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6화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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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는 두꺼우면서도 단단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걷는 사람에 따라 발소리가 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키이스는 의식적으로 발바닥에 힘을 주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다. 언제쯤 의식하지 않아도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걸을 수 있을지 암담했지만 표정은 매우 밝았다.

키이스는 지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어깨춤을 추거나 스텝을 밟아가며 걸어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고 살짝 살짝 휘파람을 불고 있을 정도로 굉장히 하이한 상태였다. 사실 그는 본부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자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던 신경원이 본부로 온 것은 밤 10시 무렵이었다. 혹시 문제가 있지는 않았을까 했는데 다행히 환자의 보호자가 모든 것은 자신이 부탁해서 한 것이라 주장했기에 별반 문제없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신경원의 라이선스가 긴급한 상황에서 단독으로 응급처치에 해당하는 ‘의료행위’를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던 덕이기도 했다. 

키이스가 본부로 송신한 사진은 곧장 분석팀으로 보내졌다. 그가 본부로 돌아왔을 무렵엔 이미 사진에 찍힌 여성의 신원 파악까지 끝나 있었다. 

신경원이 지목한 여자는 상류층만을 상대로 하는 에스코트 전문 회사에 속해 있었는데 말이 에스코트지 결국엔 고급 콜걸이었다. 거기에 과거 음주운전으로 인한 구속기록이 있어 손쉽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득은 거기까지였다.

사진을 전해 받고 그녀에 대한 신상정보 파악이 끝나자 신경원의 요청대로 그녀에 대한 추적이 시작되었다.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함께한 남자와 함께 근처 호텔로 가서 3시간쯤 후, 홀로 호텔을 나왔다. 택시에 탑승한 그녀는 또 다른, 조금 질이 떨어지는 호텔로 갔고 그곳에서 종적이 묘연해졌다.

기관의 에이전트들은 날고 기는 실력자였고 불법과 합법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방법으로 두 호텔은 물론이요 근처의 모든 CCTV 데이터를 확보해 수색했지만 여자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여자와 함께 호텔로 갔던 남자는 호텔 객실의 욕조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한 듯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자살은 무슨. 라헬 윈스터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혈액을 취하고 남자를 버린 거야. 영리한 뱀파이어지.”

신경원은 호텔 객실에 투입된 백업팀 에이전트들이 보내온 영상을 보며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곤 호텔과 거리의 CCTV에 잡힌 그녀의 얼굴을 확대해 홍채의 형태를 유심히 살폈다. 그는 얼굴이 선명하게 찍힌 영상을 찾아 얼굴을 크게 확대했다. 

“잘 봐둬, 클리퍼드. 올해 뉴욕에서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된 상급 블러드서커, B1의 홍채다.”

신경원의 말에 작전 상황실에 함께 자리하고 있던 섹션 B의 에이전트들이 일제히 침음을 흘렸다.

기록에 의하면 진짜 뱀파이어, 즉 V급의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들 중 약 5% 정도가 B1급의 블러드서커가 된다고 하는데 하위급과는 달리 인간일 때의 이성과 지능을 유지한 채로 평균 2~3년 정도를 살아간다고 한다. 물론 종국에는 이지를 잃고 하위 계급으로 전락해 헌터들에 의해 소멸한다.

문제는 그 2~3년 동안 B2와 B3를 양산해내다시피 한다는 것. 그리고 생전에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일수록 더더욱, 자기 존재를 숨기는 데 용이하기에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라헬 윈스터가 에스코트 회사에 입사한 시기는 약 2년 3개월 전. 그전까지는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의 변호사로 어느 이름난 로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신경원은 그녀가 변호사라는 직업을 버리기 직전 뱀파이어가 되었고 ‘먹이’를 손쉽게 확보하기 위해 콜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뱀파이어가 되면 각막과 수정체가 보기에는 똑같지만 성분이 인간일 때와는 다른 물질로 변성되기 때문에 빛의 세기나 방향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색이 변해. B1의 홍채는 거의 인간과 흡사한 만큼 아주 다양한 색을 보여줘. 잘 보고 기억해두도록.”

신경원은 몇 개의 정지 영상을 스크린에 나란히 띄워놓고 후―하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건 설명하나 마나일 수도 있는데,”

목을 긁적이는 신경원의 표정은 묘했다. 그래도 입을 열어 설명을 이어나갔다.

“2번 영상을 보면 라헬 윈스터가 고개를 돌리지? 안구의 반응 속도를 봐.”

“……?”

“클리퍼드. 몸을 오른쪽으로 조금만 돌려서 알렌을, 저기 앞머리만 흰 사람. 그래. 그 사람을 눈동자만 돌려서 흘겨봐봐.”

클리퍼드는 시키는 대로 했다. 고개는 45도 정도만 돌렸지만 눈동자를 움직여 알렌이라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그 상태로 몸이랑 머리를 같이 돌려서 나를 봐봐.”

눈동자를 한계까지 돌린 상태였으나 몸을 돌리니 곧장 신경원의 얼굴이 보였다. 

“혹시 알겠어?”

키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설명이라고 하나, 신.”

한쪽에 있던 예들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다. 신경원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그런 짧은 순간에 홍채를 보고 그 움직임까지 캐치해낼 수 있는 건 우리 지부엔 너뿐이다. 전국을 통 털어도 둘 정도가 고작이고.”

“둘이나 있으면 셋이 될 수도 있고 넷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신경원은 굳이 설명을 하고 가르치는 이유가 그것이라는 듯 말하면서도 웅얼거렸다. 제가 한 말에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퍼스트.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설명이랄 것도 없어. 옆을 보다 이동을 하기 위해 몸을 돌리면 ‘시선’, 그러니까 안구가 자동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을 보는데, 라헬 윈스터의 안구는 그 속도가 ‘일반인’보다 훨씬 느리다는 거지. 몸이 먼저 움직이고 안구는 뒤늦게 전방을 향했어.”

“……?”

“B1의 안구 반응 속도는 인간과 거의 흡사하거나 오히려 조금 더 빠르기도 해. 그런데 라헬 윈스터의 안구 반응 속도는 보통의 인간보다 느렸어. 그건 저 여자가 곧, 짧으면 1~2주 길게 잡아 한두 달 내에 B2로 전락할 거라는 소리다.”

여기저기서 다시 한 번 침음과 함께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환장하겠네. 두 달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지, 짐작도 안 가.”

“여름도 아닌데 두 달 내내 비상체제로 살다간 마누라에게 바가지를 긁힐 거라고!”

머리를 쥐어뜯고 한숨을 쉬고 한탄을 하고, 작전 상황실에 모인 모든 인원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신경원과 치프인 예들린뿐이었다. 예들린은 진정하라며 명령을 내렸다. 

“일단 FBI와 로컬 경찰에 라헬 윈스터의 신원 정보를 보내서 수배령을 내려. 뉴욕은 물론이요 근처의 도시까지. 특히 공항 쪽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일단 비상 근무령까지는 발령하지 않을 테니 발광은 그만하고. 알렌―.”

“네.”

“짝수일은 자네가, 홀수일은… 말론이 이 케이스를 담당하도록 하게.”

“치프. 라헬 윈스터를 찾아낸 건 접니다!.”

신경원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예들린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언제 네가 찾아낸 게 아니라고 했나?”

“그러니까 제가,”

“찾아낸 공은 물론 인정해. 초과 근무 수당에 포상금까지 잔뜩 줄 테니까 일단 그 홀쭉하게 들어간 뺨부터 원래의 형태로 ‘복구’시켜. 훈련이 끝난 지 언젠데 아직까지 체력 하나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비실거리나.”

“저 이제 멀쩡하거든요?”

“새 애인은?”

“치프!”

“애들 굴리느라 아무것도 못한 거 다 알아. 라헬 윈스터가 수배망에 걸려들면 바로 지휘권을 줄 테니 그때까지 푹 쉬어서 체력을 비축해놓도록. 그때가 되면 밤잠도 못 잘 정도로 굴려주지. 그리고 클리퍼드.”

