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언젠가 한 번은 있을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있지만 기관에 들어온 에이전트들의 대부분은 가볍든 무겁든 최소 한 번 정도는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첫 전투에서 그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신입 딱지를 뗀 직후에 그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몇 년 후에 그런 경험을 하기도 했다.
신경원도 그 일을 피하지는 못했다. 기관에 들어와 알렌의 파트너가 되어 그의 보살핌과 구박을 받아가며 일년간 잘 버티다 새 파트너를 맞아 다른 섹션으로 옮기게 된 직후 경험했다.
때문에 키이스도 언젠가는 그런 경험을,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라 생각했고 동시에 그렇지 않은 부류에 해당하기를 바랐다. 대부분이 경험하는 일인지라 위험한 선만 넘지 않으면 징계를 받는 일도 피할 수 있으나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키이스는 아직 가르치고 배울 게 많긴 해도 동기들과 비한다면 상당히 우수했다. 순응도도 높았고 적응도 잘하고 있었기에 이대로만 간다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별다른 스트레스 요인도 없고 딱히 위험하지도 않은 작전 중에, 전조 하나 없이 갑작스럽게 발작을 해 날뛸 거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헬멧, 벗어.”
신경원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말했다.
숨이 차는지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키이스의 헬멧에서는 아직 닦아내지 못한 세척액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위협적인 신경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장 헬멧을 벗었다.
“베스트, 보호구도 전부 다 벗어.”
뱀파이어의 피와 체액은 인간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기관의 에이전트는 몸을 철저하게 보호할 수 있는 장비를 온몸에 걸친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유니폼은 방수처리가 된 천으로 만들어져 있고 눈만 뚫려 있는 마스크 역시 뱀파이어의 피가 튀어도 입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특수한 가공이 되어 있다. 그거로도 모자라 헬멧의 실드로 1차 보호되는 눈에 투명한 보안경까지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상태로 작전을 수행하고 뱀파이어의 피를 뒤집어쓰는 경우 작전 현장에서 곧바로 1차 세척을 하고 바로 벗어서 처리팀에게 넘기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다. 그러니까 지금 신경원의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고분고분 신경원의 말에 따랐다.
헬멧과 베스트 그리고 보호구가 차례차례 처리팀 에이전트의 손에 건네졌다.
“보안경도.”
키이스가 보안경을 벗고 마스크를 끌어내리는 순간이었다.
퍼억―.
신경원의 주먹이 상기된 얼굴을 날려버렸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키이스가 제 얼굴을 감싸 쥐려는데 맨발이 날아와 정강이를 걷어찼다. 맨발이니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툭 하고 귀엽게 차는 게 아니라 몸을 비틀며 발꿈치로 정확하게 제일 아픈 부분을 가격했다.
“큭―.”
주춤거리며 다리에 손을 뻗던 키이스는 다음 순간 신경원의 옆차기에 복부를 얻어맞고 휘청거리다 돌려차기에 목덜미를 얻어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누가 그렇게 멋대로 날뛰어도 좋다고 했어!”
신경원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키이스를 걷어찼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귀 쫑긋하고 있으라고! 정줄 놓지 말라고!”
퍽퍽. 신경원의 발이 연신 키이스를 가격했다. 그러다 분을 이기지 못한 듯 마구 밟아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퍼스트. 심정은 이해하는데 좀 심해.”
“시끄러워!”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신경원은 뒤에서 접근해 팔을 잡으려는 존의 가슴에 엘보 펀치를 먹였다.
“커억―.”
보지도 않고 날린 일격인데 급소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는지 존이 쿨럭거리며 물러섰다. 그 때문에 더 열이 오른 신경원은 3년은 묵은 이불 빨래를 하는 사람처럼 키이스를 가차 없이 차고 밟아댔다. 말리려던 동료들이 움찔하며 물러설 정도로 험악한 기세였다.
“네가 몸이 하나지 두 개야? 응? 아차하면 골로 가는 게 우리 일이야! 정신 바짝 차려도 모자를 판에 흥분해서 마구 날뛰면 뭘 어쩌겠다는 소리냐고!”
신경원은 살벌한 말투로 야단을 쳤다. 발꿈치로 맞으면 아플 만한 곳만 골라서 콱콱 지르밟았다. 간간이 신음이 들려왔지만 귀가 먹은 사람처럼 펄펄 날뛰었다. 하지만 신경원은 겉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세 개의 팀과 백업팀 두 팀이 동원된 위험도 C의 작전을 막 마친 참이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사살된 뱀파이어는 총 열하나. 모두 B3급의 최하급 블러드서커였다.
위험한 작전은 아니었다. 다만 중간에 포위망을 뚫은 일부 뱀파이어들이 주택가로 도주한 탓에 소총이 아니라 소음기가 달린 글록과 단검만으로 적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약간의 난점이었을 뿐이다. 신경원이야 기본 무기 자체가 글록과 단검뿐인지라 딱히 어려울 것이 없었다. 다른 동료들도 신경원만큼은 아니더라도 소총을 쓰지 못하는 작전을 수차례 경험했기에 역시 별 문제는 없었다.
소총이 없어도 대체할 무기 즉, 글록이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위험하지 않은 이상, 단검을 빼 드는 경우는 없다. 근접 전투에 이골이 난 선임들도 정말 단검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모두 글록만 사용한다. 즉, 글록과 단검을 양손에 들고 전투에 임하는 신경원이 별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경원도 처음부터 무작정 뱀파이어와 몸싸움을 벌이지는 않는다. 필요할 때만 단검을 사용한다.
최근 신경원은 간간이 투입되는 작전에서 키이스의 경험치를 올려주기 위해 그를 앞에 세운 채 작전에 임했다. 뒤에서 그를 철저하게 보호하면서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평소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키이스가 평소와는 달리 흥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이스는 천천히 이동하라는 신경원의 명령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스피드만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경원이었으나 집과 집 사이, 좁은 골목을 누비며 뱀파이어를 사냥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한순간 키이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놈은 소총을 어디엔가 던져놓고 글록과 단검만을 들고 날뛰었다. 신경원이 진정하라고,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신경원 역시 키이스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금방 깨달았다. 키이스가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흥분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말이다. 키이스는 글록으로 적을 제압하는 대신 신경원이 그랬던 것처럼 단검을 빼 들고 공격했다. 필연적으로 피가 튈 수밖에 없었다. 그 피가 놈의 흥분을 극대화시켰다.
전투에 도취되어 극도로 흥분해 모든 것을 잊고 내달리는 놈을 따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키이스는 아주 잘 싸웠다. 그의 실력은 거듭된 훈련으로 상당히 향상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움직임도 이전보다 많이 줄어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초기와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잘 싸웠으니 되었다고, 부상당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며 넘어가줄 생각은 없다. 파트너가 없다면 모르되 2인 1조의 팀으로 움직이는 한은 파트너의 존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파트너의 안전도 생각지 않고 멋대로 내달리며 싸우는 행위는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키이스는 뱀파이어를 사살하고도 보고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기본을 완전히 잊은 거다. 소총을 내던져버린 것은 더더욱 큰 문제였다.
“전투 시에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어! 알겠다고 명심하겠다고 대답했던 게 누구냐고!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 내 말이 우스워졌어? 응? 소총은 왜 내던져! 미쳤어? 그건 공격 무기인 동시에 네 생명줄이야. 그걸 왜 던져! 그것도 아무 데나 내팽개쳤잖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 환장했냐고! 이 멍청한 새끼야!”
