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VI 기관, 뉴욕 지부에는 몇 가지 징크스에 가까운 법칙이 있다.
첫 번째는 평일에 아무 일도 없는 경우 주말에 우르르~ 뱀파이어들이 떼거지로 등장하기 쉽다는 것. 두 번째는 이제 좀 쉴 수 있겠지 하며 마음을 놓는 순간이 바로 떼거지로 나타난 뱀파이어들이 뒤통수를 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징크스들이 더 있지만 오늘 뉴욕 지부의 에이전트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징크스 둘 다에 휘말려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포인트 6F―14 클리어, 15로 이동하겠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신경원은 소리도 없이 다음 구역으로 이동했다. 반쯤 닫혀 있던 문을 건드리자마자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신경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놀라기는커녕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제 몸을 방어하고는 재빨리 몸을 숙여 비틀거리는 목표물, 뱀파이어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그 사이 새카만 어둠 속에서 두 마리의 뱀파이어가 나타나 신경원에게 다가왔다. 위협하듯 흘리는 소리는 마치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식욕과 살인 욕구밖에 남지 않은 최하급의 뱀파이어임을 증명하는 소리였다.
신경원은 최소의 움직임만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인간일 때의 이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최하급의 뱀파이어―블러드서커는 완력만큼은 평범한 인간을 상회하지만 움직임은 상당히 느리다. 그렇기에 신경원은 손쉽게 두 마리의 뱀파이어를 삽시간에 제압할 수 있었다.
두 놈을 처지하자 안쪽에서 또 다른 개체가 나타났다. 놈이 이 좁은 구역의 보스인 모양인지 먼저 해치운 놈들보다는 훨씬 품이 들었다. 하지만 그놈 역시 신경원의 단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목에 단검이 박힌 뱀파이어가 천천히 그 몸을 무너뜨리며 상처에서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신경원은 뱀파이어의 가슴에서 뽑은 단검을 쓰러진 놈의 목에 깊이 박아 넣고 버릇처럼 살짝 비틀었다.
뱀파이어의 몸은 인간과는 달라서 몸에 박은 검을 빼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박은 즉시 빼내는 건 조금 힘들지만 1~2초 정도만 시간을 주면 상처 부위가 녹아내리는 동시에 연기와 재로 변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단검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신경원은 항상 단검을 비틀곤 했다. 말이 1~2초지 잠깐이라도 지체하다간 아직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뱀파이어의 이빨이나, 흉측한 손톱, 그리고 인간을 상회하는 완력으로 인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목표물 9, 10, B3로 확정. 11, B2로 확정. 확인 사살 완료.』
단검을 회수한 신경원은 긴장된 자세로 쓰러진 뱀파이어의 상태를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사체 중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일일이 쓰러진 놈들의 가슴이나 목에 단검을 박아 확인 사살을 했다. 귀찮고 힘든 작업이지만 보조를 맞춰줄 파트너가 없는 이상,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다.
『포인트 8F―15B 클리어.』
보고를 마친 신경원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혹사당한 근육이 슬슬 파업을 선언할 태세였다.
뱀파이어 발생률이 최고조에 다다르는 것은 항상 여름이다. 약 3개월간 전 세계의 뱀파이어들은 더위와 함께 기승을 부리며 인간을 사냥하고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발악한다.
사계가 다른 남반구의 사정은 좀 다르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4계절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 여름에는 뱀파이어에 의한 피의 카니발이 열리고 기관의 에이전트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사냥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뉴욕 지부의 에이전트처럼. 혹은 자신처럼.
지친 신경원은 낮은 숨을 내쉬었다. 여드레 전의 일가족 참살 사건을 제외한다면 요 몇 주간 꽤 잠잠했다. 그래서 여름 시즌도 이제 끝이구나, 드디어 제대로 된 격일 근무 체제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며 안도했었는데 돌연 일이 터졌다. 그것도 브루클린 한복판에서 아주 대박으로.
오늘의 작전 지역은 폐허가 다 되어가던 창고를 헐고 새로 지어 올리고 있는 건물의 지하였다. 아직 지상의 건물은 뼈대에 살을 붙여가는 중이었고 지하는 기초 공사는 끝났으나 전력 설비가 마무리되지 않아 암흑지대였다.
그나마 지하 5층까지는 주차장이라 백업팀을 투입해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각종 설비가 들어찬 공간은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다가 총격전을 펼칠 수 없는 민감한 장비들이 많아 SWAT 팀을 투입할 수 없었다. 때문에 지하 6층부터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경원과 같은 ‘스페셜 에이전트’ 즉, HRT 팀으로 분류되는 고급 병력을 투입해 각개 격파를 해야 했다.
총 작전 개시 시간은 새벽 3시 45분. 뉴욕 지부의 베테랑 에이전트들은 지하 6층부터 8층까지 구석구석을 누비며 도대체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수많은 뱀파이어와 밤새 사투를 벌였다.
신경원은 처음부터 8층에 투입되었다. 가동되지 않는 엘리베이터 대신 그 공간에 줄을 매달아 침투했는데 주차장에 있던 허접한 놈들이 SAWT 팀의 공격을 피해 아래로 도망치는 바람에 진짜 개고생을 했다.
담당 구역의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퇴치한 신경원의 귀에는 여전히 사냥 중인 동료들의 보고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는 바로 곁에 뱀파이어의 사체를 둔 채로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손에서 글록과 단검을 놓치지 않은 채 살얼음 같은 긴장을 유지했다. 언제 뱀파이어가 다른 구역에서 이쪽으로 도망쳐 올지 모르니까.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모든 구역의 소탕이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남아 있던 기력이 바닥에 닿은 무릎과 다리, 발에서부터 쭈욱, 빠져나가버렸다. 곧장 묵직한 피곤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계속 긴장을 유지한 채 지내왔던 여름 시즌 동안에는 장시간을 격렬하게 움직여도 밖으로 기어나갈 기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밖으로 기어나가기는커녕 앉아 있는 자세를 바꿀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근 3주간 소강상태를 즐기며 신입 교육으로 소일거리를 하는 동안 마음을 놓았던 것이 조금 문제였던 것 같다. 해이해졌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군기는 좀 빠졌던 모양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 이어피스에서 한둘씩 최종 확인을 마치고 복귀 신고를 하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어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역시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대자로 뻗어 누워 잠이나 한숨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났다.
젠장, 이래가지고 아침 9시 비행기를 어떻게 타냐.
2달 전부터 벼르고 별러 휴가를 받아놨는데 눈앞이 깜깜하다. 이렇게 진이 빠져서야 제대로 휴가를 즐길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신경원의 뒤에서 어느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던 신경원의 팔다리가 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윽―.”
자세를 잡고 몸을 돌리자마자 강렬한 라이트가 신경원의 동공을 파고들었다.
『접니다, 퍼스트.』
신경원은 움켜쥐고 치켜세웠던 단검을 스르륵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걸 본 상대는 신경원을 향해 몸을 숙였다. 큰 키에 어울리는 다부진 체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신경원은 멍한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영 모르는 목소리는 아닌데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다.
『안이 꽤 복잡하더군요. 여기까지 오는 데 꽤 애를 먹었습니다.』
『…….』
지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몸을 움직인 탓인지 머리로 피가 돌지 않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니 상대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이스, 키이스 클리퍼드. 당신의 파트너입니다.』
『어?』
‘파트너’라는 단어가 기능을 멈추어가던 뇌에 아주 조그맣게 반짝, 스파크를 일으켰다.
뭔 소리야. 나는 파트너 따위 없……,
『…, 지가 않았지….』
아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파트너지만 있긴 있었어.
『네?』
의아한 목소리에 신경원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는 내가 알기론 아직 현장에 투입될 만한 시기가 아닐 텐데….』
『네. 하지만 경험 삼아 백업팀과 함께 작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위층 정리를 마친 다음 대기 중이었는데 퍼스트의 복귀 신고가 늦어지자 치프께서 내려가보라고 하시더군요. 현장 적응 훈련을 겸해서요. 저 말고도 다른 신입들도 함께 내려왔습니다. 아, 보고부터 하겠습니다.』
키이스는 싹싹한 말투로 말하고는 통신기의 채널을 바꾸고 지하 8층에서 신경원과 랑데부했음을 보고했다. 곧 복귀하겠다는 말을 마친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몸을 더 낮게 굽혔다. 그러자 키이스의 말대로 그의 뒤편에 간격을 두고 서 있는 또 다른 사람들, 함께 내려온 신입 둘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신경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이 삐뚤어져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는 묵묵히, 하지만 끄응―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 없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선배’니까, 신입 앞에서만큼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이 축 처진 몸을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자 키이스가 손을 내밀며 가까이 다가왔다. 신경원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 팔에 억지로 힘을 불어넣어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올렸다.
