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9)

2

오후 12시 59분 32초. 아래위로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키이스 클리퍼드는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닫혀 있는 사무실 문 앞에 섰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은 사무실에 배속된 나머지 두 신입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키이스를 포함한 신입들이 기관의 에이전트가 된 것은 2주 전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에이전트로서 사무실에 발을 디디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난 2주간 그들은 기관의 총 본부가 있는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연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오늘은 그들의 첫 공식 출근일이었다.

“후―.”

뉴욕 지부로 배속된 여러 신입 에이전트 중 유일한 여성인 앤 라미레즈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심호흡을 하며 차려입은 바지 정장의 재킷을 꾹 잡아 당겼다. 라미레즈만큼은 아니지만 키이스 역시 약간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긴장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건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며 유리문 앞으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센서가 그의 움직임을 포착하자 FBI 심벌이 새겨져 있는 유리문이 한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키이스를 포함한 세 신입 에이전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각자의 파트너를 찾아 인사를 건넸다. 둘은 무사히 자신의 파트너와 인사를 주고받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키이스의 인사는 불행하게도 입에서 나오다 말고 연기처럼 공기 중에 흩어지고 말았다. 

“…하아.”

키이스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신경원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첫 만남 때도 신경원은 자고 있었다. 그나마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는 게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싶다.

키이스는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기들이 자신에게 배정된 책상에 앉아 파트너에게 소소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다시 신경원에게 향했다. 여전히 열심히 자고 있다. 깨워도 되는 건지 아닌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혹 밤사이 출동을 했을지도 모르고 그 때문에 피곤이 덜 풀려서 저러고 있는 것이라면 그냥 놔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멀뚱멀뚱 보고 있지 말고 깨워.”

열심히 고민을 하는데 신경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 브라이튼이 툭 말을 던졌다. 

“깨워도 되는 겁니까?”

“내버려두면 4시까지는 절대 안 일어나. 어이, 퍼스트.”

그는 신경원을 부르며 바퀴가 달린 의자 아랫부분을 발로 툭 쳤다. 물론 신경원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얌마, 일어나. 네 파트너가 길 잃은 어린양처럼 불쌍하게 서 있는 거 안 보이냐?”

존 브라이튼이 다시 한 번 의자를 발로 찼다. 그제야 신경원은 한쪽 눈을 살며시 떴다. 그러곤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답했다.

“안 보이거든?”

“사람 앞에 두고 그러는 거 실례다, 인마.”

존은 제 쪽으로 향한 신경원의 의자를 발로 슬슬 돌려줬다. 잠에 취해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키이스가 서 있는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왔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잠시 키이스의 허리께를 맴돌다가 스윽, 위로 향했다. 

“씨발, 더럽게 크네.”

“…….”

인사 대신 욕을 들어버린 키이스의 이마에 희미하지만 핏줄 하나가 툭, 불거져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앉아. 목 아파.”

“네.”

키이스가 자신의 자리에 앉는 사이 신경원은 저러다 턱 관절이 빠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크게 하품을 했다. 손이 올라와 입가와 눈가를 느리게 문댄다. 한쪽 눈에 스며 나왔던 눈물 한 방울이 손등에 뭉개져 사라졌다. 하지만 반응은 거기까지였다. 키이스가 자리에 앉자 신경원의 의자는 다시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갔다. 잠시 뜨고 있던 눈도 다시 감기는 게 보였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말은 붙여봐야겠다 싶어 슬쩍 입을 열어봤지만 묵묵부답이다. 도움을 주었던 존에게 시선을 던져봤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최소한 작업지시 같은 거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키이스는 뒤에서 분주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딱히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뭔가를 하고 있다. 자신과는 달리.

잠깐 고민하던 키이스는 동기들이 하는 대로 일단 컴퓨터를 켜봤다. 기본 교육 때 배운 대로 로그인을 하고 백지 상태이긴 하지만 일정표 프로그램을 활성화한 다음 서랍을 열어 구비되어 있던 필기류와 무지 노트 등을 꺼내 가지런히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 사이 신경원이 눈을 뜨고 뭔가를 하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키이스에게는 말을 건네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색함과 멋쩍음이 함께 몰려왔다. 혹시나 뭔가 지시해주진 않을까 싶어 힐끔 신경원을 훔쳐봤지만 역시나,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연신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면서 컴퓨터 화면을 들어다보고 키보드를 달각거리며 뭔가를 입력하고 있을 뿐이다.

키이스는 시선을 돌려 사무실의 분위기를 살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나른하고 느슨했다. 빠릿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은 신입들뿐이다.

날고 기는 에이전트라 해도 사람은 사람이니 24시간 바짝 긴장한 채로 시퍼런 칼 같은 눈빛을 빛내고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다. 기본적으로 기관의 모든 에이전트는 오후 1시 출근해 다음 날 오전 9시 퇴근이라는, 실질적으로는 24시간 교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만날 때마다―겨우 세 번째지만―정줄 놓고 졸거나 자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전투 능력 하나는 확실한 것 같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영 아닌 사람 같은 느낌이 좀 드는데….

키이스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금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생각에 빠졌다. 

뉴욕 지부는 기관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뱀파이어와의 전쟁에 있어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국내 최대의 격전지로 손꼽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훈련생들은 기왕이면 뉴욕 지부로 발령되길 원했다. 반대로 고생할 것이 뻔하니 뉴욕 지부만은 사양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았다. 

키이스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러던 것이 뉴욕으로 확, 기운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특별 심사 대상이었던 ‘87번’의 존재였다. 어떤 식으로든 다시 87번과 조우해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버렸다.

특별 심사 대상은 ‘87번’ 이외에도 몇 사람 더 있었다. 모두 특정 지부의 추천을 받아 왔는데 합격하게 되면 그쪽 지부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접한 키이스는 망설이지 않고 뉴욕 지부 근무를 희망했다. 그는 87번이 훈련교관과 했던 말을―뉴욕에서 왔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87번은 뉴욕 지부에 있었다.

그런데―.

그 87번이 선임에다가 베테랑임을 증명하는 ‘시니어’ 에이전트일 줄이야.

처음에는 낭패감을 느꼈다. 하지만 의외로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놀랐지만 바로 납득했었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었으니 당해낼 수 없었던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했음에도 기분이 좋았다. 더불어 87번의 파트너까지 되었으니 그의 기술을 훔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연 지금의 상황이 정말 ‘좋은 상황’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왜냐하면….

