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9/9)

외전.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노랗고 빨간 단풍이 알록달록 예쁘게 든 가로수 길을 두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금발의 남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흐트러진 긴 앞머리를 큰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 옆에서 걷는 흑발의 남자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조금 흔들자 머리카락이 뒤로 날리며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는 금발의 남자만큼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기가 막힌 비율과 늘씬한 몸매가 눈길을 끌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번쯤 그들을 힐끔거렸다.

“저 꼬마, 나 본다.”

“미안하지만 나 보는 거야.”

“헐.”

“크크.”

다시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번엔 부드럽고 가는 금색의 머리카락만 흩날렸다. 그는 흑발의 남자에게 잘 보란 듯이 미소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던 꼬마 숙녀의 걸음이 뚝 멈춰 섰다. 그 순간 두 남자는 그녀들의 곁을 지나쳤다.

“거봐.”

“쳇! 불 거면 제대로 불어야지. 바람은 왜 불다 마는 거야? 나도 머리카락 기똥차게 넘겨 줄 수 있는데.”

“크크.”

그들이 토닥거리며 지나간 자리 위로 낙엽이 하나둘 떨어졌다. 가로수가 끝날 때쯤 제각각의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넓은 격자무늬의 유리창이 매력적인 카페 앞에 멈춰 섰다.

“갈게. 일하고 있어, 다원.”

“조심해서 다녀와, 네이선.”

“응. 다녀올게.”

“헤헤. 귀여워.”

네이선이 인상을 찌푸리자 다원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그가 핀잔을 주듯 다원에게 말했다.

“귀여운 게 누군데 나더러 귀엽다는 거야? 카페 안에서 얌전히 일하고 있어.”

네이선은 황당해하는 다원을 남겨 두고 시크하게 뒤돌아섰다. 점점 멀어지는 네이선을 보며 다원은 투덜거렸다.

“……이게 다 딜런 때문이야. 네이선 앞에서 귀엽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젠장.”

길모퉁이를 돌아서던 네이선이 멈춰 서더니 아래위 치아 여덟 개를 드러내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원에게 팔을 흔들었다. 그의 곁을 지나는 사람들은 훈훈하게 생긴 그가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이가 누군지 궁금해하며 주변을 힐끔거렸다. 다원은 민망한 표정으로 눈을 접어 웃으며 손을 팔랑거렸다.

‘그래, 그래. 철없는 시동생이 형수한테 좀 기어오르겠다는데 어쩌겠어. 받아 줘야지. 그러니까 그만 흔들고 빨랑 가, 제발…….’

다원은 네이선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얼른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창가 쪽 테이블 쪽으로 향하자 다행히 다원이 좋아하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다원은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피곤하다.”

“주문하시겠어요?”

웨이터는 작은 티 매트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크리스털 잔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좁고 긴 주둥이가 특이하게 생긴 주전자를 기울였다. 가늘게 일자로 떨어진 물이 잔 안에 깔끔히 들어갔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한 뒤 웨이터가 돌아가자 다원은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다원이 주문한 라테와 간단한 프렌치토스트는 금방 나왔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그는 잠시 멍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곧 태블릿 PC 화면에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음?”

태블릿 PC에 작고 둥근 빛이 맺혔다. 창틀을 따라 걸려 있던 작은 알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이었다. 얼마 전까진 없었던 그것은 아마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매단 것 같았다. 다원은 뜻밖의 선물이라도 받은 표정으로 그것을 올려다봤다.

“어!”

그리고 정말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젠장…….’

물론 ‘뜻밖의 선물’이라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창밖에서 다원을 보고 있던 데미안은 눈이 마주치자 씽끗 웃었다. 다원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데미안은 다원의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얼마 만이야, 다원.”

“…….”

“아니, 뭘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그래. 예쁘게.”

“하.”

다원의 어이없는 반응에도 데미안은 제멋대로 다원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새 그들의 테이블에 온 웨이터는 같은 순서로 티 매트를 놓고 컵을 올려놓은 후 물을 따랐다. 데미안 역시 메뉴판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에스프레소.”

웨이터가 멀어지자 다원이 먼저 물었다.

“취향이 바뀌었나 봐?”

“응? 아, 우리 다원.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많았네. 이젠 달콤한 건 안 먹어. 나도 이제 곧 마흔인데 관리해야지 않겠어?”

여전히 늘씬하고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는 데미안이 다리를 바꿔 꼬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데미안은 꼰 다리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고 다원을 빤히 바라봤다.

“하아. 정말.”

다원은 태블릿 PC 화면 속 저장 버튼을 빠르게 터치했다. 그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두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때까지도 데미안은 다원을 빤히 보고 있었다. 다원 역시 데미안을 마주 바라봤다. 둘 사이엔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웨이터가 에스프레스를 내어오고서야 둘 사이의 긴장감이 조금 흐트러졌다. 데미안은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은 지금 당장 패션 잡지에 실려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음. 역시…… 무지 써.”