“네.”

“자네도 주말에만 집에 돌아가지 말고 매일매일 귀가하도록. 자네가 계속 본부에 붙어 있으니 저놈이 신경을 쓰느라 계속 본부에 붙어 있지 않나. 그리고 쉬는 날에, 그것도 오늘 같은 주말에 불러내지 말고 혼자 싸돌아다니도록 ‘배려’해주게. 예쁜 아가씨를 소개해주든가.”

“…아. 네.”

뭔가 엄청난 공사혼동의 명령이었지만 예들린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키이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올해 들어 처음으로 B1의 존재를 확인했으나 그것으로 끝,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래서 키이스는 투덜대는 신경원과 함께 ‘귀가 명령’을 받고 곧 본부를 나왔다. 

그때 시각이 대략 새벽 2시. 불야성의 도시인 맨해튼 밤거리에 택시가 없을 리 없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우격다짐으로 제 차에 신경원을 태웠다. 본인이 발견한 것임에도 사건을 맡지 못한 신경원이 잔뜩 성이 나 있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출발한 차는 밤거리를 달렸다. 그리고 키이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모조리 뱉어내고 있는 신경원을 끈질기게 설득해 ‘주소’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완벽한 주소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거리 이름 하나. 그럼에도 그것은 키이스의 기분을 폭신한 구름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있었다니.”

응급 환자를 보살피느라 그쪽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때 키이스는 신경원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가문의 어느 변호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법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응급처치를 하면서 몰려든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안에서 진짜 ‘눈’만 보고 뱀파이어를 발견해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신경원은 정말 소름 끼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아무튼 대단하다니까.”

키이스는 혼잣말을 하며 화려하게 장식된 문을 열었다.

센서가 그의 움직임을 포착하자 현관이 환해졌다. 아무래도 저 자동 센서를 꺼달라고 해야겠다며 안으로 몇 걸음 걸어 들어가던 찰나였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은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의 집,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뉴욕에 얼마간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었기에 별생각 없이 장기 투숙을 결정했었다. 뉴욕에 있는 본가로 들어갈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이후 기숙사제의 사립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 그는 단 한 번도 본가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펜트하우스는 아니라 해도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프라이버시가 철저하게 보장된 룸이었다. 같은 층에는 오로지 두 개의 룸만 있었고 투숙객이 아니라면 엘리베이터의 탑승조차 불가능한 곳이었다. 더불어 이 스위트룸에 묵고 있는 사람은 오직 키이스 한 사람뿐이었다.

불을 켜두고 나간 기억이 없는데 응접실이 환했다. 호텔 직원들이 청소를 하러 왔다 해도 불을 켜두고 나갔을 리는 없다. 켜두면 켜둔 대로, 꺼두면 꺼둔 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원칙이다. 투숙객의 의사에 반해 멋대로 손을 댈 만큼 간덩이 크고 덜떨어진 직원은 없을 터였다. 만일 그런 직원이 있다면 이 호텔은 맨해튼 최고의 호텔 중 하나라 자부할 수 없다. 

키이스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는 한 몇 명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키이스 도련님. 많이 늦으셨습니다.”

응접실 한가운데에 30대 중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인사를 건네자 소파에서 깜박깜박 졸고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눈을 번쩍 뜨더니 황급히 일어나 키이스에게 인사를 했다. 키이스는 그 남자를 본 척도 하지 않고 30대 중반의 남자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래틀 씨.”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회장’님을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하―. 그러면 그렇지. 

‘그 사람’, 회장이 쓰러졌다고 하는 소리는 역시 헛소리였다. 

“이쪽에 앉아주시겠습니까?”

남아 있던 남자가 착석을 권했으나 키이스는 표정을 단단히 굳힌 채 회장의 수행비서인 래틀이 들어간 방문만 노려봤다. 5분쯤 후 품이 넉넉한 옷을 입은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성 간호사가 미는 휠체어에 탄 채 밖으로 나왔다. 팔에 링거가 꽂혀 있고 그냥 보기에도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눈썹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아침에 들어왔다고 하기에 찾아왔더니, 어딜 그렇게 다니다 이제 들어오는 거냐.”

“…….”

“애비를 보고도 인사말 하나 건넬 줄 모르다니, 고얀 것.”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아들이 국가에 몸을 바쳐 충성하느라 집에도 오지 않고 있으니 어쩌겠느냐. 이 애비가 노구를 이끌고 찾아올 수밖에.”

하―.

“야심한 시각입니다. 그만 돌아가시죠, 회장님.”

“앉아라.”

키이스의 아버지, 클리세딕 그룹의 명예회장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2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졸다가 일어나 몰래 눈을 비비던 남자는 응접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은제 케이스를 열고 무엇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콴티코에서 뉴욕으로 돌아와 이 호텔에 투숙하기로 결정했을 때,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원하는 이상 이 호텔이 아니라 뉴욕 시내의 어떤 호텔이든 객실의 문을 아무런 의문 없이 열어줬으리라. 

호텔이 아닌 곳에 묵고 있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 아니, 세상 어디를 가도 저 사람이 찾아오지 못할 곳은 없다. 그러니 놀랄 일도 없다. 그저 한없이 불쾌할 뿐이다. 

“닥터 레이번.”

회장이 이름을 부르자 준비를 마친 남자가 황급히 키이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키이스의 눈치를 살피며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키이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남자에게 팔을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상의를 벗어주시면….”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주먹을 쥔 채 손등을 들어 보였다. 손을 펴자 파란 핏줄이 손등 위에서 꿈틀거렸다. 닥터 레이번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조심스럽게 키이스의 손등 핏줄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새빨갛고 붉은 액체가 바늘에 연결된 작은 시험관을 채우기 시작했다. 

시험관이 반쯤 차자 닥터 레이번은 바늘을 뺐다. 키이스의 혈액을 뽑아낸 닥터 레이번은 바쁘게 움직였다. 시험관에 뭔가를 주입하고 은제 케이스 한쪽에 꽂아 넣더니 케이스 안쪽의 버튼 몇 개를 눌렀다. 잠시 후 케이스에서 삐빅―하는 전자음이 들려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태블릿 PC를 들어 결과를 확인한다.

“어떤가.”

회장의 물음에 닥터 레이번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변화가 없던 회장의 얼굴에 노여움이 퍼져나갔다. 키이스는 그런 회장의 얼굴을 보고는 실소를 흘리곤 몸을 돌렸다. 얼른 돌아가라고 해봤자 버티고 앉아 듣기 싫은 소리만 해댈 사람이다. 그에겐 회장의 말을 들어줄 여유도, 시간도, 마음도 없다. 

키이스는 곧장 호텔을 빠져나왔다. 들어올 때는 하늘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는데 나갈 때는 지옥의 늪을 걷는 듯했다. 

그가 표정을 굳힌 채 로비를 가로지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담당 컨시어지가 달려왔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지만 무시하고 정문을 나섰다. 그리고 59번가를 따라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연락을 받은 운전사가 벤츠를 끌고 나와 그를 따라붙었지만 그대로 밤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머지않은 위치에 있던 또 다른 호텔이었다. 정문 앞에 차를 내동댕이치다시피 한 운전사가 황급히 따라와 프런트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10분도 지나지 않아 키이스는 센트럴파크의 야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키이스는 어두컴컴한 거실로 들어와 소파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제기랄―.”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스치는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소파에 등을 기댄 그는 목을 꺾어 화려하게 꾸며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속에서 확확 열이 끓어올랐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전부 꺼내 창 밖으로 내던지고 싶을 만큼 속이 뒤집혔다. 아니, 몸 전체를 발코니 밖으로 내동댕이쳐 부숴버리고 싶다.

