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바윗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모여 있는 길로 들어섰다. 다원은 시간부터 확인했다. 아직 차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었다.
따뜻한 게 마시고 싶은데 문을 연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관광객들이 보온병에 든 음료를 같이 온 일행과 나눠 마시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역시 함께할 사람이 있으니 보온병을 챙겨 올 생각도 하는구나. 나도 전엔…….’
그때 다원이 아는 것보다 낮고 선명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할래요?”
“아.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다원은 혹시나 문을 연 가게를 놓쳤나 하고 두리번거렸지만 역시나 갈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연 데가 없는데…….”
“저희 집에서요.”
“네?”
남자의 뜻밖의 말에 다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 정색을 하는 반응이 의아한지 그런 다원을 남자도 똑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집에 가자니……. 아! 혹시 이 사람은 여기 사나?’
그제야 남자가 현지인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 다원이 어색하게 말했다.
“전 여기가 관광지라 당연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관광객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 네에.”
‘그렇다 해도 낯선 사람한테 다짜고짜 집에 가자니? 이 남자 뭐지?’
다시 다원이 정색을 하자 남자가 이제는 왜 그러는 줄 알겠다는 듯 씨익 웃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과 같은 가게가 여기 있죠. 가시죠.”
남자는 큰길에서 갈라지는 샛길 쪽으로 찡긋 눈짓을 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는 금세 멀어졌다. 다원도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길 한가운데서는 더 이상 잠시도 서 있고 싶지 않았다. 또 뜨거운 것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인적이 드물기는 해도 관광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괜찮겠지?’
하지만 남자는 점점 외진 곳으로 걸어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원의 발걸음이 그에게서 멀어졌다.
남자는 어느 작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아담한 통나무집 스타일의 카페였다. 멀쩡한 앞문을 놔두고 뒤쪽으로 가는 그를 다원은 멀찍이 떨어져 바라봤다. 남자는 그런 다원의 모습에 갑자기 헛웃음을 삼켰다.
“아…… 하하. 앞문을 열어 놓으면 벌떼처럼 몰려오는 인간들이 있어서요. 들어오시죠.”
너무 추웠던 탓에 다원은 여태껏 경계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차단된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그는 카운터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난로를 틀어 주었다. 그러고는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제법 두툼한 담요를 들고 나와 다원의 무릎에 잘 펴서 올려 주었다.
‘체이스…….’
살뜰하게 챙겨 주는 남자를 보자 체이스가 자꾸 겹쳐졌다. 다원은 난로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때 갑자기 어깨에 묵직한 것이 얹어졌다. 남자의 온기가 밴 코트였다.
‘윽. 따뜻함이 너무 흘러넘쳐.’
“그렇게까지 추운 건 아닌데…….”
“아니긴요. 난로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간절한 눈인데.”
“하지만 당신도 춥잖아요.”
“딜런. 딜런 러버(Lawver)예요.”
“Love?”
순간 다원은 연인(Lover)이라고 생각했다. 흘려서 빠르게 말하는 그의 발음이 부정확해서이기도 했다.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다원은 난로에서 시선을 옮겨 남자, 딜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묘했다.
‘아, 설마 또 생각나는 대로 그냥 내뱉은 거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온 여행인데 넘쳐나는 생각이 주체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다원은 속으로 혀를 차며 얼른 자기소개를 했다.
“죄송해요. 제 이름은 다원, 하다원이에요.”
“다원. 예쁜 이름이네요.”
“당신도요, 딜런.”
“설마요?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붙은 이름일 뿐인 걸요.”
다원은 그냥 배시시 웃어 버렸다. 그러고도 딜런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뭔가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다원은 별로 떠올린 적 없던 제 이름의 뜻을 덧붙였다.
“제 이름은 한국말로 모두가 다 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데, 그건 잘 모르겠네요.”
설명을 듣고 싶었던 게 맞았는지 딜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돌아서 커피 머신으로 향하며 물었다.
“왜요? 이름의 뜻대로 그런 것 같은데…….”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듣고 싶어 하는 듯한 그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다원은 평소답지 않게 불쑥 대답을 꺼냈다.
“아니에요. 나를 정말로 원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충동적으로 말해 놓고 그는 곧바로 후회했다.
‘미치겠네. 난로 불빛에 홀렸나. 정신 차려!’
다원의 얼굴은 난로보다 더 빨갛게 익어 갔다. 커피를 내리는 요란한 소리와 짙은 커피 향이 좁은 가게로 퍼져 나갔다. 커피를 준비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못 들었나? 다행이다.’
곧 부드러운 거품이 반짝이는 커피가 가득 담긴 잔이 다원에게 내밀어졌다. 투박한 모습이 매력적인 두꺼운 도자기 잔이었다. 생각보다 꽤 묵직한 무게에 다원은 두 손으로 커피 잔을 받았다. 딜런은 작은 간이 의자를 그의 옆에 당겨 주었다.
‘역시 자상한 남자네.’
다원은 의자 위에 커피 잔을 조심히 올려 두었다. 그동안 딜런은 뜨거운 커피를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있었다.
“향기만으로도 몸이 사르르 녹네요.”
딜런이 커피 향만큼이나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비시즌에도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비시즌?”
“관광지기는 하지만 여긴 12월부터 3월까지는 관광객 상대를 하지 않는 거 몰랐죠?”
“아, 그래서…….”
“대부분 영업을 안 하죠. 문이 열린 가게는 이 동네에 사시는 분이거나 집이랑 가게가 같이 있는 곳이고요.”
평일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조용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된 다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거듭된 우연으로 마주친 딜런이 이제는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다원의 입에서 또다시 생각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그럼 딜런도 여기에 집이 있나요?”
딜런은 엄지로 등 뒤를 가리켰다. 다원은 고개를 쭉 빼서 그의 등 뒤를 살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작은 계단이 보였다. 2층이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다원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딜런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던지 다원의 커피는 거의 다 식어 가도록 그대로였다. 그동안 둘의 이야기도 길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에서 여기를 왔어요? 그것도 혼자? 여기가 아무리 알려진 관광지라지만. 아, 혹시?”
“유학생이에요. 4년째죠.”
“어쩐지. 영어가 유창하더라니. 그럼 한국에서 만났던 곳이…….”
“아, 제 집은 그쪽이 아니에요. 저도 잠시 볼일 때문에 간 거였어요. 아니, 사실 정리를 하러 갔었는데요.”
“‘갔었는데요’라……. 이젠 상황이 달라졌나 보군요.”
“한국 집을 정리하고 미국에 정착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전 한국에서 살아야 할 운명인가 봐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요?”
“아무래도 취직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요.”
“취업이라면 혹시 비자 때문인가요?”
“네. 원래라면 재계약을 할 수 있었겠지만 조금 문제가 생겨서요. 아무래도 학생 비자가 끝나기 전에 취업 비자를 받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저런…….”
딜런의 안타까움에 다원도 똑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뭘 전공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대접해 주셨는데 실례는요. 회계요.”
“그럼 그 재계약이란 것도?”
“네. 회계 사무실에서 일했어요. 인턴으로.”
“그렇군요. 경력이 아깝네요.”
“그런가요? 하하. 어쩔 수 없죠. 지금 당장 일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그럼 일을 구한다면 계속 미국에 남을 의향은 있다는 거군요.”
다원은 딜런이 어떤 뜻으로 질문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딜런은 조금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시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곧 물 흐르는 소리가 그치고 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나오는 딜런은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다원도 덩달아 긴장할 때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변변찮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같이 일을 봐주시던 분이 연세가 많으셔서 힘들어하시는 상황이에요.”
“아…….”
‘기회가…… 온 건가?’
멍한 다원의 표정에 딜런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 아버지는 은퇴한 어부신데, 젊었을 때 가공업에 조금 손을 대셨어요. 지금은 제가 이어받아 소소하게 하고 있지만 사업에는 회계가 필요하죠. 회계가 누구였을지 짐작이 되나요?”
‘짐작?’
갑작스러운 질문에 다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사랑스러운 미소다. ……사랑스러워? 누가?’
무심코 든 생각에 혼란스러워하며 다원이 옆길로 새려던 찰나.
“제 어머니셨어요. 회계는 어머니께서 도맡아 하셨죠. 젊은 시절 어머니는 이 지역에서 정말 유능한 회계사셨거든요.”
“아…….”
“그런데 지금은 안경을 두 개를 쓰셔도 회계 장부의 작은 숫자를 잘 못 보세요.”
“직업병이죠.”
딜런은 정말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고 다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새 회계를 구해야 하는데, 이런 작은 동네에 누가 오겠어요. 월급도 적고, 원래 작은 규모의 사업장이 더 손이 많이 가고 성가신 법이니까요. 정말 애매하죠.”
딜런의 숨김없는 솔직한 말에 다원은 호감을 느꼈다. 또 월급이 적다고는 하지만 작은 규모의 사업장이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정말 제가 원하는 딱 그런 일자리네요.”
그동안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일거리에 진절머리가 났던 다원이었다. 회계는 남들이 안 바쁠 때는 바쁘고, 남들이 바쁠 때는 미친 듯이 바쁜 직업이었다.
게다가 이전에 일한 타미의 사무실이 소속된 회사는 규모가 컸는데, 거래하는 업체도 많았고 대부분이 제조, 건설, 무역 쪽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이 힘들고 까다롭고 어려웠다. 그런데 딜런의 말을 들어 보니 구미가 당겼다. 규모가 큰 사업장보다는 수월하겠지 싶었다.
‘완전 꿀일 것 같은데.’
다원의 반응이 나쁘지 않자 딜런은 다원에게 물었다.
“정말 원해요?”
“네. 원해요.”
“그럼…… 우리 다시 악수할까요?”
