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9)

3장.

“오늘이 월요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정말 휴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다원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명을 삼켜야 했다. 정말 온몸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 딜런. 난 진짜 힘든데.’

다원이 깨기 전부터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딜런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과 얼굴은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었다. 다원의 시선이 어느새 뾰족해졌다.

“아, 좋다.”

딜런은 다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 행복했다. 아예 처음부터 그 행복한 세상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당신을 여기 놔두고 어떻게 가게에 나가지? 또 어떻게 바다에 나가겠냐고.”

딜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말 꿀처럼 달콤했다. 연인이 한다면 정말 사랑스러울 말과 행동이었다. 다원은 작은 의문이 들었다.

“딜런…….”

“응. 당신도 뭐라고 말해 봐요. 정말 그렇죠? 네?”

“그런데 어제 우린 그냥 한순간 불타오르…… 느은…….”

다원은 입을 다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브레이크를 걸었다. 순간 바뀌는 딜런의 분위기가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할 때라고 특급 경보음을 울려 댄 것이다.

‘이게 아닌데…….’

“그…… 물론 모든 시작은 그런 한순간의 불타오름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딜런은 천천히 다원에게서 떨어져 일어나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다원의 변명은 갈 길을 잃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딜런의 새하얀 상체는 난리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제 앞으로 딜런을 어떻게 본담. 저게 정말 내가 한 거라고?’

다원은 울긋불긋한 자국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딜런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거야? 화를 참고 있는 거야? 아니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려는 거야?’

다원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드디어 딜런이 입을 열었다.

“우선은……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건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어젠 내가 너무 성급했죠?”

딜런이 침대에서 내려가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은 정말 숨이 멎을 만큼 멋있어 보였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그건 당신도 이해해 줘야 해요. 당신 책임도 있으니까…….”

다원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한국어보다 더 익숙해졌다고 자부하는 영어였다. 딜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치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설마……?’

예상은 했지만 직접 확인하자 마음이 시렸다. 다원은 말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그 눈동자는 달도 뜨지 않는 그믐날의 깊은 바다 한가운데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이런…….’

딜런은 눈가를 조금 구겼다. 이 와중에도 제 아랫도리는 발기 찼다. 머리로는 다원이 아름답다 생각했고 가슴으로는 그에게 고백을 다짐했는데, 그걸 왜 아랫도리가 표현을 하는 것인지 참 난감했다.

어찌 됐든 딜런은 아랫도리의 신호를 무시하기로 했다. 녀석의 말을 듣는다면 지금부터 할 행동에 전혀 무게감이 실리지 않았다.

‘빨리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 다원이 울겠다, 울겠어.’

딜런은 한쪽 무릎을 꿇고 다원을 올려다봤다. 울 것 같은 다원의 얼굴이 의아하게 바뀌었다.

“다원. 사실은 한국의 하얀 눈밭에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난 사랑에 빠져 버렸어. 너무 어리게 보였던 당신에게 그런 감정을 가진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딜런은 침대 위로 손을 뻗어 이불 아래 빼꼼히 나온 다원의 왼쪽 발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쌌다.

‘사랑? 어려? 혐오?’

이게 무슨 분위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발을 잡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다원은 이번에는 생각을 말로 내뱉지 않고 입을 다무는 데 성공했다. 다만 너무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에 다리부터 시작해 온몸에 돋아난 소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푸른 바다 위에서 당신을 다시 본 날, 난…… 내 심장은 그 차가운 바다에 빠져 버린 줄 알았어.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말이야. 당신이 그날 왜 그 바닷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표정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묻지 않을게. 다만…….”

그 말에 다원은 정말 놀랐다. 그때 그는 그저 너무 새파란 바다에, 이질적인 돌길에, 차가운 바람에 홀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운 딜런, 그에게도.

한편 딜런은 또 그날과 같은 표정이 되려 하는 다원을 당장 붙잡아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나와 영원히 함께해. 이곳에서.”

‘뭐?’

다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딜런은 다원의 발을 꼭 잡고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판사의 마지막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아주 간절했다.

다원은 이 남자가 왜 이렇게 절실한 사랑의 고백을 하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뭔가 다원의 마음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도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그럼…… 된 것 아닌가?’

다원은 이제 제 일을 남이 결정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딜런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는 망설임을 버리고 확실하게 말했다.

“응. 그렇게 해요.”

이번엔 딜런의 눈이 동그래졌다. 쉽게 열릴 것 같지 않던 다원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알아들었는데 믿을 수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네, 딜런. 그렇게 해요. 우리 함께해요.”

다원은 두 번이나 의사를 밝혔다. 딜런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원은 딜런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확실하게 대답했는데 반응이 없다니 역시 잘못된 고백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만일 이게 다 장난이었네, 분위기 전환용이었네 하는 시답잖은 말을 할 거면.”

발끈한 다원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하자 딜런이 퍼뜩 놀라 말을 끊었다.

“잘 나가다가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딜런은 그를 그대로 덮쳐 버렸다. 다원은 졸지에 딜런의 몸과 침대 사이에서 구겨진 신세가 되었다.

“으아악! 내 허리!”

다원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엉치뼈를 타고 찌르르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아, 미안.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많이 아파요?”

“윽. 그렇게 걱정이 되면 좀 일어나 봐…… 요…….”

다원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딜런은 은근슬쩍 아랫도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비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랫도리는 참으로…….

“아니,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이 녀석은.”

“눈 뜨고 당신의 향기를 맡을 때부터.”

“딜런은 비위가 참 좋은가 봐요.”

행위 후 씻지도 않고 잠들었으니 좋은 향기가 나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이라지만 다원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딜런은 그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다원과 입을 맞췄다. 고개를 돌리던 다원의 반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딜런의 집요한 키스는 다원의 경계심을 녹여 버렸다. 곧 방 안은 둘의 달콤한 신음과 살 부딪치는 젖은 소리로 채워졌다.

* * *

다원은 공식적인 휴무일인 월요일을 침대에서 날렸다. 딜런은 의외로 대단한 사랑꾼이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 딜런이 다원은 고맙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다원의 상황은 아직도 불안정했다. 이제 막 한숨 돌렸을 뿐이었다.

‘너무 성급했나?’

정을 통한 지 고작 하루째인데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딜런의 사랑에 걱정도 들었다.

‘원래 순식간에 타오른 불꽃이 금방 꺼지는데…….’

하루 종일 딜런에게 시달리며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다. 저녁, 반신욕을 하며 다원은 그냥 제 불안을 어디론가 치워 버리자는 결론을 내렸다.

‘나도 모르겠다. 다원아, 이제 정말 단순해지자. 제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너무 오래 있었던 거 아냐? 반신욕도 오래 하면 오히려 안 좋다던데.”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딜런은 큰 샤워 타월을 들고 욕조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쯤 되자 다원은 딜런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루 손을 탔을 뿐인데 그의 손길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마당이었다. 하루 종일 그의 손에 맡겨져 있었던 몸도,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뇌도 이제 정말 파업을 선언했다.

“너무 자상한 거 아니에요?”

“다원이 아픈 건 싫으니까. 그것도 나 때문에.”

“이건 실례가 되는 질문이긴 한데…… 원래 연애 스타일이 이래요? 자상하고 다정하고…….”

“실례 아니야. 궁금한 건 물어봐야지. 그리고 대답은…… 아니. 그렇지 않았던 거 같은데……. 전 애인들은 하나같이 나보고 늘 같은 말을 하며 떠나갔거든.”

다원은 욕조에서 일어났다. 타월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딜런은 직접 닦아 주었다.

“그들은 항상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대. 다들 내 옆에 있는 건 미친 짓이라며 떠나갔어.”

“저런.”

딜런은 다원의 머리를 적신 물기마저 털어 내고 샤워 가운을 건네주었다. 가운을 입은 다원은 드라이어를 꺼냈다. 딜런은 벗어 놓은 다원의 옷과 쓴 타월을 챙겨 들었다.

“로션도 내가 발라 주고 싶으니까 침대에 앉아 있어. 이거 넣고 올게.”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원은 멈칫 굳어 버렸다.

‘뭘 발라……? 로션?’

다원은 딜런의 고집이 보통이 아님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사장님 딜런과 애인 딜런은 달랐다. 현기증이 날 정도의 갭이었다.

‘연인이 된 그는 더했어. 집요해.’

