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19)

14

신경원은 로커 룸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곳에 묵직하게만 느껴지는 몸을 내리기 전까지 수십의 사람이 앞과 뒤와 옆을 지나갔다. 그중 몇은 가까이 다가와 무언가를 물었다.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백업팀과 의료팀이 메마른 숲을 지나 자신과 키이스에게 달려왔었다. 그들은 피를 토하는 키이스를 들것에 싣고 키이스가 토한 피에 젖어 있는 신경원도 들것에 실어 숲을 빠져나갔다. 

산책로에는 어둠 속에서도 하얀 존재감을 가진 기관의 앰뷸런스가 있었다. 거기까지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이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게 희미했다. 

예들린이 와서 뭔가를 물었다. 라미레즈에 대한 것으로 대략 기억하는데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디서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기관에 돌아와서였는지,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였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신경원도 질문을 하긴 했었다. 키이스는 어떻게 되었냐고, 키이스 옆에 있어야 하는데 어디 있냐고 누군가에게 물었다. 

누가 대답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답 자체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키이스는 기관의 치료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에 현재 상태는 알 수 없다―였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직후 사고가 멈춰버렸다. 

신경원은 고개를 들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짙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로커가 주르륵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썰렁하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니 등골부터 시작해 온몸이 축축이 젖어 오싹했다. 샤워를 한 기억도 나지 않건만 벌거벗은 몸으로 젖은 타월만 허리에 걸치고 있는 탓이었다. 그 때문에 조금이나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옷을 입어야 할 텐데….

신경원은 멍하니 소름이 오톨도톨 돋아 있는 팔과 허벅지를 바라보았다. 솜털까지 바싹 일어나 있었다. 일어나야 되는데, 그래야 로커에서 옷을 꺼내 입을 수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 힘들다. 그때 머리 위로 허연 것이 툭 떨어졌다. 

“자식, 제대로 닦아야지. 물기가 그대로 남아 있잖아. 이러다 호되게 감기에 걸려봐야 정신 차리지. 응?”

“…아.”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타월로 감싸인 머리를 벅벅 문질러댔다. 거칠기 짝이 없지만 아프지는 않다. 

“존―.”

“응.”

존은 신경원의 머리를 닦아낸 타월로 어깨며 등판의 물기도 대충 닦아낸 후 앞으로 왔다. 그는 신경원의 목과 가슴도 말끔히 닦아줬다.

“왜 너 혼자 여기 있어? 키이스도 부상을 좀 입었다던데 병원에는 갔다 온 거야?”

“…아니, 어디 있는지 몰라.”

“모른다고? 어째서?”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모르는 걸까. 알아야 하는데.”

존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한 신경원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옷부터 입어라. 감기 걸리겠다.”

키이스에게 약속한 대로 그가 뱀파이어가 된 라미레즈에게 물렸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안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말을 하든 안 하든 현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자신은 본부의 로커 룸이 아닌 키이스의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홀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키이스는 어디로 보내진 것일까. 

무릎 위에 옷가지가 떨어졌다. 존은 보기만 해도 오싹해진다며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고 한 뒤 샤워실로 가버렸다. 이어 맥스와 존의 파트너 리드가 로커 룸에 들어왔다. 맥스는 신경원을 발견하더니 ‘여기 있었네’라며 아는 척을 하곤 샤워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신경원은 동료들에게 둘러싸였다. 익숙한 동시에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 익숙한 얼굴 하나가 없다. 

“캐리…는 어떻게 되었어?”

“옷부터 입어.”

보다 못한 존이 티셔츠를 잡고 머리를 꿰어줬다. 신경원은 어린 아이처럼 그의 시중을 받아 옷을 입었다. 그러자 맥스가 그의 옆에 앉아 가늘게 떨리고 있는 신경원의 손을 잡아주었다. 

존은 신경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래서부터 위로 얼굴을 들여다봤다. 리드는 언제나처럼 묵묵히 존의 뒤쪽에서 가만히 신경원과 자신의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병원에 갔다 오는 길이야. 캐리는 정강이뼈가 둘 다 부러졌어. 정신을 잃었긴 했지만 그건 별 문제 없고 다리를 빼면 다른 덴 이상이 없대. 수술한 의사 말이 뼈가 부러지긴 했어도 아주 깔끔하게 똑 부러져서 잘 붙을 거라더라. 재활 훈련 몇 개월 받으면 복귀하는 데도 무리 없고. 걱정하지 말라더라.”

“수술… 이 벌써 끝났어?”

그럼 도대체 그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다는 소리일까. 갑자기 손끝에서부터 찌르르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응. 봉합은 남았다고 들었지만 일단 어려운 건 다 끝났다고 해서 우리도 안심하고 본부로 복귀한 거야.”

“다행…이네.”

“그래. 불행 중 다행이지.”

“라미레즈…는?”

“아직… 현장에 있을 거야.”

신경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긴 했지만 반사적으로 그녀의 목에 단검을 쑤셔 박았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차가운 겨울 숲, 얼어붙은 땅에 누워 있을 라미레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쩌면 그녀의 얼굴은 이미 연기와 재가 되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직 남아 있다 해도 해가 뜨면 입고 있던 유니폼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재도 남기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질 거다. 

“넌 적절한 조치를 취했어. 라미레즈도… 원망하지 않을 거다.”

신경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운이 나빴어. 오늘 작전에서 총 9마리를 잡았는데, 다른 구역에서 사살한 놈들은 모두 B3이었는데 우리가 상대했던 놈들만 죄다 B1이었거든.”

맥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신경원을 위로하려 했다. 그래도 신경원이 ‘하지만…’하며 운을 떼자 좀처럼 입을 여는 일이 없는 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무뚝뚝한 투로 말했다.

“퍼스트. 라미레즈가 그렇게 된 원인은 순전히 그녀 자신에게 있습니다.”

“…….”

“라미레즈는 준비된 상황에서는 뭐든 잘해내지만 돌발 상황에서는 얼어붙어서 반응이 한 템포 느립니다. 캐리가 부상을 입은 것도 그녀를 보호하다가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퍼스트가, 수습 에이전트들을 직접 가르친 퍼스트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리드.”

“라미레즈를 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존. 퍼스트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퍼스트.”

신경원은 리드를 멍하니 바라봤다. 리드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라미레즈의 입장이었다면 퍼스트에게 감사했을 겁니다. 적어도 좋…, 존경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었으니까요.”

리드는 그걸로 할 말은 다했다는 듯 다시 입을 다물고 팔짱을 꼈다. 그때 로커 룸으로 수트를 빼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예들린이었다. 

“돌아왔으면 보고서를 써야지 여기 옹기종기 모여서 뭐하나.”

“이제 오셨습니까?”

“그래. 경찰이고 FBI고 다들 참새처럼 짹짹거리기나 하고, 귀가 아파 죽을 지경이다. 시장까지 나서서 난리야. 보고서 빨리 올리고, 신은 나 좀 보지.”