“네. 잘 부탁합니다.”
둘은 사장님과 사원으로서 첫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원은 어두워진 창밖의 풍경에 울상을 지었다.
“어떡해. 차를 놓쳤어.”
다원은 바닷가 쪽으로 난 창에 매달려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딜런은 지금껏 지었던 미소 중에 가장 진하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떡하죠? 제가 너무 오래 잡고 있는 바람에…….”
“아니에요. 제 일인데 제대로 못 챙긴 제 잘못이죠. 그리고 이제 막 입사한 사원이 사장님을 탓할 수는 없고요.”
“하하하. 제가 사원 하나는 잘 뽑은 것 같네요. 벌써부터 사장님 기분을 다 맞춰 주고.”
“그야 당연하죠! 그럼…… 기분이 좋으시다니 여기서 재워 주실 수 있을지…….”
“그야 물론이죠. 다원 씨가 차를 놓친 데는 제 탓도 있는데.”
“후우. 그나마 다행이네요. 숙소비가 아깝지만 어쩔 수 없죠.”
“숙소?”
“네. 보스턴 시내에 게스트 하우스를 잡았거든요.”
“아까 유학생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이쪽에서 생활한 건 아니에요.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마땅히 지낼 곳이 없고요.”
딜런은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 * *
다원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좁은 가게를 봤을 때도 2층이 그리 넓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이건 넓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달랑 침대 하나.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것도 작게 빠진 퀸 사이즈의 침대였다. 다원이 ‘설마 여기서 같이?’라는 표정으로 딜런을 돌아봤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입고 있던 니트를 벗고 있었다.
‘헉!’
딜런이 팔을 올리는 그 순간 안에 입고 있던 회색 티셔츠가 가슴까지 딸려 올라갔다. 그의 복근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하얀 피부도 저렇게 섬세한 복근이 있으면 섹시하구나.’
체이스도 하얀 피부에 큼직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대학 졸업 후 앉아 있는 시간이 늘고 저녁 식사 자리가 많아지면서 몸집도 불었다.
서른에 가까워지면 어쩔 수 없다던 그의 말이 진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딜런의 날렵한 허리와 탄탄한 복근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다원은 어느새 니트를 다 벗고 딸려 올라간 티셔츠를 내리는 딜런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자 딜런은 눈웃음만 지으며 청바지 단추마저 풀어 버렸다.
‘아니, 저기요. 헉!’
물론 남자끼리 아무 문제 될 것 없는 행동이었다. 편안한 숙면을 위해서는 불편한 청바지를 벗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와 우정 말고 사랑도 나누는 다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했다.
‘고개를 돌리면 완전 이상해질 거야. 자연스럽게 눈만 돌려. 돌리라고!’
하지만 딜런은 상당히 동작이 빨랐다. 결국 타이밍을 놓친 다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을 질끈 감는 것이 전부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딜런의 청바지는 옷걸이에 니트와 함께 걸려 있었다. 그는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은 후였다. 그는 침대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딜런의 꿈틀거리는 등판을 보다 다원은 괜히 좁은 방 안만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딜런이 꺼내 든 것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다원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게 뭐야?’
물론 1층에 있을 때도 그렇게 따뜻한 건 아니었지만 침낭까지 꺼낼 줄은 몰랐다.
‘침대에, 담요에, 난로도 있는데 오버 아냐?’
“설마 침낭이에요?”
“네. 당연히 침낭에서 자야죠. 난방 시설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지금은 전체 난방도 다 내린 상태고 전기난로도 밤엔 위험하니까요.”
“아…… 위험하구나.”
다원은 전기난로를 밤에 틀어 놓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런 오두막집엔 침낭이 제격이죠.”
딜런은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다원을 빤히 바라봤다. 그 뜨거운 시선에 다원은 숨통이 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숨이 꼴까닥 넘어갈 것만 같던 순간 딜런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다원은 옷 안 벗어요?”
그 말에 다원의 머리가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옷을…… 벗어?’
“불편하지 않겠어요?”
“아…….”
‘음란마귀가 꼈나…….’
다원은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두꺼운 패딩에 두꺼운 후드 맨투맨 티, 그 아래 이너 셔츠, 두툼한 기모 청바지에 워커 형 부츠, 그 안의 두꺼운 양말까지.
‘벗긴 벗어야겠네.’
다원이 제 모습을 돌아보는 동안 딜런은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서너 칸 내려가 계단을 잡아당겼다.
“오.”
다원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계단은 수납형 계단이었다.
“이렇게 좁은 집에서는 수납이 제일 큰 문제죠.”
딜런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 안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옷과 다원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더니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서랍을 뒤졌다. 하지만.
“이런…….”
“윽.”
딜런의 트레이닝 바지는 다원에겐 커도 너무 컸다. 통도 통이지만 길이가 너무 길었다.
“내가 이렇게 다리가 짧았던가.”
발아래로 바지 자락이 제법 길게 덜렁거렸다.
“하하하. 아빠 옷 입은 아들 같네요.”
“윽. 제발, 사장님. 그런 인신공격성 발언은 자제해 주세요.”
“딜런.”
“예?”
다원은 이 남자가 왜 뜬금없이 스스로 이름을 읊조리나 의아했다.
“딸랑 직원 하나 있는데 사장은 무슨. 딜런이라 불러 줘요.”
“네에, 딜런. 뭐 어려운 일이라고. 듣는 직원 민망하게 그렇게 간곡히 부탁을 하시고 그러세요.”
다원은 바짓단을 대충 둘둘 말아 올렸다. 패딩과 청바지를 옷걸이에 걸고 신발도 한쪽에 가지런히 치웠다. 그러자 혹시나 발에서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싱크대에 발을 올리고 씻을 수도 없고. 밖에 있는 화장실에서 씻었다가는 동상에 걸릴 게 뻔해.’
찬물밖에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서는 손도 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딜런도 안 씻었잖아.’
신발을 정리하다 말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민에 잠긴 다원에게 딜런이 물었다.
“뭐 해요? 혹시 신발에 꿀이라도 발라 놨어요?”
“우웩.”
다원은 신발에 꿀이 든 모습을 떠올려 버렸다.
“하하. 다원은 한 번씩 어린아이 같아요.”
“하, 하, 하. 뭐라십니까? 이래 봬도 엄연한 대한민국 군필자라고요.”
“오. 우리 아버지가 상당히 좋아하시겠는걸요?”
“아버지가 왜요?”
“우리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참전하셨거든요.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지만.”
“아. 6·25.”
“저랑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며 늘 투덜거리셨죠. 같이 참전하신 분들은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며 지금도 투덜거리세요.”
“하긴. 미국의 대학 동기들도 제가 K2소총도 쏘고 각개전투랑 화생방 훈련했던 이야기 하면 다들 다른 세상 사람 보듯이 하더라구요.”
“…….”
“딱 지금 딜런처럼요.”
“내일 우리 아버지랑 잠시만 놀아 줄 수 있어요?”
다원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딜런의 말이 접수가 되지 않아 그저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보다 패딩과 기모 바지를 벗으니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딜런. 저 추워요. 당신 아버지랑 놀아 주는 이야기는 그 침낭에 들어가서 하면 안 돼요?”
“이런. 얼른 들어오세요.”
딜런은 다원을 위해 침낭을 펼치느라 바빴다. 그러나 다원은 생각보다 능숙하게 침낭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순식간에 자리를 잡은 그는 지퍼까지 완벽하게 올렸다.
“정말 당신 볼수록 새롭네요. 야외 캠핑, 더구나 산악 캠핑 좀 했다는 놈들도 그렇게 능숙하지 않던데. 침낭 안에 한 번에 자리를 잡는 놈은 없거든요. 더구나 이런 구식 침낭을.”
“그러네요. 상당히 구식이네요. 두껍고 무겁고 좋아요.”
“이것도 군에서 배운 거예요?”
“전 군에서만 써 보긴 했지만 요즘은 침낭을 접하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잖아요?”
“하하하. 제가 너무 당신을 어리게 봤나 보네요.”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서른이 코앞이라구요.”
“네에?”
침낭 안으로 들어가던 딜런이 놀라 소리치더니 다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둡고 좁은 방 안, 가뜩이나 좁은 침대 위에서 잘난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다원은 긴장이 되었다.
‘아…… 심장이야.’
딜런에게는 아무 뜻 없는 행동이겠지만 다원의 심장에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게다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딜런의 하얀 피부가 더 창백하고 섹시하게 보였다.
“다들 제 나이를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딜런이 제일 놀란 것 같네요.”
“전 당신이 대학 졸업반이라고 했을 때도, 군대를 다녀왔다고 했을 때도 사실은 속으로 정말 놀랐다구요. 전에 한국에서 당신을 봤을 땐 중학생이 혼자 여행을 한다고 참 대견하다 했는데…….”
“하, 중학생……. 네에, 네에. 놀랍지도 않아요. 이젠.”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그랬다.
‘견학 온 거니? 저 뒤쪽에 가서 앉으렴.’
‘교수님, 걔 저희랑 동기예요.’
‘저런. 어린 나이에 대학에 다 들어오고. 영재, 뭐 그런 건가?’
‘아니요. 저희랑 동갑이에요.’
‘아니야, 등신아. 쟤 우리보다 나이 많아.’
‘뭐어!’
대체로 그런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다원은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그리고 더 이상 딜런의 생각보다 괜찮은, 아니 상당히 멋지고 취향인 모습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에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심지어 다원은 실연당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실연남이었다. 이건 좀 아니지 싶었다. 다원이 조용해지자 딜런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괜찮아요. 기분 나쁘다뇨. 동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전혀 개의치 않아요. 단지 피곤해서 그래요.”
