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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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 쇼크shell shock는 전쟁신경증의 한 형태다. 병사가 전투라는 준엄한 상황 하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는 한계까지 도달해버렸을 때, 심한 불안상태가 되어 전투능력을 잃은 상태를 말한다. 증상은 불면, 신경과민, 떨림, 실신 등으로 나타나고 대부분의 경우 휴식을 취하면 회복한다. 

PTSD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데, 셸 쇼크에 비한다면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이다. 

신경원이 몸담고 있는 ‘기관’의 에이전트 대부분은 셸 쇼크와 PTSD를 비롯해 여러 가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 물론 정도가 심해 일상생활 및 업무 수행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에이전트는 없다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다. 

신경원의 경우는 PTSD 증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나 경미한 정도였다. 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과다하게 쌓이면 아주 가끔, 악몽을 꾸거나 약간의 불면증에 시달리는 정도다. 

그런 이유로 신경원은 동료들로부터 신경이 밧줄처럼 튼튼한 놈, 무던한 놈, 혹은 멘탈 깡패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동료들이 뭐라 하든 신경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으쓱할 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동료들 역시 그에 버금가거나 그보다 더한 멘탈 깡패인 경우가 수두룩했다. 멘탈 깡패가 되지 못하면 버틸 수가 없는―‘괴물’을 사냥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눈 밑이 시커멓게 죽은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경원의 파트너인 마틴이었다. 그는 사무실 밖 의자에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신경원을 발견하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신경원은 마틴의 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은 지금도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틴은 떨리는 제 손을 서로 마주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퍼스트.”

신경원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괜찮아.”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 마틴. 애초에 멀쩡하게 버티는 놈들 쪽이 이상한 건데 뭐. 네 쪽이 정상이야. 너무 고민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푹 쉬어. 금방 회복될 거다.”

“감사… 합니다.”

신경원은 대답 대신 마틴의 어깨를 꽉 쥐어주었다. 그때 안에서 신경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은 알겠다는 대답을 하며 앞에 선 마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신경원의 손을 마주 잡았다. 신경원은 손을 잡은 팔을 당겨 마틴을 딱 한번 꽉 끌어안아주었다. 

“연락해. 그럴 마음이 생기면.”

마틴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신경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틴이 자신에게, 혹은 다른 동료들에게 연락할 확률은 거의가 아니라 완벽하게 0%라는 사실을.

“가봐.”

“네. 또… 뵙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마틴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신경원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앉지.”

치프는 서늘한 목소리로 신경원에게 자리를 권했다.

“결정은 거의 났지만 자네 의견이 필요해 불렀네.”

“결정에 동의합니다.”

신경원은 작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치프는 그런 신경원의 행동에 익숙한지 별다른 주의는 주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파트너의 소견이 필요하다는 거 알고 있잖나.”

에휴―. 신경원은 투덜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임무 수행 중에 쇼크에 빠져 저를 포함해 3명의 에이전트가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작전 종료 후 벌써 2주가 지났는데도 쇼크 증상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틴 생스트에게는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마틴 생스트는 작전 중 민간인 사상자를 낸 후 2주 만에 복귀했었다. 그의 담당 정신과의는 일단 복귀해도 좋다는 진단을 내렸으나 당분간 주의를 해야 할 거라고 했다. 마틴은 이후 두 번의 작전에 나가 그럭저럭 건재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세 번째 출동에서 발작을 일으켰다.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면 백업팀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을 테지만 셸 쇼크 증상이 너무 심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완전히 회복되어 복귀를 희망한다면?”

“거부권이 주어진다면 강력히 거부할 겁니다. 설사 복귀한다 해도 파트너로는 두 번 다시 함께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치프를 보고 신경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아―.”

치프의 허락에 부리나케 문손잡이를 잡던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그럼 전 당분간 파트너, 없는 거죠?”

“일단은.”

“그거 당분간이 아니라 계속이면 안 되는 겁니까? 혼자 다니는 편이 훨씬 편한데요.”

“신, 기본적으로―,”

“둘인 거 알죠. 하지만 조금 쓸 만하다 싶을 정도로 가르쳐놓기만 하면 매번 이렇게 되잖습니까. 솔직히 말해 힘듭니다.”

“귀찮은 게 아니고?”

신경원은 대답 대신 헤헤, 하고 채신머리없이 웃었다. 치프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쉴 뿐,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것을 무언의 승낙으로 해석하기로 한 신경원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러자 난간 너머 아래층에 있던 동료들 몇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신경원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생스트의 퇴직이 결정되었다는 의미로. 

동료들이 역시 그렇구나 하며 무척이나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송별회를 열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신입의 평균 잔류 퍼센트가 10%도 되지 않는데다 그만두는 놈들 대부분이 반년도 버티지 못하고 퇴직해버리는 형편인지라 당연한 일이었다. 송별회는 최소 1년은 버티고 나가야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일은 보통의 평범한 신경줄을 가지고는 오래 할 수 없다. 신경원을 비롯해 아래층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동료들처럼 PTSD 및 우울증과 각종 신경증 또는 분노 조절 장애 등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멘탈 깡패가 아니고서는 오래 버티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층에 있는 놈들은, 좀 과장해서 한 놈도 빼지 않고 죄다 제정신들이 아니다. 

신경원은 이미 헝클어져 있는 머리를 또다시 헝클어트렸다. 마틴이 민간인 사상자를 냈을 때 이미 이런 결과를 예감했기에 충격이 그렇게 큰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착잡한 기분이 피곤한 몸을 휘감았다. 

입사하여 처음 파트너가 되었던 사람 이외에는 6개월 이상 버틴 파트너가 없었다. 제일 짧았던 놈은 1개월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었다. 적응 잘하라고 나름 열심히 챙기고 도와줘도, 너무 챙긴 것이 오히려 실수였나 싶어 데면데면 굴어봐도 결과는 항상 같았다. 

계속 그랬기에 6개월을 채우기 전엔 정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동고동락하며 사선을 넘나드는 일을 하니 절로 정이 들고 만다. 때문에 마음이 정말로 좋지 않다. 솔직히 말해 시궁창에 얼굴부터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이제 신참이고 뭐고 파트너 따위 필요 없어….”

그는 구시렁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올해로 경력 5년차의 신경원은 통산 8번째, 그리고 새 파트너를 맞은 지 6개월 만에 다시,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솔로가 되었다. 

* * *

“어이, 퍼스트.”

신경원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하지만 깊게 잠든 게 아닌 터라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란 소리는 모조리 귓바퀴를 맴돌다 쏙쏙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퍼스트.”

작은 목소리로 다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원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도대체 누가 꿀맛 같은 낮잠을 방해하는 건지 싶어 고개를 슬쩍 든 그의 눈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치프, 예들린의 얼굴이 보였다.

신경원은 혹 침이라도 흘렸을까 봐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만 잘하면 사무실 내에서는 무슨 짓을 하든 너그럽게 봐주는 상사다. 하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걸 정통으로 들키니 좀 멋쩍었다. 예들린은 배시시 웃는 신경원을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정신 못 차리고 졸아대는 꼴을 보아 하니 또 차인 모양이군.”

큭―. 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대부분 신경원과 함께 근무한 지 연수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나.”

“전 잘했거든요? 데이트하려고만 하면 호출한 게 누군데.”

“그런 일이 있어도 안 차이게 잘해야지.”

“잘해주려고 해도 시간이 없었거든요?”

요 3개월간 정말로 바빴다. 데이트는커녕, 헌팅을 시도하러 갈 새도 없었다. 뉴욕 지부 전체가 벌집이라도 들쑤신 듯 완전 난리법석 몸살을 앓았다. 가을이 다가오며 ‘괴물’의 발생 빈도가 떨어지고 나서야 낮에 사무실 의자에 앉아 짧은 오수라도 청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도 이제 겨우 사흘째다.

