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9)

9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죽거나 뱀파이어가 된다.】

오래전 뱀파이어의 존재가 확인된 그때부터 역사와 함께 전해져 내려온 불문율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기도 했다. 어디를 물리든, 얼마만큼 물리든, 흡혈을 당했든, 당하지 않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린 사람은 무조건 죽거나 뱀파이어가 되었다. 

그것은 중세 즈음 뱀파이어를 척살하기 위한 조직적인 집단이 만들어지고 발전하여, 보다 근대적이고 보다 조직적인 ‘국가 기관’이 만들어진 근래에 이르기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21세기에 이르자 불변의 진리에 한 마디가 추가되었다.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죽거나 뱀파이어가 된다. 그러나 물린 부위를 신속하고 깨끗하게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목숨을 건질 가능성이 생긴다.】

뱀파이어들의 공격을 받은 희생자 중에는 물린 게 아니라 이빨에 긁히는 정도로 끝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살짝 긁힌 정도로도 뱀파이어가 되거나 죽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물린 부위나 긁힌 부위를 깨끗하게 도려내면 죽거나 뱀파이어가 되지 않고 살아날 일말의 가능성이 생긴다. 

물론 물린 상처가 깊거나 제거할 수 없는 부위인 경우에는 수술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상처를 제거한다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확률은 채 10%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 자체는 확실했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가 발표된 후 기관은 구급키트에 메스와 마취제를 추가하고 모든 에이전트들에게 필수적으로 메스 사용법을 익히게 했다. 그 뒤 연평균 15%에 달하던 에이전트들의 사망률이 10% 초반대로 떨어졌다. 살이나 근육을 도려내거나 과감히 사지를 절단해버린 에이전트들이 현역에서 물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일단 물리거나 긁히면 끝이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뉴욕 지부의 부부장이자 섹션 치프인 예들린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는 6년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에이전트로서 명성을 날렸었다. 

그때 그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최고참 현역 에이전트로서 LA 지부의 섹션 하나를 통째로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나이인 참이라 곧 현역에서 물러나 중간 관리직을 맡게 될 예정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아직 팔팔한 현역이었다. LA에서 발견된 B1급의 뱀파이어와 조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부에 신고가 접수된 것은 밤 11시경이었다. 911으로 가족 전부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마침 비슷한 유형의 ‘일가족 살해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던 터라 지부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인원과 함께 확인차 출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열일곱이나 되는 일가친척들을 죽이고 하나 남은 동생을 물어뜯어 죽이려 하던 뱀파이어와 조우했다. 처음에는 뱀파이어에 물려서 귀가한 후 뱀파이어로 각성하며 ‘사냥’ 욕구에만 눈이 뒤집혀 가족들을 습격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뱀파이어는 이미 완벽하게 각성을 마친 B1급의 블러드서커였다. 

예들린을 비롯한 에이전트들은 그 뱀파이어와 사투를 벌였고 간신히 사살할 수 있었다. B1과의 조우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B1의 무시무시함을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전투였다.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판단된 피해자를 구출하기 위해 무리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출동한 네 명의 에이전트 전부가 중경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때 예들린은 팔과 종아리 근육 일부를 도려냈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던 일인지라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와 비슷한 부상을 입은 에이전트도 살릴 수 있었으며 유일한 생존자의 목숨 또한 구할 수 있었다.

후우―. 

아주 잠깐 옛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여보, 또 나가는 거예요?”

큰 소리에 눈을 뜨곤 전화하는 내내 등을 토닥여주던 아내가 물었다. 스탠드의 불빛을 조금 어둡게 조절한 그는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사고가 좀 생겼어.”

“비 와서 밤새 끙끙 앓았으면서, 오늘 같은 날은 다른 사람에게 좀 맡기면 안 되나요?”

“그러기엔 좀 큰 건이라. 미안해. 가능한 빨리… 아니,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 오늘 내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연락하지.”

예들린은 다시금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추곤 침실을 나왔다. 거실도 침실마냥 캄캄했다.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은 그를 위해 아내가 온 집 안에 암막 커튼을 설치한 탓이다.

커튼 때문에 아이들하고는 꽤 실랑이를 했었는데….

그는 두꺼운 커튼을 걷으며 대학을 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22살과 26살. 한창 젊음을 만끽할 나이고 만끽하고 있는 놈들이다. 그 누군가와는 다르게.

예들린은 핸드폰 메시지 맨 마지막에 떠올라 있는 이름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왜 이리 운이 나쁜 건지.”

신경원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이번이 무려 세 번째다. 수많은 에이전트들을 만나왔고 함께했으며 이제는 지휘하고 관리를 하는 입장인 그다. 개중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운이 좋은 놈들도 많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운이 나쁜 놈들도 많았다. 하지만 에이전트가 된 계기부터 시작해 신경원만큼 운이 나쁜 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신경원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재능을 누군가, 혹은 하늘이 시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유능한 에이전트일수록 부상 확률이 높다.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그만큼 위험한 작전에, 위험한 포지션에 투입되니까. 그리고 신경원은 좀 많이 지나칠 정도로 유능한 에이전트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급히 LA에 가야겠으니 비행기 표를 수배해주게. 그리고 그쪽에서 다른 소식은 더 전해온 것 없나? ……. 뭐라고―?”

순간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은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혈 중인 건 확인했나? 모른다고? 당장― 아니, 내가 하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예들린은 곧장 키이스의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수차례 신호가 가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는 LA 본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했다. 

“안드레아스 치프. 예들린입니다. 네…. 조금 전에 그쪽 상황을 전해 받았는데, 제가 좀 그쪽 지부로 방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예. 제가 무척 아끼는 에이전트인지라…. 아참. 현재 상황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 그렇군요. 아닙니다. 네. 일단은 그냥 두십시오. …아니요. 네. 그러죠. 알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출발할 예정입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친 그는 잠깐, 아주 잠깐 핸드폰을 보며 고민을 하다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 지하에 위치한 기관의 총본부에도 전화를 걸었다. 필요한 통화를 마친 그는 핸드폰을 소파 위에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얌전하게 있어서 안심했더니 정신 나간 새끼 같으니라고!”

예들린은 복잡하게 꼬여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실로 향했다. 

* * *

온몸이 묵직했다. 통증은 안 느껴지는데 뒷덜미가 무겁고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 힘들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묵직한 추를 묶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몸에는 아예 대리석판을 석 장쯤 포개 올려놓은 듯했다. 전부 마약에 가까운 강력한 진통제 때문이다. 

머리도 몽롱했다. 그럼에도 정신은 기가 막힐 정도로 말짱했다. 명백히 수면이 부족한 상태이고 마약성의 진통제 때문에라도 졸려야 하는데 신기할 정도로 졸음의 ㅈ자도 찾아오지 않는다. 키이스에게 말한 그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 남은 시간은 22시간 41분. 평소에는 어떻게 지나가는지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훌쩍 지나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 하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견디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수면제를 맞고 잠들어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수면제로 인한 잠은 자는 게 아니라 의식만을 끊어내 숨도 쉴 수 없는 진흙탕에 처박는 것 같아서 이런 상황에 처했음에도 맞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22시간 41분이 자신의 생에 남아 있는 시간의 전부인 상황이라면 절대 약물에 의지해 의식을 끊어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약에 전 채로 끝내고 싶진 않다. 

그래, 이래서 지난번에도, 결국 단 10분도 눈을 감지 못하고 삶과 죽음과 죽음보다도 못한 세 개의 길 앞에 강제로 묶인 채 미친 듯이 괴로워하며 지옥과 같은 시간을 버텨내야 했었다.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울부짖고 때로는 흐느끼면서.