“존, 보고서 좀 카피해줘.”

“Nope!”

“치사한 놈.”

“치사하긴 뭐가 치사해. 네가 처치한 놈들이랑 내가 처치한 놈들이랑 같아? 머릿수도 다른데 어딜 넘봐.”

“다 거기서 거기잖아! 베끼면 어디가 덧나?”

이런 대화를 실시간으로, 바로 옆에서! 고스란히 듣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덧나.”

“어디가!”

“네 옆에 앉아 있는 팔팔한 신입이 나쁜 거 배운다.”

신경원의 고개가 팩―돌아갔다. 검게 보일 정도로 짙은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빙긋 웃고 말았다.

“에이씨―.”

신경원은 구시렁거리며 이어폰을 찾아 귀에 꼈다.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어이, 퍼스트. 손 머리 위로, 실시.”

“실시.”

왼손잡이인지 왼손에는 펜, 시선은 모니터에 둔 채로 신경원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가위, 바위, 보!”

키이스의 입장에선 도대체 뭐하나 싶을 정도로 난데없는 일이었지만 신경원은 시키는 대로 주먹을 콱 쥐었다. 

“당첨. 퍼스트, 오늘은 너다.”

“씨발―! 내가 정말 못 살아. 상사는 최소한의 요구도 안 들어주고 도와주어야 할 동료는 바쁜 거 뻔히 알면서 일을 만들어서 얹어주고.”

“사전에 합의 본 건데 욕하면서 구시렁거리지 좀 마라. 옆에 있는 네 파트너가 널 어떻게 보겠냐?”

“뭔 상관이야.”

“신입한테 나쁜 물 들면 다 네 책임이다?”

태블릿 PC며 두툼한 서류, 몇 개의 USB 메모리를 꺼내느라 부산을 떨고 있던 신경원의 시선이 대뜸 키이스에게 향했다.

“배우지 마. 물들지 마.”

“넵.”

미간에 인상을 잔뜩 쓴 채 하는 말에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기구 간소하게 챙겨서 저기 2번 회의실로 가.”

신경원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곤 조금 전보다 더 부산을 떨며 이것저것을 챙겼다. 

“도와드릴까요?”

“됐거든?”

“네.”

키이스는 노트와 펜 하나만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다른 두 신입도 같은 말을 들었는지 필기도구만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빈 회의실에 나란히 앉았다. 어리둥절한 그와는 달리 나머지 둘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 들은 눈치였다. 

“뭐하는지 들었어?”

“일단은 이런 저런 심화 교육이라던데?”

“흐음.”

어쩐지 앞으로도 이런 대화가 되풀이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신경원이 서류와 태블릿 PC를 무려 4개나 들고 등장했다. 그는 맨 뒤편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는 불을 끄고 에어컨 온도를 내린 다음 곧장 밖으로 나갔다가 동그란 사과 주스 병을 들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다. 

“각자 하나씩 가져가.”

세 개의 태블릿 PC와 두툼한 서류 뭉치가 셋으로 나뉘었다. 그러자 신경원은 바로 앞자리에 앉은 키이스에게 조그만 리모트 컨트롤러를 건넸다.

“기본적인 건 대략 배웠다고 생각하겠지만…, 하아~음.”

말을 하다 말고 하품을 한 신경원은 컴퓨터에 USB 메모리를 꽂아 넣고 프로그램 하나를 돌렸다. 이내 전면의 커다란 스크린이 환해졌다.

“앞으로도 배울 거리가 많아. 오늘 배울 것은…, 익혀야 할 거라고 해야겠네. 아무튼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너희들이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 바로 에이전트로서, 다른 말로 해서 뱀파이어 헌터로서의 ‘눈과 귀’다. 개인차는 있지만 현직 에이전트들은 뱀파이어와 일반인을 구분해내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 실제 전투 영상을 보면서 현직 에이전트들이 어떤 기준으로 대상을 특정하는지 살펴보도록. 한 시간 주겠다. 질문이 있으면 해도 좋아.”

날짜별로 주욱 떠오른 데이터 중 하나를 고른 신경원은 영상을 플레이를 시킨 뒤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태블릿 PC에 연결된 이어폰을 한쪽 귀에만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세 신입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마자 곧장 왼손에 펜을 들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신경원이 뭘 하는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전면의 커다란 스크린에 펼쳐지기 시작한 ‘실제 전투 영상’이 주는 충격 때문이었다.

전투 영상을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라이커스 아일랜드의 총본부에서 2주간 교육을 받는 동안 하루에 최소 한 시간 정도는 전투 영상을 보며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영상은 모두 야간용 렌즈로 원거리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 그들의 앞에 펼쳐지고 있는 영상은 반 이상이 풀 컬러의 고화질 영상이었다.

녹색으로만 보이던 뱀파이어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좀비처럼 보였다면 풀 컬러로 촬영된 영상 속의 뱀파이어들은 현실 속의 괴물,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멀리서 줌 렌즈를 당겨 촬영된 것이 아니라 에이전트들의 헬멧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된 것이었기에 현실감이 상당했다. 특히 큰 스크린 바로 앞에서 보고 있기에 마치 자신이 뱀파이어에게 공격을 당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 뱀파이어가 불쑥 튀어나와 공격을 할 때마다 세 신입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물론 비명을 지르는 일은 없었다.

키이스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게 혀를 찼다. 그는 이전에 지금 보고 있는 영상과 비슷한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때문에 다른 두 신입보다는 덜 놀랐고 어느 정도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꽤 충격을 받고 있었다.

「SWAT 팀과 HRT 팀의 전투는 차원이 다르다.」

과거 키이스에게 SWAT 팀의 실제 전투 영상을 보여준 사람이 한 말이다. 그때는 달라봤자 별 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관의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와중에도 ‘위험도’가 다를 뿐, ‘차원’이 다를 정도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철저한 오산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군.

씁쓸한 기분으로 혀를 차던 키이스는 슬그머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경원은 어둠 속에서 노트에 뭔가를 계속 적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소리’뿐인지 태블릿 PC 화면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신경원은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때문에 회의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단말마와 비명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리 큰 비명과 단말마가 회의실 전체를 흔들어도 어깨를 움찔거리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뭐, 익숙해서 그렇겠지?

키이스는 신경원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전면의 스크린에는 여전히, 섬뜩한 영상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정확히 한 시간 후 키이스는 영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신경원을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신경원이 어느새 의자에 기대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퍼스트?”