“듣자하니 자네 헌팅 성공률이 100%라며. 다음엔 잘해봐.”

“비번일 때 확실히 쉬게 해주시면 그러죠.”

신경원은 현재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솔로가 된 지 대충 석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치프인 예들린은 보통 위층에서 거의 내려오지 않는다. 에이전트들에게 볼일이 있으면 주로 위로 불러올린다. 그런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는 건 평소와는 다른 일이 있다는 의미다. 

“사물함에 슈트 있지?”

“있습니다만, 퇴근할 때 다 됐는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신경원은 벽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오전 8시 32분이었다.

“옷 갈아입고 간단하게 짐 싸서 10분 후에 옥상으로 올라와. 일정은 1박 2일이다.”

“어딜 가는데요.”

“가보면 알아. 얼른 준비하고 올라와라.”

치프는 그 말을 마치고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주변을 둘러보며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내봤지만 다들 어깨만 으쓱일 뿐이다. 신경원은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헬기 한 대와 다른 유닛의 에이전트 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이전에 한동안 파트너로 지낸 알렌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여~, 퍼스트. 또 차였다며?”

“씨이―, 입도 참 가벼우시지.”

신경원은 이미 헬기에 탑승해 있는 예들린을 흘겨보았다. 

“얼른 타라.”

“무슨 일인지 아세요?”

“일단 타.”

알렌은 버티는 신경원의 등을 밀어 헬기에 태웠다. 헤드기어를 쓰기 무섭게 그는 예들린에게 물었다.

“왜 연행당하는 기분이 드는 거죠?”

예들린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씨익 웃었다. 어째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표정이라며 신경원은 입술을 삐죽였다. 곧장 헬기가 옥상을 벗어났다. 한창 꾸벅꾸벅 졸다 끌려나온 신경원은 낯선 에이전트와 통성명만 하고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경으로 그냥 눈을 감았다. 요즘 정말이지 잠이 많이 부족했다. 

헤드기어를 써도 머리통 전체를 울리는 소음에도 신경원은 잘도 졸았다. 그렇게 졸다 눈을 떠보니 알렌이 그의 머리에서 헤드기어를 벗기고 있었다. 

신경원은 멍한 표정으로 헬기에서 내렸다. 앞에 어디서 많이 보던 디자인의, 대놓고 FBI라는 티를 팍팍 내는 검은색 4륜구동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딜 가는 겁니까?”

이번에도 예들린은 금방 대답을 해주지 않고 그냥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껄끄러운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알렌은 치프를 노려보는 신경원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이미 눈치 다 깠으면서 뭘 그렇게 캐물어, 퍼스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다들 그렇게 부르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알렌이 그렇게 부르면 놀리는 거 같거든요?”

알렌은 신경원의 첫 파트너이자 사수였으며 경력 8년차의 베테랑이었다. 신경원은 그와 1년 반을 꼬박 함께 일했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사근사근한 성격을 가진 그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신경원을 다독이며 일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신경원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술을 삐죽이며 삐친 표정을 하자 알렌은 사람 좋게 웃으며 신경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10살이나 위인데다 스승과도 같은 사람인지라 얌전히 머리를 내줬다. 

그사이 그들이 탑승한 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40마일 정도를 달리자 148번 출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들은 알렌의 말대로 신경원이 눈치 깐 그대로의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양쪽으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길을 신나게 달리자 커다란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검문소가 나타났다. 그곳을 지나자 시뻘건 바탕에 Danger라는 샛노란 글씨가 적힌 자극적인 입간판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허가 없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면 즉각 체포한다.’라는 경고문도 보였다. 곧이어 커다란 돌에 새긴 ‘FBI Academy’ 표지가 나타났다. 지명으로 말하자면 버지니아 주의 콴티코. FBI가 등장하는 영화며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바로 그곳이었다.

초행은 아니다. 기관의 모든 에이전트가 그렇듯 신경원도 5년 전에 이곳에서 머물며 교육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뒤로는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FBI Academy’라는 표지가 낯설게 여겨졌다.

신경원은 FBI의 HRT 유니폼을 입고 일하고 있고 FBI 신분증을 가지고 있으며 FBI 에이전트들이 받는 급료를 똑같이 받고 있다. 즉 공식적으로는 분명 FBI 에이전트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 신분’에 가까웠다. 그가 실제 몸담고 있는 ‘기관’은 FBI가 아닌 Paranormal Crime Investigation(초자연적 범죄 수사국)이라는,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특수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Paranormal Crime Investigation은 FBI와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그와는 별개의 수사권과 집행권을 가진 독립된 국가기관이다. 약칭은 PCI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VI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수사하고 형을 집행하는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괴물 혹은 초자연적 생명체, 즉 ‘뱀파이어’라 불리는 존재인 까닭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뱀파이어는 브람 스토커의 소설에 나오는 마늘과 십자가, 그리고 해를 두려워하는 환상 속의 존재다. 때문에 뱀파이어는 소설이며 만화 영화 등에서 종종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현실의 뱀파이어는 ‘괴물’, 몬스터 그 자체나 다름없다. 물론 만화며 소설에 나오는 진조니 순혈이니 하는 부류의 상위급 뱀파이어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원과 같이 뱀파이어 사냥, 혹은 퇴치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의 에이전트들에게 있어 그들은 단순한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의 정부가 그러했다. 소설이나 만화,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와는 달리 현실의 뱀파이어는 죄다 피에 굶주린 괴물이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때문에 VI는 정식 명칭과 약칭이 있음에도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VI라는 약칭도 입에 담는 이가 드물고 그냥 ‘기관’이라고만 불렸다.

기관의 그 어떤 서류에도 VI나 Paranormal Crime Investigation이라는 공식 명칭이 인쇄되어 있지 않다. 모든 서류에는 FBI 마크가 찍혀 있고 기관에 소속된 모든 에이전트들은 FBI 정식 신분증을 발급받았으며 작전에 임할 때도 FBI SWAT이나 신경원이 그러한 것처럼 HRT의 유니폼을 입었다. VI라는 기관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특수기관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에이전트들은 자신들을 그냥 FBI 에이전트라 여겼다. 신경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VI는 결코 FBI 산하 기관이 아니며 상위 기관이라고 말하기엔 약간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나 특정 부분에서는 FBI는 물론이요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진 어떠한 국가기관도 터치할 수 없는, 특수한 상위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까닭에 VI 기관은 상황에 따라 FBI와 경찰, 군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지원을 무조건적으로 받을 수 있었고 각 국가기관의 에이전트들 중 VI에 걸맞은 인재가 있다면 무조건 스카우트 해올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FBI는 기관과 가장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기관 자체가 FBI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기관의 모든 에이전트들은 FBI의 에이전트들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으로는 이곳, 버지니아의 콴티코에 위치한 FBI 아카데미에서 18주짜리 훈련을 받고 시험에 통과해야만 정식으로 채용된다. 신경원도 그러했다.

“도대체 왜 절 여기까지 끌고 오셨어요?”

“자네도 이제 시니어니 이런 것도 해봐야지.”

“그거 물리고 싶은데요.”

“연봉 오른다는 말에 반색했던 것 같은데 왜?”

“얼마 되지도 않던데 깎아도 좋으니까 강등시켜주십쇼. 귀찮아요.”

“그런 이유라면 각하.”

“에이씨―.”

치프인 예들린과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하는 사이, 차는 연구 센터 앞에 도착했다. 대외 관계 담당이라는 스페셜 에이전트가 그들을 맞았다. 그들은 곧장 브리핑 룸으로 안내되었다. 

예들린이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 동안 신경원은 그냥 잠자코 앉아 있었다. 1시간쯤 걸린 회의를 마치자 예들린이 두툼한 서류철을 신경원을 비롯한 에이전트들에게 나눠주었다. 