욕실에서 나온 다원은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기다렸다. 곧 돌아온 딜런은 망설임 없이 로션을 손바닥에 듬뿍 짜 다원의 몸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분명히 슈퍼에서 산 싸구려 로션이었다. 그런데 딜런이 발라 주는 느낌은 조금 색다르고 이상했다. 애국가라도 불러야 하나 싶었다.

“보통은 오일을 쓰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이 향이 좋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당신에게는 어울리는 것 같거든.”

“흔하고 싸니까…….”

딜런의 손이 멈췄다. 다원은 아차 싶었다.

“아니, 좋다고요. 나도 좋아요.”

변명하듯 말을 붙인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원의 자괴감은 뿌리가 깊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늘 따라붙었으니까. 예전 데미안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너 같은 성격 정말 피곤한 거 알아? 언제나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그 가증스러운 얼굴, 내 앞에서는 안 통해. 그러니 그 가면 이제 그만 벗지 그래?’

데미안의 말은 틀리지 않다고 다원은 생각했다.

딜런은 별다른 말 없이 로션을 발등까지 꼼꼼히 펴 발랐다. 그러고는 손에 남은 로션을 다원이 벗어 놓은 샤워 가운에 닦았다.

“이 차 마시고 푹 자라고 하고 싶지만, 나도 방금 묻고 싶은 게 생겨서…….”

다원은 묻지 않아도 알아서 대답을 했다.

“내가 나에게 다소 가혹하다는 거 나도 알아요. 당신이 느낄 정도면 ‘다소’가 아니라 ‘꽤나’일지도 모르겠네요.”

딜런이 동의의 미소를 지었다. 다원은 딜런이 내어 준 조금 큰 파자마를 입고는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양치를 하지 않고 마셨더라면 더 맛있었겠지만 차 자체의 맛은 좋은 것 같았다.

“아마 어릴 적 환경 탓일 수도 있고, 얼마 전 겪은 이별의 아픔 때문일 수도 있겠고…….”

딜런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응원의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정말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일 수도 있죠.”

딜런은 잠든 다원의 이불을 한 번 더 다독이고 그의 방을 나왔다. 맞은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1층으로 내려가 커피를 내렸다. 곧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커피를 마셔도 수면에 문제가 없는 딜런은 생각할 것이 생기면 습관처럼 진한 커피를 내렸다.

질 좋은 원두로 내린 커피엔 부드러운 거품이 가득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어도 사실 지금 그는 조금 당황스럽고 놀란 상태였다.

첫 만남과 두 번째 만남 모두 다원은 기운이 없고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마음을 정리하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많기에 딜런은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잠시 슬럼프가 온 청년 또는 학생으로 보였던 것이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러나 알면 알수록 티 없이 맑고 밝기만 할 것 같은 다원은 사실 촘촘한 거미줄에 사로잡힌 나비 같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아슬아슬해 보였던 건 그래서였을까. 거미줄이 그를 옭아맨 것인지, 그가 거미줄에 스스로 엉켜든 것인지, 둘 모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죄어드는 거미줄 때문에 다원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만은 분명했다.

딜런은 다원을 거미줄로부터 풀어 주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아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헤어졌다는 애인이……?’

생각할수록 딜런은 혼란스러워졌다.

“윽, 이게 뭐야. 이제 막 시작했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

우연히 여행지에서 인연을 만들고 싶은 사람을 발견했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이곳을 찾아왔다. 틀림없이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그 앞에서 딜런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나 정말 벌 받는 건가?”

떠나간 연인들이 약속이나 하듯 던진 말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꼭 너 같은 사람 만나서 가슴 졸이고 아파해 봐. 피눈물 흘리며 땅을 치고 후회하길 바랄게.’

그 말이 정말 현실이 될 줄이야.

딜런은 지난 몇 달 동안 다원이 태평양을 날아가 버릴까 봐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평생을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

* * *

화요일 저녁, 다원은 딜런과 보스턴의 부모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시즌이 시작되었지만 평일엔 거의 관광객이 없었다. 사장님인 딜런의 기분에 따라 카페는 평일엔 자유롭게 운영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딜런은 본업인 고기잡이를 위해 바다로 나가야 했지만, 날도 좋지 않고 요트 대여를 예약한 사람도 없어 보스턴으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사장님.”

“네, 직원님.”

“이러다가 제 월급 제때 안 주시는 건 아니죠?”

“크크크. 하하하하!”

갑작스러운 무능력한 사장님 취급에 딜런의 웃음이 터져 버렸다.

“아니, 사장님! 운전 중에 이러시면 상당히 곤란하다구요. 집중! 어허, 집중!”

“크하하하하. 아, 내가 정말……. 내 사랑 다원. 널 어쩌면 좋아. 이 와중에 월급 걱정을 하고 있다니.”

“아니, 전 지금 제 목숨 걱정을 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샐러리맨이 월급 걱정하는 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하하하하. 안 되겠다. 세워, 세워! 이러다 정말 사고 나겠네!”

‘도대체 뭐가 그리 웃긴 거지? 갓길에 차까지 세우고.’

딜런은 담배를 피우는 와중에도 계속 키득거렸다. 어쩌면 담배를 피우려 차를 세웠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때, 딜런이 갑자기 죽을 것처럼 연신 기침을 해 댔다. 그럴 때마다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기도 안 차네, 정말.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온다.’

바로 얼마 전에 생긴 연인의 초 단위로 갱신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다원은 과연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총 3층으로 된 보스턴의 집은 1층엔 딜런의 부모님이 거주하는 공간과 사무실, 세를 주고 있는 가게가 있었다. 2층과 3층에도 세를 놓은 집이 각각 세 집이 있었지만 건물 전체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캐서린의 까다로운 심사 기준(?)을 통과한 세입자들은 다들 유순하고 깔끔한 사람들이었다. 캐서린도 본인의 성격대로 꼼꼼하게 건물 관리를 했다.

그중에 가장 돋보이는 곳은 사무실이었다. 낡았지만 그녀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 있는 그 사무실에서 다원은 본격적인 회계 업무를 시작했다. 바쁜 시즌은 아니었지만 미리미리 해 두지 않으면 결국 힘들어지는 건 다원이었다. 직원이 하나뿐이니 누구에게 미루거나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딜런은 생각보다 직업이 많았다. 그의 본업은 고기 잡는 어부였다. 부업으로는 1년에 대략 3, 4개월만 가동하는 통조림 공장을 운영했다. 또 취미로 본인이 커피를 마시려고 카페를 운영 중이었다. 간간이 요트 대여도 했다.

고기잡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는 경영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다. 카페 운영도 주먹구구였지만 통조림 공장 운영은 정말 상상 초월이었다. 공장의 직원들은 동네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딜런 부모님의 죽마고우인 그들은 편안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일을 했다. 그 여건을 만드는 일은 딜런의 몫이었는데, 이제는 다원도 한몫해야 했다.

얼마 전 비시즌에 문을 닫아 놓았던 통조림 공장 대청소가 있었다. 그날을 떠올린 다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생선 통조림은 당분간 사양이었다.

딜런의 집안은 대대로 어부 집안이었다. 고기가 너무 많이 잡히면 싼값에 넘겨 남 좋은 일만 시키고, 그렇지 않을 땐 수입이 없어 힘든 게 어부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앤서니는 한탄만 하지 않고 소규모 어업인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해 냈다. 공장을 세운 것이다.

그 당시 이 일대에는 러버가의 통조림만이 유통될 정도로 성행했다고 했다. 요즘은 교통이 편해지고 대기업의 마켓 등이 곳곳에 들어왔기에 딜런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딜런은 작은 공장을 청소하는 내내 이야기했다. 본인이 만드는 생선 통조림은 이곳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귀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딜런의 통조림은 지역 특산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날 다원은 딜런에게서 그 작은 항구 마을의 근현대사를 거의 다 들은 것 같았다. 아직도 귀에 딱지가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딜런은 마을 앞바다와 관련된 모든 것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다원에게 바다는 정말 생소한 것이었다. 그에게 바다는 초등학교 때 봤던 부산 앞바다와 얼마 전 봤던 여수 바다가 전부였다. 그러니 비린내가 진동하는 생선 통조림 공장을 청소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다원은 펜을 내려놓고 킁킁 손 냄새를 맡았다. 아직도 참치 캔을 땄을 때 올라오는 설명할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배 있는 착각이 들었다. 이젠 참치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다원은 맑은 공기도 쐴 겸 뭐라도 상큼한 것을 마시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업한 내용을 저장하고 막 일어나던 다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못 말려, 정말.”

