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사히 아이를 낳은 키릴은 발정기에서 해방되자마자 그간 못다 한 신앙생활에 힘썼다. 굳이 임신하지 않더라도 원체 민감하고 쉽게 달아오르는 몸이라 그간 신전 안에서만 조심스럽게 활동했는데 최근엔 신전 밖으로도 곧잘 나갔다.
그 탓에 네스토르는 전보다 자주 신전을 드나들었는데도 정작 키릴과 몸을 맞추는 횟수는 전과 비슷했다.
그는 딱히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키릴이 낳은 아이가 교단 본부로 간 시기와 키릴의 외부 활동 시기가 겹치기 때문이다. 제 짝과 진하게 교미하고 싶은 마음이야 넘쳤지만, 지금은 미숙한 어린 짝이 물렁물렁해진 마음을 다시 단단하게 굳히기를 기다려야 할 때였다.
“으음……. 그나저나, 축하한다고 말해야겠구나.”
네스토르가 불쑥 말했다. 수행실로 들어간 키릴이 나오길 기다리던 일리야가 옆에 앉은 네스토르를 힐끗 보았다.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태연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데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뜬금없군요.”
“벽을 넘어섰잖아. 마스터가 되었으니 축하할 만한 일이지.”
“…….”
일리야의 허리춤에 얌전히 매달린 검을 힐끗 본 네스토르가 나른하게 웃으며 물었다.
“날 쫓아내고 싶어서 그리 노력했나?”
“그 이상이 되더라도 딱히 당신을 밀어낼 생각은 없습니다.”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네스토르가 의아하다는 듯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기사는 네스토르의 시선을 알면서도 무시하며 꼿꼿이 서서 수행실 너머를 보았다.
“당신은 키릴 님께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뿐입니다.”
네스토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너희는 그런 부분이 제법 닮았다.”
일리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심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키릴이 네스토르를 받아들인 건 좀 더 복합적이었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진 그와는 같을 수가 없었다.
일리야는 본인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것이다. 키릴의 몸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 놓고 편히 지내려면 용의 도움을 받는 쪽이 안전했다.
그렇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특히 그것이 제 어미를 앗아간 용족이라면 더욱더 곁에 두어야 했다.
키릴이 아이를 가졌을 때를 생각하면……. 그의 능력은 물론 존재 자체로 꽤 쓸모가 있었다.
“제가 무력한 탓이니 감안해야지요.”
요정족의 껍데기를 두른 용이 나른하게 앉아 얌전히 키릴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의 용은 조금 제멋대로 구는 구석이 있었지만, 이종인 것을 생각하면 퍽 인간 친화적이었고 사회적으로 굴었다. 선황처럼 제 권력을 위해 키릴을 진창에 처박으려 한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키릴을 저에게서 빼앗아 가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경계가 조금 풀린 것도 있었다.
저 혼자 독차지하려 들기는커녕 용은 일리야를 포함하여 키릴과 셋이서 관계하는 걸 특히 좋아했다. 지극히 총애하는 애인이 있는 상대를 탐하는 것도 꽤 흥미로운 듯했다. 일리야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 젖은 안에 들어가거나 반대의 경우도 좋아했다.
변태 같은 부분은 있지만, 그건 키릴이 용인하고 있으니 일리야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키릴이 네스토르와의 관계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용의 자궁을 품은 자는 평생 자궁이 마를 날이 없을 거야.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자궁에서 물을 흘리며 수컷을 제가 있는 곳으로 끌어당기거든. 그건 그런 물건이야.’
태의같이 이상한 녀석이 또 달라붙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키릴을 착취하기만 하는 게 아닌, 그를 도울 수 있고 호의까지 얻은 네스토르가 나았다. 용의 것을 품고 정액을 받아 그 씨를 임신하더라도 키릴이 괜찮다면 그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선황도 태의도 키릴이 조금이라도 정을 내어 주었다면 일리야는 그들을 살려 두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목을 비트는 상상을 하면서도 키릴의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았겠지. 언제 키릴의 마음이 떠날지 주시하며.
‘두 놈이 기준치를 너무 낮춰버렸어. 저자의 도착적인 취향도 쓰레기보단 낫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일리야는 태연한 얼굴로 이미 죽은 자들의 목을 다시 한번 치는 상상을 하며 속을 달랬다.
예전 생각에 조금 감정이 상한 일리야와 달리, 네스토르는 일리야의 대답이 퍽 기분 좋았던 듯했다.
“네 어머니를 찾아 줄까?”
