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9)

10

신경원은 언제부터인가 잠든 것과 의식이 끊어진 것과의 차이점을 구분하게 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잠들 수 없어 수면유도제를 복용하고 그것으로 부족해 신경 안정제를 먹고, 그것으로도 잠들 수 없어 진짜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 수면을 취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수면제를 먹고 자는 잠은 잠이라고 할 수 없다. 적어도 신경원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잠이란 가물가물 의식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따스한 수면 아래로 곱게 내려앉는 거다. 하지만 수면제를 먹으면 몸은 저기에 있는데 몸과 정신의 연결 고리를 강제적으로 차단당한 채 끈적끈적하고 냄새 나는 늪에 강제로 처박히는 느낌이 든다. 

하아―. 

입술이 벌어지고 덥고 습한 숨이 새어나갔다. 오랜 시간 육체와 차단되어 있던 정신이 시커먼 늪 바닥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올라가고 싶은 마음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에 두고 온 몸은 아직 약기운의 지배하에 있었다. 

신경원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 현실에 두고 온 몸과 몸에서 강제로 배제당해 멀리 떨어져 있던 정신이 접촉했다. 

“……!”

찰나의 순간이 지났다. 신경원은 제가 다시 제 몸으로 돌아왔음을 인지했다. 흐릿하긴 했지만 시야가 확보되었고 멍하지만 소리가 들렸으며 둔하긴 하지만 감각이 느껴졌다. 

신경원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시야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점점 더 넓어졌다. 동시에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감각이 수면제로 인해 잠들어 있다 깨어났음을 알렸다.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씨발, 이래서 수면제 따위 안 먹고 버티는 건데.

처음보다 선명해진 시야에 못 보던 것이지만 익숙한 것들이 들어왔다. 흰색과 파란색의 시트, 하얀 침대 프레임, 하얀 벽, 의자와 침대용 트레이, 검고 하얗고 빨갛고 하얀 줄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의료기기들. 

삑―. 삑―. 삑―.

귀에 규칙적인 beep음이 들려왔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신경원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보다 조금 느리긴 해도 규칙적이고 잡음도 들리지 않는다. 그사이 그의 심장은 완만하게 박동수를 늘려나갔다.

신경원은 눈을 깜박이며 조도를 낮춰둔 천장의 조명기구를 바라보았다. 좀 지나치게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점이 조금 걸린다. 하지만 다른 기기나 물품들로 봐서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병원의 병실 내부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병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 눈과 귀로 입수한 정보가 머릿속에서 합쳐져 금세 결론을 도출해낸다. 여긴 구금실이 아니었다.

“하….”

멍청하게 벌리고 있던 입이 한쪽으로 쏠리며 웃음 섞인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 살아남았구나. 또 살아남았어.

잠들어 있는 사이 세 번째의 24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그는 죽지 않았고 뱀파이어도 되지 않고 다시 ‘신경원’으로서 눈을 떴다. 

“흐―. 흐으. 흐. 흐.”

웃음도 울음도 아닌 감탄사가 계속 입에서 작게 터져 나왔다. 웃든가, 차라리 울든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못하고 가운데 낀 이상한 소리만 나왔다. 그래도 뺨은 간지러웠다. 뜨뜻미지근한 눈물 한 줄기가 눈가에서부터 천천히 볼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은 또 살아남았다. 

기쁘다. 하지만 감격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세 번째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았다는 거니까. 그래. 그거면 족하다. 

“……?”

눈물을 닦으려 했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손에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데 화사한 색의 금빛 머리카락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게 보였다. 신경원의 손은 각지고 떡 벌어진 어깨에서 뻗어 나온 단단하고 긴 팔 아래 끼어 있었다. 신경원은 홀린 듯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도 모르게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던 신경원은 어느 순간 얼굴을 확―붉혔다. 시선이 절로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벽을 향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니까. 

살아남아서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행복하다. 하지만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다. 지난번에는 난리 블루스를 췄던 게 부끄러워 쥐구멍을 파고 싶었는데 이번엔 제 입으로 내뱉었던 말 때문에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때밖에는 할 수 없었던, 그때이기에 해야만 했던 말들이 시간을 건너와 침대에 길게 누워 있는 몸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쪽팔리고 민망해서 미치겠다. 수면제가 아니라 기억을 지우는 약을 통째로 목구멍에 들이붓고 싶다. 자신이 아니라 키이스의 목구멍에.

진정해. 진정하라고, 신경원.

어쩌다 보니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에게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케케묵은 오랜 이야기들을 줄줄 읊어버리고 말았다. 주워 담으려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 솔드 아웃 된 상태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다. 

“인마.”

이 멍청한 잠꾸러기 대형 강아지야. 네 주인님 깼다. 

“야, 인마. 키이스.”

몸에 힘이 좀 있었으면 그냥 냅다 뒤통수를 내려쳤을 텐데 오른팔엔 붕대가 감겨 있고 왼팔은 키이스가 손을 꼭 잡고 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키이스, 키이스 클리퍼드!”

꿈틀―. 얇고 부드러운 니트 스웨터에 감싸인 어깨가 반응을 보였다. 그에 신경원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키이스를 불렀다. 

“일어나라니까, 키이스 클리퍼드! 당장 눈 뜨지 않으면 너스 콜 눌러서 병실 밖으로 끌어내라고 할―,”

신경원은 말을 하다 말고 꿀꺽 침을 삼켰다. 퍼뜩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린 키이스가 신경원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눈 주변의 윤곽선을 사르르 무너뜨리며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키이스는 감격에 찬 눈빛으로 신경원을 바라보며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웃었다. 누가 보면 자신이 완전히 죽었다 살아난 줄로 알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감격하는 건 네 자유인데 손은 놓고 해. 네놈이 부여잡고 있어서 꿈쩍도 할 수가 없잖아.”

“아―!”

그는 깜짝 놀라 양손으로 꼭 부여잡고 있던 신경원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정말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신경원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살며시,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 몸짓은 마치 손가락만 대면 톡―하고 터져나가는 연약한 비눗방울을 대하는 듯 무척이나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신경원은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그리곤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여는 키이스를 향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명.”

“예?”

“내가 주사 맞고 정신을 잃은 뒤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요약된 버전으로 설명한다. 실시!”

명령조의 말에 키이스는 구부정하게 굽어 있던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폈다. 

“치프께서 LA 의료팀 치프에게 퍼스트를 수면제로 재워버리라고 했답니다. 그와 같은 상황하에 장시간 노출될 경우 PTSD 혹은 여타의 신경증을 심화하거나 유발할 가능성이 높음으로 심리적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였다고…. 이에 불만이 있다면 뉴욕에 돌아와서 항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망할.”

“이후 퍼스트는 24시간이 경과할 때까지 구금실에 있었으며 이후 LA 본부 내의 일반 병실로 옮겨 팔의 부상을 치료할 예정이었지만 제 건의로 이곳, UCLA 메디컬 센터로 이송하였고 현재 각종 검사와 수술을 마친 상태입니다. 팔의 부상은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고 근육도 온전한 상태였으나 도려낸 부위가 약간 깊고 넓었기 때문에 신체의 다른 부분에서 약간의 피부조직을 떼어 이식수술을 실시―,”

“일시 정지.”

“넵!”

“누구 맘대로 뭘 어쨌다고?”

“제 건의로 병원을 옮겨서 피부 이식 수술을 했습니다. 치프의 허락은 받았습니다.”

“치프가 내 부모님이라도 되냐? 치프 허락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해도 된다고 생각해?”