지하에서 수 시간을 뱀파이어와 싸운 신경원은 완전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SWAT 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키이스는 아마도 부츠 이외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파트너를 배려하려는 건 아니나 그의 몸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앞장 서.』
『……, 네.』
신경원에 비해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키이스는 차분히 몸을 돌렸다. 단순한 움직이었지만 신경원의 눈은 키이스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세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퍼스트, 따라오고 계신 것 맞,』
앞장서던 키이스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가 곧 다물어버렸다. 뒤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혹시나 하며 돌아본 건데 엄청 느리긴 해도 신경원이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키이스는 잠시 신경원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HRT 유니폼을 입고 있는 신경원은 온몸에 각종 장비를 달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발자국 소리는 물론이요 숨소리 이외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인기척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뭐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하 8층을 빠져나가며 키이스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신경원이 투입되었을 때와는 달리 안전이 확보된 계단을 따라 천천히,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랐다.
신경원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키이스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목의 인대가 끊어지고 정강이뼈가 발바닥까지 내려앉아 살과 근육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을 감내하며 간신히 5층에 도착한 신경원은 활짝 열려 있는 비상구 문에 몸을 기대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황급히 부축하려는 키이스의 손을 피하면서.
“아이고 죽겠다.”
신경원은 작게 한탄하며 헬멧을 벗어 떨어뜨리곤 눈을 제외한 두부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를 벗어 내동댕이쳤다. 그 순간 드러난 땀투성이의 얼굴에 키이스의 시선이 못 박히듯 고정되었으나 반쯤 넋이 나간 신경원은 눈치 채지 못했다.
지하 5층은 아래와는 달리 밝고 복잡했다. 백업팀과 처리팀 차량 그리고 앰뷸런스가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사방에 조명장치를 세워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쪽에서 피투성이인 신경원을 발견한 처리팀이 급히 달려왔다.
“헬멧을 다시 써주십시오, 소독하겠습니다.”
신경원은 ‘씨발’이라 욕설을 내뱉으며 힘겹게 헬멧을 다시 주워 썼다. 처리팀이 급히 신경원의 몸에 투명한 액체를 분사하기 시작했다. 온몸을 적시고 있던 검은 피가 천천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키이스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복장을 하고 있는데 검은 피가 섞인 물이 흐르니 마치 몸 전체가 녹아내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1차 소독을 마친 처리팀이 신경원의 머리에서 헬멧을 벗겨내고 수건을 내밀었다. 신경원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처리팀이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키이스는 이유 모를 불쾌감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원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들 부츠도―,”
“아, 네.”
신경원의 말에 처리팀이 키이스를 비롯한 신입에게 다가와 말도 없이 부츠 위로 예의 액체를 분사했다. 그는 신경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부츠 바닥까지 깨끗하게 소독을 받고는 문에 어깨를 기댄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신경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신경원은 이번에도 키이스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연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 장비와 조끼, 유니폼까지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는 반팔 티셔츠와 타이츠와 다름없는 얇은 반바지만 입은 채 맨발로 터덜터덜, 다른 동료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으로 갔다. 키이스는 또다시 외면받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신경원의 뒤를 따랐다.
“여~, 퍼스트. 안 죽고 잘 살아 있었구나. 하도 대답이 없어서 골로 간 줄 알았다.”
“맥스,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존 브라이튼이 한소리 하며 힘겹게 맥스의 뒤통수를 갈겼다. 소리만 크지 하나도 아프지 않을 텐데도 맥스는 죽는 소리를 했다. 신경원은 피식 웃으며 맥스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모여 앉아 있는 얼굴들을 살폈다. 같은 유닛에 속한 동료 여덟 명 모두 부상 하나 없이 무사했다.
“으으. 징글징글하다.”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여름 아직 다 안 갔다고 괴물 새끼들이 아주 발악을 하네.”
“내 말이 그거야. 진짜 징그럽게 많이도 모여 있더라.”
“뱀파이어 새끼들, 지들끼리 텔레파시라도 통하나? 가끔씩 느끼는데 연고도 서로 없는 놈들이 어떻게 그리 한곳에 잘도 모여드는 건지 궁금해.”
“지들도 고양이 손이라도 모아 살겠다고 지랄하는 거겠지 뭐. 크흐흐흐.”
“작전 종료까지 몇 시간이나 걸렸지?”
“지하 6층 아래로는 거의 4시간일걸?”
“3시간 47분 2초야.”
“으엑, 올해 최장 작전 시간을 기록한 거잖아?”
신경원보다 조금 일찍 5층으로 올라온 동료들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해 기운이 났는지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경원은 입 벙긋할 힘도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불쑥 이온 음료 병이 내밀어졌다.
“드세요.”
“신입, 퍼스트는 죽었다 깨도 이온 음료는 안 마셔.”
누군가 참견을 했다. 키이스는 이온 음료와 신경원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 사이 신경원은 맥스가 먹다 남긴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가 한쪽 구석에 준비되어 있던 먹을거리들을 들고 왔다.
“좀 드십시오.”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는데 키이스가 샌드위치 포장을 풀어 내밀었다.
“좋겠네~, 퍼스트는. 파트너가 샌드위치 포장도 까주고.”
“그러게. 부럽게시리. 너도 좀 저렇게 해봐.”
존이 제 파트너를 괜히 구박했다. 그 모습을 본 신경원은 멋쩍은 표정으로 키이스에게 말했다.
“…고마워.”
심화 교육을 하는 것과 상관없이 새 파트너인 신입과 친한 척하는 건 그가 최소 6개월은 버텨준 후에나 할 생각이다. 반드시 필요한 말 이외는 말을 건넬 생각도 없다. 그러나 친절에 대한 감사 인사까지 생략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 같았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이라 오히려 죄송한걸요. 조금이라도 드세요.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신입의 친절을 받아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신경원은 지금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경험상 목구멍은 어떻게 넘겨도 지쳐버린 위가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반항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친절을 마냥 거부할 수도 없어 그냥 받아들었다.
키이스는 싱긋 웃으며 새 생수병을 따 신경원의 옆에 내려놓고 빈 생수병을 꼼꼼하게 챙겨 정리했다. 샌드위치를 입에 물며 키이스의 행동을 지켜보던 신경원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왜 이렇게 싹싹하게 구는 거야. 미안해지게.
6개월을 채울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파트너 취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흔들린다.
“아―.”
신경원은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다 말고 여전히 웃고 있는 키이스의 얼굴색을 살폈다.
담이 어지간히 큰 사람이라도 ‘인간’의 시체를 직접 보면 적든 크든 충격을 받는다. 하물며 뱀파이어의 사체는 자연사한 인간의 시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때문에 뱀파이어의 사체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파랗게 질리는 것은 기본이고 심한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토하기도 하고 새하얗게 질려 그대로 기절하기도 한다. 그것이 전투 영상을 끊임없이 돌려 본 사람이라 해도.
신경원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키이스와 함께 8층으로 내려왔던 두 신입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중 하나는 얼굴이 굳어 있고 다른 하나는 표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안색이 조금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에 비해 키이스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8층까지 와서 자신을 찾는 동안 끔찍한 꼴을 꽤 봤을 텐데 마치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온 듯한 여유가 느껴졌다.
“멀쩡하네?”
“예?”
뜻 모를 말에 키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냐고 물으려 하는데 신경원은 딱 한입만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맥스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아버렸다. 자주 있는 일인지 맥스는 순순히 어깨를 내어주고 팔짱까지 껴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키이스의 한쪽 눈썹이 제멋대로 휘어졌다. 그때 존 브라이튼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칭찬한 거야.”
“……?”
“현장을 직접 보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니 칭찬한 거라고. 벌써부터 퍼스트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제법인데, 신입.”
그게 칭찬이라고? 아니, 그전에 그게 칭찬받을 일인가, 당연해야 하는 일인데?
키이스는 그새 코까지 골기 시작한 신경원을 바라보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음?”
“왜… 퍼스트―라고 부르는 거죠?”
“퍼스트라서?”
제가 답을 해놓고 웃기는지 존 브라이튼은 킬킬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신경원의 베개가 되어 있는 맥스와 존의 파트너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굳이 따지자면 이름 때문이지.”
키이스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서류상에는 그냥 크리스토퍼 신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세컨드 네임이 있어. 쿄―원이라고.”
“케이원일 걸?”
“아니야. 쿙―원이야.”
세 사람이 제각각 다른 이름을 댔다. 그에 잠자코 있던 캐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 틀렸어. 키영―원이야.”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우린 제대로 발음도 못하는데.”
“어쨌든 발음이 그 모양이라 우린 그냥 ‘신’이나 ‘원’이라고 불렀거든?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나 정확히 기억해. 2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어.”
“크리스마스 당일 아니었나?”
“아니, 이브야. 퍼스트 녀석 데이트하다가 긴급호출을 당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차였다며 죽상을 하고 왔던 거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래놓고는 일주일 만에 새 애인이 생겼다며 자랑질을 했었지.”
존은 신경원이 끝내주는 바람둥이라며 킬킬 웃어댔다.
“아무튼 퍼스트는 지금이야 우리 지부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실력자로 꼽히는 녀석이지만 그때만 해도 좀 하네~정도였거든 그런데 그날 뭐에 꽂힌 건지,”
“애인한테 차여서 존나 열 받아서 그랬다―에 한 표.”