다른 곳도 아니고 센트럴 파크에 포위망을 펼치고 공원 전체를 무장한 병력들이 훑고 검문검색까지 했다. 사정이 사정이니 각 관계 부처에서는 어느 정도 눈감아주겠지만 시민들의 반응 때문에 수습이 그리 쉽지는 않을 터였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예들린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껴 있었다. 

동료들이 제각각 신경원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신경원은 맨 마지막에 일어나 예들린을 따라갔다. 그런데 예들린은 자신의 사무실로 가지 않고 신경원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그는 최상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대뜸 비상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멈춰 세웠다. 

“자네. 내게 할 말 없나?”

예들린은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태도는 그래도 눈빛은 깊고 진지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머릿속을 읽히는 듯했다. 

“고의로 누락한 보고가 있을 텐데? 작전 중에 통신기를 꺼버린 후에 클리퍼드와 나눈 대화 말일세.”

“…….”

“추궁하려는 게 아니다, 신. 사실을 들었는지 아닌지, 그걸 묻는 거다.”

신경원은 눈을 깜박이며 예들린을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들린은 담배가 피우고 싶은지 엘리베이터 안인데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래도 불은 붙이지 않았다. 

“무엇…을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치프.”

“그럼 내가 묻지. 클리퍼드가 뱀파이어가 된 라미레즈에게 물렸다는 사실은 왜 숨겼나?”

“……!”

“자넨 나를 좀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이래 봬도 나는 섹션 치프일 뿐 아니라 이 지부의 부부장일세. 다른 지역도 아닌 ‘기관의 총 본부’가 있는 뉴욕 지부의 부부장!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내가 내 입으로 꼭 설명해야 하나?”

“…….”

“자네가 모르는 것도 나는 알고 있고, 모른다 해도 알아낼 방법이 아주 많아.”

“…그건…….”

“클리퍼드가 말하지 말라고 하던가?”

신경원은 어쩔 줄 몰라 하다 “네”라고 실토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내게까지 보고하지 않은 것을 보니 다른 놈들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것 같은데 확실한가?”

“네….”

신경원은 일단 대답하고는 예들린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예들린은 묵묵히 신경원을 노려보다 허리를 펴며 묵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도 그 건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함구령을 내리겠다. 명심하게.”

“……?!”

“가능하다면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려. 그 편이 좋은 일이니.”

“치프?”

“클리퍼드 때문에 정줄 놓고 있었던 모양인데 걱정할 거 없어.”

“네?”

“녀석은 괜찮아. 조금 전에 연락이 왔네.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네를 찾았다고 하더군.”

그는 마치 조난자에게 던져진 구명줄과도 같은 말을 했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예들린에게 매달렸다. 

“정말이요? 피를 그렇게 토하고 경련도 일으켰었는데 왜 그랬던 거래요? 정말 괜찮은 겁니까?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고 긁힌 것도 아니고 물린….”

“진정해, 신.”

“치프!”

“피를 토한 건 나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 모양인데 몸에는 이상이 없다니 된 거 아닌가?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놈은 뱀파이어에게 물려도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몸이야. 그렇게 태어났지. 솔직히 말해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에이전트로서 그보다 더 적합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은 없어.”

예들린은 신경원의 어깨를 꾹 쥐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어린 아들을 달래는 듯 몇 번이나 꾹꾹 쥐었다가 놓고 등도 도닥인다. 

“그런 얼굴 하지 마. 클리퍼드는 멀쩡하다니까.”

예들린은 담배를 문 채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엘리베이터는 곧 기관 본부의 최상층에 다다랐다. 

그는 신경원의 등을 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그대로 계단으로 끌고 갔다. 찬바람이 부는 빌딩의 옥상에는 새카만 헬기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치프?”

“클리퍼드가 너를 꼭 봐야겠다고 했다더군. 가봐. 가서 자네 눈으로 멀쩡하다는 거 확인하면 내 명령이라고 말하고 뒤통수 한 대 후려치고 돌아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먼 곳은 아니니 가보면 알아.”

갑자기 키이스와 처음 만났을 때, 아니 그를 만나러 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영문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헬기에 타야 했다. 

“어서 갔다 와. 빨리 돌아와서 보고서 제출해야지.”

예들린은 신경원의 등을 툭―하고 밀쳤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하며 바람이 불었다. 얇은 셔츠 위에 걸쳐 입은 체크 남방 자락이 사정없이 팔락였다. 신경원은 불안한 마음을 가득 가슴에 담은 채 헬기에 탑승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잠자리처럼 생긴 작은 헬기가 사뿐히 옥상 위로 날아올랐다. 

강렬한 태양빛이 밤새 어둠 속을 달렸던 눈동자를 찌르듯 압박해왔다. 햇살이 눈에 익자 녹색 대신 회색으로 뒤덮인 센트럴 파크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보다는 나무가 먼저 보이는 그곳은 공원이 아닌 무덤처럼 보였다. 

신경원이 탑승한 헬기가 햇살 사이로 사라지자 예들린은 품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숨이 섞인 하얀 연기가 찬 겨울바람에 금세 흩어졌다. 겨우 두 모금을 빨았을 뿐인데 손가락 끝이 얼어간다. 예들린은 감각이 사라져가는 손으로 필터 끝까지 담배를 태웠다. 

언제나 있는 일이다. 익숙해진 일이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익숙한 일임에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어째 만사가 쉽지가 않아.”

신경원이 걱정된다. 겉으로 보기엔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었다. 평온하진 않았지만 적막하도록 고요해 보였다. 하지만 키이스에 대한 말을 전하자마자 표정이 격렬하게 흔들렸었다. 무심한 편인 신경원이 그렇게 무의식중에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조용하고 고요해 보였지만 그 얼굴엔 수없이 금이 가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무너지고 부서져 내릴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신경원은 지난여름 동안 파트너 없이 단독으로 작전에 임해 혼자서도 두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을 증명했다. 반드시 두 명이 짝을 이루어야 한다는 규칙에 ‘예외’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그럼에도 신경원에게 파트너를 골라보라 강권한 것은 그의 의사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규칙을 무기로 찍어 눌러도 솔로를 고집한다면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키이스다. 아카데미 수석에 빛나는 그는 원하는 곳이 많았을 것 같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대부분의 지부장들은 키이스의 배경을 알아보곤 그의 영입을 포기했다. 

그는 뜨거운 감자, 아니 한때는 뜨거웠지만 이미 식어가는 감자였다. 그러나 식어가는 감자치고는 배경이 너무 거창했다. 그에게 눈독을 들였던 예들린도 배경을 알자마자 포기했었다. 그런데 정작 그 본인이 뉴욕 지부 근무를 희망했다. 

예들린은 고심 끝에 키이스를 받아들이고 신경원의 파트너로 배정했다. 신경원은 지금까지 여러 명의 파트너를 갖가지 이유로 잃어보았으니 새 파트너가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나가버린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즉, 신경원을 솔로로 일하게 할 수 없어 키이스를 붙여준 것이 아니다. 신경원이라면 석 달 버틸 놈을 한 달이면 짐을 싸게 만들 거라 생각해서다. 배경 때문에 일방적으로 쓸어낼 수 없으니 제 발로 나가주길 바랐던 거다.