사무실 창문 너머로 성큼성큼 뛰어오는 딜런의 모습이 보였다. 곧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환한 미소를 띤 그가 들어왔다.

“다원, 이거 마시고 해요. 옆 가게에서 새 음료를 만들었다고 시음 좀 해 달래.”

딜런의 양손엔 노란색과 하늘색의 음료가 들려 있었다. 얼음이 잔뜩 들어간 그것은 정말 시원하고 상큼해 보였다.

“우와. 타이밍 완전 대박인데요? 안 그래도 상큼한 게 마시고 싶어서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다원은 딜런의 양손에 들린 음료의 빨대를 번갈아 가며 한 번씩 쪽쪽 빨아 마셨다.

“요건 조금 달고 새콤해요. 이건 뭔가 밍밍한데 끝 맛이 달아요. 단 게 좋기는 하지만 지금 난 새콤한 거.”

다원은 딜런의 손에 들린 노란 음료를 쏙 빼갔다.

딜런은 물기만 남은 빈손과 다원의 손에 들린 새콤해 보이는 노란색 음료를 번갈아 바라보다 웃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또 영락없는 어린아인데…….’

다원은 정말 다양한 매력의 소유자라고 딜런은 생각했다. 다원은 제 책상 앞에 앉아 휴지를 네모반듯하게 접어 그 위에 노란색 음료를 올렸다. 빨대를 물고 길게 한 번 빨아 마신 그가 딜런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안경 너머로 눈을 치켜뜨고는 투덜투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서 자꾸 자극적인 맛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게 다 사장님의 말도 안 되는 경영 때문이라고요. 깨알 같은 숫자가 두서없이 쏟아지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래서 자극적인 맛이 필요한 거고요.”

“크크크. 내가 일을 더 벌여야 할까 봐.”

‘이 사람이 정말!’

다원은 진정으로 화가 났다. 만일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음료가 없었더라면 이성의 끈은 벌써 끊어졌을 것이다. 그럼 연인이자 사장님인 남자의 헛소리에 소리를 질렀을지도 몰랐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남의 뒷다리 긁는 소리죠?”

다원은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한국말로 한국 속담을 읊조렸다.

“네에?”

딜런은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요상한 말이었다. 조금 전 다원이 귀엽다고 생각했던 사실까지 깜빡할 정도였다.

“여기서 더 부려먹겠다니, 사장님 정말 너무해요.”

“크하하하하하!”

딜런은 그제야 다원이 제게 항의했다는 걸 이해했다. 그는 손에 든 음료가 손등을 타고 질질 흐를 만큼 큭큭거렸다. 간신히 진정된 딜런은 다원의 오해를 풀어 주느라 이번엔 연신 꼬리를 흔들어야 했다.

“아니, 난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귀여운 다원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지 정말 일을 시키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헤실헤실 웃었다가 이렇게 새침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유혹을 해 오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쩡! 다원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 무방비한 상태를 틈타 딜런은 다원의 양쪽 뺨에 쪽쪽 소리를 내며 뽀뽀를 했다. 더 나아가 딜런은 그의 앞머리까지 시원하게 까고 이마에 아주 진한 뽀뽀를 날렸다.

“으으으. 정말 예뻐 죽겠네.”

다원은 온몸이 근질거리고 가려워 죽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 이런 말과 행동을 배워 왔나 싶었다.

“당신 정말 갭이 너무 커요. 적응이 안 돼.”

“적응하지 마. 평생 놀라며 살면 되지. 언제나 새로운 기분으로.”

‘못 말려, 정말.’

다원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일을 계속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잠깐 쉴까 봐요. 눈도 침침해.”

다원은 딜런의 품에 안겼다. 딜런은 다원의 안경을 벗겨 줬다. 다원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폭 안겼다. 그렇게 그는 한참을 창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

“왜?”

다원이 갑자기 딜런을 조금 밀어 내고는 창밖을 보고 미소 지었다. 딜런은 다원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다 다원을 따라 엷게 웃음을 띠었다.

“어머님, 아버님 오셨어요. 나가 봐야죠.”

다원은 노란 음료를 창틀에 올려 두고 단번에 밖으로 나갔다. 장애인 전용차에서 내리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다원이 뛰어나가자 둘 모두 환하게 웃었다.

딜런은 그 모습을 오래된 나무 격자 창틀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편안하게 휘어지며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어울리네. 참 예쁘다.”

* * *

이제 다원의 자리는 당연하다는 듯 앤서니의 옆자리였다. 다원은 아버님도 아닌 아버지라 부를 만큼 그와 친해져 있었다.

앤서니의 요즘 레퍼토리는 딜런이었다. 알고 보니 딜런은 그들의 첫아들이 아니었다. 그 위로 형이 둘 있었다. 첫아이가 배 속에서 유산되는 바람에 캐서린의 몸에 무리가 갔고, 그 후로 좀처럼 임신이 되지 않아 부부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했다.

“그때 네 어미가 많이 울었단다. 그땐 나도 어려서 네 어미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랐지. 그저 옆에 있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앤서니는 어느 순간부터 다원을 딜런이라 착각하는 듯했다.

“참 무심했지. 끊임없이 밖으로 나돌았어. 사실 나도 많이 힘들었단다. 어렸거든. 나는 늘 배 위가 아니면 공장을 떠돌곤 했단다. 어쩌면 공장도 그래서 만들었는지 모르지. 그러다…… 후우. 그래, 그날은 술도 많이 마셔서 무척 피곤했지. 다음 날 일찍 뱃일을 나가야 했는데도 그랬어. 하아.”

다원이 그의 입에 물 잔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앤서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돌렸다. 다원이 그의 무릎에 손을 올리자 앤서니가 손등을 다독거렸다.

“그렇게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대. 존이 고생을 좀 했지. 끌끌끌.”

가래가 끓는 특유의 웃음소리였다. 딜런도 나이가 들면 이렇게 웃을까 싶었다.

“그리고 딜런의 형이 생겼지. 그 아인 정말 기적과 같았어. 이뻤지…….”

그는 정말 손안에 아이가 있는 듯 갓난아이를 안는 자세를 취했다. 다원의 눈가가 어느새 붉어졌다. 지금 이들에게 그 아이가 없다는 걸 다원은 너무 잘 알았다.

“후우……. 하늘은 우리에게 그 아이를 오래 허락하지 않으셨지.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밤새 얌전했던 아이를 칭찬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아이의 침대로 갔단다. 그래, 얌전히 잠들어 있긴 했지.”

딜런의 말로는 아마 영아 돌연사일 것이라고 했다. 캐서린은 전날 저녁 우유를 배불리 먹이고 트림까지 시켰다고 했다. 잠든 후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아이는 그럼에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두 아이를 보내고 네 어미는 오히려 담담해졌단다. 그녀의 모습에 도리어 내가 무서워졌지. 난 항상 네 어미를 주시했단다.”

“아버지…….”

다원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앤서니가 그때 얼마나 불안했는지 지금도 느껴졌다. 아마 캐서린의 우울증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약을 먹고 있었다.

‘평생을 쉬지 않고 일을 하신 것도 그 때문이겠지.’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본인의 병을 인정하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딜런이 우리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었단다. 딜런은 정말 존재만으로도 효자인 아이지. 암, 그렇고말고. 아가. 딜런을 많이 사랑해 주렴.”

다원은 앤서니의 무릎에 고개를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늠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윽고 앤서니가 짓는 따뜻한 웃음에 다원은 할 말을 잃었다.

‘착각이 아니었어.’

그는 다원을 딜런으로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다원이 딜런의 친구나 친한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확하게 다원을 딜런의, 그의 아들의 연인으로 보고 있었다.

“아버지…….”

“우리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땐 둘 다 병들어 있었지. 나도 일에 미쳐 있었거든. 그리고 난 어리석게도 먼저 보낸 아들들을 그리워했단다. 아…….”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여전히 딜런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예요. 딜런이 그 증거잖아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남을 그렇게 사랑할 수는 없었다. 다원의 말에 앤서니는 힘겹게 손을 올려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참 예쁜 아이구나, 아가.”

