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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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제가 불가능한 흥분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나름 기다려왔던 일이니 어느 정도는 흥분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흥분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수습 에이전트가 작전에 투입되는 것은 보통 입사 후 두 달에서 세 달쯤 되는 때부터였다. 물론 선임 에이전트가 부상당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정원을 채우지 못한 경우나 일이 많을 경우엔 그보다 빨리 투입되기도 한다.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2달을 넘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것이 기본이었다. 국내 최대의 격전지인 뉴욕에서만큼은 그 기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번 기수의 수습 에이전트가 넉넉하게 이런저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부정기적인 채용 시기가 어쩌다 보니 여름시즌 직후와 맞물려 비교적 한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채용되자마자 곧장 현장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어쨌거나 지금 키이스는 현장을 향해 달려가는 차 안에 있었다. 동기 중 몇은 이미 첫 실전을 경험했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로스만 해도 이틀 전 현장에 투입되었다. 따져보면 키이스의 실전 투입은 다른 동기들보다는 조금 늦은 상태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전장치 점검하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흥분하지 않을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달아오른 머리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싸 식혀주는 것 같았다.

“투입되면 한시라도 날 놓치면 안 돼. 하지만 너무 가깝게 접근하지는 마. 한 1.5에서 2m 정도. 항상 그 정도 간격을 유지해. 내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하고. 명심해야 할 건 ‘목표물’이 뱀파이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더라도 첫 발만큼은 절대 목이나 얼굴, 심장을 노리지 말라는 거야. 일단 팔다리에 한 발 쏘고, 반응을 보고 다시 발포하는 거다. 알았어?”

“네.”

신경원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말이 많았다. 그간 들은 말의 배는 될 것 같았다. 같은 말을 적어도 3번은 반복해서 했다. 잔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중간에 한 번, 그만 좀 하라고, 내가 어린애로 보이는 거냐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지시에 따라 착용한 장비를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5년차의 현직 에이전트. 뉴욕 지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 기관 전체를 통틀어도 전체의 1%에 해당하는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는 신경원이다. 말하는 것들이 전부 기초 중의 기초라 해도 흘려들을 수는 없다. 

키이스는 2주간의 훈련을 마친 후부터 신경원이 말하는 거라면 아무리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라도 무조건 따르고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하고 웨이트를 하라면 하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도 구분이 애매모호한 눈알들을 열심히 봤다. 비번 일에도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숙직실 하나를 아예 자기 방처럼 사용하며 끊임없이 실제 전투 영상을 되풀이해보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물론 신경원은 휴식도 포기한 키이스의 열정에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 파트너와 함께 오늘의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군말 없이 키이스를 데리고 출동하는 차량에 탑승했다. 그것만으로도 키이스는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도움은 안 되겠지만 따라와’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퍼스트, 질문이―,”

“다 왔다. 통신기 전원 켜. 질문은 작전 후에 받겠다.”

유니폼만 입은 채로 입을 놀리고 있던 신경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이익―하는 소리를 내며 차가 멈추었다. 뒷문이 열리는 사이 각종 장비를 번개처럼 착용한 신경원이 키이스를 몰아내며 차에서 내렸다. 아스팔트에 발을 내딛자마자 철컥철컥 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신경원이 장비와 무기를 점검하는 소리였다. 일처리 속도만큼이나 전광석화 같은 빠르기였다.

『레나즈 팀장, 신입니다.』

『현장 지휘권을 이양하겠다.』 

『감사합니다. 현장 상황 브리핑 바랍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백업팀, 다른 말로 하면 1차 타격대가 현장을 물 샐 틈 없이 봉쇄하고 있었다. 적외선 카메라로 확인한 결과 내부의 인원은 총 7명. 그들 중 2명이 3층. 나머지는 2층에 있었다. 백업팀은 진입 준비를 마쳤다고 보고했다. 

『캐리와 라미레즈 팀은 3층을 맡아줘.』

『Roger.』

『현 시각 01:37. 정확하게 42초 후, 작전을 개시한다.』

캐리가 라미레즈와 함께 먼저 이동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건물의 외벽에 설치된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자리를 잡는 것을 본 신경원은 툭 하고 키이스의 팔을 치고는 수신호를 보냈다. 

키이스는 곧장 신경원의 뒤를 따랐다. 차에서는 그토록 잔소리를 해대던 신경원이었지만 지금은 작전에 관련된 이야기 이외에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처음으로 작전에 나서는 파트너의 기운을 북돋워준다거나 하는 일도 물론 없었다. 최소한 잘하라고 하든가 ‘힘내, 너는 할 수 있어.’ 정도는 말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신경원은 역시 신경원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반대로 처음부터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파트너’로 인정해주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좋았다. 물론 아직 신경원을 따라잡기에는 한참 멀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늘의 작전지역은 차이나타운 외곽에 위치한 어느 불법 사설도박장이었다. 건수 자체는 FBI나 경찰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DEA(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마약 수사국)에서 넘어온 것인데 분석팀은 추적 조사 끝에 목표물을 특정해냈다. 차이나타운을 주름잡고 있는 조직 중 어느 말단 조직이 뱀파이어에 의해 접수되었고 덕분에 그 조직원의 수가 어느 시점부터 급격히 줄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조직원의 가족에까지 피해가 하나둘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작전 위험도는 B급이었다. 문제의 뱀파이어가 상급 블러드서커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원되는 인력은 HRT가 두 팀, 백업팀 한 팀이 전부였다. 문제의 목표물, 혹은 목표물들이 자신의 조직원들을 물어 죽이는 바람에 작전에 걸림돌이 되는 ‘일반인’의 숫자가 적은 탓이었다.

작전 지역은 어두웠다. 본래도 조금 어두운 지역인데 가로등을 고장 난 것으로 위장해 꺼버렸다. 백업팀의 움직임을 놈들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신경원은 백업팀 팀장에게 간단히 무전을 보낸 후, 조용히 건물 외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앞장서던 신경원은 자신의 뒤에 바짝 붙어 있는 키이스에게 손짓을 했다. 귀를 막으라는 것이었다. 

키이스가 귀를 막자마자 신경원이 수신호를 보냈다. 귓가에 백업팀 팀장의 명령 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있던 백업팀이 건물의 창을 깨고 섬광탄을 던져 넣었다. 귀를 틀어막았음에도 강력한 소음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진입.』

신경원은 명령과 함께 백업팀이 확보해준 통로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섬광탄 투척과 동시에 건물 전체에 공급되는 전원을 끊어버린 탓에 안은 매우 어두웠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지시대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번개처럼 주위를 살피니 팔다리가 포박된 두 사람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게 보였다. 창문에서 총구를 겨눈 채 매달려 있는 백업팀의 그림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신경원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문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부터 확인했다. 몸을 뒤집고 턱을 잡아 얼굴을 보고 맨눈으로 눈동자를 살핀다. 신경원은 나이트 스코프 장비를 착용은 했으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과연 저게 제대로 보일까 싶었던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아래로 내렸던 나이트 스코프를 신경원처럼 위로 젖혔다. 녹색으로 점철되어 있던 시야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보였다. 2주간의 훈련으로 어둠에 익숙해서일 수도 있고 사방이 막혀 있던 지하와는 달리 1년 12달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들이 존재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가로등을 껐음에도 말이다. 

첫 번째 남자는 예상한 대로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신경원은 남자를 기절시켰다. 그의 수신호에 뒤따라 들어온 백업팀이 남자를 밖으로 끌어냈다. 곧 나머지 사람도 밖으로 이동되었다. 그들은 일반인, 추정컨대 ‘먹이’로 삼기 위해 포박해 가두어놓은 것 같았다.

