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9)

8장.

다원의 눈이 갑자기 떠졌다.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피자 버스는 도로 위를 잘 달리고 있었다. 버스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다원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부터 꿈을 꾸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 후로 다원은 왜 체이스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 그와는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왜 얹혀산다는 부채 의식에 시달려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러나 밀어붙이는 데 약한 그는 휘둘리기만 했고, 모든 의문의 답을 찾는 것을 체념하자 그 자리엔 끝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단지 소유하려 할 뿐인 것 같기도 한 체이스에 대한 다양한 감정이 조금씩 고개를 들 무렵. 다원의 앞에 데미안이 나타났다.

데미안의 첫인상은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체이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그는 참 잘난 남자였다. 남자가 요염하고 섹시하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느낌인지 알게 해 준 남자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체이스에게 마음이 기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체이스의 행동은 그때의 다원이 보기에도 옳지 않았다. 부당했다. 그에게 따지기도 하고 화도 내 보고 대들기도 했었다. 나중엔 매달리고 애원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에게 억지로 잡혀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던 다원에게 데미안은 어찌 보면 오아시스 같은 사람이었다.

처음 데미안은 다원에게 아주 관대했었다. 한동안 데미안과의 만남이 기다려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곧 다원은 데미안이 체이스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완벽한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참 당당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체이스와 다원의 만남이 길어지자 데미안은 점점 변해 갔다. 급기야 체이스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지고 말았다.

‘어이없고 유치했지. 아주 치사했어. 비겁하고.’

그쯤 다원의 생각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잘난 데미안이 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사랑해 주니 우쭐해질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이 구박하고 괴롭힐수록 더 그랬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자기가 가장 어리석었다고 다원은 생각했다.

‘나도 정상은 아니었나 봐.’

아무튼 다원은 체이스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저 역시 체이스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이왕 할 거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체이스는 다원이 마음을 열자 그때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매일매일 한계치에 달하는 쾌락을 안겨 주었다. 정말이지 살이 내리고 뼈가 삭는다는 게 실감이 날 만큼 힘든 나날이었다.

‘우리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하는 고민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

‘뭔데?’

‘복에 겨운 고민.’

체이스는 연인들이 이별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속궁합이라고 말하며 핀잔을 주었다.

‘하여간 복에 겨워 징징거리기는. 내가 널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 넌 모를 거야.’

‘나도 노력하거든? 매일매일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그래? 그럼 오늘도 우리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같이 노력해 볼까?’

‘으윽. 내가 또 내 발등을 찍었어.’

그렇게 체이스는 다원의 말을 매번 철없는 어린아이의 고민이라 치부했다. 어쩌면 그게 모든 문제의 발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체이스가 불만을 내비친 건 거기서부터였으니까.

다원은 지난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다하고 그와의 앙금마저 완전히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체이스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불과 1년 전의 일이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오자 내릴 곳을 확인했다. 바로 다음 정류장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다원은 시간부터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약속이 많은 체이스는 어쩌면 회사에 없을 수도 있었다.

‘약속을 잡지 않고 왔는데……. 차라리 약속을 잡고 다시 올까?’

다원은 체이스의 회사 건물 앞에서 또다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리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지만 회사 건물 앞에서 오랜 시간 서성이는 건 좋지 않았다.

‘이왕 왔으니까 회사 안에 들어가 보기라도 하자. 그다음은…….’

결정을 내리고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다원!”

“타미?”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역시 착하게 산 보람이 있어.”

다원은 대로 한중간에서 신을 찾는 체이스의 친구이자 전 직장 상사인 타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신? 착하게?”

“다원, 따라와요.”

타미는 다짜고짜 다원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쨌든 그와 함께 들어간다면 적어도 체이스의 사무실까지는 곧장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원을 끌고 가는 곳은 체이스의 회사 쪽이 아니었다.

“어라? 타미 씨. 어디 가는 거예요? 저는 체이스랑…….”

“일단 우리 따로 이야기 좀 해. 체이스를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타미는 다원을 차에 구겨 넣다시피 태우고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타미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서른 중반을 넘긴 남자는 진지하고 무거웠다. 다원은 오랜만에 만난 타미가 반가우면서도 낯설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여행도 하고 일도 하고…… 잘 지냈어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다원은 그에게 차마 잘 지냈냐고 묻지 못했다. 피곤한 낯에다 대고 그렇게 물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타미 씨한테 체이스의 사무실까지 같이 가 달라고 어떻게 말하지?’

다원은 앞에 놓인 새까만 커피만 내려다보았다.

한편 타미는 머리를 풀가동시키고 있었다. 그에게 다원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구세주였다.

‘역시 사람은 죽으라는 법은 없어. 오, 하느님. 역시 제 사인은 과로사가 아니었던 거죠?’

타미는 지난 1년 내내 과중한 업무에 허덕였다.

다원이 제 밑에서 일하는 동안 그가 많은 업무를 맡고 있던 건 타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원은 일하는 동안 한 번도 불평이 없었다. 그가 모든 업무량을 감당한 데다 잘해 냈기에 타미는 그러려니 했었다. 졸업 후 취업을 원하던 다원에게는 능력을 검증받을 좋은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업무량은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는 걸 타미는 다원이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중요한 여행이었나 봐? 그때 다원의 목적은 뚜렷했잖아. 취업.”

“네, 그랬죠.”

“능력도 충분히 검증됐고 그대로 한 달만 지났다면 분명 괜찮은 조건에 정직원으로 채용됐을 텐데…….”

“그랬…… 어요?”

만일 회사가 그를 고용하지 않더라도 타미는 그를 개인 비서로라도 채용할 작정으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사라졌고, 체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친구는 없었다. 데미안은 하루가 멀다 하고 타미와 다른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다원의 흉을 보곤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타미는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지금 다원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체이스를 찾아온 모양이었지만, 무슨 이유든 간에 타미는 다원을 그와 만나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타미는 제가 하고 싶은 말부터 꺼냈다.

“아무튼 잘 만났어, 다원. 당신이 사라지고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다원은 타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와 다원 사이엔 그럴 만한 감정의 교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그때 내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서 당신이 오해한 건 아닌가 해서.”

“네? 무슨 오해요?”

다원은 타미의 말이 의아했다. 이미 1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타미는 그날의 일을 다원에게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아무 소용없겠지만, 난 해야겠어. 당신과 내 관계 회복을 위해 들어 줘야 해. 인턴 채용 최종 인터뷰를 위해 서류 심사를 했을 때 일이야. 그땐 다른 업무도 많아 이런저런 서류가 뒤엉켜 있었지. 내 책상 위는 그야말로 종이 폭탄을 맞은 상태였어. 알지? 내 책상 상태?”

다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타미는 회계사들 사이에서 반항아 내지는 돌연변이로 통했다. 대부분의 회계 관련 종사자들은 책상만큼은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에 반해 타미의 책상은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다. 신기한 것은 그 와중에 필요한 서류를 척척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날 체이스가 점심 약속을 위해 찾아왔어. 미리 변명을 하자면 난 정말 정신이 없었어. 약속 시간이 지나가는데도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 허둥대기 시작했지. 그런데 막무가내로 보채고 화를 낼 줄 알았던 체이스가 얌전한 거야.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당신은 알지?”

“네.”

체이스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진중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의 상속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반대였다. 몇몇 지인들만 아는 그의 진짜 모습은 급하고 참을성이 없었다.

“그게 하도 이상하고 무섭기도 해서 슬쩍 곁눈질했어. 그런데 그 녀석이 어딘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 그러느라 약속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게 바로 당신 서류였지.”

“아…….”

“당신 서류는 서류철에 가려져 있었는데 말이야. 사진과 당신의 나이와 글쎄…… 학교 이름이 보였을까? 아무튼 그게 다야. 체이스가 내게 따로 언질을 준 건 아무것도 없었어.”

“……어쨌든 당신은 체이스와 내가 아는 사이라는 걸 그때 알았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당신은 이미 최종 인터뷰 대상자였어.”

“아……!”

“다원. 인터뷰에서 나를 봤어?”

다원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인터뷰 심사에 참여한 누구에게도 당신의 이름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 만일 그랬다면 당신은 부정 청탁을 이유로 인터뷰에 오지도 못했을 거야.”

“네?”

“오, 다원. 빽을 쓴다는 건 그런 거야. 또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오고 가야 하고. 나 아직 회사에 그 정도 끗발은 없어. 같이 일해 봐서 알잖아. 나 같은 사람이 그런 부탁을 한다면 당신은 물론이고 나도 좋을 일 없어.”

“그럼…….”

“당신이 우리 회사에 들어온 것, 나와 일을 하게 된 건 정말 당신의 능력으로 이룬 거였어. 물론 내가 당신을 조금 더 눈여겨본 것은 체이스의 영향이 있었다고 인정하지.”

