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5화 (5/9)

5장.

체이스의 개인 비서, 세실은 데미안이 꼼지락거릴 때부터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있었다. 데미안이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데미안이 눈을 뜨면 원래대로 대해.’

체이스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리며 세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라면 그래야지. 별수 있나.’

두어 시간이 지나고서야 데미안은 완전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침대 헤드에 베개를 세워 힘겹게 기대어 앉은 그는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끝난 것 같았다. 데미안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가 되었지만 세실은 제 마음을 꾹 억눌렀다.

‘큰 기대는 말아야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세실은 그가 깨기를 기다리며 떠올려 보았던 데미안의 반응을 머릿속에 주르륵 나열했다.

그러나 체이스가 먼저 나갔음을 알리자 데미안에게서는 예상했던 반응 중에 가장 흔하고 재미없는 반응이 나왔다. 그와 첫날밤을 보낸 이들이라면 백이면 아흔아홉은 똑같이 해 오는 질문이었다.

“그게 다야? 어디 갔는데? 나한테 별다른 말은 안 했고?”

‘쯧! 김새네.’

세실은 내심 혀를 찼다. 밤새도록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며 몸에 멍이 들고 심지어 피가 나도 체이스의 상대들은 그를 찾고 무슨 말을 남겼는지 물으며 마치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착각을 했다. 늘 똑똑한 척, 우아한 척하던 이 남자도 별반 다를 바 없는 말을 재잘거렸다.

‘재미없네. 자존심이 센 타입이라 조금쯤은 재밌게 해 줄 거라 기대했는데…….’

세실은 상관인 체이스가 과연 이번에는 새 장난감을 얼마나 가지고 놀까 가늠해 보았다.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체이스는 언제나 금세 질리곤 했기 때문이다. 예외라고는 딱 한 명뿐이었다.

전에 가장 오래 버틴 독특한 장난감은 상처는커녕 체이스의 체액만을 잔뜩 묻히고서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당연히 하룻저녁도 넘기지 못하고 버려질 줄 알았는데 무려 4년을 갔다.

‘이번에는 몸 구석구석 멍도 많고 피도 조금 났지만 상처는 심하진 않고……. 그런데 체이스의 체액이 하나도 없어. 흔적을 남기지 않은 건 무슨 뜻이지?’

세실은 질 나쁜 사냥꾼, 체이스에 관한 데이터를 다시 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아직은 분류가 확실하지 않은 데미안을 보류란에 넣으며 매뉴얼대로 그의 임무를 시작했다.

데미안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런 면이 있었나?

세실은 아주 세심하고 배려 깊은 자세로 데미안을 챙기고 있었다. 욕조엔 따뜻한 물을 미리 받아 놓은 그는 깔끔한 자세로 부축하고 군더더기 없이 물러났다.

‘하! 이건 또 뭐야.’

욕실 안에는 입욕제며 따뜻한 차 등등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모두 데미안의 취향대로였다. 반신욕 후에 내오겠다는 아침 식사와 혹시 몰라 챙겼다는 비상약, 스케줄 체크까지 완벽했다.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웬만한 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줄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그의 모든 행동은 아주 기계적이었고 체계적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데미안을 이렇게 대한 적이 없었다. 세실의 태도가 데미안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어디서 감히 나를 하룻밤 상대하고 버릴 창부 취급 하고 있지?’

평소의 데미안이라면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부터 그에게 면박을 주었을 것이었다. 당장 그를 침실에서 쫓아내고 체이스에게 전화해서 잘라 버리라고 소리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그러면 실제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체이스는 그러는 시늉이라도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데미안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체이스의 언급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통상적인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이미 인정해 버린 꼴이잖아.’

데미안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나가.”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콜을 누르십시오.”

담담히 대답을 남긴 세실이 자리를 떴다.

욕조에 몸을 담근 데미안은 그제야 제 몸을 찬찬히 살펴봤다. 몸 곳곳에 남은 흔적들이 어제 일 하나하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스스로 무덤을 판 것밖에 더 되냐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미쳤어!”

데미안이 발을 찼다. 물소리가 크게 나며 사방으로 물이 튀어 넘쳤다.

첨벙, 물소리가 들려왔다. 데미안의 짧은 신음과 욕을 내뱉는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세실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세실은 그가 욕조에 몸을 담그기 전 태연한 척하며 방을 두리번거릴 때부터, 아니 체이스의 침대에 스스로 기어오르던 그때부터 이 남자가 우스워졌다. 같잖은 우아한 가면을 뒤집어쓴 데미안의 민낯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구둣발로 아주 조금 밟아 주면 어떻게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를까? 그걸 내려다보는 기분은 또 어떨까? 체이스는 그런 그를 끝까지 친구로 남겨 둘까?

오늘 데미안의 반응은 실망스러웠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역시 재밌을 것 같았다. 세실의 입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크게 났다.

세실은 오늘 데미안이 입을 옷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데미안의 치수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이즈일 뿐만 아니라 그의 취향을 100% 고려한 스타일이었다. 그에 어울리는 속옷과 양말, 구두에 시계까지 완벽한 정장 세트를 준비하고는 스케줄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이동 동선에 맞게 차도 대기시켰다. 세실은 어느새 유능한 비서로 돌아와 있었다.

* * *

그 시각, 체이스는 직접 운전해 딜런의 부모님 집에 찾아가고 있었다. 어제 세실에게 받은 보고로는 다원이 그의 가족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딜런이라는 자가 따로 구인 광고를 낸 기록도 없고요. 이전에 둘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가 이 지역에 연고도 없는 다원 씨를 회계 직원으로 고용했고, 그와 동시에 다원 씨가 투자 이민을 신청했습니다. 여기 그 서류입니다.’

투자 이민은 체이스도 다원을 위해 계획했던 것이었다.

‘딜런…… 거슬려.’

그의 회사는 딱히 회계 직원이 필요한 수준의 규모도 아니거니와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딜런과 거래하던 회계 사무실은 그의 회사가 거래를 중단하자 폐업을 한 걸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가 회계 직원을 따로 고용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인 듯했다.

‘그 회사가 아직도 영업을 한다고요? 그렇다면 사정이 더 어려워져 그의 어머님이 도와주시는 걸 겁니다.’

그렇다는 건 다원을 고용할 필요가 없음에도 충동적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였다. 체이스는 회계사로서 다원의 실력이 꽤 괜찮은 편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 깐깐한 타미가 보증을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런 촌구석에서, 그것도 다 망해 가는 회사의 회계 담당 직원으로 일한다는 사실을 체이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어디서 개수작이지?’

이제 체이스는 다원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조바심이 일 지경이었다.

‘다워나, 아무것도 따지지 않을게. 그냥 다 이해할게. 네가 원래 감정에 치우친 사람이었다는 걸 깜빡했어.’

하지만 체이스는 여전히 다원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데미안의 말처럼 오냐오냐하며 감싸 주었더니 머리 꼭대기에 기어올라 기고만장하는 것일까. 그동안 그에게 주었던 사랑과 배려를 당연한 걸로 아는 안하무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건 다원의 부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신을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찾아오면 곁에 묶어 두는 게 나을까? 아니면 어디다 꼭꼭 숨겨 둬야 하나? 젠장!’

쾅! 체이스가 핸들을 한 번 크게 내리쳤다.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다원과 제 관계는 이래서는 안 됐다.

‘일단은 만나자. 만나서 생각하자.’

체이스는 어서 빨리 다원을 보고 싶었다.

* * *

앤서니의 상태는 별다른 차도 없이 고만고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 되도록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자 했다.

대체로 오전에는 딜런과 캐서린이 함께 병원을 갔다. 다원은 보스턴의 사무실에 남아 일을 했다. 그러다 캐서린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식사 준비를 했다. 아침에 그녀가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을 데우는 정도였다.

택시를 타고 돌아온 그녀와 식사를 한 다음 다원은 딜런의 도시락을 챙겨 병원으로 향하곤 했다.