“아버지도요.”

다원이 다시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응석을 부렸다. 그러나.

“내가 예쁜 아이라고?”

그 응석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앤서니의 정신이 제자리에서 조금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어이! 내가 예쁜 아이라고 했어?”

“아니에요. 아버지 안 예뻐요!”

“뭐! 안 예뻐? 밉다고?”

“윽, 어떡해.”

“어이! 내가 밉다고? 나 미워하는 거야?”

생각보다 거센 반응에 다원은 놀랐다.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달랬지만 앤서니는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다원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다행히 어머니의 요리가 거실로 하나둘 나왔다.

“식사합시다.”

맛있는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앤서니는 화려한 색깔의 음식에 집중했다.

“아버지,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완전 부드러워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위해 애쓰셨어요.”

다원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다원과 딜런이 집에 오는 날이면 앤서니의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은 다원의 몫이 되었다. 그러자 캐서린도 편하게 본인의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원의 접시를 한 번씩 챙기며 가족들을 둘러보는 딜런의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식사를 마친 후 캐서린이 기분 좋게 제안했다.

“아버지도 컨디션이 좋고, 우리 오랜만에 다 같이 티타임이나 가져 볼까?”

“제 커피는 제가 내립니다.”

“하여간 산통 깨는 데는 선수야. 선수.”

캐서린은 본인의 취향대로 짙은 향의 꽃차를, 딜런은 진한 커피를, 다원과 앤서니는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앤서니가 우유의 반을 마시는 동안 가족들은 즐겁게 일과를 이야기했다. 곧 그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서 티타임은 자연히 마무리되었다.

앤서니가 침대에 눕는 걸 돕고 온 딜런은 다원에게 향했다. 다원은 아직 저녁 식사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딜런은 그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어른들의 눈치가 보인 다원이 눈치를 주며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승리자는 딜런이었다. 다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딜런이 웅얼거렸다.

“정말 어머니 말씀대로네.”

“응?”

“우리 집에 새아가가 들어왔어.”

하마터면 다원은 어머니의 소중한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간신히 찻잔을 붙잡은 다원이 말을 더듬거렸다. 비눗물이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 뭐, 뭐라고 했어요? 새…… 뭐?”

딜런은 얼른 수건을 가지고 와 물을 닦았다. 캐서린이 아침에 보면 불호령이 떨어질 수도 있는 중대 사태였다.

“이런, 우리 새아가 예쁨과 동시에 미움받겠네.”

다원은 손에 힘이 쭉 빠지려는 걸 간신히 버텼다. 딜런도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다원의 손에서 떨어질 것 같은 컵을 잡으려 두 손을 내민 그는 불안했던지 아예 컵을 싱크대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오, 다원. 제발 집안의 평화를 위해 설거지에 집중해 줘요. 아니다. 그냥 내가 할게. 새아가는 저기 식탁 의자에 앉아 쉬어요. 크크크.”

“딜런!”

얼굴이 벌게진 다원은 얼른 그릇 정리를 마쳤다. 그러곤 딜런의 손을 잡고 그의 방, 아니 이젠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딜런은 그가 이끄는 대로 저항 없이 따라 들어갔다. 다원은 부모님 방을 힐끗 쳐다보고 얼른 방문을 닫았다.

부모님의 기척을 살피는 듯 잠시 귀를 기울인 다원이 딜런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러니까 우리 정말 신혼부부 같아. 이제 막 결혼해서 부모님 눈치 보며 사랑을 나누는 신혼부부.”

끌어안으려는 딜런을 다원이 제지했다. 다원은 목소리를 낮춰 딜런에게 물었다.

“전부터 확실히 해야 했어. 어영부영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이참에 확실히 해 두자. 부모님이 알아?”

“뭘?”

“당신과 나 사이.”

“당연하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분이신걸.”

“아니, 그러니까 확실하게 아냐고. 당신과 내가 게이 커플이라는 거. 가족들한테 제대로 커밍아웃 한 거야?”

“아니.”

‘청개구리 7살짜리 애도 아니고 정말!’

다원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딜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뭘 그런 걸로 심각하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안 해도 다 알고 계시던걸.”

“언제?”

“글쎄? 하도 오래전 일이라……. 그냥 아시던데.”

다원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없이 고개만 도리도리하는 그를 보고 딜런은 이제 조금 심각해지기로 했다. 더 까불다가는 접근 금지령을 내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졸업하고였나? 아무튼 그때 애인이랑 집 뒤편에서 키스를 하다가 들켰어.”

“뭐?”

“나도 당황했어. 그냥 키스도 아니었다고. 남자애랑 집 뒤에서 키스하다 들켰을 땐 조금 겁이 나더라. 참고로 그때 난 아직 덜 자란 애였어.”

남자애와 키스하다 들킨 사실보다도 자기가 겁을 먹었다는 데 중점을 두고 말하는 딜런을 보며 다원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는 너무 덤덤하셨어. 내가 더 놀랐지.”

‘그녀라면 그럴 수도…….’

그제야 다원도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으셨지. 그러곤 부엌 뒷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 뒷문 알지? 계단 쪽에 있는 그 문.”

“응.”

“난 걔를 보내고 심호흡을 했어. 말소리가 들리는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부모님은 아무렇지 않게 과일을 깎아서 드시고 계시더라고.”

“알고 계셨구나.”

“응. 물어봤더니 두 분은 내가 깨닫기 전부터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었대. 내가 처음 사귄 애라며 여자애를 데리고 왔을 때 오히려 놀랐다고 하더라고.”

“하!”

다원은 너무 어이가 없으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는 말을 경험했다.

“우리 엄마 아빠 멋지지?”

“응. 정말 대단해. 어느 부분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네가 처음이야.”

“응?”

“우리 집에서 밥 먹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잠자는 거.”

“…….”

“그러니까 다원 씨, 자자. 내일은 하던 거 마저 다 하고 가게 가 봐야죠.”

그러나 다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딜런은 의아해하며 말을 이었다.

“이젠 평일엔 혼자 가게 볼 수 있지? 난 고기 잡으러 나가야 해. 너무 오래 안 나가면 자리도 뺏기고 감도 잃고 자식들이 나를 우습게 본다고.”

다원은 대체로 부드럽고 순했다. 그래도 딜런이 바다에 나가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 싫은 내색을 해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그는 여전히 멍해 보였다. 아니, 조금 부끄러워 보였다.

‘왜? 설마 처음이라고 해서?’

“설마?”

“…….”

“진짜야?”

딜런이 정말이냐는 듯 씩 웃었다. 다원은 돌아누우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제 자요.”

‘세상에, 정말 부끄러워하네.’

딜런은 다원을 꽉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이러기야? 네 신랑 여기 있잖아. 안아 줘.”

“…….”

다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딜런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방 안에 든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부끄러움에 붉게 물든 다원의 귓바퀴와 목덜미를 비춰 주었기에.

* * *

성수기라고는 해도 평일 오전이면 딜런의 카페는 정말 한가했다. 회계 일도 미리 해 두어서 할 것도 없었다. 손님도 없었고 길을 걷는 사람도 없었다.

다원은 가게와 부엌도 한 번 더 점검하고 가게 앞 작은 벤치에 나와 앉았다. 다원이 가장 좋아하는 사색의 장소였다. 딜런의 가게는 어두운 편이었는데, 다원도 통나무와 노란색 작은 전구로 꾸며진 빈티지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다원은 기지개를 크게 폈다.

“으아아아. 사람은 햇볕을 쬐어 줘야 해. 광합성을 해야 튼튼해지지. 몸도 마음도.”

이곳은 키가 큰 나무들에 햇살이 적당히 가려져 햇볕 바라기를 하기에 딱 좋았다. 두 줄로 나란히 선 나무들 사이 옅은 황토색의 흙길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다원이 양쪽 엄지와 검지를 ‘ㄴ’ 자로 만들어 어긋나게 맞대고는 네모 프레임을 만들었다. 손가락 프레임 안의 풍경은 작은 수채화 그림 같았다.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리고 싶을 정도였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려고 해도 안 될 것 같아.”

경사도 가파르지 않고 길도 그리 험하지 않았다. 큰길을 놔두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했다. 그러니까 큰길에서 가게까진 인적이 뜸하고, 가게 너머로는 사람이 많은 참 이상한 풍경이었다. 자연히 딜런의 가게는 관광객들보다는 이곳 주민들의 이용이 잦았다. 꾸준히 오는 마을의 단골손님도 꽤 되었다.