그건 기관의 에이전트가 되고 2년차 막바지 즈음, 일어났던 일이었다. 얼치기 신입 파트너가 확인 사살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뱀파이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덤비는 바람에 무작정 단검을 휘두르다 좀 다쳤었다. 이빨에 긁힌 건 아니었다. 손톱에 긁혀 허벅지에 작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에 날려버린 뱀파이어의 팔에서 튄 피가 스며들었었다. 

성질이 나서 파트너의 뒤통수를 날려버리고 메스를 꺼내 마취도 안 하고 허벅지 살을 포 뜨듯 도려냈었다. 상처 자체가 깊지 않았고 허벅지라서 부담도 없었다. 그 뒤의 24시간이 좀… 아니, 꽤 많이 힘들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24시간이 지나 죽지도 않고 뱀파이어가 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떠오른다. 기관에 들어오며 의무적으로 작성했던 유언장을 새로 고쳐 쓰는 거였다. 

작전 중 사망하는 경우 보유 중인 현금과 신탁 계좌, 보험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산은 두 사촌 동생에게 남긴다. 사촌 동생들에게는 사망원인을 과로로 인한 돌연사 내지는 심장마비로 알린다. 매장하지 않고 화장하고 납골 여부만 동생들의 의사를 따른다. 

동생들의 법적인 후견인은 로버트 예들린으로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될 때까지는 신탁은 물론이요 유산으로 받게 될 모든 재산은 후견인의 허락이 없으면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성인이 된 후에도 신탁만큼은 학자금이나 그에 준하는 명목이 아니면 손댈 수 없다. 

짧다 못해 썰렁하기 그지없는 유언장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제정신을 유지한 채로 서는 일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걸 겪고 나니 구질구질하게 부여잡고 있던 미련들이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다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구구절절한 설명과 문장은 전부 삭제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겼다. 두 동생 앞으로 쓴 장문의 편지도 제 손으로 찢어버렸다. 삶을 되찾기는 했으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경에 발을 담그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감상적인 내용의 편지가 모조리 가식적으로 여겨졌다. 그런 걸 남겨봤자 두 아이의 가슴만 아프게 후벼 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니 슬금슬금 마음이 바뀐다. 

혹 이번에도 운 좋게 목숨을 건진다면 다시 바꾸어야겠다. 자신이 사라져도 조금이라도 덜 당황하도록, 조금이라도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길고 긴 문장을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아, 젠장. 그냥 큰마음 먹고 확 잘라낼걸. 왼팔도 아니고 오른팔이라 근육 좀 깊이 잘라 파낸다고 해도 별 문제없을 텐데.

신경원은 왼손잡이지만 양손잡이이기도 했다. 글씨는 왼손으로 쓰고 밥은 오른손으로 먹는다. 메스는 왼손으로 잡는 편이 좋지만 사격은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명중률의 차이가 거의 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양손을 써왔기 때문이다. 

왼손잡이가 득실거리는 미국 땅에 살면서도 한국에서 살다 이민을 온 할아버지는 왼손잡이는 재수가 없다며 오른손을 쓸 것을 강요했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으면 당장 밥그릇이나 국그릇이 날아왔었다. 

역시 더 도려낼걸, 그랬으면 설사 에이전트로서의 생명이 끝나더라도….

신경원은 머리를 들어 피가 잔뜩 맺혀 있는 상처를 힐끔 보곤 다시 털썩,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때 키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아프십니까? 진통제를 더 놔달라고 할까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진통제는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다. 이마와 목덜미에서만 흐르던 식은땀이 이제는 몸 전체에서 솟고 있다. 통증이 꽤 심하다는 의미다. 

지금의 상황이 마치 시시때때로, 혹은 거의 매일 찾아오는 불면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몸은 스트레스를 받아 수면을 거부하고 바싹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며 전전긍긍하곤 하니까. 

“퍼스트, 그냥 진통제를 더 맞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안 했더니 누가 키이스 클리퍼드 아니랄까 봐 또 묻는다. 초조함이 묻어나는 말투는 둘째치더라도 대답을 할 때까지 물어올 기세다.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지난번엔 얼치기 신입 파트너 대신 예들린이 그 바쁜 일정 속에 짬을 내어 곁을 몇 시간 지켜줬었다. 함께 작전에 나갔던 캐리와 존, 맥스도 잠시나마 와줬다. 첫 파트너였던 알렌도 와줬었다. 그는 제일 오래 머물러줬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24시간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주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좀 섭섭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줄 진정한 파트너를 원했던 모양이다.

“키이스.”

“네.”

“내가 맞은 거 마약성 진통제니까 더 이상 아프냐고 묻지 마. 대답하기도 귀찮다.”

“…네.”

“그보다 너, 좀 떨어져 앉아. B1에게 당했으니 내가 뱀파이어가 되는 경우 최소 B2가 될 거야. 바싹 붙어 있는 건 위험해. 이래 봬도 자타공인 뉴욕 지부의 베테랑이야. 이런 내가 뱀파이어가 되면 순간 공격 범위가 2…, 아니, 최소 3미터는 될 거다. 그러니 멀리 떨어져 앉아. 싫다고 하지 마.”

차분하게 말했더니 대답은 없었지만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림짐작해 대략 3미터. 정말 딱, 말한 대로만 움직인다. 

그래. 그래야 내 착한 강아지지.

순간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그냥 강아지도 아니고 ‘내 강아지’라니.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고 제정신이 가출이라도 한 모양이다. 아니, 기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말짱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죽느냐 사느냐, 뱀파이어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 제정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신경원이 지금 이렇게 얌전히 누워 있는 이유는 별것 아니다. 첫 경험도 아니고 이런 엿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게 세 번째나 되다 보니 나름 익숙해져버렸고 난리발광 지랄 블루스를 춰봐야 괜한 체력낭비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그리고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죽도록 쪽팔렸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와, 진짜. 완전 개 좆같네.

얌전히 있지만, 날뛰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100번 낫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벌떡 일어나 발광하고 싶다. 좀 더 살고 싶다고, 더 오래 목숨을 부지하며 뱀파이어들을 죽이고 싶다고. 지금 죽을 수는 없다고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날뛰고 싶다. 그렇게 해서 살 가망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면, 정말로 사생결단을 하며 날뛸 거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기에 그냥 가만히 있을 뿐. 경험이 있다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키이스.”

“네?”

“이런 경험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토하고 싶을 만큼 속이 뒤집히고, 화가 아니라 분노로 인해 눈앞이 흐려질 지경이건만 신경원의 목소리는 여상하기 그지없다. 세 번째라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평온한 말투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고 있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고 괴상하게 여겨진다. 그럼에도 목소리를 높일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점이,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이상했다. 

이렇게 이상한 놈을 도대체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거람?

애써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머리의 반은 키이스가 한 갑작스러운 고백에 잠식되어 있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언제부터 좋아하기 시작한 걸까. 언제 반한 걸까. 

신경원은 키이스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음. 그때는 아닌 것 같다. 통성명은커녕 말을 걸어와도 대답도 제대로 안 했고 악수도 거절했다. 그거로도 모자라 중요한 마지막 테스트에서 아주 꼴사납게 쓰러트리고 말았었다. 그러자 눈빛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따라와서 이름을 물었었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라는 느낌이었다.

파트너로서 처음 대면했을 때도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키이스의 태도는 무척이나 예의 발랐지만 눈빛이 반항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무척이나 도전적이었다. 자신을 파트너라기보다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는 목표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에도 좀 그런 면이 이래저래 많이 보였었다. 

