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9)

8

황금색 털을 가진 대형 강아지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계속 신경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불쑥,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 숨기려던 건 아니었겠지. 그냥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사실 말할 필요도 없었고 말하지 않는 편이 이모저모 편하고.

신경원은 비어버린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새 맥주캔에 손을 뻗었다. 눈치를 보고 있던 키이스가 얼른 맥주캔을 집어 냅킨으로 감싸 건네주었다. 냉장고에서 꺼내 온 지 조금 시간이 지나 캔에 물기가 흥건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데서 세심한 놈 같으니라고.

신경원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풀 탭을 따서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현재 그들은 LA 시내의 고급 호텔 스위트룸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좀 유치한 표현이지만 불꽃같은 하루를 보낸 끝에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는 참이다. 

시종일관 고자세를 유지했던 퍼거슨 부인은 키이스가 불러온 최종병기 누님의 말 몇 마디에 완벽하게 백기를 들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귀한 외아들이 다쳤다는 소식에 자신이 잠시 이성을 잃었던 모양이라며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래봤자 레이첼의 ‘협박’에 꼬리를 말고 깨갱 하며 도망쳐버린 것이지만 말이다. 

「아드님께서는 지난주에 있었던 인종차별 반대 집회에서 퍼거슨 사장님이 피켓을 들고 맨 앞에 서서 거리를 행진하셨던 건 전~혀 몰랐나 보네요. 하기사 요즘 아이들이 다 그렇죠. 부모님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생각을 안 하니까요.」

신경원은 레이첼의 첫마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퍼거슨 부인보다 몇 백 배는 미인에 고상하고 우아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다 날카로운 돌직구였다.

「사장님께서 내년쯤 시의회에 출마하실 예정인 걸로 알고 있는데, 아드님께 각별히 주의를 주셔야 할 것 같네요. 이번 일로 아드님께서 ‘레이시스트’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참 곤란하지 않겠어요?」

레이첼의 직구는 퍼거슨 부인이라는 매트에 팡팡 꽂혀 들어갔다. 귓가에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이라는 환청이 들릴 정도로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했다. 

퍼거슨 부인이 동행한 변호사들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퇴장하자 레이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정말 바쁜 와중에 잠깐 시간을 낸 건지 키이스에게는 다음에 보자며 가볍게 인사를 하고 신경원에게는 키이스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다음에 LA에 오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 후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교장은 ‘흔히 일어나는 아이들끼리의 다툼’에 어른들이 너무 설레발을 쳤다는 말로 사건을 묻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표명했다. 신경원은 그랬던 모양이라며 적당히 대꾸하고는 사건이 좋게 끝나서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격렬했던 미팅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이후 신경원은 두 사촌 동생과 함께 저녁을 먹고 다른 테이블에서 두 변호사와 식사를 한 키이스와 합류해 아이들을 기숙사에 보낸 후 호텔로 왔다. 아이들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신경원은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고 변호사들끼리 합의를 보았으니 걱정할 것은 없고 이후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말을 아꼈다. 

사정을 아이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메신저 어플을 이용해 질문을 던져오고 있었다. 신경원은 연신 몸부림을 치는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형, 진짜로 해원이한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그런데 그 금발머리 형이랑 똑같이 생긴 아줌마는 누구야?」

「뭔진 몰라도 그 아줌마가 도와준 거지? 맞지?」

「우리도 감사 인사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신경원은 착신된 메시지를 주욱 읽어보고 어플의 푸시 알람을 꺼버린 다음 답신을 보냈다.

「Shut up!」

핸드폰을 내려놓은 신경원은 다시 맥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해원이가 일으킨 폭력사건은 걱정과는 달리 간단히 해결되었다. 물론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닌지라 걱정거리는 남았다. 해원이가 징계를 받지 않게 된 것은 좋았지만 상대 학생 역시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트러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걱정이 안 될 수 없다. 

결국 그냥 해원이를 믿는 수밖에 없다. 또다시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폭력을 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몸소 경험했으니 앞으로는 더 조심해주길 바랄 뿐이다. 

한 두어 달 두었다가 상황을 물어보고 별 문제가 없으면 그냥 두고 아니라면 뉴욕으로 데려가면 그만이지 뭐. 

사실 신경원은 그리 세심한 성격이 아니다. 다정한 성격은 더더욱 못 된다. 사촌 동생들에게야 가능한 다정하고 자상하게 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성격적인 한계는 분명 있었다. 

물론 그는 아이들을 제 목숨만큼이나 사랑한다.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면 간도 쓸개도 다 내줄 수 있다. 그저 품 안에 안고 ‘사랑해’라는 간질간질한 단어를 직접적으로 내뱉는 성격은 아니라는 거다.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는 질문에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성격도 아니고. 

신경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제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는 키이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텔에 도착한 뒤 키이스는 계속 신경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좀 전에 한 말로 미루어 볼 때 지금까지 자신의 배경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사실이 무척이나 걸리는 모양이었다. 신경원은 별로 신경 쓰고 있지도 않은데도 말이다. 

“키이스.”

“네.”

“그렇게 눈치 보지 마. 신세진 건 난데 왜 네가 내 눈치를 봐.”

“…….”

“뭐… 놀라지 않았다고는 못하지만 알거나 모르거나 변하는 건 없잖아.”

신경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놀라기는 정말 놀랐다. 소름이 끼쳐오를 지경이었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부잣집이 이름만 대면 일반인들도 알 만한 회사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탓이다. 클리세딕 그룹은 제너럴 다이나믹스라든가, 보잉이라든가 록히드마틴이라든가 하는 유명한 방위산업체와 동급의 회사였으니까. 

“알고 보니 내 파트너가 유명한 그룹 회장의 아드님이었다. 그리고 내 파트너는 제 집안이나 배경은 상관없이 제가 하고픈 일을 선택해 열심히 사는 놈이다. 이거 말고 내가 더 알아야 할 거 있어?”

“퍼스트….”

자신이 클리세딕 그룹 회장의 아들입네 하면서 재수 없게 굴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놈이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키이스는 재벌가 아들치고는 상당히 특이하다 싶기는 해도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동료 중의 한 사람이자 자신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르는 파트너일 뿐이다. 

“숨기고 있던 이유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그런 거 말해봤자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의 입방아에나 오르고 좋을 것 하나 없을 텐데 말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지.”

“…….”

“우리 애들이 사고를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알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여러모로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정말 신세 많이 졌다.”

“퍼스트가 미안해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신세라는 말은 그만하세요.”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신세는 신세지. 아참, 나는 그냥 모르는 걸로 할 테니까 걱정 마. 그걸로 신세를 갚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편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신경원은 ‘무슨 말인지 알겠지?’라고 덧붙이며 캔에 남아 있던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빈 캔을 들고 흔들었다.

