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72)

2.

마음을 정한 키릴이 전언을 보내자마자 네스토르가 신전을 찾아왔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그리 해주마.”

그는 키릴에게 다른 용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일리야와의 관계를 숨기는 데 협조하기로 약조했다.

“자, 받거라.”

키릴은 네스토르가 내민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신전을 너무 자주 오가면 누군가는 이상하게 여기겠지. 너 또한 괜한 시선을 받는 건 원치 않겠지?”

키릴이 고개를 끄덕이자 네스토르가 집무실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공간 마법을 사용하기엔 여긴 주신전이라서 말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는 주의가 필요하지. 그러니 그걸 방에 두고 네 기운을 불어넣어 주렴.”

네스토르는 구슬이 있는 곳이라면 신전 밖에서도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인 키릴이 손을 내밀 때였다.

“제 방에 두겠습니다.”

키릴이 구슬을 받기도 전에 뒤에서 팔이 뻗어 나와 그것을 휙 낚아챘다. 키릴이 깜짝 놀라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일리야를 돌아보았다. 일리야는 태연한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치미를 뗐다. 네스토르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어차피 옆방이니 마음대로 하거라.”

“그럼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군요.”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었다. 네스토르에게 약조를 받아 낸 키릴이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마음이 놓이자 그제야 뒤늦게 긴장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스토르가 그런 키릴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끝이라니.”

키릴이 고개를 들자마자 네스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채도 높은 붉은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내 짝, 내 신부, 내 반려. 내 어린 사제야, 약속의 의무는 이제부터 시작인 거다.”

“지금은 제가 당신의 아이를 가지는 게 불가하지 않습니까.”

사실을 말하는 건데도 어째선지 핑계처럼 들렸다. 실제로 네스토르의 귀엔 그렇게 들렸다.

“내 새끼를 품는 건 약속의 일부였을 뿐이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을 텐데? 다른 용에게서 널 지키려면 내 기운을 묻혀야 하고……. 그리고 넌 이제 내 짝이다. 그걸 잊으면 곤란해.”

“…….”

“그렇지 않니?”

키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스토르가 손을 뻗어 마치 잘했다고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상이라도 주듯 키릴의 귓가에 얼굴을 바싹대고 속삭였다.

“무엇보다 난 네게 꽤 도움이 될 거란다.”

하얀 손이 키릴의 배를 감쌌다. 그저 손이 닿는 것만으로 아랫배가 지잉 울렸다. 몸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에 꾹 다물린 키릴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하아, 벌어진 입 사이로 한 줌의 숨결이 새어 나온 직후, 신기하게도 몸이 한결 편해졌다. 내내 안을 뜨겁게 달구던 열이 사그라들었다.

일리야는 키릴이 표정이 살짝 변한 것을 느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으나 일리야의 눈엔 한결 편해 보였다.

덧붙이듯 용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굳이 용이 아니라도 쓸데없는 접근도 막을 수 있을 테지.”

표정 변화 없이 뒤에 서 있던 일리야가 그 말에 미간을 움찔거렸다.

금세 표정을 정돈했지만 이미 용은 그 모습을 보았는지 색이 진한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용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키릴이 자신도 모르게 세우고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일리야의 호감을 사려 했다. 가장 방해되는 것이 뭔지 본능적으로 깨닫고 취한 행동이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이 키릴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 드러내 보였다. 처음 키릴에게 했던 멍청한 행동을 반성하긴 했던 것인지 머리를 제법 잘 굴렸다. 일리야는 알면서도 용의 수작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용은 마치 뱀 같았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뼈째로 집어삼킬 생각이면서 아닌 척 꼬리를 말고 이리저리 의뭉을 떠는 것이 불쾌했다. 다정한 척, 마치 인간인 듯 눈치를 보는 꼴이 거슬렸다.

일리야는 용이나 뱀이나 같은 파충류이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다소 무례한 생각을 하며 애써 거부감을 내리눌렀다.

그의 말대로 눈앞의 용은 키릴에게 제법 이로웠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 시간을 주도록 하마.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이제 하루하루를 손꼽아 가며 네 부름을 기다릴 테니 말이다.”

지나가는 세월이 전혀 아쉽지 않은 콧대 높은 용이 그리 말하니 우스웠지만, 네스토르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연기 같은 미소가 아닌 진짜 얼굴을 본 듯하여 키릴은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마음을 먹긴 했으나 막상 용과 터무니없는 관계가 된 것이 현실로 와닿자 두렵기도 했다.