초반의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최근의 기억부터 더듬어 올라가보기로 했다. 길게 더듬어볼 것도 없이 바로 낮의 일이 생각났다. 키이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에 변호사는 물론이요 가족까지 동원해 신경원의 일을, 정확하게는 해원이의 일을 도와준 것을 말이다.

아무리 파트너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상태라고 해도 보통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재벌가 아들이라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대답은 No―다. 

신경원은 하루 이틀씩 거슬러 올라가며 키이스가 자신에게 해준 일을 떠올려보았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일들이, 기억에 남아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이 잘도 떠올랐다. 정말 별것 아닌 일들까지 소록소록 떠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나하나 떠올려 기억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 올릴 때마다 ‘파트너’이기 때문에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일과 그 범주 안에 넣기엔 무리가 있는 일들이 정확하게 분류되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신경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일이 별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순간부터다. 

큰 차가 싫다고 했더니 몰고 온 ‘작은’ 스포츠카와 엔진 소리가 커서 싫다고 했더니 사버린 작은 차까지는 일단 제쳐두자. 무려 클리세딕 그룹 오너의 아들인데 그깟 차 한 대쯤 껌 값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왜 그랬을지 모를 정도로 빈번하게, 그것도 비번일에 만나 맛집을 찾아 고기를 먹고 차도 마시고 가끔 맥주도 마시며 시시덕거렸던 것만큼은 빼도 박도 못 하게―.

데이트잖아….

다른 사람의 예를 들 것도 없다. 초여름부터 바빠서 클럽이든 술집이든 여자를 꼬시러 나갈 여유가 없어 본의 아니게 솔로 생활을 해온 신경원이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만 해도 신경원은 여자를 사귈 때마다 비번일에 나가 같이 고기도 먹고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하며 데이트를 했었다. 키이스와는 영화를 본 적이 없지만 그걸 빼면 죄다 여자랑‘만’ 하던 짓이다. 동료와도 할 수 있는 일이긴 한데 동료와 나눈 ‘친교’라고 규정짓기에는 너무 많이 먹으러 다녔고 너무 많이 얻어먹었고 차도 너무 많이 얻어 탔다. 지금 생각해보나 키이스의 태도는 ‘에스코트’에 가까웠던 적이 너무 많았다.

“골고루 환장하겠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런 신경원의 귀에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가까이 오지 마.”

“…네.”

쯧―. 신경원은 혀를 찼다.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지만 다시 의자에 앉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앉으라고, 옆에 올 생각은 추호에도 하지 말라고 다시 강하게 경고를 해야 하나 하며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는 찰나였다. 발치 쪽의 벽에 걸려 있어 저도 모르게 계속 시선을 주게 되는 시계가,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숫자가 보였다.

“하―.”

입에서 웃음소리라고 불러주긴 민망한 바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내 소리 없는 웃음이 되어 신경원의 입안을 맴돌았다. 미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던 분침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마냥 원래 있던 자리의 반대편에 가까운 곳에 가 있다. 

도대체 남은 시간을 무엇을 하며 버텨야 할지 깜깜했건만, 키이스가 언제부터 자신을 좋아한 건지, 언제 반했는지 따져보는 사이 무려 20여 분이 넘는 시간이 온데 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생판 모르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갑자기 길거리에서 달려들어 키스를 하고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정신을 팔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상대가 남자다 보니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자신을 대해왔다는 것은 물론이요 이런 때에 그런 고백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에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시간이 멋대로 흘러가버린 것을 포함해 지금 처해 있는 암울한 상황까지 잠시 잠깐 잊을 정도로 말이다. 

이걸 고백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런 것을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까지 전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으니 시간이 잘 간다. 참 시기 적절하게, 잘도 고백해줬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거야말로 제일 정신 나간 말이 될 테지만 정말로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고 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키이스.”

“네.”

“내가 여자로 보이냐?”

“아니요. 누가 퍼스트를 여자로 봅니까.”

그래. 못 보지. 아니, 안 보지. 그건 불가능하다고.

키이스보다 13센티 작긴 하지만 신경원의 키는 비슷한 나이대 남자의 평균 신장보다는 크다. 어깨도 키이스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기관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은 뒤 밤낮없이 몸을 단련해서 온몸에 근육이 덮여 있다. 게다가 초기라면 몰라도 지금은 몸에 말랑한 살점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껏해야 엉덩이 정도가 다다. 자신이 생각해도 제 엉덩이는 작긴 해도 꽤 탄탄했고 멋으로 운동을 한 건 아니지만 힙 업도 제대로 되어 있다. 

작고 탄탄…. 씨발, 지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설마….

………….

……………엉덩이가 문제였나.

“…너 게이냐?”

“아니었습니다.”

명백한 과거형의 말에 가뜩이나 무거운 몸이 더 무거워졌다. 멀쩡한 남의 집 아들을 게이로 만들어버린 책임을 지게 될까 봐 살이 떨린다. 

“망할 자식. 날 좋아하게 돼서 게이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라는 거야?”

“네. 그런 것 같습, 아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퍼스트.”

한숨 소리인지 단순한 숨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한숨이라기보다는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그냥… 어느 순간부턴가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신경원은 잠자코 키이스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상관없었다. 기왕이면 아까처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바늘이 뱅글뱅글 돌아서 다른 곳에 가 있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그냥… 퍼스트한테 한 방에 당한 게 억울해서, 제대로 한번 갚아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뉴욕에 와 있었고….”

키이스의 말투는 느렸다. 마치 스스로를 향해 사후 확인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키이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입에서 나온 고백에 스스로 놀라 당황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퍼스트는 파트너 취급도 안 해주시고… 맨날 사무실에서 졸기만 하고 그래서 괜히 뉴욕으로 왔나 싶었는데….”

“…….”

“어느 순간부터 퍼스트만 바라보게 된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긴다. 젖어드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말라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병신처럼 그걸 빨리 자각하질 못했어요. 퍼스트에게… 퍼스트가 질문을 해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여왕님이 애인이냐고 물어놓고도…, 바로 몇 시간 전인데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했어요. 왜 그런 걸 물은 거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고도, 제대로 된 해답을 찾지 못했었어요. 결론은 그 이전에 이미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는데….”

어째선지 또다시 고백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의 것이 두 개의 단어로 요약된 고백이라면 지금 듣고 있는 것은 문장으로 된, 장문의 러브레터를 읽어대는 걸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건데?”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곧 질문을 던지는 대신 화제를 완전히 전환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전부요.”

“……!”

“까칠하고 무심해 보이는데 겉으로만 그럴 뿐 속은 보기보다 여린 게 좋고.”

착각이다. 오해다. 전혀 여리지 않다. 말도 안 된다. 그런 되도 않는 소리를 누구한테 가져다 붙이는 거야!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면서도 일단 하기로 한 건 몸을 축내면서까지 열성적으로, 정성껏 가르쳐주는 것도 좋았고.”

미안하지만 정성껏 가르친 기억은 없다. 그냥, 자신의 기준에서 이만큼은 해야 한다―라고 생각한 걸 무식하게 밀어붙인 거다. 다른 사람은 다 포기하는데 키이스만 끝까지 잡고 늘어졌을 뿐이고.

“아닌 척하면서도 제 기분을 헤아려서 이것저것 시켜서, 정신 못 차리게 하고 필요하다면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게 해준 것도 좋고.”

“…….”

“보기보다 몸무게가 가볍다는 것도 좋아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안아 올릴 수 있었으니까요.”

망할 놈. 남의 콤플렉스를…!