“아, 그때 인정한다는 게…….”

“그리고 당신의 평가가 나쁠 리가 없잖아. 당신의 실력과 성실함은 정말 최고 수준인데. 그건 내가 정말 잘 알지.”

“하아.”

다원은 허탈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 당연히 체이스가 부탁을 해서 절 뽑으신 줄 알았어요.”

“난 그날 당신이 너무 상심하고 낙담해서 평소 당신의 결벽증, 아니 내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래. 평소에도 당신은 아무리 작은 거라도 이유 없는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잖아. 난 그것 때문인 줄 알았지. 게다가 당신이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바람에 더 정신이 없었던 거라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좀 더 자세하게…….”

“아무튼 당신, 이번엔 절대 안 돼.”

“네? 뭘요?”

“절대로 마음대로 사라질 수 없다고.”

다원은 타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타미가 갑자기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다원, 다시 나랑 일해 주면 안 될까?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아니, 타미 씨! 갑자기 왜 이러세요?”

타미는 허리까지 숙이며 부탁했다. 놀란 다원은 일어나려다 무거운 의자와 탁자 사이에 구부정한 자세로 끼어 버렸다. 급한 마음에 손사래부터 치자 타미는 공중에서 팔랑거리는 다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정말 절박해 보였다.

“정말 죽을 지경이야. 인턴들은 학교에서 도대체 뭘 배워 오는 건지 숫자도 똑바로 입력 못 해. 다 해서 갖다 바쳐도 입에 넣을 줄도 몰라. 위에서는 닦달하지, 밑에서는 꽉 막혀 있지. 내가 정말 죽을 지경이야. 나랑 같이 일해. 너랑 일할 때가 정말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어.”

“하지만 전 체이스와 해결할 일이…….”

타미는 다원의 입에서 체이스의 이름이 나오자 정색하더니 손을 놓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갑자기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다원은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아 눈치를 살폈다. 타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봐, 다시는 그 근처에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마.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그들…… 체이스와 세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뭐 때문에 그들을 만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자세한 내막은 알 필요도 없어. 그저 그들의 덫에 걸리면 이상하고 추잡한 소문의 주인공이 될 거란 것만 알아 둬. 이건 그날 내 부족했던 설명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하는 말이야.”

타미는 다원에게 그 이상하고 추잡한 소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았다. 다원 역시 묻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원이 여기에 온 목적은 명확했다.

“저와 체이스 간의 일이라 타미 씨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아무튼 저희 둘 사이의 시작과 끝은 어떻게 보면 체이스의 일방적인 선택이었어요.”

타미는 다원의 말에 귀 기울였다. 다원은 자신의 생각을 마저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체이스를 만나려는 건, 저 스스로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예요. 그래야지만 다시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더 이상 제 인생을 남이 결정하는 건 허락할 수 없으니까요.”

타미의 눈엔 다원이 그저 불쌍하고 안타까워 보일 뿐이었다.

‘어쩌다가 비정상적인 녀석들과 엮여서는…….’

타미는 다원의 개인적인 일, 특히 감정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일 때문에 다원이 필요할 뿐이었다. 안 그래도 피곤하고 바쁜 타미는 더 이상 심신을 낭비할 수 없었다.

타미는 다원이 눈치채지 못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어쩔 수 없지.’

타미는 결심했다. 다원을 체이스에게서 구하고, 동시에 타미 자신을 일의 구렁텅이에서 구하기로.

“다원. 장담하건대 체이스는 다시는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굴지 않을 거야. 그 녀석은 지금 당신을 한때의 추억으로 고이 묻었어. 그리고 새 출발을 했다는 것에 지금까지의 내 회계 인생의 모든 노하우를 걸지.”

“네?”

“그리고 당신이 지금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앞으로 당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는 데 내 앞으로의 회계 인생을 걸겠어.”

“…….”

타미는 다원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자세하게 말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면 정말 귀찮아질 터였다.

혼란스러운 다원의 눈빛이 차츰 차분하게 가라앉을 무렵, 타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 둘의 이야기를 해 봅시다, 하다원 씨.”

* * *

6개월 후.

“내일 봐요.”

“응. 조심해서 가.”

“다원, 지하철역까지 태워 줄까?”

“아니에요. 모처럼 일찍 마쳤으니 천천히 걸을래요.”

“왜. 가는 길인데 태워 줄게.”

다원은 자신의 옆구리 살을 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이거 봐요. 살이 장난 아니에요.”

“나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감히 우리 앞에서 그따위 가죽을 잡고 살 운운하는 거야?”

“으아악. 살려 주세요!”

같은 부서의 여자 동료들과 티격태격 퇴근 인사가 길어지는 다원이었다.

타미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꺼내 들었다. 창문 너머로 여전히 여자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로 그보다는 조금 낮고 부드러운 다원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분위기로 봐서는 앞으로 5분 안에 그들이 주차장을 벗어나기는 요원해 보였다.

‘도대체가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웃을 일이 그렇게 없나?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말이야.’

만일 오늘 결재 서류가 엉망이었다면 전부 야근을 시켰을 터였다. 다원에게 감사한 줄 알라고 생각하며 타미는 재킷을 입고 목도리를 느긋하게 두르며 신경 써서 모양을 잡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미리 가 봐야 피곤할 뿐이었다.

모처럼 다 한자리에 모이게 될 대학 동창들의 저녁 식사 자리였다. 타미는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또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 * *

결국 다원은 동료의 차를 타고 지하철역 앞에서 내렸다.

“태워 줘서 고마워요. 잘 가요.”

“내일 봐요.”

집까지는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을 더 가야 했다. 다원이 사는 동네는 다운타운과 주거 전용 지역이 만나는 곳이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어수선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그에겐 이른 저녁 시간 약간의 소음 정도는 괜찮았다. 오히려 좋았다. 다원은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는 내내 저녁 식사로 중국 음식과 베트남 음식을 두고 고민했지만 결국 어마어마하게 큰 피자 한 조각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은 우편함을 눈으로 한 번 확인하고 2층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보이는 203호가 지금 다원이 머물고 있는 방이었다. 조금 어긋난 문을 열기 위해선 손잡이를 잡고 위로 살짝 올려 당겨야 했다.

“끙차.”

좁은 현관엔 운동화,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열 때와 같이 손잡이를 올려 당겨 문을 닫은 후 슬리퍼 옆에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 정리하고 실내화를 신었다. 벽에 붙은 작은 식탁 위에 피자 상자를 올려 두고 작은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다음엔 키친타월 한 장을 뽑아 손을 닦고 싱크대에 튄 물기도 닦아 주었다.

바지와 재킷을 벗어 벽에 걸린 옷걸이에 걸었다. 아침에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 두었던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피자 상자를 든 다원이 침대에 앉았다.

“아, 맥주.”

귀찮았지만 피자 상자를 옆에 둔 다원은 간신히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한 칸짜리 냉장고엔 작은 캔 맥주와 물이 전부였다. 맥주를 꺼내 들던 다원은 도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아이스커피를 탔다.

‘딜런…….’

커피를 타니 자연스레 딜런이 떠올랐다. 다원은 막대를 천천히 저었다. 딸그락딸그락. 긴 유리컵 안의 얼음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주변에 울려 퍼졌다.

처음 함께 일하자는 타미의 제안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다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 체이스가 데미안과 사귀기로 했다면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타미의 말대로 괜히 앞에 알짱거렸다가 데미안에게 또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데미안과 사귀는 체이스 역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다원은 피자를 한 입 베어 물고 오물거렸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날 체이스가 나를 찾아온 건 단순히…….’

다원은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체이스는 거의 다원을 탓하는 이야기만 했던 것 같았다.

‘난 왜 체이스가 나랑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생각한 거지?’

씹던 피자를 삼키고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컵을 내려다본 다원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았다.

‘딜런…… 보고 싶어.’

어둠이 내려앉고 밖엔 하나둘 가로등이 켜졌다. 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밤을 즐겁게 보내려는 사람들로 뒤섞이고 있었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다원은 컵과 피자를 내려 두고 침대 옆 작은 서랍장 중 가장 위 칸을 열었다. 그러곤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미 여러 번 읽어 접힌 부분이 조금 해진 편지는 네이선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는 캐서린을 닮아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남자였다.

처음 이 집을 얻고 다원은 곧바로 네이선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가족 중 누군가에겐 무사히 잘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다원이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네이선이었다.

네이선이 어머니와 딜런에게 소식을 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원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그는 그 후로 간간이 편지를 보내왔다. 다원은 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지만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다원은 그의 편지에 한 줄 적힌 딜런의 소식을 쫓았다.

* * *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좋은 아침입니다.”