신경원은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키이스의 배를 걷어찼다. 지켜보고 있던 캐리가 보다 못해 나섰다.
“그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다. 이제 그만해, 퍼스트.”
“상관 마!”
“퍼스트. 그래도 말이야….”
“참견하지 말라니까!”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주변의 눈도 좀 생각해야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넌 상관없어도 다른 사람은 있어.”
캐리는 라미레즈에게 부탁해서 가져온 체크 남방을 신경원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일단 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좀 입어.”
신경원은 반팔 셔츠에 타이츠 반바지만 입고 날뛰고 있었다. 추위를 별로 타지 않음에도 그의 팔뚝엔 소름이 오돌토돌 돋아 있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늦가을의 새벽 날씨가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기 때문이다.
“저놈 아직 흥분한 상태라 네 말이 귀에 잘 안 들릴 수도 있어. 일단 본부로 돌아가자. 진정이 됐을 때 차분히 말하면 알아들을 거야.”
“말귀 못 알아듣는 놈은 패야 해.”
“팰 만큼 팼잖아. 어이, 클리퍼드. 얼른 일어나.”
캐리는 제 파트너인 라미레즈에게 키이스를 도와주라고 하며 신경원의 어깨를 잡아 억지로 차로 끌고 갔다. 신경원은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소리를 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또 한 번 그런 짓을 하면 아주 뒤지게 패줄 테니까!”
버럭대는 신경원을 끌고 가던 캐리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겉으로는 화가 난 척, 흥분한 척하며 길길이 날뛰던 신경원이 너무나 순순히 끌려왔기 때문이다. 화가 난 건 사실이지만 반은 연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생한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신경원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이제 그만해. 너무 과하면 애 삐뚤어진다.”
“과하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신경원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을 들어 보였다. 급소만 골라 패고 밟고 찼지만 부츠를 신고 패지 않았으니 많이 봐줬다는 의미였다. 캐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게. 진짜 많이 봐줬네.”
“잘한다, 예쁘다 했더니 새끼가 벌써 군기가 풀려가지고는.”
“다들 한 번씩 겪는 홍역 같은 거고 일종의 통과 의례인데 그게 군기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다행이다. 위험도 높은 작전에서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어쩌긴. 바로 허벅지에 총알 한 방 갈겨서 병원 보냈지.”
캐리는 좋은 방법이라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래도 사람 눈이 그렇게 많은데 애를 그렇게 패면 어떻게 해. HRT 체면이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네가 올챙이던 때 좀 생각해봐라.”
“내가 뭘.”
“어이구. 다 잊었냐? 크리스마스 새벽에 유닛 전체가 목이 터~져라 너만 부르며 난리법석을 떨었던 거.”
“적어도 난 그때 혼자였어.”
“그렇지, 공사 양면으로 솔로였던 거 내가 아주 잘 알지. 이브 날엔 애인한테 차이고 크리스마스 새벽엔 파트너가 나자빠지고.”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아니. 클리퍼드 너무 야단치지 말라고. 그놈 요즘 뭔가 고민이 있는지 좀 우울해 보였는데, 그래서 오늘 발작을 일으킨 걸지도 몰라.”
“우울? 그놈이?”
신경원은 차에 탑승해 바지를 꿰어 입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한 키이스는 우울해한 적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만 보여줬다. 딱 한 번,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에 실핏줄을 달고 나타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분위기만 조금 가라앉아 보였을 뿐, 딱히 우울한 표정은 짓지 않았었다. 별일 아니었는지 금세 멀쩡해졌고.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오전에 만났을 때도, 첫 끼부터 거하게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서 고기를 썰어 먹을 때도 앞에서 방긋방긋 웃어가며 나름 재롱을 피웠다. 우울한 기색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 앞에서야 항상 광대를 하늘로 승천시킬 기세로 웃어대니 모를 만도 하지. 너만 앞에서 사라지면 그놈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
“클리퍼드 그놈,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한 마디도 안 해. 녀석이 꼬리치며 살랑살랑대는 상대는 너 하나뿐이다.”
“…….”
“예의를 패시브 스킬로 장착한 놈이라 절대 무례하게 굴지는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너한테 그러는 것처럼 사근사근거리지는 않아. 과장을 좀 보태서 가끔은 이중인격으로 보일 정도라고.”
“…그랬어?”
“응. 그랬어. 그리고 며칠 전부터는 너만 없으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모니터만 노려보더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은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잘생긴 놈이 표정을 굳히니 안 그런 놈보다 배는 더 살벌해 보이더라.”
“…….”
“앞에서 항상 배실배실 웃는다고 마냥 속편한 놈이라 생각하지 마. 세상에 고민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얼굴로는 티가 안 나도 속으로 스트레스 쌓아놓고 사는 사람 많아. 퍼스트 너만 해도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도 인식 못 하는데 몸이 알아서 반응하잖아.”
캐리는 신경원의 어깨를 토닥였다.
“클리퍼드도 어쩌면 그런 타입인지도 몰라.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라도 좀 나눠봐라. 그놈 너 잘 따르잖아. 위로가 될지도 몰라.”
“무슨 이야기를 그리 진지하게 하셔. 사람 하나 걸레짝 되도록 밟아놓고.”
캐리의 말에 막 대답을 하려는데 반쯤 열려 있는 뒷문을 열고 존이 얼굴을 디밀었다. 그는 차에 오르며 명치가 아파 죽겠다며 신경원을 구박했다.
“그러게 왜 말려. 팰 만해서 팬 건데.”
“자기 파트너가 우중충한 아우라를 풍기며 궁상떠는 줄도 몰랐으면서 뭘 잘났다고.”
존의 말에 신경원은 쳇―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앞에서는 항상 웃고 있는데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며 구시렁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존과 그의 파트너, 그리고 캐리가 동시에 그를 쥐어박았다.
“아프거든!”
“아프라고 때렸거든! 그리고 나도 아팠거든!”
존은 명치를 맞았을 때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며 신경원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때 키이스가 훌쩍, 차 안으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그는 곧장 신경원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신경원의 머리를 잡고 있는 존의 손을 하나씩 떼어냈다.
“앞으로는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중하지만 뭔가 묘하게 차가운 말투로 말한 그는 신경원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곤 두 손을 마주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죄송했습니다.”
“…….”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신경원에게 어서 빨리 대답하라고 날카로운 눈빛 화살을 쏘아댔다. 신경원은 헛기침을 하며 ‘그래’라고 짧게 답했다. 곧장 눈빛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이씨. 내가 뭘 잘못했다고! 파트너인 나도 내팽개치고 날뛴 건 이놈이잖아!”
“맞을 만큼 맞고 쪽도 팔릴 만큼 팔리고 사과도 했는데 대답이 고작 ‘그래’가 뭐냐. 최소한 앞으로는 그런 일 없었으면 한다. 내가 잘 보살펴줄게. 그 정도는 해야지.”
“이만하면 잘해주고 있는 거거든?”
“아니거든? 나도 알고 캐리도 아는데 너만 생판 모르고 있었거든?”
“그게 내 탓이야?”
“그래! 니 탓이다!”
존이 눈을 부라렸다. 신경원은 또 칫―하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신경원이 입을 다물자 차 안은 조용해졌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키이스의 일도 일인지라 누구도 가볍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라미레즈가 뒤늦게 차에 올랐고 그들은 그대로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보고서 써. 그리고 이건 시말서랑 경위서.”
