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네이선! 다원 어딨어? 어? 다원이 여기 온 거 알고 있어! 빨리 말해!”
딜런은 노크도 없이 네이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네이선이 천천히 딜런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딜런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저와 똑같은 얼굴이 그러고 있자 딜런은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말 안 해?”
딜런은 네이선의 저런 표정이 싫었다. 같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네이선이 싫었다. 쌍둥이인 네이선도 제 마음을 알고 있을 테고, 그래서 자신을 불편해했을 거라고 딜런은 생각하고 있었다.
“너 진짜……! 하아, 그만하자. 너한테 내가 뭘 바라겠어.”
네이선을 향한 케케묵은 감정까지 더해진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딜런은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나 차였어’.”
“뭐?”
“아마 지금 다원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 자식이 진짜!”
딜런의 눈동자에 네이선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아니면 네가 그렇거나.”
주먹을 쥐고 네이선을 향하던 딜런의 걸음이 멈췄다.
“젠장. 넌 언제나 이런 식이야.”
“너도 그래.”
“뭐?”
“기다리게 해. 눈물 나게 해. 너 이기적이야. 나쁜 놈.”
네이선은 아픈 아이였다. 자라지 않아서 항상 보살펴 줘야 하는 아이였다. 그건 다 딜런 때문이었다.
‘너는 네 동생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
‘왜?’
‘네이선이 엄마 배 속에서 너를 지켜 줬어.’
‘어떻게?’
‘네가 엄마 배 속에서 일찍 나오지 않게 널 지키고 있었지. 사실은 네이선이 형이야. 네가 두 달이나 늦게 나왔거든.’
‘아니야. 내가 형이야. 이젠 내가 네이선을 지킬 거야.’
‘우리 딜런 이제 다 컸네.’
하지만 녀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가장 약해졌을 때를 너무 잘 알고, 그 약점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왔다. 정말 아파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가 누구인지 딜런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네이선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책상을 향해 돌아앉았다. 딜런도 오늘은 그만하고 싶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화내서 미안하다.”
딜런은 그러고도 한참을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 네이선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이기적이면 넌 지독한 녀석이야.”
딜런은 결국 한 마디 내뱉고 방을 나왔다. 네이선의 방 안에는 연필 소리만 가득했다.
거실에 나오자 캐서린은 차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도 방금 딜런과 네이선의 대화를 다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었다. 딜런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눈가가 콕콕 찌르는 듯 아파 왔다. 이미 충분히 꼴사나워졌지만 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쉬세요. 가 볼게요.”
딸그락! 그때 테이블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딜런은 그것이 사무실 열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딜런은 캐서린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열쇠만 집어 들어 단숨에 바로 옆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거야.’
물론 딜런도 사무실 안에 다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정없이 떨려 오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드르륵 열쇠가 들어가는 느낌과 소리에 딜런은 목덜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것 같았다.
“후우.”
심호흡 한 번 하고 열쇠를 돌렸다. 딸까닥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딜런은 문만 연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
매주 드나들던 사무실이 너무 낯설었다. 항상 눈을 마주쳐 주던 다원 딱 하나가 없을 뿐이었다. 또 하나, 원래 주변 정리를 잘하던 다원이었지만 지금 사무실은 유난히도 깔끔했다. 마치…… 모든 걸 정리한 것 같았다. 딜런은 선뜻 발을 들이지 못했다.
“밤새 뭘 하나 했더니 이렇게 정리를 다 해 놨지 뭐니. 그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엄마는 이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을 작정이란다.”
캐서린이 딜런의 등을 한 번 다독이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기척이 멀어지자 딜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사무실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다원이 좋아하던 것이 다 있었다. 책상, 책장, 캐비닛, 난로, 작은 소파 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창문과 창틀까지.
“하아. 흑. 너만 없어.”
눈물이 또 차올랐다. 딜런은 얼른 손으로 박박 닦아 냈다. 지금 울면 그가 떠난 걸 인정하는 것 같았다. 딜런은 눈물을 꾹 참았다. 사무실을 천천히 돌아보는데 딱 하나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다원의 노트와 안경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게 뭐라고 딜런은 심장이 뛰었다. 비닐 포장을 뜯기 전과 같은 방에서 유일하게 사용한 흔적이었다. 다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작은방에서 자고 있는 거라면, 화장실에 간 거리면, 옆 카페에라도 간 거라면 좋겠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생각하며 딜런은 안경테를 만지다 옆의 노트를 집어 들었다. 노트 중간에 펜이 끼워져 있었다. 불쑥 불안감이 들었다.
“없어라. 없어라.”
노트를 살짝 펼치자 단정한 글씨체로 적힌 글이 보였다.
“……있네.”
[딜런.]
탁! 딜런은 노트를 덮었다.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한참을 노트 끝만 매만지다 다시 폈다.
“후…… 흐음.”
[딜런.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나를 찾아보고 또 사랑해 볼게.
그리고…… 기다리라는 말은 하지 않아. 못 하겠어. 다녀올게.]
“찾아야 해.”
딜런은 사무실을 나와 차고로 향했다. 운전석 문을 열고도 차에 오르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해?’
딜런은 언제나 훌쩍 떠나곤 했다. 미련은 없었다. 바라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떠날 때도, 돌아올 때도 딜런은 왜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움을 담아 그렇게 바라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딜런은 더 거리낌이 없어졌다. 감흥도 없어졌다. 주변 사람들도 더 이상 딜런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제 부재와 귀환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딜런은 견딜 수 없었다. 공허함과 서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가…… 정말 벌을 받나 봐요, 아버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딜런은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했다.
* * *
딜런은 카페의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다.
“어떤 잡새가 여기다 똥을 처갈긴 거야!”
거친 욕이 우렁차게 공중으로 날아갔다. 짹짹짹! 오솔길 나무 위의 작은 새들이 서로 ‘내가! 내가!’ 하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아, 저 잡새들을 콱! ……됐다. 날도 추운데 소리쳐 봐야 내 목만 아프지. 하아.”
딜런은 청소 도구함으로 가 긴 막대 빗자루를 꺼냈다. 그렇게 시작한 비질이 점점 거칠어졌다.
“저놈들 때문에 다원이 매일매일 이 고생을 한 거잖아. 지워지지도 않네. 싹 다 잡아서 고기밥으로 줘 버릴 테다.”
짹짹짹! 나무 위의 새들은 저들끼리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딜런은 작은 화분에 물을 줬다. 몇 개 없어 보이더니 물을 줄 때면 물뿌리개를 몇 번이나 다시 채워야 할 만큼 한도 끝도 없었다. 상당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딜런은 화분까지 다 정리하고 기지개를 켠 뒤 주변을 돌아봤다. 아직은 조용했다. 부지런히 단골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오늘 딜런은 그들에게 할 말이 있었다.
“자, 자! 한 잔씩 다 받았지? 부족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중간에 내 말 끊으면 영구 출입금지야!”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들은 체도 안 했다.
“못난이 수플레는 도대체 언제 되는 거야?”
“하지도 못할 메뉴를 떡 하니 적어 놓고. 영업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전에 보니까 그냥 돌아가던 관광객들도 있던데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아예 카페 문 닫는 거 아냐?”
“인터넷에 누가 여기 수플레랑 라테가 그렇게 맛있다고 적어 놨나 보더라고. 그런데 그게 안 된다고 하면 아무래도 영업에 타격이 있을걸.”
“그걸 할멈이 어찌 알아? 컴퓨터 켤 줄도 몰라서 내가 켜 주잖아.”
“아니, 컴퓨터를 못한다고 모르나. 입은 뒀다 어따 써? 내가 그냥 돌아가는 그 여자들한테 물어봤지.”
할머니는 어깨에 힘을 딱 주면서 말을 이었다.
“아, 글쎄. 여기 다녀간 사람들이 그 뭐…… 글 쓰는 데다 후기라는 걸 남겼대. 여기에 웬 잘생긴 한국 청년이 완전 한국 스타일로 커피도 잘 만들고 디저트도 맛있게 한다고.”
“한국?”
“이그, 이 양반들이. 여태 다원 총각이 한국에서 온 것도 몰랐어? 아니, 왜들 그렇게 자식들 일에 관심이 없어!”
“우리 동네 애 아니었어? 그나저나 딜런, 다원은 왜 안 와? 아직도 사과 안 한 거야?”
“그러게. 아니, 왜 애한테 사과를 안 해? 싹싹 빌어야지. 대충 빈다고 그게 용서가 될 일이야?”
“하여간 남자들이란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심정은 눈곱만치도 생각을 안 하지! 아주 제가 잘나서 집안이 잘…….”
쾅! 딜런이 선반을 내리쳤다. 손님들은 가만히 놔두면 아주 각색에 편집까지 다 할 기세였다.
“다 조용히! 쓸데없는 잡소리 그만!”
딜런의 같잖은 엄포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일단 겁먹은 척은 해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다원을 찾으러 갈까 해.”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웬일로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냐는 듯.
“그런데 사실 내가 아직 다원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고.”
다들 그거 참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좀 오래 찾으러 다녀야 할 것 같아. 그 뱀 같은 새끼도 한번 손봐 줘야 할 것 같고.”
“그렇지! 그게 맞지! 그 백여우 같은 놈을 가만 놔둔다면 ‘미친 딜런’이 아니지!”
딜런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팍 솟았다.
“이 할망구는 잘 나가다가 꼭 한 번씩 애 성질을 건드리지.”
“처음 미친 딜런이라고 한 건 당신이잖수. 뭘 모른 척하고 그래.”
쾅! 딜런은 다시 선반을 내리쳤다.
“조용, 조용! 아, 할매 할배들 진짜 말 많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딜런의 심각한 분위기에 다들 긴장했다.