딜런은 리조트 업무를 보기 위해 출근하는 길이었다. 12평에서 20평 정도 규모의 통나무 오두막 형태의 펜션 열 채가 있는 리조트였다. 숙박과 요트 대여, 낚시 체험 등을 묶은 여행 패키지 상품은 괜찮은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딜런은 관리 직원을 늘리고 시설 보수는 네이선에게 맡겼다. 올해 요리를 배우겠다던 그를 딜런은 한 마디로 굴복시켰다.

‘다원이 돌아오면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네이선은 두말하지 않고 시설 보수 일을 시작했다. 딜런도 물어보지 않고 네이선도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었다. 네이선이 다원과 연락하고 있고, 딜런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둘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다원의 자리를 만들고 지키고 있었다.

딜런은 오늘도 부지런히 차를 몰아 항구의 카페로 향했다.

“딜런! 얼마나 기다린 줄 아나?”

가게 앞 벤치에는 이미 터줏대감 둘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지긋지긋하네요.”

“하여간에 쟨 누구 닮아서 저렇게 속 다르고 겉 다르대요?”

“제 애비를 닮았지. 누굴 닮아, 닮기는…….”

“하긴.”

딜런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카페 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짐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났다. 잔뜩 인상을 쓰고 투덜거리는 딜런이지만 그가 점심도 먹지 않고 허겁지겁 온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환기가 다 됐나?”

“참, 이것 좀 가져왔어. 어제 만들다 보니 글쎄 너무 많이 만들었지 뭐야. 놔두면 먹을 일도 없고.”

“나도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손이 큰지. 이걸 누가 다 먹어? 그래서 가져왔지.”

헨리의 어머니가 테이블 위에 따끈따끈한 스파게티가 든 통을 올려 두었다. 그 옆에 쿠키가 담긴 통도 놓였다. 딜런은 말없이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 * *

“다원. 요즘 퇴근하고 어디를 그렇게 가는 거야?”

“아…….”

“뭐야? 뭔데? 우리 사이에 비밀 있기, 없기?”

다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주저주저하다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들에게는 그냥 빨리 털어놓는 것이 상책이었다.

“빵 만들기를 좀…….”

“어머나!”

“우리 다원은 정말 다정한 남자라니까.”

다원이 노처녀 동료들의 이쁨을 듬뿍 받고 있는 그때 타미의 방에 손님이 들어갔다.

“자! 우리도 식사하고 옵시다.”

“앗! 저 이것만 정리하면 되는데…….”

다원이 난처한 얼굴을 하자 동료가 지갑을 챙기며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확인했다.

“그럼 하고 와. 우리가 먼저 가서 시켜 놓고 있을게. 달걀은 반만 익히면 되지?”

“넵!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모두 나간 사무실은 조용했다. 다원은 빠르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채 5분이 지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타미의 사무실 문도 열렸다. 다원은 엉겁결에 책상 아래 숨어 버렸다.

스스로의 행동에 어처구니없어하던 사이, 타미와 손님의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미 나가기에는 늦었으니 둘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때였다.

“그러니까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거야?”

“글쎄 그렇대. 세실이…….”

“쉿!”

“믿어져? 체이스가 그 사람이랑 그럴 줄은 몰랐다고,”

“걔네들 사정이야. 말조심해.”

“누가 듣는다고 그래. 아무도 없는데.”

“혹시 모르잖아. 책상 밑에 쥐새끼가 있을지.”

“소름 돋아! 체이스도 체이스지만 세실한텐 찍히면 안 되겠어.”

“데미안 꼴 나기 싫으면 조용히 해라.”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하루아침에……. 이미지는 박살 났지, 일자리도 잃었지…….”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는 그들의 대화 소리에 다원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체이스와 세실에게 밉보인 데미안의 처지가 눈 뜨고 보기 힘든 꼴이 된 모양이었다. 뜻밖의 이야기에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간 뒤에도 한동안 다원은 멍해 있었다.

따르르르릉.

“히이익!”

쿵!

“아악. 윽. 내 머리…….”

갑작스레 울린 전화에 벌떡 일어나다가 책상에 부딪친 다원은 머리를 감싸 쥐며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지금 나가요.”

* * *

“타미 씨.”

다원이 결재 서류를 타미의 책상 위에 올려 두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던 타미는 건성으로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응.”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해 봐.”

“이달이 11개월째 되는 달이라 약속대로 이제 그만…….”

“아…… 벌써 그렇게 된 거야?”

타미가 스케줄러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커피 한잔할까?”

“네.”

타미는 커피를 새로 내렸다. 그동안 다원은 뻘쭘하게 앉아 그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긴 3분이 지나가고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이 놓였다. 두 잔의 컵에서 나란히 하얀 김이 올라왔다.

“정말 그만두려고? 왜? 따로 갈 데가 있어?”

“아…… 따로 직장을 구했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없어요.”

“그런데 왜?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만큼 괜찮은 조건의 회사는 없을 텐데. 처음 1년 계약이라는 말은 당신이 하도 망설여서 한 말이었어. 알잖아?”

“네. 하지만…….”

“혹시 체이스 때문이야? 만일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 그가 여기 올 일은 없을 거야. 당신이 찾아가는 게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갈 일 없어요. 그리고 체이스 때문은 아니에요.”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군.”

다원은 별다른 말 없이 앞에 놓인 새까만 커피를 바라봤다. 타미도 이쯤 되자 더 이상 다원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꺼냈다.

“그래, 알았어. 당신 고집을 어떻게 말려. 더 있어 준다면 좋겠지만 당신이 꼭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음 사람 구할 때까지는 있어 줘야 해. 인수인계도 확실히 해 주고.”

“네, 당연하죠. 그동안 감사했어요.”

잠시 뜸을 들이던 타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원 씨. 그동안 당신 덕분에 편하게 일한 대가로 하는 말인데……. 절대로 이 지역 근처로는 얼씬거리지도 마. 알았지?”

“그, 체이스랑 세실 소문 때문인가요?”

일하는 동안 그들의 ‘이상하고 추잡한 소문’에 대해 얼핏 듣게 되었던 다원이 물었지만 타미는 눈썹을 찡긋하며 웃어 보일 뿐 확답하지 않았다.

“다원 씨. 당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야. 내가 당신 실력과 능력을 높이 사는 거 알지? 잃기엔 아까운 사람이니까, 당신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

타미의 이런 분위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원은 눈만 끔뻑거렸다.

“이런. 너무 겁먹지 마. 나나 당신은 그들 세상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 우린 하루하루 먹고살기 퍽퍽한 샐러리맨일 뿐인걸.”

타미는 다원을 달래듯 엷게 미소 지었다.

* * *

회사 복도를 걷는 세실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가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숙덕거렸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서야 세실은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여간 벌레 같은 것들.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할 것들이…….’

아무렇지 않았던 그의 표정이 조금 무너졌다. 작정하고 온갖 이야기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데미안 때문에 요즘 세실의 심기는 아주 불편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한 세실은 손잡이를 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

소곤소곤 웅성웅성. 업무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사무실 안은 어수선했다.

‘지랄들을 하는군!’

세실은 손잡이를 돌리자마자 문을 확 열어젖혔다. 후다닥. 안에 있던 이들이 서둘러 흩어지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는 짜증이 솟구쳐 올랐지만 꾹 참았다.

‘성질부려 봤자 소문을 인정하는 꼴밖에 더 되겠어? 두고 봐. 가만두지 않겠어.’

세실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모두들 자기 일에 집중하도록 하세요. 당신들이 모시는 상관의 뒷말은 회사 밖에서 하고. 적어도 그 정도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조용. 순식간에 사무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자리에 가 앉은 세실은 회사 내 모두에게 해야 할 일을 한가득 안겨 주었다.

비서실 직원들이 질식해 죽기 직전, 다시 한번 문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모든 직원들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현재 사무실 안의 모든 책상은 꽉 찼다. 단 하나, 블라인드가 내려진 유리창 너머 그들의 상관 책상만이 비어 있었다. 저희의 상관이 세실을 말려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들이 반짝였다. 곧 사무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그들의 상관, 체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체이스는 사무실에 한 발 들이다 멈칫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게, 세실이 화풀이를 했음을 알아챈 그는 직원들을 향해 공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직원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살짝 드리웠다.

“모두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체이스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가로질러 그의 방 앞에 도착했다. 직원들의 얼굴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세실, 내 방에 들어와. 확인할 게 있어.”

직원들은 내심 쾌재를 외치며 자신들의 멋진 상관을 찬양했다.