신경원은 서식을 찾아 프린트 한 다음 풀죽은 강아지마냥 자리에 앉아 있는 키이스에게 넘겨주었다.
“별일 없었으니 다행이지만, 시말서랑 경위서는 써야 해. 총기를 아무 데나 방치한 것도 큰 문제지만 파트너와 함께 행동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하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네. 죄송합니다.”
“사과는 이제 됐어.”
신경원은 축 내려앉아 있는 각진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다음 제자리에 앉았다.
그의 보고서는 짧았다. 전투다운 전투는 해보지도 못하고 목이 터져라 키이스를 부른 게 전부인지라 쓸 말이 없었다. 경위서와 시말서는 그도 썼다. 파트너인 키이스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왜…, 퍼스트가 시말서를 쓰는 겁니까?”
경위서를 먼저 쓰고 시말서 서식에 이름을 적어 넣는데 키이스가 다가와 물었다. 언제 탕비실에 다녀왔는지 그의 손에는 따스한 커피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신경원의 몫이라는 듯 데스크 위에 내려놓는다.
“파트너이자 사수로서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보호하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써야지.”
에이전트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무조건 2인 1조로 팀을 이루어 움직여야 한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이다.
에이전트의 숫자가 모자란 지부에서야 단독으로 작전을 전개하기도 하나 기본은 기본. 달리 예들린이 싫다고 발악해대는 신경원에게 새 파트너를 붙여준 게 아니다. 삼 개월 넘게 신경원을 혼자 두었던 것 자체가 특이한 경우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죄송,”
“됐다고 했지.”
“그래도 죄송합니다.”
키이스는 처음으로 듣는 침울한 목소리로 사과를 하고는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화가 나는지 아랫입술을 깨물다 프―하고 입술 사이로 숨을 내쉰다. 자책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캐리의 조언대로 끌고 나가서 술이라도 한잔하며 팬 것은 사과하지 않겠지만 그가 겪은 것은 일종의 통과 의례와 같은 것이니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위로를 해줘야 하나 싶었다.
총기를 내동댕이친 것만큼은 물론 제외, 제대로 한소리 더 해야겠다. 맡은 일이 일이니만큼 기관의 규율은 군대와는 달리 좀 느슨하다. 군대였다면 당장 영창으로 보내지든가 군사재판에 회부됐을 일이다.
흐음. 평소처럼 퇴근해서 한숨 자고 7시쯤 보면 되겠지.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키이스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다. 백이면 백 키이스가 먼저 좋은 식당을 찾았다며 반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긴 해도 거절하지 않고 끌려가서 신나게 먹고 오니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 그냥 가볍게 밥이나 먹자 하면서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아도 별 문제는 없으리라 본다.
“클리퍼드.”
“네.”
“이따 퇴근하고 한숨 푹 잔 다음 7시에 데리러 와. 식사하고 술이나 한잔하자.”
신경원은 시말서에 악필을 휘갈기며 툭― 키이스에게 말을 던졌다. 당연히 “네!” 하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 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키이스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정말입니까?”
“내가 빈말 하는 거 봤냐?”
“아, 아니요.”
“그럼 왜 그런 표정인데?”
키이스는 멍하기도 하고 놀란 거 같기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그게 뭐.”
“…….”
키이스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침울했던 표정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곧 눈꼬리가 사르르 풀어지며 미소가 피어오른다.
“먼저 식사를 하자고 청해주신 게 처음인 거 아십니까?”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네요.”
키이스는 흠흠 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느껴진다. 순간 신경원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왜 부끄러워하는 건데! 별것도 아닌 걸로 그러니까 나까지 부끄러워지잖아!
“헛소리 하지 말고 얼른 그거나 써라.”
“다 썼습니다.”
키이스는 평소와 같이 상큼하게 웃으며 시말서와 경위서를 내밀었다. 침울하던 기색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
“쇠고기는 항상 먹으니까 돼지고기나 생선을 먹으러 갈까요? 전에 그 스시 레스토랑은 어떠세요?”
“쇠고기님은 매일 영접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고귀하신 분이다.”
“그럼 불고기… 아니다, 괜찮은 프렌치 레스토랑을 찾아놨는데 거기로 가시는 건?”
겨우 밥 한 끼 먹자는 소리에 감동해가지고는 사람들 앞에서 두드려 맞고 밟힌 것도 잊고 해맑게 방글거리는 놈이 뭘 그리 우울해했을지 모르겠다.
신경원은 선선히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랍에 넣어놓았던 핸드폰을 꺼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경원은 키이스가 골라놓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가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지?”
핸드폰에 부재중 통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업무용으로 지급받은 것이지만 사적으로도 마구 쓰는 핸드폰이다. 그래봤자 신경원에게 사적으로 연락을 할 사람은 거의 없다. 사촌 동생들, 집주인, 그리고 최근에 키이스가 메시지를 종종 보내는 정도가 전부. 키이스는 계속 함께 있었으니 패스고 집주인은 집세를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연락을 하는 법이 없었다. 남은 것은 두 사촌 동생뿐이다.
“무슨 전화를 야밤까지….”
부재중 통화의 개수는 무려 서른 개가 넘었다. 낯선 번호 두 개를 제외하면 모두 재원이가 보낸 것이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갑작스레 터진 사건을 브리핑 받고 그대로 나갔기 때문에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신경원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10분에서 30분에 한 번씩 기록되어 있다. 시차가 있으니 그쪽에서는 오후 5시 무렵부터 계속 전화를 했다는 소리다.
확인해보니 부재중 통화 말고도 메시지가 수신되어 있었다. 그것도 열 개가 넘었다. 역시 재원이가 보낸 것이었다. 신경원이 바쁘다는 것을 알기에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일절 전화도 안 하고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는 아이들이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불길한 마음에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형. 일이 좀 생겼어. 메시지 보면 전화해줘.』
『많이 바빠? 정말 미안한데 그래도 전화 좀 받아줘.』
『아무 때라도 좋으니까 메시지 보면 전화해줘.』
『형, 아무래도 일이 커질 것 같아. 제발 전화 좀.』
『이러다 해원이 퇴학다할ㅈㅣ도 모라. 형. 어떠ㄱ 해. 저ㄴ하 조ㅁ.』
메시지를 주욱 읽어 내려가던 신경원은 다급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오타를 보고 안색이 변했다. 그는 낯선 두 개의 번호를 확인했다. 낯설긴 하지만 눈에 조금 익은 번호다. 그는 즉시 지갑을 찾았다. 그리고 안에 넣어둔 명함을 탈탈 털어냈다.
“퍼스트, 갑자기 왜 그러세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신경원은 데스크 위에 흩뿌려진 명함을 뒤적였다. 그리고 한 번호의 주인을 찾아냈다. 해원이의 풋볼팀 감독의 연락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 망할 새끼들.”
신경원은 즉시 재원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3시 반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LA는 아직 자정 무렵인지라 재원이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잠깐만. 나가서 받을게.』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목소리를 잔뜩 죽인 해원이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형! 바쁜 건 알지만 어떻게 저녁 내내 전화를 안 받을 수가 있어. 먼일 생기면 무조건 전화하라고 해놓고! 아침까지도 연락 없으면 예들린 아저씨한테 전화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닥치고 무슨 일인지 말해.”