“…오산이었어.”

예들린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키이스가 그렇게 만만치 않은 놈인 줄 누가 알았을까. 능력은 둘째치더라도 초재벌가의 도련님이 그렇게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 성실히 주어진 업무를 수행해나갈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또한 파트너를 잃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탓에 까칠함의 최고봉에 올라 고슴도치처럼 바싹 가시를 세우고 있던 신경원으로 하여금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신경원은 마치 10년은 함께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마치 목숨보다 더 사랑하던 이를 잃어버린 사람같이 보였다. 

“하아―.”

예들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담배연기보다는 흐린 하얀 입김은 순식간에 바람에 의해 사라졌다. 몇 번 더 심호흡을 하며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신경원이 걱정되지만 그만을 걱정하고 있을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에이전트가 뱀파이어에게 물리는 일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일어나는 일이다. 달리 죽음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관 전체를 통틀어 보면 일년에 최소 2―3명 정도가 그런 일로 에이전트로서의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이번 경우처럼 물리자마자 바로 뱀파이어로 각성해 동료를 습격하다 그 동료의 손에 죽는 일은 결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신경원은 지금 키이스의 일로 혼란스러워하느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된 라미레즈를 사살한 장본인이니 만큼 제정신을 차리고 나면 분명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충격을 별로 받지 않은 듯했다. 그건 그거대로 문제라고 생각하는 예들린이다.

보기엔 다들 멀쩡해 보이지만 기관의 에이전트치고, 그중에서도 연차가 오래된 놈들치고 멀쩡한 놈들은 거의 없다. 유닛 Zero one의 에이전트들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존 브라이튼은 평소엔 다정한 성격에 사람을 잘 챙기는 좋은 사람이나 유니폼을 벗고 특정한 시간대, 즉 해가 진후 밖으로 나가면 걸어 다니는 인간 흉기로 돌변한다. 옆에 동료들이 있을 때는 괜찮다. 그러나 혼자 길을 걷다 누가 시비라도 거는 날에는 백이면 백, 경찰이 출동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캐리는 몇 가지 신경증을 앓고 있었는데 결혼한 이후로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일년에 한두 번 정도 가볍게 발작을 일으킨다.

맥스는 제일 얌전한 타입인 동시에 가장 큰 골칫덩어리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침식을 잊고 컴퓨터에 들러붙어버리는 것까진 좋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크게 사고를 치는 게 문제다. 작년 봄에는 무려 펜타곤의 보안 시스템에 해킹을 시도해서 난리가 났었다. 

그나마 존의 파트너인 리드가 가벼운 우울증으로 제일 멀쩡한 축에 속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아직 3년차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예측이 불가하다. 그리고 신경원은 조건이 달려 있는 불면증에 자잘한 트라우마 덩어리였다.

“환장하겠군.”

이번 일은 분명 그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익숙’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무의식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나마 여름이 아닌 게 정말 다행이야.”

시즌이 한창인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고 겨울은 그나마 뱀파이어들의 활동이 많이 줄어드는 계절이다. 거기에 뉴욕에서 활약하고 있던 B1을 셋이나 잡았으니 당분간은 고요하리라.

일단 상담부터 받게 한 다음 번갈아가며 휴가를 주면 어떨까 싶다. 신경원을 중심으로 하는 유닛 Zero one은 알렌의 유닛과 함께 명실상부 뉴욕 지부 투톱을 달리는 유닛이다. 실력도 최고고 과로도도 최고다. 그만큼 제대로 쓰지 못한 월차며 연차가 산처럼 쌓여 있다. 이번 기회에 연차를 청산시켜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예들린은 인원이 부족한 다른 유닛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부하들에게 쓰지 못한 연차가 잔뜩 쌓여 있었다면 그에겐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 * *

신경원은 멍하니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헬기에 실려 도착한 곳은 예들린의 말대로 먼 곳은 아니었다. 퀸즈 북부에 있는 라이커스 아일랜드였던 것이다. 5년 전 신입 연수를 받기 위해 찾아왔었고 그 뒤로는 딱 한 번 연수를 받는 신입들의 교관 자격으로 왔던 곳이다. 왜 한 번뿐이었냐면 가진 실력은 최고였으나 가르치는 방법이 너무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 

각 지역의 지부들이 밤낮을 바꾸어 운영되는 것과는 달리 기관의 총본부는 보통의 정부기관처럼 정상적인 시간대로 운영되고 있다. 신경원이 로비 한가운데 서 있는 동안에도 출근하는 연구원들이 줄줄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연구원들 몇이 검은색 진에 체크 남방을 입고 있는 신경원을 힐끔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신경원의 차림새가 그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슈트를 입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신경원은 연구동 로비 중앙에 오도카니 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를 데려다준 헬기 조종사는 신경원을 내려놓고 연구동으로 가면 된다는 말만 남긴 채 곧장 날아가버렸다. 그래서 연구동에 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보안 직원에게 물으려 했으나 마침 출근 시간인지라 바빠 보여서 그냥 멍하니 기다린 것이다. 

10시 반쯤 되자 출근하는 인원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제야 보안 직원이 신경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원에게 다가오다 말고 방향을 틀어 회전문 쪽으로 달려갔다. 신경원은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다 아는 얼굴을 둘이나 발견했다. 

키이스의 나이차 많이 나는 형들, 조나단과 네이선이었다. 그들은 80대는 훨씬 넘어 보이는 어떤 노인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신경원은 두 사람을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신경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보안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곧장 검색대를 통과해 사라져버렸다. 보안 직원은 그 이후에야 신경원에게 왔다. 

“실례합니다만 신분증을 제시해주시겠습니까?”

신경원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보안 직원에게 아무 말 없이 ID 카드를 내밀었다.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혹시나 키이스가 이곳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싶던 불안감은 키이스의 형제들을 본 순간 사라졌다. 

키이스는 이곳에 있다.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선 저 재수 없는 형제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과 함께 여기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지 않은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ID 카드의 사진과 신경원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유심히 살핀 보안 직원이 신경원을 제일 오른쪽의 검색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ID 카드를 조회하고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지문과 홍채 패턴까지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 신. 들어가셔서 왼쪽의 엘리베이터를 타시고 5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신경원은 ID 카드와 임시 출입증을 받아 목에 걸고는 검색대를 통과했다. 올라가보니 하얀 복도가 쭈욱, 길게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앉아 있을 만한 의자도 없었다. 그저 작은 팻말만이 복도에 난 유리문 위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10여 분을 서 있었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가 복도 거의 끝에서 나왔다. 그를 발견한 순간 신경원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팼다.

어디선가 본 사람이다. 어디서 봤을까. 정지되어 있던 머리가 순간 맹렬히 회전했다. 

“아―.”

그래. 그때, LA 지부에서 본 사람이다. 의료팀 팀장과 함께 들어와서….

“오랜만입니다, 에이전트 신. 혹시 제가 기억나실까요?”