“현재 훈련을 받고 있는 훈련생들의 프로필이다. 틈나는 대로 읽어보면서 훈련 중인 놈들을 살펴보고 괜찮은 녀석들이 있나 잘 살펴보도록. 특히 신―.”

“네?”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으면 콱 찍어. 특별히 네 파트너로 배치해줄 테니까.”

“전 혼자로도 충분한데요?”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의자를 침대로 알고 있는 주제에.”

알렌이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흔한 로테이션도 없이 한 곳에서 오래 일했더니 프라이버시 따위는 강 건너 가버린 지 오래다. 

“졸려서 제대로 못 봤느니 하며 헛수작 하지 말고 반드시 한 놈 콱! 찍어. 알겠나?”

“칫―.”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사람이 들어왔다. 숙소를 안내해주겠다는 말에 따라가 속옷만 든 짐을 내려놓았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탁자 위에는 ID 카드를 끼워 넣을 수 있는 네임태그 목걸이가 있었다. 

“잠시 쉬다가 1시에 식당으로 내려와. 식사 후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것들 좀 보러 가자고.”

예들린의 말에 신경원은 곧장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몸부림을 치다가 1시가 되기도 전에 서류철을 들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엔 이미 알렌이 내려와 있었다.

“좀 쉬다 나오지?”

“침대에 누워 있었더니 오히려 잠이 안 오더라고요.”

“쯧―.”

알렌은 혀를 차며 서류를 살피다 불쑥 물었다.

“여름 내내 혼자였지?”

“뭐….”

“고생했겠네.”

“고생은요. 아까도 말했지만 혼자 다니니 신경 쓸 일이 없어 훨씬 좋더라고요.”

“네 실력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래도 등 뒤를 지켜줄 녀석은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알렌도 기관의 사정, 즉 남아나는 신입이 얼마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잘할 수 있다고 외치던 놈들이 반년도 안 돼 눈 밑이 시커멓게 죽고 별의별 신경증에 PTSD, 우울증, 공황장애 등에 걸려 기관을 나간다. 

열에 아홉이 그렇다 보니 기관은 언제나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덕분에 기존의 에이전트들은 항상 과로 상태다. 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신입들에 대해 나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 괴물,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는 괴물이고 바이러스처럼 인간을 감염시켜 동족을 만들고 인간을 먹이로 삼는다. 그런 괴물을 사냥하고 죽이는 건 당연하다. 죽이지 않으면 이쪽이 죽어나가니까. 좀 거창하지만 ‘인류의 생존’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있기에 기관의 에이전트들은 모두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럼에도 버텨내는 신입이 적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태를 가진 괴물이다. 흉측한 송곳니에 날카로운 손톱을 가지고는 있으나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등 기본은 인간과 다를 게 없다. 무엇보다 그들은 뱀파이어가 되기 전엔 인간이었다. 

즉, 기관의 에이전트들은 괴물을 퇴치할 때 시각적으로는 ‘인간’, 자신과 같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죽이지 않으면 제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그들에 의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동료가 있으며 피를 빨려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보게 되지만 계속하다 보면 인간을, 한때는 자신들과 똑같이 숨 쉬고 생활하던 평범한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심리적 부담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부담감은 어떻게 견디더라도 생태계 최고 포식자라 불리는 인간을 ‘먹이’로 삼는 이종 생명체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떨쳐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숙련된 베테랑이라 해도 아차 하는 사이에 다치고 목숨을 잃고 정말 운 나쁘고 재수가 없으면 물려서 그들이 사냥하던 뱀파이어가 될 위험에 상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이 그 모양이니 스트레스를 받는 게 당연하고 셸 쇼크며 PTSD 장애가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공포를 느끼지 않고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수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VI 소속의 에이전트들이 경중은 있으나 전부 제정신이 아닌 이유가 그거다. 

“이번엔 멘탈이 든든한 놈들이 좀 많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엘런의 말에 신경원은 건성으로 서류철을 뒤적이며 답했다. 

“그러게요.”

“해병대 출신이 꽤 많아. 해외 파병을 갔다 온 놈들도 많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해외 파병을 다녀온 놈들 중에는 임무로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 놈이 더러 있다. 그에 대한 부담감을 떨칠 수 있는 자라면 기관의 에이전트로는 아주 적격이다. 실제로 현직 에이전트는 해병대를 비롯한 특수부대 출신이 꽤 많았다.

신경원은 뚱한 표정으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귀찮음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파트너를 고를 생각도 없었지만 끌려온 이상 몇 명 정도는 괜찮다는 딱지를 붙여줘야 예들린의 구박을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건성으로나마 서류를 보는 사이 두 사람이 내려왔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후에도 그 자리에서 계속, 서류를 살폈다. 

“어디 가?”

“밥 먹고 계속 앉아 있었더니 소화가 안 돼서요.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이봐, 서류는 가져가.”

답답한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같은 유닛이 된 적이 없었던 에이전트, 마크가 서류철을 챙겨줬다.

“다 봤습니다.”

“대충 본 거 다 알아. 받아.”

“그냥 두게.”

예들린은 마크의 손에 들린 서류철을 다시 식당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가서 광합성만 하지 말고 돌아다니면서 쓸 만한 놈이 있나 찾아봐.”

“네네~.”

신경원은 슈트 하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휘적휘적 식당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마크가 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예들린에게 말했다.

“완전 건성인데요.”

“그랬지.”

예들린은 휘하의 에이전트들에게는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유한 사람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뉴욕이 아닌 콴티코에서, 새로운 에이전트를 뽑아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된 상황에서까지 그러니 마크로서는 좀 이해가 안 되었다. 마크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예들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건성건성 대충 봤으니 이제야 나간 거라네. 제대로 했으면 10분도 안 돼서 자리 털고 일어났을걸.” 

“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마크에게 이번엔 알렌이 바통을 이어받아 말했다.

“매사 대충대충, 건성건성, 아무데나 머리만 닿으면 꾸벅꾸벅 졸아대는 녀석이긴 하지만 저래 봬도 22살에 의대를 졸업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이야. 이쪽으로 올 때도 필기는 만점이었지. 건성건성 보는 것 같았어도 이 정도 서류는 마침표 하나까지 전부 외웠을걸?”

“22살에 의대를 졸업했다고요? 그런 사람이 왜 기관에….”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물어. 알 만한 사람이. 아무튼 건성건성 하는 놈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으면 그거나 얼른 봐.”

알렌은 제 손에 들린 서류를 툭툭 치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예들린이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휘었다.

“흐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도 계속 저러고 다니면 좀 그렇겠지?”

“우리야 사정을 아니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도 그러면 아무래도 좀, 체면 깎이겠죠.”

“그래. 내 체면뿐 아니라 뉴욕 지부의 체면에도 좀 문제가 있을 거야.”

예들린은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입을 끌어당겨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다.

“치프. 지금 얼굴 진짜 사악해 보이시는 거 아시죠?”

알렌은 또 시작되었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예들린은 계속 웃기만 했다.

* * *

도대체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데!

신경원은 부루퉁한 얼굴로 심사관석에 앉아 있는 상관을 노려보았다. 신경원과 시선이 마주친 예들린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들의 뒤에 앉아 있는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아 침대를 구르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었던 신경원을 두들겨 깨운 사람은 다름 아닌 치프 예들린이었다. 예들린은 그를 깨운 후 곧바로 욕실에 처넣었다. 그러곤 곧장 식당으로 끌고 가 아침을 먹였다. 그곳에서 신경원은 하마터면 억지로 먹고 있던 스콘을 잼과 함께 상관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예들린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자네 요즘 너무 나태해졌어. 훈련생들이랑 최종 테스트 받으면서 초심 좀 찾아보게.”