“병원 밥이 어디 밥이니? 다원아, 오늘도 부탁한다.”

“네, 어머님. 좀 쉬세요.”

병원에서 나오는 밥으로 식사를 해도 되지만 병원 밥은 밥이 아니라는 것이 캐서린의 지론이었다. 휴게실에서 딜런이 식사를 할 동안 다원은 차를 마시며 함께했다.

“그럼 나 집에 다녀올게. 수고해.”

“응. 천천히 다녀와.”

나이트 간병인이 오기 전 딜런은 다원을 데리러 왔다.

둘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극장에 가기도 하는 등 간간이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게 요즘 다원의 일상이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원은 딜런과 캐서린을 배웅했다. 이제 막 돌아서 계단을 오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다원은 계단을 밟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방금 길모퉁이에서 아주 익숙한 차를 봤기 때문이었다.

‘설마. 세상에 저 차가 체이스 차 한 대뿐이겠어? 나도 참…….’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다원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차 안의 사람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원은 후회했다. 운전석의 체이스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기에.

순간 다원은 눈앞이 한 바퀴 뱅그르르 도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몸이 기우는 것 같은 느낌에 난간을 잡고 버텼다. 식은땀이 쫙 나면서 한기를 느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가 왜? 캐서린의 일 때문에?’

딜런과 캐서린은 그들과 만났던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고 했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할 사람이 왜? 더구나 혼자서.’

다원은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체이스는 차에서 내려 다원을 향했다. 그동안 다원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그림자가 다원의 몸을 다 덮었다. 다원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오랜만이야.”

그의 목소리는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다원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계단 위에 선 다원과 체이스는 눈높이가 딱 맞았다. 다원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낯설지? 헤어진 옛 연인일 뿐인데.’

“잠깐 얘기 좀 하자.”

“할 말 없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나온 대답에 다원은 놀랐다. 체이스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달라졌네.’

체이스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딜런과 캐서린은 여기 없으니 괜히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돌아가.”

다원이 돌아서 계단을 한 칸 올라서려는 순간 체이스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다원은 흠칫 놀랐다.

‘차가워.’

손목을 잡아 오는 손은 분명히 따뜻한 온기가 도는데 잡힌 손목은 마치 얼음송곳에 찔린 듯 시려 왔다. 다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떨쳐 내려 했다. 그러나 체이스는 손에 힘을 줘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윽!”

다원은 잡힌 손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체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의 시선을 쫓은 다원은 순간 뒷골이 찡하고 울리는 것만 같았다.

“요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충동 지수가 엄청 올랐거든. 여차하면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아. 예를 들면 이 건물을 그냥 통째로 매입해 버린다든가. 아니면…….”

하마터면 어떻게 내놓지도 않은 부동산을 살 수 있냐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할 뻔했다. 다원은 우선 그의 말을 끊었다.

“일단 좀 놔 줬으면 좋겠는데…… 아파.”

통증을 호소하는 말에 체이스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다원은 그의 두 손을 탁 소리 나게 뿌리쳤다. 체이스가 조금 욱신거리는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캐서린의 허락 없이 집에 들어오라고 할 수는 없어.”

“나도 이런 곳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그건 체이스도 바라는 바였다.

다원은 체이스의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보스턴을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낯선 길이었다. 집과도 거리가 꽤 멀어지고 있었다. 다원은 내려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았다. 체이스의 생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낯설어.’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체이스의 상태가 한껏 예민해져 있다는 거였다. 다원은 그런 상태의 그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다원은 제 무릎 위에 올려진 빈손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바보.’

그는 계단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체이스의 손에 끌려 차에 태워졌다. 당연히 핸드폰도, 지갑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할 텐데…….’

지금 다원이 믿을 거라고는 4년간 함께했던 체이스의 말뿐이었다.

‘이야기만 할게. 너도 할 말 있잖아. 없어? 나는 있는데.’

자동차 안 시계는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체이스는 불안한 시선으로 시계를 힐끔거리는 다원을 모른 척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되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렇게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뜻밖의 다원의 반응에 흥분해 버렸다. 일을 그르치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이왕 이렇게 되어 버린 거…… 어떻게 할까?’

체이스는 다원을 곁눈질했다.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듯 내리깐 눈꺼풀과 화가 났다는 걸 외치고 있는 앙다문 입술. 그리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불안하게 떨리는 손까지. 그는 여전히 선이 길고 날씬했다. 그래서 문제였다. 다원은 언제나 체이스를 자극했다.

체이스는 근처의 한적한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히터 온도를 조금 조정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테이크아웃 카페가 보였다.

“커피?”

다원에게선 예상대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체이스는 그와 같이 내릴까 하다 그냥 혼자 내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가게로 걸어간 그는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그때까지도 차 문이 열리는 소리나 빠르게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체이스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섰다. 차 문을 잠근 것도 아니었고 그리 외진 지역도 아니었다.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와서일 수도 있겠지만 다원은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체이스는 그가 아직 자신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길을 잃고 헤매다 돌아온 고양이가 주인의 품이 얼마나 따듯하고 아늑한지 깨달았기를 바랐다.

* * *

탁!

체이스가 내리자 다원의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며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저기 아이와 함께 있는 여자한테 도와 달라고 해 볼까? 아니면 저 남자? 오다가 본 경찰서까지 무사히 뛰어갈 수 있을까?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는 차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를 되풀이했다. 마침내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당기기만 하면 돼.’

하지만 다원은 그러지 못했다. 드디어 결심을 하고 문을 열려던 순간, 차 앞을 가로지르는 체이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곧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짙은 커피 향이 차 안으로 몰려왔다.

다원의 코앞에 커피 한 잔이 내밀어졌다. 옅은 갈색의 라테였다. 다원은 그가 손에 쥐여 준 라테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우유 비린내가 올라와 도저히 마실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라테 좋아했잖아.”

“그냥…… 아.”

다원은 아침에 커피를 마셨다는 거짓말로 변명을 하려던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왜 변명하려고 하지? 체이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의 행동이 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다원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체이스에게 맞춰 주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다원은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단호하고 확실해지기로 했다.

“우유 비린내가 너무 나. 이 라테는 완전 엉터리야.”

체이스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그렇군. 난 그저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마실 거라도 필요할 것 같았어.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해.”

언제나 그랬다. 그의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다원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건 아직 다원이 깨닫지 못한 점이기도 했다. 다원은 제 타박에 오히려 사과를 해 오는 체이스의 모습에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아…… 내가 너무 심했나?’

이미 끝난 일이니 이렇게 날을 세울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생각에 다원은 그만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 하고 그를 위로하듯 대답하고 말았다.

체이스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동안 다원은 아무런 대꾸가 없는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하지만 체이스에게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안부 인사에 다원은 그만 숨이 턱 막혀 버렸다.

너에게 지난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어 올 만한 시간이었구나. 그런 생각에 다원의 머릿속은 점점 엉킨 실타래가 되어 갔다.

“상당히 먼 곳까지 왔네. 보스턴이라…….”

체이스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원이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려 할 때였다.

“하고 싶은 말 없어? 난 네가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체이스는 너무 조용한 다원이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지만 끝내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내가 이야기해도 될까?”

다원은 거의 다 식어 정말 맛이 없어 보이는 라테만 멀뚱히 내려다볼 뿐 대답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핸들을 한 번 꽉 쥔 체이스가 사이드미러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더라고.”

그러나 다원은 그의 말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캐서린이 오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집에 택시비를 낼 현금이 있었는지, 체이스가 큰길까지는 태워다 줄지, 이 라테는 내릴 때 가지고 내려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고 있을 때 체이스가 이상한 질문을 해 왔다.

“왜 말도 없이 날 떠나갔는지……. 그건 정말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어. 왜 그랬어?”

드디어 다원이 저를 바라보는 걸 느낀 체이스는 여전히 사이드미러에 시선을 둔 채 주절거렸다.