다원은 눈을 감은 채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피곤하다고 해서인지, 아니면 자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인지 말하는 도중에 정말 졸음이 찾아왔다. 의외로 따뜻한 침낭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 오는 구식 침낭의 무게와 옆에서 간간이 느껴지는 인기척에 다원은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고른 숨소리를 내는 다원을 보고 딜런은 픽 웃었다.
“센 척은 다 하더니 아기처럼 이야기하다 잠들어 버렸네.”
다원은 주황색 침낭 안에서 얼굴만 쏙 내밀고 아기처럼 쌕쌕거리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얼굴은 정말 지쳐 보였다. 사실 한국에서 봤을 때도 가히 기운이 넘친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땐 그 유명한 한국의 교육열에 치여 지친 학생인 줄 알고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오늘 바다 위에서 만난 그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낯빛도 창백했고 표정도 너무 공허했다. 무엇보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 까만 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 더 그러했다.
‘꽉 붙들고 있지 않으면 깊고 푸른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지.’
그래서 손을 내밀었는데, 잡아 온 손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리고 그 뜬금없는 벙어리장갑은 여태까지의 그의 이미지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귀엽기는…….’
그 하늘색 벙어리장갑은 지금 맞은편 벽에 곱게 걸려 있었다. 딜런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어려 보이는 얼굴로 저런 걸 하고 다니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그의 나이에 딜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생애 처음으로 취향인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땅꼬마 어린아이인 줄 알고 어쩔 수 없이 흑심을 접지 않았던가.
‘그땐 얼마나 안타까웠는데……. 그런데 비슷한 나이였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딜런은 제법 서늘하게 느껴지는 공기에 얼른 침낭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가 옆으로 고쳐 누웠다. 다원은 입을 조금 벌리고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자기보다 더 빨리 침낭에 들어가는 남자가 섹시하게 느껴질 줄이야.
‘안아 보고 싶다.’
그랬다가는 따귀를 올려붙이는 것은 물론이고 취업 비자고 뭐고 나라 밖으로 달아나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쫓아가라면 못 쫓아갈 것도 없었다. 하지만 추억 속에서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아버지와 여전히 철이 없고 열정 넘치는 어머니,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알 수 없는 동생을 놔두고 사랑을 좇기보다는 옆에 붙잡아 두는 편이 훨씬 이득이니 딜런은 참기로 했다.
* * *
커튼에 가려져 햇빛이 어스름하게 들어왔다. 다원은 코끝이 아릿할 정도로 진하게 파고드는 커피 향과 고소한 빵 냄새에 눈이 떠졌다. 딜런과 이야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아침이었다.
‘정말 기절한 듯이 잠들었네.’
다원은 나무로 된 천장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콧속으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가 폐 속까지 파고들면서 이곳이 편안하고 따뜻한 호텔도, 체이스의 집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너무 상쾌한데……. 흐음.’
머리도 아프지 않고 몸도 가벼웠다. 그제야 다원은 그동안 수면의 질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꽤 잘 버틴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언제 잠이 들었지? 딜런이 나보고 어린애 같다고 했고……. 그다음에 사과했었나? 왜?’
정확하게 기억도 안 나고 그 뒤로는 블랙아웃이었다.
“아무튼 개운하네.”
다원은 침낭에서 상체만 일으켜 창이 난 쪽 벽에 어깨를 기대고 앉았다. 따뜻한 침낭 안과 차가운 바깥 공기의 희한하고도 오묘한 콜라보레이션이었다. 흐릿한 창이 시야를 가렸다. 바깥 풍경을 더 자세하게 보고 싶은 마음에 팔을 꺼내려는데 딜런이 막 올라왔다.
“그러다 감기 걸리기 딱 좋아요. 창가 쪽은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거든요. 조금 옆으로 물러나요. 아니면 아예 뒤로 기대든가.”
“네, 아빠.”
딜런의 표정은 정말 정직했다. 경직! 그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우뚝 멈춰 섰다. 양손으로 든 쟁반이 부들부들 떨리며 부러질 것만 같았다.
‘앗! 화났다.’
다원은 얼른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비는 시늉을 했다.
“죄송해요, 딜런. 너무 잠을 잘 잔 탓에 잠시 이성을 잃었나 봐요.”
“아무튼 못 말린다니까.”
“그러게요.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전혀요. 아침 먹죠.”
“와, 냄새만 맡았을 때도 훌륭했는데 정말 대단한데요. 제가 묵고 있는 숙소의 조식에 비하면 완전 7성급 호텔 수준이에요.”
“화난 거 아니니까 아부는 그 정도로 해 두고, 어서 먹어요.”
훌륭한 우유 거품이 일품인 따뜻한 커피도, 겉이 바삭하게 구워진 두툼한 호밀 빵도 정말 훌륭했다. 딜런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하필 땅콩 잼이 딱 떨어져 버렸지 뭐예요.”
“오. 땅콩 잼 있었으면 완전 완벽할 뻔했네요.”
“다음엔 꼭 준비할게요.”
‘그냥 하는 말일 텐데…….’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데 그의 말이 귀에 쏙 박혀 들어왔다. 다원은 그만 너무 심각한 얼굴로 딜런을 보고 말았다. 그런 행동이 실례라는 걸 깨닫기도 전, 딜런은 또 한 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꺼내 놓았다.
“그럼 지금 지낼 곳이 없다는 거죠?”
다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여기?”
다원이 검지로 침대를 가리켰다. 딜런이 다원의 그 손가락을 바라보며 알 듯 말 듯 아리송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곧 미소를 거두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니, 조금 짓궂은 모습이었다.
“여기서 지내는 건 저한테도 힘들어요. 가끔 기분 전환 삼아 지내기는 하지만 매일은 아니죠. 군필자인 다원 씨에게도 쉽지는 않을걸요?”
다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저런 식으로 농담을 걸어온다면 다원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같이 맞장구쳐 주거나, 무시하거나. 하지만 이번엔 그저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사이 딜런이 말을 이었다.
“농담이에요. 근처에 부모님 집이 있어요. 여기 영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머무는 곳이죠. 보스턴에도 아버님과 어머님이 지금 살고 계시는 집이 있는데, 거기도 방이 남고요.”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다원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당연히 방세는 받을 겁니다. 저희 회사는 그리 재정이 탄탄하지 못하고 복지가 좋은 편은 아니거든요.”
다원의 얼굴은 다시 붉게 불타올랐다. 이번엔 너무 앞서 나갔다.
“생각해 보고 편하게 말해요. 어차피 남아도는 방이니 세를 놓는 거죠. 제 입장에서는 직원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이득이 있으니 나쁘지 않아요.”
그렇게 두 사람은 간단한 식사와 함께 다원의 새로운 거처 문제를 논의했다.
식사를 마친 뒤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다원은 벌써 11시를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어제 일찍 잠든 것 같은데 이렇게 늦게 일어나다니. 체이스가 알았으면…….’
다원은 생각을 멈추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끝난 사이야. 내 인생에 체이스는 당분간, 아니 영원히 없을 단어야.’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패딩을 들고 내려왔다. 그사이 딜런은 세수를 할 물까지 데워 놓고 있었다.
‘원래가 부지런한 거야? 손님을 위해 노력하는 거야?’
다원의 시선이 싱크대로 향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한 딜런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리 우리 둘 다 외모가 출중하다고는 해도 눈곱 정도는 떼야 할 것 같아서요.”
어느 포인트에 박자를 맞춰야 할지 애매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이런 유쾌한 모습이 그의 스타일인 것 같았다.
“하하, 그런가요. 사장님은 이대로도 훌륭하신데요? 감사합니다. 입사 전부터 호사를 누리네요.”
“네. 호사를 누려 주세요.”
“크크크.”
다원과 딜런은 나란히 서서 정말 눈곱만 뗐다.
이어서 가게를 정리하고 점검한 둘은 조금 떨어진 딜런의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미국의 전형적인 2층 목조 주택이었다.
“와. 초록색 지붕 집이다.”
캐나다 그린 게이블스에 있는 <빨간 머리 앤>의 집을 떠올리며 읊조린 다원의 중얼거림에 딜런이 보일 듯 말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비슷하긴 하죠.”
“정말이에요. 그것보단 조금 작은 것 같기는 하지만 이미지가 정말 비슷하네요. 혹시 그 집처럼 오래된 집이에요?”
“처음 지은 건 그 집만큼 오래됐을 거예요. 그런데 한 20년쯤 전에 대대적으로 수리를 해서 완전히 옛날 집은 아니죠. 안전과 난방, 상하수도 시설 재정비를 위한 공사였으니 자재는 그대로 다 사용했지만……. 글쎄요. 오래된 옛날 집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네요.”
“그렇긴 하네요.”
너무 단호한 수긍에 딜런에게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그의 눈은 집에 고정되어 있었다. 딜런은 왠지 그가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와. 수리를 멋지게 하셨네요.”
“어머님이 신경을 많이 쓰셨죠. 작년 시즌까지 여기서 생활하셨어요. 애착이 대단하셨죠.”
“그러게요. 이런 아름다운 집을 두고 다른 곳에 사신다니…….”
“아버님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병원 가까이 계셔야 하거든요.”
“저런.”
“뭐 심각한 건 아니고. 노환이죠.”
“그렇군요.”
1층은 작은 거실과 부엌, 부부 침실, 화장실, 작은방 하나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뒷문이 있었다. 2층엔 거의 비슷한 크기의 방 두 개와 화장실, 작은 다용도실이 있었다.
“이 방은 제 방이었고 저 건너편 방은 손님방이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어요. 결국 저와 아버지가 공부방 겸 서재로 사용했죠.”
“그렇군요. 미국에서 4년 동안 살았지만 이런 가정집은 처음 구경해 봐요. 좋은데요?”
