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노랗고 동그란 사과 주스 병이 직선으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주스 병은 허공에서 스핀을 두어 번 하고는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턱―.
신경원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과 주스 병을 받아 들고 다시 위로 던져 올렸다. 그는 이미 몇 시간째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가끔 멈추긴 하지만 주스 병을 다른 손으로 옮기기 위함일 뿐,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CCTV 화면을 모니터링 하는 신경원의 귀에 삑삑―하고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다 막 안으로 들어오는 키이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신경원은 보일락 말락 인상을 쓰고는 턱짓을 했다. 키이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피했고 신경원은 그의 앞을 바람처럼 지나쳤다. 빠른 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신경원의 뒤에 키이스가 꼬리처럼, 하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붙었다.
식당에 도착한 신경원은 조금 난폭한 손짓으로 음식을 고르고 트레이를 든 채로 맥스와 캐리 등이 모여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갔다. 그리고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그때도 사과 주스 병은 트레이 바로 왼편에 있었다.
신경원은 번개처럼 식사를 마치고는 사과 주스 병을 들고 휭하니 사라졌다. 키이스는 평소와는 달리 신경원을 따라가지 않았다. 아직 가지고 온 음식의 반의반도 못 먹은 탓도 있지만 낮에 신경원을 따라 나서려다 정강이를 호되게 걷어차이며 ‘오늘은 따라다니지 마’라는 말을 들은 탓이 더 컸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신세가 된 키이스는 포크를 든 채로 신경원이 나가버린 문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존이 거북이처럼 고개만 쑥 내밀며 물었다.
“불어, 클리퍼드. 퍼스트에게 무슨 짓 했냐.”
“그래. 이유라도 좀 듣자. 왜 저놈이 저리 기분이 저조한지.”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퍼스트가 저놈의 주스 병을 쥐고 안 놓고 있는 거야?”
신경원과 친밀하게 지내는 세 사람이 제각각 질문을 던졌다. 키이스는 살짝 인상을 쓰려다 말고 얼른 표정을 풀었다. 그의 옆과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신경원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경원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키이스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낯을 만들었다.
사실 키이스도 사과 주스 병에 얽힌 이야기가 내심 궁금하기는 했다. 문제의 사과 주스 병은 대부분의 경우 탕비실의 냉장고 한쪽에서 얌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신경원에 의해 바깥나들이를 한다.
냉장고를 들락날락하다 보니 종이 라벨이 습기를 먹어 벗겨지기 일쑤다. 그렇게 헐벗은 주스는 누군가가 간혹 고의로 홀라당 마셔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러면 신경원은 똑같은 브랜드에 똑같은 모양의 주스를 딱 한 병만 사 와서 냉장고에 넣어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그 주스를 마시지 않았다. 뚜껑을 따는 일도 없었다.
“그 사과 주스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세 남자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 대답은 앞에 앉은 존이 했다.
“퍼스트의 파트너는 너거든? 네가 모르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에이, 그러지 말고 말씀 좀 해주세요. 저보다 퍼스트를 오래 보셨잖습니까.”
키이스는 신경원에게 하듯 싹싹한 태도로 졸랐다. 그러자 맥스가 별것도 아닌데 비싸게 굴 필요 없다며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속사정까지는 몰라. 그저 퍼스트가 기분이 저조하거나 우울한 것 같을 때는 계속 그걸 들고 다닌다는 것만 아는 거지. 전에 한 번 물어봤는데 입을 안 열더라고.”
“자, 이제 답을 들었으니 너도 말해봐. 도대체 퍼스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키이스는 잠깐 고민했다. 짐작은 가는데 확실치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캐리가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듯 포크를 든 채 ‘열려라, 참깨!’를 외쳤다. 그래도 키이스가 입을 열지 않으니 존이 몸을 잔뜩 앞으로 빼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덮쳤냐?”
키이스는 그만 쿨럭―기침을 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다 알아.”
“네?”
“네놈이 퍼스트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 우리 전부 다 안다고.”
“네가 우리랑 퍼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다른데,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
“그러니 어서 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짓 했냐?”
세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키이스의 머릿속은 살짝 패닉 상태가 되어버렸다. 셋 다 참견을 하는 듯하면서도 일견 무심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이었던지라 그들이 눈치를 챘을 거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키이스는 세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호기심 어린 표정이긴 했으나 신경원에 대한 염려가 진지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좋기도 하고 짜증이 좀…이 아니라 많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만….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응. 아주 팍팍!”
키이스는 어휴―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캐리의 말에 곧 고개를 퍼뜩 들었다.
“결정적인 건 너보다는 퍼스트의 태도였지만….”
“퍼스트의 태도요?”
“퍼스트가 조금 무심한 타입이잖아. 뭐 말장난은 제법 잘 받아주지만 그 외에는 이래도 흐응, 저래도 흐응 하고 말지. 그런 놈이 너한테만큼은 ‘제대로’ 반응을 보이고 있거든.”
“…….”
“사과 주스 병 들고 다니는 걸로도 모자라서 너한테 대놓고 접근 금지령 내렸잖아. 우리가 아는 퍼스트라면 아무리 기분이 저조해도 누가 옆에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거든. 그러니 얼른 불어라. 응?”
맥스의 말을 듣는 동안 키이스의 입꼬리는 절로 귓가로 향했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 되었다. 신경원이 자신에게 가진 감정이 남에게 보일 정도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게 플러스 기분이든 마이너스 기분이든 무슨 상관인가. 다른 사람에게는 안 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그러는 거라면 무조건 환영이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신경원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안 했습니다. 그냥 퍼스트 옆에 있었을 뿐.”
“으응?”
키이스는 어깨를 펴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옆에 달라붙어 있기만 했는데 24시간 넘게 아주 잘~ 폭면을 취하시더군요.”
“뭐?”
“뭐시라?”
“진짜?”
“네.”
새벽녘 잠든 신경원은 정말로 24시간 넘게 폭면을 취했다. 키이스는 중간에 잠깐 깨어 샤워도 하고 오고 출출한 속도 채우고 왔지만 신경원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잠깐 볼일을 보고 다시 옆에 누우면 품을 파고들어 찰싹 달라붙은 채로 만족한 숨소리를 내곤 했다. 곤히 자는 얼굴과 미동도 안 하는 정수리만 보고 있는데도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24시간이나…. 어쩐지 완전 썩어가던 얼굴이 하루 만에 쌩쌩해져서 광이 나더라니.”
“허. 기권하지 말고 그냥 성사되는 쪽에 걸 걸 그랬나.”
“거봐. 내가 후회할 거라고 그랬잖아, 캐리.”
“하지만 퍼스트는 완전 스트레이트였단 말이다.”
“누가 그걸 몰라서 된다는 데 걸었겠냐.”
“거참.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어보네.”
“칫―. 네 녀석이 안 된다에 걸었어야 하는데.”
“잠깐. 혹시 그놈이 깼을 때도 같이 있었냐, 클리퍼드?”
“네. 당연한 일 아닙니까?”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즉, 신경원이 눈을 뜨고 제일 처음 본 것은 키이스의 가슴팍이었다.
“허―.”
캐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며 트레이를 들고 일어났다. 맥스도 남아 있던 음식을 한 번에 입에 쓸어 넣고는 괜히 걱정했다며 일어났다. 존의 반응이 그나마 제일 늦었다. 키이스는 그 역시 남은 음식을 번개처럼 입에 쓸어 넣는 걸 보고 그에게 매달렸다.
“퍼스트 기분이 왜 그렇게 저조한지, 다들 알아채신 거죠?”
“왜? 넌 모르겠냐?”
“짐작은 가지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흥, 퍼스트만 보고 사는 놈이 왜 그걸 몰라.”
“가르쳐주지 마, 존!”
