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화장실 문이 열리자 어두운 방 안으로 빛이 쏟아졌다. 침대 위, 이리저리 구겨진 이불 사이로 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다원이었다. 185센티의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인 체이스가 침대에 걸터앉았는데도 다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잘 참았는데.”
다원은 평일엔 졸업 논문 준비와 회계 아르바이트로 바빴다. 체이스는 주말만이라도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린 주말이었다.
“김빠진 소다수같이 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질척하게 굴었어. 처음처럼.”
체이스가 이리저리 구겨진 이불을 한쪽으로 걷어 냈다. 어젯밤의 흔적을 잔뜩 달고 파묻혀 있던 다원의 미끈한 나체가 훤히 드러났다.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길고 가는 목, 반듯한 어깨, 미끈하게 빠진 팔과 다리. 군더더기 없이 쭉 빠진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체이스의 손이 지나가자 다원은 잠결에도 간지러운지 뒤척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매끈한 피부 아래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흐음…….”
다원은 얼굴을 베개에 비비며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체이스는 그의 가지런한 척추를 따라 덧그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날씬한 허리를 지나 동그란 엉덩이까지. 걸리는 것 없이 미끈하게 쭉 뻗은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도톰한 곳이었다.
할짝.
엉덩이를 할짝거리자 그는 한 번 더 뒤척였다.
“으응.”
체이스는 그의 엉덩이를 잡아 살짝 벌렸다. 두어 번 움찔거리다 다시 다물린 그곳은 아직 젖어 있었다. 체이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이런. 이래서 문제야. 넌 나를 조금도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단 말이야.”
굵은 엄지를 다원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미끌거리며 쑤욱 들어갔다. 그의 안은 아직도 녹진하게 젖어 있었다. 체이스는 조심스럽게 다원의 허벅다리에 올라앉아 등을 큰 손으로 한 번 쓸어 올렸다. 그의 등으로 물기가 번져 나갔다.
“으으윽.”
다원은 다시 몸을 뒤척였다. 허벅다리가 체이스에게 깔려 엉덩이만 조금 들썩이고 말았다.
“보채지 마. 원하는 만큼 해 줄게.”
체이스는 다원의 안에 검지와 중지를 넣어 빙글빙글 돌렸다. 이미 빳빳이 일어선 체이스의 아래도 잡아 아래위로 쓱쓱 훑었다. 꿀쩍꿀쩍 소리를 내는 다원의 안에서는 어젯밤 내보낸 체이스의 정액이 조금 더 흘러나왔다.
“야해.”
체이스의 아래는 좀 더 크기를 키우며 경도를 더해 갔다. 그걸 다원의 통통한 엉덩이에 탁탁 내리쳤다. 어느새 흘러나온 프리컴에 그의 엉덩이가 번들거렸다. 체이스는 다원의 엉덩이 골 사이로 그것을 깊숙이 묻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익숙한 위치를 정확히 찾아 들어갔다. 밤새 잘 뚫어 놓은 길은 부드럽게 열렸다.
“으으응.”
“하아. 넌 정말 신기해. 넣을 때마다 이렇게 달라붙어 오다니. 희한해. 좋아.”
다원의 도톰한 엉덩이를 잡고 체이스가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체이스의 거친 음모가 비벼지면서 다원의 엉덩이가 새빨개지고 있었다. 처음 부드럽던 움직임이 어느새 빨라졌다. 이쯤 되면 곯아떨어져 있던 다원이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체이스. 뭐야. 아아…….”
다원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지만 체이스의 귀에는 섹시하게 들릴 뿐이었다. 철퍽철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 빨라졌다.
“하아. 다워나. 흐윽.”
잠이 달아나면서 안을 무식하게 파고들어 오는 느낌이 점점 선명해졌다. 다원은 본능적으로 엉덩이에 힘을 주며 몸을 뒤척였다.
“아아. 아파. 아…….”
“크윽. 하…….”
갑자기 조여 오는 힘에 잠시 멈칫한 체이스가 자세를 바꿨다. 안에 들어간 것이 빠지지 않게 살살 움직이면서 다원의 엉덩이 위에 쪼그리듯 앉아 그의 손을 등 뒤로 모아 잡았다.
“다리 벌려 봐. 엉덩이 들고. 그래야 더 깊이 들어가지. 응?”
“흐으응. 힘들어. 흑.”
체이스는 다원이 다리를 벌리자마자 빠르게 팍팍 치고 들어갔다. 그가 치고 들어갈수록 다원의 다리가 더 넓게 벌어졌다. 체이스가 그의 허리를 꾹 누르자 다원의 엉덩이가 더 들렸다.
다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체격이 큰 체이스에게는 귀여운 앙탈 수준이었다. 그는 육중한 무게로 다원의 몸을 내리누르며 같은 각도로 찔러 댔다. 다원은 딱 죽을 맛이었다.
“아악! 하악. 그…… 그…….”
무슨 말을 할지 알아챈 체이스가 다원의 입을 막아 버렸다.
“자기, 너무 좋아. 자기도 좋은 거지? 응? 그러니까 이렇게 오물거리는 거지? 너무 조여.”
다원이 느끼기에도 제 아래는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정말! 왜 이래. 그만 좀!’
아무래도 제 아래와 머리는 협동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원의 열 발가락이 절로 곱아 들었다. 다원은 어떻게든 빨리 끝을 내고 싶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그가 최대한 힘을 줘 안을 조였다.
“하아. 너도 좋은 거지? 좋다고 말해 줘. 윽, 이렇게 아래는 좋아 죽으려고 하면서.”
“아아. 아악! 흑.”
‘이게 아닌데…….’
퍽! 퍽! 퍽! 그의 움직임이 더 난폭해졌다. 다원의 선택은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할 뿐인 것 같았다.
“엉덩이 들고 더 조여 봐. 제대로 싸 줄게. 응?”
그 한마디에 다원은 얼른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체이스는 다원의 양손을 결박하듯 잡아 내리누르고 속도를 올렸다. 다원은 그가 들어오는 것에 맞춰 꽉 물었다.
‘제발 좀!’
그때 체이스에게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들려왔다.
“하악, 크으윽. 크으…… 하. 하.”
다원의 몸 안에 정액을 토해 낸 체이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한참을 움찔거리다 천천히 빼내며 다원의 엉덩이를 옆으로 잡아 벌리자 그의 안에서 하얀 정액이 흘러나왔다. 회음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체이스는 반쯤 죽은 것으로 끌어올려 집어넣고는 다시 여러 번 쳐 댔다. 퍽! 퍽! 퍽! 일부러 소리를 크게 냈다.
“하아앙. 체이스.”
체이스는 다원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어 그의 것을 엉덩이 아래로 잡아당겨 살살 문질렀다. 거의 간질이는 수준이었다.
“아아앙. 그만.”
“다워니도 내보내야지. 내보내고 싶지 않아?”
체이스는 다원이 애원하며 내보내 달라 할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다원은 이제 안쪽도 화끈거리고 억지로 잡아당겨진 아래도 아팠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체이스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다원은 알아서 체이스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를 만들었다.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엉덩이를 조금 뒤로 뺐다. 허벅지 사이에 낀 다원의 것이 그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체이스는 다원의 하얀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구멍과 아래가 함께 보이는 이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흐윽. 만져 줘, 얼른. 제발…… 빨아 줘. 어서 해 줘.”
“우리 다워니 착하네.”
다원의 입에서 애원의 말이 나오자 체이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다원의 안에서 거의 힘이 빠진 것을 빼내고 그의 엉덩이에 얼굴을 묻었다. 젖은 엉덩이에서 회음부를 지나 다원의 것을 한 번에 핥아 내린 체이스는 그다음 미친 듯이 핥고 빨았다.
“하아아. 으응.”
처음엔 식겁을 하던 다원도 이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러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끝내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으윽. 정말 비위도 좋아. 아침부터 빈속에 그게 들어가? 하아.’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안에서 흘러나온 모든 것을 싹싹 핥고 빨고 삼켰다. 그의 현란한 혀 놀림이 계속될수록 다원의 머릿속은 점점 멍해졌다.
‘이젠 정말 한계야. 이 짐승 같은 놈.’
잠에서 깨기도 전에 기를 다 빨린 다원은 지쳐 다시 잠들어 버렸다.
* * *
“너의 그 사랑스러운 애기는 어디다 놔두고 나를 불러내셨을까?”
데미안의 밉살스러운 말에도 체이스는 열심히 배를 채웠다.
“이 시간까지 쫄쫄 굶으셨나 봐. 걸신들린 듯이 쳐 잡수시네.”
체이스는 입 안에 든 것을 시원한 자몽에이드와 함께 한 번에 삼켰다. 티슈로 입을 닦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체이스가 이렇게 질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일 때는 필시…….
“일어나서 먹은 거라고는 그와 내가 싸지른 것들뿐이라 배가 고파.”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데미안이었다.
“재수 없어! 그래서 걘 뭐 하는데?”
“자.”
“결국 난 또 대타라는 거잖아!”
“아니지. 넌 나의 하나뿐인 친구고 그는 나의 하나뿐인 연인이지.”
“…….”
데미안은 입맛이 싹 달아난 듯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체이스는 아직도 배가 고파 보였다.
“실컷 먹었다며.”
째려보면서 톡톡 쏴붙이지만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 주는 데미안이었다.
