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19)

13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닥터 엠브리시오.”

건네 온 인사에 이름을 붙여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닥터 엠브리시오는 쓴웃음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플라스틱 통에 든 약을 내밀었다. 키이스는 말없이 약을 받아들고는 그에게 살짝 묵례를 한 다음 사무실을 나와 반듯한 걸음걸이로 아무도 없는 연구실을 가로질렀다. 벽의 시계를 살짝 보니 무려 8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가 오늘 라이커스 아일랜드의 총본부 연구실을 찾은 것은 예정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서였다. 평소에는 6시간 정도면 끝이 나는데 늦게 온 탓도 있고 검사 목록이 늘어서 그런지 2시간이 더 걸렸다. 

본래의 예정대로라면 오늘 아침 일찍, 새벽같이 총본부를 찾아왔어야 했다. 검진을 마치고 바로 복귀할 생각을 했었다. 혹시나 싶어 휴가를 받아놓긴 했지만 신경원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은 제멋대로 어긋났고 결국 한밤중이 되고 말았다. 키이스는 그를 거의 만 하루 동안 잡아둔 사람들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매해 크리스마스 저녁에 열리는 클리퍼드가의 홈 파티는 말이 홈 파티지 클리퍼드가의 실세들과 클리세딕 그룹의 고위 임직원과 그의 가족들이 모이는 일종의 총회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신년 기념 파티도 열리지만 크리스마스 파티 쪽이 좀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런 이유로 키이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현 회장의 직계, 즉 후계자 자격이 있는 자는 모두 열 일을 제치고라도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룹의 후계자 자리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어쨌건 직계 핏줄을 이은 입장이다 보니 아주 살짝 그룹의 일에 관여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쪽 일은 모두 레이첼이 관리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가주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키이스는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물론 키이스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의미가 어떠하든 별반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파티에 꼬박 꼬박 참석하는 이유는 오직 레이첼을 위해서다. 그녀는 키이스가 클리퍼드가의 일원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기 원했다. 대외적으로 회장의 혼외자식으로 알려져 있기에 더더욱,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 그가 모욕이나 수모를 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흠 잡힐 만한 일은 하지 않기를 원했다.

키이스는 언제나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왔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문드러져 썩어가는 한이 있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그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게, 반듯한 모습만을 보여왔다. 레이첼이 자신 때문에 안 좋은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해서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노력을 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만 든다. 레이첼에게 이야기하면 속상해하며 눈물을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다. 가능하면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긴 하지만 이젠 그에겐 그녀와 동등…, 아니, 더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 생겼다.

그냥 확― 상속 포기를 해버릴까? 그럼 레이첼은 몰라도 조나단이나 네이선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텐데. 

돈은 좋다. 10살 이후로 부유함을 옷처럼 입고 살아왔으니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돈이 많으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 신경원이 원하면 언제든 전세기나 자가용 제트기를 띄워줄 수도 있고 그가 바라는 것이라면 뭐든 사줄 수 있고 소소하게는 삼시 세끼를 최고 등급의 소고기로만 먹게 해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크게 불편할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라 해도 신경원은 그를 내치지 않을 거다. 뭐든 해줄 수 있는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키이스는 무표정한 신경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는데 기껏해야 고기를 사주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다. 

신경원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키이스의 세상에는 레이첼 이외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과 그녀가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두 개의 중심점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중심은 단 하나, 신경원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레이첼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네.

씁쓰레 웃는 그의 입가에 자조의 빛이 어렸다. 그것은 연구동을 나와 대기하고 있는 차에 타자 더더욱 짙어졌다.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못한 레이첼이 늦은 시간임에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서 계속 기다리셨던 아니죠?”

“그럴 리가. 간만에 시간이 나서 쇼핑 좀 하고 식사도 하고 쉬다가 시간 맞춰서 왔단다. 수고했어.”

“수고는요.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끝나는데.”

“그게 움직이는 것보다 힘들어.”

키이스와 닮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나간다. 그녀는 이제 40대 중반의 나이에 다다랐지만 열 살 무렵 처음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아름다웠고 조금은 슬퍼 보였다.

“배고프겠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지?”

차가 출발하자 레이첼은 키이스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검진받는 날이야 으레 그러려니 합니다. 생각보다는 괜찮아요.”

“호텔에 주문을 해놨어. 도착하는 대로 먹을 수 있게.”

레이첼은 손을 들어 키이스의 뺨을 감쌌다. 키이스는 빙긋 웃으며 그 손에 얼굴을 기댔다. 나름의 어리광이다. 

“지난번에 봤을 때도 좀 마른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일이 많이 힘든가 보다. 귀찮다고 식사 안 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너 툭하면 끼니 거르잖아.”

“설마요. 먹지 않으면 못 버티는걸요. 챙겨 먹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 이전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있어요. 그리고 보시기엔 마른 것처럼 보이시겠지만 이거 벌크업 한 거예요. 군살이랑 지방은 쏘~옥 빠지고 근육만 남았거든요.”

키이스는 팔을 들어 꾹 힘을 주었다. 레이첼은 못 말리겠다는 듯 슈트 소매 자락을 꽉 채운 단단한 근육을 살짝 만져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고. 그래도 식사는 꼬박 꼬박 잘 챙겨 먹으렴.”

차는 금세 다리를 건너 퀸즈로 접어들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연말인지라 거리에는 차가 많았다. 그래도 낮처럼 꽉 막히지는 않아서 맨해튼의 호텔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룸에 도착하니 레이첼이 말한 대로 디너가 풀 세팅 되어 있었다. 키이스는 도착하자마자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고기부터 썰었다. 레이첼은 흐뭇한 표정으로 키이스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화상대가 되어주었다. 키이스는 레이첼이 던지는 소소한 질문에 답하며 식사를 하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웨스트 빌리지에 아파트랑 맨션 가지고 계신 거 있죠?”

“있지. 왜?”

“비어 있는 거 있으면 제가 하나 써도 되나요? 아예 제 명의로 해주시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시면 그냥 적당히 하나 사도 되는데, 기왕이면 레이첼이 알아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키이스는 마치 오늘 날씨가 좋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레이첼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사람마냥 경악했다. 

“맨해튼에 집을 마련하겠다고? 진심이야?”

“네. 가능한 본부랑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크고 화려한 것 말고 적당한 수준에서….”