불빛 하나 없어도 천장의 무늬가 보이고 있었지만 각막 전체에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졌다. 몸 안을 돌고 있는 피가,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괜찮아. 키이스. 괜찮아질 거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무언가 기분이 좋아질 것을 떠올려야 한다. 생각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한, 즐거운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다시 발코니로 뛰어 나가서…….

“씨발―.”

떠올려봐. 키이스. 뭐라도 좋아. 다른 생각을 해. 제발.

키이스는 연신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24년.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3세라는 이름의 의미를 온전히 인식했던 그때부터 따지면 14년. 

노아의 아들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던 때부터는 12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경멸, 모욕을 견디고 또 견뎌내야 했던 시간.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즐거운 무엇. 기분이 좋아지는 무엇. 

병신같이….

눈물이라도 나와주면 좋으련만 차갑게 식어버린 몸은 감정을 흘려버리는 생리작용조차 해내지 못한다. 그저 가슴에 맺힌 쓰디쓴 감정을 곱씹게만 한다. 

그러기를 한참, 흐리게 보이는 화려한 천장에 무엇인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검게 보이는 무늬 하나가 서서히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동그랗게 변했다. 그 안에 두 개의 점이 찍힌다. 그건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키이스의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그러자 환영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퍼스트….”

살짝 벌어진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

제 입에서 나온 소리가, 그의 이름이 차갑게 식은 얼굴에 내려앉았다. 

퍼스트. 그리고 신….

“퍼스트.”

소리 내어 나지막이 부르자 차갑게 식어 있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움직임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 손등으로, 손목을 지나 팔로 기어 올라갔다. 

팔이 움직였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가슴을 지나 어깨를 향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은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신경원이 환하게 웃으며 마구 두들겼던 곳이었다. 눈물까지 흘러나올 정도로 신나게 웃으며 두들겨대서 아팠던 그 어깨였다. 

“신….”

키이스는 눈을 감았다. 웃는 것을 보고 바로 따라 웃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검은 눈꺼풀 안쪽에 신경원의 얼굴이 작게 떠올랐다. 

순간 입에서 후…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없이 한숨에 가까운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후도 흐도 아닌, 묘한 소리가 짧게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 * *

삑삑―. 삑삑―. 삑삑―.

침대 헤드보드 위의 알람시계가 오전 11시 50분을 알렸다. 따끈따끈하고 몽글몽글하고 탱글탱글한 ‘아가씨’를 한껏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던 신경원은 한쪽 눈을 뜨며 손을 뻗었다. 알람을 막 끄는 순간 품 안에 있던 아가씨가 눈을 뜨고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에메랄드빛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눈을 반개하며 신경원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경원은 기꺼이 그녀의 촉촉한 코에 입을 맞춰주었다.

“잘 잤어, 여왕님?”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웃자 아가씨는 입맛을 다시며 울었다.

우냐아~.

“응. 나도 아가씨 덕분에 잘 잤어. 고마워.”

아가씨, 그러니까 Queen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다시 한 번 하품을 쩌억~하며 꿈틀꿈틀 몸을 일으켰다. 메인쿤과 래그돌의 믹스인 퀸은 토실토실한 앞발로 신경원의 가슴을 꾸욱 누른 후 먼저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엄청나게 투실투실한 배를 가지고 있지만 고양이는 고양인지라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바닥에 뛰어내린 퀸은 곧 하나밖에 없는 의자 위로 뛰어올라 너저분하기 그지없는 1인용 식탁 위로 뛰어 올랐다. 말이 식탁이지 물건을 올려놓는 선반의 기능을 하고 있는 불쌍한 식탁이다. 

퀸은 식탁 위에 놓인 커다랗고 두꺼운 책에 올라가 두 발을 앙증맞게 모으고 엉덩이를 내렸다. 그곳은 그녀의 지정석이었다. 

냐아아, 냐아아.

“알았어. 줄게. 잠깐만. 으으―.”

신경원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퀸 덕에 제법 숙면을 취하긴 했지만 늦게까지 일하다 들어와서 그런지 피곤이 덜 풀려 몸이 찌뿌둥했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찬장을 열었다. 맨 아래 칸에 퀸을 위한 캔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어느 거 줄까? 연어? 치킨? 아니면 칠면조?”

영리한 퀸은 신경원의 손가락이 마지막 캔을 가리키자마자 냥냥 하고 울었다.

“오늘은 칠면조 맛 먹을래?”

신경원은 얼른 캔을 꺼내 1회용 그릇에 담아 퀸의 앞에 내려주었다. 그릇의 아래에도 역시 두꺼운 책을 깔아줬다. 퀸은 찹찹―냥냥 하는 소리를 내며 먹기 시작했다. 제가 고른 캔이 정말 맛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맛있냐?”

잘 먹는 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신경원은 개수대에서 대충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다음부터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저혈압까지는 아니지만 신경원은 잠에서 깨는 데 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허물 벗듯 벗어 던지고 사물함 모양으로 생긴 철제 캐비닛에서 같은 모양에 색만 다른 티셔츠를 입는다. 다음에는 행거에 대충 걸어둔 검은색 진을 입고 손을 물에 적셔 들뜬 머리를 대충 빗었다. 마지막으로 캐비닛 마지막 칸에 있던 똑같은 색에 똑같은 디자인의 양말을 두 개 집어 신었다. 거기에 운동화와 야구 모자를 쓰고 나니 출근 준비가 끝났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낸 그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퀸이 캔을 먹어치우는 걸 구경했다. 비릿한 냄새가 비어 있는 위장을 자극했는지 꼬르륵 소리를 냈다. 이윽고 커다란 덩치의 고양이 퀸이 그릇을 비우더니 세수를 시작했다.

신경원과 한 침대에서 잔 퀸은 신경원의 고양이가 아니다. 바로 위층에 사는 중국인 부부가 2년 전부터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인데 종종 이렇게 신경원을 찾아와 함께 잠을 자줬다. 퀸에게는 사람에게 꼭 안겨서도 침까지 흘리며 잘 자는 특기가 있었다.

퀸의 주인은 자신들이 키우는 고양이가 어디를 돌아다니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퀸을 애지중지했던 때는 퀸이 귀여운 아기 고양이였을 때뿐이었다. 중고양이 시절을 지나 덩치가 커지고 몸무게가 10kg에 육박하는 어른 고양이가 되니 시큰둥해진 것이다. 그래도 밥 하나는 잘 챙겨 먹이는지 퀸의 뱃살은 주물럭거리기 딱 좋을 만큼 푸짐했고 탱탱했다. 

냐~앙.

신경원이 물을 마시는 동안 세수를 마친 퀸이 덩치에 안 어울리는 소리를 내며 그를 빤히 바라본다. 신경원은 얼른 일어났다. 퀸은 비어버린 의자에 퉁―하는 소리를 내며 뛰어내렸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러곤 신경원을 한 번 돌아보곤 너덜한 문에 커다랗게 뚫어놓은 고양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고마웠어, 퀸. 맛있는 캔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알았지?”

꼬리가 사라지기 전에 인사를 마친 그는 작은 방 안을 돌아보았다. 침대 정리는 원래 안 하니까 패스. 캐비닛 문도 닫았고 냉장고 문도 잘 닫혀 있고 수도꼭지도 잘 잠갔고….

“아차, 잊을 뻔했네.”

신경원은 얼른 집에 돌아오자마자 켰던 에어컨을 끄고 제습기 전원을 켰다. 그리고 빈 고양이 캔과 일회용 그릇 그리고 빈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출근 준비는 정말 완벽하게 끝이다.

“으….”

출근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신경원은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로 길게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엄청나게 화창했다. 

이대로 태양빛을 받으면 뱀파이어처럼 먼지가 돼서 사라질 거야.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입장임에도 뱀파이어같이 구시렁거린 신경원은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그는 현관문 바로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지나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의 몸은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잠기운이 남아 있는 몸에 제대로 스위치가 들어올 때까지는 최소 1~2시간이 걸린다. 나른하고 졸리고 만사가 귀찮은 기분으로 느릿한 걸음걸이와 함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

……….