신경원은 어이가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이 메말라 갈라지는 소리였음에도 어찌나 컸는지 밖에서 간호사가 문을 벌컥 열고 달려왔다. 간호사는 큰 수술은 아니었다 해도 마취가 완전히 깰 때까지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곧 의사를 불러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키이스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헤헤 하고 채신머리없이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정신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가출한 놈인 줄 알 것 같다. 완전 미친년 꽃다발… 아니, 미친 황금실타래다. 

“아참, 목 안 마르세요? 물도 있고 주스도 있는데 어느 걸로 드릴까요?”

키이스의 입은 대놓고 귀에 걸려 있었다. 손가락을 입 양쪽에 넣어 쭉~찢으면 조커가 저리가라 할 얼굴이 될 기세다. 진짜 확 잡아서 쭉 째버려?

“지금 몇 시지? 그때 이후로 얼마나 지난 거야.”

“수면제 맞고 잠드신 지 대략 28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오후 5시 21분이고요.”

“뭐? 28시간?”

“의료팀 치프인 닥터 프리먼이 중간에 깨워서 체력을 소모하게 하는 것보다는 그냥 재운 채로 이송해서 수술까지 싹 끝내버리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치프께서 동의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신경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동의도 안 했고 언급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수면제를 투여받은 부분은 확실히 불만이다. 하지만 의사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불만을 품을 수가 없다. 정신과를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라는 데 동의한다. 

그래도 28시간은 너무하잖아.

…….

…에이 몰라. 됐어. 살아남았으면 된 거지.

과정에 ‘불호’인 부분이 상당히 많지만 결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패스다. 자잘한 데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엔 글자 그대로 정신적 소모가 컸다. 무엇보다 민망해서 미치겠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배고프니까 뭐든 먹을 거. 그리고 나가서 내 차트랑 검사 데이터 모조리 달라고 해서 가져와.”

“식사는 말만 하면 금방 준비해줄 테지만 차트는 왜 찾으십니까?”

“들어본 적 없냐? 세상에서 제일 진상인 환자는 의사 아니면 약사라고. 내가 나가서 지랄하는 거 볼래?”

“아,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자 키이스는 당황해서 신경원을 말리곤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갔다. 신경원은 침대를 이리저리 살피다 머리 부분을 자동으로 올려주는 버튼을 발견하고는 기대기 딱 좋은 기울기로 조정했다. 

편한 자세를 잡자마자 키이스가 담당의 두 명과 함께 들어왔다. 그는 의사들에게 경과를 듣고 직접 차트를 체크하며 질문을 했다. 의사들은 신경원이 전문적인 용어로 질문을 해대자 무척이나 당황했다. 하지만 신경원이 의사 출신임을 키이스가 알려주자 납득하고 비교적 순순히 상세히 대답을 해주었다. 

우수한 의사들인지 그들의 처방이나 처치, 수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백혈구 수치가 조금 이상했지만 수혈을 받은 것도 있고 정상치에 한없이 가까웠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다만 무슨 검사를 그리도 많이 했는지, 장난이 아니다. 풀코스에 플러스 알파로 건강검진을 해놓았다. 감이지만 의사들이 권한 게 아니라 키이스의 입김이 들어간 것 같았다. 

신경원은 한소리 하려다가 그저 좋다고 헤실거리는 키이스의 얼굴을 보고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제 딴에는 걱정이 돼서 그랬던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받은 스트레스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을 테니 정당히 봐줘야지.

그래도 말이지, 이 식사 메뉴는 너무하잖아.

“배고파 죽겠는데 멀건 치킨 수프나 처먹으라니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의사들이 나간 후 바로 들어온 트레이를 보고 신경원은 성질을 냈다. 키이스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꼬박 하루 반을 굶으셨잖습니까. 바로 일반 식사를 하시면 탈이 나실 수도 있어요.”

“알아, 새끼야! 누가 몰라서 그래? 그냥 투정이다.”

키이스는 쿨럭거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투정부리는 게 이상하냐?”

“아뇨. 그냥….”

신경원은 헤실헤실 웃어대는 키이스에게 눈을 흘기곤 접시를 들어 멀건 수프를 후루룩 마셔버렸다. 그리고 후식으로 곁들여진 플레인 요거트와 푸딩까지 게 눈 감추듯 먹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꿀을 조금 탄 데운 우유를 마신 그는 이제야 좀 살겠다는 표정으로 침대에 기대앉았다.

인간의 삼대 욕구 중 가장 강하다는 수면욕과 식욕이 완전하지는 않아도 대강 채워지고 나니 겨우 여유라는 놈이 생긴다. 민망함도 좀 줄었다. 그러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살아날 확률이 10%도 안 되는데 그걸 세 번이나 넘겼다. 이만하면 가히 최강의 운을 타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다. 날고 기는 에이전트들도 한두 번이 고작인데.

가만히 앉아 있는 데도 감격으로 어깨와 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걸 본 키이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퍼스트, 괜찮으세요?”

입을 열면 목소리도 떨릴 것 같았다. 그래서 입술을 말아 꾹 물었다. 그렇게 신경원은 잠시 목숨을 부지했다는 기쁨에 몸을 맡겼다. 

살아남았다. 죽지 않았다. 뱀파이어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그것에만 감사하자.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또다시 전력으로 망할 뱀파이어들을 사냥할 수 있다.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퍼스트.”

“……?”

“손…, 다시 잡으면 안 될까요?”

망할 자식, 감동할 여유도 안 주냐?

키이스의 심경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반응을 해주기엔 신경원의 성격은 그렇게 말랑하지가 못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버튼을 눌러 침대를 원래의 상태로 돌렸다. 그러곤 시트를 뒤집어쓰고 키이스에게서 등을 돌려 모로 누웠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키이스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게 불가능했다. 민망함은 좀 가셨지만 아직까지는 쪽이 좀 팔린다. 

“그만 쳐다봐.”

등을 돌리고 누운 상태지만 키이스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눈빛으로 레이저라도 쏘는지 등판 전체가 따끔따끔했다. 

“보는 것 정도는 그냥 허락해주세요.”

“…….”

“제가 고백을 한 건 사실이지만 뭔가를 바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퍼스트는 그냥 평소처럼 저를 대해주시면 됩니다. 전 그거면 돼요.”

부르르, 어깨가 또 떨렸다. 맹세하지만 감동해서 그런 게 아니다. 

무슨 처절한 외사랑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닭살 돋게시리.

팔뚝에는 진짜로 닭살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붕대에 감겨 있는 오른팔도 마찬가지였다. 곤두선 솜털이 하얀 붕대를 밀어 올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키이스의 감정이 더운 공기와 함께 물밀듯이 밀려들어 그를 감싸는 것 같았다.

시트 밑에서 신경원은 더운 숨을 내쉬었다. 습기 어린 공기는 금세 얼굴 전체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신경원은 멀쩡한 팔의 주먹을 꾹 쥐었다. 애써 키이스의 감정을 밀어내려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예전의 자신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신경원이라는 이름의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신경원은 지금의 자신만큼은, 제 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전력을 다해 한 길을 달릴 거다. 그 길에는 말캉하고 보드랍고 때로는 유치하게 느껴질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가끔 힘에 부쳐 멈추어 서서 휴식을 취할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그때조차 자신은 전력을 다해서 쉬고 다시 힘을 내서 또 달려버릴 거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키이스.”

“네.”

신경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덥고 습한 시트 아래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조금 잔인하다 싶은 말을 내뱉었다.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을 거다.”

“압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누군가를… 퍼스트를 좋아하는 제 마음이 쓸데없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퍼스트는 제게 마음을 접으라고 하지는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번복하시면 안 돼요.”

“…….”

“퍼스트는 퍼스트가 말한 그대로 앞으로도 원하는 걸 하시면 됩니다. 그저 제가 하고픈 말은….”