“이거 네가 사는 거지?”

키이스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가져다 마셔도 되겠네”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키이스가 만류했다.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다른 걸 원하시면 룸서비스를…,”

“난 맥주가 좋아.”

신경원은 웃는 얼굴로 답하고는 소파 등에 팔을 걸쳤다. 

“부잣집… 아니, 재벌가 아들을 파트너로 두니까 좋은 거 많네. 자가용 제트기도 타보고 전세기도 타보고 호텔 스위트룸에서 맥주도 마음껏 마셔보고.”

그는 냉장고에 남아 있던 것을 전부 긁어왔는지 팔 안에 캔을 가득 안고 온 키이스를 향해 짓궂게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 고기 먹을 때는 그냥 다 네가 계산해라. 부자 파트너 덕 좀 보자.”

신경원의 말에 어딘가 모르게 굳어 있던 키이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죠. 말만 하세요. 뭐든 다 사드릴게요.”

키이스는 맥주캔의 풀 탭을 따서 신경원에게 내밀었다. 자신도 캔 하나를 들고 옆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퍼스트.”

“응?”

순식간에 두 캔을 더 비워가는데 키이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게 궁금한 거 없으십니까?”

“뭘 궁금해해야 하는데?”

“그냥 이것저것이요. 예를 들면… 클리세딕가 같은 재벌가에서 태어난 놈이 왜 위험한 일을 하려고 드느냐라든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굳이 물어 답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았더니 키이스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저는 퍼스트에게 궁금한 게 많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요. 하지만 퍼스트는 저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니,”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물어보면 대답해주실 겁니까?”

“음….”

신세를 진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각하면 못 해줄 것은 없다. 게다가 키이스에게는 이미 해원이 일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꽤 많이 해버린 상태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파트너로서 동고동락하다 보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을 거라고 본다. 존이나 맥스, 캐리 같은 동료들이 알고 있는 것 정도는 말이다.

“말해봐. 대답해줄 수 있을 만한 건 대답해줄게.”

허락을 했는데도 키이스는 꽤나 망설였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고민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한참을 꾸물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여왕님이라는 여자. 애인입니까?”

푸훗―.

웃음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

신경원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을 하기에 얼마나 대단한 걸 물으려나 했는데 여왕님이라니! 애인이라니!

“으하하하하학―.”

“웃지 마시고 대답해주세요.”

“으하학― 어, 어떻게 안 웃냐, 인마.”

신경원은 살짝 흘러넘친 맥주캔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위엄이 흘러넘치는 퀸의 사진을 찾아 키이스에게 내밀었다.

“크흐흐흐. 걔가 내 여왕님이야. 이름이 퀸Queen이지. 으하하하하.”

신경원은 미친 듯이 웃으며 배를 잡고 쓰러졌다. 퀸의 사진을 보며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키이스를 보니 더더욱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나 했는데, 으하하학.”

신경원은 진짜 신나게 웃어 제친 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달아오른 목에 맥주를 부었다.

“2살이 좀 넘은 앤데 덩치가 어마어마해. 그래서 안고 자면 굉장히 따뜻하고 좋아.”

“…서늘한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에어컨 마니아시잖아요. 옷도 얇게 입는 편이고요.”

“더운 건 싫어. 하지만 잘 때는 따뜻한 게 좋아.”

신경원은 새 맥주캔 하나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나왔으니 질의응답은 나중에 하고 이만 자자. 이른 시간이긴 해도 우린 밤을 샌 거나 마찬가지니까.”

전날 11시 반에 일어나 일을 하고 새벽에 비행기를 타서 LA에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잠 한숨 못 자고 나름 강행군을 했다. 

“명색이 스위트룸이니 저쪽 방에도 욕실 있겠지?”

혹여 이야기를 더 하자고 잡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왕님이 준 충격이 꽤 큰 듯, 키이스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네…. 혹시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룸서비스로 주문하시면 됩니다.”

“그래. 부자 파트너 믿고 부담 없이 주문할게.”

뻔뻔스러운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뻔뻔스럽게 네 덕을 보겠다고 말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경제관념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검소’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자신의 경제관념을 따라 행동하라고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키이스의 무제한 한도 카드를 제 것처럼 쓰겠다거나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건 아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적당히 받아들일 생각이다. 물질적인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갚을 수 있는 선에서만. 

“먼저 들어갈게. 잘 자라.”

“네. 편히 주무십시오.”

신경원은 손에 든 캔을 흔들며 침실로 들어갔다. 

“고양이라니.”

침대 한가운데 길게 누워 있던 키이스는 눈을 번쩍 뜨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그따위 질문을 한 거냐, 키이스 클리퍼드.”

그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천장을 노려보며 자문했다. 물어보면 대답해줄 거냐는 질문을 할 때만 해도 설마 대놓고 물어보라는 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 당황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따위 걸 물으면 어쩌자는 거냐고.

무엇부터 물어볼까 순간 맹렬하게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정작 입에서 나간 질문은 그거였다. 도대체 왜 그런 걸 물어봤을까. 그걸 묻지 않았다면 다른 궁금한 것들을 잔뜩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거냐, 키이스 클리퍼드!

“환장하겠군.”

키이스는 머리를 감싼 채 넓은 침대 위에서 한 바퀴를 굴렀다. 24시간 넘게 깨어 있었기에 나름 피곤한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기관에 들어간 이후 완벽하게 밤낮이 바뀌어버린 탓이다.

쯧―. 그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독한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잠이 올지도 모른다. 그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을 내딛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 멈추어 섰다. 어둑한 응접실 소파에 신경원이 앉아 있었다. 

“어? 자라니까 왜 안 자고 나오냐.”

“나이트캡이나 한 잔 할까 해서 나오던 참입니다만, 퍼스트는 왜….”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잘 안 와서.”

“퍼스트가요?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금세 잠들어버리시는 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비좁고 홀아비 냄새 풀풀 나는 숙직실 침대는 물론이요 비교적 편한 사무실 의자, 불편하고 딱딱한 회의실 의자까지 신경원이 못 자는 곳은 없다. 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없는 주차장 맨바닥에서 맥스의 어께에 기대 반 기절 상태로 잠든 적도 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잘 잔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면 반박을 못 하잖아.”

신경원은 조금 취했는지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음…. 언젠간 알게 될 테니 그냥 말할게. 불면증이 좀 있어.”

“…불면증이요?”

“응. 심한 건 아닌데 스트레스가 좀 쌓이거나 그러면 잠을 잘 못 자. 웃기는 건 나는 내가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사실도 잘 깨닫지 못하거든? 잠이 안 온다 싶고 나서야 아아,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구나 하지. 애들 일이 좀 신경에 거슬렸나 봐. 퍼거슨 부인인지 하는 여자의 태도도 좀 그랬고. 뭐, 모자라는 잠은 낮에 잠깐씩… 이라고 하기엔 좀 많이 자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보충하고 있으니까 별 문제는 없어.”