일반 사람들은 섬광탄의 위력을 본래보다 좀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섬광탄이 눈앞에서 터지면 고막이 찢어진다든가 시신경이 타버린다든가 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다. 정말 바로 눈앞에서 터진다면 각막에 화상을 입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시신경은 타지도 익지도 않는다. 그저 강렬한 불빛과 소음으로 눈과 귀가 고통을 좀 받을 뿐, 곧 회복된다.

기관에서 사용하는 섬광탄은 일반적인 것과 조금 달라서 좀 더 강렬한 불빛을 낸다. 그래도 상대가 인간이라면 조금 더 고통을 받을 뿐이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다르다. 일반에 알려진 잘못된 상식 그대로 각막이 타버린다―고 배웠다. 그나마도 얼마 안 가 금세 회복되어버리지만. 

탕―. 

일반 소총보다 발포 소음이 작은 총격 소리가 위층에서 들려왔다. 백업팀에서 움직인 모양이다.

『클리퍼드, 왼쪽.』

『네.』

반쯤 열린 문 옆에 자리를 잡은 신경원이 키이스를 불렀다. 신경원은 곧 손가락을 들어 올려 카운트를 했다. 

3. 2. 1―!

두 사람은 적외선 투시 카메라로 조사한 결과 아무도 없다고 확인된 방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혹여 변화 중인,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의 뱀파이어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클리어.』

총소리와 신음소리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방 쪽에서 들려왔다. 

『이동. 서둘러.』

『네!』

『2보 정도 앞으로 나서서 전방을 맡아. 뒤에서 엄호하겠다.』

키이스는 소총을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고 앞장섰다. 본능적으로 신경원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신경원의 지시에 따라 다음 방을 수색하고 문이 빼꼼하게 열린 그다음 방 앞에 도착했다. 

『진입.』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하려는 찰나 명령 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스는 황급히 문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반라의 상태로 누워 있는 남자와 그에게 매달린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발포.』

키이스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속이 다 비치는 슬립을 입고 있던 여자가 침대에서 빠져나와 문가로 걸어오다 허벅지를 맞고 쓰러졌다. 그녀는 인간이 낼 수 없는 기이한 비명을 질렀다.

『뱀파이어다. 처리해.』

키이스는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연거푸 당겼다. 이번에는 팔다리가 아닌 목을 향해 쏘았다. 비명을 지르던 여자는 사지를 떨며 발광을 했다. 

『뭐해. 확인 사살하지 않고.』

신경원은 키이스의 등을 밀었다. 키이스는 마치 원격 조종되는 로봇처럼 안으로 걸어 들어가 발광하는 여자의 몸을 뒤집고 가슴을 향해 두 번, 목에 한 발을 더 발포했다. 여자는 몇 차례 더 발광을 하다 축 늘어졌다. 곧이어 여자의 가슴이 하얀 연기를 내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보고.』

『목표물 1. B3로 확정. 확인 사… 살 완료.』

키이스는 멍하니 제가 처리한 뱀파이어를 내려다보았다. 목이 녹아내리고 있어 금방이라도 두부가 몸에서 떨어져 나올 것 같은 끔찍한 상태였다. 멍하니 뱀파이어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귀에 신경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이미 죽었다. 빨리 나가.』

신경원은 키이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곧장 뒷덜미를 잡아 방에서 끌어내고 다음 방으로 가길 종용했다. 수색해야 할 방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그쪽에서는 총격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격 중지! 클리퍼드, 앞장서.』

키이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움직였다. 바싹 긴장한 팔다리가 뻣뻣하게 움직였다.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2층의 마지막 방에서 쿵쾅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키이스와 신경원은 문의 양쪽에 섰고 신경원은 곧 고개를 끄덕여 진입을 명했다. 그때였다. 낡아빠진 나무문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안에서부터 밖으로 부서졌다. 안쪽에서부터 밖으로 무엇인가 커다란 것이 튀어나왔다. 아니, 던져졌다. 

내동댕이쳐진 것은 의자였다. 그와 함께 부서진 문의 나무파편이 타다닥 소리를 내며 헬멧의 실드에 부딪혔다. 키이스는 황급히 진입하려 했지만 안에 있던 상대가 조금 더 빨랐다. 

까드득―.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강화 플라스틱을 긁고 지나갔다. 동시에 전신에 엄청난 힘이 가해졌다. 몸이 날아가 복도의 반대편 벽에 부딪혔다. 

『오른쪽으로 굴러!』

신경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피스를 울리는 순간 거구의 남자가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하지만 바닥에 닿기도 전에 놀라운 탄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슈슉―. 소음기가 장착된 신경원의 글록이 불을 뿜었다. 빗나가 바닥을 뚫은 것을 보고 황급히 소총을 들어 올렸지만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깔려 죽을 거냐! 피해!』

오른쪽으로 굴러 몸을 피한 키이스의 귀에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팔다리에 총격을 맞은 것이 분명한 거구의 남자가 좁은 복도 전체를 막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야는 금세 트였다. 거구의 남자가 내두른 팔다리가 나무로 만들어진 벽을 가차 없이 부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에 칠해진 페인트가 하얀 분말을 날리며 벽과 함께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그 사이에 날렵하게 움직이는 신경원이 있었다. 

신경원은 무섭게 쇄도하는 뱀파이어의 공격을 막고 저도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백업팀이 있었으나 발포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벽을 부숴 어느 정도 공간이 생겼다 해도 원채 복도가 좁았다. 

무엇보다 백업팀은 HRT와는 달리 일반 규격 탄환을 사용한다. 일반 탄환으로는 뱀파이어를 죽일 수 없다. 그럼에도 일반 탄환을 사용하는 이유는 뱀파이어에게 물리적인 충격을 가하여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맞으면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 되기에 백업팀은 발포가 불가능했다. 신경원이나 키이스에게 맞을 위험이 너무 컸다.

키이스는 좀 더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피하는 것이 신경원을 돕는 일이었다. 자리를 잡은 키이스는 글록을 꺼냈다. 그의 총알에는 관통력이 비교적 약한, 뱀파이어에 유효한 탄환이 들어 있다. 설사 신경원이나 백업팀에 맞는다 해도 부상당하는 정도에서 끝난다. HRT에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라면 바로 앞에 동료가 있어도 발포해도 좋다는 허가가 내려져 있다. 

그는 조심스럽게 조준을 했다. 뱀파이어는 눈알이 돌아가도록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였다. 등판 전체가 과녁이었다. 

후욱―. 키이스는 마스크 아래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신경원의 공격을 받은 뱀파이어가 한순간 멈칫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머릿속에서 땀 한 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신경원의 공격에 뱀파이어가 벽에 부딪혔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놈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넓은 등판이 똑똑히 보였다. 

슈슉―.

아이보리색 셔츠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보였다. 총격을 받은 뱀파이어가 괴성을 지르며 상체를 비틀었다. 살기 어린 눈동자가 키이스에게 박혀드는 순간이었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신경원이 몸을 날렸다. 글록을 든 손으로 단검을 단단히 받친 신경원이 뱀파이어의 가슴, 심장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귀에 뚜두둑 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이 손목을 비틀어 검을 뽑는다. 그것을 본 즉시 키이스는 몸을 일으켜 쓰러진 뱀파이어가 내두르는 팔을 피해 베레타의 방아쇠를 당겼다. 슈슉 소리와 함께 뱀파이어의 목에 구멍이 났다. 신경원의 검이 다시금 뱀파이어의 심장을 찌르는 것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아아아아―!”