물론 음성이 실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완벽한 모습이었다.

“하. 그런데 왜 그걸 시켜? 원래대로 머리까지 아플 만큼 단 체리 에이드나 시켜.”

“으음. 그건 체이스의 취향이지.”

데미안에게 날을 세우던 다원이 주춤거렸다.

“그리고…… 나도 이제 나이에 맞게 중후하고 우아해져야지. 그런데 우리 다원은 여전히 애인이랑 다정한가 보네.”

“……뭐?”

“길 잃을까 봐 카페까지 데려다주고 가실 정도로. 그런데 카페까지 와서 한다는 게 고작 일이야? 눈이 빠지게 일하는데도 얼굴은 아주 빵빵하게 살이 올랐네. 아닌가? 전체적으로…… 이런, 군살인가? 그러다 곧 굴러다니겠는데.”

“응. 난 아침, 점심, 저녁, 애인이 해 주는 밥 배 터지게 먹고 아주 열심히 일해. 그리고 내 몸무게는 단 1킬로그램도 변함이 없어. 누구랑 달리 난 아직 기초 대사량이 빵빵한 나이라서 말이야.”

“오호. 젖 달라고 꼬물거리던 우리 다원이가 제법 앙칼져졌네.”

“……젠장.”

다원은 큰 도자기 컵을 들어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테이블 위 어딘가를 노려보는 그를 데미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혼자 심각하던 다원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네가 여긴 웬일이야?”

“내 발로 내가 걸어 다니는데 네가 왜?”

다원은 데미안의 말도 안 되는 대답에 다시 방향을 잃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진지하게 물으면 제대로 대답 좀 하지?”

“됐고, 네 애인은 어디 간 거야?”

다원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걸 네가 왜 궁금해하는데?”

데미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네 애인 때문에 인생이 180도 뒤집혔는데 그 정도는 궁금해도 되지 않을까?”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할…….”

데미안이 눈썹을 실룩이며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아주 살짝이었지만 다원은 저만치 물러났다. 소파에 등이 닿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까지.

“궁금해?”

“아니.”

“정말?”

“…….”

“딜런이 내 갤러리에 찾아온 건 알아?”

“갤러리?”

“이런, 모르나 보네. 그런 걸 왜 비밀로 하지? 애인이 들으면 감동할 이야긴데……. 쯧, 그럼 그동안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는 거잖아.”

“…….”

“후우. 뭐! 괜찮아. 그건…… 그럴 수 있어.”

살짝 실망한 듯 짜증스러워하던 데미안은 뭔가 김이 샌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이번엔 다원이 그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뭔데 그래?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러나 데미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원은 점점 애가 탔다.

“말을 꺼냈으면 정확하게 말해 봐, 좀!”

“이미 끝난 일인데 뭘……. 너에겐 헤어진 전 애인 일이기도 하고. 지금 애인이 입을 다물었다는데 내가 나설 수 있나. 안 그래?”

“뭐가 안 그래야? 이미 운은 다 띄워 놓고! 빨리 말 안 해?”

다원이 흥분하자 데미안은 다시 즐거워 보였다. 한 번씩 테이블 앞을 지나가는 웨이터도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다원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빨리!”

다원이 애가 달아 폭발하기 직전, 데미안은 ‘네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그날은 나에게도 엄청 중요한 날이었거든. 모처럼 내가 기획한 전시였잖아. 몇 날 며칠을 준비하고 또 준비했어.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었는데…… 네 잘난 애인이 미쳐서 나타난 거야.”

데미안은 전시회 날 딜런이 찾아와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다원에게 말했다.

“네 애인이 난리를 친 것 때문에 난 체이스한테 맞기까지 했어. 충격이었지. 그 뒤로는 아예 제정신이 아닐 만큼. 그런데 더 최악인 상황이 벌어졌어. 정신이 들어 보니 내가 웬 방에 있더라고.”

데미안은 그날, 전시회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데미안이 정신을 차렸을 땐 침대 하나와 벽면 반 정도 크기의 큰 거울이 전부인 방에 있었다.

‘왜 병원이 아닌 거야? 빨리 치료받지 않으면 흉질 텐데. 이 구질구질한 곳은 도대체 어디야?’

데미안은 주머니를 안을 뒤졌지만 핸드폰도, 지갑도, 카드 한 장도 없었다.

‘젠장, 세실 이 새끼는 무슨 일을 이렇게…….’

그때 거울 너머에 불이 켜졌다. 거울인 줄 알았던 것은 거울이 아닌 커다란 창이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반대편 방은 데미안이 있는 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반대쪽 방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세실이었다. 세실은 곧장 거울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거울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데미안을 조롱하듯 웃고 있었다.

‘뭐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야, 너 무슨 생각이야!’