“연애 기간 내내 나는 너와 잘 지내려 노력했거든? 네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내 일까지 희생해 가며.”

‘희생?’

다원 역시 그가 많은 부분에서 배려를 해 주었다고는 생각했다. 비록 다원이 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런 희생조차 기분 좋았어. 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었는데, 내 희생 덕에 네가 행복해하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덕분에 너도 여유 있는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고. 학창 시절은 원래 그런 거잖아. 낭만과 여유…… 뭐 그런.”

핸들을 잡고 있던 체이스의 오른손 검지가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네게 뭘 바랐던 건 아니야. 나도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절대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어. 없는데, 다만…….”

이제 그는 손톱을 세워 핸들을 덮고 있는 가죽 커버를 긁적였다.

“네가 그렇게 말없이 떠난 후에 난 그동안 뭘 했나 싶더라고. 서로 사랑을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일방적이었나 싶기도 하고.”

다원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체이스의 말을 어느 타이밍에 끊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멋대로 나불거리는 그의 입에 우유 비린내 나는 다 식은 라테를 들이붓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두 손으로 쥐고 사정없이 짤짤짤 흔들고 싶었다. 아니,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널 사…….”

“그만! 그만해, 체이스!”

“어? 콜록, 콜록. 크흠.”

제 감정에 한참 몰입해 있던 체이스가 물 마시다 사레들린 사람처럼 콜록거렸다. 체이스의 기침이 끝나지 않았지만 다원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어. 배려? 희생? 낭만과 여유? 하아. 체이스, 잘 들어. 그래, 배려는 맞는 말일 거야. 나도 방금 전까지 네가 날 배려했다고 생각했으니까. 네 모든 행동이 나를 배려해서 세심하게 마음을 써 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아니라고!”

다원은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건 정확한 포인트가 아니었다.

“후우…… 그 배려, 너만 한 거라고 생각하는 건 경우가 아니지. 안 그래? 나라고 너를 배려하지 않은 건 아니야. 내 배려가 너무 사소해서 네가 느끼지 못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갑자기…….’

체이스는 다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조건 그를 용서하려 했던 입장에선 그의 말은 다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도중에 끊을 수는 없었다. 다원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하지만 난 너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네가 나한테 한 배려가 네 얼마를 차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 전부를 너를 위해 쏟으며 배려했어.”

체이스도 그 말에는 조금 당황했다. 도대체 그 배려가 뭐길래 전부를 쏟았다고 하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희생이라니……. 하아. 지금 내 앞에서 네가 감히 희생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거야? 대학의 낭만과 여유를 말할 수 있는 거냐고!”

다원은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닦았다.

“제기랄!”

다원은 창밖을 보고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대학 생활 내내 난 네 그 말도 안 되는……. 하아, 말을 말자. 나도 좋았으니까 4년 내내 그렇게 같이 물고 빨았겠지. 하지만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이제 체이스는 검지 하나를 치켜세우고 앙앙거리는 다원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말하는 캠퍼스의 낭만과 여유를 즐길 시간이 나한테 있기는 했겠어? 그 많은 시간을 네 밑에 깔려 네 거기에 꿰뚫려 있거나 며칠을 끙끙거리며 침대에 누워 있기 일쑤였는데!”

다원의 검지는 정확히 체이스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아…… 저런. 그건 인정해.”

체이스가 항복의 포즈를 취했다. 그건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할 말이 없었다.

“체이스. 대학 4년 동안 난 친구 한 명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어. 왜 그런지 알아? 졸업에 필요한 최소 학점과 필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벅찼기 때문이야. 이제 알겠어? 내가 졸업을 앞두고 전전긍긍한 이유를.”

다원은 체이스에게 스스로 당당한 연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것까지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되고서 그에게 투정을 부리는 거라면 모를까, 헤어진 마당에 억울하다고 따질 마음은 없었다.

다원은 숨을 몰아쉬며 자동차 시트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집에 나를 데리고 들어간 건 너였어. 내가 가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었고, 머물고 싶다고 한 건 더더욱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듣게 할 수 있어?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아, 그건 네 말이 맞아. 그 점은 데미안이 실수…….”

“그래. 바로 그 점이야.”

체이스는 다원의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힘든지 다원의 입술이 말라 가고 있었다.

“그거 알아? 난 너 혼자와 연애를 한 게 아니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체이스의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네 친구들과 같이 연애를 한 거였지.”

다원이 고개만 돌려 무표정하게 체이스를 바라봤다.

“특히 데미안. 네가 나가고 나면 언제나 그가 찾아와. 그리고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안 되는 수많은 이유를 열거하지.”

“난 또 뭐라고. 다워나, 그건 그가.”

“너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

“아…… 그건.”

“괜찮아. 문제 될 건 없어. 너는 아니라는 걸 알아. 나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지?”

다원이 여전히 뭐가 문제냐고 묻고 있는 체이스를 향해 마른 미소를 지었다.

“뭐가 문젠지 궁금해? 친구가 자기 연인한테 그런 말을 계속하도록 놔두는 너랑, 그걸 그냥 놔둔 내가 문제지. 너한테 내가 말하지 않았다고 따지지 마. 그건 내가 네게 한 수많은 배려 중 하나일 뿐이니까. 난 네가 혹시나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고민하고 마음 상할까 봐 혼자 해결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게 고스란히 정신적인 피해로 돌아왔지. 내가 얼마나 열등한지 데미안한테 끊임없이 지적받아야 했거든.”

둘은 또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체이스, 이런 대화는 더 이상 무의미해. 너랑 나는 이미 헤어진 지 오래야. 그리고 난 이미.”

“그만.”

체이스는 다원의 입에서 나올 말이 듣기 싫었다.

“네가 말한 게 다 옳을 수도 있어. 그래, 다 맞아. 사실 난 언제나 받는 것에 익숙해서 배려를 한다거나 사랑을 나눈다거나……. 아무튼 너와 한 모든 것은 다 처음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 서툴렀을 거야. 내 행동들이 어쩌면 네겐 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어. 타미와의 일만 해도 네가 그렇게 상처받을 줄 몰랐어. 그저 네 서류가 있어서…… 한 번 더 본 것뿐이었어. 거기서 일하게 된 건 전적으로 네 실력이야. 실제로 넌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 냈고.”

다원은 그 부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다 귀찮아. 딜런이 보고 싶어. 캐서린도. 그녀의 따뜻한 차 향기도 맡고 싶어.’

다원은 눈가가 다시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 마지막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그날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야. 물론 그 행동이 정당하거나 그래서 이해를 바란다는 건 아니야. 내가 한 행동을 나도 충분히 후회했고 자책했어. 하지만 다워나…….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왜 말도 없이 나를 떠난 거야.”

‘아…… 그래. 제일 중요한 거.’

여태까지 나눈 대화가 이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다원은 떠올렸다. 아무 말 없이 떠났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일까. 정작 연락이 안 되고 아무 설명 없이 자신을 내쫓은 것은 체이스였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아 다원은 눈에 힘을 주고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거야?”

“네가 한 말이 다 맞는다고 치자. 아니, 다 맞아. 하지만 나를 먼저 떠난 건 너였잖아. 그때 회사 일이 정리되면 네게 타미의 사무실 일도 말하고, 그 집에 관한 일도…… 어쩌면 말했을 수도 있었어. 나도 네 투자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어. 난 정말 너와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던 거뿐이라고.”

다원의 눈에 차올랐던 눈물은 어느새 다 말라 버리고 없었다. 몰아쉬던 숨도 어느새 차분해졌다. 다원은 다 식은 라테를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내려놓고 체이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이 지긋지긋하고 구역질 나는 대화를 끝내야 할 때였다.