“아 좀! 끼어들지 마.”
설명을 해주던 캐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키이스도 같은 마음인지라 끼어든 맥스를 티나지 않게 살짝 노려봐줬다.
“어쨌든 크리스마스이브에 긴급 호출을 당해서 다들 불만이 가득했던 터라 선두를 담당하기 싫어서 서로 막 미뤘거든? 그러다 당시에 우리 섹션으로 이동된 지 얼마 안 된 퍼스트에게 이름이 원one이니까 네가 첫 번째여야 하지 않느냐면서 무작정 선두를 맡겨버렸어.”
“그리고 퍼스트는 그날 포텐셜을 터트리면서 새카맣게 몰려드는 놈들을 거의 혼자 일망타진하다시피 했다~ 이 말씀. 그때 총 작전 시간이 아마 5시간 정도 되었지, 캐리?”
“맞아. 겨울인데다가 작전지역이 넓어서 좀 고생했었지.”
“상상해봐, 신입. 퍼스트 어디 있어! 퍼스트 너무 앞서가지 마! 퍼스트 너무 위험해! 퍼스트 너 이 새끼 계속 그렇게 돌출행동하면 내가 죽여버린다! 이따위 소리를 유닛 전체가 5시간 내내 외치고 있는 꼬라지를.”
“더군다나 그때 퍼스트의 파트너는 초반에 부상을 입고 나가떨어졌거든. 그래서 ‘퍼스트’는 퍼스트 혼자뿐이었어. 5시간 내내 미친놈처럼 날뛰는 놈을 따라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친데다가 그 이후 ‘퍼스트’라는 별명이 절로 입에서 나올 만큼 저 녀석 실력이 부쩍 늘어서 그냥 입에 붙고 그대로 굳어져버린 거지.”
“덕분에 우리 섹션의 선공 팀은 ‘퍼스트’라고 안 하고 Zero라고 부르게 됐어.”
“지금은 어디 내놔도 퍼스트라는 애칭이 부끄럽지 않을 최고의 실력자기도 하고.”
“신입 넌 처음부터 아주 제대로 된 파트너와 만난 거다. 행운으로 생각해. 우리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실력이 중요시되는 일이니까.”
키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관의 에이전트라는 직업은 위험에 한 발이 아니라 몸 전체를 담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파트너의 실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안전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고 그만큼 생존율도 높아진다.
그는 불편한 자세로도 잘 자고 있는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축 늘어져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리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경원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경원은 역시 뉴욕에 온 보람을 제대로 챙길 수 있는 상대임에는 틀림없다.
키이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신경원이 먹다 남긴 샌드위치와 물병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지쳐서 깜박 잠든 상태지만 거의 4시간 동안 격렬하게 움직였으니 잠에서 깨면 분명 먹을 것을 찾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그는 조금 전처럼 살뜰하게 누군가를 챙겨본 적이 없다. 안 하던 짓을 하기로 한 이유는 하나다. 신경원이라는 사람은 먼저 다가서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절대로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섬주섬 먹거리와 생수병 두 개를 더 챙기고 있는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혼자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고 있는 섹션 치프 예들린이 나타났다. 키이스와 다른 신입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일어났다. 하지만 선임 에이전트들은 일어나기는커녕 아는 척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들린은 별로 신경 쓰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다들 수고했다. HRT는 곧장 본부로 귀환하도록.”
“힘들어 죽겠는데 이대로 퇴근하면 안 됩니까?”
“보고서 써서 제출하고 퇴근해.”
“으, 완전히 방전 상탠데 좀 봐주시죠.”
“나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 일이 좀 규모가 크다 보니 위에서 자세한 보고를 원하고 있어서 말일세. 심정은 이해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주게나. 아, 자네들은 파트너와 함께 가도 좋아. SAWT 팀에 섞여 있어봤자 딱히 할 일도 없을 테니.”
예들린은 신입들에게 한마디 한 후 인사도 받지 않고―하는 사람도 없었다―다른 유닛이 모여 있는 곳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에이전트들은 각양각색의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딱 한 사람을 빼고.
“어이, 퍼스트. 일어나.”
맥스는 제 어깨에 기대 코를 골고 있는 신경원을 깨웠다. 하지만 신경원은 평소와는 달리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슬쩍 빼자 스르륵 쓰러지는 신경원의 상체를 받쳐 들었다.
“이런, 조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곯아떨어졌네?”
“깨워도 안 일어나는 거면 반쯤은 기절한 걸 테니 그냥 둬.”
“보고서는?”
“휴가 받아서 시간도 널럴할 테니 알아서 하겠지.”
“아, 맞다.”
키이스는 얼른 신경원에게 다가가 맥스와 함께 신경원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신경원은 정말 기절한 사람처럼 꽤 거칠게 잡아 세워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건 뭐 시체도 아니고.”
피곤한데 시체마냥 축 늘어진 놈까지 챙겨야 하냐며 한탄하는 맥스에게 키이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맥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파트너잖습니까.”
키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덧붙이자 맥스는 묵묵히 신경원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대뜸 키이스의 어깨 위에 짐짝처럼 신경원을 얹어놓았다.
“…이래도 됩니까?”
“괜찮아. 이런 식으로 잠들면 게이지가 채워질 때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안 깨.”
시체처럼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신경원은 꽤 무거웠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가벼웠다. 말라 보이긴 해도 근육이 단단하게 잡혀 있는 몸이라 지금 느껴지는 무게보단 더 나갈 거라 생각했었다. 대충 가늠한 것이지만 70kg도 안 나갈 것 같았다.
“들을 만해? 너무 무거우면 내려놔. 좀 혼잡하지만 차를 이쪽으로 불러오면 되니까. 들것을 가져와도 되고.”
“괜찮습니다. 무겁지 않다고는 못하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벼운데요.”
“그 녀석이 보기보단 체중이 덜 나가. 게다가 오늘같이 2~3시간 이상 뛰면 나만 해도 1~2kg는 훅 내리거든. 퍼스트의 경우는 더하지. 워낙 격렬하게 움직이는 놈이라.”
에이전트들이 타는 차는 좀 멀리 있었다. 아직 공사 중인 건물이라 건축 자재와 지게차 같은 중장비가 곳곳에 널려 있는 탓에 의료팀과 처리팀 차량만이 우선적으로 안쪽에 배치된 탓이었다.
키이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 그리 널찍하지 않은 좌석에 신경원을 내려놓았다. 축 늘어진 신경원은 마치 말랑한 고무로 만들어진 인형 같아서 몸을 잡아주지 않으면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았다.
“자리 좁혀 앉고 대충 눕혀.”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는데 존 브라이튼이 키이스를 도와줬다. 그는 신경원을 의자에 적당히 눕히고는 그대로 옆에 털썩 주저앉아 제 허벅지에 신경원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맥스가 그랬던 것처럼 굉장히 익숙한 행동이었다. 키이스는 그 모습을 보곤 잠시 망설이다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신경원이 누운 쪽에는 자리가 없었다.
차가 출발하자 에이전트들은 죄다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아대기 시작했다. 불편한 자세임에도 코까지 드렁드렁 골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멀쩡한 것은 세 명의 신입뿐이었다. 체면이고 뭐고 모조리 벗어던진 채 꼴사나운 폼으로 미친 듯이 졸아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세 신입은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졸고 있는, 혹은 자고 있는 제 파트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작전 지역은 본부에서는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인 탓에 거리는 한산했고 맨해튼에 접어들자 본부로 통하는 지하도로 곧장 접어들었기에 차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키이스는 또 신경원을 어깨에 짊어진 채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야 했다.
“그놈은 숙직실에 대충 던져놓고 신입, 아니 클리퍼드 너도 한숨 자둬. 그냥 두고 퇴근해도 되고.”
존 브라이튼이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비비며 끝까지 참견을 해왔다. 키이스의 입장에서야 반가운 참견이었다. 키이스는 살짝 묵례를 하곤 몸을 돌렸다.
숙직실은 12층 구석에 주르륵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제일 가까운 곳을 선택해 문을 열었다. 안에는 2층 침대가 양쪽 벽에 붙어 있었는데 다행히 모두 비어 있었다.
키이스는 오른쪽 아래 침대에 신경원을 내려놓았다.
“이런―.”
신경원이 철푸덕 소리를 내며 침대에 떨어졌다. 들쳐 메고 오는 건 힘들지 않았지만 시체처럼 잠든 사람을, 그것도 남자를 침대에 눕혀보는 건 처음인지라 신경을 썼음에도 실수를 했다. 신경원은 제법 세게 침대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였지만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키이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삐뚜름한 베개를 바로잡아주었다.
“정말 별짓을 다 해보네.”
키이스는 이것도 경험은 경험일지도 모르겠다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얇은 담요를 가져와 신경원의 가슴께까지 적당히 덮어주곤 샤워실로 향했다. 신경원을 짊어지고 오느라 등판에 땀이 꽤 배어나와 있었다.