…똑같지가 않네?

골목 입구에 익숙한 실루엣을 가진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에 각지고 떡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완벽한 몸매에 긴 다리를 가진 놈. 한 단어로 표현해 파트너. 키이스였다.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눈을 비벼봤지만 분명 녀석이 맞았다. 

왜 저놈이 저기 있을까. 잠기운에 취한 머리를 돌려봤다. 퇴근해서 잠시 뒹굴거리다가 약속 장소로 나가서 저녁을 먹었다.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응급환자가 발생하고―.

라헬 윈스터를 찾았지. 

신경원은 으드득 소리 나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케이스를 담당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망할 치프!! 프라이버시 침해야! 내가 애인이 있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고 보니 케이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 치프 때문에 성질이 나는 바람에 멘탈이 맨틀이 되어 용암 생성을 하려는 찰나, 벤츠 뒷좌석에서 뭔가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간단하게 요약해 살짝 정줄을 놓은 결과인 모양이다. 

주차장 창고에서 산다는 게 딱히 감추고 싶은 비밀도 아니고 아무러면 어때. 게다가 거리 이름밖에 안 가르쳐줬으니까 뭐….

신경원은 마른 뺨을 벅벅 긁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 여기서 뭐하냐?”

크림색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키이스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린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꼬리가 사르르 휘어지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좋은 아침 아니, 오후입니다, 퍼스… 신.”

“여기서 뭐하고 있냐니까.”

“같이 출근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죠. 잠시만요.”

키이스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곤 다시 신경원을 향해 방글방글 웃어 보였다. 

별명을 방글이나 방실이라고 붙여줘야 하나.

“식사하셨습니까?”

“했을 거 같냐?”

식사는커녕 샤워도 안 했다. 샤워라는 건 본부의 깨~끗한 샤워실에서 하는 거니까.

“그럼 같이 식사하고 출근하면 되겠네요. 근처에 괜찮은 식당을 찾… 신, 어디 가십니까. 제 차가―,”

멋대로 지껄이는 놈을 두고 신경원은 성큼성큼 걸었다. 마음만으로만. 잠기운이 남아 있는 몸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키이스는 당연히 금세도 아니고 곧장, 따라붙었다. 

“떨어져 걸으랬지.”

“오징어가 된다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오징어 되세요. 그래서 빨판 달린 팔로 끌어안아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이 자식이―!

신경원은 쓰읍―하는 소리를 내며 한 걸음 옆으로 이동했다. 그래봤자 한 걸음뿐인지라 오징어 신세를 면하긴 어려웠다. 그는 말없이 걸었고 키이스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연신 방긋방긋 웃어댔다. 평소보다 한 세 배는 더 방글거리는 것 같다.

길을 따라 세 블록 정도를 걷자 단골 식당이 보였다. 근처에서 제일 가격이 싸고 술을 마셨을 때는 해장에도 좋은 따끈따끈한 국물을 마실 수 있는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키이스도 얼른 따라 들어와 앞자리에 앉았다.

“개냐, 꼬리 흔들며 따라다니게.”

“고양이보다 개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 고양이가 좋아.”

특히 퀸처럼 몽실몽실하고 탱탱한 뱃살이 넘치는 큰~ 고양이 종류로.

신경원은 키이스에게 잔뜩 인상을 써 보인 다음 바삐 움직이고 있는 종업원에게 소리쳤다. 

「여기 안심 쌀국수 큰 거 두 개, 팍치 잔뜩!」

「네~.」

얼굴이 익은 종업원이 큰 소리로 대답하고 주방에 오더를 넣었다.

“베트남어도 하십니까?”

“먹을 거면 너도 주문해.”

“사주시는 거예요?”

“……. 빨리 골라.”

놈에게서 얻어먹은 것이 꽤 많다. 쌀국수 한두 그릇이야 얼마든지 사줄 수 있다. 키이스는 코팅이 된 메뉴판을 대충 보더니 그냥 1번을 골랐다.

“큰 거, 작은 거? 몇 그릇.”

신경원은 대식가였다. 몸을 쓰는 일을 하는 만큼 일반인의 두세 배는 먹어야 간신히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 키이스도 제법 많이 먹는 편이다. 

“작은 걸로 하나요. 아침엔 많이 안 먹습니다.”

신경원은 추가 주문을 했다. 음식은 금세 나왔다. 키이스는 커다란 그릇 두 개가 신경원의 앞에 놓이자 눈을 깜박였다. 

“신은 아침에도 잘 드시네요.”

신경원은 묵묵히 따끈한 쌀국수 두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하지만 키이스는 쌀국수가 입에 맞지 않는지 몇 젓가락 먹지 않고 반 정도를 남겼다. 어쩌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와놓고 안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배가 두둑해져 기분이 좋아진 신경원은 평소보다 2배가 넘는 팁을 테이블에 놓고 계산을 마쳤다. 밖으로 나온 그의 앞에는 키이스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사분 식사는?”

“알아서 잘 챙겨 먹고 다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타세요.”

“배불러. 좀 걸을 거야.”

그렇게 말해놓고도 신경원은 딱 한 블록을 더 걸어 도넛 집에서 초콜릿이 잔뜩 붙은 도넛 하나를 사 가지고 나왔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한입 베어 물려는데 질문이 들렸다.

“단거 좋아하세요?”

“야.”

“네.”

“한국 속담에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거든?”

“흠, 확실히 동물에겐 그러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그 말은 왜…?”

“입 좀 닥치라고.”

“시끄러우세요?”

키이스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째 웃는 것만큼이나 사근거리는 강도도 평소의 3~4배 이상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원은 가만히 키이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단순한 감이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웃고 좀 더 사근거리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시에 각설탕 한 개 분량만큼의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아니지만 좀 오버하는 것 같은데…. 이 자식, 뭘 잘못 먹었나.

신경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홍채 형태를 보고 뱀파이어인지 아닌지 판별이 가능한 동체 시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키이스는 어딜 봐도 상큼해 보였다. 하지만 신경원에게는 보였다. 키이스의 눈에 평소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빨간 실핏줄 두 개가 도드라져 있는 것을 말이다. 

“너 말이야, 혹시 무슨…,”

“네?”

반짝반짝. 파란 하늘만큼이나 맑은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게 보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너, 다른 차는 없냐?”

신경원은 대수롭지 않은 척 화제를 돌리며 두 사람이 걷는 속도에 맞춰 슬금슬금 따라오고 있던 검은색 벤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키이스가 타겠냐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것 역시 평소보다 배는 넘게 더 싹싹한 태도였다. 

“다른 차 있냐니까.”

“있습니다.”

“운전사 달린 차 말고 네가 직접 몰고 다니는 작은 차 있어?”

“당연히 있죠.”

“그럼 다음부터는 네가 직접 ‘작은 차’를 몰고 와. 그럼 타줄게.”

신경원은 일부러 작은 차에 악센트를 넣어 말했다. 벤츠 같은 고급 세단은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고 승차감도 최고다. 하지만 태생이 서민인지라 역시 부담스럽다. 차보다는 ‘운전사’가 달려 있다는 쪽이.

“정말이십니까?”

“내 말이 빈말로 들리냐?”

신경원은 짐짓 성이 난 척 눈을 부라렸다. 안 하던 짓을 하는 신경원을 보고 키이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나 곧장 환하게 웃음꽃을 피워 올렸다. 

“아니요. 알겠습니다. 내일부터는 작은 차를 몰고 오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저랑 출퇴근 같이 해주세요. 제가 모시러 오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내 운전사가 되고 싶은 거야?”

“신의 전용 운전사라면, 괜찮네요. 하겠습니다.”

“언제는 두둑한 지갑이라더니.”