“그래서 요즘 뭐가 그리 불만이실까? 내 친구 체이스 군은. 멀쩡한 애를 날름 잡아 드시고도 이렇게 게걸스러우신 걸 보면.”
“잡아먹은 거 아냐.”
“이 시간까지도 일어나지 못하고 자고 있다는 건 안 봐도 뻔하지.”
“사랑을 쏟아부은 거지.”
“쳇! 너 그러다 후회해.”
“뭐가?”
데미안이 주변을 한 번 살피고는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매일 밤 하다간 그거 얼마 못 써. 고장 나. 너덜너덜해진다고. 아직까지도 쑤실 맛이 난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체이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넌 다른 사람에겐 안 그러면서 다원에겐 왜 그렇게 고약해?”
“내가 언제?”
“우리 관계를 애들 불장난으로 취급하고 게다가 물건 취급까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
체이스가 포크를 내려놓자 데미안이 한발 물러났다.
“아닌 게 아니라 네 그 무식한 걸로 끊임없이 쑤셔 대면 멀쩡한 것도 터져 나가기 마련이야.”
“걘 안 그런데. 할수록 더 쫀득거려.”
이쯤 되자 체이스도 친구고 뭐고 막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름다운 데미안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곧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뭐지? 그 작위적인 미소는?”
“인간이 아니니까. 돌(doll)이니까.”
이번엔 정말 화가 난 체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미안이 두 손을 들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 내가 좀 심했어.”
체이스는 시선을 피했다. 데미안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걱정의 말을 했다.
“하지만 너도 그랬잖아. 걔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네가 아무리 사랑을 표현하고 좋다고 해도 무덤덤하다고. 그런데 또 밤일은 그렇게 좋다니…… 너무 아이러니하잖아. 너의 친구로서 그 정도 걱정은 당연한 거 아냐?”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체이스는 데미안의 말에 솔깃한 눈치였다. 데미안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걱정이잖아. 네 말대로 운명이라는 거, 한눈에 반했다는 거, 이제는 아니라고 안 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는…… 그의 행동은 여전히…….”
‘아무에게도 주기 싫어. 내 친구, 내 연인, 나의 사랑. 너를 가진 그 건방진 것이 감히 너를 이렇게 대한다는 건 용서할 수 없지. 가만 놔둘 수 없는 일이잖아. 내 눈에 눈물이 나게 했으니 그의 눈에는 피눈물이 나게 해 주겠어.’
데미안은 속내를 숨기며 더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 아까워 죽겠는데 걘 왜 그런다니……. 네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하여간 복에 겨웠지.”
그는 정말 체이스가 아까워 죽을 것 같아 보였다. 체이스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오. 잘생긴 내 친구가 웃었다. 이렇게 웃으니 얼마나 좋아. 좀 더 활짝 웃어 보라구.”
애교를 떨어 오는 데미안의 모습에 체이스도 크게 웃어 버렸다.
“하하하. 하여간 데미안. 내가 너를 어떻게 당해. 내가 요즘 너무 예민했다. 네가 그러는 것도 이해해. 당연히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정말 그런 사람 아니야. 요즘 들어 좀 그런 거야. 사귀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
“나도 이렇게 길게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어. 정말 예민해졌나 봐. 너에게 괜한 투정을 부린 것 같아. 미안해.”
데미안은 다원을 감싸는 체이스의 사과에 무너지려는 미소를 간신히 유지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우리 사이에…….”
데미안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체이스는 사과와 빵, 우유를 샀다.
“다시 잠들지만 않았어도……. 오늘 같이 밥 먹고 쇼핑하려고 했더니.”
어제 체이스의 계획 중에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스파게티도 먹다 말았고, 영화도 보다 말았고……. 마사지도……. 마사지는 너무 지나쳤고.”
체이스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
* *
“으윽. 아파. 하지 마. 그만하라고.”
체이스는 돌처럼 딱딱하게 뭉친 다원의 어깨를 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원은 아프기만 한 듯 짜증을 냈다.
‘기껏 생각해 줬더니…….’
예상치 못한 다원의 반응에 체이스는 화가 났지만 참았다.
“아프다고. 체이스, 심술 좀 그만 부려.”
체이스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다원의 심술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다워나. 요즘 자기 나한테 너무한 거 아냐?”
“미안해.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잖아. 나 정말 피곤해. 그리고 너무 아프다고, 체이스. 아! 제발 그만해.”
“후우. 알았어. 그럼 정말 살살 해 줄게. 너 어깨 정말 장난 아냐.”
다원은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체이스는 이왕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하고 싶었다. 오일을 찾기 위해 욕실에 들어설 때였다.
“정말 괜찮은데……. 아까 낮에…… 친구가 마사지…….”
“누가 뭘 해?”
체이스는 마사지 오일을 찾던 걸 중단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다원은 그새 눈이 감기고 있었다.
‘하! 기도 안 차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다 그만두려던 체이스는 생각을 바꿨다. 다른 사람이 만졌다는 그의 어깨도 너무 신경 쓰였고, 애인을 옆에 두고 조는 것도 보기 싫었다.
“다른 사람이 주물럭거리게 놔뒀단 말이지. 그 어깨 가만히 놔둘 순 없지.”
굳게 마음먹은 체이스가 까무룩 졸고 있는 다원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티셔츠를 벗기고 이젠 바지마저 벗겨 버렸다.
“제발 체이스. 뭘 이렇게까지. 필요 없어.”
“아니, 아니지. 할 땐 확실하게 해야지. 늘 그런 식이니까 우리 다워니의 어깨가 그 모양인 거야.”
“그럼 그냥 어깨만 조금 주물러 주면 돼.”
고등학교 쿼터백 출신인 체이스는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인 다원을 한 번에 제압했다. 거실 바닥엔 이미 커다란 샤워 타월이 깔려 있었고, 체이스는 다원을 달랑 들어 그 위에 눕혔다.
“으아악!”
체이스는 다원의 팬티마저 홀라당 벗겨 버렸다.
“몸에 힘 풀어.”
체이스는 가장 좋아하는 다원의 등과 엉덩이에 마사지 오일을 쭉 뿌렸다.
“윽. 차가워.”
차가운 오일에 다원의 몸이 굳었다. 체이스는 조금 힘을 실어 다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당연히 다원은 체이스의 큰 손 아래에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으아악! 체이스, 제발 조금만 살살. 으윽.”
체이스도 여기까진 순수하게 마사지만 할 생각이었다. 물론 심술이 조금 실리긴 했지만. 그러나 오일이 발린 손은 브레이크가 들지 않았다. 자꾸만 다원의 엉덩이 사이로,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졌다.
“체이스, 난 어깨가 아프다고. 거긴 하나도 아프지 않, 으…….”
“미안. 손이 미끄러졌어.”
체이스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간 곳은 하필이면 다원의 그곳이었다. 엉덩이 사이 깊숙한 그곳. 체이스는 맹세코 여기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대단한 자제력으로 곱게 물러설 수 있었다.
“체이스. 미안한데 나 오늘은 정말 컨디션이 말이 아니야. 그냥 이번 주말까지만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주면 안 될까?”
다원의 그 말이 문제였다.
“가만히, 내버려 둬?”
“……아니, 그게 말이야.”
그제야 다원도 체이스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널 상당히 불편하게 했나 봐.”
그런데 이번에는 체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문제였다.
“하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냥 난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를…….”
“여기서 얼마나 더 이해를 바라는 건데.”
체이스가 정말 정색을 하자 다원은 아차 싶었다. 다원은 체이스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좀 쉬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럼 후딱 들어주고…….’
체이스가 원하는 건 언제나 하나였다. 적어도 다원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내 말은…… 그…… 미안해. 너무 아파서 그랬어. 싫은 건 아니었어.”
사람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듯 체이스는 그 부분이 그냥 그런 남자였다. 다원은 백 마디 말보다 그냥 행동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체이스는 다원의 행동에 되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고 싶은 건 맞는데…… 원한 행동이기도 한데……. 네가 이러면 데미안에게 아니라고 하기가 애매해지잖아.’
아래를 만져 오는 다원의 손길에 체이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2주 넘게 참아 왔던 몸은 즉각 반응했다. 오일의 미끌거림이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체이스는 빠르게 달아올랐다.
처음은 정신없이 그를 파고들어 가느라 몰랐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하지만 너무 조용했다.
‘하아, 젠장!’
다원은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후딱 해치우기 위해 참고 있는 것 같았다.
* * *
“그건 나에게도 상처였다고…….”
“응? 어디 다쳤어?”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집에 들어온 체이스가 혼잣말을 할 때 다원은 막 샤워를 하고 나오던 중이었다. 다원은 그가 다친 줄 알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이제 일어난 거야?”
“응. 눈을 뜨니까 벌써 이 시간이더라고……. 이게 다 뭐야?”
식탁 위엔 뭔가가 가득 놓여 있었다.
“미안. 내가 해야 하는데……. 이제 일어나는 바람에 청소도 못 했어.”
“아니야. 피곤하니까 그럴 수 있지.”
“그래도…….”
가정부를 쓰지 못하게 한 건 다원이었다. 집도 생활비도 모두 체이스가 부담하는데 너무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다원이 집안일을 자청한 것이었는데…….
지난 3년간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 사소한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지난 한 달 사이 그 문제들은 점점 심각해졌다. 2주 동안 밀린 빨래만 해도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일단 시트라도…….’
다원은 정말 안 되겠다 싶어 침대 시트라도 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시트를 보관한 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아, 어떡해.”