샤워를 마친 그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신경원이 잠들어 있는 숙직실로 돌아왔다. 다른 숙직실로 갈까 했으나 일단 파트너와 행동을 같이 하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키이스는 조용히 움직였다. 맥스와 존으로부터 무슨 짓을 해도 신경원이 깨지 않을 거라 듣긴 했으나 그래도 좀 조심스러웠다.
소리 나지 않게 가만히 움직여 건너편 침대에 누우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옆 침대에서 신경원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게 없는데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는 사이 신경원이 비척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눈을 뜬 건지 만 건지 구분도 안 되는 상태로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신경원은 엄청나게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문가에 도착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한다면 붙잡아야 할 것 같아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신경원이 갑자기 의외의 행동―벽을 더듬거리더니 삑삑삑 하고 문가 쪽에 위치한 컨트롤패널을 마구 눌러 대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파트너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시원한 공기가 어깨 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에어컨 컨트롤 패널을 만진 모양이었다.
좁은 공간은 금세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찼다. 신경원은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숨을 쉬더니 다시 침대로 와서 털썩 소리 나게 몸을 던졌다. 건너편에서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상체만을 조금 일으킨 채 건너편 침대를 바라보았다. 제 몸이 빨래더미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침대에 몸을 던진 신경원의 상태는 가관이었다. 한쪽 다리는 침대 아래로 빠져나와 있었고 다른 쪽은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걸려 뒤틀려 있었으며 한쪽 팔을 반쯤 깔아뭉갠 상태였다.
“하아―.”
어둠 속에서 신경원을 지켜보던 키이스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아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지만 어째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신경원의 얼굴 위에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보고는 그대로 어깨에 가만히 손을 대봤다. 미동이 없었다. 조금 전에 일어나 미친 듯이 에어컨 온도를 낮추고 온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곤히, 아주 깊게 자고 있었다. 시험 삼아 어깨를 살짝 흔들어봤지만 역시 눈을 뜨지 않았다.
키이스는 팔에 힘을 주어 신경원을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사다리에 걸려 있던 다리도 안쪽으로 넣어 곧게 펴주고 침대 밖으로 떨어져 있던 다리도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 펴줬다. 마지막으로 담요를 가져와 가슴까지 덮어주고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 나서야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짜 여자한테도 이렇게 해준 적은 없는데 뭐하는 짓인지.”
머릿속을 맴돌던 말이 절로 입으로 흘러나왔다. 제 행동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은 그는 팔로 머리를 괴려다 손바닥을 펼쳐 제 얼굴을 살짝 덮었다. 그 손은 두 번이나 신경원의 외면을 받았던 손이었다.
“고양이처럼 생기지도 않았는데 왜 고양이처럼 구는 거야.”
친한 동료들에게는 먼저 스킨십을 해대며 매달린다. 하지만 파트너인 자신에게는 대놓고 경계하는 기색을 팍팍 풍겼다. 온몸에 털을 곤두세운 채 낯을 가리면서 안 가리는 척, 선임입네 하며 아래로 깔아보고 그것도 모자라 티를 내가며 쌀쌀맞게 군다.
그러고 보니 진짜 고양이 같다. 살짝 덜떨어진.
잠이 들자 만지작거려도 모르고 끌어안아도 모르고 짐짝처럼 들쳐 메도 모르는 고양이라니. 제대로 된 고양이라면 잘 때도 경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덜떨어진 고양이든 뭐든 실력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혼잣말을 내뱉은 그는 자세를 바로 잡고 눈을 감았다. 불편함이 공존하는 기이한 편안함이 차가운 공기와 함께 키이스의 몸을 덮쳤다. 그는 굼지럭거리다 얇은 담요를 펼쳐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다시 일어나 신경원의 담요를 좀 더 끌어올려줄까 하다 그만두었다. 잠버릇이 나쁜 파트너에게 신경 쓰는 것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감기에 걸리기만 해봐.
차갑게 내려앉는 공기가 코끝의 열기를 조금씩 앗아가기 시작했다.
* * *
꼼지락 꼼지락. 신경원은 얇은 모포를 머리끝까지 덮은 상태로 바르작거렸다. 모포 위로 찬 공기가 서늘하게 내려앉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덮고 있는 것이 모포인 것을 보니 지금 누워 있는 곳이 집이 아닌 본부의 숙직실이라는 감이 왔다. 즐겨 사용하던 방은 아니지만 거기가 거기나니 상관없다.
으. 잘 잤다.
찌뿌둥한 기색 하나 없이 잘 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역시 안락한 수면을 위해 제일 좋은 것은 죽도록 몸을 혹사시켜 반 기절 상태가 되는 거다.
신경원은 헤실헤실 웃으며 머리까지 덮은 모포를 끌어내렸다. 2층 침대라 팔을 위로 뻗는 대신 앞으로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흐흐.”
모처럼 잘 잤더니 절로 입에서 웃음이 나온… 응? 지금이 몇 시지?
신경원은 침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침대 옆의 협탁에 있는 라디오 겸용 알람시계를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빽―소리를 질렀다.
“Shi―t!”
시간을 확인한 신경원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씨발!!”
신경원은 맨발로 숙직실을 뛰쳐나갔다. 잘 자다 말고 자신이 내지른 욕설에 건너편 침대에 잠들어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든 말든 문을 활짝 제쳐두고 무작정 뛰었다. 그는 자다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비상계단을 타고 쏜살같이 사무실로 내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아무도 안 깨웠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데스크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던 에이전트 둘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알람이라도 세팅해줘야 할 거 아냐! 비행기 놓쳤잖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비행기 놓쳤다니까!”
“네 휴가 스케줄을 내가 어떻게 알아.”
존 브라이튼은 시계를 힐끔 보고 하품을 했다. 벽시계는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시간 잤으면 잘 만큼 잤잖아. 보고서나 써. 1시까지는 제출하래.”
“보고서가 문제야, 지금!”
“당연히 문제지.”
언제 위층에서 내려왔는지 예들린이 자다 깨 부스스한 얼굴을 한 신경원의 뒤통수를 툭 치며 말했다.
“신나게 퍼 잤으면 얼른 보고서나 써.”
“비행기 놓쳤다니까요!”
“이미 놓친 걸 뭐 어떻게 하라고. 가서 옷이나 좀 제대로 입고 보고서부터 써. 꼴이 그게 뭔가.”
“치프!!”
크르릉거리며 항의했지만 예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경원의 뒷덜미를 잡아 자리에 앉혔다.
“다른 녀석들은 피곤해 죽겠다고 아우성치면서도 보고서 다 쓰고 갔다. 너만 남았어. 네놈 때문에 나도 퇴근 못 하고 계속 사무실 지키고 있었다는 거 알아? 얼른 쓰고, 유닛 전체 보고서 모아서….”
“에이씨! 나 시니어 안 해요! 물러주세요!”
스페셜 에이전트에서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가 된 후부터 일이 는 신경원이다. 작전 시에 유닛 리더를 맡게 된 것까지야 연봉이 그만큼 올랐으니 그만큼의 책임이 더해지는 거라 생각했으나 데스크 업무가 늘어난 것만은 정말 싫었다.
“구시렁거릴 시간에 한 자라도 써.”
너그러운 예들린은 손수 신경원의 컴퓨터까지 켜주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1시까지는 반드시 보고서를 제출하라며 바싹 고삐를 당긴다.
“아, 자네도 마찬가지야.”
예들린은 신경원의 욕설에 잠을 깨고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온 키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싱거웠겠지만 작전에 참여한 건 맞으니까, 상세하게 작성하도록.”
“…알겠습니다.”
“젠장. 어차피 영상기록 다 있는데, 어째서 매번 보고서를 써야 하나고.”
신경원은 예들린의 귀에 들리게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하지만 그는 보고서 대신 전화통에 먼저 매달렸다. 당연하지만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LA행 가장 빠른 비행기 편요. LAX든 버뱅크든 아무 데나.”
예약했던 비행기는 오전 9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두 달 전부터 예약해둔 것인데 간만에 꿀잠을 자다 놓쳐버렸다.
“알죠. 주말인 거. 그래도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네. 예? 오후 7시? 으….”
주말이라 남아 있는 표가 거의 없었다. 7시 티켓도 방금 전 누군가 캔슬한 것이라 서둘러야 했다. 결국 신경원은 7시편을 예약하고 그 이전에 출발하는 모든 비행기 편에 대기를 걸어달라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도 신경원은 한숨을 팍팍 내쉬며 핸드폰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주루룩 보낸 후에야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보고서 작성은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지만 다년간 단련된 귀와 손가락은 빠르게 빈 칸을 채워나갔다. 30분 만에 보고서 작성을 마친 신경원은 부리나케 샤워를 하고 로커 룸으로 가 검은색 브리프 케이스에 태블릿 PC와 갈아입을 속옷 한 장을 챙겼다. 그러곤 미리 사둔 새 드레스 셔츠의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공항으로 바로 가시는 겁니까?”