평소 근무 태도가 나태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걸로 언제 문제라도 일으킨 적이 있냐고 반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여름 시즌 동안 그가 기록한 킬마크가 몇인지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러시냐고 매달려도 봤지만 효과는 제로였다. 

되레 예들린은 현직 에이전트의 체면이 있으니 성적이 나쁘면 곤란할 거라고, 매우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질 거라며 평소에 안 하던 협박까지 해왔다. 성적이 좋으면 ‘다소’ 나태한 태도를 보여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적당히 봐줄 테니 잘해보라는 말까지 했다. 단, 너무 눈에 띄면 곤란하니 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했다.

군대는 아니지만 조직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상관이 까라면 까야 하는 법인지라 신경원은 결국 훈련생들과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최종 테스트에 ‘훈련생’의 신분으로 참가해야 했다. 예들린은 섹션 치프인 동시에 뉴욕 지부의 부부장이었던 터라 신경원을 훈련생 사이에 ‘특별 심사대상’으로 끼워 넣는 것 정도는 껌 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신경원은 밥 먹은 게 소화되기도 전에 질질 끌려가 테스트를 받았다. 늦잠을 잔 탓에 몸 풀 시간도 없었다. 

상관의 변덕으로 인해 날벼락을 맞은 신경원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1차 야외 사격 테스트에서 정확하게 85%의 명중률을 기록해 아슬아슬하게 합격 기준점을 통과했다. 맨 마지막 번호인데다가 뒤늦게 사격장에 도착했기에 2명의 훈련생이 탈락한 것을 보고 일부러 그런 점수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1차에서 꼴등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한 신경원은 2차에서는 상위 30% 정도의 성적을 냈다. 2차 실내 사격 테스트에 들어가기 전 누군가 그에게 종이쪽지를 쥐어주고 갔는데 거기엔 ‘제대로 안 할래?’라는 말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들린의 필체였다.

상관의 협박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말마따나 현직 에이전트라는 체면도 무시할 수 없어 대충 상위권에 진입한 신경원은 이제 마지막 3차, CQB(Close Quarter Battle: 근접전투) 테스트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3차 실전 테스트는 근접전투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라 장소는 체육관이었다.

신경원은 몸을 풀고 있는 훈련생들을 멍하니 보다 시선을 돌렸다. 농구 코트가 3면이나 들어가는 넓은 체육관 한쪽에 큰 매트가 두 장이나 깔려 있었다. 신경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방식이 바뀌었나 싶었다. 이전에는 훈련 교관을 상대로 1:1 모의 전투를 했기 때문에 매트가 하나뿐이었다.

무슨 상관이람.

신경원은 이번에도 대충 상위 30% 정도에만 들자는 생각을 하며 대충 몸을 풀기 시작했다. 테스트는 계속 그래왔던 대로 번호순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6명이나 되는 훈련생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 가벼운 보호구를 입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몸을 풀다 말고 매트당 3명씩 올라가는 훈련생들을 바라보며 하품을 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식곤증이 몰려왔다. 

매트로 올라간 훈련생들이 신호에 맞춰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1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1:1:1의 전투였다. 신경원은 생리적으로 스며 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방법이다 싶었다. 작전에 나가면 간혹 저런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었다. 

심사관들이 머리를 좀 썼나 보다 하며 신경원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번호가 뒤인 훈련생들 몇도 자리를 잡고 앉아 테스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으으. 졸려.

맹세하지만 졸기 위해 앉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식곤증이 너무 어마어마하게 몰려왔다. 그리고 신경원에겐 식곤증의 힘을 빌어 낮잠을 자던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훈련생들과는 달리 긴장 따위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고 있던 탓에 그만, 졸아버리고 말았다. 

“87번! 87번―!”

언제나처럼 주변의 소리를 있는 대로 주워들으며 졸고 있던 신경원의 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누군데 심사관이 번호를 부르는데도 미적거리고 있나 싶었는데 갑자기 자신의 번호가 귀를 파고들었다.

“87번! 어디 있나!”

누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담.

신경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반쯤 떴다. 누군가 신경원의 어깨를 툭 치더니 ‘여기 있습니다!’라면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어―하는 사이 신경원은 앞으로 밀려나갔고 얼결에 보호 장구를 입고 머리 보호대를 썼다. 손에는 고무날이 달린 단검이 쥐어졌다.

그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매트에 올랐다. 잠이 덜 깨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아 시야가 뿌옇게 보였다. 뭘 어쩌라는 거지? 하는데 삐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허여멀건 얼굴 두 개가 신경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경원은 반사적으로 그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가 저도 모르게 팔을 휘둘렀다. 팔에 찬 보호구가 상대의 것과 맞부딪히며 퍼억 소리가 났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딪힌 곳에서부터 긴장감이 일어 순식간에 뇌를 깨웠다. 

씨발, 이게 뭐야!

한창 맛나게 졸고 있는데 끌려 나와서 대뜸 두들겨 맞으니 성질이 났다. 덕분에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긴급 출동을 했다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덥고 좁아터진 차 안에서 1시간이나 대기를 해야 했던 때가 떠올랐다. 

당연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신나게 졸았다. 그리고 자다 말고 끌려 나가서 때마침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미친 괴물들을 상대로 무려 3시간이나 논스톱으로 싸운 끝에 감기 몸살에 피로가 겹쳐 내리 사흘을 끙끙거리며 앓아야 했다.

갑자기 끌려 나가 얻어맞는 건 질색이라고! 짜증 나는 기억 좀 불러일으키지 말란 말이다!

신경원은 오른손에 잡고 있던 단검을 왼손으로 토스하며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놈을 걷어차고 왼손을 휘둘러 근육으로 가득한 상대의 가슴에 정확하게 단검을 찔러 넣었다. 삐익―하는 호각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든 말든 신경원은 곧장 오른쪽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에게 걷어차여 뒤로 한 바퀴 굴러갔던 놈은 어느새 일어나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경원에게는 그저 우습게만 보였다.

신경원은 상대의 공격을 피해 바닥을 구르며 왼쪽 놈이 놓친 단검을 잽싸게 주웠다. 오른손에는 단검보다는 글록이 좋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몸을 구부린 신경원에게 훈련생이 달려들었다.

그는 몸을 뒤집는 것과 동시에 왼쪽 다리를 뻗었다. 뻐억 소리와 함께 훈련생이 나뒹굴었다. 신경원은 그대로 앞으로 한 바퀴를 굴러 상대에게 빠르게 접근했고 상대가 일어서기도 전에 그의 가슴과 목에 동시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크윽!”

목에도 보호대를 차고 있긴 했으나 충격이 컸는지 상대의 눈이 뒤집히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진짜로 제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힘을 좀 뺐어야 했는데.

한발 늦게 삐익―하는 호각 소리가 들렸다. 신경원은 저도 모르게 두 개의 고무 단검을 손에서 내려놓고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상관, 예들린이 있는 쪽으로 살짝 시선을 돌렸다. 졸다가 끌려나오는 것을 봤으니 분명 화를 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22초 83…입니다.”

훈련 교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젠장, 1등이잖아. 

졸면서도 주변의 소리를 죄다 주워듣고 있던 신경원은 뻘쭘한 표정을 한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속으로 끙―하고 신음을 뱉었다. 86명이나 되는 훈련생이 전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22초 83에 그런 표정 지으면 니들 수준도 참, 걱정된다. 

그가 나서기 전 1등의 기록이 48초 32이었다. 아마도 27번이 기록했던 것 같다. 졸다가 끌려나온 것만 아니었으면 적당히 시간을 끌었을 텐데 실수했다. 

이걸 어쩌나 싶은 동시에 자존심이 좀 상했다. 제대로 했다면 22초가 무언가, 10초 내로 두 놈을 기절시키지도 않고 적당히 처리했을 것이다.