“낮에 조는 건 체력을 보충하시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지. 아, 미안. 얼른 술 한 잔 마시고 가서 자. 나 신경 쓰지 말고.”

“저도 잠이 잘 안 와서 나온 겁니다. 기관에 들어온 뒤로 밤낮이 바뀌어서 그런지 좀처럼 잠이 안 오네요.”

“그럼 룸서비스로 맥주나 더 시켜줘. 술이나 마시자.”

“네.”

키이스는 룸서비스로 맥주를 더 시켰다. 안주로 먹을 스낵과 야식으로 먹을 것도 함께 시켰다. 늦은 시간은 아닌지라 음식은 금방 도착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따끈한 베이비립을 뜯으며 맥주캔을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신경원은 술기운이 돌아 혀가 말랑해졌는지 묻지 않는 말도 잘했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야, 내가 찾은 B1 케이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말이 되냐고. 성질이 나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잠이 안 오잖아. 망할 치프 같으니라고.”

신경원은 예들린을 욕하며 투덜댔다. 그 말을 들은 키이스는 최근 신경원의 신경이 좀 날카로워 보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정말 틈만 나면 아무 데서나 엎어져 자던 것도 떠올렸다. 어쩌면 신경원의 불면증은 그 자신이 말한 것보다 조금 더 심한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겨우 사건을 맡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정도면….

“가뜩이나 성질이 나 죽겠는데 너는 멋대로 날뛰고, 그 자리에서 한 방 갈겨서 병원으로 보내지 않은 걸 다행인 줄 알아.”

“하하. 네. 죄송합니다.”

“그래. 많이 죄송해야지.”

만취하진 않았지만 경계심이 풀릴 정도로는 취한 모양이었다. 원래 만취한 것보다 살짝 알딸딸하게 취할 때가 더 그러기 쉽다. 달리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술을, 그것도 도수가 약한 칵테일을 사주는 게 아니다.

“씨발, 배부르니 졸리네.”

신경원은 꺼억―하고 트림을 하더니 소파 위로 다리를 끌어올렸다.

“그쪽으로 좀 더 가봐.”

툭툭 허벅지를 치기에 엉덩이를 옮기는 순간이었다. 꿈틀거리며 자리를 잡던 신경원이 대뜸 키이스의 허벅지에 머리를 댔다. 

“아, 자기 전에 이빨 다시 닦아야 하는데.”

키이스는 의외의 상황에 놀라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제 허벅지에 자리 잡은 신경원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야.”

“…네.”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그렇게 섭섭… 하냐?”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놀란 상태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가감없이 대답했다. 자신은 궁금한 것이 정말 많은데 신경원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정말 많이 섭섭하다고.

“그게 말이지… 궁금한 게 없어서 그런 건 아니야.”

“……!”

“그저… 그런 것까지 물어보고… 듣고 신경 써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럴 만한 성격…도 아니고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

“퍼스트?”

키이스는 작은 소리로 신경원을 불러보았다. 신경원은 눈살을 한 번 찌푸렸다 펼 뿐 대답이 없었다. 

“……. 퍼스트?”

설마 했지만 신경원은 이미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어디든 일단 머리만 닿으면 곧장, 열을 세기도 전에 잠들어버리는 체질이라는 건 익히 보아 잘 알고 있었지만 기가 막혔다. 

스트레스를 받아 잠이 안 온다더니 이게 무슨….

혹시나 싶어 몇 번 더 불러봤다. 신경원은 꿈쩍도 안 했다.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기절한 것도 아니건만 살짝 어깨를 흔들어도 깨지 않았다. 키이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뺐다. 신경원을 소파에서 재울 순 없었다. 

“나, 참―.”

키이스는 혀를 차면서도 웃고 있었다. 평소의 까칠한 신경원도 좋지만 이런 신경원도 재미있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손을 대거나 부축하려는 것도 피하던 사람이 맥주에 조금 취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엉겨 붙는 게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진짜 덜떨어진 고양이 같아서. 그래도 여유가 없다는 말은 좀 속상한데….

그는 조심스럽게 신경원을 안아들었다. 차마 이전처럼 어깨에 들쳐 멜 수는 없었다. 공주님처럼 신경원을 안아든 그는 응접실 반대편 침실로 가려다 몸을 돌렸다.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실은 얼결에 문을 열어둔 상태였다. 

키이스는 정말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신경원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발로 걷어낸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몸을 뺐다. 그때였다. 

“…으응.”

신경원이 인상을 쓰며 신음을 했다. 그의 손은 키이스의 가운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얼른 가운을 벗어 신경원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이불을 끌어와 덮어주는데 신경원이 벗어놓은 가운을 더듬다 말고 침대를 짚고 있는 키이스의 팔을 덥석 잡았다. 

결코 세게 잡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손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퍼스트?”

“으…응. …자.”

신경원은 잠결에 대답을 하며 부여잡은 팔에 이마를 댔다. 서늘한 살갗에 닿은 신경원의 이마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침대로 올라가 신경원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신경원이 더욱 바싹 키이스에게 붙었다. 팔을 부여잡았던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리더니 슬금슬금 움직여 다리를 감싸 안는다. 그러고 나서야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폈다.

신경원이 자는 얼굴은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그야말로 아무 데서나 잘 자니까. 하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표정은 처음이다. 너무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우웅….”

허벅지를 끌어안은 신경원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허벅지에 이마를 꼬옥 대고 파고들 기세로 꿈틀거렸다. 

“…….”

기분이 좋긴 한데… 좀, 곤란하기도 하고.

어째선지, 정말 이상하지만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걸까 싶다. 그러나 그는 신경원의 반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 맥주라는 것은 알코올 맛의 음료수나 다름이 없다. 취할 이유도 몸에 열이 오를 이유도 없다. 

음. 냠. 찹찹.

허벅지에 밀착된 신경원의 입술이 움직이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열이 훅훅 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에 손을 대본 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신경원을 내려다보았다. 신경원은 굉장히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잠든 신경원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곤히 자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키이스에게도 사르르, 잠기운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 * *

삐익―. 

곤히 자던 키이스는 멀리서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썼다. 그는 제게 착 달라붙어 있는 사람을 무의식중에 끌어안으며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포근하면서도 조금 서늘한 것이 안고 자기 딱 좋았다.

삐익―. 삐익―.

정말 기분 좋게 자는데, 날카로운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것은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소리가 나는 건가 하던 그의 귀에, 같으면서도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삐익―. 삐익―.