그는 조심스럽게 신경원을 불러봤다. 하지만 신경원은 불편한 자세임에도 꽤 깊이 잠들었는지 눈을 뜨지 않았다.

“퍼스트. …….”

재차 불러도 눈을 뜨지 않는 신경원에게 키이스가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목이 꺾어질 듯한 자세를 하고 있던 신경원이 번쩍 눈을 떴다. 

“뭐야.”

“한 시간 다 됐습니다.”

“…왜 질문 하나 없었지? 일단 불 켜봐.”

신경원은 하품을 쩍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 사이 키이스가 불을 켰다. 반개한 신경원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키이스도 덩달아 동기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나는 얼굴이 단단히 굳어 있고 하나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10분간 휴식. 이후 간단한 테스트를 하겠다.”

신경원은 미지근해진 사과주스 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스트.”

멈칫하며 고개를 돌린 신경원을 향해 키이스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무슨 테스트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받아보면 알아.”

신경원은 싸늘한 눈빛을 한 뒤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여자 신입, 앤 라미레즈가 입술을 비틀었다. 

“뭐야, 저 쌀쌀맞고 무성의한 태도는.”

키이스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할 일도 많은데 우리 셋을 한꺼번에 떠맡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자기 파트너라고 벌써부터 두둔하는 거야, 클리퍼드?”

키이스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넌 파트너라 곱게 보려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기분 진짜 별로야. 왠지 귀찮은 짐덩이 취급을 받고 있는 거 같아. 아까 에이전트 신이 가위바위보에 지자마자 욕하는 거 못 들었어?”

“…….”

“게다가 다들 봤지? 뭔가 하는 척하다 그냥 자버리는 거.”

키이스는 말을 아꼈다. 그러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또 다른 신입, 랜디 로스가 입을 열었다.

“한 시간 내내 질문도 없었고, 에이전트 신의 입장에서야 새로울 거 하나 없는 영상이니 졸릴 수도 있지 않았겠어? 어두웠고.”

“로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최소한의 설명은 해줘야 하잖아. 게다가 대뜸 테스트를 하겠다니, 기껏 해야 한 시간 영상 본 것밖에 없는데. 기도 안 차.”

라미레즈가 머리를 흔드는데 문이 열렸다. 아까와 똑같은 사과주스 병을 든 신경원이 여전히 눈을 반개한 상태로 안으로 들어섰다. 10분 휴식을 주겠다더니 5분도 되지 않아 돌아온 그를 보고 라미레즈는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신경원이 뒷담화를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해 언급한다면 한소리 할 자신이 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화장실 갈 사람 없으면 바로 테스트나 하지.”

신경원은 불을 끄고 주머니에서 새로운 USB 메모리를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 그러곤 곧장 영상을 플레이시켰다. 전투 장면이 나오고 얼마 안 가 뱀파이어가 제압되었다. 순간 신경원은 영상을 일시 정지시켰다. 

“라미레즈. 해당 목표물의 등급은?”

“예? 어…, B3라고 생각합니다.”

“정답. 하지만 ‘생각합니다’는 필요 없어. B3면 B3. B2면 B2. 확정해서 대답해.”

“뱀파이어의 등급을 확정하는 테스트인 겁니까?”

라미레즈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한 시간 정도밖에 영상을 보지 못했는데 이런 테스트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불만이면 나가든가. 다음, 로스.”

신경원은 목소리를 높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고 곧장 영상을 스킵해 다음 전투 장면을 보여주고 질문했다. 세 번의 턴이 돌아간 후 신경원은 예고도 없이 영상을 꺼버리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상대하는 뱀파이어의 태반은 분명 B3가 맞아. 그러니 대충 B3라고 하면 맞겠지 하며 찍는 것 같은데 조금 전 본 아홉 마리 중 둘은 B2였다.”

뱀파이어에겐 등급이 있다. 1차적으로는 뱀파이어와 블러드서커로 나뉘는데 기관의 에이전트들이 상대하는 뱀파이어는 99.9%가 블러드서커라 불리는 하위 레벨이다.

하위 레벨의 뱀파이어는 다시 3개로 나뉜다. 기준은 인간일 때의 이지와 판단 능력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다. 인간과 별다를 게 없는 것이 B1.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이 B2. 피에 미쳐 이성을 완전히 잃고 ‘괴물’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 B3이다.

상위 레벨도 V1, 2, 3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일 때의 이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체 능력이 인간을 훌쩍 상회하는 터라 발견도 잘되지 않고 발견된다 해도 제거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때문에 기관의 에이전트가 사냥 가능한, 그리고 사냥하고 있는 대상은 거의가 하위 레벨인 블러드서커 중 B2나 B3으로 분류되는 뱀파이어였다.

“모르겠다고 무조건 B3라고 확정하면 곤란해. 언어 구사 능력이 제대로 남아 있느냐 아니냐로 B2와 B3를 구분하는 건 맞지만, B3중에서도 수준급의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개체가 종종 발견되고 있으니까.”

신경원은 새로운 데이터를 불러냈다. 뱀파이어의 얼굴을 확대하여놓은 사진이었는데 화면이 4분할되어 있었다.

“저 4개의 사진에서 서로 달라 보이는 점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세 사람의 시선이 자동으로 스크린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못했다. 다행히 답을 원한 건 아닌지 신경원은 곧장 말을 이었다. 

“위쪽 우편이 B2다. B3과 B2는 눈동자, 정확하게 말해 홍채의 형태가 달라. B3는 동공이 완전히 풀려 있기 때문에 검은 유리알을 박아놓은 듯한 모습인 반면, B2는 어느 정도 홍채의 기능이 살아 있어서 빛의 세기에 따라 약간씩 반응을 보인다. B2에서 B3로 변화해가는 중인 개체는 중간에 걸쳐 있기도 하지만 순간반응 속도는 확실히 다르지.”

몇 개의 자료 화면이 한 번에 스크린에 떠올랐다. 말하자면 눈알 떼샷이다.

“나눠준 태블릿 PC에는 지금 스크린에 있는 것과 같은 데이터가 상당량 들어 있다. 그리고 오늘 본 실제 전투 영상 이외에도 다른 영상들도 있어. 아, 기관의 모든 자료와 기기는 외부 반출이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지?”