능력 있는 젊은 기업가이자 상속자의 스캔들은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잠잠해져 갔다. 변함없는 그의 모습과 그를 지지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의 역할이 한몫했다. 그리고 줌 기능으로 찍힌 사진 한 장이 결정적이었다. 깊은 숲속에 위치한 요새와도 같은 개인 별장에서 얼굴만 봐도 알 만한 집의 고명딸을 안고 있는 체이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 한 장의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것 봐. 내가 뭐랬어! 그럴 리 없댔지!”

“일부러 찍힌 걸 거야. 어쩜 찍으라고 시킨 건지도 몰라.”

“야! 이 파파라치 몰라? 완전 악질이잖아.”

“하긴. 이 여자가 미쳤다고 남자랑 스캔들 난 남자랑 단둘이 이런 곳에 가겠냐?”

“혹시 또 모르지. 이 여자도…….”

“됐어. 오늘부터 난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고. 그는 역시 내 왕자님이었어!”

연인에게 다정한 체이스의 모습에 젊은 아가씨들부터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긴, 체이스가 그럴 리가 없지. 뭐가 아쉬워서 그러겠어? 돈이며 능력이며 얼굴이며 몸매며 다 가졌는데. 사귀어 달라고 매달리는 사람이 한둘이겠어?”

“이게 다 그 사람 때문이잖아. 체이스 친구인 파티광. 그 사람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니까 괜한 오해가 생긴 거 아냐.”

“아……. 그런 거였어?”

결국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은 단 한 사람에게 돌려졌다.

* * *

다원이 베이커리를 배우기 시작한 지도 여섯 달이 지났다. 다원은 빵 만들기를 배우면서 우연한 기회에 바리스타 과정도 같이 시작했다. 딜런의 카페에서 일하면서 항상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당하게 커피값과 디저트값을 받기 위해서 다원은 최선을 다했다.

오늘 아침도 다원은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다원은 칫솔에 치약을 쭉 짰다. 치카치카. 영혼 없는 칫솔질을 하면서 다원은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내내 시달린 꿈을 되새겨 봤다.

꿈속의 다원은 작고 낡은 칠판에 크루아상의 결을 최대한 살려 그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딜런. 가격은 얼마로 정하면 좋을까?’

‘아마 ……하니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응?’

딜런의 대답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다정했다.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지?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오솔길 쪽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을 사람들이 몰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 제일 앞에 선 사람이 데미안이었다.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아름답고 당당한 개선장군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의 눈이 붉었다.

‘눈이 왜 저 모양이야? 완전 새빨갛잖아. 게다가…….’

좀 더 가까워진 데미안의 낯빛이 이상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 눈이 붉은 좀비로 변해 있었다.

‘으르르릉. 으르르르.’

마지막으로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헉! 으아아아악!’

어느새 으르렁거리는 딜런의 눈도 붉게 변해 있었다.

다원은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퀭한 눈은 붉게 핏발이 서 있었다. 꿈속 좀비보다도 더 좀비 같은 모습이었다. 괜한 꿈을 꾼 탓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베이커리 실기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다원은 꿈에서 딜런과 행복했던 순간까지만을 무한 재생하며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어서 사흘 후엔 바리스타 실기 시험을 쳤다. 결과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홀가분했다.

다원은 집주인에게 다음 달부터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주인은 집이 나갈 때까지는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보증금 문제는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문득 불안감이 찾아들었다.

다원이 세든 건물은 다운타운 외곽에 위치한 탓에 조금 애매한 분위기였다. 주택가처럼 한가롭지도 않았고 다운타운처럼 바쁘고 분주하지도 않았다. 조용한 방 안에서는 그 어중간한 어수선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허해…….’

다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체이스의 그 꺼질 것 같지 않던 일방적인 열정은 다원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땐 그 감정이 공허함인지도 몰랐다. 그저 그의 페이스에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온 우울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데미안과 같이하는 관계에 지쳐 가는 것이리라고 여겼다.

그래도 다원은 체이스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딜런을 만나고서야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원은 체이스를 사랑한 게 아니라 단지 견뎠을 뿐이었다. 체이스가 밀어 낸다고 그대로 밀린 것도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체이스와 자신의 사이에는 더 정리해야 할 문제가 없었다. 원래 접점도 없는 사이였다. 헤어진 순간부터 그와의 사이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정말 정리해야 하는 건, 옛일을 돌아보고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건 저만의 문제였다는 걸 다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안개처럼 늘 뿌옇게 떠돌던 체이스라는 존재가 말끔히 사라지자 드디어 단 한 사람만 선명해졌다. 다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딜런…… 흐윽.”

다원은 딜런이 기다리고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그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원은 그 마음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지 않기 위해 꾹 참았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자꾸만 딜런의 옆에 누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자리가 남아 있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다원은 배낭을 꺼냈다.

‘일단 딱 필요한 것만 가져가자. 내 자리가 없다면…… 하아. 모르겠다.’

대충 짐을 집어넣고 배낭을 잠갔다.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게 갈 시간이었다.

* * *

낡은 배낭 하나를 멘 다원이 이제 막 버스에서 내렸다. 추운 바람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함께 실려 왔다. 그리고 익숙한 나무 냄새와 풀 냄새, 사람 냄새까지.

“하아. 여전해.”

심호흡을 크게 한 다원은 갤러리 숍들이 가득한 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가게가 잠겨 있었다. 간혹 열어 놓은 가게도 있었지만 가게를 지키는 사람도, 구경을 온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갈림길. 다원은 멈춰 섰다.

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이고, 바다를 가르는 익숙한 바윗길도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변함없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나지 않았던 커피 냄새가 옅은 바람에 묻어났다.

‘딜런!’

그의 커피 냄새였다. 다원의 발걸음이 옆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움직였다.

끼이익!

오늘따라 이른 단골들의 방문에 딜런의 표정이 짜증 반, 다행 반으로 묘해졌다.

‘어쩐지 일찍 오고 싶더라니. 하여간 노친네들, 쓸데없이 부지런하기는.’

딜런은 제가 마시기 위해 내린 커피를 아예 옆으로 치웠다. 다시 커피 내릴 준비를 하던 그의 손이 문득 멈췄다. 그는 뭔가에 홀리듯 뒤돌아섰다.

딜런과 다원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꾸르륵꾸르륵. 커피가 내려지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진 카페 안에는 진한 커피 향만 진동했다.

딜런은 붉으락푸르락 심통이 단단히 나 있었다. 그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다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볼 뿐이었다.

“아니, 왜 이제야 왔어?”

“딜런 저 녀석 똥줄이 얼마나 탔게.”

“저 하나밖에 모르던 녀석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게를 열었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얼굴이 반쪽이 됐구먼그래.”

“이제 그만 좀 가지? 나 아직 다원을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했다고!”

딜런의 고함에도 손님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제야 제 모습으로 돌아왔네.”

“그동안은 엄마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비실거리더니.”

“이제 가, 이 노친네들!”

그때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한 번에 터트리는 듯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원이었다.

“흑흑…….”

“이런…….”

“어쩌누.”

“눈물이 나면 울어야지. 실컷 울어.”

모두들 다원의 눈물 앞에 조용해지고 말았다.

모두가 돌아가고 딜런은 아예 카페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그제야 딜런은 다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원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가 안겼다.

“다녀왔어.”

딜런은 다원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 * *

카페 2층,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둘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분위기도 좋고 다 좋은데…… 추워.’

더구나 침낭 없이 이불 하나만을 의지하고 누워 있기엔 꽤 쌀쌀했다. 다원은 딜런의 품으로 점점 파고들었다. 그런데.

“…….”

“…….”

딜런이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다원에게 속삭였다.

“그냥 조금 쉬었다가 집에 가려고 했는데…….”

딜런은 마치 허락을 구하듯 다원의 등을 쓸어내렸다. 다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딜런의 불룩해진 아랫도리에 허벅지를 은근히 비비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려면 좀 곤란하겠지?”

딜런이 다원의 몸을 부드럽게 눕히며 그 위에 몸을 포갰다. 다원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딜런의 체취에 정신이 아찔했다. 다원의 눈동자가 금세 몽롱해졌다. 다원의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에는 딜런만이 가득했다.

‘나 하나뿐이야.’

딜런은 천천히 얼굴을 내려 다원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다원.”

입술을 붙인 채로 딜런의 입술이 움직이자 더 야릇했다. 다원도 따라 움직였다. 딜런은 다원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서로의 혀가 닿더니 비벼졌다. 둘에게선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하아.”

“흐으음.”

서로의 혀가 입 안에서 엉키고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다원의 입가로 흘러내렸다. 딜런이 얼굴 방향을 바꾸려 입술이 잠깐 떨어진 순간에도 둘의 혀는 공중에서 이리저리 엉켰다.

“하아.”

“으으응.”