거구의 뱀파이어가 사지를 뒤틀었다. 거구인 만큼 그가 발광하는 것만으로도 복도 전체가 울렸다. 키이스는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추가 발포가 필요한지 눈빛으로 묻자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거구의 뱀파이어는 한참 동안 몸을 뒤틀다 어느 순간 전원이 끊어진 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보고해.』

『예?』

전투를 벌이고 결정타를 먹인 것은 신경원이었다. 키이스는 조금 도왔을 뿐이다. 사살 확인 보고는 뱀파이어를 처리한 사람이 하게 되어 있다. 의아함에 신경원의 표정을 살폈지만 보고하라는 말만 들려왔다. 

『목표물 2.』

『3이야. 중간에 위층에서 목표물 2를 제압했다는 보고를 했는데 못 들었어?』

『아, 죄송합니다.』

신경원이 앞에 널브러진 놈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귓가가 좀 시끄럽긴 했다. 하지만 앞에서 너무 난장판이 벌어져 신경원의 목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었다.

『어떠한 순간에도 귀는 열고 있어. 정신줄 단단히 잡으라는 소리다.』

『알겠습니다. 목표물 3. B3… 아니 B2으로 확정. 확인 사살 완료.』

키이스는 보고를 하며 신경원의 눈치를 보았다. 쓰러진 놈은 미친놈처럼 공격을 해왔지만 문을 열고 나오기 전 의자를 던졌다. 밖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한 짓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이지를 완전히 잃은 B3라고 보기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얼른 B2로 보고했다. 

다행히 신경원은 보고를 수정하지 않았다. 키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경원은 뱀파이어의 가슴에 박힌 단검을 비틀어 뽑으며 말했다.

『홍채 형태 확인하고 샘플 채취해. 베스트 뒤에 캡슐 있는 거 알지?』

『네.』

키이스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사용법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시행하려니 손가락 끝이 조금 떨렸다. 

『확인부터 하라니까!』

대형 캡슐을 안와에 대려 하자 대뜸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떨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움직일 만은 했다. 그는 얼른 플래시를 꺼내 뱀파이어의 눈을 살폈다. 사살된 직후였지만 동공은 풀어지지 않은 채였다. 즉, 평범한 인간과 거의 같았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서둘러. 조금만 늦어도 샘플이 오염된다.』

『네.』

키이스는 벌써 반 이상 가라앉은 뱀파이어의 흉부를 힐끔 보고는 이를 악물고 샘플을 채취했다. 이어 팔 부근에서 체조직도 약간 채취해 캡슐에 담았다. 그걸 본 후에야 신경원은 포인트 1 최종 확인 완료 보고를 했다. 이어 3층에 투입된 캐리와 라미레즈 팀이 포인트 2도 확인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신경원은 멍하니 있는 키이스를 일으켜 세워 2층을 재확인하고 침대 위에 죽어 있던 남자에게 후처치를 시행한 후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키이스에게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의 홍채를 살피라고 명령한 후 빈방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작전 완료를 선언했다.

“씨발, 별것도 아닌데 시간 엄청 잡아먹었네.”

신경원은 헬멧을 벗어들고 투덜거렸다. 캐리는 헬멧은 벗지 않았지만 실드를 올리고 마스크를 끌어내렸다. 뱀파이어의 체액이 튈까 봐 쓰는 마스크로 방수처리가 되어 있어 무척이나 답답하기 때문이다. 

“뭐, 첫 출동이었는데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 어이, 클리퍼드. 첫 출동에서 B2도 잡고 굉장한데?”

“제가 잡은 게 아닙니다. 전 그냥 조금 도와드렸을 뿐인데….”

“적절한 어시스트였어. 그만하면 충분히 잡았다고 해도 돼.”

신경원은 여상한 투로 말했다. 키이스는 동의할 수 없었다. 

“퍼스트. 얼결에 제가 보고를 하긴 했지만 그건―,”

“잠깐. 으엑―. 설마 너 저놈한테 B2급 샘플 채취시키려고….”

“B2가 아무 때나 튀어나오는 건 아니잖아. 뭐든 해봐야 경험이 되고.”

“아이고. 아주 그냥 벼랑에서 등을 떠미는구나. 첫 출동인 놈에게 그런 걸 시키고. 아무튼 신입 험하게 다루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캐리는 상상만 해도 비위가 상한다는 듯 구역질을 했다. 키이스는 그제야 왜 신경원이 굳이 자신이 죽인 뱀파이어를 키이스의 공으로 돌렸는지 제대로 이해했다. ‘경험’의 축적을 위해서였다. 지금 베스트 뒤편에 꽂아둔 ‘샘플’, 그러니까 뱀파이어의 안구 두 개를 채취하는 건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불유쾌한 일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만 가자.”

“그래. 가서 보고서 써야지. 어이, 라미레즈.”

캐리가 문가에 기대고 서 있던 라미레즈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라미레즈?”

가까이 다가가 몸을 굽힌 캐리는 곧 혀를 찼다. 라미레즈가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라미레즈의 헬멧과 마스크를 벗겼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다 끝났어. 숨 천천히 쉬고.”

캐리는 라미레즈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이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때 신경원이 스윽, 그들에게 다가갔다. 

“귀찮게시리.”

“얌마, 잠깐―.”

턱. 그리고 탁―. 신경원은 라미레즈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그녀의 뒷덜미를 손날로 쳐버렸다. 그러곤 힘없이 쓰러지는 라미레즈의 몸을 받아들어 캐리에게 넘겼다. 

“인마! 무작정 기절시키면 어떻게 해.”

“언제 진정시켜서 언제 복귀하려고. 가자. 클리퍼드.”

신경원은 라미레즈를 부축하며 구시렁거리는 캐리를 두곤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멍하니 서 있는 키이스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너도 한 대 맞고 실려 나가야 하는 상태냐?”

“아, 아닙니다.”

키이스는 황급히 대답하고 움직였다. 그는 단지 아무런 전조도, 가차도 없이 라미레즈를 기절시킨 신경원에게 아주 살짝 놀랐을 뿐이다. 10%는 베스트 등판에 꽂아둔 소름 끼치는 샘플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이유가 하나 더 있었지만 말해봤자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볼 것 같아서 관뒀다.

밖은 이미 사방에 밝혀진 조명으로 환했다. 백업팀은 차량에 탑승하고 있었고 처리팀과 의료팀 차량이 세 대나 와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들이 타고 온 검은색의 차량이 뒷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올 땐 끼익 소리만 내던 낡은 철제 계단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철컹거렸다. 키이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의 몸이 완전히 굳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어깨가 다 저려올 지경이었다. 

아래로 내려온 키이스는 처리팀에 채취한 샘플 캡슐을 건넸다. 곧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몸을 살피곤 부츠를 소독하고 물러났다.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신경원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어느새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린 끝에 간신히 신경원을 찾아냈다. 그는 유니폼을 입은 그대로였지만 아래는 팬티 차림으로 앰뷸런스 뒤쪽에 앉아 처치를 받고 있었다. 키이스는 황급히 달려갔다. 

“퍼스트, 어디 다치시기라도 한 겁니까?”

“다치긴 무슨. 그냥 나뭇조각 하나가 얕게 박힌 거뿐이야.”

신경원은 말간 얼굴을 한 채 제 상처를 가리켜 보였다. 무릎에서 약간 위쪽, 허벅지 부근에 1센티 정도의 상처가 있었다. 

“장소가 너무 좁아서 좀처럼 손을 날려버리기가 힘들었거든. 손톱에 바지가 찢겨서 아차 싶었는데 하필이면 거기로 나뭇조각이 날아들어서….”