“네, LA에서 뵈었었죠. 성함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오오. 경황이 없던 와중인지라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역시 대단하군요. 하하하.”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규정상 정확한 직책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연구 파트 하나를 책임지고 있는 엠브리시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친해지고 싶어서 하는 말인데, 저는 에이전트 신과 동문입니다. 제 쪽이 10년쯤 먼저 졸업하긴 했습니다만. 하하하.”

엠브리시오는 후일 신경원이 현역에서 은퇴하면 자신에게 와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는 신경원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음에도 매우 신이 나 보였다.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는 느낌이다.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군요. 조금 전에 가족들이 문병을 와서요.”

“키… 에이전트 클리퍼드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발작으로 인해 체력이 좀 떨어진 상태지만 매우 양호한 상태,”

그가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는데 어디선가 구웅― 하고 벽이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엠브리시오는 걸음을 멈추고 ‘이런’―이라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하아―,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안정해야 하건만 이를 어쩌면 좋을지.”

“안내해주십시오.”

“네?”

“안정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클리퍼드는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 뭐…그렇기는 한데.”

엠브리시오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을 말했다. 

“클리세딕 그룹에서 이 연구소에 매년 쏟아붓는 ‘기부금’이 만만치 않답니다. 그렇다 해도 눈치를 봐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렇고 그런 부분이… 이해하실 수 있겠죠? 

“네. 그러니 안내만 해주십시오.”

“에이전트 신.”

“저는 연구소 소속이 아닙니다. 닥터 엠브리시오.”

신경원은 딱 잘라 말했다. 

지금은 상태가 양호하다 해도 키이스는 피를 토하며 발작을 일으켰던 환자다. 안에 있는 게 클리세딕 그룹의 오너가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 해도 상관없다. 키이스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팔이든 다리든 목이든 모조리 꺾어 병실에서 내쫓아버릴 거다. 

신경원의 말에 엠브리시오는 한숨을 내쉬며 고민하다 다시 한 번 벽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굳게 닫혀 있는 유리문 앞으로 갔다. 그는 보안 카드와 지문인식을 마친 후 신경원을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오른쪽 두 번째 병실입…,”

“꺼지라고 말했잖습니까!”

“어이쿠.”

엠브리시오는 살짝 열린 병실 문틈 사이로 새어나온 목소리에 어깨를 장난스럽게 움츠렸다. 그러곤 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그것에도 어쩐지 배경에는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상황 자체를 즐기는 건지 아니면 뭔가 즐거운 일이 있든지 둘 중에 하나다.

무슨 상관이람.

신경원은 다시금 떨려오는 손을 꾹 쥐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병실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아버님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찾아오셨는데, 대체 너는!”

“알 게 뭡니까!”

“하!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기고만장해가지고!”

“버르장머리 없고 기고만장해서 멋대로 구는 놈을 왜 찾아오셨습니까! 반길 거라 생각했습니까? 눈물이라도 흘리며 매달려주길 바랐습니까?”

키이스의 목소리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제 형들을 앞에 두면 절로 변하던 표정이 생각난다. 어깨를 긴장감으로 굳힌 채 화를 터트리지 않기 위해 참던 뒷모습이 생각난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주십시오.”

“노아!”

조나단인지 네이선인지가 키이스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신경원은 병실문을 활짝 열며 주먹으로 쿵―소리가 나게 문을 쳤다. 

“병실입니다. 목소리 낮추십, ……!”

한 마디 하며 환하게 불이 켜진 병실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데 침대 가에 서 있던 키이스가 한달음에 달려와 신경원을 부둥켜안았다. 

“신!”

넓은 가슴에 얼굴이 닿았다. 키이스의 팔이 몸 전체를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고 죄어온다. 온기가 서늘하게 식은 몸을 감싸 안았다. 얼굴이 금세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쁨과 함께 포근한 안도감이 몸을 녹이고 굳어버린 머리도 함께 녹여갔다.

신경원은 그제야 자신이 키이스와 헤어진 이후로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었다. 생각도, 느낌도, 스치듯 지나가는 시간도, 모든 것이 멈추어 있었다. 그것이 키이스에게 안기자마자 단번에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다. 자신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미소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신경원은 손을 바르작거리다가 키이스의 등허리에 살짝 대고는 두 번 정도 토닥였다. 그러자 몸에 감긴 팔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키이스. 아파.”

“참으세요.”

“일단 놔.”

“싫어요.”

일단 한 대 패고 시작을 해야 하나 하는데 옆에서 네이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이 연구소 사람들은 뭘 하는 거야! 일개 필드 에이전트를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 함부로 들여보내고! 당장 시큐리티 불러와!”

“좀 닥쳐요, 네이선.”

“노아! 너야말로―,”

“으악!”

신경원은 키이스의 정강이를 가볍게, 아주 가볍게 걷어찼다. 키이스는 갖은 엄살을 떨며 신경원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신경원은 목을 가볍게 돌리곤 조나단과 나란히 서 있는 네이선 앞으로 다가갔다. 조나단이 움찔하며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선다. 신경원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조나단을 향해 말했다.

“때에 따라서는 말보단 주먹으로 패는 게 효과가 있는 사람도 있죠. 안 그렇습니까?”

조나단은 뒤로 물러섰던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허리를 세웠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그를 대로변에서 두들겨 팼던 것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키이스, 지난번에 내가 네 형님한테 한 짓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아―, 소송을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쪽 분한테도 손을 써도 괜찮을라나?”

“물론입니다, 신.”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노란 원숭이는, ―크억!”

신경원은 가볍게 몸을 날려 멋대로 지껄이는 하얀 원숭이를 쳐버렸다. 조나단을 후려 팼을 때는 많이 봐줬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날렸다. 네이선은 한 방에 넘어가버렸다. 조나단이 낯을 굳히며 그를 부축했다. 

“다 떠나서, 여긴 병실이고 저 녀석은 환잡니다.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고요. 가족끼리 할 말이 남았다면 나중에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신경원은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에이전트 신, 당신은 사정을 모르니 이번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드리죠.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야 할 사람은 당신입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어깨를 감싸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이곳에서 나가야 할 사람은 회장님을 포함해 세 분입니다. 저는 세 분과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더 이상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시죠.”

키이스의 말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회장이 역정을 냈다. 

“고연 놈! 아무리 네가 각성을 했다 해도 어찌 이리 버르장머리 없이 구느냐. 내 노구를 이끌고 너를 축하해주러 온 것이거늘!”

“…….”

회장은 형형한 눈빛으로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허나 키이스는 회장을 노려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눈빛에서 지독한 혐오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동그란 어깨를 꾹 쥐며 형들을 향해 말했다. 

“조나단, 네이선. 딱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지금 즉시, 떠나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명예 회장님을 모시고요.”

덧붙인 말에 조나단과 그에게 기대 있던 네이선의 안색이 싹 변했다. 노구의 회장은 얼굴을 붉히면서 ‘노아’라고 키이스를 부르며 화를 냈다. 키이스는 회장에겐 눈길도 안 주고 조나단을 쳐다봤다. 조나단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회장의 휠체어 방향을 돌렸다.