딜런은 다원에게 달려들어 혀를 물고 쪽 빨아 당기며 놔줬다. 입술을 할짝거리고 턱에서 쇄골까지 쭉 핥아 내리자 다원이 목을 뒤로 젖히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딜런은 달아올랐다.

딜런은 입고 있던 맨투맨 티와 안의 셔츠를 벗어 던지고 다원의 상의를 올려 가슴에 키스했다. 간질거림에 다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배가 아래로 쏙 꺼지면서 날씬한 옆구리가 드러났다.

“왜 이렇게 말랐어. 밥도 안 먹고 다닌 거야?”

“으으응. 잘 챙겨 먹었어. 하아.”

딜런은 다원의 옆구리에 드러난 갈비뼈를 하나하나 더듬어 올라갔다. 작은 젖꼭지를 입에 물자 다원은 딜런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더 해 달라고 조르듯 다리로 허리까지 감았다.

입 안에서 작은 젖꼭지를 혀로 살살 굴려 주자 다원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려 주변의 도톰한 살까지 한입 가득 물어 빨아올리자 다원이 자지러졌다.

“아아앙, 딜런! 흐응.”

딜런이 다원의 등 아래로 손을 넣었다. 다원은 등을 활처럼 휘어 그가 움직이기 수월하도록 도왔다. 딜런은 다원의 등을 부드럽게 훑고 올라가며 옷을 벗겨 내고는 그를 덮어 버렸다. 둘은 잠시 맨살을 겹쳐 서로의 체온과 피부를 느꼈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돌아오는 게 무서웠어.”

딜런의 목을 힘껏 끌어안은 다원은 흐느꼈다.

“아니야. 대화할 생각도 않고 너무 쉽게 현혹돼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딜런은 팔의 작은 근육까지 선명하게 드러날 만큼 다원을 힘주어 안았다. 딜런은 다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엔 물기가 묻어났다.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어. 오만했어. 이해가 부족했어.”

“아니야. 내가 더 부족했어.”

딜런은 다원의 얼굴을 큰 손으로 감싸며 키스했다. 다원도 그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키스했다. 한참을 이어진 키스가 끝나고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코가 빨갛게 변한 둘의 입술과 입술 사이에 콧물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선이 이어졌다.

잠시 쿡쿡 웃던 딜런이 다시 다원에게 달려들며 그의 속옷과 바지를 한 번에 벗겨 버렸다. 다원도 딜런의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내리며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다원이 당기는 만큼 딜런은 꾹 눌렀다. 빈틈없이 맞닿은 아래가 비벼지자 서로의 것이 크기를 더해 갔다.

“추울 텐데.”

“그러니까 얼른…….”

다원이 조르자 딜런도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다는 듯 재빠르게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속옷까지 단번에 벗어 던지고 젤을 다원의 엉덩이에 펴 바른 딜런은 엄지를 그의 안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다원은 다리를 조금 더 벌리곤 꼼지락거리며 자세를 잡고 제 아래를 살짝 잡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흐음, 딜런…….”

그 모습에 딜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야해. 서두르면 안 되는데.”

손가락을 두 개 넣고 조금 더 넓혔다. 딜런도 이미 바짝 서 프리컴을 흘리고 있는 제 아래를 쓰다듬었다. 움직임이 조금 수월해지자 딜런이 자세를 고쳐 잡고 동의를 구하듯 다원을 바라봤다.

다원은 무릎 아래를 잡아 다리를 제 가슴 쪽으로 당겨 붙였다. 딜런은 제 아래를 잡고 다원의 회음부를 문질렀다. 다원의 아래가 오물거렸다. 꽉 다물려 주름진 곳에 조금 밀어 넣었다 뺐다 하며 가늠하던 딜런이 조심스럽게 다원의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아.”

“으윽.”

둘 다 너무 오랜만이라 제일 굵은 부분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들어가다 튕겨 나오기를 반복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끄트머리가 들어가자 다원도 딜런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다원은 최대한 힘을 빼려 노력했다. 딜런도 다원의 꼭 다물린 안쪽을 부드럽게 헤치며 들어갔다. 드디어 다원의 엉덩이에 딜런의 아래가 닿았다.

“하아아.”

다원의 회음부에 딜런의 까끌까끌한 체모가 비벼졌다. 다 들어왔다는 안도감에 다원은 몸에서 힘이 풀려 버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이미 지친 것 같았다.

“다원아, 이제 움직인다.”

하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안쪽 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윽. 이건 반칙이야.”

“미안, 하아. 내가 너무 흥분, 하아…… 했나 봐.”

딜런의 억눌린 목소리에 다원은 최대한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딜런은 다원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번에도 다원의 허락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다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딜런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원은 그 느리고 느린 움직임이 너무 좋았다.

어느새 다원도 그의 움직임에 맞춰 엉덩이를 움직였다. 찌걱찌걱 젖은 살이 부딪치고 비벼지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하아, 그만. 딜런, 이상해. 나 쌀 것 같아.”

딜런은 한동안 천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만 했다. 맞물린 아래가 충분히 젖자 자세를 바꿔 다원을 위에 앉혔다. 찬 공기에 몸이 완전히 노출되어 다원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딜런은 이불을 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다원의 어느 지점에 제 아래를 잘 맞춰 넣었다. 딜런은 프리컴으로 젖은 앞을 부드럽게 만지며 다원의 안쪽 어느 부분을 자극했다.

“흐음, 아아. 하아.”

다원은 몸 안에 약한 전기가 끊임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간질거리는 찌릿함이 계속 느껴졌다. 딜런의 어깨에 양손을 짚고 골반을 앞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딜런의 것이 아슬아슬하게 찔러 오는 곳을 더 잘 느끼고 싶었다.

딜런은 아까부터 파들파들 불쌍하게 떨고 있는 기둥은 쓸어 주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앞부분만 손바닥으로 문질러 줬다가 엄지로 살살 긁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하아……. 딜런, 제발 세게 만져 줘. 세게 찔러 줘. 응?”

급기야 다원은 엉덩이를 콩콩 찧었다. 딜런은 재빨리 그의 골반을 잡아 누르며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조금만 더 느껴 봐. 난 느껴지는데. 윽. 지금 네 안이 얼마나 미쳐 날뛰는지. 으음.”

다원은 딜런의 묘한 표정에서 좀 전과는 다른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 순간 딜런의 손바닥이 한껏 예민해진 다원의 앞을 한 번 더 문질렀다. 동시에 다원의 안쪽 어딘가가 딜런의 단단한 머리에 닿았다.

“헉. 하아!”

다원의 등이 저절로 휘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무언가가 계속해서 다원의 몸 안에 몰려왔다. 작게만 느껴지던 짜릿함과 간질거림이 점점 덩치를 키웠다. 걷잡을 수 없는 감각이 그를 지배했다. 그것은 다원의 몸 안에서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아아, 간지러워. 이상해. 미칠 것 같아. 딜런. 흐으으응. 뜨거워.”

안쪽 깊은 곳, 그 어느 지점부터 농밀하고 진득하게 지속되던 감각이 다원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치 진한 커피 향이 집 안 가득 퍼지는 것처럼.

그것은 무럭무럭 자라나 다원과 딜런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버렸다. 다원의 몸을 덮친 쾌감은 갑자기 폭발했다. 제어할 수 없는 쾌감에 다원의 몸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허리가 활처럼 휘고 입에서 이상한 신음과 괴성이 제 마음대로 흘러나왔다.

“하아악. 으으으. 아아…… 딜런. 아아…….”

너무 짜릿하고 강렬해서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은 한계점을 완전히 넘어섰다.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는 다원의 새까만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았다. 딜런은 다원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을 보며 다시 시작했다.

“흐으윽!”

다원의 몸이 다시 잘게 떨렸다. 딜런은 엄지로 구멍을 살살 후벼 파며 등을 큰 손으로 받쳤다.

“으으음.”

그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정신없이 조여 오는 다원을 같이 느꼈다.

“하아아. 다원, 다원아. 이제 내 옆에만 있어. 우리 영원히 함께해.”

다원과 딜런은 서로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응, 으응…….”

딜런의 배 위가 묽은 액체로 흥건하게 젖었다. 다원이 그걸 보고 당황해하자 딜런은 그를 다정하게 달래며 침대에 눕히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딜런, 다 젖어. 어떡해. 정말 쌌어. 아아아! 그만, 그만. 너무 예민해. 으으윽! 미칠 것 같아.”

