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72)

10. 키릴

1.

대신관 키릴은 짐승의 아이를 가진 채로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환한 뒤 죽은 듯이 잠들었다.

그리고 긴 꿈을 꾸었다.

옛날 꿈이었다. 첫 계시를 받은 날부터 용의 아이를 낳고 두 번째 계시를 받기 전까지.

또다시 계시를 받은 것을 보면 주신도 제 일탈을 눈감아 주신 것 같아 다행인 한편, 부끄러움을 느꼈다. 수많은 주신의 종 중에서 이런 일에 제일 적합한 자가 키릴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은 쓰임을 다하면 되고, 자신과 엮인 탓에 일리야가 신께 외면당하는 일 또한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제는 그만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키릴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젊은 기사를 보았다. 소년티가 묻어나던 어린 청년이 세월 속에 우아한 미남자가 되어 있었다.

긴 꿈의 여파로 멍하니 그런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일리야는 키릴이 잠에서 깬 뒤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은 어떠세요.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링 가져올까요?”

“…….”

“여기가 젖었습니다.”

일리야의 손이 키릴의 가슴에 닿았다. 간지러움에 키릴이 입술을 깨물고 몸을 뒤로 물리자 그만큼 일리야가 붙어 왔다.

“가려우실 텐데요.”

“아니, 내가…….”

“제 손이 닿는 게 이젠 싫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왜, 그런 말을 해?”

키릴이 일리야의 손을 꼭 잡았다. 일리야는 제 손을 잡은 하얀 손에 깍지를 꼈다. 하지만 뜨거운 손길과 다르게 표정은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늘 눈가에 웃음이 가득한 이가 그러니 키릴은 마음이 불편했다.

“저 없는 곳에서 당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는 게 싫습니다.”

“…….”

“제가 있는 곳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잡아서 가둬 두고, 여기서 원하시는 걸 얻을 때까지 하시면 되잖습니까.”

“네가 보는 앞에서?”

“예. 문제 있습니까?”

키릴이 고개를 젓자 일리야가 키릴의 손에 얼굴을 묻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스토르 때는 제 요청을 받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왜 그 수인만 예외인 겁니까?”

“예외가 아니라. 계시 자체가 내가 가야 했던 거야. 네가 날 지키려다 자칫 봉변당할 수도 있었어.”

“계시를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다음엔 가능하면 저를 데려가시거나, 저한테 명령하세요. 그놈을 끌고 오라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일리야가 원망스럽다는 듯 키릴을 쳐다보았다.

“키릴 님, 항상 제 곁에 있어 주신다고 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달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부 잊으셨습니까?”

“……잊지 않았어. 혹시나 네가 잘못될까 봐 무서워서 그랬던 거니, 그만 용서해 주렴. 응?”

난처해하는 키릴을 본 일리야가 그제야 시무룩한 표정을 풀고 키릴에게 속삭였다.

“그럼 키스해 주세요. 용이 또 쳐들어오기 전에.”

황궁을 잠시 비웠던 네스토르가 드디어 돌아온 모양이다. 키릴은 한동안 신전을 제집처럼 드나들 남자를 떠올리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아무 소식을 남기지 않고 이런 일을 벌였으니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키릴이 팔을 뻗자 일리야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일리야는 키릴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흰 살결에 몇 번이고 입술을 눌렀다.

“돌아오시길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응, 나도 항상 돌아오고 싶었어.”

오랜만에 느끼는 일리야의 품이었다. 이제야 돌아온 것이 실감이 났다.

키릴은 일리야의 목을 끌어안고 그가 바라던 대로 입술을 겹쳤다.

*

그날 밤.

키릴은 돌아온 네스토르에게 잔뜩 시달려야 했다.

그는 고향 모임이 있어 잠시 황궁을 떠나 있었다. 그러다 모임이 끝난 뒤 친구를 만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했다.

덕분에 키릴은 일리야만 두고 재빨리 목적지로 떠날 수 있었다. 네스토르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수인족의 영역까지 따라왔을 것이다.