딱 두 번이 울리자마자 키이스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사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의 몸을 넘어 침대 바로 옆 협탁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잡아챘다. 

“내 것이 아닌…데.”

잠기운이 어린 신경원의 목소리에 키이스도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 넌 왜 여기 있어?”

“어…. 그게 퍼스트가 소파에서 잠들어서 제가 침대로 옮겼는데 저를 안 놔주셔서요. 그냥 앉아 있을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나 봅니다.”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했더니 신경원이 얼굴을 와작 구겼다. 

“그런다고 같이 자면… 아―.”

신경원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표정을 보니 어제 일이 대충 기억난 것 같았다. 

“씨발―. 그 이야긴 나중에 하자. 옷부터 갈아입어. 긴급 호출이다.”

신경원은 정말 별일이 다 일어난다면서 핸드폰을 키이스에게 던지고는 재빨리 침대에서 뛰어내려 밖으로 나갔다. 키이스는 황망한 가운데 옷을 갈아입고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해 차량을 부탁했다. 그 사이에도 그의 핸드폰은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긴급 호출 알람을 끄곤 밖으로 나갔다. 

“…욕 지부의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 크리스토퍼 신입니다. 파트너인 수습 에이전트 키이스 클리퍼드와 합류하겠습니다. 네…. 네. 위치와 기본적인 정보를… 알겠습니다. 네.”

신경원은 짧게 통화를 마치곤 제 침실로 들어가며 외쳤다.

“신분증이랑 무기 챙겨. 그리고 택시를 부르든 호텔 리무진을 부르든 아무거나 아래 대기시키고.”

“차는 불러놨습니다.”

키이스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가져온 글록을 대충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단검을 오른쪽 다리에 찼다. 다시 응접실로 나가자 뉴욕에서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고 서 있던 신경원이 서둘러야 한다면서 먼저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호텔 측에서 준비한 차량은 운전사가 딸린 캐딜락 리무진이었다. 신경원은 운전사에게 주소를 불러주고는 가능한 빨리 가달라고 했다. 이동하는 동안 신경원은 잠에서 깨기 위해 발악을 했다. 제 뺨을 찰싹찰싹 치기도 하고 키이스보고 자기 팔뚝을 꼬집으라고 하기도 했다. 새벽 2시 반의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뻥뻥 뚫려 있어 목적지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도착하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목적지는 LA 외곽의 주택가였다. 어디나 높은 건물들이 빼곡히 서 있는 뉴욕과는 달리 1층짜리 주택이 주욱, 성냥갑처럼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로컬 경찰들이 노란 안전선을 두른 채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신경원은 아무 말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경찰은 신분증의 사진과 신경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통과시켜주었다. 키이스는 그보다는 쉽게, 폴리스라인을 넘어갈 수 있었다. 

“저쪽이다.”

뉴욕에서 타고 다니는 차량과 똑같은 디자인의 차가 멀리 주차되어 있었다. FBI가 선명하게 새겨진 점퍼를 입은 사람도 보였다. 두 사람은 재빨리 그쪽으로 뛰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뉴욕 지부의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 크리스토퍼 신. 이쪽은 제 파트너인 클리퍼드입니다.

“LA 지부의 스페셜 에이전트 잭 테이튼입니다. 휴가 중인데도 기꺼이 호출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도 막 현장에 도착했는지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던 에이전트가 인사를 받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옆에 있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제 이름을 밝히며 장비를 착용했다. 그러자 유일하게 무장을 마친 덩치 좋은 남자가 실드를 올리고 마스크를 끌어내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에이전트 신, 혹시 제 얼굴 기억나십니까?”

신경원은 바싹 다가서는 남자를 피해 한 발짝 물러섰다가 키이스의 뒤로 반쯤 몸을 숨겼다. 조금 전에 당당하게 제 이름과 신분을 밝혔던 사람 같지 않았다. 

키이스는 기가 막히게 낯을 가리며 제 뒤로 숨은 신경원의 반응에 어쩐지 기분이 묘하게 좋아졌다. 그것으로 본래의 여유를 찾은 그는 미소 짓는 얼굴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켄달.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다, 클리퍼드. 역시 뉴욕 지부로 갔구나. 너라면 뉴욕 아니면 샌프란시스코로 갔을 거라 생각했지.”

켄달은 반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키이스는 뒤를 힐끔 보며 켄달을 소개했다. 

“기억 안 나세요? 마지막 테스트 때 저랑 같이 퍼스트에게 얻어맞고 뻗었던 사람인데. 에드워드 켄달이라고 합니다.”

“어…. 아! 86번!”

신경원의 반응에 86번, 켄달이 고개를 푹 숙이며 절망하는 시늉을 냈다. 얼굴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번호로만 기억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며 말이다.

“구면인 모양인데,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일단 장비를 갖춰주십시오. 배치는 이동하면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키는 크지만 몸 자체가 전체적으로 슬림한 신경원에게 준비되어 있는 예비 유니폼과 택티컬 부츠가 죄다 사이즈가 컸기 때문이다. 신경원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한숨을 쉬었다. 

“많이 커요?”

“어. 남아돌아. 돼지 새끼처럼 처먹고 단백질 파우더까지 털어 먹는데 왜 이 모양인지. 씨발, 완전 개좆같아.”

신경원은 이건 모두 예들린의 탓이라며 살벌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결국 부츠를 포기해야 했다. 사이즈가 큰 부츠를 신고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일 마치고 돌아가면 아예 삼시 세끼를 다 소고기로 사드릴게요.”

“아귀처럼 먹을 거야. 각오해.”

키이스는 알았다고 대답하다 신경원이 유니폼 바지 자락을 끌어올린 양말 안으로 쑤셔 넣는 것을 보곤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엄청나게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웃기냐?”

“죄송합…큭―니다.”

“나도 웃기니까 그냥 웃어. 아, 저는 소총 필요 없습니다. 글록 탄창만 몇 개 더 주시면 돼요.”