게다가 딜런은 커피콩을 정말 좋은 걸로 아끼지 않고 사용했다. 커피에 대해선 문외한인 다원이 보기에도 그랬다. 커피를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마시러 오는 것은 당연했다.

다원은 그 커피를 한 잔 들고 벤치에 앉았다. 어제 나눈 잡다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나른해지고 있을 때였다. 타박타박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거칠면서 빨랐다. 웃기게도 딜런의 카페 단골손님과 통조림 공장 직원들의 면면은 거의 겹쳤다. 그래서 웬만한 인기척에는 익숙한 다원이었지만 이번엔 생소했다.

관광객이 올 만한 방향은 아니었다. 가벼운 걸음 소리로 보아 또래의 젊은 사람일 것 같았는데, 이 마을에 다원의 또래는 드물었다. 마을엔 대부분 50대 이상의 부부들이 거주했다. 주말이나 명절이 아니면 그들을 찾아오는 자식들도 드물었다. 다원은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아…….”

정말 다원의 또래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남자가 오솔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간편한 차림을 한 그는 이 길이 익숙해 보였다.

처음에는 고향에 들른 사람인가 했다. 그러나 점점 가까이 오는 그를 보자 카페에 온 손님인가 싶었고, 더 가까워지자 어떤 확신이 들었다.

‘딜런을 알고 있겠구나.’

다원의 짐작은 정확했다.

“안녕하세요. 딜런이 고용한 사람이 당신인가 봐요?”

“……네. 딜런을 아시나 봐요.”

다원은 벤치에 커피를 내려놓고 일어나 그와 마주했다.

“어쩌죠? 딜런은 지금 바다에 나가 있는데요.”

“알고 있어요. 그냥 산책 나온 김에 들른 거예요.”

키는 딜런만큼 큰 것 같았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얇실한 얼굴을 가진 미남자였다. 깔끔하게 자른 머리 스타일이 그를 더 밝고 스마트하게 보이게 했다. 얼굴에 스며든 자연스러운 미소 역시 그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다원은 그가 주문한 라테를 위해 우유를 꺼내고 있었다. 그동안 남자는 달랑 네 개 있는 테이블 사이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천장과 벽에 걸려 있는 작은 전구, 유리병과 철사로 만든 조형물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다원이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커피 위에 올릴 때 그 남자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이건 달지 말라고 했는데……. 하여간 고집불통.”

“윽! 뜨거워.”

뜨거운 우유 거품이 다원의 엄지와 손등이 이어지는 부분에 조금 튀었다. 아주 조금인데 다원은 손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다원의 행동이 호들갑스러웠던지 남자의 타박 같은 걱정이 들려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가 봐요?”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그런데도 딜런이 가게를 맡길 정도면 꽤 믿나 보죠?”

“…….”

“이상하다.”

남자는 다원이 잔을 건네주기 전에 잔의 손잡이를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음.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의 윗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이 야했다. 그 하얀 거품을 핥은 붉은 혀가 입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말이 뱉어졌다.

“앞으론 우유를 조금만 적게 넣어 보세요. 커피의 깊은 맛이 우유에 너무 가려지니까.”

‘저 혀. 확 뽑아 버렸으면 좋겠다.’

얇고 옅은 분홍색의 입술 안에서 움직이는 붉은 혀가 미웠다. 다원은 대답 대신 우유 거품이 조금 남은 컵을 싱크대에 부어 버리고 기계의 세척 버튼을 눌렀다. 손님이 많을 때야 한 타임 끝날 때마다 하지만 평일엔 그냥 다원 맘대로 했다.

‘기분이 더러워서 다 씻어 내려야겠어. 모조리 다.’

남자는 분명 다원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원은 좁고 어두운 카페 안에 함께 있는 남자의 존재가 너무 신경 쓰였다.

‘나가 달라고 해야겠다. 내가 나가든지.’

그때 단골손님들이 한 번에 몰려와 다원은 정신이 없이 움직여야 했다.

“다원 군. 난 따뜻한 라테.”

“난 시원한 아이스.”

“난 깔끔하게 아메리카노.”

“난 에스프레소.”

주문도 참 각양각색이었다. 그나마 다원보다 가게에 더 익숙한 그들인지라 알아서 물을 가져다 마시고 커피가 나오면 알아서 가져갔다. 다원은 커피 뽑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제 제법이야.”

“응. 내 입에 아주 딱이야.”

“우리 다원이 친구가 공부를 아주 잘했다더니만 커피도 금세 배우네.”

“공부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정성이지.”

“딜런이 어디 호락호락한 녀석인가.”

“그렇지. 딜런이 이렇게 가게를 맡길 정도면 다원도 보통은 아니라는 거 아냐. 안 그래?”

다원은 아직도 그들의 수다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가게를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감 놔라 배 놔라 훈수를 드는 건 예삿일이었다. 너무 격의가 없는 그들의 참견은 예의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딜런의 공장 직원이고 가게의 단골이며 마을의 터줏대감들이었다. 아무리 취미로 한다지만 사장님의 영업장이었다. 깽판을 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구나 다원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사원이었다.

다원은 그들의 까다롭고 다양한 요구 사항을 일일이 노트에 기록하며 그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도 그때 마신 커피 때문에 예민해진 위가 쓰라려.’

그들도 다원의 노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딜런의 카페 지킴이인 다원에게 꽤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다. 오늘 처음 온 젊은 손님은 예외인 듯했지만.

“그런데 손님 접대하는 자세는 아직 좀 서툰 것 같죠?”

커피 머신을 세척하던 다원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가게 안의 왁자지껄하던 말소리도 함께.

* *

손님, 케빈의 연인이자 학교 후배였던 딜런은 정말 멋진 남자였다. 아직 16살밖에 되지 않았던 그는 이 동네에서, 아니 보스턴에서 가장 멋진 남자였다. 여기로 관광 오는 남자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딜런은 밧줄 당길 힘이 생긴 때부터 앤서니의 작은 고깃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나갔다. 앤서니는 약간 괴상한 구석이 있는 노인네였다. 큰 배와 요트들과 통조림 공장을 소유했으면서도 낡고 작은 고깃배를 몰아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바다로 나갔다. 본인만 그러면 될 것을 아들을 꼭 데리고 나갔다.

처음부터 딜런이 앤서니와의 고기잡이를 즐겼는지는 케빈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는 그도 즐긴 것이 확실했고 또 유명했다.

케빈과 딜런이 다닌 학교는 중,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학교였다. 그날은 중, 고등학교 입학식과 개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케빈은 고등학생이, 딜런은 중학생이 되었다.

케빈이 볼 때도 이제 막 입학한 중학생 딜런의 외모는 훌륭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딜런은 새하얗고 고운 피부를 자랑하는 미소년이었다.

그런데 겨우내 배를 탔다더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난해 겨울 이후 처음 본 딜런은 더 이상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태닝이라도 한 것처럼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금발의 곱슬머리는 더 밝아 보였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금실이 날리는 것 같았다. 키는 훌쩍 자랐고 어깨는 각이 져 떡 벌어져 있었다. 그 어깨에 멘 가방끈을 쥔 손등엔 푸른 핏줄이 선명했다.

딜런은 학교 정문을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헐렁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삐딱하게 멘 모습이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쟤가 언제 저렇게 키가 컸지?”

케빈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쟤네 아빠도 키는 크잖아. 물론 덩치도 크지만.”

“쟨 키는 아빠 닮았고 날씬한 건 엄마 닮았나 봐.”

“생선 비린내만 아니면 어떻게 좀 해 보겠는데.”

“꿈 깨라. 쟤가 너 같은 애 상대나 해 준다디?”

“이게 뭐라는 거야? 누가 생선 비린내 나는 앨 상대해 준대?”

“아하, 그러셔? 걱정 마. 저기 봐, 중딩 여자애들. 쟤한테 빠진 거 안 보이냐? 너한테는 눈길도 안 줄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

“…….”

옆에서 떠드는 여자애들의 소리가 아니라도 케빈도 다 보고 있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할 것 없이 모두들 딜런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에 깃든 감정은 호감, 호기심 등등 다양했지만, 그중 가장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미숙한 남자아이들의 적의였다. 특히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치기 어린 시기가 대단했다.