“저런. 그동안 너무 공부만 했나 봐요.”
“뭐…….”
다원은 ‘공부보다는 다른 걸 좀 열심히…….’라는 뒷말은 삼켰다. 그는 차마 딜런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럼 어떻게 할래요?”
“네?”
“아무래도 여기가 주된 근무지가 될 텐데, 보스턴 집에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여기서 출퇴근하는 게 더 낫겠죠?”
“아, 네!”
“어차피 옮길 거라면 지금 옮기는 게 돈도 절약하고 좋은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그럼 짐 가지러 갑시다.”
“네? 아니에요. 저 혼자 가도 돼요. 어차피 짐이라 봐야 배낭 하나뿐인 걸요.”
직원 채용도 속전속결이더니 이사까지 하루아침에 해치우려는 추진력이 남다른 사장님 때문에 다원은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유학생이라지만 4년이나 살았는데 짐이 그것뿐이에요?”
“아, 책은 학교에 있고 어차피…….”
다원은 그간의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머뭇거리는데도 딜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설명을 들어야만 움직일 기세로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아니, 다른 땐 안 그러시더니 왜 이러시지? 설마 이 모습이 본모습인 거 아냐?’
조금 망설이던 다원은 사실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필요 없는 건 다 버렸어요.”
“쯧! 아깝게 됐네요. 저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요.”
“하하.”
다원은 어차피 제 것이 아니라 돌려보내야 했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아무튼 보스턴으로 갑시다. 서류 처리할 것도 있고.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당신이 계속 미국에 있을 수 있죠. 그래야 제 일에도 차질이 없고. 그렇죠?”
“아, 네!”
“다음 시즌을 위해 우리 알찬 겨울을 보내 봅시다.”
“파이팅!”
“하하하. 파이팅!”
다원이 뜻밖에 파이팅을 외치자 딜런도 얼떨결에 하이 파이브를 하며 덩달아 외쳤다.
* * *
둘은 다원이 잡아 두었던 보스턴 숙소에서 짐을 찾아 딜런의 부모님 집으로 갔다. 이곳도 한 건물에 집과 사무실이 같이 있었다. 물론 항구 마을의 카페와는 비교도 안 될 규모였지만.
“집이 아니라 건물이네요.”
“부모님이 한평생 열심히 사셨죠.”
“네……. 그러신 것 같아요.”
‘보스턴에서 이런 3층 건물을 소유하시다니…… 요.’
사무실로 향한 딜런과 다원은 처음으로 손발을 맞춰 일을 시작했다. 처음 취업 비자를 따려던 계획을 조금 수정해서 투자 이민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다원의 남은 학생 비자 기간이 넉넉했고 한국의 집을 처분한 돈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원은 이렇게 서둘러 결정해도 되는지, 남의 호의에 너무 기대는 것은 아닌지 망설였지만 그런 그의 등을 딜런이 밀어주었다.
‘보증금이 부족해요? 그럼 은행 금리로 빌려줄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자금은 얼추 될 것 같아요.’
‘그럼 뭐가 문제예요?’
아무 문제도 없지 않냐는 딜런의 얼굴을 보자 다원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뻔뻔해져도 될 것 같았고 또 뻔뻔해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다원의 성공적인 미국 이민을 위해 서류를 꾸미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원은 열심이었고 딜런도 하나뿐인 직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서류 작업이 다 되어 갈 때쯤 해가 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문화 시설에서 노인들을 위한 교양 수업을 들은 딜런의 부모님이 돌아왔다. 딜런과 다원은 함께 1층의 부모님 집으로 마중을 나갔다.
치매라는 딜런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다. 특히나 어머니는 혈기 왕성해 집에 오자마자 요리를 준비하며 분주했다.
하지만 다원은 곧 딜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했다.
‘아버지는 추억 속에 사시죠.’
다원과 인사를 나눈 딜런의 아버지는 바로 젊은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절염이 심하다는 무릎도 연신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것은 딜런의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반복되었다. 다원에겐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딜런은 부엌에 들어간 후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 *
딜런의 아버지 앤서니는 전동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었다. 좁은 부엌 입구에는 전동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어 식탁은 거실에 놓여 있었다.
완성된 요리를 가지고 나오던 딜런이 부엌 입구에 멈춰 섰다. 뒤따르던 어머니, 캐서린은 아들이 멈춰 서자 왜 그러나 싶어 살짝 고개를 뺐다. 아들의 시선을 쫓던 그녀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오늘 처음 본 이가 남편 옆에 앉아 그의 아픈 무릎을 꼭꼭 주물러 주고 있었다. 게다가 되풀이되는 남편의 이야기를 정성껏 들어주고 있던 것이다. 남편을 평생 사랑한 그녀도, 아버지를 존경하는 딜런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했던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듣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더구나 앤서니에게는 언제나 처음 하는 말이었기에 더했다. 그는 가족들이 자신에게 무심하다고 느껴 얼마 전엔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다. 그런데 처음 보는 다원이 그의 이야기 상대를 하고 있는 모습에 둘은 놀랍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산 캐서린도,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삶을 살았던 딜런도 모두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는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아버지, 식사하셔야죠.”
둘은 아무렇지 않게 저녁 식사를 식탁에 차렸다.
“와아. 아버님, 완전 맛있는 냄새가 나요.”
“뭐?”
다원은 앤서니의 귀에 입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냄새는 처음이에요.”
“내가 맛있다고?”
“…….”
“하하하하하.”
“어마나. 여보.”
“풋! 하하하하하.”
미국 드라마에서 보던 전형적인 일반 가정의 저녁 식사였다. 물론 잠깐 동안의 경험으로 알게 된 딜런의 배경은 결코 서민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분위기만으로는 그랬다.
사실 항구 마을의 집과 가게만으로도 딜런 가족은 부유한 편이었다. 보스턴에 이만한 건물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실속이 없었다. 수입은 있었지만 방세는 건물 유지비로, 카페와 공장도 유지비로 다 나갔다.
‘그러니까 서민 가정이라기엔 좀 그렇고. 좀 여유로운 중류층 가정쯤 되겠지?’
회계를 전공한 다원에게 돈은 장부 속의 작은 숫자에 불과했다. 딜런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의 정확한 가치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수제품, 디자이너 제품, 몇백 년이 훌쩍 넘어가는 고가구, 소품 등등의 가치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딜런 어머님의 진정한 컬렉션은 단 1%도 보지 못한 다원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원에게 이 저녁 식사는 미국의 전형적인 일반 가정에서의 첫 식사였다.
‘아, 행복하다.’
문득 다원은 왼쪽 뺨이 간질거렸다. 쓸어내리기를 수차례, 설마 하고 고개를 돌리자 딜런과 눈이 마주쳤다. 딜런은 빵을 스프에 찍어 입에 넣다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다원을 보고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나 어제오늘 이 남자 너무 의식한다.’
다원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조금 흔들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딜런은 스프를 듬뿍 빨아들인 부드러운 빵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다원의 모습을 감상하며.
저녁 식사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시간도 늦었고 내일 해야 할 서류 작업도 많았고 관공서에도 방문해야 했다. 딜런과 다원은 이 집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우리 아가 덕에 딜런이 집에서 잠을 다 자고. 이게 얼마 만인지 몰라.”
‘아가!’
다원은 귀가 잘못된 것인가 싶어 귀를 후벼 팠다.
“그런데 아가. 방이 하나뿐이라 이 시꺼먼 놈이랑 한방에서 자야 하는데 괜찮겠니? 이 녀석은 저기 소파에서 자라고 할까?”
하지만 캐서린에게 흘러나온 단어는 다원이 방금 들은 그 단어가 분명했다. 다원은 딜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그리고 배신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딜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까지 들썩이고 있었다.
“아가!”
게다가 아버님까지 탁탁 무릎을 치며 다원을 찾았다.
“저이도 우리 아가가 마음에 쏙 드나 보다. 좀 있으면 잠자리에 드실 거야. 내가 준비할 동안 말동무 좀 더 해 줄 수 있겠니?”
“네. 어머님.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이미 너무 편한 것 같지만.’
다원은 직접 잠자리를 준비한다는 캐서린의 친절이 내심 불편했다. 그는 앤서니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딜런을 째려보았다.
“어머니. 이불 이거 꺼내면 되죠?”
“그래. 아까 보니 아가가 추위를 타나 봐. 두꺼운 거로 꺼내렴.”
“네!”
“아가! 내가 소싯적에 말이야…….”
여기서도 아가! 저기서도 아가! 다원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님의 나라를 구한 이야기는 다시 리플레이되었다. 다원은 반사적으로 아버님의 무릎에 손을 올리고 귀를 열었다.
* * *
그들의 두 번째 동침이었다.
집은 따뜻했고 뜨거운 물도 펑펑 나왔다. 어머님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아기자기한 욕실에서 둘 다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왔다. 따뜻한 밥도 배불리 먹었고 몸도 깨끗했다. 침대도 거의 살아 숨 쉬는 수준의 쿠션감을 자랑했다. 어제의 그 소파 베드 수준의 침대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둘은 눈이 말똥말똥했다. 창밖의 가로등 때문에 방 안이 주황색 불빛으로 밝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원은 잔꽃 무늬 천장 벽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꽃무늬가 한 덩어리가 되어 괴상하게 일그러질 때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다.
“고마워요.”
“……뭐가요?”
“아버님요.”
“아…….”
다원은 고맙다는 말의 뜻을 그제야 이해하고는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내 너무 인정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에요. 저도 한 번쯤은 그렇게 아버지의 존재를 느껴 보고 싶었는걸요.”