“체이스, 잘 들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랑 이야기하는 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다원은 근 1년 만에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사실 다원은 학점도 아슬아슬했다. 늘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미국 사회에는 어디에나 유리 천장이 존재했고 대학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미국에 연고도 없는 유학생에게 최고 점수를 줄 교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다원은 그 점수가 꼭 필요했고 타미의 사무실과의 재계약도 반드시 해내야 했다. 자신이 미국에 꼭 필요한 일꾼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자신의 잘난 애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연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내놓고 자랑은 못 하더라도 적어도 그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안심할 수 있는 정도는 되고 싶었다. 그러자니 너무 힘에 부쳤다. 거기에 사소한 문제가 얽히고설키니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몰랐고, 뭐가 문제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이 문제를 풀어야 할 사람은 곁에 없었다.

“일단 한국의 집을 정리해야만 했어. 뭐가 되었든 돈이 필요했거든. 그런데 너랑은 웬일인지 데면데면해진 것 같았고, 출국 시간은 다가오는데 넌 연락도 되지 않았어.”

“그땐 정말 바빴어.”

다원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이해해. 네가 바쁜 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도 내 문제를 해결하고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일단 한국에 간 거였지. 도착하고 나서야 네게 연락을 못 했다는 걸 떠올렸고. 도대체 왜 그렇게 연락이 되지 않은 거야?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글쎄. 일이…….”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체이스였지만 다원은 궁금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메일을 남기고…….”

“잠깐! 잠깐, 뭐라고?”

체이스가 다원의 말을 급히 가로막았다. 다원은 정말 당황해하는 그의 외침에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연락이 되지 않아? 메일을 남겨?”

“응.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남기고……. 결국 답은 없었지. 나도 답답했어. 네 호텔까지 찾아갈 정도로.”

“호텔이라고? 아니 잠깐, 메일이라니?”

“한국에 가서야 핸드폰이 먹통인 걸 알았어. 4년간의 네 그 빛나는 희생 덕에 난 핸드폰을 충전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더라고. 아무튼 핸드폰 충전하고 이것저것 하는 동안 메일을 남겼어. 네 메일로.”

체이스는 다원에게 가르쳐 준 메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연애를 시작하던 단계에서 그에게 가르쳐 준 메일은 그가 공식적으로 쓰는 메일이었다. 세실도 데미안도 볼 수 있는, 마음만 먹으면 비서실 누구라도 볼 수 있을 계정이었다.

하지만 세실을 포함한 비서실 직원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모든 것을 보고해야만 했다. 보고의 의무가 없는 사람은…….

* * *

체이스는 혼자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다원을 그가 머무는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원도 그에게서 일분일초라도 빨리 벗어나려면 얌전히 그의 옆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집 앞에 도착해 다원이 손잡이를 잡아당길 때 체이스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

잠시 멈칫한 다원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내렸다. 등 뒤로 꽂히는 체이스의 시선을 무시한 그는 뛰지 않으려 노력하며 계단을 올라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철퍼덕. 다원은 그대로 현관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체이스는 계단을 올라 현관 안으로 사라지는 다원의 뒷모습을 차 안에 앉아 그저 바라보았다. 헤어진 사랑이 아쉽기는 해도 그는 결국 냉철한 기업가였다. 무의미한 일에 관심을 두는 대신 체이스는 마음에 걸리는 일을 확인하는 편을 선택했다. 이런 찝찝한 일이 두 번 있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렇게 체이스의 차가 딜런의 건물 앞에 있는 2차선 도로를 벗어날 때, 딜런은 캐서린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 *

딜런은 조금 들떠 있었다. 아버지의 컨디션이 좋았다. 그러자 캐서린의 표정도 활짝 폈다. 그녀는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의사 선생님 말도 그렇고 오늘은 다원이도 쉬라고 해야겠다.”

“네. 나중에 저만 잠시 병원에 다녀오든지 해야겠어요.”

그렇게 미소를 띤 채 집으로 운전해 들어가는 길이었다.

“설마 방금 지나간 저 차, 혹시 전에 그 총각들 차 아니니?”

“…….”

딜런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무 말이 없는 아들의 반응에 캐서린도 곧 흥미를 잃었다.

“하긴, 요즘은 저런 좋은 차도 많이 흔해졌더라. 나도 참 문제야. 이 예민한 성격을 좀 누그러뜨려야 나도 너희들도 편할 텐데 말이야.”

딜런은 역시 입을 다문 채였다.

“다원아.”

“어, 딜런!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버지 컨디션이 괜찮아서 같이 왔어.”

“와, 정말 다행이다.”

“넌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았니?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러셨어요? 벨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제야 다원은 핸드폰을 찾았다. 딜런이 방에 있던 핸드폰을 들고 나오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내 정신 좀 봐.”

“다음부턴 꼭 챙기렴. 얘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네가 그때 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캐서린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미안해.”

다원이 딜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딜런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했지만 그는 이내 다원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이래?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무슨 일 있었어?”

“어?”

“왜, 어디 아파? 식은땀 흘린 거야?”

“…….”

다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딜런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딜런은 고개만 흔드는 다원의 이마에 뺨을 비비고 등을 쓸어 주었다.

“어서 식사하자. 오늘따라 시장하구나.”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원은 딜런의 품에서 빠져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딜런은 빈손을 만지작거리다 냄새를 맡았다. 생경한 냄새가 났다.

‘역시…….’

“그런데 어디 나갔다 왔어?”

“응? 아……. 카페에 잠시…….”

잠시 딜런을 돌아본 다원은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체이스는 보스턴에서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호텔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세실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체이스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상관이 누구를 만나고 들어온 것인지를 아는 그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실로 흥미진진한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예상대로 체이스는 대외적으로는 그의 개인 메일이지만 자기들 사이에서는 회사 공용인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함을 뒤지는 체이스의 클릭질이 점점 사나워졌다. 곧 확인을 한 것인지 체이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세실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세실. 전에 다원이 집을 나가던 때 말이야.”

“네.”

“아니…… 아니야.”

체이스는 메일 화면 여기저기를 살폈다. 세실은 다시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체이스는 메일을 지우지 않는 조금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그는 이 메일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스팸 메일도 삭제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그 메일 계정에 붙여진 이름이 ‘지옥의 구덩이’였다.

한번은 비서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직원이 체이스에게 메일함을 정리할 것을 건의했다가 일주일 만에 원래 부서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걸 아는 직원들은 차라리 그의 계정에 많은 카테고리를 만들고 중요한 메일을 따로 보관할지언정 메일을 휴지통에 버리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유일하게 메일 개수 0을 기록하는 카테고리는 휴지통 하나였다.

1년 전, 새로 그 메일을 공유하게 된 사람이 생기면서 아주 잠시 그 숫자가 1이 된 적이 있었지만 곧 다시 0으로 돌아갔었다. 그 숫자 1을 본 직원들은 누군가 실수한 것을 복구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 일은 기억의 저편으로 잊혔다.

‘내가 그때 그 흥미로운 메일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했어? 우리 체이스, 많이 당황했나 보네.’

1년 전, 세실은 받은 편지함에 들어온 그 메일을 처음 봤을 때 그것이 몰고 올 파장이 참 재미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원의 메일을 확인한 ‘누군가’가 예상대로 움직였다. 그 메일을 휴지통으로 버린 것이다.

세실은 똑똑하고 영특한 그가 한 실수가 좀 안타까웠다. 그대로 두면 금방 사실이 밝혀져 재미없을 것 같았으니까. 혹시나 해서 실수의 흔적을 휴지통에서 다른 메일함으로 살짝 옮겨 두었더니 역시나 이렇게 재밌는 일이 생겼다.

“세실.”

“네.”

“왜 다원의 메일이 스팸 메일함으로 이동해 있지?”

“스팸?”

“모르는 일인가?”

“죄송합니다.”

체이스는 변명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언제나 알아서 물어 오곤 했다.

“혹시 데미안이 내 메일을 열어 본 적이 있던가?”

“간혹 확인하십니다.”

“언제부터.”

“…….”