맥스가 트레이를 반납하고 나가다가 존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존은 마지막 남은 칠리 빈즈를 수저에 얹어 입에 넣은 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가르쳐줬으면 좋겠냐?”
“네, 부디 가르쳐주세요. 존.”
“흐흠. 후식으로는 그 펌킨 라테인지 뭔지,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나갔다 올 시간이 있나 모르겠네~.”
“펌킨 라테는 핼러윈 지나고 곧바로 시즌오프 됐지만 크리스마스 음료가 한창이죠. 그건 어떠십니까? 벤티 사이즈로. 다른 분들 것도 사오겠습니다.”
“딜~!”
키이스는 존이 내민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툭―하고 마주 대고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존이 귓속말을 하려는 듯 상체를 숙이고 고개를 쭉 뺐기 때문이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걸 거다.”
“……?”
“퍼스트는 안면 팔리는 짓 하는 걸 진~짜 싫어하거든. 같이 잤다며. 깰 때도 옆에 있었고. 부끄러움이 하늘과 땅을 치다 못해서 맨틀을 뚫고 성층권을 돌파할 정도가 되니 기분이 나빠진 걸 거야. 어쩔 줄을 몰라서.”
키이스는 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기분이 나빠 보여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거다.
존은 크흐흐흐 하고 웃으며 키이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키이스는 트레이를 들고 일어나는 존을 따라 저도 음식이 잔뜩 남은 트레이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걸으며 물었다.
“그런데, 거부감은 없는 겁니까?”
“무슨?”
“그러니까… 저랑 퍼스트의 관계랄까. 아무도 놀라지 않아서 좀….”
“니들 없을 때 우리끼리 이야기하며 다 놀랐어. 몰랐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보다는 오히려 응원하시는 듯한 느낌이라 그게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보통은 안 그렇잖습니까.”
“그건….”
“……?”
“우리는 퍼스트랑 올해 4년째 일하고 있어. 그동안 녀석이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귀었는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꽤 잘 알지.”
존은 ‘여자’라는 단어에 키이스가 대뜸 미간에 주름을 잡자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짧게는 2―3주, 길어봐야 두세 달이 고작이었지. 특히 일이 제일 바쁘고 힘든 여름에는 얼마를 사귀었든 곧장 차였는데 그럴 때마다 잠이 부족해서 성질부리는 꼴을 봐야 했어. 그놈,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이르면 옆에 사람이 있어야만 잘 수 있거든.”
“…네, 압니다.”
“여름마다 퍼스트가 눈 밑을 시커~멓게 해가지고는 병든 닭새끼마냥 비실거리고 졸아대는 걸 봐야 했지. 그런 상태로도 뱀파이어를 사냥하겠다고 필사적으로 날뛰고 헥헥거리고 비척거리고 끙끙 앓아대고….”
“…….”
“그 꼴을 우린 4년째 봐왔다 이거야.”
존은 트레이를 반납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쯤 되면 상대가 누가 되든 퍼스트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안정이라….”
“사실 안정이든 행복이든 단어는 뭐가 붙든 상관없어. 그냥 단순하게 가자면 퍼스트에게 매일 푹~ 잘 수 있게 해주는 상대가 생기면 좋겠다고 다들 바라고 있었다는 거지. 그게 네놈이 될 줄은 몰랐지만.”
“흐음.”
“뭐, 우리 일을 아예 모르는 사람하고 만나서 평생을 숨기고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사내 결혼을 하는 편이지만, 어쨌든 네놈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퍼스트랑은 의외로 요철이 잘 맞아들어가는 모양이니 잘해봐. 난 ‘된다’에 걸었다.”
“뭐가 된다는 겁니까?”
“넌 눈치가 빠른 듯하면서도 이상한 데서 둔하더라? 너희 둘이 커플이 된다!―에 걸었다고.”
“아―.”
“캐리는 아까 들었다시피 퍼스트가 스트레이트라는 이유로 기권해버렸지만 맥스도 너한테 걸었어. 그러니 기왕 퍼스트를 공략하는 김에 우리도 한몫 잡게 해줘. 나와 맥스를 제외하면 전~부 ‘안 된다’에 걸었거든.”
“둘뿐이라니 그거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소리네요. 이래 봬도 꽤 자신 있는데.”
키이스는 소리 내 웃으며 답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며 기필코 한몫 잡게 해주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존은 그 주먹에 제 주먹을 치고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맥스에게도 키이스의 말을 전해줬다. 맥스는 콧방귀를 뀌면서도 키이스의 주먹을 툭 쳤다.
* * *
노란 사과 주스 병이 허공을 날았다 손바닥에 턱―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지금 신경원은 맨해튼의 주요 호텔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는 CCTV 영상을 살피고 있었다. 1시에 출근해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데스크 업무를 해치우고 일반인들에게는 저녁에 해당하는 점심을 먹고 나면 계속 본부 상황실에 틀어박혀 이렇게 눈이 돌아갈 듯한 모니터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요 며칠 신경원의 일과였다. 라헬 윈스터가 주로 호텔에서 호텔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번일에도 어김없이 상황실에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터라 혹사당한 눈이 꽤 피곤했다. 그래도 신경원은 하루도 빠짐없이 상황실을 찾았다. 어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시야 한구석에서 주스 병이 오르락내리락한다. 평소라면 주스 병을 보기만 해도 다른 잡생각이 깨끗이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손에 쥐고 계속 시야 한구석에 두고 있음에도 자꾸만 다른 생각이 났다.
하나, 졸려서 해롱거리다 안 해도 될 소리를 키이스에게 해버렸다.
둘, 그걸로 모자라 키이스 놈이 끌어안자마자 정줄을 놓아버렸다.
셋, 일어나보니 놈의 품속이었다.
넷, 잠에서 깨어난 놈은 남의 속도 모르고 실실 헤실헤실 웃음을 흘….
으아아악―!
신경원은 오그라드는 팔다리를 감싸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든 잊어보려고 발악을 하고 있지만 소용이 없다. 눈을 뜨자마자 이마에 닿았던 단단하고 따스한 감각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잠에서 깬 지 벌써 12시간이 넘어가고 있건만 그때 느낀 온기와 감촉이 이마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환장하겠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쪽팔려서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24시간 넘게 완전 폭면을 취한 몸은 기절이라는 단어와 담을 쌓고 나 몰라라 했다. 그뿐인가? 너무 잘 자고 잘 쉬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정줄을 놓을 수도, 멍하니 딴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머리와 몸속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2주가 아니라 몇 달을 제대로 못 잔 상태라 해도 기절을 했으면 했지 어제처럼 그렇게 누군가에게 몸이 닿자마자 스르륵, 끈 떨어진 인형마냥 잠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맥스나 존 같은 동료들에게 기대서 반 기절 상태로 잠든 적도 꽤 많지만 그거랑 이거는 좀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정신 차려, 신경원. 넌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잖아.
아우우우―.
신경원은 소리 없이 신음을 흘리며 오른손에 쥔 주스 병을 꾸욱, 힘주어 잡았다. 아침부터 손에 쥐고 있던 주스 병은 체온으로 인해 미지근해져 있었다. 시시때때로 몸에 열이 오르는 바람에 되레 체온보다 더 따뜻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고 있다.
신경원은 눈에 힘을 주고 손에 든 주스 병을 잠깐 노려보았다. 노오란, 황금빛이 도는 액체가 병 속에서 찰랑거린다. 마치 키이스의 금색 머리카락을 녹여 담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젠장.”
괜히 봤다. 하루 종일 들고 있으면서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는데, 감촉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왜 봤을까. 정말 괜히 봤다.