“……돌아올 때까지 가게랑 집 좀 잘 부탁해.”
처음이었다. 딜런이 떠나면서 떠난다고, 돌아온다고 말하는 건. 카페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처음 하는 부탁에 반응이 없자 딜런은 무안해졌다. 그의 입이 달싹일 때였다.
“아니, 당연한 걸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고 그래. 싱거운 놈.”
“그러게. 우리야 늘 돌아보고 그러지. 언제는 안 그랬나?”
“암만. 캐서린이 너 없이 그 집을 어떻게 관리했겠어?”
“네이선 그 덩치 크고 고지식한 녀석 학교 보내는 것도 캐서린 혼자서는 어림도 없어.”
“다원은 처음 이 카페 문도 제대로 열 줄 몰랐다고.”
“문만이게? 화장실 열쇠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바지춤을 부여잡고 콩콩 뛰는 모습을 못 봤구만.”
“아, 그래서 저 나무둥치에 서서 오줌을 갈긴 거야?”
딜런이 알고 있는 것보다 다원은 이들과 꽤 잘 지낸 것 같았다. 적어도 다원이 떠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닐 만큼은. 딜런은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잘 부탁해.”
단골들은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러고는 이제 막 어른이 되려고 하는 철없는 아들에게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딜런! 어여 네 짝 찾아다 여기 딱 데려다 놔! 네가 만든 커피 이젠 맛없어서 못 먹겠어.”
“그러게. 시럽이 너무 적게 들어가서 마실 수가 없네.”
“우유 거품도 이게 뭐람?”
“탄내만 나고 깊은 맛이 없어.”
“다원이 찾아서 오라고! 이 망할 놈아!”
그들의 핀잔에는 다원과 딜런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딜런은 다원을 찾기 위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럴수록 딜런은 본인의 무심함에 치를 떨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처음 만났던 장소, 한국에서 살던 집을 팔았다는 것, 다녔다는 대학 이름과 체이스와 데미안이라는 달갑지 않은 과거의 인연. 제가 다원에 대해 아는 것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그가 고향에 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딜런은 한국으로 향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건 다원뿐만이 아니었다. 딜런 역시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 * *
딜런은 다원을 처음 만난 고택을 찾았다. 눈도 없는데 더 춥고 휑했다. 처음 다원을 발견하고 딜런은 그에게 일부러 말을 걸고 같이 걸었었다. 어린 꼬마가 어떻게 그런 슬픈 눈을 하는지 걱정하며 들여다봤을 뿐인데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때와 달리 눈이 없는 고택은 더 쓸쓸하게 보였다.
딜런은 다원과 걸었던 길을 따라 쭉 걸었다. 그리고 낮은 담의 어디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무것도 없는 담이었다. 그저 고택을 둘러싸고 있는 높낮이가 다른 담 중 구석진 한쪽 부분이었다.
하지만 딜런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눈사람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놀랍게도 거기에는 뜻밖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와 말라비틀어진 열매 알갱이였다.
슬픈 눈을 한 그날의 다원 위로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새벽의 다원이 겹쳐졌다.
‘설마 또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딜런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서울에서 다원이 살았다던 집을 보고 싶었다.
딜런은 다원과 나눴던 기억을 더듬어 그가 살던 곳을 찾아보려 했다. 퇴근길에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아저씨들 이야기, 다닥다닥 붙은 집 전봇대 아래에 쓰레기를 내놓는 사람들 이야기, 주거 공간과 부동산과 빨래방이 붙어 있는 건물 구조 이야기.
딜런에게는 모두 생소했기에 그런 조건을 가진 집이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불가능했다. 모두 비슷비슷한 모습이어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원이 포기해야 한다던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다원이 설명하는 한국 집 이야기를 듣고 딜런은 그런 건물이 있다면 정말 편리하겠다며 거기 가서 살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다원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편한 대신에 포기해야 할 것도 많아.’
‘그게 뭔데?’
‘넌 영원히 모를 거야.’
딜런은 다원의 눈빛에 담긴 쓸쓸함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어딜 봐도 다 똑같은 모습이야. 너무 삭막해. 이런 곳에 다원을 혼자 두다니.”
딜런의 눈에 신도시의 원룸과 오피스텔 밀집 지역은 다 똑같은 모습이었다.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다원은 학창 시절 학교와 집만을 오고 갔다고 했다. 이런 곳에서 반복되는 일상은 딜런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다원의 과거는 너무 메말라 보였다.
“다원아. 내 가슴에도 가뭄이 생길 것만 같아.”
한국에선 이랬는데 미국에서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 * *
미국으로 돌아온 딜런은 우선 다원이 다니던 대학으로 향했다.
캠퍼스의 학생들은 즐거워 보였다. 잔디밭에 앉아 수다를 떨기도 했고 수업에 늦었는지 뛰는 학생도 있었다. 뭔가 심각하게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곳에 다 다원의 모습이 겹쳐졌다. 딜런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다 비슷비슷하겠지 싶었다.
‘아니야. 다원이라면 잔디밭에서 노닥거리기보다는 공부를 했겠지…….’
한눈에 봐도 도서관일 것 같은 건물이 보였다. 딜런은 망설임 없이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엔 꽤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있었다.
‘역시 여기가 더 다원답네.’
일할 때의 다원은 무섭도록 집중했다. 장부 속의 숫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쉬어 가면서 해도 돼. 나 그렇게 악독한 사장 아냐.’
‘버릇이야.’
‘버릇?’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서……. 큼, 큼. 다른 애들 따라가려면 할 수 있을 때 집중해서 해야 했거든. 그러다 보니 일도…….’
‘지금은 아니니까 쉬어 가면서 해. 그런데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쉬어, 쉬어.’
‘아니야……. 헤헤.’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딜런은 도서관의 학생들을 구경했다.
‘다원이 말이 맞네. 다들 열심히야.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여태껏 연필이라고는 사인할 때 말고는 잡아 본 적이 없는 딜런이었다. 공부가 재밌어 죽을 것 같은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딜런은 오늘 아침에 받은 문자를 확인했다.
[OO 스트리트. OO번가 OO.]
‘여기서 살았단 말이지.’
대학 다니면서 다원이 살았다는 집이었다. 다원의 행방을 쫓아 옛날 집 주소까지 뒷조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하게 만들다니. 뱀 대가리.’
주소를 봤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역시 범상치 않은 동네였다. 하지만 딜런의 눈에 들어오는 건 딱 하나였다.
3층짜리 고급 빌라의 경비원, 스미스는 정문을 열고 나왔다. 아까부터 수상한 사람이 현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서 있는 겁니다.”
“여기 입주민이 아니신 것 같은데 도와 드릴 일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사람이 여기 산다길래 구경하고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제가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연락이 안 되네요. 몇 호에 사는지는 모릅니다.”
“죄송하지만 여기 사시는 분의 보안 때문에 그러니 돌아가 주시죠.”
“전 여기 서 있기만 했는데요. 혹시 이 길이 사유지입니까?”
“……계속 이러시면 신고하겠습니다.”
그래도 딜런은 아주 당당했고 스미스는 조급해졌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미스는 입주민들이 불편 사항을 접수하면 곤란했다. 한 번 더 벌점을 받으면 이 좋은 직장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 아는 사람이 어떤 분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이런 고급 빌라에 사는 이유가 있군요. 여기.”
딜런은 다원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스미스는 사진 속의 남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고급 빌라에 사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게다가 그 유명한 재벌가 아들과 동거를 하다가…….
“이자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분명히 여기 산다고 했는데? 이거 곤란한데…….”
“이자와 어떤 사이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애인입니다.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혹시…….”
딜런은 어부였고, 낚시는 그의 천직이었다. 스미스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모르면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네! 어떻게 아셨죠? 제가 정말 이 친구를 꼭 찾아야 해서요.”
스미스는 딜런의 반응에 제 짐작이 맞는다고 확신했다. 생각보다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다고 여기며 그는 슬쩍 물욕을 내비쳤다.
“절박해 보이기는 한데 입주민의 비밀 보장 문제도 있고……. 이걸 어쩐다…….”
딜런은 지폐 몇 장을 그의 손에 꼭 쥐여 줬다. 경비원은 주변을 살피고는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이자가 1년쯤 전에 같이 살던 사람의 금품을 훔쳐서 달아났어요. 그분이 조용히 넘어가셔서 정확한 피해 규모는 모르지만…… 아마 적지 않았을 거예요. 그날 그분이 꽤 다급해 보였거든요.”
“아하…….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요.”
“별말씀을. 꼭 찾기를 바랍니다.”
스미스는 아주 뿌듯한 얼굴로 딜런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경비원의 오해가 기가 막혔지만 딜런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고급 빌라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동했다. 그러곤 한숨을 내쉰 뒤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대충 훑었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 * *
“형은 요즘 어떻게 지내?”
“나야 뭐 늘 그렇지.”
“형 작품 봤어.”
“체이스 네가 웬일이야? 헛짓거리라더니.”
체이스는 그의 형 매튜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땐 내가 어렸어.”
“지금은 많이 컸고?”
“형이 헛짓거리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정도는?”
“귀엽기는.”
“매튜.”
“그래, 그래.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 봐.”
매튜가 판을 깔아 주자 체이스는 멋쩍은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선……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한 거, 재능 낭비라고 한 거, 또…….”
“관심 종자라고 했지.”
“윽. 다 사과해.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 알잖아, 아버지가 형 정말 사랑하는 거.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니야.”
“나도 알아. 이제…… 그를 이해해.”
“그럼 형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매튜는 더 이상 치기 어린 반항아가 아니었고, 체이스도 이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훌륭한 경영인이었다.
“믿을 건 형뿐이야. 형 아니면 이 사업 엎어질 판이라고.”
“적당히 해. 알았으니까.”