네―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신경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숙제를 내줬다. 테스트를 했던 방식으로 목표물의 등급을 확정되기 전에 먼저 유추를 해보는 방식으로 연습을 한 후에, 눈 부분을 확대한 별도의 자료에 답을 적어 오라는 것이었다.

“일단 1차 심화 교육은 이걸로 마치겠다. 4시까지는 자유시간이다. 4시부터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도록. 하루 최소 2시간에서 최대 3시간. 매일이다. 숙제는 끝내는 대로 아무 때나 내게 가져오도록.”

말을 마친 신경원은 여전히 뚜껑을 따지도 않은 동그란 사과주스 병을 들고 곧장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마자 로스가 태블릿 PC의 데이터를 잠깐 보더니 곧장 짧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을 흘렸다.

“젠장. 내 눈엔 전부 비슷해 보이는데.”

“―내 눈에도.”

라미레즈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동감을 표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전면의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마찬가지지, 클리퍼드?”

키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두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우―. …하라고 하니 하겠지만 이 방법, 실제로는 별로 효용성이 없을 것 같지 않아? 현장에서 눈동자를 보고 곧바로 등급을 특정 짓는 건 어마어마한 동체 시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봐. 일단 사람을 보면 무작정 달려드는 게 뱀파이어의 습성이잖아. 눈동자 따위 들여다보고 있을 새가 없을 거라고. 그것도 야간 투시경을 쓴 채로 어떻게 해.”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 설마 실전에서 그거 하나만 가지고 판별해내라고 하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어 구사 유무도 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구분 방법이 있을 겁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레벨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일종의 노하우가….”

두 사람의 대화에 키이스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등골을 따라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 입에서 나온 ‘노하우’라는 단어에서 오는 묵직한 무게감 때문이다. 

“우리도 차근차근 경험을 쌓다 보면 그 노하우를 얻게 되겠지.”

“맞아.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노하우를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에이전트 신은 필드에서만은 베테랑일지 몰라도 사람 가르치는 방법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특히 귀찮은 걸 억지로 하고 있다는 게 팍팍 드러나는 그 태도, 정말 최악이야!”

라미레즈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펴보지도 않은 서류와 태블릿 PC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키이스와 로스는 시선을 교환하다 거의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좀 걱정스럽네. 어째 에이전트 신이 가르치는 폼이 성에 안 차면 그냥 폭발해서 뒤집어엎을 것 같아.”

로스의 말에 키이스는 반짝이는 금발을 쓸어 넘기며 신경원의 무심하면서도 어딘가 경계심 어린 신경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라미레즈가 폭발을 일으키면 신경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긴 한데, 일단은 자신의 파트너니 남에게 괜한 봉변을 당하는 건 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묵히 회의실을 나가던 키이스는 아주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Give and Take는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법이다. 키이스는 아직 신경원에게 받은 게 없다. 그러니 라미레즈가 폭발해서 신경원에게 피해를 입히든 말든, 자신이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고소해하면 고소해했지 싫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로스.”

“응?”

“혹시 파트너십… 같은 거에 로망,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관계라는 건 좋으면 좋을수록 좋은 거고, 특히 여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지부 간 이동이 거의 없는 곳이니 더더욱 파트너와의 관계가 중요할 거라고 봐.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넌 없는 쪽인가?”

로스의 질문에 키이스는 아주 잠깐 신경원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갑자기 빙긋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제가 말이죠, 로스. 원래는 뉴욕은 근처에도 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음?”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뉴욕에 있네요.”

로스는 그래서? 라는 눈빛을 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빙긋 웃었다. 

* * *

정식 출근을 시작한 지 12일째이자 실제 출근 횟수는 6일째인 오늘. 앤 라미레즈의 스트레스 지수는 거의 폭발하기 직전에 다다라 있었다. 첫날 그녀는 신경원의 불성실한 태도에 불만을 터트렸었다. 그런데 다음 날 교육을 맡은 로스의 파트너 맥스뿐 아니라 그녀의 파트너인 캐리 역시 신경원과 별다를 바 없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신경원보다는 덜했지만 둘 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키이스와 로스도 그러했다. 

“에이전트 신. 질문이 있습니다.”

“해봐.”

“왜, 저희만 유니폼을 차려입고 무거운 장비까지 주렁주렁 매단 채 헬멧까지 쓰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 겁니까?”

라미레즈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신경원을 쏘아보며 물었다. 첫날 심화 교육 이후로 12일 만에 두 번째로 합동 교육을 맡은 신경원은 현재 반팔 셔츠에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세 신입의 차림은 이를테면 ‘완전 무장’에 가까운 상태였다. 

“저희가 받아야 할 것이 근접 전투 훈련이라면 납득할 수 있습니다만, 웨이트 트레이닝에서까지 이런 차림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차림으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웨이트 트레이닝은 언제든 할 수 있어. 내가 언제 자율 훈련할 때도 그러고 하라고 했나?”

“그건 아닙니다만―,”

“듣자하니 하루라도 빨리 실전에 투입되고 싶다고 했다며.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완전 무장을 한 채로 움직이는 거에 익숙해지는 편이 좋겠다 싶어서 그런 건데, 싫으면 벗든가.”

신경원은 여상한 말투로 대꾸하며 구석으로 가서 손목용 중량 밴드를 들고 왔다. 

“양쪽에 1kg씩 넣어. 할 만하다 싶으면 소총 무게에 맞춰서 더 채워서 차도록. 싫으면 안 해도 돼. 다시 말하지만 강요하는 건 아니야.”

제일 먼저 나서 중량 밴드를 받아든 것은 키이스였다. 처음에는 그도 라미레즈의 의견에 동감하고 있었지만 신경원이 내건 이유는 타당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늘은 다른 거 할 필요 없어. 9분은 빠르게 뛰고 1분은 느리게 걷는 걸 반복하면서 1시간 동안 러닝만 해. 속도는 내가 세팅해놨으니까 건드리지 마.”

신경원은 세 대의 러닝머신을 가리킨 뒤 몸을 돌렸다. 그러곤 반대쪽의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버렸다. 

“젠장.”

라미레즈가 중량 밴드에 금속 바를 끼워 넣은 뒤 먼저 러닝머신 위로 올라갔다. 나머지 둘도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1분도 되지 않아 약속이라도 한 듯 등 뒤를 돌아보았다. 러닝머신의 속도가 전력 질주에 가깝게 세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심술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퍼스트는 더 빨리 뛰고 있어.”