쾅! 쾅! 데미안은 거울을 깨뜨릴 기세로 두드렸다. 주먹이 붉게 부어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데미안이 있는 공간만 따로 분리되어 있는 듯 주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데미안은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때 거울 너머로 방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데미안의 행동은 뚝 멈췄다.

‘체이스?’

어느새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세실은 상처 입고 돌아온 남편을 달래는 착한 아내처럼 체이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매직미러 방은 내 생애 가장 끔찍한 공간이었어. 거기서 그 자식들이 내가 아는 모든 플레이를 몇 시간에 걸쳐서 했거든.”

잠시 데미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다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안 믿기지?”

“…….”

“그런가 보네. 하긴, 체이스는 너한텐 친절했으니까.”

데미안은 안타깝다는 듯 다원을 바라봤다. 그 기분 나쁜 눈빛에 미간을 구긴 다원이 입을 열었다.

“……네가 아니었어?”

“응?”

“체이스의 애인이 네가 아니었어?”

“…….”

다원이 눈을 한 번 깜빡거릴 동안 데미안은 순도 100%의 무표정이 되었다. 다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다원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데미안은 곧 화사하게 웃었다.

“그들이 무슨 관계든, 무슨 짓을 하든 난 이제 관심 없어. 하지만 좀 억울하긴 해. 결국 내 인생만 바닥으로 추락했잖아. 그런데 넌 아주 행복해 보이네. 아직도 그 거지 같은 카페에서 일해?”

다원의 미간이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와락 구겨졌다. 명백한 적개심이었다. 데미안은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여유롭게 굴었다.

“그게 왜?”

대답은 데미안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언제 왔는지 네이선이 서 있었다. 데미안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왜 이제야 나타났냐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나타나셨네. 하다원의 애인 씨.”

빈정거림에도 그는 흔들림 없이 시크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데미안을 내려다보았다. 흥분할 줄 알았던 그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이자 데미안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다리를 바꿔 꼬며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너 뭔가 분위기가…….”

“닥쳐. 네 거지 같은 인생 완전히 종 치기 전에 당장 꺼져.”

데미안과 다원이 당황한 사이, 잔잔하게 들려오던 주변 사람들의 소음 역시 어느새 뚝 끊어져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들은 완전한 침묵에 둘러싸였다. 네이선과 데미안은 눈싸움하듯 서로를 죽일 듯이 응시했다. 하지만 네이선이 한 발 다가서자 데미안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하. 여전히 구질구질한 바퀴벌레 한 쌍이네. 잡아도 간다, 가.”

데미안은 드물게 흥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카페를 나갔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카페는 곧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네이선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아주 순진무구한 얼굴로, 정확하게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얼굴로 다원에게 물었다.

“일 계속할 거야?”

숨 죽은 데친 야채처럼 축 늘어진 다원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기운이 없어. 집에 가자.”

네이선은 두말없이 다원의 짐을 정리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 * *

집에 돌아오는 내내 다원은 흐물거렸다. 그들의 차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2층에 있던 딜런은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내려왔다.

“잘 다녀왔어?”

“어…… 아마도.”

“상태가 왜 이래? 네이선. 무슨 일 있었어?”

딜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원을 살폈다.

“전에 형이 말했던 뱀 대가리 때문일 거야.”

“뱀? 설마 그 뱀?”

딜런은 모처럼 ‘미친 딜런’이 되어 흥분해 날뛰었다.

“그 자식을 그냥 돌려보냈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어야지. 걔가 뭐라고 그래? 해코지 안 했어? 애 상태 보니까 뭔 짓 한 것 같은데! 네이선 넌 뭐 하고 있었어! 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딜런을 따라 같이 움직이던 다원의 시선이 시계에 머물렀다. 그는 슬쩍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냉장고에서 있는 재료를 모조리 꺼냈다.

“다원. 뭐 해?”

“냉장고 파먹기.”

“지금 밥이 뭐가 그렇게 중요…….”

꼬르륵. 다원과 딜런 모두 네이선의 배를 바라봤다. 다시 한번 꼬르륵. 이번엔 다원과 네이선이 딜런의 배를 쳐다봤다.

“어부 가문 형제 때문에 안 되겠다. 시간도 늦었고 우리 오랜만에 라면 끓여 먹을까?”

“찬성.”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그 뱀…….”

“딜런, 아무 일 없었어. 그리고 나도 배고파. 우리 일단 밥부터 먹자. 응?”

“……난 달걀 많이 넣어 줘.”

셋은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네이선은 일찌감치 제 방으로 들어갔고 딜런은 유독 조용한 다원의 눈치를 봤다. 다원은 씻고 나오자마자 잘 준비를 했다. 딜런은 이런 기분으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아깐 내가 너무 흥분했어. 너도 많이 놀랐을 텐데……. 미안해.”