“으헉―!”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신경원은 화들짝 놀라 셔츠를 놓쳤다. 돌아보니 키이스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포장을 완전히 제거한 뒤에 신경원의 손에 들려주었다.
“소리 좀 내고 다녀. 놀랐잖아.”
신경원은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키이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새 셔츠에 팔을 꿰었다. 그러고는 로커에 걸려 있는, 단 한 벌밖에 없는 슈트를 꺼냈다.
“누굴 만나러 가시는데 그렇게 차려 입으세요? LA라면 비행시간만 6시간인데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언제 표가 날지 모르니 계속 대기하셔야 할 텐데.”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신경원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대화를 거부했다.
“신경 꺼.”
“…그래도 식사는 하고 가시죠. 점심시간이잖습니까.”
무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화를 거부했건만 키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신경원은 키이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옷을 입었다. 넥타이를 매려다가 그냥 브리프 케이스에 쑤셔 넣고는 무기를 챙겼다. 언제나처럼 글록과 단검이다.
“LA까지 가시는데도 무기를 챙기시는 겁니까?”
다시금 던져진 질문에 신경원은 보란 듯이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일단은 파트너니까 기관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까지 묵묵부답할 수는 없다. 파트너 이전에 사수이니까.
“…언제 어디서 호출받을지 모르니까. 잘 모르겠으면 규정집이나 정독해봐.”
“알고는 있는데 정식으로 휴가 중인 상황에서도 꼭 응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요.”
“무조건 응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휴가 중인 타 지부 소속 에이전트까지 호출하는 경우엔 정말 상황이 급박하다는 소리니까 응해야지. 달리 사전에 이동 경로나 목적지, 체류 기간 같은 걸 신고해야 하는 줄 알아?”
“HRT급 에이전트들의 수가 적어서 격무에 시달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휴가 기간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니 진짜 쉽지 않네요.”
“남의 돈 중에서도 무려 ‘세금’으로 월급 받는 일 중에 쉬운 일이 뭐가 있겠어.”
“아, 그것도 그러네요. 어쩐지 일반 FBI 에이전트들보다 추가 수당이나 과외 임무 수당이 이상할 정도로 높다 싶더니.”
“위험수당은 세 배야.”
말을 하는 중에도 부지런히 움직인 신경원은 여분의 탄창 두 개를 챙겨 브리프 케이스에 넣고는 슈트 상의를 입었다. 그는 준비를 마친 후 브리프 케이스를 챙겨들고 나서야 키이스가 자신처럼 슈트를 챙겨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신경원이 휴가를 받았기에 파트너인 키이스도 자동으로 휴가를 받은 상태다. 그야 이유가 있어 슈트를 챙겨 입었지만 퇴근할 키이스가 왜 슈트를 챙겨 입었는지 모르겠다.
아, 이 녀석은 계속 슈트를 입었지.
출퇴근 때의 키이스를 떠올린 신경원은 궁금증을 스스로 해결하고는 아무 말 없이 곧장 로커 룸을 나섰다. 키이스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러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또! 입을 열었다.
“퍼스트.”
왜 이놈은 이렇게 자꾸 살갑게 말을 거는 걸까. 6개월 채우기 전엔 파트너 취급 안 할 거란 말이다!
“말을 해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럴 거면 하지 마.
“제가, 파트너로 탐탁지 않으시죠?”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신경원의 눈썹이 멋대로 요동을 쳤다. 싫은 티를 좀 일부러, 많이 내긴 했지만 설마 그걸 저렇게 대놓고 말해올 줄이야.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혹시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가 생판 초보 애송이라는 거.
신경원은 키이스처럼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할 정도의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리고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나란히 서 있어 시선이 직접 마주치진 않았지만 매끈한 엘리베이터 문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이스의 옆얼굴이 비쳤기 때문이다.
“퍼스트는 제가 마음에 안 드실지 몰라도 저는 퍼스트가 좋습니다. 첫 파트너로 아주 믿음직한,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쿨럭―, 기침이 났다. 어째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어찌해야 하나 하는 순간 칭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신경원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튀어나갔다. 반사적으로 출입카드를 찍고 로비의 회전문을 향해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30초면 사근사근한 질문 세례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평소라면 그대로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무사히 탈출 아닌 탈출을 했을 텐데 그놈의 에너지 절약인지 뭔지 때문에 회전문이 멈춰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오른쪽 문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사이 키이스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진짜 빠르시네요. 하마터면 아카데미에서처럼 놓칠 뻔했습니다.”
“…….”
키이스는 한 발 먼저 출입문으로 가서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먼저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어째선지 ‘레이디퍼스트’를 실천하는 젠틀한 신사처럼 보였다. 슈트가 너무 잘 어울리는 넓은 어깨며 키와 체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잘은 모르지만 키이스가 입고 있는 슈트는 중저가 기성복인 자신의 슈트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가격차이가 날 거라고 본다.
자격지심도 아니고 이게 뭐람.
신경원은 로비의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는 서너 걸음 출입문 옆쪽으로 이동한 뒤 브리프 케이스를 든 채로 팔짱을 꼈다. 키이스의 태도로 보아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직장 동료와의 일은 직장에서 끝내고 싶다. 신경원은 키이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서, 날 잡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정면으로 바라보자 키이스는 아몬드형 눈을 초승달처럼 가늘게 만들며 생긋 웃었다. 그러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하고 싶은 말보다는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겁니다만, 지금은 포기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LA로 가는 빠른 비행기편이 필요하신 거죠?”
“…그런데?”
“아부 좀 하게 해주시겠습니까?”
“뭐?”
“아부요. 잘 봐주셨으면 해서 하는 아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신경원에게 기다려 달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인 키이스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톰슨 씨. 접니다. 네, 오랜만이네요. 급한 부탁이 있습니다. LA행 비행기표 좀, 가장 빠른 걸로 수배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끊은 키이스는 신경원을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길 건너편에 차를 대기시켜두었습니다. 가시죠.”
그는 여전히 잡고 있던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리곤 다시 한 번 먼저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신경원은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밖으로 나갔다. 신경원의 뒤에 바짝 붙어 나온 키이스가 곧장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곳엔 새카맣고 길고 큰, 벤츠가 한 대 서 있었다.
키이스를 처음 보았을 때 한눈에 알아봤었다. 놈이 혈통 좋은 서러브레드라는 것을. 물론 미리 본 프로필의 도움을 좀 받긴 했지만 보지 못했어도 알아차렸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상류계층 특유의 아우라 같은 게 풍겨 나오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원은 키이스가 어느 정도 돈지랄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째 예상한 거에서 벗어나는 게 하나 없네.
신경원은 건너편에 앉아 식전주를 고르고 있는 키이스를 살짝 훔쳐보았다. 지금 그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아니, 계속 나오는 중이다. 무려 자가용 제트기의 주방에서.
운전사가 딸린 벤츠에, 자가용 제트기까지는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음식은 정확히 한 스푼 정도만큼, 신경원의 예상을 빗나갔다. 진짜 부자들은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다.
“82 로제 빈티지가 있다고요?”
“지난주 회장님께서 프랑스에 다녀오셨답니다. 오시면서 드시려던 건데, 피곤하셨는지 그대로 두셨어요. 가져올까요?”
“그렇게 하죠. 그리고 스테이크는… 아, 퍼스트. 스테이크는 어느 정도로 익힌 것을 좋아합니까?”
순간 신경원은 그 ‘회장님’이랑 너랑은 무슨 관계냐 묻고 싶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디엄 레어.”
“저는 레어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스튜어디스 복장을 한 건 아니지만 펜슬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스튜어디스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고는 칸막이도 아니고 제대로 나무, 그것도 고급스럽게 마감된 문 뒤로 사라졌다. 신경원은 그녀가 닫고 나간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운전사도 있고 자가용 제트기도 있는 부잣집 아들이 왜 쓸데없이 험한 일을 하겠다고 지랄을 해서 날 피곤하게 하는 거냐고.
“미인이죠? 취향이시면 소개해드릴까요?”
Nope. 너랑은 그런 걸로 엮이고 싶지 않아.
“퍼스트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되는대로 준비해두라고 했는데, 좋아하는 요리를 물어볼 것을 그랬습니다. 말씀해주시면 다음부터는 제대로 준비해두겠습니다.”
웃는 얼굴엔 침을 못 뱉는 법이다. 하물며 바로 앞에서 저리 생글생글 웃어대고 있으니 침은커녕 거북한 기색을 보이기도 힘들다. 신경원은 한숨을 쉬며 공항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기회만 노리던 인사말을 꺼냈다.
“인사가 늦었는데, 고마워.”
“별말씀을요. 편히 보내드리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 중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튜어디스가 식전주를 들고 왔다. 그녀가 들고 온 병을 본 신경원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동그랗게 변했다. 와인엔 무지한 편이지만 특유의 병 모양과 라벨을 알아본 탓이다.
“회장님이 와인 애호가시거든요. 저는 위스키를 더 좋아합니다만, 이건 꽤 괜찮습니다. 드셔보세요.”