그가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었다. 일리야의 시선이 그제야 용에게 박혔다.
“적응했다면 아직 살아 있을 것이고, 적응하지 못했다면 자결했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찾아볼 수는 있다.”
어머니. 한때는 애타게 그리워했고, 지금도 아픈 기억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일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정말로?”
네스토르의 놀란 표정을 보며 일리야는 무심히 답했다.
“제가 보고 싶었다면 진작 찾으셨겠지요. 원해서 하신 일이니,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닙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땐 그저 어머니가 납치당한 줄 알았다.
‘타원형에 속이 살짝 비쳤어. 연녹색에 살짝 말랑거려서 정말 약이 맞나 했는데…….’
키릴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 설마 했는데, 네스토르가 보여 준 약이 몰랐던 사실을 알려 주었다.
용이 어머니를 데려가기 며칠 전, 어머니가 먹은 약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몸이 좋지 않아서 먹은 약이 아니었다. 그걸 먹고 몸이 좋지 않아진 것이었다. 자궁이 성공적으로 안착했기에.
어머니는 스스로 약을 먹었다.
혹시 협박받은 건 아닌가 의심도 했지만, 헤어질 때 반응으로 봐선 아닐 것이다.
일리야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리야에게 어머니는 늘 아프고 애틋하며 미안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느라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용에게 억지로 납치되어 끌려가는 것보단 자신이 원해서 용과 함께 떠난 것이 더 나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을 버리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상심이 없지 않았지만, 다행히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뒤였다. 늦게 알게 되어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그의 곁엔 키릴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리야의 마음의 버팀목은 어머니가 아닌 키릴이었다.
오로지 그의 곁에 있기 위해 성장하여 결국 키릴의 몸은 물론이고 마음 일부까지 차지했다. 이제 그의 모든 것은 키릴의 것이었다. 육신과 정신, 심지어 신앙마저도.
지금이 행복했기에 모친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 하더라도 그가 알던 가짜 진실보단 행복하길 바랐다.
“그때 그래서 약을 보여 달라고 했던 거였나. 우리 사제는 알고 있어?”
긴말하지 않았는데도 용은 많은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일리야가 고개를 젓자 네스토르는 알겠다고 말한 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알릴 마음이 없다니, 그 역시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같은 용일 뿐, 관계자가 아니었다.
“키릴 님을 제게서 뺏지 않을 거라 믿겠습니다.”
네스토르가 어처구니없어하며 혀를 찼다.
“난 네 기억 속의 그 용이 아니다. 너희 인간이 다 다르듯 우리 역시 그와 같다는 걸 알아 줬으면 하는데.”
“제 짝에 대한 집착은 그리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만. 안 그렇습니까?”
정곡이 찔린 네스토르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집착의 방식이 다르지. 우리 사제는 널 너무 귀애하는 데다 이곳 신의 총애를 받는 자라 둥지로 데려갈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어. 난 지금이 마음에 든다. 내 아이 다음은 네 아이를 또 가졌으면 좋겠어.”
“또 그 말입니까?”
“내 짝에게 너는 아주 특별한 존재지. 아무리 나라도 네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건 안다. 그게 조금 아쉬울 때도 있긴 하다만……. 죄책감이 없지 않았을 텐데도 결국 나를 받아들였지. 이제 그 아이는 평생 나와 너에게서 도망칠 수 없어.”
“…….”
“그리고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네 아이를 가진 채로 기꺼이 내게 다리를 벌려 주는 것이 좋단다. 아주, 기분이 좋아. 그 상태로 내 것을 물고 기뻐 울면 더 강렬한 감정을 느끼곤 하지. 그게 좋다.”
일리야가 이마를 찡그렸다. 그다지 좋지 않은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네스토르는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의 취향을 피력했다.
“네 아이를 품은 신관을 네 앞에서 보란 듯이 탐하는 것도, 내게 몸을 내어 주면서도 네게 매달려 안달하는 내 짝의 앙큼한 모습도 제법 귀엽고 말이야. 너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 않나? 셋이 할 때 평소보다 더 흥분해서 안달하지 않았어?”
일리야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등을 돌렸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계단을 올라갔다. 그 모습에 네스토르가 뒤에서 크게 웃었다. 일리야는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앞에 일을 마치고 나온 키릴이 그들을 보며 웃었다.
“어서 오세요, 키릴 님.”
썩 내키지 않은 존재가 덤으로 붙었지만, 그래도 일리야는 그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늘 지금과 같기를 바랐다.
손을 내밀자 키릴이 당연한 듯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응, 다녀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