“어이, 바다의 아들 딜런!”

“네가 그 비린내 나는 딜런이냐?”

“새끼! 키는 제법 큰데?”

“떡대도 좋네.”

“떡대만 좋냐? 인물도 좋네. 여자애들이 나불거릴 만하구만.”

“그러면 뭐 하냐? 비린내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

이죽거리는 고등학생들에게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딜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날이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자 어린 남자애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 딜런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햐, 이 자식 봐라?”

“눈 안 까냐?”

“안 되겠다. 곱게 보내 주려고 했더니……. 어?”

“억!”

“뭐야, 이 자식이! 으악!”

그들은 당연히 혈혈단신의 어린 딜런이 물러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지난겨울, 딜런이 맞서 싸운 겨울 바다가 얼마나 혹독하고 잔인했는지.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그를 몰아세웠는지.

딜런은 중학교 입학식 첫날, 그를 ‘비린내 나는 딜런’이라고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전무후무하대.”

“뭐가?”

“입학식 날 정학 맞은 놈은.”

“여자애들이 이 정도로 좋아해 주면 나도 그래 보고 싶다.”

“행여나 시도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넌 그냥 엿이나 먹고 말걸.”

“야!”

일주일 후 그는 똑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생선 비린내를 단 채 등교했다. 그러나 그가 학교 정문을 지나 잔디밭 사이를 지나가도 아무도 그를 ‘비린내 나는 딜런’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처음 케빈은 그저 딜런을 지켜보기만 했다. 본인이 게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작은 동네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집집의 아침 메뉴를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좁은 동네에서 그의 성적 지향은 특별해도 너무 특별했다. 케빈은 아직 고등학생 1학년인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하지만 딜런이 케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 순간, 케빈은 생각이 달라졌다. 본인이 게이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게이가 아니었다면 그는 딜런이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딜런이 16살이 되는 해였다. 둘 다 십 대 소년들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문제 되지 않았다. 딜런은 바다 사나이가 얼마나 거칠고 거침없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케빈은 딜런이라는 작지만 거친 바다에 속절없이 휩쓸려 버렸다.

작은 동네였다. 그 집에 숟가락이 몇 개고,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모르는 집이 없었다. 어젯밤 부부 금슬이 좋았는지 어떤지까지 모두 공유했다. 숨길 수도 없었고 숨기려는 사람들도 없었다. 어느 누구든 다 그러했다.

더구나 그 당시 딜런에게는 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다음 날 학교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 케빈과의 일도 당연했다. 오히려 딜런과 케빈이 사귄 지 6개월 후에나 소문이 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딜런은 당황하지 않았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케빈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린 딜런이 케빈을 위해 해 줄 수 있었던 최대한의 배려라는 걸. 그도 당연한 것이 케빈은 딜런보다 겨우 3살 많을 뿐이었다. 그는 아직은 미숙한 나이였다.

19살, 그 나이의 고등학생 남자들은 혈기왕성했다. 짓궂었고 호기심도 많았다. 남자가 되어 가는 걸 자랑스러워할 때였다. 그 속에서 케빈은 폭풍 속에 요동치는 작은 돛단배였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치이며 부서졌다.

케빈은 졸업을 6개월도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를 그만뒀다. 딜런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큰 배를 타기 위해 마을을 떠났다.

그러는 동안 다른 아이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 넓은 세상으로 나갔다. 딜런이 다시 돌아왔을 땐 케빈은 동네를 떠난 뒤였다. 그들의 일을 문제 삼는 이들은 없었다.

“딜런, 오랜만이야.”

“네.”

“배는 탈 만했어?”

“그냥 그렇습니다. 먼저 가 볼게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딜런은 조금 변해 있었다. 앤서니는 조심스럽게 캐서린에게 물었다.

“딜런이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이제 저 아이도 20댄걸.”

“철이 좀 들려나.”

“철은 이미 당신보다 훨씬 들었어요.”

“케빈은 연락이 있나?”

“걔를 여기서 왜 찾아, 이 양반이.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아니, 내가 뭘……. 큼큼.”

딜런은 떠나기 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제 위치를 확실히 알고 있는 그는 어른이 된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의 태도 덕분이었다. 딜런의 부모님은 아들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사랑을 보여 주었다. 그 디딤돌 위에서 딜런은 그의 몫을 거뜬히 해냈고 가족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캐서린도 이제 좀 편해져야지.”

“그래야지.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 심했어.”

“그러게.”

“여기에 정 붙일 게 있으면 좋은데…….”

“저 녀석의 방랑벽을 누가 감당해 내나. 조금 더 기다려 봐야지.”

“놔둬. 그것도 젊어서 그래야지, 나이 들면 하지도 못해.”

“나이 들어서도 그러면 어떡하라고! 누구 죽어나는 꼴 보라고?”

“그러니까 젊어서라 그러지. 얼마나 보기 좋아. 생기가 넘치잖아.”

“그런가…….”

“그래. 젊으니까 아직은 괜찮아.”

한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딜런은 자식이었다.

그들의 걱정대로 딜런의 방랑벽은 그 후로도 여전했지만 그것이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 동네 주민들에게 변화무쌍한 딜런이 생활의 작은 활력소가 되는 듯했다.

* * *

푸쉬쉬쉬쉬.

커피 머신 세척 소리에 케빈의 긴 상념이 끝났다. 카페 안은 여전히 동네 터줏대감들의 잡담 소리로 가득했다.

“저 녀석 방랑벽을 잡을 놈이 누군지 한동안 내기하고 그랬지, 아마?”

“아마는 무슨 아마. 자기가 제일 적극적이었으면서.”

“난 저 언덕 너머에 사라가 그를 들어앉힐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이고. 이 눈치 없는 양반이 아직도 그 일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었나?”

“다 지난 일이야. 사라 아들이 올해 유치원에 들어가요. 다들 입조심 좀 하세요.”

“암, 암. 그 아이가 제 엄마를 닮아 성질이 보통이 아니야. 아주 당차.”

“그러고는 저기 아랫마을 마리아랑 좀 오래갔지.”

“아니야, 톰이랑 오래갔지. 션이던가? 어이, 자네. 가게에 잠깐 일했던 녀석 이름이 뭐였지?”

“서니잖아, 서니. 나의 태양.”

“크하하하. 맞아, 맞아. 그 녀석도 대단했었지.”

“나는 그때 아예 살림을 차리는 줄 알았지 뭐야.”

“에이, 딜런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 그때 딜런은 또다시 배 탈 준비를 하고 있었는걸.”

“그 바람에 서니가 갑자기 일을 그만둬서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그때만 생각하면 내가 아주 진절머리가 나.”

“아, 생각났다. 그때 자네 허리 다친 건 좀 어때?”

“어떻긴. 평생 마누라 눈칫밥 먹고 지내는 거지, 뭐. 크흠.”

다원은 이제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화려하다 못해 현란한 딜런의 연애사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드르륵. 갑자기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다원은 놀라 뒤돌아섰다. 건성건성 하는 것 같아도 딜런은 생각보다 이 가게에 애착이 많았다.

오래된 가게는 이미 많은 상처로 가득했다. 작은 상처 하나를 보태도 티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딜런은 달랐다. 그와 가게는 마치 한 몸 같았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딜런은 가게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렸다. 특히나 새로 난 흠, 아주 작은 상처는 더 그랬다.

그런데 저렇게 의자를 심하게 끌었다면 분명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스크래치가 심하게 났을 것이다.

‘보호 패드가 있을 텐데…… 벗겨진 건가?’

“아…….”

없었다. 이건 명백하게 카페의 하나뿐인 직원, 다원의 잘못이었다.

‘수시로 점검했어야 했는데…….’

다원은 그 의자에서 일어난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는 바로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지가 왜 화를 내? 어쭈. 왜 째려보고 난리야! 뭐!’

그 젊은 남자는 화가 엄청 나 있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단골손님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던 그는 이젠 다원을 째려보고 있었다. 물론 어르신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본인들의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띵.

마침 전자레인지의 알림이 울렸다. 동시에 빵의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허니 브레드가 너를 살린 줄 알아라. 아우. 진짜 별 시답잖은 자식 때문에……. 저 스크래치를 어떻게 없애지?’

전자레인지 안의 빵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다원은 일단 집중하기로 했다.

‘또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어. 난 너처럼 아마추어가 아니라고!’