계시 하나로 설마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정녕 몰랐다.

키릴은 일리야를 끌어안고 벼랑 끝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용의 손을 잡았지만, 이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악은 피해야 했다. 그렇다면 빨리 적응하는 편이 좋았다. 키릴은 받아들이는 일엔 이미 익숙했다. 아무리 무섭고 싫은 일이라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늘 그랬듯이.

*

그 후 네스토르는 종종 선물을 핑계로 키릴을 보러 왔다.

대부분은 예쁜 보석이나 유명한 간식을 주고 갔고, 어느 날은 기부 증서를 들고 와 키릴은 웃게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지고 다니렴.”

네스토르가 키릴과 일리야에게 백금 반지를 하나씩 내밀었다.

“웬 반지입니까?”

일리야가 묻자 키릴의 배를 힐끗 쳐다본 네스토르가 의뭉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소리 차단 마법과 환영 마법이 있으니 급할 때 사용하도록 해라. 같은 반지를 낀 사람은 예외고, 이중으로 은폐 처리해서 마법에 민감한 자도 모르고 넘어갈 거다.”

“…….”

반지를 받고도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리던 키릴이 뒤늦게 얼굴을 확 붉혔다.

마치 관계 중에 남에게 들키지 말라고 소리를 막고, 환영을 두르라는 뜻인 듯하여 키릴은 민망함을 참을 수 없었다.

눈을 꾹 감고 반지를 쥐고만 있는 키릴을 가만히 구경하던 네스토르가 뒤늦게 달래듯이 이유를 말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지금 시기엔 장소나 때를 가리기 쉽지 않을 거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리야가 반지를 착용했다. 손에 반지를 끼자마자 백금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반지 자체에도 환영 마법이 걸린 겁니까?”

“인식 방해다. 아무도 거기에 반지가 있는지도 모를 거다.”

“감사합니다.”

설마 일리야에게 감사 인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건지 네스토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리야가 왜 그렇게 보냐는 듯 네스토르를 보았다. 마뜩잖은 듯이 쳐다보는 그 눈빛에 네스토르는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지웠다.

“네가 그리 순순히 감사를 표할 줄 몰랐단다.”

“키릴 님께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네스토르는 내심 미소를 숨겼다. 저 어린 기사는 제 앞의 용이 키릴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기에 이제 그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용이 싫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제 사제의 안위와 그를 잃지 않기 위해 이미 제 욕심을 어느 정도 포기한 듯했다.

네스토르는 키릴을 보았다. 그는 아직 망설이며 반지를 쥐고만 있었다. 순간 그 손에 들린 것이 반지가 아닌 저인 것만 같아 기분이 묘했다.

“억지로 낄 필요는 없단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은 키릴이 천천히 반지를 손에 꼈다. 키릴의 약지에 있는 제 반지를 본 네스토르는 자기 손가락에 있는 똑같은 반지를 보며 설핏 웃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네스토르가 키릴에게 좀 더 다가섰다. 용의 예민한 후각이 키릴의 체취와 뒤섞인 성기사의 냄새를 잡아챘다. 지우고 지워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비릿한 정사의 냄새와 함께.

가슴에서 풍기는 달큼한 모유 향을 맡으며 홀린 듯이 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뒤에 선 어린 성기사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다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빳빳하게 굳은 신관의 몸 역시. 아직은 안 된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알면서도. 굳이 한 번 권해 보는 것은 아마 반쯤은 장난이고, 또 반쯤은 제 욕심이겠지.

“반지를 쓸 만큼 급하게 도움이 필요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 그는 안달이 났다. 성기사의 체취가 짙게 밴 이 몸에 제 냄새를 묻히고 싶었다.

아주 강렬한 충동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

그는 왜 제 동족들이 짝을 만나면 둥지로 끌고 가기 바쁜지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은 그들과 달라야 했다. 괜한 조바심으로 손에 들어올 제 짝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분명 제게 큰 즐거움을 안겨 주리라.

네스토르는 키릴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물러섰다.

“돌아가마.”

*

“이 시기의 북쪽은 혹한기일 텐데, 하필 이때 토벌이라니.”