“기다려라, 조나단! 내, 저놈을!”

“당신의 세상은 끝났습니다. 돌아가세요.”

끼익끼익 하며 휠체어 바퀴가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맞춰 연거푸 키이스를 향한 회장의 욕설이 들려왔다. 그러나 키이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이 나가자마자 문을 닫아버렸다. 병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제야 신경원은 병실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금발을 예쁘게 틀어 올린 레이첼이 병실 한쪽의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다. 회장과 오빠들이 난리를 피우는 와중에도 내내 그러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만요, 신.”

키이스는 양해를 구했고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키이스는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레이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만 우세요. 네?”

“키이…스.”

“이렇게 자꾸 우시면 저 화낼 겁니다.”

“하지만….”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레이첼이 할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눈코 뜨실 새도 없을걸요?”

“어쩜 너는.”

레이첼은 울다 웃고 또 울며 키이스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키이스의 등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키이스도 그녀를 안고 등을 도닥여준다. 형제들과는 그리도 사이가 나쁘고 아버지와는 더더욱 나쁜 모양인데 어떻게 저렇게 누나인 레이첼과는 의가 좋은 걸까. 나쁜 거보다야 100배 낫지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이었다. 

“키이스… 내 아들. 내 예쁜 아들.”

…….

………뭐라고?

“나는 정말 기뻐서… 너무 기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구나.”

“그래도 그만 우세요. 어머니.”

설마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키이스의 입에서도 어머니라는 소리가 나왔다. 신경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모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예쁜 얼굴인데 빨갛게 퉁퉁 부어버렸잖아요. 신에게 정식으로 예쁜 어머니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못났다고 흉보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뭐 어때. 엄마가 아들에게 좋은 일이 있어서 기뻐서 우는 건데. 그렇죠, 신?”

“아…. 네.”

신경원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작은 소리로 뭐라 속삭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원에게 가까이 왔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신. 제 친어머니십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얼굴이 엉망인 건 이해해줄 거라 믿어요.”

레이첼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예쁘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신경원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며칠 더 뉴욕에 머무르게 될 테니 키이스가 퇴원하면 자리 한번 마련할게요. 꼭 와줘요. 알겠죠?”

“네. 알겠… 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키이스는 그녀의 외투와 가방을 가져왔다. 레이첼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웃는 얼굴로 아들을 타박했다. 

“신이 왔으니 난 얼른 가봐라 이거니?”

“저보다 레이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요. 이 백에 든 핸드폰이 아까부터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더라고요.”

“하아―. 지금도 바빠 죽겠는데, 네 말대로 앞으로는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지겠구나.”

“일하는 거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말이나 못 하면.”

레이첼은 키이스의 뺨에 손을 대고 살짝 어루만지더니 그의 뺨에 작별 키스를 했다. 키이스도 그대로 그녀에게 키스를 돌려주었다. 

“몸조심하렴.”

“네.”

레이첼은 다 닦아낸 뺨에 또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그걸 키이스가 닦아주자 다시 한 번 키이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나갔다. 키이스는 그녀를 문까지 배웅하고는 병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신경원에게 왔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손.”

“……?”

키이스는 눈을 깜박이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그쪽 손 말고.”

“아―. 괜찮아요. 벌써 아물기 시작했는걸요.”

신경원은 키이스가 물린 손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두 개의 구멍은 이미 막혀가고 있었다. 반창고도 없이 약만 조금 발라놨는지 주변이 번들번들했다. 손을 확인한 신경원은 고개를 들어 키이스의 얼굴도 확인했다. 조금 파리한 구석이 있지만 그렇게 심하게 피를 토한 사람답지 않게 정말로 멀쩡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걱정 많이 하셨죠?”

“가서 누워.”

“저 멀쩡한데요?”

“누워. 명령이다. 지금 당장. 실시.”

“키스부터 하면 안 됩니까?”

“맞고 누울래, 그냥 누울래?”

“저 환잔데요.”

“환자면 가서 누워!”

키이스는 히잉 소리를 내며 침대로 갔다. 하지만 그는 눕지 않고 그냥 침대에 걸터앉기만 했다. 신경원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우라니까.”

“불청객들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누워 있었어요. 아참, 저도 신처럼 이온 음료가 싫어지려고 해요. 수혈이 안 돼서 계속 조혈제 맞고 이온 음료만 마셔댔더니 속이 출렁출렁거리며 느글느글한 것이….”

키이스는 말을 하다 말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뭔가 굉장히 놀란 표정이었다. 

“왜 그래?”

“신이야말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겁니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 ―이런.”

긴 팔이 신경원을 향해 뻗어왔다. 그것은 그대로 신경원의 어깨를 감싸고 등과 허리에 휘감겼다. 

“울지 마세요.”

“……?”

“제발, 그렇게 소리 없이 울지 마세요.”

신경원은 제 손을 들어 뺨을 만졌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눈가가 조금 간지럽다 싶긴 했지만 설마 눈물이 흘러나왔을 줄은 몰랐다. 

“그냥 눈물만 좀 난 거야. 안 울었어.”

키이스는 그게 그거 아니냐며 신경원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셔놓고 이렇게 우시면 어떻게 해요.”

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에선 계속 눈물이 나왔다. 손등으로도 닦아보고 소매로도 닦아봤지만 멈추질 않는다. 다른 곳은 다 멀쩡한데 눈물샘만 고장 난 것 같았다. 연거푸 닦아내도 그칠 줄 모르는 눈물 때문에 신경원은 그만 당황해버렸다. 

“도대체 왜.”

눈물은 6년 전에 흘릴 만큼 흘렸다. 그 뒤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다. 차라리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다면 키이스가 무사한 것이 그만큼 기뻤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텐데 소리는커녕 목이 메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눈에 수도꼭지라도 달아놓은 것마냥 줄줄, 눈물만 흐른다. 

키이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주다 그거로는 안 되자 입고 있던 환자복 상의를 훌렁 벗어 신경원의 눈가를 덮었다. 순간 키이스의 냄새가 훅 하고 코를 덮쳤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왔다. 눈물이 왈칵 하고 쏟아져 나온다. 

제길…. 씨발.

욕설이 소리 없이 입안을 맴돌았다. 키이스는 그대로 다시 신경원을 끌어안았다. 귓가에 미안하다는 말이, 죄송하다는 말이 계속 들려왔다.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며 계속 신경원의 등을 도닥였다. 

신경원은 그렇게 소리 하나 없이 계속 울었다.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미친 듯이 흐르던 눈물이 멈추기 시작한 것은 그를 안고 있던 키이스가 은근슬쩍 신경원의 이마며 볼이며 눈가에 제 입술을 부비기 시작했을 때였다. 

“뭘 하는 거야.”

신경원은 벌건 얼굴을 한 채 벙글거리는 키이스의 얼굴을 밀어냈다.

“생각해보니 신이 저 때문에 운다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엇! 저 환잡니다. 환자. 몸 안에 피란 피는 전부 다 토해낸 급성 빈혈 환자라고요.”