『하아. 해원이가 풋볼팀 선배랑 붙었어. 평소에도 해원이 괴롭히던 미친 새낀데 그 새끼가 해원이를,』
“해원이는 괜찮니? 어디 다친 데 없어?”
『한 대 얻어맞아서 얼굴이 좀 부었지만 괜찮아. 근데 그 선배가 좀 크게 다쳤어. 해원이는 그냥 밀쳤을 뿐이라고 하는데 그 자식이 넘어지면서 뭘 어떻게 했는지 팔뼈가 부러졌대. 그래서 난리가 나서 감독님이랑 학생지도 선생님이 형한테 연락을 했는데 통화가 안 되는 바람에….』
“그건 나중에 듣자. 해원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어?
『그 선배 새끼 엄마라는 여자가 와서 해원이를 쥐 잡듯 잡았어. 경찰서에 가야 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일단 감독님하고 코치님이 중재를 하셔서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저녁 내내 침울해하다가 일찍 잠들었어. 하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몰라. 그 선배라는 새끼가 좀 있는 집 자식이라 변호사 대동하고 뭐 이런저런….』
“알았어. 가능한 빨리 갈게.”
『올 수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갈게. 기다려.”
『알았어. 미안해, 형. 해원이도 되게 미안해했어.』
“아니야. 그만 끊자. 자라.”
『응. 기다릴게, 형.』
신경원은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위층으로 달렸다. 다행히 예들린은 자리에 있었고 사정을 이야기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퇴를 허가해주었다. 필요하다면 하루 정도 더 휴가를 주겠다고도 했다. 한때 아이들의 임시 후견인을 맡았던 탓인지 변호사까지 필요한 일이라면 연락을 하라는 말도 해주었다. 신경원은 감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언제 따라왔는지 키이스가 우두커니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촌 동생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어.”
신경원은 대답을 하며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 위해 다급히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졸졸 신경원을 따라온 키이스는 의자 등을 짚으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진짜 곧장 LA로 가시려고요?”
“어.”
“왜 퍼스트가 가시는 겁니까. 그 애들 부모님은 어쩌고요?”
키이스의 질문에 신경원은 반사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대답했다.
“나밖에 없으니까.”
“네?”
“애들에겐 나밖에 없다고. 젠장, 왜 이렇게 느려!”
신경원은 마우스를 던지며 성질을 냈다. 하지만 이내 마우스를 고쳐 쥐고 북마크를 눌러 비행기 티켓 예매 사이트를 열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키이스는 핸드폰을 들고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잠시 후 아래로 내려온 그는 신경질적으로 클릭을 해대고 있는 신경원의 손목을 잡았다.
“놔. 바빠.”
“알아요. 치프께 허락받았습니다. 가시죠.”
“뭐?”
“소형 전세기를 수배해달라고 해뒀습니다. 다른 공항이라면 몰라도 JFK라면 관제센터 직원도 꽤 일찍 출근할 테니까 가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이륙할 수 있을 거예요.”
뜻밖의 말에 신경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가실 겁니까?”
“아니, 가.”
벗어놓은 체크 남방을 집어 들자마자 키이스가 손목을 당겼다. 신경원은 정신없이 그에게 끌려… 아니, 기를 쓰고 따라갔다.
* * *
급히 수배한 전세기는 상당히 작은 기종이었다. 좌석이 달랑 6개뿐으로 편의시설은커녕 오직 비행에만 목적을 두고 제작된, 키이스의 입장에서는 수송기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망할 회장의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회장의 제트기는 유럽에 가 있었다.
이참에 자가용 제트기를 하나 사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준다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비행기를 타고 이리저리 대륙을 누빌 일도 없고 싸돌아다니는 취미도 없는지라 사양했었는데 후회가 된다.
사준다고 할 때 괜찮은 걸로 골라서 받아둘걸. 그래! 이번 기회에 그냥 적당한 걸로 하나 사두는 게 좋겠다. 신경원과 함께 또 언제 LA에 날아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퍼스트, 시장하실 텐데 이거라도 드시죠.”
키이스는 종이봉투에서 햄버거를 꺼내 내밀었다. 이륙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수행비서도 겸하고 있는 운전기사가 사 온 것이다. 작은 비행기 안에 햄버거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신경원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미간에는 주름이 깊이 패어 있었고 연신 한숨을 쉬었다. 얼굴색도 좋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각해서 말을 걸기가 힘들 정도였다. 공항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랬고 이륙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내 그랬다. 그나마 비행기가 이륙하자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두 개이던 미간의 주름이 하나로 줄어들었다.
키이스는 얼음이 다 녹아가는 콜라 대신 봉투를 뒤져 생수 한 병을 꺼내 신경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사촌 동생들이 다친 겁니까?”
“…한 대 맞기는 맞은 모양인데 다친 곳은 없대.”
“다행이네요.”
신경원은 조금 자라서 이마를 덮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끌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터 계속 다닌 학교라서 애들 사정이 다 알려져 있는데도 그냥 둔 내 잘못이다 싶어. 역시 뉴욕에 자리 잡았을 때 데려왔어야 했는데.”
“사정… 이요?”
“응. 육 년 전쯤에 애들 부모님, 나한테는 큰삼촌 부부가 돌아가셨거든. 큰삼촌 말고도 같은 자리에 있던 내 부모님이랑 큰형이랑 할아버지, 작은삼촌네 식구를 포함해 전부… 다 돌아가셨어. 큰 신문은 아니지만 지역 신문에 보도가 됐을 정도로 큰 강도 살인사건이었던 터라 소문이 퍼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지.”
신경원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이스는 혹시나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퍼스트… 혹시 그 사건…….”
“응. 맞아. 뱀파이어에 의한 전형적인 일가족 참살 사건.”
뱀파이어에 의한 일가족 살인 사건은 대부분 무장 강도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포장된다. 정부에서 뱀파이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암암리에 퍼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뱀파이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정부에서 관리를 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먹이로 삼는 포식자, 뱀파이어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그들의 입을 자연스럽게 막고 있었다.
“할아버님 생신 때문에 일가족이 전부 모였었는데, 애들은 그때도 기숙사에 있었어. 어린애들에게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일요일 아침에나 데리러 가기로 했었거든.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지.”
“퍼스트는… 요?”
“나는 그때 볼티모어에서 와서 좀 늦게 도착한 바람에 살았고.”
“…….”
“그런 얼굴 하지 마. 기관에는 나보다 훨씬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많아.”
신경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실제로 기관에는 신경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처절한 사연을 가진 에이전트가 꽤 있었다.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직업을 때려치우고 기관에 투신한 사람도 많다. 신경원의 케이스는 그의 말대로 정말 아주 흔한 케이스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흔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사건이 터진 직후에 바로 애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내가 다친데다가 약간이지만 쇼크를 받아서 한동안 병원에 있었거든. 어영부영하다 시기를 놓쳤어. 그래서… 아니다. 옛날이야기는 이쯤으로 끝낼게.”
신경원은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싶었지만 그대로 끝을 맺었다. 심정 같아서는 좀 더 자세히 캐묻고 듣고 싶었지만 참았다. 묻는다 해도 더 이상 말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억지로 캐묻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인사가 늦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좀 당황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좀 더 편하게 모시고 싶었는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좁아서 불편하시죠?”