“아니야. 미안할 건 없어. 그냥 좀 뜻밖이라……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응?”

“너 데미안 갤러리 갔다는 거 왜 말 안 했어?”

“아…… 그걸 뭐 하러 말해.”

“그래도 말해 주지. 그랬으면…….”

다원은 딜런의 품에 파고들자 딜런도 다원을 꼭 끌어안았다. 다원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딜런의 가슴에 손가락을 톡톡거릴 뿐이었다. 딜런은 다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원. 그 자식이 뭐라고 말했는지 몰라도 신경 쓰지 마. 그건 내가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거였어.”

“응……. 미안해. 또 고맙고.”

“정말 그 자식 입을 꿰매 버리든지 지구 밖으로 던져 버리든지 했어야 했어.”

“풋. 그게 뭐야.”

“이제 그런 자식 따위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려. 혹시라도 또 만나더라도 몰라볼 정도로. 알았지.”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이야.”

다원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딜런까지 폭 감싸듯 덮었다. 딜런은 다원의 이마에, 코에, 입술에 차례로 키스를 했다.

“그래, 이제 그 자식 생각은 그만하고 자자. 내일은 내가 아침밥 할게. 넌 푹 자.”

“고마워.”

딜런의 포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다원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아침 해가 떠오르고 딜런은 약속대로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헐렁한 체크무늬 파자마 바지에 회색 라운드 면티를 입은 다원이 내려왔다. 딜런과 모닝 볼 뽀뽀를 나눈 그는 여전히 잠을 대롱대롱 단 얼굴로 연신 하품을 하면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습관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식탁 위 작은 꽃병에 기대어 세웠다. 곧이어 네이선도 내려왔다.

“안녕.”

“어.”

성의 없는 인사를 나눈 형제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행동을 힐끔거렸다. 네이선이 다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다원의 머리카락이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공중부양을 했다. 다원은 진저리를 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앗, 따거.”

“크크. 신기해. 항상 정전기가 난다니까.”

“내 거한테서 당장 손 떼라.”

네이선은 딜런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여전히 다원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딜런이 겁을 잃은 네이선에게 기름이 잔뜩 묻은 뒤집개를 들이밀었다. 그때 퐁퐁 하고 잘 익은 식빵이 튀어 올랐다. 모카 포트에선 뽀록뽀록 소리를 내며 진한 커피가 추출되고 있었다.

딜런은 이번만 참는다는 표정으로 먹음직스러운 토스트와 노른자가 반쯤 익은 달걀 프라이 하나씩을 접시에 올려 다원 앞에 놓았다. 동시에 네이선이 땅콩 잼, 초콜릿 잼을 그 옆에 올려놓았다.

“토스트엔 역시 악마의 잼이지.”

“다 된 밥상에 숟가락 놓는 수준 봐라.”

“둘 다 고마워.”

다원은 둘 모두의 손을 다독였다. 네이선은 딜런의 비아냥거림을 시크한 표정으로 무시하고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베이컨을 수북하게 쏟아부었다. 베이컨은 치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말려들었다. 네이선은 베이컨을 딜런이 남겨 놓은 토스트 하나와 같이 접시에 담아 식탁 앞에 앉았다.

“와, 진짜 볼 때마다 질린다 질려. 적당히 좀 먹어. 넌 왜 중간이 없냐?”

“누가 할 소리.”

네이선이 딜런의 접시를 눈짓했다. 그의 접시엔 달걀 프라이가 수북했다.

“자, 자. 두 사람 모두 우유랑 같이 꼭꼭 씹어 먹어.”

다원이 그들의 잔에 새하얀 우유를 부어 주는 것으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접시에 코를 처박고 거의 마시듯 먹는 형제와 핸드폰 화면을 보며 야금야금 먹는 다원. 모습은 달라도 셋은 거의 같은 속도로 식사를 마쳤다.

“자. 이제 먹었으니 일하러 가야지.”

셋은 나란히 현관을 나섰다. 카페는 걸어서 3분이었지만 리조트는 차를 타고 10분 이상 가야 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차로 향했다.

“풋! 데칼코마니다.”

다원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차 앞 좌석에 나란히 앉은 둘에게 팔을 크게 흔들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다원의 인사에 둘은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손을 척 하고 올렸다.

“아, 정말 못 말려.”

곧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모퉁이를 지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다원은 오솔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짹짹짹. 평소와 다름없이 새들은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었다. 다원은 오솔길을 걷는 내내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카페 안에 들어가자마자 창을 활짝 열어 환기부터 시켰다. 그리고 작은 화분들을 밖에 꺼내 물을 주고 가게 앞을 쓸기 시작했다. 그때 카페의 유일한 직원, 샘이 막 코너를 돌고 있었다. 그는 다원과 눈이 마주치자 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샘.”