다원이 허니 브레드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어르신들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내가 전에 다원이 친구가 저걸 먹는 걸 못 봤더라면 어쩔 뻔했어. 이 맛난 놈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고 죽을 뻔했잖아.”

“하여간 자네는 애가 먹는 걸 가지고.”

“그건 아니지. 가게에서 먹고 있었는걸. 그럼 우리도 당당히 먹을 권리가 있다구.”

“에그. 말이라도 못 하면.”

“어쩐지 그때 가게 앞을 한번 지나가고 싶더라고. 그런데 다원이 친구가 이 녀석을 어찌나 맛나게 먹고 있던지. 손가락까지 쪽쪽…….”

“헉!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뭘. 회계 장부도 멀찍이 치워 두고 아주 정신없이 맛나게 뜯어먹고 있던데.”

“내가 정말……. 딱 한 번이었다구요. 하필 그날 그 시간에 지나가실 건 뭐예요?”

“그래서, 이 늙은이들에게 빵 쪼가리 하나 만들어 주는 게 그렇게 싫어?”

“으윽.”

노인네들이 일제히 다원을 쳐다봤다. 그 처량한 눈빛 공격에 다원은 백기 투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말을 말자, 말을 말아. 가게에서 장부 정리하고 빵 뜯어 먹은 내가 죄인이지.’

결국 허니 브레드는 이 가게 유일의 디저트 메뉴가 되었다. 물론 다원이 출근하는 날 한정이었다.

다원은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허니 브레드 위에 하얀 슈거 파우더를 뿌렸다. 주문한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꿀과 초코 시럽도 잔뜩 뿌리곤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휘핑크림을 올리기 위해 휘핑크림 통을 아래위로 마구 흔들 때였다.

“……아직도 남 이야기나 해 대는 당신 같은 사람들! 정말, 정말 진절머리가 나!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땡그랑! 챙! 챙! 데구르르르르.

다원의 손을 떠난 휘핑크림 통이 마루에 떨어져 굴러가는 요란한 소리가 카페 안을 울려 퍼졌다. 다원의 현 남친의 전 남친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휘핑크림 통은 아직도 바닥 어딘가를 구르고 있었다. 다원은 얼른 그것을 찾기 위해 바닥을 살폈다.

‘아니. 이 빌어먹을 통은 어디 간 거야? 흰색이라 안 보이는 게 더 어렵겠구만.’

좁은 부엌을 아무리 찾아도 휘핑크림 통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딸랑.

다원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하필 이럴 때 손님이라니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원. 이렇게 날 적극적으로 환영해 주지 않아도 돼.”

딜런이었다. 다원은 차라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전 애인을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라는 사이, 딜런은 문 앞까지 굴러간 휘핑크림 통을 주워들었다.

딸가닥딸가닥.

가게엔 한동안 딜런이 휘핑크림 통을 흔드는 소리만 가득했다. 부엌 바닥을 기고 있던 다원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딜런을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단골들도 버거운데 현 남친의 전 남친이 찾아왔다. 심지어 현 남친은 오늘 고기잡이도 제대로 허탕을 친 듯 짜증의 아우라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상황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었다. 만일 지옥이 있다면 다원은 바로 지금 이곳인 것만 같았다.

‘아, 어떡해. 스트레스가 마구 치솟네.’

그때 딜런이 느긋하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돼?”

쑤우우우욱. 딜런은 휘핑크림으로 빵을 거의 뒤덮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내 허니 브레드! 딜런! 이게 무슨 짓이야. 휘핑크림은 그저 거들 뿐이라고!”

딜런은 흥분한 다원을 보고 씩 웃었다. 그는 이 동네 단맛 마니아 할아버지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엔 보기 드물게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포크와 나이프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엌으로 돌아오는 딜런이 ‘봤지?’ 하며 제 가슴 앞으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앉아, 앉아. 이거 먹어 봐. 뭘 그렇게 열을 내고 그래.”

“너도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 말고 어여 마저 마셔.”

허니 브레드의 주인인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다른 어르신들이 그 남자, 케빈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사이 딜런은 제 눈치를 살피는 케빈에게는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다원의 뺨에 살짝 뽀뽀했다.

‘바다 냄새.’

딜런의 몸에서는 언제나처럼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겨 왔다. 이윽고 딜런은 샤워를 하러 갔고,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어쨌든 상황은 종료된 건가?’

다원은 고객 수첩을 조용히 꺼내 추가 사항을 적었다.

[휘핑크림 듬뿍(산처럼) 추가, 의자 보호 패드 교체]

카페 안에 원래부터 틀어져 있던 잔잔한 음악 소리가 이제야 겨우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다원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잡아 오는 물고기도 얼마 없는데!”

타닥타닥.

“가게 수입은 커피콩도 겨우 살 정도고!”

타닥타닥.

“통조림도 여기서만 파는데!”

타닥타닥.

“왜 이렇게 일이 많은 거냐고!”

다원은 계산기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으이구. 내가 내 발등 찍었지. 누구를 탓해.”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편 다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가게를 돕겠다, 청소도 같이하자 나서는 바람에 수많은 잡무가 생겨 버렸다. 본 업무를 위해 개인 시간을 투자해야 할 지경이 되니 월말이 다가오는 지금, 회사 유일의 회계 직원 다원은 매일 저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손가락 마디가 시리다고……. 흐윽.”

다원은 잠시 안경을 벗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딜런 왔네.”

“나 왔어.”

딜런과 함께 더운 바다 공기가 같이 들어왔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이거 마시고 해. 오다가 샀어.”

“고마워.”

딜런은 늘 오고 가는 길에 인근 가게에서 파는 걸 사 들고 오곤 했다.

‘오늘은 아이스티 가게 장사가 영 시원찮았나?’

“차 맛이 조금 강해서 그런가?”

다원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딜런은 그런 다원이 대견한 듯이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하곤 맞은편에 앉았다.

“덥다.”

“응.”

다원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장부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타닥타닥.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딜런의 어릴 적 기억 속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 시간에는 이 부엌, 이 식탁에 이렇게 앉아 있었다.

“아…… 행복이란 이런 걸 말하나 봐.”

‘갑자기?’

다원은 슬쩍 딜런을 쳐다봤다. 딜런은 노을을 보고 있었다. 완전히 저문 해가 해수면 위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원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여전히 노을을 보던 딜런이 무심히 말을 꺼냈다.

“궁금하지 않아?”

“응?”

딜런은 케빈이나 지난 연애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다원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리듬을 타고 움직였다. 한 페이지가 다 끝나고서야 얼음이 반 녹은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신 다원이 대답했다.

“궁금하죠, 당연히. 하지만 지난 일이잖아요.”

“그래도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달라질 게 있어요?”

“없어.”

“…….”

‘그런데?’ 하는 다원의 표정에 딜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웃었다. 또 이상한 표정이었다.

“제발 질투 좀 해 주세요. 네?”

이어진 딜런의 말에 다원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하하. 난 또 뭐라고. 어린애도 아니고 지나간 일에 질투는 무슨…….”

“난 할 건데?”

“풋!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제가 여태까지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무슨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에잇! 내가 이놈의 노인네들을 죄다 모아 놓고 혼을 내든지 해야지. 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애라니요. 이봐요, 딜런. 당신 알고 봤더니 상당히 어리던데요?”

“누가 그랬어! 또 그 노친네들이지? 내가 정말 이 노친네들을 모조리 무인도에다 버리고 와야겠어.”

다원은 투덜대는 딜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딜런은 다원보다 어린 나이였다.

“뭐야, 그 눈빛은? 그래 봐야 딱 1년이야!”

“1년 8개월.”

“하!”

“근 2년이라고 하죠.”

“쳇!”

잠시 딴청을 부리던 딜런이 다원의 눈치를 보며 주저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케빈은.”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알게 될 거야. 한동네잖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거보다 내가 말해 주고 싶어서 그래.”

딜런이 다원의 동의를 구했다. 다원도 이 정도까지 애를 쓰는 딜런에게 더 이상 버틸 재간은 없었다. 다원이 들을 준비가 되자 딜런은 담담하게 어릴 적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렸어, 우리 둘 다. 그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때 호기심 반 호감 반이었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어렸다고.”

딜런이 다원의 질책의 눈빛에 봐 달라는 듯 두 손을 모으고 징징거렸다.

