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4만 불이면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뭐 문제라도 있나요?”
서늘한 목소리에 신경원의 집주인은 저들보다 훨씬 나이 어린 키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키이스의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키이스는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성가시게 하기는.”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 손을 넣었다. 순간 신경원이 번개같이 팔을 올려 키이스의 가슴을 팔꿈치로 쳐버렸다. 기습 공격을 받은 키이스는 쿨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인정사정없이 명치에 제대로 먹힌 탓인지 숨까지 다 막혀왔다. 신경원은 그의 손에서 벌금 고지서를 빼앗았다.
“미쳤냐?”
“쿨럭―.”
“내가 전에 말했지.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라고.”
“하, 하지만― 쿨럭― 신….”
“그렇게 돈지랄을 하고 싶으면 톰슨 씨인지 하는 사람에게 전화 걸어서 변호사나 알아봐줘.”
“변호사 수임료보다는 그냥 주는 편이 더 싸게 먹힐 수도 있―,”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며 대답하는데 신경원이 눈알을 부라렸다. 키이스는 아차 싶었다. 쓸데없는의 기준이 뭔지 감히 잡힌다. 금액과는 상관없이 사유가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인 것 같다.
“알겠습니다, 전화할게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인 부부는 눈앞에서 4만 불이 바로 들어오려다가 나가고 ‘변호사’라는 말까지 나오자 안색을 싹 바꾸었다.
“아니 이 사람이, 변호사라니. 변호사 불러서 복잡하고 시끄러워지면 어쩌려고. 게다가 비용은 또 어쩌려고! 돈 아깝게 왜 이러나. 그냥 저 친구 말대로….”
“이게 제 앞으로 나온 벌금이라면 4만 불이든 10만 불이든 냈을 겁니다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부당한 일을 해결하는 데 얼마가 들든 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죠. 방금 전에 저한테 하신 말씀 모두 녹음해놨습니다.”
신경원은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고지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봐요 Mr. 신!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야!”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키이스, 뭐해.”
신경원에 말에 키이스는 방긋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신호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톰슨은 금방 전화를 받아주었다.“
“안녕하세요. 톰슨 씨. 네. 또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키이스는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곧 전화를 끊고 턱을 치켜 올리며 주인 부부를 향해 말했다.
“생각해보니 변호사에게 맡기면 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깔끔하게 법대로 하지요. 입주 시에 작성한 계약서나 준비해두시길 바랍니다.”
“그런 거 없어.”
“네?”
키이스는 신경원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거 없다고. 급하게 구한데다 현금박치기 하기로 하고 들어온 거니까. 송금 내역은 더더욱 없어.”
“흐음.”
그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명치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리를 돌렸다. 별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괜찮을 겁니다. 검찰 측에서 은행 계좌 압수 수색을 하면 되고 그걸로 집세 받은 게 추적이 안 되면 신용카드 내역부터 영수증까지 전부, 체크할 테니까요. 계약서 없이 입주를 받은 것부터가 문제가 되기도 할 거고요.”
키이스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시선은 신경원이 아닌 집주인 부부에게 가 있었다. 집주인 부부의 얼굴이 점점 더 흐려지는 게 보였다.
“뭐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다만, 법대로 가게 되면 신의 앞으로도 벌금이 나올지 모르는데… 뭐, 그건 걱정 마세요.”
“걱정 안 해. 하지만 신세지는 거니까 달아둬.”
“네네.”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괜한 말다툼도 하기 싫고 밉보이기도 싫은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야 강구해보면 되는 거고 소송을 해서 승소만 하면 변호사 비용은 어차피 상대방이 문다. 신경원 앞으로 나오게 될지도 모르는 벌금 정도만 어떻게 처리하면 ‘금전적인’ 신세는 단 한 푼도 안 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집주인 부부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인가. 자기들 앞으로 나온 벌금을, 그것도 4만 불이나 되는 돈을 세입자인 신에게 내라고 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
솔직히 신경원에게 4만 불이나 되는 돈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자체가 좀 이상했다. 도심에 위치하고 있긴 하나 신경원이 사는 아파트는 오래되고 허름했다. 사는 사람들의 수준도 거기서 거길 거라고 본다.
게다가 신경원은 분명 창고라고 했다. 불법 거주 운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신경원의 집세는 보통의 아파트 집세보다는 적을 터였다. 평소 옷차림만 봐도 어지간한 사람은 신경원에게 큰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할 것이다. 같은 디자인의 무지 티셔츠와 체크 남방 두어 개를 돌려 입고 바지도 정확하진 않지만 다 해봤자 3―4벌을 가지고 한 계절을 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지켜봐온 바로는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옷을 차려입는다는 개념이 아예 없어서 그런 것 같지만 어쨌든 남들이 보면 남루하다고 해도 좋을 옷차림이다. 어디를 봐도 4만 불쯤 되는 빚이 있으면 모를까 한 번에 4만 불을 낼 수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저 집주인들은 무슨 생각으로 신경원에게 돈이 있다고 판단한 걸까.
“이봐, Mr. 신.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생각이 있네.”
“무슨 생각이요.”
“우린 자네가 불법 체류자인 거 다 아네.”
순간 키이스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신경원도 기가 막히는 지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세상에 그냥 FBI도 아니고 기관의 에이전트가 불법 체류자라니, 저건 해도 해도 너무하… 진 않은 건가? 하고 다니는 폼이나 얼굴만 봐서는 학생처럼 보일 정도니 뭐….
이럴 때 FBI 신분증을 척 내밀면 한 방에 끝날 것 같은데 규정상 수사 대상이 아닌 사람에게 신분을 밝히는 건 금지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계약서 안 쓰고 현금으로 집세 내는 동양인은 다 불법 체류자로 보이십니까? 그거 인종차별적 발언인 건 아세요?”
암암. 그렇고말고. 세상에 왜 이렇게 인종차별 주의자가 많은 건지. 키이스는 신경원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키이스는 변호사를 고용하면 저 문제도 살짝 끼워 넣어서 아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벗겨 탈탈 털어버리라고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회사에서 가깝고 집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타입도 아니라서 그냥 있었던 거지, 단순히 집세가 싸서 있었던 게 아닙니다.”
어쩌면 저리 말도 잘할까. 키이스는 속으로 히죽거리며 붉으락푸르락하는 주인 부부의 안색을 살폈다. 하는 폼이 4만 불을 정말로 내게 하려 한 건 아니지 않을까 싶다. 고지서를 들고 흔들어서 얼른 내보내고 입을 닫게 만들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신경원이 현금으로 집세를 내며 불법 개조된 창고에서 살았던 것은 사실이니 집세로 얻는 소득에 대한 세금 조사를 받을까 봐 선수를 치려했던 것일 수도 있다. 더불어 3개월치 집세에 해당하는 보증금도 날로 먹고 말이다.
음.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조금이나마 설득력이 있어. 그래도 역시 뭔가 좀… 이상한데.
키이스는 당황함을 숨기려 애를 쓰는 주인 부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생각해보니 신경원이 고지서를 들고 화를 낼 때 자신이 등장하자 잠깐이긴 해도 주인 부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던 게 기억났다.
어라? 설마 타깃이 퍼스트가 아니라 나였나?
키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인 부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이 아파트나 근처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자신이 시도 때도 없이 신경원을 데리러 출몰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폰티악도 일주일 정도 몰고 다녔고, 엔진소리가 골목을 좀 많이 울리긴 했었다.
불법 체류자로 보이는 동양인에게 돈 많은 친구가 생겼으니 저런 걸 눈앞에 들이밀면 내가 도와줄 거라 생각했을지도….
좀 비약한 걸지도 모르지만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주인 부부가 지금도 계속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더.
“무슨 생각을 하시고 저한테 벌금을 내라고 하신지는 모르겠지만, 헛물켜지 마세요.”