“잠깐, 키이스. 너 설마 기관 쪽 일, 계속 할 생각인 거니?”

“네.”

키이스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첼은 표정을 바꾸고 다시 물었다. 그래도 키이스는 똑같이 대답했다. ‘네’라고 단호하게.

“1년 정도만 있다가 그만둘 계획 아니었어?”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무슨 이유인데.”

“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주시면 말할게요.”

레이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키이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탐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키이스가 식사를 마친 후에야 입을 열었다.

“혹시 네 파트너 때문이니?”

“네?”

“키이스. 내가 널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의뭉 떨지 마.”

키이스는 멋쩍게 웃었다. 스스로 깨닫는 데는 그렇게 시간이 걸렸건만, 선임들이나 레이첼은 어째 자신보다 더 잘, 그의 심중에 누가 있는지 금세 파악해버린다. 감정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대상이 신경원이 되면 저도 모르게 모든 것을 오픈해버리고 마는 모양이다. 사실 레이첼에게는 신경원을 돕기 위해 도움을 청한 것도 있었으니 눈치 채기 쉬웠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유의 부탁을 한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신 때문이라고 하면 어떤 대답을 하실지 궁금한데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말라고 했지.”

“하하하.” 

“말해. 어서.”

키이스는 어째 선임들에게 추궁을 받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라 생각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답은 방금 전에 드렸어요. 신 때문입니다.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어서요. 왜냐하면….”

키이스는 약간 뜸을 들였다. 레이첼이라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국 이해해줄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추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감춰도 언제든 알게 될 일이다. 그런 거라면 자신이 먼저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레이첼은 감이 좋은 사람이다. 집을 알아봐달라고 하니 대뜸 신을 언급한 사람 아닌가. 그는 레이첼의 이해와 협조를 원했고 또 필요로 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남자라서 안 돼.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안 돼. 라는 말은 안 하셨으면 해요. 신과 관련된 거라면 그 어떤 만류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니까요. 더불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사과라니. 무슨….”

“지금까지는 레이첼이 모든 것에 우선했지만, 지금의 저에겐 신이 최우선 순위가 되었거든요. 죄송합니다.”

키이스는 차분하게 말하고 레이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을 사랑해요. 가능하다면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 전부를 바쳐서.”

그래.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다. 그리고 가능했다면 이 말은 레이첼이 아닌 신에게 먼저 하고 싶었다. 

“잠깐, 키이스. 그러니까… 지금, 네가 게이…라고 커밍아웃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되는 거니?”

“글쎄요. 제게 게이냐―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만,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니 게이가 맞는 거겠죠?”

답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레이첼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의 성격상 크게 화를 내거나 면전에서 혐오감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침묵은 역시 조금 무섭다. 

키이스는 타들어가는 목을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물로 식히곤 일부러 주머니에서 엠브리시오가 준 약을 꺼내 삼켰다. 그걸 본 레이첼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길게 한숨이 나왔다. 

“널 아는 만큼 너를 닮은 예쁜 아이를 볼 생각은 애초에 접어두고 있었다만…,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구나.”

“당사자인 저만큼은 아니실걸요? 저는 제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안 해봤거든요. 성별과 상관없이요.”

“내가 충격을 받은 게 바로 그거란다, 키이스.”

“……?”

“나는 네가 인간이란 인간은 다 혐오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건 여전해요. 신과 레이첼 이외의 인간은 다 싫습니다.”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레이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키이스는 조근 조근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아세요? 저도 제가 신을 좋아한다는 게, 사랑한다는 게 신기해요.”

“…….”

“보고 있으면 뭐든 해주고 싶어요. 안타깝기도 하고 안달복달 못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당황하고 걱정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싫고 그저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져요. 사소한 것부터 아주 큰일까지.”

마음 편히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 일과 일 사이의 그 짧은 휴식시간만이라도 편하게 재워주고 싶다. 

레이첼은 아무 말 없이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근심과 걱정, 놀라움 또는 안타까움이 순간순간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후우~하고 길게 숨을 내쉬더니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좀 수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단다. 네가 네 자신도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를 불러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색은 안 했었지만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고는 있니?”

“그 정도였나요?”

“그래. 그날 밤에 잠이 안 올 지경이었어. 전화 한 통이면 해결할 수 있는 걸 굳이 내가 직접, 그 자리에 나서주길 원했잖니. 세상에, 나는 그날 달이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닐까 싶었어.”

“하하하.”

“이번엔 달뿐 아니라 해도 반대 방향에서 뜨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게 되길 바라고 또 바라기는 했지만….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구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입장이니 말이다.”

끝의 말에는 약간의 심술과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제야 키이스는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꽤나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죄송하다는 말씀은 안 드릴 거예요. 제가 신을 좋아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 잠시만요, 레이첼.”

놀란 기색이 역력한 레이첼과 대화를 이어나가려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삑삑거렸다. 기관에서 지급받은 쪽이다. 게다가 그 삑삑 소리는 상당히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는 황급히 메시지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니?”

“긴급 호출입니다. 일이 생겼나 봐요. 잠시 통화 좀 하겠습니다.”

키이스는 긴급통화 버튼을 눌러 바로 본부 상황실로 연락을 했다. 상황실의 에이전트가 간략하게 정보를 주었다. 듣는 동안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하겠습니다. 어디로…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첼. 죄송하지만 저 가봐야겠어요.”

“지금? 이런 시간에?”

“네. 이 시간이 저한테는 이제 한창 일할 시간인걸요.”

“그래도 정식으로 받은 휴가인데 안 가면 안 되니?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은데.”

“퍼스트가… 신이 한 달 넘게 찾고 있던 뱀파이어가 발견됐답니다. 상황이 급박해져서 비번인 에이전트들까지 전부 불러들이고 있는데 저만 빠질 순 없어요. 무엇보다 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 최근에 심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옆에 있어야 해요. 큰 문제가 없으면 아침에는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이만 쉬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레이첼은 그래도 붙잡고 싶어 했지만 키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몸조심하라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 *

『현재 백업팀의 상황은?』

『알파 팀은 유닛 Zero와 함께 97번가와 웨스트 드라이브 교차점. 브라보와 델타 팀은 이스트 97번가 입구, 찰리 팀은 현재 매디슨 에비뉴를 지나 5번가 입구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남쪽은?』

『제복 경관들이 각 입구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쪽 SWAT팀은?』

『7분 후 도착합니다.』

『도착 즉시 찰리 팀 쪽으로 보내고. FBI 쪽의 지원 상황은 어떤가?』

『SWAT팀 일부를 지원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정확한 인원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신경원은 이어피스를 통해 들려오는 보고를 들으며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그의 눈앞에는 빌딩 숲을 배경으로 한 너른 벌판과 겨울 숲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른바 맨해튼의 허파라 불리는 센트럴 파크다. 