“그런데 일이 터진 거야. 좁은 동네니까. 누가 봤는지 모르겠지만 삽시간에 우리 이야기가 퍼져 나갔지. 우리에겐 문제가 될 건 없었어. 그의 부모님도 놀라기는 하셨지만 그뿐이었고. 우리 부모님은.”

딜런은 ‘말 안 해도 알지?’ 하는 눈빛으로 다원을 바라보았다. 다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의 동기들이었지. 내 주변에도 질 나쁜 호기심을 보이는 새끼들이 있었지만 나야 뭐. 하지만 고등학생인 그의 주변은 달랐지. 어설프게 자란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설마…….”

다원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충격은 받았겠지만…… 내가 그 새끼들을 반 정도 죽여 놨지. 그때 나에겐 그게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어.”

“그나마 다행이네.”

둘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각자 생각을 정리했다.

“학교에 가지 않은 건 내 선택이었어. 바다 건너 세상이 궁금했거든. 게다가 마침 그런 일이 있고 나니 이곳에 있기도 싫었어. 아마 아버지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거야.”

딜런은 다원의 곁에 가 그를 안았다.

“그와의 일은 사실…… 내 머릿속에선 사라졌던 일이었어. 아니, 어제까지라고 해야겠네.”

“어련하시겠어요. 워낙 이 동네에 뿌려 놓은 염문이 많으시니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드셨겠죠.”

“하하하. 정말 내가 이 노친네들을…….”

“됐어, 그만해도 돼. 난 정말 아무렇지 않아. 그 사람이랑도 별일 없었어.”

“……정말?”

다원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훗! 물론 그 사람 눈엔 미련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건 그의 몫이고. 또 이런 남친을 둔 내 몫이겠지 뭐.”

“하! 내가 정말 이번엔 정말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 같아.”

“뭐라는 거야.”

다원은 몸을 뒤척였다. 딜런은 더 힘을 줘 안았다.

“그 노친네들이 그러더라고. 나도 몰랐는데, 내가 내 공간에 누굴 들여놓는 건 처음 본대.”

“…….”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마을에 머물러 있는 것도 처음 본다더라.”

“그래 봐야 지난겨울 한국에서 봤을 때부터 고작…….”

“난 중학교 졸업한 뒤론 3개월 이상 이 마을에 있어 본 기억이 없어. 그들에게 넌 정말 대단해 보일 거야. 내가 정말 임자를 제대로 만나긴 만났나 봐. 나도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몰랐으니까.”

다원은 고개를 숙였다.

‘아씨. 분명히 붉어졌을 거야.’

그 어설픈 몸짓에 딜런의 가슴은 또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 * *

“하아. 딜런…….”

딜런은 거품이 잔뜩 묻은 타월로 다원의 몸을 구석구석 씻겼다. 물론 그의 몸에도 거품이 한가득이었다.

“완전 좋은데? 이렇게 미끈거리니까.”

“흐으.”

철퍼덕! 딜런은 타월을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치고 다원을 끌어안았다. 둘은 이리저리 몸을 비볐다. 다원의 배에 닿아 오는 딜런의 것이 점점 힘을 더해 갔다. 딜런은 다원의 아랫배며 허벅지에 제 것을 꾹꾹 눌렀다. 다원도 반쯤 일어난 아래를 손으로 잡고 딜런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딜런은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다원에게 딱 적당한 정도의 사랑을 해 주었다. 다원이 지치지 않을 만큼만, 배가 불러 나른할 만큼만, 기분이 좋아 딜런에게 그 사랑을 되돌려 주고 싶을 만큼만 적당히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지금도 그랬다.

“딜런. 너무 좋아, 이런 느낌…….”

딜런은 그의 날씬한 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스스로 만지고 있는 그의 손 위에 아랫도리를 바짝 가져다 댔다. 다원은 그의 바람을 알아차리고 둘의 것을 양손으로 같이 잡아 살살 만졌다.

“흐으음.”

딜런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다원의 입술을 찾았다. 다원은 얼른 입을 벌려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입 안으로 파고드는 딜런의 따뜻하고 두툼한 혀를 빨아 당기며 다원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하아아. 딜런.”

딜런이 허리를 조금씩 들썩이더니 다원을 돌려세웠다. 다원은 타일 벽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엉덩이 사이에 비벼지는 그의 것이 뜨거웠다. 미끄덩거리는 느낌에 다원의 허리가 절로 움직였다.

“그렇게 좋아?”

“짓궂어.”

딜런은 다원의 엉덩이에 아래를 조금 더 밀착시켜 그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다리를 조금 굽혀 아래에서 위로,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작은 구멍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찔렀다.

“아아, 딜런. 딜런.”

타일 벽에 머리를 대고 다원은 신음을 흘렸다. 딜런이 샤워기를 빼내 따뜻한 물을 틀어 비누 거품을 조금 씻어 냈다. 딱 붙어 있는 딜런의 아래와 다원의 엉덩이 부분만 비누 거품이 씻겨 내려갔다.

“와, 내가 본 것 중에 최고야.”

다원이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았다.

“헉.”

힘이 바짝 들어간 다원의 엉덩이 골 사이로 붉게 달아올라 있는 딜런의 귀두가 빼꼼히 나와 있었다. 딜런은 참지 못하고 아직은 꽉 다물려 있는 다원의 작은 구멍 안으로 머리를 밀어 올렸다. 빡빡했다.

“으윽, 아파……. 딜런. 흐으으으.”

“미안.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흐음.”

딜런은 다원의 엉덩이 골 사이며 허벅지 사이를 들락거렸다. 손은 젤을 찾기 바빴다.

‘이 어디쯤…….’

간신히 젤이 손에 잡혔다. 젤 뚜껑을 여는 소리에 다원은 타일 벽에 얼굴과 가슴을 댔다. 상체에 힘을 줘 버티며 허리를 에스 자로 만들었다. 엉덩이를 조금 뒤로 빼며 양손을 돌려 엉덩이를 벌리자 딜런은 훤히 드러난 그곳에 아래를 바짝 들이대고 젤을 쭈욱 짜 버렸다.

“윽, 차가워.”

“이런, 너무 많이 짰어. 미안.”

적당히 달아오른 딜런은 다정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몸을 맡겨도 상관없었다. 알아서 기가 막힌 쾌락을 가져다주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없이 달아오른 등 뒤의 남자는 위험했다. 잔잔했던 바다는 얼마든지 사나운 파도를 일으켜 거칠게 휘몰아칠 수 있었다. 그걸 아는 다원은 기다리지 않았다. 임무를 다한 젤 통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그가 폭발해 버리기 전에 먼저 그의 것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엉덩이 사이에 잘 끼워 허리를 움직였다.

“으으윽.”

딜런은 다원이 통통한 엉덩이를 모아 쥐고 아래위로 움직이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젤 통 따위는 이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의 가지런한 척추가 잘 엮어 놓은 진주알같이 반짝였다.

“하아. 점점 뜨거워져, 딜런.”

“다원, 하아.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건데. 응?”

딜런이 그에게 바짝 붙어서 골반을 잘 잡았다. 그다음 회음부부터 쭉 훑어 구멍을 지나 엉덩이 골 사이까지 올라갔다.

“으으으.”

단단한 딜런의 것이 아래를 쭉 훑고 지나가자 다원의 온몸에 일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다원이 느끼기에도 아래 구멍이 미친 듯이 오물대고 있었다.

‘딜런은 날 어떤 얼굴로 보고 있지?’

문득 궁금해져 뒤돌아본 다원은 그 선택을 후회했다. 딜런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옆으로 틀고 있었다. 미간을 조금 구긴 그의 얼굴에 다원은 그만 쌀 뻔했다. 방정맞은 아래를 급하게 손으로 잡으며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완전 야해.’

조금 그을린 딜런의 옆모습이 열에 들떠 있었다. 넘실거리는 금발에 가려진 그 얼굴은 지금 안으로 들어오는 단단한 그의 것보다 백배 천배는 더 아찔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원은 제 아래가 미친 듯이 움찔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으윽. 다원.”

“하아, 딜런. 으으.”

“넌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들어.”

그건 제가 할 소리라고 다원은 생각했다.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단단한 그가 너무 황홀했다. 다원은 몸을 온전히 덮어 부드럽게 안아 오는 그의 따뜻한 체온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매달리며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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