키이스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살아 돌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나 죽었다 살아난 거 아니거든?”

죽었다 살아난 것과 비등한 수준일지는 몰라도 진짜로 죽지는 않았잖아. 

“네. 그래도… 살아서 다시 제 앞에 계셔주셔서 감사해요.”

“…….”

“가장 바라던 것을 이루었으니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겠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러니 저를 외면하거나 멀리하지만 않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는다면서 은근슬쩍 잘도 갖다 붙인다. 저놈은 사기꾼 기질을 타고 났음에 틀림없다.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키이스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부유하는 공기가 키이스의 온기를 담아 신경원에게 전한다. 그것은 아주 따스했다. 

시트로 감춰진 신경원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달칵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안으로 훅 들이닥쳤다. 얇고 부드러운 소재의 니트 스웨터는 며칠 사이 계절 자체가 바뀌어버린 뉴욕의 날씨를 견디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고맙다. 수고했어.”

공항에서부터 내내 마치 묵상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눈을 감고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던 신경원의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만요.”

“내리지 마.”

“다치셨잖아요. 문 열어드릴게요.”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생채기 두 개 가지고 환자 취급 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 가봐. 넌 오늘 일하는 날이잖아.”

“…….”

신경원은 붕대에 감싸인 오른팔 대신 왼팔을 뻗어 차 문을 열고는 차에서 내렸다. 

“고생 많았어. 모레 보자.”

“내일 저녁때 오겠습니다. 같이 식사해요. 몸 축났으니 고기 먹어야죠.”

“…….”

“뉴욕에 가기 전에 저랑 약속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근사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가서 같이 식사하시기로 했잖아요.”

“아아.”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7시에 모시러 올게요.”

“하아…, 그러든가.”

신경원은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멀쩡한 팔을 들어 휘익―하고 한 번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신경원이라는 남자는 일단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그걸로 끝. 돌아보거나 손 인사를 해주던 사람이 아니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신경원을 바라보고 있던 키이스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미소가 어렸다. 조금이지만, 정말 조금이지만 신경원이 자신을 받아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네.”

키이스는 장시간의 비행으로 굳은 목을 두어 번 주무르고 고개를 빙그르르 돌렸다. 뿌득 뿌득 하는 소리가 근육과 뼈를 울렸다. 

그는 인적이 얼마 없는 골목으로 사라져가는 신경원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비슷비슷한 색의 아파트 다섯 채를 지나고 나서야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고 길가로 삐죽 차체 앞부분이 튀어나와 있는 차들 사이로 사라진다. 호수까지는 알아낼 길이 없지만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는 이제 대강 알았다. 

말 한마디면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인데 이렇게 찔끔찔끔, 추수를 한 뒤 땅바닥에 떨어진 밀 이삭 줍듯이 습득하는 건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대한 기다림 끝에 얻는 것이기에 더 뿌듯하고 보람차고 즐거웠다. 하지만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을 느낀다. 

안 돼. 키이스. 그렇게 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키이스는 운전대에 손을 올린 채 거기에 이마를 박고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지옥과 같은 24시간이 끝나고 무사히 목숨을 건진 신경원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까칠하고 여전히 자신에게는 무심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제는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 괜찮다. 하지만 이상하게 조바심이 난다. 참아야 한다는 건 안다. 무엇보다 그는 신경원에게 더 바라는 게 없다고 공언을 해버렸다. 마음속의 말과는 정반대의 말을 해버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신경원이지만 조금 전 그는 키이스와 시선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조금이긴 했으나 낯을 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괜한 욕심에 푸시를 하면 그동안 잘 다져왔던 관계가 단숨에 원래대로 돌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괜찮아. 키이스. 괜찮다고. 

키이스는 계속 자신을 타일렀다. 낯을 가리는 듯한 행동을 보인 걸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신경원이 그의 고백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굳이 저런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을 거다. 마음을 받아줄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은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나름의 진전은 있었던 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키이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반이다. 출근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반. 빠듯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약속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하는 시간이었다. 

차를 출발시키는 키이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갔다. 신경원을 바라보면 저절로 움직여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던 근육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차도를 가득 메운 차들 사이로 끼어들 무렵 키이스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뉴욕 시 퀸즈 북쪽에는 큰 섬이 하나 있다. 라이커스 아일랜드라는 이름의 그 섬에는 현재 10개의 교도소와 구치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시설이 또 하나, 섬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키이스의 목적지는 바로 그곳이다. 

키이스는 프란시스 부오노 다리를 건너 라이커스 아일랜드에 진입했다. 범죄자들만이 그득한 이 섬에 오는 것은 거의 반년 만이다. 아니,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FBI 아카데미에 입소하기 직전이었으니 반년은 좀 더 된 셈이다. 

이 섬에 올 때마다 그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하지만 오늘만큼 기분이 나쁜 적은 없었다. 바닥을 치는 게 아니라 아예 뚫고 들어가고 있다. 

망할 놈의 섬. 그냥 가라앉아버리면 속이 시원하겠어.

차에서 내리자 LA까지 찾아왔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키이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키이스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Mr. 클리퍼드. 아, 이젠 에이전트 클리퍼드라고 불러야 했는데 실례했습니다.”

키이스는 살갑게 인사를 해오는 남자를 마치 신경원이라도 된 것마냥 반 무시하고서 건물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남자는 겸연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키이스의 뒤를 따랐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탔던 두 사람은 곧 각종 기계가 가득한 넓은 연구실로 향했다. 남자는 키이스를 안내하여 투명한 유리벽으로 가로막힌 그의 개인 연구실로 안내했다. 

“커피, 아니면 차?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닥터 엠브리시오.”

“그럼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저는 커피를 한 잔 마셔야 머리가 잘 돌아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자, 닥터 엠브리시오는 반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 키이스를 보며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그가 키이스와 처음 만났을 때가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그는 재벌가 아들답지 않은 단정하고 예의 바른 소년의 모습에 상당히 감탄을 했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집불통에 응석받이에 완전 제멋대로로 다루기가 상당히 힘들었었다.

그 아이들도 모두 키이스와 같이 이름만 대면 일반인들도 알 만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애지중지 응석을 받아주며 키웠기에 성격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키이스만은 달랐다.

클리퍼드가의 막내아들은 되바라지기로는 미국 최고라 여겨도 부족함 없는 다른 재벌가 아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재벌가의 아이는 이래야 한다는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재벌가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아 잘 자라고 잘 큰 전형적인 도련님, 조금 과장을 해서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제 가문의 이름을 부끄럽게 만드는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성인이 되어 제 앞가림을 시작해야 할 나이가 된 후에도 키이스는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나 다른 후보자들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도련님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

엠브리시오는 LA 지부 구금실에서 만났던 키이스와 그의 파트너를 떠올렸다.

키이스의 파트너는 총본부의 연구부를 맡고 있는 그조차도 이름을 들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배경까지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유능한 에이전트였다. 기관엔 동양계가 많지 않은데 그런 곳에서 오직 실력만으로 시니어 에이전트가 된 남자였다.