키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큰 상처로 보이진 않지만 거칠고 뾰족한 나뭇조각이 박혔으니 통증이 꽤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경원은 작전을 완료할 때까지 내색을 안 했다. 절룩거리지도 않았고 계단을 내려올 때도 키이스처럼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그래. 좀 더 잘해. 귀는 항상 쫑긋 세우고 눈알 잘 굴려서 주변 잘 파악하고.”

“알겠습니다.”

“처치 끝났습니다. 다행히 깊이 박히지 않았고 상처도 크지 않아 꿰매지는 않았어요. 물에 닿지 않게 하시고 아물 때까지 가능한 많이 움직이진 마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신경원은 으차~하며 일어섰다. 키이스가 부축하려고 했지만 예상대로 싹, 피해버린다. 그러곤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그냥 입고 계시죠. 날씨가―,”

“안 추워.”

이전에 봤던 그대로 신경원은 맨발로 터덕터덕 대기하고 있던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 라미레즈와 캐리는 이미 차량에 탑승한 뒤였다. 물론 라미레즈는 한쪽에 눕혀진 상태였다. 신경원과 키이스가 탑승하자 차량은 곧장 본부를 향해 출발했다. 

“기가 세 보여서 괜찮을라나 싶었는데.”

캐리는 혀를 차며 라미레즈를 바라보았다. 

“적응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바라진 마.”

“그건 그렇지. 그래도 이 녀석은 멀쩡한데.”

라미레즈에게 꽂혀 있던 캐리의 시선이 제 옆에 앉은 키이스에게 향했다. 키이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잘했다고 칭찬은 해줬냐?”

“나 잔다.”

신경원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팔짱을 끼더니 곧장 눈을 감아버렸다. 신경원과 캐리 사이에 앉아 있던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마주 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떨림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본부로 돌아온 키이스는 즉시 기관에 상주하는 카운슬러에게 상담을 받았다. 일 자체가 심리적인 충격을 받기 쉬운 일이라 첫 출동 후에는 무조건 상담을 받아야 했다. 

키이스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지만 생각보다는 담담하게 상담을 마칠 수 있었다. 1시간여에 이르는 상담을 마치고 나왔더니 기절했던 라미레즈가 복도의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쌀쌀맞게 대답하는 라미레즈는 얼굴빛은 나빠도 눈빛은 살아 있었다. 표정을 보니 좀 분해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 떵떵거리며 큰소리를 쳤던 것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신경원이 가차 없이 기절을 시켜 그런 것인지 알 길은 없다. 키이스는 부디 전자이길 바랐다. 신경원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전트 라미레즈. 들어오세요.”

키이스는 어깨에 힘을 꽉 준 채로 안으로 들어가는 라미레즈를 뒤로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한바탕 혈전을 치르고 온 신경원과 캐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살짝 나른한 느낌으로 데스크 앞에 앉아 있었다. 언제 출동을 나갔다 왔냐는 분위기다.

“보고서 써.”

상담은 잘 받았는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 물어왔다면 그건 신경원이 아니다. 못했다는 소리를 안 들은 게 어디냐 생각하며 키이스는 자리에 앉았다. 엉덩이와 등이 의자에 닿는 순간 온몸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후우―.”

저도 모르게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철제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느꼈지만 정말 생각보다 많이 긴장을 했던 것 같다. 그게 이제야 빠져나가고 있었다. 

키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주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만날 똑같은 보고서를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외치던 신경원과는 다른 이유로, 곧장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긴장했던 근육과 신경이 한 목소리로 보이콧을 외치고 있었다. 어째선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키이스 클리퍼드가 기관의 에이전트―뱀파이어 헌터가 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최후 결정 자체는 온전히 키이스의 것이었으나 거부하기에는 상황이라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따랐다. 

사실은 뱀파이어 헌터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10살 무렵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18세 성인이 되던 그날 ‘그 사람’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온몸에 씌워져 있던 굴레를 드디어 벗을 수 있다 생각하니 행복하기까지 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멋대로 웨스트포인트에 원서를 넣었다.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홀로서기를 위해 강행했다.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웨스트포인트를 다니는 동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졸업했을 때도, 임관해 부임지가 적힌 명령서를 받아드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연줄로 기관의 에이전트가 될 길을 열어놓고 키이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래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도 포기하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수락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될 대로 돼라. 다른 하나는 이렇게 해서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지막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경우 무작위로 쏟아질 원색적인 비난과 경멸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당연하지만 타의에 의해 하게 된 일이기에 의욕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자존심과 오기, 그리고 뱀파이어 헌터 따위가 되어도 그 사람이 바라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무엇인가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즉, 기관의 에이전트가 되는 일이 불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시간낭비를 시킨 것을 비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무사히 기관의 에이전트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의 성과는 얻어내야 했다. 그래서 열심히,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달려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목적이 제멋대로 뒤틀렸다. 

생각해보면 첫발부터 빗나갔던 것 같다. 뉴욕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뉴욕에, 그것도 맨해튼 중심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한적한 도시로 가서 적당히 주변에 맞추어 중간만 하는 것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하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생애 처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키이스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집중을 하고 있는지 한쪽 뺨에 힘을 주어 입술을 삐뚜름하게 내민 사람이 보였다. 

파트너라는 이름의 남자. 자신에게 전력을 다하게끔 만든 사람.

밀빛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제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순한 인상이지만 까칠한 성격의 동양인. 그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키이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건 중력 같은 끌림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가지에서 뚝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사과처럼, 그렇게 끌려서 떨어졌다. 지금 그는 자신에겐 손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기를 땅바닥에서 주워달라고, 뉴턴이 그랬던 것처럼 집어 들고 세기의 발견을 해낸 사람처럼 기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까지 키이스가 눈치를 살폈던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아무리 눈치를 살펴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하면 불만이 있어도 따랐다. 키이스가 그 사람의 말에 반발한 것은 단 한 번, 웨스트포인트 진학을 결정했을 때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키이스는 신경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고 실없는 말이라도 좋으니 한 마디를 던져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며 계속 눈치를 본다. 

이상해. 그런데도 괜찮아.

맹세하지만 이런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먼저 다가가서 이름을 물었던 사람도 없다. 그런데 신경원에게만은 그러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깨끗하게 거절당하고 나서 왜 따라갔는지, 왜 이름을 물었는지 한참을 생각했었다.

처음엔 ‘동급’이라 생각한 사람에게 너무 어처구니없이 당해서 그를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을 뿐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고 망설임 없이 뉴욕행을 결정하고 뉴욕 지부에 발을 디딜 때까지도 그 생각만 했다. 동기가 아니라 선임인 것을 알고 파트너가 되었을 때도 여전했다. 어떻게 해서든 신경원의 머리와 몸에 배어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통쾌하게 쓰러트리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뭐야.”

모니터에 박혀 있던 시선이 갑자기 키이스로 향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보고서 안 써?”

“써야죠.”

차갑고 쌀쌀맞고 조금이긴 해도 고압적인 말투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빙그레 웃었다. 

“실없이 웃지 마.”

“버릇입니다.”

키이스를 아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말이다. 그는 미소 띤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신기했다. 저런 말투인데도 거부감이나 반발심이 들지 않는다. 되레 쳐다보고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 자체에 기분이 좋아진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는 의문도 단박에 날아가버렸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통신 자체가 다 녹음되는데 왜 일일이 보고서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 납득이 갑니다.”

“그런 말은 최소 1년쯤은 버티고 나서 해. 닥치고 써.”

“넵!”

보고서 작성을 다 마쳤는지 신경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스트레칭도 한다. 그러고는 서류 몇 개를 집어 들었다.

“회의실 가시게요?”

