어린놈이잖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기왕이면 포용력 넘치는 여자랑 결혼해서 알콩달콩 잘 살길 바랐다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퍼스트가 저런 게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
“어휴.”
캐리는 차라리 저 잘난 얼굴에 홀라당 반했다고 하면 이해가 갈 거 같은데, 그건 절대 아니니 속이 터진다며 제 가슴을 쳤다.
“클리퍼드가 잘생기긴 참 많이 잘생겼지. 퍼스트한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 어라? 그럼 퍼스트는 진짜로 저놈 알맹이에 반했다는 소리 아냐?”
“반하긴 뭘 반해. 클리퍼드 녀석이 밀어붙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준 거겠지.”
“아니야, 캐리. 넌 병원에 있느라 못 봐서 그래. 클리퍼드가 다쳤다니까 퍼스트 녀석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더라고. 그걸 봤어야 하는데.”
“뭘 어쩌고 있었는데.”
“홀라당 벗고 물 뚝뚝 흘리면서 로커 룸에서 멍 때리고 있었지.”
하아―.
예들린은 수다스러운 부하들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결론은 아끼는 부하가 새로 굴러들어온 돌한테 넘어갔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캐리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존과 맥스는 이제 한시름 덜었다며 마냥 기뻐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사정을 아는 탓에 예들린은 순수하게 기뻐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성혈의 소유자’가 가진 가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사건과 사고, 그리고 인연으로 만들어진 부정이 가슴에서 넘실거린다.
“왜요, 치프. 영 마음에 안 드세요?”
“그게….”
예들린이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키이스와 신경원이 서 있는 쪽에서 “으억―!”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키이스가 제 다리를 잡고 펄쩍 펄쩍 뛰고 있었다. 신경원은 라미레즈의 무덤 쪽을 가리키며 뭐라 떠들고 있었다.
잠시 후, 키이스가 모델 뺨치는 워킹으로 그들에게 걸어왔다. 다만 중간 중간 제 정강이를 문질러대서 모양이 좀 많이 빠졌다.
“좀 늦었습니다.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했습니다.”
키이스는 아주 반듯한 태도로 예들린이며 선임들에게 인사를 했다. 캐리에게는 더 각별히 신경을 써서 안부를 물었다.
“몸은 괜찮냐?”
“네, 바로 복귀해도 될 정돕니다. 아, 치프, 저 내일부터 복귀해도 되겠죠? 아니다, 복귀하겠습니다.”
“복귀…하겠다고?”
예들린은 키이스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복귀를 원한다 해도 주변에서 그를 가만두지 않을 터다. 예들린은 속을 털어놔보라는 듯 예리한 눈빛으로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저 빙글 빙글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키이스는 양해를 구하고 하관 후 마지막 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무덤으로 갔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 후 잠시 묘비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돌아왔다.
“클리퍼드.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는 길게 이야기하기 뭐하니 내일 좀 일찍 올 수 있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30분 정도면 될까요?”
“좋아. 그리고….”
“……?”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아참, 치프. 라미레즈의 가족들은 바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음. 하루 이틀 정도 근처에서 묵으며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이야기를 좀 전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체류에 드는 비용은 모두 제가 부담하는 조건으로요. 돌아기는 비행기편까지 다 책임져드리겠다고 해주시면 더 좋고요. 제가 말을 할까 하다 라미레즈의 부친 같은 타입은 저보다는 치프가 말을 건네주는 쪽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예들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봐도 라미레즈의 아버지는 그런 타입이다.
“뜻은 이해했네. 하지만 자네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저분들에게도 스케줄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야 크리스마스 방학이라 학교에 갈 필요도 없을 텐데요 뭐. 이런 말을 하면 퍼스트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때로는 돈이 마음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경우에는 돈 그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되겠지만요. 거리가 있으니 묘지를 찾아오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며칠 더 근처에서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면서 작별의 인사를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
“단순하게 말하면 그냥 제 나름대로의 조문 방식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예들린에게 건네줬다.
“제가 개인적으로 부담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기관에서 배려해주는 거라고 하는 쪽이 더 잘 먹힐 거라고 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이, 클리퍼드.”
“네.”
“우리 이겼다고 하고 돈 걷어도 되는 거냐?”
키이스는 엄지를 척 들어 보인 후 환히 웃었다. 마치 어린 소년 같은 느낌이다. 그는 장난스럽게 거수경례까지 해 보이고는 그야말로 발걸음도 가볍게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신경원에게 뛰어갔다.
먼 거리였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신경원이 짓고 있는 작은 미소가 또렷이 보였다. 키이스가 달려가며 손을 흔들자 신경원의 미소는 조금 더 짙어졌다. 그 미소는 그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주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