그가 알기로 신경원이 기관에 투신한 계기는 가족 대부분이 뱀파이어에게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통계 하나가 나온다. 신경원과 같이 가족이나 연인, 혹은 지인들이 뱀파이어에게 살해된 후 기관에 투신한 에이전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에이전트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준다는 부분이다. 특히 소중한 사람이 살해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거나 그 자신도 뱀파이어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람들이 더욱더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적으로 연구 분석을 해보지 않아도 이유는 금세 파악이 된다. 가족과 연인, 지인들을 죽인 뱀파이어에 대한 복수심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뱀파이어에 대한 극렬한 혐오감과 복수심이 뇌리에 새겨진 사람들이니 타고난 신체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사람이라 해도 보통의 에이전트들을 뛰어넘는, 이른바 기적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발현되지 않았을 잠재 능력의 폭발 정도로 추측된다. 어쨌든 그들은 언제나 엠브리시오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엠브리시오가 신경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신경원이 22살에 의대를 졸업한 천재에 가까운 수재였기 때문이다. 국내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의대가 많이 있었으나 신경원이 다닌 대학은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존스 홉킨스였다. 어지간히도 실력이 좋았는지 인턴십도 존스 홉킨스에서 받았다. 그런 이유로 엠브리시오는 신경원이 필드 에이전트로 일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면 자신의 연구팀에 스카우트할 인재로 오래전부터 점찍어놓았다. 

“가능하면 유능한 에이전트를 파트너로 붙여주길 바랐는데, 설마 그를 저 남자에게 붙여놓았을 줄은 몰랐단 말이야.”

엠브리시오 외에도 키이스가 기관의 에이전트로 일하게 되었을 때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같은 요청을 상부에 했었다. 키이스에게는 그럴 가치가 아직은…, 아직은 많이 남아 있었다. 

에이전트가 되는 걸 그렇게 내키지 않아 하더니, 세상 참 모를 일이야.

엠브리시오는 커피 머신을 조작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키이스는 정말로 에이전트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키이스의 ‘친부’는 고집을 피웠고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아카데미로 향했었다. 

솔직히 그는 키이스가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두겠다고 할 줄 알았다. 웨스트포인트를 나오긴 했으나 기관의 에이전트가 하는 일은 곱게 자란 재벌가 도련님이 감당하기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과격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라고 해야 할 정도로 적응을 잘하고 있는 모양이다. 파트너와의 관계가 돈독하고 깊지 않았다면 신경원이 수면제로 정신을 잃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반듯한 모습을 보여주던 도련님이 그렇게 과격하게 나오는 건 처음 봤다. 

엠브리시오는 깊은 향기가 피어나는 커피 잔을 데스크 위에 올려놓은 후 세 개의 모니터 중 하나를 키이스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는 모니터에 몇 개의 검사 결과 데이터를 출력하고는 커피를 마셔가며 천천히 데이터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으로 현재 에이전트 신의 건강상태는 양호하며 별다른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단정하고 예의 바르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이지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에 엠브리시오는 마우스를 내려놓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데스크 위에 올렸다.

“에이전트 클리퍼드.”

“네, 닥터 엠브리시오.”

“일단 에이전트 신에게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는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

“현 시점에서 에이전트 클리퍼드의 혈액은 일반인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분 헌혈도 아닌 전혈을 그대로, 일반인에게 수혈한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아시지요?”

“네.”

“상황이 상황이었고 곧장 에이전트 신에게 수혈할 혈액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이전트 클리퍼드의 선택은 자칫 잘못하면 유능한 에이전트 한 명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위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단정한 잘생긴 얼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 아랫입술을 말아 빨갛게 되도록 물었다 놓는다. 하지만 다시 이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잠시 잊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저는 해석하려 합니다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에이전트 클리퍼드를 위해서, 동시에 다른 사람, 예를 들어 파트너인 에이전트 신을 위해서도요.”

“알겠습니다.”

“용건은 이게 끝입니다. 간단하게 전화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이곳까지 오시라고 하여 말씀을 드린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

“오신 김에 채혈을 좀 할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단추를 하나만 채우고 있던 슈트 상의를 벗었다. 엠브리시오는 셔츠를 직접 걷어 올려주고는 얇고 작은 시험관에 반쯤, 키이스의 혈액을 채웠다.

“잔소리로 들리시겠지만 건강에 유의하시고 몸조심하십시오. 다음 정기 검진 때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슈트를 입고 단추를 채운 키이스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엠브리시오의 사무실을 나갔다. 발군의 미모를 가진 남자가 연구실을 가로지르니 나이대와 상관없이 여성 연구원이란 연구원은 모조리 그의 얼굴이나 슈트로 가려졌음에도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의 근육질 몸매를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개중에는 남자 연구원도 몇 섞여 있었다. 

하지만 엠브리시오는 다른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키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다기보다는 아깝기 그지없다는 시선이었다. 

엠브리시오는 새빨간 피가 든 시험관을 분석기에 넣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God bless us.”

* * *

“뭐라고?”

뉴욕 지부 부부장이자 섹션 치프인 예들린은 두 눈에 힘을 가득 주며 물었다. 눈썹 양끝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구름을 뚫을 기세다. 그럼에도 신경원은 여상한 표정을 지으며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부상이라고 해봐야 팔뚝에 생채기 두 개가 고작인데 왜 3주나 쉬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요.”

“그게 생채기냐? 응? 고작 생채기라니, 누가 그래.”

“제가요.”

“……!”

이걸 그냥 확! 

한 대 패면 좋겠다는 표정을 지은 예들린은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안 했다. 

“긁히고 찢어진 정도로 쉬는 사람은 없어요. 가뜩이나 맥스는 혼자 일하고 있잖습니까.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요. 당장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되겠지만 마음이라도 좀 편하게 있고 싶어요. 일주일 정도는 얌전히 사무실만 지키면서 사건 파일이나 뒤적이고 있을 테니 그냥 일하게 해주세요.”

신경원은 단호한 표정으로 예들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에는 빈틈이 없다는 태도다. 실제 그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팔다리가 부러지면 또 몰라도 이 정도 부상으로 병가를 내는 사람은 없다. 조금 심하다 싶으면 하루 이틀 정도를 받아서 비번일과 합쳐 3~4일 정도 쉬는 게 고작이다. 

물론 자신에게 3주의 병가가 나온 이유는 이해도 하고 납득도 하고 있다. 물린 부분을 도려냈기 때문에 긁히거나 찢어진 상태보다 상처 부위가 넓어서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로 고심하며 24시간 동안 받았을 스트레스의 강도를 생각해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도록 즉, 심리적인 안정을 찾도록 휴식을 취하라는 의미다. 

“제가 이번이 첫 번째라면 바로 수긍하고 3주가 아니라 한 달쯤 쉬게 해달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째였어요.”

“그러니까 쉬라는 거다.”

“세 번째쯤 되니 딱히 감흥도 없는걸요. 그냥 이번에도 살아남았구나 싶고….”

“그게 이상한 거라는 건 모르는 거냐?”

“다른 사람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저는 멀쩡해요. 심리 상담을 해주신 닥터 데니스도 너무 멀쩡해서 신기하다고 하시긴 했지만 복귀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요. 여기 소견서. 곧장 복귀해도 좋다는 평가를 해주셨으니 확인해주세요.”

신경원은 심리 상담가의 소견서를 품에서 꺼내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예들린은 곱게 접혀 있는 종이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당분간은 나가서 뱀파이어 때려잡겠다고 난리피우지 않을게요.”

신경원은 헤―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라헬 윈스터 건 아직 아무런 소득도 없죠?”

“그래.”

신경원이 발견한 B1 라헬 윈스터에게 수배령이 떨어진 지 벌써 한참이다. 로컬 경찰뿐 아니라 FBI에도 협조를 구한 상태지만 라헬 윈스터의 머리카락 한 올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기관은 아직 비상체제에 돌입하진 않은 상태였다.

“음,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기왕 NYPD에 협조를 구해놨으니 아예 그쪽으로 가서 CCTV 센터에서 진을 좀 치고 있으면 어떨까 해요. 뭐 본부 상황실에서도 할 수는 있지만 출동이라도 하게 돼서 작전이 벌어지면 CCTV 쪽 모니터링은 불가능하잖아요.”