얼마 전부터 신경원은 종종 서류를 들고 회의실로 사라졌다. 한번은 궁금해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말을 건넬 겸 회의실로 간 적이 있었다. 신경원은 제법 서늘해진 날씨인데도 에어컨을 켜놓은 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더위를 꽤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신경원은 대답하지 않고 태블릿 PC를 챙겼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라 키이스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이어폰을 꼈다. 막 녹음된 통신 데이터를 플레이하려는 순간이었다. 이어폰을 끼지 않은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럭저럭 잘했어.”

키이스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돌리자 그새 탕비실로 들어가 예의 동그란 병의 사과 주스를 들고 나오는 신경원이 보였다. 물론 키이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고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여상한 태도였다. 

회의실의 문이 탁―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제야 벌어졌던 입이 호선을 그리며 양옆으로 벌어졌다.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Y―es!”

키이스는 주먹을 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 그것은 신경원이었다.

* * *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조금 늦게 찾아온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되며 뱀파이어의 발생률은 급격히 낮아졌다. 그렇다 해도 마냥 놀고 있을 정도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뉴욕은 뱀파이어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수의 뱀파이어가 발생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정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때도 있었지만 3~4일에 한 번은 출동이 있었다. 키이스가 처음 맞이했던 일가족 참살 사건과 비슷한 건도 한 번 있었고 사무실 인원 전체가 출동한 큰 사건도 하나 있었다. 출동하고도 허탕을 친 사건도 몇 있었다. 그 와중에 섹션 B에서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그는 밝은 성격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투 중에 갑작스레 쇼크에 빠져 부상을 입고 파트너 역시 위험에 빠트려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게 만들었다. 아직 완벽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복귀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신입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의 퇴사가 완전히 결정되기 직전, 두 번째의 탈락자가 나왔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평소와 같았다. 웅성거리지도, 침울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제 할 일을 할뿐이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키이스와 라미레즈는 위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맥스가 난간에 엉덩이를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는 벌써 10분째 같은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대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잠시 후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던 로스가 얼굴이 반쪽이 된 채로 치프의 사무실을 나왔다. 맥스는 로스의 한쪽 어깨를 툭 치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로스는 넋이 나간 표정을 한 채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라미레즈가 쪼르르르, 로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라미레즈가 로스의 등을 밀어 사무실을 나갔다. 키이스는 그제야 모니터로 시선을 되돌렸다.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의자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신경원은 불쑥 입을 열었다. 

“가봐.”

“네?”

“걱정되면 가보라고.”

“괜찮습니다. 라미레즈가 갔으니 잘 위로해주겠지요.”

상큼한 미소와 함께 답이 돌아왔다. 동기, 그것도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로스가 얼굴이 반쪽이 되어 퇴사를 하게 된 마당인데 표정으로 보아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혹은 그런 척을 하는 걸 수도 있다. 

“퍼스트. 잠깐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뭔데.”

키이스는 태블릿 PC를 불쑥 내밀며 뱀파이어의 눈알 사진 몇 개를 내보였다.

“이것들, B3로 변성 중인 B2로 봐도 될까요?”

“어, 하지만 두 번째는 그냥 B2야.”

“얼레. 클리퍼드. 아직도 그걸 붙잡고 있었냐?”

담배를 피우고 왔는지 냄새를 풀풀 풍기는 존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대뜸 키이스의 태블릿 PC를 빼앗아 들고는 요리조리 살폈다. 

“생각만큼 진도가 안 나가서요. B3는 이제 대략 구분이 가는데…, 어렵네요.”

“그 정도면 됐어. 어차피 전투 중에 놈들 눈알만 보고 등급 분류가 가능한 건 이놈밖에 없으니까.”

“눈알만 보고 특정하는 건 아니거든?”

“충분히 가능한 거 알거든? 그리고 누가 너한테 말했냐? 클리퍼드에게 말했지. 그보다는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너에겐 당연해도 다른 사람까지 다 당연한건 아니라고. 괜한 거 시켜서 애 잡지 마라. 이 녀석 휴게실에서도 계속 태블릿 PC를 잡고 있다고. 게임이라도 하나 했더니 이제 보니 망할 놈의 눈알 떼샷을 보고 있는 거였구먼.”

신경원은 조금 놀랐다. 키이스가 열성적으로 자신이 가르친 것들을 복습하고 공부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비번인 날에도 집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휴게실에서까지 그럴 정도로 시간을 쏟아 붓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존은 앉아 있는 신경원의 머리에 손을 대고 마구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이 우리 지부 베테랑 중 하나인 건 사실이지만, 퍼스트가 가르치는 걸 곧이곧대로 다 하진 않아도 돼, 클리퍼드. 자기가 가능한 건 남도 가능할 거라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거든.”

“요즘은 안 그러거든?”

“여전히 그러거든?”

“괜찮습니다. 남는 시간에 하는 거고 익혀두면 도움이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니까. 동체 시력이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괜한 수고 하지 마.”

존은 그렇게 계속 보고 있다가 꿈에서 눈알 괴물이 나오면 어떻게 하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해, 존.”

신경원은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존의 손을 쳐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키이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도 필요한 말은 해야겠지?

“괜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해도 돼. 기본적인 유형 파악이 끝났다면,”

“동체 시력만 좋아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퍼스트는 의대를 나왔어. 보는 눈이 다르달까. X―ray나 MRI, CT같이 비슷비슷해 보이는 걸 계속 보던 가락이….”

“존.”

“알았다. 알았어. 눈 좀 그만 부라려.”

존은 신경원의 뒤통수를 툭 치곤 태블릿 PC를 키이스에게 되돌려주었다.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신경원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키이스가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그만 봐도 돼.”

“의대를 나오셨다고요?”

“…어.”

“흐음. 그러니까 자료를 계속 봐서 머릿속에 데이터를 축적해나가면, 눈만 보고 등급을 가늠하는 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소리네요.”

신경원은 눈을 깜박였다. 의대를 다녔다는 소리를 들으면 대부분이 어느 대학을 나왔냐, 무슨 과를 전공했냐 등등을 묻는다. 하지만 키이스는 딴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좀 암담했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왜 이런 데이터를 주시고 계속 보라고 하신 건지 충분히 납득했습니다. 의사들이 MRI를 보고 척척 병을 집어낼 수 있는 건 비교할 데이터를 머릿속에 축적해두었기 때문일 테니까.”

“그래. 기본은 같아. 하지만….”

“머리가 터~지도록 열심히 집어넣어보겠습니다. 퍼스트만큼은 못할지 몰라도 하다 보면 길 가다가 운 좋게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뱀파이어를 한눈에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밤길뿐이겠지만요.”

“…….”

신경원은 두 번째로 조금 놀랐다. 홍채의 형태를 보고 뱀파이어의 등급을 특정 짓는 훈련을 시킨 이유를 정확하게 집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신입이 파트너로 올 때마다 같은 훈련을 시켰었다. 대부분은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해버렸다. 두 명 정도는 꽤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지만 다른 동료들이 하는 말에 결국 두 손을 들고 포기해버렸었다. 그런데 키이스는….

“왜 그런 표정이세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키이스의 표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키이스는 의아해하면서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열심히 해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키이스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째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흐흠.”

신경원은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24살이나 먹은 파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놈이 뭐가 귀엽다는 건지.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건 인정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키이스는 굉장히 열성적이었다. 설명 하나 하지 않고 일을 시키고 훈련을 시켜도 거부감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작전에 나가서도 칼같이 자신의 명령을 따랐다. 첫 작전에서 보여주었던 머뭇거림도 사라졌다. 어떤 끔찍한 장면을 보아도 태연했고 여전히 싹싹하고 바지런하고 예의 바르고 또….