“세실! 계약서!”
세실은 이미 준비된 계약서와 펜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크크. 귀여운 녀석.”
“뭐라고 해도 좋아. 자, 사인해.”
두 사람의 사인이 적힌 계약서를 확인한 세실이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휴우, 이제 살 것 같아.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10살 어린 동생이지만 체이스는 매튜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진짜 할 말은 따로 있지? 슬슬 털어놓으라고.”
매튜는 동생이 진짜 고민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나 데미안이랑 자.”
“오, 저런. 결국 데미안이 해낸 거야?”
“형.”
“그럼 그 꼬꼬마는? 다원이랬나?”
“…….”
“저런…… 진심인 것 같더니. 어쩌다가.”
체이스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때 내선 전화기에 작은 붉은빛이 깜빡였다.
“응.”
-10분 후에 회의 시작됩니다.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여전히 말이 없는 체이스 대신 매튜가 입을 열었다.
“데미안이 그러는 건 네 책임도 있다는 걸 잊지 마. 원래 욕심이 많고 맹목적인 아이였어. 알면서 외면한 건 너야.”
“나도 알아. 그땐 나도 어렸고 힘들었다고. 나한텐 하나뿐인 친구기도 했고.”
“서로가 원하는 게 다르니. 이 고집불통들. 그럼 꼬마는 상처 많이 받았겠다.”
“…….”
매튜가 다원을 언급하자 체이스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뭐야? 표정을 보아하니 그러지도 않은가 보네.”
“내 표정이 어떤데?”
“잘 먹던 사탕 뺏기고 양치질하라고 혼나는 아이의 표정?”
“……다워나는 돌아오라는 내 말을 거절했어. 그리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어.”
“하하하. 그냥 꼬마가 아니라 상꼬마였네.”
“……쯧!”
매튜는 체이스를 다정히 끌어안았다. 체이스의 덩치가 더 큰 탓에 매튜를 안는 꼴이 되었지만 형제는 그렇게 헤어졌다.
체이스는 오후에 잡힌 회의에 참석했다. 이번 사업은 체이스에게 상당히 중요했다. 그저 아버지를 잘 둔 도련님에서 능력 있는 기업가라는 걸 입증할 절호의 기회였다.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나날이 몇 달째였다. 경쟁에 익숙한 체이스에게 이런 스트레스는 익숙했다. 다만 지칠 줄 모르고 그의 신경을 깔짝거리는 데미안 때문에 그는 많이 지쳤고 예민해져 있었다.
“오늘은 또 뭐 때문에 연락했대?”
“이번에 발굴한 신인 화가의 첫 메이저 무대 데뷔 기념 파티로.”
“이젠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는구만. 발굴한 신인? 제 뒷구멍이나 핥아 주던 놈이겠지. 꽤 잘 핥았나 봐? 아니면 아주 시원하게 쑤셔 줬든가.”
“…….”
“그래서 뭐?”
“중요한 셀럽들을 모조리 다 초대하셨습니다.”
“바빠서 못 간다고 해. 지금 할 일이 산더민데.”
“어머님도 가십니다. 형님도 초대하셨고요. 참석 여부는 알려 오지 않으셨지만 그 신인 작가라는 분이 형님과 연이 있으니…….”
“젠장. 그 화가가 데미안의 뒷구멍만 핥은 게 아닌가 봐. 형님과도 배가 맞은 거야?”
“…….”
“데미안도 알고 있어?”
“네.”
체이스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참석하지 않는다고…….”
“됐어. 간다고 그래.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는 세실을 향해 체이스가 말을 맺었다.
“데미안이랑 따로 시간 잡아 놔.”
세실은 자신의 개인 스케줄 표에 체크를 했다.
‘다음 날은 꼭 스케줄을 비워 놔야겠군. 병원도 예약해야 할까? 가능할지 모르겠네.’
요즘 들어 체이스의 스트레스 지수가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확실히 힘을 실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체이스라도 나이 많고 깐깐한 CEO들 사이에서 성과를 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어머니는 결혼을 종용하고 있었다. 아니, 확실히 작년보다 압박을 주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체이스는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 내내 다원을 끌어안고 보냈다. 그렇게 2, 3주 정도 지나면 신경이 조금 누그러들곤 했는데 이제 그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일한 친구였던 데미안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제일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되었다. 체이스의 인내심이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해 달라는 친구 역할은 안 하고 사랑해 달라고 조르다니. 이번에야말로 정리가 되려나…….’
세실은 데미안을 떠올리며 희미한 비웃음을 띠었다.
* * *
표면상으로는 신인 화가의 데뷔 무대였다. 하지만 데미안의 본뜻은 다른 데 있었다. 갤러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면면들을 확인한 데미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차피 그렇고 그런 자리야. 이쪽이든 저쪽이든 크게 손해날 것도 없지.’
이 갤러리는 이미 셀럽들 사이에 입소문이 자자했다. 사교계 진출을 위한 초급 입문 과정쯤이었다. 정·재계와 예술, 언론 등 사회 각계각층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데미안이 기획하는 전시회는 대부분 어린 셀럽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아직 사교 모임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일종의 맛보기로 일명 ‘갤러리 파티’라 불렸다.
어린 셀럽들은 가벼운 분위기인 그의 파티를 좋아했다. 그 덕에 데미안은 젊은 셀럽들 사이에선 꽤 인지도가 있는 편이었다. 그는 그것을 아주 뿌듯하게 여겼다. 월급도 적고 일만 많은 이런 갤러리를 그만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체이스의 회사와 합작해서 일하느라 데미안은 한동안 파티를 기획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기획한 이번 파티는 나름 성공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0분 후면 도착하실 겁니다.”
파티는 이제 골든 타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요한 초대 손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데미안은 전시장을 훑었다.
“어디 보자. 피날레 장식을 위한 세팅은 완벽한가?”
오랜만에 떨리는 가슴을 안고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 전에 도착한 아름다운 노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체이스의 어머니였다. 이런 수준의 파티에 그녀가 참석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체이스의 일을 미끼로 흘렸더니 마지못해 온 것이었다. 마침 눈이 마주친 그녀에게 데미안은 지을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고마움을 표시했다.
‘오늘 당신의 역할이 참 중요해. 마음껏 놀라세요. 화를 내시면 더 좋고. 어디 보자, 매튜는?’
참석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 그 화가도 보이지 않네. 제 그림 전시횐데 어디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야? 매튜랑 둘이 벌써 붙어먹고 있는 거야?’
갤러리 벽에 걸린 거지 같고 구질구질한 그림을 그린 화가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둘은 밀애를 나누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체이스의 형을 이 자리에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니 이제 화가에겐 별 볼일도 없었다. 데미안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체이스의 친구들, 학교 동기 동창들, 여러 방면의 사업 파트너들과 입이 가벼운 셀럽들까지 파티장에 참석한 손님들은 모두 완벽했다. 데미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갤러리를 한 바퀴 쭉 돌아보던 그때 그의 비서가 조심스럽게 뒤에 섰다.
“지금 정문 앞이십니다.”
드디어 그가, 체이스가 왔다.
체이스는 포커페이스의 달인이었다. 사교계 인생 50년이 넘은 그의 어머니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갤러리에 들어서고 있는 체이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방금 차 안에서 이번 파티의 초대장 명단을 확인했다. 자신과 연결된 인간관계를 고스란히 옮겨온 것 같았다. 데미안이 제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지 체이스는 알 것 같았다. 데미안은 결국 둘 사이에 간신히 이어져 있던 끈을 자른 것이다.
이곳은 개인 갤러리였지만 꽤 규모가 있었다. 건물 전체가 갤러리 하나만을 운영하고 있었다. 3층 정도의 높이를 하나로 확 튼 구조가 이 갤러리의 자랑거리였다.
중앙 현관을 들어서면 그 멋들어진 건물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늘 데뷔하는 화가의 그림과 설치 미술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사이사이에 소파와 작은 티 테이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체이스가 들어서자마자 데미안이 화사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체이스.”
데미안은 체이스의 곁에 서며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체이스는 데미안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은 사람처럼 갤러리 안으로 향했다.
체이스는 갤러리 내부를 순식간에 훑었다. 자주 드나든 만큼 익숙한 공간이었다. 교묘하게 숨겨진 작은 공간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의도가 너무 뻔한 그들만의 파티였다.
체이스는 망설임 없이 한곳을 향했다.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좀 늦었습니다.”
“네 얼굴 봤으니…… 가 봐야겠다.”
데미안을 힐끔거린 그녀는 말을 아끼는 듯 보였다.
“형은 보셨어요?”
“글쎄다.”
도착한 지 꽤 되었다는 매튜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인 녀석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마 오늘 일어날 일에 대해 이미 갑론을박을 끝낸 상태인 듯했다.
나머지 그렇고 그런 풋내 나는 인간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막 등장한 체이스와 데미안의 분위기에서 뭔가를 감지한 하이에나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데미안이 둘의 곁에 다가섰다.
“난 이제 가 봐야겠구나. 네 말과 다르지 않니, 데미안.”
“그래요, 어머니? 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는데.”
데미안은 목을 조금 빼며 몸을 조금 틀었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을 유심히 살피던 모두의 시선이 데미안의 목을 향했다. 디자인이 특이한 드레스 셔츠였다. 비대칭으로 난 셔츠 깃이 포인트였지만 그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깃 사이로 드러난 목과 쇄골에는 아직 자국이 다 가시지 않은 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데미안의 의도는 너무 뻔했다. 보라고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벌려 놓은 것이었다. 체이스의 시선이 차게 식었다. 그 눈빛에 데미안이 야하게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어머니, 이 디자인 참 특이하죠? 작가의 아이디어기도 해요. 마지막엔 제 센스가 조금 들어갔지만요.”