“마수들도 그 추위에 밑으로 떠밀리듯 내려오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주신전에서 한 손 보태주면 좋으련만.”

“그때는 정화 작업 기간이었으니 덕을 본 셈이지요. 이번에는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겁니다.”

회랑을 지나던 네스토르는 방금 귀에 꽂힌 단어를 곱씹었다.

‘북방 토벌이라……. 기사단 쪽이 시끄러워지겠군. 이쪽에 또 뭘 요구하려나.’

불쑥 키릴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어린 성기사가 떠올랐지만 바로 지웠다. 이미 박힌 돌이 성가시긴 해도 그렇다고 멋대로 전장으로 던졌다간 뒤가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키릴의 경계심을 다 허물기도 전에 애정은커녕 원망부터 받고 싶진 않았다. 짝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그 어린 것을 치워버리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반면에 그 어린 기사는 네스토르가 퍽 싫은 듯했지만 말이다.

‘홀로 독차지하던 것을 남과 그것도 싫어하는 용족과 공유하게 생겼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겠나. 그런데도 제 딴엔 득실을 따져 계산이 끝나자마자 상황을 바로 인정한 것이 또 재미있었지.’

방해하고 싶을 만도 한데 어린 성기사는 용과 제 신관의 교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건 제법 고마웠지만, 만약 성기사가 아닌, 제가 먼저 키릴을 선황에게서 뺏어왔다면 좀 더 결과가 좋지 않았을까.

네스토르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겠지.’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닌 타인의 강제로 변한 몸이다. 남자인 데다 사제인 키릴이 쉽게 제 몸의 변화를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성기사니까 받아 준 거였겠지.’

그 과정에 자연히 몸의 변화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자신이 일리야를 대신했어도 결과가 썩 좋았을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그 어린 성기사 덕분에 쉽게 허락을 받았다고 봐야 하나. 이리 말하면 좋아하진 않겠군.’

마뜩잖은 눈빛을 애써 갈무리하던 금발의 기사를 떠올리며 용은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오셨습니까.”

공방에 들어서자 근처에 있던 황실 마법사들이 수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받으며 연구실 쪽으로 걸어가던 네스토르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법사들이 모인 곳에 의외의 손님이 와 있었다.

네스토르의 시선을 확인한 마법사 한 명이 조용히 상황을 전했다.

“황태자 전하께 맞는 보호구를 고르는 중입니다.”

“보호구?”

모태에서부터 주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다. 가진 신력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해도 그 어떤 저주나 독도 아이를 해하지 못할 텐데, 보호구라니.

“물리적 충격은 차고 계신 팔찌만으로 막을 수 있을 텐데?”

“예, 보호 장벽이 발동할 터이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주 계열이 아닌, 정신계 마법은 아무리 태자 전하라 할지라도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섭정의 뜻이겠구나.”

제가 낳은 아이도 아닌데 섭정은 태자의 안위를 끔찍이 챙겼다. 제왕 교육에는 그리 엄하게 군다면서 말이다. 섭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의 모든 것을 직접 챙겼다. 그것이 과한지 아닌지는 용인 그로선 옳게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선황 같은 망종은 되지 않겠다 싶어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제 부친과 성격마저 판박이로 자란다면 어쩐지 키릴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조금 닮았나?’

네스토르는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선황을 빼닮은 듯하면서도 은근히 키릴을 닮은 부분이 보였다. 특히 오른쪽 눈가의 점이 도드라졌다. 푸른 눈동자도 선황의 칙칙한 푸른색이 아닌 낳아 준 자를 더 닮았다. 양쪽 귀도 키릴만큼 물고 빨기 좋게 생기진 않았지만 제법 잘생긴 것이 비슷한 듯도 했다.

너무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일까. 고개를 돌린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깜빡이던 아이가 휙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진 황태자를 보며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인간의 아이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인간은 물론이고 동족의 아이조차 그랬다. 그런데도 인간의 아이가 이토록 눈에 깊이 박히는 건 아마도 저 작은 생물이 키릴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네스토르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 짝은 언제쯤 마음의 준비가 끝날까. 몸은 당장이라도 그와 교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인간의 마음은 불안정하고 제멋대로라 아무리 그라도 때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네스토르가 손을 뻗을 때마다 키릴은 몸을 굳혔다. 티 내지 않으려 해도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그때마다 네스토르는 흥이 식었다. 어쩌면 실망감일지도 모른다.