신경원은 받아든 탄창을 베스트 여기저기 끼워 넣었다. 다행히 베스트는 밴드를 조여 몸에 딱 맞게 입을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통신기를 켜자 곧장 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리퍼드는 에디와 아카데미 동기니 1년차고, 에이전트 신은 시니어시니 물을 것도 없지만….』

『5년찹니다.』

『좋군요. 그럼 클리퍼드는 저와 한 팀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헤일리, 에이전트 신과 함께 B팀이다. 포인트 4를 맡아줘.』

『Ok. 에이전트 신. 마을 오른쪽 끝, 30번지에서 저와 합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어깨를 툭 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타 지역에서 작전에 참여하는 경우 그 지역 지리에 익숙한 에이전트와 팀을 이루어야 하는 규칙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키이스는 잭이 부른 주소지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콜 사인을 정하는 것을 듣다 무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만, ‘퍼스트’를 Zero나 다른 콜사인으로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제 파트너의 별명이 ‘퍼스트’라서 혼선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지금…, 에이전트 신의 별명이 퍼스트―라고 한 것 맞습니까?』

『네.』

순간 귓가가 소란스러워졌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 감탄사를 내뱉는 사람, 퍼스트를 연호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이름은 몰라도 뉴욕 지부에 ‘퍼스트’란 호칭을 가진 베테랑 에이전트가 있다는 소문은 들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계속 말하지만 시간 없으니 나머지는 작전 완료 후에 합시다. ‘퍼스트’, 잘 부탁합니다.』

『네.』

신경원은 어디서나 신경원인지라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잭은 선두를 맡게 되는 A팀의 콜 사인을 Zero로 바꾸고 지휘를 맡은 자신의 팀을 그냥 A로 바꾸었다. 그러곤 간단하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뱀파이어 둘이 이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들을 추격하며 인원 부족으로 긴급 호출을 했고 위치를 대략 특정하여 경찰의 협력으로 일단 마을을 봉쇄했다. 

그들의 임무는 두 뱀파이어의 사살이었다. 둘 중에 하나는 B2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사살할 목표가 둘뿐이니 쉬운 일이었지만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마을 자체가 베트남 이민자들로 구성된 집단촌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고 총 42채나 되는 작은 집들로 이루어져 있어 가가호호 일일이 문을 두드려 수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백업팀도 할당되어 있지 않았다. LA 지부가 현재 다른 지역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는 중인 탓이다. 도주해 온 두 뱀파이어가 바로 그쪽 포위망을 뚫고 나온 놈들이었다. FBI에 지원을 요청해 현재 달려오는 중이지만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작전을 시작해야 했다. 

『현 시각 02:27분. 8초 후 작전을 개시한다. 6, 5, 4, 3, 2, 1. Go!』

키이스는 잭의 뒤편에 바싹 붙어 그를 엄호했다. 잭은 첫 번째 집부터 수색에 들어갔다. 자다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뱀파이어들이 밖으로 튀어나온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물론 되레 날뛰기 시작하면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색 방법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한 팀이 최소 10집을 수색해야 했다. 잭은 빠른 속도로 나란히 늘어선 집들을 수색했고 키이스는 계속 그의 등 뒤를 지켰다. 잠시 후 Zero팀에서 통신이 왔다.

『A리더. 27번지에서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인물이 밖으로 나와 35번지 쪽으로 향했다.』

『B팀. 목표물이 보이는가?』

『아직.』

귓가에 신경원과 함께하고 있는 에이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 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자 순간 온몸이 바싹 긴장으로 달아올랐다. 키이스는 초조한 심경으로 신경원의 보고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목표물 발견. 36번지를 지나 추격 중.』

숨소리와 함께 들려온 신경원의 목소리에 키이스는 소총을 꽈악 부여잡았다. 

『클리퍼드.』

막 한 집을 수색하고 나온 잭이 키이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키이스는 글자 그대로 귀를 쫑긋 세운 채 다음 집을 향해 먼저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 이어 잭이 불을 켜고 있는 다음 집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의 입을 틀어막은 잭은 스튜디오 형태의 집 안을 둘러보고 무장한 강도를 찾고 있으니 문을 꼭 잠그고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말을 한 뒤 다음 집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C팀이 다른 뱀파이어를 발견하고 추격 중임을 알려왔다. 잭은 Zero팀에 B팀의 지원을 명하고 자신은 C팀 쪽으로 향했다. 

『목표물은 3시 방향의 언덕으로 도주 중.』 

『목표물. B3로 확정! 확인 사살 완료!』

『사체를 마을 밖으로 끌어내고 남은 집들을 확인해! 피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Roger.』

『클리퍼드. 15번지부터 20번지까지 수색을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신경원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묵묵히 작은 집들을 뒤졌다. 다행히 그가 맡은 집에서는 아무런 피해자도 발견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잭이 맡은 20번지 후반대의 집에서 둘, 그리고 사체를 마을 밖으로 끌어낸 C팀이 맡은 8번지에서 하나가 나왔다. 

『허억! A 리더! 하나가 더 있었― 크윽!』

『헤일리!』

『곧 가겠다. 마이키! 피해자들을 맡기겠다. 클리퍼드!』

세 명 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지만 뱀파이어에게 당한 만큼 후처리가 필요했다. 뱀파이어에게 물려 죽은 경우 이미 숨이 끊어졌다 해도 24시간 안에 뱀파이어가 되어 눈을 뜰 수도 있기에 확인사살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가족이 보는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인지라 인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동 중입니다!』

이어피스에서 가쁜 숨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스는 신경원은 아닐 거라 믿으며 정신없이 달렸다. 그는 달려가며 나이트 스코프를 위로 젖혔다. 마을에 벌어진 소동에 이미 여러 집이 불을 밝히고 있어 방해만 되었다. 

마을을 반쯤 가로지르자 언덕배기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둘 보였다. 누군가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으며 잭과 또 다른 에이전트 하나가 그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키이스는 그들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아닐 것이다. 저기 쓰러진 사람은 신경원이 아닐 것이다. 그는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자신까지 다섯. C팀은 희생자들과 함께 있으니 하나가 모자란다. 모자란 것은 분명 신경원일 것이다. 신경원이어야 한다. 그 사람은 그리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방향을 바꿔 곧장 횡으로 통과해 언덕배기로 향했다. 비탈을 따라 자세를 낮춘 채 달리며 작은 숲을 살폈다. 쓰러져 있는 에이전트에게 가까워질 즈음, 작은 숲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그의 눈에 포착되었다. 키이스는 몸을 바싹 낮추며 나이트 스코프를 내리고 아주 조금 상체를 일으켜 숲을 바라보았다. 키와 체격이 딱 신경원인 그림자가 보였다.

『퍼스트! 엄호하겠습니다!』

『닥치고 바닥에 바싹 엎드려 있어!』

그림자는 하나가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길 반복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또 다른 그림자가 따르며 계속 총을 쏘고 있었다. 그것 중 몇 발은 그대로 숲 밖으로 빠져나와 키이스를 비롯한 에이전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그것이 숲 가장자리까지 이동해 왔으나 모두들 비탈에 바싹 몸을 붙인 상태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빗나가는 총알도 총알이지만 뱀파이어와 신경원의 움직임이 빠른데다 나무가 불규칙적으로 위치해 있어 사격 위치를 잡기도, 목표물을 조준하기도 쉽지 않았다. 

『빌어먹을!』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그림자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림자의 손에 길고 삐죽한 것이 들려 있었다. 신경원이었다. 