세실에게선 대답이 없었지만 체이스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세실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 * *

돌아오자마자 체이스는 메일 목록에서 1년 전의 메일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나 다원이 보냈다는 메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체이스는 다원이 순간 당황해서 거짓말로 둘러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까 들은 다원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난 너 혼자와 연애를 한 게 아니었어.’

‘데미안. 설마…….’

그는 혹시나 해서 다른 카테고리도 다 뒤져 보았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스팸 메일함으로 이동되어 있는 다원의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직원들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실제로 스팸 메일함에는 정말 스팸으로 옮길 만한 것들밖에는 없었다.

‘데미안……. 버릴 거면 확실하게 버렸어야지.’

노트북을 덮은 체이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확인한 다원의 메일 내용은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메일은 이미 누군가가 읽은 상태였다. 너무 확실한 정황 증거에 체이스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데미안이 체이스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체이스를 단 한 번도 친구를 보는 눈빛으로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본인은 제 마음을 잘 숨긴다고 생각했겠지만.

‘다원이 알 정도면……. 하긴, 그 정도로 노골적인데 모른다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체이스에게 데미안은 친구 이상은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하도 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둘은 태어나면서부터 같이했기에.

‘차라리 형제가 되고 싶다거나 사촌들이랑 결혼하고 싶다 했으면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해 줬을 텐데. 미련한 놈.’

체이스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데미안이 선택한 방법은 너무 비겁했다.

‘넌 최악을 선택한 거야. 멍청한 자식.’

다원을 궁지에 몰아넣고 쫓아 버렸다.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 제 마음을 단순한 욕정으로 포장했고, 체이스가 경고를 했음에도 파트너 관계를 수락했다. 그의 마지막 배려였지만 데미안은 그마저 거절한 것이다.

‘실수 한 번 했다고 친구를 버릴 순 없지. 그것도 형제와 다름없는 친구인데. 아무리 인간 이하의 짓을 하더라도.’

“데미안…… 쯧.”

세실이 아주 잠시 그를 곁눈질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체이스가 데미안을 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저런…… 재미없어.’

체이스는 같은 부류에 속한 자들에겐 관대한 자였다. 그게 체이스가 속한 부류의 특성일지도 몰랐지만 마음에 드는 전개가 아니었기에 세실은 조금 못마땅했다.

체이스에게 이번 사업은 조금 다른 의미로 중요했다. 체이스의 형, 매튜를 그들 사이에 정착시키기 위한 일종의 핑곗거리였다.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그를 크리에이터 겸 큐레이터 자격으로 그를 붙잡아 둘 요량이었다.

체이스는 급하게 아버지와 경영진과 회의를 했다. 이후 데미안은 사업에서 배제되었고 그 자리에는 전문가가 따로 섭외되었다. 체이스는 본사로 돌아갔고 다시 바빠졌으며 데미안은 원래 일하던 갤러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체이스는 데미안을 정기적으로 찾았고 데미안도 거절하지 않았다.

‘둘은 친구인가? 단순한 섹스 파트너인가? 아니면 새로운 장난감?’

생각보다 상황이 좀 더 재밌어질 것 같았다. 세실은 데미안에 대한 자신의 데이터를 조금 수정했다.

* * *

흐트러진 침대에 데미안은 홀로 누워 있었다. 체이스는 이미 말끔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좀 있다 봐.”

데미안의 말은 공중에서 흩어졌다. 체이스는 아무 말 없이 호텔 방을 나갔다.

‘체이스…… 나쁜 새끼. ’

그는 데미안과 정말 육체적인 관계만을 가졌다. 대외적으로 체이스가 데미안을 일부러 무시한다거나 배제하는 일은 없었다.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를 취했으며 가족 간의 모임도 때가 되면 함께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단둘이 만나는 일은 그가 부른 호텔 방이 아니고서는 없다는 것이었다. 호텔 방 침대 위에서는 오로지 목적만을 위한 움직임뿐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 공간엔 빌어먹을 그의 개인 비서가 함께했다.

데미안은 처음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나름의 화풀이라고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도가 지나치고 있었다.

“세실.”

“네.”

‘뻔뻔한 새끼.’

데미안이 이를 갈며 말을 잇지 않자 세실이 물었다.

“말씀하십시오. 뭐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는 침대 곁에 서서 데미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이래?”

“무엇을 말입니까?”

“체이스의 파트너한테 언제나 이러냐고.”

“아…… 그의 밤 상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데미안의 손이 잠시 주춤했다. 그는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정말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그 녀석에게도 그랬어?”

“그 녀석이라 함은…….”

능청스러운 세실의 태도에 데미안은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정말 궁금했기 때문에 꾹 참고 질문을 이었다.

“다원 말이야. 그 녀석에게도 똑같이 이렇게 대했냐고.”

“아. 그 말씀이군요. 아닙니다. 체이스는 제가 두 분만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원 씨와 동거하던 집에도 제 출입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는걸요.”

데미안은 보기 드물게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왜 그걸 잊고 있었지?’

매일같이 그 집을 드나들며 그 사실을 특권처럼 여겼으면서도 그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래. 체이스는 그 자식과 동거하던 그 집에 누군가를 들이기 싫어했어.’

4년간 그의 집에 사람들이 모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언제든지 그 집에 갔는걸. 그가 있든, 그 녀석이 혼자 있든. 심지어 아무도 없어도 말이야.”

데미안은 다시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자 세실은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었으니까 그렇죠.”

뜻밖의 말에 이번엔 데미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세실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꽤 멍청한 표정이네.’

세실은 고운 얼굴의 그에게 어디까지 알려 주어야 할까 가늠했다. 그는 곧 데미안을 조금 더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들어 잠잠한 체이스 때문에 지루한 참이었다.

“저런……. 당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체이스의 곁을 지킨 친구분이시라면서 단 10년을 보필한 저보다 그를 더 모르십니까?”

“뭐?”

“가족을 포함해 그와 한평생을 같이한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가 곁을 내어 준 이가 몇 명이나 된다고 보세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이는, 가족들도 모르는 체이스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는 당신뿐이었잖아요.”

“!”

세실이 나가고 혼자 남은 데미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모르겠어.’

그의 어머니보다 그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걸 원한 게 아냐. 그를 잘 알고 싶은 게 아니라고. 난 체이스의 연인이 되고 싶었단 말이야. 내가 바란 것은 그것 딱 하나였는데…….’

체이스는 잠자리를 가진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모든 것이 달라지긴 달라졌다.

전화만 하면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준 그와의 브런치는 더 이상 없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그와 한 소파에 나란히 앉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요즘 하고 있는 고민을 들을 수도 없었으며 뭘 하고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조차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데미안이 일하는 갤러리에 때마다 제일 먼저 피는 꽃을 한 다발씩 사 들고 와 환하게 웃어 주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밤마다 꾸준히 전화는 걸려 왔다. 그가 아닌 그의 개인 비서에게서였다.

체이스는 늘 데미안을 인형처럼 안아 왔다. 배려도 없고 조심성도 없고 감정도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의 비서의 쪽지만이 남아 있던 날이 떠오른 데미안은 치를 떨었다.

[오늘은 제가 일정이 바빠 직접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 비서를 호텔에 대기시켜 두었으니 필요하시면 찾으십시오.]

이 작은 변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데미안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밀려나다 보면…….’

체이스의 사무실에 갈 때조차도 미리 약속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점점 힘들어질 테고.

‘내 자리를 찾아야겠어.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해.’

호텔 방 안을 서성이던 데미안의 시야에 세실이 준비한 옷이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내가 체이스를 가지지 못하는 건 다 다원 그 녀석 때문이야. 그러니 갚아 줘야 하지 않겠어?’

데미안은 갤러리에 전화를 걸었다.

“응. 한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아니,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옷이나 빨리 가져와.”

개인 스타일리스트에게 가지고 오라고 한 옷을 입고 데미안은 보스턴으로 향했다.

* * *

평화로운 오전.