“에이전트 신은 가벼운 차림이잖아.”

키이스가 퍼스트라고 계속 부른 탓에 로스도 덩달아 신경원을 퍼스트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라미레즈는 신경원이 퍼스트라 불리는 이유를 제대로 납득하기 전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라미레즈.”

키이스는 씩씩거리는 라미레즈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에이전트 캐리나 맥스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제 파트너에게 일방적으로 퍼붓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언―,”

“조금 전에 말투가 굉장히 사나웠습니다.”

“이유 없이 그런 건 아니거든?”

“제가 볼 때 우리 세 명의 파트너의 태도는 다 거기서 거깁니다. 불만을 터트리고 싶으면 3등분을 해서 각자에게 해주세요. 공평하게요.”

할 말은 그게 전부라는 듯, 키이스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라미레즈는 가뜩이나 쌓인 스트레스가 더더욱 치솟는지 스페인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완전 무장을 한 채로 팔에 중량 밴드까지 차고 달리다 보니 곧장 숨이 차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세 사람은 숨 쉴 기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대는데 신경원이 세 사람 앞에 우뚝 섰다. 

“수분 보충하고 4시 10분까지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 상태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신경원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근접 전투 훈련이다.”

그 말에 키이스는 자동 반사 기능이 달린 로봇처럼 벌떡 일어났다. 신경원이 자신의 파트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계속 기다리던 훈련이었다. 먼저 청해볼까 하는 생각도 계속 했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알아서 해준다니 반갑기까지 했다. 

키이스는 기대로 가슴을 부풀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의 부푼 가슴은 아래층으로 내려온 지 채 1분이 지나기도 전에 푹 꺼지고 말았다.

“…저희 셋만 하는 겁니까?”

“그래. 아카데미의 마지막 테스트처럼 1:1:1로, 상대를 모두 적으로 상정해 싸운다. 실시.”

맥이 풀렸다. 그래도 하다 보면 뭔가 코치라도 해주겠지 싶어 마음을 가다듬고 훈련에 임했다. 하지만 키이스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신경원은 30여 분간 그들의 모의 전투를 지켜보다 아무 말 없이 훈련장을 나가버렸다. 그에 라미레즈는 다시 분통을 터트렸고 로스는 미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키이스는 어땠냐 하면 그저 묵묵히, 신경원이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셋을 다 달고 가라고?”

신경원은 막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로 돌아온 세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에이전트 캐리와 맥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도 않은데 뭐 어때.”

“거리가 문제가 아니거든? 경험도 없는 애들을 데리고 가서 뭘 하라고. 무엇보다 나는―,”

“경험 없는 애들이니까 경험 쌓아줘야지. 가서 눈에 띄는 게 있으면 설명도 해주고, 아, 먼저 증거를 찾아보라고 하든가.”

“그러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내가 문제잖아, 내가!”

신경원은 신입들을 가리켰던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쿡―찔렀다. 

“너야 항상 문제였는데 이제 와서 뭔 상관이야. 아, 그게 그렇게 걸리면 네 파트너를 앞장 세워.”

에이전트 캐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는 키이스의 얼굴을 콕 짚어 가리키며 대답했다. 

“모처럼 잘생긴 얼굴을 가진 놈이 들어왔는데 써먹어야지. 아마 어지간한 트러블은 저 얼굴이랑 마법의 단어 하나만 있으면 다 해결될 거다.”

신경원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키이스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게 잘생겼다고?”

“하아―.”

에이전트 맥스가 한숨을 쉬었다. 캐리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어째 네 눈은 발전이 없냐.”

“내 눈이 뭐가 어때서! 내 시력은―,”

“누가 시력을 말했냐. 아무튼 네 미적 감각은 알아줘야 해. 발전도 없고 변화도 없고. 세상사람 전부 다~ 미남이라고 하는데도 아니라고 우기고. 어쨌든 그냥 내 말대로 클리퍼드를 앞에 세워둬. 클리퍼드 넌 무슨 말을 하든 맨 뒤에 한마디만 덧붙이면 돼.”

“……?”

“Please. 모든 트러블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단어지.”

키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단어라는 말은 좀 유치찬란하긴 했으나 Plz라는 단어가 그 자신의 얼굴과 조화를 이루면 캐리의 말마따나 어지간한 일은 부드럽게 처리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얼른 가봐. 혹시 우리가 받아야 할 사건이면 서둘러야 할 거 아냐.”

동료의 말에 신경원은 답하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빨리 따라가. 저래 봬도 발이 엄청 빠르거든.”

벌써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버린 에이전트 캐리 대신 맥스가 한마디를 흘리며 탕비실로 쏙 들어갔다. 키이스는 아무래도 뉴욕 지부의 에이전트들은 하나같이 말이 부족하거나 짧은 모양이라며 황급히 신경원의 뒤를 따랐다. 

신경원은 엘리베이터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키이스와 함께 두 신입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 곧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에 멈추었고 네 사람은 곧 관용 차량을 타고 지하도를 통해 브루클린으로 향했다. 운전은 로스가 자청해 맡았고 신경원은 뒷자리에 앉아 간단하게 브리핑을 해주었다. 

“두 시간 전에 신고가 된 일가족 살인 사건이다. 뱀파이어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소견이 있어서 확인하러 가는 건데, 현장 확인해서 뱀파이어의 소행이다 싶으면 우리가 케이스를 받아 수사해야 해. 아니면 그냥 돌아오면 되고. 전체 가족 구성원은….”

HRT 팀으로 분류되는 에이전트들은 여느 FBI 에이전트와 마찬가지로 수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각지에서 보고되는 사건을 분석해 뱀파이어를 추적하는 정보 분석팀이 따로 있긴 하지만 현장 검증이 필요할 때는 직접 나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그대로 수사를 펼치기도 한다. 때문에 그들은 전투 능력뿐 아니라 ‘수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일부에서는 고되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그들에게 수사까지 맡기는 것은 고급 인력을 무리하게 혹사시키는 일이라며 전문 수사요원들을 따로 두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의견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남긴 흔적을 찾아내는 데 있어 직접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는 에이전트들을 따라갈 만한 능력을 지닌 ‘일반’ 수사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달리 기관의 에이전트들이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게 된 것이 아니다. 

“…게 되어 있고 현장은 현재 FBI에서 통제하고 있는데, 하아―.”

말을 하다 말고 신경원은 한숨을 쉬었다. 