설명을 하니 예들린이 솔깃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신경원은 열성적으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진짜 얌전히 틀어박혀 있을게요. CCTV 모니터링 정도면 몸에 부담도 안 가고 밤에만 하면 되니까 되레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거든요. 정시 출근해서 정시 퇴근! 올빼미 생활을 하게 되겠지만 그건 여기랑 마찬가지니 별 문제 없지 않겠어요? 치프도 아시다시피 전 CCTV만 봐도 뱀파이어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가능성도 있고요.”

예들린은 신경원의 말을 들으며 의자의 방향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쪽 눈썹 끝을 연신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것이 딱 봐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운 좋게 라헬 윈스터를 찾아내면 좋겠지만 그녀가 아니더라도 다른 뱀파이어를 찾아낼 수도 있잖아요. 그럼 곧바로 본부로 연락해서 SWAT 팀을 내보내거나 건수에 따라서 HRT를 파견하면 되고… 괜찮게 들리죠?”

신경원은 그답지 않게 나불나불 입을 놀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예들린이 그만하라는 듯 눈썹을 문지르던 손을 내저었다. 

“신.”

“네.”

“라헬 윈스터를 발견하더라도 ‘연락’만 하고 직접 뛰어나가지 않겠다고 자신할 수 있겠나?”

“음… 상처가 좀 회복된 후라면 자신은 못 하겠는데요.”

“그때는 당연히 나가야지! 그 전을 말하는 걸세. 앞으로 3주간은 옴짝달싹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그렇게 할게요. 아무리 B2가 되기 직전인 상황이라도 B1을 상대로 만용을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자네는 만용이라는 단어를 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서 B1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냥 앞에 나타났으니까 죽인 것뿐이라고요. 무엇보다 그때는 LA 애들이 제대로 못 해서 그런 거지 제 탓이 아니었거든요?”

“…….”

“애초에 포위망이 뚫렸다는 것부터도 문제였는데 백업도 로컬 경찰에게 맡기질 않나, 대체 LA 지부 애들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신경원이 LA 지부 에이전트들을 타박하자 예들린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사건에 한해 LA 지부 섹션 치프의 지휘 능력과 병력 배치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뱀파이어의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휘하의 에이전트는 물론이요 타 지부의 우수한 에이전트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으니 말이다. 

예들린은 자신의 상관이기도 했던 LA 지부 섹션 치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수한 지휘관이긴 했으나 성격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능력 위주로 돌아가는 기관인지라 지금까지 치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건지, 아니면 그 성격 때문에 휘하의 에이전트들이 제대로 그의 말을 따라주지 않은 건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일로 문책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리라.

“그쪽은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억울하긴 하겠지만 네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알아요. 그냥 푸념하는 거예요. 아! 맞다. 86번이 거기 있더라고요?”

“86번?”

“네. 제가 백업팀에라도 뽑아달라고 한 해병대 출신. 저한테 맞고 뻗은 덩치 좋은 놈이요.”

“아아. 그 친구. 탈락했으면 우리 쪽으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LA에서 데려갔었지. HRT로 있었나?”

“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긴 하더라고요.”

예들린은 낯가림의 선두주자 주제에 웬일로 한 번 만난 놈에게 관심을 보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신경원의 관심은 거기서 끝이었던지라 이미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부탁이 좀 있는데요, 치프.”

“……?”

“맥스의 파트너, 아직 결정 안 되었죠?”

“백업팀이나 타 지부 에이전트 중에서 뽑아 올릴 예정이라 후보에 오른 사람은 몇 있다. 왜?”

“후임 결정될 때까지 당분간만, 뭐… 제가 멀쩡해질 때까지라도 좋으니 키이스를 맥스의 임시 파트너로 두시면 어떨까 해서요.”

“흐음….”

“무사히 넘어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험…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좀 충격을 받았을 거 같은데 제 옆에 붙어 있어봤자 당분간 손가락이나 빨 수밖에 없고 이미 빈자리가 하나 있는 상황에서 키이스마저 빠지면 다들 부담이 클 거 아니에요. 수습인 놈을 혼자 두기도 그렇고.”

“그러니 맥스의 임시 파트너로 해서 둘 다 굴려라?”

“네. 뭐니 뭐니 해도 경험이 최고잖아요. 맥스는 저랑 다르게 분석관으로서의 소질도 있으니 잠시라고는 해도 이것저것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맥스는 HRT 에이전트들 중에서도 드물게 컴퓨터 관련으로는 매우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분석팀에 요청을 해서 찾아내야 하는 일을 맥스 혼자 앉은자리에서 처리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번 일가족 참살 사건의 주요 범인인 파인을 찾아낸 것도 그였다. 덩치와 근육은 해병대 최고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람하고 큰데 제 손톱보다도 작은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범인을 추적할 때는 드라마에 나오는 해킹의 천재로 보이는 남자다.

“나쁘지 않군. 두 사람의 의향을 물어보고 결정하지.”

“아뇨. 맥스에게는 물어보셔도 되지만 키이스에게는 그냥 통보하세요.”

“왜?”

“그야―.”

신경원은 그놈이 나한테서 떨어질 것 같지 않아서 그렇죠―라는 말을 하려다 그냥 빙그레 웃었다. 구금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는 영상까지도 모두 기록으로 남지만 바쁜 예들린이 그걸 일일이 챙겨 봤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봤으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제 입으로 키이스가 자신에게 사랑고백을 했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경원은 부디 예들린이 영영 그때의 기록을 들춰보는 일이 없으면 하고 바랐다. LA 지부의 몇몇 사람들에게는 완벽히 뽀록났지만 그 사람들이야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무슨 상관이냐 싶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주세요. 안 그러면 그놈 제멋대로 할 테니까.”

“너보다 더 제멋대로인 놈이 어디 있다고.”

“저한테 배웠나 보죠 뭐.”

신경원은 ‘그딴 거 배우지 말라고 해뒀는데, 나쁜 자식’이라 중얼거리며 제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예들린은 NYPD 측과 상의를 해본 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 자체가 허락이나 다름없었기에 신경원은 기분 좋게 사무실을 나왔다.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와서 상담가 및 치프와 면담을 했는데 끝내고 보니 이미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신경원을 발견한 동료들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몰려들었다. 무엇을 하느라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잠시 자리를 비웠다 사무실로 돌아오던 키이스도 조금 늦긴 했어도 신경원을 향해 달려왔다.

“괜찮냐?”

“많이 다쳤어?”

존과 캐리는 신경원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신경원은 구겨진 체크 남방을 걷어 올리며 팔에 감긴 붕대를 보여줬다. 

“허. 그게 전부야?”

“응.”

그들은 모두 신경원이 마의 24시간을 넘긴 후에야 소식을 전해 받았다. LA에 다녀온 예들린이 뒤늦게 그들에게 통보를 해주었던 것이다. 

“씨발.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걱정을 했더니만!”

“팔이라도 날아간 줄 알았잖아! 정신 차렸으면 얼른 연락을 했어야지!”

“그럴 새가 없었어.”

“사고를 치고 싶으면 여기서 쳐. 왜 그 멀리까지 가서 쳐!”

“안 쳤거든?”

“어쭈. 반항을 해? 그러고 보니 얼굴빛은 좋다?”

“먹고 자고만 했으니 당연하지.”

“이 자식이! 남의 속은 새까맣게 태워놓고 저는 아주 태평하게―,”

걱정한 게 아까웠다며 존이 신경원의 뒤통수를 노리려던 찰나였다.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이 누군가에게 걸려 턱―소리를 내며 허공에 멈추어 섰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부상은 부상입니다.”

딱딱하지만 정중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신경원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키이스가 존의 팔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거 놔라?”