라헬 윈스터로 추정되는 여자가 발견된 곳은 웨스트 91번가였다. 연락을 받은 신경원이 택시를 잡아타고 이동하는 동안 본부 작전 상황실에서는 거리의 CCTV 영상을 확인하고 문제의 여자가 라헬 윈스터가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별반 없었다. 그녀를 발견한 순찰 경찰관은 은밀히 그녀를 뒤쫓았고 그녀는 추적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동행한 남자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가다 하차해 센트럴 파크로 접어들면서 애로사항이 꽃피기 시작했다. 

라헬 윈스터가 센트럴 파크로 들어갔다는 무선을 듣는 순간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욕을 해버렸다. 말이 공원이지 가로 0.8km, 세로 4.1km에 달하는 센트럴 파크는 지부의 모든 병력을 동원한다 해도 포위망과 수색망을 구축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신경원은 즉시 예들린에게 지휘권을 반납했다. 작전 지역이 센트럴 파크가 된 이상 소규모 인원으로는 작전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다. 더불어 로컬 경찰과 FBI 등에 지원 요청을 해서 센트럴 파크 주변을 통제하고 전체 상황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섹션 치프인 동시에 뉴욕 지부 부부장인 예들린 혹은 더 고위급의 인사가 필요했다.

예들린은 즉시 모든 에이전트들에게 비상호출 명령을 내리고 NYPD와 FBI에 지원 요청을 한 후 곧장 센트럴 파크로 출발했다. 그 사이 신경원은 센트럴 파크를 반쯤 돌아서 라헬 윈스터가 진입한 입구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백업팀과 조우하여 센트럴 파크를 가로지르는 97번가를 따라 움직이며 그녀를 은밀히 추격했던 경찰관들과 함께 1차 저지선을 구축해두었다. 라헬 윈스터가 북으로 갔을지 남으로 갔을지 파악이 되지 않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현장 상황은 예들린이 도착한 후 보다 체계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원 내의 CCTV 영상을 확보해 검색해본 결과 라헬 윈스터와 동행한 남자들이 웨스트 드라이브를 벗어나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Zero 유닛의 동료들이 도착한 것이 그 시점이었다. 

“아무튼 올해는 끝의 끝까지 시달리는구나.”

“올해는 무슨, 올해‘도’겠지. 내년도 마찬가지고 내후년도….”

“어휴, 기운 빠지는 소리는 그만 좀 해라.”

신경원은 서늘하게 내려앉는 밤공기를 마시며 마지막 점검을 했다. 평소보다 글록의 탄창도 더 챙기고 온몸을 단단하게 조였다. 막 도착한 동료들도 보호복을 벗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장비를 챙겼다. 캐리가 제일 먼저 무장을 마치고 소총을 집어 들며 말했다. 

“망할 놈의 뱀파이어 같으니라고. 지들이 무슨 산책을 한다고 공원을 싸돌아다녀.”

“사냥을 나온 거겠지.”

“응?”

“클리퍼드가 요 며칠 NYPD 쪽 데이터 뱅크를 뒤졌는데, 최근 1~2년 동안 센트럴 파크를 비롯해서 맨해튼 내의 여러 공원과 홈리스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에서 발견된 변사체의 수가 이전에 비해 꽤 늘어 있다는 통계가 있었어. 전부 뱀파이어에게 당했다는 보장은 없지만.”

“흠. 그럼 여긴 라헬 윈스터의 고정 사냥터라는 소리가 되나?”

“알 게 뭐야. 어차피 센트럴 파크는 뱀파이어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잖아. 유동인구도 많고 밤에 출입을 통제해도 공원 내에 숨은 채로 버티는 사람이 꽤 되니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렇다고 여기는 밤에 뱀파이어가 출몰하니 얼씬도 하지 마시오라고 팻말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법이 없지.”

맥스는 ‘뱀파이어 출몰지역, 진입금지’라는 팻말을 세우면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하는 줄 알고 더 몰려올 거라며 농담을 했다. 그러자 존이 맞장구를 쳐줬다. 하지만 캐리는 농담에 끼지 않고 어둑한 겨울 숲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좋을 거 같다. 등골이 써늘한 게 어째 감이 좀 나빠. 오늘 일, 절대 쉽지 않을 거야.”

“애초에 하고 많은 곳 중에 센트럴 파크로 들어왔다는 거 자체가 운이 나쁜 거지. 적어도 우리한테는.”

100%는 아니지만 사지에 한 발을 디딘 상태로 살아가다 보면 ‘감’이라고 부르는 것을 믿게 된다. 특히 감에 의지해 목숨을 건진 경험이 있으면 더더욱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 캐리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그의 감은 때로 예언에 가까울 정도로 잘 맞아들어가는 편이다. 때문에 그들은 절대 캐리의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재수 없는 소리 한다고 구박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우리가 선두야. 준비해.”

신경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이마에서 마스크를 끌어 내렸다.

『현 시각 11:53. 섹션 A Zero 유닛 one, 현재 위치 C베이스. 총원 5명, 출동 준비 완료하였습니다.』

『잠시 대기하여 주십시오. 추가 인원을 배정하겠습니다.』

오퍼레이터의 말이 끝나고 5분쯤 후 완전 무장을 갖춘 낯선 에이전트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덩치가 맥스만큼이나 좋은 젊은 남자였다. 

『스튜어트입니다. 올해 2년차로 뉴저지 지부 소속입니다.』

『신입니다. 이쪽은 맥스 맥밀란. 함께하실 분입니다.』

『그냥 맥스라고 불러주쇼.』

맥스는 이름이 불리자마자 그에게 가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신경원은 곧바로 콜 사인을 정했다. 