샘은 앞치마부터 두르고 가게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비질을 다 한 다원은 가게 안으로 들어와 손부터 씻고 앞치마를 둘렀다. 끈을 다 묶기도 전, 딸랑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좋은 아침. 다원, 샘.”

“어서 오세요.”

“할배도 안녕.”

다름 아닌 카페의 단골손님들이었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점심 전부터 손님들이 몰려드니 우린 문 열자마자 와야지.”

“암. 그게 예의지.”

“크크. 정말 못 말려.”

그들을 시작으로 손님들은 꾸준히 딜런과 다원의 카페를 찾았다. 장사하랴, 보스턴 사무실 직원에게서 오는 메일과 거래처에서 오는 메일을 확인하랴 다원은 바쁜 하루를 보냈다.

* * *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카페 문부터 걸어 잠근 다원과 샘은 한숨을 돌렸다.

“후우.”

“샘, 오늘도 수고했어. 어서 퇴근해.”

“이것만 정리해 놓고요. 그래야 내일 시작이 힘들지 않죠.”

“역시 내 오른팔이야. 자랑스러워.”

“말만 오른팔, 오른팔 하지 마시고 제 오른팔도 좀 뽑아 주시죠.”

“그건 사장님의 마음에 달렸지.”

“네에, 네에. 제가 꿈이 야무졌죠.”

“풋! 걱정 마. 거의 50%는 넘어왔어.”

“아하. 이제 1년만 더 기다리면 되겠군요.”

“크크.”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나란히 카페를 나서 문을 잠근 뒤 샘은 왼쪽, 다원은 오솔길로 향했다.

다원이 막 오솔길을 벗어날 때쯤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하게 비췄다. 다원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차는 천천히 다가와 다원 곁에 와서는 거의 멈춰 서듯 속도를 줄였다. 딜런은 창문을 내려 다원에게 손을 흔들고는 능숙하게 차고로 차를 집어넣었다. 다원도 얼른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네이선은?”

“금요일이잖아. 집에 갔어.”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어? 시간 가는 줄 몰랐네.”

“불금인데 우리도 시내에 나갈까?”

딜런이 집과 연결된 문손잡이를 잡은 채 다원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다원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피곤해. 넌 놀고 싶으면 친구들이랑 한잔해. 난 괜찮아.”

“아니야. 널 혼자 두고 내가 무슨 재미로. 들어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딜런의 대답에 다원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딜런은 별다른 내색 없이 문을 열더니 다원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눈을 접어 웃었다. 다원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딜런의 앞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차례대로 손을 씻고 부엌으로 향했다. 다원은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그럼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뭐가 있을까?”

“아니야, 내가 할게. 넌 좀 쉬어.”

“나만 일했나? 너도 했는데.”

“아냐, 오늘은 한가했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느라 엉덩이가 쑤실 정도였다고. 내가 할게. 전에 내가 해 준 시금치 스파게티 좋아했잖아. 또 해 줄게.”

“오. 그때 정말 맛있었는데. 그럼 부탁해요. 딜런.”

쪽. 다원이 딜런의 뺨에 뽀뽀하자 기분이 좋아진 딜런은 진한 키스를 돌려주었다.

“나머지는 먹고 하자.”

“크크.”

딜런은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시금치부터 다듬었다. 요리를 하면서 딜런은 버릇처럼 다원을 힐끔거렸다. 처음엔 눈을 맞추며 웃던 다원은 어느새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거야? 이상하다. 바쁜 일 없을 텐데…….”

딜런의 말에도 다원은 대답이 없었다.

“오, 멋지다.”

대답 대신 다원에게선 뜬금없는 감탄사가 들려왔다. 딜런은 주걱을 든 채 슬쩍 그의 뒤로 돌아갔다. 무선 이어폰을 낀 다원이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은…….

“케이 팝 아이돌?”

남자 아이돌 그룹이 화면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너무 심취한 다원은 제 뒤에 선 딜런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딜런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가스레인지 앞으로 향했다. 스파게티가 점점 모양을 갖춰 가자 캐서린이 담근 피클을 작은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렸다. 여전히 다원은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포크를 놓아도 마찬가지였다.

딜런은 이젠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마지막으로 면에 시금치를 넣고 뒤적이던 딜런이 갑자기 획 하고 다원을 돌아봤다. 다원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그대로였다.

딜런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캐서린의 접시에 스파게티를 담아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다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먹어, 다원.”

다원은 눈으로는 핸드폰을 보며 손으로 더듬더듬 포크를 집어 들었다. 딜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곧이어 정성 들여 예쁘게 돌돌 말아 담은 스파게티 한중간에 아무렇게나 포크를 푹 꽂는 다원의 모습에 딜런의 눈가가 크게 실룩거렸다.

“그러다 흘려.”

“으응. 응.”