“도착하면 클리퍼드…가 아니라 로스 자네가 적당히, 그러니까… 특수 수사부라고 대충 우리 소개하고, 현장 확인하러 왔다고 해.”

신경원은 세 신입 중 27살로 나이가 제일 많은 로스를 지명했다. 순간 앞좌석에 앉아 있던 클리퍼드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지만 제일 뒷자리를 차지한 신경원은 보지 못했다. 

길이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 현장에는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신경원은 차에 있던 FBI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쓰며 말했다. 

“아참, 난 그냥 일반 에이전트라고 말해줘. 시니어의 ‘시’자도 꺼내지 마.”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경원은 로스의 대답을 들으며 짙은 색의 FBI 점퍼까지 차려입고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키이스는 어째서 신경원이 저런 말을 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동양인인 신경원은 틴에이저 정도로 어려 보이진 않지만 ‘시니어’ 에이전트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FBI 에이전트의 평균 나이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시니어라고 소개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얼굴이었다. 더욱이 FBI 로고가 새겨진 모자에 점퍼를 입으니 신입인 자신보다 훨씬 더 신입, 완전 애송이로 보였다. 

‘내가 문제잖아, 내가!’

적어도 자기 얼굴이 가진 문제점 하나는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네.

키이스는 신경원이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버렸다. 

앤 라미레즈 정도는 아니지만 키이스도 파트너인 신경원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상태다. 거기에 근접전투 능력을 제외한 신경원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귀찮음을 감수하고 뉴욕에 온 보람이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려는 참이었는데 자기 얼굴에 대한 문제점이나마 솔직하게 인정하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겠지만 불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로스는 제 나이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FBI 에이전트들에게 일행을 소개하자 별 문제없이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경원은 제일 뒤에서 소리 없이 따라왔는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팔짱을 끼고는 작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뱀파이어의 소행으로 보이는 증거가 있는지 살펴봐. 20분 주지.”

뭘 어떻게 보라는 설명도 없이 내려진 명령에 라미레즈는 불만스러운 태도로, 나머지 두 사람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흩어졌다. 신경원도 그들의 뒤를 따라 피해자의 사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실부터 시작해 집안 전체를 살폈다. 

브리핑 받은 그대로 일가족 6명이 살해당한 현장은 상당히 처참했다. 사방에 피가 튀어 있었는데 거실이 가장 심했다. 6명 중 4명이 거실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키이스를 포함한 신입들이 집 전체를 한 바퀴 돌고 거실에 모였다. 신경원은 어느새 과학 수사팀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거실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표정이 꽤 심각했다.

“응. 바로 처리해줘. …그래. 부검도 가능하면 우리가… 당연하지.”

신경원은 통화를 하면서 키이스들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3분 정도 후 밖으로 나온 그는 아무 말 없이 신입들을 차에 태우고는 곧장 본부로 향했다.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신경원은 회의실로 향했다. 맥스와 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현장 사진 데이터를 전해 받았는지 회의실의 전면 스크린엔 처참한 현장 사진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빨리 왔네.”

“차가 안 막히더라고.”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신경원은 슈트 상의를 벗어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더니 바로 에어컨의 온도를 내렸다.

“퍼스트, 나 감기 기운 있어.”

캐리가 태블릿 PC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투덜거렸지만 신경원은 옷을 더 껴입으라며 에어컨 온도를 올려주지 않았다. 맥스는 피해자들의 사진을 주루룩 띄워놓고는 신경원에게 물었다.

“내가 볼 때는 장녀인 안젤라 맥케인이 범인 같아 보이는데, 어때?”

“음…. 안젤라 맥케인의 친구들을 조사해줘.”

신경원의 대답에 맥스는 알겠다며 그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캐리와 신경원은 스크린에 띄운 데이터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분위기를 살폈다. 

조는 모습만 보여주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던 신경원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신경원만큼은 아니었으나 버금가게 나태해 보이던 캐리도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긴장감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두 사람의 뒤태에서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애인부터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안젤라 맥케인에게는 애인이 없어.”

캐리의 말에 신경원이 딱 잘라 말했다. 

“없다고?”

“응. 안젤라의 방 사진 좀 스크린에 띄워봐.”

“Ok.”

연노랑색의 사진들이 스크린에 가득 떠올랐다. 신경원은 오른쪽을 보라면서 말했다.

“벽 전체가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남자가 없잖아.”

“그러네.”

캐리가 스크린에 떠오른 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말해. 맥스.”

『회의실로 데이터 보냈어.』

신경원이 컴퓨터를 조작해 맥스가 보낸 데이터를 스크린에 띄웠다. 세 명의 어린 아가씨들 얼굴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마이크로 블로그를 살펴보니 그 세 아가씨들이 제일 친하게 지낸 것 같아.』

“소재 파악부터 해줘.”

『하는 중이야. 하나는… 금발 아가씨는 집에 있었고. 나머지 둘은 핸드폰은 안 받아서 집으로 연락해보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혹시 모르니까 소재 파악이 되더라도 사람 보내봐.”

『걱정 마.』

인터폰이 꺼지자 캐리가 부엌 쪽의 사진을 띄웠다.

“첫 번째 희생자는 어머니인 것 같네.”

“아마도.”

두 사람은 희생자들의 사진을 차례로 띄우곤 이리저리 확대를 해가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뒤에 신입 세 명이 나란히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키이스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진 참을 파고들었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맞다. 얘들이 있었지.”

캐리는 이마를 긁적이며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잊고 있었던 기색이 역력했다. 신경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대신 첫 번째 희생자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 띄우고는 빠른 속도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인 맥케인, 42세. 발견 장소는 보시다시피 부엌. 저 상처는 뱀파이어의 ‘이빨’에 의해 물어 뜯겼을 경우 나타나는 전형적인 형태 중 하나야. 잘 보면 머리로 올라가는 혈관, 동맥이 단번에 찢겨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때문에 벽과 천장에 이런 식의 혈흔이 남은 거지. 저 상처와 혈흔만 봐도 이 사건이 뱀파이어에 의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리고 차남인 레이튼의 경우는….”

그는 계속해서 다른 희생자들의 사진들을 보며 그들이 입은 상처가 무엇에 의한 것인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만, 일단은 모두 날카로운 무엇, 뱀파이어의 손톱으로 봐야겠지만, 어쨌든 외상을 입고 과다 출혈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피해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출혈량으로 볼 때 흡혈을 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각성 중의 뱀파이어는 ‘먹는 것’보다는 ‘사냥’ 욕구 그 자체를 더 느끼기 마련이라….”