『존과 리드가 Zero A팀. 맥스와 스튜어트가 Zero B팀. 캐리와 라미레즈가 Zero C팀. 선두는 내가 맡는다. 콜사인은 퍼스트. C팀은 나와 함께, A와 B팀이 4인 한 조로 움직인다. 대규모 작전이고 작전 지역도 평상시보다 훨씬 넓고 나무들이 많아서 움직임이나 백업에도 상당한 제한을 받을 거다. 체력 안배에 유의해줘. 캐리의 말대로 쉽지 않은 작전이 될 것 같으니 다들 바짝 긴장 유지하도록.』

마지막 준비를 마친 신경원은 임시 작전 상황실에 보고했다.

『건투를 빕니다, 유닛 Zero one.』

『현 시각 12:01. 작전 개시.』

수신호에 맞춰 검은 유니폼을 입은 에이전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맡겨진 수색 지역은 센트럴 파크 북서쪽 97번 도로부터 노스 미도우 일부와 글랜 스펜 아치를 지나 GR 힐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노스 미도우부터가 야구장이며 소프트볼 경기장이 서로 간격을 두고 12개나 위치해 있으니 이만저만 넓은 게 아니다. 

팀별로 간격을 두고 잘 닦인 산책로가 아닌,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흩어져 있는 지역으로 진입한 그들은 인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선두에 선 신경원이 노스 미도우의 나무 사이로 이동을 시작하자 공원 여기저기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공원 출입금지 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게 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여러 차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센트럴 파크는 동물원이며 극장, 베데스다 분수가 있는 72번가 쪽으로 사람이 많이 몰린다. 연말이 아니었다면 굳이 연거푸 안내 방송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몇 군데서 인기척이 났다. 대부분이 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즐기던 커플들이었다. 신경원은 고민을 하다 헬멧을 벗고 두부 전체를 가려주는 마스크를 벗었다.

『왜 그래?』

『확인하려고. 아무리 FBI 유니폼을 입고 있다 해도 시커먼 마스크를 쓰고 눈만 번득이는 건 너무 위협적이잖아. 유니폼만 보고 도주하면 곤란해.』

『뱀파이어면 어쩌려고.』

『그 정돈 괜찮아.』

신경원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존에게 수신호를 보낸 다음 글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러고는 나무 밑에 앉아 있다 막 길을 따라 움직이려던 커플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신경원의 차림에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신경원은 미리 정해진 대로 FBI에서 비정규적인 훈련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그들의 눈을 살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그들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퍼스트, 우리는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한다. 길을 따라서 사람들이 좀 보여. 풀The Pool을 지나서 다시 합류하겠다.』

『유닛 Zero two가 방금 투입되었다. 풀 서쪽은 그쪽에 맡기고 동쪽으로 돌아.』

『Roger.』

신경원은 글록을 든 채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가 노스 미도우를 거의 가로질러갈 무렵 귓가에 약간의 잡음이 들려왔다. 통신 포트 하나가 추가되는 듯했다. 잡음 때문에 귓가가 간지러워진 신경원은 손을 들어 톡톡, 이어피스를 두드렸다. 그때였다. 

『퍼스트!』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에 다이렉트로 내리꽂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이지만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반갑게 들려왔다. 신경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현재 위치는?』

『노스 미도우 레크리에이션 센터 바로 옆입니다.』 

『일단 글랜 스펜 아치로 이동해. 나는 Zero C팀과 곧장 로치The Loch로 진입한다. 도착하는 즉시 보고하도록.』

숨을 크게 몰아 내쉬는 소리와 함께 알겠다는 답이 들려왔다. 신경원은 목을 한 번 돌린 후 다시 뒤쪽에 있는 C팀에 수신호를 보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몸이 훨씬 더 가볍게 느껴졌다. 

진행 속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느렸다. 추운 날씨에다가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숲에 뭐가 볼 것이 있다고 사람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족족 설명을 하고 눈을 확인하는 작업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초조함이 더해갔다. 

예들린은 동원 가능한 모든 에이전트들을 투입하고 있었다. 뉴욕 지부의 HRT는 모두 센트럴 파크 저수지 위쪽에, 맥스와 임시로 팀을 이룬 뉴저지의 요원 외 타 지부와 뉴욕 주 전체를 담당하고 있는 지부의 일부 요원들은 저수지 아래쪽에 투입되었다. 라헬 윈스터가 북쪽으로 이동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던 두 남자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헬 윈스터도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눈에 띄지 않게 남쪽으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 소요된 시간이 좀 되었기에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아니야. 저기 어딘가에 라헬 윈스터 아니, 뱀파이어가 있어. 

신경원은 높이 솟은 빌딩 아래로 주욱 깔려 있는 숲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캐리가 상황 자체에 대한 감이 있다면 신경원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감이 있었다. 100%는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뱀파이어가 있다는 감이 들면 대부분 맞아떨어지곤 했다. 그 감이 뒤를 돌아보고 싶더라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퍼스트. 우리는 라빈The Ravine 쪽으로 이동해서 이스트 드라이브를 따라 이동할 테니 넌 여기서 클리퍼드를 기다렸다가 로치를 통과해서 올라가는 게 어떨까. 위쪽으로는 출입금지 된 휴지 구역도 있으니 천천히 훑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러려고 했어. 먼저 올라가도록.』

『OK. 조심해라.』

캐리는 라미레즈를 향해 수신호를 하고는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신경원은 그들의 뒷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키이스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사방이 적막했다. 가끔 바람이 불어 얇은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정말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어피스를 통해 베이스를 비롯해 각 유닛의 리더들이 현장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목소리로 귓바퀴가 가득 찼다. 하지만 아직 신경원이 기다리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빨리. 어서.

그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키이스를 재촉하다 지레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리 내어 말한 것도 아닌데 뭔가 기분이 머쓱했다. 신경원은 글록을 든 손으로 턱을 비볐다.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손등에 묻어나는 느낌이다.

신경원은 손을 마주 잡고는 손등을 감쌌다. 여름 내내 홀로 일해왔기에, 파트너가 생겨도 언제나 곧 사라졌기에 고독에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빈자리가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 혼자 있다는 외로움이, 고독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키이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어.

신경원은 낮게 숨을 내쉬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좀 더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기를 얼마,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스트. 도착했습니다.』

『길 건너편에 로치 워킹 패스가 있어. 내가 보일 때까지 달려.』

『알겠습니다.』

키이스가 대답하자마자 신경원은 몸을 움직였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키이스가 달려올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더 빨라졌고 더 커졌다. 