신경원은 주스 병을 내려놓고 다시금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제 이마를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손등과 마찰된 이마가 더욱더 뜨거워졌다. 그곳에서 파생된 열이 눈가로, 뺨으로, 귓가로 그리고 목덜미에까지 붉게 퍼져나가고 이내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몸에 열이 나니 마치 키이스의 품 안에 포근히, 온기와 함께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속에서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기분도 들었다. 확 내뱉어버리면 편해질 것 같은데 뭘 어떻게 내뱉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제 몸의 변화에 어찌할 바를 몰라 연거푸 이마만 부비고 있던 신경원의 머릿속에 어느 순간 키이스가 했던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좋아합니다.」
파란 눈동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눈을 하고도 키이스는 웃어 보였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가슴이 울렁거렸다. 누군가 심장을 맨손으로 잡아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을 덮고 있는 옷자락을 움켜쥐었으나 기묘한 압박감은 사라질 줄을 모른다.
어떻게 해.
신경원은 스읍―하고 숨을 들이켜며 답답한 가슴에 공기를 불어넣었다. 연거푸 공기를 들이마셔도 소용이 없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흔들린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애써 내리누르고 있던 감정의 호수에 파문이 퍼져나간다.
누군가와 잠들어도, 누군가를 품에 안거나 안겨 잠들어도 그렇게까지 포근하고 따뜻한 감각을 느껴본 적은 없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 그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잔다는 게 그렇게까지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답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퍼스트를 23시간 동안이나 혼자 고독하게 놓아둘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린 겁니다.」
어째서 이제 와서 그때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걸까. 신경원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만 느껴졌던 말이 뒤늦게 머릿속에서 자꾸만 재해석된다.
「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23시간뿐이라면, 그 시간만이라도 온전히 제가 가지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도 그 시간을 양보하고 싶지 않아요. 마지막 1분 1초까지도.」
그때 키이스가 지었던 절박한 표정이 눈앞에 떠오른다. 남아 있는 시간을 온전히 가지고 싶다던 말에 담긴 무게가 어깨… 아니, 전신을 압박한다. 몸을 지탱하는 다리가 그 무게에 짓눌려 부르르 떨린다.
낯선 감각이다. 그러나 그 감각과 무게가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신경원은 감정에 둔한 사람은 아니다. 그저 단순히 뭔가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그것 이외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경주마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족을 잃고 에이전트가 된 이후로 딱 두 가지 목표만 바라보며 살았다. 원래 성격도 성격이고 목표 자체가 워낙 절대적인 것이기에 다른 데 신경을 줄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아주 가끔씩은 시선이 다른 것에 가곤 했다. 그때는 의식적으로 감정을 차단했다. 처음에는 조금 성가시고 힘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익숙해졌다. 감정을 떨어버리는 것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쉬워질 때쯤 되자 어지간한 일에는 무감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라 멍청한 인간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키이스가 했던 말에 담긴 무게와 의미와 그 절실함과 절절함을 이렇게 뒤늦게, 새삼스럽게, 온몸으로 절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언가에 잡혀 압박을 받던 심장이 덜컥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펄떡펄떡 뛰며 더운 피를 온몸으로 밀어내며 이내 쿵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신경원은 같은 질문을 또 스스로, 어떤 인간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을 향해 던졌다.
그는 지금 인생에 단둘밖에 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 목표는 어떠한 이유로든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이유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은 그 목표를 향해 죽는 그 순간까지 전력을 다해 뛰어야 한다.
자신이 달리는 길은 일직선의 곧은 고속도로와 같다. 중간에 쉬어가는 휴게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질주를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있었다. 시야의 끝, 거의 한계점에 가까운 곳에 누군가가, 키이스 클리퍼드라는 이름의 사람이 서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뿐 아니라 그가 전해오는 감정이 느껴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 조금씩이나마 반응을 보이려 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와 같은 일은 그저 한 길만을 향해 경주마처럼 달리던 신경원에게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은 멈추지 않는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폭주해 여전히 한 길을 계속 달릴 뿐이다.
신경원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깜박였다. 수십 개로 나뉜 스크린에 어둡지만 환한 거리가 비치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미친 듯이 키이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눈은 여전히 스크린에 고정된 채 뱀파이어를 찾는다.
질문에 대한 답은 굳이 되묻지 않아도 이미 나와 있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을 해도 답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전과 같다. 결과는 신경원이 가지고 있는 키이스에 대한 마음의 무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의지나 마음의 벡터와는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바뀌지 않을까 고민하는 거냐고. 헛수고인데.
신경원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마음속의 술렁거림은 아직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귀까지 새빨개진 몸도 쉬이 원래대로 돌아갈 기색이 없다. 그래도 시선은 스크린을 향했다.
수십 수백 개의 움직임이 두 개의 동공 안으로 쉴 새 없이 빨려 들어간다. 수많은 인간들 사이에 끼어 있을지도 모를 뱀파이어를 찾기 시작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란 사과 주스 병이 다시 일직선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오전 여섯시 반, 신경원은 밤새도록 혹사당한 눈을 꾹꾹 누르며 상황실을 나왔다. 12월 말의 맨해튼 밤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밤늦게까지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리를 가득 메웠다. 특히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각 호텔의 주변은 평소보다 배는 더 붐볐고 그들의 움직임은 신경원의 체력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사무실로 돌아온 신경원은 가만히 넓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거리는 밤새도록 붐볐지만 사무실은 조용했다. 의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무런 신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존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신경원을 발견했다. 그는 신경원의 얼굴이 아닌 손을 살피고는 씨익 웃었다. 어색함이 남아 있는 것이 신경원이 아직도 주스 병을 들고 있는 것에 신경이 쓰인 듯했다. 그래도 그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 퍼스트.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
신경원도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럭저럭’이라 답해주고는 밤새 비웠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옆자리가 비어 있다. 주인이 없는 자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존이 킬킬거리며 물었다.
“항상 옆에서 꼬리 휙휙 흔드는 강아지 새끼가 없으니 허전하냐?”
“뭐….”
“오호.”
“…무슨 의미의 감탄사지?”
“강아지 새끼가 귀엽긴 귀엽나 보다? 없는 거에 신경을 다 쓰고?”
“신경을 쓴 게 아니야. 그냥 있다 없으니 빈자리가 보였달까.”
“흐음.”
“한국 속담에 그런 게 있어.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신경원은 속담의 의미를 되새기며 지금은 완전히 주인을 잃은 자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맥스의 파트너 로스가 앉아 있던 자리다. 생긴 거는 뱀파이어 정도는 가볍게 씹어 먹을 듯했는데 제일 먼저 포기하고 나가버렸다.
솔직히 그는 로스가 아니라 키이스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이유야 두말할 것도 없이 잘 자란 도련님이니 험한 일을 못 견딜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미레즈는 의외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잘 버틸 거라 믿었고 말이다.
태도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라미레즈는 신경원과 비슷한 형태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즉 사연이 있어 에이전트가 된 사람이었다. 물론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유독 신경원에게 날을 세우는 것을 보고 예들린이 넌지시 알려준 것이다.
라미레즈는 일가족 전부는 아니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이 뱀파이어가 된 친척에게 살해당했다. 다행히 아버지와 다른 형제자매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그녀 자신은 신경원처럼 ‘일상’을 잃어버리고 뱀파이어 헌터의 길을 택했다.
그녀의 독이 오른 듯한 태도가 바로 그 사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죽인 뱀파이어를 용서할 수 없었을 테고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에이전트의 길을 택했을 텐데 나태하고 불성실해 보이는 선임들, 특히 신경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었을 것이다.
신경원도 처음엔 그러했었다. 라미레즈보다 더 온몸에 가시를 삐죽삐죽 곤두세우고 긴장으로 어깨를 바싹 굳힌 채 매순간을 보냈다.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선임들을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한발만 잘못 디뎌도 요단강을 건너고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어긋나도 곧장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에 서 있으면서도 어째서 저렇게 느긋한지, 어째서 저렇게 나태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현장에 나가면 태도가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용납하기 참 힘들었다.