“지갑도 하고 운전사도 하죠 뭐.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불러주세요. 성심성의껏 봉사하겠습니다.”

하아―.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는 놈을 보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청해서 자신을 호구로 삼아달라고 하는 놈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녀석의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어진다. 도대체 어떻게 키웠기에 이런 놈이 된 건지 모르겠다. 가정교육을 잘 받긴 받았는데 막판에 아주 조금 이상한 양념을 쳐서 요리한 놈 같다.

“넌 애인도 없냐? 시간이 아주 남아도나 보다.”

“네,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얼른 하나 꿰차.”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 없는데요? 지금은 퍼― 신의 지갑이랑 운전사가 되는 게 더 매력 있어 보입니다.”

“왜.”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신은 제가 마음에 안 드실지 몰라도 저는 신이 좋다고요.”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곁을 지나가던 여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열심히 얼굴을 훔쳐볼 정도로.

“다음부터는 작은 차로 제가 직접 운전해서 모실 테니 오늘 한 번만 ‘큰 차’에 타주세요.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모릅니다. 지난번에 지각해서 치프한테 뒤통수 맞으셨잖아요. 저 그거 굉장히 보기 싫었습니다.”

맞긴 내가 맞았는데 왜 네놈이 기분이 나쁘다는 거냐. 이상한 녀석.

신경원은 손에 들고 있던 도넛의 마지막 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은 뒤 삐뚜름한 자세로 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이 도련님은 자신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이러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실력’이 마음에 든 걸까? 자기 자랑은 아니지만 실력에는 자신이 있는 신경원이다. 그렇다면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좀….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아마도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청해서 호구가 되겠다고 하는 키이스의 저런 태도도 딱히 이상한 건 아닐 거다. 그저 놈의 방식일 뿐.

그래도 좀… 뭔가 이상하긴 한데. 

왜냐고 물어봤자 이미 들은 ‘좋아서요’라는 답밖에 안 나올 것이다. 좋아서 하겠다는데 길길이 날뛰며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다. 상대가 정말 철천지원수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야 좋다고 꼬리 흔들며 제발 관심 한 스푼만~ 이러며 치근대는 사람을 싫다고 내칠 사람은 없지 않을까? 

적어도 신경원은 그렇게까지 매몰찬 성격이 못 된다. 

“멍멍 해봐.”

갑작스러운 말에 키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곧 생긋 웃으며 시키는 대로 했다. 

“멍멍―.”

신경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에서 절로 풋―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손’도 할까요?”

“머리.”

한 술 더 뜨는 놈에게 그래도 설마 이건 안 하겠지 하며 말해봤다. 하지만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허리에 대고는 상체를 숙여 보였다. 

황금빛 머리카락으로 감싸인 정수리가 보였다. 너무 밝지도 않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예쁜 황금색의 머리카락이다. 

“…….”

하란다고 그대로 하는 행동에 기가 막혀서 물끄러미 봤지만 키이스는 허리를 펴지 않았다. 쓰다듬어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폼이다. 머리를 요구한 건 자신인데 키이스가 먼저 쓰다듬어달라고 머리를 내민,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치 꼭 쓰다듬어줘야 한다고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았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두 번 쓰다듬었다. 순간 키이스의 미소가 살짝 풀어지며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고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던 신경원은 키이스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했다. 

“그만 가자, 멍멍아.”

신경원은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지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팔자걸음으로 까맣고 길고 큰 벤츠로 걸어갔다. 

황금빛 털의 새끈한 대형 강아지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 * *

존은 옆자리의 신경원을 힐끔 훔쳐보았다. 한동안 사무실 의자에만 앉으면 신나게 졸아대던 놈이 며칠 전부터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무서운 속도로 여름 내내 쌓인 사건 파일을 검토하고 있었다. 하도 멀쩡하기에 혹시 애인이 생겼냐고 물었더니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은 여왕님이 굽어 살펴주시고 계시니 신경 쓰지 마.”

말투는 딱딱했지만 그 안에서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무언의 대답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제 여왕님까지 모시냐?”

“어. 가끔 밖에 납셔주시지 않아서 안타깝지만 요 며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에 갈 때마다 납셔주시더라고.”

“얼씨구.”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데 훤칠한 키의 잘생긴 미남이 그들 사이에 쑥 끼어들었다. 

“여왕님이라뇨? SM 클럽이라도 다니시는 겁니까, 퍼스트? 그런 취향도 있으셨나 보네요.”

사무실에 기를 막아대는 바이러스 균이라도 있는지 이번에는 신경원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스 시나몬 돌체 라테, 휘핑크림은 빼고 벤티 사이즈. 맞죠?”

신경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키이스는 스트로를 꽂아 컵을 내려놓았다. 존은 키이스의 다른 손을 살폈다. 빈손이었다. 

“너 이거 사러 나갔다 온 거였어? 그런데 왜 딱 한 잔뿐이냐?”

“퍼스트가 뭔가를 마실 거면 카페인이 든 단 음료 쪽이 낫겠다고 하셔서요.”

“퍼스트 거만 달랑 사 들고 온 거야? 내 건?”

“죄송합니다. 다른 분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요.”

키이스는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존의 것도 사 오겠다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퍼스트, 여왕님 예뻐요?”

“어, 예뻐.”

신경원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컵을 들어 스트로를 쪼옥 빨았다. 한 모금을 삼킨 신경원은 “씨발, 너무 달아”라며 구시렁거렸다. 그럼에도 계속 쭈욱, 차갑고 단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키이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을 빛냈다. 

“가을 시즌 메뉴도 있던데 너무 달면 다음엔 그걸로 사 올까요? 펌킨 스파이시 라테라고 호박을….”

“호박은 씹어 먹어야 하는 거다. 마시는 게 아니라.”

“하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게도 그 여왕님 좀 소개해주시면 안 됩니까?”

“비싼 몸이셔서 나도 얼굴 보기 힘들다. 넘보지 마라.”

“카드 한 장 드릴까요? 한도 없는 걸로.”

그때까지 키이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있던 신경원이 움직임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단정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키이스를 발끝에서부터 쓰윽 위로 훑어보더니 인상을 썼다. 

“헛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일이나 해.”

“네!”

싹싹하게 대답한 키이스는 얼른 제자리에 앉아 신경원이 넘겨준 파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법이 아니라 상당히 진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까지 시답잖은 말을 연신 신경원에게 던지며 애교를 떨어대던 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뭐, 헛소리를 해대도 일은 잘하니까 별 문제는 없는데….

현재 섹션 A에 남아 있는 신입은 키이스를 포함해 총 6명, B섹션에는 5명이 남아 있었다. 수습 기간인 6개월을 채우기도 전에 각 섹션에서 3명씩이나 퇴사를 해버렸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꽤 스코어가 좋은 편이다. 

아직 수습 기간이 끝나지 않았지만 상부에서는 초반에 이루어진 신경원의 훈련이 신입 잔류율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하고 있는 중이다. 두 개의 섹션, 네 개의 유닛으로 분리 운영되고 있는 뉴욕 지부는 유닛 간의 횡적인 유대감이 거의 없다. 홀수일과 짝수일로 나누어 격일 근무를 하고 담당하는 지역도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경원의 훈련에는 두 섹션의 신입 전부가 참여했다. 그 덕분에 신입들 간에 횡적인 유대감이 생겼다. 그로 말미암아 얼마 안 되는 공통의 자유 시간을 통해 서로간의 고충을 나누고 서로를 북돋워가며 적응하기 힘든 생활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현재 상부에서는 만일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많은 수의 신입들이 무사히 수습 기간을 마치는 경우 다음 번부터는 은퇴한 전직 에이전트들을 초빙해 비슷한 형태의 훈련을 시행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점에 있는 것이 저 박력 넘치게 잘생긴 녀석이란 말이지.