『퍼스트!』

시커먼 유니폼과 그보다 더 까맣게 보이는 헬멧을 쓴 키이스가 드디어 신경원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순간 다리가 움찔했다.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듯 긴장한 발을 억지로 땅에 눌러 붙였다. 신경원은 이리 오라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키이스가 뛸 때마다 들려오는 철컥 철컥 하는 소리가 들어 올린 손에 밧줄처럼 휘감겼다. 그 손은 키이스가 코앞까지 달려오기 직전에 아래로 내려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30초 주지. 숨 골라.』

넓은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지구력으로는 유닛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놈인데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좀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경찰들이 쫙 깔려서 검문검색을 하는 바람에 시간이 걸렸어요. 죄송합니다.』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따라와.』

신경원은 가볍게 몸을 돌려 바로 길을 벗어났다. 

『상황은 파악했겠지?』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퍼스트.』

키이스는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신경원을 따라잡더니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경원은 움찔하며 몸을 옆으로 빼려 했지만 키이스가 팔을 부여잡는 바람에 실패했다. 키이스는 자유로운 손을 목 쪽에 넣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순간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키이스의 오금을 걷어차버렸다. 

『윽.』

저 말을 하려고 성대 마이크를 목에서 떼어내다니, 정말 기가 막혔다. 게다가 지금은 작전 중이 아닌가. 기쁘지만 동시에 성질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작전 중에 또 그런 짓 하면 그때는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을 줄 알아.』

『작전 중이 아니면 괜찮은 거… 어이쿠.』

신경원이 손을 들어 올리자 키이스가 엄살을 피우며 물러섰다. 그는 그대로 키이스의 헬멧을 툭 친 뒤 앞으로 움직였다. 어둡기는 해도 달이 꽤 밝아 사물을 분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래도 혹여 놓치는 것이 있을까 세심하게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홀로 움직일 때는 들려오지 않던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뭇잎과 작은 가지들이 부츠의 굽에 밟혀 나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신경에 거슬렸어야 하는데 오늘은 어째선지 그저 좋게만 들려왔다. 그래도 가능한 소리를 줄이는 편이 낫기에 신경원은 바닥을 가리켰다. 

『뒤꿈치 들고, 돌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밟아. 나뭇잎이 사방에 깔려 있는 것도 아니니 그것도 좀 피하고. 그러면 발소리가 좀 덜 난다.』

『넵.』

키이스는 가볍게 경례까지 해 보였다. 어려울 수도 있는 작전에, 그것도 휴가 중에 긴급 호출로 불려왔음에도 키이스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사정이 있었음에도 기꺼이 달려와준 키이스 덕에 신경원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

신경원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짓다 말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뒤를 따르던 키이스가 몸을 움츠리며 멈추어 섰다.

『11시 방향, 나무 뒤. 누군가 쓰러져 있다.』

키이스에게 왼쪽으로 돌아가라는 수신호를 보내며 신경원은 글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곤 아주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남루한 외투를 여러 겹 껴입은 홈리스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코에 악취와 함께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글록을 남자에게 조준한 채로 가까이 다가간 신경원은 소매 아래로 드러나 있는 앙상한 팔목에 손가락을 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확인을 위해 피에 젖어 있는 목에도 손을 대봤지만 맥박은 이미 멈춘 채였다. 

『라이트.』

키이스가 즉시 작은 플래시 라이트를 꺼내 남자의 목을 비추었다. 머리로 올라가는 목의 혈관이 떨어져 나온 살점과 함께 너덜너덜해져 있는 게 보였다. 신경원은 즉시 남자의 가슴과 목에 각각 한 발씩 발포했다.

『베이스. 유닛 Zero one이다. 로치 워킹 패스에서 웨스트 드라이브 중간 지점에서 피해자 1인을 발견, 확인 사살 완….』

『목표물 발견! 퍼스, 크윽―.』

캐리의 목소리와 함께 멀리서 소총을 발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캐리!』

『노스 우즈 중심에서 7시 방향. 갈색 머리 용의자 발견. 반복한다. 갈색 머리 용의자 발견!』

신경원은 캐리를 불렀으나 그 대신 라미레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은 그 즉시 노스 우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유닛 Zero one, 퍼스트. 노스 우즈로 이동 중. 백업팀의 지원을 요청한다!』

『Copy that. 찰리 팀 리더, 팀원을 집결시켜 노스 우즈로 이동해 Zero one을 지원하도록.』

예들린의 목소리에 신경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찰리 팀이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찰리 팀은 5번지에서부터 서쪽 끝의 잉글리시 가든 아래까지 드문드문 흩어져 얄팍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한 곳에 집결해 이동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물론 긴 시간은 아니다. 센크럴 파크가 아무리 넓다 해도 이동거리는 고작 1km 이내밖에 안 된다. 물론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긴 하다. 하지만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베이스, 다른 백업팀은 없는 겁니까?』

『간신히 구축한 포위망이다. 더 이상 구멍을 뚫을 수는 없어. 게다가 아래쪽에서도 두 개체가 발견되어 현재 전투 중이다. 라헬 윈스터는 아니다, 신.』

『씨발!』

밤이 되면 센트럴 파크는 뱀파이어에 의한 우범지대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기관에서는 간헐적으로 센트럴 파크에 사복 에이전트를 보내 탐색을 한다. 하지만 실제 걸려드는 뱀파이어의 수는 적다. 넓은 공원을 적은 인원으로 커버하는 것 자체가 녹록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오늘은 뉴욕 지부의 전 병력이 투입되었고 경찰에 FBI SWAT팀까지 동원하니 평소에는 발견해내기 힘들었던 놈들까지 걸려들고 있는 모양이다. 감이 좋지 않다고 한 캐리의 말이 다시금 뇌를 울리는 순간이었다. 라미레즈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신! 캐리가―!』

『라미레즈! 피해!』

『유닛 Zero one, A팀, 목표물 발견! 곱슬머리 용의자다.』

『맥스, A팀 지원!』

『이동 중이야!』

순식간에 통신선이 마구 얽히기 시작했다. 콜사인을 댈 여유도 없는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소리친다. 그 사이사이에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총성이 섞여 들어갔다. 신경원은 욕설을 내뱉으며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런 그의 눈에 격렬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걸려들었다. 