그렇게 다원은 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아버지의 손길이었다. 너무 어린 시절의 일이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엄마라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원의 부모는 대학 새내기 환영식에서 눈이 맞았다고 했다. 엄마의 표현이 그랬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런저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다 아기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땐 지우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고.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은 뒤 엄마는 아이와 함께 엄마의 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그동안 아빠라는 사람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대신 할아버지가 유전자 검사를 요구했다. 외할아버지도 동의해서 유전자 검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아빠는 군대에 갔고 엄마는 유학을 갔다고 했다.
다원은 두 집안이 반반씩 부담해서 마련해 준 집에서 지냈다. 그들이 고용한 가정부 겸 육아 도우미의 손에 키워졌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고아인 줄 알았다.
언제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1, 2학년 때쯤일 것이다. 웬 젊은 여자가 집에 찾아왔다. 도우미 아줌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여자는 아이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앞선 이야기를 해 주었다.
더 이상 제 뿌리를 궁금해하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고, 주어진 것이나 잘 지키며 살라고 했던 것 같다. 그 여자가 갑자기 찾아와 그런 말을 한 건 아마 그쯤 다원이 아빠와 엄마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때 그녀가 재혼을 한 걸 수도 있고.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원은 아빠보다는 엄마가 조금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빠는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나마 엄마는 본인이 낳았다고 인정은 했으니 딱 그만큼 나은 것이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었을 땐 아줌마마저 오지 않았다. 다원은 완벽히 혼자였다. 그래도 불편한 것은 없었다. 월말이면 꼬박꼬박 생활비가 들어왔고 졸업과 입학 때마다 큰돈이 들어왔다. 늘 다른 이름으로. 물론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 집안과 상관없는 사람의 이름을 빌렸을지도 모른다.
사실 자세한 사정은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그들 덕에 미국까지 오기도 했고…….
“지금 그래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딱딱한 말소리에 다원은 어리둥절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어요.”
같은 말이 되풀이되고 나서야 그는 그제야 딜런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다원은 무슨 상황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말을 하다 말고 또 생각에 빠졌구나.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자꾸 허술한 모습이 나오는지 모르겠네.’
다원은 무슨 말을 어디까지 한 건지 되새겨 보았다.
“정말 그런 겁니까?”
“아니에요, 그런 거…….”
딜런은 아예 다원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다원은 시선을 창가 쪽으로 돌리며 또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행이라거나 고맙다거나 밉다거나, 그런 대상조차 되지 않아요. 제게 가족이란 건. 그런데 갑자기 정말 드라마에서나 보던 사이좋은 가족을 겪어 보니 좋았다는 거죠.”
“…….”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다거나 무릎을 주물러 드린다거나 하는 거 전혀 힘들지 않다구요.”
“……미안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어요.”
그대로 이불을 덮고 등을 돌려 눕는 딜런이었다. 침대가 크게 움직였다. 다원도 창가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는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커튼 너머의 가로등 불빛을 바라봤다.
‘처음 본 거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섭섭하다니……. 두 번이나 한 침대에 자면 그런 건가? 그래서 체이스한테도 그렇게 섭섭했나? 체이스와는 수없는 낮과 밤을 한 침대에서 보냈는데. 그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섭섭해해야 하는 거야?’
다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동안 뒤척이다 어렵게 잠들었다.
고르고 깊은 숨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려 누운 딜런은 천장을 바라보다 이마에 팔을 올렸다.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잠든 다원이 느껴졌다.
‘쯧! 어젠 예쁘고 반듯하게 누워 자더니……. 이러면 더 안아 주고 싶어지잖아.’
딜런은 옆으로 누워 다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어깨가 작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오래도록 그의 어깨에 머무르던 손은 어느덧 힘이 빠지면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 * *
다음 날 둘은 정말 정신없이 관공서를 누비고 다녔다. 역시 돈이 최고의 진리인 듯 투자 이민으로 선회하자 일은 일사천리였다. 딜런은 생각보다 일 처리가 빠르고 능숙하며 거침없었다. 다원은 그의 등 뒤로 자꾸만 반짝이 가루가 날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신 생각보다 성적이 훌륭하잖아요.”
“그래요?”
“내가 훌륭한 인재를 너무 싼값에 쓰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 정돈가요?”
“저런. 당신의 취약점은 바로 이런 점이네요.”
다원은 칭찬을 하다 말고 취약점을 지적하는 그에게 당장 고칠 테니 빨리 말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는 거.”
다원은 할 말이 없었다. 맞는다고 인정을 해야 할지, 그런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야 할지. 사장님 앞에서 난처할 뿐이었다.
“개인적으론 그런 면이 사랑스럽지만, 흐음.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건 상당한 약점이고 이용당할 우려가 높은 부분이죠.”
제 가치를 모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느니, 그러나 약점이라 이용당할 거라느니 하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러니 제게 들킨 걸 마지막으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마세요.”
다원은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이런 멘트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엔 대부분 고치라고 해 주는 게 정답 아닙니까?”
“그럼 사랑스러움이 사라지니까요.”
이 남자가 말하는 사랑스러움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사랑스러움이 맞는지 다원은 정말 따져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제 말만 하고 휑하니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경쾌해 보였다. 다원은 첫 출근부터 봉변을 당한 기분이었다.
‘세상에……. 약점이라면서 사랑스러우니까 고치지 말고 잘 숨기라니. 이런 황당한 경우를 봤나.’
그렇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다원의 미국 비자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회사에 적응하는 것뿐이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회계 일이야 원래 다원이 하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하나만을 바라보고 열심히 일하는 타입이었다.
“기가 막히네요. 당신 정말 천재적이군요.”
“훗! 제가 좀 하죠.”
다원은 완벽하게 자신감을 회복했다.
“사실 제가 일하던 사무실이 무역이랑 건설 쪽, 또……. 아무튼 좀 많이 힘들고 까다로웠거든요. 1년간 그런 일을 주로 했던지라 이 정도는 거뜬해요.”
“최고 수준의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라 모든 일이 별거 아니라는 소리로 들리네요.”
“설마요. 제가 이 직장에 꼭 맞는 준비된 인재라는 뜻이에요. 그래도 손에 익지 않은 낯선 일들은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최대한 빨리 적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 다원의 눈은 내내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지금도 딜런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다행이네요.”
“카페를 다시 열면 카페 일도 돕고요.”
딜런은 겁도 없이 일을 더 하겠다고 나오는 이 철없는 직원을 어찌해야 할까 싶었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제가 한다는데 사장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는 단 1%도 없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대환영입니다. 훌륭한 자세로군, 왓슨!”
딜런은 입가에 뭔가를 무는 흉내를 내며 뜬금없이 왓슨을 외쳤다. 아무래도 역할 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하, 이런. 뭐라는 거예요, 셜록!”
“크크크.”
의외로 쿵짝이 잘 맞는 둘이었다.
* * *
따뜻한 바닷바람이 부는 4월, 작은 항구 마을 관광지에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각오를 다졌던 다원은 요즘 들어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다. 특히 오늘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엉덩이 한 번 붙이지 못한 날은 더 그랬다. 밥은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길 틈이 없었다. 끊임없이 커피를 나르고 잔을 씻고 계산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아니, 도대체 여기가 미국이야, 한국이야, 중국이야?”
다원의 입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푸념 아닌 푸념이 나왔다. 지금이야 영어가 익숙해졌지만 유학 왔을 때만 해도 한국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럴 때면 한국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쩌다가 툭 튀어나온 한국말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많았다. 정말이지 말이 통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오히려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 먼 이역만리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고 말을 시키고, 반대로 중국 사람들은 왜 대답을 안 하느냐고 말을 시켰다.
다원은 침대에 털썩 누우며 한숨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가 정말 앓느니 죽지, 죽어.”
“방금 뭐라고 했어요?”
마침 문 앞을 지나던 딜런은 울상이 되어 투덜거리는 다원의 한국말이 궁금했다.
“아…… 아니, 그게.”
다원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딜런은 난 또 뭐라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그 사람들 때문에 그래요? 좀 심하긴 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당신이 이렇게 예쁜데.”
다원은 정말 지친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제발. 딜런까지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저 정말 심각하다구요.”
“하하, 알았어요. 얼른 일어나요. 여기서 더 처지면 정말 피곤해져요. 얼른 씻고 식사해요.”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원의 양쪽 팔뚝을 잡은 딜런은 한 번에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우와. 힘 대박. 그래도 이건 아닌데…….’
딜런은 이미 상큼하게 뒤돌아선 후였다. 다원은 양쪽 팔을 쓰윽 쓸며 욕실로 향했다.
‘뭔데 이렇게 간질거리지? 열도 나는 것 같아.’
다원이 손을 쫙 펴 자신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당연히 아무렇지 않았다. 방금 딜런이 잡았을 땐 화끈거렸는데 말이다.
‘딜런의 손이 그렇게 뜨겁고 컸나? ……모르겠다. 씻고 얼른 밥 먹자. 정말 뱃가죽이 등가죽이랑 만나려고 그래.’
다원은 옷을 벗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면서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어 가며 살폈다.
‘배가 쏙 들어간 건 배고프니까 그렇다 치고…… 등살이 빠졌나?’
다원은 파닥거리듯 팔을 앞뒤로 움직였다. 양쪽 견갑이 맞부딪칠 것만 같았고 척추도 전보다 더 드러나 보이는 듯했다.
‘정말 살이 많이 빠진 건가?’
오른쪽으로 돌아선 다원이 팔을 들어 옆구리를 쭉 늘이며 갈비뼈를 훑어 내릴 때였다.
“아…….”
딜런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눈이 마주쳐? 왜?’
다원은 딜런이 왜 선명하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있던 그는 딜런이 욕실 문을 열고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이 왜……?”
“아…… 그러니까. 그게…… 아까 제가 마지막 타월을 써 버린 게 갑자기 떠올라서……. 여기 놔둘게요. 얼른 씻고 나와요. 그럼.”