신경원은 구시렁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보호구를 그대로 착용한 채 앉은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정말 가지가지 쪽팔린 짓만 한다면서 보호구를 벗은 그는 주변의 시선에도 꿋꿋하게 앞만,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는 상관만 바라봤다.

“속행하겠습니다. 86번은… 일단 두고, 42번, 21번.”

또 뭘 하는 건가 싶어 신경원은 눈알을 굴렸다. 번호를 들어보니 3인 테스트에서 꼴찌를 기록했던, 즉 최단 시간에 나자빠진 훈련생들이었다. 당당하게 꼴등을 기록한 것은 신경원이 쓰러트린 86번이었지만 그는 곧장 의무실로 실려 간 상태였다.

마지막 테스트 역시 이전과 같이 3인 테스트였다. 하지만 이번엔 한 번에 한 팀뿐이었고 훈련생 둘에 훈련 교관 하나가 투입되었다. 또한 가벼운 보호구 대신 SWAT 팀의 실제 장비를 풀로 착용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테스트를 지켜보았다. 심사관석에 앉아 있는 예들린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부릅뜬 채 신경원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졸았다가는 작든 크든 상관의 보복을 당할 것 같았다.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의외의 부분에서 쪼잔한 부분이 있는 상관이니 야근 수당이라든가, 특근 수당 같은 걸 잘라버릴지도 모른다. 아마도가 아니라 100%.

2차 실전 테스트는 꽤 시간이 걸렸다. 훈련 교관이 훈련생들의 공격을 적당히 받아치며 훈련생들끼리 서로 공격하는 것을 끊어내거나 하면서 실력을 보일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었다. 그만큼 시간이 걸렸지만 대신 어떤 근접전투법을 익혔는지, 숙련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쉬웠다.

신경원은 추가 수당을 사수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채 테스트를 지켜보았다. 보고 있자니 앞서 낮은 점수를 기록한 훈련생 중에서도 쓸 만한 놈이 몇 보였다. 그의 머리엔 예들린과 알렌이 짐작했던 대로 훈련생들의 프로필이 마침표 하나까지 자동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신경원은 차분히 쓸 만한 놈들을 추려나갔다. 

한 팀이 남았을 때 신경원도 장비를 착용했다. 그때까지는 반팔 셔츠만 입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유니폼을 제대로 입고 조끼도 입고 헬멧도 썼다. 그는 몸을 풀며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그것을 본 교관이 다가와 물었다.

“뭐 문제라도 있나?”

“아, 좀… 가벼워서요.”

SWAT 정식 유니폼에 풀로 장비를 착용한 것은 맞다. HRT의 장비와 기본적으로 같으니 그건 별로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실제 작전을 나갈 때는 아래위로 더 장비 몇 개가 더 추가된다. 상황에 따라 헤드셋을 착용하기도 하고 야간 투시경이나 소형 카메라를 달고 라이트 스틱에 예비용 탄창 등등, 무게가 꽤 나가는 것들을 잔뜩 들게 된다. 그게 없으니 뭔가 허전하고 무게중심도 제대로 안 잡혀 어색했다.

“계속 신소재가 개발되고 있어서 점점 가벼워지고는 있지. 하지만 실전에 나가면 몇 가지 장비가 추가돼서….”

현직 에이전트인 만큼 교관보다야 잘 알고 있지만 경청하는 척했다. 그는 한참을 떠들다가 질문을 해왔다.

“특별 심사 대상이었지? 어디서 왔나?”

“어, 그게…. 뉴욕입니다.”

“아까 보니 몸놀림이 상당히 날렵하던데, 뭔가 따로 배웠나?”

“이거저거요.”

어릴 때 한국계라면 으레 배우는 태권도를 조금 배우긴 했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배운 것 없이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로 이거저거 닥치는 대로 익혔다. 몸에 맞는 것 하나만 선택해서 파고드는 놈들도 있는데 신경원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실전에서 습득한 것으로 딱히 무엇을 배웠다고 하기가 좀 난감한 상태였다. 선임들로부터는 칼리 근접전투술(PTK―CQC: 페키티 티르시아 칼리 군용 근접전투술, 필리핀 해병대의 군용무술)과 비슷해 보인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런데, 무기는 이거 하나만 허용됩니까?”

“일단은 근접전투 테스트니까 단검만 사용하게 되어 있지. 아까 보니 두 자루 들고 펄펄 날뛰던데, 하나 더 줘?”

“그래도 되면요.”

몸이 가벼운 건 뭐, 싸우다 공격을 받아 장비가 다 날아갔다고 치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겠지만 손 하나가 비는 건 영 허전했다. 

“양손잡이?”

“그건 아니고 버릇이 되… 아니, 그냥 그런 겁니다.”

단검 한 자루와 글록 하나. 그것이 신경원의 기본 장비가 된 지는 꽤 되었다. 사실은 소총까지 더해야 하지만 싸우다 보면 보조 무기인 글록이 몸을 움직이는 데 더 용이해서 거추장스러운 소총은 버린 지 오래다. 글록의 탄창이 소총 쪽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경원은 교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모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훈련생이라 더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하나는 아웃. 하나는 꽤 괜찮네.

뽑아놓은 리스트에 51번을 추가한 신경원은 단검을 양손에 든 채로 스트레칭을 했다. 이미 결정을 내린 후지만 그래도 시선은 계속 한쪽에만 두고 있었다. 

“상대인 저는 눈에도 안 보이나 봅니다?”

으응?

신경원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으응? 하며 얼굴을 들었다. 상대가 신장 181의 신경원도 목을 꺾어야만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장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싶었지만 곧 상대가 자신과 함께 테스트를 받게 될 마지막조의 27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실력 좋던데요.”

“아. 네.”

야외 사격은 2등, 실내 사격도 2등. 근접전투 1차 테스트에서는 1등의 자리를 차지한 27번은 새파란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신경원의 머릿속에서는 자동반사로 상대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나이는 24세. 신장 194. 

사연이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하면 해병대며 특수부대 출신이 대부분인 훈련생들 중 유일하게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미 정식으로 소위 임관까지 받은 훈련생이었다. 훈련 기간 내의 성적은 항상 1~3등에서 왔다 갔다 했고 특이 사항이랄 것까진 없지만 발군의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원에게는 별로 어필하는 부분이 없는 사람이었다.

27번은 웨스트포인트에다가 그런 데는 별 관심도 없는 신경원조차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 사립 초중고를 졸업한, 그림으로 그린 듯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머리도 좋고 신체 능력도 상당히 뛰어났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보기는커녕 실전 경험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훈련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가 있지 않은가.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지만 실전에서는 영 실력발휘 못하고 어리바리해서 소대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마는 얼빵한 신임 장교 같은 거. 

웨스트포인트 출신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 이름만 봐도 좋은 집안 출신의 서러브레드 같은데 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부모님이 준비해둔 엘리트 코스를 밟아주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라고 본다.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관 같은 데 와서 못 볼 꼴 보다가 각종 신경증을 얻어 훼까닥 돌아 인생 조지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을 거다, 애송아.

“잘해봅시다.”

신경원은 속마음과는 달리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자 상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무슨 스포츠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웬 악수?

이걸 마주 잡아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데 방해꾼 아닌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신경원이 기절시킨 86번이었다. 

그래, 차라리 저놈이 낫다. 해병대 출신에 파병 경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얻어맞고 쪽팔리게 기절까지 했는데도 불굴의 의지로 일어나 끝까지 테스트를 받겠다고 아득바득 기어왔지 않은가. 

기관에서 일하려면 저 정도 악과 끈기는 있어야 한다. 테스트 성적도 나름 상위권이고 훈련기간 중의 성적도 실기 쪽은 상당히 괜찮았으니 나쁘지 않다.