불만은 곧 반항과 반발로 이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라미레즈보다 질이 나빴다고 해야 한다. 라미레즈는 티라도 팍팍 내며 나름대로 스트레스 해소를 하고 있었지만 신경원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었다. 속으로만 불만과 스트레스를 쌓았다. 덕분에 알렌이 고생을 많이 했다.
당시 4년차였던 알렌은 마치 이중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신경원을 대했다. 평소에는 느슨한 태도로 가시를 곤두세운 신경원을 무턱대고 감싸줬다. ‘그런’ 경험을 했는데 어떻게 가시를 세우지 않고 견딜 수 있겠냐며 토닥여줬다. 하지만 현장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엄격했다. 잘못한 것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꼬투리를 잡아 혼을 냈고 가차 없이 손발을 날렸다.
그는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좋지만 24시간 그렇게 있다가는 정작 가장 필요한 순간에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긴장의 끈이 끊어질 수 있다고 했다.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물리적인 휴식뿐 아니라 정신적인 휴식도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데 거의 일년이 걸렸다. 쉬지 않고는 계속 달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다. 그건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스스로 깨우치기 전에는 납득하기 힘든 거였다. 깨닫고 나서도 제대로 실천하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신경원 역시 아직까지도 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법을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것 이외에는 찾지 못했으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로 신경원은 라미레즈나 로스나 키이스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비롯해 선임들에게 반항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언제라도 좋으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스스로 선임들의 나태한 태도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들도 나태해지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긴장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길 바라는 거다.
신경원은 힐끔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제일 먼저 태도가 바뀐 것이 바로 키이스였다. 라미레즈와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보였지만 키이스도 초반에는 불만 어린 눈빛을 종종 보였었다. 그 눈빛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맥케인 가족의 참살 사건이 벌어진 후부터였다.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또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제외하고 키이스가 자신을 ‘어떤 선임’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잠시 옛일을 떠올리며 멍하니 있던 신경원은 우연의 일치인지 라미레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신경원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게 불쾌하고 불편하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신입이라는 건 어쨌든 귀엽다.
“퍼스트,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요?”
언제나처럼―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리 느껴지니 이것도 신기하다―키이스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다. 자리를 비웠던 맥스도 함께였다.
“퍼스트 왔구나.”
“어.”
“마실 거라도 가져올까요?”
키이스의 시선이 모니터 바로 옆에 내려놓은 사과 주스 병으로 향한다. 하루 종일 들고 다녔으니 그 역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어째 내 주변에는 죄다 참견쟁이밖에 없다니까. 그중에 제일은 금색 털 강아지지만.
“아니, 괜찮아. 그런데 근무 중에 어딜 다녀오느라 자리를 그렇게 비워?”
“맥스와 함께 분석팀에 좀 다녀왔어요. 제가 설명해도 되나요, 맥스?”
맥스는 그러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제자리에 앉았다. 해는 떴지만 아직 퇴근시간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아 있어 그런지 그는 곧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키이스는 태블릿 PC를 신경원에게 내밀었다.
“이것저것 생각해봤는데 맥스가 분석팀에 이런 쪽에 유능한 분이 계시다고 해서 도움을 좀 요청했어요.”
키이스는 의자를 당겨 신경원에게 바싹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그가 가져온 데이터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라헬 윈스터의 원래 거주지, 그녀의 원래 직장, 뱀파이어가 된 이후 옮긴 주거지와 직장과 활동지역을 기본으로 두고 맨해튼 내의 호텔들 중 그녀가 드나든 호텔과 비슷한 등급의 호텔을 추려내 기본 데이터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지난 2년간 보고된 살인사건이나 변사체 발견 건 중에서 ‘호텔’에서 벌어진 것, 그리고 뱀파이어에 의한 사건으로 판단된 건들을 추가해서 교차 분석했고요.”
“…….”
“게스트 하우스까지 넣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서 일단 호텔로 한정을 지었습니다만,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조금씩 더 추가해 넣어보려고 해요. 경찰 쪽 데이터베이스를 뒤져야 하는 거라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요.”
듣고 있자니 키이스와 맥스가 무슨 일을 한 건지 감이 잡혔다. 그들은 라헬 윈스터의 예상 행동반경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신경원의 일을 줄여주려는 거다.
“맨해튼 시내로 한정지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물론 두 번 다 맨해튼에서 목격되었지만 그래도….”
“네. 이건 1차 데이터고 맨해튼 쪽 데이터 분석이 끝나면 뉴욕 시 전체의 데이터를 추가해볼 요량입니다. 퀸즈 쪽의 호텔은 대강 추려내서 준비 중이고요. 내일이면 퀸즈는 끝낼 수 있을 것 같고 2~3일 내로 다른 곳도 추가할 겁니다. 데이터가 완성되면 집중 모니터링 해야 하는 지역을 좁혀서 좀 더 세밀하게 살필 수 있을 거예요.”
신경원은 지도에 표시된 호텔들을 확인하고 추가된 데이터 분석표를 체크했다. 생각보다 꽤 세밀했다. 딱 봐도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만들 수 있는 데이터였다.
본격적인 겨울이 되며 출동 횟수가 줄어들어 나름 한가해지긴 했다. 하지만 한가해진 것은 어디까지나 현장 업무뿐, 데스크 업무는 오히려 늘어난 상태다.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에 이른바 ‘시즌’이라 불리는 여름 동안 미루어두었던 서류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뉴욕 지부는 주로 맨해튼을 중심으로 뉴욕 시에서 활동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뉴욕 주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뉴욕 시 이외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처리하는 전담 지부가 있긴 하나 그쪽은 모두 SWAT팀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즉 HRT가 필요한 사건이 벌어지면 어디든 출동해야 한다. 달리 HRT가 바쁜 게 아니다.
형편이 그런 상황에서 이런 데이터를 만들었다는 건 정말로 시간을 꽤나 쪼개서 썼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도 휴일을 반납했을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라 과외의 일로 구분 지을 수는 없어도 일부러 일을 만들어 했다는 점에서 과외의 일이나 마찬가지인 일이니까.
“쓸 만하죠?”
키이스는 방긋 웃었다. 칭찬해달라는 느낌이 든다.
“피곤했을 텐데 용케 시간을 냈네.”
“피곤하지는 않았습니다. 퍼스트를 위해 한 일인데 제가 피곤할 리가 있겠어요. 맥스에게 폐를 끼치긴 했지만.”
“폐는 무슨. 내가 한 거라고는 프로그램적인 부분에만 손을 조금 보탠 건데 뭐. 퍼스트, 클리퍼드나 칭찬해줘. 초안을 만들고 필요한 데이터를 뽑아내기 위해 데이터베이스 뒤지느라 꽤 고생했거든.”
맥스는 제 공이 아니라며 키이스를 칭찬했다. 아주 열성적으로 일했다며 말이다.
“생각보다 그런 쪽에 재능이 있더라고. 데이터 체크하고 추려내서 통계내고 분석하고 그러는 쪽에.”
“그래?”
“응. 나중에 필드 쪽 은퇴하면 분석팀 쪽으로 가도 될걸? 너랑은 다른 의미에서 눈이 좋아. 시야가 넓다고 해도 좋고.”
“흐음.”
HRT에 속한 에이전트들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40대 중반 정도에 은퇴한다. 하지만 완전히 일을 그만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기엔 젊은 나이이기도 하고 현장에서 뼈가 굵은 유능한 에이전트는 다방면에서 쓸모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경원은 필드 에이전트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면 전공을 살려 의료팀이나 총본부의 연구소 쪽에 지원을 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맥스는 이미 분석팀에서 찜을 해놓았다. 나이가 있는 알렌 같은 경우는 지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은퇴 후 규모가 작은 지부의 장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고 말이다.
초재벌가 자식인 키이스가 은퇴 이후에도 기관에 몸담을 생각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뭔가 특기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고맙다. 내일부터는 이 자료를 중심으로 해서 모니터링 해볼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퍼스트.”