딜런도 당황한 건지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변기 위에 수건을 내려놓으려다 다시 들고, 세면대와 이어지는 선반에 놓으려다 다시 든 그는 결국 원래 수건을 넣어 두는 장에 구겨 넣고 나가며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문은 도로 열렸다. 다원과 눈이 마주치자 주저주저 뭔가를 말하려던 딜런은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무슨…….’
다음 순간 또다시 문이 열렸다. 딜런은 주저리주저리 사과의 말을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그 샤워 커튼 치고 샤워하면 여기서는 안 보이니까, 그래서……. 그럼 구석구석 잘 씻고 내려오세요.”
탁!
문 닫히는 소리 뒤로 이젠 정말 내려가는 건지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구석구석…….”
‘아니, 왜 사과를 변기 뚜껑을 보고 하는 건데.’
다원은 멍한 기분으로 타일의 무늬를 하나하나 세면서 샤워를 했다. 다행히도 딜런의 어머님의 취향은 한결같아서 이곳의 타일 역시 셀 만한 잔무늬가 많았다. 다원은 그 무늬를 세며 그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도대체 딜런이 저렇게까지 당황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저까지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같은 남자끼리 알몸을 봤다고 기분 나빠 하기는커녕 당황하는 그를 보자 혹시 그가 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에이, 설마. 그럼 어머님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를 아가, 아가 했겠어? ……아닌가? 그래서 아가, 아가 한 건가? 에이, 아니야. 그래……. 아니겠지.’
캐서린과 앤서니가 아들보다 어린 사람에게 아가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버릇인 듯했다. 게다가 다원은 서양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한참 어려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씨. 나도 이참에 사각 턱 보형물도 넣고 광대뼈에도 보형물 넣어서 강하게, 나이 들어 보이게 수술할까?’
요즘 미국 남자들 사이에서는 좀 더 남자다워 보이도록 사각 턱 보형물을 넣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래. 지금은 보증금 내느라 거지니깐 돈 모으면 당장 하자!’
딜런이 제 벗은 몸을 보고 왜 당황했는가에서 시작한 다원의 생각은 엉뚱하게도 사각 턱 보형물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딜런은 2층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계단 한중간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집 안팎이 조용해 다원의 샤워 소리만 들려왔다.
‘한국인들은 원래 저렇게 피부가 꿀이 뚝뚝 떨어지게 좋은 거야? 군살 하나 없이 미끈한 몸매에……. 털도 꼭 있어야 할 곳에만 조금 나는 건가? 머리카락만 새까만 줄 알았는데 세상에……. 거기도…….’
딜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단정한 모양의 아래도 좋았지만, 결정적인 건 그 위에 한 줌 풀포기였다. 얌전한 검은 것이 자꾸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쟨 완전 신세계야.’
취미가 여행인 딜런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원 없이 연애를 즐기면서도 공교롭게도 동양인과 사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경험한 것 중에 가장 최고는 집에 있었다.
‘가게에서 본 다리도 예쁘고 미끈해서 놀랐는데 그건 놀랄 거리도 아니었어.’
딜런은 잠깐 만났던 모델 지망생 남자를 떠올렸다. 그도 다원 못지않게 마르고 미끈한 몸이었지만 어딘지 달랐다.
다원은 그저 미끈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울퉁불퉁하지 않고 긴 근육이 몸 전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조각가가 보기 좋게 다듬어 놓은 것처럼 군더더기가 없었다.
‘으으윽. 완전 고문이 따로 없어.’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가 딜런을 깊은 번뇌에 빠지게 만들었다. 다원의 몸은 딜런이 알고 있는 남자들의 몸과는 달랐다. 운동을 하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몸, 운동으로 다져진 벌크 업 된 몸, 살이 올라 통통하고 말랑한 몸, 자신처럼 노동 근육이 붙은 몸.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쟨 온몸이 쫙 빠졌어. 근육도 있는데 말랑거려. 동양인들은 원래 그런가?’
아이 같은데 예쁘게 근육이 잡혀 있었다. 그런 미끈하고 마시멜로 같은 남자의 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딸깍!
그때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딜런은 조용히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 * *
“어?”
다원은 욕실에서 나오다 계단 끝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수건으로 앞을 간신히 가리고 고개만 쭉 빼서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수건으로 채 덮이지 않은 엉덩이를 손으로 가리고 총총 방으로 향했다.
‘나 오늘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욕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도 그렇고 갈아입을 옷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다. 딜런이 가져다준 작은 수건은 앞만 겨우 가려질 뿐이었다.
다원은 수건을 의자에 걸쳤다.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로션을 집어 들었다. 바닷가라 습해서 피부가 건조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닷바람은 피부에 상당히 해로웠다. 보습에 신경 쓰지 않으면 비늘처럼 껍질이 일어났고 피부는 갈라질 듯 아파 왔다.
다원은 급한 대로 슈퍼에서 제일 산 보디로션을 사 애용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걸 쭉 짜서 이마부터 발끝까지 듬뿍 발랐다. 싸구려 베이비 로션의 향을 음미하며 로션이 다 흡수될 때까지 다원은 홀라당 벗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대충 말렸다.
긴팔 셔츠를 든 다원은 날이 더 따듯해졌음을 떠올리고 서랍에서 칠 푼 길이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러나 봄이라도 다리는 추웠기에 구 푼 트레이닝 바지에 울 양말까지 꺼내 신었다. 그대로 나가려던 그는 멈칫했다.
“아차차. 내 털 실내화.”
미국은 신던 신발 그대로 집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다원은 습관적으로 신을 벗다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딜런네는 그렇지 않았다. 현관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다.
그건 좋았지만 문제는 난방이었다. 아니, 다원의 혈액 순환이었다. 365일 언제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했던 체이스의 집에서도 다원의 발은 늘 차가웠다. 그런데 딜런은 난방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시베리아 벌판이 따로 없는 바닥에 발이 얼어붙을 지경인 다원을 보다 못한 딜런은 절충안으로 폭신한 털 실내화를 구해다 줬다. 다원은 그걸 신고 다닥다닥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식탁 위는 이미 세팅이 다 되어 있었다. 딜런은 마지막으로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를 푸는 중이었다.
“아, 죄송해요. 같이 준비해야 하는데.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별말씀을. 우선 앉아요.”
딜런의 시선이 잠시 다원의 실내화에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은 정말 우리 둘 다 너무 힘든 하루였어요.”
“아닌 게 아니라, 주말엔 아르바이트를 따로 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늘 조금 버거웠잖아요.”
“가게 일은 회사 일과 별개라는 거 알죠? 그럼 아르바이트생의 임금은 당신의 시급과 제 시급에서 반반 부담하는 걸로 하죠.”
“헉!”
다원은 스튜 접시를 받아 든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느새 딜런은 사업가, 아니 장사꾼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원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말을 돌렸다.
“식사합시다, 사장님.”
“하하하.”
* * *
바쁜 하루를 보내고 배를 든든히 채우자 몸이 늘어졌다. 창밖 어딘가를 보는 다원의 시선이 멍했다.
벌써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원은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아니, 지나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거나 다름없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1년 내내 그랬지.’
회계 사무실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시간을 많이 필요로 했다. 타미의 사무실은 나라 전체가 연일 불경기를 외치는 와중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더구나 마지막 학기에 꼭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했기에 다원은 정말 살과 뼈가 분리되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혼신의 힘을 다했다.
부채 의식처럼 여겨지던 체이스와의 연애에 대해서도 그랬다. 거의 막바지인 만큼 가장 힘든 때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이별이 찾아왔다.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차인 것도 서러운데 비자 문제까지……. 아, 다시 생각해도 최악이야.’
다원은 둘 모두 서로를 배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결과가 다 좋을 순 없었다. 사랑은 더 그랬다.
‘그런데 왜 체이스는 내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거라 생각한 거지? 분명 그때…….’
다원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그날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서 상황이 달라질 것도 아니고 자세히 기억도 안 났다.
그러나 생각의 고리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다원은 체이스와의 사이가 잘 풀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들떠 집으로 향했었다. 그다음 체이스가 문을 열어 주었고, 집 안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확실한 건 거기까지였다. 그 뒤의 일은 커튼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미국 여행을 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는 다시 선명해졌다.
그중에 제일 선명한 건 딜런이었다. 다원은 지금도 푸른 바다 위에 서 있던 딜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금발이 넘실거리던 딜런은 마치 그림 같아서 그만큼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지금과는 달리 수염까지 덥수룩해서 더 그랬다. 그는 영락없이 바다의 신처럼 보였다.
‘정말 삼지창만 손에 들려 주면 영락없었어.’
사실 다원에게 딜런은 정말 신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큰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는 빠른 판단과 강력한 행동력으로 일사천리로 일을 몰아붙였다.
다원도 투자 이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판 집값과 제 부모 집안에서 받은 돈, 일하면서 모든 돈까지 투자 이민을 위한 자금은 충분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 데에는 그것들이 순수한 제 돈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번 돈은 특히 더 그랬다. 다원에게는 체이스가 제공하는 완벽한 의식주 덕에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돈을 모을 수 있었다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최대한 그의 도움을 배제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이었다. 그때 다원은 미국에 있고 싶은 유일한 이유인 체이스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그래, 데미안처럼.
‘……이제야 인정하네. 하다원. 너 정말 못났다, 못났어.’
다원은 헛웃음이 나왔다.
체이스 옆에서 늘 당당하던 데미안처럼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등바등하며 모은 돈마저 체이스의 입김 덕분에 벌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사실 체이스에게 캐리어를 보내면서 사무실에 받은 월급도 넣어서 보내야 하나 잠깐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제 안의 자괴감을 드러내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갈 힘을 얻기 위해 선택한 여행은 뜻밖에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의 지난 4개월은 전쟁과도 같았다. 졸업과 취업과 이사와 새로운 가족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그러나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평화가 찾아오는 기분이었다.