무려 돔페리뇽 빈티지. 어느 연도의 빈티지가 최상인지는 모르겠으나, ‘회장님’이 드시려고 한 돔페리뇽이니 아마도 최상급이리라.
“…괜찮네.”
“그렇죠?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신경원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둘러봤다. 비어 있는 위는 어서 날 채워줘! 라고 아우성치고 있지만 과연 체하지 않고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신경원은 잠자코 풀 세팅된 식기 중 제일 가장자리에 있는 포크를 들고 앞에 있는 음식들을 덜어 먹기 시작했다.
“……!”
젠장. 맛있잖아.
겉보기는 호화찬란해도 비행기 안에서 만든 음식이라 기대를 별로 안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미슐랭 스타를 열 개쯤 박은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기는 느낌이다.
“천천히 드시고 고기만 드시지 말고 다른 것도 골고루 드세요. 입에 맞는 게 있으면 더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열중해서 맛있는 음식을 위장에 쓸어 넣고 있던 신경원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키이스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맛있어.”
“다행이네요.”
맛은 있지만 역시 체할 것 같다. 무엇보다 우아함이 철철 넘치는 포즈로 샐러드를 씹고 있는 키이스를 보고 있자니 석 달 열흘은 굶은 사람처럼 아구아구 음식을 먹어치운 게 쪽팔린다.
에이씨, 몰라. 식사 예절 형편없다고 욕하고 싶으면 욕하라지. 무슨 상관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스테이크가 서빙되었다. 와인도 바뀌었다. 철저한 맥주파인 신경원이었으나 스튜어디스가 내오고 키이스가 따라준 고급 레드 와인은 취향도 가뿐하게 깨버릴 만큼 맛이 좋았다.
쪼르륵―. 어느새 비어버린 빈 와인잔에 다시 붉은 액체가 채워졌다. 작정하고 마실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는데 너무 맛있다 보니 자꾸만 손이 갔다.
“후식으론 어떤 걸 좋아하십니까, 퍼스트?”
신경원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리고 벌써 반이나 비운 와인잔을 살짝 흔들었다.
“이거면 충분해. 더 먹었다가는 위장이 터질 거야.”
“입가심은 하셔야죠. 과일 소르베 같은 건 한두 입 정도니까 괜찮을 겁니다.”
무시해도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답게 키이스는 멋대로 후식을 가져오게 했다. 다행히 소르베는 정말로 한두 입, 그것도 티스푼으로 두 번만 떠먹으면 바닥을 비울 수 있는 양이었다. 맛은, 더 말하면 입이 피곤할 정도로 좋았다.
“고마워. 잘 먹었어. 신세 많이 진다.”
“신세라뇨. 아부라니까요.”
키이스는 환하게 웃으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위에 쓸어 넣은 음식물이 식도를 역류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자 아까 보았던 스튜어디스 말고 다른 사람 둘이 와서 순식간에 테이블을 깨끗이 치워주었다. 그사이 키이스는 자리를 옮겼고 그의 권유에 따라 신경원도 좀 더 안락한 좌석으로 이동했다.
크림색의 가죽으로 마감된 의자는 비행기 좌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안락했다. 다만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주 작게 뿌득뿌득 하는 소리가 들려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원은 심호흡을 해가며 몸과 머리를 진정시켰다.
좋게 생각하자. 좋게 좋게.
놓쳤던 비행기 대신 훨씬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자가용 제트기에 탔다. 밤새 비어 있던 위장도 꽉 채웠다. 공무원의 신분으로는 평생 가도 한 번 누릴까 말까 한 호사를 누리느라 거북하기 그지없지만 베풀어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신경원식으로 환산해 가판대에서 핫도그를 사서 내밀고 매일 타고 다니는 차에 잠깐 동승을 시켜준 정도밖에는 안 되는 일이다. 부담 같은 거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감사 인사를 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앉아 있는 푹신한 좌석에 바늘방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따끔 따끔, 계속 신경을 거스르고 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괜찮다. 시장바닥 같은 공항에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 줄창 죽치고 있는 것보다야 백 배 낫지 않은가.
신경원은 힐끔, 널찍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는 키이스를 훔쳐봤다. 그의 손에는 타임지가 들려 있었다. 앞에 있는 테이블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에스프레소 잔과 함께 다른 신문과 얇은 잡지도 몇 부 놓여 있었다. 종이 신문 대신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것이 맞을 나이인데도 종이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폼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고 기품이 철철 넘쳐흐른다.
“…저기.”
“네?”
신문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띠고 신경원에게 향한다. 신경원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뭔가 약속… 같은 거 있던 거 아니야?”
“…….”
“비행기 태워줘서 정말 고마운데, 시간… 빼앗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한두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잖아.”
“아, 제가 같이 가는 게 신경이 쓰이셨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사실 이 제트기는 회장님이 안 쓰시면 언제든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 건 아니거든요. 회사 관계자도 아닌 퍼스트를 혼자 태울 수는 없어서 저도 함께 탄 겁니다.”
“……!”
힘겹게 마인드 컨트롤까지 해가며 잡은 평온이 와드득 소리를 내며 꽝꽝 얼어붙었다. 민폐다. 아주 왕 민폐다.
“시간은 괜찮습니다. 약속이 있던 것도 아니고 집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거나 휴일 출근을 해서 퍼스트가 내준 숙제나 할까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걱정 마세요. 어차피 이번 휴가 자체가 퍼스트 덕에 받은 거고 기왕 하는 아부, 제대로 해야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 어. 그. 그래.”
그놈의 아부, 두 번만 받았다가는 민폐 킹으로 등극해서 폐가 짜부라져서 죽을 거다.
신경원은 앓는 소리는 못 내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대화가 끊어지자 더더욱 앉은 자리가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안면 몰수하고 아무 데나 머리를 대고 졸거나 자버렸겠지만 간만에 숙면을 취한 탓에 졸음의 ㅈ도 찾아오지 않았다.
신경원은 앉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허리를 뒤틀어가며 어색함과 사투를 벌였다. 그러기를 한참, 신문을 내려놓은 키이스가 불쑥 말을 걸었다.
“그런데 퍼스트.”
“으, 응?”
“LA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
젠장, 자는 척할걸.
“그게….”
“말씀해주시기 곤란하면 괜찮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니 딱히 곤란하지만은 않다. 다만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놈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싫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부’로 분에 넘치는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이 물으면 대답 안 할 수가 없잖아!
“…사촌 동생들 만나러 가.”
“사촌 동생들이요?”
“그… 여름엔 바빠서 얼굴 볼 틈이 없었거든.”
“아하. 친척들과 친밀하게 지내시나 보네요.”
“그, 그렇지.”
질문이 더 이어지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했으나 키이스의 질문은 거기서 끝났다. 다시금 찾아든 침묵은 여전히 거북하고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래도 계속 질문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행히 키이스는 이후로는 거의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마실 것은 필요 없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정도가 다였다.
의문의 ‘회장님’이 타고 다니는 제트기는 6시간의 비행 끝에 버뱅크 공항에 도착했다. 주말인지라 LAX에 내리긴 힘들었다며 키이스가 사과했다. 신경원은 절대 사과할 필요 없다며 편함과 불편함이 공존했던 제트기에서 내렸다. 예상했던 그대로, 제트기 옆에는 벤츠가 대기하고 있었다. 뉴욕의 벤츠와 다른 게 있다면 번호표와 색 정도였다.
“어라, 톰슨 씨가 여기 웬일이지?”
신경원을 앞세운 채 비행기에서 내리던 키이스가 벤츠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퍼스트. 저 차를 타시면 됩니다.”
“아니야. 신세지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해. 덕분에 일찍 왔는걸.”
“그러지 마시고 타고 가세요.”
키이스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신경원을 살살 벤츠 쪽으로 몰아갔다. 어떻게 했냐면 손목이라도 잡을 기세로 가깝게 접근해 신경원이 알아서 피하게―벤츠 쪽으로―했다. 눈뜨고 코 베인다는 표현이 딱 맞을 거라며 신경원은 울며 겨자 먹기로 벤츠 쪽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톰슨 씨.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직접 뵙는군요. 키이스 도련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차 한 대만 더 수배해주시겠어요?”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직접 벤츠의 문을 열어주었다.
“타세요, 퍼스트. 운전사에게 말하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릴 겁니다.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키이스에게 선수치기 당한 운전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곤 운전석에 탔다.
“어서 타세요.”
“괜찮다니까. 오랜만에 뵙는 분도 계신데 네가 타고 가. 난 일정도 있어서 렌터카를 빌릴 예정이거든. 월요일 날 보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퍼스트―!”
신경원은 소개를 받은 사람도 아니지만 초면인 초로의 신사에게 양해를 구한 뒤 키이스에게 또 붙잡힐세라 부리나케 벤츠의 뒤를 돌아 쏜살같이 내뺐다. 벤츠를 타면 돈도 굳고 몸도 편하겠으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6시간의 비행 동안 혹사당한 신경줄이 버텨낼 것 같지 않았다.