신경원은 제멋대로의 합격 리스트에 86번을 끼워 넣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파트너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차분하게 배워 적응을 잘하면 같은 유닛에 속하는 정도까지는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27번, 86번, 87번.”

86번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지막 테스트는 3파전이 아닌 4파전으로 치르게 되었다. 교관과 심사관이 동의했으니 별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신경원은 차분히, 하지만 예들린의 눈치를 보며 매트 위에 올랐다. 그러곤 이번엔 제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표정으로 예들린에게 한쪽 눈을 깜박여 보였다. 그러자 예들린의 옆에 앉아 있던 심사관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87번, 이번엔 기절은 시키지 말게.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건 잊지 말고.”

“하하. 네.”

현역 에이전트라는 사실을 귀띔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예들린 쪽으로 시선을 줬다. 아는 척은 안 할 거라 생각했던 예들린이 슬쩍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력을 다해주길 바라네, 87번.”

뜻밖의 말에 신경원은 눈을 껌벅였다. 

전력이라니? 웬 전력? 교관은 둘째치더라도 파릇한 새싹 기죽일 일이 뭐가 있다고.

자만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러나 근접전투에서만은 이곳에 있는 어떤 훈련생도 자신의 상대가 되긴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신경원은 재빨리 기절은 시키지 말라고 말한 심사관과 예들린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러곤 예들린이 그 심사관에게 뭔가 말을 하긴 했다는 데 한 표를 던지기로 했다. 거기에 둘이 뭔가 내기를 한 것 같다는 강렬한 촉도 왔다. 이번 달 추가 수당 전부를 건다 해도 한 푼도 잃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씨팔―. 팔자에도 없는 쇼 하게 생겼네.

신경원은 절대 만만하지 않은 상사에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목을 돌리며 단검을 고쳐 잡았다. 

월급쟁이는 어쩔 수 없다. 상사가 또 까라고 하니 또 까야…….

…….

………그런데 넌 왜 표정이 그러니, 웨스트포인트야?

신경원이 그럴싸하게 보란 듯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는데 금발의 서러브레드 웨스트포인트―길다. 줄여서 BTW!―가 퍼렁퍼렁한 눈빛을 싸늘하게 빛내고 있는 게 보였다. 상대는 물론 신경원이었다. 

BTW의 눈빛은 마치 철천지원수를 앞에 둔 듯했다. 저놈에게 실수한 게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던 신경원은 그가 청한 악수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린 자식이 나이 든 치프마냥 쪼잔하기도 하지.

신경원은 구시렁거리면서도 27번 BTW와 86번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과를 속으로만 했다. 너그럽고 유하지만 심술궂고 장난기 많고 더불어 의외의 곳에서 쪼잔한 상관의 명인지라 어쩔 수 없이 때려눕혀야 하기 때문이다.

“준비 끝났나?”

교관의 말에 테스트에 참가한 교관까지 4명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삑―하고 스타트 신호가 울렸다. 신경원은 시선은 27번과 86번에 둔 채 땅을 박찼다.

“크억!”

가볍게 몸을 돌리며 양손에 든 고무 단검을 교관의 목과 가슴에 정통으로 박았다. 정말로 미안했지만 교관을 얼마 만에 쓰러트리느냐가 내기의 중심이라는 촉이 왔기 때문에 그를 먼저 쓰러트려야 했다. 

3명의 훈련생들 사이에서 간격을 보고 있던 교관은 신경원의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사방에서 헉―! 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신경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두 훈련생의 사이로 파고들며 두 팔을 휘둘렀다. 오른손의 단검이 86번의 팔을, 왼손의 단검이 27번의 팔을 스쳤다. 테스트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면 그들의 팔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그대로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 신경원은 86번의 허리를 뒤에서 걷어차고 왼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그대로 한 바퀴 돌아 오른발로 27번의 뒤통수를 날려 쓰러뜨렸다. 근육더미 같은 86번이 먼저 일어나 반격을 해왔다. 신경원은 팔로 공격을 막은 뒤 86번의 빈 가슴에 단검을 찔러 넣고 당황한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 몸을 일으켜 달려오는 27번의 공격을 막았다. 

“으억!”

방패가 되어 등판에 27번의 공격을 받은 86번이 신음을 흘리는 순간 신경원은 86번의 몸을 그대로 밀었다.

“우아악―!”

27번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향해 넘어지는 86번의 몸을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전광석화같이 이어지는 신경원의 공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신경원은 86번의 몸을 뛰어 넘어 자신을 향해 내질러지는 단검을 피하며 86번의 팔 아래, 겨드랑이 쪽으로 파고들었다. 

콰악―.

단검을 든 오른손으로 왼손에 든 단검의 끝을 밀어주며 27번의 가슴을 있는 힘껏 찔렀다. 순간 또다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력을 다하라고 했던 예들린의 말을 떠올리며 끝까지 힘을 풀지 않았다. 

보호구를 입고 있었지만 가슴에 정통으로 가해진 충격에 27번이 비틀거렸다. 신경원은 그의 다리를 걷어차 쓰러트리고 확인 사살의 의미로 목에 직각으로 단검을 찍었다. 다만 가슴과 같이 힘을 주어 찌르진 않았다. 테스트는 이미 끝났으니까.

“빌어먹을―.”

27번은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가 신경원과 눈이 마주치자 두 팔을 털썩 내려놓았다. 목에서도 힘을 풀었는지 헬멧이 매트에 턱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훈련생들 쪽에서 우와~하고 환호성이 몇 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금세 사그라졌다. 크고 길게 환호성을 지르기엔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한판 활극을 펼친 신경원이 그들과 동고동락해온 훈련생이 아니라 갑자기 뛰어든 불청객이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괜찮아요? 힘 조절을 잘 못해서….”

신경원의 입장에서는 초등학교 풋볼 경기에 와서 깽판을 놓은 프로 쿼터백이 된 심정이라 땅굴을 파고 머리를 들이밀고 싶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27번에게 손을 내밀었다. 

27번은 후 하고 숨을 토하더니 신경원의 손을 마주잡고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가슴에 받은 일격이 좀 강했는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신경원은 얼른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괜…으…니다.”

27번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신음을 흘리면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신경원은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는 아직 쓰러져 있는 86번에게도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 교관의 상태를 살폈다. 

교관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신경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원은 그에게 다가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얼른 매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3명을 공격했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헬멧과 조끼를 벗고 유니폼도 벗었다. 쪽팔려서 한시라도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뒤편에서 훈련생 전원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이후 시간은 휴식을 취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과에 대한 코멘트는 없었다. 오래되긴 했지만 신경원이 기억하기에도 합격 통보는 집으로 돌아간 후 개별적으로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달리 길게 코멘트가 이어지지 않았기에 기회다 싶었던 신경원은 재빨리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문을 막 통과하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신경원의 손목을 잡아챘다. 급작스럽게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지친 상태라 피할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어?”

돌아보니 신장 194cm을 자랑하는 금발의 서러브레드 웨스트포인트―BTW가 굳은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눈빛이 테스트를 받기 전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는 신경원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으. 으응?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쳐다보자 BTW가 정중한 말투로 물어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연락처, 받을 수 있을까요?”

실례야. 신상 털릴 일 있냐. 털려봐야 별일도 없겠지만 그냥 싫어.

“일단 이것 좀 놓아주시겠습니까?”

신경원은 제 손목을 가리켰다. 

“이름부터요.”

“87번.”

“번호 말고 이름요.”

신경원은 고집스럽게 이름을 묻는 BTW에게 그냥 씨익 웃어 보이며 팔을 털었다. 세게 잡고 있던 것도 아니고 거부 의사를 보이자 놈은 강경한 말투와는 달리 의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순순히 팔을 놓아주었다. 놓지 않으면 한 대 팰 각오도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저부터 이름을 밝혀야 했는데 실례했습니다. 제 이름은 키이,”

혈통이 정말 좋을 것으로 예상되는 서러브레드는 예의 바르게 사과하며 제 이름부터 밝히려 했다. 하지만 신경원은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다시 보기 힘들 텐데 굳이 이름은 안 밝히셔도 되고요.”