다시 반복되는 쾌감은 횟수를 더할수록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다원을 완전히 잠식해 버렸다. 몸 안의 물이란 물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 * *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날이 밝아 있었다. 다원은 전날의 기억에 몸서리를 치며 당분간은 몸의 대화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옆에 누워 있던 딜런은 방금 일어나 멍한 다원의 옆모습을 가만히 감상했다. 그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언젠가 그가 돌아올 거라 확신했지만 기다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매일 네이선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있는 곳을 토해 내게 하고 싶었다. 그가 스스로 돌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에 참고 또 참았지만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그와 잠들던 침대에서 혼자 외로운 밤을 달래던 딜런은 좋은 생각이 떠올렸다. 마음으로 주고받는 정신적인 사랑과 신뢰도 중요했다. 그래도 역시 연인과의 사이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몸의 대화, 섹스였다. 딜런은 거친 행동에 비해 섹스 라이프는 꽤 담백하고 깔끔한 편이었다.

물론 격하게, 진득하게 할 줄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혼을 쏙 빼 버리고 몸을 부술 듯 밀어붙이는 섹스는 오히려 쉬운 편이었다. 다만 딜런은 서로 체온과 감정을 나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미칠 듯한 쾌락을 좇는 데는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돌아온 다원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딜런은 그와의 첫 섹스 때 아주 잠시, 살짝 경험한 그것을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드라이 오르가슴 그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때의 사랑스럽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날 밤부터 딜런은 매일 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 * *

“빨리 와!”

“알았어.”

“얼른. 지금 장 봐서 언제 다 준비해!”

“그 노친네들 먹일 걸 뭐 하러 이렇게 서둘러. 천천히 해도 돼.”

“그래도…….”

서두르는 다원의 뒤로 딜런이 따라 나왔다. 그의 손엔 언제 챙긴 건지 여러 개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장바구니인 모양이었다.

다원은 노친네들이라고 툴툴거리면서도 장바구니까지 챙긴 딜런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데 가방들은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비주얼이었다.

“이런 건 다 어디에서 난 거야?”

“어머니가 예전에 쓰시던 거. 저쪽 구석에 처박혀 있기에 내가 미리 챙겨 놨지.”

딜런은 여러 개의 장바구니를 팔에 끼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폭풍 칭찬을 바라는 골든 레트리버 같았다.

“그랬어요? 아이, 예뻐.”

다원은 딜런의 뺨에 살짝 뽀뽀를 해 주었다. 마치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딜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런데 이거 정말 장 볼 때 써도 되는 거야?”

“안 될 건 또 뭐야?”

“아니, 어머님은 워낙 오래되고 귀한 물건들을 너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두시니까……. 이것도 그런가 싶어서.”

“이 거적때기 같은 마대 자루가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다고 그래. 가자. 늦었어.”

“응.”

그 거적때기는 손으로 한 올 한 올 직접 짜 만든 햄프린넨으로 만든 가방이었다. 캐서린이 어렵게 천을 구해서 직접 재봉하고 정성스럽게 이니셜 수까지 놓은 것이었다. 한 달이 넘게 걸려 완성한 것을 그녀는 언제나 부엌 한편에 걸어 두기만 했다.

어쨌든 가방은 분명히 가방이었다. 딜런이 영 용도를 잘못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원은 마트로 가는 내내 꺼림칙했다. 뒷좌석에 놓인 그 장바구니에 다원의 신경 줄 하나가 아예 꽂혀 버렸지만, 이어지는 딜런의 질문에 신경은 간단하게 돌려졌다.

“마트에서 살 거 적어 놓은 건 챙겼어?”

다원은 마트로 향하는 이유를 다시 떠올렸다.

“아, 그렇지. 핸드폰에 메모해 놨어.”

다원은 핸드폰을 꺼내 다시 한번 목록을 확인했다.

“기대된다.”

다원의 뺨은 상기되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딜런은 참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다원은 딜런의 손끝이 닿은 뺨을 한 번 쓱 문질렀다. 눈은 여전히 핸드폰에 가 있었다.

‘귀여워. 여기서 꽉 깨물면 삐지겠지? 참자.’

딜런은 카페를 지키기는 했지만 정말 커피만 팔았다. 그것도 근 1년간을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딱 두 품목만 취급했다. 본격적으로 카페 영업을 시작하기 전 사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호에 걸리자 핸드폰을 내려놓은 다원이 몇 번 입을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정말 카페 계속 운영할 거야?”

“응, 당연하지. 왜?”

“아니, 리조트 사업도 그렇고 너무 열심히 하길래……. 혹시나 나 때문이면.”

다원은 딜런이 억지로 얽매이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고민이 많았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다원을 만나기 직전까지도 떠돌아다닌 데다 사귀면서도 매일 바다에 나가던 그였다.

“혹시나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리조트 사업은 네 투자 이민이 계기긴 해도 진짜 이유는 네이선 때문이고.”

그건 다원도 네이선의 편지에서 대충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네이선은 지금 리조트의 보수, 수리 전반에 걸쳐 제법 많은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하잖아. 네가 힘들게 모은 돈도 돈이지만 아버지가 남긴 것도 있고, 우리 가족의 미래가 걸린 건데.”

“카페는?”

“카페는 원래 날 위해 시작한 거야. 네가 와서 완성이 된 거지만.”

“완성?”

신호가 바뀌면서 딜런은 운전에 집중했고 다원도 별말 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차는 마트의 주차장으로 들어섰고 딜런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주차를 했다. 다원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대답을 들은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 * *

장을 가득 봐 돌아온 둘은 일단 집으로 향했다. 가게 문을 열면 딜런의 ‘노친네들’, 다원의 ‘할매, 할배들’이 벌떼처럼 몰려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 노친네들, 혹시 우리 카페에 카메라 심어 놓은 거 아냐?”

“풋! 하여튼 엉뚱해. 빨리하자. 시간 없어.”

다원은 서둘러 장 본 것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실력 발휘를 했다.

우선 볼에 체 친 밀가루와 설탕, 소금, 이스트, 버터, 우유를 넣어 딜런에게 넘겼다. 주문한 반죽기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딜런의 팔 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파이팅!”

“나만 믿어.”

그는 다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딜런이 크루아상 반죽을 하는 동안 다원은 스콘 반죽을 시작했다.

“밀가루, 소금, 베이킹파우더. 좋았어.”

모두 같이 넣어 세 번 체 쳐 주고 설탕과 버터도 넣은 뒤 스크래퍼로 자르듯 반죽했다.

다원은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자 딜런이 ‘뭐지?’ 하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봤다. 다원이 ‘뭐?’ 하며 입만 방긋하며 씽긋 웃었다. 딜런은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고 팔을 주물럭거리며 어깨도 휘휘 돌렸다. 다원은 그를 가볍게 무시했다.

“다원, 너무 치사한 거 아냐? 자기만 쉬운 거 하고.”

“각자의 영역이 있는 거야. 넌 그거나 열심히 해.”

“넵!”

“우유랑 크랜베리 넣고……. 딜런은? 와, 잘했네.”

“얼마큼?”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딜런은 기쁜 듯 웃어 보였다. 다원은 잘 완성된 두 반죽을 따로따로 위생 팩에 담아 냉장실에 넣었다.

“스콘은 이대로 세 시간 휴지할 거고, 크루아상은 좀 성가셔.”

당장 딜런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 이건 안 되겠다. 그냥 빵을 사서 샌드위치를 만들자. 손이 너무 많이 가.”

“그렇긴 한데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 자기 전에 반죽을 해 놓고, 아침에 구워서 바로바로 만들면 괜찮을걸?”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돼. 너무 비효율적이야.”

다원은 투덜대는 딜런을 일단 식탁에 앉혔다. 완성된 크루아상 반죽을 꺼내 쭉쭉 밀고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자른 그는 딜런을 바라보며 눈썹을 한 번 실룩거렸다. 딜런이 궁금해 죽으려고 하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쉽게 볼 수 없는 귀여운 다원의 모습에 딜런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돌돌돌.

“봤지!”

“오.”

둘은 사이좋게 긴 삼각형 모양의 반죽을 돌돌돌 말았다. 달걀물까지 꼼꼼히 발라 주고 잘 예열된 오븐에 넣은 뒤 크루아상이 완성될 때까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들려와야 할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가스레인지 앞에 선 딜런이 빈 모카 포트를 든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망설이는 그의 뒷모습에 다원은 그를 와락 껴안았다.

딜런은 아버지가 바다에서 처음 건네준 커피를 마신 이후 늘 모카 포트로 만든 커피를 즐겼다. 그런 그가 주저하고 있었다.

“다원, 정말 미안해. 그때…… 많이 놀랐지?”

시무룩한 목소리에 다원은 딜런의 등에 대고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불이 안 나서 다행이었어. 네가 벽에 타일도 붙이고 주변을 깨끗이 해서…….”

딜런은 뒤돌아서 다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정말 미안해. 놀라게 해서.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바보. 라테나 만들어 줘. 맛있게.”

“미안해. 용서해 줘서 고마워.”