시트야 널찍하고 좋지만 비행기 자체가 워낙 작아 운신할 공간 자체가 없다. 게다가 엔진 소음도 크게 들리고 기류에 따라 마구 흔들리기도 했다.
“아니야. 덕분에 일찍 도착할 수 있게 된걸. 신세 많이 진다.”
“신세라뇨. 저야말로 이런 일에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좋은걸요. 오늘 폐도 많이 끼쳤고…. 그런데 동생분 사정을 좀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전 일 말고요. 누구한테 왜 맞은 건지.”
“…그게…….”
질문을 하면 짧게 단답형으로 답하거나 아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이 기본인 신경원이다. 그런 사람이 말을 꺼내다 말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사정이 좀 복잡한 모양이다.
“가서 정황을 좀 더 들어봐야 자세히 알게 되겠지만…. 대충 짐작이 가.”
신경원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곤 ‘그래서 고민이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키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비싼 사립학교 다녔지? 동양인은커녕 흑인도 몇 없는.”
“네.”
몇 없는―이 아니라 아예 없었지만 비싼 사립학교를 다닌 것은 확실하다.
“재원이랑 해원이가 다니는… 아, 애들 이름인데, 아무튼 애들이 다니는 학교가 그런 학교야.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동양인 학생도 꽤 되고 히스패닉이나 흑인들도 꽤 많지만 그래봤자 전체 학생수의 10%도 안 되는 학교지.”
키이스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사립학교’라는 단어와 ‘동양인’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신경원이 난감해하고 고민하는 이유를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인종차별과 관련된 일이라고 추측하시는 거군요.”
“맞아. 해원이가 가을학기부터 풋볼팀에 들어갔어. 프로선수를 희망하는 게 아니라 그냥 취미로, 워낙 풋볼을 좋아하는 애라 선선히 그러라고 허락해줬는데…. 후우―.”
신경원의 한숨은 키이스에게 바로 전염되었다. 왜 하고 많은 스포츠 중 하필이면 풋볼을 선택한 걸까. 유색인종이 하기엔 참 이래저래 난관이 큰 스포츠가 풋볼이다. 흑인 중에서도 훌륭한 플레이어가 배출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풋볼은 백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스포츠였다. 피지컬이 좋은 흑인들도 어지간해서는 관문을 뚫기 힘든데 동양인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다.
지역의 유명한 사립학교와 동양인 학생, 거기에 풋볼팀이라니, 인종 차별로 인한 트러블이 쉽게 일어날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다. 어른들도 그 문제만큼은 제대로 자제를 못 하는데 나이 어린 아이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원색적이고 원초적이며 잔인하게 구니까.
“성질이 좀 급해서 얌전하다고는 못해도 솔직하고 착한 애야. 욱하는 성격인지라 어릴 때는 사고도 좀 쳤는데 자기가 사고를 치면 보호자인 내게 연락이 간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는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어. 그런 애가 ‘선배’와 싸웠을 정도면 분명 뭔가 큰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게다가 어쩌다 상대의 팔이 부러진 모양인데, 그 부모가 와서 좀 난리를 크게 피웠나 봐. 변호사 운운하기도 한 모양이고….”
“변호사라….”
키이스는 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굴렸다. 상대가 변호사를 부른다고 해봐야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본다. 이쪽에서도 변호사를 쓰면 그만이니까. 다만 그 변호사의 고용주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냐는 것이 변수로 남는다.
자식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 싸움이 나고 다친 것으로 변호사 운운하는 정도의 집안이라면 필시 만만치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런 것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일수록 체면이며 권위에 집착하고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키이스는 그런 사람을 꽤 많이 봤다.
“제가 그런 쪽으로 쓸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붙여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걸 왜 네가 해. 네게는 이미 비행기만으로도 크게 신세를 졌고―,”
“압니다. 알아요, 퍼스트.”
키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차갑게 식은 신경원의 손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빼려는 듯 움찔했지만 꽉 쥐어버렸다.
“제 도움을 바라며 말씀하신 거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전화 한 통이면 끝나는 일인걸요.”
“어려운 일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거든? 이건 내 문제, 우리 가족의 문제고… 나는 네게 민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너한테 말한 건 그냥….”
“알고 있다니까요. 제가 물어봐서 ‘그냥’ 대답하신 거죠. 그러니까 저도 단순히 ‘그냥’ 돕겠다는 건데, 안 됩니까?”
“클리퍼드.”
“아시다시피 제가 사립학교를 다녔잖습니까. 거기에 쓸데없이 돈 많은 부잣집 아들이기도 하고요. 그런 부류를 상대하는 데는 퍼스트보다 제가 더 전문가입니다.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제가 학창시절에 말썽을 피웠다는 건 아니니까요.”
“…….”
“그리고 조금 전에 민폐라고 하셨는데, 그런 말씀 하시면 저 섭섭합니다.”
키이스는 상처받았다는 듯 자유로운 손을 가슴에 얹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 본 신경원은 난감해하는 와중에도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말이야, 클리퍼드.”
“잠깐요. 일단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
“오늘 저는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그거야말로 퍼스트에게 ‘민폐’를 끼쳤다고 해도 좋을 일이었습니다. 그걸 보상하고 싶습니다.”
“클리퍼드. 그거랑 이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야.”
“그렇죠. 다른 일이죠. 하지만 제 입장에선 방법에 따라 같은 선상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어서요. 까놓고 말해 뭐든 퍼스트께 해드리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키이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로 뭐든 하지 않으면 잠도 안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전투에서 흥분에 휩싸여 폭주를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신을 놓았던 기억은 없다. 이어피스를 통해 들려오던 신경원의 말을 듣지 못한 적도 없다. 그저 자제심이 살짝 흐트러졌을 뿐이다. 그간 향상된 실력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이 좀 있었고 신경원처럼 단검과 글록만을 가지고 전투에 임해보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그래서 발목을 잡아대는 자제심을 무시하며 한번 날뛰어본 것이다.
그 결과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개처럼 맞아버렸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한다. 덕분에 한계치까지 쌓여 있던 스트레스도 확 날렸고 제 실력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동안 신경원에게 땄던 점수가 마이너스가 된 것 같아서 내심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어떤 수준의 일을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마이너스가 된 점수를 플러스로 돌려놓을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도와드리게 해주세요.”
“…….”
“그래도 영 신세를 지는 것 같아 찜찜하시면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게 제공해주시면 됩니다. 한두 개 정도.”
“반대급부?”
“네. 예를 들면… 음, 그게 좋겠네요. 클리퍼드 대신 ‘키이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인마, 그게 무슨 반대급부가 돼.”
“저에겐 충분한 반대급부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만큼 서로의 관계가 친밀해졌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
“그리고 또, 뭘로 할까.”
“너 지금 장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 엄청 심각하거든?”
“설마요.”
키이스는 싱긋 웃고는 얼른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하나는 절 파트너로 인정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너 내 파트너가 아니라 다른 사람 파트너였냐? 무슨 헛소리를―.”
“절 믿어달라는 의미입니다. 파트너로서.”
“하―! 네가 지금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 줄 알아? 소총을 아무 데나 집어던지고 파트너인 나도 무시하고 뛰쳐나갔던 주제에!”
신경원은 키이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잘못했습니다. 전적으로 제가 못난 탓입니다. 반성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죽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신경원의 손을 더욱 꽉 쥔 키이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신경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가 이토록 진지한 눈빛으로 키이스를 바라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갈증까지 일어났다. 보면 볼수록 더 강하게.