키릴에게 짝이 되어 달라 제안했을 때는 키릴과의 짝짓기가 이리 지지부진하게 될 줄 몰랐다.

네스토르는 용이었고, 키릴은 용의 씨를 수태하기 위한 자궁을 품은 자였다. 거기다 용의 짝에 걸맞게 개조된 그 몸을 선황이 온갖 약물을 사용하면서 조교하기까지 했다.

제 품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허물어지던 몸을 기억한다. 비록 딱 한 번 속살을 만져 보았을 뿐이지만, 예상보다 더 민감한 몸이었다. 용의 기운 탓만은 아니었다. 얌전한 얼굴로 숨기고 있지만, 쾌락에 찌든 몸은 언제라도 아래를 세우고 뒷보지로 물을 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네스토르를 이리 거부해선 안 되었다.

그 물건을 품은 자는 본능적으로 용을 원했다. 특히 키릴처럼 색사를 위해 개발된 몸이라면 용의 기운을 느낀 순간 다리를 벌리지 않고는 못 배겨야 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하며 당황하는 것을 보면 분명 용에게 반응하는 것이 확실한데, 생각보다 반응이 약한 것을 보면 정신이 본능을 억압하고 있는 듯했다. 육신과 정신의 괴리감이 컸다.

“결국은 시간인가.”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스토르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었고, 지난한 시간을 보내는 건 익숙했으니.

고작 인간 하나를 품고자 했을 뿐인데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간이 더디다고 느꼈다. 기다림이란 것이 이토록 애가 타는 것이었던가.

몇 번 보지도 못한 인간 따위에게 이토록 얽매이는 자신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이런 자신이 싫지 않았다. 덧없던 시간이 조금 아쉽고, 흥미로워졌다.

“흉내라도 내야 하나?”

껍데기가 아니라, 행동거지를 따라 해 보면 조금은 저를 향한 경계심이 누그러들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조금 혹했다. 지나가는 시간이 아쉬워졌기에, 그는 이 아쉬움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며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아둔하게 굴고 싶어졌다.

*

일리야의 흉내를 내 보려던 용의 계획은 실패했다. 일단 네스토르는 일리야에 대해 잘 몰랐고, 이제라도 유심히 관찰해 볼 의욕도 없었다.

의욕이 없는 이유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고, 일리야의 곁엔 늘 키릴이 있었기에 짝도 아닌 인간이 집중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간 부지런히 ‘나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무언의 주장을 한 보람은 있었다.

자주 접하며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네스토르의 유한 태도에 키릴이 한결 안심했기 때문인지. 키릴은 이제 네스토르가 뺨을 만지거나 목덜미를 지분대도 가만히 버텼다.

“오늘은 피하지 않는구나.”

늘 얌전히 있다가도 슬그머니 물러나길 반복하던 키릴을 떠올리며 네스토르가 물었다.

“약속하였으니…… 저도 지켜야 하니까요. 반지 덕분에 걱정을 덜었습니다.”

“그래. 그리 말하니 주길 잘한 것 같구나.”

예민한 새끼 짐승인 양 낯을 가리더니 제 딴엔 용의 존재를 받아들이려 애를 썼나 보다. 그것이 기꺼워서 더욱 손을 떼지 못했다.

마침 늘 뒤를 지키던 성기사도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네스토르의 손이 키릴의 목깃을 타고 내려와 쇄골 주변을 더듬었다.

“그래서 반지는 어디에서 썼니?”

손끝이 튜닉 사이를 파고들어 셔츠 위를 노닐었다. 우아하게 춤추듯 움직이는 손끝이 야릇했다.

“야한 냄새가 난단다. 오늘도 쓴 거겠지?”

“…….”

“그래, 어디였길래 반지를 사용한 거지? 내게도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움푹 팬 쇄골 위를 더듬던 네스토르의 손이 옆구리를 지나 키릴의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커다란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오싹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참으려 해도 등허리가 떨렸다.

키릴이 이를 악물자 네스토르가 달래듯이 남은 손으로 키릴의 턱을 쓸어 만졌다. 마치 마법처럼 얼굴에 힘이 풀렸다. 반대로 묵직한 기운이 차오른 아랫배가 요동치며 꽉 죄어들었다.

“자, 아가, 말해 주렴.”

“소, 소성전에서…….”