“퍼스트. 저녁 시간 다 되어가는데 식사하러 나가실래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잘 따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게 됐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메뉴가 고기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대답을 하고 일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꽤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걀비침?―이라는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한식당을 알아놨는데 걸어가긴 좀 멀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어떠세요?”

“걀비침이 아니라 갈비‘찜’이다.”

“네. 갈비‘짐’! 도착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예약해두겠습니다.”

키이스는 곧장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저런 점이 키이스가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점을 새삼스레 깨닫게 만든다. 사소한 일이지만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부분이 나름 마음에 든다.

신경원은 공사가 마구 뒤섞인 타입이었다. 졸리면 사무실든 체육관이든 숙소든 아무 데서나 자고 사무실의 전화며 기관에서 지급한 핸드폰을 개인 핸드폰이 없다는 핑계로 사적인 용도로 썼다. 고쳐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저렇게 사소한 부분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자신과 정반대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 마음에 드는 걸지도 모른다. 

이대로 잘 적응해서 마의 6개월을 넘겨 정식 에이전트가 돼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뭐, 이미 완벽히 적응한 것 같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신경원은 기대를 너무 하면 안 되는 법이라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스가 예약해둔 갈비찜 전문 한식당은 그럭저럭이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그래도 소고기는 소고기인지라 열심히 먹었다. 

계산은 또 키이스가 했다. 신경원이 하려 했더니 먹고 있는 와중에 미리 언질을 받은 운전사가 먼저 해버린 뒤였다. 분해서 이를 갈았지만 맛에 비해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가게였던 터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기기로 했다.

갈 때는 키이스의 차를 탔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그냥 걸었다. 그리 멀지 않았던데다 퇴근 시간이 맞물리며 차가 막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화는 간간이 이루어졌다. 키이스는 과묵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을 껄끄러워하며 억지로 말을 걸거나 대화를 시도하는 타입도 아니다. 근무 시간에 나란히 앉아 침묵한 채 일을 해서 그런지 대화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고 불현듯 대화가 시작되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키이스는 돌아오는 내내, 밖으로 식사를 나올 때면 언제나 그렇듯 떨어져 걸으라고 잔소리를 퍼부어도 신경원의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신경원은 또 오징어 타령을 해야 했다. 

“계속 오징어가 된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좀 설명해주시면 안 됩니까?”

“궁금하면 구글링이나 하든가.”

“구글링을 해도 답이 안 나오던데요.”

나올 리가 없지. 그건 한국식 표현이거든. 그건 그렇고 정말로 구글링까지 했다는 거 자체가 참―. 웃기는 놈 같으니라고.

“근무시간에 구글링 하지 마.”

“당연히 쉬는 시간에 했죠. 그보다 설명 좀 해주세요? 네?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

“미칠 정도면 한국어를 배워보든가. 한국식 관용어구 같은 거거든.”

“흐음―, 한국어라. 아! 맞다. 퍼스트, 세컨드 네임 좀 말해보시겠어요?”

“알려달라가 아니라 말해보라고?”

“이전에 다른 분들에게 들었는데, 전부 다르게 발음하더라고요.”

신경원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분명 존 아니면 맥스일 거다. 

둘 다 자신과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처음 같은 유닛에 속하게 되었을 때부터 대놓고 어린애 취급을 했었다. 나름 알뜰하게 챙겨주고 참견하고 입에 담기 싫은 표현이지만 잘한다 잘한다 하며 우쭈쭈도 해주고. 하도 애 취급을 해서 성질도 꽤 냈었다. 그래도 그들 덕분에 정들었던 알렌과 떨어지고 완전 낯선 사람들만 있는 환경에 처했음에도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퍼스트’라는 별명도 그들이 붙여준 거다. 분수에 맞지 않는 별명 때문에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던 기억도 있다. 

다만 나이 서른이 돼서도 여전히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좀 문제다. 그래도 어쨌거나 좋은 사람들이다. 입이 싼 게 흠이라 그렇지.

“넌 제대로 발음 못 해.”

“그래도 말해보세요. 어느 분 발음이 제일 실제와 가까운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경원.”

“키용―원?”

“경. 원. K가 아니라 G에 가까워.”

“기용―원?”

그럭저럭 합격점이다. 어차피 죽었다 깨나도 한국계가 아닌 이상 그의 구강 구조로는 경자를 제대로 발음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키이스는 계속 기용원 기용원 하며 혀를 놀렸다. 어떻게든 제대로 발음해보겠다는 오기 같은 게 느껴졌다. 서툰 발음을 듣고 있다 보니 갑자기 장난기가 돌았다.

“따라해봐. 점. 전. 정.”

“졍. 졍. 졍?”

키이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똑같은 발음을 해댔다. 순간 신경원의 입에서 시원스럽다 못해 경박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란다고 진짜 하다니.

“으하하하하하학.”

대로에서 배까지 잡고 웃어대니 키이스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음 순간엔 같이 웃어버렸다. 

“새꺄, 넌 왜 웃… 으히히히.”

“퍼스트가 웃으니 좋아서요.”

“크흐흑.”

신경원은 키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신나게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맺힐 정도였다. 

아이고, 이 덩치 큰 강아지 같은 새끼. 

“아파요, 퍼스트. 퍼스트 손맛이 얼마나 매운지 아십니까?”

“참아, 인마. 으하하학.”

“네.”

키이스는 고분고분했다. 신경원은 키득거리며 손을 쭉 뻗었다. 자신보다 13cm 높은 곳에 위치한 보드라운 금발 머리카락이 손끝에 느껴졌다. 혈통이 좋아서 그런지 털발도 좋다. 마구 헤집어주고 싶었지만 참고 적당히 두 번 쓰다듬어주고 손을 내렸다. 

“제 머리 비싼데요.”

“아, 싫으면 앞으로는 안 할게.”

“계속하셔도 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런 거에 뭔 조건을 걸어?”

“다른 분들이 자꾸 퍼스트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는데, 그거 못하게 하시면 대신 제 머리를 일 년 365일 24시간 아무 때나 만질 수 있는 권리를 드리죠.”

“남이 내 머리를 만지는 거랑 내가 네 머리를 만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엉뚱한 소리 하기는.”

“어떤 의미에서 퍼스트는 제 직속 상사지 않습니까. 아무나 제 직속 상사의 머리를 만지거나 치는 게 싫어서요.”

“그래서 네 머리를 나한테 내주고 너는 내 머리를 만지시겠다?”

“아닙니다. 다른 분이 만지지 않게 해주면 제 머리를 만지게 해드리겠다―입니다. 멋대로 해석하지 마세요.”

“지들이 멋대로 만지는 건데 그게 내 맘대로 되냐. 차라리 네 머리를 안 만지고 말지.”

그 말에 키이스가 한쪽 볼에 바람을 넣어 동그랗게 부풀려 답지 않게 귀여운 척을 했다. 길고 커다란 주제에 하는 꼴이 딱 어린애다.

아참, 24살이었지. 뭐 그럼 아직 어린애 맞네. 한계치에 좀 간당간당해도 아직 귀여운 척해도 될 나이고.

신경원은 히죽거리며 걸었다. 키이스와 실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이제는 어색하지도,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든다. 6개월을 채우기 전엔 파트너 취급 안 해주겠다고 했지만 얼마 안 남았으니 그냥 해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이미 해주고 있기도 하고.

이러다 어느 날 펑! 하고 터져서 ‘저 못 하겠습니다’라며 징징 짤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안 되도록 신경을 좀 써줘야겠다. 이번 파트너는 가능한 오래갔으면 하니까. 