“진심입니다. 그러니까 도와드리게 해주세요.”
키이스는 힘을 주어 말했다. 거짓이라고는 한 옴큼도 없었다. 신경원은 잠시 키이스를 더 바라보다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짧지만 긴 침묵이 키이스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낮은 한숨이 신경원의 입에서 길게 터져 나왔다. 혹시 거절하려는 건가 싶어 뭐라고 더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신경원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알았어.”
“……!”
“다만!”
허락의 말에 환하게 웃으려던 키이스는 곧바로 들려오는 신경원의 단호한 말투에 움찔했다.
“이건 절대 네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야. 아까 말했듯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네.”
“등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파트너라면 사생활에서 일어난 곤란한 일도 얼마든지 터놓고 말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이라는 전제하에, 그러니까… 파트너라서, 믿을 수 있는 파트너이니까 할 수 있는 부탁.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어. 그리고 이제 손 좀 놔라.”
“하하. 네.”
키이스는 굳은 어깨를 펴며 환하게 웃었다. 신경원은 키이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지만 키이스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눈치 채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런 의미에서 클… 키이스.”
“네!”
“너도 내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지금은 없는데요?”
“…듣자하니 근래 좀 우울해했다며. 그럴 만해서 그런 걸 테고,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벌써 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솔직히 다른 사람에게서 ‘내’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거,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어.”
“아―. 그게…. 죄송합니다. 별일이라면 별일이고, 별것 아니라면 아닌 일이어서요.”
“그럼 말해.”
기꺼이 들어주겠다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두들겨 패주겠다는 그런 박력이 느껴진다. 키이스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제가 생각했던 현실과 실제 현실이 예상보다 너무 많이 달라서….”
맹세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없는 70%의 진실은 가슴에 묻어두고 말할 수 있는 30%의 진실만을 입에 담았다.
“가소롭다고 하실 수도 있고, 제 자랑을 한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래 봬도 제가 아카데미에서나 웨스트포인트에서나 꽤 좋은 평가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제게 부족한 것은 경험뿐이다. 그렇게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관에 들어와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키이스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자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신경원뿐 아니라 모든 선임요원들을 보며 제 부족한 부분을 나날이 깨달아가고 있음을.
“자만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이래저래 스스로가 좀 우습더라고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고 그래서 아주 조금….”
“우울해졌다?”
“네. 하지만 많이는 아닙니다. 그냥 조금이었습니다.”
신경원은 고개를 숙이고 제 턱과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뭘 생각하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을 좀 빌려서 자기 자랑을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지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에이전트야. 다른 동기나 선임들을 제치고 먼저 시니어가 됐을 정도로. 그건 물론 경력보다는 ‘현장 지휘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지만 내 나이와 경력을 생각하면 이례적으로 빠른 진급임에는 틀림이 없어. 그런 부분을 포함해서 비교 대상을 ‘나’로 하면 어지간한 에이전트들은 전부 우울증에 걸려서 땅을 파야 해.”
“…….”
“나를 목표로, 롤 모델로 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비교하지는 마. 나에겐 내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고 네게는 네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거니까. 무엇보다 너는…, 오늘 일을 제외한다면 제법 잘해내고 있어.”
“……!”
“그러니 오늘 일 잘 반성하고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 우울해하며 땅 파고 스트레스 받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신경원의 말은 위로라고 하기엔 좀 딱딱했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경원은 칭찬에 무척이나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법 잘해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키이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뭔가 뭉클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입을 벌리면 그것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무척이나 아까울 것 같았다. 속에 담아두고 오래오래 곱씹고 싶었다.
“하지만 또 오늘 같은 짓을 하면 봐주지 않고 곧바로 허벅지에 총 한 발 갈겨서 병원에 보내버릴 거니까 정신 바짝 차려. 농담 아니다.”
신경원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던 것이 못내 쑥스러운지 조금 가벼운 말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러곤 바로 등을 시트에 기대고 살짝 눈을 감았다. 더 할 말은 없다는 몸짓이었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얼굴선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대와 고집 있어 보이는 입술과 동양인치고는 큰 눈에 긴 속눈썹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 * *
“슈트는 가능한 어두운 색으로. 타이는 화려하고 세련된 것으로. 셔츠는 기본 스타일로 하고 소재는 최고급으로 해주십시오.”
신경원은 화려하게 꾸며진 매장 한가운데 서서 매장 직원들에게 명령조로 주문을 하고 있는 키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주문에 화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여자들이 넓은 매장 안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그건 너무 베이직한 스타일입니다. 좀 더 라인이 슬림한 세련된 것으로.”
직원 중 하나가 가져온 슈트를 보고 키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곧 다른 직원들이 각자 두 벌의 슈트를 선보였다.
“오른쪽. 아, 그것도 좋을 것 같군요.”
키이스가 손짓을 하자 행거에 슈트 두 벌이 걸렸다. 곧 석장의 셔츠와 한 벌의 슈트가 더 걸렸고 넥타이는 다섯 개나 걸렸다.
전세기가 LAX에 도착한 것이 오전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공항 활주로에는 이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운전사가 딸려 있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도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운전사가 모는 진회색의 벤틀리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신경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전세를 낸 듯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묵묵히 식사를 했다.
사실 아침 8시라는 시간은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학교로 가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연락을 하려 해도 최소한 9시는 넘겨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일찍 학교에 나와 있을 것 같은 풋볼팀 코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키이스에게 신세를 지기로 한 이상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키이스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일에는 처음부터 변호사가 나서서 모든 연락과 처리를 담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이다.
키이스는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간간이 통화를 했다. 변호사, 법률자문, 인종차별, 폭력사건, 의사, 진단서. 그런 단어들과 함께 톰슨이라고 하는, 지난번에 얼굴을 잠깐 보았던 사람의 이름이 계속 키이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30분간 식당에서 시간을 보낸 키이스는 ‘전투복’을 갖추어야 한다며 신경원을 무작정 끌고 현재의 매장에 도착했다. 상류층임에 분명한 ‘적’은 신경원의 옷차림이 조금만 허술해도 얕잡아 볼 거라면서 말이다.
“입어보시고 제일 몸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걸 선택하시면 됩니다. 바로 입고 나오세요. 기성품이라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양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죄송하다고 하지 마.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일이잖아.”
조금 늦게 도착한 남자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신경원을 탈의실로 안내했다. 그 역시 제대로 된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딱 봐도 ‘톰슨’이라는 남자가 손을 써 개장시간도 아닌데 매장을 열어 손님을 받게 한 것 같았다. 아침을 먹었던 식당처럼 말이다.
신경원이 탈의실로 가는데 키이스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키이스는 신경원에게 고개를 까닥여 보인 다음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신경원은 세 벌 중 제일 몸에 잘 맞는 슈트를 입은 채 탈의실 밖에 나와 있었다. 웃는 얼굴로 돌아온 그는 신경원을 보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탄을 했다.
“하아―. 고기를 그렇게 먹었는데.”
그는 가슴 쪽에 주름이 살짝 진 것을 보며 먹은 고기가 몸으로 제대로 갔다면 거기에 주름이 지는 일은 없었을 거라 구시렁거렸다.