체이스는 이미 더러워진 시트를 싹 걷어 나오고 있었다. 빈 장롱 앞에 선 다원을 발견하고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걱정 마. 어제 아침에 내가 세탁기 돌렸어. 건조기에 넣고 꺼내는 걸 깜빡했네.”
“아, 정말 미안. 그럼 다림질은 내가 할게.”
“그래. 일단 뭐 좀 먹고 하자. 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다원은 타월 한 장만 걸친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타미가 일을 많이 시켜? 너한테만 그러는 거 아냐? 어리고 인턴이라고 막 부리지!”
“아냐. 팀장님은 나한테 잘해 주셔. 지금은 사무실 전체가 비상이야. 아마 팀장님은 지금도 서류에 파묻혀 있을걸?”
“그게 다 그 녀석이 무능력해서라고!”
그동안 체이스는 커피를 내리고 과일을 먹기 좋게 자른 뒤 빵도 접시 위에 올려 두었다. 다원은 겨우 옷을 챙겨 입었을 뿐이라 괜히 머쓱했다.
“괜찮으니까 와서 앉아. 이거라도 좀 먹어.”
“응.”
체이스가 타미를 욕하는 모습을 처음 본 건 다원의 퇴근이 늦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비까지 오기 시작하자 체이스는 다원이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데리러 회사까지 왔다.
‘다원아. 데리러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체이스가 다원과 같이 나오던 타미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붓는 것이었다. 다원은 거의 심장마비를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타미는 가볍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곤 체이스를 향해 우산을 ‘팡!’ 소리가 나게 펴며 자리를 떠났다.
‘헉!’
알고 봤더니 둘은 죽마고우였다.
“하여간 일도 못하는 새끼가 상관이니까 밑에 있는 사람까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거라고!”
그 후로 체이스는 다원의 퇴근이 조금만 늦어지거나 그가 피곤해하면 이렇듯 타미의 욕을 해 댔다.
‘팀장님 죄송요. 다 제 탓이에요. 윽, 목이 왜 이렇게 아프지.’
다원은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포크를 내려놓는 다원을 보자 체이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너 어제 스파게티도 거의 못 먹었잖아.”
“그랬나? 요즘 영 입맛이 없어.”
‘윽. 써.’
다원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체이스가 다원의 등 뒤에 서서 어깨를 살살 만졌다.
“그 일, 계약이 언제까지라고 했지?”
“다음 달.”
“어제 리포트로 졸업 논문도 끝이지?”
“응. 마지막 수정본이고 교수님의 반응도 좋았어. 아마 이달 말이면…….”
“그럼 이제 좀 한가해지겠다.”
다원은 체이스의 손을 잡으며 뒤돌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체이스는 이미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우리 여행이나 갈까?”
“진심이야?”
“……응?”
정색을 하는 다원이 체이스는 의아했다. 체이스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다원은 자신의 입장을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애인에게 욱해서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한가해지긴……. 이제부터 나 직장 알아봐야지. 그리고 그 일도 재계약할 거야.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직장이야 물론 그렇지만 일은 이제 그만해도 되는 거 아냐? 단순한 경력 쌓기였잖아.”
“아니야.”
다원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체이스는 갑자기 화를 내는 다원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상당히 짜증스럽네.”
다원은 얼떨결에 자리를 뜨긴 했지만 집 안 어디에도 갈 만한 곳이 없었다.
“하아. 도대체 이 집에서 내 자린 어디야?”
사실 다원이 화가 난 이유는 방금 전의 대화 때문이 아니었다. 훨씬 전부터였다.
다원은 지난해부터 취업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원서를 내는 족족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서류 전형을 통과해도 소용없었다. 면접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 다원은 국적도 인종도 달랐다. 어느 것 하나 유리한 것이 없었다. 체이스와의 관계가 아니라도 미국에서 자리 잡고 싶었던 다원의 마음은 급해졌다.
‘지난 3년을 네 품에 안겨 지낸 것이 이렇게 부메랑이 돼서 내 목을 칠 줄은 몰랐어.’
그때 연락이 온 곳이 지금 일하는 곳이었다. 다원은 벼랑 끝에서 간신히 지푸라기를 잡은 심정이었다. 간절했던 만큼 일도 열심히 했다.
‘체이스. 네가 내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이젠 나도 모르겠는걸. 내가 왜 이렇게 미국에 남으려고 하는지.’
잠시라도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원은 집을 나와 잠시 산책하기로 했다.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처음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어서 온 거였는데, 생각보다 유학 생활은 힘들었다. 동기들과 어울리는 것도 학교 공부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오기로라도 미국에서 성공하겠다 다짐했을 무렵, 다원의 앞에 체이스가 나타났다.
지금은 체이스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동안 대책 없이 안이하게 지냈던 것이 이제 와서 발목을 붙잡았다. 체이스를 만나고 너무 편하게 살아서 해이해진 게 독이 된 것 같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다원은 더 이상 미국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드시 취업을 해야 했다. 학업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외 쓸 만한 경험이나 자격은 전무했다.
“뭐 하나 내세울 만한 것도 없으면서 무슨 배짱이었던 거야. 나 정도는 이 나라에 차고 넘친다고. 으윽.”
답답한 마음에 한 번은 그런 생각도 해 봤다. 만일 체이스와 결혼을 한다면……. 그가 결혼을 원한다면 다원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만일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남자끼리 하는 결혼이 남녀가 하는 결혼이랑 똑같은 건가? 법적인 효력이 있는 거야?’
자세히 알아보기에도 웃겨 다원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됐다. 다원은 체이스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은 관계를 이 이상 끌고 싶지 않았다. 그와 대등해질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그의 곁에 스스로의 힘으로 있고 싶었다.
‘결국 문제는 취직이야. 나는 단지 고용주가 필요할 뿐이라고! 그런데 대통령 아저씨는 왜 그러시는 건데요. 아아.’
미국 국적이 없는 사람은 미국에서 취업하기가 정말 하늘의 별 따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가 되어 버렸다. 이런 와중에 체이스의 태도를 보니 순간 서러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단순 경력 쌓기라니! 여행이라니! 그런 속 편한 소리나 할 때냐고! 하아. 혼자서 이래 봐야 무슨 소용이야.”
다원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쪽지는 그대로였고 집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다원이 잠들 때까지도 체이스는 오지 않았다.
* * *
그리고 다음 날.
[미안해. 자기 일어나는 모습 보고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찾으셔서 새벽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어. 너도 알잖아, 우리 아버지 성질 고약한 거. 오늘 너한테 맛있는 거 많이 먹일 계획이었는데 속상해. 나 없어도 잘 챙겨 먹어. 이따 저녁에 전화할게.
사랑하는 너의 체이스.
P.S 어제 나의 옹졸함을 잊어 줘.]
“아. 체이스.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잖아.”
어젠 결국 화해도 하지 못하고 혼자 잠들었다. 잠결에 안아 오는 체이스의 체온을 느낀 것도 같았다.
“오늘 정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의논할 것도 있었던 터라 다원은 이 뜻밖의 소식이 너무 아쉬웠다.
“뭐 어쩔 수 있나. 이미 떠난 사람인데.”
다원은 일단 침대에서 빠져나와 냉장고 문부터 열어 보았다.
“정말 먹을 게 하나도 없네.”
전엔 다원이 학교 마치고 오는 길에 장을 봤었다. 그러면 체이스가 요리를 해 주곤 했다. 꽤 쿵짝이 잘 맞았는데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이 너무 여유가 없어진 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요즘 체이스도 바빴나? 그럼 그동안 뭘 먹고 산 거야.”
다원은 새삼 또 체이스에게 미안해졌다.
그는 물 한 잔을 마시고 미뤄 두었던 빨래를 돌렸다.
“일단 환기부터 하고, 그다음에 청소하고, 씻고. 나가서 장도 보고…….”
띵동.
그때 청아한 벨 소리가 들려왔다.
다원은 비행기가 뜨지 않아 체이스가 돌아온 것인가 하는 기대에 냉큼 문을 열었다.
“아…….”
“이런. 아직도 이러는 거야?”
그러나 찾아온 이는 데미안이었다.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벌컥 여는 버릇은 도대체 언제쯤 고쳐지는 거야? 여기가 아무리 보안이 잘되는 곳이라도 이런 행동은 정말 위험하다고. 같이 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할 거 아냐. 너 따위야 길바닥에서 먹고 자도 아무 문제 없겠지만 체이스는 다르다고!”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다원이 뭘 하든 불평불만이었다. 데미안은 이 집이 마치 제집인 양 안방부터 시작해서 화장실, 부엌을 헤집었다. 심지어 지금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 다용도실까지 들쑤시고 다녔다.
“정말 시누이가 따로 없네.”
다원은 무의식적으로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야! 너 나랑 있을 땐 다른 나라 말 쓰지 말라고 했지!”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일 뿐인데도 언제 들었는지 데미안은 시비를 걸어왔다. 그가 다원의 나라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은 언제나 ‘다른 나라’였다.
‘쟤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기는 알까?’
“하여간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어쩌다가 체이스가 이런 거지 같은 애한테 홀라당 넘어가서는 이 고생인지. 청소도 하나도 안 돼 있고, 먹을 것도 하나도 없고.”
데미안은 꺼내 놓은 청소기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네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지. 어? 그러면 네가 한다고 나선 청소라도 제대로 하고 빨래라도 잘해야지! 그 바쁜 체이스가 이런 거나 하고 있어야겠어?”