“낯을 가려서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하다가도 기절해서 잠들면 마구 만져대도 모르는 것도 좋고.”

“……!”

“어지간해선 칭찬 한 마디 안 해주다가 부지불식간에 툭 하고 한 마디 던져주는 것도 좋고.”

안 되겠다. 더 이상은 들어주기가 힘들다. 신경원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그의 연이은 ‘좋고’ 시리즈를 잘라버렸다. 

“됐다. 그만해.”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됐다니까. 이제 그만해.”

“그럼 싫은 걸 말해볼까요? 싫은 것도 굉장히 많습니다.”

귀가 쫑긋했다. 전부 다 좋다면서 싫은 것도 많단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는 걸 지적하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싫은 걸 읊게 만들면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을 무위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봐.”

“제일 먼저 에이전트 존이랑 너무 친한 게 싫어요.”

“…뭐?”

“존은 툭하면 저한테 퍼스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거든요. 이러는 게 좋다 저러는 게 좋다. 퍼스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가능한 소리인데 그런 걸 알게 될 정도로 그분이랑 친한 게 싫다고요.”

“…….”

“다른 분들하고도 친밀하게 허물없이 지내는 것도 싫지만 에이전트 존과 더 각별하게 지내시는 것 같아서 싫어요.”

“야, 인마.”

“저는 손 한 번 잡기 힘들게 피하시면서 그분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만지게 하고 터치하게 하고 기대서 자기도 하고 머리 쓰다듬어도 그냥 두고…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많이 있지만 어쨌든 스킨십을 너무 허물없이 하는 게 정말, 굉장히, 아주 많이 싫었어요.”

“…….”

“저랑은 일 관련 이야기 말고는 어지간해서는 길게 이야기 안 하시면서 그분들하고는 농담도 하고 말싸움도 잘하고 그러시는 것도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싫었고요. 또….”

키이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죄다 싫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신경원의 얼굴은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저한테는 거리 이름밖에 안 가르쳐주셨는데 그분들 전부 퍼스트의 집 주소 제대로 알고 있죠? 그것도 싫어요. 아십니까? 그런 사소한 걸로도 질투심이 생길 수 있다는 거. 그때는 그냥 왜 저한테는 안 가르쳐주는 걸까 싶어 속이 답답했는데, 그게 질투였나 봐요.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니까.”

키이스의 입에서는 이제 질투심이 타오르던 순간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지쳤음에도 신경원이 제 부축은 의식적으로 피하고 터덜터덜거리고 걸어가 자연스럽게 맥스의 옆에 앉고 맥스에게 기대 잠들었던 때. 그는 알 수 없는 모르는 이야기들을 신경원이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했을 때. 장난인지 싸움인지 모를 투닥거림을 나누고 있을 때. 동료들이 물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주면서 그의 질문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을 때 등등. 

키이스는 신경원이 기가 차서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줄줄, 잘도 기억하고 있다 싶을 정도로 ‘싫었던 때’와 ‘질투심이 타오르던 때’를 읊어댔다. 그러더니 곧 질투심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제 눈앞에서는, 가능하다면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어이. 키이스 클리퍼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하면 제 어깨에 기대시면 좋겠어요. 다리를 베고 자고 싶으면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제 다리를 베시면 좋겠고….” 

들으면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신경원은 고집스럽게 천장과 벽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키이스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놈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웃음 기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잘 웃는 놈이지만 지금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웃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긴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상황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진심임을 주장하기 위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저랑 하시고 싸우고 싶어도 저랑 싸우고.”

시선이 마주치면 안면이 팔려서라도 그만하지 않을까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파란 눈동자를 위협적이게 빛내며 말을 이어간다.

“가능하면 안 싸우면 좋겠지만 싸울 상대가 필요하시면 저를 선택해주시면 좋겠다는 거죠. 다른 사람하고 감정 부대끼는 거 안 했으면 하니까.”

저건 어떻게 들어도, 이리 깎고 저리 깎아보아도 그냥 독점욕 그 자체다. 게다가 완전 유치하다. 마치 대여섯 살 먹은 어린애 같다.

“퍼스트,” 

“…….”

“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간절하게요.”

“야.”

“제가 퍼스트의 파트너가 된 뒤로 여자 사귀신 적 없죠? 저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바쁘셔서 그랬던 거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예 여자한텐 눈길도 안 주시면 더 좋고요. 그냥 저만…,”

“…….”

“저만 보시면 좋겠어요,”

“키이스.”

“…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어?”

“…….”

“답을 바라고 고백한 거 아니라고 말한 주제에. 게다가 어린애도 아닌데 무슨 그런 유치한 소리를 해대는 거야.”

“유치하면 안 됩니까?”

“Stop. 이제 그만해. 멈춰.”

“싫습니다. 그냥 말하게 해주세요. 지금 말하지 않으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수도….”

“…….”

“그렇게 되면 저는….”

“씨발―.”

저런 멍청한 개새끼를 봤나. 

저걸 팰까 말까. 신경원은 맹렬히 갈등했다. 키이스가 한 말도 말이지만 둑이 터진 것처럼 콸콸 쏟아지는 감정 어린 말들에 정줄을 놓고 있는 찰나에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한 방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버렸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암울한 자리로 말이다.

몸만 멀쩡했으면 그냥 죽기 직전까지 팼을 텐데.

신경원은 끄응 소리를 내며 다시 제 얼굴을 손으로 덮어버렸다. 

“지금부터 내가 뭐라고 하기 전까지는 한 마디도 하지 마. 뭐든 입 벙긋이라도 하면 사람 불러서 끌어내라고 할 거다.”

네―라는 답 대신 침묵이 돌아왔다. 침묵으로 인해 곧장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지만 신경원은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다시 화가 났다가 푸시식 식어버린다. 감정이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날뛰며 널을 뛴다.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에 표류하는 기분도 들었다. 힘이 빠져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꼬르륵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찰나에 파도에 밀려 위로 올라와 물을 토해내고 질긴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헐떡이는데 다시 휩쓸려 물속으로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그냥도 정줄을 놓기 쉬운 상태인데 키이스란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거로도 모자라 안정을 찾지 못하게 마구 뒤흔들어댄다. 

그러기를 한참, 신경원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로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키이스. 네가 볼 때는 내가 안정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난 제정신이 아니야.”

“…….”

“너도 제정신일 수가 없고.”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의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어쩌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단 하루,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일하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평정을 잃고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신경원은 그런 경험이 있었다. 

“네가 진심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사람은 당황하고 궁지에 몰리면 엉뚱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기 쉬워. 어쩌면 너는 내게 품은 호의의 방향을 착각하고….”

“아닙니다!”

“닥치고 들어.”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퍼스트 말대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것은 맞아요. 하지만 착각은 절대 아닙니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갑자기 자각하고 고백까지 한 건 맞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반드시 그렇게 됐을 겁니다. 자각도 못한 상태로도 그렇게 퍼스트를 쫓아 다녔고 오직 퍼스트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말과 말 사이에 거친 숨이 섞여 있다.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하고 뭔가를 힘겹게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참기 위해, 혹은 내뱉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하는 그런 소리였다.

“퍼스트를 만난 이후로 저는 즐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함께하는 게 정말 좋았어요. 긴 시간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보다 더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은 없었습니다. 저는 퍼스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퍼스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요. 그러니 아무 일 없었더라도 금세, 금방 깨달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시간에 쫓겨서 무작정 고백하는 대신 좀 더… 제대로…….”