“어머니, 그만 가시죠.”
체이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어머니를 에스코트하려 했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데미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고 시침을 떼고 있었다. 데미안은 마침 지나가던 웨이터를 세워 샴페인이 든 잔을 두 개 빼들어 체이스에게 향했다.
“그래, 이제 가야겠다. 내가 잘못 온 것 같구나.”
“어머니,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아직 할 말이 남았어요. 듣고 가세요.”
“그만하지.”
체이스가 정색을 하자 그녀는 멈칫했다.
“체이스, 보는 눈이 너무 많구나.”
“어라. 이미 볼 건 다 봤어요, 어머니.”
데미안이 체이스의 팔짱을 끼고 화사하게 웃었다. 갤러리 안의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보통은 이런 자리에서 누군가를 대놓고 바라보는 것은 실례였다. 하지만 보라고 대놓고 그러는데 봐 주는 것이 오히려 예의인 듯했다.
둘이 사귀었냐, 친구 아니었냐, 데미안이 일방적으로 따라다니지 않았냐, 체이스 표정은 왜 저러냐, 데미안은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지 않냐, 집착이 심해 보인다,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손님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커져 갔다.
체이스의 어머니는 이런 식의 이목이 마뜩잖았다. 이제 막 회사 경영에 뛰어든 아들이었다. 첫 이슈가 이런 스캔들이라니 최악이었다. 데미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자 갤러리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단 한 사람, 데미안만 빼고. 그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어머니,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 아들이 저를 창부 취급 하니 별수 있나요.”
탁! 데미안의 몸이 휘청거리며 멀리 내쳐졌다. 방금 체이스가 쳐 낸 데미안의 손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고 데미안은 미소 지었다.
사실 데미안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지인들과 셀럽들이 보는 앞에서 다정한 모습까지만 보이고 싶었다. 체이스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 확인만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지금 흔들리고 있어. 조금만 더 하면…….’
체이스는 다혈질에 성질이 급했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는 흥분해 있었다.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을 때였다.
“체이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가 떠나고 남은 건 나 하나라고 네가 그랬잖아. 매일 밤 그렇게 속삭였잖아……!”
“뭐라고? 너 정말!”
결국 목소리를 높인 체이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어머니가 체이스를 막아서며 데미안을 탓했다.
“말이 심하구나. 어디서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데미안은 화가 난 체이스와 그의 어머니를 차례로 바라봤다. 그 너머 급하게 오고 있는 세실까지.
‘당신이 봤어? 아니잖아? 내가 맞는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회심의 미소를 지은 데미안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의 붉은 혀가 다시 움직이려는 그 순간.
“안 됩니다! 초대 명단에 없으신 분은 출입이, 저기요? 아니, 저 사람이!”
“거기 뭐 하는 거야!”
“빨리 와! 긴급 상황이야!”
“거기 막아! 거기 서!”
“침입자다! 비상!”
* * *
딜런은 원래가 그렇게 생겨 먹은 남자였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 주지만 한순간 빼앗아 갔다. 모든 걸 집어삼키면 끝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을 주지 않았고, 진심으로 곁을 내어 주지는 않았다. 제가 죽으면 혼자 남겨 두게 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으로 관심이 가는 게 생겼다. 반드시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지켜 낼 자신도 있었고, 괜찮은 계획도 있었다. 이제 바다는 나가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 싶었다. 다원과 함께. 그런데…….
‘내가 망쳐 버렸어. 비겁하게 바다로 도망가서 벌 받은 거야. 그런데 혼자 벌을 받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사이렌에게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에 다원이 떠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두 눈 뜨고 그를 빼앗겨 버렸다. 사랑을 빼앗긴 남자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 썩어빠진 뱀 대가리 자식아, 당장 안 기어 나와?”
모든 시선이 일제히 정체불명의 침입자에게 몰렸다. 갤러리 안의 사람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분위기의 남자였다. 남자는 흙 묻은 워커 발로 거침없이 갤러리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이 무참히 짓밟히며 더럽혀졌다. 씩씩거리며 험악한 기세로 들어온 그는 거친 말을 쏟아 냈다.
“어디서 또 그 새빨간 혓바닥을 나불거리는 거지? 아, 너도 있었군. 비겁한 찌질이 자식. 너도 나와! 뱀 대가리 뒤에 숨어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었나?”
남자는 홀 중앙에 버티고 서서 모두를 천천히 돌아봤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올린 남자는 슬퍼 보였다. 그는 상처 입은 눈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둘 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남자가 찾는 뱀 대가리와 비겁한 찌질이가 누구인지로 갤러리 안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하나둘 설마 하는 눈으로 한곳을 바라봤다.
남자, 딜런은 드디어 목표물을 발견했다.
“하! 여기 다 숨어 있었네. 데미안, 체이스.”
딜런의 손가락은 정확하게 둘을 가리켰다. 다시 한번 갤러리가 웅성거렸다.
그때 건장한 경비원들이 딜런에게 달려들어 양팔을 잡고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딜런은 오히려 그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데미안의 얼굴은 구겨졌고 체이스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상황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자 뒤따라온 경비 요원이 권총과 전기 충격기 등을 꺼내 들었다. 딜런은 긴장했고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그때 체이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경비 요원들은 책임자인 데미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정신이 없는 듯했다.
세실이 경비대장에게 다가가 뭐라 이야기하자 그들은 한발 물러났다. 딜런에게 내동댕이쳐진 경비 요원들도 일어나 그의 주변에서 방어 자세만 취했다.
딜런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 체이스를 보았다. 왠지 그는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한 분위기였다. 찌를 문 물고기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게 낚시꾼이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딜런은 그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네가 우리 어머니에게 요사를 떨 때부터 사람 새끼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사람을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뱀새끼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지. 그래도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는 비열한 새끼인 줄은 미처 몰랐다.”
딜런은 정확히 데미안을 가리켰다. 데미안은 얼얼한 손을 가슴 앞에 올려 매만지고 있었다. 눈썹을 팔자로 떨어뜨린 것이 딱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피해자였다.
“이제 그따위 연기는 씨알도 안 먹혀. 가증스러울 뿐이야.”
데미안은 수치심에 몸을 떨며 체이스의 곁에 붙어 섰다. 마치 제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듯 보였다. 하지만 체이스의 어머니가 그를 쳐 냈다. 체이스도 데미안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데미안만 덩그러니 떨어져 나간 꼴이었다.
“그렇게 저 비겁한 새끼가 탐났어? 다 정리하고 떠나 온 애한테 그렇게 더러운 말을 할 만큼? 그것도 마을 사람들이 다 있는 앞에서!”
의문스러운 얼굴로 체이스가 데미안을 바라봤다.
“아, 아니……! 아니야. 체이스, 이건 모함이야. 난 걔한테 간 적도 없다고!”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어! 내가 그에게 반한 거야. 내가 그를 원한 거라고. 그는 너 따위에게…… 그런…… 그런 더러운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야. 도대체 왜 그렇게 모욕적인 말을 한 거야? 왜 모함을 한 거냐고……. 정말 다리를 벌려서 저 비겁한 놈 곁에 남아 있는 건 너 아냐?”
딜런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며 물기가 스며들었다. 이어서 그는 체이스를 향해 원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넌 대체 왜 그가 저 뱀 대가리한테 그런 말을 듣도록 내버려 뒀지? 너나 나나…… 다 병신 같아.”
체이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물이 차오른 딜런의 붉은 눈이 체이스에게서 데미안에게 옮겨 갔다. 주변이 웅성거렸다. 데미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였어? 저 새끼가 탐나면 네 힘으로 가져가면 됐잖아. 왜 그 지랄이냐고, 너희 둘 다.”
딜런은 눈에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 냈다. 그는 데미안의 앞에 바짝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거친 손등에 쓸린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난 네가 한 말에 흔들린 벌을 받고 있고, 달게 받을 생각이야. 네가 저 새끼를 가지든 뭘 하든,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야. 난 내 애인을 찾아야겠으니까. ……단, 앞으로 우리 앞에 얼씬거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 번만 더 우리 주변에 얼쩡거리면 지금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하게 해 줄 거니까.”
딜런이 그대로 고개만 돌려 체이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도 기억해 둬. 더 이상은 안 돼. 그는 이제 내 사람이야. 보아하니 가진 것도 많아 보이는데, 남의 것 넘보지 말고 네 손에 쥔 거나 잘 지키라고.”
딜런은 체이스에게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갤러리를 거의 다 빠져나갈 때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데미안이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잡아, 잡으라고! 그냥 보낼 거야? 누구라도 신고 좀 해!”
그러나 이미 의미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갤러리 안의 사람들은 데미안과 체이스를 힐끗거리며 술렁거렸다. 경비대는 대장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곧 세실과 경비대장이 움직였다. 경비대와 갤러리 직원들은 재빠르게 손님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누구 직원이야? 왜 저자의 말을 듣냐고! 이봐!”
데미안이 경비대장의 앞을 가로막자 그는 딱 한 마디만 했다.
“저희는 오너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그럼.”
“뭐? 오너?”
오너의 지시를 따른다면서 경비대가 세실의 말을 듣는 걸 보면 그들이 말하는 오너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그러나 체이스가 갤러리의 오너라는 이야기는 데미안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당황한 그가 체이스를 돌아보는 순간 ‘쫙!’ 소리와 함께 데미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체이스의 어머니가 따귀를 때린 손이 아픈 듯 만지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더러운 것!”
그녀는 마치 몸에 더러운 오물이 묻은 양 진저리를 치며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방금까지 딜런이 서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보던 체이스는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의 형, 매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임시로 세워 둔 파티션 뒤쪽 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중이었다.