다원은 포크 끝을 쥐고 대충 한 바퀴 돌렸다. 눈은 핸드폰에 고정한 채로 입은 포크로 향했다. 결국 면발은 입 바로 앞에서 풀려 버려 반 이상 접시로 흘러내렸다. 나머지 면발도 포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다원은 남은 면발이 떨어지기 직전 급하게 호로록 소리를 내며 빨아들였다. 몇 가락은 식탁 매트 위로 떨어졌는데도 다원은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탁! 딜런이 큰 소리가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제야 다원은 딜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를 모르는 듯 멍한 눈빛에 딜런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하…… 사랑이 식었어.”

“어?”

딜런은 아무 말 없이 휑하니 부엌을 나가 버렸다. 다원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금치 스파게티 두 접시와 영롱한 보라색을 자랑하는 피클, 핸드폰 속 아이돌과 함께 남겨졌다.

* * *

늦은 밤, 다원은 2층 침실 문을 천천히 열고 고개만 빼꼼히 집어넣었다.

“자?”

딜런은 벽을 보고 돌아누운 채 미동도 없었다. 다원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 안으로 슬쩍 몸을 밀어 넣은 그는 딜런을 등진 채 새우처럼 등을 말았다.

잠시 후, 다원이 잠든 것 같자 딜런은 똑바로 돌아누웠다.

‘젠장. 이게 아닌데……. 얜 또 왜 이렇게 불쌍하게 자고 그래. 맘 약해지잖아.’

딜런은 다원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고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그를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러나 한참 후 조용한 새벽, 잘 자던 딜런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혼자 집에 들어온 다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웬 수족관이야? 뭐가 이렇게 커. 딜런, 이거 뭐야?’

못 보던 대형 수족관 안엔 화려하게 생긴 물고기 한 마리가 꼬리지느러미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급기야 물고기는 다원이 서 있는 쪽 수족관 벽에 딱 달라붙어 입을 뻐끔거렸다.

다원이 딜런을 찾으려 수족관에서 멀어지려 하자 물고기는 그대로 수족관 벽을 향해 돌진했다. 콩, 하는 소리에 다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콩! 콩! 딜런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다원은 물고기의 돌발행동에 물고기를 유심히 쳐다봤다.

‘딜런이 잡은 건가? 와. 성질 정말 사납다.’

다원의 반응을 본 물고기가 뒤로 물러나더니 다원을 향해 다시 한번 돌진했다. 쿵!

‘으. 내가 다 아프네. 수족관 안이 답답한가? 그런데 정말 딜런은 어디 갔지? 딜런!’

물고기는 온몸을 흔들며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 봐야 뚜껑이 덮인 수족관 안이었다. 그저 수면 위가 조금 찰랑거리는 수준이었다.

‘오구오구. 형아가 그렇게 좋아? 그런데 딜런 못 봤어? 너 잡아 온 남자.’

파다닥, 파다닥. 물고기가 한층 사납게 몸부림쳤다.

‘아…… 너한테는 유감이겠구나. 널 잡은 사람을 너에게 물어보다니.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 어, 네이선! 이 물고기 봤어? 신기해. 왠지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아.’

네이선은 수족관을 지그시 바라봤다. 푸더덕. 푸더덕. 물고기는 수족관 안을 빙빙 돌며 벽을 꼬리로 치고 머리로 박고 더 난리를 부렸다.

‘성질 더러운 형이 꽤 답답하겠다.’

‘어? 안 그래도 딜런이 안 보여. 네이선, 딜런 어디 있는지 알아?’

‘응. 걱정 마. 형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곳에서 잘 있어. 가자. 내가 밥해 줄게. 넌 아이돌 보면서 푹 쉬어.’

‘아……. 그래도 될까? 딜런도 안 들어왔는데…….’

‘응. 형이 먼저 먹고 자라고 했어.’

‘그래? 무슨 일이래?’

‘나도 몰라. 네가 좋아하는 ‘볶음밥’ 해 줄게. 어서 와.’

‘어? 신난다. 헤헤.’

네이선은 다원의 손을 잡고 수족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물고기, 딜런은 손이 아닌 꼬리지느러미를 열심히 흔들며 수족관 안에서 뻐끔거릴 뿐이었다.

딜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딜런은 단숨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헉헉. 이게 무슨 거지 같은 꿈이야?”

딜런은 제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사람 맞네. 후우.”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다원도 확인하자 웃음이 나왔다.

‘하아. 다행이다. 미치겠네. 좀 섭섭했다고 그런 꿈을 꾸는 게 말이 돼? 내가 졌다, 졌어.’

딜런은 다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으응.”

“항복이다. 항복.”

“흐음. 딜런……. 몇 시야?”

딜런의 손이 다원의 상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음. 딜런.”

“다원아, 나 무서운 꿈 꿨어. 안아 줘.”