신경원은 그 말을 마치고 열쇠를 꺼냈다. 과연 신경원이 사는 창고집은 어디일까 궁금해하며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던 그는 신경원이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물론 따라가기 전에 집주인 부부에게 예의 바르게, 하지만 약간 거만한 투로 한마디 던지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자세히 알아보고 저분께 부당하게 금전을 취한 사실이 있으면 고소를 할 생각도 있으니 집에서 편히 기다려주시면 좋겠군요.”
“사정도 자세히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모르니까 자세히 알아보겠다고 한 겁니다. 아, 맞다. 공갈협박은 1차로 생각해주세요. 신은 불법 체류자가 아닌 ‘미국 시민’입니다만, 설사 불법 체류자라고 하더라도 그걸 이유로 신고하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건 분명 공갈협박이니까요. 제가 할 말은 이게 끝입니다. 더 할 말이 있으시면 변호사가 동석한 자리에서 듣지요.”
집주인 부부는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키이스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거리를 해봐야 하등의 이익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퍼스트는 어디….
집주인들에게 한마디 하느라 신경원의 움직임을 놓친 키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갈 곳이 없다. 5미터 전방에 있는 작은 창고뿐….
…으응? 창고?
키이스는 설마설마하며 조막만 한 주차장 창고로 걸어갔다. 문이 어설프게 닫혀 있어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신경원은 좁은 창고 한가운데 서서 허리에 손을 짚은 채 가만히 침대며 책이 잔뜩 쌓여 있는 테이블 등을 살피고 있었다. 불을 켜놓긴 했지만 어두운데다 천장이 낮아 답답해 보였다. 공기에는 습기가 가득했고 미약하지만 곰팡이 냄새도 났다.
키이스는 침을 삼켰다. 꿀꺽 하고 목울대가 울렸다. 기가 막힌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황당하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올라오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작은 창고 안은 마치 토굴처럼 보였다. 흰 칠이 되어 있긴 하나 녹이 스며 나오고 있는 낡은 금속제 침대와 그 위에 사람 얼굴만 한 크기의 창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 옆에 문이 열려 있는 캐비닛에는 점퍼와 자주 보던 체크무늬 남방이 두 장 걸려 있었는데 옷장 같았다. 그 외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박스 몇 개, 티셔츠가 얹혀 있는 행거 하나, 책이 잔뜩 놓여 있는 테이블, 그리고 낡아서 우우웅 소리를 내고 있는 냉장고가 살림의 전부였다.
그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사촌 동생들을 위해 꽤 큰돈을 쓰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흐음. 냉장고는 그냥 버리면 되고….”
가만히 좁아터진 창고 방 안을 돌아보고 있던 신경원은 두 팔을 위로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다 이제야 눈치 챘다는 듯 문가에 서 있는 키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하냐?”
“…….”
“너무 좁고 구질구질해서 놀랐어?”
“…아니. 그게….”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돈이 없어서 이런 데서 살고 있던 건 아니야.”
“그럼 왜….”
“음. 아, 이 집을 구할 때만 해도 돈이 없긴 없었다. 전에 말했었지?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정리를 하고 보니 남는 유산이 없더라고.”
“네….”
“내 앞으로 되어 있는 신탁 자금이 조금 있긴 했는데 이것저것 처리하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더라고. 아카데미 수료하고 치프 추천으로 뉴욕에 와서 급히 살 집을 찾다 돈이 모자라서 대충 구한 거야. 아까 들었다시피 본부에서 가까운 곳인데다 집세가 진짜 싸서, 돈을 좀 벌 때까지만 있자고 생각했지. 그런데 매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집’이라는 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지 뭐야.”
신경원은 그렇게 말하며 구석에 있던 리빙 박스 하나를 가져다가 식탁으로 쓰는 듯한 작은 간이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책을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두꺼운 책들은 모두 의학 서적 같았다.
“처음 일 년은 기관에 적응하느라 어영부영 보내고 그다음 해부터는 적응하니 일이 많아져서 또 그냥 방치하고, 너도 알다시피 일주일에 반은 본부에서 자다 보니 이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안 나더라고. 집이라는 거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 꼴은 이래도 자는 데는 별 불편이 없거든. 어차피 어디서든 푹 자진 못하니 별 상관도 없고.”
구질구질하다 못해 암울해 보이는 집이지만 이런 집에서 5년째 살아왔던 것도, 그것을 키이스에게 보이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투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 없이 별 감정도 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정말로 집이라 불러주기도 민망한 곳에 사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 없는 거다. 하지만 듣고 있는 키이스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신경원이 말하는 ‘여유가 없다’라는 말이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는지 뒤늦게 이해가 간다. 어째서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고 했던 건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말은 어지럽게 머릿속을 메우던 생각들을 쑥 들어가게 만들어버렸다.
“뭐, 기본적으로 ‘집’이라는 거에 딱히 애착을 못 느끼는데다 여자가 생기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들어가서 살기도 해서 굳이 제대로 된 집을 구해 돈을 쓰는 것도 좀 아깝다 싶어서 그런 것도 있…, 아―. 지금 한 말은 그냥 대충 흘려들어라.”
키이스는 눈앞이 새카매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와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는 말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신경원이 말을 하다 말고 ‘대충 흘려들어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버럭 소리를 질러버릴 뻔했다.
신경원은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 키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 이야기를 하다 흘려들으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키이스는 소리 없이 신음을 흘리며 새카매졌던 시야가 다시 밝아지길 기다렸다. 신경원이 자신에게 신경을 쓴다. 저 무심한 사람이 과거의 일로 자신이 상처 입을까 봐 조심을 하고 있다. 대답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 했던 사람이 저만큼이나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가능성이 손톱만큼은 있다는 소리지 않을까? 없다 해도 있다고 믿고 싶은 심정이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네?”
“가려면 얼른 가고, 도와줄 거면 도와주고.”
“짐부터… 싸시는 겁니까?”
“오늘 나가나 내일 나가나 이번 주 내로 나가나 똑같잖아. 머무르며 새집 구한답시고 들락날락거려봐야 저 사람들에게 잡혀서 잔소리 들을 것 같으니 얼른 정리해서 나가려고.”
“아….”
“보다시피 짐도 얼마 없어. 한 시간도 안 걸릴걸?”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음.”
신경원은 허리에 손을 얹고 좁은 창고 안을 다시 돌아본다. 그러더니 커다란 종이 백 하나를 가져와 내밀었다.
“일단 저기 있는 찬장에 고양이 캔이 잔뜩 있어. 그걸 여기에 담아줘.”
“네.”
키이스는 입구에 놓여 있는 상자를 피해 안으로 들어갔다. 기껏해야 서너 걸음 걸었을 뿐인데 신경원이 가리킨 찬장 앞에 다다른다. 안으로 들어서니 곰팡이 냄새가 더욱더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찬장에 쌓여 있는 고양이 캔을 종이 백에 담았다. 찬장 안에는 고양이 캔 외에 시리얼 두 박스, 휴지와 일회용 식기, 그리고 열댓 개 정도의 인스턴트 누들과 단백질 파우더통이 전부다. 이 작은 창고에 오면 뭘 먹고 지내는지 한눈에 보였다.
“다 담았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여기 있는 비닐 백에 담고 책이랑 논문은 빈 박스에 대충 넣어주면 돼.”
“네.”
신경원은 키이스가 내민 무거운 종이 백을 가슴에 안고서 휭하니 사라졌다. 돌아왔을 때는 손에 조그마한 상자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뭡니까?”
“여왕님의 주인이… 그러니까 전에 말한 고양이 말야.”
“신이 키우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주인 따로 있어. 위층 사는 사람.”
“아….”
“아무튼 여왕님을 위해 산 거라며 줬더니 고맙다고 줬어.”