매튜가 계면쩍은 웃음을 짓다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마 힘내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 옆엔 매튜보다 조금 큰 체격을 지닌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가 그의 어깨를 톡톡 치며 뒤쪽을 가리켰다. 아마도 신인 화가일 그 남자의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도 매튜는 체이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체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매튜는 비밀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왜 갑자기 제 결혼을 서두르는지 알 것 같았다.
‘형은 태어나서 하나부터 열까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왜 하필 지금 사랑에 빠진 거야?’
그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체이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나오냐고?”
데미안의 격앙된 목소리에 그의 미간이 거칠게 구겨졌다.
예전에 체이스는 데미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말이야.’
‘응?’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뭘 숨겨?’
잠자리가 끝난 뒤였다. 관계 후엔 언제나 바로 씻으러 가던 체이스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자 데미안은 그 모습이 더 짜릿한 듯 황홀한 얼굴이었다.
‘널 사랑하는 걸 들켰는데 숨기는 게 더 있겠어? 없어.’
‘정말 없어?’
‘응. 난 언제나 너에게 당당해.’
그렇게 데미안은 결백하다는 듯 맑은 얼굴로 말했지만, 사실 체이스는…….
“알고 있었어.”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야?”
“네가 다원을 싫어하는 것도, 나 몰래 괴롭힌 것도…….”
“뭐……!”
“알고 있었어.”
체이스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데미안은 그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체이스의 뒤로 서 있는 세실이 보였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게임 오버.
데미안의 눈가가 찌푸려지자 체이스 역시 인상이 험악해졌다. 세실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네가 내 핸드폰에서 그의 부재중 통화 이력과 메시지를 지우고 메일을 숨긴 것까지 전부.”
“어…… 어떻게.”
“알고 있다고. 하아…….”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쉰 체이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쳤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어딘가 편해 보였다.
“네가 그렇게 원하는데 어쩌면 너랑 함께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 어차피 너나 나나 이 바닥 돌아가는 거 훤한데……. 편할 수도 있고.”
“……뭐?”
데미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또 그러다 보면…… 어쩌면 새로운 정이 생길 수도 있잖아. 한평생 나만 좋다는 녀석인데.”
“그 말은…… 나와 잘해 보겠다는.”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서 나온 그 말에 데미안은 멍해 보였다.
“그러니까 잘 좀 하지 그랬어? 마지막까지 솔직했으면 좋았잖아. 왜 몸만이라도 좋다고 한 거야? 왜 다원의 일을 숨긴 거야? 왜 그를 찾아가 그딴 소리를 지껄인 거야?”
다시 다원이었다. 순간 데미안은 속에서 불구덩이가 치미는 것 같았다.
“다원, 다원, 다원! 지겨워, 정말! 그 거지새끼한테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내가 걔보다 못한 게 뭔데? 내가 먼저였어! 내가 더 오래 네 곁에 있었다고! 넌 원래 내 거였단 말이야!”
“……그만.”
“그 새끼 구멍이 그렇게 좋았던 거야?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싫어? 나보다 더 잘해? 얼마나 잘하는데. 왜, 걘 네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대 줘?”
“그만…….”
데미안은 체이스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접어 웃었다. 체이스는 딜런이 한 말이 떠올랐다.
‘뱀!’
“때리고 밟고 졸라도, 멋대로 찔러도 다 좋다고 구멍을 마구 쪼여 댔어? 쫀득쫀득하…….”
짜악!
“아악!”
“그만하라고!”
체이스의 길고 굵은 팔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큰 손은 순식간에 데미안의 하얀 뺨을 내리쳤다. 데미안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입인지 코인지 둘 다인지, 아무튼 데미안의 얼굴에서 제법 많은 피가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으으윽.”
데미안은 맞은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끅끅거렸다. 그는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체이스를 올려다봤다. 체이스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등 뒤에 가까이 다가와 선 세실의 얼굴이 더 심각했다. 데미안의 얼굴은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저런. 퉁퉁 부어올라 버렸네요. 눈꼬리도 찢어지고.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세실의 말에도 체이스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그럼 데리고 가겠습니다.”
세실은 데미안을 일으켜 세웠다. 체이스에게 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패닉 상태인 그는 순순히 세실의 손에 이끌려 전시회장을 나갔다.
세실은 데미안을 그의 개인 비서에게 넘기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전시회장을 둘러보는 세실의 표정이 묘했다.
“어리석은 체이스.”
사랑인 줄도 모르고 체이스는 다원을 흥미롭고 신기해했다. 처음에 세실도 체이스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체이스를 보니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결국 깨닫지 못할 거야. 사랑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배울 수 없겠지.”
* * *
캐서린의 집을 나온 다원은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낯선 분위기가 느껴질 때쯤 멈춰 섰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다원 혼자만 멈춰 서 있었다. 다원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스스로가 가여웠다. 급기야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에 숨이 차올랐다.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그러나 바로 뒤따른 생각은 ‘의미 없다’였다. 그때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후우.”
정신없이 걸었더니 다리와 발바닥이 아파 왔다. 앉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려도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밤새 내린 비에 벤치는 다 젖어 있었다.
“딜런…… 하아.”
갑자기 입 밖으로 나온 이름에 다원은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고 싶어지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얼굴이라도 자세히 봐두는 건데…….’
거리는 어느새 각자의 목적지로 찾아 들어간 사람들 덕에 한산해져 있었다. 다원은 텅 빈 거리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 모습이 어색해 일단은 걷기 시작했다.
“응? 커피 냄새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커피 냄새를 따라 조금 더 걸었다. 곧 웬만한 도시에는 다 있다는 인어 아가씨가 그려진 커피 가게가 나왔다. 학교 가는 길에 항상 들르던 프랜차이즈였다.
“응? 꼬리가…….”
언제나 별생각 없이 보고 지나치던 로고가 오늘따라 다원의 눈길을 끌었다. 다원은 잠시 그 로고 앞에 멈춰 섰다. 처음엔 그냥 아가씨인 줄 알았다. 머리 위에 왕관 같은 것이 있어 공주님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예전에 대학 동기와 수다를 떤 것이 떠올랐다.
‘원더우먼일 수도 있겠다.’
커피를 마시다 꺼낸 뜬금없는 다원의 말에 대학 동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어제 영화 채널에서 <원더우먼> 봤거든. 닮은 것 같아.’
‘인어 아가씨야.’
‘인어? 커피랑 인어가 무슨 상관이 있어?’
‘난들 아냐. 커피만 맛있으면 됐지. 뭐…… 맛도 없지만.’
결국 인어 아가씨의 커피는 맛이 없는 걸로 대화는 마무리되었고,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었다. 얼마 전 딜런이 그 인어에 관해 설명해 주긴 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다원에게 또 다른 의문을 던져 주었다. 딜런의 말에 의하면 그 인어는 다원이 생각한 <인어공주>의 예쁜 인어가 아니었다.
‘사이렌? 왜애애애앵, 그 시끄러운 사이렌?’
‘하하하. 그 사이렌의 유래이긴 하지.’
딜런의 입에서 나온 사이렌은 다원이 알던 아름다운 인어 아가씨가 아니라 끔찍한 괴물이었다. 다원은 귀를 막았다.
‘하지 마. 내 동심을 파괴하지 마! 그건 너라도 용서할 수 없어!’
‘미안해서 이를 어째? 우리 꼬맹이, 많이 놀랐어요? 우쭈쭈쭈.’
피식. 다원은 갑자기 떠오른 그때 일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무리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해도 딜런은 끝까지 사이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냥 예쁘고 착한 인어, 못생기고 무서운 인어라는 거 아냐?’
다원은 여전히 인어와 사이렌의 차이가 아리송했다. 아무튼 이 로고의 아가씨는 금발의 전형적인 미국 미인도 아니고, 왕관을 쓴 원더우먼도 아니고, <인어공주>에 나오는 아름다운 인어도 아니었다.
‘확실한 건 딜런이 사이렌을 무서워한다는 거였어.’
다원은 다시 한번 매장 밖 외벽 기둥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로고를 눈여겨봤다. 요즘 로고가 아닌 초창기 로고였다.
‘처음부터 이 로고를 봤다면 헷갈리지 않았을 텐데.’
그냥 옷의 무늬인 줄 알았던 줄무늬가 이제 보니 인어 꼬리였다. 다원은 대학 생활 4년간 매일 한 잔씩은 커피를 사 먹었으면서 이제야 안 이 사실에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인어였어. 아니, 사이렌이었나?’
빠아아아아앙!
그때였다.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경적 소리에 다원의 생각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쾅!
* * *
응급실은 분주했다. 방금 일어난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환자가 두 명이었고 경상을 입은 환자도 열 명은 더 되었다.
“이거 작성하시고 가시면 됩니다.”
다원은 한쪽 팔에 링거를 맞고 있었다. 간호사는 종이 한 장이 끼워진 클립보드를 침대 한편에 내려놓았다. 다원은 클립보드 위의 하얀 종이를 보다 눈을 감았다. 글씨가 한데 모아졌다 풀어졌다 했기 때문이었다.
적을 생각은 하지 않고 눈을 감아 버리는 걸 본 간호사가 다원을 불렀다.
“환자분? 환자분?”
다원은 간호사의 그 소리가 다른 환자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지러움이 좀 가라앉았을 때쯤 클립보드 위를 누군가가 손끝으로 톡톡 쳤다. 그제야 간호사가 부르는 환자가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간호사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약간 멍하게 풀려 있었다. 간호사는 다시 다원을 살피며 질문했다.
“정말 별다른 이상은 없으신 거예요?”
“……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하는 표정의 다원에게 간호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무 멍해 보이셔서 그래요. 큰 상처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건 현장 바로 옆에 계신 거였잖아요. 부상도 당하시고.”
“가벼운 상처인걸요.”