신경원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키이스의 말이 맞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키이스의 태도에 대해 들은 것도 있고 기억을 돌이켜본 결과 늦든 빠르든 키이스는 언젠가 제 마음을 고백하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됐어.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하자.”

신경원은 키이스의 말을 잘라버렸다.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너는 착각하고 있다’는 말을 좀 더 길게, 설득력 있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서 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결론은 같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선의의 거짓말이 나올 수도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건 선의의 거짓말로 하기엔 힘들지 않을까?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러니 키이스의 말은 진심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막혔던 둑이 터진 듯 무모하게 쏟아낸 감정 어린 말도 전부 진심일 것이다.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할 정도로 단순했고 가감이 없는 말이기에 더더욱 어설픈 감정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

……진심이라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전한 것이라면 뭐든 대답을 해줘야겠지.

처음처럼, 혹은 두 번째처럼 운 좋게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야 감정이 널을 뛰는 지금 굳이 답을 하기 위해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릴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답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밖에 없다. 

24시간을 채울 때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러나 1분 뒤, 혹은 1초 뒤 갑자기 숨이 멎거나 뱀파이어에로의 각성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곧바로 답을 해주어야 한다. 

진심을 부딪쳐 왔으니 이쪽에서도 성심성의껏 진심으로 답해야 한다. 그것이 예의다.

자. 그럼 얼른 생각해봐, 신경원. 무엇부터 어떻게 이야기할지.

신경원은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하얀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문득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 * *

대도시에 위치한 기관의 지부는 무조건적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뉴욕 지부처럼 아예 일반 회사로 위장해 고층 빌딩 하나를 전부 차지하는 경우도 있고 밖에서 보면 몇 층 안 되는 작은 건물로 보여도 실제로는 지하에 굉장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LA 지부의 건물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 빌딩숲이 있는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탓에 건물 자체는 컸지만 위로는 기껏해야 7층밖에 없었다. 대신 주차장 아래쪽으로 깊숙이 땅을 파고 들어가 주요한 시설은 대부분 지하에 있었다. 

하지만 뉴욕이나 LA 그리고 기타 모든 지부에 공통적으로 반드시 건물 제일 위층에 설치되는 시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신경원이 갇혀 있는 구금실이다. 

영화나 소설 속의 뱀파이어는 햇빛이 닿으면 재가 되며 죽고 십자가를 무서워하고 마늘에도 약하다. 그러나 현실 속의 뱀파이어는 마늘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십자가에도 별반 반응이 없다. 

현실에 존재하는 뱀파이어를 한줌의 재로, 연기로 화하게 하는 것은 모두 세 가지다. 하나는 HRT들에게만 사용이 허가되어 있는 특수한 탄환이다. 속에는 가톨릭교회의 추기경들이 성호를 그어 만든 ‘성수’가 채워져 있는데 대량 생산이 불가한 어떤 특수한 물질이 첨가되어 있다. 

두 번째는 그 성수를 이용해 특수한 방법으로 제련한 은으로 코팅한 단검이다. 코팅한 은이 벗겨져 나가지만 않는다면 소모품인 탄환과는 달리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 목이나 심장을 찌르기 전에는 뱀파이어를 완전히 재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바로 태양이다. 소설 속의 뱀파이어가 그렇듯 현실의 뱀파이어도 햇빛에만큼은 맥을 못 추고 닿는 즉시 연기와 재가 되어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구금실은 모든 기관 건물의 최상층에 설치되며 최소 1면의 벽을 빛을 그대로 투과하는 특수한 유리로 만든다. 구금된 사람이 뱀파이어로 각성했을 때 바로 처치하지 못할 경우 햇살을 마지막 무기로 쓰기 위해서다. 

현재 신경원이 갇혀 있는 구금실은 LA 지부 본부 최상층, 동남쪽 구석에 위치해 있었는데 동쪽과 남쪽, 두 곳의 벽 반이 유리로 되어 있었고 커튼이 쳐 있었다. 키이스는 지금 그 커튼을 잡고 망설이고 있었다.

“빨리 걷어.”

신경원의 차분하고 여상한 목소리가 키이스의 귀에 들려왔다. 

“아직 해 안 떴는데요.”

“상관없어. 걷어.”

명령조나 다름없는 단호한 말에 키이스는 어쩔 수 없이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커튼을 천천히 걷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인지 새벽의 밤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커튼을 걷으라고 한 장본인은 창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구금실에 들어온 뒤 가능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신경원은 단 한 번도 창가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시계에만 가끔 시선을 줄 뿐 거의 천장만 봤다. 두 번 정도 자신을 보긴 했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야속하게도.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야속하기 그지없다. 이유야 이해하고 납득하긴 했지만 그래도 바로 곁에 있고 싶다. 옆에서 손이라도 잡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원래의 자리, 신경원에게서 대략 3미터 거리에 놓아둔 의자로 돌아온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속에서 뭔가 자꾸 북받쳐 올라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당사자가 너무나 평온해보일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했기 때문이다. 

부상을 당하고 제 상처를 제 손으로 직접 도려내는 와중에도, 거의 연행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끌려올 때도, 끌려와서 이곳에 구금될 때도, 그 이후에도 신경원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순응했다. 

그것만으로도 신경원의 멘탈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간형의 괴물을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튼튼한 신경줄을 가지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나 어쨌든 신경원이 상상 이상으로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음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럴 일은 절대 없지만 만일 자신이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절대 저런 식으로 반응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울고 싶은데 울지도 못하고 절박하디 절박한 기분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심정은 뭐라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보고 있는 자신도 그런데 언제 죽을지, 언제 뱀파이어가 될지 모르는 신경원은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키이스는 지금 신경원이 저렇게 얌전히 있는 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무리 경험이 있다고 해도, 이런 일에는 절대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런 행동은 이미 모든 걸 포기했다는 반증이니까. 하지만 왜 포기하느냐고, 좀 더 노력하고 매달려보라고 의지를 굳건히 하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이 경우만큼은 노력이나 의지가 결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알고 싶은데, 짐작조차 못 하겠다고. 그래서 미칠 것 같아. 

“키이스. 배고프면 가서 뭔가 먹고 와. 그 사이에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혹시 그사이에 뱀파이어가 되면 들어오지 말고 밖에 있어. 커튼을 열어둔 이상 해가 뜨면 알아서 죽을 테니.”

그래.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가.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식사를 하고 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나는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1분 1초가 아깝고 아쉬워서 미치겠는데.

“퍼스트. 그런 말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빈말로라도 알았다고 해주면 좋겠는데, 신경원은 그러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니 알겠다는 소리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먹어도 속에서 안 받을 거 같고요.”

“그럼 저 이온 음료라도 마셔. 난 안 마실 거니까.”

키이스는 신경원이 시키는 대로 조혈제 옆에 잔뜩 놓여 있는 이온 음료를 하나 가져와 메마른 목을 축였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속이 타서 입술이 바싹 바싹 마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온 음료는 절대로 안 마신다고 하셨죠.”

“이런 일을 두 번쯤 당하고 나면 너도 그렇게 될지 몰라. 꼭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다쳐서 피가 날 때마다 조혈제 맞고 전해질 보충한답시고 미지근한 이온 음료를 계속 마셔야 한다고 생각해봐. 완전 질려버리지. 씨발, 생각만 해도 올라오려고 그러네.”

“잠깐, 두 번이라뇨. 한 번…이 아니었습니까?”

“에이전트가 되고 난 후 한 번. 그전에 한 번. 난 처음이 아니라고만 했지 한 번이라고 한 적은 없어.”

“……!”