존은 수염이 돋아나기 시작한 목을 손등으로 긁으며 키이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초반에 키이스가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 그는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실수나 어설픔은 있었지만 함께 입사한 동기들과 비교하면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으며 적응력도 상당히 좋았다. 

다른 유닛이나 섹션의 신입들을 가까이 본 적은 없으나 이번 기수의 신입들 중에서 제일 쓸 만한 놈이 누구냐 묻는다면 바로 저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경험을 제외하면 기존의 에이전트들과 수준 차이가 크게 나지 않고 있으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괜찮은 놈이다. 

그런데도 존은 키이스에게 미묘한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긴 애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키이스가 적응을 잘해나가면서도 기묘하게 자신들과 융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아니, 융화되길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다고 꼭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키이스는 굉장히 예의가 발랐고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어느 누구에게나 웃는 낯으로 대하고 자신을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고 적정선을 지키고 있었다. 

아, 그래. 그거다!

존은 손가락을 딱― 울렸다. 

신경원에게 일을 하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진지하게 서류를 검토하는 놈의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장벽이 좀 거창하다면 선이라고 해도 좋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지만 그 누구에게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친절한 타인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퍼스트, 질문 좀 해도 될까요?”

해봐―라는 의미로 신경원의 타이핑 소리가 뚝 끊어졌다. 

“NYPD 쪽에서 넘어온 케이스인데요, 이런 경우에는….”

박력 넘치도록 잘생긴 놈이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신경원은 어, 그래, 아니, 응. 이렇게 네 개의 답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다. 파란 눈동자를 신경원에게 고정한 채―신경원은 눈길 한번 안 주는데도―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마냥 없는 꼬리를 팔랑팔랑거리고 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존뿐 아니라 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알고 있다. 저놈이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저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외면을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걸 타이밍만 노리고 있는 상대는 오직 신경원뿐이라는 사실을.

퍼스트, 커피 드시고 나니 입안이 텁텁하시죠? 민트 드세요.

퍼스트, 미간에 그렇게 주름 잡고 서류를 보면 나중에 미간에 금이 갑니다. 얼굴 펴세요.

퍼스트, 식사하러 가요. 

퍼스트, 소화도 시킬 겸 가볍게 한판 할까요? 

퍼스트, 퍼스트, 퍼스트. 또 퍼스트!

척 봐도 신경원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게 보인다. 

유닛에 융화되길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게 바로 그 부분이다. 키이스의 눈에는 오직 신경원만 보이고 그 이외에는 모두 아웃 오브 안중이라는 것. 키이스의 관심은 철저하게 신경원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퍼스트 이놈도 참 대단한 놈이라니까. 

잠시 멈추었던 타이핑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옆에서 잘생긴 놈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없는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음에도 시선은커녕 관심 한 스푼 줄 생각을 안 한다. 키이스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이상 입을 여는 법도 없다. 누가 봐도 제발 저 좀 봐주세요~하는 태도로 알짱거리는데도 말이다. 

신경원은 현재 올해 처음 뉴욕에서 발견된 B1의 케이스를 맡지 못해 신경이 좀 곤두서 있는 상태다. 그렇다고 해도 저만큼이나 치근거리며 들러붙어오는 놈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최소한의 대꾸만 해대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 

어쩌면 제 딴에는 친절~하게, 엄청 알뜰살뜰 보살피던 전 파트너가 좀 심각한 상태가 되어 일을 그만둔 탓인지 이번에는 작정하고 차갑고 쌀쌀맞게 대하며 무시로 일관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보았자 태도만 저렇지 보기보다 마음이 약해서 아닌 척하면서도 이거저거 해주고 있는 게 빤히 보이지만.

무엇보다 존은 자신이라면 아무리 아부를 해도 제 파트너를 위해 섹션을 넘나들어가며 그런 대규모 훈련 계획을 세워주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거 아무나 못 한다. 더더군다나 한 사람을 위해서는 정말 하기 힘든 일이었다.

“왜.”

“응?”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넌 옆통수에도 눈이 달렸냐?”

“가시권 내거든?

“아, 눈까지 흘겨가며 훔쳐보셨다? 내 얼굴이 그렇게 훔쳐보고 싶을 정도로 잘생겼어? 새삼 반했냐?”

존은 수염이 삐죽삐죽 난 턱 밑에 두 손을 괴어 꽃받침을 해 보였다. 신경원은 ‘뭐야, 이 정신 나간 놈은’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발로 존을 차버렸다.

“아파, 퍼스트.”

“헛소리 좀 그만하고 일이나 해. 나중에 나한테 도와달라고 억지로 서류 더미 떠넘기지 말고.”

“허. 기껏해야 두 번밖에 안 그랬는데 아주 죽~어라 물고 넘어지네. 쩨쩨한 자식.”

“보고서 한 번 안 보여주는 주제에 누구보고 쩨쩨하다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그건 그거 이건 이거.”

“인간관계는 give & take가 기본인 거 몰라?”

“그걸 뛰어넘어야 진정한 동료가 되는 거 몰라?”

“퍼스트.”

“왜.”

“쉬시는 거면 이거 잠깐 좀 보시겠습니까?”

잠깐 잡담을 나누는데 키이스가 또, 아까처럼 끼어들었다. 어째 신경원이 다른 사람과 잡담을 나누는 것에도 질투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제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면 낑낑거리며 자기를 보라고 꼬리치는 강아지 같았다. 강아지치고는 좀 많이 크고 많이 잘생겼고 많이 길고 그리고 또….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 잘하겠지.

키이스가 신경원의 숭배자가 되든 말든 상관은 없다. 그저 파트너 운이 나쁜 동료가 제대로 된 파트너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파트너를 얻길 바랄 뿐이다. 

* * *

그러니까 대체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하냐고!

신경원은 부루퉁한 얼굴을 한 채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앙증맞게 생긴 귀여운 차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차들은 전부 보닛 앞쪽에 양쪽에 작은 날개를 단 동그랗고 검은 엠블럼을 달고 있었다. 소형차로 유명한 MINI라는 자동차 회사의 엠블럼이다.

“이쪽이 이번에 나온 신형 모델입니다. 육각 라디에이터 그릴과 거대한 원형 헤드라이트는 저희 MINI 고유의 친숙한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조금 더 신선한 느낌을 주도록 디자인 되었습니다.”

키이스를 응대하고 있는 직원은 두 명이었다. 하나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빨간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린 젊은 여자였다. 

“작지만 강력한 트원 파워 터보 엔진을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키이스에게 열성적으로 새로운 모델에 대해 읊어댔다. 매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들의 눈에는 키이스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키이스가 일부에서 마니악한 인기를 얻고 있는 폰티악의 2인승 스포츠 컨버터블을 타고 도착했기 때문이다. 

신경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주일 전의 일을 떠올렸다. 

‘작은 차’를 직접 몰고 온다면 차를 타주겠다고 했더니 키이스는 정말로 작은 차를 몰고 나타났다. 작긴 작았다. 2인승이었으니까. 

“…뭐냐, 이건.”

“재즈요.”

“…….”

“작죠?”

말 그대로 키이스가 몰고 온 차는 작긴 작았다. 하지만….

“제가 가진 차 중에 제일 작은 걸 가져왔습니다. 혹시 아세요? 트랜스포머 영화판에 나오는 폰티악 재즈~.”

순간 신경원은 으엑―하고 소리를 냈다. 

“너 카툰 마니아였냐?”

“아뇨. 그냥 어쩌다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마음에 들더라고요. 사서 그냥 차고에 처박아두었지만요.”

“차고에 처박아두었다고?”

“네. 샀을 때만 해도 아직 면허 딸 나이가 아니었거든요. 덕분에 연식은 좀 되었지만 실제로는 새 차죠. 스포츠카치고는 딱히 쓸 만한 놈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타보시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말론이 들었으면 땅을 치며 울겠군.”