“응?”
“이제 좀 괜찮으세요?”
“뭐가.”
“아침부터 계속 기분이 좋지 않으셨잖아요.”
“아, 그럭저럭.”
“다행이네요.”
키이스는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곧 환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느냐고 물을 만도 한데 아무 소리 안 한다. 아침에 일어나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숙직실을 나왔으니 어느 정도 짐작을 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마냥 속이 좋은 놈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럴 땐 속 좋은 놈으로만 보인다니까.
신경원은 의자를 끌어 제자리로 돌아가는 키이스를 보고는 몸을 돌렸다. 모니터 옆에 놓아둔 사과 주스 병이 다시 시야에 잡혔다.
오돌토돌한 유리병 안쪽에 담긴 황금색 액체가 순간 강하게 시선을 끌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살짝 얼굴을 돌려 키이스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사과 주스 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금을 녹여 부은 듯한 노오란 액체는 강렬한 인력으로 신경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상황실에서는 키이스에게로 쏠리는 신경을 의식적으로 차단하고 모니터링에 집중했다. 하지만 키이스의 얼굴을 보니 다시 그때 생각했던 것이, 고민하던 것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론을 내야 한다. 계속 이렇게 머릿속이 소란하게 둘 수는 없다.
신경원은 손을 뻗어 주스 병을 잡았다. 그새 서늘하게 식은 유리병이 손바닥의 온기를 앗아간다. 신경원은 병을 다른 손으로 옮기고는 내용물이 찰랑, 소리 나게 흔들어보았다.
뚜껑을 열면 뽕―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상큼한 향내가 피어오를 거다. 마시면 적절하게 달콤한 액체가 혀를 녹여줄 것이다. 알지만, 마실 수 없다. 뚜껑을 열 용기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바라만 보는 거다.
그래, 이렇게 바라만 보는 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담아두고 뚜껑을 닫아놓고 가끔 보는 것 정도는, 이렇게 손에 잡고 살짝 흔들어 소리를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신경원은 제자리로 돌아간 키이스의 옆얼굴을 훔쳐보고 다시 사과 주스 병을 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신경원은 마음속 한구석에서 샘처럼 솟아올라 작은 못이 되어가는, 어쩌면 사과 주스보다 더 상큼하고 향긋한 향기가 피어오를 따스한 감정을 무형의 병에 그리고 손안의 병에 담아 황금빛 액체에 의미 하나를 더했다.
아쉬움과 미안함. 혹은 안타까움. 혹은 뭐라 이름 짓기 힘든 감정이 뭉근하게 녹아 손안의 병을 온기로 감싼다. 서늘하게 식었던 유리가 조금씩 따스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지고 있는 것 정도는, 담아두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그렇지? 그거면 충분할 거야.
신경원은 단단한 금속제의 하얀 뚜껑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모니터를 보고 있던 키이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 시선을 그대로 느끼며 탕비실로 간 신경원은 냉장고 문을 열고 사과 주스 병을 넣었다. 항상 두는 그 자리에,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구석자리에 넣고 문을 닫았다.
“아, 맞다. 퍼스트.”
“응?”
자리로 돌아오려는데 그새 자리를 비웠던 존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신경원을 불렀다.
“낮에 식당에서 가볍게 파티가 열리는데, 참석할 거지? 내일 근무팀도 좀 일찍 출근하기로 했거든.”
“무슨 파티? 누구 생일이야?”
뜬금없이 무슨 파티냐 싶어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문 앞에서 번개처럼 날아온 존이 손을 들어 신경원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아니, 가격하려다가 가로막혔다.
이건 무슨 크로스~하고 팔을 맞대며 의기투합하는 것도 아니고.
신경원은 눈앞에서 서로 팔을 교차한 채 때 아닌 힘겨루기를 하는 존과 키이스를 보고 끄응 하고 신음했다. 존은 그렇다 치고 키이스는 분명 모니터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눈치를 채고 일어나 막은 건지, 정말 전광석화가 따로 없다.
“뒤통수 때리지 말라고 해서 이마 때리려고 했거든?”
“제가 언제 뒤통수‘만’ 건들지 마시라고 했던가요? ‘머리’라고 했습니다. 이마도 머리에 해당합니다.”
“이마는 이마, 머리는 머리. 헤어라인을 기준으로 갈리는 거야. 국어 공부 좀 열심히 해야겠다, 클리퍼드?”
“머리라고 하는 건 목 위의 신체부위를 말하는 겁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신경원은 한숨을 쉬고는 여전히 크로스 중인 두 남자의 팔을 떼어냈다.
“존, 무슨 파틴데?”
“넌 CCTV 영상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에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거냐? 진짜?”
“모르니까 묻지.”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아―.”
“어제는 크리스마스이브! 오늘은 크리스마스! 아무리 우리가 휴일 없이 일한다지만 너 정말 너무한다.”
“크리스마스라고 쉬는 것도 아닌데 무슨. 언제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그렇게 크게 의미를 두었다고.”
휴식시간에 식당에서 케이크 한 조각 먹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 게 에이전트들의 크리스마스다. 운 좋게 크리스마스에 비번이 걸리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야 홈 파티라도 하겠지만 보통 크리스마스에는 항상 일이 터지기 때문에 다들 큰 약속은 잡지 못하고 반 대기 상태로 하루를 보내곤 한다.
사실 경찰들이나 911 같은 국가 공무원들이 가장 바쁜 때가 바로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연말연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러니 왜 ‘우리만’ 이 모양 이 꼴이냐는 푸념은 할 수 없다.
“알았으니 무조건 참석해. 너 요즘 숙직실에서 사는 거 다 아니까, 어디 빠져나가지 말… 아, 그렇지. 클리퍼드!”
“네?”
“네가 책임지고 퍼스트 깨워서 데리고 나와. 라미레즈도 마찬가지야. 집에 가지 말고 숙직실에서 잠시 눈 붙이고 나와. 크리스마스에 일해야 하는 불쌍한 놈들도 죄다 참석한다고 했으니까 쉬는 우리가 빠질 수 있나. 수습인 너희들은 특히 반드시 참석해야 해.”
“으음. 잠깐 참석했다가 바로 나가도 됩니까? 명색이 크리스마스인지라 퍼스트에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려고 하는 중이라….”
“어차피 쉬는 날이잖아. 저녁 먹어, 저녁.”
“저녁때는 약속이… 집 쪽에 가봐야 해서요.”
키이스의 대답에 신경원은 눈을 깜박였다. 누나인 레이첼을 제외하고는 형제들과는 사이가 무척이나 나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상태로도 파티는 하는 모양이다. 하기사 키이스의 집은 집이라기보다는 가문이라고 해야 할 규모고 어쩌면 클리세딕 그룹 차원에서 뭔가 거대한 파티가 열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너의 가족이라면 아마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거나.
“그래? 그럼 얼굴이라도 무조건 내밀어.”
“알겠습니다.”
“왜 네 멋대로 대답하냐? 난 잘 건데.”
신경원은 한쪽 눈가를 찡그러트리며 말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버릇도 없을뿐더러 사람 많은 거리며 식당에 비집고 들어가 억지로 뭔가를 축하하는 행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게다가 그는 오늘도 한숨 자고 일어나 바로 상황실에 틀어박혀 모니터링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점심때는 일어나셔야 하잖아요. 얼굴만 비추고 나가서 식사해요. 해 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본부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녁을 함께 하고 싶은데 그건 힘드니 점심은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나 그런 거 상관 안 하거든? 점심은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건데 굳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세요. 좋은 데 예약해놨어요. 저녁을 같이 못 하는 것도 섭섭한데. 아참, 퍼스트 저 내일 하루 쉰다는 말씀드렸었는데 기억하세요?”