키릴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소성전에서 사람들 앞에서 네 어린 기사와 씹질했니?”

씹질이란 천박한 말에 흠칫한 키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없었…… 어요. 없었습니다.”

“글쎄, 주위를 볼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진 않다만. 정말 아무도 없었을까?”

“…….”

“자, 아가, 자세히 말해 주렴. 거기서 무얼 했지?”

척추를 타고 내려온 손끝이 둔부에 닿았다. 키릴의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게 떨렸다.

“자궁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어 네 기사에게 씨물을 뿌려 달라고 매달렸나?”

예배를 드리고 중간 휴식 시간 때였다. 아래가 근질거리고 쑤시긴 해도 참을 수 있었다. 참지 못한 건 키릴이 아닌, 일리아였다.

키릴은 네스토르의 목소리에 홀린 듯이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자, 잠깐, 앗, 일리야……!’

‘아기가 밥 달라고 자꾸 졸라서 힘드셨잖아요.’

‘아니, 나, 괜찮… 참을 수 있, 읏, 어.’

‘죄송합니다. 제가 못 참겠어요.’

사람이 빠져나간 소성전의 한쪽 구석에서 축축하게 젖은 키릴의 뒷구멍을 빨던 일리야가 참지 못하고 키릴의 다리를 잡아 올렸다.

‘키릴 님이 볼만 붉혀도 저는 아래가 뜨거워져요. 참지 말아 주세요.’

개처럼 한쪽 다리만 들어 올린 부끄러운 자세에도 키릴은 저항 없이 일리야의 성기를 삼켰다. 자신이 달아오른 것과 별개로 일리야가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숨이 차올랐다. 어떤 행위든 제 어린 기사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리해 줄 수 있었다.

‘읏! 으응, 흐읏……!’

내벽에 그득 찬 성기가 익숙했다. 커다란 살기둥이 안을 들락거리며 속살을 마구 헤집어 대는 움직임도. 이젠 이것이 당연한 행위인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성전에서 불순한 행동을 한다는 죄책감은 등 뒤의 온기에 금방 잊혔다. 예쁘다고, 당신 안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고, 너무 좋아한다고 온갖 애정의 말을 속삭이는 일리야의 목소리에 키릴은 홀린 듯이 그에게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하아, 하아, 일리야……!’

키릴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흐느끼며 일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이젠 처음처럼 다른 이름을 부르는 일은 없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저를 보는 키릴에게 일리야는 짐승처럼 허리를 찧어 대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이끌리듯 키릴이 힘겹게 따라 미소 지었다.

소성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키릴이 낯부끄러움에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휴식 시간 중 관계를 가진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휴식이 끝나고 기도를 위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을 때, 제대로 다물지 못한 구멍에서 뜨끈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구멍이 벌름거릴 때마다 안에 가득 찬 것이 쏟아져나왔다. 키릴은 뒤로 정액을 흘리며 기도 중 앞으로 사정했다.

겹겹이 껴입은 풍성한 옷 덕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지만, 신의 눈만은 피하지 못할 터. 키릴은 감사 기도를 올리는 중에도 끝없어 속으로 사죄 기도를 드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용의 손길에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용과 닿는 것이 기분 좋았다. 키릴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용의 말대로였다. 키릴은 제 몸이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몸 같다고 느꼈다. 그저 용의 손끝만 닿아도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것 같았다.

강렬한 충동을 느낄 때마다 키릴은 되레 두려워졌다. 약속했는데, 용의 짝이란 것이 되어 그의 씨를 품기로 했는데. 이미 마음을 정했는데도 키릴은 때때로 용의 얼굴 위로 선황의 모습이 겹쳐 보여 몸을 웅크렸다.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리야인 척하며 했던 행동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스치듯 나누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키릴은 그가 선황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이성과 본능이 날뛰며 싸우는 사이, 네스토르의 손이 키릴의 배에서 다시 위를 훑고 있었다.

“읏……!”

네스토르가 키릴의 가슴을 움켜쥔 순간, 키릴이 튕기듯이 몸을 펄떡이며 급히 뒤로 젖혔다.

“그, 죄, 죄송합니다.”

“아…….”

네스토르는 홀로 남은 제 손과 멀어진 키릴을 보며 탄식을 삼켰다. 어린 성기사는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빠는 가슴인데 자신에겐 손끝도 허락하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가였다. 그것을 알지만 아쉬웠다. 너무도 아쉬워 네스토르는 나이와 덩치에 맞지 않게 그만 울상을 지었다.