부리나케 도망을 치는 신경원을 보고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발 하나는 끝내주게 빠르다니까.”
발만 빠른 게 아니라 순간반응 속도도 엄청 빠르다. 정말 찰나의 순간에 손목을 잡으려는 자신의 손을 피해버렸다. 키이스는 제 손바닥을 보며 또 웃었다. 언제쯤 경계를 풀고 손을 내미는 족족 잡혀줄지 참 기대가 된다.
“염려했는데, 적응을 잘하시고 계시나 봅니다.”
“네?”
“파트너분이시잖습니까. 사이가 좋아 보입니다.”
“뭐… 아직, 그렇게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잠깐, 설마 퍼스트에 대해 벌써 조사해보신 겁니까?”
“별명이 퍼스트라는 건 몰랐습니다만 대략―, 아무래도 VI의 에이전트인지라 보안 등급이 어지간한 동급 국가기관의 에이전트들보다 높아서 상세하게 조사하긴 힘들었지만 일단 했습니다.”
초로의 신사 톰슨은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멀어지는 신경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신경원이 앞에 있을 때도 저런 눈빛이었으리라. 사람을 앞뒤로 재보는, 어떤 사람일지 계산해보는 그런 눈빛. 항상 봐도 항상 싫다는 생각을 하던 키이스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퍼스트의 나이는?”
“얼마 전에 서른이 되었습니다.”
“저 얼굴로 서른?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다고요?”
키이스는 게엑―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면봉에서 점이 되어가는 신경원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동양인들은 외모만 봐서는 나이 짐작이 어렵죠.”
“잠깐, 주워듣기로는 5년차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스물넷…, 스물다섯. 나보다 겨우 1년 늦게 에이전트가 되었다는 소리네. 군인 출신인가?”
“아닙니다. 스물두 살에 의대를 졸업하고 바로 인턴 생활을 시작했는데….”
톰슨의 입에서 신경원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얼른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입을 막았다.
“아, 자료를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키이스는 손을 내저었다. 누군가를 새로 만날 때마다 무조건 뒷조사부터 시작하고 사람을 대하는 건 지긋지긋한 형들과 회장님이면 충분하다. 톰슨이야 그 사람들이랑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니 딱히 뭐라 말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그들의 습성에 질색하는 입장인 키이스로서는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상대가 덜떨어진 고양이 같은 신경원이라면 더더욱.
신경원에 대한 궁금증은 하루에 최소 하나씩, 착실히 늘어가고 있다. 말 한마디면 신경원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가 손에 들어올 거다. 신경원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돼도 당사자에게는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다. 그래도 반칙을 하는 것 같아 싫다.
무엇보다 다 알고 시작하면 재미가 없잖아. 게다가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재미있을 것 같은 소일거리를 놓칠 수는 없지.
“그보다 여기는 웬일이세요, 톰슨 씨? 뉴욕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볼일이 있어 며칠 머물던 참입니다. 도련님께서 이쪽으로 오신다고 해서 잠시 시간을 냈지요. 갑작스레 오신 건 도련님 쪽이신데 이제 어쩌시렵니까? 곧장 뉴욕으로 돌아가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하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갔다가는 큰누님에게 날벼락을 맞을 겁니다. 서두르면 저녁 정도는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연락 좀 넣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톰슨은 헬기를 준비하겠다며 잠시 몸을 물렸다. 키이스도 햇살을 피해 그늘로 이동했다. 나름 서둘러 온 덕에 아직 해가 지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차에다가 제트기까지 동원했는데 고작 얻은 정보가 사촌 동생들을 만나러 왔다는 것뿐이니, 나 참.”
아부라 말했으나 과연 신경원이 오늘의 일을 아부로 받아들였을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협박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키이스의 금발 머리카락을 뚫고 뇌수로 슬금슬금 번져 나갔다.
괜히 제트기를 타고 왔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적당히 아무거나 퍼스트클래스로 표를 구하라고 했어도 되는데, 마침 회장의 제트기가 놀고 있다고 해서 덥석 아무 생각 없이 잡아버렸다. 덕분에 제트기 승무원들만 괜히 고생했다.
“이 정도 하면 보통 이것저것 질문을 해오고도 남아야 하는데….”
“예?”
저도 모르게 툭, 마음속의 말이 튀어나왔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톰슨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키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키이스는 보란 듯 여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톰슨이 주의 깊게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뻔뻔한 태도를 고수했다.
“헬기가 준비되었다고 하니 헬리포트까지 모시겠습니다.”
“톰슨 씨도 같이 저녁식사 하실 거죠?”
“저는 약속이 있습니다.”
“헤에. 진짜 저 때문에 공항까지 나오셨나 보네요.”
톰슨은 부드럽게 웃으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탄 키이스의 눈썹은 헬기 이착륙장을 향하는 와중에도, 헬기에 타고 말리부를 향해 가면서도 계속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계속 자가용 제트기에 태워 온 신경원이 제트기에 대해서도, ‘회장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단 한 마디 질문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곱씹고 있었다.
원래 그런 건 안 묻는 성격인 건지, 아니면 묻고 싶을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안 하던 아부까지 했건만 답이 후자라면 자신에 대해 진짜 아무런 궁금증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상태가 된다. 혹은 궁금증은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물어볼 만큼의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도―.
“…굴욕인데.”
“도련님?”
톰슨은 프로펠러 소리가 시끄러운데도 즉각 키이스의 혼잣말에 반응을 했다. 톰슨만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 한 마디, 손짓, 작은 눈짓 하나에도 즉각 반응을 보인다.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제 이름을 밝히거나 오늘처럼 재력을 약간 과시해주기만 하면 바로 반응을 보였다. 눈을 빛내고 찰싹 달라붙어 뭐라도 하나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신경 쓰지 마세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런 거니까.”
키이스는 손사래를 치곤 눈을 감아버렸다.
이 키이스 클리퍼드가 안 하던 짓까지 해가며 사근사근 굴어주고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그리 무반응일 수가 있어!
무릎에 올려놓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주먹을 꾹 쥔 그는 입꼬리를 귀 쪽으로 끌어올렸다.
두고 보자. 덜떨어진 고양이 새끼.
힘이 들어간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 *
불편하면서도 편한 6시간의 비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신경원은 예정보다 좀 늦기는 했어도 무사히 쌍둥이인 사촌 동생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거의 5개월 만에 만난 사촌 동생들은 당연하지만 신경원을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다 먹을 수 있어?”
“물론이지!”
오늘을 위해 검색까지 해가며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었으나 날려버렸다. 두 사촌 동생은 미안해하는 신경원에게 스테이크보다 더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며 학교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거대 쇼핑몰로 가길 원했다. 그곳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두 아이는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에 콜라를 시켜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놓고 행복해했다.
“진짜 이걸 다 먹을 수 있다고?”
“당연히! 평소에 이런 거 먹기 얼마나 힘든지 알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놔야 해.”
“…혹시 용돈 모자라?”
“그런 게 아니라, 돈이 있어도 먹기가 쉽지 않아서 그래.”
“패스으흐드는 거강식푸이 …라고 하교에서 으처―.”
“입에 뭐 물고 말하는 거 아니다. 삼키고 말해.”
“외출하면 뭘 먹었는지 체크까지 한다니까? 원래부터도 좀 그랬는데 10학년이 되니까 더 심해졌어. 물론 다른 거 먹었다고 구라 치면 되지만….”
동생인 해원이가 프렌치프라이를 케첩에 푹 찍어 입에 넣으며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급식으로 햄버거가 나왔는데.”
“우리도 나와. 유기농 야채 수제 햄버거. 하지만 햄버거는 역시 맥도널드에서 먹어야 맛있지.”
“난 버거킹이 더 좋아. 형, 이따가 야식으로 치즈와퍼 먹어도 돼?”
신경원은 웃을락 말락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햄버거 포장을 풀었다. 유기농으로 만들어도 결국 햄버거는 햄버거일 거 같은데….
두 아이가 다니는 사립학교는 이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학교였다. 신경원이 고른 것은 아니었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학비는 당신께서 대시겠다며 큰형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입학시킨 에스컬레이터식 사립학교였다. 그만큼 학생들을 빡세게 관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외출 시에 먹는 음식까지 관리할 줄은 몰랐다.
“아참, 여름에 어… 여름은 아닌가? 6월 초에 예들린 아저씨가 왔다 가셨어.”
“형, 그거 아저씨가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치ㅍ―, 예들린 씨가 왔다 가셨다고?”
“응. 와서 밥도 사주시고 여름 캠프 자료를 잔뜩 가져오셔서 이것저것 알려주고 가셨어.”
“그랬… 구나.”
현재 아이들의 법적인 후견인은 신경원이다. 하지만 신경원이 정식으로 후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FBI 아카데미 훈련을 마치고 기관의 요원이 된 후였다. 그전까지는 예들린이 임시 후견인으로서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유능한 변호사를 구해 이런저런 일을 처리해주는 등 힘을 써줬다. 그래서 신경원이 예들린에게 크게 반항을 못 하는 거다. 소극적인 반항, 떼는 좀 쓰지만….