대놓고 통성명하자는데 그걸 또 대놓고 거부할 줄은 몰랐었는지 BTW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신경원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초면에 미안했습니다.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그럼.”

“자, 잠깐요!”

당황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잡아당겼지만 신경원은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따라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친 와중에도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미친 듯이 달렸다. 중간에 힐끔 뒤를 돌아봤지만 예상과는 달리 금발은 보이지 않았다. 헬멧도 벗지 않은 상태니 교관에게 끌려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신경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뭘 그리 잘못했다고 줄행랑을 치나 하는 생각도 들어 그때부터는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다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찾아 잠시 쉴 겸 저녁노을을 받으며 광합성을 시도했다. 

“어이구, 죽겠다.”

살짝 무리를 했었는지 가랑이 사이의 허벅지 근육이 당겼다. 스트레칭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신경원은 예들린에게 반드시! 대가를 청구해야겠다면서 끙끙거렸다. 허벅지를 문지르는 그의 머릿속엔 금발에 서러브레드에다가 웨스트포인트에 대한 것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신경원은 다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슬쩍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해가 지도록 그곳에서 졸고 또 졸았다. 

“잘했네.”

예들린은 알렌에게 귀를 잡혀 질질 끌려온 신경원을 향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경원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얼마 버셨어요?”

“100달러.”

함께 4년 넘게 구르다 보면 척하면 척이다. 무엇을 어떻게 왜가 싹 빠진 말로도 두 사람은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럼 저녁 먹으러 가도 되죠?”

아카데미를 한 바퀴 돌아가며 수색을 펼친 끝에 신경원을 찾아내 끌고 온 알렌은 속 터진다는 표정으로 신경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자식, 이 와중에 저녁을 찾아?”

“힘쓰느라 몸도 잔뜩 축났는데 저녁을 굶으라고요?”

“저녁 챙겨 먹어야 하는 놈이 식당 문 닫을 때까지 벤치 뒤에서 숨어서 자? 자려면 숙소로 돌아와서 자지 뭐하는 짓이야!”

“헉! 벌써 닫았어요?”

“벌써라니. 10시가 다 돼간다. 10시가!”

“윽―.”

신경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숙면을 취한 건 좋았지만 밥 때를 놓치다니, 말도 안 된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살 때도 있는 거라고!

“구박은 그 정도로 하고 그거나 주게.”

“치프가 그렇게 오냐오냐 하시니까 이 녀석 버릇이 점점 나빠지는 겁니다.”

알렌은 구시렁거리며 구석에 있던 종이봉투를 신경원에게 건네줬다. 안에는 두툼한 햄이 든 샌드위치와 오렌지 하나, 그리고 우유가 들어 있었다.

“쳇. 우유가 뭡니까. 애들도 아닌데.”

“얼른 마시고 철 좀 들어라. 응?”

신경원은 제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알렌의 손을 거둬냈다. 불평은 했지만 우유를 뜯어 단숨에 마셨다. 사실 목이 많이 마른 상태였다. 예들린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 신경원에게 미소 띤 표정으로 물었다.

“파트너 될 놈은 골랐나?”

“아뇨.”

“콱 찍으라고 했잖아.”

“쓸 만한 놈은 좀 되지만 콱 찍을 만큼 괜찮은 놈이 없어서요.”

“하여간…. 그럼 쓸 만한 놈이라도 불러봐.”

“3번, 18번….”

신경원은 번호 두 개를 부른 후 샌드위치를 한입 먹고 다시 번호 두 개를 불렀다. 그가 체크한 사람은 꽤 많았다. 예들린은 신경원이 부르는 번호의 서류를 서류철에서 하나씩 뽑아냈다. 그중 3분의 2 정도에는 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꽤 많이 골랐군.”

“애들 실력이 전반적으로 괜찮던데요? 아참! 86번도 추가해주세요.”

“86번? 으음…. 실기는 괜찮아도 필기가 합격점에서 좀 많이 떨어지는데.”

예들린은 서류더미에서 86번의 프로필을 뽑아내 훑어보며 말했다.

“하지만 해병대 출신에 파병 경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기절하고도 다시 달려드는 걸 보면 쓸 만하겠다 싶어서요. 머리 나쁘다고 못할 일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머리 좋은 편이 여러모로 좋잖나.”

86번의 서류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지 않았다. 어떤 서류에는 3개씩이나 붙어 있는데도 말이다. 

“다른 데서 안 데려간다고 하면 치프가 뽑아다 백업팀에라도 넣어주세요.”

“그렇게 86번이 마음에 드나?”

“…저 때문에 제 실력 다 못 보였잖아요. 인간적으로 보상은 해줘야죠. 훈련생으로 올 정도라면 백업팀에 들어갈 실력으로는 충분하잖습니까. 쩨쩨하게 굴지 말고 좀 뽑아주세요. 당사자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신경원은 남은 샌드위치를 홀랑 집어삼키고는 오렌지를 까기 시작했다. 제 할 일은 다 했다 싶은지 서류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는다. 게 눈 감추듯 오렌지를 까 먹고 손가락을 쪽쪽 빠는 신경원을 보고 예들린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신경원이 한방에 제압해버린 훈련 교관은 그린베레 출신으로 아카데미에서는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그를 한방에 쓰러트려줘서 나름 경쟁관계에 있는, 워싱턴 지부를 맡고 있는 친구에게 콧대를 세울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내기를 걸 때 이미 한 옴큼의 의심도 없이 신경원이 이길 것임을 확신했었다. 그만큼 신경원의 전투 능력은 발군이었다. 

신경원은 전투 능력만 좋은 게 아니다. 탁월한 기억력에 두뇌 회전도 빨랐다. 특히 발군의 눈썰미를 가져 뉴욕 지부가 아니라 기관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로 구분되는 놈이다. 다만….

“흐아―암.”

식사를 마친 신경원은 하품을 하며 의자에 축 늘어졌다. 의자에 고개를 꺾어 기대고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천장을 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펴봐도 의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나태하고 방만한 태도다.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신경원이라는 녀석은 명령을 내리기 전엔 그 어떤 일에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였다.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흐아암.”

신경원이 또 하품을 했다. 내버려두면 저대로 졸기 시작한다에 자신의 연봉 전체를 걸 수 있다며 예들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손에 든 서류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모두 신경원이 고른 훈련생의 서류다. 그것을 잠시 뒤적이던 예들린은 신경원의 눈에 들지 못한 훈련생의 서류 쪽에 잠시 시선을 두다 입을 열었다.

“신.”

“네이~.”

“27번은?”

“……?”

“테스트 결과로는 27번이 최고다.”

“27번…? 아! BTW!”

“BTW?”

“금발blond에 서러브레드thoroughbred, 그리고 웨스트포인트West Point요.”

신경원의 말에 예들린은 따로 떼놓았던 서류 중 맨 위에 있던 27번의 서류를 손에 들었다. 사진을 보니 확실히 금발이다. 거기에 주욱 적힌 학교 이름들을 보니 죄다 이름난 사립 명문 학교들뿐이었다. 그 학교들은 돈이 많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학교들이 아니었다. 명예라고 해야 할까, 돈보다는 출신 성분을 조금 더 따지는 부류다. 왜 서러브레드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뭐 어때서.”

“척 봐도 혈통 좋은 서러브레드, 부잣집 도련님이잖아요. 그런 놈이 무슨 험한 일을 한… 아. 혹시 간부 후보생 같은 건가요? 그럼 뭐 제 의견은 필요 없겠고.”