“파편에 맞은 상처를 우습게 보면 안 돼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더 위험한 건 바로 마음의 상처죠.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정말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좋을 텐데요. 예약을 하고 가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원의 정중한 거절에 간호사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응급실은 바빴고 할 일은 많았다. 그녀는 다원에게 볼펜을 쥐여 주고 뒤돌아섰다.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다원은 손으로 몸을 감싸며 웅크렸다. 손에 화끈한 느낌이 드는 순간 모든 상황은 끝이 나 있었다.
“사이렌…….”
다원은 서둘러 필수 항목을 채워 넣었다. 그동안 링거액도 거의 바닥을 보였다. 다원은 현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고 응급실을 나섰다.
-제동이 되지 않은 차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유명 프랜차이즈의 커피 매장을 들이박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에게 들어 보겠습니다.
-네. 여기는 보스턴 번화가에 위치한 커피 매장 앞입니다. 보시다시피 유리창이며 벽이 처참하게 깨지고 무너져 있습니다. 오늘 오전, 출근 시간을 갓 넘긴 10시경이었습니다. 100km가 넘는 속도로 돌진하던 지프가 갓길에 정차되어 있던 다섯 대의 차를 들이박고는 그대로 커피 매장 정문으로 돌진했습니다. 차는 카운터를 박은 후에야 멈췄습니다. 운전자도 많이 다친 상황이라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네, OO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들으셨다시피 정말 끔찍한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고로 매장에서 일하던 직원 한 명과 손님 한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아! 손님이었던 여성분이 숨졌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막 매장을 들어서던 순간 차에 부딪친 채로 카운터와 충돌하는 바람에…….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다원은 아직도 그 여자가 눈앞에 선했다. 그녀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시커먼 지프와 뒤로 밀려 들어간 카운터 사이에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기 전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다원은 그녀가 죽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다원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될 수도 있었어. 내가 그 사이에 끼어서…….”
만일 카페의 초기 로고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사이렌과 인어 아가씨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면 다원과 거의 동시에 가게 앞에 도착한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마 다원이 서 있었을 것이다.
만약 오늘 자신이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을 사람들과 캐서린, 네이선에게…… 그리고 딜런에게 데미안이 말한 대로의 사람으로 남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파렴치한이 있었지, 하고 두고두고 회자되면서. 제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자 다원은 억울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눈앞이 핑 돌았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어. 확실히 끝을 낸 다음에 돌아갈 거야.”
다원은 1년 전 떠나온 도시로 방향을 잡았다.
* * *
새로 생긴 목적지를 향한 다원의 거침없는 출발은 곧 뜻밖의 장애물에 좌절되고 말았다.
“기차가 없다니.”
도대체 이 추운 날에 왜 이렇게 다른 지역에 가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과거를 정리하러 가는 길이 초장부터 꼬여 버렸다. 다원은 기차역에 안내된 기차표의 운행 시간과 경유지를 찬찬히 훑었다.
어차피 좁은 방에서 혼자 끙끙거리면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될 터였다. 이렇게 된 바에 경유해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다원은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곳을 4박 5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각오를 하고 오긴 했지만 바로 체이스를 찾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사실 다원에게 체이스는 편하거나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 날부터 체이스는 다원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아직도 다원은 그가 어디에서,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물어본 적은 있었지만 체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피한 것 같았다.
체이스와의 연애 기간 내내 신경 쓰지 않으려 했을 뿐 다원은 은연중에 체이스가 무언가를 숨긴다는, 정확히는 제게 알리기 싫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연인으로서 그에게 좀 더 명확하게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그의 뜻대로 맞춰 주는 게 습관이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다원은 당연히 지금보다 모든 것이 서툴렀고 어설펐다. 하루하루 학교 다니는 것도 벅찼다. 안타깝게도 그의 인생에 조력자라 할 만한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보호해 줄 부모도, 의지할 형제도, 상담할 선배조차도.
그렇더라도 다원은 영민하고 의지가 강했다. 체이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느리더라도, 실수가 좀 잦더라도 혼자 힘으로 잘해 나갔을 것이다.
체이스는 강한 에너지와 확실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원 혼자 감당하기엔 버거운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그를 따라가며 늘 맞춰 주다 보니 어느덧 그의 틀 안에 갇힌 채 알량한 자존심만 세우게 되었다.
* *
다원은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에 왔다.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밥 한 끼를 먹는 일도, 커피 한 잔을 사 먹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다원이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를 이용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나마 가장 눈에 익숙했고, 주문이 가장 쉬웠고, 혼자 오래 있을 수 있는 곳이었기에.
시간이 좀 흐르고 의사소통이 조금 편해지자 그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으로서 누릴 건 다 누려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에 갔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미국 대학 도서관은 다원에게는 정말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나마 말하는 것보다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편했다. 다원은 악착같이 도서관을 들락날락했다. 도서관이 조금 익숙해진 후로는 기숙사, 학교, 도서관만을 오갔다. 그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조금씩 단단해져 가고 있었다.
그쯤 다른 학생들의 눈에도 다원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이면 제일 열심히 수업을 듣고, 기숙사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매일 도서관을 찾는 동양에서 온 유학생. 그 유학생은 가장 인기 없는 책들이 가득 꽂힌 구석진 책장 사이, 바닥에 앉아 책을 읽었다. 너무 눈에 띄었다.
“저 꼬맹이 오늘도 곧장 나갈걸. 신기하지 않냐?”
“뭐가? 아, 성적? 요번에 탑 찍었지? 맨날 도서관에 사니까.”
“좀 그렇지 않냐? 저런 애들 때문에 우리 등록금이…….”
“아니, 그게 아니라……. 여자애들이 쟤 얘기 많이 해.”
“나도 들은 것 같아. 엄청 귀여워하던데.”
“동생 같으니까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가 아직 여자애들 하는 얘길 못 들어서 그래. 다이애나 있지?”
“다이애나? 내가 알고 있는 그 다이애나? 1학년 퀸카? 내 영원한 이상형? 걔가 왜?”
“쟤한테 찝쩍대.”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그냥 불쌍한 애 도와주는 거 아냐?”
“그런데 걔 남친 있잖아.”
“노튼 교수 아들? 그 성질 고약하기로 유명한…….”
다원이 조금만 더 사교적이었다면, 주변의 변화에 민감해서 오해를 풀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좀 달랐을지 몰랐다. 아니, 다이애나의 눈에 띄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내실을 다지며 껍질을 단단하게 만든 다음 스스로 그곳을 걸어 나왔을 다원은, 불행히도 강제로 끌려 나오게 되었다.
“방금 누구라고 했어?”
“어! 아니…….”
“다시 말해 봐! 내 애인 다이애나가 누구한테 찝쩍댄다고?”
* *
그쯤 곧 졸업을 앞둔 체이스는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체이스. 오늘 12시에 노튼 교수와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세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체이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졸업에, 입사에, 철없는 형에 친구까지.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제가 오전에…….”
체이스는 세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일어나 씻으러 들어갔다. 세실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세실은 하필 오전에 자리를 비우게 되어 체이스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체이스를 쉽게 대하지 못했다. 체이스가 가진 배경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의 외모나 분위기 그리고 세실이 꾸민 여러 가지 일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학교에 들를 뿐이니 체이스에게 별일은 없을 거라고 세실은 생각했다.
얼마 뒤. 교수와 마주 앉은 체이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곧 있으면 첫 출근이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는데, 자신을 방해한 교수와 그의 막내아들을 체이스는 잘 기억해 두었다.
“그럼 체이스 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점심 식사나…….”
“아빠, 난 수업 있어.”
교수의 제안을 체이스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의 아들이 선수를 쳤다.
“없다는 거 안다.”
“친구들이랑 스터디. 나 먼저 갈게. 체이스 선배,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보면 알은척해요.”
“저, 저, 저.”
“그럼 저도 이만. 오후에 선약이 있어서.”
“아니, 체이스 군……!”
체이스는 망설임 없이 교수실을 나왔다. 건물을 막 빠져나오는데 노튼 교수의 아들이 낯익은 얼굴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보였다.
“스터디 간다던 녀석이…… 하! 한다던 스터디가 그 스터디였어? 동아리 수준 많이 떨어졌네.”
대학에는 배경 좋고 돈 좀 있는 집안의 자식들만 모이는 사교 동아리가 있었다. 체이스도 가입되어 있던 곳이었다. 재산이며 영향력을 따져 등급을 나누어 질을 관리하던 사회의 축소판이었는데, 체이스의 눈에도 익은 동아리 회원들이 있던 것이다. 그것도 타깃을 정해 집요하게 괴롭히는 데 재미를 붙인 악질적인 놈들이.
체이스는 세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뭐 하나 알아봐. 간단한 거야.”
-말씀하십시오.
“그 동아리 가입 명단에 노튼 교수 막내아들이 있는지, 지금 타깃이 된 녀석이 있는지 알아봐. 당장.”
전화를 끊은 뒤 일 잘하는 세실에게서 5분이 지나기도 전에 문자가 왔다.
[현재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음. 그의 추천으로 이달의 타깃이 정해짐. 같은 과 동기, 하다원.]
아니나 다를까. 교수 아들이라는 게 나서서 타깃을 정하다니 꼴불견이었다. 체이스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에게 찍힌 불쌍한 타깃을 확인하러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은 텁텁한 책 냄새와 답답한 공기, 공부하는 학생과 하는 척하는 학생들의 모습까지 모든 게 여전했다. 그리고…… 새로운 그 무엇.
체이스는 타깃이 되었다는 동양인을 찾아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책장 사이 바닥에 앉은 걸 탓하는 줄 알고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았다.
“인터넷으로 몇십 번, 몇백 번 확인했는데요. 지금까지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 없었고요. 중앙 도서관 열람실은 다 이렇게 이용하는 건데……. 아닌가? 누가 뭐라고 해요? 그런데…… 누구세요?”