“말라서 옷이 크다는 말 돌려서 잘한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요. 신이 보기보다 몸무게가 덜 나간다는 건 알고 있지만요. 그렇게 잘, 많이 먹었는데 왜 살이 안 찌는 겁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신경원은 키이스가 시키는 대로 한 바퀴 돌았다. 품이 조금 낙낙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곳은 잘 맞았다. 하의 길이도 적당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해도 괜찮네요. 타이는… 이게 좋겠습니다.”
키이스는 다섯 개의 타이를 대보더니 은회색에 핑크빛 도트가 있는 것을 골랐다. 슈즈도 키이스가 고른 것으로 신었다.
“변호사가 지금쯤 학교에 연락을 해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일단 기숙사로 가서 하워니라고 했던가요? 그 친구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죠.”
“하워니가 아니라 해원. 내 이름보다는 발음하기 쉬울 거다.”
“해원. 음. 그러네요.”
“그런데 왜 병원을 가? 다친 데는 없다고 했는데.”
“한 대 맞기는 맞았다면서요. 어린애라고는 해도 상대는 풋볼 선수입니다.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가볍게 투덕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틀리죠. 진찰해보고 전문의의 소견서와 진단서를 받아두어야 합니다.”
신경원은 뭔가 일이 생각 이상으로 커지는 건 아닐까 하면서도 얌전히 키이스를 따라갔다. 다시 말하지만 부탁을 한 이상, 그리고 맡아서 해결해주겠다고 하는 해결사가 있는 이상 전적으로 맡기는 편이 좋다는 것이 신경원의 지론이다.
학교 기숙사에 도착하자 두 아이는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앞에 나와 있었다. 해원이는 신경원을 보자마자 잘못했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런 아이의 얼굴에는 푸르딩딩한 멍이 들어 있었다. 입가에는 피딱지도 앉아 있었다.
키이스는 타고 온 차를 신경원과 아이들에게 내줬다. 그 자신은 기숙사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톰슨의 부하 직원이라 밝힌 남자와 함께 탔다. 자초지종은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들을 수 있었다. 누가 먼저 때렸냐는 말에 해원이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대답했다.
“때리긴 내가 먼저 때렸어. 그 새끼가 한 말에 성질이 나서 그냥 주먹을 휘두른 건데… 제대로 맞은 것도 아니야. 그냥 턱을 살짝 스쳤다고. 그런데 그 자식은 진짜 진심으로 덤벼들어서 날 쳤어.”
신경원은 왜 먼저 때렸냐고, 그 때문에 문제가 커질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퍼렇게 멍든 뺨과 입가를 살피고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을 뿐이다.
해원이가 성질이 급하고 욱하는 기질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해원이는 자신이 또래의 애들보다 훨씬 키도 크고 덩치도 크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다 자신이 잘못하면 신경원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가볍게 치고받고 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싸워 문제를 일으킨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대항하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그만하자고 밀어버렸는데 녀석이 뒤로 훌렁 넘어가잖아.”
“넘어지다 뒤로 손을 짚으면서?”
“응. 그런데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라고. 기가 막혀서.”
“일단 알겠어. 그럼 이제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설명해봐. 길게 말 안 해도 돼.”
“…….”
나불거리던 해원이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재차 말을 해보라 하자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은 레이시스트야.”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다.
“평소에도 인종차별적인 단어를 마구 내뱉었어. 뭐, 그 정도야 어디를 가든 들을 수 있는 거고 그래서 그냥 무시했는데, 그다음에는 무시한다고 괴롭히더라고.”
“한두 번이 아니야, 형. 나도 해원이 연습하는 거 구경하러 갔다가 몇 번 들었어. 팀에 해원이 말고도 중국계 선수 하나랑 베트남계 선수가 하나 더 있는데 그 애들한테도 장난 아니게 말을 심하게 하더라고.”
“코치님이나 감독님은 아무 말도 안 하셨니?”
“그렇게 무식한 놈은 아니야.”
그러니까 주의를 줄 만한 어른 앞에서 입조심 정도는 할 줄 아는, 영리한 아이라는 뜻이다. 어째 해결이 쉽게는 안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롭혀도 잘 참았던 것 같은데, 왜 주먹질까지 하게 된 거지? 뭔가 다른 안 좋은 말을 한 거야?”
“…그건 말하기 싫어.”
“말을 해야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방법을 찾아보지.”
“그보다 형.”
“응?”
“아까 그 금발머리 형은 누구야? 이 차는 뭐고.”
“음… 직장 동료인데, 도움을 주겠다고 해서 같이 왔어.”
“뉴욕에서부터?”
“응. 그런데, 신해원.”
“어?”
“어설프게 말 돌리지 말고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나 말해.”
“…….”
해원이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신경원은 끝까지 추궁했고 병원에 도착할 무렵, 문제의 말을 가까스로 들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며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부모도 없는 호래자식이라고 했어요.”
해원이는 키이스가 수배한 두 명의 변호사 앞에서 차분하게, 하지만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반복은 어렵지 않았다.
“거지새끼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어디서 호구 후원자를 잡아서 학교를 다니는 거냐고도 했어요. 물론 아니라고 항변했죠. 그랬더니 어디서 경원이 형에 대해 들은 건지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라도 서른밖에 안 된 IT 회사 직원이 어떻게 우리 학교의 등록금이며 기부금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번 돈이 아닐 거라면서 경원이 형이….”
해원이는 신경원에게 말할 때도 바로 저 부분에서 머뭇거렸다. 이번에도 해원이는 옆에 앉아 있는 신경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녹취용 녹음기를 보고는 결심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경원이 형이 몸을 팔아서 벌어들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요.”
“…그래. 이해한다. 그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히 화가 나지.”
“고아라고 부르는 건 괜찮아요. 고아 맞으니까. 그런 걸로는 하나도 화 안 나요. 후원자가 있으니까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거지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랑 재원이의 후원자는 돌아가신 엄마 아빠랑 할아버지, 그리고 친척들이고 그분들이 남겨주신 돈이니까요.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경원이 형을 욕하는 건 진짜 참을 수 없었어요.”
변호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해원이를 위로하면서도 필요한 말들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변호사는 메모까지 해가며 인터뷰를 마친 후 아이들을 내보냈다.
“현재 학교 측에 연락하여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현장에 있던 다른 풋볼팀 선수들에게서 증언을 확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학교 측에 문의를 하고 각 학생들의 부모에게도 미리 허락을 받아놓도록 하지요. 그리고 오늘 오후, 3시쯤에 1차 미팅을 잡아보겠습니다.”
“이런 일은 법정까지 가는 것보다는 가능한 ‘합의’의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습니다. 아이들의 정신건강도 그렇고 앞으로의 학교생활에 지장을 가져올 만한 것들은 가능한 피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두 변호사의 말에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때린 것은 해원이다. 하지만 원인을 제공한 것은 상대 학생이다. 합의점을 찾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우선시하는 두 변호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정중했고 아이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질문을 할 때도 신경원에게 허락을 하나하나 구했고 허락하지 않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구하지 않았다.
“미팅 시에는 저희들이 모든 질문에 대응할 겁니다.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실 때는 저나 플린 변호사에게 먼저 귓속말을 하신다음 발언하셨으면 좋겠고요. 경찰 수사 드라마에서 보신 적 있으시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이들에게 미팅 시에 취할 태도 등에 대해 약간의 코치를 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실례지만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변호사는 질문은 신경원을 향해 하면서도 시선은 키이스에게 주었다. 키이스는 곧바로 되물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시죠.”