대뜸 손을 들었더니 키이스는 몸을 움츠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거짓말인 게 뻔했지만 얼굴색이 파리해서 봐줬다. 게다가 지금 한 말이 신경 쓰였다. 

“몸 안의 피를 다 토해냈다고?”

“네. 밤새도록. 정확하게 얼마나 토했는지 모르겠지만 닥터 엠브리시오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제 경우는 말이 될지도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궁금하세요?”

키이스는 얄밉게 웃으며 신경원을 쳐다봤다. 진심으로 한 대 패주고 싶었다. 

“음….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생각나는 대로 말해.”

“이야기가 그리 길진 않지만 죄다 꼬여 있어서 말하기가 참 그런데 일단 앉으세요. 차근차근 이야기해드릴 테니까요.”

신경원은 즉시 가장 가까이 있던 의자를 가져왔다. 그러곤 구겨져 있던 담요를 키이스의 벌거벗은 상체에 덮어주고는 그의 앞에 앉았다. 키이스는 자신의 옆에 앉아주길 바랐다며 투덜거렸다. 

“빨리 이야기해.”

궁금해서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니까. 

“쉬운 거부터 가죠. 글록, 가지고 계세요?”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망한 가운데 등을 떠밀려 오긴 했지만 무기 하나는 참 착실하게 챙겨 왔다. 키이스는 글록을 달라고 하더니 탄창을 빼 총알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린 그는 신경원의 앞에 내밀어 보였다. 

“이 안에 성수가 채워져 있다는 건 아시죠?”

“알아.”

“성수 이외에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어떤 특수한 물질이 극소량 들어 있다는 건요?”

신경원은 다 아는 이야기는 패스하자며 키이스를 독촉했다.

“아뇨. 신이 모르는 게 있어요. 문제의 그 특수한 물질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스무고개 하듯 길게 늘이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말해.”

신경원은 살짝 끓어오르는 짜증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키이스는 에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정말 간단명료하게 말씀드리죠. 그 특수한 물질은 어떤 사람들의 ‘피’예요.”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함량을 따지면 극히 미량이지만 분명 사람의 피가 들어 있어요. 그게 들어가지 않으면 이 총알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총알뿐이 아니에요. 뱀파이어에게 입은 상처를 치료할 때 쓰는 특수 앰풀도 마찬가지죠. 거기에도 총알에 들어가는 피의 양과 동등한 양의 피가 들어 있어요. 그리고 신이 쓰는 그 단검도 피를 섞은 성수로 담금질을 해서 만들어요. 그게 아니면 뱀파이어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죠.”

“…….”

“물론 보통 사람의 피는 절대 아니에요. 어떠세요? 감이 좀 잡히십니까?”

신경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잡히지 않는 건 아니지만 가물가물하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이 세상엔 뱀파이어 퇴치에 유효한 피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은밀히 이어져온 핏줄인데 그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 전부가 다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피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아요. 그중에 몇 명, 아주 낮은 확률로 ‘각성’을 한 사람의 피만이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죠.”

신경원의 눈동자가 급속히 팽창했다. ‘각성’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회장이 한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까 분명… 네가 각성을 했다고….”

키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네’라고 답했다. 

“무척이나 늦은 각성이지만 각성을 하긴 했죠. 보통은 성인이 되면 바로 각성을 하는데 저는 몇 년이 더 걸린 셈입니다.”

“…….”

“이렇게 늦게 각성하는 건 전례가 별로 없는 일이긴 해요. 거기에 피를 토하면서 각성한 사람은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라서 저도 좀 놀랐습니다.”

신경원은 멍하니 키이스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신화에나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인데 키이스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과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는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인 듯했다.

“각성을 한 사람의 피는 ‘성혈’이라고 불러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성혈의 소유자가 9명이 있어요. 그들이 있기에 이 총알을 만들 수 있는 거고 이게 있기 때문에 뱀파이어를 사냥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 안 되시는 거 있나요?”

신경원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성혈’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진 모르겠지만 맥락은 확실히 이해했다.

“그럼 남은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있겠네요.”

키이스는 목이 마르다며 잠깐 기다려달라고 한 뒤 테이블에 잔뜩 놓여 있는 이온 음료 병을 들고 왔다. 

“진짜 피를 계속 토할 때는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 그런 표정 하는 거 금집니다. 심장에 안 좋아요.”

거울이 없으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키이스가 저러는 걸 보면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하. 그럼…. 이제 저와 레이첼의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키이스는 클리퍼드를 시작으로 열 개의 성을 읊었다. 그중에는 신경원도 알 만한 유명한 정계 가문의 성도 있었고 클리세딕처럼 일반인들도 다 아는 초거대 그룹의 오너 가문의 성도 있었다.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분명 유명한 가문의 성일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몇 개 더 있는데 정치나 경제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집안들이죠. 전부 성혈의 소유자를 보유하거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가문들이에요. 그들이 가진 기득권의 원천이 무엇인지 충분히 아시겠죠?”

“‘성혈의 소유자’ 그 자체가 기득권을 얻을 수 있는 열쇠라는 건가?”

“네. 그들이 없으면 ‘인간’이라는 ‘종’은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종’ 자체의 생존에 필요한 원초적인 필요충분조건이니 성혈의 소유자를 보유한 자들은 기득권을 얻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나라가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와는 약간 다른 양상을 띠고 있긴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성혈의 소유자가 태어나는 집안은 ‘인류’를 위한다는 대의적인 목적 이외에도 자기 집안의 영달을 위해 성혈이 태어나는 핏줄을 지키고 보호해요.”

“그럴 수… 밖에 없겠지.”

“원래 그 핏줄을 이은 자들은 ‘성혈의 일족’이라 불려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죠. 피가 부계가 아니라 모계로만 이어지거든요.”

키이스가 설명한 것은 이랬다. 

부친이 누가 되든 성혈의 일족에 속하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매우 낮은 확률로 ‘성혈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가능성이 있는 아이는 성인이 되면 각성을 해서 성혈의 소유자가 되든가 아니면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피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성혈로 각성할 가능성은 남녀가 똑같아요. 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각성하지 못해도 성혈의 소유자를 낳을 수 있는 ‘일족’의 일원이 되기 때문에 각성한 남자보다 훨씬 소중한 취급을 받죠.”

“그러면 레이첼은 ‘성혈의 일족’이라는….”

“네. 레이첼의 어머니는 지금은 유명무실해지긴 했지만 과거에 대통령까지 배출한 명문가 집안의 딸이었거든요. 그 집안의 딸들은 지금도 여러 명문가로 시집을 가고 있죠. 경쟁률이 굉장히 치열하다고 들었어요.”

키이스는 자신이 물려받은 이름의 원래 소유주. 즉,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1세가 성혈의 소유자라는 말을 덧붙였다. 