키이스는 기가 막혀서 입을 쩍 벌렸다. 얌전해도 너무 얌전한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설마 두 번이나 이런 일을 겪었을 줄이야. 신경원이 가차 없이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때보다 훨씬 더 머리가 띵했다. 

“어제 말했던 거 기억해? 가족 전부가 뱀파이어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

“네, 물론….”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 기대었던 등을 떼고 조금이라도 신경원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앞쪽으로 당겨 앉았다. 신경원이 뭔가 길게 이야기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아―. 그게 말이지. 범인이 누군지 대충 짐작 가겠지만,”

“가족… 중 어느 분이셨으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맞아. 내가 3남 1녀에 셋째인데. 범인은 내 바로 위의 작은형…이었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신경원은 오래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이민을 와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친척들끼리 굉장히 친하게 지냈어. 할아버지 생신이 되면 아버지 형제는 물론이고 친척에 사돈들까지 다 모여서 축하하고 파티도 하고 그랬거든. 어차피 다 근처에 살기도 해서 한 달에 한 번 누군가의 생일이면 생일을 구실로 모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모여서 놀고는 했어. 그날은 특히 할아버지 80세 생일인지라 나도 인턴생활로 밤낮없이, 지금보다 더 바빴는데 특별히 휴가를 받아서 가기로 했었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그려졌다. 이민자들 특유의 단단한 결속력을 자랑하는 그런 집이었으리라. 형제자매뿐 아니라 배우자의 가족까지 전부 일족이 되는 그런 대가족 말이다. 

“작은형은 우리 형제 중에서는 제일 먼저 독립했어. 정확한 이유는 몰라. 짐작하기에는… 나 때문이지 않을까 싶긴 해. 나는 지나치게 머리가 좋았고 작은형은 정말 평범했거든. 하지만 굉장히 착했어. 4살이나 어린 내가 자기랑 같은 학년이 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걸 훌쩍 뛰어넘고 그거로도 모자라 어린 나이에 대학을 가게 되었어도 축하만 해줬지 시기나 질투어린 말 한 마디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집을 나가버렸어. 그 뒤로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고.”

신경원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말을 멈췄다. 그리곤 다음부터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난 신경도 안 썼어.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한 번 제대로 안 했고. 그 나이에 독립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처럼 작은형도 작은형 인생을 살려 하는 거라고, 그게 작은형의 선택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

“비행기를 타기 전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작은형도 왔으면 좋겠는데 못 온다고 했다고 섭섭해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한 번 전화를 걸어보겠다고 하고 바로 연락했어. 멀리 있는 나도 가는데 왜 가까운 데 사는 형이 안 가냐고, 다른 날도 아니고 할아버지 80세 생신인데, 다른 때보다 더 의미 있는 날인데 왜 안 오냐고. 세상 너 혼자 사는 거냐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한소리 했지.”

“…….”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어. 불은 환하게 켜 있는데, 식구들이 잔뜩 모여 있을 텐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응급실이나 수술실에서나 맡을 수 있는 피 냄새가 문가에까지 진동을 했지. 심상치 않다 싶어 바로 911에 신고를 하고 그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안에 들어갔었어.”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보는 순간 가족들 전부 숨이 끊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런데도 의사 나부랭이라고, 혹시 누군가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다가갔어. 유일하게 몸에 상처가 얼마 없어 보이는 작은… 형한테.”

하―, 하고 신경원의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목을 짚어보니 맥이 안 느껴졌어. 그런데 눈을 뜨고 웃으며 말하더라. 기다렸다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내가 전화해서 기억이 나서 왔다고, 나를 기다렸다고.”

차분한 목소리였음에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심장에서부터 사지말단까지 한기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가족을 죽인 문제의 ‘작은형’이 어떤 등급의 뱀파이어였는지 짐작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부 나 때문에 죽었어. 내가 멍청하게 전화를 해서, …다 죽었―. 씨발. 내 말이 아직도 똥으로 들려? 앉아!”

신경원이 구금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깊은 회한이 어린 목소리에 키이스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키이스는 신경원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앉아.”

“퍼스트….”

“계속 듣고 싶으면 앉아.”

작은 목소리였지만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어깨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신경원은 키이스가 다시 자리에 앉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출동했던 사람이 바로 LA 지부에 있던, 그때는 현역 에이전트였던 치프야. 치프는 작은형이랑 싸우다가… 작은형은 날 바로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았거든. 그래서 날 구하려다가 출동한 인원 전부가 부상을 입었어. 치프는 팔이랑 다리 근육을 도려내야 했고…, 나는 물리진 않았지만 등을 손톱으로 크게 긁히고 작은형이 죽은 척 위장하려고 자해한 상처에서 흘린 피랑 가족들의 피가 섞인 피 웅덩이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구금된 상태로 24시간을 보냈어. 그게 내 첫 번째 24시간이었지.”

키이스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입을 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지금 그가 듣고 있는 것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신경원의 모든 것’ 중 가장 어두운 부분이었다. 신경원은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할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은 듯, 그보다 훨씬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많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추스를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은… 아니,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보냈어. 사실 어떻게 24시간을 보냈는지 잘 기억도 안 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24시간이 지나 있었고 마찬가지로 목숨을 건진 치프가 자기 상태도 안 좋은데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해주더라고.”

“…….”

“왜, 영화에서 많이 나오잖아?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대사. 그 말을 해주면서 자책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땐 마음이 약해져 있어서 그랬는지 그 말에 넘어갔어.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치프의 권유대로 병원을 관두고 기관에 들어왔어.”

신경원은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감정이 요동을 쳤던 이야기를 끝낸 후여서인지 목소리는 다시 본래대로 차분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그 일이 내 탓이 아니라면,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하잖아. 치프가 설명해주길 가족을 죽인 건 ‘작은형’이 아니라 ‘작은형’의 몸과 기억을 가진 별개의 생물, 뱀파이어라고 했거든? 그래서 뱀파이어를 죽이면 되는구나. 치프 같은 에이전트가 돼서 뱀파이어를 죽이고 또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언젠간 작은 형을 뱀파이어로 만든 상위급의 진짜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어.”

거기까지 말하고 신경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역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키이스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현실을 외면했지만 금세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 ‘잘못’이나 죄를 지은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내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인 이상 내 탓이 분명했고 내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걸.”

“…….”

“내가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야, 키이스.”

그 말을 하며 신경원은 계속 천장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키이스 쪽으로 돌렸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움찔하며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기관에 들어와서 오늘날까지, 나는 단 두 가지의 목표를 위해 살아왔어. 하나는 나 때문에 부모님을 잃은 동생들을 보살피는 거고 다른 하나는 작은형을 뱀파이어로 만든 놈을 찾아서, 유치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복수’를 하는 거야.”

“……!”

“물론 작은형을 뱀파이어로 만든 빌어먹을 새끼는 어떤 놈인지 알 길도 없고 찾을 길도 없고 설사 찾을 수 있다 해도 이미 ‘한계’를 넘어서 어떤 형태로든 죽었을 거야. 머리로는 알아. 하지만 마음은… 그걸 용납하기가 힘들어. 복수는 허무하니까, 그따위 것 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찾으라는 말, 내게는 개똥처럼 들려. 그런 말은 복수할 일이 없는 태평한 사람이나 하는 개소리지. 당해보면 알아. 머릿속에서 그 생각밖에 안 나는데 어떻게 하겠어.”

신경원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눈물이 좀 맺혀 있기도 했다. 