영화는 신경원도 봤다. 어찌어찌 타이밍이 맞아서 두 사촌 동생들과 함께 관람했다. 하지만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관심이 없는 터라 그냥 액션만 즐겼다. 그럼에도 저 차를 아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카툰 마니아 아니, 긱geek인 말론이 엄청나게 사고 싶어 했던 차였기 때문이다. 

말론은 문제의 영화가 그쪽 계열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바람에 제때 저 차를 손에 넣지 못했었다. 이후 물량이 다시 풀리고 중고차가 나왔지만 긱 답게 ‘초기 생산 제품’을 사지 못했음을 두고두고 억울해했었다. 그런데 키이스는 면허도 없는 상태에서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서 차고에 처박아뒀단다. 

“이 정도면 작은 거 맞죠?”

“작긴 작은데, 엔진 소리가 너무 크다. 골목을 울리잖아.”

“명색이 스포츠카인데 그 정도는 돼야죠.”

“그래. 너나 잘 타고 다녀라.”

신경원은 즉시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나 잠에서 덜 깨서 좀비처럼 움직였기에 곧 따라잡혔다.

“엔진 소리도 작아야 되는 겁니까?”

“어. 그냥 평범한 차.”

“작고 평범한 차라…. 고민해볼 테니까 오늘은 그냥 타세요. 불고기 전문 한국 식당에 갈 건데 여기서 좀 멉니다. 전에 거기는 안 가신다고 해서 다른 곳을 알아봤습니다. 평이 상당히 좋더라고요.”

불고기라는 소리에 신경원의 머리가 퍼뜩, 잠기운을 걷어내고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고기. 쇠고기! 고기! 불고기~!

“타세요. 예약을 해둬서 빨리 가야 해요.”

키이스는 벌써부터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한 신경원을 무사히 차에 태웠다. 물론 그날 먹은 고기는 참 맛있었다. 문제라면 다음 날 맛난 고기를 얻어먹은 값을 치러야 했다는 데 있었다. 

키이스는 온갖 종류의 자동차 카탈로그를 가져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라고 성화를 했다. 뭔가 넘겨보는 건 사건 파일로도 충분하고 그 이외의 것은 싫다고 했더니 제 태블릿 PC에 각종 자동차 사이트를 북마크 해와서는 이리저리 쿡쿡 찍어가며 첫 차를 사는 고등학생마냥 설레어하는 얼굴을 했다.

“이건 어떠세요?”

“크다.”

“이건요?”

“스포츠카잖아.”

“그럼 이건요?”

“너무 튄다.”

“그럼 이건―,”

“됐어. 그냥 대충 고르고 그거 내 눈에 두 번 다시 안 띄게 해.”

가뜩이나 망할 놈의 B1 때문에 짜증이 매일같이 피어오르는 상황인데 파트너라는 놈은 태평하게 차를 고르고 있으니 성질이 났다. 그래서 차갑게 말했지만 키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경례까지 하며 대답했다.

“넵!”

키이스는 생글 웃으며 얼른 태블릿 PC를 치웠다. 그 뒤로는 차에 대한 이야기는 안 했다. 대신 며칠만 참아달라며 계속 폰티악 솔스티스를 몰고 왔다. 

그냥 대충 골라주고 말았으면 되는 걸 내가 왜 그때 그랬을까.

신경원은 일주일 전의 기억을 구석에 몰아넣으며 한탄을 했다. 그리고 ‘쇠고기’에 약한 자신을 향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쇠고기 사드릴게요. 비싼 레스토랑이 아니라 캐주얼한 스테이크 하우스인데 육질 하나는 보장한다는 인기 있는 가겝니다. 7시에 제가 항상 기다리는 곳에서 봬요.」

저녁 6시 반에 핸드폰이 문자를 수신하고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냈다. 날이 서늘해지니 겨울 준비를 하려는지 꼬박꼬박 왕림해주시는 퀸을 안고 자고 있던 신경원은 육질 좋은 쇠고기에 눈이 멀어 키이스가 드리운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키이스에게 끌려간 스테이크 하우스는 놈이 끌고 가는 식당이 거의 모두 그랬듯 엄청 괜찮았다. 거기서 신경원은 놀라운 식욕을 보였다. 티본스테이크 하나를 전채 요리로 먹고 다음에는 립아이를 제일 큰 걸로 시켜서 아구아구 먹어치웠다. 그걸로도 모자라 추가로 필레 미뇽을 하나 시켜 ‘후식’ 삼아 마지막까지 맛있는 쇠고기를 즐겼다.

고기만 먹고 있으니 키이스가 야채도 함께 먹는 게 몸에 좋다며 사이드 디시를 내밀었지만 으르렁거리며 무시해줬다. 고기님을, 그것도 소고기님을 먹는데 야채 따위를 함께 먹으면 고기님이 맛이 흐려진다며 운다. 

쇠고기님을 먹을 땐 쇠고기님에게만 집중을 해서…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지.

신경원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매장 소파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키이스가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질문을 해왔다. 

“신, 마음에 드는 컬러 있으십니까?”

순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이건 퀘스트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대형 강아지 놈에게 차를 골라주는 퀘스트. 그것을 완료하기 전에는 이 던전―자동차 매장―을 탈출할 수 없다. 보상은 이미 위장 속에 들어가 있고 퀘스트를 거절할 방법은 전무. 그러니까 무조건 클리어 해야 한다. 

“이 오렌지 컬러는 어떠세요?”

“…….”

열심히 스펙을 설명하고 있던 두 직원의 시선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경원에게 향했다. 웃고는 있지만 ‘아차’―하는 표정이다. 누구를 공략해야 차를 팔 수 있는 건지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되레 눈치를 보는 두 직원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이 매장의 직원이라도 고급스러운 슈트를 입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자인 티가 팍팍 나는 키이스에게 달라붙지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꼬깃꼬깃 구겨진 체크 남방을 입고 야구 모자까지 눌러쓴 사람에게 달라붙어 갈고닦은 세일즈 기술을 펼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이번에 신 모델이 나오며 5개의 외장 컬러가 추가되었습니다. 방금 전에 말씀하신 칼라는 저쪽, 오른쪽에 있는 차의 컬러인데 볼캐닉 오렌지라고 하고요, 왼쪽은 블레이징 레드. 다른 색은 이쪽의 카탈로그를 보시면….”

예쁜―분위기와 느낌상―아가씨가 난처한 기를 살살 흘리며 설명을 했다. 나이가 든 남자 쪽은 그래도 표정 관리를 잘하는데 아가씨 쪽은 이마에 송송 식은땀까지 배어나오고 있었다. 정말로 나보고 고르라는 거냐는 눈빛으로 키이스를 보니 어깨를 으쓱하며 배시시 웃고는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아―. 이 철없는 부잣집 출신 대형 강아지를 어째야 하는 거야.

신경원은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시큰둥한 표정을 유지한 채 시선만 아래로 내렸다. 다채로운 색의 차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제일 우중충한 거.”

“이 검은색이요?”

“아니 그 옆에.”

“썬더 그레이를 말씀하시는 거죠? 좋은 선택이십니다. 깔끔하기도 하고 MINI 쿠페의 내부의 블루톤 디스플레이와도 잘 어울리지요.”

남자 직원은 싹싹한 태도로 신경원이 ‘제일 우중충한 거’라고 말한 그레이 컬러의 차 사진을 들어 보였다. 키이스는 신경원을 한 번 보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색으로 하겠습니다.”

“옵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시트부터 차근차근 골라주세요. 샘플은 여기 있습니다. 기본 색은 딥블루입니다만 차량 외부 컬러와 동일하게 맞춰드릴 수도 있습니다. 가죽도 아주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 시트의 가죽은 어떤 걸 선호하십니까?”

“선호는 개뿔. 그런 취향 없어. 그냥 안 튀게 적당히. 이상한 거 주렁주렁 달지 말고 깔끔하게. 그냥 골목길에 굴러다녀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도록, 기본 사양 그대로 딱 보통으로만.”