바닥에 캐비닛, 책장, 책상, 의자 그리고 창문 프레임까지 모두 나무로 된 캐서린의 사무실은 ‘따뜻하고 정겨운 사무실’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유일한 장소일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된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는 다원은 회계 시즌 한정으로 쓰는 검은색의 동그란 금속테 안경을 쓰고 한껏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는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은 엑셀 파일, 캐서린에게 물려받은 구식 장부, 딜런과 그의 일당들이 제멋대로 던지고 간 전표 속의 수많은 작은 숫자들과 사투 중이었다.

아무리 한가해도 딜런의 카페는 수입이 있었다. 아주 소량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 수준의 통조림 공장이라도 물건을 만들어 냈다. 시즌이 되면 회계 업무는 바빠지기 마련이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계산기와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쓱싹쓱싹. 탁탁탁.

“하…….”

사각사각. 쓰윽. 쓰윽. 탁!

“에잇!”

오전 11시, 결국 다원은 항복하고 나무 의자에서 일어났다. 딱딱한 마룻바닥으로 캐서린이 의자 위에 얹어 놓았던 고운 꽃무늬 방석이 풀썩하며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 돌아서던 다원은 결국 가던 걸음을 돌려 그 방석을 주웠다. 먼지를 털고는 의자 위에 다시 곱게 올려 두었다.

“에휴. 절대로 못 들은 척한 거 아니에요, 방석님.”

다원은 사무실 한쪽 모서리에 위치한 작은 간이 세면대로 가 찬물을 틀었다. 흐르는 물 아래에 가만히 두 손을 내밀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으니 뜨끈하게 달아오른 손의 열기가 식는 것 같았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한결 가벼운 표정의 다원이 손을 닦고 주전자에 물을 받아 사무실 한중간에 있는 난로로 향했다. 난로 주변은 후끈후끈했다.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그 위에 올리자 뜨거운 난로의 불판과 닿은 주전자 밑바닥에서 물방울이 지글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후다닥 물러난 다원은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다원은 캐서린의 사무실이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 영감이 살았던 시대의 사무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깔끔하고 반짝거리는 시대에 이런 곳은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다원도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문제는 이 사무실 안엔 나무와 종이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캐서린은 오래된 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 이 난로를 꺼내던 날이 떠오르자 다원은 자기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캐서린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가진 상당한 고집의 소유자였다. 특히나 가족들 안에서는 원톱이었다. 지금 다원이 밟고 서 있는 난로 주변의 타일을 놓을 때 다원은 캐서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다원이 알고 있던 우아하고 자상한 캐서린은 그녀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일 뿐이었다.

한 달 전, 다원은 캐서린이 창고에서 뭔가를 낑낑거리며 들고 나올 때 얼른 그녀에게로 갔다. 고운 꽃 자수가 놓인 천 커버에 싸인 것은 꽤 묵직했다. 다원은 그것을 캐서린의 말대로 사무실 중앙에 놓고 한 발 물러났다.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캐서린은 커버를 벗기며 자랑스러워했다.

‘어때?’

그녀의 손에 의해 드러난 그것의 자태를 확인하고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래서 다원은 정말 순수하게 물었다.

‘전시용인가요?’

캐서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난로 중앙의 뭔가를 들고 캔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세상에…… 불이 붙다니.’

불이 붙은 난로 앞에서 다원은 신기해하고 캐서린은 아주 뿌듯해했다. 캐서린이 난로 위에 물이 든 주전자를 올렸다. 지난여름 그녀가 직접 담았다는 유자청을 머그 컵에 한 스푼씩 담아 물이 끓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였다.

‘어머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원 너도 정말 왜 이래? 불나면 어쩌려고 이래!’

갑자기 등장한 안전 맨, 딜런이었다. 그날 유자청은 결국 집 안 가스레인지 불로 끓인 물로 타 먹어야만 했다.

그날 저녁 내내 딜런은 사무실에서 난로 사용은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캐서린도 지지 않았다. 지난 세월 동안 이 난로를 틀었지만 불이 난 적은 없었다며 둘은 옥신각신했다.

다원의 중재로 두 모자는 어쩔 수 없이 중간 지점에서 타협을 했다. 바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구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첫 번째인 나무 바닥에 타일을 붙이는 작업을 할 때 두 모자는 다시 격돌했다. 캐서린은 그 시대의 타일을 어떻게 구했는지 그걸 패턴에 맞춰 깔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딜런은 바닥용은 따로 있다며 둘은 또다시 20센티 정사각형 모양의 타일 25장을 놓고 몇 날 며칠을 대치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둘의 대치는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딜런이 공수해 온, 그 타일을 거의 100% 재현한 이미테이션 바닥 전용 타일을 구하고서야 끝이 났다. 나무 위에 바로 타일을 붙이려는 딜런의 행동에 캐서린이 질겁하면서 다시 분쟁이 시작됐지만.

‘얘가 지금 오래된 마룻바닥에 무슨 짓이니!’

‘마룻바닥을 뜯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세요?’

‘고작해야 몇 개 뜯는 걸 가지고 뭘 그리 엄살이냐.’

‘직접 해 보면 그런 소리 못 하세요!’

정말 장도리를 집어 드는 캐서린의 기세에 결국 딜런은 완전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오래된 마룻바닥 조각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걷어 내느라 비지땀을 흘렀다. 물론 땀을 흘린 이유는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캐서린은 딜런 옆에 딱 달라붙어서 마룻바닥이 상할까 노심초사하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 댔다. 딜런은 정말 최대치의 인내력과 조심성을 발휘했다. 결국 시공이 끝난 타일 위에 난로와 소화용 모래, 소화기를 나란히 놓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

그날 캐서린은 보란 듯이 유자차를 탔다. 유자차는 세 잔이었지만 다원과 어머니가 한 잔 반씩을 나눠 마셨고, 딜런은 그 옆에서 시원하게 맥주를 깠다. 무려 다섯 캔이나.

다원은 그날 저녁, 정말 궁금하고 답을 듣지 못하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참다못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딜런이 직접 한 거야? 전문가를 부르거나 건물 수리 전문으로 하는 곳에 연락하면 안 돼?’

그러자 딜런은 아주아주 긴 한숨을 오랫동안 천천히 내쉬고는 대답했다.

‘내가 아버지를 왜 인정하는지 알아? 우리를 낳아 키워 주셔서도, 평생을 성실하게 사셔서도 아니야.’

다원은 차마 말로는 못 하고 눈으로 물었다. 그럼?

‘한평생 어머니의 저 미칠 듯 까다로운 요구를 묵묵히 들어주셨기 때문이야. 어머니는 자기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셔.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까지는 나에게도 맡기시지 않으셨다고.’

다원은 정말 힘든 듯 지친 표정을 짓는 딜런을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런 깐깐한 어머니에게 인정받은 아들이라니. 대단한걸.’

‘다원아. 제발 내 곁을 떠나면 안 돼. 난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흑흑흑.’

‘오구오구. 그러셨어요? 힘드셨어요?’

‘응. 히잉.’

“풋. 귀여워.”

그날의 딜런을 떠올린 다원의 얼굴엔 어느새 피곤이 싹 가시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다원의 손에 노란색 스틱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요즘에는 미국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산 믹스 커피였다. 두 개를 컵에 털어 넣은 그가 물을 적당히 부었다.

노란색 빈 봉지 안에 초록색 끄트머리 조각을 밀어 넣고 쓰레기통에 버리곤 성에가 잔뜩 끼어 뿌옇게 변한 창가로 가 창틀에 걸터앉았다. 창틀이 꽤 넓어 걸터앉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다원은 일하다 눈이 너무 아프면 이곳에 앉아 한적한 도로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후.”

커피의 뜨거운 김에 뿌옇게 변한 안경을 벗었다. 창틀에 올려 두려는데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타이밍하고는.”

다원은 뜨거운 커피 잔을 안경 옆에 내려 두고 책상으로 향했다. 당연히 딜런일 거라고 예상한 전화는 낯선 번호였다.