신경원은 나이프를 든 채 뱀파이어를 향해 달려갔다. 총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던 뱀파이어는 신경원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곧장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신경원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달려들던 뱀파이어가 뒤로 나자빠졌다. 정황상 신경원이 총을 쏘다 포기하고 단검을 들고 달려드니 총알이 떨어진 것으로 알고는 덤벼든 것 같았다. 

설마, 자기를 미끼로 쓴 거야?

신경원의 실력이야 익히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끼쳤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신경원이 바닥에 쓰러진 뱀파이어를 향해 다시 총을 쏘았다. 뱀파이어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작은 숲을 가득 채웠다. 그것으로 끝일 줄 알았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던 뱀파이어는 사지를 떨다 말고 갑자기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신경원에게 달려들었다. 

『퍼스트!』

신경원과 뱀파이어의 몸이 얽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대여섯 차례의 격렬한 공방 끝에 두툼한 나무토막 같은 것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곧이어 신경원과 뱀파이어의 몸이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키야아아아아악―!

뱀파이어의 단말마가 이어피스를 뚫고 고막을 찔렀다. 이어진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모조리 집어삼켜버리는 어둡고 거대한 침묵이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위이잉 하는 이명을 일으켰다. 그 끝에서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작게, 전선을 타고 귓바퀴를 돌아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목표물. B1으로 확정.』

싸늘하다 못해 고드름이 뚝뚝 떨어질 듯한 신경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어 사이사이에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확인 사살 완료. A리더, 의료팀을 가능한 빨리 호출해주십시오.』

『이미 호출했습니다. 3분 후면 도착 예정입니다.』

키이스는 벌떡 일어나 신경원에게 달려갔다. 발끝에 무언가가 걸려 데구루루 굴렀다. 뱀파이어의 팔이었다. 신경원은 뱀파이어의 가슴에 박았던 단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퍼스트! 다친 데 없으십니까?』

『너는?』

『저는 이상 없습니다.』

『그럼 이리 와서 내 팔뚝 좀 묶어.』

신경원의 유니폼이 조금이지만 팔꿈치 아래쪽으로 찢어져 있는 것이 보았다. 순간 철렁―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빨리!』

키이스는 즉시 신경원에게 달려들어 시키는 대로 했다. 

『좀 더 위쪽.』

채혈을 위해 묶는 것처럼 베스트 한쪽에서 나일론 끈을 꺼내 팔뚝 위쪽을 묶었다. 

『구급키트 꺼내서 앰풀을 목이랑 팔에 놔줘. 내 거랑 네 거 전부. 상처 옆에 마취제도. 서둘러. 하지만 신중하게 해야 해.』

키이스는 신경원의 헬멧을 벗긴 뒤 단검을 꺼내 목 부분에서 손목까지 길게 유니폼을 찢어냈다. 그새 달려온 LA 지부의 에이전트가 그를 도와 남은 유니폼을 벗겨냈다. 키이스는 황급히 베스트 아래쪽 주머니에서 구급키트를 꺼내 신경원이 지시한 위치에 앰풀을 주입했다. 

목덜미에 두 개. 팔 위쪽에 두 개. 그리고 팔에 나 있는 두 개의 작은 ‘상처’ 주위에 나머지 여섯 개를 전부 박아 넣었다. 그리고 소독액을 꺼내 하나는 0.5cm, 다른 하나는 1~2cm 정도 되는 두 개의 상처 위에 주욱 부었다.

“차분히 잘했어, 키이스.”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칭찬’이 키이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기쁨보다 당혹감이 찾아들었다. 동시에 연수를 받을 때 수도 없이, 마치 표어처럼 외우고 외치던 말이 미친 듯이 맴돌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죽거나 뱀파이어가 된다.】

그것은 불문율이고 진리이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메스를 내 소독액으로 소독해.”

명령을 받은 대로 막힘없이 해낸 키이스지만 소독액으로 메스를 씻어낼 때쯤 되자 절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신경원의 팔뚝에 있는 상처는 어떻게 보아도 뱀파이어의 이빨에 긁힌 것으로 보였다. 정말로 긁힌 것뿐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 일전에 겪은 일가족 참살 사건이 떠올랐다. 팔에 5센티 정도의 상처를 입고 있던 안젤라 맥케인의 얼굴과 그 정도의 상처로도 종종 감염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던 신경원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키이스는 헬멧을 벗었다. 머리와 심장이 동시에 꽉 조여드는 것 같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키이스.”

“네….”

“정신 똑바로 차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당신은 이런 와중에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거지?

키이스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질문을 신경원에게 던졌다.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없었다.

“메스 이리 주고 상처에 라이트 좀 비춰줘. 브랜트…라고 했죠? 같이 라이트를 비춰주세요. 밝을수록 좋으니까. 아, 에이전트 헤일리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어깨가 빠지고 팔뼈가 바스라졌지만 일단 목숨은 건질 것 같습니다.”

“다른 이상은 없고요?”

“네.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봅니다.”

“다행이네요. 하아―, 뉴욕 B1은 찾기만 하고 놓쳤는데 왜 LA B1은 제멋대로 내 앞에 굴러오는 건지….”

“그쪽에서도 발견이 되었습니까?”

“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키이스는 신경원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라이트로 비추어보니 불행 중 다행인지 상처가 깊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젤라 멕케인의 상처보다 훨씬 얕게, 정말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손 부들부들 떨지 말고 가만히 비추고 있어. 메스 엇나간다.”

“에이전트 신,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 제가 직접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래 봬도 한때 의학도였거든요.”

신경원은 망설임 없이 작은 메스를 자신의 팔뚝에 가져갔다. 아무리 즉효성의 마취제를 주사했다 해도 자신의 손으로 제 상처를 도려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신경원의 손은 거침없이 작은 상처를 생살과 함께 크게 도려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가 솟아올라 줄줄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나머지 상처도 망설임 없이 깨끗하게 도려냈다. 보고 있는 사람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는데 신경원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1분쯤 있다가 피 색을 보고 새빨갛다면 끈을 풀어줘. 피를 좀 흘려야 하니까. 알았지?”

“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 이건 그냥 ‘평범한’ 응급처치야.”

신경원은 경구 투여용 약물을 꿀꺽 한입에 삼킨 후 제가 도려낸 팔을 꼼꼼히 살폈다.

“흐음. 내가 봐도 진짜 깨끗하게 잘 도려냈다. 오른팔이라 다행이야. 아등바등하며 인턴 생활한 보람이 있네.”

“…퍼스트.”

“응?”

“부탁이니까 제발…, 그렇게 덤덤하게 말하지 마세요.”

키이스는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거의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신경원은 피식 웃었다. 