딜런은 비몽사몽간인 다원의 파자마 바지를 벗기고 어느새 바짝 서 버린 것을 다원의 아랫배며 아래에 비볐다. 으응. 다원은 잠결에 치근덕거리는 딜런이 귀찮은 듯 그를 밀어 냈다.

딜런은 칭얼거리는 그의 젖꼭지를 살살 빨아 당겼다. 결국 다원의 미끈한 다리가 딜런의 허리를 감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딜런은 다원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단단하게 선 아래를 잡고 다원의 입구를 꾹꾹 누르고 살살 비볐다.

하아. 달아오른 다원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나올수록 그의 아래도 촉촉해졌다. 딜런은 그의 안으로 조금씩 들어갔다가 뒤로 물리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다원은 깊고 긴 신음을 내뱉었다. 다원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길고 하얀 목이 훤히 드러났다.

“다원아.”

딜런은 그의 목에 부드럽게 키스를 하며 끝까지 치고 들어갔다. 그의 안이 꿈틀거리며 딜런의 것에 착 달라붙었다. 딜런은 다원의 안에서 제 것을 반쯤 뺐다가 다시 쿵 하고 박아 넣었다.

“하아. 하아.”

딜런의 움직임이 반복될수록 다원의 신음이 짙어졌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그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다원의 다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딜런은 마지막 순간 다원의 것을 잡았다. 그리고 끝까지 세게 치고 들어갔다.

“크흣.”

“흐으.”

둘은 가쁜 숨을 내쉬며 조금의 빈틈도 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창가에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창가 바로 옆 침대 위, 딜런과 다원은 꼭 끌어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일 뭐 할 거야?”

“글쎄. 어머니네 갈까?”

“…….”

딜런은 다원을 빤히 내려다봤다. 딜런에게서 대답이 없자 다원은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봤다.

“왜?”

“진심인가 싶어서.”

“뭐가?”

“이렇게 로맨틱하고 섹시한 분위기에서 엄마를 보러 가자니. 말이 돼?”

다원은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딜런을 올려다봤다. 딜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의 이마며 코며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우리 바다에 가자.”

“바다?”

“진작부터 너한테 바다를 보여 주고 싶었는데 여태 한 번도 못 보여 줬어. 오늘이 아니면 또 얼마나 늦춰질지 모르겠단 말이야. 오늘 새벽엔 틀림없이 바다가 잔잔할 거야. 가자.”

“우와.”

아이처럼 좋아하는 다원을 딜런은 더 바짝 끌어당겨 안으며 이불을 고쳐 덮었다.

“자자. 새벽같이 나가려면 일찍 자야 해.”

* * *

깜빡깜빡.

다원의 눈동자가 말똥말똥했다. 등 뒤에선 딜런이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다원은 잠시 그를 살피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벽 3시 30분이었다. 다원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흐음.”

딜런이 뒤척이자 다원은 가만히 숨죽였다. 딜런에게서 다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다원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서서 그의 어깨까지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어제저녁, 핸드폰에 정신을 팔고 모처럼 만들어 준 식사를 대강 먹는 바람에 딜런을 서운하게 했던 것을 보상해 줄 생각이었다. 마음이 상해 섭섭해했으면서도 무서운 꿈을 꿨다며 제게 안겨 든 그를 떠올리자 미안함과 고마움, 사랑스러움으로 가슴속이 충만해진 것이다. 곧장 부엌으로 향한 다원은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장을 봐 놓을걸. 역시 아무것도 없네.” 

원래 계획은 김밥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었다. 다원은 다용도실로 달려가 선반을 뒤적거렸다. 밥하기 귀찮을 때를 대비해 비상용으로 구비해 놓은 것들이 그의 손끝에 걸렸다.

“오호. 역시. 내 기억력은 틀린 적이 없어.”

그의 손에 들린 건 참치 캔과 조미김이었다.

다원은 싱크대 위에 참치 캔과 김을 올려 두고 큰 볼을 꺼냈다. 그러곤 즉석 밥 세 개를 쏟아부었다.

“쟤네들이 짭조름하니까 조금만 간을 하면 되겠지?”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소금과 참기름, 깨까지 뿌리고 주걱으로 뒤적거렸다. 대충 다 섞어지자 밥을 놔두고 이번엔 조금 작은 볼을 꺼냈다. 이어서 참치 캔을 따 기름을 짜 버리고 볼에 모조리 쏟아붓고는 마요네즈를 쭉 짰다.

“이크. 너무 많이 짰네. 딜런이 싫어하겠다.”

이건 사랑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운 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다원은 좋은 생각이 떠올라 다시 다용도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양파 하나를 꺼내 와서는 서둘러 껍질을 까고 잘게 다졌다.

다진 양파를 참치가 담긴 볼에 담고 위생 팩 한 장을 꺼내 그 안에 조미김 다섯 봉지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씨익. 다원은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구를 꼭 잡고는 마구 주무르기 시작했다.