그 표정에 키릴은 이상하게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까닭 모를 죄책감도 느꼈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 어색한 몸짓으로 네스토르를 안았다.

“안는 건 괜찮은데요…….”

네스토르의 몸에 가슴이 닿아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스스로 안긴 키릴을 두 팔로 꽉 안은 네스토르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단다. 내가 저지른 실수 탓이니. 억지로 싫은 것을 참을 필요는 없단다.”

일리야의 모습을 둘러쓴 채로 아무렇지 않게 제 몸을 만지고 정사까지 치르려던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난 네가 내게 흥분하는 것이 보고 싶은 것이니. 그러니 좀 더 천천히 와도 된단다. 대신 다른 용이 널 욕심 내지 못하게 내 냄새를 조금이라도 묻혀야 하니 그 정도는 참으려무나.”

그는 선황과 달랐다.

똑같이 애정 없이 시작된 관계라도 전과는 다를 것 같았다. 흐릿하게 다가오는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당신이 저와 일리야를 계속 지켜 주신다면, 저도, 저도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냄새는 어떻게… 하지 않고도 묻힐 수 있는지요?”

가만히 키릴을 내려다보던 네스토르가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이 정도만이라도.”

입술을 꾹 찍고 키릴을 반응을 살핀 뒤 슬쩍 입술을 비볐다. 키릴이 계속 얌전히 안겨 있자 네스토르는 혀를 내밀어 제 짝의 입술을 슬쩍 맛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엇을 먹었는지 단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네스토르의 얼굴 위로 안타까운 기색이 비쳤다.

“괜찮다면 입술을 벌려 주렴.”

머뭇거리는 키릴을 보며 네스토르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노력해 보겠다고 했잖니. 후회하지 않을 거야. 자, 어서.”

키릴의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네스토르가 조금의 틈이 생기기 무섭게 혀를 찔러 넣었다. 깊게 파고든 혀가 숨어 있던 살덩이를 뭉근하게 비비자 순식간에 타액이 뒤섞였다. 꾹 감겨 있던 키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입안에 그득 들어찬 타액이 이상하게 달았다. 지나치게 단 데다 어째선지 입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심한 갈증이 치밀어 올라 목이 말랐다.

키릴은 저도 모르게 네스토르의 어깨를 움켜쥐고 입 안의 타액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스스로 네스토르의 혀를 빨기까지 했다.

“읍…… 달아…… 더, 더…… 흐…….”

홀린 듯한 목소리에 네스토르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래, 네겐 마치 꿀과 같겠지. 얼마든지 내어 주마. 전부 네 거란다.”

축축한 혀가 타액을 뚝뚝 흘리며 마치 뱀처럼 키릴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키릴은 마치 생명수를 받아먹듯 기꺼이 입을 열어 그의 타액을 탐했다.

일리야의 모습을 빌려 첫 키스를 했을 때보다 키릴은 용의 타액에 강하게 반응했다. 키릴의 자궁이 네스토르를 원하고 있었다. 단순히 용에게 반응했던 처음과 달리 그의 것이 되고 싶어 안달하며 흥분을 부추겼다. 키릴의 안에서 네스토르란 존재가 용이란 개체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을 깨닫자 머리에 열이 올랐다.

가쁜 숨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키스는 흥분한 네스토르가 키릴의 몸을 더듬다 가슴을 움켜쥘 때까지 계속되었다.

“읏……!”

화들짝 정신을 차린 키릴이 네스토르를 거세게 밀렸다.

“이게 무슨…….”

잠시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듯 도망치듯 몸을 물리는 키릴을 보며 네스토르는 아쉬움을 삼켰다.

말캉한 살덩이의 감촉은 용의 음심을 돋우었지만, 키릴은 용의 거친 손길에 무례했던 첫 접촉을 떠올린 듯했다. 희게 질린 얼굴에서는 애타게 그의 입술에 매달리며 그를 갈구하던 조금 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키릴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아까의 흥분이 남아 있었더라면 그대로 밀고 나갔을 텐데, 우울하게 제 몸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용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우선은 여기까지. 이 정도만 묻혀도 다른 놈들이 잠깐 고민은 해 보겠지.”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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