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72)

14.

북부에 있던 일리야가 키릴의 소식을 들은 건 그가 막 제 몫을 모두 마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던 때였다.

“키릴 님이 돌아오질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교단에선 무얼 하고요.”

되묻는 목소리가 등골이 떨릴 만치 으슥했다. 상대는 희게 질려 면목 없다는 표정만 지었다.

분명 제국 수도 신전으로 돌아가야 했을 키릴이 사흘째 제국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교단과 수도 신전에서 뒤늦게 성기사를 내보냈지만, 이틀째 아무 소득이 없다고 했다.

“무능한…….”

영상이 꺼지자마자 일리야가 욕설을 뱉었다. 교단 본부의 성기사들을 믿으라더니 결국 이 모양이다.

일리야는 이를 갈며 먼저 교단으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하루를 꼬박 써서 키릴의 흔적을 되짚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어쩌면 키릴이 제국으로 돌아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키릴은 교황청에 있는 전이문을 사용하지 않았다. 걸어서 교단 밖으로 나갔고 교단과 외부에 목격자도 있었다.

‘왜 그러셨지?’

넘치는 신력에 효율을 중시해 늘 전이문을 통해 이동하던 키릴이 이번엔 그러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선황이 살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키릴은 밖으로 나온 후 중간에 흔적이 사라졌다. 아무도 그를 본 자가 없었다.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첫 외출 때 키릴과 함께 있었다는 지인을 의심했지만, 신관들의 말로는 첫날만 만났을 뿐 키릴은 이후 그자와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키릴이 직접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도 그와 키릴이 같이 있는 것을 본 자가 없었다.

그는 일단 키릴이 제국 안에 없는 것으로 가정하고 네스토르에게 소식을 알렸다. 시간은 이미 자정이 지나 새벽을 달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예상대로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네스토르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키릴 님은 찾는 일에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용은 키릴의 기운을 감지하는 데 선수였다. 키릴이 있는 곳이라면 신전 곳곳에 불쑥불쑥 나타나 멋대로 굴곤 했다. 한때는 그게 거슬릴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능력이 절실했다.

네스토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걸 왜 부탁하는지 모르겠네. 이건 네 주인을 찾는 것 이전에 내 짝을 찾는 일이란 걸 잊지 말도록 하렴, 아가야.”

두 사람은 바로 키릴의 기운을 추적했다. 얼마 안 가 둘은 교단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개인 주택에 들어섰다.

연구실인지 마법 물품이 널린 너저분한 곳을 지나 닫힌 문 앞에 섰다. 문 너머에서 짐승이 헐떡이는 듯한 소리와 익숙한 신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일리야는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달칵, 문을 열자 꿉꿉한 냄새가 나는 방에서 희미하게 키릴 특유의 달큼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헉, 헉! 큿!”

뒤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고 짐승 한 마리가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짐승의 허리를 감고 있었을 하얀 다리는 활짝 벌어진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사내의 허릿짓에 힘없이 인형처럼 흔들리는 하얀 몸을 본 사람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이런.”

보다 못한 네스토르가 한숨을 흘리며 손을 휘젓자 흥분으로 날뛰던 사내의 심정이 그대로 터졌다. 즉사해도 부족하지 않을 타격에 사내의 입안에 순식간에 핏물이 치솟아 올랐다. 네스토르의 손이 또 한 번 움직였다. 키릴의 몸 위에 피를 뿌리기 전에 반송장이나 마찬가지인 몸을 한쪽 벽에 처박아 치워버렸다.

네스토르가 사내를 처리하는 사이, 일리야는 바로 키릴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키릴은 다리를 활짝 벌리고 널브러지듯 누워 있었다. 방금까지 사내에게 시달린 듯 온몸에 정사의 흔적이 가득했다. 이를 악물던 일리야는 뒤늦게 키릴의 반응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키릴 님?”

키릴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멍한 얼굴을 보고 정사에 지쳐 그런 것이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아닌 듯했다. 키릴은 일리야와 네스토르에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방금 싼 뜨끈한 정액을 울컥울컥 뱉어내며 구석에 처박힌 사내만 안달하듯 보고 있었다.

“키릴 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일리야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키릴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무슨…….”

“세뇌 같은데.”

“세뇌? 세뇌라고요?”

“세뇌거나 그거 비슷한 무언가겠지. 최면이나 암시도 거기에 해당하니까.”

네스토르가 땀에 젖은 키릴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자신과 같은 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팔짱을 끼고 죽어가는 사내를 무감정한 얼굴로 살폈다.