“내가 복수할 대상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 그러니 나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럴 힘이 있는 한, 기회가 주어지는 한 계속, 내 전부를 바쳐 전력으로 복수할 거야. 뱀파이어라는 거, 어차피 다 그놈이 그놈이잖아? 그냥 눈에 보이는 뱀파이어란 뱀파이어는 다 잡아 죽이면 작은형을, 내 가족을 죽인 놈이 싸질러놓은 다른 뱀파이어를 죽일 수도 있고 그놈을 이 세상에 내놓은 더 높은 등급의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계속 닥치는 대로 놈들을 죽일 거야.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이번에도 또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놈들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 나갈 거고. 그게 나 혼자, 거기서 살아남은 이유라고 생각하니까.”

“…….”

“그래서 나는, 네게 뭐라고 말을 해줄 수 없어.”

신경원은 입가를 끌어 올리며 미소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네 고백을 듣고 혐오감이 끓어올랐으면 또 모르겠는데 그렇진 않았던 걸 보면 나도 게이가 될 소질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 뭐, 이런 상황에서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해도 네 마음에 답을 주겠다든가 생각이라도 해보겠다는 말은, 설사 내가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도 할 수가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할 만한 여유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 자체가 없으니까. 그런 감정을 마음에 담는 건 나한테는 사치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미소가 되다 만 표정을 보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귓가로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가 심장을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야 신경원이 어젯밤 자신에게 했던 말이 제대로 이해되었다. 궁금한 게 없어서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것까지 물어보고 듣고 신경 써주고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말을 말이다.

성격이야 원래부터 좀 많이 까칠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여유’가 없다는 말에 아주 조금 속상했었다. 그런데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던 말에 저런 사정이 숨어 있을 줄은 진정 몰랐다. 속상해했던 자신을 그때로 돌아가 한 대 쳐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그래도 이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같네. 이것도 좀 유치하고 우습지만….”

“……?”

“고마워. 나 같은 걸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해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평생 그런 말은 못 듣고 살 줄 알았거든. 지금 생각해보니 마음가짐이 이 모양이니 누굴 만나도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차였던 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네.”

“퍼스트….”

신경원은 이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키이스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신경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선을 붙잡아 자신에게 고정하고 싶었다. 

“그러니 마음을 접으라고는 하지 않을게. 그럴 입장도 아니고 권리도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끝이야.”

신경원은 정말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길게 이야기해놓고도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동시에 지금부터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겠다고 하는 단호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신경원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대화가 끊어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의료팀 치프가 들어왔다. 그는 신경원의 상태를 살피고 비어가던 혈액 팩을 빼고 수액 팩을 연결했다. 

“식사…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진통제 효과는 서너 시간은 더 갈 겁니다. 혹 그 이전에 통증이 느껴진다면 콜 해주세요.”

“네.”

신경원은 의료팀 치프의 말에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그가 다시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인 침묵이 구금실에 내려앉았다. 신경원은 이제 키이스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기 싫다는 듯 인기척을 내도 눈조차 뜨지 않았다. 

* * *

정적이 이토록 끔찍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시간은 미칠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신경원의 얼굴을 바라보다 10분은 지났겠지 하며 시계를 봤지만 분침은 겨우 두세 칸 정도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여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해야 할 수준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창 밖 하늘에 어둠이 가시기 시작했다.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인공적으로 생성된 창백한 조명을 누르고 노란 황금빛 햇살을 구금실에 가득 채웠다. 시간은 더디게 가면서도 착실하게 새로운 아침을 가져왔다. 

키이스는 메마른 목을 이온 음료로 적셔가며 하염없이 ‘아직’ 살아 있는 신경원만 바라보았다. 뭔가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텐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절망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비워버린 이온 음료수 병을 힘주어 잡았다. 플라스틱이 힘없이 우그러들었다. 찌그러진 병을 바닥에 그대로 떨어뜨렸다. 퉁―하고 플라스틱 병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공허한 그 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어째서인지 머릿속에 12살 때부터 들어왔던 경멸 어린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아의 아들.

수치도 모르는 것.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더러운 것.

말도 말이었지만 자신을 향해 그 말을 하던 두 형의 말투와 표정에 진한 경멸과 혐오가 담겨 있었다.

열두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였지만 키이스는 자신이 다른 형제자매와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20살 이상 나이차가 나는 형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경멸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첩의 자식이라 해도, 세상에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다 해도, 존재해서는 안 될 더러운 것이라 말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엄마처럼 돌봐주는 사람, 누나인 레이첼에게 달려가 하소연과 투정을 했다. 그녀는 키이스를 안아주고 등을 쓸어준 후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답 하나를 주었다. 

“그건 아버지가 네게 당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고 친자로 인지해줬기 때문이야. 그리고 조나단과 네이선은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고 또… 자기 걸 남에게 빼앗기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그래.”

그 말로 키이스는 그들이 왜 그토록 자신을 싫어하는지 완벽히 이해했다. 제 또래보다 총명했기에 이미 클리퍼드가가 평범한 집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를 거쳐 자신에게 붙여진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첩의 아들에게 붙여줄 만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그런 조그만 회사가 아니라 ‘그룹’이라 불리는 클리세딕을 총괄해온 클리퍼드가의 가주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었다. 즉,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3세라는 이름에는 다음 대의 가주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크게 내포되어 있었고 형들로서는 키이스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를 싫어할 이유가 충분했다. 아니, 넘쳐흘렀다.

이후 키이스는 형들과 마주치는 것을 가능한 피했다. 조용히 얌전히 지냈다. 그리고 첩의 자식이니 저 모양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면 적어도 그런 모욕적인 말은 듣지 않게 될 거라고 믿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14살이 된 직후, 키이스는 ‘노아의 아들’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를 지독하게 싫어하던 큰형, 조나단이 어느 날 갑자기 기숙사로 찾아와 귓가에 속삭여주었던 것이다. 

인생이라 불러야 할 것이, 미래라 불러야 할 것이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더러운 것인지도, 어째서 자신을 그렇게나 싫어하고 경멸하고 혐오했는지도 전부 깨달았다. 

그때부터 키이스는 ‘아빠’라 부르며 다른 자식에게는 데면데면 굴면서도 자신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귀여워해주었던 남자를 ‘회장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기숙사제 학교에 입학한 이후 단 한 번도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때부터는 ‘회장님’의 호출에 응해 밖에서 식사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가족 중에서는 오직 하나, 처음부터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던 레이첼하고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럼에도 형들은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학교로 찾아와 시시때때로 그의 속을 거침없이 긁고 모욕적인 말을 내던지곤 했다. 그것은 18살, 성인이 되었던 해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다른 이유로 더더욱 심한 말을 쏟아붓기도 했다.

후우―. 키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제대로 지혈을 하지 않은 탓인지 채혈을 했던 손목 부근에 멍이 살짝 퍼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등의 쓸모없는 쓰레기.

그는 조나단이 하던 욕설 하나를 자신을 향해 던졌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지금까지 그들에게 들었던 모든 욕설과 경멸과 비난을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퍼부었다. 

형들이 퍼붓는 밑도 끝도 없는 경멸과 혐오와 비난은 그를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했었고 반대로 강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레이첼을 제외한 ‘가족’들로부터 등을 완전히 돌리게 만들었고 ‘클리퍼드’라는 성과 제 몸 안에서 흐르는 피를 모조리 버리고 싶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들의 원색적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속에 품은, 설명할 수 없는 시커먼 것의 크기를 키워 나갔었다. 그래도 그들의 말에 상처를 입고 슬퍼하거나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쓸모없는 놈.

태어날 가치조차 없는 자식.