“……?”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신경원이 휴가를 받으면 키이스도 자동으로 휴가를 받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키이스가 휴가를 받은 것은 그가 선임 에이전트의 감독 하에서만 일을 할 수 있는 수습 에이전트였기 때문이다.
“저녁에 열릴 파티가 바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낮까지 풀코스로 이어지거든요. 빠지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는 것도 있고 이래저래 좀 복잡합니다. 더군다나 레이첼이 오랜만에 뉴욕에 온다는 연락을 받아서 내일 저녁에는 레이첼과 따로 봐야 할 것 같고….”
“아아.”
“레이첼이 누구냐? 설마 네 이거?”
존이 불쑥 끼어들어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키이스는 당치도 않다는 태도를 하며 ‘누나’라고 강조했다.
“오호. 말하는 걸 보니 퍼스트는 본 적이 있는 모양인데, 미인이냐? 아…. 너한테 물어봤자 소용없지.”
“왜 퍼스트에게는 물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겁니까?”
“아무튼 너는 의외의 부분에서 참 둔하단 말이야.”
존은 씨익 웃으며 키이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는 신경원의 앞에 나란히 섰다.
“자아, 퍼스트. 누가 더 미남 같아? 사진 보는 건 반칙이야.”
신경원은 인상을 썼다. 누굴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냥 자리로 돌아와버렸다. 뒤에서 두 남자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잠시 후 키이스가 와서 자리에 앉으며 신경원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러셨던 거군요.”
“뭐가?”
“전에 갑자기 제 출입증 사진 보신 적 있잖습니까. 왜 그러시나 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어요. 진짜 궁금했었거든요.”
“그런 것도 궁금하냐?”
“전 퍼스트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싶고 궁금해요. 아! 제 FBI 신분증 사진 보실래요? 그쪽이 더 잘 나왔는데.”
“됐거든?”
“에이. 아, 저 잠깐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신경원은 모니터를 켜고 오늘의 업무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때 서랍에 넣어둔 핸드폰이 메시지를 수신했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내본 그는 액정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화사한 금발머리의 키이스가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지은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메시지도 첨부되어 있었다.
「기왕이면 저를 보고 웃어주세요. 안 그러면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남자가 돼서 라미레즈를 괴롭혀 쫓아낼지도 몰라요.」
신경원은 간단하게 답 메시지를 보냈다.
「등신. 이거 업무용이다.」
사진 속의 얼굴은 정말이지 영화배우 뺨을 100대는 왕복으로 칠 수 있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 * *
「메리크리스마스, 형!」
「메리크리스마스!」
「형 1월에 휴가 받을 수 있어?」
「저번에 왔으니 힘들까?」
「그래도 휴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키이스랑 같이 와.」
「이쪽 번호도 키이스가 가르쳐줬어.」
「이 번호로는 메시지 막 보내도 되지?」
누구 마음대로 키이스래. 이것들이.
신경원은 잔뜩 쌓인 메시지를 확인하며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한숨 자고 다시 일할 준비를 하기 위해 샤워를 하고 돌아와 로커에 넣어둔 ‘새 핸드폰’을 꺼내니 쌍둥이로부터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모두 어제 저녁에 도착한 것들이었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 그게 끝나면 아마 하루 정도는 휴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해지면 알려줄게. 늦었지만 메리크리스마스.」
신경원은 동생들에게 답을 보내고 메시지 창을 닫았다. 그러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키이스의 얼굴이 액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테두리가 하얀 프레임 안의 얼굴은 어제 아침에 찍어 전송해준 사진 속의 얼굴보다 훨씬 잘나 보였다.
그것은 어제 키이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다. 만석인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받았다.
최신형의 핸드폰이었다면 틀림없이 거절했을 텐데 키이스는 굉장히 용의주도했다. 유행의 선두를 달리는 브랜드의 제품이지만 완전 최신형이 아니라 구형 모델로 약정을 한다면 굉장히 싼값에 구입할 수 있는 놈이다. 즉, 이런 ‘비싼’ 물건은 받을 수 없다는 말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추가로 키이스는 신경원의 약점에 속하는 것을 콱! 하고 찔렀다. 바로 아이들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신경원의 핸드폰이 업무용인지라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더라면서 말이다.
사실 원래부터 개인용 핸드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어느 날 고장 났는데 하필이면 여름 시즌이었던 터라 한가하게 핸드폰 따위를 사러 다닐 시간이 없었다. 여름 시즌이 지나니 개인용 핸드폰이 없는 것에 익숙해져버렸고 핸드폰을 두 개 들고 다니는 귀찮음도 한몫했던 터라 새 핸드폰을 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한 사촌 동생들에게 기관에서 지급받은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주고 쓸데없는 메시지는 보내지 말라는 제한을 걸어놓자 공사 양면으로 편해져 더더욱 새 핸드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신경원은 잠시 액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키이스의 얼굴을 보았다. 핸드폰은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신경원은 연락처나 몇 개 등록해놓을까 하며 핸드폰을 조작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꼼꼼한 새끼.”
핸드폰에는 이미 필요하다 싶은 연락처는 모두 들어 있었다. 쌍둥이와 같은 유닛 동료들의 연락처며 예들린의 번호도 있었고 키이스의 번호도 있었다. 연락할 일이 없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번호였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우웅 진동을 하며 메시지를 수신했다. 혹 쌍둥이인가 했는데 키이스였다.
「밤 샜어요. 그런데 끝나려면 멀었어요. lol 보고 싶어요, 신. Ps―레이첼이 신과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다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나도 못 보는데… lollollol」
텍스트 메시지인데 어쩐지 사운드 이펙트가 딸려 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lol이라니. 그 큰 덩치와 손가락으로 lol을 찍고 있을 키이스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울리는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신경원은 피식거리며 핸드폰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간혹 개인용 핸드폰을 사무실로 들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신경원은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로 가니 다들 의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찍 출근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혹시 지각한 건가 해서 시계를 봤지만 1시 정각까지는 5분도 더 남아 있었다. 신경원은 자리에 앉으며 벌써부터 일을 시작한 존에게 물었다.
“웬일로 그렇게 부지런해?”
“연말이잖아. 밀린 일 해치워야지.”
“흐응.”
“너도 병가 받은 거랑 상황실 들락날락거린 거 때문에 데스크 업무 꽤 쌓이지 않았어?”
“아, 좀.”
평소라면 꽤 쌓였다는 단어를 쓸 정도로는 일을 남기지 않는 신경원이다. 자주 졸고 빈둥거리긴 하지만 눈앞에 일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는 타입은 아니다. 일이 쌓인 이유는 오로지 라헬 윈스터를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내겠다는 열망 하에 다른 일을 조금 등한시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꼭 연말연시면 데스크 업무에 치여 죽기 일보직전이 된단 말이야.”
“어차피 우리한테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은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거 아니냐. 사실 우리보단 NYPD 애들이 더 불쌍하지. 걔들은 24시간 정신없잖아.”
맥스가 모닝커피 한 잔을 들고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커피가 고팠다. 자연스레 빈자리로 눈이 향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신경원의 모닝커피는 항상 키이스가 담당을 해왔기 때문이다.
신경원은 탕비실로 갔다. 마침 라미레즈가 원두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신경원은 조용히 두 걸음 물러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데 불쑥, 라미레즈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일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절대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는지라 이런 일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커피 진하게 드시나요?”
“어? 으응.”
“설탕이나 밀크는요?”
“필요 없….”
“여기요.”
라미레즈는 갓 내린 커피를 머그잔에 가득 부어 내밀었다. 거칠다고 하기까진 뭐하지만 딱히 부드러운 손짓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친절을 베푼 것이다.
“어…, 고마워. 너는?”
“전 연하게 마셔서 이거면 돼요.”
그녀는 신경원과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유리 포트에 남은 커피를 살짝 돌려 보이곤 잔에 따르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잘 마실게.”