“간부 후보생 같은 게 어디 있냐, 인마. 우리 쪽은 대부분 필드 경험이 있어야만,”

“대부분이라는 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거잖습니까.”

“…….”

“그런 놈이라면 제가 뭐라고 하든 당연히 합격일 텐데, 가능하면 우리 지부로는 안 왔으면 좋겠습니다.”

“왜?”

“어느 집 귀한 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놈이 폐인 돼서 돌아가면 당연히 책임소재를 묻지 않을까요? 그냥 엄마 아빠가 준비해둔 출셋길이나 달리게 두는 게 나아요.” 

예들린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27번의 프로필을 살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신경원의 말이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출신도 좋고 실력도 있는 녀석이니 그만큼 책임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아뇨. 합격시켜봤자 3개월 안에 손을 든다 쪽에 한 표요. 제가 심사관이라면 불합격입니다.”

“흐음….”

예들린은 27번의 서류를 들고 생각에 빠졌다. 

“그럼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끝난 거죠? 우리 언제 돌아가요?”

“내일 아침.”

“넵,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신경원은 가볍게 경례를 해 보이곤 쏜살같이 예들린의 방을 빠져나갔다.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게 언제냐는 모습이었다. 

탁―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예들린은 픽―하고 웃어버렸다. 그러자 알렌이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던 서류를 챙기며 물었다.

“녀석에게 꽤 자세하게 물으시네요, 치프.”

“자네도 알다시피 눈썰미가 귀신같지 않나.”

“그렇긴 하죠. 여러모로, 다방면에서.”

“자네들은 이 86번 어떻게 보나?”

“신이 마음에 들어 했으면 쓸 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눈에도 일단 우직해 보이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더군요. 한방에 나가 떨어져 기절했는데도 돌아와서 테스트도 끝까지 다 받았고요. 백업팀도 인원이 좀 부족하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일단 그럼 이 친구는 우리가 데려가겠다고 해야겠어. 문제는 27번인데….”

“1등을 했으니 여기저기 원하는 데가 많겠지만 기왕이면 우리가 데려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렌은 의견을 피력하며 깔끔하게 정리한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유는?”

“신의 말대로 오래 버티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확률은 반반입니다. 우리 일 험한 거 모르고 지원했을 리도 없고요. 1등이라 경쟁률이 좀 셀 거 같은데, 오랜만에 힘 좀 써보시죠. 인력 부족현상은 우리 지부가 젤 심하잖습니까.”

예들린은 잠시 더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2주 후, 기관의 뉴욕 지부에 몇 명의 신입이 들어왔다. 예들린은 기합이 바싹 든 신입 에이전트들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정시 출근한 에이전트들은 예들린의 뒤를 따라 내려오는 낯선 얼굴들을 힐끔 보고는 바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신입, 그러니까 수습 에이전트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유는 당연히 오래 버티는 신입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들린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에이전트들 중 둘을 불러 각기 신입을 소개하고 파트너인 동시에 사수로 붙여주었다. 그러고는 신경원을 찾았다. 

“이 녀석은 왜 아직 안 보여.”

“음. 지금쯤 막 주차장에 도착했겠네요. 버스를 타고 왔으면 길을 건너는 중일 테고요.”

막 한 명의 신입을 배정받은 맥스가 벽에 달린 시계를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사람이 부족하다는 점은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으나 익숙하고 오래된 파트너와 헤어져 신입을 맡아 교육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새로 신입을 파트너로 맞은 다른 에이전트 캐리도 뚱한 표정이었다. 나머지 에이전트들도 언제 자신의 이름이 불릴지 몰라 전전긍긍해했다. 예들린의 뒤에 아직 신입이 셋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신입이 오는 날에도 지각을 하다니.”

“지각 한 번 할 때마다 추가 수당 깎는다고 해보시죠.”

여기저기서 킥킥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들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머지 신입들을 데리고 옆 사무실로 향했다. 그걸 본 에이전트들이 정든 파트너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때 투명한 유리문이 좌우로 열렸다. 신경원이 어기적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직 잠이 덜 깨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예들린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데스크에 엎드려 대놓고 자고 있는 신경원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썼다. 

“어이, 퍼스트.”

바로 옆자리의 존 브라이튼이 얼른 신경원의 어깨를 쿡쿡 찔러 깨웠다.

“…왜.”

“치프.”

“어.”

신경원은 부스스 얼굴을 들었다. 몰골이 가관이었다. 머리는 까치집이 여기저기 져 있었고 어제 뭘 먹고 잤는지 얼굴은 팅팅 부어 있었으며 한쪽 눈에는 아직까지도 눈곱이 끼어 있었다. 거기에 얼마를 잤다고 그새 입가에 침까지 흘러나와 있었다. 예들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상관의 시선이 제 얼굴에 꽂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듯 신경원은 반사적으로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신경원의 눈동자는 아직 초점이 또렷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정신 좀 차려.”

“아…. 네.”

“조는 건 이해해주겠지만 지각은 안 돼. 계속 그렇게 지각하면, 한 번 할 때마다 추가 수당을 한 시간분씩 깎아버리겠네.”

“…그러시든… 헙!”

순간적으로 정신이 퍼뜩 든 신경원의 눈에 초점이 빡―잡혔다. 잠에 취해 정지되어 있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목숨 걸고 하는 일인데 그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니 정신 차리고 하라는 거야!”

큰 소리를 친 예들린은 아프지는 않게, 하지만 소리는 크게 나게 신경원의 뒤통수를 쳤다.

“에이씨―. 상관이라고 막 공개적으로 린치해도 되는 겁니까?”

“선임 에이전트면 모범을 보이라는 의미에서다. 눈곱 떼고 인사나 해.”

“예?”

“네 새 파트너다.”

“그에엑?”

황급히 눈곱을 떼던 신경원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몰골이 좀 한심해 보이겠지만 이래 봬도 우리 뉴욕 지부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베테랑,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 신. 이쪽은 키이스 클리퍼드. 구면이지?”

신경원은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치프가 소개한 신입 에이전트를 바라보았다. 신입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신경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원은 신입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예들린에게 매달렸다. 

“치프.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 혼자서도 잘하잖습니까.”

“그렇지. 혼자서도 잘하지.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네. 앞으론 둘이서 잘해봐.”

“치프!”

“자네도 알다시피 아카데미 1등에 빛나는 인재야. 워싱턴이랑 시애틀에서 이 녀석을 데려가려고 얼마나 아우성을 쳤는지 아나?”

“그럼 그쪽으로 보내지 왜!”

“자네가 파트너도 없이 혼자인 게 안타까워서 내가 특별히 힘 좀 썼지. 그리고…,”

그때 신경원이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한 신입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가 뉴욕 지부 근무를 희망했습니다.”

뭐어~라고?

신경원의 시선이 다시 신입 요원에게 향했다. 키가 어찌나 큰지―아, 194였지. 아무튼―고개를 꺾어야만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뉴욕에서 왔다는 말을 얼핏 들었습니다. 뉴욕 지부의 추천이라면 당연히 뉴욕 지부로 배정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고, 함께 일하면 좋겠다 싶어 저도 이쪽을 희망했죠. 그런데… 설마 선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경원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입은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정식으로 제 소개를 드리죠. 뉴욕 지부로 발령받은 수습 에이전트, 키이스 노아 클리퍼드 3세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 신.”

이름이 뭐든 알 바 아니지만 주니어도 아니고 3세라니. 신입은 풀 네임에서도 나 좋은 집안 출신입니다 하는 티가 팍팍났다. 신경원이 짐작한 그대로였다. 그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키이스라고 불러주십시오.”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입의 얼굴에 더더욱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뒤편 어디선가 ‘짜식―, 박력 있는 미남이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원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인정사정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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