신경원은 월병이 든 작은 상자를 책을 가득 넣은 박스 위에 대충 던져놓고 캐비닛 위에 있던 슈트케이스를 꺼냈다. 위에 먼지가 조금 앉아 있었다. 키이스는 슈트케이스에 티셔츠를 던져 넣는 신경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어… 신.”
“응?”
“집…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함께 있자고 하고 싶다.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자신과 함께 살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호텔은 일단 그의 집이 아닌데다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신경원의 성질을 건드릴 것 같았다.
조금 전만 해도 신경원은 키이스가 4만 달러를 그냥 주려 하자 대뜸 폭력부터 휘둘렀다. 변호사를 구해달라는 것까지가 신경원이 자신에게 ‘신세’를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최대치 같았다. 호텔, 그것도 스위트룸에 데려갔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난리가 날 것 같았다. LA에 갔을 때처럼 잠시 묵는 것과는 다르니까.
“글쎄다. 하루 만에 방을 구하긴 힘들 테니 휴가를 받아서 구하러 다녀야겠지 싶은데, 지금은 귀찮으니 나중에 생각할래. 짐은 얼마 안 되니까 일단 차에 실어놓고 당분간은 본부 숙직실에서 잘 거야.”
신경원은 그러다가 본부에서 계속 숙식을 하며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킥킥거렸다. 솔직히 농담으로 안 들렸다. 집을 구할 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이런 집 같지도 않은 곳에서 4년 넘게 살아온 사람이다. 게다가 본부 숙직실은 이 집에 비하면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경원은 불편을 느끼기는커녕 출퇴근에 시간을 쓰지 않아서 좋다고 말할 것 같았다. 그리고 치프가 발견해 쫓아낼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지낼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집을 구해봐야 하나….
신경원도 그렇지만 ‘집’에 대한 애착이 없는 건 키이스도 마찬가지다. 10살 때까지 어머니와 살아온 집에는 그나마 좀 애착이 있었지만 회장님이 마련해준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런 부류의 감정은 전부 버렸다. 회장님의 저택에서는 2년을 조금 넘게 살았는데 거긴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웨스트포인트, 그리고 아카데미까지, 계속 기숙사에서만 지내왔다. 기숙사에서 지내지 않는 동안에는 주욱, 호텔만 이용했고 말이다.
집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말 한마디면 톰슨이 얼씨구나 좋다며 구해줄 거다. 레이첼에게 부탁하면 그야말로 손 하나 까닥이지 않고도 가능하다. 그녀는 열일 제쳐두고 뉴욕으로 날아와 괜찮은 저택이나 브라운 스톤, 혹은 본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를 찾아서 내부 인테리어까지 마친 상태로 열쇠만 달랑 손바닥에 올려줄 거다. 키이스가 할 일은 딱 하나, 전화 한 통뿐. 문제는 키이스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했을 때 신경원이 과연 그 집에 들어와 살 가능성이 얼마나 있느냐다.
지금 상태로는 가능성은커녕 그럴 가망 자체가 없지.
많이 양보해서 본부 근처에 그럭저럭 평범한 아파트 한 채를 구해 같이 살아보자고 해도 신경원은 거절할 것이 틀림없다. 시도도 안 한 상태지만 뭐라고 하며 거절할지 빤히 보였다.
‘그렇게까지 신세 질 생각은 없어.’
환청까지 들리는 걸 보니 집을 구하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침구는 그냥 버려야겠다. 어차피 새로 살 생각이었으니까.”
신경원은 이불이며 베개, 매트리스 커버까지 훌러덩 벗겨 밖으로 들고 나갔다. 앙상한 프레임의 침대에 매트리스만 남으니 그야말로 을씨년스럽다.
그 뒤로도 신경원은 들락날락하며 미처 버리지 못한 쓰레기며 목이 늘어난 티셔츠들을 처리했다. 남은 것은 슈트케이스 하나, 책이 든 박스 두 개. 옷 박스 두 개, 비닐 백 하나, 그 외 자잘한 것들이 든 박스 하나뿐이었다. 자잘하다고 해봐야 냉장고에 있던 생수병과 맥주가 반, 나머지는 필기도구가 전부였다. 4년 넘게 살아온 살림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받아.”
휘익―하고 눈앞으로 뭔가 날아들었다. 받아들고 보니 차 키였다.
“바로 앞에 있는 청회색 시트로엥이 내 차야. 트렁크에 적당히 실어줄래?”
키이스는 묵묵히 책 박스를 들고 나와 시트로엥의 뒤 트렁크를 열었다. 그곳에 박스 세 개를 넣는 사이 신경원이 나와 옷 박스며 슈트케이스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그것으로 신경원의 이사 준비는 끝이 나버렸다.
“운전해야 하니 맥주는 그렇고, 물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물이면 충분합니다.”
신경원은 키이스에게 생수병을 하나 건네주고 자신도 뚜껑을 따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빈병은 곧장 밖의 쓰레기통행이 되었다. 그는 맨 마지막에 작은 기계 하나를 들고 나와버리는 것으로 정말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다.
“아, 진짜― 오늘은 옷 사러 갔어야 했는데. 이게 뭐람. 스케줄 꼬이게.”
키이스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구시렁거리는 신경원에게 물었다.
“옷이라뇨?”
“나 원래 단벌 신사였잖아. 네가 사준 이 슈트랑 해서 번갈아 입고 다녔는데, 이걸 입고 가니 사람들 태도가 확 바뀌더라고.”
신경원은 벗어두었던 비싼 슈트 재킷을 다시 꿰입으며 기가 막힌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키이스는 당연하지만 미간에 주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틀은 내 슈트를 입고 갔는데, 완전 벌레, 성가신 파리 취급하더라니까? 그런데 이걸 입고 가니 아래위로 쫙~ 스캔을 하고서는 웃더라?”
“…….”
“그다음부터는 질문에도 답도 잘해주고 이전 데이터도 찾아주…. 뭐야 너, 왜 그런 표정이야.”
키이스는 팔짱을 끼고는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는 잘도 신경 써서 말을 하다 말더니만, 이번에는 깜빡 잊은 모양이다. 그는 지금 댁 앞에 있는 사람은 댁에게 사랑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로 신경원을 계속 쳐다봤다. 그러자 신경원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여자 꼬시려는 게 아니거든? 그냥 일에 도움이 되니까….”
“…….”
“씨발! 내가 무슨 바람이라도 폈냐? 왜 이런 설명을 해야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젠장, 이게 다 네놈 때문이야!”
신경원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이며 버럭 소리를 쳤다. 그러곤 키이스에게서 차 키를 빼앗아 제 차에 탔다.
“나 간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어. 잘 가라.”
“네…. ―가 아니라, 퍼스트.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내 차거든?”
“저 퍼스트 운전사잖아요.”
“됐거든? 그리고 너, 차 어따 주차시켜두고 왔어. 여기 아무 데나 맘대로 주차하면 견인 당한다. 어서 가봐.”
“제대로 된 데다 주차하고 왔어요. 회사에 갔다가 돌아와도 문제없습니다.”
키이스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대로 차를 몰고 나가면 골목 초입에 세워둔 차를 발견할 터다. 하지만 그건 그때 일이다.
“됐다니까. 이거 낡아서 내가 운전 안 하면 가다 퍼져. 변호사 쪽만 잘 부탁해. 수임료는 나한테 청구하고.”
“괜찮습니다.”
“…따라해봐.”
“네?”
“따라해보라고. 꼭.”
“꼭.”
“청구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잘도 멋대로 단어 씹어 먹는다, 너?”
“…….”
“하아. 꼭 청구해. 다시 말하지만 돈이 없어서 저런 데서 산 거 아니야.”