“왜 안젤라 맥케인을 범인으로 지명한 겁니까? 다른 피해자들에 비해 외상도 적어 보이는데요.”

키이스의 질문에 신경원은 스크린에 띄운 안젤라 맥케인의 사진에서 팔 부분의 상처를 레이저 포인트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손목에는 약 5센티 정도의 상처가 있었다. 

“이건 물렸다기보다는 이빨에 긁힌 거로 짐작되는데. 저 정도로도 감염이 되는 경우도 꽤 많아. 나중에 비교할 만한 데이터를 찾아줄 테니 상처의 형태를 확인해보도록.”

키이스가 질문을 이어가자 라미레즈도 질 수 없다는 듯 발언을 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안젤라 맥케인을 범인으로 지목하긴 좀 부족해 보입니다.”

“맞아. 저 상처만 가지고는 판단하기 힘들지. 하지만 다른 희생자들과 비교를 해보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입에 핏자국이 있는 피해자가 셋인데 아버지 쪽과 여동생 쪽은 피를 토하면서 입가에 핏자국이 남았지만―아래로 흐른 게 보이지? 안젤라 맥케인의 입가에 묻은 피는 이리저리 번져 있어. 거기에 손에 묻은 핏자국, 옷에 튄 핏자국 같은 것을 보면 다른 희생자들과는 다른 걸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나중에 찬찬히 봐.”

“공범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혹은 외부에서 다른 침입자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부에서의 침입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 무엇보다 첫 번째 희생자가 ‘반항’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부엌을 봐. 요리를 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지?”

“…….”

“부엌칼이 얌전히 도마 위에 놓인 채다. 모르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집에 침입해서 눈앞에 나타났을 때, 부엌칼을 저렇게 얌전히 내려놓긴 힘들지. 바닥에 떨어뜨렸다면 몰라도. 제인 맥케인이 쓰러져 있는 위치도 부엌 한가운데가 아니라 입구 쪽이다. 이건 단순한 추측이지만…, 딸이 귀가해서 부엌에서 나와 포옹을 하다 물렸다고 봐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신경원은 단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추측이 반이었으나 다년간 경험을 쌓은 에이전트의 말이다 보니 빈틈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 캐리 역시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키이스의 입장에서는 신경원의 추측이 전부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사실 이런 타입의 일가족 참살 사건은 뱀파이어에 의한 사건들 중에 가장 흔한 형태다. 패턴도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뱀파이어에게 물린 후 완전히 각성할 때까지 최소 만 하루 정도가 걸리는데 완벽히 각성하기 전까지는 인간으로서의 ‘이지’가 남아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범인’이 귀가하기 때문이다. 물려서 뱀파이어가 되는 확률보다는 그대로 사망하는 확률이 좀 더 높긴 하지만 어쨌든 각성 후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게 ‘가족’인 경우가 많다 보니 이런 형태의 일가족 살해로 이어지기 쉬워.”

말을 듣다보니 총 본부에서 연수받을 때 배운 내용들이 소록소록 머릿속에 떠올랐다. 키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보고 듣고 외운 것인데 신경원에게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심지어 그보다 더 가볍게 스치듯 지나치며 훑어본 것뿐인데도 신경원의 눈은 많은 것을 보고, 찾아냈다. 

신경원과는 달리 신입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던 캐리는 한숨을 쉬는 키이스를 보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숨 쉴 것 없어.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우리 일은 2주간 연수받은 걸로는 절대 ‘다 배웠다’라고는 말 못해. 그래서 너희들에게 계속 ‘교육’을 받게 하는 거고. 뭐, 하다보면 나름대로의 방식이 생기고 보는 눈도 생기고 할 테니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어, 맥스. 친구들 소재 파악 다 끝났어?”

캐리는 말을 하다 말고 반짝거리는 인터폰을 연결했다. 

『서둘러야겠어. 대학 기숙사에 거주 중인 유니스 파인의 소재가 이틀 전부터 파악이 안 되고 있다.』

“내가 맡지. 데이터 보내줘.”

『알았어. 그리고 유니스 파인은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쪽은 퍼스트가 맡아야겠는데? 일단 난 바로 나간다.”

『데이터 보냈어. 남자친구 쪽도 바로 알아보고 보내지.』

캐리는 신경원에게 눈짓을 보내며 인터폰을 껐다.

“라미레즈. 따라와. 로스 자네는… 일단 맥스에게 가봐.”

“알겠습니다.”

두 신입이 먼저 자리를 떴다. 이제 회의실에 남은 것은 신경원과 키이스뿐이었다. 신경원은 치프에게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하고는 키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딱 봐도 키이스를 데려갈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키이스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아직 별 도움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동행하고 싶습니다.”

“모르겠지만이 아니라 그냥 안 돼.”

신경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맥스―. 혹시 모르니까 백업팀 좀 준비해줘.”

“오케이. 파인의 남자친구는 NYU(뉴욕대) 학생이고 그래머시 그린 기숙사에 거주 중이다. 일단 그쪽으로 가봐. 나머지 정보는 핸드폰으로 보낼게.”

 학생이고 그래머시 그린 기숙사에 거주 중이다. 일단 그쪽으로 가봐. 나머지 정보는 핸드폰으로 보낼게.”

신경원은 고개만 끄덕이고 황급히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무기는 글록하고 단검만 챙겨. 아, 이어피스도.”

“유니폼을 입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 장갑도 챙겨.”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고 본부에서 뛰쳐나갔다. 운전은 키이스가 맡았다. 본부 지하 주차장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지하도를 따라 빠져나온 차는 곧장 그래머시 그린으로 향했으나 퇴근 시간이어서 그런지 차가 엄청 막혔다. 신경원은 그 사이 핸드폰으로 전송되어 온 데이터를 살피고 먼저 나간 캐리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키이스는 신호등에 걸려 잠시 정차가 되자 신경원의 핸드폰을 슬쩍 훔쳐보며 물었다. 

“이렇게 무작정 나가도 되는 겁니까?”

“무작정 나가는 것 같아?”

“조금은요.”

“정보 분석팀에서 CCTV 데이터를 뒤지기 시작했어. 곧 범인들의 흔적을 찾아서 지역을 특정 지어줄 거야.”