‘뭐! 가만…….’
데미안이 하는 말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마치 이 공간에서 벌어진 둘 사이의 일을 훤히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다원도 체이스와 데미안이 얼마나 친한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데미안을 불편해한다는 걸 알면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냐! 이건 아니지.’
“아하. 혹시 너 몸 하나 믿고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거야? 하긴, 네 뭘 보고 체이스가 그렇게 홀라당 넘어갔겠어. 그래도 너무 몸만 믿고 있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아가야. 사람이 주제 파악을 잘해야지!”
“누가 누구한테 홀라당 넘어갔든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 예의가 없는 건 남의 집을 마음대로 들쑤시고 다니는 당신이거든? 남이야 청소를 하든, 굶어 죽든! 내 주제 파악은 내가 해.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데미안은 바락바락 대드는 땅콩만 한 자식을 잡아 죽일 듯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원의 표정이 자동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좋은 일이 없었다. 실제로 체이스와 다투었던 모든 일들은 그가 저런 식으로 삐딱하게 나온 후였다.
“아하. 그러셔?”
하지만 이젠 다원도 체이스와 사귄 지 3년째다.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아니 데미안이 체이스를 따라다니다시피 하니 그와도 3년이었다. 다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뭐가 또 그러셔야? 그러셔는.”
“혹시 그거 알아? 모르나? 그래서 이렇게 뻔뻔한 건가? 아님 원래 뻔뻔한 종자라서 이렇게 체이스 옆에서 단물을 쪽쪽 빨아 드시고 계시는 건가?”
“뭐? 단물?”
이번엔 조금 다른 그의 분위기에 다원의 표정도 조금 심각해졌다. 그 모습에 더 오만해진 데미안이 그동안 꾹꾹 숨겨 왔던 비밀을 터트렸다.
“그 일 말이야. 네가 목숨 걸고 하는 그 일. 그거…… 정말 네 실력일까?”
“실력이 아니면?”
데미안이 다원을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다원의 머릿속에 뭔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눈앞이 아찔했다.
‘야, 이 자식아! 일 좀 그만 시켜! 내가 이러려고…….’
‘하여간에 사랑에 눈먼 놈이 내 마음을 알기나 하냐!’
‘내가 알 리가 있냐? 네 그 밴댕이 소갈딱지를.’
‘아이고, 그렇겠지. 힘만 무식하게 센 놈이 알긴 뭘 알겠어. 다원 씨가 걱정이다.’
‘내 건 내가 걱정해! 넌 네 일이나 잘해!’
체이스와 타미는 지나치게 친했다. 전에는 흘려들었던 체이스의 말이 이제는 무겁게 와닿았다.
‘내 취업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나? 그런데 그걸 왜 이 녀석이 알고 있는 건데?’
“왜? 이제 눈치챈 거야, 아님 이제 눈치챈 척하는 거야?”
데미안이 이죽거렸다. 이런 일을 하필 그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원을 미치게 만들었다.
한편 데미안이 보기에 다원의 반응은 애매했다.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상태가 어떻든 데미안은 마지막 쐐기를 박아 주기로 했다.
“뭐, 어느 쪽인지는 두고 보면 알 테고. 아무튼 이제 그렇게 열심히 일 안 해도 되겠지. 네가 가진 유일한 재주나 부리면서 체이스 옆에 더 오래 붙어 있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그만 그 가면은 벗어 던지시지.”
데미안의 얼굴은 천사들의 아름답고 해맑은 얼굴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너무나도 지독했다.
“체이스에게 말해 보든지. 내가 말했다는 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도 궁금하네.”
데미안이 나가고 난 뒤 다원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열어 놓은 창문도, 꺼내 놓은 청소기도 그대로였다. 다 돌아간 세탁기까지도. 소파에 쭈그리고 앉은 다원은 한 가지만 끊임없이 생각했다.
도대체 체이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한 번을 내색하지 않았을까?
타미를 떠올리자 다원은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 하는 사회생활이었다. 미숙한 다원이 느끼기에도 타미는 훌륭한 직장 상사였다. 그가 하는 칭찬과 평가는 다원에겐 큰 힘이 되었다. 덕분에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결국 그게 전부 체이스의 힘이었어.”
문득 살에 닿아 오는 차가운 공기에 다원은 주변을 살폈다.
“아…….”
모든 것이 체이스의 것이었다. 소파도, 러그도, 식탁도, 가전제품도, 침대도……. 심지어 입고 있는 모든 옷들, 속옷, 칫솔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체이스가 사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도대체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뭘 한 거야? 체이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고?”
다원은 열린 창문을 모두 닫고 청소기도 정리해 넣었다. 그리고 생각도 정리했다. 생각이라 해 봐야 해야 할 일들을 늘어놓는 일이 전부였다.
“우선 졸업, 계약 갱신. 또…… 한국 집에 한번 다녀오기. 하아.”
말이 집이지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취업이 확실해지면 한국의 집을 정리하기 위해 다녀올 생각이었다. 미국에 머물 가장 큰 이유가 희미해졌지만 다원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체이스랑 이야기를 해야 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일단 체이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학교는……. 아니, 먼저 타미와 이야기를 해 보고.’
다원의 밤이 그렇게 깊어 갔다.
* * *
타미는 다원의 물음에 조금 난색을 표했다.
“다원 씨.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내가 다원 씨와 재계약을 원한다는 거야. 이번 수습 기간도 지금처럼만 한다면 당신은 당연히 정식으로 채용될 거야.”
“고마워요, 타미 씨. 하지만 처음 시작은 제 실력 때문이 아니잖아요. 맞죠?”
“무슨 소리야, 시작이 실력 때문이 아니라니. 한 번 더 눈여겨본 건 인정하지만.”
“고마워요. 그리고 계약은…….”
“아직 시간이 있잖아. 그동안 학교 일도 잘 마무리하고 다시 생각해 봐. 무엇보다 이번에 재계약을 하면 비자 문제도 일단은 해결이 될 테고. 알았지?”
“……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끝까지 체이스의 알선이 있었는지를 따질 수는 없었다. 다원은 알 수 없는 더부룩함에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 * *
“어! 언제 전화가 왔었지?”
씻고 나오니 체이스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다시 걸었을 땐 체이스가 받지 않았다.
“왜 전화를 안 받지? 하암. 조금 있다 다시 걸어 봐야겠다.”
학교도 가지 않고 일만 하는데도 이유 없이 피곤하고 잠이 쏟아졌다. 다원은 침대에 눕자마자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땐 다시 체이스의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서 그냥 옷만 갈아입고 나가. 오늘 저녁에 봐.]
“아. 나 언제 잠들었지? 벌써 10시네.”
당연히 체이스는 출근하고 없을 시간이었다. 다원은 얼른 일어나 씻고 학교로 향했다. 잡다한 일이 몇 가지가 남아 있었다. 담당 교수님과 예의상 인사를 나눈 것을 마지막으로 4년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단대 본관을 나섰다.
“시원섭섭하네. 후우.”
그렇게 아등바등했는데 이제 남은 것은 졸업식뿐이었다. 그러나 졸업식에는 갈 생각이 없으니 학교에 오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다원은 멈칫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시간이 어중간했다.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때워야겠다 싶었다. 다원은 남는 시간 동안 구직 사이트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아! 비행기! 미쳤다, 미쳤어. 연말인데 없는 거 아냐?”
그는 서둘러 표를 확인했다. 다행히 티켓이 남아 있었지만 편도에다 시간도 애매했다.
“다음 주면 너무 촉박한데……. 그다음은 더 애매하네. 어떡하지?”
한국에 가서 어떻게 될지도 몰라 망설여졌다. 이 순간 다원은 체이스가 절실했다.
“의논하고 싶은데…… 해약해도 되려나? 위약금이…… 발권 전에 취소하면 없네. 그럼 일단은 예약하고 의논해 보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다원에겐 체이스가 최우선이었다. 다원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 * *
“다워나아, 정말 오랜만이야.”
체이스는 다원을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여전히 넓고 따뜻했다. 하지만 마냥 어리광을 부릴 순 없었다.
“다원 씨, 반가워. 정말 오랜만이네요.”
“자긴 더 이뻐졌네. 무르익었어.”
“이게 얼마 만이야. 이제 점점 남자가 되어 가는 그대의 모습. 유후!”
체이스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조용하던 집 안이 시끌벅적했다. 덩치가 큰 남자들이 돌아다니니 넓은 집 안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체이스! 이거 이제 어떻게 하는 거야?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러는 건데! 아니, 그냥 가정부 불러! 아니면 세탁소에 맡기든가.”
데미안의 목소리가 다용도실의 다림질하는 곳에서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타박하는 내용과 달리 약간의 흥분이 배어 있었다.
“아…… 빨래.”
다원은 그제야 세탁기에 돌렸던 옷들이 떠올랐다. 다림질하려고 돌려 두었던 시트까지.
“괜찮아.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나랑 데미안이 거의 다 했어.”
“야, 야! 너네만 한 거 아니잖아. 난 청소기도 돌렸다고. 정말 내가 다 한 거야.”
“무슨 소리야! 난 아직도 요리 중이야! 어디서 큰소리야!”
“그건 네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잖아.”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장 봐 오느라 그런 거잖아. 아니, 다원 씨. 그동안 뭐 먹고 산 거야? 냉장고엔 물도 없고, 쓰레기통도 깨끗하던데. 그러니 살이 그렇게 빠지지.”