신경원은 입술을 우그러뜨리곤 ‘나도 벌 만큼 벌어’라며 시동을 걸었다. 차는 그가 말한 대로 겉모습은 비교적 멀쩡하나 낡은 차답게 두 번이나 푸덕거리다 시동이 걸렸다.
“잘 가라. 내일 보자.”
신경원은 팔을 차창 밖으로 빼 두어 번 휘두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했다. 키이스는 멀어지는 시트로엥을 바라보며 부디 차도 한복판에서 차가 퍼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후.”
키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째 잘 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사소한 데서 삐끗하는 기분이다. 어떤 면에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그런 일만 없었으면 좀 더 자연스럽게 고백을 할 수 있….”
신경원이 그랬던 것처럼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리던 키이스는 무언가 발치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느끼곤 시선을 내렸다. 놀랄 만큼 커다란 고양이가 슥슥,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처음 보는 고양이지만 낯이 익었다.
“…네가 여왕님이구나.”
키이스는 오른발을 슬쩍 내밀어봤다. 퀸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게 골골이 아니라 구르륵 소리를 내며 그의 다리에 머리를 비벼댔다. 무슨 고양이가 이렇게 낯을 안 가리고 덤벼드는지 모르겠다.
“개도 아니고….”
신경원이 이 고양이만큼만 붙임성이 있었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붙임성 있는 신경원이라니, 그건 신경원이 아니다. 신경원은 까칠해야 한다. 성질이 나거나 졸리거나 배가 소파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대뜸 ‘씨발’ 하고 욕부터 내뱉어야 신경원이다. 허튼짓을 하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어야 신경원이다. 그러다 아주 가끔, 가뭄에 내리는 비처럼 칭찬의 말 한 마디를 던져주는 게 그가 좋아하는 남자였다.
“…단점까지 다 좋다니. 진짜 중증이네.”
키이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작별인사를 했다.
* * *
신경원은 좁은 침대 위에서 계속 뒤척였다. 키이스가 예견했던 대로 그는 벌써 2주하고도 사흘째 본부의 숙직실을 제 집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집을 구하러 다니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젠장, 오늘은 좀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급작스럽게 길거리에 나앉게 된 신경원에게 있어 숙소만큼 좋은 임시 도피처는 없었다. 빨래야 그가 직접 밖으로 들고 나가 코인 세탁소를 찾아가거나 손빨래를 해야 했지만 그 이외에는 손이 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청소는 고용된 청소부들이 해줬고 식사는 시간 맞춰 식당에 가거나 키이스에게 질질 끌려 나가 고기를 먹으면 그만이었다. 딱 하나 빼고는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천혜의 장소였다.
“…맥주라도 마셔야 잠이 오는데.”
신경원은 이층 침대에서 가져온 베개를 끌어안고 구시렁거렸다.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아무리 도수가 낮은 것이라 해도 ‘술’을 사다놓을 수는 없었다. 사다놓는다고 벌점 같은 걸 먹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는 ‘신성한’ 직장인지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니, 처음이나 다름없다. 인턴 시절에는 아예 출퇴근 시간 자체가 없다시피 했고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나 출퇴근의 개념이 없었으니 해당사항이 안 된다. 기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규칙적인 생활’과는 아예 담을 쌓아버렸다. 결론만 말하자면 엄청, 굉장히 피곤하다는 소리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죽겠구먼….”
NYPD 경찰청 본부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는 것마냥 험난했다. 눈칫밥을 먹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하드하게 체험 중이다. 고급 슈트로 인해 호감 어린 태도를 보이던 사람들은 신경원이 같은 슈트만 줄창 입고 다니자 금세 태도를 달리했다. FBI에도 급수가 있다는 듯, 완전 떨거지 취급을 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나간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곤을 감수할 만큼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 일주일간 찾아낸 뱀파이어가 하나, 숙직실로 이사 아닌 이사를 하고 난 뒤 둘을 더 찾아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오늘 새벽, 맥스와 짝을 이룬 키이스가 해치웠다. 제일 하위급인 B3이긴 했으나 아주 깔끔하게 처리했고 확인 사살도 정확하게 해냈다며 맥스가 텍스트 메시지로 알려줬다.
신경원은 건너편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키이스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이 본부 숙직실로 옮겨온 다음 날부터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계속 저렇게 바로 옆 침대에서 잤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에는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참으로 막강한 놈이다.
너도 고생이 참 많다. 왜 하필이면 나 같은 걸 좋아해서 보답 한번 제대로 못 받고 그 모양이냐.
고백을 못 들었다면 그냥 마음 편히 귀여워라도 해줬을 텐데, 저놈의 머리와 가슴에 자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로는 모든 게 다 조심스러웠다. 물론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적당히 거리를 두어가며 대해주는 것 따위는 신경원의 사전에는 없다. 그래도 신경은 계속 쓰였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미안함이 가슴속에 싹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 꼬실 사람이 없을 잘난 놈인데 어쩌다 나 같은 걸….
쯧쯧―하고 혀를 차던 신경원은 자괴감에 빠져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나 같은 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스스로에게 꽤 자신감이 있는 신경원이다. 헌팅 성공률은 100%에 가까웠고 길어봤자 3개월 짧으면 한 달도 못 가서 그렇지 여자가 끊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는 올 초여름부터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도 제대로 구경을 못하고 있다. 어쩌면 저놈, 키이스가 나타난 이후로 자신의 여자 운이 소멸해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자를 만나지 못한 건 키이스가 자신의 파트너가 되기 훨씬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내 운이 나쁜 거지 키이스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니잖아. 그치?
“하아―.”
신경원은 한숨을 쉬곤 몇 번 더 뒤척거리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된 ‘잠’을 못 잔 지 벌써 2주가 넘는다. 이전에 살던 집에 있을 땐 퀸이 종종 와줘서 짧더라도 그럭저럭 숙면을 취했는데 숙소로 온 후로는 선잠을 자는 게 고작이다. 완전 한계다.
그는 슬리퍼를 끌고 샤워실에 갔다가 돌아와 옷을 골랐다. 키이스가 사준 옷은 세탁을 보냈고 다른 하나는 내일 입고 나가야 하니 곤란하다. 봄에 입던 옷이며 작년에 입던 옷의 반은 버려버렸고 남은 옷은 죄다 출근용 옷, 그러니까 무지 셔츠와 체크 남방, 그리고 진과 면바지뿐이다.
“…쇼핑부터 해야겠군.”
신경원은 중얼거리며 면 티 하나를 꺼냈다.
“퍼스트…?”
“신경 쓰지 말고 피곤할 텐데 더 자. 잠깐 나갔다 올게.”
옷을 찾느라 부스럭거렸더니 그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다.
“어딜 가시는데요?”
“더 자라니까. 아, 새벽에 수고했다.”
선잠을 자고 있던 탓에 키이스가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숙직실로 들어올 때 한 번 깼었지만 자는 척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잘했다고 맥스가 메시지를 보내줬어. 일어나지 말고 더 자라니까. 아직 2시밖에 안 됐다.”
“아직이라니요. 너무 많이 잤는데요. 보통은 4―5시간 자면 깨는데.”
키이스는 하품을 하고는 두 팔을 위로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는 작전을 마치고 와서 피곤했는지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그대로 잠든 탓에 반라의 상태였다.
기관에 들어왔을 무렵만 해도 키이스의 몸은 근육이 잘 잡혀 있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선이 부드러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에이전트들마냥 뼈와 근육과 피부 한 겹만 남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덕택에 상체 근육이 더 선명해지고 적나라해졌다. 샤워장에서 종종 보긴 했으나 이렇게 가까이서 의식을 하며 살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키이스의 배에는 올록볼록 네모난 화이트 초콜릿 판이 있었다. 등 한가운데에는 뚜렷한 선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어깨 깡패답게 삼각근도 딱 필요한 만큼만 잘 형성되어 있었으며 등의 잔 근육들도 아주 훌륭했다. 벗긴 채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켜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턱걸이를 시키면 선천적으로 모양 좋은 근육을 타고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악마의 얼굴이 등에 떠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한 번 벗겨놓고 트레이닝을 시켜볼까. 완전 멋질 것 같은…, 씨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데 어디 가세요?”