『키이스! 백업!』

신경원은 곧장 그림자를 향해 달렸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라미레즈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단검이 뱀파이어의 등에 박혀들었다. 

크아아아아―!

공격을 받은 뱀파이어가 괴성을 지르며 라미레즈를 내동댕이쳤다. 괴력의 뱀파이어는 신경원이 단검을 뽑기도 전에 몸을 피했다가 손톱을 길게 빼어들고 다시금 달려들었다. 신경원은 곧장 글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총격을 피했다. 하지만 키이스가 발포한 총탄은 뱀파이어의 어깨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키이스는 큰 소리로 외쳤다. 

『퍼스트, 하나 더―!』

신경원은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오른쪽 어깨 옆으로 긴 손톱이 샤악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이쪽은 맡겨주십시오!』

『B1인 것 같다. 한두 발 갈기는 걸로는 안 끝나. 조심해!』

『네!』

키이스가 뱀파이어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총격을 받은 뱀파이어가 다시 몸을 일으켜 도주할 모양새를 취했기 때문이다. 특수 제작된 총알을 맞고도 일어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B1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신경원은 그 이상 그쪽에 시선을 줄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몰아 내쉬며 새롭게 등장한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식사를 방해하면 곤란하죠. 안 그런가요, 뱀파이어 헌터 씨?”

신경원의 앞에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 뱀파이어 라헬 윈스터가 서 있었다. 신경원의 검은 눈동자가 라헬 윈스터의 홍채에 못 박혔다. 그녀의 홍채는 어둠 속에서도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에티켓은 지킬 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죠?”

홍채만 보면 그녀는 이미 B2급으로 전락한 상태다. 하지만 말투와 그것에 담긴 뉘앙스가 여타의 B2와는 확연히 달랐다. 인간과 같은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라헬 윈스터는 아직도 B1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질문을 했으니 대답을 해요, 뱀파이어 헌터.”

웃기는 소리. 누가 뱀파이어 따위와 말을 섞을까. 

바로 눈앞에서 두 번이나 놓쳤기에 집착했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잡을 수 있었던 것을 놓쳐서 그런 것이지 그녀 본인에게 어떤 원한이 맺혀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그녀가 고 레벨의 뱀파이어라는 것 자체가 집착의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특별 취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 역시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뱀파이어 중 하나일 뿐이니까.

『퍼스트. 찰리 원입니다. 1차로 1조 3인, 도착했습니다.』

신경원은 작은 소리로 답했다.

『나를 기준으로 11시 12시 1시 방향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혹 여유가 된다면 부상을 당한 에이전트가 있으니 보이면 구출해서 즉시 현장을 벗어나길 바란다.』

『Roger.』

상대는 B1이다. 옆에는 키이스와 라미레즈,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캐리도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터. 에이전트가 뱀파이어와 뒤섞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백업팀에 발포를 허가할 수는 없다. 뒤바꿔 말하면 신경원도 발포에 주의해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신경원은 그것을 핸디캡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총이 안 되면 칼로 하면 그만이다. 신경원은 비릿하게 웃으며 왼쪽 부츠에 꽂아두었던 또 한 자루의 단검을 뽑았다. 

“하아, 세상에는 예의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니까요. 말로 하면 되는데 꼭, 폭력을 행사하려들고.”

라헬 윈스터는 짙게 칠한 눈썹을 찌부러트리며 손을 들었다. 손가락보다 긴 손톱이 길게 뻗어 있었다. 

“예의 없는 사람은 동료가 될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죽어줘야겠―!”

준비동작도 없이 신경원의 발이 땅을 박찼다. 낙엽과 흙이 튀고 신경원의 몸은 허공을 가로질러 라헬 윈스터에게 쇄도했다. 라헬 윈스터는 가볍게 신경원의 공격을 피하고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신경원의 가슴 대신 공기를 갈랐다. 헛손질을 한 손톱을 단검으로 걷어낸 신경원은 한쪽 다리를 축으로 몸을 회전시켜 가냘픈 어깨를 노렸다. 부츠 끝이 아슬아슬하게 라헬 윈스터의 어깨를 스쳤다. 

신경원은 발이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박찼다. 몸을 낮춘 채로 라헬 윈스터에게 달려든 그는 팔을 휘둘렀다. 단검이 살과 근육을 가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키아아아악!”

붉게 칠한 입술에서 뱀파이어 특유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신경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라헬 윈스터에게 보디어택을 감행했다. 퍼억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몸이 밀려나갔다. 그녀의 팔이 땅에 닿는 순간 신경원은 단검을 들어 피부가 갈라진 그녀의 손목에 내리꽂았다.

손목을 잃은 뱀파이어가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장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손목 하나 잃은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물론 그것을 그대로 둘 신경원이 아니다.

라헬 윈스터는 이른바 노회한 B1이다. 사냥의 노하우를 잔뜩 쌓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반인’이었다. 뱀파이어가 되어 완력과 스피드는 생전보다 더 좋아졌겠지만 ‘전투 기술’만을 논한다면 다년간 뱀파이어를 사냥해온 신경원을 이길 수 없다. 게다가 그녀의 몸 자체는 거의 B2로 전락한 상태, 어려운 사냥감이 아니다.

신경원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손을 잃고 검은 피를 흘리는 팔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경원은 허리를 구부린 자세 그대로 날아오는 손톱을 단검으로 막아내고 그녀의 팔꿈치에 총을 갈겼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무기를 잃은 뱀파이어가 괴성을 질렀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자란 송곳니가 보였다. 신경원은 몸을 돌려 온 힘을 다해 그녀의 가슴을 걷어차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돌려 차서 쓰러뜨렸다. 일격 일격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털썩 소리와 함께 흙먼지와 낙엽이 쓰러진 그녀의 몸 주위로 날아오르는 순간, 신경원의 글록이 불을 뿜었다. 마구잡이로 갈긴 것처럼 보였지만 총탄은 정확하게 그녀의 가슴에만 박혀들었다. 총알이 박혀들 때마다 라헬 윈스터는 사지를 떨며 발광을 했다. 