“아―.”

“물론 뱀파이어로 완전히 각성했을 경우, 거주지 근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가능성도 크지만…, 잠깐. ―뭐라고?”

신경원이 귀에 낀 이어피스를 꾹 누르며 물었다. 키이스의 귀에도 맥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인의 남자친구인 토머스 릴로 추정되는 시신이 오늘 아침 브롱크스에서 발견됐어.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았지만 일단 얼굴을 봐서는 그가 맞아. 그제까지는 학교에 정상적으로 출석했고 어제는 아침에 기숙사에서 나간 게 CCTV 영상으로 확인되었는데….』

“그럼 유니스 파인이 감염원일 가능성이 좀 더 커지는데?”

『아무래도. 하지만 혹시나 몰라서 분석팀쪽에 그래머시 기숙사에 거주 중인 학생들 소재를 파악해달라고 요청했어.』

“유니스 파인 쪽은?”

『이틀 전의 흔적을 찾아서 지금 계속 추적 중. 본가는 보스턴인데 다행히 그쪽으로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여.』

“확인된 주소 있으면 보내줘. 일단 그쪽으로 향하고 있을 테니까.”

통신이 끊어지자마자 신경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하지만 꽉 막힌 길 때문에 곧장 차를 돌리긴 힘들었다. 간신히 기숙사 쪽으로 차를 돌릴 무렵 다시 통신이 들어왔다. 

“찾았어?”

『브롱크스 쪽의 필레밍이라는 클럽. 아직 문도 안 연 상태인데 어젯밤 11시경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 아직 밖으로 나온 흔적이 없어.』

“차가 막혀서 우리는 시간 내로 도착하기 힘들어. 그쪽에서 호출에 응할 만한 에이전트는?”

『없어. 다행히 캐리가 프리웨이를 탔고 25분쯤 걸린대. 본부에서는 SWAT 팀을 헬기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고 3분 후면 출발해. 말론이랑 브라이튼, 그리고 대니얼 팀이 갈 테니 넌 본부로 돌아와.』

“알았어. 아참, 네가 가르쳐준 유니스 파인의 마이크로 블로그랑 SNS를 보니까….”

『응? 뭔가 참고할 거라도 있어?』

“40일 전 정도부터 ‘낮’ 시간에 올린 게 없어.”

『헛. 시간까지는 체크 못 했었는데.』

“최소 B2, 어쩌면 B1일 수도 있어. 조심하라고 해.”

『알았어. 바로 전할게.』

“수고해.”

뚝 하고 통신이 끊어졌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신경원은 시트에 등을 기대더니 하아―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와 함께 ‘긴장’이라 불러야 할 것이 신경원의 몸에서 흘러나와 공기 중에 흩어진다.

“들었지?”

“네.”

키이스는 바로 왼쪽 라이트를 켰다. 마침 교차로였고 본부로 향하는 서쪽 지하도 입구가 근처에 있었다. 차가 엄청나게 막히긴 했지만 20여분 정도면 본부에 도착할 지점이었고 두 사람은 예정보다 10분을 더 넘겨 30분 후 본부에 도착했다. 

신경원은 마치 김이 빠진 콜라처럼 축 어깨를 늘어뜨린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그대로 키이스를 데리고 상황실로 갔다. 

“보는 것도 공부야. 무엇보다 유니스 파인이 B1인 경우, 올해 처음으로 발견된 상급 블러드서커란 소리가 되는데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지켜보고 듣고, 아무튼 작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자리 비우지 마.”

그 말을 마친 신경원은 키이스가 알겠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왕이면 옆에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면 좋으련만 키이스의 파트너는 야속했다. 

키이스는 신경원의 말대로 착실히 자리를 지키며 작전 상황을 지켜보았다. 현장 지휘는 또 다른 시니어 에이전트인 말론이 맡았다. 헬기로 도착한 SWAT 팀이 자리를 잡기 전 평상복 차림의 에이전트들이 클럽에 투입되었다. 투입된 인원이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현장 상황은 모조리 사운드 온리로 중계되었다. 

작전은 급박하게, 그러면서도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수년간 손발을 맞춰온 에이전트들은 개장 준비 중인 클럽에서 수색을 펼쳤고 어두운 룸에 틀어박혀 있던 ‘범인’ 유니스 파인을 빠르게 찾아냈다. 

키이스는 현장에서 전해져오는 전투 실황을 들으며 자신의 파트너, 신경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사가 풀린 듯 나태하기만 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달라져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한 것들을―예를 들면 안젤라 맥케인의 방에 붙어 있던 사진 같은―집어내며 수사를 진행시켜나갔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동안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는 목을 돌리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신경원에게 실망하는 건 아직 많이 이르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실망하는 건 이르다―라는 생각 자체를 지워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 교육 태도가 좀 나쁘면 어때.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닌걸.

기껏해야 두 시간 정도였으나 어쨌거나 신경원의 본모습을 보았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단박에 제압하던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의구심이 피어오르던 신경원의 ‘능력’에 대한 기대가 다시금 새롭게 피어오른다.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보고를 해오는 에이전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하루라도 빨리 신경원이 뱀파이어들과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퍼스트는 도대체 몇 살인 거지?

FBI 로고가 박힌 모자를 쓰니 평소보다 더 어려 보이던 신경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쩔 때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니어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 이십대 후반은 되어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다. 거기에 또 하나, 자신을 바라보며 ‘저게 잘생겼다고?’라고 되물은 이유도 궁금해진다. 

이래 봬도 얼굴엔 좀… 많이 자신이 있는데 말이야.

키이스는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발전도 없고 변화도 없는 미적 감각이란 게 도대체 뭔지, 누구에게 물어야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궁금증 하나가 둘이 되고 곧 셋이 된다. 더 늘어날 기미도 보인다. 하지만 역시 제일 궁금한 것은, 보고 싶은 것은,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신경원의 모습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분명 자신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켜줄 것 같다. 

빨리. 하루라도 빨리.

키이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무리되어가는 작전 상황을 고스란히 귀를 통해 머리에 담았다. 그 사이에도 궁금증은 계속 숫자를 늘려가고 있었다. 

귓가에 유니스 파인을 사살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그녀의 최종 등급은 B2. 같은 장소에서 사살된 뱀파이어들은 모두 B3였다.

키이스는 잠시 딴생각을 했던 자신을 탓하며 계속해서 들려오는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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