“딱히 어디랄 건 없고, 그냥 쇼핑. 오늘 쉬거든.”
“그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 얼른 샤워하고 오겠습니다. 먼저 가시면 안 돼요.”
키이스는 신신당부를 하고는 잽싸게 뛰어나갔다. 신경원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이스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이렇게 되겠구나 하며 포기한 탓이다. 이대로 나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귀찮다. 눈에 띄지 않게 나가는 것보다 나중에 돌아와 자길 두고 갔다고 끙끙거릴 강아지를 상대해주는 게.
신경원은 이미 키이스에게 적응… 혹은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 * *
키이스는 여러모로 귀찮은 놈이지만 나름대로 쓸모도 많은 놈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엄청나게 쓸모가 있다.
“음. 그것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색으로 가보죠.”
일전에도 한 번 경험한 일이다. 가만히 서 있으면 어울리는 것들을 알아서 골라준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은 키이스의 눈과 입, 그리고 손가락. 마지막으로 그의 지시에 따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매장의 스태프들뿐이다.
신경원은 3년을 입은 슈트는 이제 버려야겠다며 ‘기성복’을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키이스는 대뜸 지난번에 사준 명품 매장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그 옷은 다 좋은데 조금 지나칠 정도로 몸에 달라붙어서 활동성에 조금 제약이 느껴진다고 말했더니 고민을 하다 현재의 매장으로 끌고 왔다. 중저가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초고가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는 고급 기성복 매장이었다.
신경원이 멀뚱히 서 있는 동안에도 매장의 스태프는 바지런히 움직이며 계속 슈트를 가져왔다. 비싼 명품 슈트를 입은 키이스가 그들에겐 왕이었다. 그들은 신경원의 가슴에 상의를 대보고 키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면 행거에 걸고, 아니면 도로 가져가길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게 벌써 5벌이었다.
“키이스.”
“네.”
“두 벌만 골라.”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한 벌로도 3년을 넘게 버텼으니 키이스가 사준 것 까지 포함해 슈트 세 벌이면 앞으로 5년이 뭔가, 10년은 입을 거다.
“두 벌은 신이 사고 세… 두 벌은 제가 선물하면 안 됩니까?”
키이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신경원은 턱을 들고 한쪽 눈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이러저러하니까 싫어. 또는 안 돼. 라고 말하겠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신경원은 쓰읍―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키이스는 얌전히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결국 옷을 사서 신경원에게 안겨줬다. 슈트를 사고 나와 중저가 의류매장에서 신경원이 ‘평상복’에 해당하는 무지 티셔츠와 바지를 고를 때 제멋대로 점퍼 하나와 바람막이를 사버린 것이다. 실랑이하는 것도 귀찮은 신경원은 그냥 받아들였다. 그의 기준에 선물로 받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가격의 옷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은 내가 산다.”
“네, 잘 먹겠습니다.”
키이스는 생글생글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광대가 하늘로 승천할 기세였다. 당연하게도 곁을 스쳐지나가던 여자란 여자는 죄다 키이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맛에 선물을 하는 건가 봅니다.”
“……?”
“레이첼이 항상 그랬거든요. 제게 뭔가를 선물할 때마다 굉장히 기뻐했어요. 저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에 안 했고, 때로는 그 말도 제대로 못한 적도 많은데 선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었거든요. 그땐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했는데, 이제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알겠어요.”
설명을 들었지만 주는 것만으로도 좋다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give & take. 받았으면 줘야 하고 주면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거 저 주세요. 무겁죠?”
키이스는 신경원이 들고 있는 쇼핑백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도 손 있거든?”
“하지만 제가 더 길고 크고 힘도 세거든요?”
“내가 너보다 작다고 까는 거냐?”
“설마요.”
키이스는 그냥 들어주고 싶다면서 결국 우격다짐으로 쇼핑백의 반을 가져가버렸다. 그러곤 조심스레 신경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앞 보고 걸어.”
“괜찮으세요?”
“뭐가.”
“눈 밑이 좀 거뭇해서요. 그렇잖아도 요즘 계속 제대로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
“괜찮진 않아. 뭐, 어떻게 되겠지.”
신경원은 제가 입은 슈트를 내려다보았다. 새 슈트는 버튼을 채우면 허리선이 조금 강조되는 디자인이었다. 사실 디자인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여자를 꼬시는 데는 꽤 좋은 효과를 발휘해줄 것 같았다. 문제는….
이걸 입고 여자를 꼬시러 가기에는… 좀… 많이 아니, 굉장히 꺼림칙하단 말이야.
결제야 자신의 카드로 했지만 자신을 좋아해서 뭐든 사주고 싶어 안달을 하는 놈이 골라준 옷이다. 이걸 입고 잠자리 상대를 구하러 간다고 하면 보나마나 엄청난 난리가 날 것 같았다. 모르게 하고 튀는 방법도 있지만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신경원은 지금 정말로, 잠자리 상대가 필요했다. 섹스가 아니라 그냥 같이 자줄 사람이.
신경원은 저보다 14cm 큰,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 키이스를 올려다봤다. 키이스는 말만 하면 기꺼이 함께 자주고도 남을 거다. 하지만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하면 상처만 주게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 얼결에 같이 잔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키이스가 고백을 해오기 전의 일이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말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응. 참 많이 피곤하지. 진짜 한계야. 그런데 말이지….
“식사 얼른 하고 돌아가서 쉬죠. 조용한 데로 갈게요.”
키이스는 쇼핑백을 한 손에 몰아들고 신경원의 뒤로 자유로운 손을 뻗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한층 늘어난 인파에서 그를 보호하겠다는 느낌이 강했다. 신경원은 미소 어린 키이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본 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여자는 포기하는 게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키이스가 골라준 옷을 입고 여자를 꼬시러 가는 건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키이스에게 같이 자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안면과 숙면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싶다. 머릿속에 들어앉은 키이스의 존재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크다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숙면을 포기할 수 있을까.
망할 강아지 새끼.
신경원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고개를 숙여 바닥을 봤다. 그의 발과 키이스의 발은 딱 한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지금뿐 아니라 두 사람의 거리는 언제나 딱 한 걸음 거리였다. 신경원은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을 피해 아주 자연스럽게 키이스 옆으로 반보 다가갔다. 그러자 어깨가 키이스의 팔에 살짝 닿았다.
“가자. 배고프다.”
“네!”
신경원은 앞을 바라보고 있기에 키이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만 돌리면 되지만 돌리지 않았다. 그저 조금 가까이 간 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쁘면서도 억지로 참고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을 키이스의 얼굴 따위, 너무너무 졸린 지금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키이스가 고른 식당이 으레 그렇듯, 음식은 굉장히 맛있었다. 특히 고기 요리가 좋았다. 고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괜찮았다.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인데다 식당 자체가 조용한 분위기여서 신경원은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잠을 포기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뒤 괜히 심술이 나서 식사를 하는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 음식이 맛이 없어 그런가 싶어 키이스가 전전긍긍해하는 걸 보니 좀 웃겨서 꽁했던 게 금방 풀려버렸다.
조용한 식당에서 정말 조용하게 식사를 마친 후 신경원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가격은 예상한 그대로 상당히 높았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고 대형 강아지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귀여웠기에 기분 좋게 지불할 수 있었다.