신경원은 글록의 탄창이 바닥날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하며 탄창이 비는 소리가 나는 순간 오른편에서 날아온 총알이 라헬 윈스터의 머리에 박혀들었다. 키이스였다. 그는 재차 라헬 윈스터의 머리에 총을 쏘고는 신경원에게 왔다.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없고요?』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검을 들고 라헬 윈스터에게 다가가 벌써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한 머리를 확인하고 아직 멀쩡한 목에 단검을 박았다 뺐다. 가슴은 총알로 벌집이 되어 있어 이미 1인치 이상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키이스에게 맡겼던 뱀파이어를 먼눈으로 확인했다. 땅바닥에 대자로 뻗은 뱀파이어가 보였다.

『확인 사살은?』

『했습니다. 보고도 완료했습니다. 라헬 윈스터는 다섯 번째예요.』

『목표물 5. B1으로 확정. 확인 사살 완료. A팀 리더, 그쪽은?』

『두 번째가 우리야.』 

『부상은?』

『없어.』

『OK. 일단 그곳에서 1분간 휴식을 취하고 계속해서 수색을 진행해. 다른 뱀파이어가 있을 수도 있어. 키이스, 캐리와 라미레즈는?』

질문은 키이스에게 했으나 대답은 이어피스를 통해 들려왔다. 

『퍼스트, 찰리 리더입니다. 에이전트 캐리는 의식은 없지만 부상 자체는 경미합니다. 길로 나와 의료팀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죄송해요, 퍼스트. 목표물 3을 처리하느라 캐리나 라미레즈에게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너는 어디 다친 데 없고?』

『네.』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견 비정해 보일지 모르나 뱀파이어와의 전투 시에는 동료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보다 뱀파이어를 사살하는 것이 우선 순위다. 동료를 돌보다 뱀파이어에게 당하는 일이 생겨선 안 되기 때문이다. 

『백업팀이 없으니 일단 경계를 서줘.』

『네.』

신경원은 헬멧을 벗으며 라미레즈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괴력의 뱀파이어가 내동댕이친 그녀는 마치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신경원의 눈에는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다행히 살아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내동댕이쳐지기 전에 뱀파이어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뒤편에서 보아서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갈색 머리의 뱀파이어가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던 것은 똑똑히 보았다. 어쩌면 어딘가 물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물려는 찰나였을 수도 있고 물릴 뻔했지만 바로 내동댕이쳐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준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신경원은 글록의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는 새롭게 장전을 마친 후 라미레즈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라미레즈?』

쓰러진 그녀는 한쪽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아직 몸에서 힘이 풀리지 않은 것을 보니 정신이 있는 듯했다.

『라미레즈, 내 말 들려?』

『……. …네.』

『일어날 수 있겠어? 힘들면 의료팀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돼.』

라미레즈는 몸을 들썩거렸다. 신경원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일어나 앉는 것을 도왔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계속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손… 치워볼래?』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녀를 바라보던 신경원은 일단 그녀의 헬멧 실드를 위로 올리고는 그대로 헬멧을 벗겨냈다.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응급치료를 할 수 있어. 손 내려. 이건 명령이야.』

말투는 까칠했지만 신경원의 손놀림은 부드러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라미레즈의 마스크도 마저 벗겨냈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검은 고수머리가 드러났다. 추운 날씨였지만 얼굴과 머리 전체가 땀으로 흥건했다.

『라미레즈. 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신경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었다. 어깨의 유니폼이 조금 찢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상완의 HRT 패치는 전투 중 뜯겨나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신경원은 황급히 헬멧에 부착된 라이트를 켰다. 그러곤 베스트에서 구급 키트를 꺼내놓고 오른쪽 다리에 묶어놓았던 조금 작은 사이즈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일단 상처부터 보자.』

『흐윽.』

『울지 마. 기운 빠져.』

신경원은 라미레즈의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게 하고는 어깨 부위의 유니폼을 잘라내고 베스트의 끈도 단검으로 모두 잘라버렸다. 가무잡잡한 어깨가 그대로 신경원의 눈앞에 드러났다. 동그스름한 어깨에 4개의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 순간 캐리가 했던 말이 다시 귓가를 울렸다. 

「등골이 써늘한 게 어째 감이 좀 나빠.」

신경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피를 빨리진 않은 것 같지만 물린 자국이 너무 깊었다. 이건 빼도 박도 못 한다.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죽거나 뱀파이어가 된다.】

수도 없이 되뇌던 말이 다시금 뇌리를 가득 채운다. 자신처럼 긁힌 정도가 아닌 정말로 제대로 물려버린 라미레즈에게는 희망이 없다. 하지만 끝이 정해져 있더라도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싶지는 않았다. 신경원은 굳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베이스, 라미레즈가 부상을 입었다. 의료팀 급히 지원 바란다.』

신경원은 거치적거리는 베스트와 장갑을 벗어버렸다. 그 후에야 구급 키트에서 나일론 끈을 꺼냈다. 하지만 어디를 어떻게 묶어야 할지 정말 난감했다. 어깨 위쪽으로 끈을 돌려보려 해도 물린 자국과 맞물렸다. 

『신….』

라미레즈는 가냘픈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신경원은 굳은 얼굴로 앰풀을 꺼냈다. 그대로 앰풀의 바늘 부분을 물린 자국 옆에 가져다대려는 순간 라미레즈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급히 라미레즈를 부축했다. 그녀는 신경원에게 매달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라미레즈. 일단 앰풀부터 놓자, 응?』

『소용 없…, 신….』

울음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는 신경원에게 더 찰싹 달라붙었다. 신경원은 어쩔 수 없이 매달려오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처럼 완벽히 물린 건 아니더라도 신경원 역시 같은 처지에 처했었기에 그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물려본 적이 없는 이상 그녀의 심경을 100%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신경원이 할 수 있는 것은 물린 자리를 도려내거나 혹은 절망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을 그녀를 이렇게 안아주는 것뿐이다.

『라미레즈….』

도저히 진정하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신…, 저는…. 신을 퍼스트…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 흐윽…어요. …아 해요… 그러… 신도… 저와 같이….』

울음에 말을 섞어 토해내던 라미레즈가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신경원에게 매달렸다. 순간 오싹 하고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힘을 상회하는 완력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였다.

『퍼스트!』

뒤편에서 키이스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장갑을 낀 키이스의 손이 그녀의 얼굴과 신경원의 목덜미 사이로 파고들었다. 으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내려놓았던 단검을 들어 제 품 안에 있는 라미레즈의 목덜미에 꽂아 넣었다. 