“에이전트 존이 퍼스트의 뒤통수를 두 번 다시 노리지 않겠다면 놓겠습니다.”

그 말에 모여든 에이전트들의 손이 우르르, 신경원에게 쏟아졌다. 반이 아니라 100% 장난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신경원을 노리며 달려드는 손들을 일일이 막아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놓쳐서 신경원의 뺨에 닿은 누군가의 손은 퍼억 소리가 날 정도로 쳐냈다. 

“멀쩡해 보여도 심신이 지친 상태입니다. 장난은 그만하시―,”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겠지만, 어쨌든 너나 그만해라! 쪽팔린다!

신경원은 성질이 나서 키이스의 정강이를 인정사정없이 걷어찼다. 

“윽―!”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비 오는 날 먼지 날 정도로 한번 맞아볼래?”

“아뇨.”

“그럼 적당히 해라.”

“싫은데요.”

키이스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한쪽 뺨을 부풀리고 있는 꼬라지가 완전 다섯 살배기 어린애다. 

“야, 인마!”

“아무리 그러셔도 싫은 건 싫은 겁니다. 앞으로는 무조건 못하게 막을 겁니다.”

“……!”

신경원은 기가 막혔다. 마음을 접으란 소리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나올 줄이야. 

키이스는 부풀렸던 뺨을 원래대로 되돌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께 정식으로 진지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함부로 제 파트너인 퍼스트에게 손을 대, ―흡!”

신경원은 그대로 키이스에게 달려들어 멀쩡한 팔로 헤드록을 걸었다. 손은 목이 아닌 입을 막았지만 어쨌든 헤드록은 헤드록. 키이스는 그 상태로 질질, 사무실을 나와 비상구 쪽으로 끌려갔다. 동료들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지만 신경원은 키이스를 끌고 나가는 데 급급해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죽을―, 으악!”

헤드록을 건 채로 한소리 하려는데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뜨겁고 물컹한 것이 사악 파고든다. 

“뭐하는 거야!”

신경원은 재빨리 팔을 풀고 키이스가 핥아버린 손가락을 탈탈 털었다. 소름은 안 돋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황당했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더 바라는 것 없다며!”

“네.”

“그런데 왜 그래! 다른 녀석들이 날, 아니 우릴 어떻게 보겠냐고!”

“그냥 서로 많~이 친한 파트너로 보겠죠. 어려운 일을 겪은 후 아주 돈독해진 파트너요.”

“…….”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키이스에게서 한 발 떨어지며 뒤로 물러섰다. 어째선지 빙글빙글 웃고 있는 키이스가 조금, 아주 조금 두려워지고 있었다. 

“퍼스트가 제 마음을 받아준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그냥 제가 퍼스트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그래서 저리 걱정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이러면… 무엇보다 선임들에 대한 태도가 너무 건방지고 과하잖아. 너 아직 수습이라고.”

“과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서로 등을 믿고 맡기는 동료라고 해도 그렇게 함부로 남의 뒤통수를 치고 온몸을 만지작거리고 하는 거, 정상 아니에요. 퍼스트도 퍼스틉니다. 머리를 그렇게 쳐대는데 기분 안 나쁘세요?”

“나쁘지 않은 건 아닌데 그건 그냥 이전부터….”

“퍼스트의 나이가 다른 에이전트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린 거 알아요. 그래서 귀여워하는 의미로 그랬다는 것도 대충 짐작 가고요. 하지만 퍼스트도 이젠 서른에 시니어입니다.”

“…….”

“버릇이 된 거라 해도 이 시점에서 한 번쯤 그런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잡아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뭐가 문젭니까.”

“어우―.”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반박이 안 된다. 말했던 그대로 기분은 나쁘지만 동료애로, 혹은 신경원이 아직 불안하던 시절부터 우쭈쭈해주며 시작된 것이라 그냥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두었던 것이니까. 언제가 되든 한 번쯤은 이제 그만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보면 어떨까 생각하던 것이라 더더욱 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치프는… 뭐, 이래저래 퍼스트께 중요한 의미가 있는 분이기도 하니 적당히 참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절대 안 됩니다.”

“네가 무슨 권리로 된다 안 된다를 말해.”

“전 퍼스트의 파트너입니다. 제 파트너가 불의한 폭력에 시달리는 건 더 못 참겠습니다.”

불의한 폭력이라니, 이 자식이 점점 더―,

“전 퍼스트를 좋아합니다.”

“……!”

“유치하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손 한번 대기 힘든데, 다른 사람 손 타는 거 싫습니다. 더더군다나 그게 폭력에 속하는 거라면, 퍼스트가 누구한테 맞는 거, 앞으로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예요.”

신경원은 기도 막히고 어이가 없어 키이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호해 보이는 눈매며 입매가 뭐라고 하든 듣지 않겠다는 태도다. 자고로 말을 들어먹지 않는 어린애…는 아니고 강아지인데, 강아지도 짐승은 짐승. 자고로 짐승이 말을 듣지 않으면 패야 하는 게 법이다.

“너 좀 맞아야겠다.”

“…….”

“맞고 그만할래. 안 맞고 그만할래.”

“맞고 계속하겠습니다.”

“…….”

“아무리 패셔도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으니 체력 보존 차원에서 그냥 두시죠?”

신경원은 방긋 웃는 키이스를 보곤 끄응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은 신경원이 예상했던 게 아니었다. 

“야.”

“…네.”

“제발 적당히 하자.”

“…….”

“나 지금 네 말대로 심신이 피곤한 상태다. 너까지 발발대며 나한테 부담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조심하겠습니다.”

키이스는 절대 그만두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원은 이쯤해서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예민하게 반응을 해봐야 자극만 더 해버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면, 말로 해서 설득할 수 있는 사안이면 얼마든지 말로 하겠다―는 건 신경원의 신조에는 없는 일이다. 말로 해서 통할 상대면 한 마디 하는 걸로 끝나고 그게 안 되는 경우에는 그냥 넘기고 피한다. 누누이 말하지만 신경원은 자잘한 데까지 신경을 쓸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런 자신의 성격이 키이스에게는 되레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일이나 해라. 난 간다.”

신경원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그대로 비상구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키이스는 물론 바래다주겠다며 그를 따라나서려 했으나 근무시간임을 강조해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신경원은 퇴근 아닌 퇴근을 해버렸지만 동료들은 그가 키이스를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을 모두 목격했고 사무실의 유리문이 자동으로 닫히자마자 제각각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클리퍼드 녀석 얼굴 표정 봤냐?”

“조금만 더했다간 진짜로 한 대 치겠더라?”

“어찌나 살벌하게 노려보는지 얼굴에 구멍 뚫리는 줄 알았다니까.”

신경원의 뒤통수를 치려다 실패한 존은 키이스가 잡았던 제 손목을 들어 보이며 투덜거렸다.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던 터라 조금이지만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완전 예의 바르게 굴더니만, 그동안 써왔던 가면을 홀라당 벗어버렸어. 망할 자식.”

“수상해. 저 둘.”

“둘이 아니라 클리퍼드 녀석만 수상한 거지. 지체 없이 정강이를 날려버린 퍼스트의 행동으로 봐서는 완전 일방통행 같은데?”

“아니야. 내가 볼 때는 우리 앞에서 바로 조지지 않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는 점에서 퍼스트가 더 수상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맥스였다.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그지만 복잡한 컴퓨터 워크에도 소질이 있는 그는 다른 의미에서 섬세한 성격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특히 커플을 알아보는 눈치가 아주 빨랐다. 

“내가 아는 퍼스트였다면 끌고 나가지 않고 여기서 족쳐야 정상이라고.”

“아―!”

“그러네?”

“그치?”