“아이들이 언급한 ‘학비’와 ‘기부금’에 관한 사항입니다. 그쪽에서 한 말을 하나하나 반박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혹시라도 실제와 다른 경우 이쪽의 주장에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 어떻습니까?”
“그거는… 대충 얼버무리면 안 될까? 아이들이 알고 있는 거랑 실제가 좀 다르거든.”
“어떻게요?”
“6학년까지의 학비는 그 이전에 지불을 한 거라 유산이 맞긴 한데, 그 이후부터는 내가 다 냈어. 사실을 알게 되면 아이들이 좀….”
신경원은 말을 흐렸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학비뿐 아니라 기숙사비 이외에도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드는 사립학교다. 교복비만 해도 1,000불이 넘었고 600불 정도의 세탁비까지 내야 했다. 그래서 두 아이의 학비로 자신의 연봉을 거의 그대로 때려 박아야했다. 일 자체가 위험한 탓에 각종 추가수당을 받고 있는데다 6학년까지는 완불이 되어 있어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살기가 참 팍팍했을 거다.
“유산이 아예 없었던 거군요.”
“처음에는 좀 있는 줄 알았는데 정리하고 나니 남는 게 거의 없더라고.”
그 말을 하자 키이스가 턱을 잡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군요.”
“응? 뭐가?”
키이스는 싱긋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 문제는 이렇게 처리하죠. 유산이 없진 않았지만 많지는 않아서 신이 어느 정도 부담을 하고 있었다―이렇게요. 그리고 법적인 보호자는 아니지만 달리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분께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요. 아이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 걱정을 하셔서 숨겨오신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런가.”
“네. 마냥 감추고 사실 생각은 아니셨겠죠?”
“가능하면 끝까지 감출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마세요. 나중에 알게 되면 더 많이 미안해할 겁니다.”
키이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셨죠?”
“네. 그 정도면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는 정중하게 대답하고는 아이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들은 바지런히 일했고 미팅 시간은 오후 3시로 잡혔다.
미팅은 처음부터 상당히 격렬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상대 학생의 어머니는 변호사를 둘이나 데리고 왔다. 그녀는 신경원과 함께 온 변호사와 인종차별 관련 사건 전문가라는 플린 변호사 앞에서도 자신의 아이는 손톱만큼도 잘못한 것이 없으며 모든 책임은 ‘야만적인 성격의 해원’이에게 있다며 시종일관 고자세를 유지했다.
그녀는 당시 현장에 있던 풋볼팀 선수들이 와서 그녀의 아들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증언을 했음에도 깨끗하게 무시했다. 오직 해원이가 휘두른 ‘폭력’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그녀가 데려온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을 전부 내보내고 변호사들이 설전을 벌이는 사이 키이스가 작은 목소리로 신경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편이 LA에서 꽤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랍니다. 저 여자는 물려받은 유산으로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사교계에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더군요. 이 학교에도 상당한 기부를 하고 있고요. 그래서 저렇게 도도하고 당당하게 고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지는 말이었다. 그래도 일단 믿어보자 싶어 똑같은 말만 오가는 설전을 반 방관상태로 지켜보았다. 그러기를 약 거의 한 시간, 지루함과 답답함에 몸이 뒤틀리기 시작한 시점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원군, 아니다. 최종병기가 왔어요. 이제 끝입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석하고 있던 교장이 풋볼팀 코치에게 나가서 확인을 해보라는 말을 했지만 괜찮다며 직접 가서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쪽에서 서늘한 공기와 함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많이 늦었니, 키이스?”
“아니요, 레이첼. 딱 좋을 때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화사한 금발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40대 중후반의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키이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키이스와 무척이나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려요.”
해원이를 대변하고 있던 두 변호사가 황급히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그들뿐 아니라 상대 학생 측의 변호사도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신경원은 교장이나 풋볼팀 코치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인사를 한 그녀가 신경원을 향해 말했다.
“연락받고 깜짝 놀랐잖니, 신. 아무튼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급하다는데도 이사들이 놓아주질 않지 뭐니.”
모르는 사이임에도 친근하게 말을 던지며 아는 척을 하는 여자 때문에 신경원은 당황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키이스가 뭔가 언질을 해두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폐를 끼치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아이들은 원래 이런저런 사고를 치며 크는 거야. 이런 일 정도야 얼마든지 해결해줄 수 있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알겠지?”
그녀는 신경원의 순발력 있는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치 키이스를 보는 듯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있던 상대 학생의 어머니를 향해서도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신경원에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180도 다른 미소였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다니 유감이에요, Mrs. 퍼거슨.”
그녀의 인사말을 들은 상대 학생의 어머니, Mrs. 퍼거슨의 얼굴에서 썰물처럼 핏기가 빠져나갔다. 우아한 척하면서도 시종일간 유지하던 고자세도 어디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살다 보면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해프닝으로 뜻밖의 사람과 마주치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유감입니다.”
신경원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껌벅였다. 동석하고 있던 교장, 그리고 풋볼팀 감독과 코치도 신경원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누군지,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교장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교장은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와 마주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첼 클리퍼드라고 합니다. 클리세딕 인더스트리라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순간 교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당황하다 못해 경악을 했는지 인사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레이첼은 경악한 교장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넸다.
“사실 아이들이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부당한 이유’로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하니 한달음에 달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Mrs. 퍼거슨과는 개인적으로 ‘조금’ 안면이 있는 사이라 제가 직접 오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했죠.”
그녀는 손을 내민 채 그대로 굳어버린 교장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고는 변호사들이 내준 자리에 앉았다. Mrs. 퍼거슨의 바로 정면 앞자리였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짧게 끝냈으면 합니다. 이후에 하필이면 ‘퍼거슨 사장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바깥분의 사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걸로 알지만, 부인과 아드님 문제 때문에 제가 늦으면 곤란하겠죠?”
레이첼의 말은 명백히 협박이었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그녀가 경영하는 회사가 퍼거슨 부인의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 퍼거슨 부인의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미루어볼 때 그녀의 회사는 갑을로 따져 ‘갑’에 해당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거라는 것도.
놀라고 경악한 것은 교장만이 아니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신경원 역시 교장 못지않게 경악하고 있었다. 레이첼 클리퍼드가 말한 회사는 기관의 에이전트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뒤의 인더스트리가 아닌 앞의 ‘클리세딕’이라는 거대 그룹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한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다리로 손을 뻗었다. 그의 왼쪽 종아리에는 ‘뱀파이어 퇴치용 무기’―특수 제작된 단검이 묶여 있다. 그리고 그 단검의 손잡이 끝에는 방패 모양의 심벌과 함께 클리세딕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신경원은 옆자리에 돌아와 앉아 있던 키이스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분과 너는 무슨 사이인 거야!
차마 말로 할 수 없어 눈빛에 담아 노려보았다.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대략 짐작이 가고 있었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키이스는 테이블 위에 있던 메모지를 집어 뭔가 휘갈겨 쓴 다음 신경원에게 내밀었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이차가 좀 많이 나긴 하지만 누나예요. 미인이죠?>
순간 다리에서부터 등골까지 맹렬하게 소름이 끼쳐 올랐다. 누군가 특대형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기도 했다. 메모지의 문장은 키이스의 배경은 물론이요 이전에 들은 ‘회장님’이라는 존재의 정체까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앞으로 5분이면 게임 끝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꼿꼿하게 굳어버린 신경원의 귀에 키이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