키야아아아아―악!

장갑을 낀 키이스의 손을 물고 있던 라미레즈가 입을 벌리더니 괴성을 질렀다. 그것은 귀에 익히 익은 뱀파이어의 단말마였다. 귀에서부터 온몸으로 맹렬하게 소름이 끼쳐 올랐다. 그녀는 ‘살아 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순식간에 뱀파이어로 각성한 뒤였다.

라미레즈, 아니 그녀의 얼굴과 몸을 가진 뱀파이어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신경원의 몸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신경원은 이를 악문 채 그녀의 목에서 단검을 비틀어 뽑아 재차 찔러 넣었다.

씨발. 빌어먹을. 젠장!

폐부를 찌르는 단말마가 고막을 찢어발긴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신경원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곤 여전히 그에게 붙어 있는 라미레즈의 얼굴을 거칠게 후려치고는 글록의 총구를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라미레즈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는 것이 보였다. 그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슈슉―!

제로 거리의 사격에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코끝에 확 끼쳐왔다. 키이스는 라미레즈를 신경원에게서 완전히 떼어내 발로 걷어찼다. 신경원은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여 그녀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가는 목덜미에 박혀 있던 검이 스르륵, 땅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하얀 연기가 그녀의 목과 이마, 그리고 가슴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슈슉 슈슉―.

멍하니 라미레즈를 보는데 키이스가 확인 사살을 하고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목표물 6. B2으로 확정. 확인 사살 완….』

신경원은 키이스의 보고가 다 끝나기도 전에 그에게 달려들어 장갑을 벗겼다. 검지와 중지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 순간 시야가 흐릿해졌다. 새카만 절망감이 바닥에서부터 솟아올라 몸을 휘감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빌어먹을!』

『퍼스트.』

『닥치고 앉아! 가만히 있어!』

신경원은 주먹을 쥔 채 제 허벅지를 내려쳤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뜨린 앰풀을 찾았다. 몸의 떨림은 멈추었지만 손은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가 비어버린 것 같았다. 

『씨발!!!』

신경원은 욕설을 내뱉고 제 뺨을 두 손으로 철썩 때렸다. 진정해야 한다.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버렸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억지로 되뇌었다. 라미레즈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키이스마저 잃을 수는 없다. 그것만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라미레즈는 어깨여서 손을 쓸 수 없었다. 키이스는 겨우 손가락 두 개뿐이다. 살릴 수 있다. 살릴 수 있다! 절대로 살릴 거다.

신경원은 정신없이 구급 키트를 찾았다. 바닥에 떨어뜨렸던 나일론 끈도 찾았다. 그것으로 즉시 키이스의 손목을 휘감아 조이려는 순간이었다. 키이스가 신경원의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그러곤 라미레즈에게 물린 손을 움직여 제 통신기를 꺼버렸다.

『뭐하는 거야, 이거 놔!』

“퍼스트, 잠깐만요.”

신경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앰풀을 잡았다. 그러자 키이스는 물린 손을 뻗어 신경원의 통신기도 꺼버렸다. 그러곤 덥석, 신경원을 품에 안아버렸다.

“이거 놔!!! 죽고 싶어?”

신경원은 몸부림을 쳤다. 그래도 키이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빨리 놔! 손이…, 손가락만 잘라내면,”

“안 잘라도 됩니다!”

“잘라야 해! 그래야―,”

“자르지 않아도 돼요. 전 안 죽습니다.”

“그래! 넌 안 죽어. 내가 빨리 손을 쓰면―,”

키이스는 신경원의 귀에 바싹 입술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요, 퍼스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 죽지 않아요. 믿지 못하실 거 알지만 정말로 죽지 않아요. 뱀파이어가 되지도 않습니다. 믿어주세요.”

“개소리 하지 말고 놔!!”

“개소리가 아니에요. 진실 그 자체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키이스. 제발 놔줘. 서둘러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

말캉한 입술이 귓불에 닿았다. ‘쉬잇―’ 하고 조용히 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빨리 찾아!’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신경원은 곧장 큰 소리로 ‘여기’라고 외쳤다. 그러자 키이스가 더더욱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지금은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가 곤란해요.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는 절대로 죽지도, 뱀파이어도 되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신경원은 키이스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키이스는 신경원을 끌어안은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제가 라미레즈에게 물렸다는 말씀을 하시면 안 돼요. 절대로.”

“키이스…. 이러지 말고 제발, 내가 뭐든 하게 해줘.”

“네, 제가 물렸다는 것,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약속해주세요.”

“알았다니까! 빨리 놔!”

신경원은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떨어지지 않았다. 더욱 바싹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인다.

“저는 말이죠, 퍼스트. 항상, 숨 쉬는 매 순간순간마다 제 몸속을 흐르는 빌어먹을 피를 저주해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뱀파이어에게 물려서 머리라도 돌아버린 걸까? 신경원은 귓가에 들려오는 키이스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피를 가지고 있어서… 퍼스트와 만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퍼스트의 곁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해하지 못할 말을 계속 속삭이던 키이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키이스?”

“퍼스―, 큭―.”

다시 입을 연 키이스가 갑자기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감싸고 있던 팔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힘이 빠져나갔다. 기침소리와 함께 키이스가 뜨끈한 액체를 토했다. 그 액체로 젖은 귓가에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키이스! 키이스!!”

신경원을 끌어안고 있던 키이스가 그 상태로 축 늘어졌다. 신경원은 쓰러지는 키이스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제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오그리더니 미친 듯이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컥컥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쪽이다―!”

근거리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꽂혀오는 환한 라이트가 가슴과 배를 부여잡은 채 피를 토하며 쓰러진 키이스를 비추기 시작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황급히 나무 사이로 달려왔다. 주변이 점점 더 환해졌다. 환하게 밝혀진 라이트가 비추는 키이스의 피는 섬뜩하리만치 새빨간 색이었다. 키이스의 몸은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

연거푸 피를 토해내던 키이스가 팔을 부들부들 떨며 신경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경원은 급히 그 손을 잡았다. 새빨갛게 젖은 입술이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신경원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부여잡은 키이스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신경원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키이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키이스의 이름이 연기처럼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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