“주차장 입구가 좀 혼잡해서 시간이 약간 지체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밖으로 나왔더니 식당 직원이 쩔쩔매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신경원은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고 말한 후 식당 입구를 서성댔다. 키이스는 아직 신경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맛없었다고 말하면 콰광―! 명화 스크림의 절망 포즈를 하고 무너질 기세다.
한입도 안 남기고 소스까지 박박 긁어 먹었는데,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신경원은 키이스의 머리에 강아지 귀 머리띠를 씌워보면 어떨까 생각하다 히죽 웃으며 차도로 시선을 옮겼다. 과연 주말 저녁이라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차라리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직접 차를 몰고 나오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데 검은색 캐딜락 리무진 하나가 식당 앞에 멈추어 섰다. 도어맨이 차로 다가가 뒷문을 열었다.
반짝이는 하이힐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의 미추는 구분하지 못하는 신경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얼굴에 해당하는 것이지 몸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멋진 다리와 끝내주는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이런 고급 식당 앞이 아니었다면 휘익~하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등학생마냥 휘파람을 불고도 남을 정도로 아주 끝내줬다.
그렇게 아주 잠깐 여자의 다리에 한눈을 파는데 옆에 서 있던 키이스가 스윽―하고 나와 시야를 가렸다. 설마 보는 것도 안 된다고 하는 건가 싶어 눈을 치켜뜨는 순간이었다.
“병환 중이신 아버님도 찾아뵙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면서 식도락을 즐길 시간은 있는 모양이구나.”
굵직한 목소리에 슈트에 감싸인 키이스의 어깨가 굳는 것이 보였다. 신경원은 얼굴만 살짝 빼 앞을 봤다. 키이스와 얼굴의 굴곡이 비슷한, 그러니까 참 많이 닮은 중년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점잖아 보이는 얼굴이나 눈빛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신경원은 품 안으로 손을 넣으며 좀 더 남자를 살폈다.
그는 지난번에 키이스를 찾아왔던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때의 남자와 같이 키이스와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형제인 듯 했다. 키이스는 어지간히도 늦게 태어난 늦둥이인 모양이다. 혹은….
“이런. 네이선에게 듣고도 설마했는데, 정말로 노란 수컷 원숭이를 키우고 있던 거냐?”
하―. 형제 맞구나. 어쩌면 저렇게 제 동생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냐.
신경원은 키이스가 나이차 많은 제 형들과는 달리 예의 바르고 착하게…는 유보, 그냥 예의 바른 놈으로 자라줘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이선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해드리죠. 말조심하시고 사과하십시오. 이분은―,”
“네 직속 상사니까? 그렇다고 해도 네 뒤에 숨어 있는 게 노란 수컷 원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보는데?”
“그만하시고 사과하십시오.”
“그러고 보니 아무데도 쓸모없는 반편이 자식에게는 꽤 어울리는구나. 반편이와 노란 원숭이 커플.”
키이스가 주먹을 불끈 쥐는 게 보였다. 꼭 쥔 주먹을 파르르 떠는 걸 보니 얼굴까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필사적으로 화를 참고 있는 게 뻔했다. 키이스가 참으니 자신도 참아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소리를 두 번이나 듣고, 아니 지난번까지 포함하면 세 번인가? 어쨌든 참고 넘어가주기는 좀 곤란하다.
탁탁―. 신경원은 키이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이럴 때 감탄하는 건 좀 그렇지만 반탄력이 느껴지는 것이 근육 하나는 정말 잘 만들어놨다.
“비켜.”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신이 상대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이니 제게 맡겨주세요.”
“닥치고 비켜.”
“신―.”
“내가 너나 저 사람보다 피부가 노란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원숭이는 아니거든?”
신경원은 옆으로 돌아나가도 되지만 힘을 주어 버티고 서 있는 키이스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서서 제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내가 예전에는 손보다는 말로 해결하는 타입이었는데, 4년 넘게 험하게 구르다 보니까 성격이 좀 바뀌더라고. 그거 잘 들고 있어.”
“신, 뭘 어쩌시려고….”
신경원은 목을 한 바퀴 돌리며 히죽 웃었다. 끙끙거리며 눈치 보는 키이스 덕에 기분이 꽤 좋아진 상태지만 근 2주를 제대로 못 잔지라 짜증 게이지가 풀로 차 있다. 그런 와중에 신경을 긁는 놈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강아지였다. 목줄을 달아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그의 강아지임에는 틀림없었다. 키우는 강아지가 남한테 수모를 당하면 당연히 주인이 나서야 하는 법이다.
“경찰도 부르고 변호사도 부르고 다 불러. 네 핸드폰으로.”
신경원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가 키이스의 형 앞에 섰다. 그는 키이스보다는 키가 좀 작아서 목을 꺾지 않아도 대충 시선이 마주쳤다. 신경원은 그를 향해 키이스처럼 방글 웃어 보였다.
“잠깐 실례 좀 합시다.”
“뭐지?”
“클리세딕 그룹은 직장 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기회를 드리죠. 키이스가 말한 대로 사과해주시겠습니까? 저한테도, 댁의 동생에게도 아주 정중하게.”
남자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전 분명 사과할 기회를 드렸습니다. 잊지 마세요. 아, 조금 전에 제게 하신 말씀은 전부~ 다 녹음해놨습니다. 그러니 정상참작은 될 거라 생각한다. 이 하얀 수컷 원숭이 자식아!”
신경원은 준비 동작도 없이 주먹을 날렸다. 금발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올린 중년 신사의 얼굴이 퍼억 소리와 함께 왼쪽으로 돌아갔다. 신경원은 그걸로 끝낼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짙은 네이비 컬러의 슈트 자락이 펄럭였다. 여자가 꺄아악―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반 바퀴를 회전한 신경원의 다리가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남자는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넘어갔다.
“에이씨. 손맛만 버렸네. 연약해 빠져서 때릴 맛도 안 나.”
신경원은 손바닥을 부딪쳐 탁탁 소리를 내면서 손을 털었다. 마음 같아서는 구둣발로 정강이를 몇 번 더 차고 발로 지르밟고 싶었지만 구두가 더러워질까 봐 그만두었다.
여자가 반쯤 기절한 것 같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도어맨과 남자의 운전사가 나와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애를 쓰고 있었다. 키이스는 어떤가 하면 황당해했다가 곧장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고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나만 모욕당했어? 너도 당했거든?”
“저는 괜찮습니다. 일상다반사나 마찬가지여서….”
“일상다반사라고 당하기만 해? 화를 내야지. 왜 부들부들 떨면서 참고 있어!”
“저러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어서요. 화를 내봤자 해결도 안 나는 일이기도 해서 그냥 짖게 내버려두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꽤 점잖은 신사인데 저를 자극 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라서, 안쓰럽기까지 하거든요. 그보다는 신. 신의 온몸이 흉기라는 사실은 알고 계세요? 나이에 비해 관리를 잘하고 있긴 해도 조나단은 일반인이라고요.”
“그래서 왼손으로 안 치고 오른손으로 쳤는데? 발이 아니라 발목으로 살짝 쳤고 뼈 안 부러지게 살살 봐줬어. 너 팰 때처럼.”
마음만 먹으면 뼈도 부러뜨릴 수 있고 단번에 목이며 척추도 모조리 꺾어줄 수 있지만 뒷일을 생각해 참아줬다. 키이스는 큭큭거리며 웃다 오른팔의 상태를 물었다. 신경원은 괜찮다고 말하며 키이스 앞에서 팔을 빙빙 돌렸다. 그 사이 남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남자를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키이스도 웃음을 멈추고 서늘한 표정으로 제 형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붉어진 얼굴로 일어났다. 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무식한―,”
“네. 제가 좀 무식합니다. 무식한 놈한테 한 대 더 맞아보시겠습니까?”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신. 상대해주면 끝이 안 나요.”
“넌 좀 닥치고 있어, 노아!”