“누구지?”

그에게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은 딜런과 캐서린뿐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다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일은 없었다.

‘회계 관련 업무라면 사무실 전화로 올 텐데…….’

다원이 주저주저하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차라리 잘…….’

곧 다시 울리는 벨 소리에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다원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네.”

-다원 씨 되십니까?

다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근 1년 만에 듣는 목소리는 예리한 송곳이 되어 목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체이스 씨의 개인 비서, 세실입니다.

“…….”

대답을 하지 않아도 전화기 너머에서는 다원임을 안다는 듯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그의 전화를 달가워하지 않으실 거라 하셔서 체이스 씨 대신 연락드립니다. 다원 씨께서 편한 시간에 식사를 했으면 한다고 전해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

-언제가 좋으십니까? 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전해 주세요.”

-…….

“제겐 그를 만날 이유가 없어요. 체이스에게 전 생각이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그쪽도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 그럼.”

다원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 * *

뚜. 뚜. 뚜.

세실은 끊어진 전화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상당히 기분이 짜릿한데.”

세실은 모니터에 띄워진 화면 안, ‘다원에게 연락’이라고 적은 칸 옆에 빨간색으로 엑스 표시를 했다. 그는 저장된 것을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에 들어간 체이스가 나오기 30분 전이었다.

* * *

딜런은 캐서린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것을 배웅했다. 그는 다원이 도시락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으으. 안에만 있었더니 몸이 박제가 되어 버릴 것 같아.”

물론 날씨가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더 이상 병원 안에 있었다가는 앤서니 옆에 같이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아팠다.

딜런은 한겨울 얼음 같은 파도가 살을 파고드는 바다 위에서 몇 날 며칠을 생활했다. 그에게 사실 이런 날씨는 초봄의 꽃샘추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만에 하나 재수 없게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감기라도 걸려서 아버지에게 옮기면 큰일이었다. 딜런은 나가기 전 마스크며 목도리, 다원이 사다 준 두툼한 비니까지 꼼꼼히 챙겼다.

기나긴 준비 끝에 이제 막 병원의 중앙 현관을 나서려는데 바지춤에 넣어 둔 전화벨이 울렸다. 느낌이 안 좋은 전화벨 소리에 딜런은 조금 표정을 굳혔다. 목도리와 비니를 든 채로 허둥거리던 딜런은 둘 모두 겨드랑이에 낀 채 서둘러 장갑 끝을 입으로 물어 벗겼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 안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서두른 보람도 없이 화면에 뜬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평소라면 아주 쿨하게 무시했겠지만 다원과 관련해서 전화가 올 수도 있는 일이니 딜런은 착실히 받았다.

“네.”

현관문을 나서는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펴져 나갔다. 곧 딜런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래서, 내가 왜.’ 하는 짧은 말을 뱉던 그가 마침내 상대에게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쯧! 그럼 이리로 오든지. 난 자리 못 비우니까.”

구겨진 딜런의 인상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펴질 줄을 몰랐다.

“재수 없게 왜 전화질이야.”

딜런은 생각지도 않은 전화에 갑자기 열이 뻗쳤다. 그는 목도리고 비니고 점퍼 주머니에 그대로 구겨 넣은 채 병원 주변을 빠르게 걸었다.

병원을 한 바퀴 크게 돌고도 딜런의 짜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나기 시작했다. 몸이나 가볍게 풀고 바람 좀 쐬려고 나왔건만 기분만 더 나빠졌다. 그동안 잘 참아 왔던 담배가 무척이나 당겨 주머니 안의 손이 연신 불안하게 움직였다.

“안 되겠다.”

병원은 안과 밖 모두 금연 구역이었다. 흡연실까지 가다가는 도중에 피울 것 같았다. 차 안에서라도 한 대 피워야 할 것 같아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 썅!”

이십 대 중반을 넘어서며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던 욕이 무심결에 나와 버렸다.

‘왜 이렇게 초조하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남자, 데미안에게 화풀이를 단단히 하리라 벼르며 딜런은 그가 오겠다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딜런이 앉자 데미안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때 할 말 다 한 것 같은데.”

“급하시기는……. 그것 때문에 만나자고 한 것 아니에요.”

데미안은 요사스럽게 웃으며 앞에 놓인 물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딜런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가 입을 벌리자 마치 뱀의 혀가 나왔다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주 잡아 죽이겠네. 내 말을 듣고도 계속 그런 표정일지 두고 보자.’

데미안은 그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되도록 지금 표정 그대로 다원을 보게 되었으면 싶었다.

그는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 딜런이란 남자는 타고난 준수한 외모와는 달리 성질이 아주 급하고 고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알아요? 그날 제 옆에 앉아 있던 남자와 당신 애인이라는 녀석이 한때는 죽고 못 살던 사이라는 거. 불과 1년 전만 해도 말이에요. 둘은 4년 동안 한집에 살았어요.”

딜런은 그저 데미안의 얼굴 어딘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왜 이렇게 얌전해. 욕 안 해? 탁자 안 내리쳐? 너무 놀란 거야?’

데미안은 뜻밖이라는 듯 딜런을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꽤 침착하네. 뭘까? 애인에 대한 믿음? 아니면 정말 너무 놀라 당황한 건가?’

사실 딜런은 갑자기 찾아온 뱀 같은 자식이 하는 말의 진위를 가늠하느라 바빴다.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흔들린 건가?’

데미안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직 진행 중이라고 해야겠네요. 체이스는 아직도 그 녀석을 포기하지 않았거든요.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 녀석도 아마 체이스에게 완전히 마음을 접은 건 아닐 거예요.”

데미안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화사하게 웃었다.

“지난 4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아!”

데미안은 정말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녀석이 이야기하던가요? 자기가 원조를 받으며 대학을 다녔다는 거. 아마 안 했겠죠. 그 녀석에게는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거지? 이유가 뭐야?’

딜런은 이 남자가 왜 자신에게 이런 잔인한 말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데미안은 말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한 모금 정도 마신 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만 옮겨 딜런을 바라보았다. 딜런의 표정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그 녀석이 좀 뻔뻔해야죠. 체이스 곁에 딱 달라붙어서는 어찌나 악착같이 단물을 쪽쪽 빨아먹던지……. 아마 4년 내내 그 녀석은 제 돈은 동전 한 닢도 쓰지 않았을 거예요.”

‘그 입 다물어.’

딜런은 뱀 같은 자식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두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제 친구가 그럴 애가 아닌데 이상하게 그 녀석에게는 사족을 못 쓰더라고요. 그런데 그 녀석이 졸업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떠났죠. 제 친구가 회사 일이 바빠진 틈을 타서요. 직접 듣지 않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곁에서 그들을 지켜봐 온 사람들은 다들 짐작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무튼 그 녀석이 떠나고 나서 제 친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죠.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멀쩡한 사람을…….”

딜런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얌전히 앉아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근거 없는 말에 흔들리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요점이 뭐지?”

“뭐……. 서로 격식 따지고 말고 할 처지도 아니고.”

“…….”

“난 그저 체이스가 정신을 차려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뿐이고, 더불어 당신의 어머님께도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죠. 물론 그 녀석이 제 친구의 마음을 헤집어 놓은 대가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건 당신에게 말할 건 아니고.”

딜런은 남자의 눈동자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정신을 홀리는 저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다.

“일이 성사되지 않았더라도 훌륭한 컬렉션을 모으신 분의 안목에 대한 일종의 존경의 표시랄까. 그 녀석이 이번엔 당신을 스폰서로 삼은 모양인데, 사랑하는 아들이 그런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현혹당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게 되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비위를 맞추는 척 신경을 건드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딜런은 옛날, 앤서니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딜런. 망망대해 한중간에서 휘몰아치는 파도를 만났을 때 겁을 먹고 그대로 있다가는 결국 그 파도는 너도, 너의 배도 집어삼킬 게 뻔해.’

‘그럼 어떡해요?’