“덤덤하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울어버리는 쪽이 좋아? 울든 말든 결과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데. 그래도 울까?”

“…….”

“아참, 이거 받… 아니다. 에이전트 브랜트, 이거 좀 받아주세요. 매뉴얼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신경원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글록을 주워 브랜트에게 주었다. 브랜트는 그것을 받아들며 신경원과 키이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키이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에이전트 브랜트. 원래는 제 파트너가 해야 하지만 아직 수습이어서요.”

“…아닙니다. 에이전트 신.”

이번에는 매뉴얼이라는 단어가 고막을 쿡쿡 찔렀다. 지금까지 신경원이 하거나 명령한 것은 전부 뱀파이어에게 물린 상처가 작거나 이빨에 긁혔을 경우 취해야 할 응급처치 매뉴얼을 따른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저렇게 담담하게, 제 손으로 해내는 사람은 없다고!

키이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무엇인가를 꾹꾹 억눌렀다. 

“키이스. 괜찮아.”

“…….”

“괜찮을 거야. 아마도….”

신경원의 목소리와 함께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전트 브랜트가 글록의 탄창을 갈아 끼우고는 장전을 하고 있었다. 키이스는 손을 내리고 에이전트 브랜트가 장전한 글록의 총구를 신경원의 머리로 가져다대는 것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꽉 다문 이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아직…, 그럴 만한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치우십시오.”

긁힌 부분을 메스로 도려내는 것처럼 에이전트 브랜트의 행동도 엄연히 매뉴얼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감염이 되었을 경우 언제 뱀파이어로 돌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죽는다면 필요 없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키이스. 가서 의료팀 왔나 확인해보고 이쪽으로 안내해줘.”

“퍼스트!”

“명령이다. 어서 가.”

“…….”

“가서 얼른 데려와줘.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더 도움이 돼.”

담담하게 들려온 마지막 말이 굳어 있던 키이스의 몸을 움직였다. 

“네. LA 지부의 긴급 호출에 응해서 작전에 임했는데 부상을 당했습니다. 물론 응급처치는 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만일의 경우에는 이전에 부탁드린 대로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 치프. 자꾸 같은 말 반복하지 마세요. 저 피곤합니다.”

키이스는 LA 지부 본부, 최상층의 어느 작은 방에 서 있었다. 전면의 유리창 너머 구금실에는 신경원이 침대 끝에 앉아 예들린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으음. 뭐 그건 그때 가서…가 아니라 치프가 원하시는 대로 해주세요. 아니요. 제 생각엔 뭐 별일 없을 것도 같은데요. 네. 네. 치프, 소리 지르지 마시라니까요.”

키이스의 시선에 구금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LA 지부의 에이전트가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다. 

“그럼. 네. 이만 끊겠습니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놓는 신경원의 얼굴빛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일체의 지혈을 하지 않은 채 조혈제와 수분만을 섭취하고 있는 탓이다. 그의 왼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조금씩 흘러나와 손가락을 타고 똑똑,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신경원의 표정과 말투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다. 죽음과 삶, 그 중간에 서 있음에도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는 듯 변함없이 태연했다. 

뱀파이어의 체액이 몸 안에 들어가면, 또는 이빨에 물리거나 긁히면 죽거나 뱀파이어가 된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사실’ 그 자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한다. 신경원과 같이 긁힌 상처를 즉시 도려내는 경우 꽤 높은 비율로 목숨을 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깨끗하게 도려낸다 해도 그전에 이미 몸 안으로 뱀파이어의 혈액이나 체액이 퍼져나갔을 수도 있기에 24시간 동안은 추이를 살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뱀파이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야 확인 사살을 해버리면 끝이지만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을 뱀파이어가 될지 모른다며 죽일 순 없는 노릇이다.

키이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45분 12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망연자실해 있던 시간과 응급처치를 하느라 흘려보낸 시간까지 하면 50분에서 55분 정도가 지났을 수도 있다. 그렇게 계산해도 아직 23시간이나 남아 있다.

“수혈. 안 하는 겁니까? 피 색이 저렇게 붉은데, 이제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요. 저러다 빈혈로 쇼크사 하면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에이전트 클리퍼드. 매뉴얼에 따르면 1시간은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기에야 피를 많이 흘린 것처럼 보이지만 동맥은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실혈양은 그리 많지 않아요. 응급처치라고 했지만 저도 저만큼 깨끗하게 상처를 도려낼…,”

“그건 이미 수차례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수혈 준비나 해주십시오.”

LA 지부의 의료팀 치프는 키이스의 서슬 퍼런 기색에 어깨를 움찔했다. 

“못 들으셨습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보유하고 있는,”

“제 피를 수혈해주시면 됩니다. 같은 혈액형입니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파트너를 선정하는 조건에는 ‘혈액형’도 들어간다. 가능한 같은 혈액형을 가진 에이전트를 파트너로 짝지어서 서로가 위험할 때 곧장 수혈용 혈액을 확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의료팀 치프는 잠시 기다리라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5분쯤 후, 그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착신되었다. 

“음. …두 분의 혈액형이 같은 건 사실이지만 데이터를 보니 에이전트 클리퍼드의 혈액은 어떤 사람에게도 수혈이 ‘불가’하다는 항목이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확인을 해보고 오겠습니다. 보관 중인 혈액이 없으면 저희 지부의 에이전트들 중에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몇 있으니 그들을 호출하도록 하죠.”

“괜찮습니다. 그냥 제 피를 수혈해주십시오. 그 불가라는 항목, 제가 건강이 좀 좋지 않을 때 기록된 것이라 지금은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의료팀 치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체 건장한 젊은이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경우라면 에이전트가 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거부하신다면 제가 직접 들어가서 혈관에 바늘을 쑤셔 넣을지도 모르니 알아서 하세요.”

“에이전트 클리퍼드!”

“준비해주십시오.”

키이스는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제지하려는 에이전트를 제치고 신경원이 있는 구금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에이전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가 신경원의 파트너인 것을 알아보곤 그냥 자리에 앉았다. 같은 에이전트니만큼 키이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

“수혈 때문에 들어왔어요.”

“아직 한 시간 안 됐어.”

“빈혈로 죽고 싶으세요?”

“그 정도로 많은 피를 흘리진 않았어. 또 이야기해야 해? 내가 의대 나온 거.”

“의사도 자기 병은 못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마, 그건….”

“혹시 또 모르잖아요. 그냥 수혈받으세요.”

“아직 한 시간 안 됐다고 말했다.”

“응급처치를 한 시점부터 따지면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모자란 시간은 채혈하는 시간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어요.”

“키이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당황하는 건 이해하는데 머리 식히고 제발 말 좀 들어.”

“퍼스트도 처음이잖습니까! 퍼스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마시고,”

“처음 아니야.”