“사무실에서 졸지 마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하하. 그래.”
신경원은 미소 지으며 대답하고는 탕비실을 먼저 나섰다. 라미레즈를 보고 웃었을 뿐 아니라 대화까지 했으니 키이스가 옆에 있었다면 또 뭐라고 잔소리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이스의 빈자리가 참 여러 형태로 느껴졌다. 그의 빈자리는 밤이 되어 오랜만에 출동준비를 하자 더더욱 크게 다가왔다.
“뒤에 좀 당겨줘, 퍼스트.”
“나도 아직 입는 중이다.”
“으으으. 보호복 진짜 싫다.”
맥스는 끙끙대며 마치 잠수복처럼 생긴 보호복을 가슴께에서 아래로 끌어내렸다. 존도 마찬가지로 쫄쫄이 같은 보호복을 착용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일단 입으면 편한데 입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오늘 출동은 긴급 출동은 아니다. 맨해튼 아래쪽의 어느 클럽에서 뱀파이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해사건이 발생했는데 어디까지나 추정인지라 현장을 확인하고 근처를 탐색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때문에 그들은 HRT 유니폼이 아닌 평상복 차림을 해야 했다. 그래도 몸을 보호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속에 받쳐 입는 것이 바로 쫄쫄이 형태의 보호복이다. 이빨이 박히는 것까지는 막지 못해도 손톱 같은 것이 스치는 것 정도는 무난히 막아준다.
신경원은 제일 먼저 상의를 입고 역시나 쫄쫄이나 마찬가지인 하의를 스타킹처럼 주욱 잡아당겨 입었다. 오랜만에 입는 것이라 그런지 불편했지만 생각보다 쑥쑥 잘 들어갔다.
“…퍼스트. 너 살 빠졌냐?”
“저놈이 빠질 살이 어디 있어.”
“그렇긴 한데 어떻게 저리 쑥쑥 잘 들어가는 건지….”
“웨이트를 좀 소홀히 해서 그런가봐.”
요 근래 모니터링에 온 신경과 시간을 쏟아붓느라 웨이트 트레이닝 시간을 1시간으로 줄였더니 이 모양이다. 신경원은 한숨을 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인 건 좋은데 대신 조금만 운동을 소홀히 해도 근육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게 탈이다.
그러고 보니 이 보호복도 클리세딕 그룹 계열사 건데.
신경원은 종아리를 감싼 부위에 노란 글씨로 작게 새겨져 있는 회사 로고를 발견하고는 또 키이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거의 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걸 보면 키이스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 아니, 가문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거대 그룹의 오너 가문쯤 되니 크리스마스 파티를 당일부터 시작해 다음 날까지 이어갈 정도로 크게 하는 거겠지 싶기도 하고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각지에서 몰려온 일가친척만 만나도 하루는 꼬박 걸리지 않을까?
“다 입었으면 나 좀 도와줘, 퍼스트.”
맥스가 보호복에 팔이 걸려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한 채 SOS를 쳤다. 신경원은 힘껏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로 돌아가 두꺼운 가슴에 걸려 내려오지 않는 보호복을 끌어내렸다.
“먹은 게 다 근육으로 간 거야? 난 웨이트 시간 줄였다고 근육이 쫙쫙 빠지고 있는데.”
“흐흐흐. 내가 좀 근육맨 아니냐.”
맥스는 보디빌더 포즈를 취해 보이며 우쭐거렸다. 보호복으로 가려지지 않은 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좀 가만히 있어.”
키이스의 등은 참 예쁜데 맥스의 등은 왜 이 모양… 아. 씨발, 이젠 별 생각을 다 하네.
신경원은 도리질을 치며 보호복 자락을 잡은 손에 아예 제 몸무게를 실어버렸다. 그 덕에 가슴께에 걸려 내려가지 않던 보호복이 쑥~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OK~. 됐다.”
“어으. 여름이 아니라 다행이야.”
맥스는 여름에 보호복을 입고 움직이면 아예 땀으로 샤워를 해야 한다며 겨울을 찬양했다. 그사이 옆에서 맥스보다 더 보호복과 씨름을 하던 존은 결국 한 치수 더 큰 것을 가져와 입었다. 존은 보호복을 입자마자 신경원에게 달려들어 어깨동무를 하더니 그대로 헤드록을 걸어 질질 끌고 가 제 파트너의 어깨에도 팔을 둘렀다. 그러곤 몸을 풀고 있는 맥스의 앞으로 가서 마치 슈퍼 히어로 같지 않냐며 농을 떨었다.
“시간 없는데 장난 좀 작작 해!”
신경원은 맨발로 존의 발등을 지르밟고선 그의 팔에서 벗어났다.
“으윽―, 파수 보는 강아지 새끼도 없는데 왜 이렇게 까칠하셔? 강아지가 우리랑 스킨십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냐?”
“개소리하지 마.”
“개소리라니, 클리퍼드라면 얼마든지 그러고 남을 것 같은데? 어깨동무한 채로 사진 찍어서 녀석에게 보내볼까? 받는 순간 슝~하고 날아온다에 10달러 아니, 20달러 건다!”
“헛소리 그만하고 옷이나 입어.”
신경원은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키이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존이 어깨에 팔을 올리려는 순간 그 팔을 막아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사람 든 자리는 모르는데 난 자리는 너무 크게 느껴진다.
“어째 강아지 새끼가 없으니 확실히 허전하다, 그치?”
오늘 출동하는 팀은 Zero 유닛의 반. 즉, 존과 존의 파트너, 캐리와 라미레즈 그리고 맥스와 신경원이다. 원래는 4팀 8명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그만두고 하나는 집안 일로 자리를 비운 탓에 3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름에 3팀 5명으로 작전에 임해야 했던 걸 생각하면 한 명이 늘어 있으니 그나마 사정이 낫다.
“강아지가 있어야 왈왈대서 활기차고 좋은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맥스, 네 새 파트너는 언제 온대?”
“아직 확정 안 났을걸?”
“백업팀에서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저번에 퍼스트가 지하에서 훈련할 때 꽤 괜찮다는 평을 했던 놈.”
“음. 그렇게 되는 건가 했는데. 일리노이 쪽에 SWAT이긴 한데, 그쪽엔 HRT가 없어서 이래저래 경험을 쌓은 녀석이 있다더라고.”
“같은 SWAT이라면 아무래도 그쪽이 낫겠지. 우리 쪽 애들도 죄다 그런데 보냈다가 데려오면 어떨까? 실력 있는 애들은 바로 두각을 드러낼 텐데.”
“그게 쉬운 일이면 상부에서 왜 안 하고 있겠어.”
“그런가?”
신경원은 동료들의 대화를 들으며 옷을 입었다. 평소와는 달리 양다리에 단검을 채우고 어깨띠를 매서 글록을 챙겼다. 그 위에 체크 남방을 입고 키이스가 사준 점퍼를 입자 권총을 차고 있다는 티도 나지 않게 완벽해졌다. 옷을 입고 팔다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움직임을 체크해보는데 존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이가 서른인데 왜 저 모양인지 몰라.”
“저기다 안경 씌우고 모자만 씌우면 아주 딱이야. 딱!”
“무슨 딱?”
“면 셔츠에 체크 남방을 몸에 박제한 공대 출신 너드nerd.”
순간 동료들이 우하학―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신경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존의 종아리를 적당히 걷어차고는 먼저 차에 올랐다. 뒤따라온 존이 아프다고, 뭘 그리 잘못했다고 예고도 없이 걷어차는 것이냐며 항의했지만 신경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뱀파이어의 존재가 확실히 확인된 것이 아닌 탓에 출동하는 차량도 평소의 검은 트럭이 아닌 SUV였다. 체구가 작은 라미레즈가 껴 있었으나 건장한 체격의 남자 다섯이 타자 차 안이 복작복작해졌다. 그런 분위기는 클럽도 마찬가지였다.
