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2/72)

11.

키릴은 아이의 밝은 머리 색을 떠올리며 어두운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하얀 신관복이 아닌, 견습 때 종종 입었던 푸른 옷을 입었다. 모양이 단순하여 언뜻 보면 일반 평상복으로 보이는 옷이었다. 모습이 많이 달라졌기에 키릴은 신분패를 잊지 않고 챙겼다.

몇 년 만에 방문한 교황청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그 주인은 머지않아 곧 바뀔 것 같았다.

교황은 키릴의 둘째 아이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왜 갑자기 은퇴하려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교황이 그렇게 결정한 이상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었다.

아이는 건강했다. 신력 또한 키릴보다 조금 모자랄 뿐 그와 비슷했다. 지금 나이에 벌써 그 정도니 열세 살이 넘으면 현 교황보다 더 많은 신력을 품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교단 내에선 모두가 아이에게 친절했다.

키릴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그래서 내내 은퇴를 고민하던 교황이 마음 편히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싶었다. 교황의 자리엔 무엇보다 가장 많은 신성을 품은 이가 올라야 했다. 적어도 주신전에선 그러했다. 교단 전체가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키릴은 온몸으로 느꼈다.

아이는 늘 차분했고 말수가 많지 않아 그리 많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자랄수록 키릴을 쏙 빼닮아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선 아이의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그런 것도 있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본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러면서 키릴은 내심 첫 아이인 황태자에게 미안해했다. 그때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못 했다. 아이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정작 마음에 담지 못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한번은 제대로 품에 안아 볼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 또한 내 욕심일 뿐이지. 아이에게 좋은 것도 아니고…….’

그저 축복을 내리며 그 앞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그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교황의 뜻을 확인하고 아이 주변을 살피며 사흘을 보냈다.

나흘째 되는 날, 제국 북쪽에서 수도 주신전을 대상으로 성기사 파견 요청이 날아왔다.

솔 제국의 목적은 일리야였다. 몇 해 전 토벌에서 큰 성과를 거둔 탓에 이번에도 활약을 기대하는 듯했다. 마스터가 된 것은 아직 네스토르 외엔 아무도 몰랐기에 그는 아직 중급 기사에 불과했다. 위에서 내려온 명을 거부하긴 힘들었다.

대신관의 호위인데도 그가 중급 기사란 이유로 교단에선 하나같이 호위는 자신들이 할 테니 다녀오란 반응이었다. 일리야는 늘 짓던 미소마저 지우고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육신을 갈고 닦은 후 신성력 제어에 몰두할 계획이었던 그는 머릿속에서 계획을 모조리 폐기했다. 피할 수 없는 이상, 이번에 성과를 쌓고 바로 상급 기사로 올라갈 것을 결심했다.

“나도 아쉽긴 한데,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다녀와.”

대놓고 가기 싫은 티를 내는 일리야를 보며 키릴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위험한 곳에 가는 일리야가 걱정되었는데, 투정 부리는 어린애 같은 표정을 보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무사히 일 마치고 다시 보자. 다치면 안 돼. 응?”

“……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키릴을 보며 일리야는 내심 한숨을 삼켰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어릴 때 키릴을 만나서 그런지 그의 사제는 종종 저보다 큰 성기사를 어린애 대하듯 하곤 했다. 그 어린애가 매일 밤 그를 짐승처럼 탐하며 울리는데도 그랬다.

나쁜 건 아니었다. 그 덕분에 성인이 된 뒤에도 키릴의 경계를 사지 않았고, 자신에겐 늘 쉽게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일리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도망치려는 키릴을 온전히 품에 안았고, 지금도 그 덕을 보고 있었다.

“다른 성기사를 너무 가까이 두진 마시고요.”

“응.”

일리야가 유독 성기사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알기에 키릴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일리야는 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그날 키릴은 반쪽짜리 수인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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