김이 말 그대로 김 가루가 되었을 때쯤 위생팩을 조심스럽게 내려 두고 이번엔 일회용 비닐장갑을 양손에 꼈다. 그리고 밥을 한 주먹 쥐고 동그랗게 만들더니 송편 빚듯이 안을 움푹하게 만들어 참치 양념을 안에 넣고는 잘 오므렸다.

손바닥 위에 동그란 주먹밥을 올려 요리조리 보던 다원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주먹밥을 위생 팩 안으로 폭 빠뜨렸다. 위생 팩 안에서 몇 번 굴려진 밥은 새까맣게 김 가루를 뒤집어써 버렸다.

“폭탄 밥 완성이다!”

다원은 똑같은 과정을 다섯 번 더 반복했다. 아직 창밖은 아직 깜깜했다.

4시 20분,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아도 거의 같은 시간에 기상하는 딜런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다원을 찾아 옆자리를 더듬거리던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야? 설마 아직도 꿈이야? 물고기?”

이불을 젖힌 딜런은 어젯밤 다원과 사랑을 나눈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제 몸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고기가 된 악몽과 달리 멀쩡한 인간의 몸이었다.

‘그럼 다원은 어디 간 거지?’

벌써 씻으러 간 건가 의아해하며 딜런은 침대 프레임에 걸쳐 두었던 바지를 입었다. 방 밖으로 나가자 계단 아래에서 불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1층으로 향했다.

“다원. 어?”

딜런은 다원을 부르다 말고 계단 끝에서 코를 벌름거렸다. 발소리를 죽여 부엌 안을 들여다본 딜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다원은 딜런이 보는 줄도 모르고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묘하게…… 야하네.’

까치집을 지은 머리, 헐렁한 파자마, 다 구겨진 얇은 티셔츠. 그 너머로 미끈한 몸이 아슬아슬하게 비쳐 보였다. 씨이익. 딜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다원은 다 만든 폭탄 밥을 담을 그릇을 찾아 그릇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틀에 서 있는 딜런을 발견하고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어!”

짝다리를 짚고 문틀에 기대어 서 있는 딜런은 사방팔방 삐죽삐죽 뻗은 머리에 부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새하얀 상체엔 여기저기 옅은 분홍색 자국이 남아 있었다. 딜런의 멋진 장골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회색 트레이닝 반바지는 그의 아랫도리 윤곽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다원은 귀 끝에 걸리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고개를 돌렸다.

딜런은 다원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으며 키스를 하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다원이 피하는 바람에 딜런의 입술은 공중에 어중간하게 멈춰 버렸다. 딜런이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자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다원이 웅얼거렸다.

“안 씻었어. 양치도 안 했어.”

“나도 그래.”

“그래. 그러니까…….”

“헐.”

“풋!”

다원은 딜런의 목에 팔을 둘렀다. 딜런은 다원의 늘씬한 허리를 끌어안으며 진한 모닝 키스를 나누었다.

“좋은데.”

“헤헤. 나도.”

“그런데 뭐 하는 거야?”

“배 위에서 먹을 거.”

“정체가 뭐지?”

딜런이 새까만 덩어리를 향해 다가가려 하자 다원이 막아섰다.

“아직은 비밀.”

“지금 당장 밝혀내고 싶지만…… 서둘러야 해. 뭐 도와줄 거 없어?”

“응. 다 했어.”

“그럼 난 배에서 맛있는 커피를 타 줄게.”

“응. 기대할게.”

정확하게 5분 후, 딜런은 문밖에서 다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발은 쉼 없이 까딱거렸고 눈은 아예 시계에 박혀 버린 듯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재촉의 말은 없었다.

딜런이 숨넘어가기 직전, 다원은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딜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얼른 바구니를 받아들고 차 문을 열었다. 다원은 들뜬 얼굴로 조수석에 탔고 딜런은 날 듯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딜런의 말대로 바다는 잔잔했다. 갑판 위엔 체크무늬 피크닉 돗자리가 깔렸다. 피크닉 바구니를 옆에 낀 다원이 딜런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조타석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딜런도 다원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딜런은 이제 막 추출이 끝난 커피에 따뜻한 우유를 부었다. 안전을 확인한 그는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다원의 곁에 가 앉았다.

“여기. 아직 조금 뜨거워.”

“고마워. 바다 위에서 애인이 만들어 준 라테를 마시다니……. 정말 영화 같아.”

“너의 폭탄 밥만 할까. 다음부턴 마요네즈는 좀 빼 줘.”

“풋! 그럴 줄 알았어.”

“바다로 소풍 온 기분이 어때?”

“짜릿해. 넌?”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원은 딜런의 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하. 역시 너를 닮았어.”

딜런은 다원의 손에 들린 커피 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에게 라테 같은 진하고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이제 막 바다 위로 떠오른 해가 그들을 붉게 물들였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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