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당신은 제과점에서 간식을 사고 아는 지인을 만나 같이 산책하다 벤치에서 잠들었다 일어난 거예요.’
‘당신은 내일 이곳으로 다시 옵니다. 다시 이곳에 찾아와 만나기 전까지 나와 한 일을 잊는 겁니다.’
‘우리가 만나는 건 비밀입니다. 아무도 모르고, 몰라야 합니다.’
벤치에서 눈을 뜬 키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교단으로 돌아갔다. 분명 아는 사람을 만나 같이 산책을 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다 몸이 너무 나른했다. 마치 체력이 다한 것처럼 축축 늘어졌다. 밖에 너무 오래 걸어 다녀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뒤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난색을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더 이상하게도 키릴은 금세 의문을 거뒀다.
“……어?”
다음날 눈을 뜬 키릴은 옷과 시트가 젖은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설마 하는 생각에 가슴팍을 더듬자 축축했다. 임신이었다.
“이걸로 세 번째…….”
날을 계산해 보자, 교단에 오기 전날 또는 그 전날쯤인 듯했다. 이틀 모두 일리야와 네스토르와 관계했다. 네스토르의 말에 의하면 용의 씨가 우선이라 했으니 아이는 네스토르의 아이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일단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꼬박 오 년이 걸릴 줄이야. 이걸로 약속은 지켰는데. 하아…….”
벌써 세 번째 임신이란 사실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잠시 멍하니 배를 쓰다듬던 키릴이 일어나 자리를 정리했다. 임신한 걸 안 이상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아……. 중요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좀 더 있다가 가야 해.”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르면서 키릴은 짐을 싸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자마자 평복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교단 밖으로 나간 키릴이 향한 곳엔 반쪽짜리 수인족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키릴의 눈빛이 흐려졌다.
*
사내는 키릴을 만나자마자 다시 사탕을 먹이고 암시를 걸었다. 오늘은 조금 다른 암시도 추가했다.
“당신은 날 아주 좋아해요. ……진즉 이 말을 붙였어야 했는데.”
그는 키릴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온갖 물품들로 지저분한 공간을 지나 사내가 머무는 숙소로 올라갔다.
키릴은 당연한 듯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사내의 입술을 받았다. 키릴의 맨살을 쓰다듬고 주물럭거리며 즐기던 사내가 축축해진 가슴에 고개를 내렸다.
“여기 왜 이렇게 젖었어요?”
키릴은 대답 대신 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유두 끝에서 투명한 물이 삐져나왔다.
“젖은 아닌데? 가슴에서 이런 게 나오는 거 보니, 이거 임신도 가능한 거 아니야?”
농담으로 한 말에 키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우뚝 멈췄다.
“……여기로 아이를 낳은 적 있어요?”
키릴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발, 어쩐지……. 욕설을 뱉은 후 침을 꿀꺽 삼킨 사내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 아빠는?”
“죽었어요.”
“……!”
그리고……. 키릴이 천천히 뒷말을 이으려는데 흥분한 남자가 먼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참 키릴의 입안을 헤집고 입술과 혀를 빨아 대던 사내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그래, 이런 몸으로 아직 사내를 몰랐을 리가 없지. 애 아빠가 죽고 혼자 키우느라 힘들었을 텐데, 내가 새아빠가 되어 줄게요.”
키릴의 표정에 의문이 깃들었다. 사내는 투명한 물이 나오는 가슴을 쪽쪽 빨아 대느라 바빠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키릴 역시 가슴을 빨리며 성감이 치솟아서 하려던 말을 잊었다. 그저 비음 섞인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둘째도 줄게요. 지금 같이 만들어요.”
이미 임신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예감에 키릴은 대답 대신 사내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흥분한 사내의 몸엔 어제처럼 짐승의 털이 수북했다. 까슬까슬한 허리에 허벅지를 비비자 사내가 못 참겠다는 얼굴로 달려들었다.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키릴은 사내와 만나 해가 지기 전까지 짐승처럼 흘레붙다 돌아왔다.
사내에게 느꼈던 일말의 불쾌감은 만남을 반복하는 동안 계속된 암시에 점차 사그라들었다.