“어.”

“LA에서 뭔 일이 있긴 있었나 봐.”

“아무래도 그래 보이지?”

“까닥하면 퍼스트가 골로 갈 상황이었으니, 뭐….”

“아직은 클리퍼드의 일방통행이지만 언젠간 성사된다에 10달러!”

존은 그간 보아왔던 키이스의 언행을 떠올리며 재빨리 커플 성사에 돈을 걸었다.

“아직은 무슨. 퍼스트는 스트레이트라고. 한동안 솔로로 지낸 모양이지만 다들 알잖아. 퍼스트는 여자가 부족한 놈이 아니야. 뭐가 아쉬워서 아무리 잘생긴 놈이라도 남자를 상대하겠어.”

“그건 그렇지.”

캐리는 신경원이 툭하면 차이긴 해도 이상하리만치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원은 뭐라고 해야 할까, 겉은 까칠하지만 속은 물러터진데다 어딘가 모르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구석이 있었다. 

문제는 그게 남자들에게도… 자신에게도 꽤 통한다는 데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닛 전체가 신경원에게 그리 신경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는 신경원과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에겐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도 있고 없다 해도 손이 안 갈 듯하면서도 자주 가는 신경원과 같은 타입, 거기다 남자를 사귈 생각은 전혀 없다.

“난 안 된다는 데 10달러!”

“나도.”

나도나도나도의 향연이 이어졌다. 결국 성사에 10달러를 건 사람은 존과 맥스뿐이었다. 캐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결국 기권했다. 그 뒤 한동안 ‘안 된다’에 돈을 건 사람들이 득세했다. 이후 키이스가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습―때리든 만지든 주물럭거리든―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만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신경원은 바로 옆에 있는 남자와 여자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NYPD의 CCTV 관리 전담 센터를 나왔다. 시간은 오전 8시. 해가 뜨고 나서도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밤새도록 수백 개가 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눈이 꽤 피곤했다. 

그가 NYPD 본부를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오늘로 여드레째였다. 예들린은 신경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찰청과 협상을 했고 NYPD의 높으신 분은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신경원의 출입을 허가했다. 신경원은 LA에서 돌아온 사흘 후부터 아래위로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FBI 신분증과 방문자 출입증을 들고 매일 해질 무렵에 출근해 해가 뜨면 퇴근했다. 

“…옷을 좀 사야겠는데.”

신경원은 며칠 사이 구깃구깃해진 제 슈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슈트라곤 딱 한 벌밖에 없던 그는 현재 자신의 옷과 LA에서 키이스가 사준 슈트를 번갈아 입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단 두 벌로 한 달을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처음에는 신경도 안 썼다. 기관에서야 어떤 옷을 입고 출퇴근을 하든지 아무도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수사를 나갈 때만 슈트를 입으면 되는 터라 여러 벌을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신경원은 원래 가지고 있던 슈트를 입고 셔츠와 넥타이만 바꿔가며 출퇴근을 했다. 그러다 세탁을 한번 맡겨야겠다 싶어 키이스가 사준 슈트를 입고 나왔다. 

그날 신경원은 꿔다놓은 것도 아닌 누가 억지로 맡겨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하고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가 달린 ‘인간’이 되는 기적 아닌 기적을 맛보았다. 하루 3교대로 근무하는 센터의 직원들 중 여자 직원들이 전과는 달리 상당히 부드러운 태도로 그를 대해준 것이다. 귀찮은 파리 취급을 하던 남자들 몇도 고급 슈트를 입고 가니 인간 취급을 해줬다. 

옷 하나로 대우가 달라지니 씁쓸하기 그지없었지만 일에는 도움이 되었다. 무엇을 물어도 반응하지 않던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고 가끔은 요청에 따라 폐쇄회로 모니터의 방향을 신경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주기도 했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커피나 음료수를 가지고 가서 싱긋 웃으며 부탁하면 과거의 데이터를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그간 신경원은 딱 한 건이기는 해도 CCTV 회로에 잡힌 뱀파이어를 발견했다. 발견하자마자 즉시 본부에 보고를 했고 섹션 B의 에이전트들이 출동해 문제의 뱀파이어를 색출, 곧장 사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밤새도록 수백 개가 넘는 화면을 들여다보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계속 할 수는 없겠으나 팔이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지속적으로 살피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꽤 괜찮은 성과를 올릴 수 있겠다 싶었다. 

8일을 다녔으니 앞으로 23일. 뱀파이어를 척살한다는 목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옷이든 뭐든 얼마든지 구입할 의사가 있다. 키이스가 사준 명품 슈트 같은 걸 사는 건 좀 낭비다 싶지만 디자인 자체가 어느 브랜드인지 알아볼 만한 것을 사는 것은 좋을 것 같다. 대략 계산을 마친 신경원은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경찰들에게 일일이 묵례를 해가며 밖으로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신.”

“…….”

신경원은 삐딱한 태도로 저를 기다리고 있던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키이스의 옷차림엔 빈틈이 없다. 게다가 상큼한 미소까지 만면에 가득 띠고 있었다. 평소 7시면 퇴근하는데 아무 연락도 없이 1시간이나 늦게 나왔는데도 짜증 하나 나지 않은 태도다. 

“…네가 이러니 여자들이 난리지.”

“네?”

“네가 계속 여기서 날 기다리니까 너 누구냐고, 소개해달라고 센터 여직원들이 난리다.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으니 오지 마.”

“그걸 왜 상대해주세요. 특기를 발휘하셔야죠. 까칠하게 팍! 생까버리는 거요.”

“…….”

신경원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FBI를 반기지 않는 경찰청의 CCTV 센터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호감을 표해오는 여자들에게 무조건 잘할 필요가 있었다.

하아. 아무라도 좋아 누구든 이놈 좀 제발 잡아가줘.

“많이 피곤하시죠? 날도 쌀쌀한데 식사부터 하러 가요.”

신경원은 대답하지 않고 척척 계단을 내려갔다. 따라오는 놈을 따돌리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손목을 잡아채거나 어깨를 감싸려는 행동으로 신경원의 움직임을 교묘하게 제어해 자신의 차 쪽으로 가게 했다. 알고 있는데도 피하기가 참 애매모호한 스킬이다. 

“타세요. 뭐 먹으러 갈까요?”

“넌 피곤하지도 않냐?”

“그럴 리가요. 신의 얼굴을 볼 생각만 하면 기운이 펄펄 납니다. 오히려 전 신이 더 걱정됩니다. 매일같이 출근하시잖아요.”

“그게 일반적인 거거든?”

“하지만 ‘우리’에겐 일반적이지 않죠. 포인트는 보통 사람들하고 우리가 틀리다는 점이예요. 아, 가만히 계세요. 안전벨트 매드릴게요.”

몰리고 밀려서 MINI에 타긴 했으나 반항 심리에 안전벨트를 매고 있지 않았더니 키이스가 몸을 숙이며 손을 뻗었다. 신경원은 가볍게 그의 손을 걷어내고는 벨트를 맸다. 

“나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없으면 좋겠다고 하면 절 미친놈 취급하시겠죠?”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베트남 음식점은 어떠세요? 요리가 괜찮은 집을 하나 찾았는데.”

“됐고 항상 가던 데로 가. 집에 가면 바로 잘 건데 무슨.”

“그러지 마시고 든든하게 먹어요. 퇴근하고 먹는 저녁이잖아요.”

“내릴까?”