MINI는 그다지 비싼 차는 아니다. 신경원이 살고 있는 아파트 1층 주차장과 그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너무 고급스러운 내장재를 쓰는 건 곤란하다. 

“들으셨죠? 그냥 기본 사양으로 평범하게 해주세요. 겉으로 딱히 티가 안 나는 거라면 자잘한 건 전부 추가해주시고….”

식곤증이 몰려온 신경원이 작게 하품을 하자 키이스의 말이 빨라졌다. 그는 간단히 옵션 선택을 끝내고 품에서 고급스러운 수표책을 꺼냈다.

“내일 오전 10시 반까지 이쪽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추가로 꺼낸 것은 유명한 호텔 로고가 박혀 있는 명함이었다. 

“Mr. 클리퍼드. 죄송합니다만 내일 오전까지는 불가능합니다. 신 모델이라 인기가 높아서 주문량이 많아서요. 일주일, 아니 최소 사흘 정도는 기다려주셔야….”

“특별한 옵션을 추가하는 것도 아닌데, 안 됩니까?”

“저희가 바로 오더를 넣어도 지금 시각이 시각인지라 출고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면 됐습니다.”

품에서 만년필까지 꺼내 수표에 정산된 금액을 적으려던 키이스는 날카롭게 말하며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아니, 그게… Mr. 클리퍼드.”

키이스는 당황하는 두 사람의 앞에서 뻔뻔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태연하게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접니다, 톰슨 씨. 차 하나만 사서 내일 오전 10시 정도까지 좀 보내주시겠어요? 별건 아니고 MINI 쿠페인데… 그냥 작은 차가 좀 필요해서요. 네네. 매장에서 내일까지는 안 된다고 해서요. 해주실 수 있죠? 그럼….”

신경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키이스를 바라보았다. 저러려면 왜 매장까지 자신을 끌고 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열심히 설명을 하던 남자는 신경원보다 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나온 새 모델인데 컬러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톰슨 씨.”

키이스가 핸드폰 아래쪽을 손으로 덮고 구매 계약서를 힐끔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자 직원이 기합을 빡― 넣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오전 10시 반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안 된다면서요.”

“해드리겠습니다.”

키이스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자기 이름을 걸고 반드시 내일 아침까지 차를 보내주겠다며 불끈 주먹까지 쥐었다. 키이스는 씨익― 아주 사악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 예들린이 떠오르는 미소였다.

“…아, 죄송합니다. 매장에서 해주겠다네요. 예.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띠로록―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키이스는 핸드폰을 품에 넣고 명함 한 장을 꺼내 남자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그 명함에는 유명 호텔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준비되는 대로 그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키이스는 수표에 옵션을 포함해 정산된 금액을 적어 남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수표에 금액을 적고 멋들어진 서명을 했다. 

“이건 ‘운반비’입니다.”

“감사합니다. Mr. 클리퍼드.”

번개 같은 눈으로 수표에 적힌 금액을 본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혀를 빼물었다. 운반비조로 건넨 수표에는 옵션을 포함한 차 값의 1/3이 조금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그걸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주는 놈이나 받는 놈이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가시죠, 신. 맥주라도 한잔 하실래요?”

“아니, 자러 갈래.”

일주일 걸려 받을 차를 내일 오전까지 받기 위해 저런 돈을 쓰는 놈이라니. 아무리 부잣집 자식이라도 참….

“아직 조금 이른데 저랑 맥주 한잔 하고 가세요. 괜찮은 하우스 맥주집을 알고 있습니다.”

“클리퍼드.”

“네.”

“너 운전해야 하거든?”

키이스가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원은 그의 어깨를 밀어 빨리 집에나 가자면서 그를 매장 밖으로 몰고 나갔다. 두 직원이 따라 나와 안녕히 가시라고 배웅을 했다. 밖으로 나온 신경원은 직원들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고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손을 날렸다. 

빠악―!

“윽―.”

경쾌한 소리와 함께 키이스가 뒷덜미를 잡았다. 

“아파요, 신.”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간지러우라고 때렸겠어? 응? 응?”

“하지만 너무 아픈데요. 그 무지막지한 힘으로,”

신경원은 끄응끄응거리며 항의하는 키이스의 말을 잘라버렸다. 

“새꺄. 네 돈도 아니고 부모님이 힘들게 버신 돈 그렇게 막 쓰는 거 아니―,”

말을 하다 말고 신경원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돈을 함부로 쓴다는 생각에 한 대 후려 팬 거까지는 좋은데 키이스가 쓴 돈이 부모님 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관의 에이전트는 수습이라도 동급의 FBI 에이전트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다. 거기에 키이스는 그간 작전에도 몇 번 나갔고 위험도가 높은 B2를 처리한 경력도 있어 생명수당에 위험수당 외 기타 등등, 이런저런 수당을 더해 상당한 금액을 받았을 것이다. 에이전트가 된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많은 돈을 받지는 못했겠지만 제가 가진 돈을 조금 보탠다면 고가의 슈퍼카도 아닌 평범한 MINI 한 대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씨발―.”

“아우, 아파요, 신.”

“엄살 피우지 마. 때릴 만해서 때린 거니까.”

자기 돈이든 부모님 돈이든 어쨌든 그런 큰 금액을 운반비조로 준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물론 키이스와 자신이 가진 돈에 대한 관념 자체가 아예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안다. 신경원에겐 큰돈이더라도 키이스에겐 tip으로 주는 1달러 지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래도….

“너 돈 많은 거 알아. 차 한 대 값도 네겐 별로 큰돈이 아니겠지. 그러니 차 산 거 가지고 뭐라 그럴 생각은 없어. 하지만 며칠 기다리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쓰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

부잣집 도련님이 가지고 있는 돈을 썼을 뿐인데 괜한 잔소리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렇다. 하지만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어.”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야.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이건 그냥―, 아우우우~.”

신경원은 말을 하다 말고 제 가슴을 벅벅 긁었다. 어째선지 가슴속 어딘가에서 간지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잔소리 같은 건 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잔소리가 나왔다는 건 키이스가 ‘남’―타인의 위치에서 잔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젠장, 아직 6개월 다 못 채웠는데.

시간과 상관없이 이미 키이스를 파트너로 인정해버린 뒤지만 그거랑은 또 뭔가 다른 의미에서 키이스를 인정하고 있었나 보다. 마치 가랑비에 어깨가 젖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퍼뜩, 깨달아버린 그런 기분이랄까.

강아지 강아지 했더니 진짜 강아지 한 마리 입양한 기분도 들고…. 강아지치고는 좀 많이 특 대형 사이즈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속이 아니라 몸까지 간질간질거린다. 신경원은 얼굴을 설풋 붉히며 목을 벅벅 긁었다. 그러곤 키이스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손.”

“네?”

“손.”

재차 말하자 키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낚아챈 신경원은 힘을 주어 마주 잡은 손을 당겼다. 키이스는 어엇―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숙였다. 신경원은 제가 호되게 후려갈긴 뒤통수를 쓱쓱 두어 번 문질러주었다. 고개를 든 키이스는 머쓱해하면서도 곧 방그레 웃었다. 

목에서부터 뺨까지 벅벅 긁어대던 신경원은 키이스를 삐뚜름히 바라보며 말했다. 

“맥주 마시러 가자.”

운전이야 뭐, 자신은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 그만이고 키이스는 그 예의 운전사를 부르라고 하면 되겠지. 안 그래도 빡센 인생인데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 곤두세우고 싶지 않다. 

이미 마음에 들어버린 걸 어쩌겠는가. 표현은 좀 그렇지만 안 망가지게, 예쁘게 잘 보듬어 키워 오래오래 부려먹어야지.

“빙구처럼 웃지만 말고 얼른 차에 타라. 응?”

“네! 모시겠습니다.”

언제 끙끙거렸냐는 듯 키이스의 표정은 해맑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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