신경 써서 살살 해주면 되겠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즐거운 기분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본부 앞에 다다랐다. 시간도 5분 정도 남은 것이 딱 좋았다. 

“으아~. 오늘은 급한 일 안 생겼으면 좋겠다.”

내일은 주말이고 오늘은 TGIF니 아무 일 없으면 헌팅 나가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다. 

“근사한 레스토랑을 알고 있는데 내일 저녁이라도 함께 하실래요?”

“황금 같은 주말에 시커먼 사내자식이랑 무슨. 데이트라면 몰라도.”

“퍼스트, 애인 있었습니까?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없어. 바빠서 만들 시간이 없어서.”

“그럼 저랑 식사하시죠. 지난번에 저희들 훈련시키느라 빠진 살 아직 다 원상복구 안 되셨잖아요.”

“됐어. 네놈이 사는 건 하나같이 다 비싸서 먹다 체할 거 같아.”

“돈 많은 파트너 뒀다 어디에 씁니까. 두둑한 지갑 하나 달고 다닌다고 생각하세요.”

두 사람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호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출입증을 꺼내 목에 걸었다. 

기관의 본부는 ‘라이테크’라는 IT 업체의 사옥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당연히 1층 로비의 안내 데스크 요원과 보안 요원 역시 각진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긴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그리 넓지 않은 1층 로비의 벽에도 근사한 로고가 붙어 있다. 

IT 업체로 위장한지라 출입증이 없으면 엘리베이터든 비상계단으로든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어도 의심받을 염려가 없었다. 어차피 관련자 이외에는 드나드는 사람도 없지만.

신경원은 안내 데스크의 젊은 남자에게 묵례를 하며 먼저 보안 시스템을 통과했다. 키이스가 그 뒤를 따르려는데 안내 데스크의 남자가 그를 불렀다. 

“Mr. 클리퍼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이요? 연락도 없이 회사까지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

손님이라는 말에 신경원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옆모습이었지만 키이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는 것이 보였다. 

“‘회사’ 생활이 생각보다 즐거운 모양이구나, 노아.”

로비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방문자용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키이스처럼 금발에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였다. 미추 구분은 불가능해도 그가 키이스와 상당히 닮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상당히 거친 일을 한다더니, 취향도 나빠진 모양이군. 노란 수컷 원숭이를 끼고 다니다니. 이 회사엔 쓸 만한 여자가 없더냐?”

“말조심하시죠. 여긴 제 직장이고 저분은 제 직속 상사십니다. 사과해주십시오.”

“아. 그래?”

남자는 티껍다는 표정을 지은 채 신경원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사과는 하지만 딱히 진심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표정과 말투에 진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숨기려는 마음도 없어 보인다보기보다는 일부러, 키이스를 자극하기 위해 저러는 것 같았다. 요즘 세상에 저리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

“근무 중입니다.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아니, 핸드폰으로 연락 주십시오.”

“그 핸드폰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수신 거부를 해놓았더군.”

“당신에게 듣고 싶은 말은 없어서요.”

“버르장머리 없는 건 여전하구나. 하긴, 태생이 그 모양이니.”

키이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어깨에서부터 고오오~하고 한기가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돌아가십시오.”

“아버님이 쓰러지셨다.”

뜻밖의 말에 신경원은 키이스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변화가 없다. 한기가 짙어진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아무래도 가족, 나이차가 많아 보이지만 형제 같았다. 자리를 피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먼저 올라갈게.”

“아니요.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아버님이 쓰러지셨다고 했다, 노아.”

“위독하신 거라면 톰슨 씨가 연락을 했겠지요. 당신과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습니다. 가십시오. 두 번 다시 회사로 찾아오시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노아!”

성이 난 남자가 나직하면서도 위협적인 목소리로 키이스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키이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신경원은 남자에게 인사를 할까 하다 그의 무례한 언행이며 간만에 들은 원색적인 인종차별 발언을 떠올리고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 있어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키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차갑게 굳은 표정도 여전했다. 칭―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후에야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퍼스트.”

“괜찮아. 인종차별주의자가 한둘도 아니고.”

“그래도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본래부터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저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그런 단어를 쓴 겁니다. 제가 없었다면….”

“괜찮다니까. 그보다 괜찮아? 아버님이 쓰러지셨다는데.”

“들으셨다시피 정말로 위독하신 거라면 지난번에 보셨던 톰슨 씨가 연락을 했을 겁니다. 제 연락처는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 그냥 제가 어떻게 있나 탐색을 하러 온 걸 겁니다. 최근엔 계속 본부에 머물고 있어서 제 아파트로 가봤자 얼굴을 보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마친 키이스는 한 손을 올려 제 얼굴을 가렸다. 그렇잖아도 떡 벌어진 어깨를 크게 펴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손 밑의 입술에서 ‘이래서 뉴욕 따위….’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스는 몇 번 더 심호흡을 한 뒤, 후~하고 제 감정을 날숨에 담아 내뱉었다. 그것으로 감정을 추스른 듯했다. 잠시 후 손을 내리며 드러난 키이스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상당한 자제심을 가지고 있다.

신경원은 괜찮냐고 물으려다가 관뒀다. 친하고 아니고를 떠나 남에게 쉽게 이야기하기 힘든 사생활이 있는 법이다. 신경원만 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다. 

“낮에 준 일은 다 했냐?”

“네.”

“그럼 가볍게 몸이라도 풀어볼래?”

“예?”

“가르치는 건 젬병이지만 몸 풀기용 1:1 대련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생각이 복잡해지거나 울화가 치밀 땐, 때로 몸을 움직여주는 편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급한 일 없으면 10분 후에 체육관에서 보자.”

신경원은 데스크로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인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날 키이스는 약 한 시간 동안 신경원에게 갖은 잔소리를 들으며 죽도록 맞았다. 막판에는 신음을 흘릴 지경이었음에도 키이스는 웃고 있었다. 

“너 설마 마조히스트였냐?”

“설마요.”

키이스는 ‘아으으’ 하고 신음을 흘리면서도 계속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화를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다음 날 저녁, 신경원은 키이스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비번 날에, 그것도 주말 저녁에 사내자식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한다니, 평소의 신경원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전날의 일이 내심 걸려서 식사 약속을 받아들였다. 

키이스가 데려간 곳은 예상한 그대로 메뉴판에 가격이 안 적혀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혹시나 해서 한 벌뿐인 슈트를 집에 가져가서 입고 오지 않았다면 입구에서 쫓겨날 만한 곳이었다. 

음식이 서빙될 때마다 재료며 산지며 요리 방법을 주루룩 읊어대는 갸르송 때문에 역시나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경원은 불편하다는 기색을 팍팍 내뿜으면서도 꾸역꾸역 나온 요리들을 먹어치웠다. 

“그냥 음식만 내오세요.”

전체요리를 다 먹을 때쯤 키이스가 다음 요리를 가져온 갸르송에게 말했다. 눈치는 빨라서 무엇 때문에 신경원의 표정이 좋지 않은지 금세 알아챈 모양이었다. 

“맛은 어떠십니까, 퍼스트?”

“밖에서까지 퍼스트라고 하지 마. 이상하잖아. 그냥 신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하지만 실수할 수도 있으니 그 점은 양해해주세요.”

“맛은 있는데, 이건 식감이 좀 이상해. 뭔가 입에서 푹 퍼지는 게 좀…. 재료가 뭐지?”

신경원은 커다란 접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포크로 쿡쿡 찌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푸아그라인데 그건 입에 안 맞으시나 보네요.”