스스로를 향해 퍼부은 말이 폐부를 찌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가 흐르고 절망을 향해 내달린다. 반편이도 못되는 자식, 무가치함의 극을 달리는 제 몸, 제 피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 또한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키이스는 처절한 좌절감과 절망을 맛보아야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그보다 더한 절망적인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지금, 이곳에 있기까지는.

퍼스트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나도 죽어버리겠다고 할까?

키이스는 시커멓게 죽어버린 눈으로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면 신경원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안 좋은 생각은 하면 안 되지만 사고는 계속 마이너스로만 흐른다. 그러면서도 뒤늦게 자각한 자신의 감정이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한 색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뒤늦게 자각한 것 자체가 진정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가에 고인 눈물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남자 때문이었다. 

“신―!”

자동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남자는 뉴욕 지부 부부장 로버트 예들린이었다. 그는 키이스의 앞을 스쳐지나가 신경원이 누운 침대로 다가갔다. 

“넌 대체….”

“……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기에 혹시 약에 취해 잠든 것이 아닐까 했던 신경원이 즉시 눈을 뜨고 반응을 보였다. 키이스는 가슴의 지끈거림을 혼신의 힘을 다해 내리눌러야 했다. 

“…는… 안….”

몇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 바싹 말라붙은 입술에서 마른 소리가 나왔다. 예들린은 성마른 손짓으로 가장자리에 있는 생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키이스가 그토록 원했던 행동을 했다. 누워 있던 신경원을 부축해 앉게 하고는 물을 먹인 것이다.

하아―하고 신경원이 숨을 토했다. 그러자 곧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왔다.

“비번일에 쉬지도 못하고 멀리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그걸 말이라고 해!”

“감사해요. 못 보고 가면 좀 섭섭할 것 같았는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망할 자식.”

예들린은 사무실에서는 욕설의 욕도 하지 않던 점잖은 사람이었지만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대의 기울기를 직접 조정해 신경원이 편히 기대앉을 수 있도록 했다. 

어째서 저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 나는 곁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예들린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키이스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키이스는 이를 악문 채 예들린과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런 일 처음 당하는 것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다. 그따위 소리 하지 마! 조심했어야 할 거 아냐! 뉴욕도 아니고 이 멀리까지 와서 도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했기에 이 모양 이 꼴이 돼! 이 멍청한 놈.”

“그러게요. 왜 하필이면 여기서 이렇게 된 건지. 그런데 말이죠, 치프.”

“뭐.”

“저 여기가 고향이에요. 죽을 거면 고향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이걸 그냥 확―!”

예들린은 한 손을 들었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말라붙은 피딱지와 선홍색의 피가 맺혀 있는 신경원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크지도 않았다면서.”

“그래서 근육까지 도려내진 않았는데, 더 도려내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네요. 이젠 의미 없지만.”

“…….”

“…죄송해요, 치프.”

“알면 됐어.”

“혹시 제가 잘못되면 애들 좀 부탁드려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할 이야긴 해야죠. 아, 맞다. 혹 시간이 괜찮으신 거면 키이스 좀 먼저 뉴욕으로 보내주시고 치프가 여기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바쁘시면 그냥 저놈 데리고 뉴욕으로 돌아가셔도 좋고요.”

“왜?”

“아직 6개월도 안 됐는데 쓸데없는 경험까지 하게 하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요.”

“네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던 놈이냐? 생초짜한테 B2 눈알을 생으로 도려내게 하는 놈이 무슨.”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요.”

“…끝까진 못 있겠지만 저놈은 데려가마.”

예들린의 대답을 들은 키이스는 더 참지 못하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 갑니다. 못 갑니다.”

“키이스.”

“제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 것으로 아는데요, 퍼스트.”

“…….”

“이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신경원은 키이스를 살짝 봤다 곧장 천장에 시선을 고정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그냥 두세요.”

“뭔진 모르겠지만 네 맘대로 해. 대신 재수 없는 소리는 일절 하지 마. 넌 이번에도 괜찮을 거다, 신.”

“그러면 더 바랄 것이 없긴 해요. 상처 크기로 확률이 좌우되는 거라면 이번이 제일 살아날 확률이 높을 테니까….”

신경원은 배시시 웃으며 제 상처를 내려다봤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울어봐야 소용도 없는걸요. 차라리 웃는 편이 낫죠. 그래야 나중에 쪽팔리지도 않고. 그런데 이제 좀 떨어져 있으세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예들린은 쓰읍―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오른손을 치켜 올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키이스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제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문이 다시 열리고 의료팀 치프와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 남자 하나가 구금실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남자의 얼굴을 본 키이스의 표정이 급격히 험악해졌다. 

“통증은 어떻습니까?”

의료팀 치프는 남자를 침대에서 좀 먼 곳에 세워두고는 예들린에게 눈인사를 하며 신경원에게 갔다. 

“…진통제가 슬슬 약발이 떨어져가는지 약간 아프긴 합니다. 심하진 않고.”

“진통제를 다시 주사해드리죠. 같은 양으로 할까 합니다만, 원하시면 조금 양을 늘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냥 적당히 해주세요. 진통제 기운을 빌려 자고 싶진 않으니까.”

신경원은 구금실에 누가 들어오든 관심이 없는지 의료팀 치프하고만 대화를 했다. 사실 치프를 대하는 자세도 예들린을 대하던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 심드렁해하고 있었다. 치프가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는 걸 분명 눈치 챘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키이스가 수차례 만나왔던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공적인 일로 얽히지 않았다면 인간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을 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키이스는 남자를 만나면 항상 불쾌해지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 남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총본부를 떠나 나라 반대편에 있는 LA까지 올 리가 없다. 또한 뭔가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언제 뱀파이어가 될지 모를 사람이 갇혀 있는 구금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올 리도 없다. 몸을 사리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무작정 감수하는 타입도 아니니까. 

키이스는 왜 저 남자가 이곳까지 찾아왔을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다리를 절로 움직이게 했다. 

“키이스,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나한테 가까이 오면 치프 보고 너 LA로 끌고 나가라고 할 거다.”

신경원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움직임을 제지당한 키이스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의료팀 팀장은 가운 앞주머니에서 진통제 앰풀을 꺼냈다. 그리곤 신경원의 앞에서 주사기를 채운 뒤 수액이 흐르고 있는 줄에 바늘을 찔러 넣고 천천히 진통제를 주입했다. 

“지금까지 잘 버티셨습니다. 지금까지 버티신 시간에다 몇 시간만 더 버티시면 됩니다. 힘내십시오.”

“네.”

신경원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제 팔에 연결된 줄을 만지작거렸다. 키이스는 연신 예들린과 남자와 의료팀 치프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들 사이에 뭔가 사전에 합의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누우시겠습니까?”

“아뇨. 좀 앉아 있을….”

대답을 하다 말고 신경원은 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곤 잠깐 그 상태를 유지하더니 힘겹게 고개를 들어 의료팀 치프를 쳐다봤다.

“지금 주사한 거… 진통제 맞죠?”

“맞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혹 어지럽기라도 하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알레르기 반응도 없었고 무엇보다 같은 양을 주사했잖습니까? 보세요.”

의료팀 팀장은 내용물이 1/3쯤 남은 앰풀을 꺼내 신경원에게 보여주었다. 신경원의 눈동자가 앰풀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확인한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신경원의 고개가 원을 그리며 뒤로 넘어갔다. 

“이건… 진통…가 아니…….”

털썩―. 신경원의 머리가 침대에 떨어졌다. 동시에 몸이 축 늘어졌다. 그 순간 키이스는 의료팀 팀장과 예들린, 그리고 남자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목격했다. 

“도대체 지금 퍼스트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절규와 같은 외침이 키이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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