“이런 세뇌류는 준비 과정이 복잡한데 저 반쪽짜리 수인에게 그런 능력은 없을 테고. 혈계 능력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로 강하게 뇌를 속이려면 어지간한 준비로는 되지 않을 텐데.”

키릴과 반쪽짜리 수인을 번갈아 보던 네스토르가 눈가를 찡그렸다.

“아마 둘의 상성이 잘 맞았기 때문이겠지. 운이 나빴어.”

네스토르의 말에 일리야의 표정이 확 굳었다.

“치유 능력이 아무 소용 없는 겁니까?”

“가진 힘이 강하니 일반적인 세뇌라면 그것마저 원상태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쪽이라 그리 효과가 없었을 거다. 부작용이 생기지 않게 회복하는 정도겠지. 상성이 좋을 만했어.”

“어찌하면 돌아옵니까.”

“어찌 되었건 술자를 죽이면 해제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런 암시는 오래가지 못해. 아마 반복해서 사용했을 거다.”

그의 말대로 사내의 숨이 완전히 끊기자 멍하니 풀린 키릴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살짝 초점이 돌아오는가 싶더니 그제야 사내에게 꽂혀 있던 시선이 움직였다. 일리야와 네스토르를 차례대로 훑던 키릴이 눈을 끔뻑였다.

“졸리면 주무셔도 됩니다. 제가 곁에 있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듯, 키릴은 눈을 감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네스토르가 축 늘어진 키릴의 몸을 정화하고, 일리야가 두꺼운 망토를 벗어 그 몸을 감쌌다.

“정신이 돌아오면 기억은 어찌 됩니까.”

“글쎄. 어떤 암시를 걸었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야.”

일리야는 제가 안겠다며 팔을 뻗는 네스토르를 무시하고 키릴을 안아 올렸다.

“그럼 이 일은 비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알아서 좋은 게 뭐가 있겠어.”

일리야는 키릴을 끌어안고 거듭 안도한 후 뒤이어 신전에 어찌 보고할지를 생각했다. 그러다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곤 생각을 잠시 멈췄다.

“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네가 부탁해서 한 게 아니라니까? 네가 안고 있는 그 애는 내 짝이라고. 내가 인사를 받아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내 짝에게 받아야 맞는 거란다.”

“하지만 이 일은 비밀이니, 제가 대신 감사드리는 겁니다.”

“그래, 네 멋대로 하거라.”

헛웃음을 흘리던 네스토르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일리야의 품에 안긴 키릴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홀린 듯이 팔을 뻗은 네스토르가 키릴의 배를 쓰다듬더니, 이내 잠든 키릴의 얼굴을 금방이라도 깨질 무언가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기어코 네가…….”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그가 두 팔을 뻗는 순간, 일리야가 팽 돌아섰다. 홀로 감격에 젖어 있던 네스토르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잠깐, 그 아이가 기어코 내 새끼를 제 배에 품었단 말이다. ……듣고 있는 거냐?”

“…….”

키릴이 용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키릴을 내어 줄 생각은 한 톨도 없었다. 일리야는 키릴의 짐을 챙긴 뒤 네스토르를 닦달해 전이문을 열었다.

*

깨어난 키릴은 그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사내가 얽힌 일들은 죄다 기억에 공백이 있었다.

다행히 제가 임신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어 네스토르에게 사실을 알렸다. 네스토르는 이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처음 듣는 양 기뻐하며 키릴의 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한껏 기쁨을 나눈 네스토르는 곧 키릴에게 가급적 수인은 피하라는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술자는 이미 죽었고, 그와 피가 이어진 자 중에 비슷한 혈계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네스토르는 하려는 말을 도로 삼키고 키릴을 더 깊이 제품에 끌어안았다.

설마 그러한 자가 또 있을 거라곤, 그리고 그가 키릴과 만나게 될 것이라곤 그때의 네스토르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몇 년 뒤, 키릴은 계시를 받고 수인족 수장의 아이를 가진 채 돌아왔다.

수장은 사내와 같은 호족이었고, 암시 계열의 혈계 능력을 가진 자였다. 둘은 옅지만 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해제하지 못한 암시는 그 주인이 죽은 후에도 키릴의 안에 남아 야쿠치가 능력을 발현할 때마다 깨어났다. 그리고 죽은 사내 대신 야쿠치의 아이를 원하도록 부추겼다.

한 줌의 기억조차 남기지 못한 사내가 키릴에게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