“쟨 이슬만 먹고 살겠지.”
역시 화룡점정은 데미안이었다.
“하하하. 당연하지. 우리 다워니는 천사거든.”
거기에 박자 맞춰 주는 체이스까지. 다원은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다원의 눈에 그들은 뭔가 상기된 분위기였다. 집 안을 쭉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다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데미안의 손엔 곱게 개어진 시트가 들려 있었다.
“몰랐어? 체이스 이번에 승진했어. 나이에 비하면 빠른 편이지만 능력으로 보자면 아버지의 배경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한 거지. 안 그래?”
“그런 게 어딨어. 나는 이번 승진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에헴.”
“하여간 겸손한 척하기는.”
시트를 정리한 데미안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다원은 있는지도 몰랐던 크리스털 잔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너희 아버지가 너에게 그 땅을 물려주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
“그러게. 너희 형은 가만히 있어?”
“형은…… 뭐, 그렇지.”
“얘네 형이야 뭐가 문제야. 자유로운 영혼이시잖아. 언제나 이곳저곳 발 닿는 곳이 모두 자기 땅인 사람인데.”
“하하하하하. 너희 형도 참 대단한 사람이야.”
“아버지는 그냥 형이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면 좋겠대.”
“그걸 바로 포기라고 하는 거야.”
“데미안…….”
체이스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의 가족을 언급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형에 대한 일은 아주 민감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대단한 브라더 콤플렉스였다.
“말이 그렇다고. 아버지 입장에서 매튜가 아까운 건 사실이잖아. 내가 보기에도 매튜가 너보다 더 똑똑해. 생긴 것도 그렇고.”
“하긴……. 하하.”
하지만 그것도 데미안에겐 예외였다. 그의 몇 마디에 체이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갔다.
그들의 파티는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차분해서 다원은 지루할 정도였다. 그들은 일, 정치, 주식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논했다.
‘심각한 얘기를 하는데도…… 편해 보이네. 희한해.’
반면 다원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 갔다.
‘난 고작 취업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다원은 새삼 체이스와의 거리가 실감 났다. 그들의 이야기는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었다. 다원은 점점 어깨가 묵직해지는 것 같았다. 체이스가 다원을 힐끔거리자 그의 친구들은 알아서 자리를 정리했다.
“자, 그럼 우리도 이만 돌아가자.”
“그러게.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모처럼 집중해서 떠들었네.”
모두들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데미안만은 나른해 보였다. 소파에 앉아 눈을 끔뻑거리던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체이스였다.
“잠은 집에서 자야지, 친구.”
“칫! 잠들기 직전이었는데……. 이렇게 어설프게 깨면 잠 안 온단 말이야.”
투덜대는 데미안을 체이스가 살살 달래며 데리고 나갔다.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파티는 또 갑작스럽게 마무리되었다.
다원의 몸과 마음은 마치 기습 공격을 받아 초토화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문이 닫히자마자 소파에 너부러졌다.
체이스는 곧 돌아왔다. 다원은 그에게 안기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체이스가 다가와 축 처져 있는 다원을 끌어안았다.
“이제야 온전히 안아 보네, 다워나.”
‘다워나……. 하아, 거슬려. 왜 하필 지금 거슬릴까?’
언제나 반쯤 흘려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몇 개월 일하지 않은 직장의 상사인 타미는 정확하게 ‘다원’이라고 불렀다.
“다워나…….”
체이스의 친구들도, 심지어 데미안마저도 정확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4년을 함께한 그의 입에서는 언제나 부정확한 이름만이 나왔다.
“다워나…….”
술 냄새며 각종 음식 냄새와 함께 흘러들어오는 다워나, 다워나……. 다원은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다원.”
“……응?”
“다원이라고. 내 이름.”
다원은 체이스의 팔을 치우고 일어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축하는 못 해 줄망정 투덜대기나 하니 체이스가 화가 났을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다시 아무도 없는 빈집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야.’
다원은 자꾸 어긋나는 상황이 불안했다. 풀고 싶은데 그럴수록 더 엉켜만 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쳐진 손은 여전히 어색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체이스는 무척 당황스럽고 화도 났다.
“후우. 어렵네.”
체이스는 소파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봤다. 감정을 한 박자만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아직은…… 끝내고 싶지 않은데.’
잠시 뒤 체이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갔다. 다원은 이불에 푹 파묻혀 있었다. 체이스는 그를 이불째로 끌어안았다.
“미안해.”
“……뭐가.”
“뭐긴…… 친구들 부른 거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거지.”
다원은 일어나 앉았다. 눈이 붉어져 있었다.
‘단순히 삐진 게 아니었나?’
“왜 그래? 울었어? 혹시 다른 일이 있었던 거야?”
체이스의 표정도 조금 심각해졌다.
“미리 말하지 않은 게 그것뿐이야?”
“알아듣게 말해. 그렇게 돌려서 말하지 말고.”
체이스는 늘 그랬다. 감정 낭비를 싫어했다. 어떻게 보면 성격이 급하고, 그만큼 솔직하기도 했다.
“타미의 사무실.”
“타미? 아.”
그제야 체이스는 다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어디서 말을 들었는지도 짐작이 되었다.
“난 이해가 안 돼. 처음부터 문제 될 건 없었어. 더구나 넌 네 실력으로 인정받았잖아. 그거면 된 거 아냐?”
“나한테는!”
생각보다 크게 나온 다원의 목소리에 둘 다 놀랐다. 다원은 숨을 삼키고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문제가 돼. 그리고 적어도 나한테는 말을 했어야지.”
“왜?”
“왜라니……. 그럼 난 뭐가 되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고 죽자 살자 정말 열심이었다고.”
“그래. 그거면 된 거 아냐?”
“뭐?”
“그렇게 열심히 해서 다시 기회를 얻는 거잖아. 이젠 네가 선택하는 입장이라고. 뭐가 문제라는 거야?”
“시작이 잘못되었잖아.”
“하. 다워나, 다워나…….”
“다원! 다원이라고! 내 이름은 다원이라고!”
“너 정말. 하아. 요즘 들어 힘든 거 알아.”
힘든 걸 안다는 체이스의 말에 다원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더 이상 내가 뭘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 난 최대한 너를 배려해 줬어. 더 이상 뭘 바라는 건데?”
“……바라는 거 없어.”
“아니. 넌 지금도 나한테 뭔가를 묻고 있잖아. 요구하고 있고.”
틀린 말은 아닌데 그의 말이 틀린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다원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한테 내가 늘 오냐오냐하고 쉽게 굽히고 들어간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체이스는 화를 삼키며 심한 말이 나올까 봐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다원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납할 수 없다는 거야?”
“뭐?”
“너처럼 대단한 사람이 베풀어 주는 걸 고마워하지 않는 거. 넙죽넙죽 받지 않는 거. 이유를 묻고 설명을 요구하는 거. 그걸 용납할 수 없다는 거잖아.”
“……하. 기가 차는군.”
이번엔 체이스도 정말 화가 났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방을 왔다 갔다 했다. 그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건 잠자리할 때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었다. 다원이 본 체이스의 모습 중 지금이 가장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그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다원은 겁나지 않았다. 한 번도 그가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원은 그대로 제자리에 서서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체이스는 한동안 거친 숨소리를 내며 왔다 갔다 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갑자기 서서 다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모습은 마치 마지막 선고를 내리는 재판장과 같았다.
“난 한 번도 너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 주위에서 하는 말은 그저 그들의 생각일 뿐이야. 그리고 너한테 한 모든 행동은 내가 생각했을 때 너에게 도움이 되는 일뿐이었어. 그런데 그게 너에게 부담이었고 방해였다면 내가 사과하지. 지금은 너도 나도 많이 감정적인 상태라 이 이상의 말을 하면 실수할 것 같아. 오늘은 그만하고 생각할 시간을 좀 가지자. 쉬어. 너 그동안 너무 무리했어.”
탕! 침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탕, 조금 더 멀리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원은 자신도 모르게 거실로 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옷방 문도 열어 봤다. 다용도실 문도, 마지막으로 화장실 문도 열어 봤다.
집 안 그 어디에도 체이스는 없었다. 체이스의 집에 체이스만 없었다. 다원에게는 항상 너무 뜨거워서 감당하기 어려웠던 체이스였다. 그런 그가 한번 식어 버리니 만년설보다 더 차가웠다.
* * *
체이스에게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당분간 난 회사 근처 호텔에서 생활할 거야. 어차피 승진 직후라 일도 많아서 고민하던 차였어. 그리고 내일부터 출장이라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정말 그와 연락하기가 어려워졌다.
‘항상 그랬구나. 먼저 전화 걸어 주고, 찾아와 주고.’
다원은 당황스러웠다. 그를 만나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국으로 가야 할 날은 착실히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한 번은 다녀와야 해. 체이스도 출장을 갔고 그동안 다녀오면 되겠지.’
출국 하루 전날이었다. 다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체이스에게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내일 출국을 하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길면 보름까지도 체이스를 볼 수 없을 터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도 돼서 다원은 무작정 택시를 타고 그가 다니는 회사로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회사 근처에는 호텔이 많았다.
‘어떻게 애인이 지내는 호텔조차 모를 수 있지? 나 정말 그동안 뭐 하고 살았던 거야?’
다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체이스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다시 돌아가야 할지, 전화라도 한 번 더 걸어 볼지 고민하는 찰나였다.