처음으로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놀고 싶은 유리구슬이었다. 체이스가 처음 다원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 *
처음 보는 큰 체격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책장과 벽 사이에 버티고 섰을 때 다원은 답답함을 느꼈다. 남자는 단순히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다원은 뻥 뚫린 공간이 뚜껑이 닫힌 유리병처럼 완전히 밀폐된 것 같았다.
저를 꿰뚫는 듯한 남자의 묘한 시선은 다원에게는 상당한 공포로 다가왔다. 때마침 책 정리를 위해 사서가 지나갔고 다원은 한낮의 대학 도서관에서 힘겹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다원은 꿈에서도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 때문에 잠을 설쳤다.
그런데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남자는 계속해서 밤낮으로 나타났다. 다원은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바쁘다, 모른다, 싫다, 대체 왜 이러냐, 할 일이 없냐. 수시로 물었지만 그는 제대로 대답을 해 준 적이 없었다. 다원은 이제 남자가 왜 그러는지는 관심 없었다. 그냥 머릿속에 도망치라는 경보음만 끊임없이 울려 댈 뿐이었다.
다원은 부지런히 숨어 다녔다. 수업 후엔 샌드위치 하나에 커피 하나만 사 들고 기숙사에 틀어박혔다. 어차피 며칠만 버티면 방학이었다. 남자가 아무리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며칠 정도는 피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가지 못해 다원은 남자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알고 봤더니 그 남자는 같은 과 선배였다. 그쯤 되자 다원은 조금 화가 났다.
“아니, 졸업생이면 먹고 살기 바빠야 하는 거 아니에요? 출근 안 해요? 왜 자꾸 학교에 와요? 전 바쁘거든요? 전 댁…… 선배님처럼 능숙한 편이 아니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요. 이제 오지 마세요. 선배님 볼일 보러 가시라고요.”
이왕 잡힌 김에 다원은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다 풀어 버렸다. 그 모습은 꼭 치와와가 마스티프 앞에서 왕왕 짖어 대는 것 같았다. 제가 죽을 줄도 모르고.
“상당히 귀엽네.”
남자가 하는 말에 다원은 기도 차지 않았다.
“하!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전 선배님이랑 달리 상당히 바쁜……!”
“파티에 놀러 와.”
“내가 왜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려고.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전 선배님과 거둘 유종의 미가 없거든요. 있더라도 안 거둘 거고요.”
“흐음.”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이 꼭 ‘지금 죽을래? 나중에 죽을래?’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다원은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사실 전 파티가 뭔지 몰라요. 학교랑 기숙사 말고는 가 본 데도 없어요. 그냥 가만 놔둬 주시면 안 돼요? 부탁이에요.”
“그럼 꼭 놀러 와. 너한테 다시없을 기회가 될 테니까.”
“……싫어요.”
남자는 고개를 숙여 다원의 귀에 뭐라 뭐라 한참을 속삭였다. 그러고는 조용히 입을 다문 다원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알았지? 기다린다.”
“…….”
“참고로 난 기다리는 게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체이스가 돌아간 후, 평소 늘 조용하던 다원의 주변이 북적거렸다.
“너 저 선배 어떻게 알아?”
“선배가 뭐라고 했어?”
“아니…… 갑자기 왜 이래?”
다원은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얼떨떨하기도 했고 조금 짜증도 났다.
“빨리. 선배가 뭐라고 그랬는데? 어서 말해 봐.”
그들은 원하는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다원이 대답했다.
“취직하려면 네트워크가 중요하고, 인맥이 어떻고……. 뭐 그런 거?”
“헉.”
“너 정말 저 선배랑 무슨 사이야?”
“응? 아무 사이도 아니야. 도서관에서 길을 막…… 아니, 책 좀 찾아 주고……. 수업 이야기도 했던 것 같고.”
아무리 무딘 다원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다원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무튼 너 저 선배 확실히 잡아. 하늘이 내려 주신 기회야. 그 김에 우리도 좀…….”
“야! 넌 이런 녀석한테까지 그러고 싶냐?”
적극적으로 몸을 내민 녀석을 옆에 있는 다른 녀석이 툭 쳤다. 다원은 이때다 싶어 슬쩍 빠져나가려 했다.
“갑자기 왜 이래? 더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좀…….”
“야! 너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그러나 그대로 붙잡힌 다원은 입학하고 처음으로 같은 과 동기들과 밥을 먹게 되었다.
남자의 등장은 대학 적응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다원에게 많은 걸 일깨워 주었다. 대학은 단지 세상에 한 발 내딛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었다. 아무런 인적 네트워크가 없는 유학생에게 미국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현실을 다원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고 능력이 우선이라던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능력을 입증할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원은 결국 파티에 가기로 결심했다.
파티 당일, 다원은 파티 장소와 초대자 이름을 쓴 종이를 기숙사 방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 선배라는 남자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없지만 기숙사생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감이 확인은 해 줄 터였다.
다원은 그렇게 운명을 바꿔 놓을 파티장으로 향했다.
* *
으리으리한 저택 입구에서 씩 입술을 끌어당겨 웃는 남자는 악마 같아 보였다. 다원은 남자와 눈인사를 한 후로 미로 같은 파티장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무슨 파티가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어? 정말 미치겠네.’
인맥을 만들겠다고 나온 파티였지만 의미심장한 남자의 미소를 보자 절대로 잡히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함이 든 다원은 기를 쓰고 숨었다.
‘하느님, 부처님. 이제 정말 다 필요 없어요. 기숙사 내 침대로 무사히 돌려보내 주세요. 제발요.’
하지만 하늘은 다원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다원은 남자가 놓은 덫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는 파티장에 학을 뗀 다원은 무의식적으로 조용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우와. 예쁘다. 딴 세상 같아.”
건물 뒤편엔 큰 나무가 하나 있었다. 그 뒤엔 작은 연못도 있었는데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아니, 신비로웠다. 정신없는 파티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다원은 넋을 놓아 버렸다.
연못 안의 물고기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야광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숫자밖에 모르고 살던 다원에겐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 다원은 연못가에 가 앉았다. 저를 잡아먹으라고 목을 쭉 빼고 기다린 꼴이었다.
“여기 있었네. 예쁘지? 나도 이곳을 가장 좋아해.”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다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이렇게 된 거 다원도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선배님.”
“체이스.”
남자는 다원의 손을 잡아 왔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다원은 체이스라고 이름을 밝힌 그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선배님, 전…….”
“체이스.”
“……체이스.”
“응. 왜 그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원의 손을 잡고 있는 손도 여전히 느슨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머릿속에선 자꾸 경고음이 울렸지만 겁을 먹으면서도 다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한테 자꾸 왜 이러시는 건데요? 저기 쭉쭉빵빵 언니들한테 가세요. 다들 당신 근육만 보고 있잖아요.”
다원이 검지로 건물 앞쪽을 한 번, 체이스의 팔과 가슴 근육을 한 번씩 가리키며 또박또박 대들었다.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이번에는 그의 아랫도리를 정확하게 가리킨 다원이 쏘아붙였다.
“그리고 다들 당신 거기에도 관심 있는 것 같으니까 가서 잘 활용해 보시고요.”
체이스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다원은 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도를 지나친 발언이었다.
‘젠장. 망했다.’
다원이 낭패감을 곱씹는 사이 체이스가 한 발 더 다가왔다. 그러고는 뜻밖에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히이익!’
그의 큰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가 쓸고 나가는 감촉이 상당히 묘했다. 더 겁을 먹은 다원은 소리를 높였다.
“그 잘난 얼굴도 저 말고 다른 데 활용하시라니까요?”
다원은 체이스의 큰 손을 치우며 드라마 주인공처럼 매끈한 그의 얼굴을 쭈욱 밀어 버렸다. 그런데…….
‘하아.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건데…….’
체이스의 손에 이끌린 다원은 지금 그 아름다운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어느 창가에 앉아 있었다. 다원이 좋아할 만한 요건은 다 갖춘 장소였다. 혼자 있었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다원의 앞에는 저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되는 것 같은 남자, 체이스가 무릎을 바짝 맞대고 앉아 있었다.
“저 정말 술 못 마셔요. 아니,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어서 마실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체이스는 다원의 간절한 고백에도 변함없는 표정을 고수했다.
“아, 정말 어떡해. 벽창호도 아니고 대체 뭐야.”
저도 모르게 한국말로 중얼거린 다원의 표정은 말 그대로 딱 죽을 맛이었다.
“암튼 지금은 안 마실래요.”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처음이니까 선배 앞에서 마셔. 한 잔만.”
“……어른한테요?”
요지부동이던 다원은 체이스의 그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동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랑 반주를 했다며 ‘술은 이렇게 고개를 뒤로 하고 마셔야 한대.’ 하고 떠들던 옆자리 아이가 부러웠던 다원이었다. 제게 그런 기회가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원래 술은 처음 배울 때가 제일 중요하거든.”
다원은 홀린 듯 체이스가 손에 쥐여 준 칵테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고 꿀꺽하고 삼켰다.
“어! 달다. 술은 쓰다던데…… 다네요?”
“…….”
선배라는 남자가 넋을 놓고 무표정하게 저만 바라만 보고 있자 다원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요? 이봐요? 이거 보여요?”
다원은 체이스의 눈앞에 손을 팔랑거렸다. 그는 여전히 말없이 다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체이스는 다원이 술을 마시는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번 키워 볼까?’
한 번도 살아 있는 것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게 조르거나 때리거나 쥐어짜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았다. 망가뜨리지 않고 잘 키울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자면 한 가지를 꼭 확인해야만 했다. 당장.
* *
“흐윽. 아파요.”