“할아버지 위쪽으로는 대대로 성혈의 소유자가 태어났었기 때문에 클리세딕은 그걸 기반으로 성장해왔어요. 그런데 ‘전’ 회장의 대에는 각성을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딸이라도 하나 태어났다면 별 문제 없었겠지만 전부 아들뿐이었죠. 다행히 그 아래로는 레이첼이 태어났지만 레이첼도 그렇고 조나단과 네이선도 각성은 하지 못했고 친척들 중에서도 나오지 않았어요. 조나단과 네이선이 일찌감치 그쪽 핏줄의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거기서도 수확이 제로. 그쯤 되니 전 회장이 굉장히 조급했던 모양인지….”

“…….”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요. 이대로라면 그룹의 기반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첼은 태어났을 때부터 결혼 상대가 정해져 있었고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결혼했어요. 그런데 몸은 건강한데도 임신이 안 되자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들락날락했죠. 그때 전 회장이 손을 썼어요. 병이 있다는 핑계로 가벼운 수술을 몇 차례 받게 하면서….”

키이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목소리에도 우울함이 가득했다.

“레이첼의 난자를 훔쳐내고 거기에 냉동 보관해놨던 자신의 정자를 수정시켜서 대리모를 고용해 아이를 낳게 한 거죠.”

“……!”

“그거 아세요? 인공수정에 관련된 의료산업이 어째서 그렇게 급속도로 발전했는지.”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전 회장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던 거죠. 인공수정으로 성혈의 소유자를 찍어내듯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뭐 이건 그냥 하는 이야기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제가 태어났는데 당연하지만 레이첼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저도 몰랐고요. 전 회장이 철저하게 손을 썼기 때문이죠. 사실이 밝혀진 건 이 연구소에서 검사를 받은 후였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DNA 검사부터 철저하게 하거든요.”

키이스는 먼눈을 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쓰려오고 속이 미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레이첼은 제 누나이기도 하고 어머니이기도 해요.”

키이스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은 안 했어요’라고 한마디 덧붙이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저렇게 아픈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출생에 대해 고뇌하고 고통을 받아왔는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네이선과 조나단이 저를 ‘노아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왜 당연한 소리를 그렇게 기분 나쁜 어조로 말하는 건지 궁금했었죠. 뭐, 제가 첩의 자식으로 그 집안에 들어갔을 때부터 저를 적대시했던 사람들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지만….”

“…….”

“사실을 알고 보니 ‘롯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 자기들 딴에는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부른 것 같더라고요.”

성서에는 아비와 딸의 근친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지자 남편감을 찾지 못할 거라 생각한 롯의 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동침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키이스와 레이첼의 경우는 그 반대지만 형제들은 그 이야기에 빗대 자신들의 동생이자 조카를 조롱했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째서 형제들과 그렇게 사이가 나쁜지, 키이스가 회장에게 왜 그리 무례하게 굴고 혐오가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듣고 있는 자신도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데 당사자의 고통은 짐작하기도 힘들다.

“제가 사실을 알게 된 건 열두 살 때였어요.”

“……!”

“그때부터 제 몸에 흐르는 피를 저주했죠. 할 수만 있다면 제 몸의 피를 완전히 갈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성인이 되는 날만 기다렸어요. 하루라도 빨리 결판이 났으면 했으니까요. 그리고 18살이 되어도 각성을 하지 않아서 정말 뛸 듯이 기뻐했죠. 각성했다면 더 기뻤을지도 모르지만 아니라면 정정당당히 클리퍼드가를 뛰쳐나갈 이유가 생겼으니까요. 그런데 이 망할 몸이… 이상하게도 평범한 사람처럼 변하지 않고 각성할 여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더라고요. 이쪽 말로는 ‘인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성인이 되며 사라져야 할 인자가 그대로 남아서 망할 전 회장이 계속 집착을 하게 만들었죠. 마치 끝없는 희망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어요.”

키이스는 몇 개월에 한 번씩 연구소로 와서 검사를 받아야 했고 그거로는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전 회장이 수시로 찾아와 피를 뽑아 갔다며 진저리를 쳤다. 

“기관에 들어오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인자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뱀파이어에게 물려도 죽지 않으니까 안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뱀파이어와 직접 마주쳐서 싸우다 보면 각성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제가 아니라 전 회장이요.”

키이스는 거기까지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원에게 왔다.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뻗어 신경원의 얼굴을 감쌌다. 

“전 솔직히 기관 따위에는 들어오고 싶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어서… 계속 거부하면 회장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건 둘째였죠.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될 것이 뻔한데 그러면 레이첼이 슬퍼할까 봐 회장의 말을 따랐던 거예요. 몇 달 하다가 봐라, 아무런 변화도 없지 않냐. 소용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만두려고 했어요. 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만 생각했었어요.”

“키이스….”

“지금은 달라요. 이런 피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저는 신을 만날 수 없었을 거고 그 순간에 신을 구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따스한 손이 신경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그 손에 얼굴을 기댔다. 긴 손가락이 귀와 머리카락으로 파고들었다.

“신을 구하고 나서 생각했어요. 정말 이런 피를 가지고 태어나서 다행이다. 물려도 죽지 않으니 계속 신의 곁에 있을 수 있겠다. 앞으로도 계속 신을 지켜줄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렇게요.”

키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화사한 미소가 눈에서부터 피어올라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아세요? 제가 각성한 건 오로지 신 때문이라는 거.”

미소 어린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말캉한 입술이 신경원의 입술 위에 살포시 닿았다. 

“키이….”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하면서도 뜨거운 혀가 침입했다. 귓바퀴를 맴돌던 손가락이 그대로 뻗어나가 목덜미를 감쌌다. 키이스의 손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신경원의 얼굴을 당겼고 마주 닿은 입술은 그대로 키이스에게 삼켜졌다. 

신경원은 저항하지 않았다. 안으로 파고드는 혀에 자신의 혀를 얽으며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그러자 키이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탐욕스럽게 신경원의 입술을 먹어치우고 숨결까지 빨아들일 듯 강하게 혀를 감아왔다. 

빨아들인 혀를 지그시 깨물고 놓아주고 다시 얽어 비비고 연약한 점막을 마음껏 유린했다. 그의 키스는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고 젖은 입술과 타액에 젖은 피부를 한참이나 할짝거린 후에야 신경원을 놓아주었다. 

더운 숨결이 계속해서 입가와 코끝에 닿아왔다. 키이스가 이마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24년 동안 저는 계속해서 굴레를 쓴 채 살아왔어요.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해본 적이 없었죠. 하지만 이젠 완전한 자유를 얻었어요. 신 덕분에. 그러니까 이제는 신을 위해서 살고 싶어요. 사랑받는 것까진 원하지 않을게요. 그저 옆에 있게만 해주시면,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저를 좋아해주시면….”

순간 신경원은 머리에 떠오른 말을, 가슴에 있는 말을 그대로 여과 없이 내뱉었다. 

“나는 네가 필요해.”

“……!”

“왜 네가 그때 내게 고백했는지 알 것 같아.”

키이스는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신경원은 반나절뿐이라 해도 잃어버린 후에야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키이스보다 머리가 나쁜 걸지도 모르겠다. 

“담아둘 수 있을 줄 알았어.”

“……?”