“어?”
다원은 그 고민이 필요 없어졌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체이스의 차였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려던 발걸음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마치 길바닥에 쇠사슬로 고정이 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인물이 눈에 익었다.
“데미안?”
곧 운전석에서 내린 체이스가 그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 그 둘은 호텔로 들어가는 것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다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님! 도착했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여기.”
“거참. 젊은 사람이…….”
다원은 허둥지둥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현관문 앞에서도 문을 열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창밖으로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다원은 미리 챙겨 놓은 짐을 들고 나가기 바빴다.
* * *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원은 일부러 잠을 청했다. 피곤했던 몸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꿈속에서 다원은 체이스를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체이스! 체이스, 나야! 다원이야! 걘 데미안이라고! 체이스!’
‘그래. 다워나. 알고 있어.’
‘뭐!’
“윽.”
다원은 괴로웠다. 꿈인지 상상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데미안의 어깨를 다정히 끌어안은 체이스의 모습이 끊임없이 리플레이되었다.
‘차라리 그냥 눈을 뜨자. 현실은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냐.’
어른스럽게 현실을 직시하려 했지만 다원에게는 모든 것이 버거웠다. 그 시작은 공항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 공항이 왜 이렇게 넓은 거야.”
늘 학교와 집, 직장만 오가던 다원이었다. 인천 공항의 광활함과 그곳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은 없던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을 일으킬 수준이었다. 근 4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아 보는 그는 심지어 한국말도 낯설었다. 간신히 공항 직원의 도움을 받아 공항을 벗어났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그다음 문제는 숙소였다.
“뭐가 이렇게 많아. 방 모양은 왜 이 모양이야?”
다양한 이름의 숙소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었지만 방의 모습이 하나같이 그 기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다원의 기준에 제대로 된 모습의 숙소는 너무 비쌌다.
‘여긴 좀 비싼데……. 어쩌지? 할 수 없다. 너무 피곤해.’
비즈니스호텔이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 우선 그곳에 여장을 풀었다.
“일단은 좀 쉬자.”
그리고 다원은 날밤을 꼬박 깠다. 그야말로 시차 적응에 완전 대실패였다. 비행기 안에서 어설프게 잔 것이 독약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날밤을 까면서 한 가지 건진 건 굳이 비싼 비즈니스호텔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원은 바로 값싸고 깨끗한 게스트하우스로 옮겼다. 그리고 미국에서 미리 연락해 두었던 공인중개사를 만났다. 생각보다 거래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원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굳이 미국에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한국이나 미국이나 혼자였다.
“체이스가 아니라면 미국에 있을 이유가 없어.”
그는 다원의 생을 통틀어 무엇이든 처음인 사람이었다. 다원은 한국에 온 지금조차도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다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자꾸 혼자라고 생각하는 건데……. 이건 한국이냐 미국이냐가 문제가 아니야.”
다만 다원은 뭔가 확실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체이스에게 한국에 온다는 걸 말하려던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 아. 호텔에 있겠네. 그래도 메시지라도 남겨야겠다.’
다원은 전화기를 꺼냈다. 배터리가 다 돼서 꺼져 있었다. 핸드폰을 충전하는 동안 다원은 체이스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체이스.
한참 동안 다원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린 아직 연인일까? 걱정할 연인을 위해 메일을 남겨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말없이 집을 비운 것에 대한 메일을 남겨야 하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면 아직도 생각을 정리 중이냐고 물어봐야 하는 걸까?’
다원은 곧 고개를 저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인가 싶었다. 자신은 그저 조금 헷갈리고 힘들었고 두려웠을 뿐이었다. 그는 체이스에게 생각나는 대로 메일을 보냈다.
[체이스.
나 지금 한국이야. 여기의 일을 정리할 생각으로 원래 올 계획이었어. 만일 여행을 가자는 네 말에 대답했더라면 어쩜 지금 같이 와 있을까?
아니구나. 지금 넌 회사 일로 바쁘다고 했으니 여전히 혼자겠다. 난 너무 오랜만에 혼자라 좀 어색해.
말이 조금 옆으로 샜어. 떠나기 전에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통화가 안 됐어. 나올 때도 너무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쪽지도 못 남기고 왔네.
체이스. 네 말이 맞아. 너는 정말 나한테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이렇게 네 빈자리가 큰 거겠지. 여기 와서도 지금에서야 핸드폰이 방전됐다는 걸 알았지 뭐야. 유심칩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도 은근 헷갈려. 아무튼 여기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갈게. 그때 보자.]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자 이제 고민 따위는 이미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체이스가 있는 미국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취직을 해야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니, 누구의 힘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음 날, 바로 한국 집의 매매 계약이 이루어졌다. 지금 그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거주자였다. 곧 결혼을 할 계획이라는 그는 행복해 보였고 설레 보였다.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건 그런 거구나. 나도 그러고 싶다.’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어 계약은 일사천리로 마무리가 되었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 섭섭할 정도였다.
그러나 돌아갈 비행기 표를 알아보던 다원은 기겁하고 말았다. 한국 사람들은 다원의 생각보다 미국 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았다. 다음 주에나 표가 있었던 것이다. 제일 가까운 티켓은 도착 시간이 너무 늦은 밤이었다.
“이러면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게 문제잖아. 어쩔 수 없네.”
그다음 날 오후에 도착하는 걸로 예약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아마 저녁 7시나 8시쯤 될 것 같았다.
너무 큰일을 해치워 기운이 하나도 없는 다원은 씻고 나온 뒤 침대에 누워 멍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남는 시간을 조금은 알차게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언제 또 한국에 오겠어. 어쩌면 영영 못 올 수도 있는데……. 안 되겠다.”
여기저기 관광코스를 짜 보았다. 처음엔 그저 서울만 보다 지역을 넓혀 보기로 했다.
“태평양도 건넜는데 이 정도쯤이야.”
* * *
그런 이유로 다원이 도착한 곳은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 위치한 고택이었다. 출발하기 전날 소복하게 눈이 내린 시골의 풍경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다원에게는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니 옛날 기와집들이 보였다.
“이게 뭐라고 괜히 뭉클하네. 이런 건 찍어야 해.”
잠시 멈춰 서서 핸드폰으로 그 모습을 찍은 뒤 셀카를 찍기 위해 돌아서는데 어설픈 한국말이 들려왔다.
“저기…….”
“네?”
“이 길로 걸어 올라가면 여기가 나오나요?”
뒷말은 영어로 뱉은 남자는 눈 쌓인 길을 가리켰다. 그의 손에 들린 관광 안내 책자엔 기와집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다원도 가고자 한 그 고택이었다.
“네, 맞아요. 이 길로 올라가면 나와요.”
영어로 대답해 주자 남자는 조금 놀란 얼굴로 다원을 쳐다봤다.
“와, 영어 엄청 잘하시네요.”
다원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하아. 정말…… 반갑습니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을 내쉬었다. 소통이 어려운 타지에 놓인 처지를 누구보다 공감하는 다원 역시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그렇게 낯선 여행지에서 잠시 함께하기로 했다.
“와우, 저게 뭐예요? 뭔가 작은 무덤 같기도 하고 딱정벌레 같기도 하고. 예술 작품인가?”
눈 덮인 장독대가 외국인 눈에는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다원은 남자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했다.
“저건 장독대라고, 우리나라 전통…… 음식을 보관하는 그릇이라고 해야 하나? 간장이나 된장이나 뭐 그런 걸 담아 두는?”
스스로도 어색한 한국 전통에 대해 설명하자니 자꾸만 혀가 꼬였다.
“아하. 「간자앙된자앙고추자앙. 너무너무 좋아.」 그렇구나. 저런 곳에 보관을 하는구나. 정말 많다.”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그는 술술 해설을 늘어놓으며 오히려 다원을 이끌고 다녔다.
“이 네모난 물웅덩이가 ‘연지’라는 거예요. 일종의 연못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근처에 향교라는 곳이 있는데…….”
그렇게 다시 네모난 모양의 연지로 돌아오는 내내 그는 소리 죽여 이야기했다. 그래서 다원도 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조용 이야기해요? 목이 아파요?”
“하하하!”
그가 처음으로 소리 높여 시원하게 웃었다. 갑자기 크게 터진 그의 웃음에 놀랐지만 속이 다 후련했다. 다원도 그를 따라 활짝 웃었다. 웃음을 그친 남자가 다원을 빤히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뻘쭘하게.’
다원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갈 때쯤 속삭였던 이유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게 아니라, 사실 이 멋진 집에 사람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관람객은 거의 매일 이곳을 찾잖아요. 그들에게 여긴 관광지니까 시끄러울 수밖에 없겠죠. 사시는 분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아…….”
다원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깨달음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원의 입에서 눈처럼 하얀 김이 나왔다. 남자가 빙그레 웃자 눈이 반달처럼 접혔다.
“가요.”
다원은 남자를 얌전히 따라가다 갑자기 멈춰 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가 거의 동시에 뒤돌아봤다.
남자는 낮은 기와 담 앞에 서서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는 다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원은 주먹만 한 크기로 작게 눈을 뭉치고 있었다. 그는 담장의 기와 위에 눈 뭉치를 쌓아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래 봐야 작은 눈덩이 두 개를 아래위로 세운 것이 전부였다.
“소원을 빌 돌멩이를 찾을 수 없어서 대신 눈사람으로.”