방에서는 작은 항구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마을 대부분은 불이 꺼져 있었다. 어두운 바다에는 작은 배들이 비추는 불빛만이 마치 보석과 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9시 35분이었다. 도시에선 초저녁이지만 여기선 거의 한밤중인 시간이었다.
똑똑!
재촉 같은 노크 소리에 다원은 얼른 대답했다.
“네.”
“들어가도 돼요?”
“당연하죠.”
새 시즌이 시작되면서 딜런도 새사람이 되었다. 길어서 지저분하던 수염을 깔끔하게 면도하고 머리도 단정히 자른 딜런은 정말 배우 같았다. 문 앞에서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정말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지만 다원의 시선은 그의 손에 가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는 쟁반 위였다.
“만일 커피였다면 다시 나가라고 했을 거예요.”
딜런은 그럴 줄 알았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럴 줄 알고 차를 준비했죠. 바닐라 향이 좋아요. 당신은 꽃향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달콤한 향으로 골라 봤어요.”
“꽃향기는 아무리 적응하려고 애를 써도 화장품 냄새 같아서…….”
“하하. 그렇죠. 한 번씩은 저도 그렇게 느껴요.”
“하지만 어머님한테는 비밀이에요.”
“당연하죠.”
“헤헤헤.”
다원은 헤실헤실 아이처럼 웃었다. 딜런은 다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번엔 다원도 그런 딜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바다 위에 뜬 달에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구보다 작은 것이 어마어마한 바닷물을 밀었다가 당기는 것도 모자라 딜런이 다원에게 달려들게 만들기까지 하니 말이다.
‘차가 아직 뜨거운데. 엎지르면 델 텐데……. 어.’
정작 타오르는 건 딜런의 입술이 닿은 다원의 입술이었다. 다원은 이미 뇌가 다 타 버려 녹아 없어진 것 같았다.
딜런은 다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을 핥으니 다원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 틈으로 혀를 조금 밀어 넣자 좁은 입 안은 신기하게도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공간을 넓히고 줄이고를 반복했다. 딜런은 그것이 기분 좋으면서도 참 이상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날 밀어 내지 않는 거야?’
예상과 달리 다원은 뜨거운 차를 얼굴에 끼얹지도, 뺨을 때리지도 않은 채 키스에 응해 오고 있었다. 딜런은 더 이상 생각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다원을 감싸 안았다. 그가 가만히 안겨 오자 조금 더 힘주어 끌어당겼다. 딜런은 침대 헤드에 기대며 다원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다원도 자석에 이끌리듯 딜런에게 안겨 목을 끌어안고는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등을 쓸어 올리며 끌어안는 딜런의 움직임이 좋았다.
둘은 키스를 계속 이어 나갔다. 서로가 서로의 입 안을 돌아다니자 질척질척한 소리가 방 안에 퍼져 나갔다. 딜런이 다원의 혀를 조금 힘주어 빨아 당겼다.
“흐으음…….”
다원에게서 들려오는 낮은 신음이 듣기 좋았다. 아랫입술도 조금 당기자 다원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아.”
다원은 아랫배가 찌르르 당겼다. 몸에 열이 나고 숨이 가빠 왔다.
“더워…… 하아.”
다원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허리를 앞뒤로 아주 조금 움직였다. 다원의 움직임에 딜런이 답하듯 움직였다.
딜런은 길게 드러난 다원의 목을 혀로 살짝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얇은 상의 속으로 손을 넣어 배에서 가슴까지 쓸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 단단한 젖꼭지가 닿아 왔다.
다원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기분 좋은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래에 힘이 들어가며 허리가 저절로 빨리 움직여졌다. 사타구니 아래에 깔린 딜런의 것이 단단해지자 왠지 모를 호승심이 일었다.
딜런이 그의 상의를 벗겼다. 다원도 팔을 들어 그를 도왔다. 딜런은 자신의 윗옷도 눈 깜짝할 사이에 벗어 버리고 다원의 젖꼭지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아…….”
그 아찔한 느낌에 다원의 고개가 다시 뒤로 젖혀졌다. 다원은 딜런의 고개를 자신의 가슴으로 더 끌어당겼다. 마치 더 해 달라 조르듯이.
딜런은 살짝 깨문 젖꼭지를 핥으며 놓아주고 다른 쪽을 물어 빨아 당겼다. 두 손은 다원의 등을 감싸듯 안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다원은 그의 따뜻하고 큰 손이 등을 감싸 내리자 앓는 소리를 냈다. 다원의 속옷 안으로 파고들어 간 딜런의 손이 엉덩이를 부드럽게 잡아 놓았다 했다.
“흐으응.”
딜런의 목에 고개를 파묻은 다원은 아래를 비비며 끙끙거렸다. 그의 손이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오자 다원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 틈을 타 바지와 속옷이 동시에 벗겨지고 미끈한 그의 몸이 드러났다.
어느새 다원의 손도 딜런의 바지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다원은 그의 것을 잡고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그의 허벅지 위에 제 사타구니를 비비며 천천히 움직였다.
“딜런…….”
다원이 딜런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볐다. 딜런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거렸다. 씩 웃으며 다원을 올려다보자 다원도 같이 웃었다. 둘은 장난처럼 서로의 혀를 맞대고는 빨아 당기고 놓았다 하며 키득거렸다.
다원이 딜런의 바지를 내리려 하자 딜런이 얼른 벗어 버렸다. 속옷도 입지 않은 그의 것은 이미 훌륭하게 서 있었다. 다원이 조금 더 만져 주자 금세 그 끝에 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원의 엉덩이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랑한 엉덩이 살이 딜런의 손가락 사이로 볼록볼록 삐져나왔다.
“하아…… 마시멜로 같아.”
“그런 말 처음 들어 봐요.”
딜런이 다원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놓으며 엉덩이 골 사이로 파고들더니 메마른 다원의 주변을 지분거렸다. 다원은 장난처럼 그의 손을 피해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어서 다원이 제 손가락을 딜런의 입 안에 넣었다. 딜런은 혀를 뾰족이 세웠다 넓게 폈다 하며 그의 손톱 아래부터 손가락 사이사이를 꼼꼼히 핥아 주고 빨았다. 다원의 긴 손가락들이 금세 딜런의 침으로 축축해졌다.
다원은 손을 뒤로 돌리고는 스스로 안에 넣어 허리를 움직였다. 다원의 입꼬리가 야하게 올라갔다.
“하아. 딜런…….”
“야해, 다원.”
다원의 모습에 딜런은 점점 달아올랐다. 그의 몸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핥고 빨며 입 맞추던 딜런은 제발 조금만 더 힘을 내보라는 듯 다원의 것을 부드럽게 잡았다. 촉촉하게 젖어 가는 작은 요도구를 엄지 살로 살살 문지르자 다원도 그의 것을 잡고 따라 했다. 그러면서 뒤도 착실히 넓혀 갔다.
곧 방 안이 꿀쩍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하아, 다원.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아.”
다원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딜런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달랬다. 그러고는 제 사타구니를 그의 허벅지에 슬슬 비볐다. 딜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야했다.
“당신 정말……. 누가 이런 모습을 상상하겠어.”
딜런의 손이 다원의 안을 파고들어 갔다. 둘의 손가락이 다원의 안에서 같이 움직였다.
“으응.”
다원은 그의 어깨를 짚고 무릎걸음으로 딜런에게 다가갔다. 딜런이 자신의 것을 잡아 쓱쓱 쓸어 올리고는 다원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꽉 닫힌 입구에 잘 맞췄다. 다원이 천천히 몸을 내렸다.
“으으음.”
다원에게서 조금은 힘겨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입구를 벌리고 들어오는 묵직한 느낌에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딜런은 그의 단단하게 선 작은 젖꼭지를 혀로 살살 굴리며 힘들어하는 그를 격려했다.
“으윽, 하아.”
쑤욱, 굵은 머리 부분이 들어갔다. 다원은 짧은 신음을 터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미간은 잔뜩 찌푸린 채였다.
“흐음, 다원.”
다원이 엉덩이를 조금씩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그의 안이 꼬물거렸다. 안을 뚫고 들어간 것에 적응하는 다원에게 딜런은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딜런은 참을성 좋게 그를 기다렸다. 어서 빨리 그가 준비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하아아. 딜런.”
다원은 딜런을 내려다보며 조금 더 아래로 몸을 내렸다.
“하아. 지금 당신 너무 예뻐.”
결국 딜런의 것을 다 삼킨 다원은 그의 목에 매달렸다. 딜런도 다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끌어안고 있었다. 다원의 안쪽은 딜런의 것에 맞추듯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침내 그의 모양에 딱 맞게 속살이 맞춰졌다.
“하아. 따뜻해.”
“딜런, 딜런.”
딜런이 다원의 목에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다원이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맞춰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듯 허리를 움직였다. 다원의 움직임에 딜런은 소름이 돋을 만큼 황홀했다.
“너무 좋아. 흐윽, 다원.”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움직이는 다원의 골반에 딜런은 그저 손을 올린 것이 다였다. 착 달라붙어 물어 오는 따뜻한 그의 속살과 허벅지 위에서 요염하게 비벼지는 그의 움직임, 귓가를 달콤하게 파고드는 숨결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아슬아슬한 신음만이 전부였다.
딜런의 것은 다원의 안을 꽉 채웠다. 다원은 제 것을 잡고 허리를 움직였다. 다원의 작은 숨소리 하나에도 반응하며 답해 오는 그였다. 다원은 자신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같이 느껴 주는 그가 그저 좋았다.