남자, 조나단은 소리를 쳤지만 키이스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흥분한 듯한 신경원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 사이에 누가 진짜로 경찰을 불렀는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조나단의 운전사가 아닐까 싶었다. 잠시 후 제복을 입은 경찰 둘이 달려왔다. 사이렌을 울려봐야 경찰차가 통과할 만한 틈을 내기 힘들 정도로 도로에 차가 꽉 들어차 있으니 내려서 뛰어온 모양이었다.
신경원은 목을 벅벅 긁으며 경찰들 앞으로 갔다. 불완전 연소긴 해도 스트레스 해소를 해서 제법 속이 시원했다. 경찰이 오자 바쁘게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남자는 경찰들에게 열변 아닌 열변을 토하고 키이스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 신경원은 버릇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라?
뭔가를 봤는데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신경원은 뒤로 몸을 젖히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
길 건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6번가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원피스가 아닌 청바지에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긴 했으나 분명 그녀가 맞았다.
씨발, 모니터를 그렇게 들여다봐도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하필이면 쉬는 날!
“키이스! 본부로 연락해! 라헬 윈스터다!”
신경원은 키이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막 녹음된 파일을 재생하려던 키이스가 얼른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고 바로 몸을 돌리려는데 경찰이 그를 제지했다. 신경원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경찰에게 던지고 빠르게 말했다.
“FBI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 크리스토퍼 신입니다. 1급 살인 용의자인 라헬 윈스터를 발견했습니다. 그쪽의 수배 리스트에도 있으니 확인해보십시오. 키이스, 연락했어?”
“네!”
“그럼 여기 일 대충 수습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지원병력 도착하면 바로 따라와.”
그 말을 마친 신경원은 경찰의 제지를 뿌리치고 바로 달려 나갔다. 뒤쪽에서 키이스가 신―하고 길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원의 모든 신경은 이미 길 건너편을 향해 있었다. 검은 재킷을 입은 여자를 재차 확인한 그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신경원은 까칠하기는 해도 험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제 할 일 이외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탓에 무심한 사람에 가까웠다. 그래도 동료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곧잘 웃는 모습도 보여줬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은 물론이요 몸 어디든 손끝만 대도 ‘험악함’ 그 자체가 묻어나올 것 같은 표정과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가 험악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흘 전부터다. 그날 신경원은 5번가 대로변에서 라헬 윈스터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추적했지만 이전과 같은 사유로―어느 작은 호텔로 들어간 후 종적이 묘연해졌다―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신경원은 이를 갈며 본부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작전 상황실로 가서 사람들을 닦달해 5번가부터 시작해 그녀를 놓친 호텔 주변의 CCTV 영상을 죄다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다음 날부터 그는 작전 상황실에 진을 쳤다.
예들린이 병가는 다 채우고 출근하라고 했지만 신경원은 고개를 저었다. 라헬 윈스터가 예상을 뒤엎고 아직도 B1급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해가 지고 난 후라 해도 대로변을, 사방에 먹이가 널려 있는 곳을 그렇게 유유히 거닐 수 없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똑같은 방식으로 거리를 지나다닐 수 있으니 사흘만이라도 그녀를 찾게 해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안 된다고 하면 남은 사흘간 경찰청 본부로 출근하든가 그게 안 된다면 밖으로 나가 직접 발로 뛰며 라헬 윈스터를 찾아보겠다고 하니 예들린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신경원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작전 상황실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스크린을 보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나자 신경원은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금세 눈치 챌 정도로 완전히 험악해져버렸다.
표정이나 분위기만 험악한 게 아니다. 옆에 가면 이를 뿌드득 가는 소리나 작게 욕설을 내뱉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 기간 함께해온 동료들조차 지금의 신경원에게는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말을 거는 사람은 전 지부에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식사를 마치고 약간의 여유시간이 생긴 Zero 유닛의 동료들은 작전 상황실을 찾아와 키이스가 신경원에게 애교가 철철 넘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먹을 것을 권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퍼스트. 좀 드시면서 하세요.”
키이스는 전면의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신경원에게 손을 뻗었다. 신경원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됐어.”
“먹기 쉬운 걸로 사 왔다니까요. 손만 주세요. 손만. 네?”
환청이겠으나 빠직―하는 소리가 동료들의 귀에 들려왔다. 신경원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 오르고 있었다.
“귀찮게 하지 마. 꺼져.”
“이거 하나만 드시면 더 귀찮게 안 할게요.”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신경원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의자에 앉아 있던 터라 피할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넘어간 건지 신경원은 순순히 손을 내줬다. 키이스는 그 손에 포장을 벗긴 샌드위치를 쥐어주었다.
신경원은 후우―하고 한숨을 쉬고는 조금 전보다 더 험악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그런 순간에도 그의 눈은 전면 스크린에 못 박혀 있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이 샌드위치를 다 먹길 기다렸다가 포장지를 치우고 비어버린 신경원의 손에 꿀과 각종 영양제를 탄 우유를 가득 담은 텀블러를 쥐어주고 나서야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존이 입을 열었다.
“너 재주 좋다?”
키이스는 그냥 어깨를 으쓱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캐리는 잘했다며 키이스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거 독이 올라도 아주 단단히 올랐어.”
“오를 만도 하지. 두 번이나 놓쳤잖아.”
신경원의 뱀파이어에 대한 집착, 그것도 상위 레벨에 대한 집착은 뉴욕 지부의 에이전트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맥스나 캐리 그리고 존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고 키이스는 신경원에게 들은 과거의 이야기가 있기에 저렇게 고집스럽게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어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먹이고, 해가 뜨면 끌어내 숙소의 침대까지 데려가는 일만 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가만히 있던 라미레즈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전면 스크린에 가득 떠올라 있는 수십 개의 CCTV 화면을 가리켰다.
“에이전트 신이 CCTV에 잡힌 화면만 보고도 뱀파이어를 가려낼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좀 무모한 거 아닌가요? 혼자 저걸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놈은 다 봐.”
“네?”
“그 뭐냐, 동체시력이 뛰어난 야구 선수들은 날아오는 공의 실밥도 보고, 한 번에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본다잖아? 퍼스트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야.”
“그게… 진짜 가능하다고요?”
라미레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본적으로 신경원에 대한 반감이 있는 그녀는 인정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동체시력이 좋아도 그게 말이 되는,”
“저놈은 돼. 영상 속의 뱀파이어를 보고 안구의 반응 속도까지 비교 분석이 가능한 놈이 뭘 못 하겠어.”
“야구 선수를 했으면 대박을 터트렸을 텐데, 아깝다니까.”
“모르시는 말씀. 저놈은 야구 센스가 아주 꽝이야. 전에 백업팀 녀석들 틈에 끼어서 한 번 해본 적이 있는데, 보기는 잘 봐도 제대로 못 치더라고.”
“몸을 그렇게 잘 쓰는데 어째서?”
“쌈박질이랑 스포츠가 같냐?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완급을 조절해야 되는데 저놈은 그게 안 돼. 그냥 무조건 일격필살에만 익숙해져 있는데다 신체 반응속도가 너무 빨라서 공이 도착하기도 전에 배트를 휘둘러버리더라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오랜만에 사람 모아서 야구나 한 게임 할까?”
“어디서?”
“주차장 정도면 되지 않을까? 백업팀 애들이랑 친목도모를 위해 쓴다고 하면 허가해줄 거 같은데.”
괜찮은 생각이라며 동료들이 입을 모으는 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신경원이 벌떡 일어나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뒤에, 닥쳐. 꺼져.”