다원을 지켜보던 남자가 작은 나뭇가지를 꺾어 양옆에 끼웠다. 그리고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던 작은 열매를 따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제 저도 같이 빌어도 되죠?”
“하하. 네.”
둘은 한동안 둘의 공동 작품을 감상하다 뒤늦게 사진도 한 방 찍었다. 그리고 어차피 같은 정류장까지 가야 하니 마을 길을 같이 걸었다.
‘같은 길인데 느낌이 완전 달라.’
올 때는 혼자여서 헤매기도 하고 낯설기도,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가는 길은 둘이어서 뭔가 즐겁기까지 했다.
“전 혼자 하는 여행보다 같이하는 여행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다원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는 대답이 없었다. 먼 곳만 보고 걷는 그였다. 다원도 굳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역시 멀리 보이는 정류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도 그런 것 같네요.”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다원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와는 역까지가 다였다.
“저는 이곳을 좀 더 돌아볼 예정이에요.”
“전 여수로.”
“그럼.”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만나요.”
둘은 역 앞에서 헤어졌고 다원은 여수로 출발했다. 여수에서도 이곳저곳 돌아보지 않고 단 한 곳만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는 예약한 숙소에 여장을 풀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 *
찌르르. 찌르르.
‘설마 벌레 소린가? 이 겨울에.’
“하암.”
추운 겨울 아침인데도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다원은 절로 눈이 떠졌다.
“진짜네. 휴양림이라 그런가? 대박.”
괜히 신기하고 좋았다. 그 분위기에 취해 태어나 처음으로 아침 산책까지 했다. 아침을 먹고 완전히 해가 뜨자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자, 이제 향일암을 가 보자.”
다원은 기분 좋게 일정을 시작했다.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기이한 모양의 거대한 바위틈의 좁은 길을 지나가야 했다. 지나가는 내내 머리 위의 거대한 돌이 떨어질까 봐 신경 쓰였지만, 절에 올라 내려다본 바다는 눈부시게 푸르렀다. 처음 보는 바다에 다원은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
‘뭐지? 분명히…… 흐음. 아! 그 남자의 눈동자…….’
생각이 나서 후련하긴 했지만 다원은 뭔가 기분이 조금 묘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스쳐 지나간 남자를 떠올리는 건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었다.
여수에서의 일정도 그렇게 마치고 다원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를 쉰 다음 공항으로 향했다.
* * *
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두근대던 가슴은 체크인을 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출국장으로 향하면서는 뛰다 못해 아예 멈춰 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보안 검색이 어떻게 끝났는지, 출국 심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권에 도장이 찍혀 있는 걸 보니 제대로 하긴 한 것 같았다.
비행기 출발까지 여유가 있었다. 면세점도 구경하고 밥도 먹어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뭘 했다고 벌써 비행기를 타야 하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비행기 안에선 잠이 든 것도 아니었는데 금세 도착했다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체이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아직 정하지도 못했는데. 집에 돌아오긴 했나? 그는 생각을 다 정리한 걸까? 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안아 줄까?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혹시 아직도 화가 안 풀렸을까?
다원의 심장은 다시 빨라졌다. 그를 태운 택시가 한참을 도로 위를 달리는 사이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택시는 금세 집 앞에 도착했다. 다원은 무의식적으로 집 창문부터 확인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체이스가 돌아왔나 봐.’
택시에서 내리는 다원의 짐은 작은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한국에 갈 때도 같은 크기의 짐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겁던 짐이 지금은 홀가분했다.
집으로 향하는 다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작아도 이것저것 가득 든 캐리어가 무거울 법도 한데 한 손에 들고 2층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후우.”
다원은 조금 차오른 숨을 애써 고르며 짧은 복도를 걸었다. 2층엔 두 집밖에 없어 조용했다. 패딩 주머니 안에 열쇠가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도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다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렀다. 그래도 조용했다. 실망한 기색을 지우지도 못하면서 다원은 애써 변명을 만들었다.
‘샤워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피곤해서 잠들었을 수도 있고. 냉장고가 비어서 잠시 마트에 갔을 수도 있어.’
열쇠를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누구세요?
문 너머에서 체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다원은 목이 메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떤 예감 때문이었다. 체이스는 다원이 이렇게 초인종을 누를 때면 언제나 ‘다워니야?’ 하고 물어 왔다. 이렇게 ‘누구세요?’라고 물어 올 때는 없었다.
아니, 전에 현장답사에 갔다가 갑자기 돌아왔을 때도 ‘누구세요?’라고 한 적은 있었다. 선뜩한 느낌을 애써 지우며 다원이 입을 열었다.
“나야, 다원…….”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끼이익 하는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이상했다.
‘우리 집 문이 이런 소리를 냈나?’
다원은 현관문의 경첩을 바라봤다. 시야 끝자락에 문 앞에 서 있는 체이스가 들어왔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문 앞에 서서 비켜 주지 않는 모습. 그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체이스, 언제 온…….”
“여기. 안 그래도 내일까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있었어.”
그가 허리를 조금 숙여 가려진 벽 너머에서 뭔가를 꺼냈다. 지금 다원의 손에 들린 캐리어의 세 배 정도는 됨직한 큰 캐리어였다. 다원은 그것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체이스의 등 뒤로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체이스가 먼저 이야기했다.
“집 정리했어.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
“……왜?”
다원의 멍한 물음에 대답은 다른 이에게서 들려왔다.
“왜긴. 이 집은 너 때문에 일부러 비싼 세 주면서 유지한 거잖아. 알면서 모른 척하긴! 체이스는 자기 소유인 회사 근처 호텔에서 생활하면 돼.”
다원은 정말 몰랐다. 그 비즈니스호텔이 그의 것이고, 지금 이 집은 자신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것인 줄은. 가만히 서 있는 둘이 답답했던지 캐리어를 문밖으로 밀어 낸 것은 데미안이었다.
“뻔뻔하긴. 정말 찾아올 줄은 몰랐네.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주제에.”
“떠나?”
다원의 멍한 물음에 이번에 대답을 해 온 것은 체이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연락이 없어서 이상하다 싶었어. 혹시나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건가 해서 많이 걱정했고. 그런데 학교도 사무실도 정리했더군. 정말 떠났구나 생각했어. 연락 정도는 해 주지 그랬어. 정말 많이 걱정했는데. 그래도 건강한 모습 보니까 다행이다. 자.”
체이스가 캐리어를 다원 쪽으로 더 밀었다.
“싹 다 넣었어. 체이스 것이 딸려 들어갔으면 들어갔지 빼놓은 것은 없을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그리고 다원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문 너머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너도 미련 버려. 너 두고 쟨 띵가띵가 놀다 온 거라니까. 저거 봐. 여행용 캐리어 든 거. 그러게 진작 내 말대로 출입국 알아봤으면 좋았잖아.”
“그만해. 생각하기 싫어.”
“알았어. 이제 너도 좀 쉬어. 그동안 너무 무리했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게 무슨 난리야…….”
점점 희미해지던 목소리는 급기야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다원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문과 집채만 한 캐리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관문 아래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불빛이 꺼지는 것이 보였다. 혹여나 누가 나오나 싶어서 그는 긴장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체이스가 나오면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떠난 것이 아니다, 띵가띵가 놀다 오지도 않았다, 연락도 했었다? 혹시나 데미안이 나온다면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왜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은 거냐, 왜 같이 호텔에 들어간 거냐 묻고 따질 말이 많았다.
하지만 나오는 이도 없었고 불이 다시 켜지는 일도 없었다.
‘아무래도 나 방금 차인 것 같아.’
연인과 그의 친구에게. 아니, 연인과 그의 새로운 연인에게.
다원은 아주 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 울음은 한번 나오면 절대로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더 악물었다. 절대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게 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울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다 들릴 게 분명했다. 방금까지 연인이었던 사람과 그의 새 연인에게 울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다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다원은 큰 캐리어 위의 홈을 잘 맞추어 원래 들고 있었던 캐리어를 고정시켰다. 다행히 한 세트였던 캐리어가 딱 맞아떨어지는 게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었다.
‘어서 벗어나자.’
계단을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올라올 땐 그렇게 가볍던 짐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더 신경을 집중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했다. 떠나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1층까지 내려왔을 땐 다원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1층의 자동 출입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겨울바람이 온몸을 휘감아 왔다. 땀에 젖은 몸은 한기마저 느껴졌다. 다원은 느슨해진 목도리를 다시 매만질 생각도 하지 못하고 큰길로 나왔다.
‘택시가 금방 잡혀야 할 텐데.’
다원의 머릿속은 온통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다행히도 손님을 태운 택시가 앞에 멈췄다. 다원은 그 사람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바로 택시에 올랐다.
“제일 가까운 호텔요.”
백미러로 다원을 힐끔 본 택시기사는 이내 출발했다. 택시는 곧 동네를 벗어나 낯선 지역으로 들어섰다.
* * *
그리 오래 달리지 않아 택시가 호텔 앞에 멈췄다. 다원은 조금 놀랐다. 체이스와 함께 살았던 곳은 나름 부촌인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음에도 호텔은 조금 허름하고 허술해 보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분 1초라도 빨리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다원은 일단 체크인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방의 인테리어는 유행이 많이 지나 있었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깔끔했다. 적어도 빈대에 물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다.
‘방금 차여 놓고 빈대 물릴 걱정이나 하고. 어이가 없네.’