“…네?”

“처음 아니라고. 난 5년차야. 5년 동안 얌전히 손가락 빨며 본부 사무실에서 잠만 잔 줄 알아?”

“……!”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봐. 내가 왜 평소에 이온 음료를 안 마시는지.” 

신경원이 테이블 위에 가득한 이온 음료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는데 의료팀 치프가 들어왔다. 그는 불만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경우를 종종 보았기에 키이스가 원하는 대로 그의 혈관에 굵은 바늘을 찔러 넣고 채혈을 시작했다. 

비어 있던 혈액 팩에 붉은 피가 들어차기 시작하자 의료팀 치프는 신경원의 상처를 확인하고 드레싱을 해주었다. 말라가던 피딱지가 떨어지고 다시 상처에서 피가 송송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지혈을 할 만한 타이밍은 아니다. 

“혹 견디시기 힘들면 수혈을 마치고 수면제라도 놔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콜 해주십시오.”

“네.”

의료팀 치프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알려준 후 키이스의 피가 가득 담긴 혈액 백을 떼어낸 다음 작고 얇은 시험관에 약간의 피를 더 채혈해 가지고 나갔다. 수혈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검사며 처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이스는 초조하게 의료팀 치프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에게는 마치 천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의료팀 치프가 돌아왔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새빨간 혈액 팩을 높이 매달고 침대에 누운 신경원의 왼팔에 바늘을 꽂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톡톡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신경원에서 빠져나가는 피의 양만큼 키이스의 피가 신경원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시죠, 에이전트 신? 이런 식으로 전혈 수혈하는 건 드문 일이라는 거. 에이전트 클리퍼드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현재 보유분 중에 에이전트 신의 혈액형과 일치하는 게 마침 똑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수혈을 하게 된 겁니다. 큰 문제는 없을 거라 봅니다만 혹시 모르니 상태를 좀 지켜봅시다.”

“알겠습니다.”

“가능한 마음 편히 하시고 누워 계십시오. 사실 수혈을 제외하고 상처 자체는 응급처치를 워낙 잘해두셔서 별일 없을 거라 봅니다.”

신경원은 의사의 지시대로 가만히 누워 수혈을 받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키이스 넌 이만 나가봐.”

“못 나갑니다.”

몇 번 더 나가길 강권했지만 키이스는 꿈쩍도 안 했다. 되레 의료팀 치프가 정확히 15분을 채우고 신경원에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도망치듯 구금실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키이스는 구석에 앉아 있던 에이전트에게 다가가 반 협박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그 총 제게 주십시오.”

“키이스! 당장 나가지 못해?!”

“아무리 그러셔도 못 나갑니다! 안 나갈 겁니다!”

키이스는 버럭 소리를 치고 만일의 경우, 신경원이 뱀파이어로서 눈을 뜰 경우 그를 사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에이전트에게서 총을 갈취하듯 빼앗았다. 그는 당사자보다도 훨씬 더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키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기관의 에이전트로 있는 한,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또 당할 수 있는 일이기에 막무가내로 나오는 키이스를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와 같은 경우 파트너가 그 일을 맡는 것이 기본이기도 했다. 

“나가.”

“23시간이나 남았어요. 23시간밖에 안 남기도 했습니다!”

신경원은 이제부터 멀쩡하게 살아남을 가능성과 죽을 가능성과 뱀파이어가 될 가능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23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로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키이스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자신을 서늘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신경원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손가락 끝이 닿자 저도 모르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제발 부탁이니까 나가라고 하지 마세요.”

신경원은 진통제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있겠지만 몸은 생살을 도려낸 고통에 그대로 반응을 하고 있는지 이마와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살짝 닦아내자 따스한 온기가 손가락 끝에 닿은 피부에서부터 손으로, 팔로, 심장으로 고스란히 흘러간다. 

그 온기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자 그간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감정이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언제 가슴속에 자리 잡았는지, 그게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던 감정이 싹을 틔워 맹렬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려던 ‘무엇’인가의 이름이 어떤 감정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이제 그는 절대로 신경원을 혼자 둘 수 없다. 아니, 그 자신이 신경원의 곁에서 떨어져 혼자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낼 거라면 신경원의 옆에서 함께 지옥을 헤매고 싶었다. 

“키이스.”

“…….”

“제발 나가. 너한테 그런 일 맡기고 싶지 않아. 명령이 아니야. 파트너로서 부탁하는 거야.”

키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말간 눈동자가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못 합니다. 왜냐하면….”

키이스는 신경원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다 얼굴을 천천히 내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경원의 입술에 제 입술을 아주 살짝 눌렀다 떼었다. 

어린아이 같은 버드 키스에 메말라 있던 입술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까만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이 눈물처럼 맺혔다. 

키이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하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합니다.”

“……!”

“사랑…하고 있어요.”

눈물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신경원의 앞에서는 눈물도, 울음도 터트릴 수 없었다. 태연하지는 못해도 굳건한 모습을 보여 신경원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키이스는 눈물 대신 아프게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이 빌어먹을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 걸까. 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는데, 조금 더 빨리 전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이제야 이렇게 선명하게 깨닫게 된 건지 모르겠다. 왜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답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퍼스트를 23시간 동안이나 혼자 고독하게 놓아둘 수 없는 이유를… 말씀드린 겁니다.”

그는 신경원의 뺨에서 손을 떼고 한 손에 들고 있던 글록을 눈앞에 들어 보였다. 그리고 보란 듯 장전을 했다. 철컥―소리와 함께 서글픔과 슬픔을 절망과 함께 내리눌렀다.

“그리고 만일, 퍼스트에게…,”

신경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키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금색 머리카락이 비쳐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23시간뿐이라면, 그 시간만이라도 온전히 제가 가지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도 그 시간을 양보하지 싶지 않아요. 마지막 1분 1초까지도.”

키이스는 글록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래도 나가라고, 안 된다고 하실 겁니까?”

당혹과 놀라움이 어른거리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키이스를 말없이 지켜본다. 키이스는 숨을 죽인 채 굳게 닫혀 있는 신경원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입에서 나올 말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길고도 짧은 침묵 끝에 신경원의 입술이 아주 조금 달싹였다. 하지만 키이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신경원은 그대로 입술과 눈을 모두 닫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이스는 옅은 미소를 흘리며 침대 맡의 의자에 조용히 허리를 내렸다.

신경원은 어지간한 것은 그냥 받아들이고 OK 사인을 낸다. 그러나 절대로 불가한 일에 대해서는 완강하고 명백하게 거절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때와 상대방의 선택에 맡기고자 할 때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러니까 이건 허락이다.

23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동시에 그와 동등한 무게의 절망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지옥 같은 23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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