“맛은 있다니까. 하지만 뭔지 알고 나니 더는 못 먹겠어.”

“세계 3대 진미라고 해도 취향을 많이 타는 거니 괜찮습니다. 아직 나올 음식이 많으니까요. 와인은 괜찮으십니까?”

“어.”

신경원은 새로 서빙된 요리에 열심히 포크를 놀렸다. 가격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최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은 글자 그대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다만 재료를 알게 되면 먹지 못할 음식이 많아질 것 같아 이후부터는 일절 이게 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과연 이 레스토랑의 한 끼 식사 값은 얼마일까 하며 후식으로 나온 소르베와 과일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던 찰나였다. 키이스의 등 뒤로 두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던 어느 젊은 남자가 가슴을 잡고 인상을 쓰는 것이 얼핏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파 보이는 사람이 있어서…, ―!”

대답을 하는데 인상을 쓰고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그러곤 곧장 컥컥 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클리퍼드. 911!”

신경원은 황급히 남자에게 달려갔다. 레스토랑의 플로어 매니저도 저 멀리서 달려와 황급히 911에 연락을 하라며 손님 중에 의사가 없냐며 소리쳤다. 

“라이선스는 있습니다.”

신경원은 소리치고는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전조 증상을 보고 의심했는데 역시나 기흉이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심각했다.

“911은?”

“전화는 했습니다.”

“젠장.”

남자는 점점 더 괴로워하며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입술색도 심상치 않았다.

“지금은 기흉 때문에 그러는 거지만 혹시 심장에 문제가 있습니까?”

“네.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약해서….”

“발작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볼펜대 같은 걸 꽂거나 하면 안 됩니까?”

“급하면 못할 건 없지만….”

작전 중에 누군가 부상을 당하거나 남자와 같은 증상을 보인다면야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는 일반인이다.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병원을 때려치웠기 때문에 응급치료 정도는 부담 없이 해도 되지만 현재의 신분이 기관의 에이전트라는 점이 살짝 걸렸다. 행여나 환자의 보호자가 ‘과잉행위’라며 법적인 문제를 들먹인다면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는 신분이 노출돼서는 안 되니까. 

“뭐든 좋아요! 어떻게든, 제발 살려주세요.”

함께 식사를 하던 여자는 어머니인 듯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법적인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는 모두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변호사도 책임지고 구―, 오, 제임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어떻게든 해봐요! 제발―!”

아들의 신음이 더 커지며 입술색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제발! 부탁해요!”

씨발―.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을 이런 데서 해야 할 줄이야.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게 더 문제야.

“응급약품이 있다면 뭐든 가져다주세요. 거기에 소독약이 없으면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술을 가져다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뭐든 가느다란 관을….”

“응급약품 중에 소독용 알코올이 있습니다. 어서 가져와!”

매니저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누군가 금속제의 펜을 내밀었다. 

“14K까진 아니지만 일단은 금입니다.”

“날카로운 칼도 필요합니다!”

정강이에 무광 처리된 단검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갑자기 뱀파이어 퇴치용의 ‘무기’를 꺼낼 순 없었다. 다행히 플로어 매니저가 소독용 알코올과 함께 날카로운 칼을 몇 자루 가져왔다. 

“비켜.”

신경원은 키이스를 멀리 물리고 사람들에게도 떨어지라 말했다. 그리고 환자에게서 몸을 돌린 다음 심을 빼낸 펜의 머리 부분을 사선으로 날렸다. 단번에 금색 펜의 끝이 날아갔다. 쉬워 보여도 쉬운 일이 아니건만 급한 상황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경원은 황급히 알코올로 손과 금제 펜대를 소독했다. 그 사이 어머니가 손을 벌벌 떨면서도 용케 아들의 상의와 셔츠를 풀어 맨가슴이 드러나게 했다. 신경원은 촉진을 하며 펜을 꽂아 넣을 부분을 찾았다. 흉부외과 전공이었던 것이 다행일 뿐이다. 그는 신중하게 위치를 잡고 알코올로 소독을 한 뒤 단번에 펜을 꽂아 넣었다. 

신경원의 응급처치는 금세 효과를 냈다. 남자의 숨소리가 조금씩 나아졌다. 

“호흡곤란 때문에 심장에 어떤 형태로든 무리가 갔을 수도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으로 옮겨서 제대로 된 처치를 받게 해야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1층으로 보내 긴급 상황으로 잡아두었습니다. 911이 도착하자마자 올라올 수 있을 겁니다.”

플로어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최고급 레스토랑의 플로어 매니저는 이런 일에도 익숙해져 있는 모양이다. 뭐든 경험이 최고다. 

“연락처입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응급상황을 처리한 후 잠시 멍하니 있는데 키이스가 품에서 명함을 내밀어 남자의 어머니에게 건넸다. 

“왜 네 연락처를 줘.”

“퍼… 신은 개인 연락처가 없잖습니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클리퍼드라는 성은 여기저기서 꽤 힘을 발휘하거든요.”

키이스는 소곤거리며 대답했다. 

“혹 변호사가 필요하게 되더라도 걱정 마십시오.”

이건 무슨 마법의 램프 속에 사는 지니도 아니고. 부자가 좋긴 좋구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 제정신을 차린 환자의 어머니가 인사를 하는데 911의 구급대가 건물 1층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사용하는 통신기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신경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이었지만 긴장을 해서인지 어깨가 뻐근했다. 그는 팔을 이리저리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이 있을까 해서가 아니라 그냥 버릇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을 발견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클리퍼드.”

“네.”

신경원은 키이스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플로어 매니저 뒤에 검은 슈트를 입고 있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는, 빨간 드레스 입고 있는 여자, 무슨 핑계를 대도 좋으니 사진을 찍어.”

“알겠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았지만 키이스는 곧바로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혹시나 모르니 응급처치한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놓아도 좋을까요?”

“아, 네.”

환자의 어머니는 순순히 응했다. 키이스는 카메라 어플을 켜고 줌을 확인하는 척하며 여자의 사진을 찍었다. 기관에서 지급한 특수한 제품인지라 사진을 찍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얼른 렌즈를 누워 있는 남자에게 맞추고 조명 때문에 잘 나올지 모르겠다는 말을 크게 하며 사진을 찍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인 듯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어차피 티가 크게 날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진을 찍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911 구급대원들이 뛰어들었다. 그 틈을 타 신경원은 키이스와 함께 조금 뒤로 물러났다. 

“사진 본부로 전송해서 이후 행적을 CCTV로 추적하라고 해. 누군지 알아볼 수 있다면 더 좋고.” 

키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구급요원이 응급처치한 사람을 찾았다. 신경원은 얼른 앞으로 나아가 신분을 밝혔다.

“크리스토퍼 신입니다. 현재 의사로 일하고 있진 않지만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환자에게 한 응급처치는….”

설명을 간단히 하는 동안 환자는 들것에 옮겨졌다. 호흡기도 씌운 상태였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잠시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급대원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다시 확인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혹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역시 뱀파이어가 맞았다. 그것도 최소 B1 등급의 상급 블러드서커다. 그렇지 않고선 아무리 해가 진 이후라 해도 조명이 꽤 밝은 이런 레스토랑에서 사람인 척하고 남자와 함께 태연히 식사를 할 수는 없다. 

최소 B1. 만일 V급의 뱀파이어라면 쉽게 잡기 힘들다. 하지만 피 냄새에 눈빛과 함께 홍채의 색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봐서는 B1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가지 않아 B2가 될, 위태위태한 상태였지만.

“클리퍼드.”

“네.”

“일단 회사로 돌아가서 문제가 있으면 연락해. 일 마치는 대로 바로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르륵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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