“오래오래 느끼고 싶어.”
다원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더 깊이 파고들어 왔으면, 여기저기를 마구 찔러 왔으면 좋겠어. 이대로라면.’
점점 빨라지는 다원의 허리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아…….”
성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다원의 움직임에 딜런도 같이 움직였다. 날씬한 골반을 잡고 허리 움직임에 맞춰 움직였다. 빨개진 다원의 목덜미가 너무 섹시해 보였다. 눈물이 고여 촉촉한 두 눈가와 점점 달아오르는 뺨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때 다원이 제 것을 힘주어 잡으며 딜런의 것을 꽉 물어 왔다.
“아아!”
“윽.”
딜런이 다원을 꽉 끌어안았다. 다원은 정신이 아찔했다. 살이 맞닿아 있는 다리 사이가 뜨끈하게 젖어 들었다. 둘의 거친 숨소리가 서로의 귓가에 퍼져 나갔다. 같이 맞은 절정에 두 사람은 한동안 가시지 않은 여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딜런은 여전히 절정에서 허우적대는 다원을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 다원의 가슴과 배가 얕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눈을 감고 이불에 몸을 나른하게 비볐다.
이제 딜런이 다원에게 답할 차례였다. 딜런은 그의 쫀득쫀득한 팔 안쪽 살을 조몰락거렸다. 땀이 살짝 밴 겨드랑이를 지나 가슴까지 내려온 딜런이 손바닥을 펴 가슴을 덮었다. 말랑말랑해진 젖꼭지를 엄지로 살살 비벼 주자 다시 딱딱하게 일어섰다. 다원에게서 다시 따뜻한 숨결과 듣기 좋은 앓는 소리가 같이 흘러나왔다.
“하아, 딜런.”
딜런은 온몸으로 다원의 몸을 빈틈없이 덮어 눌렀다.
“흐으음.”
다원은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신음을 뱉으며 딜런을 마주 안았다.
‘하는 짓도 예쁘네.’
다원의 반짝이는 입술이 딜런을 유혹했다. 딜런은 그의 윗입술을 살짝 물고 빨아 당겼다. 이윽고 눈을 감은 다원이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천천히 파고들어 갔다.
‘사랑스럽네.’
다원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침대 위엔 둘의 살이 비벼지는 젖은 소리뿐이었다. 딜런은 쪽 소리를 내며 다원의 입술을 놔주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앙증맞은 턱, 그 아래 목젖, 쇄골 사이 움푹 들어간 우물에도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다원은 애를 태우며 타고 내려가는 딜런의 입술이 간지러웠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몸을 뒤척이자 딜런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다원의 젖꼭지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아앙, 딜런. 싫어!”
귀여운 앙탈을 부리는 다원을 보며 딜런이 혀를 살살 굴리자 그는 곧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자지러졌다. 아무래도 젖꼭지가 민감한 것 같았다.
딜런은 너무 달고 맛있어 입에 문 것을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츄룹츄룹. 젖은 소리를 크게 내며 혀를 넓게 펴 힘을 줘 핥았다.
“하아, 하아.”
다원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혔다.
한참 동안 다원의 젖꼭지를 가지고 놀던 딜런이 어렵게 그곳을 놔주더니 이번엔 옆구리를 타고 내려갔다. 고개를 든 그의 것이 궁금했지만 가는 길을 대충 갈 수는 없는 일, 다원의 옆구리에 딜런이 뺨을 비볐다.
다원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배가 쑥 꺼지며 갈비뼈가 드러났다.
‘가지런해서 예쁘긴 한데 너무 앙상해. 밥을 든든하게 먹여야겠어.’
딜런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기특한 생각은 잠시, 그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말랑한 듯 기분 좋은 탄력이 느껴지는 배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옅은 땀 냄새와 비누 냄새, 아기 냄새가 동시에 딜런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으으윽.’
그것은 세상 그 어떤 페로몬보다 강력한 한 방이었다. 딜런은 아랫배가 뭉글하게 당겨 왔다. 재빨리 아래로 내려가자 다원이 다리를 세워 힘을 줬다.
‘설마 이제 와서 부끄러운 거야?’
딜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다원을 올려다봤다.
‘세상에나. 지금 그 표정……. 정말 부끄러운 거야?’
다원은 딜런의 움직임이 기분은 좋았지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아니, 부끄러웠다. 처음에야 무슨 정신으로 그리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몰아친 태풍 후에 머릿속은 너무 청명해졌다.
방금 땀을 흠뻑 흘려 끈적끈적한 몸에 정액과 체액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 것이 뻔했다. 더구나 딜런이 젖꼭지를 빨 때부터 눈치 없는 놈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딜런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젖꼭지 좀 빨아 줬다고 바로 세우기나 하고.’
“딜런. 놔줘, 제발. 딜런.”
다원의 애원에도 딜런의 손은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옆으로 벌렸다. 엎드린 자세로 힘도 별로 들이지 않고 쓱 밀었을 뿐인데 최선을 다해 버틴 다원의 다리는 어이없게도 금세 벌어졌다. 다원은 순식간에 얼굴에 피가 몰리면서 화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딜런의 놀란 얼굴과 딱 마주쳐 버렸다.
‘이건 완전 최악이야.’
다원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몸을 타고 다시 올라오는 딜런의 움직임이 무시무시했다. 다원은 딱 죽을 맛이었다. 쪽.
‘어?’
뜻밖의 뽀뽀와 함께 그에게서 전혀 생각지 못한 달콤한 말이 들려왔다.
“당신 왜 이렇게 귀여워?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 이건 반칙이야.”
‘딜런 당신도 제정신은 아닌가 봐.’
입술에 살짝 닿아 오던 딜런의 입술이 언제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아래를 덥석 물어 오는 그의 행동에 다원은 정말 심장이 펑 하고 터져 버리는 줄 알았다.
“아아!”
축축하고 따뜻한 딜런의 입 안과 조금은 거친 혀가 다원의 아래를 물고 빨며 핥았다. 솔직히 그의 펠라티오는 이 침대 위에서 그가 한 모든 행동 중에 가장 어설펐다. 그러나 다원에게 그런 건 이미 전혀 상관없었다. 그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하아아, 딜런. 딜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딜런은 다원의 것을 그의 배에 딱 붙여 눌렀다. 그리고 그 아래를 핥으며 손가락으로 안을 조금씩 파고들어 갔다. 방금까지 딜런의 것이 들어가 있던 그곳은 원래대로 꼭 다물려 있었지만 안쪽은 사정이 달랐다.
딜런은 완전히 일어선 녀석을 다원의 안으로 살살 밀어 넣었다. 그의 것을 기억하고 있는 다원의 안은 금방 활짝 열렸다.
“아아. 다원.”
쑤욱 빨려 들어가는 아찔한 기분은 방금 전 힘겹게 들어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쾌감이었다. 딜런은 무릎을 꿇은 채로 다원의 엉덩이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날씬한 그의 등허리가 들리며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딜런이 큰 손으로 무릎부터 허벅지 안쪽을 한 번에 훑어 주자 그의 구멍이 순간 조였다.
“하아아.”
“으윽!”
다원, 그는 잠시도 방심하면 안 되는 녀석이었다.
딜런은 다원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잡고 허리를 살살 흔들었다. 아래가 맞닿을 때마다 찰싹찰싹 소리가 났다.
‘아…… 궁금해. 보고 싶다.’
딜런은 진심으로 그의 엉덩이에 제 고환이 부딪치는 순간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쉽네.’
오늘은 포기하고 다원의 안을 들락날락거리고 있는 아래에 집중하기로 했다. 안으로 치고 들어갈 때마다 그의 배 위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그의 것도 놓칠 수 없었다. 딜런은 다원의 것을 가볍게 잡아 쓸어 올렸다.
“다 예뻐.”
그 위에 한 줌의 검은 풀도 놓칠 수 없었다. 까칠한 음모를 지나 위로 올라간 그가 납작한 배를 지나 가슴을 향했다.
“예민해. 그게 마음에 들어.”
가장 민감한 것은 젖꼭지였다. 특히 왼쪽 젖꼭지.
“하지만 이게 가장 예뻐. 나를 부드럽게 받아 주는 작은 입술.”
딜런은 다원을 부드럽게 하지만 힘주어 끌어안았다. 허리를 움직이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딜런. 하아, 딜런…….”
다원은 정신을 차릴 틈 없이 몰아치는 섹스도 좋아했다. 그런 섹스는 언제나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러운데…… 힘 있게 꾹꾹 눌러 주면 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아.’
작은 움직임이 하나하나 느껴지는 이런 뭉근한 섹스는 정말 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온몸에 지펴진 불이 구석구석 빠짐없이 타올랐다. 새빨갛게 달아오르면 잠시 느려지지만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잔잔한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간질간질 불어오는 그 바람에 죽어 있던 작은 감각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깨어났다. 발끝의 작은 솜털 하나하나까지 바짝 곤두세우는 쾌감이 온몸을 관통하자 어느새 다원의 배 위가 흥건하게 젖어 갔다.
“아, 딜런. 어떡해. 나 안 멈춰. 으으으. 어떡해…….”
“아니야. 다원. 이거 완전 대박인데. 나를 이렇게까지 느껴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다원의 것은 발기한 채로 묽은 액체가 나오고 있었다. 딜런은 그의 것을 살살 달래 주었다. 다원에게 잘했다는 칭찬의 키스도 잊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런 강력한 쾌감은 처음인 다원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으니 그냥 둘 뿐이었다.
“아, 딜런. 으으으. 나 정말 어떻게 돼 버렸나 봐.”
“아니야. 완전 멋져. 사랑해. 다원.”
다원의 귓가에 딜런의 달콤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