원래 사내가 사용하는 암시 능력은 혈계 능력으로 그의 피와 마력으로 만든 사탕을 먹은 자에게만 쓸 수 있었다. 사용 대상이 한정된 만큼 강제력이 제법 강했다. 단, 제한 시간이 있었다. 시간을 늘리기 위해 같은 대상에게 그의 피를 자주 먹이거나 암시를 반복하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었다. 거부 반응은 두통을 통해 나타났다.
그렇게 암시를 거듭 반복했는데 키릴은 한 번도 두통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키릴이 치유 능력을 가진 신관이었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내는 속궁합에 이어 능력까지 잘 맞는 것 같다며 기뻐했다. 그 이후 사내는 키릴에게 암시를 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내 명령을 들어요. 당신은 이제부터 내 말에 따를 거예요.”
키릴의 입에 사탕을 넣고 그의 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내 아이가 가지고 싶어 미칠 것 같아요. 어서 빨리 내 아이를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어 하는 거예요. 내 말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
어제부터 반복한 암시다.
처음 음란한 냄새에 이끌려 키릴과 교미하고 싶어 몸이 달았던 반쪽짜리 짐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한집에 살고 싶다는 욕심을 품었다.
이대로 암시를 계속한다면, 암시가 풀리더라도 그 잔재가 키릴에게 영향을 끼쳐 사내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내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오늘도 키릴의 안에 제 씨물을 가득 싸 주었다.
“아, 아! 하으, 으으응…!”
털이 부숭부숭한 몸 위에 올라타 몸을 들썩이며 요분질하던 키릴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신음했다.
“아아! 또, 가아……! 흐으읏!
교성을 내지르며 털이 돋은 사내의 손을 끌어와 제 가슴에 강하게 비비며 뒤로 애액을 뿜어 댔다. 눈물과 침으로 범벅되어 엉망이 된 얼굴도 가관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또다시 좆물을 지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절정에 이른 순간 양다리로 부들부들 떨며 그의 옆구리를 꽉 조이는 것도 미치게 좋았다.
진정한 제 반쪽을 찾은 느낌에 흥분한 마법사는 질리지도 않고 그 뒤에도 내내 키릴과 흘레붙었다.
“자, 잔뜩 먹어요! 여기에 내 씨 잔뜩 뿌려서 임신시켜 줄 테니까!”
사내는 진정으로 키릴을 임신시키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이 암시를 건 주제에 제가 당한 것처럼 키릴의 임신에 집착했다. 자궁이 안쪽에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제가 싼 정액을 자궁 안으로 밀어 넣으려 젖은 귀두로 꾹꾹 눌러 댔다.
며칠 뒤, 키릴의 가슴에서 모유가 흐르자 그제야 임신에 성공했다며 혼자 착각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키릴은 아니었다. 키릴은 계속된 암시에 자신이 임신 중이란 것도 잊었다. 사내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말했던 대로 키릴은 그와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가져야 했다.
키릴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착각한 사내는 해가 진 뒤에도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암시를 걸었다.
사내의 암시에 키릴은 교단으로 돌아가 제국으로 돌아간다며 짐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구석에서 대기하던 사내와 만나 그의 집에 같이 틀어박혔다.
불쑥불쑥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종종 사내가 아닌 다른 이를 찾았지만, 곧 머릿속이 몽롱해지면 다 잊곤 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사내가 건 암시와 육신에 맴도는 열기뿐이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에 그는 사내가 주는 쾌락에 더욱 열중했다.
“학, 기, 깊어, 흣, 응, 흐아아… 아아!”
“큿…! 헉, 잘리는 줄, 알았네, 헉, 헉, 좋아? 좋아요?”
임신으로 모유가 흐르는 키릴은 성욕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사내는 반은 짐승이라서인지 체력이 넘쳤고 암시는 거부 없이 계속 먹혀들어 둘은 밤낮으로 한 몸처럼 뒤엉켰다. 사내의 침실엔 늘 비릿한 정액 냄새가 진동했다.
사내는 그때까지도 키릴이 주신전의 대신관이란 것을 몰랐기에, 불행히도 키릴이 돌아가지 않을 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토록 야한 냄새를 폴폴 풍기며 아이까지 낳은 적 있다는 남자가 설마 신관이었다니, 사내가 예상하지 못할 만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