하지만 6월 초였으면 기관이 엄청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 시점이었는데, 그럴 때 말도 없이 혼자 왔다 갔다니. 음청 고마운 땡땡이 상관 같으니라고.
“재원아, 예들린 씨가 뭐라고 하든?”
“형은 여름에 너무 바빠서 연락도 잘 못할 테지만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러는 거니까 섭섭해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
“한두 번도 아니고 항상 그런데 섭섭할 게 뭐가 있냐고 했지 뭐.”
밝게 웃으며 두 번째 햄버거를 먹어치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신경원은 조금 우울해졌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심정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 유독 활개를 치는 뱀파이어들을 좀 더 원망해야 할 것 같다.
“미안하다.”
“괜찮다니까. 우리도 이제 다 컸는걸. 그치, 재원아?”
“당연. 우리도 이제 10학년인데.”
“그래. 이제 10학년이니 필요한 것도 많겠지?”
신경원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패스트푸드점이 몰려 있는 이 거대 쇼핑몰이 문을 닫을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얼른 먹고 근처 좀 돌아보자. 나도 편한 옷 좀 사야겠다.”
“형. 나 바지 좀 사도 돼?”
사립학교에 다니는지라 교복을 입지만 그 때문에 더더욱 사복에 대한 열망이 클 나이다. 원하는 것 정도는 마음껏 살 수 있도록 나름 상당한 금액의 용돈을 주고 있지만 상식선을 넘기지는 않고 있다.
“얼마나 귀하신 몸이기에 나한테 사달라고 그러셔? 응?”
“사실은 자전거 휠을 바꾸느라 용돈을 거기다 다 써서… 흐흐.”
“재원이 완전 거지야. 일주일 전부터 나한테 빌붙어서 살고 있어.”
해원이 얼른 고자질을 했다. 혼내달라는 것도, 5분 먼저 태어난 형에게 용돈을 착취당해서 억울하다는 얼굴도 아니다. 그저 뭐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이야, 세상에. 형이 돼서는 동생의 용돈을 착취하다니. 다시 봐야겠다. 신재원?”
“씨이. 착취한 거 아니거든? 다 갚을 거거든?”
“언제?”
“대학 가면 아르바이트해서….”
““잘도 갚겠다.””
신경원과 신해원이 동시에 외치자 재원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그러면서도 세 개째의 햄버거에 손을 뻗는다. 해원이도 질세라 햄버거를 집어 들고 전투적으로 먹어댔다.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럼에도 신경원은 가슴이 아파왔다. 부모님은 물론이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일가친척을 잃은 아이들에게서 친구마저 빼앗을 수 없어 다니던 학교를 그대로 다니게 했지만 힘들더라도 뉴욕으로 데려가서 함께 사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다시 고개를 든다.
“너희들… 뉴욕으로 올래?”
전투적으로 햄버거를 물어뜯던 두 놈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신경원을 바라본다. 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두 녀석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린 여기가 좋아. 이제 와서 학교 옮기면 이래저래 귀찮아. 대학은 뉴욕 근처로 갈 거지만 성적 문제도 있고, 지금은 여기 있는 편이 나아.”
“응. 잘하면 이번 학기부터 풋볼팀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 형. 나 풋볼 해도 될까?”
해원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얼핏 보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신경원의 눈에는 해원이가 오버하는 게 보였다. 화제를 돌리려는 거다. 신경원은 웃으며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하고 싶으면 해.”
“진짜? 돈이 좀 드는데….”
“이 형이 재벌은 아니지만 너무 바빠서 초과 근무 수당을 아무 데도 쓰질 못하고 쌓아놓고 사는 거 모르냐? 그런 건 걱정하지 마.”
“헤헤. 그럼 월요일날 학교 올 때 코치님이랑 감독님 좀 만나주라. 정식으로 팀에 들어가려면 보호자랑 면담을 해야 한다더라고.”
“시간이…, 잠깐 기다려. 일단 회사에 연락해볼게.”
원래 휴가는 오늘 토요일 하루뿐이었다. 격일제 근무라 하루만 휴가를 받으면 사흘을 쉴 수 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 일찍 두 아이의 선생님들과 면담을 하고 약간 늦게 출근을 할 예정이다.
신경원은 일부러 아이들 앞에서 핸드폰을 들어 예들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알아주고 자신에게 계속 믿음을 주었으면 해서다.
답신은 금방 왔다. ‘6월에 아이들을 만나셨다면서요,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를 덧붙여 보냈는데, 평소 전혀 하지 않는 짓, 막돼먹은 하트를 덧붙여 보낸 탓이리라 믿는다.
“오케이. 몇 시간 벌었다.”
“됐어! 으하하.”
해원이가 환하게 웃었다. 재원이는 동생이 점점 운동바보의 길을 걷는 거 같다며 투덜거렸지만 밝은 얼굴이었다. 신경원의 얼굴에도 두 아이에게서 전염된 웃음이 천천히 퍼져나갔다.
신경원은 일요일 하루 종일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월요일 이른 아침 쇼핑백을 가득 든 두 놈과 함께 학교를 찾았다. 등교 준비를 해야 하는 아이들과 아쉬운 인사를 마친 그는 교사들과의 약속시간이 될 때까지 학교 내부를 돌아보고 시간에 맞춰 교사를 만나고 풋볼팀 코치와 감독도 만났다. 볼일을 마치고 학교를 나올 무렵엔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위장이 비어 발걸음이 가볍고 통장이 비어 주머니도 가벼워졌구먼. 크으―.”
사립학교란 정말 이래저래 돈이 든다. 딱히 기부를 안 해도 해원이는 풋볼팀에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해두는 편이 좋다. 세상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 그리고 돈을 쓸 때는 통 크게 써야 효과가 있는 법인지라 큰마음 먹고 확! 뿌렸다. 덕분에 정말로 쓸 시간이 없어 쌓여 있던 반년치의 초과 근무 수당이 깨끗하게 날아갔다. 비슷한 급의 국가기관의 에이전트들보다 3배나 더 받는 위험수당도 포함해서.
“그래. 뭐든 통 크게 해야 효과가 있지.”
LA에서 할 일을 마치니 마음은 이미 뉴욕을 향하기 시작했다. 통 크게 아부를 한 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신경원은 아이들을 위해 빌린 렌터카에 타며 골머리를 썩였다. 키이스는 아부라고 했다. 하지만 신경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아도 ‘신세’를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갚을 수 없는 신세는 지는 게 아니고 신세를 지면 갚아야 하는 것이 도리다.
“어휴―. 망할 놈의 부자 새끼. 무슨 아부를 그따위로 해.”
신경원은 투덜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던 머리를 굴리니 돌덩이 굴러가는 소리가 나고 돌가루도 날리는 기분이다. 머리에서는 돌가루, 차바퀴에서는 흙먼지를 날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경원은 보딩 패스를 받고 나서부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혼자 바보처럼 웃기 시작했다.
잘 봐달라고 하는 말을 꼭 사근사근하게 오래된 파트너 대하듯 대해달라는 말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입을 잘 봐주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은가.
그날 저녁 8시 반, 중역출근을 한 신경원은 두어 시간 가량 뭔가를 열심히 보고 두드리고 출력하더니 대뜸 위층에 있는 예들린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15분 후 키이스를 포함한 사무실의 에이전트들은 ‘야호!’ 하며 사무실을 나오는 신경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 자발적으로 예들린을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는데다가 사무실 의자를 침대처럼 사용하는 게으른 사람이었던지라 모두들 ‘저놈이 휴가기간 동안 제대로 못 잤나?’하며 의아해했다. 해야 할 일만 끝내면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기 마련이던 신경원은 그 후로도 바지런히 움직여 동료들의 궁금증을 키워나갔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어?”
옆자리의 존 브라이튼이 바지런히 사무실을 들락날락거리는 신경원에게 물었다.
“바빠, 말 시키지 마.”
“바… 쁘다고 했냐, 지금?”
“어, 바빠.”
신경원은 모니터를 뚫고 들어갈 것 같은 포즈를 하고는 미친 사람처럼 키보드를 두들겼다.
“네가 바쁠 일이 뭐가 있는데.”
“어떤 새끼가 뇌물성 아부를 해서 갚아야 하거든.”
신경원은 교육을 받느라 자리를 비운 키이스의 의자를 힐끔 보고는 파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다시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더더욱 신경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존 브라이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놓고 신경원의 모니터를 훔쳐봤다.
“허―.”
존 브라이튼은 모니터와 신경원의 옆얼굴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다 고개를 저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 사이 서류 작성을 마친 신경원은 큰 소리로 동료를 불렀다.
“캐리! 나 좀 봐!”
두 남자가 회의실로 사라지자 존 브라이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네.”
그게 아니면 신경원이 뭔가 잘못 먹고 살짝 맛이 간 게 틀림없다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은 두세 시간 전, 예들린이 지었던 표정과 정확하게 동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