‘정면 돌파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있거든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라.’

‘도망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죽기밖에 더하겠니.’

딜런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떠 데미안을 직시했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닌데.”

“…….”

의외의 말에 데미안은 조금 놀랐지만 아직까지는 단단한 가면을 벗지 않았다.

“아직 당신은 체이스만큼 그 녀석에게 홀린 것 같지 않으니 하는 말이에요. 당신의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이쯤에서 그 녀석을…….”

데미안의 목소리와 기억 속 앤서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자꾸만 겹쳐졌다.

‘오늘도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는구나.’

‘노랫소리요?’

‘들리지 않니? 마을이 보이는 바다에 다다르면 언제나 사이렌은 바닷사람을 유혹하지. 그 소리에 혹하면 배는 순식간에 좌초하고 마는 거야. 그러면 영영 집에 돌아갈 수 없어.’

‘헉!’

‘그럴 땐 귀를 틀어막아라. 그래도 들리면 귀를 잘라 버려, 딜런! 정신 차려!’

어느 겨울 거센 파도가 치던 날이었다. 집채보다 큰 파도에 딜런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딜런은 앤서니의 호통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딜런! 아직 집에 도착한 게 아니야! 바다는 아직도 성이 나 있다고! 사이렌이 울린다! 정신 차려!’

“아주 솔깃한 말이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데미안은 시종일관 안타까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가짜였다.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처럼.

“당신, 이번에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

“남의 연애에 관심 끄고 너나 잘해.”

“아니……. 뭐…… 뭐!”

“다원이 날 만나기 전에 뭘 했는지 난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가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거지.”

“아, 그래요?”

당황해 입술을 파르르 떨던 남자가 다시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딜런은 그 입을 틀어막아 버리거나 자신의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데미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그를 옭아맸다.

“누가 그래요? 그 녀석이 당신 옆에 있다고. 얼마 전에도 단둘이 오붓하게 만났는데 알고 있어요? 저런, 모르는구나.”

“…….”

“훗. 정말이지. 그 녀석이 요물은 요물인가 봐. 체이스 옆에 있을 때도 혼을 쏙 빼 놓더니 당신도 그런 거야? 도대체 그 녀석 구멍이 어떻기에 그런 거지? 나도 한번 찔러 넣어 볼까? 얼마나 좋은지.”

“……닥치지.”

“…….”

데미안의 입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딜런은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더러운 입 그만 나불거려.”

‘도대체 누가 사이렌인 거야.’

체이스 앞에서야 얌전 떨며 착한 아이처럼 언제나 지고 들어가는 데미안이었지만 그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약점을 드러낸 먹잇감을 그냥 놔둘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데미안은 비틀거리고 있는 먹이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내 입이 더러운가, 네 애인 구멍이 더러운가 지금부터라도 자세히 확인해 보시지!”

“뭐?”

“아주 똑똑히 확인해야 할 거야. 그 녀석에게 몸도 마음도, 네 어머니의 훌륭한 컬렉션까지도 다 털리기 싫으면!”

딜런은 아주 오랜만에 말문이 막혔다.

‘그냥 패 버릴까.’

아름다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럴싸한 목소리로 아주 솔깃한 이야기를 속삭이는 남자를 죽기 직전까지 패 주고 싶었다. 무릎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앉아 있다가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마저 끊어질 것 같아 딜런은 그대로 일어나 병실로 향했다. 그러면서 연신 귀를 거칠게 후벼 팠다. 마치 귀 안에 데미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더러운 말들이 쌓여 있는 것처럼.

데미안은 창 너머로 멀어지는 딜런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상처를 잘 추스를지,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 난 상처는 큰 흉터가 되어 남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지금은 그거면 됐어. 한 번에 못 알아들으면 다시 알려 주면 되는 거고.’

데미안의 얼굴에 모처럼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 *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서야 딜런은 제가 아버지의 병실을 맞게 찾아왔구나 싶었다. 다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실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아침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은 고향 마을의 돌길 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때의 모습이기도 했고, 한국의 이름 모를 고택의 눈밭에서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이기도 했다.

“딜런.”

다원이 딜런을 발견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딜런,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다원은 그 모습 그대로인데 자신은 왜 달라졌는지, 왜 겨우 얼굴 한 번 본 남자의 말에 흔들리는 건지 딜런은 알 수 없었다.

“어디 아파? 뭐야.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다원이 딜런의 곁에 다가왔다. 다원의 몸에선 익숙한 냄새가 났다. 딜런이 좋아하는 종이와 잉크 냄새였다.

“하아. 다원아.”

“왜 그래, 정말?”

온몸으로 스며드는 그 향기에 딜런은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유리창 너머에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하얀 침대에 누워 있는 앤서니가 보였다.

“아버지는 편안하셔. 숨도 잘 쉬시고 별다른 일 없었어.”

딜런은 다원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으며 그의 이마에 긴 키스를 했다.

“정말 이상하네. 무슨 일 있었어?”

딜런은 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응.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더라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 까닥하다가는 휩쓸려 갈 뻔했지 뭐야.”

“정말? 나 올 때는 괜찮았는데…….”

딜런은 다원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딜런의 시선에 다원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딜런…… 정말 왜 그래.”

다원은 주변을 힐끔거렸다. 딜런에게 타인의 시선 따위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더 보잘것없었다. 그는 남들이 있건 없건 상관없었지만 다원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딜런은 다원을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원은 점점 집중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실 다원은 아직까지 본인이 정말 게이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어쩌다 보니 첫 연애를 남자와 했을 뿐이었다. 건장하다 못해 장대한 체격의 쿼터백 출신인 체이스는 집착과 정력이 남달랐다. 4년간의 연애 기간 내내 다원은 여자와의 만남은커녕 일상적인 만남도 가질 수 없었다.

실연의 아픔을 제대로 실감하기도 전에 거친 바다를 제집 앞마당처럼 드나드는 남자를 만나 두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 사랑에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자신이 정말 게이인지 확신이 없는 다원에게 공공장소에서 동성 애인과 스킨십을 하는 것은 허들이 너무 높았다.

“딜런, 여긴 병원 복도야. 그것도 아버지 병실 앞이라고. 알고 있어?”

오늘따라 집요하게 구는 딜런의 행동에 다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다원은 늘 이랬다. 수줍어하고 민망해하고 남들의 이목에 민감했다. 지금도 남들의 시선에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짓궂은 연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배려야? 사랑이야? 연기야?’

딜런은 당연하던 것에 물음표를 붙이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다원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에 순간 힘이 실렸다.

‘윽!’

숨쉬기도 힘든 다원이었지만 그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의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마치 100미터를 전력 질주 한 사람처럼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딜런, 왜 그러는 거야? 정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키스해 줘.”

간절한 목소리에 파르르 떨리는 다원의 입술이 딜런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다원을 끌어안고 있던 딜런의 팔에 힘이 풀렸다.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딜런은 그를 부드럽게 고쳐 안으며 깊은 키스를 했다. 그렇게 둘은 앤서니의 병실 앞 복도에서 길고 긴 키스를 나누었다.

다행히도 늘 상주하던 간호사들은 모른 척해 주었다. 면회 시간이 아닌 덕에 몇 명 없던 다른 환자의 보호자들 역시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래도 고개를 들지 못한 다원은 유리창 너머의 앤서니만을 바라보았다. 딜런은 다원의 어깨를 감싼 채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함이 사라질 때까지.

“이제 집에 가 봐. 어머니 혼자 계시는데.”

“…….”

“왜?”

“아니,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늘 같이 있는데 새삼스럽게.”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안고 있어도 안고 싶고, 붙어 있으니 들어가고 싶어.”

“!”

딜런이 다시 다원을 끌어안으려 하자 이번엔 잽싸게 피하는 다원이었다.

“딜런.”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눈을 무섭게 치켜떴다.

“여긴 공공장소야. 두 번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하! 나에게 그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해?”

다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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