그는 일리야와 달리 키릴이 기다리라고 했다고 그것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계시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키릴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잘 모를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뒤늦게 일리야를 통해 키릴의 일을 전해 들은 네스토르는 바로 신전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제일 먼저 키릴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했다.

“내가 아무것도 못 느낀 걸 보면 네 신변에 큰 위험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네스토르가 살펴보니 키릴은 조금 마른 것을 제외하곤 몸은 멀쩡했다. 다만 배 속의 아이가 문제였다.

갑자기 딴 놈의 아이를 배고 돌아온 키릴을 보며 네스토르는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키릴의 정신을 살피려 들었다.

용은 아이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네스토르가 일리야의 아이라 굳게 믿었던 둘째와 달리, 이번엔 의무로 인한 임신이었기에 그런 듯했다. 키릴은 내심 용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네스토르는 키릴이 죽은 수장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곤 더는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네스토르가 신경을 곤두세웠던 이유는 이번 일과 첫 번째 계시와의 유사성 때문인 듯했다. 예전에 키릴에게 들었던 일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마음이 피폐해진 건 아닌가 걱정했던 것 같아서 키릴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처럼 순진했던 사제라면 끔찍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야쿠치와의 정사는 계시를 위해서라 생각하면 잡념을 모두 지울 수 있어 본능대로 행동하면 되었다.

계시를 위해서긴 했지만, 그의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다. 그가 짐승화했을 때를 제외하면 야쿠치에게 안길 땐 거부감은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만큼 집에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키릴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어떤 사내가 기억 대신 키릴의 안에 남긴 흔적이란 것을 몰랐기에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수인들에게 희롱당할 때는 조금 두렵고, 실패하거나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기도 했지만, 돌아온 이상 그저 스쳐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야쿠치건 침실 시종이건 어떤 수인이든 네스토르처럼 평생 엮일 사이가 아니기에 일리야가 속상해할 일도 아니었다. 배 속의 아이를 제외하곤 그들은 키릴에게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마쳤고, 마을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으니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키릴이 몸도 정신도 멀쩡하게 돌아왔음을 확인한 네스토르는 뒤늦게 두 사람에게 심통을 부렸다.

덕분에 고생하는 건 키릴이었다.

“넌 따라오지 말란다고 진짜 가지 않은 거냐? 이런 답답한 것이 있나.”

“그래서. 수인족 족장의 좆이 그렇게 크다더니 그 큰 걸 먹으면서 익숙해진 건가? 좆 두 개도 물겠는데?”

“그 자식 것 맛있었니?”

“정말로? 자궁이 열릴 만큼 흥분해서 그 자식 것을 씹어 물었으니까 임신해서 온 거 아니야?”

“그래, 알았어. 더 안 물을 테니, 하나만. 그래서 그놈이 좋아, 지금이 좋아?”

키릴이 야쿠치와의 관계를 별스럽게 여기지 않자, 그 역시 아무렇지 않게 저속한 말로 몰아세워 키릴을 자극하며 흥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둘째보다 다른 짐승의 아이를 먼저 가진 것을 은근히 질투했다. 같은 짐승이라 그런가. 인간의 아이를 품었을 때와는 반응이 달랐다.

늘 여유롭게 굴던 네스토르가 그날만은 질투 많은 어린놈으로 보였다. 마치 그가 일리야보다도 한없이 어리게만 보였던 그 어떤 날처럼.

여전히 비인간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이제 조금은 인간과 닮아 가는 면도 보였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그것을 절실히 실감했다.

그러나 어리광과 달리 키릴을 괴롭히는 그의 행위는 격렬하기만 했다. 키릴은 밤새 마구 울부짖으며 망가진 인형처럼 흔들리는 몸으로 두 남자의 것을 받아 물었다.

성기가 내벽 깊은 곳을 찔러 올릴 때마다 정액을 찍찍 싸질렀다. 나중엔 정액 대신 투명한 물이 흘렀다.

머릿속이 열락으로 가득 차 죽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죽음과도 같은 쾌락이었다.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한 두 남자의 정을 퍼 받으며 키릴은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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