클럽은 불타는 금요일을 집에서 보내지 못하고 뛰쳐나온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맥스가 라미레즈와 함께 커플인 척하고 클럽에 잠입하고 신경원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클럽에 잠시 들어갔다가 곧바로 나와 근처를 산책하는 척하며 살폈다. 술이나 약에 취한 젊은, 혹은 어린 남녀들이 추태를 부리고 추운 날씨에도 맨다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매춘부들이 남자들을 유혹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 여럿 보였다.
신경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의 골목골목을 확인했다. 대략 한 시간 정도 클럽 주변 거리를 탐색하고 있는데 경찰 쪽에서 넘어온 사건 하나를 보고받았다. 신경원은 근처에 있는 맥스와 함께 얼른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은 클럽에서도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고 허름한 호텔이었다. 척 봐도 근처의 매춘부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사색이 된 주인과 경찰을 뒤로하고 도착한 작은 방 안은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맥스가 호텔 주인에게 투숙객에 대해 묻는 사이 신경원은 침대 위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반라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목덜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얼핏 봐도 시트를 적신 피의 양은 이미 치사량에 다다르고 있었고 목뿐 아니라 온몸에 상처가 많았다. 여자의 상처를 살피는 신경원의 얼굴은 곧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맥스. 의료…팀 호출하고 남자의 인상착의 정확하게 물어봐.”
“어? 응. 혼자서 괜찮겠어?”
신경원은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둑하게 세팅되어 있는 침대 맡 스탠드를 환하게 밝혔다. 여자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로 보였다. 짙은 화장을 하고 있어 얼핏 보면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10대 후반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품에서 글록을 꺼내 소음기를 장착했다. 그런 후에야 침대 위에서 헐떡이고 있는 여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전 신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뭐예요?”
신경원은 총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여자의 뺨을 쓰다듬고 힘없이 축 늘어진 팔을 가볍게 쓸어내리다 손을 잡아주었다. 여자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신경원을 바라보며 애써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에……이, ……미.”
“에이미. 예쁜 이름이네요. 연락할 가족…있나요? 대답하기 힘들면 눈만 깜박여도 돼요.”
에이미는 눈을 깜박였다. 신경원은 계속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몇 가지를 더 묻고 그녀가 안심할 수 있게 한두 마디를 더 해주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범인―뱀파이어의 얼굴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괜찮을 겁니다. 누군가 올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요.”
신경원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에이미는 그 말을 믿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주륵주륵 흘렸다. 그녀의 숨소리는 1분, 아니 1초 단위로 점점 더 가빠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두었다.
후우―.
신경원은 에이미의 손을 놓고 손에 묻은 피를 무감각하게 시트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글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장전을 하고는 에이미의 가슴을 조준했다.
“미안해요. 이런 짓 해서. 하지만 뱀파이어로 눈을 뜨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 죽는 것이 더 행복할 겁니다.”
그는 조용히 에이미의 명복을 빌며 글록의 방아쇠를 당겼다. 슉―소리와 함께 총알이 에이미의 가슴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숨이 끊어진 ‘시체’가 번쩍 눈을 떴다. 곧장 고막을 긁어내는 듯한 뱀파이어의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신경원은 망설임 없이 그녀, 아니, 뱀파이어의 목에도 한 발을 더 쏘았다. 그때 뒤편에서 맥스가 콰앙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퍼스트, 괜찮아?”
“어. 처리 완료했어.”
신경원은 뱀파이어의 가슴이 연기를 피워 올리며 내려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에이미에게서 눈을 뗐다.
“죽자마자 바로 눈을 뜬 건가? 무슨 각성이 이렇게 빠르담.”
맥스가 사살된 뱀파이어를 확인하며 구시렁거렸다. 그는 얼른 처리팀을 호출했다.
“달아난 범인은?”
“30대 초반, 히스패닉계 남자. 술 냄새가 좀 많이 났지만 그 이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는군. 숙박계에 기록된 이름은 J. 스미스. 존에게 이미 근처를 수색해보라고 했어.”
“해놓은 폼을 보면 B3 같지만 최소 B2나 B3로 변성 중인 뱀파이어 같으니 주의하라고 전해줘.”
“OK.”
신경원은 구석에 있던 에이미의 가방을 뒤졌다. 뱀파이어가 되면 시체가 남지 않으니 가방과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이 그녀의 유품이 된다.
“옆에 둬. 처리팀이 알아서 처리할 거야.”
맥스는 가방을 뒤져 핸드폰과 지갑을 확인하는 신경원을 보고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원은 비밀번호가 걸린 핸드폰을 잠시 보았다.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주겠다’고 말한 것이 조금 걸렸다. 절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에이전트로 일하며 볼꼴, 못 볼꼴, 별의별 꼴을 다 보지만 이런 일은 사실 어지간해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미 죽은 후에 ‘확인 사살’을 하는 것까지는 그래도 익숙해져서 괜찮은데 숨을 거두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 이후에 확인 사살을 하려면 항상 ‘살인자’가 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어둔 것 같았다. 오늘은 편히 자긴 글렀다. 키이스가 옆에 있어주면 또 모르겠지만….
신경원은 키이스의 얼굴을 떠올리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잘 생각’을 하자마자 키이스가 떠오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그를 잠을 자기 위한 ‘도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그러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를 해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는 이미 키이스의 품 안이 얼마나 아늑하고 포근한지 알아버렸다.
“젠장.”
“항상 있는 일이잖아. 그러려니 해.”
맥스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위로를 한다. 하지만 신경원은 맥스보다는 키이스가 그래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예쁜 얼굴만 봐도 축 처진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싫어 더욱더 기분만 나빠진다. 좋은데 동시에 나쁜 기분이라니, 진짜 환장하겠다.
“퍼스트, 본부 상황실에서 통신 들어온다.”
신경원은 에이미에게 집중하기 위해 잠시 빼놓았던 이어피스를 다시 귓바퀴에 쑤셔 넣었다. 곧장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웨스트 81번가에서 라헬 윈스터로 추정되는 여자가 목격되었다. 현재 로컬 경찰이 거리를 두고 추격 중이다.』
신경원은 눈을 크게 뜨고 맥스 쪽을 보았다. 맥스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신경원과 시선을 마주쳤다. 눈에 핏줄이 서도록 CCTV를 모니터링 할 땐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제 발로 굴러 나왔다. 추정이라고는 하나 직감은 그녀가 맞을 거라고 속삭인다.
『라헬 윈스터 건의 현장 지휘는 신에게 맡기겠다. 즉시 현장으로 이동하도록. 백업팀은 이미 그쪽으로 급파했다.』
『Roger.』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신경원은 즉시 글록에 안전장치를 채우고 품 안에 쑤셔 넣었다. 밀려오던 우울함 따위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머리는 이미 81번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먼저 가. 난 처리팀 기다렸다 저 여자 넘기고 따라갈게.”
뱀파이어에 대한 집착, 그중에서도 두 번이나 발견하고도 잡지 못한 라헬 윈스터에 대한 신경원의 집착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잘 알고 있는 맥스가 양보를 했다. 확인 사살까지 마치긴 했지만 사체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일반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기에 처리팀이 올 때까지 이곳에 한 사람은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가서 바로 택시를 타는 게 더 빠를 거야. 백업팀하고 조우해서 준비부터 해. 나는 다른 녀석들 불러서 같이 갈 테니까. 현금 가지고 있어?”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호텔 방을 뛰쳐나갔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필요 없었다. 낡은 엘리베이터가 기어오를 시간도 아깝다는 듯, 그는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택시―!”
거리로 나서자마자 목청 높여 택시를 부르는 신경원의 머릿속에는 라헬 윈스터의 이름만 가득 차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키이스의 환한 미소가 만든 흔적이 남아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