다원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래도록 그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더 이상 입술을 물지도 않았고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다. 그냥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눈물방울 조금을 떨어뜨렸고, 주먹을 쥔 손을 조금 떨었을 뿐이었다.
이별의 슬픔은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가슴이 미어지지도 않았다. 배고픔도 느껴졌고 잠도 잘 왔다. 죽음을 떠올릴 만큼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가끔 심장이 콕콕 쑤시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숨이 막히는가 싶을 때에도 곧 숨은 잘 쉬어졌다.
무엇보다 지금의 다원은 실연의 아픔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정이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아직 비자 기간이 남긴 했지만…… 취직이 안 되면 어떻게 되지?’
그는 현재 머물 집조차 없었다. 다원은 수중에 있는 돈을 계산해 보았다. 한국의 집을 판 돈은 진로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손댈 생각이 없었다.
“이제 어쩐다.”
혼잣말을 뱉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더 이상 미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자 기간이 끝나 미국에 머물 수 없게 된다면 일단 한국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럼 한국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가정하고……. 돌아가는 비행깃값이랑 거기서 직장을 구할 동안 생활할 자금을 남기면…….’
다원은 그동안 일한 경력을 살려 차근차근 계산을 했다. 그러다 바쁘게 움직이던 연필을 놓았다. 너무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년간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이별을 당한 지금도 그러려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잠시 멈출 필요가 있었다.
‘후우, 릴랙스. 지금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야.’
여유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자 다원은 문득 한국의 눈 덮인 풍경과 함께 긴 마을 길을 걸었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다원의 어깨에 긴장이 풀렸다. 아무래도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인 것 같았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한국 여행은 좋은 휴식이었다. 다원은 여기서도 여행을 떠나 볼까 싶었다. 미국에서는 늘 같은 곳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빙빙 돌았던 것이다. 비싼 비행깃값까지 들여 미국에 왔는데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떠나기는 아깝기도 했다.
‘그래, 그동안 못 가 본 곳이나 돌아보고 앞일은 천천히 생각해 보자. 미련이든 뭐든 다 이곳에 두고 가자고.’
하지만 막상 여행을 하려고 하니 어디로 가면 좋을지 막연했다. 머릿속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여유 공간이 없었다. 그저 멍했다.
그때 문득 푸른 바다가 떠올랐다. 다원은 고민할 것 없이 바로 검색을 했다. 그리고 검색 결과에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항구 도시라……. 좋았어, 결정.’
목적지를 정하고 나자 제일 곤란한 것은 짐이었다. 일단 거대한 짐 덩어리인 캐리어를 열었다. 체이스가 문밖으로 밀어 낸 캐리어 안엔 그동안 그가 주었던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 옷과 신발, 커플링과 그 외의 액세서리들 그리고 편지가 든 상자가 전부였다. 상자는 자물쇠가 잠긴 채 그대로였다.
잠시 고민한 다원은 일단 당장 필요한 옷들과 신발 하나만 챙겼다. 나머지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두고 캐리어를 닫았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버리거나, 다시 체이스에게 보내거나.
그동안 줄기차게 입던 옷들이고 신발들인데 막상 버리자니 남의 물건을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체이스에게 보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다원은 보낼 주소를 알지 못했다.
‘그 집도 정리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회사는 알고 있지만 일하는 곳에 이런 캐리어를 보내는 건 대놓고 물 먹이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사는 호텔은 알고 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지 못했다.
‘아! 그 호텔이 체이스 거랬지.’
데미안이 알려 준 정보를 떠올린 다원은 헛웃음을 뱉었다. 가장 유효한 정보를 준 게 결국 데미안이라니. 들을 땐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아팠는데 다원은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캐리어에 체이스의 이름을 써서 호텔로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이제 그만. 체이스와 관련된 건 이제 그만 생각하자.’
다원은 일단 캐리어를 현관에 세워 두고 숨을 돌렸다.
* * *
다음 날 아침, 바로 캐리어를 보내 버리고 다원은 보스턴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늘은 기가 막히게 맑았고 차는 더럽게 막혔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할 일도 없는 백수가 뭐가 그리 급하다고 러시아워에 겁도 없이 나섰지? 바보 멍청이.’
목적지에 도착한 다원은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며 다시 한번 지도를 검색해 숙소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버스 정류장을 벗어났다.
“와. 짐 정리 하기를 잘했네.”
2층에 위치한 숙소는 계단이 어마어마했다. 각도가 90도에 달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팔랐다.
난간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오른 다원은 카운터에서 예약을 확인한 후 배정받은 개인 로커 룸에 배낭을 넣고 핸드폰만 챙겼다. 배낭 안에 든 것은 옷뿐이라 걱정은 없었다. 10인용 방이었지만 다원은 혼자였다. 일단 침대에 누웠다.
도시마다 분위기가 다르긴 하지만 다원의 눈에 대도시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어차피 여기선 할 일도 없었기에 그는 핸드폰이나 좀 하다가 자다 깨다 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둘째 날, 눈을 뜨자마자 아침에만 무료로 제공되는 식사를 하러 1층으로 향했다.
‘어라. 생각보다 꽤 그럴싸하잖아?’
낯선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한 식사는 꽤 괜찮았다. 욕심껏 우유에 시리얼을 잔뜩 말아 먹고 토스트에 땅콩 잼도 듬뿍 발라 먹었다. 입가심으로 주스를 한 잔 마신 그는 진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작은 항구 도시 락포트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원은 또 당황해 버렸다. 이곳이 정말 검색을 하면 제일 먼저 뜨는 나름 유명한 관광지가 맞나 싶었다.
‘아무리 작은 항구 도시라지만…… 이건 좀 심한데.’
버스에서 내려서 갈 수 있는 길은 일단 하나뿐인 것 같았다. 긴가민가하면서 걷던 다원은 얼마 걷지 않아 곧 이곳이 틀림없는 관광지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름 중심부로 향하니 가게가 길 양편에 위치한 거리가 나온 것이다.
‘예쁘다. 아기자기하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갤러리 숍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그래도 유명한 바닷가재 식당은 잘 구경했다. 열려 있는 몇 안 되는 가게라 웬만하면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 구경만 하고 말았다.
마을은 더 이상 볼 것이 없었다. 바다 쪽으로 쭉 걷다 보니 새파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바윗길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바다 한중간을 잘 오려 내고 그 사이에 돌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정말 신기하네. 돌과 바다 사이를 들추면 하얀 종이가 나올 것 같아.’
하지만 다원은 그 그림 같은 바윗길 위에서 상당히 고군분투해야 했다. 생각보다 바위들은 크기가 컸고 틈도 넓었다. 게다가 울퉁불퉁하기까지 했다. 헛디디지 않으려면 발로 꼭꼭 찍어 누르듯이 걸어야 했다. 다원은 작게 투덜거렸다.
“젠장, 뭐 하나 쉬운 게 없어.”
좀 더 바다 쪽으로 걸어가고 싶었지만 점점 바위틈도 넓어졌고 바람도 거셌다. 바다는 잔잔해 보였지만 얼굴에 와 부딪치는 바람의 세기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마침 너르고 평평한 바위가 눈에 들어와 그곳에 잠깐 걸터앉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그제야 끝이 없는 바다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다원은 사람들이 왜 물가가 위험하다 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떠 있지 않은 넓고 푸른 바다를 오래도록 보고 있으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몸이 바다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정말 걸어 들어가고 싶네.’
만일 끊임없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물에 빠져 죽기 전에 감기 걸려 죽겠다.’
다원은 돌아가기 위해 일어났다. 그때 그의 시야에 크고 검은 남자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엇!”
다원은 여기가 한국의 그 고택 뒷담 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탄성을 내지른 다원에게 남자가 알은척을 해 왔다.
“정말 당신이에요?”
“네, 어떻게 여기서 다시 만나죠?”
“그건 제가 해야 할 질문 아닌가요? 당신 한국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남자의 질문에 다원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아…… 뭐. 앞으로는 그렇게 되겠죠?”
그건 다원이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대답이었다. 남자 역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원의 앞에 내밀어진 손은 생각보다 크고 거칠었다. 남자의 손을 잠시 바라보던 다원은 끼고 있던 벙어리장갑을 벗고 그 손을 맞잡았다.
“차갑네요.”
“당신은 따뜻하고요.”
“장갑을 끼고 있었으니까요.”
남자는 대답 없이 벙어리장갑을 한 번 보고는 다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남자의 시선이 길어지자 다원의 표정이 점점 어색해졌다. 남자는 곧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바라보게 되네요. 당신의 눈. 까만 눈동자가 마치 블랙홀 같아서.”
다원은 남자의 말에 습관처럼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서양에선 흔하지 않은 색이라서 그럴까요?”
하지만 이내 머쓱해지고 말았다. 지금 이 바윗길 위에만 해도 동양인이 더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잠시 주위를 돌아보는 시늉을 했다.
다원의 시선은 갈 곳을 몰라 이리저리 배회하다 결국 여전히 맞잡고 있던 손에 머물렀다. 이제 남자와 다원의 손 모두 차가웠다.
“여기선 검은 눈동자를 보는 건 드문 일은 아닌데요.”
“그러네요. 그런데 여긴 계속 있기엔…….”
“너무 춥죠. 가죠.”
둘은 나란히 바윗길을 걸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어색하지도 않았다. 사실은 어색할 사이가 없었다. 다원은 바윗길에 집중하며 걷느라 주변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생각보다 불안한 다원의 발걸음을 지켜보는 남자 역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