험악함이 물씬 풍기는 말에 동료들은 고개를 저으며 우르르 작전 상황실을 빠져나갔다. 키이스는 신경원이 내려놓은 텀블러를 흔들어보고 빈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그들을 따랐다. 신경원은 라헬 윈스터를 발견할 때까지 작전 상황실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이스가 다시 신경원을 찾아온 것은 그다음 날 새벽,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는 시각이었다. 쉬는 시간이나 식사 시간이 아닌데도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예들린의 명령 때문이었다. 예들린은 명령을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키이스와 함께 상황실에 왔다.
“신. 그만하고 가서 쉬도록.”
“아직 일출 시간까지 32분 남았습니다.”
“나돌아 다니던 뱀파이어도 쥐구멍 찾아 숨어들 시간이다. 잘 알면서 고집 피우지 마. 그만 쉬어.”
“치프 저는,”
“지금 상태로 라헬 윈스터가 나타나면, 나가서 싸울 수 있나?”
“…….”
“푹 쉬고 모레부터 정식으로 복귀하게. 클리퍼드 자네는 의무실에 가서 수면제 좀 달라고 해서 저놈에게 먹이고 잠들 때까지 감시하게. 한눈팔면 밖으로 뛰쳐나갈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수면제라면 질색을 하니 옆에서 제대로 먹는지 지켜보도록.”
예들린은 그 말을 남기고 작전 상황실을 나가버렸다. 상황실에 상주하고 있는 인원들이 힐끔힐끔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신경원이 워낙 험악한 상태라 알게 모르게 사흘간 마음고생을 한 탓이다.
“퍼스트, 일어나세요.”
키이스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신경원은 한참을 미적거리다 욕설을 내뱉은 후에야 일어났다. 신경원이 샤워를 하는 동안 수면제를 받아 온 키이스는 침대에 앉아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신경원에게 알약이 든 작은 플라스틱 컵을 내밀었다.
“드세요.”
신경원은 약을 받아들고 핏발이 서다 못해 토끼 눈이 돼버린 눈동자로 컵 속의 알약을 노려보다 고개를 들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어째선지 ‘먹기 싫어’라는 말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치프 명령이라서 드시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어떻게든 주무셔야 해요.”
이전에는 잠이 모자라는 경우 일을 끝내놓고는 의자에 기대 잠깐씩이라도 졸아 수면을 보충하던 신경원이다. 하지만 모니터링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즉, 그 어느 때보다도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아니, 제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얼른요.”
“그래. 자긴 자야지.”
작전 상황실을 나온 뒤 처음으로 입을 열은 신경원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키이스는 2층 침대의 프레임을 잡고 허리를 숙인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의 숨소리와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키이스의 눈에 신경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고집스럽게, 험악한 기세로 작전 상황실에 진을 치고 있던 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한데 고집스레 입을 열지 않는다.
“퍼스트. 그런 눈으로 보시면 곤란해요.”
“…….”
“이 거리, 위험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장난조로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지금처럼 반쯤 넋을 잃고 있는 상태라면 도둑 키스를 해도 거부 반응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키이스는 잠시 그 자세를 유지하다 어깨를 조금 뒤로 물렸다. 신경원과의 거리가 물러선 만큼 멀어진다. 조금 아쉬웠다.
“어서 드시고 주무세요. 지금 상태, 정말 좋지 않습니다.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알아. 하지만,”
신경원의 시선이 다시 손에 든 수면제로 향했다.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게 보였다.
“…모……어.”
“퍼스트, 뭐라고 하신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무엇을요?”
“지금처럼 상태가 나쁠 때는 약도 잘 안 들어. 제대로 자려면….”
“뭐가 필요하세요? 말씀만 하세요. 구해다드릴게요.”
신경원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키이스는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무엇이든 말해보라 속삭였다. 신경원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망설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람.”
신경원의 대답에 키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 누가 있어야만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다… 그런 말씀이세요?”
까만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머리가 까닥 하고 움직였다. 순간 키이스의 뇌리에 예들린이며 존이며 맥스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가끔이지만 신경원에게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곤 했다. 없다고 하면 농담조긴 해도 빨리 여자를 만들라며 성화를 했었다.
어째서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공사혼동까지 마구 해가며 해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알겠다.
그들은 신경원의 불면증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신경원 스스로는 심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불면증이 사실은 꽤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과 근본적이진 않아도 매우 유효한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평소에는 괜찮아. 하지만 이렇게 심할 때는… 필요해.”
어째선지 신경원이 매우 연약해 보였다.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연약한 사람 같다. 잠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약해질 수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짐작이 가질 않는다.
키이스는 안타까워하며 입을 열었다.
“누우세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넌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아무에게도 퍼스트의 옆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안 돼.”
신경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키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요동치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정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신경원을 재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존이나 맥스를 불러드릴까요? 그분들이라면,”
“안 돼.”
처음으로 신경원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도 싫고 존이나 맥스도 싫다면 도대체 누구를 원하는 건데! 여자라도 구해 오라는 소리야? 자길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에게?
화가 나는데 내색을 하기 그러니 더 화가 난다. 하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저를 쳐다보는 빨간 눈이 너무나 안쓰러워 화는 금세 사그라졌다. 키이스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나긋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안 되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
“답을 해주셔야 해결을 해드리죠. 제가 아무리 퍼스트를 좋아해도 퍼스트 머릿속까지 읽어낼 재주는 없어요.”
“…그래서야.”
“네?”
“…네가 날 좋아…하니까.”
“……!”
“네 마음은 받아주지 않겠다고 말해놓고 단순히 수면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같이 자달라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나는… 네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 그런데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같이 자달라고 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서….”
“…….”
“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든 해야겠는데,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
순간 키이스는 침대 프레임을 잡은 손에 힘을 꾸욱 주었다. 뭐든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신경원을 품에 안아버릴 것 같았다.
“그냥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다른 사람이랑 자면 되는데, 그런 건 생각 안 해보셨나요?”
“그래볼까 생각은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키지 않아서 포기했어. 어떤 식으로든 네가… 알게 되면 상처 입을 것 같―,”
키이스는 더 참지 못하고 팔을 내려 신경원을 품에 안아버렸다. 맹세하지만 신경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알면 이렇게 면전에 대고 말하진 못할 거다. 아니, 지금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모자란 잠이 단단한 벽에 틈을 낸 거다. 그 틈으로 무의식 속에 있던 말들이 새어나온 거다.
“아파.”
“조금만 참으세요.”
키이스는 신경원을 안은 채 눈을 꾸욱 감았다. 언젠가 마음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끝없는 희망고문에 시달리게 될 거라는 생각도 동시에 했었다.
그런데….
“퍼스트는 제가 얼마나 퍼스트를 좋아하는지 모를 겁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정말 좋아해요.”
진심을 담아 속삭이는 데 아래쪽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굳어 있던 신경원의 등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퍼스트?”
끌어안은 팔을 푸는 순간 신경원의 상체가 그를 향해 기울었다. 신경원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플라스틱 컵과 수면제였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어버렸다. 잠깐 끌어안은 것뿐인데 신경원은 그의 품 안에서 마음을 놓고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았던 일은 신경원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신경원을 안아 조심스럽게 침대 안쪽에 눕혔다. 신경원은 그가 잠깐 손을 떼자 미간을 찌푸렸다. 키이스는 신경원이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잠깐 기다리라며 겉옷을 벗고 부츠를 벗었다. 그리고 재빨리 신경원의 옆에 누워 잠든 그를 보듬어 안았다. 신경원은 잠결임에도 거의 본능적으로 키이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신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신경원을 바싹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저 때문에 다른 사람하고 함께 잘 생각도 못할 정도로는…, 제가 상처 입을까 봐 차마 시도도 할 생각도 못 할 정도로는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키이스는 계속 작게 속삭이며 신경원의 등을 토닥였다.
“부디… 나를 조금 더, 좀 더 많이 좋아해주세요.”
신경원은 마치 고양이처럼 제 이마를 키이스의 가슴에 비비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