쪽. 딜런이 다원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며 물러났다. 둘은 잠시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곧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딜런은 진한 커피를 만들고 우유를 데웠다. 다원을 위해 근 1년 만에 만드는 라테였다.

그동안 다원은 갓 구워낸 크루아상을 접시에 올리고 캐서린이 만든 잼도 꺼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샌드위치 재료도 함께 꺼냈다.

크루아상의 배를 가른 다원이 양상추와 슬라이스 햄, 치즈, 양파, 소스까지 넣어 그에게 건넸다. 한 입 크게 베어 문 딜런이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두어 번 씹더니 양쪽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는 크게 박수까지 치며 입 안의 것을 다 삼키기도 전에 말도 안 되는 떼를 썼다.

“이런 훌륭한 걸 그 노친네들에게 맛보게 할 수는 없어. 이건 나만 먹을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샌드위치 두 개를 해치운 딜런은 삼각형 스콘을 양손에 세 개씩 들고 입에 던져 넣었다. 물론 스콘 하나에 우유 한 잔씩 곁들여 가며.

“딜런, 그러다 배탈 나!”

딜런은 다원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깨끗하게 모든 걸 비워 버렸다.

* * *

다원은 작은 칠판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제일 위에 빨간 분필로 ‘다원의 디저트 메뉴’라고 쓰고는 그 아래 ‘런치 타임 한정’이라고 적었다.

“한정?”

“내가 그동안 베이커리를 공부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다가는 거덜 나기 딱 좋아, 사장님.”

“지금까지 먹고사는 데 지장 없었어.”

“지금까지는 몰라도 앞으론 효율성 있게 운영해야 한다고.”

그래서 탄생한 야심 찬 런치 메뉴는 커피와 크루아상 샌드위치 세트였다. 단일 품목으로 팔 때보다 조금 싸게, 대신 12시부터 2시까지만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딜런이 빨간색 분필을 들어 그 옆에 별을 세 개 그렸다.

“중요하니까.”

“크크크. 하여간에 귀엽다니까.”

투둑! 딜런의 손을 떠난 빨간색 새 분필이 두 동강 나며 장렬히 전사해 버렸다.

“왜 그래? 아깝게.”

“나한테 귀엽다고 하는 건 너밖에 없어.”

“그랬어? 이제부터 이 형아가 마음껏 귀여워해 줄게.”

멍한 딜런을 놔두고 다원은 다시 메뉴판에 집중했다. 이어서 커피와 스콘 세트를 적은 그에게 딜런이 물었다.

“이건 왜 시간이 없어?”

“이건 한정 메뉴가 아니니까. 스콘만 따로 주문해도 되고, 세트로 해도 돼.”

“너무 복잡해. 노친네들이 알아들을까?”

“이건 관광객을 위한 거지! 할매, 할배들한텐 그냥 줄 거야.”

“안 돼! 노친네들한테는 세트 가격으로도 줄 생각 없어.”

“아니, 왜 그렇게 할매, 할배들한테 인색한 거야? 난 그냥 줄 거야!”

“너는 왜 그렇게 노친네들한테 잘해 주는 건데? 넌 나한테만 잘해 주면 돼!”

둘의 티격태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딜런이 카페의 문과 부엌에 난 창문 사이에 칠판을 걸었다.

“다원 총각!”

“역시 다원이가 오니까 카페가 환하구만!”

“이게 무슨 냄새야? 뭔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

“이게 뭐야, 샌드위치 아니야?”

“샌드위치를 크루아상으로 만들 생각은 어떻게 했대?”

짝! 짝!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큰 박수 소리에 모두 딜런을 째려봤다.

“자, 자. 이거 다원이 밤새 반죽하고 힘들게 구운 거야. 다들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고.”

“때깔도 곱네.”

“채소 신선한 것 좀 봐. 이런 건 나중에 내가 키워서 가져다줄게. 괜히 아깝게 사지 마.”

“토마토도 날 따듯해지면 내가 마련해 주마.”

“햄 대신에 바닷가재를 넣어. 그것도 좋을 것 같아.”

“딜런, 난 에스프레소.”

“난 아메리카노.”

“난 뜨겁게.”

“난 아이스로.”

“난 달게.”

“우유는 거품을 잔뜩 내 줘.”

“하, 진짜. 이 노친네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냥 하나로 통일시켜, 좀!”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든 단골손님들로 카페 안이 가득 찼다. 시식회는 당연히 성공리에 끝이 났다.

* * *

오늘 딜런과 다원은 캐서린과 네이선을 집에 초대할 예정이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 디저트를 만들 차례였다. 틀이 없어 캐서린의 그라탱 그릇을 사용해야 했다. 다원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딜런도 열심히 다원을 도왔다.

“어때? 이 정도면 완벽하지?”

“응. 딜런 정말 최고.”

딜런은 유선지를 그라탱 모양대로 접어 깔았다.

“그것 봐. 나만 믿으라 했잖아.”

다원은 환한 얼굴로 딜런의 뺨에 뽀뽀를 했다.

“역시 귀여워.”

“뭐래. 네가 더 귀여워.”

둘은 티격태격하면서 브라우니 반죽을 붓고 예열된 오븐에 넣었다. 곧 집 안에 초콜릿 냄새가 진하게 퍼져 나갔다. 다원과 딜런은 식탁에 앉아 브라우니가 구워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딜런은 저녁 시간에 맞춰 캐서린을 데리고 오기 위해 출발했다. 리조트 일 때문에 마을에 와 있던 네이선은 이미 집에 와서 씻고 나오는 길이었다.

“다원, 달콤한 향기.”

“응? 어머니 오시기 전에 환기 좀 시켜야 할까 봐.”

“아니야. 좋다는 말이야.”

“그래? 그럼 놔두자.”

네이선의 단답형 말투는 종종 다원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그게 네이선의 매력이기도 했다.

“네이선, 일은 힘들지 않아? 이것 봐, 여기 상처. 여기 와서 앉아 봐. 어머니가 보시면 또 속상해하시겠다.”

네이선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다원의 손에 끌려 거실 소파에 앉았다. 다원은 네이선의 손등과 팔에 난 상처에 꼼꼼히 연고를 발랐다. 제법 크게 쓸린 상처엔 밴드도 붙였다.

“이건 잘 땐 떼는 게 좋아. 공기가 통하는 게 상처 회복엔 가장 좋거든.”

“상냥한 사람이야. 넌 정말 예뻐.”

“아…….”

화르르륵.

“다원. 얼굴에 불났어.”

한 번씩 네이선은 딜런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정말이지 다원에게는 꼭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르릉, 따르릉.

“어, 스테이크!”

마침 오븐에 넣어 둔 스테이크가 익는 시간에 맞춰 둔 벨이 울렸다.

‘나이스 타이밍! 완전 난감했어.’

후다닥거리며 급하게 부엌으로 향하는 다원의 뒷모습을 네이선은 멀뚱히 바라봤다.

* * *

“어머니…….”

“이제야 아들 얼굴을 보는구나.”

캐서린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원을 와락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네이선이 그런 둘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 딜런도 질세라 그들을 모두 끌어안았다. 다원의 가슴에 다시 한번 뭉클함이 차오를 때쯤.

“답답하다. 앞으로는 이런 건 하지 말자.”

쿨한 캐서린은 거구의 두 아들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영역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크. 역시 닮았어.’

무심함을 가장한 네이선의 쿨함은 그녀에게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어머니!”

다원도 캐서린을 따랐다.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표정을 한 딜런과 네이선만 현관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스테이크가 너무 익어 버렸죠?”

“아니, 훌륭해.”

“그래도 야채는 맛이 좀 괜찮죠?”

“응. 완전.”

“난 스프도 맛있어. 더 줘.”

걱정은 다원 혼자만의 몫이었고 세 사람은 접시를 싹싹 비웠다.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거실로 이동했다. 다원은 디저트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네이선, 일은 힘들지 않니? 집에 너마저 없으니 참 쓸쓸하구나.”

“일주일에 이틀인데요.”

“어머, 얘는. 말하는 것 좀 봐. 듣는 엄마 서운하게.”

“어머니도 이번에 시작한 일 때문에 바쁘지 않으세요?”

“안 그래도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그녀가 한쪽 관자놀이를 검지로 살짝 문질렀다. 말이 길어지려는 신호였다. 딜런이 슬쩍 부엌 쪽을 힐끔거렸다.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니에요?”

기다렸다는 듯 다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캐서린이 말을 꺼냈다.

“그럼 이참에 너희들이랑 다 같이…….”

“안 돼!”

“좋아.”

“안 돼! 절대 안 돼! 네이선이 이틀이나 자고 가는 것도 싫다고! 안 돼!”

딜런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반대를 외쳤다. 캐서린의 제안은 1초도 되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딜런은 얼른 브라우니와 각자의 취향대로 내어 온 커피, 차, 따뜻한 우유, 라테를 세팅했다.