“자꾸만 너를 생각하게 되는 마음을… 그냥 담아두고 보기만 해도 괜찮을 줄 알았어. 그런데 네가 내 앞에서 사라지니….”

신경원은 미소를 지었다. 지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멈춰버리더라.”

시간이 흘러도 흐른 것 같지 않았다. 뭔가를 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흐릿했다. 인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네가 없으니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어.”

신경원은 손을 들어 키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얀 얼굴을 감쌌다. 

“네가 없으니 제대로 생각도 할 수 없었어. 네가 내 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어. 너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몰랐었어.”

키이스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져나간다. 신경원은 계속 웃으려 했다. 하지만 과연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 할 말을 키이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절실하게 필요해.”

“신….”

손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네가 있어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신경원’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너를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면서도 너를 제대로 돌아봐주지 않을지도 몰라.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너를 무시할지도 몰라. 옆에 있는 걸 잊어버리고 미친 듯이 내 갈 길만 달릴지도 모르고… 그런 주제에 왜 빨리 따라오지 못하냐고 널 다그칠지도 몰라. 이런데도 내 옆에 있을 수 있어?”

하얀 손이 올라와 신경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 옆에 있을 수 있어?”

파란 눈동자 주변의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눈동자 아래로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실망한 걸까? 아니면….

“있잖아요, 신….”

키이스의 목소리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아세요?”

“당연히 알지. 내가 한없이 이기적이라는….”

“그게 아니에요! 모르고 있어요!”

“…….”

“내가 없으면 숨 쉴 수 없다면서요.”

“그래.”

“내가 없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면서요. 그래도 모르겠어요?”

“…….”

“그건 내가 없으면 못 산다는 거고 다른 말로 하면 날 사랑한다는 소리라고요!”

키이스는 버럭 소리를 치곤 신경원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그러고는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요! 빌어먹을! 왜 그걸 몰라!”

“사랑….”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요. 지금 제게 한 말을 해주면서 물어보라고요. 백이면 백 다 신은 날 사랑하는 거라고 대답해줄 거예요. 젠장!”

“우앗!”

키이스는 신경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빙글 빙글 돌았다. 미친 사람처럼 마구 웃어대기까지 했다. 

“키, 키이스! 내려놔! 너 환자…,”

“알 게 뭐예요! 젠장,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기쁜데.”

키이스는 계속 빙글빙글, 신경원을 안은 채로 제자리를 돌았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날이 저물 때까지 돌 기세였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닥터 엠브리시오였다. 그는 키이스에게서 신경원을 잡아 뜯어내듯 하고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키이스를 야단쳤다.

“제정신이에요? 급성 빈혈 상태나 다름없으니 며칠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에이전트 신도 마찬가집니다. 라이선스도 있는 의사가 밤새도록 피를 토한 환자한테 안겨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됐고, 신의 질문에나 답해보세요.”

“뭐라고요?”

키이스는 신경원의 어깨에서 엠브리시오의 손을 털어내고는 제 앞에 돌려세웠다. 

“신, 물어봐요.”

“뭘.”

“저한테 했던 말.”

“…….”

신경원이 입을 열지 않자 키이스는 싱글벙글하며 입을 열었다.

“신이요, 제가 없으면 숨도 못 쉬겠고 생각도 못 하겠답니다. 제가 없으면 못 살겠대요. 그런데도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거든요? 닥터 엠브리시오는 아시죠?”

순간 엠브리시오의 얼굴에 이건 어디서 온 병신들인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대답해주세요. 얼른.”

“이봐요, 에이전트 클리퍼드. 여기가 어딘지 잊었습니까?”

“대답부터요. 짧고 간단명료하게.”

엠브리시오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환자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목적을 가진 그는 병신이라는 소리도 아까울 것 같은 커플을 향해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 

“없으면 못 살겠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좋아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보다 한 단계 더 나가면요?”

엠브리시오는 똥을 씹는 표정으로 네 개의 알파벳을 차례로 불러줬다. L. O. V. E. 라고.

“들었죠, 신?”

키이스는 신경원을 제 쪽으로 돌려세우고는 멱살을 잡아 안으며 거칠게 키스를 해왔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신경원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키이스는 절대 손을 풀지 않았다. 신경원은 결국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으앗―.”

일단은 주치의의 앞인지라 차마 걷어차진 못하고 스니커즈를 신은 발로 키이스의 맨발을 꾸욱 지르밟아버린 것이다. 엠브리시오는 엄살을 피우며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는 키이스를 잡아 침대로 데려가 억지로 눕혔다. 신경원은 당연히 그에 합세했다. 

“애정 행각은 제발 퇴원하고 나서 둘이서, 오붓하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십시오. 여긴 병실이고 에이전트 클리퍼드는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예요.”

엠브리시오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온 음료 병을 키이스에게 내밀었다. 키이스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이온 음료를 꿀꺽꿀꺽 소리 내며 마셨다. 그걸 보는 신경원의 미간에는 절로 주름이 잡혔다. 독약이라도 되는 눈빛이었다.

“환자 면회는 이걸로 끝입니다. 가시죠, 에이전트 신.”

엠브리시오가 신경원의 손목을 잡는 순간이었다. 키이스는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으로 엠브리시오의 손을 커트하고는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허락 없이 함부로 신에게 손대지 마세요. 어차피 허락 안 할 거지만.”

신경원은 이제 토마토처럼 변해버린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어린애처럼 왜 이래!”

“사랑하면 원래 유치해져요!”

“난 안 그래!”

“그렇게 될 거예요. 그렇죠, 닥터 엠브리시오?”

엠브리시오는 결국 펑―터져버렸다. 

“둘이 서로 사랑한다는 거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해요!”

“…….”

“…….”

“이건 무슨…,”

엠브리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명령했다. 

“에이전트 클리퍼드는 침대로 돌아가십시오. 3초 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사흘은 여기 가둬두고 에이전트 신을 비롯해 그 누구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에이전트 신은 당장 퇴실하세요. 내일 또 면회를 오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 둘, 셋!”

키이스는 즉각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신경원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나갔다. 문 앞에 다다를 즈음 키이스가 신경원을 불렀다. 

“신.”

“…….”

“사랑해요.”

키이스가 손 키스를 날렸다. 신경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까지 붉어진 제 손가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참, 손만 내려다보지 말고 손 키스 정도는 날려줘요. 안 그랬다가는 병실을 탈출할 것 같으니.”

키이스는 엠브리시오에게 간만에 옳은 말을 하신다며 환호했다. 하지만 신경원은 결국 손 키스를 날리지 못했다. 그냥 손을 내밀어 휘저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키이스는 날아갈 듯한 기분인지 소리 없이 닫히는 문 사이로 “Ye~s!!” 하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엠브리시오는 혀를 쯧쯧 차며 먼저 몸을 돌렸다. 신경원은 머뭇거리다가 빨간 손을 들어 제 입술에 눌렀다 닫힌 문에 살짝 대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작은 싹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라 신경원의 가슴을 꽉 채웠다. 싹이 자랄 토양과 양분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했다.

신경원은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힘차게 뛰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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