체이스는 조금 속도를 줄였다. 평소에 비하면 정말 천천히 움직이는 건데도 다원은 힘들어했다. 그는 체이스의 아래에 엎드린 채 무릎을 세우고 하얗고 조그만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팔을 가슴 앞에 모으고 고개를 사이에 묻고서 낑낑거렸다.
‘깨지면 안 되는데…….’
유리알 같은 녀석을 위해 체이스는 침대 위에서 드물게 배려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가 다원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작고 보들보들한 엉덩이와 핏줄이 울퉁불퉁한 손이 대비되는 모습에 다시 가학심이 살짝 올라온 체이스는 엉덩이를 옆으로 벌렸다.
“으윽. 으으윽.”
다원은 엉덩이에 힘을 주며 바르작거렸지만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다원의 안에서 체이스는 제 것을 천천히 빼냈다.
“흐음. 힘을 좀 빼 봐.”
처음이라 그런지 내벽의 쫀득한 살이 요령 없이 찰싹 달라붙어 마지막까지 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랬다면 절대로 체이스에게 통하지 않았겠지만 다원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시종일관 요령이 없었다.
체이스는 온몸에 식은땀이 쫙 날 만큼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었다. 다 빼지 않고 끝만 걸친 채 내려다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대로 잠시 기다리자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아직 다 빠지지 않은 것을 빼 보려 했던 것인지 다원은 스스로 움직였다. 아주 제대로.
다원은 허리를 내리면서 동시에 안에 든 것을 밀어 내기 위해 아래를 오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날 밤 다원이 체이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한 행동 중에 가장 잘못된 일이었다. 체이스는 그대로 퍽 하고 다원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악!”
“으윽.”
체이스의 입에서 처음으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조여든 다원의 아래는 마치 사정 방지 링으로 밑동을 바짝 조이듯 체이스를 옭았다. 체이스는 다원을 다그치지 않고 그가 스스로 힘을 풀기를 기다렸다.
“흐음, 잘했어. 미안해. 이제부턴 살살 할게. 너무 좋아서 내가 좀 흥분했어.”
“하아아.”
다원의 몸에서 힘이 풀리자 체이스는 천천히 자신을 빼냈다. 그리고 이번엔 좀 전보다 더 천천히 밀어 넣었다. 하얀 엉덩이 사이로 사라져 가는 검붉게 달아오른 것은 완전히 힘을 받아 빳빳했다.
“아아아악! 내 엉덩이. 흐윽. 배가 뚫리는 것 같아…….”
체이스가 침대에서 들은 말 중에 가장 무드 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다원은 체이스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마안, 이 나쁜 놈아……!”
“겁이 없네. 내 유리구슬은.”
반쯤 들어갔을 때 체이스는 그의 마른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큰 손으로 조금 힘을 줘 등을 내리누르곤 그대로 아래를 팡팡 가볍게 튕기자 다원에게선 죽는 소리가 났다.
“으아악! 으으으. 그만…… 흐윽. 그만 좀.”
시트를 꽉 잡은 하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더 하면 깨지겠지?”
체이스는 다원의 등을 누르던 손을 치웠다. 다원은 훌쩍거렸지만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 그 자존심 끝까지 지켜야 할 거야. 세실에게 빈틈을 보이면 나도 널 지켜 줄 수가 없거든.”
정신이 없는 다원은 체이스가 뭐라 하든 더 이상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잘 집어삼키면서 엄살은…….”
체이스는 다원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귓바퀴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본 체이스는 다원의 골반을 잡아당기며 그의 엉덩이에 아래를 비볐다. 다원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체이스는 그 움직임이 간지러웠다.
“다워나…….”
대답은 없었지만 아래가 움찔거렸다. 체이스는 그의 귀에 다시 속삭였다.
“다워나.”
또 아래가 움찔거렸다. 목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체이스는 다시 귀에 속삭였다. 조금 경고를 보태서.
“대답해야지, 다워나.”
“……으응.”
작게 대답하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체이스는 다원에게 다정하게 앞으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제 좀 더 세게, 빠르게 움직일 거야.”
“아파. 무서워…….”
다원이 체이스를 바라봤다.
술에 달아오른 다원의 눈가는 붉었다. 한 번도 하지 않은 행위에 눈물이 나는 건 당연했다. 지금까지도 힘들고 충격적이었는데 이제 시작이라는 말에 놀라 돌아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안타깝게도 체이스에겐 앙탈로 보였다.
‘제법 애처롭긴 한데……. 키우려면 처음부터 버릇을 잘 들여 놔야겠지.’
다원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체이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도 더는 참기 힘들어. 대신 넌 투명하고 예쁜 구슬이니까 깨트리진 않을게. 나만 믿고 이제부턴 정말 힘을 빼야 해. 알았지? 착하다.”
체이스는 다원의 어깨 옆을 짚었다. 그러곤 팔에 힘을 줘 팔 굽혀 펴기를 하듯 몸을 지탱하고 허리를 아래에서 위로 크게 한 번 쳐 올렸다.
“으아아!”
다원의 몸이 풀썩하고 침대 위로 무너졌다.
“쯧! 이럴 줄 알았어. 조금 힘 준 것뿐인데…….”
체이스는 혀를 차며 다시 다원의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무너지면 네가 다쳐. 허벅지와 허리에 힘주고 이렇게 딱 버텨. 이젠 절대로 안 봐줘. 알았지?”
체이스는 다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꿈틀거리는 다원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체이스는 눈을 감고 그를 느끼며 다시 쳐 올리기 시작했다.
체이스는 오늘이 처음인 유리구슬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선 틀어 놓은 재즈에 맞춰 부드럽게,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재즈 선율 사이에 섞여 들려오는 살 소리가 점점 젖어 들 때쯤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시트를 말아 쥔 다원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시트에 비벼져 더 붉어진 눈가엔 어느새 물기가 가득했다. 다원의 몸이 달아오름과 함께 체이스의 허리 짓이 더 빨라졌다. 그의 아래가 척척척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다원의 회음부를 쳐 댔다.
어느 순간 완전히 풀려 버린 다원의 아래에선 하얀 액이 흘러나왔다. 계속 비벼져 거품이 인 것이 체이스에게 붙었다가 다시 다원에게 달라붙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새로 나온 액체와 다시 섞여 다원의 회음부를 따라 떨어지고, 그의 허벅지까지 흘렀다.
재즈의 선율은 최고조를 치고 올랐다. 체이스의 골반과 허리는 아래에서 위로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크고 긴 허벅지 근육에 세로로 깊은 골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다원의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 재즈의 선율이 다시 느려졌고 체이스의 움직임도 그 속도를 줄였다.
“체이스……!”
반쯤 눈이 풀린 다원의 입에서 드디어 제 이름이 나오자 체이스는 마지막을 향해 다시 움직였다.
타타타타탁!
“하아아. 체이스!”
“으으윽.”
체이스가 다원의 상체를 받치며 그를 내리눌렀다. 다원은 속절없이 침대 위로 무너지며 그의 큰 몸 아래 덮였다. 체이스의 등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아. 하아. 하.”
체이스가 굵은 허벅지로 다리 사이에 갇힌 다원을 조이자 다원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체이스의 몸도 한 번 더 잘게 떨렸다. 체이스는 천천히 일어나 다원에게서 떨어졌다.
“으으으윽.”
안에서 그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다원은 부르르 떨었다.
“조금 쉬자.”
체이스의 말에 다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행위가 이어지는 사이 창밖이 조금 밝아 오는 걸 본 기억을 끝으로 다원은 잠이 들었다. 아니, 정신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리 벌려 봐. 어서.”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에 다원은 한순간 뇌 주름이 쫙 펴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잠에서 깼다는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360도 회전하는 통에 들어간 것처럼 괴로웠다.
“응? 얼른.”
‘양심도 없지. 나쁜 놈.’
고개 저을 힘도 없었던 다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다원이 가만히 있자 체이스가 그의 다리를 벌렸다.
‘설마 또 뭘 하려고? 이 미친……!’
다원은 그를 밀치려 했다. 몸이 과연 뜻대로 움직여질까 고민하던 그 순간이었다.
다원은 눈이 동그래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성기가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제 허벅지 사이로 자신의 페니스가 꽉 눌려 숨겨졌다는 것은 감촉으로 알 수 있었지만, 검은 음모만 한 주먹 크기만큼 있는 그곳은 정말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다원의 사고는 체이스가 그를 엎드려 눕히는 바람에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당연히 일어나려 버둥거렸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체이스는 그의 양 허벅지를 딱 붙이고 강하게 눌러 버렸다. 다원은 다시 겁이 났다.
“왜 그래요? 흐윽……. 힘들어요. 히이익!”
체이스는 다원의 뒤에서 허벅지 사이로 그의 것을 잡아당겼다. 다원의 엉덩이 살 아래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서지 않은 그것은 조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살살 만지작거리자 반쯤 일어선 녀석과 그의 엉덩이 사이가 함께 보이는 모습이 체이스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기대해.”
다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엉덩이 사이와 아래를 싹싹 핥고 빨아 당기는 그의 행동에 멘탈이 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혀와 입술, 손을 움직였고 다원은 끊임없이 울었다.
“으아아. 변태, 나쁜 놈! 저리 가! 히이익. 혀 세우지 마! 집어넣지 말라고! 으윽, 제발…….”
그날 이후, 다원은 다시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동안은 체이스의 침대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은 늘 같은 꿈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꿈은 상당히 끔찍했다.
붉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느긋하게 앉아 무언가를 구경하는 꿈이었다. 발가벗은 사람들이 긴 쇠꼬챙이에 엉덩이부터 입까지 관통당한 채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래에는 엉덩이를 내어 준 채 바둥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건 바로 다원, 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