키이스는 ‘절대로 안 되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신경원은 묵묵히 앉아 차창 밖만 바라보았다. 어째 키이스의 페이스대로 끌려가는 것 같은데 No를 외칠 만한 근거가 없다. 자신의 뒤통수를 치거나 머리를 만지려던 행동을 제지한 것 이외에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키이스는 이틀에 한 번, 비번일에만 신경원의 운전수를 자청했다. 만일 그가 제 벤츠와 운전사를 보내 신경원을 출퇴근시키려 했다면 No를 맨하탄의 마천루를 뚫을 기세로 외쳐주고 온몸의 뼈가 똑똑 부러지게 작신작신 밟아줬을 거다. 하지만 키이스는 절대 그런 과한 행동은 않았다. 시간이 있을 때만, 원래 하던 걸 그대로 했다.

식사도 그랬다. 퇴근하는 신경원을 데리러 와서 이전에 갔던 식당 중 하나를 선택하고 가격이 비싼 것일 때만 제가 계산을 했다. 조금 비싸더라도 신경원이 계산을 하려고 하면 말리지 않았다. 전부 다 자신이 내겠다고 우겨주기만 했어도 이런 짓은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놔줬을 텐데 키이스는 기가 막히도록 선을―고백하기 이전에 하던 짓만 하면서―잘 지켰다. 

하지만 어째 조금씩 건방져지고 있단 말이야.

신경원은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키이스를 힐끔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키이스는 정말 잘, 선을 지키고 있지만 정작 신경원은 어느 선을 지켜야 할지, 기준이 되는 선 자체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고백을 받기 전에는 그냥 만나서 밥 먹고 가끔 맥주 한잔 하던 것이 지금은 ‘데이트’에 가깝거나 데이트 그 자체로 다가온다. 자신은 안 그래도 키이스에겐 데이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차에 탈 때 문을 열어주는 것도 이전에는 자신이 잠에 취해 해롱대니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나 에스코트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지 마라. 이건 데이트나 다름없다. 애인끼리나 하는 거라고 말하기엔 괜히 키이스의 언행을 의식하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것 같아서 말하기가 꺼려졌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 힘들다. 차라리 확 선을 넘어와주면 뻥! 하고 차버릴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완전 진퇴양난이다. 

막말로 해서 육체적인 관계만 원하는 거라면, 육욕을 느껴서 그러는 거라면 살다 보면 이런저런 해프닝이 생기는 법이라 생각하며 ‘한번 해보자’라고 말을 건넬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안락한 수면’을 위해 여자를 사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하아―. 진심이라는 게 진짜 문제야. 가볍게 대할 수가 없잖아. 

신경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식사는 집 근처의 베트남 식당에서 했다. 계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신경원이 했고 키이스는 그냥 방글방글 웃고 있다가 점원이 서비스라며 준 베트남 과자를 받아 신경원에게 모두 건넸다. 물론 그녀의 앞에서 그런 게 아니라 집 쪽의, 키이스가 항상 기다리는 자리에서 주었다. 

“너, 나 단거 싫어하는 거 모르냐?”

신경원은 손 안의 과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포장지에 인쇄된 과자에는 굵은 설탕 알갱이가 잔뜩 붙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혀가 오그라들었다. 

“알죠. 드실 때마다 ‘세상에 이런 막돼먹은 단맛이 있다니!’하는 표정으로 오만상을 다 찌푸리시잖아요.”

“그런데 왜 줘?”

“단 커피를 사다드리는 거랑 같은 맥락이에요. 단건 싫어하시지만 ‘뇌’에 주는 사료는 필요로 하시잖아요. 맞죠?”

“…….”

무서운 놈. 별의별 걸 다 파악하고 있었어. 대놓고 ‘사료’라는 단어를 서슴지 않고 입에 담다니. 지나가는 소리로, 그것도 한두 번밖에 말한 적 없는데….

“5시 반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불고기 먹으러 가요.”

쓰읍―. 저 자식이 누굴 불고기 못 먹어서 걸신 든 사람인 줄 아나. 

대답을 안 했더니 예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불고기 싫으세요?”

“…아니, 좋아.”

신경원은 졌다는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손안의 과자는 대충 슈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분명 그걸 보고 뒤에서 웃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언제 필요할지 모를 ‘사료’를 버리긴 아까웠다. 

보통 때면 터덜거리고 걸을 신경원은 오늘은 제법 신경을 써서 걸었다. 슈트에 맞추어 신발도 키이스가 사준 고급 수제화를 신었기 때문이었다. 구두 굽 소리도 안 나게 걸으며 집으로 향하던 그는 주차장 앞에 서 있는 낯익지만 간만에 보는 부부를 발견했다. 아파트 주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네요.”

신경원은 가끔밖에 못 보지만 소유의 아파트를 둘러보러 주인 부부가 자주 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집세가 밀리지 않는 한 절대 세입자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거다. 설마 집세 올린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또 올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이미 한계인데.

“그래요 오랜만이에요, Mr. 신. 잘 지냈어요?”

점잔을 빼고 있는 남편 대신 아내가 신경원의 인사를 받아줬다. 그러자마자 남편 쪽이 무슨 엄숙한 선서라도 하는 사람처럼 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화로 할까 하다가, 사안이 좀 급해서 직접 왔는데 길게 말해봤자 결론은 같으니 짧게 말하지.”

“…….”

“이번 주 내로 집을 비워줬으면 좋겠네.”

“…네?”

“이번 주 내로 집을 비우라고. 그리고 보증금 말인데,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자네가 나가면 이걸 허물어야 해서 말이야. 그래서 보증금을 주기가 힘들어. 그리고 벌금이 나왔는데, 이건 자네가 내줘야겠어.”

집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서류를 꺼내 신경원에게 건네주었다. 신경원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서 받은 서류를 펼쳐보았다. 무슨무슨 법을 어떻게 어겼고 이러저러하니 4만 불을 내라는 고지서였다. 물론 주인집 부부 앞으로 되어 있었다. 

“창고를 주거용으로 쓰는 거야 어차피 불법이고 나가달라고 하시면 못 나갈 건 없습니다만, 왜 제가 이걸 내야 합니까?”

“불법인 거 알면서 살았으니 자네가 내야지.”

“그게 말이 됩니까?”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말이 안 돼. 우리가 살았나? 자네가 살았지.”

집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신경원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입고 있는 것만 해도 몇 천 불은 할 것 같은데 겨우 4만 불 가지고 뭘 그러나. 원래 오늘 내로 처리해야 하는데 내가 사정사정해서 내일까지로 미뤄놓은 거니 깔끔하게 정리해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나가죠. 하지만 이건 못 냅니다. 주차장 창고를 불법으로 개조해서 세를 놓은 게 접니까?”

정말로 4만 불을 받아내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돈이 있으면 이런 곳에서 살 리가 없으니까. 아마도 가지고 있는 현금을 박박 긁어 갈취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봐주는 척하면서. 

“그것밖에 없다고 하니 거기라도 들어와 살겠다고 한 건 자네야!”

귀찮게 간섭하는 주인은 아니나 돈은 좀 밝힌다는 건 알고 있었다. 불법으로 개조한 창고를 주거용으로 세놓으며 말도 안 되는 높은 집세를 제시하고 일년마다 꼬박꼬박 세를 올리던 사람들이다. 그래도 보통의 아파트보다는 훨씬 쌌고 집세만 잘 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았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불법 거주로 제가 고소든 고발이든 당해서 벌금을 직접 내야 하는 거면 내겠지만 이거는 못 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신경원이 손에 든 서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려 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슥 나타나 신경원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채갔다.

“어?”

새하얗고 모양 좋은 손으로 서류를 낚아챈 사람은 다름 아닌 키이스였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고지서를 보더니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러곤 신경원이 말릴 사이도 없이 이렇게 말해버렸다. 

“4만 불이면 되는 겁니까?”

주인 부부를 바라보는 키이스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신경원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서늘하고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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