“먹어, 마셔. 얼른얼른.”

그리고 그들은 다음을 기약했다.

* * *

다원의 정확한 직책은 회계 담당 직원이었다. 하지만 카페에서의 그의 입지가 너무 커져 버렸다.

“회계 직원 놔두고 또 회계 직원을 뽑다니. 노친네들 정말.”

다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웃을 일이야? 자기들이 월급을 보태 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네가 만들어 준 게 아니면 안 된다는 거냐고!”

딜런이라고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괜히 그래.”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러지.”

다원은 카페 휴무일인 월요일에 회사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했다. 평일 저녁에는 직원에게 메일을 받아 틈틈이 일했고, 지금도 식탁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괜찮아. 네가 많이 도와주잖아.”

아닌 게 아니라 딜런은 옆에서 빵 반죽을 하고 소분해서 냉장고에 차곡차곡 쟁여 넣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게 더 내 적성에 맞아. 회계는 취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거니까.”

“그럼 다행이고.”

딜런은 부엌을 정리하고 다원에겐 라테를 건넨 뒤 제 앞엔 진한 에스프레소를 놨다.

“하아, 이제 좀 앉자. 으으으.”

다원은 어느새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딜런은 부엌을 한 번 쭉 돌아봤다.

‘젊은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같잖아. 자리도 똑같아.’

그렇게 부엌은 다시 한번, 이 집에서 가장 쓰임새가 다양한 공간이 되었다.

다시 돌아온 시즌, 다원과 딜런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어느 날부터 다원과 딜런의 카페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다원의 회심작인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커피 런치 세트가 인기가 좋았다. 테이블이 단 네 개뿐인 가게에 아르바이트생까지 고용해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 해. 딱 반죽한 만큼만 팔아.’

‘하지만 딜런, 돌아가시는 손님들이 너무 많잖아.’

‘그래도 안 돼. 그리고 잠깐이야. 곧 사그라들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는 꺼지기는커녕 더욱 달아올랐다. 결국 심상치 않은 인파에 딜런도 백기를 들었다. 야외 테이블도 놓고 밤마다 반죽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딜런에게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다원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한 것이다.

‘아…… 다원아. 그건 정말 안 돼.’

‘그래도 재료까지 다 찢어서 가져다주셨는걸.’

‘누구야. 헨리 어머니지? 내가 이 할망구를!’

‘딜런!’

‘아…… 다원아. 내가 정말 못 살아. 너 너무 힘들다고. 이건 질질 흘러서 포장까지 해야 하잖아.’

‘괜찮아. 내가 할게.’

‘……아니야. 내가 할게.’

‘그럼 같이해.’

딜런은 한동안 이 메뉴, 게살 샌드위치를 주문하는 손님을 한 번씩 째려보곤 했다. 다행히 손이 빠른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면서 다소 여유가 생겼지만 아직도 그는 ‘게’ 자만 나와도 멈칫할 정도였다.

* * *

그날도 어김없이 바쁜 런치 타임이었다. 지친 세 명은 손님이 뜸한 틈을 타 점심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샌드위치로 해결하지만 한 번씩 다원이 식사를 준비해 오기도 했다.

“오늘은 스파게티를 준비했어.”

다원의 말에 딜런과 아르바이트생의 손이 빨라졌다. 그때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조금은 수다스러운 여자 세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딜런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제가 주문받을게요. 사장님은 여기 준비하세요.”

눈치 빠른 아르바이트생이 얼른 카운터로 향했다. 마침 테이블을 막 치우고 돌아서던 다원은 그녀들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드시고 가실 거면 이리로 앉으세요. 지금 밖은 조금 더우니까.”

“엄마, 그렇게 하자.”

“그래. 그럼 주문하고 앉자.”

“블로그 보니까 여기 게살 샌드위치도 맛있고 스콘도 맛있대. 뭐 먹지?”

“이것저것 다 시키고 스콘은 포장해서 가져가자.”

딜런이 싫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로그와 게살 샌드위치. 그냥 먹고 살 정도면 되던 가게가 이렇게 정신없이 바빠진 이유가 그 빌어먹을 블로그 때문이었다.

‘젠장!’

화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딜런의 등이 꿀렁거렸다. 싱크대 앞에서 샌드위치를 준비하던 다원은 빙그레 웃었다.

“아! 그리고 여기 잘생긴 사장님이 한국 사람이래, 엄마.”

“그러니? 어디? 저 사람인가 보네.”

딸로 보이는 어린 여자들의 말이 딜런의 귀에 쏙 박혔다. 하도 많이 들어서 알아듣는 한국말이었다. 딜런이 행주를 던지고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이크.”

아르바이트생은 일단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팻말을 들고 그곳을 탈출했다. 다원도 재빨리 카운터로 향했다. 그녀들의 호기심을 풀어 주기 위해.

“예, 제가 한국인이에요. 앉아서 기다리시면 가져다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어머나.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시네요.”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 아니에요. 서른인걸요.”

“와, 완전 동안!”

“우리 사진 찍어도 돼요?”

결국 딜런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딜런이 가장 잘 아는 한국말이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었다.

‘와, 정말 한국인이세요? 사진 한 장만 찍어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녀는 허락도 없이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다. 사진을 내려 달라 요청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오는 손님들마다 다원을 찾았다. 딜런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건 바로.

“손님! 저기!”

딜런은 다원과 여자들 사이에 서서는 벽을 가리켰다. 그녀들의 시선이 딜런의 손가락을 따라 벽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촬영 금지’라는 말이 한국말로 크게 적혀 있었다.

딜런의 기세는 아주 흉흉했다. 딸로 보이는 여자들은 그대로 뒤를 돌았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도 다원을 한 번 더 보고는 테이블로 향했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인가 봐.”

“응. 으르렁으르렁.”

“킥킥킥. 정말 지킴이다, 철벽 지킴이. 대박인데?”

“쉿! 들어.”

다원은 그녀들의 대화에 잠시 움찔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눈치 빠른 딜런에게 들키면 피곤해질 게 뻔했으니까.

문에 내건 팻말 덕분에 가게에는 잠시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딜런, 다원, 아르바이트생과 그녀들도 편안하게 식사를 마쳤다. 두 아가씨는 포장 주문한 스콘을 챙겨 먼저 가게를 나갔다. 아기자기한 작은 화분을 찍으며 까르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딜런도 다원만 찍지 않으면 딱히 말릴 이유가 없기에 내버려 두었다.

“여기 계산요.”

“네.”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우리 본 적이 있던가요?”

다원은 카드를 쟁반에 올려 여자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제가 흔하게 생겼나 봐요.”

“원, 총각도. 총각처럼 잘생긴 얼굴이 흔한 얼굴이면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 죽으라고……. 아무튼 맛있게 잘 먹었어요. 수고해요.”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여자는 다원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이내 가게를 나섰다. 다원도 어린 딸들과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부엌에 난 창으로 계속 바라보았다.

“뭐야. 나 그동안 엉뚱한 것들만 경계한 거야?”

갑자기 들려오는 딜런의 사나운 목소리에 다원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

“응?”

“나이 많은 여자가 좋은 거였어?”

싸늘. 일순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아르바이트생이 브레이크 타임 팻말을 뗐는지 어느새 딜런 뒤쪽으로 선 손님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둘을 보고 있었다. 다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빨리 대답해 보시지.”

하지만 딜런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듯 짝다리를 짚고 팔짱까지 꼈다.

“딜런, 그냥 나이대가 엄마랑 비슷할 것 같아서 그랬어.”

아르바이트생이 딜런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주문을 받았다.

“그런 거였어? 난 또…….”

딜런은 머리를 긁적이다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아니, 누가 또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고 갔어!”

다원은 그녀들이 향한 길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그녀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주문을 받았고 다원은 음식을 만들었다. 손을 씻고 들어온 딜런도 커피 기계 앞에 섰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오후 일상이었다.

가게 문을 닫고 둘은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어 올라갔다. 밝은 보름달이 떠서 길이 환했다.

“미안해.”

“응?”

“아까 그 여자 손님들…….”

“아……. 아직도 그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어?”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정말 몰랐어.”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그 여자가 오기 전엔. 너무 오랜만에 봐서 나도 긴가민가해.”

“……그래도.”

“그런 거 아니야. 그녀가 정말 내 엄마든 아니든 간에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그녀의 딸들도. 그게 다야.”

“그렇다면 다행이다.”

딜런이 슬그머니 다원의 손을 잡았다. 작은 스킨십이었지만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것도 좋은데. 설레. 아, 행복해.”

“나도 설레. 네가 행복해서 나도 행복해.”

둘의 웃음소리가 밤공기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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